1. 《도덕의 계보》해제
1.1 과제
《도덕의 계보》는 도덕 개념 및 도덕 가치의 발생사(Entstehungsgeschichte)를 다루는 책이다. 그러나 도덕 개념 및 도덕가치의 발생사는 아주 복잡한 문제영역을 포함하며, 그 문제영역은 적어도 다음처럼 네 가지 분리된 과제로 재구성해볼 수 있다. 1) 현대 유럽의 지배적인 도덕에 대한 파악, 2) 도덕 코드 전체를 삶의 기호이자 징후로 이해, 3) 도덕 판단 및 도덕개념 발생 해명, 4) 지배적인 도덕의 효과와 기능 및 영향에 대한 비판적 검토.《도덕의 계보》는 이에 상응하여 지배적인 도덕의 계보를 추적하고, 도덕이 갖는 해석적 성격을 해명하며,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하지만 이 주제들 중에서 도덕 판단 및 개념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이 주요과제가 되며, 나머지 주제들은 그와 병립하는 형태를 띤다.《도덕의 계보》는 ‘논쟁서’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파울 레Paul Rée의 《도덕감정의 기원 Der Ursprung der moralischen Empfindungen》(1877)을 의식한 것이다. 하지만 그와의 대결은《도덕의 계보》를 집필하게 한 동기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의 계보》는 도덕에 대한 학적 연구방법론에서부터, 도덕 가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설들을 거쳐, 지배적인 유럽 도덕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도덕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들과 논쟁을 한다. 그리고 이 논쟁서 속에는 새로운 도덕이 설정되어 있지만, 니체는 처음부터 도덕에 대한 절대적 관점을 포기하고 들어가며, 그 자신의 새로운 도덕에 대해서도 절대요구를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도덕을 삶의 조건으로 이해하는, 즉 해석으로 이해하는 그의 도덕관을 도출해낸다. 이렇듯 ‘도덕의 발생사’라는 과제는 ‘도덕의 해석적 성격’을 밝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1.2 방법론 및 《도덕의 계보》의 가설적 성격
《도덕의 계보》는 계보학(Genealogie)을 방법론으로 선택한다. 계보학 개념은 17세기부터 이미 사용되었던 것으로, 이때 사용되었던 계보학은 한 가족의 가계족보를 작성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런 계보학을 철학적 방법론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바로 니체이며(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3, 268쪽.),《도덕의 계보》는 철저히 이 방법론에 의존한다. 따라서《도덕의 계보》는 족보탐구와 유사한 방식으로 도덕 가치의 여러 연원들과 발생조건들을 추적한다. 이런 방법론으로 인해《도덕의 계보》는 1) 도덕 가치의 발생을 경험적이거나 사변적인 하나의 근원(Ursprung)으로 소급시키지 않는다. 족보탐구가 위로 소급하는 탐구지만, 소급하면 할수록 더 많은 선조아버지들과 선조어머니들이 등장하는 가계도를 구성해내는 것처럼,《도덕의 계보》 역시 도덕 가치의 다양한 발생연원을 등장시키는 도덕의 가계도를 구성해낸다. 2)《도덕의 계보》는 일면성과 관점성이라는 성격을 갖는 도덕의 가계도를 제공한다. 선조들이 다양한 삶의 공간과 이해지평을 갖고 있는 한에서, 계보가 소급되면 될수록 점점 더 상이하고도 다양한 역사적 공간과 이해의 공간을 포함하게 된다. 이것은 다시《도덕의 계보》가 제시하는 계보의 일면성과 관점성을 자명한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니체는 이 점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다.《도덕의 계보》가 기존의 도덕적 자명성을 비판하려는 소 과제를 갖고 있는 한, 도덕 연원의 관점성과 일면성을 보여주는 것은 기존의 자명성 역시 추정적 자명성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계보적 방법론은《도덕의 계보》에서 보여주는 도덕발생사에 가설적 성격을 띠게 한다. 뒤로 소급되면 될수록 더 많은 추측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니체는 이런 점 때문에 신용할 수 있을 만한 역사적 단초들을 가능한 한 많이 끌어들여, 가설적 성격을 완화시켜보려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어원학․사회학․심리분석․철학적 인간학․실존철학․경제학 등의 관점을 서로 교차시키고 보완시키면서 적용하며, 이론 수립을 위한 증거들을 이 영역의 지식들로부터 찾아보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통의 복잡성으로 인해《도덕의 계보》의 논의들은 가설적 특징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4) 계보학을 방법론으로 사용하는《도덕의 계보》는 역사로서의 계보학을 제공하는데 그 궁극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덕가치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으로서의 계보학, 즉 비판으로서의 계보학을 제공하고 싶어한다. 비판으로서의 계보학은 도덕의 가상적 자명성에 대한 비판이며, 이것을 위해 연원에 대한 점점 더 가설적이고 일면적이며 관점적인 탐구가 진행되는 것이다.
니체 자신 역시《도덕의 계보》를 그 자체로 완결된 프로그램으로서, 특정한 체계적인 작업을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으로서는 기획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의도는 그가《도덕의 계보》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적용하여 상이한 세 가지 견해를 밝히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선악의 저편》의 부록’ (KSB 8, 258쪽), ‘엄밀한 도덕이성 비판으로서의 반동적 철학의 시작’ (KSB 8, 11쪽, 242쪽), ‘진리의 계보’(EH-GM))
1.3 구성
《도덕의 계보》는 세 개의 독립된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논문들은 각기 명백한 목적과 그것에 상응하는 개별전략을 가지고서 진행된다.
첫 번째 논문의 제목은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여기서는 ‘선’과 ‘악’ 개념의 계보, 이에 대립되는 ‘좋음’과 ‘나쁨’ 개념의 계보가 탐구되며, 이것은 도덕에 대한 심리적․역사적․어원학적․사회적․정치적․생리적 가설들의 그물을 제시하면서 이루어진다. 그 결과 ‘도덕적-도덕적이지 않음’의 대립이 ‘선-악’의 대립이 아니라, ‘좋음-나쁨’의 대립으로 환원되는, 도덕에서의 고귀한 가치평가방식을 제시한다. 두 번째 논문은 ‘죄’ ‘양심의 가책’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이라는 긴 제목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양심의 계보, 양심의 가책의 계보 그리고 신 개념의 계보가 분석되며, 그 후속절차로서 양심의 가책의 파기 및 선한 양심의 가능성(양심의 자연적 성격)이 탐구된다. 이런 탐구를 위해 니체는 계보적 관점에 생물학적 진화론․경제학․문명이론․법․인류학 및 종교학까지 동원하여, 도덕과 다른 영역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즉 도덕의 계보는 기억의 계보, 국가의 계보, 문명의 계보, 종교의 계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인간의 도덕 속에는 인간의 삶의 조건들이 모두 반영되어 있다고 니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논문은《도덕의 계보》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세 번째 논문의 제목은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인가?다. 여기서는 금욕적 이상이 사제적 이상과 동일한 것으로 설정되며, 이 이상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의미가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무에의 의지라는 것이 계보분석을 통해 밝혀진다. 그런 후에 금욕적 이상을 학문과 예술과 철학이 일반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속성으로 이해하기 위해, 학문비판의 성격을 띤 시대비판이 진행된다.
니체는 이 논문들을 하나의 총체적이면서도 체계적인 구도로 연결시키거나 종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개의 논문은 완전히 독립적이다. 특정 논문에서 제시한 도덕적 상황을 다른 논문은 완전히 다른 상황으로 반전시켜 다른 논의를 제공한다. 따라서 다양한 관점들의 총체이자, 동시에 다양한 학적 관점들이 유희하고 있는 총체라고 볼 수 있다.
