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학문적 방법론과 그의 근본적인 사상의 흐름에는 변증법이 있다. 그러나 그의 변증법은 헤겔의 것과는 분명히 다르며 키에르케고르의 이른바 실존적 변증법과 유사하다. 그를 알 수 없는 인물로 보는데는 이러한 그의 변증법적인 그의 사상의 특징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그의 저술을 전체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그에 대한 환호와 찬사가 엇갈리게 되는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대로 미래에 대한 낙관론자1)들은 그를 회의주의자로 보았다. 이처럼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2) 그의 저술의 번역과 함께 그에 대한 평가도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대체로 본격적인 것은 1980년 대 이후이다. 국내에서도 그의 저술의 번역과 함께 그가 부분적으로 소개되었다. 폭력(1974), 법의 신학적 기초(1985)에서 볼 수 있듯이 주로 그의 법학적 논저에 대한 번역이 먼저 이루어졌다. 그리고 9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번역작업이 있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the Technical Society(1964), Propaganda(1965), Political Illusion(1967), The Meaning of the City(1970), Hope in Time of Abandonment(1973)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회학적인 저술이 먼저 번역되어 읽히면서 반향을 일으키고 그의 신학적인 저술이 뒤 따라 읽혀졌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이해와 조명은 주로 사회과학적인 토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저술은 두 개의 영역이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인 저술과 신학적인 저술이 병행되어 졌음을 볼 수 있다.3) 이러한 두 기둥은 현실 인식과 미래 창조에 있어서 서로 만나고 헤어진다. 그의 사상에서 이 두 사상적 흐름은 함께 흐르며 어느 한편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로 병존하며 변증법적인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4) 그리고 원함과 행함(To Will and To Do)에서 기독교 윤리를 다루면서 그는 윤리의 불가능과 가능성에서 변증법을 전개시킨다. 그의 변증법 사상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그의 성서-계시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또한 그의 개인적인 경험들은 그의 변증법 사상에 중요한 역할들을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변증법에 대한 연구는 사회학적인 저술에서만 천착에서는 안 된다. 그의 사상의 커다란 두 개의 울림은 신학과 사회학이기 때문이다. 그가 신학자로 불려 지기에는 너무나 사회과학자이며 반대로 사회과학자로 불려 지기에는 너무나 신학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엘룰의 사상적인 궤적과 특징은 그의 종말론에 나타나는 세계의 자율성과 계시의 긴장과 동일한 맥락 가운데 있다. 그의 저술 자체가 일종의 변증법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엘룰의 변증법은 헤겔의 정반합적 변증법이 아닌 키에르케고르 식의 이원론적 변증법 성격을 가진다. 키에르케고르의 변증법은 헤겔 철학의 조화와 일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전적타자(ganz Andere)가 되심을 강조함으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였다.5) 이러한 삶의 변증법-이른바 실존적 변증법(existential dialectic)은 바르트에게 영향을 주었다. 엘룰은 키에르케고르와 바르트 두 사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6) 쟈크 엘룰은 바르트7)와 키에르케고르가 실존적 변증법을 통하여 인간의 죄성과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며 정직한 결단을 요청했다. 바르트도 당시 역사적인 상황과 자연주의적 신학의 흐름 부정(nein)을 선언하며 현실의 부조리와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런데 엘룰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현실인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과 사회 안에서 작용하는 힘들의 실재적인 면들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 현실의 모순을 더 심화․확대하여 드러내었다. 엘룰은 바르트의 전적타자는 본질적으로 다른 관점을 키에르케고르에서 발견하였다.8) 엘룰은 진술한다: “나는 결코 체계를 세우는데 집착하지 않았다. 바르트에 대해서 나는 항상 비평적인 거리(critical distance)를 가지고 있다. 나의 키에르케고르와의 관계와 유사한 것은 아니다. 이제 나는 단지 듣기만 할 뿐이다.”9) 키에르케고르는 거울이 되었다. 엘룰은 그의 키에르케고르의 반영에서 그 자신을 발견하였다. 바르트는 변증법적인 주제를 통하여 전적타자로 나아간 반면 키에르케고르는 자아(the self)로 회기한다. 