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의의 흉배를 매라
말씀: 에베소서6:13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만나교회담임 이덕휴목사
본문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본문에서 두 가지를 주목하고 싶다.
첫번째, 하나님의 전신 갑주이다. 이것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두번째, 우리는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입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입을 수 있게 만드시기만 하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갑옷을 입고 말씀의 흉배를 차고 복음의 신발을 신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입어야 한다. 이 두가지를 이해하는데 있어 다음 구절은 굉장히 중요하다:
1.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에베소서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이것은 전신갑주의 두번째 부분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의의 흉배에 대해 집중해서 살펴볼 것이다. 에베소서 14-17절에 나와 있듯이, 전신갑주에는 여러 가지 부분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만든 신 것에는 이유가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흉배는 무엇을 위해서 만들어 졌는가? 그렇다. 이 흉배는 가슴을 보호한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우리 몸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심장이 왼쪽 가슴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흉배에 가장 중요한 기능은 심장을 보호하는것이다. 성경에선, 심장을 마음 또는 속 사람에 비유한다. 우리 마음 속에 들어있는 생각으로 우리를 나타낸다.
잠언 4장 23절에서 말하길;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하나님 말씀에선 그 어떤것 보다도 우리 마음을 지키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우리 속사람을 뜻한다. 정말로, 우리 속 사람이 무엇이 있고 우리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에 따라 “생명의 문제”들을 결정짓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히 이 부분을 사탄이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만약 사탄이 우리 마음을 뚫을 수 있다면, 즉, 우리 안의 속사람이 바로 사탄의 목표물이 된다. 사탄이 신실하고 헌신적인 기독교인의 마음에 자주 쓰는 무기는 정죄함이다. 이 “정죄함”이란 무기는 마음, 속사람을 아프게 만드는 최고의 무기 중의 하나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강력한 무기이다. 요한1서는 이 질병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요한1서 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을 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만일” 인데, 이곳에서 또한 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명심하라. 정죄함은 마음과 속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병이다. 우리가 마음 속에 정죄함을 가지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앞에서 담대함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가진 우리를 향한 뜻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이다(빌립보서 4:4).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없다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우리의 방어로 사용하면, 사탄은 정죄함을 우리 삶 가운데 가져올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어떤 부분이 우리의 마음을 보호할까? 에베소서 6장 14절은 우리에게 말한다:
2. 하나님의 의
"“그러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흉배를 붙이고” 에베소서6:14
그 부분은 의의 흉배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의란 무엇을 뜻하는가? 흔히 이 구절에서 행위을 통한 의로움이 먼저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선입견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이 자기 의를 뜻하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우리가 말하길 “내가 착하고 선한 행동을 한다면 난 의로워”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게 있는데, 성경에서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20)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우리의 자기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 이다.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의란 바울에 의하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다메섹에서 받은경험을 하기까지는, 하나님의 율법의 이행에 의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확립에서 구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 사건 이후 그 방법은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죄를 범한 일이 없는 인간이란 한 사람도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계명을 전부 지키고, 적극적으로 거룩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바울의 신학은 모두 경험적이었다. 그는 자기의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일(십자가에 의한 구속)을 믿는 것에 의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깊이 발견했다. 이 사실을 인식한 후 그는 자기의 힘으로 의롭게 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고 다만 [하나님의 의]에 의해,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이것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일](義認)의 의미이다. [의로운], [의롭다 함], [의](dikaios, dikaiosis, dikaiosyne)라는 사도 바울의 표현은, 모두 동일어근에서 파생하고 있다. 따라서 신앙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란 믿는 것에 의한 의,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계시된 복음을 믿는 것에 의해,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 이것은 우리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갑주를 만들어라”고 하지 않았다. 말씀하시길,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했다(에베소서6:11). 만약 전신갑주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흉배는 누구에 의한 것일까? 이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그렇다면 “의의 흉배”의 의는 누구에 의해서인가? 우리의 선행을 통해 얻은 의로움인가? 아니다.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이다. 실제로 전신갑주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각각의 부분들로 나뉘어져 있다. 우리가 갑옷을 만들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입기만 하면 된다. 이 의에 대해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할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의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애쓰면 안된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알아야 할 것이, 로마서 3장 20절 말씀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또한 로마서 3장 23-24절 말씀에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 하나님의 은혜
.” 은혜는 은혜로 행위는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
로마서 11장 6절에도 말하듯이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로마서 11:6) . 그때에 비로소 의의 흉배를 붙일 수 있다 ( 에베소서 6:14). 그렇지 않다면, 마음이 보호받지 못하고 정죄함의 병에 걸리기 쉬울 것이다. 사탄이 교활 함정에 우리를 가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전신갑주를 착용하지도 않고,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을 착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흉배를 착용한 게 아니라, 자기 의의 흉배를 착용하고 있다. 하지만 자기 의의 흉배의 그 결함이 하나님에 말씀에 의해서 선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그 자기 의의 “흉배”를 입는다면, 우리는 사탄에 의해서 생기는 정죄함의 병에 걸리기 아주 쉬울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우리 마음을 진리의 의의 흉배로 보호한다면, 로마서 8장1절에서 말하는 말씀이 우리 삶에 성취될 것이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바로
로마서 7장 21절∼8장 2절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없나니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의 문제로 인해서 낙심하고 좌절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와 싸울려면 맨손으로는 맨몸으로는 맨정신으로는 죄와 싸워이기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겨낼 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죄를 이기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기만 하면 됩니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성령의 은혜입니다.
참고로 종교개혁자 루터는 성경말씀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칼빈이나 뮌쳐는 성령님을 주안점으로 두었습니다. 보이는 성령님이 성경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안보이는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있지만 결국 성경의 가르침이 성령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항해하는 배가 나침반을 보면서 항해하듯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감동하고 거기서 성령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 각자에 보내주셨으며 거룩한 성령님의 이야기가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덧입는 것 그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인 하나님의 전신갑주임을 믿으시는 우리 만나인 모두가 성령님의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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