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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G.W.F.Hegel

그래도 헤겔이다

by 이덕휴-dhleepaul 2023. 1. 4.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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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Hegel
본명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출생
사망
1831년 11월 14일[2] (향년 61세)
국적
직업
학력
일루스트레 김나지움
튀빙겐 대학교 (철학 / 1790년 석사)
예나 대학교 (철학 / 1801년 박사)[3]
경력
뉘른베르크 김나지움 교장 (1808~16)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 (1816~18)
베를린 대학교 교수 (1818~30)
베를린 대학교 총장 (1830~31)
종교
서명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튀빙겐 시기2.3. 예나 시기2.4. 뉘른베르크 시기2.5. 하이델베르크, 베를린 시기2.6. 말년
3. 사상4. 영향5. 비판
5.1. 비판에 대한 지젝의 옹호
6. 저서7. 어록8. 관련 강의 영상9. 여담

1. 개요[편집]

헤겔은 18~19세기 프로이센의 철학자이다. 칸트, 피히테, 셸링 등의 독일 관념론 철학을 계승하여 완성시켰다. 존재와 사유, 주관과 객관의 모순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일치시키려고 했으며, 논리학ㆍ법철학ㆍ역사철학ㆍ미학ㆍ종교학을 아우르는 거대한 체계를 구상해, 후대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헤겔은 전통철학의 완성자이자 현대철학의 비판적 출발점이기 때문에, 전통철학을 공부하든지 현대철학을 공부하든지 간에 헤겔을 모르고서는 철학을 깊이있게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현대철학자들은 헤겔 철학의 비판적 해석을 통해서 자기 철학의 정당성을 마련하고 있으므로, 헤겔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이야기 자체를 이해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현대철학에 깊이 다가가기 힘든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동시에 그의 철학은 극도로 난해한 철학으로 정평이 나 있어서 대부분은 입문 단계에서 포기하는 철학으로도 유명하다. 100명의 철학자가 있으면 100명 전부가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정도로 어렵고 복잡하며, 서로 자기가 내린 해석이 맞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오해와 그러한 오해를 반박하는 글도 엄청나게 많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도 역시 헤겔 철학이다. 그래서 미셸 푸코는 일찍이 헤겔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헤겔에 대항하여 사고할 때조차 그것이 여전히 헤겔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헤겔은 1770년 8월 27일 독일 남부의 작은 공국 뷔르템베르크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공무원[4]인 게오르크 루드비히 헤겔과 그의 아내 마리아 막달레나 루이자 헤겔의 맏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교육과 문화를 중요시 여겨, 헤겔을 3살 때 독일어 학교에 보냈고, 5살 때는 라틴어 학교에 보냈다. 또한 헤겔은 동시에 여러 과목의 개인 교습을 받았는데, 10살 때는 아버지가 지역의 유명한 수학자를 데려와 헤겔에게 기하학 개인 교습을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11살이 되던 1781년, 당시 유행하던 말라리아 열병으로 헤겔은 어머니를 잃게 된다. 헤겔과 아버지도 말라리아 열병에 걸렸으나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고, 어머니를 잃은 충격으로 헤겔은 아버지와 멀어졌다. 이때부터 말을 더듬는 습관도 생겨났다.

헤겔은 집이 점차 불편해졌고, 집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집에도 읽을 거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이면 공립 도서관에 가서 하루를 지내곤 했다. 때문에 아버지 말은 잘 안 들었지만 학교에선 다행히 모범생이었고, 대학 입학을 위해 고향을 떠난 18살 때까지 줄곧 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2.2. 튀빙겐 시기[편집]

1788년, 18살의 헤겔은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집을 떠나 튀빙겐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부의 엄격한 규율과 낮은 수준의 강의는 헤겔로 하여금 수업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위로가 되는 건, 그와 마찬가지로 높은 성적으로 입학했으며 훗날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 되는 횔덜린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2년 뒤엔 5살 어린 천재 셸링이 입학했고, 셋은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면서 금새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들은 신학보다는 철학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자유와 자발성을 강조하는 칸트류의 철학에 마음을 뺏겼고, 이윽고 서로 목사가 되지 말자며 결심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1792년에는 마침내 프랑스에서 왕정이 폐지되자, 소식을 들은 셋은 근처 들판에 혁명을 기념하는 "자유의 나무"를 세우고는, 프랑스 혁명의 춤인 카르모뉼을 추면서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나무 주위를 돌았다고 전해진다.[5] 혁명에 고무된 신학생들은 혁명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정치 모임을 만들었고 신학교는 곧 왕정에 반대하는 혁명가들의 양성소가 되었다. 헤겔도 그 정치 모임의 회원이었다. 하지만 당국이 탄압하자 정치 모임은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사라졌고, 헤겔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단지 "계몽되는 것" 이상의 사회적 실천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목사를 포기한 헤겔은 1793년 신학부를 졸업하고 이후 베른 프랑크푸르트를 떠돌면서 가정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가정교사는 귀족으로부터 하인이나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헤겔은 곧잘 우울증에 빠지곤 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헤겔은 헤르더, 루소, 스피노자 등을 읽으며, 앞으로 펼쳐질 자신만의 사상의 토대를 구축한다. 그는 계몽주의자들이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추론하여 '개인의 자유'라는 추상적인 권리를 도출해냈지만, 독자적인 개인은 도리어 개인의 감정과 욕망에 충실하게 되면서 공동체는 개인의 직업과 이익에 따라 분열하기 시작했고, 이는 역설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적 사고와 감정적 행동의 불일치는, 이성으로 추론한 객관적인 권리가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주관적인 내면화로 변환되지 않아서이다. 그렇기에 헤겔은 개인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이렇게 파편화된 사회를 하나로 뭉치는 '정신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헤겔은 그 답이 "교양Bildung"에 있다고 생각했다.

교양은 '수동적인 교육'과 구별되는 것으로, 교양은 '자기 비판'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6] 그리고 '스스로를 비판(부정)하는 것'으로서의 교양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들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기를 요구한다. 즉, 교양은 합리적 이성으로 추론한 객관적 이념이, 개인 각각이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따르는 주관적인 내면화로 일치되는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판(부정)할 수 있는 '자유'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헤겔은 당시 새로운 학문을 신설하고 가르치는 "대학"만이 이러한 교양을 퍼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학문을 '비판적(부정적)'으로 가르침으로써, 주관과 객관, 특수와 보편, 실천과 이념 사이의 모순을 매개하고 일치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될 것이다.

