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22-23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성령으로 충만한 삶이라는 이번 시리즈에서 사랑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서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그는 이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3장과 방금 전에 살펴본 갈라디아서 5:22-23 말씀을 비교해 보면,
사랑이 단순히 성령의 처음 열매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성령의 열매 그 자체이고 나머지는 다 사랑에 부수적으로 따라옴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이렇듯 이런 품성은 다 사랑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 모든 적극적인 행동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랑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개념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이란 말을 잘못 사용하고 너무 많이 남용하기도 합니다.우리는 사랑이란 말을 아무데나 함부로 쓰고 있습니다. 배우자와 자녀를 사랑한다 부터 시작해서 피자, 나라, 아이스크림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사랑을 포괄적으로 사용하다 보니 그 본뜻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오해가 생겼습니다.
사랑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의 감정을 우리 속에서 나오는 떨림 혹은 감정의 물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사랑이 강력한 감정을 낳긴 하지만 사랑이 감정은 아닙니다.라이너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연재만화를 보면 라이너스가 시무룩하게 턱을 손으로 받치면서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주일마다 교회에서 만났던 그 예쁜 여자애 알지? 나한테 늘 미소를 지어주던 그녀가 교회를 바꾸고 말았어.” 그러자 찰리 브라운이 이렇게 대꾸합니다.“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도 곧 바뀌겠네.”이게 바로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감정입니다. 이런 철부지 사랑은 절대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억제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난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사랑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말합니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닙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요.”혹은 그 반대로 “이제 어쩔 수가 없어요.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이렇듯 우리는 사랑은 통제불가능 하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통제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랑이 다음과 같다고 말합니다. 첫째, 사랑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골로새서 3:14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여기서 “더하라”는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사랑이 우리가 선택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사랑을 더하라.”만약 이것이 감정이라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선택사항이기 때문에 사랑을 더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둘째, 성경은 사랑이 행동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은 행동이지 감정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18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 계명을 거꾸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사랑하고 행동으로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남자가 약혼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정말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위해 죽기까지 할거에요.”그러자 여자기 대답했습니다.“당신은 늘 그렇게 말했지만 한번도 나를 위해 죽어본 적이 없잖아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가 무엇인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것은 조건 없이 희생적으로 주는 사랑을 뜻합니다. 이것은 선택에 따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 아가페 사랑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이라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때로는 우리와 성격이 정반대인 사람들과 그와 같은 환경 속으로 우리를 넣으실 때가 더러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그런 시도를 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60초 시간을 드리고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 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데는 서로 다른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을 수도 있고, 말하는 태도, 행동, 혹은 나한테 대하는 태도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계시지 않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할 필요는 없으나 그들을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요? 저는 여러분의 삶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는 단순하지만 정말 중요한 다섯 가지 성경적인 방법을 함께 살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책에서 나오는 교훈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교훈입니다. 지금은 여러분께서 이 말씀을 믿지 못하실지 모르지만 이대로 시도해보면 그대로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셨는지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알고 이해하고 느껴야 합니다. 에베소서 3:17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바울이 여기서 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을까요? 그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이에게 사랑을 주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부터 경험해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4:19 말씀입니다.“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이게 바로 우리 삶 가운데서 사랑을 키우는 첫째 단계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 단계가 없으면 우리 삶 가운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을 놓치고 맙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까지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셨으며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시는지 모른다면 말입니다.
이제 두 번째 단계입니다. 내 삶 가운데 사랑을 키우고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사는 두 번째 단계는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3 말씀입니다.“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내가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나빠지고 맙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부모에게 내가 화를 내고 있으면서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할 없습니다.
