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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역사철학

역사철학이란 무엇인가?

by 이덕휴-dhleepaul 2018. 4. 12.

제26장 역사철학이란 무엇인가?

 

1. 역사철학의 정의

 

역사철학이란 역사현상에 특정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여 그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일관된 순서와 계획 및 자연과학에서와 같은 메커니즘이나 통칙을 찾아내려는 학문분야라 정의.

역사철학은 역사를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는 하는 史觀과 연결되는 것이 상례.

왜(why)와 어떻게(how)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를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2. 역사철학의 목표

 

역사철학자들은 세 가지 질서들을 역사현상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상례.

① 역사의 발전과정(historical process)은 어떤 것인가. 역사현상은 일정한 패턴을 따라 움직인다고 봄. 직선(진보? 퇴보?)과 순환적인 패턴, 무질서한 패턴(우연하거나 예기치 않은 作戱에 의해 일어남. 그 외에는 위의 경향이 섞인 종합적인 패턴

② 역사의 動因(motive)은 무엇인가. 신? 인간의 노력? 인간의 의지, 이성? 물질이나 생산관계?

③ 역사의 종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역사를 시작-과정-끝이 있다고 봄) : 낙관적? 비관적?

 

1) 어거스틴(Saint Augustine : 354-430)의 기독교사관

 

역사철학의 신학적 기원

 

역사의 의미에 관한 서구의 사변은 주로 신학에서 나왔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순환운동이라는 그리스․로마적 사고와는 달리 역사란 직선적 발전 운동이라는 믿음이 그리스도교 초기에 성행했다. 이러한 접근의 흔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등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죽은 지 1,250년이 지난 뒤에 보쉬에는 〈보편사론 Discours sur l'histoire universelle〉(1681)에서 역사의 전과정이 '매우 높은 지혜'의 계획에 의존한다는 소박한 믿음을 내세웠다. 그는 국가의 흥망과 종교적 신조의 흥망은 결국 섭리의 숨은 질서에 의존하며 섭리가 역사적 정의(正義)와 응보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이 견해의 반향은 컸지만 그 영향은 오래가지 않았다. 18세기에는 이러한 목적론적․섭리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아우구스티누스 :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사상을 결합한 문명의 가교적 역할을 이룩한 서양 최초의 역사철학자. ?神國論(De Civitate Dei) -로마에 대한 기술. 로마의 멸망은 기독교나 교회 때문이 아니라 로마인들의 도덕적 타락과 경제적 향략 때문이라 주장. 로마의 멸망은 신의 숨겨진 뜻. 따라서 그것을 대체할 나라는 ‘신의 나라(神國)’라고 주장함.

인류의 역사를 선(신의 나라)과 악(세속의 나라)이 대결하는 투쟁의 역사로 파악. 궁극적으로 신의 나라의 승리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 (영)Saint Augustine. Saint Augustine of Hippo라고도 함. A.D. 354 - 430), 축일은 8월 28일. 로마령 아프리카에 있던 도시 히포의 주교(396~430).

 

〈신약성서〉에 나타난 종교성과 그리스 철학의 플라톤 전통이 그에게서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그러한 그의 사상은 중세 로마 가톨릭 세계로 이어졌고 르네상스 시대의 프로테스탄트를 낳았다.

 

우주론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창조는 아무런 목적도 동기도 없고 신의 자기 관조의 자동적인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를 "선한 것이 있도록 한 선한 하느님의 의지"(〈신국〉 11:21)의 결과라고 보았다. 뻗어나가는 창조적 사랑의 힘이 그의 신학 전체의 핵심을 이룬다. 하느님의 창조 의지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거나 존속하는 것이 없으므로 '존재를 가지고 있는 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 그리고 분명 선의 등급이 있으니 존재의 등급도 있다. 그러나 '비존재'에 가까운 무형의 물질이라도 하느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선하다. 악의 기원을 물질에서 찾으면 안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책임을 물질적 조건에 돌리려는 데 반대했다.

 

 

2)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 1464-1527)의 국가사관

 

르네상스가 교회의 군림, 권위, 스콜라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대해 반기를 들기 시작하자, 시민사회․인간․자연에 초점을 맞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졌다. 이 3가지 관심은 르네상스 철학의 유력한 3갈래, 즉 정치이론․인문주의․자연철학으로 정확히 재현되었다.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민족적․국제적 문제가 새롭게 관심의 초점이 되자 유럽에서는 정치철학이 성장했다. 이탈리아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Il principe〉(1512~13)과 그밖의 저서에서 '국가이성'을 도덕성보다 높이 평가하는 듯한 시각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기법을 연구했다. 마키아벨리의 연구 동기는 이탈리아를 완전히 통일하려는 애국적 희망과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낮은 도덕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고대 로마의 덕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신념이었다.

프로렌스공화국 붕괴 이후 정계에서 물러난 다음 심오한 정치적 좌절로부터 정치 중심의 역사관을 갖게 되었다. 내적으로 도시국가의 내란과 외적으로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의 침략으로 곤경에 빠진 이탈리아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 ?군주론?에서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정치 구상. 이 세상은 운명의 여신의 지배를 받고 있음으로 혼란과 절망. 인간은 절반은 운명의 여신, 절반은 인간의지에 달려있다고 함. 인간의 자유의지와 힘의 필요. 운명의 신인 여성을 이기기 위한 단행, 난폭, 용감성, 힘의 강조.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인간은 르네상스적 만능인간도 아니고, 신을 순종하는 아퀴나스적 인간도 아닌 옛 도덕과 종교를 뛰어넘는 인간의 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세속적인 인간. 이 같은 인간 즉 탐욕, 위험, 변덕, 기만스러운 인간을 다스리는 정치는 사자와 여우의 자세로 군주의 역할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역사는 정치법칙을 알아내는 도구. 그는 역사분야를 문학의 범주에서 현실세계로, 정치를 도덕과 종교에서 국가이성과 인간의지로 끌어내렸다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 평가

 

