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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G.W.F.Hegel

정신현상학 서문

by 이덕휴-dhleepaul 2023. 3. 26.

보나파르트 -절대정신의 표상

철학의 근본문제들: Hegel <<정신현상학1)>> 서문(Vorrede)

출처: Hegel <<정신현상학1)>> 서문(Vorrede) 읽기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만약 지구의 양극이 [온실효과로 인해] 용해된다면 도시들은 홍수로 침해되고 우리의 삶은 뒤죽박죽될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약간 더 큰 바다를 갖게 될 것이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 스티븐 굴드 -

 

 

1. 서론

 

1.1 강의(Vorlesung)의 일차적 의미는 읽어주기이니, 읽어줄 문헌의 선택이 읽어주는 이의 읽기 경험에 근거한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나, 우리의 강의도 그 개념에 따라 문헌을 읽어주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읽어주기는 복화술과 같아서 다른 이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요, 자기와 타자의 이러한 긴장이 읽어주기의 생동성을 유지하거니와, 거기에 듣는 이의 듣기, 듣는 이 자신의 읽기가 덧붙여진다면 읽기, 읽어주기, 듣기, 읽기라고 하는 강의의 전 과정 및 그것과 별개일 수 없는 강의 본래의 목적이 동시에 역동적으로 완성된다 하겠다.

 

1.2 철학의 근본문제들에서 사람들이 일반으로 떠올리는 인식과 진리, 존재, 美와 가치 등은 이미 철학이라는 학문 영역에 발을 들여 놓은 이들에게나 호소력있는 주제일게다. 우리에게는 이것들이 부차적으로 여겨지고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 철학공부는 어떻게 하는가, 세상사와 철학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등이 근본문제일 것이며, 더욱 근본적인 것은 철학을 공부하면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는가 이겠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는 철학자체가 더욱 근본적인 것은 물론이고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서조차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것을 해명해주지 못하는 철학을 현학취미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간주에 대하여 사람들은 Aristoteles의 '우리에게 먼저인 것'과 '본성상 먼저인 것'의 구별2)을 들어 우리의 문제가 우리에게는 절박한 것일 수는 있으나 사실은 천박한 것이라 규정하고 '본성상 먼저인 것'을 천착하는 철학적 탐구가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먼저인 것'에 집착하는 우리의 욕구까지 충족시켜 준다는 확신을 설파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의 내면에는 우리의 근본문제에 대한 강한 동의가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고, 그것이 스멀스멀 기어나올까봐 다음과 같은 Hartmann의 말로써 쐐기를 박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현재상황이 안고있는 긴급한 문제들을 가능한 한 곧바로 해결하는 것을 철학적 작업에 종사하는 조건으로서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곧장 가는 지름길이 가로 막혀서 불가피하게 여러 갈래의 우회로를 따라 갈 수 밖에 없게 되면, 이들은 그제서야 냉정을 되찾아 철학에 등을 돌리며 철학이란 결국 세상사와는 상관없는 사고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 속에 깊숙히 침잠함으로써만 비로소 문제 해결을 위한 통찰을 얻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알고자 하는' 조바심으로 인해 그렇게 하지 못한다... 과제가 더없이 절박할때, 진정한 철학은 근본으로 되짚어 내려가는 법이다."3)우리는 철학이 세상사와는 상관없는 사고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철학과 세상사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가 우리의 절박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조바심을 버리고 근본으로 되짚어 내려가서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그냥 두어 두더라도 근본문제들에 대해서 만이라도 명료히 대답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것들이 사람들이 말하는 근본문제들과 어떤 연관에 놓여 있는지, 또는 '우리에게 먼저인 것'과 '본성상 먼저인 것', 둘 다가 본래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성의 양면이어서 '우리에게 먼저인 것'에서 시작하여도 '본성상 먼저인 것'에 이르는 길을 제시할 수는 없을까?

 

