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칼럼

To have, To be -Erich Fromm

by 이덕휴-dhleepaul 2022. 6. 18.

소유와 존재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5-46).

소유의 포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누가복음은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5: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관원이었던 레위 역시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2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좇기 위해 좋은 수입원을 포기했습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은 주 수입원을 내려놓았습니다.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지 물어봤을 때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은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관원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대답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8:22)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23)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18:24-25)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확언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신과 세베대의 아들들이 예수님을 따르려 그들의 소유를 버린 일을 상기시켰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생에서와 다음 생에서의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18:28-30)

14장의 큰 잔치의 비유에서도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잔치에 처음 초대된 사람들은 참석을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5절 이하에서 당신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들에게 고개를 돌려 제자에게 요구되는 바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가까운 관계를 모두 뒤로 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14:25-27)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부름에 답하기 전에 손익을 따져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28-32)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는 단호하고도 선명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갈등과 고민이 있습니다. 돈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현대 사회에서 소유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존재 자체를 포기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우리는 기동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돈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출발점이요 토대라 할 수 있는 가족 관계마저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주님은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시면서 왜 주님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우리의 고민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주님은 왜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인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소유와 존재

우리는 모두 몸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몸은 곧 나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몸을 소유하며 동시에 곧 몸인 존재입니다. 몸은 내가 누구인지를 표현합니다. 또 이 몸이 바로 나의 정체성입니다. 나는 살아 숨 쉬는 존재임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나 자신의 소유자입니다. 인간은 소유하는 존재라는,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실존을 깨닫지 않고는 소유에 대한 논의가 불가능합니다.

물질의 소유 역시 이러한 인간 몸의 핵심적 측면인 존재와 소유의 연속선상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소유를 몸의 확장으로 봅니다. 옷이 그 사람이고, 스타일이 그 사람이며, 무엇을 먹는가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사용하는 소유가 육체를 확장하며 자아를 세계 안과 타인의 삶 안으로 확장시킵니다. 입고, 먹고, 거주하고, 운전하고, 또 사용하는 모든 것이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인지를 나타내줍니다. 우리는 몸을 소유하며 동시에 몸이기 때문에 소유는 자신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내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 이것이 곧 나라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소유는 우리의 신체를 세상에서 소유로 확장할 뿐 아니라 우리 신체를 우리 자신으로 확장시킵니다. 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존재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물질을 사용하고, 소유하고, 거머쥐고 사용하는 방식은 자아, 주변 세계, 타인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자세와 반응을 상징합니다. 여기에도 상호성이 있기 때문에 재물의 사용은 세계, 타인, 하나님에 대한 반응을 나타낼 뿐 아니라 그 반응 자체에 영향을 끼칩니다. 몸으로서 우리 존재와 몸을 소유하는 것의 의미가 모호한 것처럼 물질적 소유를 사용할 때도 불확실함은 여전합니다. 소유에 관한 진짜 어려움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입니다. 소유에 관한 진짜 신비는 그것들이 인간으로서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한 인식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소유에 관한 진짜 죄악은 존재와 소유에 관한 의도적인 혼동입니다.

우상숭배

존재와 소유에 관한 의도적인 혼동은 우상숭배로 드러납니다. 우상숭배는 절대적이거나 궁극적이지 않은 어떤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행위입니다. 어떤 대상을 예배할 때 우리는 그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섬기는 것입니다. 기능적으로 볼 때 신은 자유를 드려 섬기는 대상이 됩니다. 어느 것을 궁극적이라 선포하든 간에 나의 신은 내 관심을 고정하고, 내 행동의 중심이 되고, 내 마음을 사로잡고, 나를 움직이는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행동하는 목적, 그것이 바로 신입니다. 내 삶이 만들어지는 모든 원칙 주변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보면 나의 신, 내가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우상숭배는 결국 소유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이건, 물질이건, 권세 혹은 특권이건 모두 창조된 것들인데, 이것들이 궁극적인 양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이를 중심으로 삶을 형성하는 것은 소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내 가치의 기준이며, 내 정체성과 존재를 세워줍니다. 우상숭배자는 그 주머니에 자기의 신을 넣고 다니길 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숭배하는 권력을 예배함으로써 그것을 통제하려 합니다. 우상숭배자는 신을 소유하려 합니다. 참 하나님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우상숭배자는 말을 잘 듣는 어떤 대상을 만들어 그것을 조정하고 통제하려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권세라고 부르는 대상을 소유하며 우리 자신을 소유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라는 골로새서 3장 5절의 말씀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참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는 에베소서 5장 5절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모든 우상숭배는 탐욕의 한 형태입니다. 생명과 가치를 창조자께서 주시는 선물이라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피조세계에서 얻으려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께서 왕이신 나라이며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동시에 그분의 공급하심과 돌보심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는 오직 주님만을 왕으로 모시는 자만이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과 함께 그분이 허락하시는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사고, 진주를 사야 한다는 비유의 핵심은 소유의 포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자녀 혹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는 앞에서 다른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짝을 이룹니다. 두 비유 사이에는 일맥상통하는 점도 있지만 차이점들도 있습니다. 천국은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누구나 이 천국을 소유해야 한다는 교훈이 공통점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화의 비유에서는 보화가 천국을 설명하는 개념인데 반해,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에서는 천국이 진주가 아니라 진주를 찾는 상인에 비유됩니다. 또 일꾼의 경우는 우연히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는데 비해 상인의 경우는 좋은 진주를 열심히 찾던 중 최상품의 진주를 발견한다는 것도 두 비유의 차이점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는 천국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수동적이었는데 반해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에서는 능동적 태도와 열심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시작하신 것이지만 순전히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반응, 즉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응답을 요구합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수동적 태도로 하나님의 행동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적극적 동반자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발적인 동의로부터 시작되는 참여를 기대하십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는 일꾼이 일단 보화를 발견한 다음에 그 보화를 소유하고자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이 점은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인도 진주를 사려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팝니다. 그러나 보화와 진주를 발견하기 전의 행동은 달랐습니다. 일꾼은 우연히 보화를 발견하지만, 상인은 진주를 찾다가 진주를 발견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 보면 천국은 인간 편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혼자 스스로 시작하신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인정하는 정도로 밖에는 달리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길이 없습니다. 진주를 찾는 상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는 애써 진주를 찾습니다. 그러다가 값진 진주를 발견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찾아 헤매는 존재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은 기도하고 기다리다가 발견하는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찾아 나서는 적극적 응답자로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점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시작된 천국에도 이 양면성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호보완적인 비유들입니다.

