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인간론
인간이란 무엇인가 ?
1. 원시인의 자아상
1). 희랍인들의 인간 창조설: 희랍의 신학적 인간 창조론에 의하면 인간은 성서의 창조론과 비슷하게 흙을 빚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인간을 정신적 요소를 소유한 존재로 보고 육체는 죽음에 의해서 없어져도 정신이나 영혼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신화에서 뿐만 아니라 애굽의 종교나 불교와 조로아스터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영혼의 전생 또는 윤회의 사상이 나오게 된다.
2). 영혼의 윤회: 영혼의 윤회라는 사상은 어떤 특정한 신화나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원시 종교와 신화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상이다. 첫째로 인도교 에서는 개인의 영혼이 사람과 동물과 식물 사이를 영원토록 전전(轉轉)한다고 한다. 인도교에 영향을 받은 불교는 모든 존재의 무시무종(無視無終)을 강조한다. 이러한 윤회설은 희랍철학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영혼의 전생을 너무나도 강하게 믿었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3).한국의 혼백사상: 한국의 혼백사상은 위와는 본질상 다르다. 조상의 혼백이 사후에도 살아있어서 자손들이 그 혼백에 대해서 어떠한 제사를 들이느냐에 따라 복이나 화를 내린다고 한다. 이것은 효도가 강조됨에 따라 부수적으로 나타난 일시적이고 훈육적인 사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2. 희랍철학의 인간 이해
희랍철학은 탈레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때의 철학은 자연철학이었다. 이런 흐름이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인성철학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인간의 본질 이해에 더 노력하게 된다. 다음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누스의 인간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육체는 영혼을 잠깐 담아두는 그릇으로 영혼은 신적인 동시에 죽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한다. 그의 철저한 이원론적 원칙을 그의 인간관에 적용한다. 플라톤보다 경험론적인 입장을 취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의 영혼의 윤회설을 비웃으며 인간의 중심은 영혼에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육체와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 그는 영혼에 두 가지 부분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으로 나눈다. 플로티누스의 인간관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일자(一者,The one)와 이성(理性,Nous)과 영혼(靈魂,Soul)이다.
3. 동양인의 인간 이해
동양인의 인간관은 불교와 유교의 인간관에서 그 대표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 불교의 인간 이해는 희랍의 인간 이해와 같이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했다기보다 실존적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인간이 걸어가야 하는 생은 고(苦)에 쌓여 있다고 한다. 인간을 고통의 존재로 본 불교는 그 원인을 인간의 무명(無明)의 마음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집체(集諦)라고 부른다. 이러한 집체를 없게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실천을 통해서 팔정도의 생활을 해야 한다. 팔정도는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精正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다. 불교의 인간관의 특징은, 첫째로 인간을 매우 현실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이해한다. 둘째로 현실적인 인간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셋째로 인간이 가지는 모든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유교의 인간관은 윤리적이며 또한 사회학적이다. 육교의 모든 경서에 나타난 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인(仁)이라고 한다. 사람이 인신(仁身)을 가지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은 이 인(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仁)이란 개념에는 정, 지, 용, 충, 성, 예, 공, 신, 효(精, 知, 勇, 忠, 誠, 禮, 恭, 信, 孝)등 여러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유교는 인간을 도덕적 주체자로 보았다. 최수운의 천도교(天道敎)는 한국 특유의 인간관을 주장하게 되었다. 최수운의 인간관은 첫째로 인간이란 구체적이고 현실적 상황 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 둘째로 성실한 마음가짐을 강조. 셋째로 자아의 자각과 신념을 강조. 넷째로 우주에서 가장 위대하고 진리이시고, 존귀한 한울님을 모시고 다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매우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이다.
4. 현대의 여러가지 인간 이해
브루너(E. Brunner)는 1937년에 {기독교 인간학}을 출판하면서 그 안에서 현대의 여러가지 인간 이해를 소개하고 있다. 첫째로 물리적 인간관이 있다. 인간은 물리적-화학적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하면서 인력(引力)의 법칙에 따라서 살고 있다. 둘째로 동물학적 인간관이 있다. 매우 발달된 신경 체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는 하나, 원리적으로는 다른 동물과 동일한 체계를 가진 동물에 속한다고 한다. 셋째로 낭만적 인간관이 있다. 영혼과 정신을 이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정신은 영혼에서 나온 것으로서 거기에는 언제든지 대립과 모순과 거치른 싸움이 있으나 영혼은 그렇지 않다. 넷째로 보편적 인간론이 있다.
