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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법철학

자연법 개념연구

by 이덕휴-dhleepaul 2018. 7. 4.


1. 서론

자연법은 서양사상사의 주요개념의 하나이다.[각주:1] 자연법은 실정법과 대비되는 말이다. 실정법이란 보통 법기관에 의해 정립된 법 혹은 현실적 효력을 인정받은 관습법 등의 법규범을 말한다. 반면에 자연법은 실정법에 앞서 또 법제정당국 또는 법생활자들의 법정립행위와 독립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법규범으로 이해된다.[각주:2] 전통적으로 예컨대 십계명, 각자에게 그의 것을,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 자기가 받고 싶은대로 남에게 행하라는 황금률 등의 원칙이 자연법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자연법은 신의 법칙, 우주질서 혹은 인간본성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실정법을 초월적으로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같은 자연법의 특성인 근원성과 초월성은 자연법을 외경과 열망의 대상이 되게 하기도 또는 회의와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 옳은가를 획일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수다하게 주장되고 논의된 자연법은 아주 다양하고 또 상이한 역사적 맥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연법의 논의가 단지 戱論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자연법의 근원성과 초월성에는 틀림없이 우리 인간들의 삶의 애환이 서려 있을 것이고 바로 여기에 자연법을 연구하는 의의가 있다고 본다.  
자연법은 자연과 법이 합해진 말이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자연’의 의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따라서 자연법에 대한 이해에도 편차가 나타난다.[각주:3] 그러나 아무래도 여기서의 자연은 자연과학의 대상이나 풍경화의 대상은 아닐 것이고 그리하여 특히 ‘본연’ 혹은 ‘본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법에 담겨 있는 심장한 의미에 가장 잘 부합할 듯 싶다. 이는 또한 자연법의 연원인 희랍시대의 자연법론에 비추어 보아서도 타당하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시 살피기로 한다. 이제 자연법은 ‘본연의 법’이라고 하자.[각주:4] 무릇 법에는 규범성과 권력성이 내재하고 있다. 즉 법은 우리의 인격과 생활을 위해 강제로라도(권력적 관철로써) 지켜져야 하는 규범이다. 그런데 여기에 왜 “본연”의 것이 운위될까? 아마도 법의 정체성의 위기 즉 규범의지와 권력의지의 충돌 때문일 것이다 - 우린 위기를 대하여 비로소 본질을 반성해 본다. 법체계의 불안정성 또는 불확실성은 우리를 새삼 법의 본연을 생각케하고 법의 근원성과 초월적 지도원리에 대한 반성으로 이끈다. 그리하여 자연법 주장은 규범혼란의 시대에 맞서 권력의지의 규범화 및 규범의지의 권력화를 위한 노력으로서 즉 흔들리지 않을 규범질서의 중심에로의 지향으로 나타난다.[각주:5] 그것이 배타적 패권을 취하기 위한 욕망에 그치든 혹은 삶의 진실을 세우기 위한 염원으로까지 순화되든 간에. 자연법의 배척도 규범불확실이란 지평에 서 있다는 점에서는 자연법의 주장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체계화된 실정법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자연법주장에 맞서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자연법에 숨어 들어 있는 허위이데올로기의 추방이든 혹은 실정법 속의 때지난 규범의지에 기한 권력에의 애착이든 간에. 그리하여 근원성과 초월성을 지닌 자연법은 실정법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현실의 실정법을 내쫓는 파괴자 혹은 심판관일 수도 있는 것이다.[각주:6]
그리하여 우리에게 “자연법 개념연구”의 논점이란 다름아니라 각각의 자연법요청에 담겨 있는 규범의지가 얼마나 순수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권력의지에 의하여 어떻게 현실화되는지 혹은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살피는 것이 된다. 즉 자연법의 개념연구는 자연법에 실려있는 인간들의 뜻과 애환을 이해하고 추적하는 작업과 다를 수 없다. 또한 필자는 그 연구를 통하여 무릇 '개념이란 인류역사의 퇴적이자 그 위에 놓이는 우리의 희망'[각주:7]이라는 진실을 같이 공유할 수 있게 되고[각주:8] 그리하여 자연법에 관한 대화 속에서 서로의 규범의지를 신뢰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비록 미숙하고 부족한 필자의 논의에서나마.
글의 줄거리를 적어보고자 한다. 먼저 위에서 제시한 자연법의 어원적 뜻을 그 본적지라고 할 수 있는 희랍시대에서 살펴보고, 다음 현대의 삶에 직접적 중요성을 띠고 있는 근대의 자연법론들을 통해서 사회의 정체위기 및 규범적 혼란에서 규범적 중심을 잡으려는 노력이 어떻게 펼쳐졌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어서 실정법의 체계화 및 안정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근대 국가가 틀을 잡으면서 자연법이 어떻게 실증주의에 의해 밀려나는가를 알아보고 그렇지만 20세기 들어서 양대 세계전쟁이란 인류의 실존의 위기에서 자연법사상의 부활이 언급됨을 간단히 살피게 될 것이다.  끝으로 규범허무주의 혹은 규범상대주의를 내세우는 패권주의가 팽배하여 커다란 규범혼란 속에 빠져 있는 이 시대 그리고 다른 한편 다원주의와 중심해체의 시대사조에서 자연법이란 용어가 더 이상 규범의지의 상호소통의 매개역할을 하기 어려워진 현재의 시점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자연법의 정신을 계승할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2.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physis)과 법(nomos)