마키아벨리는 선량하고 고결한 시민이자 좋은 아버지였다. 그는 1501년 후반 마리에타 코르시니와 결혼했고 5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가 남편으로서 충실했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가정에는 늘 다사로움이 넘쳐흘렀다. 자신의 영혼보다도 피렌체를 사랑했던 그는 너그럽고 정열적이며 기본적으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마키아벨리가 필요 이상으로 사악하게 비쳐진 이유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고자 했던 그의 의도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거침없는 경구들과 더불어 가톨릭 반동세력의 표적이 되었고 사탄의 화신 정도의 평판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부정하려는 경향으로부터 '마키아벨리즘'이라는 경멸적인 표현을 창출해냈다. 위대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던 그는 불행한 삶을 살았음으로 해서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키아벨리는 역사철학의 창시자로서 그때까지 누구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부터 역사순환론을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인간에 대한 인식을 정치학의 토대로 정립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마키아벨리는 위대한 사상가였고 따라서 위대한 작가일 수 있었다. 그의 시는 운문보다도 산문의 형식을 취한 것이 많지만 이탈리아 문학사상 비견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마키아벨리의 재능은 역사기술․정치논문․단편소설․희극 등 시도한 모든 장르로부터 빛을 발하고 있다.

 

 

3) 비코(Giambattista Vico : 1668-1744)의 나선사관

 

이탈리아의 문화사 철학자․법철학자. 나폴리에서 태어나 나폴리에서 죽음

 

오늘날 문화인류학이나 민속학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주저인 〈새로운 과학 Scienza nuova〉(1725)에서 역사와 더욱 체계적인 사회과학들을 수렴하여 이 둘을 상호 침투시켜 단일한 인간과학을 만들려 했다.

 

계몽시대 합리주의적 오류를 극복한 역사가. 자연과학과 관련된 분야만을 진정한 학문으로 받아들이던 계몽시대에 일대 혁신을 시도. 역사의 세계는 인간 스스로 만든 세계이므로 인간 자신이 추구할 수 있는 학문의 세계라고 주장. 역사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학문. 역사학에 대한 주장은 두 가지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1) 인간의 동질성 : 인간성의 불변. 인간의 성격은 시대와 관계없이 불변. 나면서부터 쌓아온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들을 그대로 보유하면서 동질적으로 살아가는 존재

2) 역사의 나선적 지속성 : 따라서 현재 자신의 정신 안에 과거를 제정립할 수 있는 역사학의 기능성이 있다.

* 역사과정의 패턴은 나선적 상승(spiral ascent)과정을 밟고 있다. 역사현상은 시대에 따라 기복현상을 이루지만 결코 반복하지는 않는다. 역사현상은 순류(corso)과정을 경과하다가 다음에는 역류(ricorso)의 과정을 겪는다. 그렇다고 발전과 퇴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역류에서 “이질적 요소들이 여과”되고 있는 것.

* 역사의 과정을 3단계 : ① 신의 시대(신정정치 : 감정의 지배) - ② 영웅의 시대(귀족정치: 문학정신이 지배) - ③ 인간의 시대(입헌군주제 혹은 공화정 : 이성이 지배) : 역사발전은 진보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계속적인 발전이 아니라 순환이라는데에 한계가 있다. 물론 다시 경과하는 시대가 과거와 같은 것은 절대 아니다. 진보의 무조건적 가치지향도 아니고 순환론적 모순도 아니다. 헤브라이즘의 직선적 패턴과 헬레니즘의 순환론을 극복한 인간주의적이며 역사주의적 사상가.

 

비코의 시각

 

비코는 자기 나름의 인간관과 우주관을 갖고 있었고, 데카르트의 연역적 방법이 유행하고 있을 때 감각이라는 근대적 문제, 곧 생활감각과 역사감각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때로는 이성의 심장 속에서 알아차릴 수 없게 커지는 작은 불씨와 같은 비합리적인 요소를 발견했다. 그의 철학은 인류의 열망, 강박관념과 꿈, 불확실한 성취, 좌절과 패배 등을 인정했다. 그는 인간 사회가 성장․쇠퇴의 단계들을 거친다고 묘사했다. 첫 단계는 '짐승 같은' 조건이고 여기서 '신들의 시대'가 떠오른다. 이 시대에는 초자연적인 것의 공포가 인간을 지배한다. 가문 지도자들이 내부의 이익과 외부의 공격을 막기 위해 동맹함으로써 '영웅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 단계에서 사회는 귀족과 평민으로 엄격하게 나뉜다. 뒤따르는 '인간의 시대'는 계급갈등 속에서 평민이 평등한 권리를 성취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이 단계는 타락과 해체의 문제, 원시적 미개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문제에 직면한다. 비코는 섭리가 역사의 진행을 바로잡아서 인류가 잇따른 대재앙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비코에 따르면 흔히 원시적 신분의 경직성을 포함하는 불평등한 사회계급은 기술진보가 아니라 불완전한 종교형태에서 비롯된다. 비코의 인류학 전체는 종교의 절대적 우위에 대한 확신을 기조로 삼고 있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철학자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사상에 시사받은 것이다. 비코는 민족의 탄생과 재탄생을 3가지 원리가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은 종교를 갖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 공식 결혼은 경축된다.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은 인간에 고유하고 보편적인 관습이다." 겸손과 경건은 기본적인 도덕 감정이고 가문을 세우는 두 기둥이다. 이것들이 무너지면 짐승 같은 상태로 급속히 떨어진다.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비코는 고대의 우상숭배 종교를 타파한 타락이 그가 참된 종교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교마저도 덮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으로부터 도피처인 수도원을 설립했고 감정과 도덕의 순수성을 지켜왔다.

