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렸을 적에 유행하던 한 TV 애니메이션에 다음과 같은 명대사가 있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한없이 오글거리는 말이지만, 이 대사는 순수하고 떼 묻지 않은 아이들의 감성을 울리기에 충분했으며 지금까지도
인터넷에 종종 회자되는 명대사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어느새 20대 중반에 들어선 나에게, 이 대사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정의란 도대체 무엇이고, 인간의 선과 악을 결정짓는 명확한 잣대나 기준은 정녕 존재하는 것일까?
근래에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인간사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갈등이나 대립은 저마다 생각하는 정의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정의를 추구하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우리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녕 악인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판단하고 단죄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에게 악인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선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논쟁을 생각해보자.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전세계에 흩어져있던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이 세계 2차대전 이후 성서의 기록을 근거로 중동 한가운데에 세운 국가이다. 사실 어찌보면 말도 안 되는 논리이지만, 전세계에 유대인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하다보니 중동 이슬람 국가들 한가운데에 이스라엘이라는 유대교 국가가 실제로 탄생한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마땅히 되찾아야 할 선조들의 땅을 다시 되찾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그들의 입장은 선이다. 하지만 여타 아랍국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한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끼리 옹기종기 수백년 동안 모여살고 있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이교도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강탈해간 상황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아랍국가들에게는 이스라엘이 절대 악으로 여겨지지 않겠는가?
결국 세상에 절대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선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패배한 이들을 악이라고 불러왔던 것은 아닐까?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에서 등장했던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전쟁을 위한 기도』는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이 인생의 말년에 미국의 반-제국주의, 반전운동에 앞장 서면서 저술한 작품이다. 그리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1898년에 있었던 필리핀-미국 전쟁이다. 마크 트웨인은 처음에는 쿠바의 해방을 위한 전쟁을 지지했지만,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 벌어진 미국과 스페인의 전투, 그리고 뒤이은 미국과 필리핀의 16년에 걸친 전쟁을 목격하고 반전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마크 트웨인은 당시 전쟁을 "발을 빼려 하면 할수록 더욱 빠져나오기가 힘들어지는 수렁"이라고 묘사하는데, 실제로 미국-필리핀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필리핀-미국 전쟁의 공식적인 종전은 1902년이었지만, 이후에도 각지에서 게릴라전과 국지전이 계속되어 실제로 전쟁이 끝난 것은 1914년이 되어서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려 100만여 명에 달하는 필리핀인들이 전쟁의 참혹한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이 전쟁이 쿠바의 해방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 성전(聖戰)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그들의 사랑하는 아들들을 지켜주실 것을 기도했으며 거룩한 주님의 보살핌 아래 승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마크 트웨인은 본문에서 노인의 말을 통해 이러한 미국인들의 기도를 필리핀인들의 입장에서 되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90페이지 내외의 지극히 가벼운 분량의 책이다.
하지만 책이 담고 있는 메세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너무나 무겁게 느껴진다.
마크 트웨인은 독수리1의 발톱이 더 이상 다른 민족을 찍어누르지 않기를 희망했지만,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독수리의 발톱은 여전히 다른 민족들을 찍어 누르고 있다. 그리고 진실을 폭로한 노인이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애써 외면하고 기피하고 있다. 어찌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는 정상성(Normality)의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을 애써 이해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녕 그래도 되는 것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의 위대한 정신처럼 같은 필멸의 인간으로서, 그들을 끌어안고 하다못해 그들의 아픔을 공감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 오늘날 미국 대통령의 휘장은 독수리인데,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최고 주신 제우스의 신조가 독수리였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