공산주의의 기초를 닦아 둔 철학자는 포이에르바하(F. Feuerbach)다. 그는 1843년에 출판한 {기독교의 본질}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과 기독교의 신학과 인간학은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신을 생각하나 그러한 신이 어디에 있나? "신의식(神意識)이란 자아 의식이요 신지식이란 자아지직이다." 이렇게 독일의 철학의 일부가 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인간을 중심한 인간 이해가 만연될 때 마르크스(K. Marx)의 {자본론}이 출판됨에 따라 공산주의적 유물적 인간 이해가 대두하게 되었다. 유물사관에 있어서 가지는 인간이란 완전히 환경에 따라 좌우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적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 결과 경제적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다만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어떠한 다른 인간관과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현대 실존주의의 효시라고 하는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헤겔(Hegel)의 관념론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의 독자적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한 단독자다. 이 단독자는 동시에 자기 자신 안에서 만족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신과의 관계를 가질 때 자아의 완전한 실현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당신(Du)으로서의 신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출발한 실존주의는 니체(Nietzsche)에 의해서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변질되어 까뮈(A. Camus)나 사르트르(J. P. Sartre)에 연결되어 인간의 실존적 상황 이해를 인간의 입장에서만 보려고 함으로써 단순한 휴매니즘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와 반면에 키에르케고르의 참 사상은 바르트(Barth)와 불트만(Bultmann)과 틸리히(Tillich)에 의해서 도 발전되어 인간의 실존 이해를 인간 실존의 가장 심각한 경지에까지 들어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한다.
5. 問題兒로서의 人間
인본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만 자유의지라는 관점에서 또한 그것을 소유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방법은 잘못된 방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운명론적 입장에서만 이해해도 안 될 것이다. 사람은 이성(理性)의 동물이라고 한다. 이 이성은 생득적인 것으로서 모든 인간에 공통된 길이라고 한다. 이 이성은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여 신적인 차원에까지 상승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이성은 영원한 것이다. 또한 인간은 오감(五感)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이 기능에 따라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감은 너무나도 한정된 기능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그것은 시공간의 제약 앞에는 무능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극복할 지혜와 능력ㅇ르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모든 신화와 종교는 자연의 위엄에 굴복한 결과라고 한다. 사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무지한 생각을 했다. 본래 자연과학은 기독교적 우주관에서 싹텄다. 유대인들은 자연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다. 자연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기 때문에 인간을 위해서 있다. 희랍 철학자들은 육체는 별 가치가 없으나 육체 속에 담겨져 있는 영혼은 불멸한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낙관적 인간관을 가지게 되었다. 동양적인 인간관은 운명적인 특징을 가진 것과 윤리적인 주체자로서 파악하고 있는것이 있다. 전자는 불교의 영향이며 후자는 유교의 영향이다.
存在 根源을 추고하는 人間
1. 存在에 대한 意識
고대 희랍인들은 신화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물질 세계를 보는 데 있어서도 매우 신학적으로 보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라는 철학자는 실제에 대한 파악과 진리에 이르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모든 존재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 존재가 무엇이며 그것을 아는 지식론을 체계화하려고 했다. 그 때부터 희랍철학은 존재의 근원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도 기울어져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낳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서 형이상학이 발달되어 기독교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철학자들의 과제는 이 현상 뒤에 숨겨져 잇는 실재, 즉 참 존재를 아는 일이라고 해서 그들은 존재 탐구에 전력을 다했다. 성서적 존재 이해는 희랍철학의 경향과는 전연 다른 방향과 방법을 택했다. 구약인들은 존재를 현실적 존재와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현실적 존재와 그의 본질적 존재를 동일시했다. 성서는 신을 형이상학적으로나 현상을 넘어서 있는 본질적 면에서 파악하지 않고, 현재 실지로 나타나 있는 움직이는 존재로서 신을 파악했다. 그러기 때문에 성서적 존재 이해는 언제든지 역동적이고 행동적이고 인격적이다. 희랍인들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은 인간의 본질에서 유리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보이는 인간 속에 보이지 않는 어떤 본체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영혼이라고도 생각했고, 마음, 정신 또는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서기자들은 인간 이해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처음부터 신과의 관계에서 이해했다. 그 자체 안에 있는 무엇으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해하려고 한다.