1.4 배경
《도덕의 계보》의 외적․사상사적 배경을 형성하는 것
1) 도스토예프스키, 르낭, 칸트, 포이어바흐,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프랑스 실증주의에 대 한 재연구
2) 버클Henry Thomas Buckle이《영국 문명사Geschichte der Zivilisation in England》 (1857-1861)에서 보여준 인구통계학적인 방법,
3) 레Paul Rée의《도덕감정의 기원 Der Ursprung der moralischen Empfindungen》 (1877)이 보여준 도덕 계보학
4) 스펜서H. Spencer의《도덕적 사실 Die Tatsachen der Ethik》(1879)에서 제시된 삶 과 문화의 진화론
5) 벨하우젠J. Wellhausen,《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프로레고메나Prolegonema zur Geschichte Israels》(1883)이 논의한 이스라엘 민족신으로부터 보편적 신 개념으로의 확대과정
6) 뒤링E. Düring, 《철학강의 Kursus der Philosophie als streng wissenschaftlicher Weltanschauung und Lebensgestaltung》(1875)에서의 기계론적 원한 개념
1.5 영향
1) 도덕문제에 대한 학제간 연구방법론 및 계보적 관점 → M. Foucault, M. Weber
2) 부채이론 → G. Deleuze
3) 충동이론/ 내면화 이론/ 문명이론 → S. Freud 등
4) 비교: 학문유형 구분(노동자 학문-영웅정신의 학문). 쿤T. Kuhn의 구분(normale Wissenschaft-revolutionäre Wissenschaft)
2. 《도덕의 계보》의 내용분석
2.1. 도덕적 가치평가(moralisches Wertschätzen)의 유형학
《도덕의 계보》첫 논문의 주제는 ‘선과 악(gut und böse)’ ‘좋음과 나쁨(gut und schlecht)’의 서로 다른 발생사에 관한 가설이다. 이를 위해 그는 도덕판단의 유형학을 제공한다: 고귀한(vornehm) 가치평가방식과 고귀하지 않은(unvornehm) 가치평가방식. 이 작업의 목적은 ‘선과 악(gut und böse)’이라는 도덕 개념을 행위자(니체에게서는 주권적 존재)의 가치감 및 권력감의 표현인 ‘좋음과 나쁨’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귀하지 않은 가치평가방식을 지양하고, 고귀한 가치평가방식을 도덕판단의 준거틀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도덕판단의 유형학은 니체가《도덕의 계보》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선악의 저편》260번 글에서도 제시했던 주인적 평가방식(주인도덕)과 노예적 평가방식(노예도덕)의 대립, 귀족적(aristokratisch) 가치평가 방식과 천민적(plebejisch) 가치평가 방식의 대립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귀한=주인적=귀족적 가치평가에서 니체는 ‘좋음과 나쁨’의 계보를, 고귀하지 않은=노예적=천민적 가치평가에서 ‘선과 악’의 계보를 찾는다. 니체의 이런 구분에는 영국계보학을 비판하던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즉 도덕판단의 척도는 도덕행위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귀한=주인적=귀족적 가치평가는 좋은 인간=강자=고귀한 인간=자연성을 상실하지 않은 인간의 가치평가로서 니체의 긍정의 대상이며, 고귀하지 않은=노예적=천민적 가치평가는 노예적 존재 혹은 원한(Ressentment)인간의 가치평가로서 폄하의 대상이 된다. 니체는 이 두 평가방식의 싸움이 인류 역사를 통해 계속 진행되어 왔으며, 몇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후자가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싸움의 역사를 ‘로마 대 유대’라는 역사적 상징을 사용하여 입증하고 싶어 한다.
고귀한 가치평가와 고귀하지 않은 가치평가와의 싸움의 상징은 ‘로마 대 유대, 유대 대 로마’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싸움보다, 이 문제제기보다, 이 불구대천의 적의를 품은 대립보다 더 큰 사건은 없었다 [...] 로마인은 강자이며, 고귀한 자다. 그들보다 강하고 고귀한 자는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결코 꿈꾸어 본 적도 없었다 [...] 반대로 유대인들은 저 탁월한 원한을 품은 사제적 민족이며, 유례없는 민중도덕의 천재성을 구유하고 있는 민족이다 [...] 우선 로마와 유대 가운데 누가 승리했는가? 이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로마가 의심의 여지없이 몰락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GM I 16: KGW VI 2, 300-301. 한글판 386-388.)
2.1.1 영국계보학
장점: begründen하는 방식으로부터 ableiten하는 방식으로의 변화.(GM I 1)
선 개념의 계보: 유용성-망각-습관 (GM I 2)
오류: 역사적 감각의 결여 (GM I 2)
심리학적 모순: 유용성-망각-습관 → 유용성-경험-습관 (GM I 3)
선 판단 주체의 문제점: 행위 → 행위자 (GM I 2)
2.1.2 도덕적 가치평가의 유형학
2.1.2.1 고귀한(vornehm) 가치평가 방식
고귀함과 거리의 파토스, 좀더 높은 지배종족이 좀더 하위의 종족, 즉 ‘하층민’에게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고도 지배적인 전체 감정과 근본감정-이것이야말로 좋음과 나쁨이라는 대립의 기원이다. (GM I 2: KGW VI 2, 273. 한글판 354.)
주체: 주권적 존재
1) 주인의식 (GM I 2)
2) 가치설정자 및 가치감 (GM I 2) (GM I 10)
3) 권력감 (GM I 2)
4) 승인(Anerkennung) 도덕의 주체 (GM I 10)
증거: ‘좋음’에 대한 어원학적 고찰 (GM I 4)
2.1.2.2 고귀하지 않은(unvonehm) 가치평가
가치평가의 전도: 사제유형 (GM I 6) (GM I 7)
역사적 증거: 1) 사제적 민족으로서의 유대인 (GM I 7)
2) 유대적 신 개념 (GM I 7)
3) 신 개념의 확대 (GM I 7-8)
4) 그리스도 복음의 왜곡 (GM I 8)
노예도덕의 계보: 원한 (GM I 8) (GM I 10)
원한의 심리학
1) 문화의 도구로서의 원한 (GM I 11) (GM I 12)
2) 원한의 예: 자유로운 의지 개념 (GM I 13)
3) 원한도덕의 역사적 증거 (GM I 16)
2.2 양심(Gewissen)의 심리학
책임이라는 이상한 특권에 대한 자랑스러운 인식, 이 희한한 자유에 대한 의식, 자기 자신과 운명을 지배하는 이 힘에 대한 의식은 그의 가장 밑바닥 심연까지 내려앉아 본능이, 지배적인 본능이 되어버렸다. [...] 이 지배적인 본능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이 주권적 개인은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GM II 2: KGW VI 2, 310. 한글판 399.)
양심은 전통도덕의 최후의 심급이다. 양심은 구체적인 행위의 선함과 악함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양심은 기존 도덕이론이 인정하듯 개별적이며, 또 개별적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도덕주체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양심 개념과 더불어 초시간성 및 일반성에 토대를 두는 도덕철학은 다시 개인성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된다. 절대도덕을 거부하고, 도덕의 개인성 및 관점성을 부각시키려는 니체는 이런 맥락에서 양심의 문제를 건드리게 되며,《도덕의 계보》의 두 번째 논문을 양심의 심리학에 할애한다. 그는 양심의 심리학을 다른 영역과 구체적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을 통해 도덕의 계보를 밝히려 한다. 즉 양심은 기억의 계보, 국가의 계보, 문명의 계보, 종교의 계보와 불가분적으로 연관되는 것으로 제시되며, 이를 통해 도덕 역시 이런 여타의 계보들과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갖는 계보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결 작업을 통해 니체는 양심을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규정한다. 양심은 가책 받는 양심(Das schlechte Gewissen)이 아니다. 오히려 양심은 주권적 개인만이 가질 수 있는 선한 양심(Das gute Gewissen)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양심의 자연적 상태인 것이다.
