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asmus vs. Luther: Vom (un)freien Willen
루터는 그의 작품 중 두 가지만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중 두 작품만이 앞으로도 계속 집중적으로 연구되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그의 교리 문답은 큰 명성을 얻었지만, 불행히도 그의 작품 "자유롭지 않은 의지에 관하여"는 너무 자주 배경으로 사라졌습니다.
개혁자는 1525 년 전에 쓴 로테르담의 인본주의 자 에라스무스 (Erasmus)의 논문 "자유 의지에 관하여"에 대한 응답으로 그것을 썼다. 루터 신학의 핵심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두 학자 사이의 논쟁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음 인용문 모음은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 안에는 두 작품의 필수 핵심 구절이 기록되고 병치됩니다.
에라스무스 대 루터: (비)자유 의지에 대하여
성경의 본질에 관하여
성경의 어둠 – 에라스무스 (p.12f.):
사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가 더 깊이 침투해서는 안되는 접근 할 수없는 구절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침투하려고하면 증가하는 어둠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신성한 지혜의 불가사의 한 위엄과 인간 정신의 약점을 인식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올 때마다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 얼마나 깊은가! 그의 결정은 얼마나 이해할 수 없으며 그의 길은 얼마나 불가사의한가!" (로마서 11:33) 그리고 이사야의 경우: "누가 주의 영을 들었으며 누가 그의 모사라?" (사 40:13) – 인간의 영의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흐릿한 거울과 어두운 말로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을 가리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때를 위해 많은 것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1 Cor 13,12 참조).
성경의 명확성 – 루터 (p.24ff.):
하나님과 성경은 더 이상 창조주와 피조물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마지막 날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3:32). [...] 그러나 무신론자 궤변가들 – 에라스무스 여러분도 여기서 말하는 언어 – 성경에는 이해할 수 없고 모호한 것이 있다고 퍼뜨렸습니다. 물론, 그들은 신앙개조를 한 번도 내놓은 적이 없으며, 그들의 무의미한 견해를 증명하는 어떤 것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저글링 게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람들을 위해 성서를 망쳐 놓았습니다. [...] [사 40장 13절에서] "누가 성경의 의미를 알았느냐"가 아닙니다. 오히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고 말합니다. [...]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의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성,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고백합니다. 이것은 불분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벽하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자유 의지에 대한 예비 발언
자유 의지에 대해 알아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 – 에라스무스(p.13f.):
어쨌든, 나는 우리가 자유 의지와 관련하여 성경에서 배운다고 믿습니다 : 우리가 경건의 길에 있다면,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위해 기쁘게 앞으로 나아가야하며 더 이상 우리 뒤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생각하지 않아야합니다 (필리 3,13 참조). 만일 우리가 죄에 빠졌다면,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나와서 회개의 구제책을 짊어지고, 주님의 자비를 얻기 위해 모든 면에서 노력해야 하는데, 그것 없이는 사람의 뜻도 열망도 효과가 없습니다. 모든 악은 우리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만, 모든 선은 전적으로 신성한 은혜에 기인할 것이며, 우리는 그 은혜에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존재까지도 빚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생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이,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며, 우리가 우리에게 닥칠 자격이 없어 보일지라도 본성적으로 의로우신 분은 어떤 불의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본질적으로 무한히 자비로운 하나님의 용서에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제 생각에, 기독교 경건에 충분하며, 하나님의 예지가 [인간 행동의] 불가피한 것과 양립할 수 있는지, 인간의 의지가 우리의 영원한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불필요한 질문은 말할 것도 없고, 불확실한 질문은 말할 것도 없고, 또는 그가 연기하는 은혜 만 받아 들여야하는지, 그리고 우리가하는 모든 일, 선과 악, 순전히 필요에 따라 또는 오히려 고통을 겪는지.