 

비코의 2번째 기본 생각은 인간이 혼합된 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천사보다 짐승에 가깝다. 비코에게는 인간의 시대를 마감하는 미개의 2번째 단계는 반성의 지나침 또는 기술의 지배에서 온다. 이 단계는 역사의 새로운 시작이 임박함을 알린다. 이 단계의 근본적으로 비뚤어진 양상은 사실상 첫단계보다 더 위험하다. 첫단계는 지나치게 강하지만 고귀한 충동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조절하기만 하면 된다. 인간은 겁장이, 믿음이 없는 사람, 밀고자가 되고 '아첨과 위선적 감언이설' 뒤에 악한 의도를 숨기고 있다. 가족들은 이리저리 뻗은 도시들, '영혼의 사막'에서 떼지어 살고 있다. 이 타락한 사람들은 피난처와 보호물을 찾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최악의 노예상태로 뛰어든다. 돈이 유일한 가치가 된다. 인간의 시대에서 짐승 같은 상태로 나아가는 이와 같은 해체는 인류를 문명의 구속과 퇴보보다 훨씬 더 나쁜 운명에 빠뜨린다. 비코는 사람들이 물질주의 이데올로기의 숭배자나 양심을 모르는 과학의 하인이 될 경우 그들에게 덮칠 수 있는 해악을 경고하고 싶었다.

 

영향 : 괴퇴, 미슐레, 콩트에게 영향

 

 

 

4) 부르크할트의 문화사관 : 스위스의 역사가

 

Jakob Christoph Burckhardt라고도 씀. 1818. 5. 25 스위스 바젤~1897. 8. 8 바젤.

 

예술사와 문화사를 최초로 연구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가 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명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1860)은 문화사 연구방법의 귀감이 되었다.

역사가를 예술가로 생각(화가처럼)

 

화가가 어떤 목표를 정하여 그리려고 할 때 일정한 시간동안 명암이 일정하다고 가정하고 착수하는 것 같이 역사가도 역사현상을 다룰 때 일정기간동안 그 안의 내용들을 동일하게 가정하고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 그리하여 그는 14-16세기의 3세기간을 르네상스로 정하고 이시기의 사건들을 동질적인 것으로 파악함.

 

 

랑케가 종단면을 다루었다면 부르크할트는 횡단면을 다룸. 즉 역사현상을 반복하는 것, 불변적인 것, 유형적인 것으로 보고 세부적 부분적인 것보다는 전체적이며 유형적인 스타일이 나 패턴을 찾으려고 함. 시대마다 시대의 특유성을 인정해야 한다. 과거를 현재와 단순비교하는 것은 무리. 회화에서 각 시대마다 일정한 당르나 스타일이 있듯이 역사현상에도 각 시대를 지배하는 양식이나 유형이 있게 마련. 역사가의 역할은 그러한 것을 찾아내는 일. 그는 역사에서 종교나 국가, 문화 등과 같은 큰 줄거리를 중시함.

르네상스문화의 특성은 자연의 재발견과 인간의 재발견, 이로부터 자연과학과 휴머니즘이 발달하였다고 주장함.

 

 

저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부르크하르트의 책들은 그가 유럽의 사적과 귀중한 예술품에 정통하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최초의 중요한 저서는 마지막 저서와 마찬가지로 고대문명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입증해주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 Die Zeit Konstantins des Grossen〉(1853)에서 건전하지 못하고 부도덕하지만 종교활동과 문화활동으로 가득 찬 과도기의 로마 모습을 제시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융성이 필연적이었고 중세의 독창적인 문화가 발전하는 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그는 분명 고대세계의 쇠퇴하는 세력에 초점을 두었다. 〈명승지 안내 Der Cicerone〉(1855)는 이탈리아 예술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서로, 지리적으로 배열되어 여행 안내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뒤이어 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명〉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주요원천이 되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주제를 나타내는 적절한 소제목(세계와 인간의 발견, 개성의 발달, 예술 작품으로서의 국가, 근대적 유머 감각)을 이용하여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일상생활과 그 정치적 풍토 및 뛰어난 인물들의 사상을 분석했다. 그가 이용한 자료는 대개 연대기와 소설로 이미 출판되어 누구나 쉽게 입수할 수 있었지만, 역사가들은 그것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항상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그 자료에 접근했다. 부르크하르트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많은 차이점을 강조했지만, 중세의 업적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았다. 르네상스뿐 아니라 다른 어떤 시대도 그 이전 시대보다 전체적으로 진보했다고 기술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역사관이었다. 르네상스 성기에는 대체로 라파엘의 예술이 부각되지만, 부르크하르트는 '시계장치'와 같이 빈틈없이 움직이는 교묘하고도 무자비한 르네상스의 정치적 구조를 간과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는 개인과 소수의 창조적 자유를 고려하지 않는 정교한 대중통제 기구인 근대 국가의 시작을 감지했다.

 

부르크하르트에게 예술은 르네상스의 최대 성과였지만,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명〉에서는 이 중요한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 부르크하르트는 이 주제를 별개의 논문에서 다루고 싶어했지만, 이 소망은 건축만 다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Renaissance in Italien〉(1867)에서 일부만 이루어졌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연구가 결국 문화사를 다루는 방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면, 예술사가 지닌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그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뵐플린이었다. 역사시대와 마찬가지로 예술양식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탄생되었다. 예술양식은 한 시대의 전반적인 성격에서 나온 공통된 특징으로 결정되었고, 다시 그 시대의 문화를 규정하는 데 이바지했다. 부르크하르트는 시모음집 〈춤추는 인형의 노래 E Hampfeli Lieder〉(1853)를 출간하기도 했다. 독일어 방언으로 씌어진 이 시집은 분량은 많지 않지만 귀중한 가치가 있다.

 

 

 

5) 콩도르세(Condorcet : 1743-1794)의 진보주의사관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교육개혁 옹호자.