2.2.1 양심의 계보
2.2.1.1 ‘망각-고통-기억-관습의 도덕’ 가설
니체는 도덕의 주요 개념인 양심을 도덕 개념들을 사용하여 분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개념군들, 즉 짐승, 사육, 힘, 본능, 피 등 생물학적-생리학적 개념군들을 사용하여 양심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려 한다. 가책받는 일 없는 양심 혹은 가책받는 양심이라는 구분 이전에, 이미 양심은 타인에 대한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행위 이전이나 특히 행위 이후에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심은 따라서 책임에 대한 양심이며, 이것은 자신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기억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니체는 기억과 기억의 이성성의 문제를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 니체는 전통적인 의미와는 달리 기억을 ‘의지’의 기억으로, 기억의 이성성을 사육의 결과로 이해한다. 기억은 오랫동안의 인류역사가 짐승인간(Tier-mensch)을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로 만들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2.2.1.1.1 망각
인간을 약속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 이것을 니체는 인간에게 부여된 “역설적” 과제이자, 인간에 관한 “본래적인” 문제로 이해한다. 약속할 수 있는 존재란 그 자신의 사고와 행위가 일정정도 산정 가능한 존재다. 즉 그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예측할 수 있고, 그것들을 일정정도 규칙적이며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존재다. 이런 존재가 되기 위해 인간은 자신에게 있는 자연적인 힘인 망각의 힘을 제거해야 한다. 즉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니체는 망각을 인간의 자연적인,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인 저지장치로 이해한다. 인간은 본성상 망각하는 동물인 것이다. 망각은 결코 이성능력의 부족이나 타성력이 아니라, 삶에 필요하고 삶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그것이 의식 이전에 발생하는 욕구나 충동들의 모순과 대립의 과정들에 대한 정보를 차단할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가 억압(Verdrängung)이라는 단어로 말했던 것처럼 고통스런 기억을 밀어내어 정신적 질서와 안정을 찾게 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 장치에 의해 인간은 행복감과 건강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자연적이고도 동물적인 망각의 힘은 ‘의지의 기억’에 의해 제거된다.(GM II 1: KGW VI 2, 307. 한글판 395-396.)
2.2.1.1.2 기억
기억은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이다. 그것은 순수한 이성적 차원의 것만은 아니다. 즉 사고와 행위의 산정가능성과 필연성 및 규칙성으로부터 “다시 벗어나지 않으려는 능동적인 의욕상태(aktives Nicht-wieder-los-werden-wollen)”다. ‘의지의 기억’이라는 개념은 헤르바르트(Johann Friedrich Herwart)가《심리학 교본Lehrbuch zur Psyschologie》(1816)에서 영혼 전체를 저지장치로 이해하는 데서 유래한다. 헤르바르트의 심리학을 니체는 별로 진지하게 간주하지도, 그렇다고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지만, 이 용어만큼은 거기서 차용한다. 의지의 기억에 의해 인간은 우연적인 것 속에서 필연적인 것을, 임의적인 것 중에서 본질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된다. 기억은 이렇듯 자기 자신을 산정가능하고 약속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려는 인간의 본성적 힘이다. 이것은 다시 자신을 책임의 주체로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적 힘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런 책임에 대한 기억이 양심일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해본다. 그런데 책임능력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부여되어 있거나 통시대적으로 일반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매우 개별적이며 일상적 경험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정도의 차이를 지니며 시간제약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니체는 관습의 도덕(Sittlichkeit der Sitte) 개념을 사용하여, 사회적 강제를 통해 획득되는 일반적 성격을 지닌 책임능력의 형성을 설명한다. 이를 통해 그는 비로소 약속하는 존재 개념 및 책임 개념을 도덕 범주와 연결시킨다.(→2.2.1.1.4) (GM II 1-2: KGW VI 2, 308-809. 한글판 396-397.)
2.2.1.1.3 기억각인의 수단: 고통
기억은 어떤 과정을 통해 각인되는가? 니체는 여기에 대해 아주 거친 심리학을 선보인다. 그는 고통을 기억각인의 가장 강력한 보조수단으로 제시한다. 양심은 책임에 대한 기억이고, 기억은 사육에 기초한다. 그런데 여기서 사육은 고통에 대한 기억을 매개로 하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기억은 고통을 피하게 하도록 하며, 이것이 사육과정을 통해 인간 의지의 이성성으로 된다. 이성성은 그렇다면 고통에 대한 기억이 우리에게 금지시킨 고정관념일 뿐이다. 이에 대한 예로 니체는 거세나 희생제물 등의 잔인한 종교 의례, 잔인한 형벌제도, 그리고 여러 금욕적 의례들을 든다. 이것들의 잔인함과 그로 인한 고통은 ‘망각에 대한 승리’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GM II 3: KGW VI 2, 310-311. 한글판 399-400.)
2.2.1.1.4 관습의 도덕(Sittlichkeit der Sitte)
약속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는 니체에 의하면 사육의 결과다. 그것도 관습적 도덕과 그것의 사회적 강제(사회적 구속복soziale Zwangsjacke)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니체가《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및《아침놀》에서 제시한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다. “도덕적moralisch, 관습적sittlich, 윤리적ethisch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 온 규칙이나 관례(Herkommen)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억지로 복종하는지 혹은 기꺼이 복종하는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관례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MA I 96) 도덕 및 윤리의 출처를 관습에서 찾는 이런 형식적 판결을 통해 니체는 비이기적-이기적이라는 평가를 관례에 얽매임과 관례로부터의 독립으로 환원시켜버린다. 이 입장은《아침놀》에서 좀더 구체화된다. 여기서 니체는 도덕을 관습에 대한 복종으로, 관습을 전통으로 내려오는 행위양식이자 평가방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전통의 명령이 없다면 도덕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니체에게서 가장 윤리적인 사람은 전통에 가장 강하게 지배받는 사람으로 규정된다.(M 9) 인간의 ‘의지의 기억’과 책임의식은 이렇듯 인간을 기존에 답습되는 형태로 행위하게 하고, 거기에 복종하도록 하는 사육의 결과인 것이다. 여기서의 책임의식은 관례에 복종하는 도덕적 선에 대한 의식에 불과하다. 이것은 니체에게는 주권적 개인의 ‘양심’이 요구하는 책임의식과는 다르다(GM II 2: KGW VI 2, 309. 한글판 397.)
2.2.1.2 ‘주권적 개인의 양심’ 가설
니체는 ‘망각-고통-기억-관습의 도덕’ 가설에서 등장하는 책임의식 및 양심 개념의 자기지양 가능성을 타진해본다. 그리고 이 가능성을 오로지 주권적 개인(Das souveraine Individuum)에게서 찾는다. 주권적 개인을 니체는 “자기 자신과 동일한 개체”이며, “관습의 도덕과 사회적 강제에서 다시 벗어난 개체”이고, “자율적이고 초윤리적인 개체, 즉 간단히 말해 약속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오래된 의지를 지닌 존재”로 묘사한다. 이런 개인은《도덕의 계보》1 논문에서 제시했던 주인의식의 소유자=강자=귀족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주권적 개인의 형성에는 오랫동안의 엄격한 교육이 필요하다. 이 교육은 계통적phylogenetsich-개체적ontogenetisch인 교육이다. 즉 주권적 개인 역시 관습의 도덕이라는 사회적 강제를 받고 성장한다. 그래서 니체는 “사회성과 관습의 도덕이 이런 존재를 형성시키는 수단”이라고도 말한다. 즉 주권적 개인 역시 인간을 일정정도 예측(Berechnen)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사육의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예측 가능성을 능가하고, 예측 가능성을 반추 할 수 있으며, 관습의 도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존재는 관습의 도덕을 깰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니체가《아침놀》에서 관습의 도덕을 깨기 위해 요청했던 “광기”는 여기서 비로소 그 구체적인 내용을 얻게 된다.(M 9) 이런 주권적 개인의 책임의식 및 자유의식을 니체는 양심이라고 부른다. 이런 양심은 곧 선한 양심이다. 이 양심은 곧 자유에 대한 의식이자, 그런 한에서 책임에 대한 의식이며,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의 힘과 삶에의 의지의 표현이다. 주권적 개인에게 책임은 더 이상 고통에 대한 기억에서 연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가치척도의 담지자라는 의식, 자유로운 존재라는 의식에서 연유한다. 자유로운 존재로서 그는 약속할 수 있는 존재이며, 약속할 수 있는 존재로서 그는 그 자신의 사고와 행위에 책임지는 주체일 수 있다. 이런 존재는 곧 고귀한 존재이며, 이런 존재의 양심은 곧 힘 의식의 표출이다. 이런 선한 양심을 니체는 양심의 자연적 상태라고 이해한다. 양심의 자연적 상태는 결코 가책받는 양심이 아닌 것이다(GM II 2: KGW VI 2, 309-310. 한글판 397-399.)