2.3. 예나 시기[편집]

그러므로 이제 헤겔은 강단 철학자로서 대학의 교수가 되는 길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 1800년에는 용기를 내어 연락이 끊겼던 옛 친구 셸링에게 교수 임용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사이 셸링은 철학계의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는데, 셸링은 무명의 가정교사에 불과했던 옛 친구 헤겔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헤겔은 곧장 셸링이 있는 예나로 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셸링의 추천을 받아 예나 대학의 교수 임용 시험에 도전한 헤겔은 「행성들의 궤도에 관하여」라는 교수 자격 논문을 제출하여 합격했다. 그리고 겨울 학기부터 임시 강사 자격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헤겔은 첫 해에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를 출간하면서 학문적으로 셸링의 추종자가 되었으며, 1년 뒤인 1802년에는 셸링과 함께 《철학 비판 저널》이라는 학술지 편집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렵 셸링은 동료 아우구스트 슐레겔[7]의 아내 카롤리네와 연애 끝에 결혼하면서, 이를 역겹게 지켜보았던 주위 동료들에게 배척당했다. 셸링은 도망치듯이 뷔르츠부르크 대학으로 떠났고, 이렇게 됨으로써 헤겔과도 멀어졌다.

이제 홀로 서게 된 헤겔은 자신의 미래 전체를 걸고 자기 자신의 책을 써서 지식인들의 사회에 우뚝 서야 했다. 그리고 헤겔은 철학사에 길이 남을 책, 『정신현상학』을 1807년에 발표한다. 『정신현상학』은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만들어 준 출세작이자 이후 그를 대표하는 책이 된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오기까지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쓰면 쓸수록 원고가 걷잡을 수 없이 길어지는 바람에, 출판사에 원고를 전달하기로 한 날짜를 번번히 어길 수밖에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가장 중요한 장을 저술하고 있을 때,[8] 예나 중심가는 프랑스 군이 일으킨 전쟁으로 포격을 당하고 있었다. 헤겔은 자신의 집 창문 밖으로 나폴레옹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9] "나는 황제가 ㅡ 그 세계 영혼이 ㅡ 도시 외곽에서 말을 타고 정찰하는 모습을 보았네." [10]

전쟁은 예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대학의 신입생은 줄어들었고 그만큼 헤겔의 급여도 줄어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가정부 요한나 부르크하르트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루드비히 피셔가 태어났다. 돈이 부족해진 헤겔은 어떤 형태의 일자리든 얻어야 했다. 헤겔은 다른 대학의 교수자리를 절실하게 찾아다녔으나 구하지 못했고,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밤베르크에 있는 신문 편집자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신문 편집자로서의 생활은 수입도 괜찮고 사회적 지위도 보장해 주었지만, 그래도 헤겔이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대학을 자신의 천성적인 고향으로 여겼다. 헤겔은 바이에른의 교육부 장관이었던 친구 니트하머에게 대학 임용에 관해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고, 1808년에 니트하머는 헤겔에게 뉘른베르크에 있는 김나지움[11]의 교장직을 맡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헤겔은 비록 원하던 대학 교수 자리가 아니지만, 신문 편집자로 있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 제안을 기쁘게 수락했다.

2.4. 뉘른베르크 시기[편집]

헤겔은 김나지움의 교장직을 맡으면서, 학생들에게 예비적인 철학 수업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도 담당했다. 그는 학교가 특정 직업을 수행하기 위한 실용적인 훈련 기관이 되어선 안되며, 학교는 학생들이 스스로 방향을 잡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어, 그들이 보편적 교양인이 될 수 있겠끔 유도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가난한 학생들의 학업을 정부가 도와줘야 된다고 주장했고 이를 위해 노력했다.[12] 하지만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13]은 학교의 기능을 거의 상실할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고 재정 상태는 엉망이었으며, 정부는 학교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데 인색했다. 심지어 학교 건물에는 화장실이 없었는데, 헤겔은 니트하머에게 학교 상황을 보고하면서 화장실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것은 공공 교육의 새로운 차원이며, 나는 그 중요성을 이제야 깨달았네. 이를테면 교육에 있어서 엉덩이의 중요성을 말일세." [14] 그러나 이 모든 현실적인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김나지움을 성공적으로 궤도에 올려놓아 대중의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교장으로서의 성공은 헤겔에게 고위층 사회로 접근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고위층 사람들만 가입할 수 있는 "박물관Museum"이라는 이름의 사교 모임에서 폰 투허 가문의 사람을 만났고, 그 인맥을 통해 헤겔은 1811년 9월 15일, 마리 엘레나 수잔나 폰 투허와 결혼했다.

이 시기의 헤겔은 자신이 맡은 철학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논리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수업 내용과 그 동안의 생각들을 바탕으로 『논리의 학』 제1권을 1812년에, 제2권을 1813년에, 제3권을 1816년에 차례대로 출간했다. 헤겔에 따르면, 논리학은 모든 철학을 작동시키는 기초이면서 자기 자신을 자율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기획이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 체계의 핵심은 더 이상 『정신현상학』이 아니라 『논리의 학』이 차지하게 된다.

『논리의 학』에서 헤겔은, 사유와 존재를 "판단(또는 규정)"하기 이전의, 통일되고 근원적인 '의식'을 전제한다. 이른바 "순수한 앎"이다. 하지만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판단(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사유 속에서 다양한 역설과 긴장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만들어 낸다. 한편 역설과 긴장을 만들어내는 각각의 판단들은 오직 더 큰 추론 속에서 유의미해지기 때문에, 보다 더 큰 추론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가장 큰 추론을 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겔은 이를 "이성들의 공간" 또는 "이념(객관성)"이라 부른다. 이 "이성들의 공간"은 개별 판단에 의한 논리적 역설과 긴장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큰 전체로서 다시 사유와 존재의 통일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것은 "주관적인 개념인 동시에 객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이성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가장 큰 추론이므로, 이 이성 외부에 기준으로 존재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이성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정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정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개별적 판단이 비록 한계를 가지더라도 결국 우리 모두의 판단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정립할 수밖에 없다는 말과 같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모든 규정(판단)은 부정"이기에, 통일된 "이성들의 공간"에서 각기 부분으로 위치할 개인들이 그 자신의 "부정성"을 끊임없이 산출해야 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부정성"은 "스스로 생각하기", 즉 자율을 요구한다.