1.3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먼저인 것'에서 '본성상 먼저인 것'으로 나아갈 것인가 -- 이것이 지금의 과제요 이는 <<정신현상학>>의 과제이기도 하다. <<정신현상학>>은 우리의 감각이 틀림없다고 여기는 것, 즉 감각적 확실성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곧바로 이런 확실성을 가진 의식은 그 확실성이 참으로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며, "관찰하는 이성"(이론이성), "이성적 자기의식의 실현"(실천이성), "개체성"(사회적 이성)을 거쳐 정신에 이르고, 결국에는 '본성상 먼저인 것'인 절대적 知에 도달한다.4) 그런 까닭에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는 것이 지금의 과제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일 수 있을게다. 그런데 우리가 읽기로 한 것은 <서문>이다. 과연 이 <서문>을 통해서 우리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가 대하는 몇몇 책의 서문들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 책들이 서문에서 저술과의 필연적 연관이 없어 보이는 듯한 저술 동기, 師門來歷, 自讚 등을 內子, 출판인에의 감사와 곁들여 쓴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서문>도 크게 다르지 않는 건 아닐까? 이러한 의구심은 Hegel에게도 조금은 중요한 것이었다. 그가 이 <서문>의 첫머리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서문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한다는 점이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5)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대개 서문에서 저작의 "목적", "동기", 다른 논저들과의 관계 등을 설명하는데, 이는 철학에 있어서는 "부적절하고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것은 "경향과 입장, 총괄적 내용과 성과의 記述的 報告일 것이며, 진리에 관하여 이리저리 떠들어대는 일련의 주장과 단언"이어서 "철학적 진리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다."(9) 이렇게 본다면 이 <서문>은 일단 우리가 흔히 대하는 서문들과는 다르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서문이라는 글이 그렇듯이 <<정신현상학>>의 저술을 끝낸 후에 작성된 이 <서문>은, <<정신현상학>>이 Hegel철학의 입문이라 불리어진다면, 그의 철학의 입문이라 불리어진다. 따라서 Hegel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서문>부터 읽어나가는 것이 常例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서문>은 Hegel學에 관심없는 이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물음은 <서문>을 다 읽은 다음에야 답할 수 있겠으나 그 대답을 先取한다면 '그렇지 않다'이다.

 

 

2. 본론

 

2.1 모든 것이 학의 대상일 수 있으나 어떤 학이든지 "학의 이름을 정당하게" 부여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6) "해부학"을 예로 들어보자. 해부학은 "非生動的 定在에 있어서"의 인간의 신체, 간단히 말해서 시체를 다루며, 그것의 목표는 "지식의 축적"(10-11)이다. 해부학자들은 그 신체가 어떤 경로를 거쳐 해부대 위에 놓여 있게 되었는지, 그 신체가 시체가 되기 전에는 어떠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내장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 등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요, 이는 "Caesar는 언제 태어났는가"7) (34)를 따져묻는, 사실에 치중하는 탐구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종류의 학은 정확함을 추구하며, 그 정확함 또는 명증성에서 스스로가 학이라는 근거를 찾고자 하여 수학을 학의 이상으로 삼는다.8) "수학적 인식은 非哲學的 知가 보기로는 철학이 도달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상이지만, 그러나... 그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33) "[수학적] 인식은 결함이 있으면서도 명증성을 가지는데 이 명증성을 수학은 자랑하며, 철학에 대해서도 자만하지만 [그러나] 이 명증성은 수학의 목적의 빈곤과 수학의 소재의 결함에 기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때문에 그것은 철학이 경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37) 수학을 이상으로 삼는 학들은 표면에 드러나서 헤아릴 수 있는 것들, 즉 量的인 것만을 학의 대상으로 삼는데, 바로 그 때문에 내면적 진리에는 관여할 수 없거니와, 이처럼 모든 사태를 양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학의 태도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결국 수학의 한 분야일 뿐이다. "수학의 목적 또는 개념은 양9)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비본질적인 沒槪念的인 관계이다."(37) 따라서 수학적 태도는 "질적인 내재적인 운동, 즉 '자기' 운동에도 이르지 못"하는데, 이는 "수학이 고찰하는 유일한 것은 양이라는 비본질적인 구별이기 때문이다."(38) 해부학적인 지식의 축적과 수학적인 양으로의 환원이라는 방법은 살아있는 인간은 물론이고, 그러한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다룰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수학에서 빌어온 학문상의 盛裝이 이미 世評에 있어서조차 적어도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10)(40) 지식의 축적과 명증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會話"를 통하여 그들이 축적한 지식을 전달한다. 회화는 사태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고 겉만 스쳐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회화를 하는 이들은 사태를 낱낱히 파헤쳐서 그것이 시초부터 종국까지 전개되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수행하며 있는 그대로를 상세히 서술11)하지 않고 다만 요점과 略說만을 취하며 이에 근거하여 "단언"(9)을 일삼곤 한다. 지식을 전부로 아는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여러 학설들을 비교12)하고 그것들의 차이를 지적하는데까지 나간다. 그러나 차이와 그 차이의 충돌을 밝히는 것이 철학의 궁극적 과제일 수는 없다. 그것이 필요하기는 하나, 그것은 비판이 수행하는 부정적인 일일 뿐이다. 적극적인 철학적 사색은 "서로 반목하고 거역하는 ... 형태에서 필연적 계기를 인식"(10)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요, 그러한 부정적 측면을 더 진전시켜 전 철학체계의 상호연관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 지식은 사실의 명증한 확인과 축적, 대조비교로써 성립하나 사태의 본질을 드러낼 수는 없다. 지식은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인식13)의 성립과 "陶冶와 실체적 생의 직접성으로부터의 脫却의 노력"(11)에 있어서 필수적인 계기라고 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실체적 생은 소박한 생, 무조건적 신앙의 상태, 主客未分14) 의 단계, 무자각적 상태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상태, 私的인 것이 어디에서 끝나고 公的인 것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모르는 상태15)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지식인데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요구된다: 일반적인 원칙과 관점에 대한 지식, 그 지식을 事象의 思想으로 끌어올리기, 근거를 가지고 事象을 지지하거나 논박하기, 규정성에 따라 구체적이고 풍부한 내용을 파악하고 내용에 대한 정확한 결정과 진지한 판단을 내리기.(11) 만약 "이러한 [지식의] 형성이 없다면 학은 일반적인 이해를 결여하고 몇몇 개인의 秘敎的 소유"(16)가 되고 말 것이다. "[형식에 있어서] 완전히 규정된 것이 동시에 公敎的이요, 파악될 수 있고 배울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의 소유일 수 있다."(17) 지식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인식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절대자는 ... 느껴지고 직관되어야 하고, 절대자의 개념이 아니라 절대자의 감정과 직관이 주도적인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13)고 말하는 이들, 진리는 단박에 깨칠 수 있다고 선언하는 이들, 진리는 글로써 표현할 수 없고 느낄 수 밖에 없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진리와 인식을 말하고 있으나 실상은 지식이 깨뜨리고자했던 소박한 실체적 삶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요, 이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진리의 구현체라고 선언하거나 愚衆을 규합하여 狂躁的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지식을 거치지 않은, 무매개적인 직접적 인식을 추구하고 그것에서 만족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학의 길에 들어서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쳐야 하지 그러한 인식이 "학보다 더 고차적인 어떤 것"(14)이라 주장해서는 안된다.16)