 

인류가 무한히 완전해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진보 이념을 내세운 주요혁명가 중 한 사람이다. 도피네의 한 마을인 콩도르세에서 가문의 칭호를 따온 카리타의 오랜 명문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랭스의 예수회 신학교와 파리의 콜레주 드 나바르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수학자로서 처음 재능을 보였다. 1769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 거기에서 수학 및 기타 주제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콩도르세는 당대의 뛰어난 거의 모든 사람의 친구였으며 당시 프랑스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하던 진보사상의 열렬한 선전가였다.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 장 르 롱 달랑베르와 함께 〈백과전서 Encyclopedie〉의 준비에 적극 참여했다. 1777년 과학 아카데미의 종신 서기관으로 선출되었고 1782년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으며 유럽의 다른 아카데미 회원을 지냈다. 1785년 확률이론의 역사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는 뛰어난 저작 〈다수 결정의 확률에 대한 분석적용에 관한 소론 Essai sur l'application de l'analyse a la probabilite des decisions rendues a la pluralite des voix〉을 발표했다. 이 책의 전면 개정 증보판은 1805년에 나왔다. 1786년 그는 당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소문난 소피 드 그루시(1764~1822)와 결혼했다. 콩도르세가 감찰원장으로 거주했던 조폐국 관저 내의 그녀의 살롱은 당시 꽤 유명했다. 콩도르세는 또한 〈튀르고 전기 Vie de M. Turgot〉(1786)․ 〈볼테르 전기 Vie de Voltaire〉(1789)를 출판했다. 친구들에 관한 이 전기는 프랑스 혁명 전 민중의 고통을 줄이는 방안을 논한 튀르고의 경제이론과 교회에 대한 볼테르의 반대에 콩도르세가 공감했음을 보여준다. 두 저작은 폭넓은 독자에게 열심히 읽혔으며, 순수하게 문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콩도르세의 저작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일 것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발발을 열렬히 환영했으며 매우 활발한 정치활동에 나섰다. 입헌의회의 파리 대표로 선출되었고 입헌의회의 서기관이 되었다. 교육제도의 개혁에 종사했고 1791년 유럽 열강에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1792년 국가교육체계의 틀을 제시했고 이것은 최종적으로 채택된 체계의 기초가 되었다. 콩도르세는 공화정을 선언한 최초의 한 사람이었고, 1792년 8월 국왕의 특권정지와 국민의회의 소집을 정당화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국민의회에서 그는 엔파를 대표했으며 헌법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혁명 기간 동안 비교적 온건한 정치집단인 지롱드당을 대표한 그의 새로운 헌법초안은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더 급진적인 정치집단인 자코뱅당에 의해 거부되었다. 루이 16세의 재판에서 그는 사형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독자적 태도는 로베스피에르의 급진적인 조치가 승리하고 있던 혁명의 와중에서는 위험한 것이었다. 지롱드 당원의 체포에 반대하다가 그는 법률의 보호를 박탈당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숨어살고 있는 동안 몇몇 친구들은 그의 마음을 집중할 수 있도록 아주 유명한 저작 〈인간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관 Esquisse d'un tableau historique des progres de l'esprit humain〉(1795)을 쓰도록 권유했다. 이 저작의 근본 이념은 인간이 궁극적인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신체 조직을 제외하고는 다른 동물보다 나은 점이 없던 가장 낮은 야만 상태에서 출발하여 계몽․덕․행복 등의 길로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인간이 이미 밟은 단계 또는 역사의 대시대는 9개로 나누어졌다. 10번째 단계가 미래 시대인데, 이 시대에 관한 부분이 콩도르세 논문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다. 그는 과거를 지배한 일반법칙을 바탕으로 미래를 일반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한 뒤 과거의 역사 전체가 보여준 다음과 같은 3가지 경향이 미래의 성격을 규정할 것이라고 논증했다. 첫째, 국가간의 불평등의 분쇄, 둘째, 계급간의 불평등의 타파, 셋째, 개인의 향상과 인간성 자체의 무한한 지적․도덕적․신체적 완성가능성이다. 그가 국가와 개인이 부단히 다가가고 있다고 주장한 평등이란 절대적 평등이 아니라 자유와 권리의 평등이다. 모든 것은 자유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만일 국가와 인간이 동등하게 자유롭고 평등을 지향한다면 국가와 인간은 평등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무한한 완성가능성을 주장하면서도 인간성의 자질과 환경의 성격이 진보를 제약한다는 점을 어디서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조건들이 무한한 진보와 양립할 수 있으며, 인간 정신은 지식이나 미덕, 또는 인간 생명의 연장을 이루어나가는 데 있어 어떤 한계도 설정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국민교육에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공공교육의 확실한 진보를 기대했다. 이 책은 모든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와 군주제에 대한 강한 혐오를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희망에 가득 찬 이 책은 글을 쓸 당시의 환경에서 비롯된 여러 사소한 실수를 포함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생각은 큰 가치가 있다. 콩도르세의 윤리적 입장은 동정심과 사교심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생각은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오귀스트 콩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지롱드 당원으로서 인권이 박탈되어 있는 동안 쓴 몇몇 저작은 친구들에 의해 출판되었으며, 다른 몇몇 저작은 사후에 간행되었다. 은신중에도 여전히 공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콩도르세는 숨어 있던 집이 감시당한다고 생각하고 피신하여 덤불과 돌산에서 3일 동안 몸을 숨긴 뒤 1794년 3월 27일 저녁에 클라마르 마을에 들어갔다. 여기서 이내 정체가 드러나 부르그라렌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3월 29일 아침 그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피로로 인해 죽었는지 독약에 의해 죽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완전한 계몽주의자로서 경제적 자유, 종교적 관용, 법률․교육의 개혁과 노예제 폐지를 옹호한 콩도르세는 이성의 왕국을 사회문제에도 확장하려 했다. 인간 행동을 과거처럼 도덕과학이나 물리과학에 의지하여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두 과학을 결합․변형한 사회학이라는 분과로 설명하려 했다.

 

이처럼 콩도르세(Marie J. Condorcet : 1743-1794 ) 프랑스혁명의 격변 속에서 인간의 낙관주의를 대변하는 저술(?인간정신의 진보론?)을 발표하여 진보주의사관의 기수가 됨. 수학에서 과학으로 관심이 바뀜. 자신의 주장을 통해, 인류가 한없이 완성되어간다, 인류의 진보는 반드시 성취된다 등의 주장. 인류의 정신이 역사에서 어떻게 진보되어지며 완성되어 가는가에 관심. 역사의 진보에서의 갈등은 합리적인 것과 불합리한 것의 갈등이지만 결국 합리적인 것이 승리, 인간정신의 진보로 끝난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믿음.