2.5. 하이델베르크, 베를린 시기[편집]

헤겔의 높아진 평판과 지속적인 그의 노력 덕분에 1816년 마침내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헤겔에게 교수 자리를 제안했다. 보수에 관해 잠시 협상을 한 후 헤겔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느덧 46살의 중년이 된 헤겔은,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정생활과 교수로서의 직장생활을 즐기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헤겔을 둘러싼 세계는 변했고, 그에 상응하여 헤겔의 생각과 체계도 변했다. 이제 헤겔은 자신이 혁명을 말하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이미 일어난 혁명을 어떻게 지속하고 유지하는 데 관심을 가지는 철학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1817년에 발표한 『철학대계 (엔치클로페디)』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정립된 근대적 이념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이 시절에 헤겔은 헌법에 관한 논쟁에 뛰어들게 되면서, 스스로 "객관 정신"이라고 말했던 사회 제도와 법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러는 와중에 프로이센 문화부 장관으로 막 임명된 알텐슈타인이 베를린으로 헤겔을 부르자, 헤겔은 1818년 베를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헤겔은 베를린 대학에 있으면서, 독일 국가들이 어떤 헌법을 가져야 되는지를 철학적으로 해석한 『법철학 요강』을 1820년 발표한다. 이 책에서 헤겔은 "자유" 자체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 어떻게 국가와 법에 의해 조건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자 했다. 헤겔에 따르면, 자기 비판적인 각각의 개인들은 자신의 이성적 생각과 자유에 따라, 스스로가 다른 개인들과 유기적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만한 "전체" 구조 속의 한 지점을 찾아들어간다. 그러기 위해서 개인은 미리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거꾸로 "전체"는 "민중"이 집단적으로 합리적(이성적)이라고 설정하는 것에 대한 이해에,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할 수밖에 없다. 즉, "전체"는 오직 합리적인(이성적인) 개인들이 자유롭고 집단적으로 창출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법"에 의해서만 기획될 수 있고, 이를 통해 획득한 다양한 법률적, 규제적, 조합적 구조들이 "전체"에 윤리적 권위를 부여할 때, 개인은 그 권위를 기준삼아 "전체"를 조망하고 스스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헤겔은 이 "전체"를 국가라고 보았다.[15] 이것은 정치철학을 역사철학으로 몰고 간다. 왜냐하면 이성에 대한 이러한 설명[16]은, 역사적으로만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겔은 세계사의 철학에 관한 짧은 몇 단락으로 『법철학 요강』을 종결지었다. 그리고 헤겔은 후에 일련의 강의를 통해 이것을 확대했다.

2.6. 말년[편집]

역사철학, 예술철학 등의 강의는 성공적이었고, 헤겔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갔다. 헤겔이 강의실에 들어서면 웅성거리던 소리는 갑자기 멈추었고, 심지어 너무나 조용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헤겔 고유의 이해하기 힘든 용어와 농담들은 도시 전역에 빠르게 퍼져서, 실제로 거의 모든 곳에서 그의 사변적인 표현들이 쓰여졌다. 대학의 건물 벽이나 담장에는 분필이나 연필로 헤겔의 말들이 적혀 있곤 했다. "당신, 헤겔이 한 말 들어 보았소?"는 베를린 사회의 일상적인 말이 되었다. 헤겔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쇄도했고, 자신의 작품을 읽고 대학에서 좋은 말을 해 달라거나 한번 만나 달라고 하는 등의 편지를 헤겔은 정기적으로 받았다. 이 무렵 헤겔은 책을 펴내지 않고 오직 강의를 통해서만 자신의 체계를 세워 나가고 있었는데, 그래서 헤겔의 강의를 받아 적은 노트의 사본은 사람들이 늘 찾는 품목이었다. 1826년에는 제자들이 마련한 헤겔의 깜짝 생일파티가 지역 신문에 실렸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헤겔의 생일을 보도한 신문 기사를 읽고 화를 냈다. 자신의 생일파티에 대한 보도와 비교할 때 헤겔의 생일파티가 너무 많은 지면을 차지했다는 이유였다. 그리하여 왕은 내각령을 공표해서 이 시점 이후 "개인의" 생일에 대한 신문 보도를 금지했다.

1830년에는 드디어 베를린 대학의 최고 행정직인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더군다나 대학을 감독하는 정부의 전권대사로도 임명되었다. 그러나 1829년 들어 나빠진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상부 위장관 질병으로 인해 가슴 통증은 심해졌고 빈혈로 인해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럼에도 강의는 꾸준히 진행했다. 그러던 어느날 심각한 통증이 몰려와 하루종일 가슴 경련과 복통을 호소하다가, 그 다음날인 1831년 11월 14일 오후 다섯 시경에 세상을 떠났다.[17]

당시 베를린은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었고, 의사들은 헤겔이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진단했다. 그렇지만 죽음의 원인은 사실상 콜레라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헤겔은 설사나 발열, 혹은 그 밖에 어떤 콜레라 증상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18]

이틀 뒤 치뤄진(11월 16일) 장례식은 거대한 행렬을 이루었다. 헤겔의 시신을 실은 마차 뒤를 학생들과 도시 전역에서 모인 수많은 애도자들이 뒤따랐다. 심지어 헤겔의 반대자들도 그의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헤겔 자신의 소망에 따라 도로테아 공동묘지에 있는 피히테 옆에 묻혔다. 헤겔이 죽은지 12년 후에, 미쳐버렸던 그의 절친한 친구 횔덜린도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헤겔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방문객의 질문을 받고는, 중얼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해댔다. 분명한 것은 이 말이었다. "절대자요 The Absolute."

3. 사상[편집]

[편집]

 

헤겔은 특히 철학자 중에서도, 철학 체계가 방대한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독일 현지를 제외하면 그의 철학적 면모들 중 일면만이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때 영국에서 유행하던 헤겔은 그의 논리학적 일면이었고,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헤겔이었다.

독재에 대항하던 운동권들이 마르크스를 추종하던 경우가 많았던 한국에서 가장 널리 퍼진 헤겔은 역사철학에서의 헤겔이다. 즉, 마르크스 사상적 스승으로서의 헤겔과 헤겔 철학의 기저를 이루는 방법론인 변증법이다.

헤겔은 이성이 인류를 진보로 이끌며 이성이 진보를 일궈내는 메커니즘이 바로 변증법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리스의 자유로움과 로마의 외적 율법주의(엄격한 법치)가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현대 서유럽의 법체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어떤 국민이 있다(정). 그런데 아주 나쁜 독재자가 나타나서 국민들을 탄압한다(반). 분노한 국민들은 독재자를 몰아낸다(합). 독재자를 몰아낸 사회는 처음의 사회와 비슷해 보이지만, 독재자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그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경험·제도를 얻은 더 나은 사회이다.