 

 

2.2 우리는 지식의 부정적 긍정적 측면을 모두 조망한 결과 그것의 부정적 측면을 폐기하고 동시에 적극적 의의는 보존하여 진리에 대한 학적 인식으로 올라설 수 있는 단계17)에 이르렀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된 것은 "숙지된 것", "表象", "思想"이다. 그러나 "숙지된 것은 일반으로, 그것이 숙지되어 있다고 해서 인식된 것은 아니다."(28) 숙지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만큼 보편적인 것이요, 보편적인 까닭에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추상적인 것이니, 우리는 이것을 추상적 보편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살아가는 당대의 현실 속에서 검증하는 일, 즉 "개념의 노고를 몸소 떠맡"(48)음으로써 추상적 보편성에서 특수성이라는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며, 이 단계를 거치면 표상은 "現實的 知"18)(12)로서 등장할 것이요, 이는 다른 말로 구체적 보편성의 단계라 하겠다. 이처럼 추상적 보편성, 특수성, 구체적 보편성의 단계를 거치는 것은 도야 또는 교양의 과정에 다름 아니며 최초의, 보편이긴 하되 추상적이었던 보편이 역사사회적 현실을 거쳐 최초의 보편으로 돌아오되 이번에는 질적으로 고양된 개별성이 되는 이 도정을 우리는 변증법적 원환이라 할 수 있다.19) 본래 지식은 현실에서 통용되는 것이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추출하고 추상화하여 일정한 원리를 만들어 가진다. 원리가 되면 지식은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추상적인 것이 되는데, 일반으로 사람들은 이것을 얻는 것이 학의 임무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원리는 진정한 인식, 현실적 지를 형성해 나가는 출발점일 뿐이다. 즉 "원리는 완성이 아니다."20)(16) 현실을 관조하여 그것으로부터 추상적 지를 이끌어 내는 것은 오랫동안 철학의 임무였고, 이를 사람들은 "愛知"라 하였다. 그러나 애지에 머물러 있는 한 진리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고 완성되지도 않는다. 지는 자신이 태어난 곳, 즉 현실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돌아가야만 지는 완성되고 인식되는 것이니 이러한 되돌아감은 "지의 본성에 놓여"(12)있고, 이와같은 인식을 산출해내는 것은, 현실로부터 지식을 추상해내었던 오성이 아니라, 현실에 관여하는 힘을 가진 정신21)이다. "정신적인 것만이 현실적인 것"(24), 현실적 지를 산출할 수 있다. 정신적인 것은 역사 속으로 전개된 이성이므로 역사는 실천의 장이다. 역사적 실천을 수행하는 정신은 태고로부터 존재해온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내가 가진 것이며, 그러한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나 또한 도야의 과정을 밟지 않으면 안된다. 학적 현실적 인식을 감당하기에 적절한 개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특수한 개인은 불완전한 정신이요, 하나의 구체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이 형태의 定在 전체에 있어서는 단 하나의 규정만이 지배적이요, 다른 규정들은 희미하게 지워진 모습으로만 현존하는데 지나지 않는다."(26) 현실적 지가 추상적 보편, 특수성, 개별적 보편이라는 과정을 거쳐 나갔듯이 개인 또한 이러한 도야22)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철학하는 것을 또다시 진지한 일로 만든다는 것이 특히 필요하다. 모든 학문, 예술, 기능, 수공에 관해서는, 그것들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 여러가지 노고가 필요하다고 하는 확신이 널리 시인되고 있다. 그에 반해서 철학에 관해서는 오늘날 다음과 같은 선입견이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누구나 자신의 타고난 이성에 그것[철학하는 것과 철학을 평가하는 것]에 필요한 척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그대로 철학할 줄도 알고, 철학을 평가할 줄도 알고 있다고 하는 선입견이 그것이다."(54) 개념의 노고, 개인의 정신의 도야를 거치면 철학적 인식은 "모든 자각적 이성의 '소유'가 될 수 있"(57)는 것이다.23)