2.2.2 양심의 가책(Das schlechte Gewissen)의 계보
주권적 개인의 선한 양심의 가능성을 제시한 후, 니체는《도덕의 계보》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양심의 가책에 관한 1) 부채이론, 2) 내면화이론이라는 두 가지 가설이다. 이 두 가설은 각기 독립적으로 주장되며, 신 개념의 계보에 대한 설명에서 비로소 서로 종합된다.
2.2.2.1 부채(Schulden) 이론
양심의 가책에 대한 니체의 첫 번째 가설은 부채이론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가설의 구조를 형식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과 개인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는 ‘채권자-채무자’라는 경제적 계약 관계다. 둘째, 국가-종교-법 역시 이런 근본관계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국가-종교-법 역시 경제적 관계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셋째, 양심의 가책이라는 도덕감은 국가-종교-법의 계보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넷째, 도덕의 계보는 결국 경제적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다섯째,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상호간의 경제적인 ‘가치의 등가’와, 이것의 대체가능성으로서 ‘변제(Vergeltung)’를 전제한다. 이런 변제의 가능성 중의 하나가 바로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행사할 수 있는 ‘잔인함(Grausamkeit)’이다. 여섯째, 그러므로 죄나 양심의 가책은 ‘잔인함의 경제’를 그 계보로 갖는다. 니체의 이런 입장은 국가-종교-법 뿐만 아니라, 도덕 역시 철저히 경제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마르크스 류의 정치․경제이론이나 다른 경제이론의 입장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니체는 마르크스 류의 이론 체계구성에는 관심이 없으며, 학적으로 입증되거나 증명될 수 있는 가설들의 체계를 구성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니체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 그는 단지 양심의 가책을, 더불어 인간의 도덕감을 전혀 정치․경제학적이지 않은 특정한 경제적 관계, 즉 ‘잔인함’의 경제에서 찾고자 한다. 이것을 통해 양심의 가책이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도덕외적 근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2.2.1.1.1 채무법으로서의 도덕
니체는 도덕이 채무법(Obligationenrechte)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채무법이 채권자에게 채무자에 대해 잔인할 권리를 보증해주기 때문이다. 이 가설은 인간의 근본관계로서의 채무자-채권자라는 계약관계, 교환가치의 등가 및 손해분에 대한 배상, 채무자의 의무 및 채권자의 권리라는 경제적 사유를 전제로 한다.
2.2.1.1.1.1 채권자-채무자 관계
인간을 ‘가치를 재고 평가하고 측정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니체 철학의 기본 관점이다. 즉 인간은 관점적 해석(perspektivische Interpretation)의 주체다. 니체 철학에서 이 관점은 인간의 이론 인식 뿐만 아니라 실천적 삶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적용된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 역시 이 관점에 의해 해명된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서도 가치의 교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기호의 교환이든, 재화의 교환이든 중요한 것은 가치의 등가성이 전제된다는 점이다. 가치를 주고-받는 이런 교환관계를 니체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관계가 가치의 “등가적” 교환을 전제로 하는 한, 개인과 개인은 등가적 가치를 지불한다는 암묵적인 계약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개인은 등가적 가치를 지불할 의무가 있는 채무자이자 동시에 등가적 가치의 지불을 요구하는 채권자인 것이다. (GM II 8: KGW VI 2, 322. 한글판 412.)
2.2.1.1.1.2 경제적 교환관계로서의 채권자-채무자 관계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단적으로 경제적 교환관계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교환이란 완전히 상이한 종류의 것들이 그것들의 가치상의 등가를 전제로 교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제 3의 가치, 혹은 가치 그 자체에 근거한 교환이나 소통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교환당사자들을 만족시키는 상대적인 가치에 따른 소통이 이루어진다. 이런 경제적인 교환에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킨다. 니체가 말하는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이렇듯 고전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제적 교환의 원리를 선취하고 전제하고 있다. 인간의 근본관계는 경제적 교환관계인 것이다. (GM II 4: KGW VI 2, 314. 한글판 402.)
2.2.1.1.1.3 죄 개념의 기원
인간의 근본관계가 가치의 등가를 전제로 하는 경제적 교환관계라면, 죄(Schuld) 개념의 계보도 경제적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니체는 ‘죄’라는 도덕개념을 “부채(Schulden)”라는 지극히 물질적인 경제적 개념이 형식상의 변형을 일으킨 것이라고 추측한다. 윤리학에서 죄는 경제적인 것과는, 유용성과는 사실상 거리가 있는 개념, 유용성과는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왔다. 이런 윤리학적 자명성에 니체는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등가적 교환은 계약 당사자들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 만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손해를 본 측은 어떤 식으로든 그 손해분을 메우고 변제하도록 손해를 입힌 측을 강요한다. 즉 손해를 본 측은 채권자의 권리를 손해를 입힌 채무자에게 행사하려 한다. 채무자는 자신이 입힌 손해분을 변제(Vergeltung)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니체는 바로 여기서 죄 개념의 계보를 보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추측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니체는 벌을 예로 든다. 벌은 채무자-채권자 관계에서 채무자의 부채, 즉 죄에 대한 변제다. 벌은 고통스러운 피해를 당한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피해에 대한 ‘등가물’로서, 가해자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배상을 받으려는 심리의 표현인 것이다. 손해의 정도가 벌의 정도를 제한하며, 공정한 벌과 공정하지 않은 벌을 결정한다. 니체는 이렇듯 죄가 갖는 경제적 의미 속에서 죄 개념의 근원을 추측하려 한다. 그 결과 도덕을 경제적 변제개념으로 환원시키고자 한다(GM II 4: KGW VI 2, 313-314. 한글판 402.)
2.2.1.1.1.4 책임에 대한 기억
교환은 계약 당사자들 사이의 동의와 신뢰에 기초하며, 이것이 있어야 상호간의 소통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신뢰는 서로를 통제할 수 있고 서로를 계산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되는 정도 만큼 불필요해진다.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신뢰라는 것이 이미 계산가능성과 통제에 의해 대체되어 “신용(Kredit)”으로 되어 있는 관계다. 신용에 기초한 이런 교환관계를 니체는 염두에 둔다. “되갚을 것이라는 약속에 신용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자신의 계약내용을 “약속하고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저당”잡히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 신용관계가 “잔인함”과 “고통”을 찾아낼 수 있는 “발굴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속을 기억하도록 만드는 기제, 즉 자신의 신용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기제가 끔찍한 새디즘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니체는 잔인함의 심리로 이해한다(GM II 5: KGW VI 2, 6. 한글판 404.)
2.2.1.1.1.5 잔인함(Grausamkeit)에 대한 청구권
채권자-채무자 계약관계는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잔인할 수 있는 권리를 청구하는 관계다. 계약 당사자가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지 않으면, 즉 자신의 신용을 책임지지 않으면, 상대방은 채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 즉 그는 채무자를 잔인하게 다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잔인함이라는 것은 니체에게 일종의 가치다. 채무가 진정한 질료적인 등가의 형식으로 변제될 수 없는 한에서, 채권자에게는 영혼의 충족감을 얻을 권리가 있다. 채권자는 자신의 손해액을 상쇄할 정도만큼의 기분 좋은 느낌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다. 기분 좋은 느낌, 영혼의 충족감은 채무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데서 얻어진다고 니체는 생각한다. “고통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더욱 쾌감을 준다.”(GM II 6) 자신이 입은 손해에 대한 등가로서 채권자는 채무자의 고통을 즐길 권리를, 잔인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다. 채무자가 저당 잡혔던 것을 빼앗는다거나, 채무자에게 물리력을 사용하면서 그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다. 잔인함의 청구권은 이렇듯 채권자에게는 자신의 손해분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인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잔인함의 청구권을 권력관계로 이해한다. 채권자가 얻은 영혼의 충족은 다름 아닌 자신의 힘을 힘없는 자에게 행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잔인함의 청구권은 채권자의 채무자에 대한 지배욕의 소산이자, 지배욕에 대한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죄’ ‘양심’ 등의 도덕개념들은 ‘채무법(Obligationen-Rechte)’(GM 6)에서 기인하며, 이 채무법이 다시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한 잔인할 권리를 보증해주는 한에서, 도덕개념의 시작에는 피가 뿌려진 것이다(GM II 5: KGW VI 2, 6. 한글판 405.)