정명제에 대립되는 반명제가 제시되고 그 둘에서 합명제가 나온다. 그 합명제는 단순히 기존의 정명제, 반명제 중에 이긴 일방적인 어느 한쪽뿐이 아닌 둘 모두를 '종합'(syn)을 통해 부정하며 또한 긍정한다. 때문에 합명제는 다시 정명제가 되어 종합의 과정을 계속 이어간다. 이는 한 정파가 정쟁에서 승리 후 다른 정파를 모두 부정하는 그런 현상과는 다르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고 민주화도 이루어지자 운동권도 점차 세를 잃으며 자연스레 헤겔도 인기를 잃어갔다.

하지만 헤겔 철학은 역사철학에 대한 변증법의 활용만으로 단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9][20]

헤겔의 철학에서 등장하는 '변증법'이라는 개념은, 영어로 대강 따지면 conversation이 아니라 dialogue에 가깝다. 말하자면 변증법은 부정과 긍정이 교차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스 어 dialektike를 연상하면 편할 것이다.[21] 설명하면 dialektike라는 것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좋아하는 대화법, 혹은 교육 방침이다. 질문에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서 어떤 사실을 부정하고 어떤 사실을 긍정해 가며 참다운 정의에 다다르게 한다. 『메논』에서는 이 변증술을 통해 직각삼각형 같은 수학적 개념을 모르는 사람이 그 개념을 깨닫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계속해서 얘기하지만 헤겔에게 있어서 '변증법'이란 학문이 나타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논리에 불과하다.

헤겔은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인식과 지식을 관찰해 보고자 했다. 헤겔 이전에 철학계의 입장은 '사물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우리의 오감을 통해 만든 이미지는, 사물 자체와 비교해 보면 한차례 걸러지면서 왜곡된 것이기 때문에, 사물 자체에 대한 접근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 대해 헤겔은 기존의 철학자들을 "쫄았냐?" 라고 비웃는다. 쫄보인 그들은 실수가 두려워서 물자체에 대해 알 수 없다든가, 전지전능한 신이 모든 걸 전해준다든가 등등의 이런저런 개념만 전제하면서 정신이 펼쳐지는 모습을 그저 관찰만 했다고 비판했다.

우리가 무엇을 알거나 그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감각으로써 가능하다. 사과를 보고 빨간색임을 알거나, 만지고 미끈한 감촉을 느끼거나, 먹고 단맛을 느낀다. 인간의 정신과 개념은 결국 감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이 느낌들은 분명 언어로는 정확히 환원될 수 없는 어떤 느낌이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은 정확하지 않고 착각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므로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옳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물자체란 것이 우리의 개념과 분리된 어떤 실체가 될 수는 없다. 이른바 물자체란 것 또한 개념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물자체란 것이 있고 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상정한 이후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개념에 대해서만 논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물자체란 것은 개념이 아닌가?

어차피 개념밖에 논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물자체를 설정하는 것은 실패할까 조마조마해하는 쫄보들의 작태다. 감각 경험 역시 개념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감각을 느끼며 이것이 언어나 개념과 불일치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말하려는 순간 이 감각은 언어가 되고 개념이 된다. 즉 개념화, 이성의 작용이라는 것은 1차적으로 부정이 된다는 것이다.

이성으로 개념을 만든다는 것은, 이 부정이 곧 규정이자 개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감각을 느끼고 이를 생각하며 분류하는 것은 뜨거운 것도 아니고, 단 것도 아니고, 쓴 것도 아닌 여러 감각들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헤겔은 이성을 써서 무엇인가를 규정함이 곧 부정이라고 생각했다.(여기서 부정은 어떤 사태가 단순히 부정되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지금 여기 있는 한 사물을 단순하게 '이것'이라 표현했다 한다면, 이는 가장 개별적인 표현일 터이다. 그러나 이 감각적인 확신은 곧바로 부정된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것으로 표현된 '이것'은 아주 보편적인 규정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사물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규정은 그것이 놓인 시간과 장소의 변화에 따라 부정된다. 헤겔에게 이러한 감각적 인식에서의 부정은, 단순히 부정되어 사라짐이 아닌, 고차원의 인식으로 이행된 긍정이다. 즉 감각적 확신에서 부정된 내용은 이미 지각의 대상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의 양태를 부정과 긍정이 교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말하자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다움, 이성이라는 것은 고전 그리스 철학부터 이어진 유산이다. 그리스 어에서 이성(logos)은 곧 언어를 뜻한다. 이것은 인류에게 공통된 인식이기도 하다. 헤겔에게 이성과 언어의 작용은 부정인 동시에 긍정이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인식 등을 다루던 당대 학문의 경향에 있어서, 헤겔이 말하는 지식의 참된 획득 방법은 감각이 들어오면서 앞으로 나갔다가, 이성과 언어로 이를 규정하면서 뒤로 한 번 후퇴하고, 그것은 또한 동시에 이성이자 언어이자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한 걸음 나가는 작용이다. 다른 것과 구분하면서 부정이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그 결과로 인해 하나의 지식을 얻는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정반합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라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통하며 동시에 파르메니데스의 사상과도 통한다. 무슨 말이냐면 모든 것을 종합했다고 일컬어지는 헤겔답게 대강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이면서 말이 되는 걸 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변증법 요소 중 하나는 아우프헤벤이다.

4. 영향[편집]

"우리 시대는 논리학을 통해서건 인식론을 통해서건, 마르크스를 통해서건 또는 니체를 통해서건 간에, 모두 헤겔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헤겔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그와 유리됨으로써 치르게 될 대가를 정확히 평가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비록 공공연하게는 아니더라도 암묵적으로나마 헤겔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알아야 하며, 우리가 헤겔에 대항하여 사고할 때조차 그것이 여전히 헤겔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를 상대로 한 제소, 그 소송이 실은 그 헤겔이 우리에게 마련한 계략이며, 그 끝에서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미셸 푸코 콜레주 드 프랑스 취임 강연문에서