먼저 고대 그리스의 법사상에서의 자연법(physikon dikaion 혹은 physei dikaion)을 살펴볼 때 우린 그것이 실정법과는 구분되는 이념적 법, 본성적 법 혹은 참법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법에 관한 고전적 정식화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타난다.[각주:9]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각주:10] 폴리스의 정의를 자연적 정의와 법에 의한 정의로 나누고 있다. 전자는 어디서나 동일한 힘을 가지고 인간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후자는 본래는 아무래도 괜찮았던 것이나 일단 정해지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 한다. 예컨대 범죄인이 석방되기 위해서 1므나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이 법에 의한 정의는 도량형과 마찬가지로 협약과 편익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고 정치체제가 다른 곳에서는 또한 서로 다른 법의 정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 따른 최선의 정치체제는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 최선의 정치체제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에서 귀족정으로 즉 “훌륭함”(덕;arete)을 갖춘 이들이 정치를 맡는 체제로 논하고 있다.[각주:11]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법은 폴리스체제의 본성에 따른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여기서도 퓌시스의 이념적 성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을 ‘본성’이라는 이념적 성격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도 이미 드러난다.[각주:12] 즉 그는 자연에 따른다는 의미를 운동과 정지의 원인을 자체에 보유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연은 운동과 정지의 원인이나 근원으로 이해되고 그것은 결국 대개 사물의 형상(eidos) 혹은 목적(telos)과 동일하게 된다. 이것을 자연법에 적용을 시켜 본다면 자연적인 법은 곧 법다운 법 즉 ‘법의 형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자연개념은 바로 퓌시스의 원래의 뜻에서도 낯선 것은 아니다. 즉 희랍지성사의 초기에서 퓌시스의 뜻은 오히려 “본질, 본성, 근원”에 해당한다고 한다.[각주:13] 즉 퓌시스는 to on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한편 to on(being)은 단순히 존재를 뜻하기보다 거짓이 아닌 참의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서 벌써 자연법의 개념에는 참법의 뜻이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와 같은 퓌시스의 의미는 저 유명한 <퓌시스-노모스>의 대립상에서 보다 명확해진다.[각주:14] 희랍지성사의 초기에 노모스는 퓌시스와 구분되지 않고 노모스은 신성한 기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변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소피스트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모스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 변하는 것이고 퓌시스은 신성한 것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들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퓌시스와 노모스의 구별은 다시 파르메니데스 이래로 철학의 핵심주제인 본질과 현상의 구분과 연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퓌시스와 노모스가 분리되면서 소피스트시대에선 그 대립이 중요한 테제가 되었다. 즉 퓌시스-노모스는 각각 자연적인 것-인위적인 것, 참된 것-허위인 것 등을 뜻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소피스트 시대 다른 철학자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다. 즉 엠페도클레스는 생과 멸을 부인하면서 다만 관행(노모스)에 따라 그러한 용어를 쓸뿐이라고 하였고 데모크리토스는 감각들은 다만 노모스에서만 존재할 뿐이라고 하였다. 퓌시스와 노모스의 대립의 테제는 특히 당시의 소피스트들, 연설가들 그리고 역사가들에 의하여 많이 원용되었다. 즉 노모스는 이제 근원이나 참됨과는 구분되는 1)옳고 그름에 대한 전통적,인습적인 믿음에 근거한 관행이나 풍습으로 혹은 2)국가권위에 의하여 형식적으로 제정된 법률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노모스는 절대적인 효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행위의 표준을 이제 더이상 노모스에서가 아니라 퓌시스에서 구하게 되었다. 즉 자연법은 실정법의 지양 혹은 보충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가의 대표격으로 우선 안티폰을 들 수 있다. 그는 “법에 따라 정의로운 것들의 많은 부분이 자연에 적대적”이라고 하며, 더 나아가 “이로운 것들에 관해 말하자면, 법들에 의해 이롭다고 놓여진 것들은 자연에 멍에가 되며, 자연에 의해 이로운 것들은 자유스럽다”고 말한다.[각주:15] 즉 안티폰은 인간행위의 표준을 실정법이 아니라 자연에서 찾으며 그것은 바로 “이로움”이라고 이해된다. 한편 안티폰은 귀족가문 태생이나 그렇지 않은 자 혹은 그리스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자연상 동일한 인간이라고 하여 평등사상도 또한 보여준다.[각주:16] 이점에서 안티폰은 강자의 이기주의가 바로 자연적 정의라는 칼리클레스와 전혀 다른 지평에 있다고 볼 수 있다.[각주:17] 칼리클레스는 법의 구속력의 근거에 관한 實力說의 비조라고 할 만하다. 즉 그는 기존의 노모스는 약자들이 강자들을 억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고 정말로 자연에 맞는 것은 강자가 더 많이 갖는 것이며, 그리하여 노예였던 강자가 마침내 일어서서 주인이 될 때 자연법의 광채는 눈부실것이라고 한다.[각주:18] 이러한 주장이 뜻하는 바는 당시 민주정에 대한 과두주의 귀족들의 반란과 연결시켜 볼 때 잘 이해된다.[각주:19]
퓌시스와 노모스의 대립에서 퓌시스를 옹호하는 입장은 그러나 위와 같이 인간의 이기심에만 호소하는 부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인간의 규범적 본성에 역점을 두어 인간의 자연권 혹은 인류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기존의 노모스의 결함을 자연적 정의인 불문법으로 치유코자 하였다.[각주:20] 그 대표적인 예가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서 크레온에 대항하는 안티고네의 주장 즉 비록 범법자라고 해도 장례 의식은 실정법으로 막을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라는 주장이다. 또한 히피아스는 퓌시스를 노모스에 의해 인간사회에 세워진 장벽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출신이나 혹은 인종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자연법에 위배된다고 하였다. 이는 앞서 안티폰에서도 제기되었던 주장이다. 급기야 우린 신은 모든 이를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노예제는 자연에 어긋난다는 알키다마스의 주장을 접하게 된다.[각주:21]
이상 희랍시대의 자연법의 뜻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퓌시스의 원래의 의미, 퓌시스-노모스의 대립에서의 퓌시스의 의미 등에서 우린 서두에서 보인 바와 같이 자연법이란 본연의 법, 참법 등을 가리킴을 알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자연의 뜻에 어떤 합치는 없었다. 그 차이는 바로 혼돈의 규범질서에서 과연 무엇으로 중심을 세울 것인가에 관한 욕망 또는 염원의 상이함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의 관심은 벌써 자연법의 뜻에 머물지 않고 자연법에 스며있는 지성사의 영욕의 언저리에 가 있다. 희랍 사상의 백가쟁명기라고 할 수 있는 기원전 5-4세기는 아테네의 민주정이 절정에 달함과 동시에 그 폴리스체제가 한계를 노정하고 그 안에 내재한 모순이 가시화되는 때이다. 이러한 현실의 모순을 마주 대한 여러 자연법 사상에 담겨 있는 인간들의 욕망과 희망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에 관해 한번 과감한 스케치를 시도해 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한 폴리스를 창문을 통해 바라보면서 귀족정을 제일로 희망하고 차선책으로 유산자공화정이란 헌정질서를 모색하였다고 할 때, 플라톤은 그런 혼탁한 폴리스를 뒤로 한 엘리트의 이성 속에서 펼쳐지는 이상국가를 그려보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양자가 귀족주의적 이상향을 꿈꾸었다면, 소피스트들은 문을 열고 현실의 폴리스로 나아가 거리의 사람들에게 외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은 인간의 배타적 욕망에 호소하며 예전의 과두정을 다시 불러와 중우정치인 민주정을 타도하기 위해서, 다른 한편은 인간 본성의 보편적 평등성에 호소하여 민주정의 본연에 철저하게 다가서 게으른 시민들을 각성시키고 이방인과 노예의 인격을 회복시키기 위해서.[각주:22]


3. 근대 유럽 시민혁명기의 자연법론

고대 그리스시대의 자연법사상에는 그 신적 기원과 인간의 이성이 함께 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면, 중세에 들어서 자연법의 개념은 인간 이성에 각인된 신법으로서 이해되어 그 신적 근원이 보다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중세 자연법론은 대체로 객관적 법에 대한 이론이었고 권리보다 의무가 강조되는 교설이었다. 그러다가 근대에 접어들면서는 기독교의 권위가 무너지고 계몽된 인간이성의 절대성이 부각되어 자연법은 신의 권위에서 독립적인 이성법이라고 하는 자연법의 세속화가 진행되었고 다른 한편 객관적 법 즉 의무중심의 이론에서 주관적 권리 즉 개인의 권리가 그 핵심에 자리하는 이론이 되었다. 즉 근대 자연법론은 자연권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자연권은 곧 절대왕정의 자의적인 권리 침해에 대항하는 시민혁명의 이론이
되었다. 그러한 시민혁명의 주조는 절대주의에 대한 토지소유귀족과 신흥부르조아의 승리로서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전통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통 자유주의적 정치적 자연법론이라고 하고 1776년의 미국의 독립선언과 각주의 헌법 그리고 1789년 프랑스대혁명의 인권선언에 반영되었다고 말해진다.[각주:23]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류보편의 권리와 평등한 인격의 사상이 무르익으면서 실제 혁명에서도 또 하나의 대립하는 흐름으로 나타났다. 영국시민혁명에서의 수평파운동과 프랑스대혁명기의 자코뱅의 급진민주주의와 상-뀔로뜨 운동이 그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반면에 주지하다시피 시민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독일에서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계몽절대주의로 근대화를 대신하였다. 그 주요한 제도적 귀결로서 법전의 편찬을 들 수 있는바, 여기에 자연법론이 또한 큰 영향을 끼쳤다. 즉 푸펜도르프 이후 독일의 자연법론은 크리스챤 볼프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였으며, 1794년 프로이센의 일반국법[각주:24] 그리고 1811년의 오스트리아의 일반민법전은 그 영향하에 제정된 것이다.[각주:25]
시민혁명과 계몽주의 없이 인류의 현대를 상상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근대의 자연법론은 오늘날 법질서의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만약 근대 자연법의 역사가 인간 본래의 자유를 되찾아 주고 서로의 인격을 승인하는 도정이었다면 그 훌륭한 유산은 바로 선배들의 땀과 희생의 결실일 것이고, 따라서 그 역사에서 인간소외와 삶의 고통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우리 후배들이 갚아야 하는 부채로서 기꺼이 떠 안아야만 할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운위되고 있는 현대이지만 근대사상의 프로젝트는 여전히 남아서 우리를 구속하고 있으며 또 우리에게 무언가 요청한다. 왜냐하면 근대의 역동기에서 우리는 혁명전후에 수 많은 선대의 인간들, 즉 ‘또다른 우리들’에서 인간애와 규범의지 그리고 그에 대한 숭고한 믿음을 다른 한편 순화되지 못한 권력의지의 폭압성과 믿음이 결여된 나약한 규범의지를 목격하였으며, 그 희망과 절망은 다름 아닌 바로 여기 우리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기억은 우리에게 있어 아직 잊혀질 수 없는 그 무엇인 것이다. 이제 이하에서는 독일은 생략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근대 시민혁명기의 자연법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1) 영국시민혁명과 로크 및 수평파의 자연법론