2.2.1.2 정의
국가적 차원의 정의의 계보 역시 부채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정의에 대한 고찰에도 따라서 경제와 권력이라는 관점이 적용된다. 이 관점을 적용하면 정의는 잠정적으로 ‘일정 정도 동등한 권력을 소유한 자들 사이의 힘의 등가’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런데 니체는 자신이《도덕의 계보 》1 논문에서 구분했던 고귀한 평가방식과 고귀하지 않은 평가방식의 구분을 정의에 대한 고찰에 적용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원한을 넘어서는 “자비(Gnade)”로서의 정의관이 결론적으로 도출된다.
2.2.1.2.1 교환정의로서의 정의
인간의 근원적인 관계에 대한 가설을 토대로 니체는 정의에 대한 가설을 세운다: ‘인간의 근원적 관계가 원시적인 사회복합체로 이행하면서 ‘어느 사물이나 그 가격을 지닌다. 모든 것은 대가로 지불될 수 있다’라는 일반화가 가능해졌다. 즉 모든 관계가 가치의 교환관계로 이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가 교환정의로 파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교환정의는 니체에게서 ‘힘’ 및 ‘권력’관계를 토대로 한다. 정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힘의 조정 및 힘의 타협이다. 교환정의는 따라서 계보상으로는 힘 및 권력의 교환정의인 것이다. 정의에 대한 이런 가설은 개인-개인의 근본적 관계로 설정된 채권자-채무자 관계가 공동체-개인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GM II 8: KGW VI 2, 322. 한글판 413.)
2.2.1.2.2 채권자-채무자 관계로서의 사회계약
개인이 다른 개인과 형성하는 채권자-채무자 계약관계는 공동체-개인의 관계에도 유효하다. 개인과 공동체와의 계약에서도 ‘가치의 등가’ 원칙이 적용된다. 원시적인 사회복합체도 예외는 아니다. 개인은 공동체에 자신을 방어해주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점에 대해 감사하며, 그것에 대한 등가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개인이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는 첫째, ‘관습의 도덕’ 측면에서 본다면, 공동체의 전통 및 관례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개인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공동체 도덕에 충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정의’의 측면에서 본다면 균형의 원리를 파괴하는 위반행위다. 힘 관계의 균형을 흐트러뜨리는 것이다. 이런 일은 곧 계약관계를 파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니체는 공동체와의 계약을 깬 자(Brecher)를 범죄자(Verbrecher)로 이해하는 것이다. 범죄자는 이렇듯 경제적 사유에 의하면 사회적으로 협의되고 도달된 균형을 위협하는 존재이며, 곧 공동체에 대한 부채를 지고 있는 자다. (GM II 9: KGW VI 2, 323. 한글판 413-414.)
2.2.1.2.3 공동체의 잔인함에 대한 청구권
범죄자가 전체 공동체와의 계약을 깬 자이자 채무자이기에, 전체 공동체는 채권자로서의 권리를 획득한다. 범죄자를 엄격하고도 잔인하게 대할 권리를. 개인-개인 사이에서 성립되었던 채권자의 채무자에 대한 ‘잔인할 권리’가 여기서 공동체로 위임된다. 공동체의 균형을 깬 개인은 채무자처럼 다루어져, 그가 일으킨 손해에 대한 ‘등가적’인 조처가 취해진다. 그를 공동체의 보호대상에서 제외시켜 자연 상태의 가혹함을 맛보게 한다든지, 자유를 박탈해버린다든지, 아니면 직접적인 고통을 느끼게 하는 잔인할 권리를 행사한다. 이것은 공동체의 보복이며, 이것이 곧 형벌이다. 이 형벌의 목적은 범죄자에게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그리고 사회의 도덕적 이득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고, 자신이 누리던 공동체 속에서의 권리와 자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데에 있다. (GM II 9 : KGW VI 2, 323-324. 한글판 414.)
2.2.1.2.4 교환정의의 자기지양
니체는 정의에 대한 경제적 사유를 잠시 중단하고, 정의의 자기지양(Selbstaufhebung)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그는 개인의 자기지양의 과정을 모델로 삼는다. 개인이 주권적 개인으로 될 때 승인(Anerkennung)의 도덕이 도출될 수 있듯이, 국가가 주권적 공동체가 될 때 자비(Gnade)로서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환정의로서의 정의관이 자비(Gnade)로서의 정의라는 새로운 정의관으로 대체될 수 있는 가능성은 오로지 국가의 주권적 공동체화에 의존하게 된다.
2.2.1.2.4.1 주권적 개인 모델
니체에게 주권적 개인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의 힘에의 의지를 강화시키고, 타인의 삶을 증진시키는 존재다. 타인과 타인의 자유의지를 승인하고 인정하는 존재다. 즉 주권적 개인의 주권성은 자기지배와 자기입법성에서 완성되지 않고, 오히려 타인에 대한 승인에서 완성된다. 이런 존재를 니체는 “올바른 태도” “적극적 태도”를 지니는 개인으로, 또는 “심판하는 눈” “객관성이 흐려지지 않는 눈” “좀더 자유로운 눈” “좀더 훌륭한 양심”의 소유자로 묘사한다. 이런 존재는 곧 “거리를 두는 파토스(Pathos der Distanz)”의 소유자다. 거리를 두는 파토스란 “거리를 벌리지만 대립적인 것은 창조하지 않는”(VIII 2 10[63]), “적대화하지 않으면서도 분리시키는 기술”(EH, VI 3, 292)이다. 이것은 단순한 인내는 아니다. 또 단순한 배려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특징은 독단성을 지양하고, 다양한 관점과 사고실험을 통한 객관적인 판관의 임무를 ‘실천’하는 데에 있다. 이런 파토스의 소유자는 자신에게 상해를 입힌 자에게 원한이나 복수감정으로 대하지 않는다. 자신의 입장만을 독단적으로 주장하지도 않는다. 니체는 주권적 개인의 이런 특징에서 정의의 자기지양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GM II 11: KGW VI 2, 326-327. 한글판 417-418.)
2.2.1.2.4.2 새로운 정의 개념: 자비(Gnade)
정의의 자기 지양은 국가가 주권적 공동체일 경우에 가능하다. 주권적 공동체는 마치 주권적 개인이 행위하듯 행위한다. 여기서는 영혼의 잔인함에서 오는 쾌감과 권리는 승화되고 미묘해진다. 공동체가 강화된 자의식으로 인해 개인의 공격을 더 이상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기에, 여러 행위들이 허용된다. 모든 범죄는 변제되어야 한다는 경제적 사고는 이제 불가피하게 완화된다. 교환정의 원칙이 완화된다. 따라서 형벌도 완화된다. 차라투스트라가 정의를 냉혹한 정의와 구별하여 “눈멀지 않은 사랑”으로 단언하는 것이나(Za I 살무사에 물린 상처에 대하여: VI 1, 84), “사랑만이 판관일 수 있다”(VII 2 25[493])라는 니체의 유고는 형벌과 정의의 자기지양의 이런 가능성을 선취하고 있다. 이런 사랑을 니체는 자비라고 부른다. 니체의 자비로서의 정의관은 정의와 공동체에 대한 그의 사유에 유토피아적인 색채를 띠게 한다. 채무가가 변제의 의무를 지지 않는 공동체, 더 이상 벌이 없는 공동체. 따라서 더 이상 죄가 없는 공동체. 이런 유토피아적인 공동체를 니체가 희망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 희망이 인간의 근본관계나 공동체-개인의 관계를 모두 채무-채권자 관계로 이해하고, 심지어는 선조와 개인의 관계, 신과 인간의 관계마저도 이런 것으로 이해하는 니체의 기본입장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공동체는 힘이 강해짐에 따라 개인의 위법행위를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 그 사회의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 -이와 같이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가장 고귀한 사치를 허용할 수 있는 사회의 힘 의식이라는 것도 생각해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 정의는 ‘모든 것은 변상되어야 한다’였지만, 이제 잘못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그저 방임한다. 정의의 자기지양: 이것이 어떤 미명으로 불리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것이 자비다. 이것은 좀더 강한 자의 특권이며, 그가 가진 법의 저편이다. (GM II 10: KGW VI 2, 324-325. 한글판 415-416.)