헤겔 이후의 철학은 그게 비판이 되었든 동의가 되었든 간에 헤겔이 뿌려놓은 씨 위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스스로를 "거꾸로 선 헤겔학도"로 표현했을 만큼 변증법적 방법론을 그의 체계에 도입하고 있지만, 청년 헤겔 학파 등에 대한 그의 무지막지한 비판 덕분에 종종 헤겔 안티로 오해받기도 한다. 블라디미르 레닌, 게오르크 루카치, 테오도르 아도르노 등의 철학은 변증법적 방법론을 마르크시즘에 적용시킨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이데거를 위시한 해석학도 헤겔에게서 출발한다. 슬라보예 지젝 자크 라캉과 헤겔 철학 사이의 연결점을 파악하려 시도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라캉과 헤겔 사이에도 연결고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라캉이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그 유명한 헤겔 강의를 듣고 영향을 받았으니.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전집을 읽는것보다 데이비드 흄의 저서 한 페이지를 읽는것이 더 가치있다."는 말로 헤겔에 대한 평을 일축해 버렸다. 그외에도 헤겔을 비판한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꼽자면 에드문트 후설, 쇠렌 키르케고르, 빌헬름 딜타이, 질 들뢰즈, 칼 포퍼가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영미 철학계의 주류였던 분석철학은 헤겔에 대해 비판적인 어조를 취했다. [22] 그 이유는 첫째, 이 시기 분석철학은 과거 철학자들의 작업을 진지하게 고찰하거나 철학사적 맥락 하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에 소극적이었고, 둘째, 명료한 글쓰기와 철저한 논증을 중시하는 분석철학이 가진 철학적 논증의 특성상 헤겔의 철학적 논증 방식과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미철학권, 즉 분석철학의 조류 내에서 헤겔 철학의 지위는 대륙의 그것만큼 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분석철학'의 조류 내에서 때때로 그들이 공격하거나 비판하는 철학적 입장의 대표자로서 종종 등장하곤 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 분석철학이 헤겔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분석철학의 출발점은 프레게가 현대논리학을 개발하고 함수 개념을 언어 분석에 사용한 것인데, 수학자였던 프레게의 작업이, 칸트라면 몰라도[23], 어떤 식으로든 헤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힘들다. 비트겐슈타인은 공학도 출신으로, 말년에 가서야 플라톤의 저작들을 읽어봤을 정도로 기존의 철학적 전통에 철저히 무관심했다.[24] 논리실증주의의 형이상학 비판도 경험적 내용을 갖지 않는 기존 형이상학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이었지, 헤겔을 딱 집어서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헤겔주의가 분석철학에 미친 영향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러셀과 무어가 영국의 헤겔주의[25]를 혹독하게 비판한 일도 있었고[26][27], 러셀, 무어, 화이트헤드 등이 따랐던 신실재론 및 인식론적 일원론의 관점은 독일 관념론과 헤겔 철학을 비판하면서 탄생했다.

이후 분석철학에서도 헤겔을 분석적 방법으로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는 사람도 나타났는데, 이런 경향은 과거의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딱히 헤겔에 대해서만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28]나, 영미권 내에서 20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진지하고 활발하게 연구되는 학자 중 한명이 바로 헤겔이다. 이런 연구자들은 헤겔의 관념론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의미의 재구성에 대한 부분을 주로 건드리고 있다. 가끔씩은 헤겔의 대논리학을 분석철학적 방법론으로 연구하는 경우도 있고. 칸트에 대한 적절한 비판으로서 분석철학 내에서 '비형이상학적 헤겔'이 해겔에 대한 새로운 독해로서 등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비형이상학적 헤겔' 독해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실용주의 진영 내에서 '실용주의적 헤겔'의 독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동양 철학과 헤겔을 연결시켜 보려는 시도도 있다. "의식의 절대적 도야"를 목표로 삼은 헤겔과 동양 철학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 임석진의 "정신현상학" 번역본을 보면 헤겔 철학과 동양 사상의 접점으로 이끌 만한 논의들에 대해 제법 다양한 주석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확고한 목적론을 지닌 헤겔 사상을 무정형의 변화를 기본으로 하는 동양사상에 대입하는 것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어려운 것이라 하겠다.

한편 헤겔 철학은 한국과 일본의 운동권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양국의 운동권 대학생들은 마르크스주의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헤겔주의에 대한 지식 역시 함께 습득했는데, 이때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의 단계, 즉 주인-노예의 변증법이라는 구조가 마르크스주의적 운동의 대안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한국에서 헤겔 사상이 독재 정권에 의해 어용 철학으로 악용당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저항의 과정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활용되기도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점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헤겔주의자로는 알랭 바디우, 악셀 호네트, 찰스 테일러, 피츠버그 학파의 로버트 브랜덤과 존 맥도웰 등이 있으며, 최근의 대표적인 철학자는 슬라보예 지젝이 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헤겔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5. 비판[편집]

나폴레옹 프랑스 시기에 출간된 그의 초기 저서 『정신현상학』이 부정적 사고를 전제로 하는 변증법 개념을 전면에 도입했다는 점에서 그는 일면 진보적 철학자로 여겨졌으나, 말년에 프로이센의 새로운 지배층 육성을 위한 베를린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법철학』을 출간해 헤겔이 프로이센 독재를 옹호하는 관제 철학자가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어왔다. 이 논쟁은 그의 사후, 헤겔학파가 좌우파로 나뉘어지며 매우 중요한 쟁점이 된다.

그의 철학은 너무나도 낭만적이며 몽상적이라는 점 또한 그가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낭만적인 경향은 그와 교류했던 셸링이나 횔덜린 등의 낭만주의자들과는 크게 다른 지점이 있다. 대부분의 낭만주의자들이 신을 지향하면서도 결코 신에게는 이를 수 없다는 낭만적 아이러니를 중시한 것에 비해, 헤겔은 말 그대로 철학사의 운동을 통해 인간이 신과 같아질 수 있다고 보았다. 오히려 이는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전통의 복원을 운운하던 낭만주의자들 입장에선 경악할 소리이기도 했다.

한편 칼 포퍼는 마르크스주의를 싫어한 만큼이나 헤겔주의 역시 싫어했는데, 헤겔을 플라톤과 함께 전체주의를 정초한 권위주의적인 학자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헤겔주의의 정신적 측면을 절충하여 주체사상을 형성하였고, 이게 일인 독재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런 비판도 받을 법하다. 사실 헤겔 철학을 유물론적으로 계승한 공산국가 전체가 독재 국가였다. 또한 그는 헤겔이 칸트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29]

쇠렌 키르케고르도 헤겔 비판에 한몫했다. 아니 그의 책 상당수가 헤겔을 중심으로 근대 철학을 까는 내용이다. 까는 요지는 보통 이렇다. 헤겔을 필두로 한 근대 철학은 윤리를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는데, 이게 사람들에게 퍼지면서 모두 자신의 양심보다는 어떤 행동이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 옳은지만 찾게 되었다. 그래서 개개인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하지 않은 채 역사 탐구에만 몰두하고, 심지어는 역사의 일부분을 축소하거나 과장하여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30]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이것들에 대한 반대급부로, 현실에 존재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세계관을 들고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실존주의이다.