기독교 신앙의 잘못된 그림 – 루터 (p.27ff.):
우리가 싸우는 원인, 쓸모없고 필요하지 않은 "자유"의지의 원인을 포함시키는 것은 더욱 참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그리스도인 경건에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함으로써 그들을 무시하기를 원합니다. 그 결과 유대인이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방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또한 작은 손으로 그리스도를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그리스도 없이도 기독교 경건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인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본질적으로 무한히 자비로운 분으로서 전적인 헌신으로 경배된다면.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니, 에라스무스? 당신은 루시안으로 가득 차 있고 나를 위대한 에피쿠로스의 광란에 빠뜨렸습니다. 만약 우리가 싸우고 있는 대의가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제발 전쟁터를 떠나십시오! 우리는 당신과 공통점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당신이 묘사하는 기독교의 본질 중 일부는 우리가 모든 힘을 활용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유익한 일을 짊어져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 위해 모든 면에서 노력해야 하며, 그것이 없다면 물론 인간의 모든 의지와 노력은 헛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나님 께서 그에게 주실 용서에서 위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와 성령이 없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우리 안에 힘이 있고, 인간의 모든 힘을 다해 분투하는 것이 있으며, 하나님의 긍휼과 그것을 위해 노력할 가능성이 있으며, 본성적으로 공의로운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친절하다는 것 등을 확고하게 주장합니다. 이 힘이 어떤 힘인지, 이 힘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겪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지,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 가능성에 한계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묻는 사람에게 대답 할 수는 없습니다. [...] 당신은 사람의 행동과 고통을 서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인간의 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이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 루터 (p.31) :
그것은 [...] 경솔하고, 건방지고,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의지가 그의 구원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지 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지를 아는 데 유익하고 필요합니다. 예, 알아야 할 사항 : 여기에 우리 분쟁의 중추적 인 지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자유 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겪어야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은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조사해야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기독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모든 이교도들보다 더 나쁩니다. 만약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꾸짖거나 경멸하는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인들의 최악의 적이라는 것을 압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과 관련된 나의 능력과 행위의 본질과 범위와 척도를 알지 못한다면, 나는 하나님이 나를 대할 수 있고 행하시는 것의 본질과 범위와 척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불확실하고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서 일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사역을 모른다면 하나님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경배할 수도, 찬양할 수도, 감사할 수도, 섬길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제 자신을 얼마나 신뢰해야 하는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능력과 일을 우리의 능력과 구별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기독교 지식의 첫 번째 과제입니다. 우리의 자기 지식,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 하나님의 영광은 여기에서 의문의 여지가 있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자유 의지의 정의
자유 의지의 정의 – 에라스무스(p.24):
자유 의지란 [...] 인간 의지의 기능을 의미하며,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향하거나 외면할 수 있다.
루터(p.84):
당신은 [...] 자유 의지가 양쪽에서 똑같이 강해지도록 허용하여 은혜없이 자신의 노력으로 선을 돌릴 수있을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돌이킬 수 있습니다. 이 힘이 선으로 바뀔 수 있다고 말할 때 자유 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성령이 불필요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모든 능력으로 성령을 배제합니다.
