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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

채식주의자

by 이덕휴-dhleepaul 2018. 5. 20.

채식주의자

작가
한강 지음
출판
창비
발매
200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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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식주의자]는 국내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Man Booker Prize)을 수상한 한강의 대표작이다. 맨부커상은 1969년 영국의 식품유통사 부커(Booker) 사에서 제정한 상으로, 영국 연방국가 내에서 영어로 쓴 소설 중에서 수상작을 선정하는 맨부커상과 영어로 번역된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으로 나뉜다. 한강 작가가 수상한 맨부커상은 인터내셔널 부분으로, 실제로 한강 작가는 수상 당시 번역을 담당한 데보라 스미스의 공이 컸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두고 국내 문학계에서는 "한국 문학의 대단한 쾌거"라며 반색하고 있는데 어쨌거나 한국 작가가 최초로 세계적인 권위의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그 자체로 축하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창비에서 출간된 책을 보면 이 책에는 단편의 소설만 수록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채식주의자는 1부 채식주의자, 2부 몽고반점, 3부 나무불꽃으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며 각각의 소설은 소설의 주인공 영혜를 바라보는 그녀의 남편, 형부, 언니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1. 채식주의자

 

 소설의 주인공 영혜는 남편의 말을 빌리면 뭐하나 특별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성 중 한명이다. 그녀의 키는 평균적인 여성의 신장이며, 머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에 피부가 특별히 하얗거나 쌍커풀이 있지도 않다. 그녀가 가장 선호하는 옷차림은 무채색의 색상에 단조로운 디자인의 검은 구두이다. 그리고 영혜의 남편은 그녀의 평범함이 좋아 결혼했으며 결혼 후 평범한 직장에서 많지도 적지도 않은 연봉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평생 평범한 생활을 영위할 줄 알았던 그들의 삶은, 영혜가 채식을 시작하면서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1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원인모를 악몽을 꾸게되고 육식에 대한 혐오감과 함께 집 안에 있는 모든 육류를 치워버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던 그녀의 남편은 이윽고 근래의 트렌드가 '채식주의'라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그녀의 채식이 얼마 못가서 중단되겠거니 생각한다. 하지만 '채식주의(vegetarianism)'는 본래 건강상의 이유, 종교상의 이유처럼 일정한 신념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악몽이라는 다소 우연적인 원인으로 채식을 시작한 영혜의 상태를 정의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용어였다. 영혜의 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그녀는 집 안의 모든 동물성 재질로 이루어진 제품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혜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참고 견디던 남편은 그녀가 회사의 임원진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돌발행동을 일으키면서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월남전 참전용사이자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가진 장인어른에게 아내의 상태를 토로하기에 이른다. 남편의 하소연으로 가족모임이 잡히게 되었지만 그 사이에도 아내의 몸은 점점 여위어간다.


"내가 믿는 것은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2


 이윽고 영혜와 남편, 그리고 외가 식구들이 모인 가족모임 날짜가 도래했다. 그들은 영혜의 채식주의가 잘못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육식도 필요하다는 것을 이유로 영혜에게 육식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녀의 건강을 위한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처남이 영혜의 팔을 구속하고 장인이 영혜에게 손찌검을 하면서 화목했던 가족모임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이를 견디다 못한 영혜는 과도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렸다. 영혜가 응급실로 실려간 후 영혜의 남편에게 흑염소 고기를 선물하는 장모의 모습은 이러한 비극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듯하다.

 오늘날 채식주의는 현대사회에서 비교적 일반적,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건강상의 이유로, 혹은 종교상의 이유로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육식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밝혀지면서 채식주의는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들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채식주의는 사전적 의미의 채식주의 이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희의 상태는 채식주의라기보다는 육식에 대한 혐오, 아니 모든 인위적인 요소들에 대한 혐오에 가깝다. (오히려 통상적인 언어로는 정의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즉, 남편과 영희의 가족들에게 '채식주의자'라는 명칭은 이해할 수 없는 영희의 행위를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속성이나 성질로 환원한 것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채식주의 외에 육식을 기피하는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영희의 가족들의 사랑은 지극히 왜곡된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딸을 향한 손찌검으로, 어머니의 사랑은 육식을 못하게 된 딸에게 흑염소를 선물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한다. 상대방의 행위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그 사람은 '비정상'으로 규정되고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더 이상 기울이지 않게 된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뇌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는 이야기의 형태로 희귀병 환자들의 진료기록을 서술하였는데, 이는 희귀병 환자들에 대한 편견과 그릇된 시선을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전해진다. 본문에서 영혜의 상태가 가족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상태를 정의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적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그러한 언어가 있다고 해도 해당 언어는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공적 언어로 인정받아야 한다. 이러한 언어의 중요성 때문에 의학계에서는 새로운 질병이 나타날 때마다 세균과 질병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닐까? 이름은 특정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언어적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2. 몽고반점