 

2.3 지식이 인식으로 고양되고, 특수한 개인이 교양적 인간으로 도야되어 철학적 사색을 하면, 그가 낳아놓는 진리는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이제 지식은 개인의 외부에 쌓여 있어서 이용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축적물24)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검증되었고 동시에 그 역사적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도야한 개인에 의해 파악되었으므로, 다시 말해서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모두가 역사적 도야를 거쳤으므로 단순히 객관 속에 존재하는 "실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체로서 파악되고 표현"(19)되어야 할 것이다.25) 또한 역사 사회적 현실은 단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현대에는 무수한 학문분과 -- 대다수는 '학'의 이름을 부여받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 가 있고, 삶의 영역은 참으로 다양하다. 당대의 문화나 사회의 모든 측면을 따로 떼어놓고 연구할 수는 있겠으나 그 본질에서는 서로 구분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진리, 학적 인식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이 모든 차원을 고려하고 각각의 경우에서 세밀히 궁리하되 그것이 결국 전체의 계기들임을 놓쳐서는 안되는데, 이는 바로 "진리는 전체"(23)임을 고려하는 것이다. "정신의 세계의 왕관인 학은, 처음부터 형성되어 있지 않다. 새로운 정신의 始原은 다양한 교양[문화] 형식의 상세한 혁명의 산물이요, 겹겹이 얽힌 길과 착잡한 긴장과 노고의 대가이다."26) (16) 왜 진리는 현실의 운동 속에서 파악되어야만 하고, 진리를 파악하는 개인 또한 역사 속에서 도야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이 물음은 어이없는 것이다. "자연에 있어서는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반면 "정신적 지반 위에서 일어나는 변화", 즉 인간의 역사에서는 "새로운 것이 등장"27) 하기 때문이다. 현실 자체가 고정적이고 불변적으로 남아있는 영원한 형식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그 의미와 내용 규정이 변한다면 당연히 그것을 파악하는 사유의 범주들 또한 고정적이어서는 안된다.28) 지금까지 사람들은 세계와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 존재를 고정적인 것으로 생각해왔고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인간에게는 세계를 이해하는 사유의 불변적 범주가 있다고 여겼다.29)그러나 이제 시대는 달라졌다. "우리의 시대는 하나의 탄생과 새로운 시기로의 이행의 시대30)라는 것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이 시대에는 종래에 통용되던 모든 관행과 사유의 범주들이 폐기되고 우리는 시대에 걸맞는 전혀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 이 시대에 걸맞도록 스스로를 도야하는 "정신은 정지해있지 않고 항상 전진하는 운동"(15)에 있지 않으면 안되고, 변화하는 현실은 철학에게도 "학으로 고양"되고 "현실적 지"(12)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변화하니 정신도 변화한다고 하지만 정신이 세상의 변화에 저절로 맞춰지는 것은 아니다. "정신의 힘은 단지 스스로의 외화만큼 크며 정신의 깊이는 정신이 자기의 전개에 있어서 스스로를 확장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리는만큼 깊은 것이다."(15) 정신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스스로를 세상으로 내보내며 그러한 전개의 과정에서 더러는 자신을 펼쳐 보이고 더러는 쓰디쓴 퇴보의 경험을 겪기도 한다.31) 그러나 이러한 확장과 상실, 긍정과 부정의 과정, 즉 정신의 운동은 그 자체로 정신이 현실적 지, 참된 진리를 형성해가는 과정이요, 그 과정에서도 정신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굳게 지켜나가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러한 외화와 자기정체성, 즉 "자기의 밖에 존재하면서 자기 자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24)의 확보는 정신의 본성이어서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32)

 

3. 결론

 

그것이 날씬하건 두툼하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가 많아진 현대에서는 고도의 정보기술33)을 이용해서 그 정보들을 가능한 한 많이 취합하고 그렇게 취합된 정보들을 다양한 기준에 따라 분류해서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일견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報告"34)(9), 다시 말해서 지식의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지식이 아닌 인식, 지식을 바탕으로 하되 그 지식의 내적인 구조와 본질에 대한 인식에 이르려하는 철학적 사색이 성립하는 근거가 있다. 우리가 사물을 꿰뚫어 알때에만 사물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고, 이것은 개념적 파악이라 하겠는데, 이러한 개념적 파악을 가져야 세상사에 제대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개념파악적 인식을 얻는 것이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이고, 지식에서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철학 공부의 방법이며, 그러한 인식을 가지는 것이 세파를 이겨내는 근본적 바탕이므로 철학은 세상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귀결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에게 먼저인 것'을 이렇게 탐구하고 보니 이것이 '본성상 먼저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하고, 전혀 별개의 것인양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러한 검토는 우리에게는 미해결인채로 남아있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에게 미루기로 하자.