아도르노는 헤겔 비판을 총체적으로 완성한다. 아도르노는 헤겔 철학의 핵심인 " '정반합의 결과로 얻어진 절대 정신'은 다수의 헤게모니(패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헤겔 철학은 필연적으로 '절대 정신을 가진 대다수'와 '그렇지 못한 소수'로 나뉘어지게 되며, 소수의 비판은 다수의 절대 정신에 덮혀서, 이로 인한 '소외와 배제가 발생'한다. 아도르노는 이런 헤게모니화된 헤겔의 논리로 인해, 나치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고 극렬히 비판하였다.

5.1. 비판에 대한 지젝의 옹호[편집]

칼 포퍼, 아도르노 등의 비판 핵심은 '헤겔의 사상이 전체성(전체주의)을 목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절대지식의 추구에서 그 '도중의 비합리적인 정치적 행동들이 반증이라는 명목아래, 목적을 위해 합리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중요한 비판 지점이다. 이에 대해 지젝은 그들이 헤겔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말한다. 헤겔은 '진리는 전체다'는 말에서, '과정' 자체가 진리가 되어야 된다고 분명히 언급했으며, 이러한 '과정'은 변증법을 통한 '부정(反)의 역사' 였다는 것이다.

즉, '절대지'는 '반증의 역사 과정 전체'이다. 무한대의 반증(반대)을 끌어 안아야 절대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헤겔의 사상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반증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전체성'과 연관시키는 것은, 자신의 사상에서 '자유'를 강조했던 헤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존 '개념'과 '권위'를 해체하자고 주장하는 아도르노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해체'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파편화되어 도리어 어떤 '의견'도 성립되지 않는 문제점을 노출시킨다. '대안'을 말해도 그 대안 마저 '해체'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어떤 주장도 성립될 수 없으며, 모든 것에 대한 '비판'만이 인정된다. 결국 '종합'을 해야되는 시점도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해서 '주류 담론'을 만들지 못하고, 시대를 이끄는 담론이 형성되지 않음으로해서, 사회를 바꾸지도 못하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 [31]

6. 저서[편집]

제목
발간 연도
정신현상학
Phänomenologie des Geistes
논리의 학 (대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
철학적 학문들의 엔치클로패디 강요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n Grundrissen
법철학 강요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종교 철학 강의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Religion
철학사 강의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미학 강의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
역사 철학 강의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헤겔의 3대 저서는 『정신현상학』, 『논리의 학』, 『법철학 강요』이다. 여기에 『엔치클로패디』까지 합쳐서 총 4권이 헤겔이 정식으로 출간한 책들이다.

나머지 책들은 전부 강의를 필사한 것이다. 헤겔이 유명할 때 강의가 필사되었고, 심지어 시중에 헤겔 강의 필사본이 돌아다닐 정도로 그 당시에도 수요가 높았기 때문에, 필사된 내용은 대부분 정확하다. 다만 강의본은 헤겔이 직접 "책"으로 편집한 본이 아니기 때문에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생각이 보이기도 한다. 그 중 『역사 철학 강의』는 헤겔 책치고는 그나마(!) 읽기 쉬워서, 입문용으로 먼저 읽히는 편이다.

하지만 헤겔이 정식으로 출간한 4권은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어려워서, 『역사 철학 강의』의 내용만으로 헤겔의 사상을 단정짓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데, 사실 헤겔의 주요 저서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앞선 3대 저서 『정신현상학』, 『논리의 학』, 『법철학 강요』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비판자들이 이 책들을 오독해서 그릇된 비판을 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중 『정신현상학』은, 책을 읽는 학자마다 해석이 달라질 정도의 난해함으로 유명하다. 그래도 최근에는 관련 연구 논문들이 많이 쌓인 상태라 예전보다는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 위안거리다.

『정신현상학』의 한국어 번역에 대해서는, 헤겔학회의 초대회장을 역임했으며 명지대학교의 명예교수로 재직하다가 2018년 별세한 임석진 교수의 완역본이 있다. 다만 임석진 교수의 역본은 학술적으로 사용되기에는 자의적인 해석이 많고 지금은 많이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로 번역해 놓았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에 따라 2022년 부산대학교김준수 교수의 완역본이 새로 나왔다. 원전에 충실한 번역, 가독성을 최대한 살린 번역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번역으로 호평받고 있다.

7. 어록[편집]

진리는 전체다.
Das Wahre ist das Ganze.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
Was vernünftig ist, das ist wirklich; und was wirklich ist, das ist vernünftig.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
세계사는 자유 의식의 진보다.
Die Weltgeschichte ist der Fortschritt im Bewusstsein der Freiheit.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無)는 같다.
Das reine Sein und das reine Nichts ist also dasselbe.
국가는 구체적인 자유의 현실이다.
Der Staat ist die Wirklichkeit der konkreten Freiheit.
정말 중요한 것들은 열정없이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Nichts wirklich Wichtiges ist ohne Leidenschaft erreicht worden.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오류 그 자체이다.
Die Furcht zu irren ist schon der Irrtum selbst.
호기심도 허영심도 효용성도 의무감도 양심도 아닌, 결코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생겨나는 잊혀지지 않는 서툰 갈증이 우리를 진리로 이끈다.
Nicht die Neugierde, nicht die Eitelkeit, nicht die Betrachtung der Nützlichkeit, nicht die Pflicht und Gewissenhaftigkeit, sondern ein unauslöschlicher, unglücklicher Durst, der sich auf keinen Vergleich einläßt, führt uns zur Wahrheit.

8. 관련 강의 영상[편집]

 
김상환 교수의 정신현상학 강연
 
나종석 교수의 법철학 강연

9. 여담[편집]