로크의 사상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교설로 불리우고 그가 이론화한 입헌국가의 체계화와 권력의 분립은 20세기까지 유럽과 미국의 국가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각주:26] 그의 자연권론은 절대왕정의 자의성에 대항하여 시민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참으로 민주주의의 근본에까지 고민하여 들어갔는가 그리고 주위의 서민들의 삶에 애정을 가졌는가에 대하여는 회의적이다. 로크의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에서는 소유권의 자연권적 정당화 뿐만아니라 그 불평등의 구조 또한 화폐의 사용에 대한 시민의 동의로써 정당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때문에 로크의 자연권론은 많은 이들에 의해 오히려 부르조아 계급지배의 정당화를 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각주:27] 사실 로크가 활약한 명예혁명[각주:28]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발전을 낳기 보다 기존의 성과를 공고히 하는 혁명이었고 그의 <통치론>은 결국 미래의 전령이기보다 과거의 완성이었다. 로크의 사회계약론, 자연권론, 혁명론에서 보이는 민주주의의 이념은 당시 영국사회의 민중들의 어려운 삶과는 무관한 것이었으며 자연법론이 인간 본성에 따르는 참법을 담아낼 수 있음을 생각할 때 로크는 부족하다 아니할 수 없다. 로크의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던 그리고 그 보다도 한 세기도 훨씬 이전에 토마스 모어도 절절하게 고발하였던 엔클로저(종획운동)로 인한 민중들의 참상[각주:29]에 대해 그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서린 엔클로저에서 로크는 단지 토지소유권의 자연권적 정당화만을 찾을 뿐이었다. 즉 로크는 토지소유권 취득의 자연법적 근거로서 경작 보다 먼저 울타리치기를 거론한다.[각주:30] 더 나아가 자연법적으로 설정되는 토지소유의 한계도 부의 축적을 위한 화폐 사용의 동의에 기하여 사라지게 된다.[각주:31] 로크의 주요 관심사였던 토지소유권은 바로 이전에 그리고 당대에도 민중들을 추방하거나 예속하여 얻어진 것이다. 그가 토지소유권의 기원을 엔클로저와 화폐를 통한 축적으로써 정당화하여 절대왕정에 대항할 때 그 이면에는 민중의 권리의 박탈로 얻어진 부르조아의 토지소유권의 공고화를 의미하게 된다.[각주:32]
이와 같은 로크의 사상은 그 보다 한 세대 남짓 앞선 수평파들(The Levellers)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디거즈(Diggers)의 주장과 대비하여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청교도 혁명의 주역인 크롬웰에 대항하여 인민의 광범위한 정치참여와 경제 민주화 그리고 디거즈는 심지어 토지공유의 공산주의까지 주장하였으나 실패하고 진압되었다.[각주:33] 먼저 수평파의 지도자의 일인인 릴번(Lilburne)의 자연법의 논설을 들어보자[각주:34]“모든 인간은 과거와 현재에 있어 자연에 의하여 권력,품위,권위 및 위엄에 있어 평등하고 동일하다. ...... 이 세상의 어떠한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도 그들의 자유로운 동의없이 이를 지배하거나 통치할 권력과 권위와 재판권을 점유하고 행사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연에 어긋나며 비합리적이고...부당하며...전제적이다”. 또한 인민주권설도 볼 수 있다[각주:35]; “모든 권력은 원초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 나라의 인민전체에 있으며 인민의 자유로운 선택이나 그들의 대표자에 의한 동의는 모든 정당한 정부의 유일한 근원적인 기반이다”. 우리는 로크의 자연권론과 사회계약설의 민주적 이념을 벌써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수평파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비록 여성과 고용인 및 자선금 수령자는 제외되고 있지만 인민의 광범위한 정치참여를 주장하였다.[각주:36] 한편 그들은 단지 이와 같은 정치적 문제에만 관심을 보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복지정책도 추구하였다. 수평파의 또 한명의 지도자인 오버튼(Overton)은 영국의 자유인이면 누구나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공공재정으로 운영되는 수업료면제학교를 부활 내지 설립할 것, 빈민을 위한 모든 자선기관 내지 구제시설을 부활시켜 보존하고 고아,과부,연로자,무능력자 또는 불구자를 위한 병원과 구제시설을 각 주마다 확보하여 공공재정으로 이를 지원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각주:37] 오버튼은 더 나아가 엔클로저에 대하여도 문제제기를 하였다; “과거에 빈농을 위하여 공유지로 되어 있던 토지로서 부당점유되거나 울타리를 친 모든 토지는 앞으로 울타리를 제거하고 빈농의 자유로운 공동사용과 혜택을 위하여 다시 개방되어야 한다”.[각주:38] 한편 이른바 <진정한 수평파>로 일컬어 졌던 디거즈는 토지의 사유에서 악의 근원을 보고 심지어 토지공유의 공산주의까지 주장하였다. 즉 디거즈를 이끌었던 윈스탄리(Winstanley)는 <정의의 신법>(New Law of Righteosness)에서 “공동으로 작업하고 공동으로 식사하라. 이 말을 전세계에 선포하라.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토지를 경작하거나 자기자신을 다른 사람에 대한 주인이나 지배자로 생각하는 자, 그리고 자기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주의 벌을 받을 것이다”[각주:39]고 선언하였다.
이상에서 볼 때 수평파들의 사회권 및 생존권적 요청은 그 보다 후세 사람인 로크의 자유주의적 자연권 및 입헌주의론보다도 훨씬 진보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로크의 자연법론은 절대왕정의 자의와 전횡에 대하여 재산권과 혁명권을 옹호하는 것으로서 그 한도에서 민주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하겠으나 영국 신흥부르조아에 희생되는 민중의 아픔에 대한 관심을 결여한 한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즉 로크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부르조아의 지배권을 옹호하기 위하여 자연법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고 따라서 그의 이론을 자본가의 계급지배의 교설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비약이라고 하겠으나, 그렇다고 로크를 민주주의의 대변인으로 추앙하는 것은 단견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대신 많은 이들이 논하듯이 디거즈를 비롯한 수평파들이야말로 참으로 민주주의의 기수로서 칭송되어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각주:40]