 

 

4. 문헌해제

 

4.1 Hegel의 <<정신현상학>>을 원전으로 읽고자 한다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E. Moldenhauer와 K. M. Michel이 편집하고 Suhrkamp출판사에서 나온 Theorie Werkausgabe전집판이다. 20권으로 된 이 전집판의 세 번째 권이 <<정신현상학>>이다. 이 저작으로부터의 인용을 표시할 때는 TW라 줄여 적고 권 수와 페이지 수를 적기도 한다. 가령 TW12, 74는 12권, 즉 <<역사철학강의>>의 74페이지라는 뜻이다. 흔히 'Hoffmeister판 현상학'으로 불리는 것은 Felix Meiner출판사에서 간행된 것이고, 이 글에서도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인용을 한 다음 괄호 안에 페이지 수만을 적었다. <<정신현상학>> 영역본으로는 J. B. Baillie의 The Phenomenology of Mind와 A. V. Miller의 Phenomenology of Spirit가 있다. 불역본으로는 J. Hyppolite의 La Phénoménologie de L'esprit가 있고, 일역본으로는 金子武藏의 <<精神の現象學>>이 있다. 국역본은 임석진의 <<정신현상학 I, II>>(지식산업사)이 있는데, 읽어내기가 어렵다. 양무석이 서문과 서론만을 번역하고 여러 번역본들의 주해를 덧붙여 출간한 책이 있는데, 제목은 <<정신현상학 주해집성 I>>(형설출판사)이다. 이 책 주해 시작 부분에 Hegel에 대한 참고서적들도 잘 정리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책의 번역을 참조했다. <<정신현상학>>에 관한 고전적인 주석서는 불역본을 출간하기도 한 Hyppolite의 <<헤겔의 정신현상학 I, II>>(문예출판사)이다. Hegel 철학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은 많이 있으나 W. Kaufmann의 <<헤겔>>(한길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4.2 Aristoteles의 Analytica Posteriora는 <<후분석론>>이라 하는 책이고 metaphysica는 <<형이상학>>이다. Aristoteles의 저작에서 인용할 때는 '71b 34'와 같은 식으로 표기한다. 이는 'Bekker쪽수'라 하는 것으로 Immanuel Bekker가 간행한 Aristoteles전집에서 사용된 것이다.

 

4.3 N. Hartmann의 <<존재론의 새로운 길>>의 원제는 Neue Wege der Ontologie이고 손동현이 옮기고 서광사에서 출간된 것이다. Zur Grundlegung der Ontologie는 1935년 w. d. Gruyter에서 출간되었고 하기락에 의해 <<존재학 원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형설출판사에서 나왔다. Hartmann은 '비판적 실재론'을 전개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독일관념론의 철학>>이라는 저서로도 유명하다. 이 책은 독일관념론 철학을 조망하는데 가장 좋은 책이다.

 

4.4 今村仁司의 <<근대성의 구조>>(민음사)는 기계론적 형이상학을 중심으로 서양 근대를 조망한 책이다. 핵심을 잘 잡아 정리한 점이 돋보인다.

 

4.5 Gilson은 중세철학자이다. <<철학과 신>>은 김규영이 옮겼고 성바오로 출판사에서 1966년에 초판이 나왔다. 이 책은 그리스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유를 검토하고 있다.

 

4.6 Koselleck은 독일의 역사학자로 Geschichtliche Grundbegriffe[역사적 기본개념들]의 편집자로 유명하다. 원제가 Vergangene Zukunft인 <<지나간 미래>>는 1979년에 Suhrkamp에서 출간되었고 한국에서는 한철이 옮겨 문학동네에서 간행되었다. 근대 이후의 역사학에 관련된 논문 모음집이다.

 

4.7 <<나는 장미의 이름을 이렇게 썼다>>(열린책들)는 Eco가 자신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대한 몇가지 궁금증에 답하기 위해 쓴 책이다.

 

 

 

 

 


1) <<정신현상학>>에 관한 서지적 사항은 <4. 문헌해제>를 참조하라.


2) Aristoteles, Analytica Posteriora, 71b 34참조.


3) Hartmann, <<존재론의 새로운 길>>, pp. 13-14.


4) <<정신현상학>>의 목차에는 정신이 거쳐가는 이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5) 여기서 Hegel이 문제삼는 일반적 서문의 내용들은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수사학적 기술(ars rhetorica)에 속한다. 저작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이 기술의 핵심적 특징이며 저자가 주제에 이른 방식과 논증방식을 서술하는 것은 inventio에 해당하고, 다른 저작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ars disputandi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Hegel은 전통적인 수사학적인 방식을 따르는 서문이 가진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하면서도 자신 역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서문을 작성하고 있다.