엘룰은 현재의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응답을 구하였던 키에르케고르로 향하게 되었다.10) 엘룰의 변증법은 마르크스11)와, 키에르케고르와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사회와 개인의 문제에 대하여 보다 철저한(radical) 질문을 하는데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서 희망과 사랑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12) 그리고 마르크스, 헤겔 그리고 바르트를 통하여 당시 정치 질서 속에서 성경을 비평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바르트를 통하여 엘룰은 성서의 변증법의 원리를 배웠다.13) 엘룰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변증법을 통해서만 이해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명령, 불순종, 심판, 화해’ 와 같은 용어에 의해 제시되는 과정은 완전한 변증법의 과정이다. 이것은 우연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의 역사와 같은, 달라질 수도 있는 사소한 이야기의 과정이 아니다 … 그리고 매번, 위기를 통해 이전 요소들(불순종을 포함해서…)의 총체가 존재한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드러난 하나님, 또는 형이상학적 하나님, 또는 형이상학적 과정에 의해 구성되고 알려진 하나님만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14) 이것은 이른바 성서의 변증법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엘룰은 에베소서 2장 8절과 빌립보서 2장 13절의 말씀을 하나의 진술로 표현하였다. “당신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행위로 당신의 구원을 위해 일하십시오.”15) 이러한 모순된 진술은 이론이 아닌 삶의 원리 안에서 이해되며 가능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성서가 변증법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었다고 하였으며 진리는 반대의 것과 관련될 때만 참되다고 보았다.16) 엘룰의 학문적인 방법론은 변증법이다. 또한 그의 사상의 특징 또한 변증법적이다. 그의 종말론에서는 필연과 가능, 필연과 자유, 크로노스(kronos)와 카이로스(kairos), 현실과 진실, 속됨과 거룩함, 이것도-저것도, 신-인, 자연의 역사와 초자연의 역사, 역사와 파루시아, 현존과 도래, 현재적 종말과 미래, 중간시간(temps intermédiare, 창조와 재창조 사이)과 종말의 시간, 약속과 성취, 머무름과 떠남, 보존과 심판, 남겨진자와 남은자, 이미와 아직, 적그리스도의 소유와 그리스도의 통치, 역사적 차원과 종말적 차원의 변증법이 있다.17) 변증법적인 긴장과 역동성은 그의 생애에,18) 작품과19) 사상 전반에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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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질적)변증법ㅡ키에르케고르 철학과 사상 / 철학.사상
"죄는 무엇인가. 존재하는 대신 만들어내고, 단지 공상으로만 선과 진리를 문제삼으며, 실존적으로는 그러기를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변증법은 정(正)ㅡ>반(反)ㅡ>합(合)이라고 하는 경과를 밟는 수사법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합'으로 총합되는 한에는 '정'과 '반'은 정말 모순되고 대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는 화합시키므로써 보라색 잉크가 된다. 혼합시켜 보라색이 되는 한에는, 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는 진정한 의미에서 모순되고 대립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양'의 차이일 뿐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이와 같은 단순히 양적인 차이가 있는 것을 두고, '정', '반', '합'을 생각하였다는 의미에서 '양적 변증법', '저것도 이것도'의 변증법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비판한다.
"인간은 사상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이 없다고 하는 것을 감추기 위하여 말하는 법을 배운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저것이냐 이것이냐>).
헤겔의 변증법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는 자기의 변증법을 '저것이냐 이걱이냐'의 변증법, '질적(실존) 변증법'이라고 말하였다.
즉, 죄있는 자와 죄없는 자, 무한과 유한, 신과 인간은 절대로 융합될 수 없는 존재이며, 신과 인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단절이 있다. 절벽이 있는 것이다. 이 단절과 절벽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연속적인 옮겨감이 아니라 "결단에 의한 비약", 또는 "결단에 의한 선택"에 의해서만 비로소 지양(止揚. 아프헤벤)이 가능해진다.
"인간은 하나의 총합ㅡ무한과 유한,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자유와 필연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예를 들어 사람과 신의 경우, 신 앞에서 인간은 실존의 주체성이 죄로서 소멸되고, 오로지 신만이 진리가 되며, 신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은혜가 되므로써 거듭나서 신생(新生)을 얻게 된다.
현대인은 이미 죄의식으로 고뇌하는 일은 없어졌다. 그러나 그 대신 자의식이라고 하는 근대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다. 현대인은 "인간은 정신이다"이기 때문에 자기 분열을 일으켜, 인간만이 소유한 절망에 빠져 들고 있는 것이다.
[출처] 실존(질적)변증법ㅡ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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