  • 동시대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그를 매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저서 곳곳에서 헤겔을 '사기꾼', '협잡꾼' 등의 원색적인 표현으로 비난하였다. 헤겔 개인을 인간적으로 싫어했다기보다는, 서양 철학 전체를 다 까는 그의 입장에서는 헤겔이 당시 서양 철학의 적통이기 때문에 주요 비판 대상이 된 것. 쇼펜하우어는 베를린대에서 헤겔과 같은 시간에 강의를 하여[32] 정면 대결을 했으나, 헤겔의 교실에는 수강생이 가득 차고 쇼펜하우어의 교실에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베를린대의 대표 철학과 교수로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치던 헤겔을 갓 데뷔한 쇼펜하우어가 이길 수는 없었다. 헤겔이 사망하고 나서야 쇼펜하우어는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 헤겔의 하숙방 밑을 지나갈 때 헤겔이 "저기 절대정신이 걸어간다" 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어서, 헤겔은 제 나라를 침략한 적국의 수장을 왜 저렇게 찬양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저 말을 했을 당시 헤겔은 예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교에서 교수 생활 중이었고 헤겔의 조국은 예나 시가 속한 작센 선제후령이 아니라 뷔르템베르크 공국이었다. 그리고 뷔르템베르크 공국은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다. 작센 선제후령 역시 프로이센의 동맹으로 예나 전투에 참전했지만,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탈탈 털린 후 프랑스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라인 동맹에 가입하게 된다. 그래서 헤겔은 프랑스를 지지하던 수많은 뷔르템베르크 지식인들 중 한명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저런 말을 한 것. 또한 그 당시 독일 연방 전체가 목불인견의 시궁창이었다. 영주들은 일신의 환락을 위해 무거운 세금을 강요하고 지식인들을 체포하고 구금하길 즐겼다.[33] 독일 연방에 대한 이러한 실상을 놓고 헤겔은 "독일은 이제 국가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34]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은 그 당시 독일 진보적 사상가들의 희망이었고, 그런 맥락에서 헤겔은 나폴레옹을 '(자유와 평등 같은 근대적) 시대정신을 체화한 존재'로서 절대정신이라 부른 것이다.
  • 일반적으로 근대 철학과 현대 철학을 구분하는 마지막 경계가 바로 헤겔이다. 근대 철학의 계보는 헤겔이 이어받았으며 그와 동시기의 다른 학자들은 헤겔 철학을 비판하면서 현대 철학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 헤겔은 당시 기준으로 중국에 대해 '자유가 없는 나라'라고 주장했다. 서양은 계속해서 자유가 확대되는 쪽으로 진보해왔지만 중국은 아직까지도 황제 한명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주장이다. 이는 헤겔이 자유의 확장이 역사를 발전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시각에 입각하면 중국의 전제군주 시스템은, 국가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유교적인 명분에 의해 지배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공자를 평가절하한다.[35] 그러나 동양권에서는 헤겔의 사상을 받아들일 때부터 유교와 결합시켜서 이해해왔었다. 이는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는데, 유럽에서 도덕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자리에 동양의 도덕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를 집어넣어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럴려면 우선은 '공동체'를 말하기 이전에 '자유로운 개인'을 먼저 정의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유교 자체가 이미 공동체에 대한 도덕을 말하는 것이어서 유교만 가지고는 '자유로운 개인'을 먼저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근현대에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자국(동양)의 민주주의 역사 과정을 끌고 들어와서, 이를 유교와 변증법적으로 융합시키는 기괴한 장면이 학계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굳이 유교를 공동체의 도덕으로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 한때 헤겔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의 동양권 나라에서 대단히 많이 연구된 서양 철학자로, 동양권에서 국가주의 민족주의 성향의 우파 지식인들과 마르크시즘 성향의 좌파 지식인들 모두에게 중요하게 여겨진 학자이다. 그의 변증법적 역사 발전론은 동양의 근대 지식인들에게 국가 발전, 근대화 추진의 사상적 기반으로 여겨졌고, 가족-시민사회-국가로 발전되는 변증법적 집단 윤리 의식을 강조한 도덕철학과 대륙법계 법철학은 유교적 보수적인 동양권 근대 지식인들에게 많이 수용되어 정치 철학과 윤리학, 동양권에 계수된 대륙법계 법철학의 주요 이념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서구권에서는 2차 대전 이후, 특히 영미권 학계에서 헤겔은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시초로 여겨져서 많은 비판을 받았었고 그만큼 연구가 부진했었다. 그랬던 것이 최근 수십년간 영미권에서도 헤겔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척이 되면서 헤겔 수용 영역도 점점 넓어지고 있고(특히 도덕철학과 정치철학 영역에서) 찰스 테일러, 로버트 브랜덤, 존 맥도웰 등 헤겔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저명한 학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 그는 책을 대부분 독일어로 썼는데, 그의 문체는 매우 난해하고 어려워서 독일인들은 그가 책을 '헤겔어'로 썼다고 말한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말솜씨가 좋지 않았는데, 강의를 할 때 움츠러든 자세로 시선은 노트를 향하고 위아래로 훑으며 노트를 넘겨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서 읽었고, 말 사이사이에 끊임없이 헛기침 소리를 냈다고 한다.
  • 2022년 11월 29일, 가디언지에 따르면, 뮌헨 지역의 가톨릭 도서관에서 헤겔의 초기 사상이 담긴 4천여장 분량의 강연 원고가 새롭게 발견됐다. 이 원고는 하이델베르크 시기에 헤겔의 강의를 들은 제자가 받아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원고가 중요한 이유는 헤겔은 하이델베르크에서 처음 미학 강의를 했고 이후 베를린에서 강의할 때는 견해가 크게 달라져 있었는데, 이번 발견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베를린에서의 미학강의가 아니라 바로 그 전 시기인 하이델베르크에서의 미학강의여서, 헤겔미학의 초기 변천과정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원고를 연구한 교수의 소견에 따르면, 헤겔이 그의 미학 개념을 어떻게 형성했고,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떻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분석했는지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
 