2. 존재 의식의 變遷史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은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의 존재론을 부정함으로써 형성되었다. 헤라클리투스는 현실 뒤에 숨겨져 있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다만 생성뿐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존재로 충분하다. 플라톤은 그의 여러 선배들의 사상을 정리해서 그의 고유한 존재론, 즉 이데아론을 형성했다. 그 이데아의 세계에 군림하는 선(善)의 이데아가 있는데 그것이 신이라고 한다. 플라톤이 정신적이고 초월적인면을 강조하는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생활의 사실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동시에 인간의 본질을 초월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현실적 생활을 통해서 인식하려고 했다. 한편 성서 기자가 체험하고 발견한 신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신과 구체적으로 지상에서 존재하는 실제적 존재인 인간이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어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성경의 존재론은 매우 동적이고 인격적이다. 중세철학에 있어서는 플라톤의 존재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의 종합이 시도되었다. 중세 신학자들이 중세 철학자들의 종합작업에 현혹되어 성서적 신 이해를 잘못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중세철학의 존재론은 데카르트(Descartes)에 의해서 근대화되었다. 그는 존재를 플라톤보다는 더 주관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칸트에 이르러 플라톤에서부터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쯔(Leibniz)에게로 연결되는 고전적 존재론이 뒤집어진다. 인간을 그러한 존재 세계의 한 부분에 위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 이상의 것을 체험할 수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신 자체요 누메논이다. 이러한 존재론이 키에르케고르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3. 존재의 神秘
첫째로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둘째로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셋째로 모든 인류의 존재 목적은 무엇일까? 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a) "나"라는 존재
고대인들은 영혼의 전생(轉生)이란 생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것이 불교와 인도교에 아직 남아있다. 그러나 윤회나 영혼의 전쟁은 두 가지 약점이 있다. 하나는 영혼이 담겨질 육체의 출처를 말해 주지 못하고 둘째로 영혼의 전생론자는 인간은 완전히 이원론적으로 영육을 분리하여, 영혼에는 최대한의 중요성을 부여하나 육체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가치밖에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현대인의 인간학은 인간의 존재를 물질 세계의 한 부분으로 이해한다. 현대인은 한 개인은 전체 우주 구성의 극히 작은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본다. 현대인의 인간학은 이 점에 있어서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고 있다. 전통적인 신학적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과 생명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영혼의 창조설과 유전설이다, 창조설에 의하면 개인의 영혼은 잉태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영혼의 유전설을 강조했다. 이 설에 의하면 개인의 영혼은 부모의 생식 작용에 의해서 잉태될 때 그들로부터 이어받은 고유한 요소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은 창조설을 지지했으나 루터는 유전설을 지지했다. 현재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교회는 창조설을 정통 교리로 인정한다.
b) 나의 사는 目的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목적이 무엇일까? 사람이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인생관이란 것은 후천적으로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천태만상(千態萬象)의 형식으로 살고 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되고부터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상에서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의 삶의 목적을 제각기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성서에 따르면 사람이 사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고 한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는 인간의 삶이 목적이 분명하게 성서와 같이 천명되고 있다. 이와는 달리 현재인은 자립을 강조하고 신의 존재마저 부인하기 때문에 자아의 존재목적을 자아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c) 人類의 存在 目的
인류 역사는 신의 창조 목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신의 창조가 신에게 필요해서 하신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신이(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거기서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선성(善性)을 발신하기 위한 것이다. 칼빈주의 정통주의자들은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현대 신학에 있어서는 이러한 전통고하는 달리 창조 목적의 해석에 있어서 상반된 주장을 한다. 틸리히는 창조의 목적을 신의 창조력의 행사로 본다. 만약 신의 영광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브루너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신의 창조에는 목적이 있다고 강조한다. "신이 창조했다. 신 자신이 성스러운 신으로서 그는 창조를 통해서 교제와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근본적으로 틸리히와 브루너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나 신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 그 창조작업과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자아 투영(自我 投影)을 하시고 피조물과 관계를 가지심으로써 피조의 세계가 창조의 본 목적에 순응해서 발전하고 번성할 것을 신은 원하신다고 이해할 수 있다.
4. 神의 形象과 人間의 能力
희랍 철학자들은 현대인과는 달리 인간의 존엄성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즉 영혼이라든가 이성 또는 마음에서 찾으려고 했다.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은 인간을 성서의 교훈에 따라서 이해한다. 신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이 신의 명령을 어겻기 때문에 그는 타락하게 되었으며 도시에 스가 소유했던 신의 형상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한다.
a) 創世記 1:26-27의 解釋問題
오리게네스(Origenes)는 "형상"은 창조시에 받은 것이고 모양은 나중에 그 형상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함으로써 문제를 일으켰다. 칼빈에 의하면 "모양"(imilitudinem)이란 말은 "형상"(imaginem)이란 말을 더 밝히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하면서 히브리어의 연구법을 지적한다. 바르트는 대담하게도 신의 형상의 내용을 남자와 여자으ㅟ 관계로 이해 한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신인간(神人間)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의 표본을 발견한다.
b) 神의 形象과 人間의 墮落
인간의 타락 행동이 신의 형상에 어떻나 영향을 주었을까? 그 타락 행동이 신의 형상을 전적으로 파괴해 버렸는지 그렇지 않으면 어느 정도만 아직도 그 형상이 남아 있는 것인지 이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대한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해석과 프로테스탄트의 해석이다.
(대한 기독교 출판사 이종성 /정리 : 윤 동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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