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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지기칼럼

Anselmus의 신학사상 소고

by 이덕휴-dhleepaul 2018. 5. 20.

Anselmus의 신학사상 소고(1)- 이해를 위한 신앙 dhleepaul 조회 : 720 추천 : 2%

-안셀무스(1033-1109)의 신앙과 신학-

그에 있어서 신학은 "이해를 위한 신앙"(CREDO UT INTELLIGAM)이다. 즉, 신앙은 물음을 갖게하고 질문을 일으키게 하는 신앙이다. 기독교신앙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를 믿고 준종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학은 질문하는 신앙이며, 적어도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현재의 대답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이하, 다니엘 미굴리오, 조직신학입문 참조).

기독교신앙은 세상의 지친 영혼들을 위한 진정제가 아니며, 사람의 깊은 문제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해답을 주는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다양하게 질문들을 촉진시키며, 물음을 갖게 하고, 현재의 사물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성향과 싸우며,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재고되지 않는 가정들을 계속적으로 묻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무관심한 것, 혹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 혹은 진리를 완전히 소유했다고 하는 교만한 주장들과 함께 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참신앙과 신앙주의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주의는 우리가 질문하지 않고 단순하게 믿어야만 구원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만, 신앙은 탐구와 물음을 계속하는 것이다.

신학은 지금 완전히 소유하지 못했지만 조금인마 깨닫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질문하고 추구하는 기독교 신아의 역동성으로부터 성장한다. 이러한 이해를 위한 신앙의 물음은 다음 두 가지를 근거로 한다.
첫째,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대상과 관련이 있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요,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의 신비로 남아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은 또한 신앙의 주제이기도 하다. 신앙은 살아계신 한나님과의 관계이다. 따라서 신앙은 신비 그 자체이다.
다음으로 이해를 위한 신앙의 근거는 신앙의 상황이다. 신앙인들은 하나의 꿈에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독특한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하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다. 신앙인들은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신앙과의 불일치를 날마다 경험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현존보다 부재를 경험한다. 그들은 성령의 힘을 믿지만 교회돠 자신들의 무능을 잘 알고 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특별한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정작 무엇인지 잘 모른다.

기독교의 신앙은 질문하는 물음이며 이해를 추구한다. 한마디로 기독교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데카르트처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고, "하나님은 존재한다. 고로 우리도 존재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기독교인이 신앙의 순례자로 남아 있는 한, 그들은 언제나 대답을 발견하는 것만은 아닌, 어려운 물음을 계속 제기해야 한다. 신앙인들은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기 보다는 일종의 새로운 물음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신앙이 더 이상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운 질문을 하지 못하게 될 때, 신앙은 비인간화되며 위험스럽다.

물음을 가지지 않는 신앙은 이데올로기, 미신, 열광주의, 자기 추구, 우상숭배로 쉽게 빠져들게 된다. 신앙은 열정적이고 분별력 있게 이해를 추구해야 하면, 그렇지 않은 때는 신앙은 약해지고 결국에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안젤무스에 있어서의 신앙이란, "이해를 위해서 믿는 것이지, 그 반대로 믿지 위해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한 개인의 특수한 행위로서의 신념(belief)이 아니고, 살아있는 전통에 참여하는것이다. 그래서 이 전통은 사람이 살고 있는 영적 실체이며, 이 전통이야말로 신학의 터전이다. 신학은 이 터전에 관한 해석이며, 여기에 바탕하여 신학이 세워진다.

결국 신앙은 마음으로 깨달을 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기뻐하고, 실천할 수 잇는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사려깊은 신앙으로서의 신학은 하나님과 이웃에 봉사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목회와 신학 칼럼니스트: 이덕휴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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