2) 프랑스 대혁명과 루소의 자연법론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끼친 계몽사상가로서 우린 루소이외에도 볼떼르 그리고 몽떼스끼외를 거론할 수 있다. 그러나 루소는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각주:41] 루소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때론 전체주의 사상가로 이해되고 때론 급진민주주의자로 또 때론 쁘띠 부르조아 이념의 대변자로 평가된다. 자연법론자로서의 루소에 대하여도 논란이 있다.[각주:42] 우선 루소를 반자연법사상가로 보려는 이들이 있는데, 『쥬네브초고』와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나타난 서술에 근거하여 루소가 인간의 본능과 충동을 중시하여 자연법의 개념을 포기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와 반대되는 입장에서는 루소의 자연법사상에 대한 비판은 자연법의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는 아니었다고 본다. 즉 루소는 다만 자연법의 합리주의적 개념에 반대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루소는 기존의 사유에 새로운 사유를 첨가한 오히려 혁신적인 자연법사상가였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불평등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de l'Inégalité)[각주:43]에서 기존의 인간관 그리고 자연상태론 및 자연법론에 대한 루소의 비판이 잘 나타나 있다. 루소의 자연법사상에 대한 이해는 기존 자연법사상의 허구성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각주:44] 루소는 종래 자연법으로 주장되어 온 생명,자유,재산 및 이를 보장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동의의 권리 등은 자연이 아니라 국가에 의하여 제공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른바 자연권이란 자연의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합법적이고 인위적인 기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즉 루소는 자연법론자들에 의해 기존하는 정치,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자유의 산물로서 즉 자연적인 것으로 정당화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문제되는 것은 이성에 자연적인 속성이 부여되면서 인간의 감성적인 면모가 부정 내지 무시된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법의 합리주의적 사유방식은 광범위한 인민을 소외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에 반해 루소는 자연법론자들이 제시한 이른바 이성에 의하여 추론되는 도덕적 기준에 대하여 그것은 실제로는 인간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의 목소리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우린 인간의 참 본성에로 돌아가야만 한다. 본래의 인간 즉 자연인에게는 인간과 자연은 구분되지 않았다. 즉 그들에게는 어떤 합리적인 법이 존재치 않는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자연인에게도 자연법은 공허한 문구가 아니라 진정한 원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이성에 선행하며 또한 그로부터 독립된 채로 훨씬 더 명확하고 간결하게 나타나는 자연적 감성 즉 자기애(amour de soi)와 연민(pitié)이라는 “자연의 목소리”로써 직접 전달,공포되었던 것이다. 자연인은 스스로의 주인으로서 오직 자연에만 복종하며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사유재산이 시작되면서 인간은 불행의 역사에 접어들게 된다. 이렇게 소유권의 도입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불평등은 그릇된 계약에 의거한 행정관의 설치와 자의적인 권력의 형성으로 더욱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제 사회는 재산과 신분의 극단적인 불평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의 결과 인간의 자유는 타인에의 예속을 통하여 제한되었다. 기만적인 실정법 앞에서 자연권이 포기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인간의 과제는 비자발적으로 형성된 사회의 모순을 제거하고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의지로써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루소는 ‘양심’의 개념을 제시한다. 여기서 루소의 자연법론은 전통적 자연법론과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타락한 문명사회에서 새로운 규범질서를 세우기 위해 우린 양심에 의지해야 한다. 양심은 인간본성으로서 여타의 인위적인 정념들에 대항하여 선을 지향하는 감성을 북돋운다. 이성이 인식의 기능이라면 양심은 사랑과 의지의 기능인 것이다. 이리하여 다른 자연법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루소에서도 자연법은 역시 자유와 평등이지만 그것은 이제 기존 사회제도하의 기득권으로서의 권리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것 즉 전 인민의 권리가 되었다.
루소는 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이념은 혁명의 주체들에게 계승되었다. 특히 자코뱅의 지도자인 로베스삐에르는 루소의 사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프랑스혁명지도자들 중에서 로베스피에르만큼 루소의 사상에 대하여 감명을 받고 또한 그의 사상의 핵심인 평등과 자유의 회복을 위하여 투쟁한 사람도 없다.[각주:45] 그는 1789년 삼부회 소집에서 Arras지역에서 법복귀족출신인 데마지에르를 물리치고 제3신분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그날밤 인민의 대표라는 사명감에서 루소의 가르침을 실현할 것을 맹세하는 <루소의 亡魂에 대한 獻辭>를 썼다고 한다.[각주:46]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가 혁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지롱드 세력이 그 후의 지배세력이 되면서 로베스피에르는 살인마, 독재자라는 인식이 유포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참으로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헌신하였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각주:47] 로베스피에르는 당시 혁명에 대한 전유럽의 반민주세력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혁명정부의 독재를 실시하였으나 그는 온건파와 과격파의 중간노선을 취하였다.[각주:48]
그러면 로베스삐에르에 의해 구현되는 루소의 사상은 무엇인가. 우선 소유권의 행사의 제한을 들 수 있다. 루소는 한편으로 로크와 같이 경작과 노동에 의한 토지소유의 권한을 긍정하긴 하였으나 다른 한편 로크와는 달리 개인의 토지소유권의 절대성을 긍정하지는 않는다. 즉 루소는 사회구성원리가 토지소유제에 우선함을 밝히고 있다.[각주:49] 그리고  토지사유제에서 인류역사의 불행의 기원을 본다.[각주:50] 그러나 루소는 토지와 권력의 절대적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각주:51] 그런데 이와 달리 혁명초기 1789년 선언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소유권은 불가침의 절대적 권리로 규정되었다.[각주:52] 이에 대해 로베스삐에르는 새로운 권리선언을 국민공회에 제안하였다[각주:53]; “인간의 善에서 가장 귀중하고, 자연권 중 가장 성스러운 권리인 자유를 규정함에 있어서 여러분은 정당하게도 타인의 권리를 그 한계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사회제도의 하나인 소유권에 대하여는 왜 이 원리를 적용하지 않는가? 마치 인간의 관습보다도 자연법을 침범해도 좋다는 듯이, 여러분은 소유권의 행사에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수많은 조항을 설정하면서 그것의 정당한 성격을 규정하기 위하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이리하여 “1.소유권은 법에 의하여 각 시민에게 보장된 재산을 각 시민이 향유하고 처분할 권리를 말한다 2.소유권은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의무에 의하여 제한된다 3.소유권은 동포의 안전,자유,생존, 그리고 소유권을 손상시킬 수 없다 4.이 원리를 범하는 모든 재산과 모든 상행위는 불법이며 부도덕이다”[각주:54]라는 새로운 권리선언이 결의되었다.[각주:55] 이에 대해 소부울은 1789년의 선언에 의하면 자연권이었던 소유권이 이제 사회적 제도가 된 것이라고 평가한다.[각주:56] 다음으로 루소의 인민주권의 사상 또한 로베스삐에르에로 이어졌다. 프랑스혁명 당시 이른바 제3신분계급의 주류는 부르조아층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선거권등의 참정권을 유산계급에 제한코자 하였다. 이에 반해 로베스삐에르는 <세금에 따른 선거권 부여의 폐지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즉 그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유를 향유하며, 권리에 있어서도 평등하게 태어났고 그리고 그것을 향유한다. 주권은 절대적으로 국민(la nation)에 있다. 법은 일반의지(la volonté général)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은 직접 그 자신에 의하거나 또는 자유롭게 선출된 대표를 통하여 입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시민은 덕과 재능의 차별이외에 어떤 차별없이 공직에 취임할 수 있다”[각주:57]고 하였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민주권에 관한 루소의 근본적 사고 - 이는 단지 이론적 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로베스삐에르의 말을 들어보자; “루소보다 더 인민에 관하여 정당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인민을 사랑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각주:58] 루소, 그의 이름에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프랑스혁명의 민주적 열정이 담겨 있다. “혁명 직전 인간이 본래 악하지 않고 단지 타락하고 비참해졌을 뿐 - 인간은 자신 속에 동정심, 관용, 이기주의와 잔인성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랑을 가졌으며, 깊은 정치적 사회적 개혁은 비참함과 타락의 원인을 없애줄 것 - 이라고 믿게 된 것은 각별히 루소 덕택이었다”는 지적은 참말 옳다.[각주:59]