6) 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학문의 대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학자가 그런 걸 다룰 수는 없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무엇에든지 '학'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7) Caesar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100년으로 알려져왔다. Suetonius, Plutarch, Appian 등과 같은 역사가들이 그가 56세에 암살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Theodor Mommsen은 기원전 102년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역사가들은 사실의 정확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정확한 사실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탐구가 '학문', 즉 역사'학'이 되려면 정확한 사실만 가져서는 안된다. 역사의 의미 등과 같은 사실 이외의 것에 대한 진지한 사색이 덧붙여져야 한다.


8) 근대철학의 출발점이라 여겨지는 Descartes에서도 학문의 목표는 명증성이었고, 이 명증성을 위해서 그는 수학을 학문의 모범으로 삼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기본 태도는 변함없다. 거의 모든 학문이 정확함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그 정확함을 위해서 고도로 정밀한 기계조작 등을 감행하고 있다.


9) 양만을 문제삼는다는 것은 눈으로 보아 셀 수 있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양을 쉽게 측정하는 방법은 그것이 얼마짜린지 계산해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돈으로 환산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계산해보아 많은 것이 좋은 것이고, 적은 것은 나쁜 것이 되곤한다. 단순히 많고 적음이 윤리적으로 좋고 나쁜 것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수학적 계산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이와같은 계산방식이 국가에 의해 권장되고 있는데, 이른바 '신지식인'이라는 게 바로 그것이다. 국가에서 널리 알리고 있는 신지식인들은 지식을 이용해서 더 많은 이익을 만들어 내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들이 지식을 쌓아서 훌륭한 인격을 완성했다면 결코 신지식인에 선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많은 이익을 만들어냈을 뿐인데도 훌륭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사기다. 본래 '훌륭한'이라는 말은 내면적인 인격에 대해서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10) Hegel이 <<정신현상학>>을 쓴 것은 1807년이다. 그가 수학적 학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아직도 그것을 학문의 모범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다.


11) 사태를 낱낱히 파헤쳐서 그것이 시초부터 종국까지 전개되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수행하며 있는 그대로를 상세히 서술하는 것을 Hegel은 Ausführung이라 한다. Ausführung은 '수행하다', '서술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 술어는 Hegel의 변증법을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Hegel의 변증법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소문이 많이 나돌아왔는데, 사실 그의 변증법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것들은 그런 소문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제대로 말하려면 그것이 생겨난 시초부터 끝난 지점까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야 하고, 그렇게 말하려면 그 과정을 주욱 따라가 보아야 한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느 한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단언'(Versicherung)이 될 것이다. 실제로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단언'은 '상술'에 대비되어 쓰인다. <<정신현상학>>을 읽는 방법도 Ausführung 밖에 없을 터인데 사람들은 이 책조차 요점과 약술을 취하는 방법으로 읽곤 한다. Hegel에 있어서 중요한 술어들에 관해서는 Kaufmann의 <<헤겔>>, pp. 186-193을 참조하라.


12) 어떤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진공 속에서 시체로서 살았고, 죽은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老子와 Novalis를, Hegel과 慧能 등을 비교한다. 이런 비교가 가진 학문적 의의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만약 그것이 生과 사회적 상황들을 죄다 빼버린 채 이루어진다면 그들의 작업은 해부학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해부학자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13) 이 <서문>은 "학적 인식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서문>에서는 '지식'(Kenntnis)과 '인식'(Erkenntnis)이 뚜렷하게 구별되어 쓰인다.


14)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는 것은 Descartes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cogito적 사유이다.


15) 근대 이전 사람들은 공공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해서 살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들은 아무데서나 사적인 것을 드러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렇지 않다. 이런 구분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예를들어 공적인 원칙에 따라 처리해야 할 일을 사적인 유대, 즉 혈연, 학연, 지연 등에 따라 처리하는 사람들은 근대인이 아니다.


16)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형식을 통해서 글을 쓰고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이 파악한 진리는 그저 느껴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광신자이지 학문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참된 진리에 도달하려면 책을 불살라야 한다거나 지식을 통해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등과 같은 헛소리들을 지껄이곤 한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걸 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개선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것이 진리로 간주되고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져서 그들이 사기를 치고 있는지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조차 알아낼 길이 없다면 세상은 정말 황당무계한 곳이 되고 말 것이다. 먹고 살기가 힘들고 어려울수록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를 주절대는 거짓 예언자들이 난무하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학문세계에서도 일어나곤 한다. 다음과 같은 지적은 이 점을 생각하게 한다: "프랑스의 경우, 1960년대 전반부터 자크 라캉처럼 분위기로 밖에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인기를 끌었다. 그것은, 나쁘게 말하자면, 통속적 수용이며 영웅을 갖고 싶어하는 우리 일반 대중의 나쁜 습관이기도 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자본주의라고 불리우는 근대체제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없다면, 라캉이나 프로이트에 대한 흥미는 절박한 것이 못될 것이다."(今村仁司, <<근대성의 구조>>, p. 29)