2.3 내면화 이론(Theorie der Verinnerlichung)
양심의 가책에 대한 니체의 두 번째 가설은 내면화 이론이며, 이것은 사회심리학적 가설이다: ‘양심의 가책은 인간의 자연적 욕구들이 내부로 방향을 돌리는 내면화 과정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양심의 가책은 동물적 충동의 내면화에 불과하다.’ 이 가설은 니체가 부채이론의 형식으로 제시했던 양심의 가책의 계보에 대한 또 다른 가설과는 독립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채권자-채무자 관계 및 새디즘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프로이트가《문명속의 불만Das Unbehagen in der Kultur》(1930)에서 제시했던 문명이론의 입장을 선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명이론은 도덕화를 문명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이해한다. 인간들 사이에 성립하는 외적 평화에 대한 내적동의를 구축해주기 때문이다. 양심은 폭력사용을 구속하는 계기로 간주된다. 그런데 도덕화는 여기서 어느 순간에서부터 희생과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을 문명이론에서는 인간의 진보이자 성과로 간주한다. 바로 이 점에서 니체는 완전히 다른 입장을 선택한다. 문명이론과는 달리 그는 양심(양심의 가책)의 발전을 환영할 만한 성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평화와 사회의 구속에 갇혀있음을 인지할 때 발생하는 인간 내부의 지속적인 비평화 상태, 즉 병증이다. 인간의 자연적 욕구들이 내부로 방향을 돌리는 내면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며, 여기서 양심의 가책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회화라는 지속적인 외적 평화의 대가는 이렇듯 내부의 지속적인 비평화 상태, 즉 양심의 가책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인간이 일반적으로 경험했던 모든 변화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저 변화의 압력 때문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심각한 병이라고 간주한다. 저 변화란 인간이 결국 사회와 평화의 구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변화를 말한다. [...]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해 국가조직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저 무서운 방어벽은 -특히 형벌도 이러한 방어벽에 속한다- 거칠고 자유롭게 방황하는 인간의 저 본능을 모두 거꾸로 돌려 인간 자신으로 향하게 하는 일을 해냈다. 적의, 잔인함과 박해, 습격이나 변혁이나 파괴에 대한 쾌감 -그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에게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길들여지고자 하는 인간 자신이 양심의 가책을 발명한다. (GM II 16: KGW VI 2, 337-339. 한글판 431-432.)
2.3.1 내면화 과정
사회화는 외적 위험을 완화시키고 평화의 길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영역의 활동이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영역으로 축소되지 않은 자연적 본능들은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거칠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인간의 본능들, 예컨대 잔인함이나 파괴에서 느끼는 쾌감은 이제 새로운 대상을 찾는다. 평화가 강요되면 될수록 잔인함에서 느끼는 인간의 쾌감은 인간의 내부로 파고들어, 내면화된다. 자기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 목적을 위해 인간은 양심의 가책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내부세계를 점령한다. 니체는 내부세계가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부세계는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더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인간은 짐작도 못했지만 아주 넓어진 내부세계와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내부세계가 무엇보다도 내면화된 잔인함이기에,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지속적인 불일치 상태에, 평화롭지 않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사회화를 통해 타인을 측정할 수 있게 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측정가능하지 않게 되는 대가를 치루게 된 것이다. 우리가 내부세계라고 부르는 것의 특징은 바로 이런 불측정성(Unberechenbarkeit)이다. 내부는 늘 외적 통제와 관찰로부터 벗어나 있다.(GM II 16: KGW VI 2, 338-339. 한글판 431.)
2.3.2 내면화의 마조히즘
내면화과정은 인간 심리의 마조히즘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인간 심리의 이런 특징을 니체가 제시하는 목적은 인간 심리에 대한 하나의 통일적 상을 제공하는 데에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양심의 가책이 인간 심리의 마조히즘적 성격에 근거한다는 것을 분석해내어, 양심의 가책을 인간에게서 약화시키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양심의 기원을 찾아보고 싶어 한다.
2.3.2.1 공격충동의 마조히즘
내면화 가설이 보여주는 마조히즘은 공격충동에 관한 것이다. 내면화 가설은 인간에게 프로이트가 말하는 일종의 공격충동이 있으며(니체에게서 이것은 ‘적의, 잔인함과 박해, 습격이나 변혁이나 파괴’에 대한 쾌감, ‘은밀한 자기 학대’등으로 불린다), 이것이 내부로 전환되면서 양심의 가책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니체에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잔인한 동물”이다.(Za III 건강을 회복하는 자에 대하여 2) 인간에게는 자신의 욕구를 발산하려는 근본충동이 있지만, 이 욕구가 외부에서 충족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욕구들을 억압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학대하며 쾌감을 느끼는 성향이 있다. 인간에 대한 이런 입장은 니체의 초기 사유에서부터 잘 나타나 있다: “자기부정에 위대한 무엇이 있다는 사실.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적을 극복하는 것, 격정을 순식간에 억제하는 것 -부정은 이런 것으로 모습을 나타낸다”(MA I 132), “인간은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 만큼이나 좋게 작용한다는 느낌을 얻는다.”(MA I 137), “잔인함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축제에 속한다.[...] 이와 함께 자발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것, 자신에게 스스로 고문을 가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이 세계 안으로 기어들게 된다.”(M 18)《선악의 저편》에서도 이 입장은 변하지 않는다: “자기자신의 고통, 자기 자신을 스스로 괴롭힌다는 것에도 풍부한, 넘칠 정도의 풍부한 즐거움이 있다” (JGB 229). 즉 인간은 자기학대를 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가장 잔인한 동물이다. 인간의 이런 특징이 그의 공격충동의 내면화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자발적인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갑자기” 평화와 사회의 구속을 받게 되면서, 그의 무의식적인 공격충동이 “갑자기” 외적 강제에 의해 저지당한다. 즉 동물적 과거와 “비약”적이며 “강제적”인 “폭력적인 단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GM II 17) 그래서 외부세계로의 발산이 억제된 공격충동은 강제적으로 내부세계에서 새로운 충족과 만족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공격충동은 자신의 소유자를 혼란시키고 공격하고 파괴하면서, ‘자기학대’를 하면서, 거기서 쾌감을 느끼면서 충족된다. (GM II 17: KGW VI 2, 341. 한글판 435.)
2.3.4 공격충동의 힘의지
니체는 내면화 이론의 전제와 힘에의 의지 이론을 연결시킨다. 즉 인간심리의 마조히즘적 성격은 지배를 원하고 그런 한에서 외부에 힘을 행사하며(폭력), 그것을 통해 힘 상승을 경험하고 삶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단지 이 의지가 니체의 표현대로 “내면적으로 작아지고 옹졸해지고 내면으로 방향을 돌린” 것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방향전환이 자기학대에의 의지로 분출되기 때문이다. (GM II 18: KGW IV 2, 342. 한글판 435.)
2.3.5 내면화의 문명
내면화 과정은 문명의 발전을 위한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하다. 문명의 전체 역사는 니체에 의하면 우연과 불확실한 것, 급작스러운 것에 대한 원시적 공포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란 바로 “산정하기, 인과적으로 사유하기, 선수치기를 배우며 필연성을 믿는 것”이다.(VIII 2 10[21]). 문화는 따라서 산정불가능한 원시적 충동을 제어하고, 산정가능한 의식세계의 발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원시적 충동세계는 제거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화되어 마조히즘적 성향을 띠게 된다. 이렇듯 문화의 발전과 내면화 과정과 자기학대의 과정 그리고 의식세계의 발전은 비례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니체는 문화의 끝 단계에서는 금욕주의자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금욕주의자는 자기학대를 동반하는 내면화과정의 전형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는 데서 최고의 기쁨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M 113) “우리가 더 높은 문화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은 잔인함이 정신화되고 심화된 데 바탕을 둔 것이다 -이것이 내 명제다.”(JGB 229)라는 단언도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문명과정을 내면화과정의 발전 및 그에 따르는 심적 분열(초자아와 자아)의 과정과 가장 밀접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GM II 16: KGW VI 2, 338. 한글판 430-431.)
