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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입 - 기독교의 공공성

by 이덕휴-dhleepaul 2018. 5. 23.


감정이입 - 기독교의 공공성

 

자율성과 공공성의 문제는 기독교학교가 풀어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지금까지 기독교학교에 대한 논의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현실로 인하여 주로 자율성의 주제에 초점을 많이 맞추어왔다. 정부 주도의 교육정책으로 인하여 기독교학교가 본래의 설립목적을 제대로 실현해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학교가 동시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내용은 바로 공공성에 대한 기여의 문제이다. 기독교학교가 자율성의 문제에만 매몰된다면 사실상 기독교학교의 원래 설립정신을 살려나가는 데 있어서 절반만을 강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독교학교들의 설립이념과 목적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면 예외 없이 그 속에 자율성과 더불어 공공성의 차원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공공성의 문제는 기독교학교의 설립이념과 목적을 온전하게 실현하기 위한 또 다른 반쪽이다. 이제 양자의 관계를 서로 대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켜주고 상승시켜주는 관계로 바라보면서 후자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학교의 공공성을 강화해 나가는 문제는 현재 한국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대사회적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교회와 가정이 공적신앙을 양육해 나가는 중요한 현장이기는 하지만 기독교학교가 여기에 연계되지 않으면 그 효과는 반감될 것이다. 기독교학교의 설립목적을 온전히 실현해 나가고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개혁을 위하여 기독교학교의 공공성 실현이 매우 중요한 과제임을 다시 깨닫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와 실천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본 연구에서는 오늘의 상황에서 기독교학교가 공공성을 추구하고 공적 책임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이를 위한 신학적 기초를 제안한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공공성이라는 개념은 기술적(descriptive) 차원과 규범적 차원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공공성이 무엇이며 어떠한 공공성이 추구되어야 하는가를 모두 다룬다. 이를 위하여 먼저 학교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를 공공성의 개념, 학교의 공공성, 사립학교로서 기독교학교의 공공성 등으로 나누어서 살펴본다. 다음으로 성서, 교회사, 신학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공공성의 유형을 1) 정의롭고 평등한 공동 삶의 형성 차원, 2) 현실개혁적 차원, 3) 변증적이며 대화적 차원 등으로 분류하여 고찰해본다. 이어서 기독교 교육신학적 차원에서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교육학자 또는 종교교육학자들의 공공성 이해와 그 신학적 기초를 논의한 후에, 오늘의 상황에서 기독교학교의 공적 책임수행과 관련된 주요한 주제들과 이를 위한 신학적 기초를 공공신학과의 대화를 통하여 제안한다.

                                                                                                                                                              
1949년 9월 밥 피어스(Bob Pierce, 1914~1978) 목사는 김치선 목사가 시무하는 남대문 교회에 초청을 받아 말씀 사경회를 가졌다. 사람들은 구름 떼같이 모여들었다. 독립한 지 일 년 밖에 안되어 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은 복음이 필요했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은 통곡하며 기도하였다. 그들의 간절한 간구에 교회당은 들썩거렸다. 비록 초라하고 보잘것없지만, 제대로 씻지도 못하여 냄새가 낫지만, 주를 사모하는 그 뜨거움에 밥 피어스 목사는 감동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는 내 생전에 사도시대를 눈으로 목격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역력히 보았습니다. 내 눈으로 한국에서 보았습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대한민국 백성을 잊을 수 없었다. 이듬해 그는 다시 한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서울, 부산, 대구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대대적인 전도 집회를 가졌다.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다.

밥 피어스 목사가 한국을 떠난 지 두어 달 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밥 피어스 목사는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전도해서 예수 믿기로 한 한국의 많은 젊은이가 죽게 되었구나. 한국에 다시 가야겠다.' 그러나 민간인은 전쟁터에 갈 수 없었다. 그는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잡지의 종군기자를 자원해서 1950년 10월 한국을 찾아왔다. 전쟁의 상처는 깊었다. 길거리에는 전쟁고아가 넘쳐났고, 각종 질병이 만연하였다. 가슴이 찢어졌다. 그는 미국 교회에 도움을 호소하였다. 그는 전쟁미망인을 위한 모자원, 고아원, 나환자 정착촌, 농아, 맹인 지원 사업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해서 월드 비전(World Vision)이 만들어졌다.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는 감정이입이란 문제 속으로 들어가 그 문제의 일부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감정이입은 많은 분야에 꼭 필요한 감정 기제다. 연극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는 ‘배우는 스스로 극 중 인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인물이 행동하는 것처럼 연기하게 된다.’고 하였다. 가끔 감정이입을 하지 못해서 미숙한 연기를 하는 배우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는 이런 말을 하였다.
“작가는 묘사하고 있는 인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감각으로 세상을 느껴야 한다.”
펜실베니아 주립 의대 교수인 바스티안(E.A.Vastyan)은 말했다.
“감정이입이야말로 자신이 도움을 주는 관계를 움직여나가는 데 있어서 중심이 되는 기술이다.”
특히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마음을 읽어주고 알아주어야 효과적인 치료를 할 수 있다. 감정이입의 본질은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이다. 1)