3. 실증주의의 승리와 자연법의 지속

영국의 시민혁명, 프랑스 대혁명, 독일민족국가의 성립을 통해서 부르조아 헤게모니는 확정되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봉건적 자의성으로부터 법체계가 독립하여 안정되었다. 이전에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기 위하여 주장되었던 자연법은 이제 그런 한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거나 아니면 오히려 체제보수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루소와 같은 자연법론은 거꾸로 부르조아 지배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영국 보수주의의 태두라고 일컬어지는 에드먼드 버크는 자연법을 신과 인간문명의 질서개념으로 이해하면서 『프랑스혁명의 고찰』을 지어 프랑스혁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 영향이 영국에 미치는 것에 대해 방비하였다.[각주:60] 체제의 정당화로서의 자연법은 결국 기존 실정법에 대한 효력부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고, 기존질서 변화의 추구도 또한 실정법만으로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이제 바야흐로 실정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예컨대 프로이센의 국가철학자 헤겔은 자연법을 비판하면서 인륜(Sittlichkeit)을 내세워 국법질서의 옹호에 나섰다.[각주:61] 즉 원래 법 자체의 본질은 그것이 객관적 현존재로서 구체적으로 정립되면서 또한 법(권리,정의)이며 동시에 유효한 것으로서 공포되는 가운데 제정법이 된다. 법은 바로 이러한 규정에 의하여 실정법일반이 된다. 즉 헤겔에서 실정법의 우위성은 그의 관념철학으로부터 근거지워졌다. 더욱이 19세기 이후의 실증주의의 대두는 자연법의 진리성, 인식가능성에 대한 의심을 고조시켰고 자연법을 법학의 영역에서 추방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특히 영국의 경험론적 전통에서 두드러지는 바, 그 대표자로서 벤담을 들 수 있다.[각주:62] 벤담은 기존 법체계의 유지에 급급한 블랙스톤의 자연법론을 비판하고 사회발전을 위한 입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즉 자연권론자들은 자연권이라는 前국가적이고 前법적인 권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논하고 있으나 벤담은 국가나 법이 성립하기 이전에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권리는 법의 산물이고 법은 국가없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벤담은 또한 자연권을 확립된 법과 사회제도를 비판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어떠한 정치권력과도 조화될 수 없을 것이고 아주 위험할 정도로 무정부적이라고 하여 급진적 자연권 사상 역시 비판한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접어들어 더욱 강해져서 논리실증주의에 이르게 되는바, 그에 따르면 경험적 종합판단이나 분석판단 이외의 모든 명제는 의미없는 것으로 과학 즉 진리의 영역 밖으로 추방되어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이 논리실증주의의 윤리학적 표현이 바로 이모우티비즘(emotivism)이라고 할 것인바, 거기서  자연법, 정의 등의 규범적 용어는 심지어 단순한 감정의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된다.[각주:63] 따라서 규범의 세계는 어떤 지도원리도 보유하지 못한 채 자의적인 역학관계에 내맡겨져 버릴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실증주의의 신봉자라고 해도 법학자들에게 질서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실정법체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 의미있는 유일한 규범체계는 실정법이고 또 그것으로 족하다. 이리하여 법학의 영역에서 자연법 그리고 정의 등의 법이념이 추방된 법률실증주의가 생기게 되었다.[각주:64]
그러나 그와 같은 실증주의의 지배하에서도 자연법론의 명맥이 아주 끊긴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론의 전통을 계승한 카톨릭계의 네오토미즘을 들 수 있다. 네오토미즘은 20세기 자연법 사상사에서 가장 굳건한 입지를 구축하였다고 볼 수 있다.[각주:65] 한편 20세기 초 독일에서 신칸트학파의 슈타믈러는 기존의 자연법론을 비판하면서도 이른바 “가변적 내용의 자연법”을 말하였다.[각주:66] 슈타믈러에게서 가변적 자연법은 경험적 조건하에서의 정법이었으나 이후 그 가변성은 법의 정당성을 넘어서 각 민족의 구체성이 강조되고 급기야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찌) 법이론에 기여하게 된다. 즉 디이체는 독일의 법을 독일민족의 자연법으로 가르치고 혈통,대지 그리고 기본적 심정을 그 요소로 파악하였다.[각주:67] 그와 같은 민족우월주의의 자연법이론이 나찌의 적극적 동력이었다면, 나찌 법질서유지의 소극적 동력은 아마도 법률실증주의 즉 ‘형식을 갖추고 실효적인 법이 있으면 그 내용이 어떻든 구속력을 인정하는’ 실정법지상주의에서 찾아진다고 하겠다. 바로 그 법률실증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사람들은 전후 라드부르흐의 “법률적 불법”(gesetzliches Unrecht)과 “초법률적 법”(übergesetzliches Recht)의 개념[각주:68]을 감동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는 사악한 법체계하에서 악법에 따라 한 행위가 과연 당시 실정법을 준수한 것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라는 문제라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도 또한 동독체제의 붕괴후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는 시민을 총살한 장벽감시병들에 대한 형사소송에서 다시 논의되고 있는 법철학의 중요과제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논점은 결국 전통적인 자연법사상의 요청 즉 자연법에 위반되는 실정법은 무효로서 구속력이 없다는 사상에 터잡고 있는 바, 이리하여 자연법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후에 소위 “르네상스”를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법의 부활은 얼마 지속되지 못하였다. 자연법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 그리하여 자연법은 학문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반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자연법 비판의 인식론적 근거의 대표로서 이른바 <존재-당위 이원론>을 들 수 있다.[각주:69] 이는 흄과 칸트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존재명제에서 당위명제가 도출될 수는 없다는 논리원칙을 말한다. 다른 한편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서 자연적 특성을 곧 가치로움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는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각주:70]의 이론도 거론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인식론적 이론하에 자연법의 진리성 혹은 규범부여의 근거가 의심되었던 것이다. 즉 그에 따라 설명하면 자연법이란 어떤 본성이 사실적으로 그렇게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인바, 그로부터 어떤 규범 즉 구속력있는 명령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실명제를 당위명제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법이라고 하여 절대적 구속력을 부여하는 이들은 사실 자신의 주관적 가치관념을 자연에 미리 투입해 놓고 그것을 다시 자연 즉 본성이라는 이름을 빌어 절대화시키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된다.[각주:71]
그러나 존재-당위 이원론이 논리법칙으로는 타당하다고 할지라도 서로 붙어 있는 존재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를 인위적으로 떼어 놓을 수는 없다. 우린 “현실의 요청”이란 말을 形容矛盾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즉 규범은 우리의 머리 속이나 기존의 실정법체계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이들의 삶의 요청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규범은 아르투어 카우프만의 말대로 존재하는 당위(seiendes Sollen)이다. 따라서 우린 존재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당위도 발견할 수 없다는 존재-당위 이원론의 극단적 형태에 찬성할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보통 자연법의 현대적 형태라고 평가되는 이른바 <사물의 본성>(Natur der Sache) 이론은 타당한 사유방식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가치상대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며, ‘사물의 본성’이라는 명목으로 자기관철을 정당화하여 타인의 인격을 침해할 우려 또한 불식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어떤 내용적인 원칙이 아니라 상호인격의 승인이라는 절차적 원칙만이 모든 것에 앞서고 또 모든 가치에 내재하는 법의 보편원리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한편 최근 핵전쟁,기근,환경오염 등이 인류생존에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면서 이 시대 그리고 미래의 자연법은 바로 인류평화와 생존이라는 ‘긴급법’으로 우리에게 부과된다는 탐멜로의 주장도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환경오염의 문제가 절실해지면서 자연의 지배자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사상이 서구지성계에서 비로소 공인되었으며, 그에 따라 다시 ‘자연법’이 아닌 ‘자연의 법’을 생각할 때를 맞이 하였다고 볼 수 있다. 


4. 결론에 대신하여 - 자연법사상의 상속

우린 이상에서 미숙하고 부족하나마 자연법의 개념에 퇴적된 서구지성사의 영욕을 보았다. 이제 이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위에 우리의 희망을 얹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위의 논의에서 본 바처럼 ‘법의 본연에 대한 신뢰와 소망’ 즉 ‘법의 도덕적 근원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자연법사상의 귀중한 유산임을 생각할 때[각주:72]결코 부질없는 짓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세상의 규범질서는 규범(가치)상대주의 그리고 심지어 규범(가치)허무주의에 결박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자연법이란 말은 다만 지나간 시절을 회상케 할 뿐 우리에게 현재에 대한 어떤 요청을 담아내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인간세계의 규범의지의 전체적 조락인가?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보단 이제 자연법이라는 말이 규범질서에 관한 문제의식에서 상호의사소통의 매개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그리 되었을까? 추측컨대 인간의 본성 및 자연질서의 본성의 불확실성, 다원주의적 사고 그리고 인간 자신에 의한 자연 및 인간 종의 변화가능성, 인류의 역사에 대한 희망의 부재, 삶의 규범성보다는 삶의 경쟁성 그리고 본질보다는 현상, 숙고보다는 감각, 시간의 지속보다는 현재의 찰나성, 유지보다는 해체라고 하는 시대조건과 사조가 그러한 추세에 기여하는 듯 보인다.
이렇게 인간의 규범적 본성 및 공동체의 규범의지 더 나아가 규범중심의 존재여부 자체에 대하여도 회의적일 수 있는 현대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과연 우리는 어떠한 언어로 자연법사상 즉 법의 도덕적 근원 그리고 규범질서의 중심을 논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흔들리고 피폐해진 규범질서를 그 근본에서부터 새롭게 세울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나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 하기 때문에 (Du kannst, denn du sollst)”라는 저 유명한 칸트의 자유의 명제를 되새겨 보자. 여기서 우린 삶의 규범적 본성을 새삼 깨달을 수 있고, 규범허무주의의 혼돈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하늘로부터 우리 내부에까지 드리워진 생명의 끈을 찾는다. 즉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삶의 주체이며 따라서 또한 법다운 법, 참법에 대한 믿음과 소망의 주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서 규범상대주의의 무책임성에서 완전히 벗어나기에는 칸트의 보편화가능성의 정언명령 즉 합리적인 이성법만으로는 미흡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필자는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인간본연의 정서와 친했던 루소에게로 돌아가고자 한다. 즉 루소가 말한대로 자연 즉 인간의 자연(본성)에 돌아가, 자기애(amour de soi)[각주:73]와 연민(pitié)에 희망을 얹는다. 그리고 그 인간의 본성은 또한 루소의 통찰대로 교만함과 탐심에 젖어 왜곡된 정서를 갖는 엘리트들에서가 아니라 순박한 그리고 이웃을 진심에서 아끼는 착한 민중의 마음에서 발견된다고 할 것이다. 우린 그 마음에서 참된 규범의지를 찾을 수 있고 또 희생정신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계급이나 집단의 이름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이란 곧 상호주관성(Intersubjektivität)이라고 할 때 배타성과 피해의식으로 갈라져 있는 너와 나의 간극은 곧 각자의 인격에도 전사되는 것이므로 결국 우리 모두는 같은 비극을 안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인간의 규범적 본성의 진수는 다름 아니라 그 비극을 생의 절망이 아닌 생의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에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은 계층과 경계을 떠나서 서로의 간극을 메꾸어 나가 인류의 희망을 느끼게 해주는 그리하여 이 생의 비극이 오히려 감격의 원천이 되게끔 하는, 그런 훌륭한 규범의식을 지닌 사람들 모두가 될 것이다.[각주:74] 그리고 이러한 규범의지는 오늘날 규범질서의 다원성에 대한 구속이 아니라 그 생명력을 위한 것으로 그리고 해체의 대상이 아니라 해체의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에 우리가 규범질서의 척도로 삼아야 하는 본연의 법은 허영에 찬 지식인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이성법이기보다 삶의 진실한 애환을 체험하는 모든 착한 이들의 가슴에 새겨지는 또 그리하여 우리 모두에 감동을 전하는 양심법이라고 할 것이다.