직장 상사에게 화가 잔뜩 나 있다면 집에 돌아와서도 자녀들을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을 화나게 만든 근본원인은 여러분에게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물론 상대방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모욕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는 아무도 이처럼 십자가에 달려 조롱을 당하고 사람들한테 침을 뱉는 일을 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기서 잠깐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말씀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셨을지 모르지만 과거의 문은 닫아버리고 이제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그들이 용서 받을만하므로 용서해 주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슴이 다시 충만해지도록 용서해 주십시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를 버리면 과거의 사람이 현재의 나에게 더 이상 상처를 입히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마음을 뺏기지 말고 오히려 가슴을 주십시오. 상처를 자꾸 생각하지 마시고 이제는 그 끈을 놓아버리십시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셋째 단계입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성령과 사랑이 자라게 하려면 나도 예수님처럼 사람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사람을 바라보십시오. 빌립보서 2: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람을 대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대해 주십시오.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분명한 사실을 하나 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삶 가운데 밝히 보신 것은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 사실을 아신 예수님은 그래서 과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사람도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잘못을 간과하시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보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 가운데 자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역겹고 도무지 사랑스러운 데가 없는 사람일수록 가장 사람이 많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으로 그들을 대하지 마십시오. 상처받은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도무지 사랑스러운 곳이라곤 없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곧잘 무시하는 사람일수록 사랑의 묘약이 가장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런 예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도 그렇게 대해 주셨고 요한복음 8장에서는 간음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에게도 그렇게 대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는 세리라고 사람들의 멸시를 받던 삭게오에게도 그렇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바라보신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바라보십시오. 잘못을 보지 마시고 그들의 필요를 보십시오. 그들의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넷째,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십시오.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위선적으로 사랑하는 척 하라는 말이냐고 반문하실 분께서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믿음이란 갈 곳을 보지 않고도 먼저 발을 옮기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란다면 그대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번 시리즈에서 정말 중요하게 살펴보려고 하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느낌을 받기 위해 행동부터 하는 것이 행동을 위해 느낌을 기다리는 것보다 오히려 쉽다. 적어두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느낌을 받기 위해 행동부터 하는 것이 행동을 위해 느낌을 기다리는 것보다 오히려 쉽다. 여러분이 규칙적으로 운동하시는 분이라도 운동하고 싶은 느낌이 날마다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가서 걷고 싶지 않고, 나가서 달리고 싶지 않고 나가서 수영하고 싶은 느낌이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나가서 행동에 옮기면 어떻게 됩니까? 하다 보면 점점 느낌도 좋아집니다. 그러다가 마칠 때 즈음이면 느낌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느낌을 받기 위해서라도 행동부터 옮겨야 합니다. 이런 원리를 인간 관계에도 적용해 볼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을 보십시오. 여기 나오는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은 성경에 나오는 명령 가운데 가장 어려운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세상에 어떻게 그게 가능하느냐고 묻는 분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다음 네 가지 단계를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계속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양심의 선택입니다.
둘째,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처음 계명의 후반부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이 우리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사랑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의 느낌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좋게 대하는 (선대) 편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 먹을 것이든 무엇이든 원수에게 좋은 일을 행하라 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이 뭐라 하셨는지 보십시오.“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이것은 아버지가 아들한테 복을 빌어주는 것과 같은 축복의 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저주할지 모르지만 너는 그들에게 아무 나쁜 말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작정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잠언 12장 18절에서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제 네 번째를 보겠습니다.“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던가 하나님의 능력이 원수에 대한 나의 태도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떤 마음과 행동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이렇듯 원수를 사랑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오늘 시간을 내어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 말씀을 읽을 시간은 없지만 13장 4-8절을 보면 15가지 행동이 사랑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성령이 내 삶 가운데 성장하면 최선의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서 사랑은 항상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란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전파력이 있습니다. 혹시 내가 배우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내 자녀를 변화시킬 수 있다. 내가 내 동료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들을 가장 잘 변화시킬 수 있는지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변화 받은 사람처럼 대해 주십시오. 남편이 성공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남편이 이미 성공한 사람처럼 대하십시오. 현명한 자녀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이미 현명한 자녀가 된 것처럼 대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원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그렇게 바라는 척하지만 마시고 진심으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으십시오. 사랑은 최선의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섯 가지 단계를 보았습니다. 두 성경에서 나온 원칙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어떻게 보조를 맞추어 성령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이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다 마음 속에 기억하기 어렵거든 냉장고에 붙여놓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붙여놓고 식사 전에 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강좌를 마치기 전에 이번에는 두 번째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죽은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보겠습니다. 제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결혼한 사람들이 상담하러 찾아와서 내가 이제 배우자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때입니다.
