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대한민국 헌법에 기초하여 우리나라의 사법 정의와 국민의 기본권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고 있는데, 다소 급진적이면서도 생각의 여지를 남겨주는 특유의 문체는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로 손꼽히는 책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책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저자의 이색경력인데, 이 책의 저자인 김두식 교수님은 고려대 법대를 졸업후 사법고시를 패스, 군법무관을 거쳐 검사가 되었지만 검찰 조직에 환멸을 느껴 곧장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유학을 떠난다. 그토록 법학이 싫었다면 미국에서는 전혀 다른 전공을 해봤으면 싶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자의 선택은 코넬대 로스쿨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이후 코넬대 로스쿨을 졸업한 저자는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한동대 교수를 거쳐 현재 경북대 로스쿨에서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고 한다. 즉, 저자는 법학에 있어서는 다양한 경험을 해봤지만 철저한 거류외인(foreign residents)인 셈이다. 이러한 저자의 이색경력 덕분에 책의 내용은 인문학과 법학의 영역을 넘나들면서도 전혀 사변적이지 않고 중립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내용들을 몇 개 선별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법률언어와 일상언어 사이의 괴리
"일반인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법률가들이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고유한 특권을 누리는 출발점입니다. 법률가들은 인반인들이 모르는 언어로 가득 찬 법전 해석 권한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언어가 쳐준 장벽 덕분에 보통 사람들의 진입이 차단됨으로써 법률가들의 기득권이 보호받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성한 언어로 치장된 경전을 만들고, 사제들이 그에 대한 해석 능력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는 구조는 저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설교자들이 하나님과 평신도 사이를 중개하며, 성서 해석 권한을 독점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1
(2) 대법원 판례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필요성
"<솔로몬의 선택> 같은 프로그램에서 변호사들이 제시하는 정답은 대부분 우리나라 대법원의 입장을 따른 것입니다만, 대법원의 태도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유일한' 해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법원에 아무리 우수한 법률가들이 많이 모여 있다고 해도 결국 대법원의 입장 역시 '지금 현재 힘을 얻고 있는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법원이 그 입장에 서 있다고 해서 앞으로 영원토록 대법원이 그 입장을 취할 것도 아닙니다. 어느 시점에 가면 대법원도 얼마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2
(3) 리갈 마인드(Legal Mind)의 실체
"리갈 마인드는 논리라기보다는 직관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영미법계에서 대표적인 법률 사전인 <<블랙 법률사전>>도 리갈 마인드를 '잘 훈련된 법률가의 지적, 법률적 능력 또는 입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잘 훈련된 법률가'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 것이듯이, 리갈 마인드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주관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블랙 법률사전의 정의자체가 그저 순환논법에 지나지 않는 것만 봐도 리갈 마인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개념인지를 알 수 있지요."3
※ 물론 본문에는 블랙 법률사전 외에도 다양한 사례가 소개되기 때문에 선결문제요구의 오류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4) 실체적 진실이 '만들어 나가는' 진실이라는 견해
"일반적으로 적법 절차와 실체적 진실은 늘 대립관계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실체적 진실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차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적법 절차와 실체적 진실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차피 실체적 진실이라는 덩어리를 완전하게 재현해낼 수 없다면, 적법 절차를 통해 진실에 가장 근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4
(5) 국가를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국가를 사랑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가에 대한 '사랑 표현'을 강제할 수는 없으며, 국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중요한 것이 국가를 '통제'하는 일임을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 국가를 '사랑의 대상'이 아닌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법학의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국가가 사랑해야 할 대상일 분이라면 사실 법은 할 일이 없습니다. 그저 절대선인 국가가 명하는 대로 우리가 따라가면 되는 것이지, 특별히 법에 의한 지배를 생각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5
(6) 법률가의 독립성에 대하여6
"(연수원 중심의 법률가 양성체제에 대해서) 그러나 권력의 통제 또는 국가 권력의 괴물화를 방지해야 할 사명을 지닌 법률가들에게 이와 같은 '하나의 뿌리'는 거의 폭약에 가깝습니다. 단일한 뿌리는 내부 통제를 불가능하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인간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힌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절대로 가족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법조계입니다. 검사는 국가를 대신해서 범죄자와 싸움을 벌이는 존재입니다. 변호사는 국가로 뭐고 신경 쓸 것 없이 의뢰인을 위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판사는 거대 담론과 여론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법리에 의해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하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독립성입니다. 그러나 사법연수원 몇 기냐에 따라서 그 법률가의 위치가 좌우되는 풍토에서 독립성 보장이란 생각하기 힘듭니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