2.3.6 사회계약의 폭력성
내면화 가설은 개인의 공동체 결성을 전제한다. 니체는 이 공동체 결성을, 달리 말하면 평화협정을 자유롭고도 자발적인 계약이 아니라, 폭력에 의한 계약으로 이해한다. 그에게는 자유롭고도 자발적인 사회계약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자유롭게 결성된 계약이 가능하다면, 이런 계약은 이미 평화로운 관계가 전제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계약이론가들은 인간이 자연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론적 보증점을 찾으려 한다. 이것은 니체에게는 “몽상”에 불과하다. 여기서 니체는 힘에의 의지 이론과 내면화 가설의 전제를 다시 결합시킨다: 국가는 단지 강력한 자가 더 많은 권력을 약속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강자, 지배자, 힘에의 의지를 권력에의 의지로 구현하는 자가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한 힘 행사, 폭력행사의 결과가 국가이자 사회인 것이다. 국가는 권력행사가 빚어낸 폭력이고, 사회계약은 폭력의 결과다. “국가가 ‘계약’으로 시작되었다는 저 몽상은 정리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명령할 수 있는 자, 천성적으로 ‘지배자’인 자, 일에서나 몸짓에서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자 -이러한 사람에게 계약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GM II 17: KGW VI 2, 340-341. 한글판 434.)
2.3.7 내면화의 도덕화
양심의 가책의 계보에 대한 두 가설, 부채 이론과 내면화 이론은 서로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계보는 그러나《도덕의 계보》두 번째 논문의 21장에서부터 진행되는 신 개념의 계보추적에서 서로 연결된다. 내면화로 인한 양심의 가책의 의미가 채무자-채권자 관계로 구상된 신 개념에 의해 비로소 그 전모를 드러낸다. 즉 신 개념의 발생점 역시 인간의 근본적 관계로 설정되었던 채권자-채무자 관계이며, 이때 원래는 동물적 충동의 내면화에 불과했던 양심의 가책이, 신을 정점에 놓는 종교적 해석이 가해지면서 도덕화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제기하면서 니체는 죄 개념과 양심의 가책 개념을 동시에 소멸시키는 반대의 방향을 구상한다. 그것은 양심의 가책과 죄감정이 극대화되는 유일신론(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폐기가능성 제시를 통해 구체화된다.
2.3.7.1 신 개념의 계보: 채무자-채권자 관계
신 개념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살아있는 세대와 그들의 선조 및 조상 사이에는 채무자-채권자 관계가 성립한다. 살아있는 세대가 그들의 삶과 권력을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에게 선조에 대한 이러저러한 형식의 채무이행은 의무로 다가온다. 그들 종족의 힘이 강력해지는 것과 그들의 선조에 대한 부채의식의 정도 그리고 선조에 대한 공포의 정도는 비례한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의 선조는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 되고, 신적 속성을 획득한다. 선조의 신으로의 변형이 일어나 선조는 이제 조상신이 된다. 그런데 혈연에 기초한 공동체가 몰락한 후에도 신적인 것에 대한 부채의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부채부담의 유산 및 그것을 상환하려는 열망의 유산을 전수받는다. 신 개념 뿐만 아니라 종교는 이렇듯 부채감정의 소산이다. 특정 민족의 종족성을 넘어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유일신교는 이런 부채감정이 최고단계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GM II 19: KGW VI 2, 343-344. 한글판 437-438.)
2.3.7.2 잔인함의 내면화
내면화 이론에서는 인간의 공격충동이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기 위해 인간에게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킨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부채이론에서는 양심의 가책을 채권자-채무자 사이의 경제적 관계에서 도출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두 가설이 여기서 종합된다. 인간 심리의 마조히즘은 자신에게 가하는 고통을 극단화하기 위해 “모든 부채가 지불불가능하다”는 관념을 만든다. 이 관념은 채무자-채권자라는 경제적 관계를 도덕적 관계로 발전시키는 동인이 된다. 이것은 부채를 신에 대한 부채로 해석하는 종교적 해석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신에 대한 부채해결능력이 없다는 것, 따라서 보상이 불가능하다는 것. 이 관념은 인간에게 자신이 신에 대한 부채를 해결하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관념, 그것도 영원히 죄인으로 머물 수 밖에 없다는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영원한 죄인이, 채권자 신이 주는 영원한 벌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이렇듯 종교적 해석은 인간의 마조히즘 심리의 정점을 표현하고 있으며, 양심의 가책은 종교적 해석을 통해 도덕화된다. (GM II 22: KGW VI 2, 348. 한글판 442-443.)
2.3.7.3 최고의 부채감정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신
유일신론은 최고의 부채감정을 나타낸다. 따라서 유일신론의 유럽적 최고 형태인 그리스도교의 신은 곧 인간의 가장 강력해진 부채의식 및 가장 커진 죄의식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교는 ‘신에 대한 부채해결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종교 해석학을 위해 원죄 개념을 도입한다. 조상인 아담의 죄로 인해 후대의 그 누구도 아무리 노력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원죄. 즉 그리스도교는 인간에게 종적인 죄의식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죄의식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깊어진다. (GM II 20: KGW VI 2, 345. 한글판 439-440.)
2.3.7.4 그리스도교의 원한
니체는 원한 이론과 채무자-채권자 관계를 연결시켜 도덕적 부채와 경제적 부채개념을 연결시키며, 이것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설명하려 한다. 그리스도교는 한편으로는 채무자 인간에 대한 원한의 소산이다. 인간을 영원한 죄인으로 만들면서 인간의 마조히즘적 성향을 강화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교는 채권자인 신에 대해서도 원한을 표시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니체는 그리스도교 신 개념에서 그 내용을 찾는다: 그리스도교 신은 채권자다. 그는 보상과 희생을 요구하는 존재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신을 희생하면서 죄를 사해주는 존재다. 신의 자기희생은 신 자신이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지불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상환할 수 없게 된 것을 인간에게서 벗어나 상환한다는 것이다. 채권자 신이 채무자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 채권자의 원한은 채무자에게로 향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이라는 채권자는 자기 자신으로 원한의 방향을 변경한 것이다. 그런 신은 마조히즘의 정점이다. 마조히즘의 정점으로서의 신! 니체는 이것을 패러독스이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갖고 있는 최고의 원한감정의 소산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채권자 신의 자기희생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니체에게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GM II 21: KGW VI 2, 346-347. 한글판 440-441.)
2.3.7.5 양심의 가책의 파기가능성
니체는 죄감정 및 양심의 가책을 결정적으로 파기해버릴 가능성을 바로 유일신론의 파기에서 찾는다. 유일신론에서 죄감정의 극대화와 양심의 가책의 극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무신론을 인간의 부채의식의 소거, 죄의식의 소거로 받아들인다. 신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곧 채무자의 자유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가능성은 니체 당대에 현실화되지 않았다. 유럽 인간에게 두 번째 무죄의 가능성은 닫혀있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다른 가능성을 타진해본다. 첫째는 새로운 유형의 신의 등장 가능성이고, 둘째는 그리스도교성의 복원이다. (GM II 20: KGW VI 2, 346. 한글판 440.)
