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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인간학(론)

하나님의 공의

by 이덕휴-dhleepaul 2019. 6. 23.

하나님의 공의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암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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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이신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복음적 전파의 사명이고  다음은 문화적 사명으로서 빛의 자녀가 만들어 가야 할 삶의 환경입니다. 복음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문화적 사명은 구약 선지자들의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과 예언 제시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에 대한 선지자들의 사상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회, 하나님 앞에서 정의로운 사회건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시냇물처럼 흐르는 그러한 사회건설의 비전을 선지자들은 가졌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런 정의사회 건설의 의지를 강력하게 선포한 선지자가 바로 아모스 선지자입니다. 그는 당시 사회정의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의와 부정이 세상을 지배하였기 때문이었지요. 아모스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삶의 기반을 하나님의 공의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나의 존재 기반이 혼탁한 곳에 뿌리를 박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살피면서 개혁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속한 사회를 정의롭고 번영하는 사회로 건설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선지자가 소망하는 정의사회 건설의 첫 번째 근거는 절망의 심연을 변화시켜 희망이 솟아오르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두 번째는 욕망과 죄 된 의지로 살아가는 자에게 심판이 반드시 이른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근거는 자연의 세계에도 질서가 있듯이 인간이 이기적 욕망으로 파괴한 창조 질서를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의에 대한 불감증에서 벗어나 정의사회 건설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입니다.

선지자 아모스가 당시 백성들에게 보낸 예언과 메시지는 첫째. 부자들이 빈민을 압박하며, 백성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함이었고, 둘째, 제사장들이 헛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기에 그는 본문의 표현한대로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고 너희의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당시의 위선적인 종교행위와 형식 종교에 대한 선지자의 질타이기도 했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현실정치에 대한 질타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2. 정의로운 소유로서의 하나님의 공의(마 6:19-21)  

지난 세기의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 라는 책에서 오늘날의 물질 문명이 소유위주의 형태로 변해감에 때라 모든 사람의 관심사가 인간의 소유가 곧 인간의 삶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참모습은 사라지고 남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얼마만큼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가 되어갔으며 그 결과는 항상 부정적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빈민, 공장노동자, 농어민 문제 등 사회각개 각층에서 생존권 투쟁은 날마다 가속되고 있습니다. 많이 가지려는 사악한 마음은 주님의 절대적 계명인 사랑이 무시되는 사회요, 위험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며, 우리 모두가 소유라는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가운데 소유에 대한 대표적인 지적은 누가복음 12장에 소개되는 한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오늘날의 우리의 시대를 반영하는 인물입니다. 그 부자는 밭에 소출이 풍성해지자,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짖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고 누가복음12:17-19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소유에 대한 지나친 생각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저장하려는 죄악스러운 모습입니다. 이 부자는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사회의 총체적인 모습이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서두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즉 소유욕을 버리라,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 하리라."  또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마태복음 6:19-21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유위주의 삶을 분명하게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까지도 자신만을 위한 소유의 삶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소유의 확대에만 신경 쓰는 사람은 그 소유 때문에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소유위주의 삶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은 구원받는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설적인 말씀이지만, 실제로 성경의 역사가 이 말씀을 입증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소유 위주의 사람은 항상 철저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멸망 당했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간이 가나안 땅 입성 후 여리고 점령 때 외투 한 벌, 은 200세겔, 금 50세겔 때문에 눈이 멀어 아골 골짜기에서 일족이 멸절 당했고, 신약에서도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소유를 팔아 욕심에 눈이 멀어 성령을 속이고 그 가격 일부를 감춘 것 때문에 베드로 사도의 저주를 받아 횡사했습니다. 이는 소유 일변도의 삶을 경계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요, 채찍이요 또한 계시적 교훈입니다.
이제 우리는 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소유의 분배적 정의에서 그 실체를 찾아야 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3. 사랑과 봉사 그리고 분배로서의 하나님의 공의

그것은 봉사입니다. 본래 기독교적 봉사, 즉 디아코니아는 복음의 선포 그리고 친교와 더불어 교회의 본질적 기능에 속한다고 사도행전 2:42-47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섬기고 봉사하는 자'로서 자신을 이해한다고 마가복음 10:45과 눅 22:27절에서 각각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봉사 자세는 섬김이요, 교회가 봉사하는 것은 권력을 장악하여 지배하는 지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봉사를 단지 개인적 구제나 구호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삶 그 자체가 사회적 제도나 구조와 뗄 라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빈곤이나 실업, 그리고 사회적 부조리와 실패의 원인이 개인의 무능과 잘못 때문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개인적 구호와 사회적 구호, 나아가서 국민들의 총체적인 삶의 질을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행사 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실천적으로 헌신하기 위하여 여러 형제들께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것입니다.

개인적 구호와 사회적 구호는 선택적으로 파악될 것이 아닙니다. 상호보완적으로 파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법을 지켜라"라고 하신 말씀의 실천적 명제인 이웃 사랑하기를 사회적 차원에서 이룩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사회정의가 바탕하여야 합니다.

현대사회의 구체적 쟁점인 사회정의의 실현은 바로 분배적 정의에서 그 원리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분배적 정의의 정수는 (마 20:1-16)에서 가르치신 대로 포도원의 주인과 일꾼의 관계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분배가 평등의 원칙과 공평의 원칙을 만족시키면서도 새로운 국면을 전개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사회적 정의의 최대의 명제인 분배는 두 가지 원칙을 따라야 하는데, 하나는 평등이고 다른 하나는 공평의 원칙입니다. 이 두 원칙에 의하여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자유로운 공존의 기본권을 대우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협동과 평화로운 공동참여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복지사회를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5천년의 유구한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공의로움에 덧입어 살아보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은혜를 덧입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Written by 이덕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