 2장을 읽는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은 영혜에게 남아있는 '몽고반점'의 함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몽고반점은 동아시아인에게 주로 나타나는 푸른 반점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신생아의 엉덩이에서 발견되지만 아이가 성장하면서 색깔이 점차 퇴색되어 11-12세가 되면 일반적으로 자취를 감추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작중 등장인물인 영혜는 몽고반점이 진작에 사라졌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강 작가는 성인이 되어서도 몽고반점을 갖고 있는 영혜를 통해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려던 것일까? 몽고반점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몽고반점을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독립하여 문명적인 삶을 선택함으로써 희생해야 했던 선천적인 본능이나 욕망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문명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보호하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본능들을 희생할 것을 요구했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문명적 성도덕과 현대인의 신경병」이라는 논문에서, 성 본능의 억제를 기준으로 문명의 발달을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 단계는 어떠한 제약도 없이 성 본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단계이며, 두 번째 단계는 생식이라는 목적에 이바지하는 성 본능을 빼고는 모든 성 본능이 억제되는 단계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는 합법적인 생식3만이 성행위의 목적으로 용인되는 단계이다. 결과적으로 문명은 인간이 선천적인 본능이나 욕망을 희생하는 것을 대가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제공했다. 따라서 영혜에게 남아 있는 몽고반점은 그녀가 가부장적이고 억압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며 억눌러왔던 내면의 욕망이나 욕구로도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장에서 또 한 가지 충격적인 장면은 영혜와 그녀의 형부가 온 몸에 꽃을 그리고 몸을 섞는 장면이다. 처제와 형부의 성관계에 대한 법적, 윤리적 판단은 둘째 치더라도 나체를 드러내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영혜와 그녀의 모습에서 어떤 예술적 영감을 찾아내는 그녀의 형부는 보통 사람들의 정상성의 범주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다. 그들의 행위는 명백히 비정상적이며 보는 이에 따라서는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하다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들의 성관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리고 영혜의 형부가 영혜를 보고 얻었다는 예술적인 영감은 도대체 무엇일까? 한 가지 여담으로 영혜와 그녀의 형부가 성관계를 맺는 장면은 놀라울 정도로 적나라해서 이러한 묘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바로 다음 구절로 넘어갈 것을 권장한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려왔던 대로였다.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그의 붉은 꽃이 닫혔다 열리는 동작이 반복되었고, 그의 성기는 거대한 꽃술처럼 그녀의 몸속을 드나들었다. 그는 전율했다.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물들이고 배와 허벅지까지 적시는 끈끈한 풀물의 푸른빛을 보았다."4


 한강 작가는 영혜와 그녀의 형부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모습을 식물의 형상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 그려진 꽃 모양들은 이러한 비유에 극적인 효과를 부여한다. 이들의 관계는 본문에 묘사된 것처럼 가장 아름답지만 동시에 가장 끔찍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영혜와 그녀의 형부는 자신들이 어떠한 일탈행위를 하고 있다는 데서 쾌락을 얻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들의 관계 이면에는 숨은 의미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강 작가는 독자들에게 해석을 위임하고 있다. 과연 그들을 부적절한 관계로 이끈 요인은 무엇일까? 그리고 영혜의 형부가 영혜의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예술적인 영감은 무엇일까?


3. 나무 불꽃


 1장과 2장이 영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면, 3장은 영혜의 언니인 인혜를 중심으로 모든 사건이 진행된다. 인혜는 형부(이자 자신의 남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다가 발각된 영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정신병원에서는 그녀를 중증의 정신분열과 식사거부라고 진단하는데, 인혜는 영혜가 그렇게 된 원인을 도저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점점 식물이 되어간다는 영혜의 말은 인혜를 지속적으로 혼란에 빠뜨린다. 영혜는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기에 명백히 비정상이며, 누구보다도 평범하게 살아왔던 인혜가 영혜의 상태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인혜는 점차 죽어가는 영혜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던 트라우마를 조우하게 된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5


 인혜는 문득 자신이 아들 지우를 출산하기 위해 병원에 누워있던 순간을 떠올린다. 흔히 인간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이전까지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일상적인 가치들이 전복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직관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 앞에 선 단독자로 바로 서게 하고, 비본래적 실존을 벗어나 본래적 실존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작중에서 인혜는 영혜와 자신의 남편이 불륜을 저지른 해 한달 가까이 하혈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피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신병원에 입원한 영혜에게서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이전까지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왔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편과 결혼해서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과의 이혼은 그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녀는 과연 무엇을 얻기 위해 그토록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아온 것일까?


"그녀는 덩굴처럼 알몸으로 얽혀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분명히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성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꽃과 잎사귀, 푸른 줄기 들로 뒤덮인 그들의 몸은 마치 더이상 사람이 아닌 듯 낯설었다.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테이프를 만들고 싶어했을까. 그 기묘하고 황량한 영상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전부를 잃었을까."6


 인혜는 상태가 악화된 영혜를 대형병원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각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영혜와 형부를 비정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자신조차도 정상성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음을 발견한다. 과연 인간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이해받기 어려운 성질이나 속성을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추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내면의 감정이나 욕망을 잘 숨기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언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결론적으로 영혜와 그녀의 형부, 인혜는 인간 실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준다. 그리고 한강 작가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을 독자들에게 위임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4. 결론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한국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여 우선적으로 읽어본 작품이다. 원래는 교내 독서모임에서 토론하려던 작품인데, 시험기간을 앞두고 필자가 극심한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학기가 끝난 이제서야 후기를 작성하고 있다. 작품을 읽은 감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상당히 난해하고 어려웠다. 한강 작가가 문학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기도 했고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사고방식 자체가 일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아 그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나는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과 미셸 푸코의 구조주의에 기초하여 작품을 해석해 보았는데 다른 의견이 있다면 얼마든지 의견을 남겨주시기 바란다. 이건 여담이지만 문학작품은 읽는 시간 자체는 얼마 안 걸리지만 서평을 쓰는데 시간이 유독 많이 걸리는 듯하다.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와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 ⓒ 맨부커상 공식 트위터




  1. 본서 19p
  2. 본서 43p
  3. 이때의 합법적인 생식은 법률혼을 비롯한 사실상의 혼인관계에서 맺는 성관계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4. 본서 140p
  5. 본서 197p
  6. 본서 2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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