자유 의지는 상처를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 에라스무스 (p.28) :
자유 의지가 죄를 통해 상처를 입었지만 죽은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것이 마비되어 은혜를 받기 전에 우리는 선보다 악에 더 기울어져도 파괴되지 않습니다. 오직 무시무시한 범죄, 또는 두 번째 종류가 된 습관적인 죄들만이 때때로 마음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의지의 자유를 너무 흘려서 의지가 파괴되고 죽은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의지는 사탄의 권세 아래 노예가 되었습니다 – 루터(p.76):
자유 의지 즉 인간의 마음은 사탄의 힘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기적으로 그를 깨우지 않는 한, 진리가 눈과 귀에 분명히 침투하여 만질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람은 스스로 진리를 보거나 들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악(그리고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 루터(p.53f):
사람은 악을 행한다 [...] 그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지 않는 한,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행한다. 그는 필요하지만 강제하지는 않습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 여기에는 마치 사람이 교수대로 끌려가는 도둑이나 강도처럼 옷깃에 잡히는 것처럼 강압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힘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자신의 의지, 의지, 정욕 또는 성향을 포기하거나 정복하고 변경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의지와 성향으로 같은 방향을 추구해야합니다. [...] 의지는 바뀔 수 없습니다. 그는 방향을 바꿀 수 없습니다. [...]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성령에 의해 유익한 방식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쾌락으로, 성향에서, 우리 자신의 주도권으로, 강요하지 않고 행동합니다. [...]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서 있는 방식입니다. 그는 기수가 있어야 하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태울 때,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간다. 사탄이 그를 태울 때, 그는 사탄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갑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에게 달려가는 것은 그의 재량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누가 그것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놓고 싸운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 루터(p.55ff.):
자유 의지는 신성한 칭호입니다. 그분은 높으신 하나님께 속해 계시며 그분 외에는 아무도 속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시편 115:3). 사람에게 이 칭호가 주어질 때, 그는 사실상 하나님이라고 불린다. 능가 할 수없는 신성 모독. [...] 논쟁의 여지가있는 단어를 삭제하고 싶지 않다면 – 가장 안전하고 최선 일 것입니다 – 우리는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말해야합니다. 인간은 자신보다 높은 것과 관련하여 자유 의지를 가질 자격이 없으며 자신보다 낮은 것에만 자유 의지를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 더욱이 그는 하느님에 대한 자유 의지가 없습니다. 그는 구원을 받거나 그것을 바꿀 수 없이 정죄받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거나 악마를 섬겨야합니다.
자유 의지에 대한 명백한 성서적 증거
하나님의 초대, 약속 및 훈계 – 에라스무스 (p.34ff.):
"나는 너희에게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제시하였다. 좋은 것을 선택하고 따르십시오! (신명기 30:19의 자유 번역)" 더 명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선과 악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임금과 처벌의 전망을 제시하고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남깁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돌릴 수 없는 사람에게 투표를 요청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갈림길에 있는 누군가에게 자기 앞에 두 개의 길이 있고 그가 원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 이사야서에서 주님은 "너희가 만일 내게 기꺼이 순종하면 그 땅의 맛있는 산물을 즐기리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만일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칼에 망할 것이니라." (사 1:19이하) 사람이 선에 대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정하면, 심지어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선이나 악에 대한 자유 의지가 없다고 가정 해보십시오 : 그러면 "당신이 원한다면..."이라는 말은 무엇을합니까? 그리고 "원한다면"을 의미합니까? 그렇다면 "내가(하나님)의 뜻이라면..."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 "원하는 사람"이라는 단어로 자유 의지가 항상 다루어집니다. [...] 성경은 회심, 열심 및 개선 이외의 거의 아무것도 목표로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권면이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 모두에서 필요성에 실제로 의문을 제기한다면 그 의미를 잃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에게 우리의 무력함을 보여줍니다 – 루터 (p.97f.):
그러나 우리는 당신에게서 비유를 듣습니다 : 교차로에있는 누군가가 그 앞에 두 개의 길을 보았고 그가 원하는 길을 선택해야한다고 말하면, 하나만 열려 있다면 그는 조롱받을 것입니다. – 여기서 내가 지상 이성의 증거에 대해 말한 것을 고려한다. 만일 인간이 성취될 수 없는 계명에 의해 조롱을 당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도록 훈계를 받고 쫓겨난다고 말합니다. [...]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을 확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맹목적인 이성을 깨우치기 위해 그분의 율법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자신의 빛이 얼마나 헛되고 인간 의지의 힘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보자. 바울은 율법을 통해 죄에 대한 지식이 온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3:20). [...] 율법에서 재산이나 선에 대한 지식이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에 대한 지식은 바울이 증언한 것처럼 율법을 통해 생기는 유일한 것입니다 (로마서 3:20). [...]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조차도 명령 형태로 배치 된 단어는 일어날 일을 지정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일어날 수있는 일은 현실 형태로 설정된 단어를 통해 표현되어야합니다.