역사발전과정을 10단계 : 1-4단계는 원시시대에서 헬레니즘시대(인간정신의 점진적 발전), 5-6단계는 게르만민족의 이동에서 십자군전쟁( 인간정신이 퇴보한 시대), 7-8단계는 인쇄술의 발명시기(인간정신이 상당히 발전한 시기), 9단계는 데카르트 시대로부터 프랑스혁명시대(인간정신의 진보가 마무리되는 시기), 10단계에서는 인간정신이 마무리되고 난 후 예견. ** 인간의 완전성에 기초하여 이상사회의 성취를 꿈꾼 낙관적 역사철학이었던 것.

 

6) 콩트의 실증주의사관

 

實證主義(positivism)

 

프랑스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의 연구로 뚜렷한 모습을 갖춘 철학 이데올로기이자 철학운동.

기본 주장은, 첫째, 사실에 관한 모든 지식은 '실증적' 경험자료를 바탕으로, 둘째, 사실의 영역을 넘어서면 순수논리학과 순수수학의 영역으로 한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자에게는 관찰과 경험의 증언에 엄격히 따르는 것이 절대명령이다. 형이상학이란 실재의 본성에 관한 사변에 불과하며 이 사변을 지지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어떤 증거도 허용하지 않는다. 한편 윤리학에서 대부분의 실증주의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나 이와 비슷한 종류의 윤리 규범을 받아들인 공리주의자였다.

 

철학의 역사에는 실증주의를 미리 내다본 인물들이 있었다. 고대 철학자로는 BC 5세기의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와 AD 3세기말에 살았던 고전적 회의론자 섹스토스 엠피리코스, 중세 철학자로는 유명론자 오컴, 18세기에는 독일 사상가 게오르크 리히텐베르크 등이 있었다. 그러나 실증주의의 가장 가까운 뿌리는 이성의 계몽을 강조한 프랑스 계몽주의와 감각경험의 역할을 강조한 데이비드 흄, 조지 버클리의 영국 경험론이었다. 콩트는 드니 디드로, 장 달랑베르 등 계몽주의 백과전서파의 영향을 받았고, 사회사상면에서는 프랑스 사회주의의 창시자 클로드 앙리 생 시몽 백작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 콩트(Auguste Comte : 1798-1857) : 18세기 시민혁명의 혼란한 소요돌이 속에서 문명의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안 강구. 그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투시하고 이로부터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었다. 역사는 사회의 모든 다양한 개체들이 통일적인 이상사회를 향하여 발전하여 나아가는 한 과정이라 인식. 그는 역사의 다양성(diversity)보다는 그 통일성(unity)에 주의함.

1. 그의 저서 ?소품(opuscules)}에서 사회는 두 가지 종류로 대립, 발전. 하나는 소멸하는 사회와 신생하는 사회의 대립. 전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능하여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됨으로써 “지적(知的) 혁명”을 거치게 됨, 즉 신학적, 군사적인 사회로부터 산업적 과학적 사회로 轉移하게 됨.

2. ?실증철학론?에서 사회에서의 인간정신의 발전단계를 세 가지로 구분 설명.

1단계 - 13세기까지 신앙과 무사가 지배한 신학적 단계,

2단계 - 13세기에서 18세기까지 법과 철학이 지배한 형이상학적 단계

3단계 - 18세기 이후 실증주의가 지배한 실증적 단계 : 즉 산업과 과학의 발달로 실증적인 학문들인 수학, 천문학, 물리학 등이 지배하며 최종적으로는 사회학이 주종을 이루게 됨.

사회의 기능은 인간의 성품과 사회의 성격을 잘 조화시키는 것,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회는 정적인 면(statics)과 동적인 면(dynamics)을 가짐. 조화가 쉽지 않음. 조화의 비결은 바로 종교. 이제까지의 종교가 그 같은 역할을 하지 못함. 새로운 종교의 소망, 소위 인류교(가장 위대한 위인 13인의 이상을 담은 종교)

 

콩트의 실증주의에서 가장 기본적인 주장은 이른바 지성 발달의 3단계 법칙이다. 콩트에 따르면 인류의 전역사와 개인의 성장사에서 사유 형태의 진화는 매우 비슷하다. 첫째, 신학적 단계에서 자연현상은 초자연적 힘 또는 신적 힘의 산물로 설명된다 (→ 색인 : 자연철학). 콩트는 이 단계가 모든 것을 인간과 유비(類比)하는 데 기초한 의인화 단계라고 비판했다. 둘째, 형이상학적 단계는 탈의인화했을 뿐 여전히 신학적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자연현상은 비인간적 힘, 신비한 성질, 생명력, 엔텔레키아(entelechie) 등에 의해 일어난다고 설명된다. 콩트는 이 단계도 진정한 설명을 제공할 수 없으며 궁극적 실재, 제일원인, 절대적 출발점 등에 관한 물음에 대해 결코 대답할 수 없는 것으로 선언해버린다고 비판했다. 셋째, 과학적 단계 또는 '실증적' 단계는 실증적 사실만을 중요시한다 (→ 색인 : 과학철학). 과학과 지식의 과제는 자연과 사회의 사실․규칙 등을 연구하고 이 규칙을 기술적 법칙으로 정식화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자연현상은 일반법칙에 포섭됨으로써 설명된다. 콩트에 따르면 인류의 사유는 신학적 단계와 형이상학적 단계의 사이비과학적 설명을 포기하고 과학적 방법을 철저히 견지해야 완전히 성숙할 수 있다.

 

한편 콩트는 6개의 기초 순수과학을 피라미드 계층구조로 분류하여 뒷날 논리실증주의가 각 층의 과학을 그 아래층의 과학으로 '환원'할 길을 열었다. 콩트는 다른 어떤 과학도 전제하지 않는 수학을 가장 아래층에 놓고 그 위층들에는 각 층의 과학이 그 아래층의 과학에 의존․이용하도록 배치했다. 그리하여 이 계층구조 속에 수학․ 물리학․화학․ 생물학(생리학도 포함)․ 사회학 등을 차례로 놓았다. 이 과학체계에서는 심리학이 빠져 있는데, 콩트는 심리학이 한편으로는 생물학(특히 뇌신경생리학)의 한 분야,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학의 한 분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사회학의 '아버지'로서 사회과학도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관찰에서 시작해 일반법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콩트는 이와 같이 객관적 관찰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20세기 행동주의의 방법론에 매우 가까이 다가갔다. 19세기 영국의 철학자․논리학자․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콩트와 의견이 다소 다르지만 당대의 뛰어난 실증주의자였다. 〈논리학 체계 System of Logic〉(1843)에서 인식과 과학적 추론에 관해 철저한 경험론적 이론을 주장했으며, 수학과 논리학도 경험과학으로 보았다.

