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불과 2년 전 피케티(Thomas Piketty, 1971~ )의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이 전세계적으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뉴욕타임즈의 모 칼럼니스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매후 책장에 꽂아두기만 하는 책이라고 조소하기도 했던 이 책에서, 피케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양극화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향후 수십년 내에는 이러한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비판한다.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21세기 자본'을 직접 읽어보시라. 피케티는 무려 700쪽에 달하는 자신의 저서에서 미국이나 기타 선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의 양극화 현상을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들어가며 객관적으로 분석,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종전의 성장중심 경제정책을 탈피하고, 글로벌 자본세 도입과 고소득층에 대한 누진세 적용,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본 통제 규칙 마련 등을 언급하고 있다. 피케티가 제안한 대안의 실현가능성은 둘째 치더라도 자본주의 체제가 본질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것은 21세기에는 어느정도 기정사실화된 듯하다. 19세기 산업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일찍이 간파하고 자본주의 비판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창했던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의 이론은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모든 사회문제를 자본과 노동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지나치게 극단적인 수단만을 해법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지만 말이다.
한편 자본주의 진영 내에서도 맑시즘을 기초로 19-20세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예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비판이론'이다. 여기서 사회비판이론이란 맑시즘을 사상적 배경으로 한 현대 사회비판이론을 지칭하는 말이다. 본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연구를 진행하던 이들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피난을 와 있는 동안 수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는데,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자본주의와 나치즘(또는 파시즘), 도구적 이성과 대중을 선동, 기만하는 문화산업 등 다양한 사회현상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전개하였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에는 칼 마르크스, 호르크하이머, 발터 베냐민, 테오도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위르겐 하버마스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담론은 현대철학과 심리학, 사회학, 법학, 문화이론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진행되었다. 본문에서 다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느의 『계몽의 변증법』 또한 당대에 쓰여진 책이다.
이쯤에서 예상했겠지만 계몽의 변증법이 쓰여진 20세기 중반은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암담한 시대였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주축이 된 독일은 하켄크로이츠를 휘날리며 전세계를 전란에 휩싸이게 만들었고, 이탈리아에서는 뛰어난 언변을 앞세운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당의 당수가 되어 전 국민을 전쟁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세계 1차 대전의 승전국이었던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군국주의를 앞세워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당대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믿기지 않겠지만 그들은 오히려 나치당과 파시즘의 편에 서서 전쟁을 적극 옹호하였다. 게다가 히틀러는 독일에서 만장일치로 총통에 당선되었다. 이 책의 말미에는 당시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권력을 쥐게 될 확률은 극히 낮다고 보았다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히틀러의 공약은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세계 1차대전의 패전국으로 막대한 배상금과 전세계적인 경제공황에 고통스러워하던 독일 국민들에게 빵을 주겠다고 했을 뿐이다. (정확히는 부국강병을 약속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에게 적극적으로 표를 던졌으며 대다수 지식인들조차도 히틀러가 지배하게 될 독일의 미래를 낙관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대로이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에 맞게 계몽의 변증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관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책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서구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합리적 계몽주의'로부터 어떻게 나치즘과 같은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결과가 도출될 수 있는지를 본문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계몽(Enlightment)이란 인간이 지적 미성숙상태1를 탈피하여 능동적,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일컫는 말이다. 즉, 인간은 계몽을 통해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신화적 사고를 벗어나 자연을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하지만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목적이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인간이 계몽의 과정을 통해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계몽의 개념 자체가 퇴보의 싹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계몽을 통해 중세 이전까지의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권위에 의한 종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합리적으로 사고할 것만을 강요받게 되었다. 인간을 신화적 사고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계몽이, 이제는 새로운 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이성의 비이성에 대한 억압을 자신의 저작에서 여러차례 폭로했던 것처럼,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만이 정상과 비정상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고 말았다.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2
계몽의 변증법에서 핵심이 되는 키워드는 '도구적 이성(Instrumentelle Vernunft)'이다. 본문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이성이 단지 상품의 교환가치와 효율성을 판단할뿐인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였다고 비판한다. 도구적 이성은 모든 것을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만 파악하기 때문에, 인간 외의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계산가능한 양적 존재로 환원된다. 자연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자신의 의도에 부합하게 재생산해내는 것이다.
"신화는 계몽으로 넘어가며 자연은 단순한 객체의 지위로 떨어진다."3
하지만 도구적 이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사고조차도 지배에 적합한 형태로 재생산해낸다. 이를 '사물화(Verdinglichung)'과정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적 장치들이 이제 인간의 사고까지 사물화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의 이성은 칸트 이래 세계에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던 세계의 선험적, 초월적 주체로써의 지위를 상실하고, 세계의 모든 사물을 교환가치로 판단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격하된다. 그리고 사물화된 인간의 사고는 급기야 다른 인간을 사물화시키고 자연에게 행사하던 폭력을 인간 자신에게도 행사하게 된다. 산업사회에서 자본가들이 개별 노동자들을 기계부품처럼 부리고, 여성과 아이들에게조차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노동에 종사하게 한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제 이성은 다른 모든 도구를 제작하는 데 소용되는 보편적인 도구로 쓰인다."4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도구적 이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불행히도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대답은 "벗어날 수 없다."로 귀결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1세대 비판이론가들5은 암담한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이성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노예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계몽의 변증법이 말미에 가서는 지극히 불확실한 문장으로 끝을 맺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1세대 비판이론가들의 사상적 기반이 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조아 계층을 타도하고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철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비판이론가들의 이론에 따르면 혁명을 일으켜야 할 노동자들은 의식 자체가 도구적 이성으로 축소되어 버렸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헤치고 반성할 능력조차도 상실해버렸다. 이래서야 요즘 말로는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그래서 후대에 2세대 비판이론가인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는 계몽의 변증법을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다만 계몽의 변증법은 철저하게 회고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당대의 암담한 시대상을 어느정도 감안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즉, 21세기 대한민국과 전세계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계몽의 변증법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세지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최소비용 최대효과'를 도출해야 한다는 경제학의 기본원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자라왔으며 지금 이순간에도 의사결정을 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지를 고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불확실한 것, 혹은 손해가 되는 것들을 나름대로의 기준에 맞게 분류하거나 배제해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가치있는 것들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은 막연히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만 생각하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이고 행복한 삶인지에 대한 고민은 뒤로 제쳐두곤 한다. 만약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절차적인 부분에는 상대적으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본다면 21세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도구적 이성의 노예가 되어버렸다고 뒷목을 잡는 것은 아닐까? 지나친 억측이긴 하지만 가끔은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제목인 계몽의 변증법에서, 변증법이란 동일률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이나 대립을 근본원리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원리를 말한다. 한편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에서 정(正)의 단계란 자신 속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는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정과 반은 종합되어 합(合)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전개해나간다. 다시 말하면 규정(A)이 부정(~A)을 수반함으로써 새로운 합(A)으로 나아간다는 말인데, 헤겔은 이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가 끊임없는 대립과 투쟁 속에서 무한히 진보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이 절대화됨으로써 정으로부터 더 이상 반이 도출될 수 없게 되었고, 결국에는 정마저 존재의 의의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정과 반이 사라짐으로써 합의 원리조차 도출될 수 없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즉, 1세대 비판이론가들은 인류의 역사를 끊임없는 진보의 과정으로 파악한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적어도 자신들이 보기에는 역사는 진보하지 않았다. 오히려 퇴보하고 말았다."
[출처] 33.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 [계몽의 변증법]|작성자 베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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