2.3.7.5.1 신성한 신의 가능성
니체는 신성한 신의 가능성을, 신 개념 계보를 다른 식으로 제공하면서 구상해보려 하며, 그 예를 그리스 신에서 찾는다. 여기서 그는《그리스도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1841)에서 표명된 포이어바흐(L. Feuerbach)의 입장과 유사한 입장을 전제한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신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신의 본성에 자신의 본성을 객관화시켜 투사한 후, 그는 자신의 원래 본성으로부터 소외된다. 니체는 물론 포이어바흐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19세기 종교비판가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우였던 그를 리하르트 바그너를 통해 알고 있었다(W. Stegmaier, Nietzsches Genealogie der Moral (1994), 164). 실제로 니체는《안티크리스트》54번 글에서는 포이어바흐의 테제와 동일한 입장을 제시하기도 한다: “모든 유형의 신앙은 탈자기(Entselbstung), 자기소외(Selbstentfemdung)의 표현이다.” 니체는 이런 전제하에 그리스 신에 대해 다음처럼 말한다: “그리스 신은 그리스인들의 자주적이고 고귀한 본성이 투사된 것이다. 그리스인의 신관은 그들 자신에 대한 인간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의 우수성은 이렇게 형성된 신에 대한 표상에 양심의 가책이나 죄를 결합시키지 않는데서 나타난다. 그들은 오히려 신에게서 지상에서의 악과 고통의 원인을 찾았다. 인간은 신에 의해 우롱당한 어리석은 존재일 수는 있지만, 결코 죄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니체의 표현대로 신은 “벌주는 것을 맡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맡았던 것이다.” 신에 대한 이런 식의 표상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을 니체는 미래의 인간으로 생각한다. 이 인간은 자신의 원한을 신에 투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신은 인간을 죄 있는 존재로 만드는 채권자 신도, 마조히즘적 신도, 도덕적 신도 아니다. 그러나 니체는 그 구체적 경우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죄 감정으로부터의 자유만으로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GM II 23: KGW VI 2, 351. 한글판 444-445.)
2.3.7.5.2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교 신 개념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만큼 죄있으며 저주받아야 할 것으로 보는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데서 니체는 그리스도교 신 개념의 병증을 본다. 하지만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부터의 구제 가능성을 니체는 그리스도교성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발견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제도화된 그리스도교와 예수의 복음 자체에 토대를 두는 그리스도교성에 대한 니체 자신의 구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니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을 인간의 개인화라고 생각한다. 즉 종적 인간이 원죄라는 것을 갖는다면, 개인화된 인간은 종적 인간의 이런 특징을 갖지 않게 된다. 예수는 원죄를 없애면서 종적 죄 감정을 소멸시켜버린 것이다. 이것은《안티크리스트》33번 글이 복음을 ‘죄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한 구원은 이렇듯 죄 감정의 소멸인 것이다. 예수는 개인을 양심의 가책 및 죄 감정으로부터 해방시켜, 가책받을 일 없는 선한 양심을 갖는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니체는 예수의 이런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성이라고 이해한다. 원죄 개념을 도입하는 해석학과 더불어 그리스도교는 원한의 종교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는 사랑이었다. 이것은 도덕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도덕의 자기 지양이었던 것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여기에는 병이, 지금까지 인간에게서 창궐했던 가장 무서운 병이 있는 것이다: - 이 고문과 부조리의 밤에 어떻게 사랑이 외치는 소리가, 그리워하는 환희가 외치는 소리가, 사랑에서의 구원이 외치는 소리가 울려펴졌는지 아직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 더 이상 없다!) 견뎌내기 어려운 전율에 휩쓸려 얼굴을 돌리고 만다......인간에게는 이렇게 놀랄만한 일이 많이 있다!...... 대지는 너무 오랫동안 이미 정신병원이었다!...... (GM II 22: KGW VI 2, 349. 한글판 443.)
3. 금욕적 이상 (Das asketische Ideal)
금욕적 이상은 《도덕의 계보》의 세 번째 논문의 주제다. 니체는 여기서 금욕적 이상의 계보를 추적하여, 그것의 배후의도와 의미 및 한계를 찾아내고 싶어한다. 이 작업은 서양의 사제적 이상과 금욕적 이상이 동일하다는 것, 이 이상이 서양의 그리스도교 도덕의 정상에 위치하면서 절대적인 유효성을 요구한다는 것, 그리고 이 이상이 서양의 문화영역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 등을 밝히면서 수행된다.
금욕적 이상이라는 단어는 니체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것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찾는데에 무관심하며, 이것의 근원에 대한 사적 탐구에도 관심이 없다. 하지만 대략적인 정의는 가능하다. ‘금욕적 이상’이라는 단어가 이미 내포하고 있듯이 ‘금욕’과 ‘이상’은 상호간에 의미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연결된다. 금욕적 이상은 하나의 이상이다. 이것은 삶의 특정한 태도를 설정해주지는 않는 ‘환상적 이상’(M 377)과는 달리, 삶에 방향설정을 해주며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삶에 지속적이고도 지치지 않는 도달에의 노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상’인 한에서 결코 성취될 수는 없다. 니체는 이 금욕적 이상을 삶의 엄정한 훈련이자 규율로서, 삶에 대한 지속적인 폭력이자 폭력에의 의지의 표출로 이해한다. 그런 한에서 금욕적 이상은 무에의 의지다.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그러나 일반적으로 금욕적 이상이 인간에게 그렇게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 안에는 인간 의지의 근본사실, 즉 인간 의지가 지닌 공허의 공포가 표현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가 필요하다. -이 의지는 아무 것도 의욕하지 않느니, 차라리 무를 의욕하는 것이다. (GM III 1: KGW VI 2, 357. 한글판 451.)
3.1 금욕적 이상의 유용성: 약자-인간의 의미물음에 대한 답변 (GM III 28)
3.2 금욕적 이상의 허무적 성격
반자연성 (GM III 28)
절대성 요구 (GM III 23)
3.3 금욕적 이상과 현대문화
3.3.1 문화권력으로서의 사제
과제: 고통으로 인한 개인적-사회적 디프레스의 완화 및 ‘마비’ (GM III 15)
목적: 지배권 획득과 권력 행사 (GM III 15)
전략: 원한 아펙트의 내면화: 약자-인간 → 병자-인간 (GM III 15)
수단: 죄의식 (GM III 20)/ 기계적 활동 (GM III 18)/ ‘즐겁게 하는 일의 즐거움’의 부여 (GM III 18)/ 무리형성 (GM III 18)
전제: 1) 자기모순적 논리. ‘삶을 거스르는 삶(Leben gegen Leben)’ (GM III 13)
2) 이원론적 심리학 (GM III 12)
3) 생리적 불합리 (GM III 13)
비판: 도덕적 위로기제에 불과 (GM III 17)
결과: 유럽의 원한문화 (GM III 14)
냄새를 맡기 위한 코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오늘날에도 들어가는 곳이면 거의 어디서나 정신병원이나 병원의 공기를 느끼게 된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인간의 문화권이나 바로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유럽’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가장 커다란 위험은 병자다: 악인이나 맹수가 아니다. 처음부터 실패자, 패배자, 좌절자 -가장 약한 자들인 이들은 대부분 인간 삶의 토대를 허물어버리고, 삶이나 인간이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가장 위험하게 독을 타서 그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GM III 14: KGW VI 2, 386. 한글판 487.)
3.3.2 예술에서의 금욕적 이상의 의미: 바그너의 예 (GM III 2)(GM III 3)(GM III 4)
3.3.3 철학에서의 금욕적 이상의 의미
목적: 정신성의 최고화 (GM III 9)
수단: 자기거세(Selbstkasteiung) (GM III 10)
1) 감각에 대한 불신 (GM III 7)
2) 진리 의지 (GM III 24)
3) 이성의 금욕적 자기경멸(GM III 12)
한계: 지적양심의 결여 (GM III 9)
대안: 관점주의 (GM III 12)
3.3.4 학문에서의 금욕적 이상의 의미
특징: 학적 양심의 결여(GM III 23)
진리의 도덕화 (GM III 25)
이성의 자기제한 (GM III 25)
유형: 노동적 학문 (GM III 23)
영웅정신의 학문 (GM III 24)
대안: 가치창조적 학문 (GM III 24)
3.3.5 금욕적 이상의 자기지양 (GM III 27)
[출처] 백승영 <니체 도덕의 계보> |작성자 툭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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