Der blinde Mensch – Luther (p.100) :
성경은 우리에게 결박되고, 비참하고, 감옥에 갇히고, 병들고 죽어있을 뿐만 아니라, 사탄의 일로 인해 상황을 악화시키는 사람, 너무 눈이 멀어서 자신이 자유롭고, 행복하고, 구속받고, 강하고, 건강하고,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을 제시합니다. 사탄은 자신의 불행을 아는 사람을 자신의 힘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사탄은 사람이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그가 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하도록 가두려고 노력한다. 반면에 모세와 입법자의 노력은 율법을 통해 사람에게 자신의 불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 지식은 사람을 부수고, 당황하게 하고, 은혜를 위해 그를 준비시키고, 그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의지가 자유롭지 않다면 죄를 전가할 수 없음 – 에라스무스(p.28):
만일 의지가 자유롭지 않았다면, 죄는 전가될 수 없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의지의 오류나 속박이 죄로부터 발생하지 않는 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면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력적으로 모독당한 여성은 그녀의 사건에 기인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필요할 때 다가오는 법정의 무익함 – 에라스무스(p.76):
죄책감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면 왜 성경에서 심판이 그렇게 자주 언급되었을까요? 또는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모든 것이 순전히 필요에 따라 일어났다면 왜 우리는 판사석 앞에 서야 합니까? 또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변함없는 뜻에 따라 우리 안에서 모든 것, 즉 뜻과 성취를 이루셨다면(필리 2,13 참조) 왜 많은 경고, 계명, 위협, 훈계, 비난이 필요한지 생각하는 것도 혼란스럽습니다.
자발적인 행동의 결과로 인한 임금 또는 처벌 – 루터 (p.116f.)
우리는 이제 필요성이 공덕이나 임금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다룰 것입니다. 강압에서 발생하는 필요성을 의미하는 경우 이것은 사실입니다. 불변성에서 비롯된 필요성을 의미한다면 사실이 아닙니다. 강제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임금이나 신용 소득을 누가 줄 것인가? 그러나기꺼이선이나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 비록 그들이 스스로 의지를 바꿀 수 없을지라도 –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보상이나 처벌을 따릅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주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주시리이다" (로마서 2:6). 이것은 다음과 같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 물에 가라 앉으면 익사합니다. 해변으로 헤엄 쳐 가면 구원받습니다.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성서적 증거
파라오
파라오의 예 – 에라스무스 (p.48) :
하지만 사실상 파라오는 서로 움직이는 의지를 가지고 창조되었으며,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의 성향을 따르기를 더 좋아하면서 저절로 악으로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왜곡되어서는 안됩니다 – 루터 (p.126-131)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 "나는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입니다" [...] 그러나 그것을 읽은 사람은 이 시점에서 죄인을 즉시 꾸짖지 않음으로써 완악할 기회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무슨 권리로, 어떤 목적으로, 어떤 강박으로 이런 식으로 뒤틀리고 있습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것은 우리의 재량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 그것[비난]은 하느님 자신이 인간을 완악하게 하는 데 책임이 있고 그분 자신이 초래한 비난으로부터 하나님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다
유다의 예 – 에라스무스 (p.51) :
하나님은 그것을 미리 알고 계셨고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에 – 그는 어떻게든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무오한 예지와 변함없는 뜻을 보면 반드시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자신의 의지를 바꿀 수 있었고, 실제로 그는 신성 모독적인 의지가 그에게 일어나도록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바꿨다면? 그때에도 하나님의 예지가 틀리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방해받지 않았을 텐데,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은 이 뜻의 변화를 알고 원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의 부정 행위의 필요성(강압 없이) – 루터(p.149):
우리는 유다가 자발적으로 배신자가 되었는지 아니면 그의 뜻에 반하여 배신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시간에 유다가 기꺼이 주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이 불가피한 일이었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디아트리파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무오한 섭리를 고려할 때, 유다는 반역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의 의지를 바꿀 수 있었다. – 친애하는 디아트리브여, 당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합니까? 우리가 방금 증명한 것처럼 유다가 악을 원할 수 있었다는 사실 외에도;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무오한 섭리에 도전하여 자신의 뜻을 바꿀 수 있었겠습니까? 어쩌면 하나님의 섭리를 바꾸어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 의지에 대한 것, 가장 은혜에 대한 것 – 에라스무스 (p.87f.)