17) Hegel 변증법에 있어서 중요한 술어 중의 하나인 '지양'(Aufheben)은 세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내다 버리다, 폐기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보존하다'이며, 마지막으로는 '들어 올리다, 높이다'이다. Hegel은 이처럼 다양한 뜻을 가진 술어를 통해서 변증법적 통일을 표현한다. 서로 대립되는 두가지가 있을 때 각각이 가진 좋지 않은 측면은 내다 버리고 좋은 측면을 보존하여, 또다른 입장으로 올라선다면 이것을 우리는 지양이라 할 수 있다.


18) '현실적 지'를 '현실주의적 지'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적인 지는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라든가 '어떻게 유도리를 발휘할 방법이 없느냐' 등과 같은 처세술을 뜻할 뿐이다. 또 '현실적 지'를 '현실을 정당화하는 지식', 그러니까 현실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그건 이미 정해진 것이니까 옳다는 식의 정당화로 이해해서도 안된다. Hegel이 말하는 '현실적 지'는 머리 속에 추상적으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상황 속에서 검토된 이성적인 것이고 그는 이것을 학문적 인식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 <서문>에서 말하는 '현실적 지'는 그의 <<법철학>> <서문>의 유명한 명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법철학>>의 이 구절이 당시의 프로이센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어이없는 해석일 뿐이다.


19) 변증법을 설명하는 또다른 방식은 이처럼 추상적 보편성 - 특수성 - 구체적 보편성(개별성)이라는 과정을 통하는 것이다. 보편에서 시작하여 다시 보편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이 과정을 둥그런 원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20) 원리(principium)는 arche겠는데, 철학적 인식이 도달해야 할 목적이자 동시에 출발점으로서의 시초(Anfang)를 의미하기도 한다. Aistoteles도 모든 의미의 arche의 공통점이 "사물의 존재 또는 생성 또는 인식이 시작되는 최초의 점"(metaphysica, 1012b 34f.)이라 지적한 바 있다.


21) Hegel의 정신 개념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공간과 그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전제할 때에만 이해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가끔 쓰는 말 중에 '저 사람 제정신이 아니야'라는 게 있다. 이때 '정신'은 어떤 사람 개인의 정신상태만을 가리킬 것이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혼자 사는 사람은 제정신일 필요가 없다. 아니 그가 제정신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기준이 없다. '정신나간 사람'이라는 규정은 집단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Hegel에 있어서 정신개념은 Hartmann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장 적절하게 규정해주고 있다 할 수 있다: "개인은 인격으로서는 하나의 완결되고 독자적인 존재이지만, 정신적 생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정신적 생은 역사적 전진에 있어서 진전한다... 정신과학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정신을 다룬다. 여기서는 개인의 특수성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특수성은 그것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다만 그때의 역사적 정신의 전체로부터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정신은 변천, 경향, 발전을 가지며 개인을 넘어서 지속된다해도 시간 속에서 생멸하는 실질적인 것이다... Hegel이 '객관적 정신'이라 부른 것이 바로 이것이다." (Hartmann, Zur Grundlegung der Ontologie, SS. 11-12)


22) Hegel이 말하는 개인의 도야 또는 교양(Bildung)을 호사가들의 고상한 취미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객관적인 역사세계에 직면해서 개인이 치열하게 자신을 검토하는 과정이다.


23) Gilson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현대 철학에 대한 가장 큰 저주는 지적인 자기 훈련에 대한 거의 일반적으로 유행하는 반항인 것이다. 해이해진 사고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곳에서는 진리가 거의 파악될 수 없다. 거기에서부터 나오는 결론은 당연히 진리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철학과 신>>, pp. 15-16) 그는 꽤 오래 전에 이 말을 했는데, 아직도 절실하게 들린다.


24) 이처럼 지식을 쌓아놓고 이용하는 것이 공부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문가라 불리운다. 그들은 사용하는 도구가 다를 뿐 프로운동선수들과 다르지 않다. 당연히 그들은 지식을 물건으로 취급한다.


25) 이처럼 객관적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도야하고 그 세계에 대한 철저한 통찰에 이르는 것이 Hegel에 있어서 '주체'의 의미이며, 이는 근대가 의도했던 주체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의 주체는 결코 폐기될 수 없는 것이다. 흔히 '근대적 주체의 몰락'을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주체의 능력을 계산하는 기능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런 것들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설수록 계산하는 능력으로서의 주체는 더욱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으며 그 와중에 현실을 개념적으로 파악한다고 하는 참된 의미의 주체 개념은 아예 흔적을 감추고 있다.


