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3일 주일 낮 예배
말씀: 마 16:21-27
제목: 주의 길을 가라
선포: 만나교회 이덕휴목사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 받고 죽임 당하고 다시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해 처음으로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면 자신들도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했다. 그들은 어쩌면 그런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대하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쫒았던 것이다. 오늘날도 대개의 교인들은 교회를 나가면 세상사는 일들이 잘될 것을 기대하고 고대하고 기도아닌 염원을 드린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씀에 그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엄습해오고, 그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자신들은 뭐가 되나 하는 염려가 들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단호했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바로 조금 전 자신의 신앙고백-주는 그리스도- 때문에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였다. 칭찬과 함께 천국의 열쇠를 약속받았던 그였다. 그런데 졸지에 사탄아 물러 가라는 꾸지람을 듣게 된다. 그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단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꾸지람을 듣게 된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하도록 부추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거기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계획하신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일은 무엇인가? 고난을 피하고 죽음을 피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힘있는 메시아가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회복될 것만 꿈꿨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믿고 따른 예수님은 그들의 관심사를 이루어주는 메시아가 되어야 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랐다기 보다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왕국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마 16:24-2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제자도에 관한 말씀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람의 일은 고난이 없는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이 아니라 먼저 나의 안전과 유익을 구하는 삶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하며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는 것이다.
고난과 희생 없이 사람의 일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세워지지 않는다. 십자가 없이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잘 안되는 이유는 자기 부인을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사를 놓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나라를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 사단이라고 하셨다기 보다 하나님의 일과 그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는 마귀의 영적 궤계를 보시고 사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의 배후에는 항상 사단이라는 영적 존재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물리적 세계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성경의 세계관은 물리적 세계와 더불어 영적 세계가 공존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사도행전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천사 이야기가 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24-26절은 이제 본격적으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길과 그 길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여 주십니다. 그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의 길을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인생에서의 질병과 고초 혹은 우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십자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워드 요더는 십자가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신자들의 십자가는 그들이 견뎌내도록 요구받는 모든 종류의 고통 질병 혹은 갈등과 다르다. 십자가처럼, 신자들의 십자가가 역시 사회적 영합의 거부 (social nonconformity)에 대한 대가이다.'라고 했습니다. 사회적 요구나 시류 혹은 세상 풍조의 요구를 거스르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삶에 따라 우리가 지게 될 불합리와 부조리 그에 따른 여러가지 고난 어려움 박해 이런 것들을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 스스로도 바로 이런 길을 걸으셨습니다. 나는 참으로 주님의 길을 걷는 자입니까?
마 16:26-27,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자들에게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십자가를 감당한 자에게 영광을 주는 것은 천국의 원리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친히 경험하신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향한 그의 사명을 이렇게 고백한다.
골 1:24-25,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각자 자신의 온 몸으로 채우라는 부르심이다. 한마디로 이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천국에 두어야지 현실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 만나교회는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다. 그동안 나 자신도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인지, 어떤 것이 사람의 일인지, 그 사이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다.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주시는 마음은 내 자신부터 교회를 위해 고난을 몸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영광으로 드러나기까지 우리는 우리 만나교회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함께 감당해야 한다.
본문: 마22: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37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 15)
그 다음에는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합니다.‘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한1서 4:21)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요1서4:20)
나의 전 심신을 기울여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면 다른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게 되면 우리는 이웃의 많은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사랑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통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설교(학)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마음을 지키라 (0) | 2018.11.04 |
---|---|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가까이 하라 (0) | 2018.10.07 |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 (0) | 2018.08.26 |
성령의 은사 (0) | 2018.08.12 |
새 하늘과 새 땅이 너와 함께 있을지어다 (0) | 2018.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