“예전에 내가 그 사람한테 가졌던 감정은 이제 소멸해 버리고 말았어요. 이제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다 지난 일이 되고 말았어요.”저는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아십니까?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들은 초점을 자신들의 생각이나 행동, 혹은 헌신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망치라고 우리에게 감정을 주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것들이 우리 감정을 다스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잃어버린 감정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요? 방금 전에 어떻게 해야 성령이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할 수 있는지 보았는데,
요한계시록 2장에서 죽은 사랑을 어떻게 다시 살릴 수 있는지 귀중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을 이번 강좌에 적용하는 게 좀 이상하게 보이긴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으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 가운데 첫 교회가 에베소 교회인데 이 교회는 첫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메마르고 열정도 식어버렸는데 예수님이 그 사랑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지적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점으로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죽은 사랑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고 싶으면 첫 사랑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서로 사랑했는지 기억해 보라고 했습니다. 행복했던 시간, 우리 마을을 사로잡았던 좋았던 시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이 함께 나누었던 일들과 경험에 다시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첫 데이트 시절을 다시 생각해 보실 수도 있습니다. 결혼식, 신혼여행, 첫 아이를 낳을 때를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좋았던 옛 시절을 기억해 보십시오.
두 번째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란 단지 유감스럽게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변화를 의미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하고 자기연민도 그만두고 마음 아파하는 것도 그만두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결혼생활이 더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도 그만 두시기 바랍니다. 배우자에 대한 온갖 나쁜 생각을 중단하십시오. 그 대신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실천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사랑을 되살리려면 요한계시록 2장 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처음 행위를 가지라.” 얼마나 간단한 말씀입니까! 처음에 만나고 약혼할 때와 같은 열심을 다시 내 보십시오. 대화를 시간을 내고, 꽃도 사 주고 옷도 치장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과 그러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배우자와 그렇게 해 보십시오. 다시 한번 창의력을 발휘해 보십시오. 다른 집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이는 게 아니라 물을 주어야 푸른 것입니다. 그러니 잔디에 물을 주십시오.
불평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대신 결혼에 이만큼 투자하면 100쌍 중 99쌍은 틀림없이 결혼생활이 좋아질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감정의 불도 되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노력하면 결혼생활이 다시 좋아집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강좌를 마치기 전 처음 드렸던 주제를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의 대상이 누구든지 그 대상이 아내든지, 남자 친구든지, 여자친구든지, 자녀나 부모든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가 깨닫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마치기 전 오늘 여기 계신 분 가운데 아직 주님께 나오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고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를 씻고 싶은 분에게 기회를 드립니다. 주님께 여러분의 삶을 다시 헌신하기를 다짐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은 앞으로 나오셔서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분에게 다시 세례를 받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우리가 다시 나아오면 주님의 보혈이 늘 우리 죄를 씻어 주십니다.
머리 숙여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희가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아버지, 주님의 성령이 저희 삶 속에 열매를 맺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도와 주소서.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므로 성령의 열매를 잘 맺게 해 주소서. 아버지, 저희 가운데 죽어 있는 사랑을 주의 능력으로 되살릴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아버지, 저희 가운데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복음에 순종하여 주님의 사랑의 초청에 응답하게 해 주옵소서. 지금 바로 순종하게 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상의 말씀은 스티브 플랫 著 BCC 譯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글을 올려주신 "길동무"블로그(https://cafe.naver.com/kcachurch) 메니져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덕휴목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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