감정이입을 가장 잘하신 분은 예수님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1:6-8)
예수님은 눈물이나 고통이 없는 하나님 나라에 계신 분이시다. 주님은 고통 가운데, 눈물 흘리며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셨다. 불쌍하다고 생각만 한 것은 아니다. 주님은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높고 높은 보좌가 아니라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다. 그리고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몸소 다 겪으셨다. (사53:4)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렇게 번역했다.
“그분은 우리의 현실에 무관심한 제사장이 아니십니다.”(히4:15)
공동 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다.
“우리의 사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다.”(히4:15)

주님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우리의 편이 되어주신다.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다 경험하셨다. 죄 많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품어주셨다. 그렇게 주님은 세상을 사랑하고 품어 안으셨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어떠한가? 예수님은 당대 종교인들을 바라보면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6,17)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감정이입을 지적하였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상대방의 감정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종교인을 지적하였다.

최근 들어 한국 교회는 사회의 온갖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도덕적 타락과 비리와 독선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감정이입이란 측면에서 보면, 시대의 아픔과 고민에 전혀 공감하지 못함은 아닐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교회만 부흥하면 되고, 개인 신앙생활만 잘 하자는 식으로 가르친 결과는 아닐까? 나는 소위 대한민국의 장자 교단이라고 하는 합동 측 신학교를 나왔다. 대학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칼빈주의였다. 칼빈주의 신학이야말로 오류 없는 신학인 것처럼 배웠다. 조금이라도 정통 보수 신학에 어긋나면 읽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고 하였다. 오직 성경만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집중하였다. 사회적인 이슈나 문제는 고민하지 않았다. 시대적인 아픔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정통 보수주의 신학을 따른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찼다. 누가 조금 다른 소리를 하면 신신학이니, 자유주의 신학이니, 신 칼빈주의니 바르티안이니 하면서 사정없이 비판하였다. 국제 신학대 김동춘 교수는 이를 두고 교리적 칼빈주의라고 하였다. 보수 - 정통주의를 추구하는 교리적 칼빈주의는 근대화된 합리적 논리체계라기보다 매우 전통적인 신념체계로서 권위주의적이며 배타적이다.2) 나 아니면 다 틀렸다는 식의 사고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성경 무오설을 바탕으로 칼빈주의는 정통신학이며, 절대적 신학이며, 무오한 신학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칼빈주의를 절대 무오한 신학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칼빈주의는 결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한 개혁 신학은 언제나 지성적 합리성과 타당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갱신하고 개혁하며 발전하였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est reformanda)
그런데 종교개혁 정신은 변질되어 교회는 이제 개혁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변혁의 주체가 아니라 보수의 주체로 체제와 제도와 권력의 맛에 취하였다. 기독교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체제 유지용 종교로 전락하였다.

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알겠지만, 같은 칼빈주의자라 할지라도 의견이 서로 제각각이다. 칼빈주의는 교리적 칼빈주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변혁적 칼빈주의도 있다. 칼빈이 제네바 시를 개혁할 때 단지 성경만 가르치지 않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전반에 걸쳐 변혁을 주도하였다. 그것은 칼빈만 아니라, 비텐베르크의 루터나, 취리히의 츠빙글리 등 개혁자 대부분도 같은 모습이었다. 변혁적 칼빈주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준 신학자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다. 그는 네덜란드 수상을 지냈으며 정치가로 신학자로 사회 변혁적 사고를 가졌다. 그는 '하나님 주권 사상'과 '일반 은총론', '영역 주권설' 등을 강조하며, 신앙을 단지 신학교나 교회에 머물게 하지 않고 세상에 나가 영향을 끼치도록 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기독교 세계관과 인생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세상에서 기독교가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지 고민하였다. 그들은 창조세계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인식하고, 세상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구현하는 일에 앞장섰다.3) 변혁적 칼빈주의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백성이 무엇 때문에 울고 웃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그들 곁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삶,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까 고민한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특별히 한국 장로교회는 사회 변혁적 칼빈주의는 외면하고, 교리 보수적이고 근본적인 칼빈주의만을 지향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사회에 대하여, 이 시대에 대하여, 그리고 백성의 아픔과 고민에 대하여 감정이입 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였다. 공감 능력이 떨어진 지도자를 따를 사람은 별로 없다. 그가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마음을 나누지 않으면, 듣기 싫은 소음에 불과하다.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피리를 불어도 춤출 줄 모르고, 애곡하여도 슬퍼할 줄 모르는 시대이다. 세상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종교인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종교인을 향한 주님의 충고이다. 이제 교리적 칼빈주의에서 변혁적 칼빈주의로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 시대 기독교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나는 사람이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공감적인 직관’ 혹은 ‘감정이입’이라고 본다. 문제 속으로 들어가서 그 문제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칼 포퍼


* 글쓰신 분: by 배경락Jul 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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