"헌법을 이해하는 열쇳말은 '인정한다. 그러나'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헌법은 '그림의 떡' 또는 '잘 포장된 한 장의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권력자들은 누구나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인정한다. 그러나'의 논리를 들이대며 자기 눈에 거슬리는 것을 마음대로 제한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막지 못하면 이미 헌법이 아닌 것이지요. (...) 종교의 자유는, 확실히 이상해 보이는 행동이더라도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한 행동을 관용한다는 것입니다. 이상해 보이지 않는 행동에 대해서 관용하는 것은 이미 관용이 아니지요. 또한 설사 종교의 자유에 일정한 제한을 가한다 하더라도 그 제한이 기본권의 본질을 침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비례성의 원칙이라고 해서 처벌의 범위가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을 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김해여고 사건의 경우, 학교 측은 학생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 한다는 이유로 아예 그 학생을 제적 처분해버림으로써, 비례성의 원칙을 명백히 위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난 세월 동안 이런 잘못된 판결까지도 아무런 문제 삼지 않고 받아들여 왔다는 데 있습니다. '내면적 신앙'과 '외적 활동'의 구분에 갇혀 종교의 자유가 갖는 본질적 의미를 망각해온 결과입니다."7
(8) 무죄추정 원칙의 중요성
사회 전체의 분위기도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어떤 범죄 혐의로 구속되었다고 하면, 신문이든, 방송이든, 개인이든 혹시 그가 무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오직 피의자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피의자의 인생은 끝나게 됩니다. 나중에 그들 중 일부가 무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 유죄로 각인되어버린 피의자, 피고인들의 인생은 되돌릴 길이 없습니다. 언론은 새로운 먹이에게 유죄추정의 덫을 덮어씌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과거에 이미 희생되어 버린 먹이에게는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일단 수사기관의 표적이 되면 다른 곳에서 진범이 붙잡히거나 본인이 사망하지 않는 이상, 설사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해도 '여론의 유죄 확정 판결'로부터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 그야말로 유죄 추정의 원칙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8
(9) 아는 사람만 아는 권리, 진술 거부권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피의자 신문이라고 하는 '피의자와 수사기관이 함께 진실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불법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장치 가운데 역사가 만들어온 가장 위대한 권리가 바로 진술 거부권, 즉 말하지 않을 권리입니다. (...)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야말로 진실을 만들어 나가는 데 있어서 피고인이 갖는 가장 강력한 수단입니다. 검사에 비해서 아무 무기도 지니지 못한 나약한 피의자, 피고인이 그나마 존엄성을 지키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절대적인 무기가 진술 거부권인 것입니다."9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법학에 문외한인 평범한 사람들을 배려하여 최대한 쉬운 언어로 설명하려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자신감을 얻어 동네 서점에서 법학에 관련된 코너를 찾아보면 그 자신감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린다. 1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법학교과서의 두께와 현대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의 과용, 우리 말이면서도 우리 말 같지 않은 법률용어들은 법(law)을 일반인과 더욱 멀어지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근래에는 주요 국가기관들이 블로그나 SNS 등을 활용하여 정책결정과정에 여론을 반영하고 정책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일반인들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법'만큼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분야가 또 있을까?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은 법치주의 원리를 국가의 핵심이념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모든 국가정책의 결정과 집행은 법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법을 안다는 것은 현대국가의 근본원리를 이해하고 모든 국가정책이 어떻게 결정, 집행되는지를 안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우리 헌법은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제 10조부터 36조까지 명문화하여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제37조에서는 국민의 기본권이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경시되지 않으며, 부득이하게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해야 할 경우 엄격한 요건들을 거쳐야 하며 그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헌법을 서구사회로부터 들여온 나라이기 때문에 기본권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인데, 미국이나 영국, 독일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들은 헌법상 규정된 기본권들을 쟁취하기 위해 무수한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130년 동안 종교전쟁을 치른 17세기 영국사회를 떠올려보자.) 헌법상 기본권에 대한 이해부족은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비극을 겪지 않은 결과물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법을 수입해왔기 때문에 법을 배우다보면 우리 정서와는 맞지 않는 법률 또한 상당수가 발견된다. 이러한 법률들 또한 순차적으로 우리나라에 맞는 독자적인 법으로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헌법의 풍경』은 우리나라의 사법 정의와 국민들의 법의식에 있어서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책으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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