26) 이것이 바로 '전체적 진리관'의 내용인데, 이를 '전체주의적 진리관'으로 오인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Hegel의 저작을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는 전체적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의 저작에서는 시대의 온갖 정신적 산물에 대한 통찰이 총체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순수한 의미에서의 '철학적 지식'만을 가진 이들은 종합적 지혜를 의도했던 그의 저작에 접근하기 어렵다.


27) Hegel, <<역사철학강의>>, (TW. 12, 74)


28) 인간에게 고정된 불변의 것, 이를테면 본능 같은 것이 있어서 이것이 언제 어디서나 나타난다고 하는 주장들은 인간을 자연물로 이해하는 것이고, 한마디로 페티시즘이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어떤 이는 이기심을 인간의 본능이라 하고 그 이기심을 가장 잘 충족시키고 조절하는 기구는 시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직립보행 이후의 모든 인간의 행위와 제도가 인간의 자각적 의지, 넓은 의미의 문화적 산물임을 간과하고 있다. 이처럼 문화의 차원에 있는 것과 본능의 차원에 있는 것을 혼동하고 전자를 후자로써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천박한 것이다.


29) Kant가 말하는 선험적 범주들이 이런 것일 수 있겠다. 반면 Hegel의 변증법은 근대의 역사적 의식에게 적합한 범주들을 제공한다.


30) Hegel이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시대'(neue Zeit)를 '근대'(Neuzeit)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가 근대세계를 철학적으로 파악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정신현상학>>은, 근대적 삶의 경제체제인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적 파악인 Marx의 <<자본>>과 비교해볼때, 근대의 정신적 지평에 대한 개념적 파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Koselleck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18세기 후반의 역사서술에서 '새로운 시대 neue Zeit'라는 개념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그것의 합성개념인 '근대 Neuzeit'는 그림(Grimm)에 따르면 1870년 이후에야 나타났고, 프라일리히라트가 이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 이전에 사용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개념은 이 개념으로 포괄되는 대략 4세기가 지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쓰였다. 랑케(Ranke)는 이 개념을 알고 있었지만, 이 개념을 쓰기를 꺼려했다. 그리고 이 개념이 사전에 오른 것은 1875년 이후였다... 이 표현은 시대가 새롭다는 걸 규정하지만, 하나의 기간으로서의 이 시대의 역사적 내용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 표현의 형식성은 우선 지나간 낡은 시간과의 대조에서 의미를 얻으며, 혹은 시대개념으로서 지나간 시대의 규정에 대한 대조에서 의미를 얻는다."(<<지나간 미래>>, pp. 336-338)


31) 변화하는 역사적 현실 속에 개인을 데려다 놓은 것은 르네상스부터이지만 Hegel에게 직접적인 충격을 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프랑스 혁명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동시대인의 경험공간을 극단적으로 변화시켰고 과거의 전범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시대를 낳아 놓았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32) 세상에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만을 근거로 하여 새로운 시대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른바 '현상론'의 입장이다. 근대를 현상의 측면에서만 파악하면 무한히 소급해 들어갈 수 있다. 이는 '원격지 무역'이라는 현상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규정하려는 시도가 가진 한계와 마찬가지의 어려움에 빠진다. Eco의 이런 말도 참조해볼 수 있다: "불행히도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은 전가의 보도같은 술어이다. 나는, 사용자가 편리할대로 쓰는 바람에 이 용어가 아무 데나 쓰인다는 인상을 받는다. 심지어는 이 용어를 소급해서 사용하고자 하는 기도가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소급현상은 날이 갈수록 두드러지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포스트모던의 범주에 호메로스까지 포함되게 될지도 모른다."(<<나는 장미의 이름을 이렇게 썼다>>, p. 92) 세상이 바뀌었다해도 그것을 의식하고 자신의 내면 속으로 끌어 들여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개인이 없다면 그 시대는 진정한 의미의 근대가 아니다. 컴퓨터를 쓰고 있지만 여전히 봉건적인 사유를 가진 사람은 근대인이 아니다.


33) 흔히 IT(Information Technology)라 불리는 이 분야에 종사하는 일이 현대에서는 첨단의 칭송을 들으며 모든 사람이 첨단의 일을 해야 하고 그럴 수 있다고 하는 신화가 널리 유포되고 있다. 그러나 첨단일수록 지속력은 없으며 그 첨단을 익히고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더 많이 들어간다는 것은 간과되고 있다.


34)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경험의 학'이요, 구체적으로는 절대적 지에 이르는 의식의 경험의 과정을 단순히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Hegel은 이러한 '보고'가 사태의 본질을 낱낱이 드러낼 수 있다고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때 그것을 기록한다면 그것이 그 사태에 대한 본질적인 설명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말(verbum)과 사물(res)의 일치,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 http://armarius.net/

 

Hegel <<정신현상학1)>> 서문(Vorrede) 읽기

철학의 근본문제들: Hegel <<정신현상학1)>> 서문(Vorrede) 읽기 "만약 지구의 양극이 [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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