[1] 독일의 화가 야콥 슐레진저(Jakob Schlesinger)가 그린 『철학자 헤겔 (1831)』. 이 초상화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겔이 죽었다. 즉, 이 그림은 말년의 병든 모습을 그린 것이다. 병색을 더 도드라지게 표현하기 위해서 이 그림에서 채도를 낮춰 얼굴을 하얗게 편집한 그림파일도 돌아다니지만, 해당 그림이 원작. 그림은 현재 베를린 구국립미술관(Alte Nationalgalerie) 3층에 전시되어 있다.[2] 헤겔 전문가 테리 핀가드는 죽음의 원인은 사실상 콜레라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한다. 당시 헤겔은 설사나 발열, 혹은 그 밖에 어떤 콜레라 증상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헤겔을 진단했던 의사들이 죽음의 원인을 콜레라라고 주장했던 것은 당시 베를린에 콜레라가 유행했었기 때문에 내린 오진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죽음의 원인은 1827년 이래로 심각하게 앓아 왔던 만성적인 위장병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847~848 참조)[3] 「행성의 궤도에 관하여」라는 짧은 교수 자격 취득 논문(habilitation)을 통해 교수 자격을 취득한다.[4] 세관 사무원[5] 이 일화는 수없이 반복되면서 헤겔-횔덜린-셸링 신화의 일부가 되었으나, 헤겔의 전기작가 테리 핀카드는 이 일화는 아쉽게도 셸링이 〈마르세예즈〉를 번역했다는 것만 제외하고 모두 거짓임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44)[6] 교양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충격적인 특징은 무엇보다도, 교양인이 되는 것은 출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끌고 만들어 가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귀족, 심지어 부르주아까지도 부정하는 새로운 종류의 인간상ㅡ 즉, '교양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7]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형이다.[8] 1806년 10월 13일.[9] 친구 니트하머에게 보낸 편지에서.[10]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301[11] 한국으로치면 중ㆍ고등학교에 해당한다.[12] 헤겔은 매우 자세한 계획을 세우고 지속적으로 관련 인사들을 만나서 필요한 자금을 얻어, 빈민들을 위한 사범학교를 세웠다. 연말 보고서에서 헤겔은 "빈민 학교"를 설립하고 훈련받은 교사들을 그곳에 배치하여 아이들이 가장 좋고 새로운 방법으로 배울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415)[13] 학교 명칭은 '에기디엔 김나지움'이었다.[14]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365[15] 「다만 헤겔은 민주주의와 지역구 투표제를 거부하고, 대의제적 정부 형태를 주장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는 다수 정당이 소수의 이해를 단순히 무시해 버리기 때문이며, 지역에 기반하여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것은 그들이 "전체" 사회를 대표하는지, 혹은 심지어 그들이 대표해야 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이고 중요한 이해를 대표하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선출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계층과 소속 단체에 소속감을 가지는 한에서, 계층과 단체를 기반으로 하는 대의제는 모든 합법적인 목소리가 "국가" 수준에서 나오는 것을 좀더 확실하게 보장할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사회의 기본적인 이해를 확실하게 대변하고 사회의 안정성이 유지될 수 있는 방법으로 "귀족" 의회와 "평민" 의회가 있는 양원제를 주장했다.」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623)[16] 이성의 "전체"(『논리의 학』에서 말했던 '이성들의 공간' 또는 '이념'을 뜻한다)는 "민중"이 집단적으로 합리적(이성적)이라고 설정하는 것에 대한 이해에 달려있다는 설명. 즉, 이성의 개념(이념)은 (개인의 논리적 추론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민중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매우 쉽게 말하자면, 이념은 '그 시대의 집단 지성'에 의해 결정되고, 그것이 국가의 법이라고 말했던 것.[17] 하인리히 하이네에 따르면, 임종 직전 유언으로 헤겔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를 이해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분하다는 듯이 다시 말을 덧붙이면서, "(사실은) 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일화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 헤겔 공부하다가 빡친 학생들이 만들어냈다는 게 정설[18] "충격적인 것은 의사들이 죽음의 원인을 콜레라로 발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헤겔이 콜레라 증상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들은 죽음의 원인을 몸의 내부에서 발생하여, 일반적인 콜레라의 외적인 증상을 전혀 보이지 않는 "독성 콜레라"로 판정했다. 그렇지만 죽음의 원인은 사실상 콜레라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헤겔은 설사나 발열, 혹은 그 밖에 어떤 콜레라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헤겔은 언젠가부터, 아마도 1827년 이래로 앓아 왔던 만성적인 병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콜레라가 베를린의 여러 저명한 지식인들을 앗아갔고 의사들의 진단이 있었기 때문에 헤겔은 콜레라에 의해 희생된 유명 인사의 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생각되어 왔다."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847~848)[19] 대학마다 구체적인 커리큘럼은 다소 다를수도 있지만 보통 사학과에서 헤겔의 역사철학은 1학년때부터 배우고 필요할때 자주 소환되기도 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필수적인 부분이다.[20] 그러나 정작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서문에서 자신의 철학에 대한 이러한 도식적 요약을 불쾌히 여긴 바 있다.[21] dialektike니 conversation이니 dialogue니 하는 것은 모두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유산들이다. 짧게 설명하자면 dialektike는 흔히 변증술로 번역된다. dialektike에서 lektike 부분, dialogue에서 logue 부분을 주목하자. logic, 논리라는 영어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소위 정통 철학자들은 이 dialektike가 제일 좋은 교육법, 문답법, 대화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외에 반론술, 쟁론술 같은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22] 무관심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관심이 없던 것도 한몫했다...[23] 프레게의 주된 학문적 목표 중 하나가 수학적 명제는 선험적 종합 명제라는 칸트의 핵심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24] 전혀 잘못된 사실이라는 주장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려서부터 쇼펜하우어 등의 철학자들의 철학을 그의 누나와 논했을 만큼 높은 수준의 철학적 교육을 받았고, 또한 이후에도 칸트와 버클리에 대한 생각을 남기는 등 철학사적 전통에 충분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 철학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여 쇼펜하우어 철학을 운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칸트와 버클리에 대한 생각을 낸다는 것 자체가 플라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25] 정확하게 말하자면 칸트로부터 시작된 독일 관념론 전부[26] 정확히 러셀의 경우 헤겔의 저서를 읽고 비판한 것은 아니다. 영국의 헤겔주의에 대한 비판.[27] 이런 기조여서 그런지 요즘도 영미에서 수학하고 온 분석철학 계통의 학자들은 헤겔더러 심할 경우 거의 개가 짖는 소리 가까운 취급을 하는 사람도 있다.[28] 과거 철학에 분석적 연구 방법을 도입하는 건 심지어 동양 철학 연구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29] 쇼펜하우어도 그가 칸트를 제멋대로 다루는 것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였다.[30] 키르케고르,'주체적으로 되는 것',임규정 역,지만지고전천줄,2008,p32-37[31] 즉, 포스트모더니즘 논리는 '해체'만을 강조하여, 우리시대를 이끄는 환경문제나 민주주의 보호 같은 담론도 반대측의 입장에서 '해체'하여, '환경파괴'나 '독재' 역시 다르지 않다는 물타기 용도의 논리로 쓰여질 수 있다는 것.[32] 재미있게도 이 자리는 헤겔이 직접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33] 애첩에게 성을 지어줄 돈을 마련하려고 국민들을 잡아다가 통 크게 인신매매한 영주도 있었고 헤센 공국의 경우는 국가 주도로 용병업을 하기위해 여행과 주거이전의 자유를 박탈했다. 특히 헤겔의 고향인 뷔르템베르크(프로이센이 아니다!)에 대해서는 "역사상 뷔르템베르크 이상으로 노예 상태가 이루어졌던 곳은 독일의 어느 연방에도 없었다"는 말도 있었다.[34] 국내에 번역된 일본의 철학자 나까야 쪼우(中埜 肇, 오역이다. 올바른 이름은 '나카노 하지무'이다.)의 책 '헤겔' 참조.[35] 반면 노자의 사상은 변증법스러운 암시가 많이 엿보이기 떄문에, 헤겔은 노자를 스스럼 없이 한명의 철학자로 대접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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