나는 어떤 것은 자유 의지로 돌리는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대부분은 은혜에 기인합니다. [...] "왜 자유 의지에 무언가를 부여합니까?"라고 묻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꺼이 물러나는 악인들에게 마땅히 귀속될 수 있는 것이 있게 하려는 것: 그리하여 그가 잔인하고 불의하다는 거짓 비난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 함이라. 그리하여 절망이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안전이 지켜지고 우리가 분투하도록 자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하며, 이는 모든 인간의 희망을 막기 위해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 없이는 효과가 없습니다.
중도는 없다 – 루터(p.189):
에라스무스가 그의 마무리 발언에서 말한 것은 단지 반복일 뿐이다: 만약 루터의 견해가 옳다면, 많은 계명들, 위협들, 약속들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공로와 죄책감, 임금과 처벌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달리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죄하신다면 하느님의 자비나 공의를 변호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과 다른 불편이 뒤따를 것입니다. [...] diatribe는 우리가 중도를 선택하고 자유 의지를 "조금"주어야한다는 선의의 제안을 만듭니다. 그러면 성경의 모순과 앞서 언급한 불편함이 제거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중간 길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더 이상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극단으로 가서 자유 의지가 전혀 없다고 말해야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모순"은 없습니다. 불편을 없앨 수 없다면 감수해야 합니다.
왜 자유롭지 않은 의지가 선포되어야 하는가 (선포되지 않는가)
비자유 의지를 선포하는 비효율성 – 에라스무스(p.16):
그렇다면, Wiklif가 가르치고 Luther가 확언했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자유 의지가 아니라 순전히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사실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보다 더 비효율적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둘째, 어거스틴이 어딘가에 쓴 것이 어떤 의미에서 사실, 즉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선과 악을 행하신다는 것, 즉 그의 선행에 대해 우리에게 상을 주시고 그의 악한 일에 대해 우리를 처벌하신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의견의 발표는 특히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영적으로 번거롭고 제한적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악의적이며 어쨌든 불경건한 죄악에 대해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경건하지 않은 경건한 창으로 열어줄 것입니다. 어떤 연약한 사람이 이제부터 자신의 육체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힘든 투쟁을 견디겠느냐? 이제부터 그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어떤 악이 추구할 것입니까? 마치 고문을 기뻐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의 악행으로 처벌하기 위해 영원한 고통으로 지옥을 뜨겁게 달구는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교육받지 못하고 세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쨌든 불신, 신성 모독 및 신성 모독에 취약하므로 불에 기름을 부을 필요가 없습니다.
Warum solche Lehre verkündigt werden muss – Luther (S.51f.):
Du fragst, ob es nicht bedenklich, ob es wirklich notwendig sei, Sachen zu verbreiten, die so viele üble Folgen haben. Darauf antworte ich: Gott will, dass solche Sachen verbreitet werden. Statt nach dem Grund des göttlichen Willens zu fragen, soll man Gott anbeten und seinen Willen ehren. Denn Gott ist allein gerecht und weise. Darum tut er niemandem Unrecht und handelt niemals blind, mag es uns auch oft so scheinen. Diese Antwort sollte eigentlich genügen. Die Frommen sind mit ihr zufrieden. Doch wir wollen ein Übriges tun und zwei Gründe nennen, warum solche Sachen öffentlich verbreitet werden müssen:
- damit wir demütig werden und die Gnade Gottes kennen lernen,
- damit wir die höchste Stufe des Glaubens erreichen.