  1. 동양사상의 전통에서는 예컨대 “천법”사상이 그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천법사상에 대하여는 홍기원, 「古代中國의 天法에 관한 硏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석사학위논문, 1993, 참조. [본문으로]
  2. 참고로 칼-하인츠 일팅은 자연법을 “이성적 존재인 모든 인간들에게 구속력이 있는 법규범의 체계로서 모든 실정적 특히 국가의 법률과 규정이 없이도 효력이 있고 만약 그와 충돌이 있는 경우에는 그에 반하여도 유효한 규범”으로 정의하고 있다, Karl-Heinz Ilting, 「Naturrecht」, 『Geschichtliche Grundbegriffe』, ed. by O.Brunner, Bd.4, 1978, p.245. [본문으로]
  3. 이에 관해 에릭 볼프는 “자연을 본질로 생각하면 자연법은 ‘존재법’이 되고, 자연을 기원으로 생각하면 자연법은 ‘원초적 질서’가 될 것이고, 자연을 참됨 혹은 불멸성으로 보면 자연법은 ‘참법’이 될 것이며, 자연을 인과성으로 이해하면 자연법은 ‘자연법칙’이 될 것이며, 자연을 합리성으로 이해하면 자연법은 ‘이성법’이, 자연을 이상으로 보면 자연법은 ‘법이념’이, 자연을 실제(Realität)로 이해하면 자연법은 ‘실제적 정의(Sachgerechtigkeit)’가, 자연을 창조성으로 보면 자연법은 ‘창조질서’가, 자연을 단순한 활력으로 보면 자연법은 ‘강자 혹은 다중의 힘의 질서’가, 자연을 사회성으로 이해하면 자연법은 ‘보수적 혹은 혁명적인 시대정의’가 될 것” 이라고 한다, E. Wolf, 「Naturrecht」,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6, ed. by J.Ritter/K.Gründer, 1984, p.590. [본문으로]
  4. 박은정교수는 서구정신사적으로 자연법을 이성법으로 이해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밖에 '존재법','자유법','혁명법','문화법','사회법','긴급법' 등으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박은정, 『자연법 사상 - 실천을 위한 보편이론』, 1993, 14-16쪽. 박교수는 또한 이 책에서 실정화 이념으로서의 근대자연법, 실질적 정법론으로서의 자연법이념, 그리고 미래학적 자연법 등등에 대하여 풍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본문으로]
  5. 박은정 교수는 자연법사상은 대개 역사적으로 보아 규범적 위기상황에서 法理念적 요청으로 대두되었다고 말한다, 앞의 책, 33쪽. [본문으로]
  6. 이를 실정법과 관계하여 현대 법철학적 논점으로 설명하자면 ‘법의 개념과 도덕(법이념)의 관계’ 그리고 ‘법의 구속력(효력)의 근거’에 대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즉 실정법의 한계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심헌섭, 『법철학I』, 1983 참조. [본문으로]
  7. 따라서 우리의 개념관은 개념에는 역사가 침전되어 있다는 점에서 개념을 단순한 정의(definition)의 문제로 보는 유명론과 다르고, 그러나 역사는 현재 하나의 형태로 굳어져 있지 않고 주객의 복합체로서 미래에 개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또 종래의 객관적 실체개념을 전제로 하는 개념실재론과도 다르다. 그리고 우리도 개념을 역사의 산물로 보지만 거기엔 다시 역사를 꾸려 나가는 우리의 주체적 희망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의 관점과도 다르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관의 진리성 혹은 과학성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 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강경선 교수의 글을 전하는 것으로 대답하고 싶다, “과학적인 이론이란 얼마만큼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느냐는 적실성에 의하여 그 장단을 판가름지을 수 있다. ...... 현실에 부합한다는 것은 사실성과 당위성의 계기를 포함한다. 인간의 역사는 살아움직이고 있으며 일정한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따라서 보다 더 과학적인 이론이라면 이렇듯 살아움직이는 그러면서도 가치지향적인 역사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강경선, 「해석과 변혁」,『 민주법학』, 1989.9, 5쪽. [본문으로]
  8. 이에 관해 다음의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자연법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 모든 형이상학적인 것처럼 - 오히려 과제로서 설정된 것이다”, Johann Sauter, 『Die philosophischen Grundlagen des Naturrechts』, 1932, p.224, 박은정, 앞의 책, 212쪽에서 재인용. 한편 『Historisches Wöterbuch der Philosophie』, op.cit., p.614도 참조. [본문으로]
  9. 한스 벨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법이론의 선험적 기초를 놓았으나 법과 인간본성의 결합을 근거지우지는 못하였다. 이 과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즉 자연(본성)과 이데아(형상)과의 일치라는 그의 이론은 고유한 자연법에로 향하는 문을 연 것이다”. H. Welzel, 『Naturrecht und Materiale Gerechtigkeit』, 1962, p.28. [본문으로]
  10. 이하 Ethica Nichomachea, 1134b18-1135a6. 니코마코스 윤리학, 최명관역, 1986, 160-161쪽 참조. [본문으로]
  11.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에서 올바른 정체와 그릇된 정체로서 각각 군주정-참주정, 귀족정-과두정, 공화정(politeia)-민주정을 설명하고 있다. 즉 그의 정치학에서 올바른 정체라 할 때 일반적으로는 군주정,귀족정,공화정이 그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화정은 최선의 정체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한 차선의 정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국가는 곧 덕에서 뛰어난 자가 통치하는 체제이고 이에 부합하는 것은 군주정과 귀족정이다. 그런데 그의 정치학에서 실제로 최선의 정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사는 귀족정에 모아져 있다. [본문으로]
  12. Physica, 192b, transl. by R.P.Hardie & R.K. Gaye 참조. [본문으로]
  13. 박종현, 『희랍사상의 이해』, 1986, 26-28면. [본문으로]
  14. 이에 관하여는 W.K.C.Guthrie, 『A History of Greek Philosophie』, 1975, vol.II. p.353 및 vol.III., p.56. 참조. [본문으로]
  15. 김남두, 「소피스트 안티폰에 있어서 법과 자연」,『서양고전학연구』 제2집, 1988.11., 132면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6. 같은 글, 139면 [본문으로]
  17. 여기서 주의할 점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한 트라시마코스가 칼리클레스와 같이 취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의 그와 같은 주장은 강하고 뛰어난 자가 보다 많은 것을 갖는 것이 “자연법”이라는 규범적 논지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옳고 그름의 기준을 포기하는 규범허무주의로 파악될 수 있다, Guthrie, op.cit.,vol.III, p.88-97 참조. [본문으로]
  18. Welzel, op.cit., p.17 참조. [본문으로]
  19. 칼리클레스는 기원전 411년의 아테네에서의 과두주의자들의 반란의 주체인 400인회에 참여한 안드론과 친분을 맺고 있었고 본인 역시 귀족 출신으로 자신의 혈통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Guthrie, op.cit., vol.3, p.102. 아테네에서의 과두주의 반란 그리고 그에 관련한 소피스트들의 physis-nomos 대립사상에 대하여는 양병우, 「과두주의 혁명 - 반동귀족의 사상과 행동」, 『아테네 민주정치사』, 79-108쪽 참조. [본문으로]
  20. 이하의 논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Guthrie, op.cit., pp.117-131 및 pp.155-163 참조. [본문으로]
  21. 그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성(자연)적인 노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당시 희랍사회의 노예제도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랍의 폴리스의 구성을 통치계급-피치계급, 완전한 시민-노예,상인,수공업자,노동자,농노,토지소유계급-노동계급, 희랍민족-이민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다시 '폴리스의 구성부분-폴리스의 조건의 구분'으로 이어져 전자는 목적이고 후자는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후자는 만들어 내고 전자는 수취한다(Politica, 1328a30, transl. by Olof Gigon). 당시 자유인과 노예의 구분은 물질적인 측면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보다 큰 심각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바, 노예는 아무리 지위가 있고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게 산다고 해도 “인격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고 그런한 천시의 대상이다. 그리고 희랍인들은 내부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누리면서 이민족을 노예로 삼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민족적 우월의식에 젖어 있었다(Guthrie, op.cit., p.156 참조). 그 업신여김의 폐습은 비극적 역사유산으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너와 나의 공동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본문으로]