천국은 가장 값진 것입니다. 천국을 위해서는 어떠한 값을 치르더라도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바쳐도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절실하고 귀중합니다. 천국은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유 전부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천국을 진주를 찾는 상인에게 비유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방향을 달리하여 이 비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천국은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온 힘을 다해 찾고 두드리고 구할 것을 요청합니다. 천국을 향한 인간의 적극적 열망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이 이 비유에서는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크게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합니다. 왕, 백성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한 왕의 일이 그것입니다. 씨와 관련된 비유들은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그리며 왕의 출현, 활동, 그 결과를 묘사합니다. 그런데 씨와 관련된 비유들을 해석하며 예수님의 활동만이 아니라 그 대상, 즉 백성들을 필수적 요소로 등장시켰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즉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 개념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로 파악한 것입니다.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직접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는 비유입니다. 몸소 하나님 나라이신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들 역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처럼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아 헤매다가 긴 여정 끝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도 합니다. 탐구의 길은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고뇌에 찬 영적 방황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신가? 천국은 존재하는가? 어떻게 우리의 영혼이 평온한 쉼을 얻을 수 있는가? 죽음 이후의 삶은 과연 있는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마치 영생을 갈구했던 부자 청년처럼 하나님을 향한 오랜 방황 끝에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부자 청년에게도 가장 귀한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그를 부르셨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소유에 얽매여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보다 소유가 더 귀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위해 결단하기를 촉구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쌍둥이 비유란 별명을 얻은 두 비유, 즉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잔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를 통해서 비록 당신 자신은 초라한 나그네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바른 길에 들어섰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으며 그들의 전 생애를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장 값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슷한 말씀을 직설법으로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2-39).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님을 따르는 것,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하나님 나라이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열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 안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단순히 인간적인 관계나 물질의 소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어리석은 마음은 늘 거치적거리는 방해물입니다. 아빠가 사다 주신 사탕 한 알과 아빠를 비교하고 쉽게 사탕에 집착하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소유와 비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에 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은 잊고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보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은 안간 제물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선물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지를 시험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예수님을 저주하는 것도 인간의 마음입니다. 교만도 마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모든 악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늘까지 높아지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우리를 지옥으로 몰고 가면서도 잘하고 있다고 우리를 착각하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저울질하게 하는 것도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장 값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이기심, 자만심, 자존심, 심지어 자유와 욕망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해야 한다고 충고하십니다.

가난의 신비

소유의 존재이며 소유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에게 소유를 포기하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유의 포기야말로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비결이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은 성경이 처음부터 말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소유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인간은 소유 자체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소유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가능한 많이 소유함으로써 존재의 안전을 꾀하고자 합니다. 소유가 많아지면 삶이 풍족해지고 소유가 많아지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소유가 많아지면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더 귀중한 것들을 잃게 되어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또 인식한다고 해도 소유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합니다. 소유의 한계를 소유 안에서는 결코 인식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통찰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우리는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합니다. 소유에 집착할 때 모든 소유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며 소유를 늘려감으로써 안전을 도모하는 모든 시도들이 웅덩이를 파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판 웅덩이가 터진 웅덩이라는 것은 더더욱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가난 그 자체이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그곳에서, 더 이상 가난해질 수 없는 그 자리에서 그분은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셨고, 그것을 목격한 그분의 제자들은 기꺼이 그분처럼 자신을 비우는 사람들이 되어 살아갔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던져진 그들은 그러나 가난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그분으로부터 보살핌과 공급을 받아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고후 4:8) 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기꺼이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고, 왕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의 공급하시는 능력과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가난해지는 것은 자살 행위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은 그 길만이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 길로 들어서라고, 그 길만이 영생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의 굴레에 얽매여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 살 길을 찾아 세상으로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진주를 찾는 상인처럼 가장 좋은 진주를 발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그 일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소유는 여전히 무한한 힘을 가지고 우리의 눈을 가릴 것입니다. 더 많은 소유를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전히 소유에 대한 갈증이 남아 있겠지만 우리는 생수를 공급받게 될 것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가난해졌기에 우리가 판 웅덩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삶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는 생생한 증거라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 허락없이 게재하였다오니 걍 읽기만 하라.

 

* 더 깊은 이해를 위하여 -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mock&logNo=90023186421

 

'신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라틴어: Confessio Augustana,  (0) 2022.07.25
구원관 -신구교 비교  (0) 2022.07.12
신성인가? 인간적인가?  (0) 2022.06.10
Joachim Kahl  (0) 2022.06.09
Deus sive Natura - Spinoza  (0) 2022.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