Erstens: Gott hat den Demütigen Gnade verheißen (1. Petrus 5,5), also denen, die sich verloren geben und die an sich selber verzweifeln. Es kann aber kein Mensch wirklich demütig sein, bevor er weiß, dass sein Heil gänzlich außer ihm liegt, jenseits seiner Kraft, jenseits seines Planens und Strebens, nicht im eigenen Willen noch Werk, sondern im Urteil, Rat, Willen und Werk eines andern, nämlich Gottes allein. Wer sich einbildet, er selber könne etwas, und sei es auch noch so wenig, für sein ewiges Heil tun, der beharrt noch im Glauben an sich selbst, der verzweifelt an sich selbst noch nicht ganz. Darum demütigt er sich nicht vor Gott, sondern setzt sich selber Ort, Zeit und Werk, um endlich, wie er wenigstens hofft und wünscht, selig zu werden. Wer dagegen nicht daran zweifelt, dass er ganz vom Willen Gottes abhängt, wer also völlig an sich selbst verzweifelt und nicht von selbsterwählten Werken, sondern allein vom Wirken Gottes sein Heil erwartet, der ist der Gnade am nächsten. Der kann selig werden. […]
둘째,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의심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1:1). 그러므로 믿음은 믿어야 할 모든 것이 숨겨져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이제 무언가는 그것이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느껴지고 경험될 때보다 더 깊이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사역 속에 숨어 계십니다. [...] 소수만 구원하는 사람은 자비롭지만 많은 사람을 정죄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그리고 변화시키지 못한 채 사람을 정죄 할 수있는 사람이 정당하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믿음입니다. [...] 하나님이 자비롭고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신앙을 실천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전파하고 전파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우리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 루터 (p.37) :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일어나는 모든 일의 필요성에 대해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는 당신의 가르침과 믿음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믿음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약속,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메시지의 모든 말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시련 속에서 우리의 유일하고 최고의 위안은 하나님께서 진실하시고, 모든 것을 변함없이 행하시며, 그 무엇도 그분의 뜻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루터의 개인적인 고백 – 루터 (p.222f.):
나는 나 자신을 고백한다 : 내가 선택해야한다면, 나는 자유 의지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팔복을 위해 노력할 기회를 갖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합니까? 너무나 많은 시련과 위험이 있고, 사람을 괴롭히는 악령이 너무나 많아서 각 영은 모든 사람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해서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위험, 시련, 악령이 없다면. 나는 미지의 세계로 고군분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내 발 밑에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설령 영원히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해도 양심은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하는지 결코 말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사역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하는 괴로운 생각이 남습니다. 하나님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겠느냐? 이것은 제대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 역시 여러 해 동안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팔복에 대한 나의 염려를 덜어 주셨습니다. 나는 이제 나의 행복이 나의 의지가 아니라 그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안다. 그분은 나의 행동과 달리기가 아니라 그분의 은혜와 자비로 나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에게 거짓말을하지 않습니다. 그는 너무나 강력하고 위대해서 어떤 악령이나 시련도 그를 넘어뜨리고 나를 그에게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속한 자들을 내 손에서 찢을 자가 없나니 그들을 내게 주신 아버지께서 다른 어떤 것보다 크시니라"(요한 10,28f)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 심지어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다. 자유 의지는 사람을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모두 우리의 행위와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은혜와 자비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했습니다.
소스
Simon Mayer가 소개하고 편집했습니다. 다음 소스가 사용되었습니다.
- Erasmus von Rotterdam, Vom freien Willen [trans. by Otto Schumacher], Vandenhoeck & Ruprecht, Göttingen, 6th ed. 1988. 원래 라틴어 제목은 "De libero arbitrio"입니다.
- Martin Luther, Vom unfreien Willen [trans. by Otto Schumacher], Vandenhoeck & Ruprecht, Göttingen 1937. 원래 라틴어 제목은 "De 서보 arbitrio"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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