  22. 당시 대개의 희랍 시민들은 노동을 천시하였고, 이민족 사람들로 구성된 국유노예의 생산기반 위에서 일종의 연금생활자처럼 즐기며 사는 것이 꿈이었다(양병우, 앞의 책, 122면 참조). [본문으로]
  23. 최종고, 『법사상사』, 1993, 154쪽. [본문으로]
  24. 프로이센일반국법의 제정과 공포의 과정에 대하여는, 김언식, 「프로이센 계몽절대주의와 법전편찬 - 프로이센 일반국법(ALR)의 제정을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1,12 또는 「계몽주의와 프로이센 일반국법(ALR)」, 『법학연구』3호, 1993.11. 161-200쪽 참조. 여기서 우린 프로이센 일반국법에 담겨 있는 자연법사상의 의의와 한계에 관하여 동법전의 실제 기초자인 수아레즈(Svarez)를 통하여 간단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아레즈는 볼프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또 확고한 자연법사상의 소유자였다. 즉 그는 “인간은 어떤 경우에서도 포기할 수 없고 따라서 시민사회로 이행함을 통하여 상실될 수 없는 몇가지 권리들을 갖는다. 이것이 소위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이다. ...... 그러므로 이 자연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은 시민사회로의 이행 후에도 인간에게 잔존하며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그 권리들을 빼앗을 자격이 있는 어떠한 입법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이 입법권의 한계들이다”(김언식, 앞의 글, 1993, 184쪽에서 재인용)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반면에 그는 국가의 시민법에 근거한 특별한 권리도 긍정하고 있다. 즉 그는 “출생을 통해서만 성립하는 권리들의 구별은 자연법이 아니라 오직 국가의 실정법에 근거한다...... 한 신분의 모든 성원들에게 그들이 단지 그 신분에 속하기 때문에 귀속되는 권리들은 시민적 입법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김언식, 같은 글, 186쪽 재인용)고 하고 있다. 이로써 법적 지위의 봉건적 불평등이 시민법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즉 프로이센 일반국법은 그 계몽적, 진보적 성격과 함께 그와 같은 봉건적 성격 그리고 계몽절대군주제를 유지하는 보수적 성격을 동시에 띤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25. 최종고, 앞의 책, 152쪽. 그리고 박은정, 앞의 책, 51쪽 이하 참조. [본문으로]
  26. 크리스티안-프리드리히 멩거, 『근대 독일헌법사』, 김효전‧김태홍 공역, 1992, 156-157쪽. [본문으로]
  27. 이에 관해 무엇보다, 국순옥, 「죤 록크의 시민헌법사상」, 『인하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논문집』, 1984. 2 , 183-197쪽 참조. 그리고 맥퍼슨, 『홉스와 록크의 사회철학 -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 』, 황경식‧강유원 공역, 참조. 아울러 노명식,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 - 그 비판적 연구 -』, 1991, 136-143쪽 참조. 노명식교수는 로크의 이론적 모순에 관하여 “여기에 이론가로서의 로크와 당시의 휘그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그로서의 로크와의 모순이 있는 것이다. 이론가로서 그는 개인적 권리와 같은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들을 추구하려고 하였으나 휘그파를 옹호할 현실적 필요에서 그는 당시 영국의 부의 엄청난 불공평 분배를 외면한 채 재산권을 옹호하였던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같은 책, 140-141쪽. [본문으로]
  28. 로크는 명예혁명의 주역인 샤프츠베리 백작의 비서이자 자문역이었으며, 왕당파의 이데올로기인 필머의 '가부장론'에 대항하여 '통치론'을 썼다. 로크의 '통치론'은 명예혁명 직후 즉 1689년 출판되었지만 그것이 실제 집필된 때는 1679-1681년 경으로 추정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송규범, 「존 로크의 정치사상」,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학위논문, 1991.2., 4쪽 참조. [본문으로]
  29. 목양산업을 위한 엔클로저로 농민들이 농토에서 쫓겨나 곤궁한 삶으로 전락하는 것을 빗대어 토마스 모어는 “양들이 사람들을 먹어치운다”고 표현하고 있다,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나종일 역, 1989, 58-62쪽 참조. [본문으로]
  30. 존 로크, 『통치론』, 이극찬 역, 1991, 50,53쪽 등. 한편 로크는 미개한 인디언들은 이 울타리치기를 모르고 아직도 공유자의 일원으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같은 책, 50쪽. [본문으로]
  31. 같은 책, 64-66쪽 참조. [본문으로]
  32. 그러나 로크가 부르조아의 민중지배를 위해 '통치론'을 쓰고 자연권론을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반론 또한 고려되어야 할 것 같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그(로크)는 단지 재산을 자유의 향유를 위한 주요한 수단으로 이해하였으며 이 재산을 자연권으로 확립함으로써 절대 자의적인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지키려 하였을 뿐이다. 그의 재산론은 스튜어트 절대왕조 치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논쟁의 대상이 과세문제였다는 사실과 왕의 특권으로부터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거의 하나의 정치적 공리처럼 여겨졌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송규범, 앞의 글, 국문초록 I쪽. [본문으로]
  33. 수평파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임희완, 『영국혁명의 水平派운동』, 1988 참조. [본문으로]
  34. 이하 J.Lilburne, 「Freeman`s Freedom」, Woodhouse, p.317, 민석홍, 「청교도혁명기의 수평파에 있어서의 자유와 평등의 개념」, 『서양사논문선집 I』, 1983, 277-324, 288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5. 「The Case of the Army」, Haller and Davies, p.78, 민석홍, 앞의 글, 285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6. 이에 관해서는 3차에 걸쳐 작성된 수평파들의 정치강령인 인민협약(The Agreement of the People)을 참조. 특히 제3차 인민협약 제1조에는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선거권을 가지며 남의 고용살이를 하는자, 자선금을 수령하고 있는자, 무기나 자발적 기부금을 내어 전왕에 봉사한 자는 선거권을 가질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 임희완, 앞의 책, 160쪽 및 성명숙, 「청교도 혁명기 수평파의 인민협약에 관한 연구」, 동아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80쪽. 한편 “남의 고용살이를 하는자”(servants)와 “자선금 수령자”(alms-takers)의 범위에 관한 논란에 대하여는, 민석홍, 앞의 글, 290쪽 이하 참조. [본문으로]
  37. 민석홍, 같은 글, 310쪽. [본문으로]
  38. R. Overton, 「An Appeale」, Wolfe, p.194, 민석홍, 같은 글, 313-314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9. Winstanley, 「New Law of Righteousness」, pp.190-200, 임희완, 앞의 책, 190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40. 민석홍, 앞의 글, 320쪽 및 임희완, 앞의 책, 206쪽. [본문으로]
  41. 최종고, 앞의 책, 참조. [본문으로]
  42. 이에 관해서는 이혜령, 「J.-J Rousseau의 정치사상」,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0.8, 28쪽 이하 참조. [본문으로]
  43. 이글은 원래 디종의 아카데미가 현상공모한 논제 즉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것은 자연법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응모작이었다. [본문으로]
  44. 이하의 설명은 주로 이혜령, 앞의 글, 26-83쪽에 의존하였다. 한편 국순옥, 「자유와 강제 - 루쏘의 소시민적 급진헌법 사상에 관한 소고 -」, 『인하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논문집, 1985.2.,261-273쪽도 좋은 참고가 된다. [본문으로]
  45. 서정복, 「Jean-Jacques Rousseau의 정치사상과 프랑스혁명(1744-1794) - Maximilien Robespierre와 혁명정부에 의하여 수용된 Rousseau의 사상을 중심으로 -」,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83, 93쪽. [본문으로]
  46. 이에 관하여 서정복, 같은 글, 85-88 참조. [본문으로]
  47. 민석홍, 「Maximilien Robespierre의 정치사상 연구」, 『서양근대사 연구』, 1991, 211-317쪽 참조. [본문으로]
  48. 소부울, 『프랑스 혁명사』 下, 최갑수 역, 1984, 제4장 「혁명정부의 승리와 몰락」참조. [본문으로]
  49. 토지의 취득이 어떤 형태로 되든 간에 각 개인이 자기 토지에 갖는 권한은 공동체가 모든 토지에 갖는 권한에 종속된다”, 루소, 『사회계약론』, 이태일‧최현 공역, 1991, 34쪽. [본문으로]
  50. “어떤 토지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것은 내땅이다'하고 선언할 생각을 가졌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은 시민사회의 진정한 창립자였다. 그 말뚝을 뽑아 버리거나 혹은 도랑을 메우면서 '그런 사기꾼의 말을 믿지 마시오. 이땅에서 나는 온갖 곡식과 과일들은 모두 만인의 것이며 대지는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여러분은 신세를 망치게 됩니다'하고 동포들을 향해 외친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은 범죄와 전쟁과 살인으로부터 그리고 얼마나 많은 참상과 공포로부터 인류를 구제해 주었을 것인가?”, 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 앞의 책, 217쪽. [본문으로]