 

 

7) 헤겔의 변증법적 사관

 

* 헤겔(G.W. Hegel : 1770-1831) : "이성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그리스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의 사상에 기초한 형이상학적 역사철학을 전개함. 그러나 그의 공식은 자연의 질서에 보이는 보편적이며 불변적인 외적 인과율과 관련된 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이성의 합리성을 의미하였다. 그렇다고 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초자연적인 질서와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베를린 시기에 특히 미학․ 종교철학․역사철학에 관한 강의가 이루어졌다. 종교철학에 관한 강의는 종교에 그의 방법을 적용한 것이다. 헤겔은 종교를 일상의 세속적 정신과 양립할 수 있는 사소한 것으로 축소한 합리주의학파를 비판했다. 또 감정을 체계적 신학 위에 있는 종교의 지위로까지 끌어올린 슐라이어마허 학파도 비판했다. 헤겔은 중도적 방식으로 교조적 신조가 종교적 감정에 내포된 것이 합리적 발전임을 보여주려 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철학은 종교에 대한 해석자이자 더 우월한 분야가 되어야 했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인간 역사 전체가 정신적․도덕적 진보를 이루어가고 자기인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전제했다. 그는 역사가 신의 목적을 연출하는 것이며 인간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진보해왔다고 믿는다. 그 목적은 인간 자유의 점진적 실현이다. 그 첫 단계는 노예적인 자연의 삶에서 질서와 법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국가는 힘과 폭력에 의해 세워진다. 질서잡힌 생활의 이성적 성격을 받아들일 만큼 정신적으로 진보하기 전에는 법을 지키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많은 사람이 노예로 머무르는 반면 몇몇 사람이 법을 받아들이고 자유로워지는 단계가 있다. 근대 세계에서는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인간의 과제는 인간이 실제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역사철학의 과제는 역사의 사건 안에서 작용하는 理性을 발견하여 그것이 무엇을 성취하였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아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에 관한 것으로 자연의 물질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름.

세계를 주재하는 이성인 정신의 특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운동(self movement)인 자유(freedom)라는 것으로 여러 종류의 등급으로 구성. 역사에서 인간의 진보정신이 어떻게 실제 실현되어졌는가 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핌. 이것이 역사의 목표이며, 동시에 세계를 움직이는 동인(運動因)이다.

* 헤겔은 정신적인 것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은 “의지(will)의 수단을 통함. 세상은 각기 개인적 목적과 이기적 욕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마치 사람들의 행복과 국가들의 지혜, 덕목들이 희생되는 살육장을 방불. 인간의 열정과 욕구들이 작용하는 것은 바로 소위 ‘理性의 奸計’때문. 따라서 이 같은 혼란을 정돈하는 엄격한 규율을 행사하는 국가의 필요성.

* 세계사 발전의 네 가지 주요 단계와 각 단계별 세 가지 하급 단계 : 동에서 서로 움직임. 세게사는 중국인, 인도인, 페르시아인의 동양사회로부터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서양사회로 이어지고, 서유럽의 게르만인의 기독교 문화에서 절정을 이룸. 이들 사회의 자유도 동양에서 서양으로 가면서 점점 발전. 정신의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진전.

헤겔은 역사의 흐름을 正, 反, 合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으로 보고, 긴장과 이완의 연속과정을 이성의 메카니즘으로 관망. 그의 변증법적 역사해석에는 필연성이라는 논리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어 많은 사상가들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를 안겨준다.

 

8)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 칼 마르크스(Karl Marx : 1818-1883) : 저서 ? 공산당선언?,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등에서 사회적 계급투쟁과 경제적 결정론에 기초한 유물사관의 개진.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경제적 생산력으로 사회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 위에 법적, 정치적, 정신적인 상부구조를 이루게된다는 것. 역사는 사회적 계급투쟁에 의해 먼저 하부구조가 개혁되고, 이에 따라 상부구조가 변혁된다고 인식. 귀족계급과 노예계급, 봉건제후와 농노의 대립,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대립 항상 후자가 승리.

* 마르크스는 위의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이윤의 추구라는 것, 어떤 물품의 가치는 그 속의 평균 노동량에 비례한다는 것, 노동의 가치는 물품의 가치와 동일한 방법으로 측정된다는 것, 노동자가 임금의 형태로 받는 가치는 생산에 필요한 소요시간보다 적다는 것, 그리고 이 차이로 나타나는 착취의 비율은 잉여가치와 임금 사이의 관계로 정해진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의 다양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사회의 중산층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비현실적이며 비역사적인 도식적 이상에 불과하다고 비판받음. 자본주의 모순이 극도에 달했던 1870-90년대를 대변.

 

 

평가

 

런던의 하이게이트 프라이호프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인류역사 발전의 법칙'과 '자본주의 사회운동의 법칙'을 발견해냈다고 선언했다. "무엇보다 카를 마르크스는 위대한 혁명가였다. 증오의 대상이 되어 극단적인 비방과 모략에 시달렸던 그는 이제 수백만 노동자들의 사랑과 존경, 애도 속에서 눈을 감는다."