  51. “평등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말이 권력과 재산의 정도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동등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권력에 대해서는 그것이 폭력으로 될만큼 강대해서는 안되고 오직 지위와 법률에 따라서만 행사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재산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떠한 사람도 다른 사람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지도 않고 그 누구도 몸을 팔정도로 빈곤하지도 않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강자의 편에게는 재산과 세력의 절제가, 또 약자의 편에서는 인색과 탐욕의 절제가 전제로 되고 있는 것이다”, 루소, 『사회계약론』, 앞의 책, 62쪽. [본문으로]
  52. 1789년의 최초의 권리선언 제17조는 “소유는 신성불가침의 권리이므로 누구도 법률로써 공공필요를 위하여 명백히 요구되는 경우가 아니면 또한 정당한 사전 보상이 지불되는 조건이 아니면 이를 박탈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규정이 공익을 위해 소유권이 제한될 수 있다는 취지로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반대로 동 규정은 토지에서의 봉건적 권리(공납이나 시설사용료 징수 등)를 계속 확보하려는 부르조아의 노력으로 이해된다. 즉 여기서의 ‘소유권’은 공납 등 封建諸稅를 포함하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동 규정은 프랑스혁명이 발발하면서 봉건제폐지가 기정사실화 되는 시점에서, 토지의 봉건제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농민들의 점증하는 욕구에 대한 부르조아의 대응책이었다. 즉 혁명초기 국민의회에선 예컨대 일정한 액수의 금액을 영주에 지불해야지만 이후 납세의무가 면제된다는 식으로 그 문제를 처리하였다. 봉건제세를 이와 같이 처리하는 방법을 ‘되사기’ 또는 ‘유상폐기’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영주는 연차공납액의 원금에 상당하는 돈을 한번에 수령할 수 있으므로 그 자체로도 아무런 손실이 없을 뿐더러 그 돈으로 다른 토지를 사들이는 ‘자유소유권자’로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반면에 농민이 되사기를 신청하지 않으면 여전히 공납을 징수하게 된다. 이상에 관하여는 甲斐道太郞외 지음,『소유권 사상의 역사』, 강금실 역, 1984, 94-98쪽 참조. [본문으로]
  53. Robespierre, 「Discours du 24 Avril, 1793」, Textes Choisis, Tome II, pp.134-135, 서정복, 같은 글, 97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4. Robespierre, op.cit., 서정복, 앞의 글, 98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5. 헌법사적으로 소유권 행사의 의무적합성의 요구는 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바이마르 헌법에서 최초로 규정되었다고 논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혁명 후 100년도 훨씬 지나서의 일이다. [본문으로]
  56. 소부울, 앞의 책 上, 1984, 301쪽. [본문으로]
  57. Robespierre, op.cit., 서정복, 앞의 글, 106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8. Robespierre, 「Discours, 2 Janvier 1792」 Text Choisis, Tome I, p.141,서정복, 앞의 글, 104 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9. 다니엘 모르네,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 주명철 역, 1993, 135쪽. [본문으로]
  60. 버크는 당대에 프랑스혁명에 반대하는 이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또한 그의 힘은 영국이 프랑스혁명의 와중에서 조용한 가운데 개혁을 해 나가는 의회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고 한다, 박종훈, 「Edmund Burke의 정치철학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5.7., 128쪽. 한편 프랑스혁명이 유럽대륙의 많은 이들을 열광케 하자 버크도 이 혁명이 유럽사람들의 마음의 기본적 변화의 증거일 수도 있으며 그리하여 프랑스혁명이 자연에 반한 혁명이 아니라 결국 신이 의도한 혁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글, 111쪽. [본문으로]
  61. 이하 헤겔, 『법철학』, 임석진 역, 1990, §211 「법의 실정화: 제정법의 보편성과 규정성」 그리고 §212 「실정법의 우위 및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의 실질적 차이」 참조. [본문으로]
  62. 이하 정운, 「제레미 벤담의 법사상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석사학위논문, 1989.2., 특히 30쪽 이하 참조. [본문으로]
  63. 이모우티비즘에 대한 설명으로는 김태길, 『윤리학』, 219쪽 이하 참조. [본문으로]
  64. 그 대표자로서 베르그봄 그리고 켈젠을 꼽을 수 있다. 켈젠은 법의 과학과 법정책을 엄밀히 구분한다. 법이 학문이려는 한 그것은 다만 실정법의 일반이론적 설명 이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자연법이라든가 정의와 같은 이념들은 법의 과학이 아니라 법정책의 이름으로 다루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켈젠이 법학의 과학성 혹은 순수성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켈젠도 말하듯이 그가 법이 훌륭한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것에 반대인 것은 아니며 그의 취지는 다만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법이론적 정당화를 우려한 것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법의 과학”의 중요한 이론적 귀결 중의 하나가 ‘법은 어떠한 내용이라도 포함할 수 있다’ 즉 ‘악법이라도 실효성이 있는 한 구속력이 인정된다’는 것이라고 할 때 켈젠은 마땅히 자신의 전제를 다시금 숙고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론 켈젠류의 법학의 과학성과 순수성이란 종종 ‘학문은 실제로부터 개념을 추출하면서 동시에 실제를 개념적으로 주조해 가는 것’이란 사실을 부인하는 사고지평의 협소함을 초래할 수 있고 또 자칫 법의 규범성의 근저에 놓인 우리의 도덕적 소망과 염원을 무시하는 학문적 독선과 아집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고 여겨진다. [본문으로]
  65. 네오토미즘의 자연법론에 대하여는 이태재, 『법철학사와 자연법론』, 1987, 특히 169쪽 이하 참조. [본문으로]
  66.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op.cit., p.609-610 참조. [본문으로]
  67. Ibid., p.613 참조. [본문으로]
  68. 라드부르흐,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 『법철학』, 최종고 역, 1982, 285-294쪽 참조. [본문으로]
  69. 이에 관하여는 심헌섭, 「존재와 당위」, 앞의 책, 177-270쪽 참조. [본문으로]
  70. 이에 관하여는 김태길, 앞의 책, 171쪽 참조. [본문으로]
  71. 심헌섭, 앞의 글, 214쪽 등 참조. [본문으로]
  72. 이에 관하여는 박은정교수의 실질적 정법론으로서의 자연법관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자연법은 정치적 사회적 위기에 처해서 일깨워지는 역사의식,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예언적 노력 등을 법사고에 실어 날라 법이라고 불리는 그 무엇으로 하여금 항상 '올바름'을 향해 역동적으로 눈 떠 있게 하는 사상인 것이다”, 앞의 책, 217쪽. [본문으로]
  73. 이 amour de soi는 amour-propre와 혼동되어선 안된다. 후자는 자만심,이기심에 가까운 반면 전자는 자신에 대한 참된 애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해 국순옥교수는 “루쏘에 있어서 자연적 자유의 실체를 이루는 것은 다름아닌 自己愛(amour de soi)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利己愛(amour-propre)와 구별된다. 즉 자기애가 인간의 본질적 충동으로서의 자기보존의 욕구를 의미하는데 반하여, 이기애는 인적 의존관계에서 오는 자기소외의 감정, 예컨대 불신감과 경쟁의식과 같은 부정적 심리를 가르킨다”고 설명한다, 국순옥, 앞의 글, 1985, 263쪽. [본문으로]
  74. 다음의 구절은 이에 관해 좋은 시사를 준다; “이제 법학의 영역은 훨씬 확대되어야 한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연출하고 있는 올바른 행동 그 자체를 탐구할 수 있도록 법학의 시각은 크게 확장되어야 한다. 법관이 무엇을 어떻게 인식하고 판결하는가를 연구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입법부와 행정부에 걸쳐 일어나는 법의 제정과 집행과정을 추적해 나갈 것이 요청된다. 더욱 나아가서는 생활에서 연출되고 있는 村老와 匹夫의 훌륭한 행동, 노동자와 농민, 노점상들의 정당한 요구, 사회운동가의 정의로운 행동들 이런 것들의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게 하는 행위규범학으로서의 법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홍규-강경선-이상영 공저, 『법과 사회』,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12쪽. [본문으로]



출처: http://anachist.tistory.com/entry/자연법-개념연구?category=290476 [GERECHTIG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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