 

마르크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반항정신과 엄격한 지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지적으로 교만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1846년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 그를 만나 유심히 관찰했던 러시아 작가 파벨 안넨코프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의 말투는 항상 명령조에 가까웠고 반론을 용인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마치 환상 속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민주적 독재자의 화신과도 같았다." 마르크스는 많은 청중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고 파벌논쟁을 벌이는 분위기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예니 역시 그가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공식회의 석상에서도 말을 아꼈다고 밝혔다. 그는 경쟁 상대인 다른 사회주의 집단들이 논쟁을 벌이는 제1인터내셔널 대회를 멀리했으며, 그보다는 제1인터내셔널 총회나 신문사 간부모임과 같은 소모임 분위기를 선호했다. 성격상 이런 소모임 동료들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그였다. 한편 그는 대등한 위치에서 경제학 및 사회학의 여러 문제들을 논의할 수 있는 명망 있는 학자들과의 회합을 기피했는데, 이는 그의 식견이 짧아서가 아니라 영국의 외무장관 파머스턴 경이 러시아 정부의 첩자라는 식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르주아 사회가 자신을 결코 '돈 만드는 기계'로 전락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도 엥겔스의 증여와 친척들의 유산에 생계를 의존했다.

 

마르크스는 예수가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를 찬양한다고 말할 정도로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생활이나 건강은 돌보지 않았다. 그는 언어 습득조차 삶의 투쟁에서 새로운 무기를 획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투쟁'을 삶과 존재의 법칙으로 간주했다. 그는 개인적인 습성이나 생활방식에서는 영원한 학생이었는데, 두 친구와 함께 거리의 가로등을 깨부수고 경찰이 몰려오면 도망치는 어리광스러운 장난을 치기도 했다. 또한 소설광으로서 특히 월터 스콧 경과 발자크에 탐닉했으며 그의 가족 모두 셰익스피어의 예찬론자들이었다. 그와 예니는 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세 딸만 남고 나머지는 유년기에 잃고 말았다. 그가 총애한 딸 엘레아노르는 신경질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에다 여배우가 되려고 고집해 아버지를 근심시켰다. 또한 그와 하녀 헬레네 데무트 사이에서 프리드리히라는 사생아가 태어나 그의 가정생활을 어둡게 만들었다. 엥겔스는 세상을 떠날 때프리드리히의 아버지가 마르크스임을 엘레아노르에게 일러 주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쳐 왔다. 제1인터내셔널 결의서에 '노동계급의 성서'라고 공식 기술된 바 있는 그의 저작 〈자본론〉은 1867년 베를린에서 출판되었고 1873년 재판(再版)되었다. 그 중 제1권만이 그의 생존시에 완성되었다. 제2권과 제3권은 엥겔스가 편집해 1885년과 1894년 출간했으며, 처음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1905~10년 〈잉여가치학설사〉라는 독립된 형태로 카를 카우츠키에 의해 출간되었다. 마르크스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고전 경제학을 부르주아 사회는 모든 사회적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발전의 경로를 거쳐야 한다는 유물변증법과 결합시켰다 (→ 색인 : 리카도).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준비하면서 수행했던 작업이 얼마나 방대했는가를 알려면 먼저 많은 양의 유고(遺稿)와 수고(手稿), 방주(傍註), 서신교환 등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그의 분석대상은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본질, 자본의 유통과정, 자본의 총과정,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이데올로기 비판, 인간상, 잉여가치론과 그 역사를 망라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학․기술․공학적 문제들을 연구하고 수학 및 자연과학을 연구했으며, 역사적 과정과 농업경제를 분석하는가 하면 헤겔의 〈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에 특별히 주목하기도 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성에 관한 연구를 자연사적(自然史的) 과정이라는 성격을 갖는 사회구성체 발전이론으로 총괄했으며 경제적 토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생산력, 생산관계 등 사회구성체의 생산관계를 밝히고 사회구성체의 여러 요소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구했다.

 

〈자본론〉은 이윤율의 감소와 같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들이 현저해짐에 따라 자본주의는 사라지고 더 나은 사회로의 이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기억할 만한 〈자본론〉의 내용 가운데 영국 의회의 청서(靑書)에서 발췌한 것으로 노동계급의 비참한 생활을 서술한 페이지들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비참함이 증가되고 동시에 자본의 독점이 생산에 대하여 착취로 작용하는 가운데 마침내 부르주아 사유재산의 조종(弔鐘)이 울리게 되고 착취자가 피착취자로 전락하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계급과 계급투쟁의 존재를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자기보다 훨씬 이전에 이 문제들을 다루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생산발전의 각 단계는 이에 상응하는 계급구조와 연관이 있다는 것과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낳아 무계급 사회의 도래가 실현될 것임을 주장했다. 그는 19세기 초에 통용되던 상이한 사회주의 이론들을 흡수해 하나의 이론으로 통합했고, 이는 그의 사후 50년 동안 지배적인 사회주의 이론이 되었다. 그는 역사발전에 있어서 경제구조의 영향을 강조했으며, 그 중요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끊임없이 완성되어가는 혁명과정 속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한 세대에 걸쳐 유능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지도자와 이론가들을 길러냈다.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라 파르그, 메링, 카우츠키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들의 처지와 욕구를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는 데 협력하는 것, 이것이 그의 진정한 필생의 직무였다. 그의 철학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항상 사회를 인식하고 변혁하는 무기였다. 그것은 경제생활과 정치적 계급투쟁, 과학과 기술의 혁명, 그리고 인민의 문화적․정치적 발전 등과의 결합에서 얻어진 것으로, 거의 150년에 걸친 역사 속에서 생명력을 입증했다. 그의 철학은 혁명적 노동운동과 현실 사회주의의 건설로 이어졌으며,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전세계 공산당과 노동자 정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저작들에서 강조한 것은 경제학적 문제들이었으나 그의 철학은 경제학 못지 않게 사회학과 역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사회학 이론에 있어 마르크스의 가장 지대한 공헌은 모든 사회체계가 내재적 모순(불안정)을 발생시키며 이 모순은 새로운 사회의 등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그의 일반적 분석방식 즉 '변증법적 분석'에 있다. 〈자본론〉의 경제학적 추론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신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는 그의 변증법적 분석을 따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분석 방식은 토머스 맬서스, 허버트 스펜서, 빌프레도 파레토 같은 학자들의 분석 방식과 마찬가지로 사회과학의 유산으로 남은 유력한 사회분석 이론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그의 이론체계를 거부해온 학자들로는 경험주의 철학 계통의 버트런드 러셀, 존 듀이, 그리고 카를 포퍼가 있다.→ 공산주의

 

 

 

9) 니버의 기독교적 종교사관

 

*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hr : 1892-1971) : 그의 대표적 ?인간의 성격과 운명?(1941-43)에서 소위 신정통적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입각한 종교사관을 발표.

1. 서양사상을 지배하는 그리스적 고전사상에 관하여 부정적 입장,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철학자들을 대표하는 헬레니즘 사상은 시간적 차원의 인간자유의 새로움보다는 자연현상의 순응에서 역사를 이해하려는 것으로 무시간적이며 합리적인 방법으로 역사과정을 바라보려 햇다고 인식. 따라서 특정사황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창의적으로 해결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오히려 방해하였다는 것. 역사를 무역사적, 지성적으로만 바라봄으로써 역사를 전체적으로 의미있게 해석할 수 없었다는 것.

1. 반면 역사를 직선적인 개별상황에서 바라보게 한 히브리 선지자들의 사상에 관하여 매우 긍정적 입장.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서양인들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잘못 이해하여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 그들은 역사에서의 자유의범위와 자유와 도덕의 관계를 지나치게 과신함으로써 오히려 사회문제들만을 뒤집어 씀. 역사에서 가정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들과 충동들을 어떻게 자제하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 인간이 자유를 지나치게 행사했다.

인간은 역사창조의 입장에서 역사의 창조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해야 함. 성경에 입각한 신의 주권을 역사의 動因으로 보려는 역사관. 오직 성경에 의해 인간과 사회를 해석하려는 것은 비판받고 있다.

 

10) 토인비의 문명사관

 

* 아놀드 토인비(Arnold Loseph Toynbee : 1889-1975) :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사관 구상. 1차세계대전 당시 투키디데스를 연구하면서 당면하고 있던 문명의 위기를 고심. 투키디데스의 위기(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위기감)와 공감.

 

“알기 위한 역사(랑케사학)에서 살기 위한 역사(반랑케사학)”를 지향함.

 

1. 모든 사회의 문명들은 동시대성을 지님.

 

2. 문명마다 직선적인 아닌 일정한 코스를 순환

 

28개 문명 설정. 성숙한 문명 21개. 창조적인 1단계(도전과 응전) 쇠퇴적인 2단계. 문명은 발생과 성장, 쇠퇴, 해체의 주기. 문명말기의 ‘고난의 시기’. 스펭글러의 必滅에 비해 낙관론.

1889. 4. 14 영국 런던~1975. 10. 22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요크. 영국의 역사가.

역사철학을 확립한 저서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12권, 1934~61)는 문명의 순환적 발전과 쇠퇴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 것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토인비는 역사이래 존재한 사회(문명)들로 서유럽사회, 그리스 정교사회, 이슬람사회, 힌두사회, 극동사회(중국, 일본, 한국), 슈메르사회, 이집트사회, 신세계사회(남미: 안데스, 유카탄, 멕시코, 마야 등)를 들고. 현재 소멸된 사회를 찾아냄. 이리하여 도합 28개 문명 찾아냄. 유산된 문명2개, 정지된 문명 5개를 제외한 21개의 문명 설명.

모든 문명의 서유럽문명이 유일하다는 설을 비판하고, 모든 문명이 이집트에서 기원한다는 설도 비판.

문명의 발생 : 선행문명 혹은 원시사회에서 직접. 인종적 자질, 유리한 지리적 환경, 앞의 두가지의 상호작용.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인간의 무한한 힘을 일으켜주는 역경이라고 주장. 즉 도전과 응전. 인간의 창의적 행동들은 역경을 당하여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전례없는 노력을 하게 됨. 제1세대 문명의 특징. 오히려 좋은 환경에서라기 보다는 어려운 환경에서 발생.

 

1922년 그는 〈역사의 연구〉를 쓰기 시작했다. 이 저서는 그의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질, 즉 그의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 그 형태에 대한 시각, 엄청난 학식, 예리한 관찰 등을 특색 있게 보여주었다. 〈역사의 연구〉에서 토인비는 인간역사 과정에서 26개 문명의 등장과 쇠퇴를 검토하고 문명은 엘리트 지도자로 이루어진 창조적 소수의 지도 아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등장한다고 결론지었다. 문명은 그 지도자들이 창조적으로 대응하기를 멈추었을 때 쇠퇴하며 민족주의, 군국주의, 전제적(專制的) 소수의 독재정치 등의 죄악에 의해 몰락한다. 슈펭글러가 〈서구의 몰락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에서 분석했던 것과는 달리 토인비는 문명이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문명은 연속되는 도전에 계속 대응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와도 달리 역사가 경제력이 아니라 정신적인 힘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역사의 연구〉를 쓰는 동안에도 토인비는 수많은 저서를 썼고 왕립국제관계연구소의 해외연구 책임자(1939~43)로, 외무부 연구담당 부서의 책임자(1943~46)로 일했으며 은퇴할 때까지 영국경제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많은 책을 저술했던 그는 1950, 1960년대에 세계종교․서구문명․고전역사․세계여행 등에 관한 책들도 계속 출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토인비는 그가 중점을 두는 역사의 주인공을 문명에서 고등종교의 탁월성으로 바꾸었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시련의 문명 Civilization on Trial〉(1948)․〈동방에서 서방으로 : 세계여행 East to West : A Journey Round the World〉(1958)․〈헬레니즘 : 문명의 역사 Hellenism : The History of a Civilization〉(1959) 등이 있다.

토인비는 다른 역사가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이 비판은 그가 실제자료와 필적하는 가치로 신화와 은유를 사용한 것과 문명의 등장과 몰락에서 그 재생력으로 종교에 지나치게 의존한 점에 집중되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토인비가 도달한 결론이 역사가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도덕가의 것이라고 불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는 현대 역사연구의 전문화 경향에 대한 고무적인 해답으로 높이 평가되어 왔다.

 

   

역사란 무엇인가
 글쓴이 : 이윤화
조회 : 3,522  
   03역사1-2.hwp (0byte) [1405] DATE : 0000-00-00 00:00:00
역사란 무엇인가 제1-2주 강의 참고자료입니다. 교재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강의 내용이 많아 이해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정리하였으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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