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은총론 요약 / 이덕휴 목사
서방신학은 동방의 관점인 전체 구원역사의 과정을 은총이라는 것과는 달리 개별자가 자신의 인격적 자유로서 어떻게 구원을 찾는가 하는 것이다. 서방신학의 은총 사상에서 강조하는 것은, '각개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매개되는 하나님이 특별한 힘으로서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에 인도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은총으로 말미암아 죄악으로부터 해방되고, 자기 본연의 목표에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은총이다'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은총은 자신이 자립하는 데서 볼 수 있게 되는 자유로운 독자적인 개인, 개별자에게 주어져서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방의 은총사상은 동방과 달리 은총 문제가 인간학적 관점 에서 대두된다고 할 수 있다.
즉 구체적인 개별 인간에 중점을 두고 은총이 그 인간 안에서 어떻게 인간의 자유에 의해 구원을 찾게 되는가에 관심을 둔다. 이러한 은총의 이해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Pelagius(354-450) 와의 논쟁 속에서 확실히 드러나게 되고, 어거스틴의 은총론의 전개로 인해 서방 은총론의 체계가 이루어진다.
354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펠라기우스는 380년 경 로마로 왔다. 펠라기우스는 로마는 머무는 동안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과 규칙들을 가볍게 여기는 부유한 로마 귀족의 경박한 도덕적 생활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방종주의가 대중에까지 잠입하기 이르렀다. 그러므로 일부의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시대에 본연의 기독교 삶을 강조해서 요청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들은, 인습적 이교도들이 인습적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여 저항하였다. 그 후 그는 북아프라카로 와서 살았다. 분명치는 않지만 펠라기우스와 그의 제자 켈레스티우스는 어거스틴이 죽은 후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 공의회에서 그들은 그들의 사상보다는 네스토리우스의 명백한 배척 과정에서 그들도 함께 단죄되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선과 정의에서 출발하여, 인간 즉 인간 본성은 선하다는 이론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가장 고귀한 속성은 선과 정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과 정의로부터 그분에 의해 창조된 모든 것들이 선하다는 사실이 나온다. 따라서 선하게 창조된 본성 그 자체는 바뀌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본성은 존재의 시작으로부터 그 마침에 이르기까지 유지되기 때문이다. 본성의 속성들은 우연에 의해 바뀌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본성의 죄들'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본성이 악해졌더라면 본성의 죄들이란 생겨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이론에서 볼 때 인간 본성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에 그 자체로 선하다는 논리가 나온다. 인간 본성은 우연적으로 형태만 바뀔 뿐이다. 또한 본성의 몸 안에는 자유 선택으로서 의지가 속해 있다. 이성이 작용하는 이 자유로운 선택은 인간의 몸 속에서 최상의 선인데 은총을 받는 인간은 인간 본성을 찬양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과 정의를 행할 수 있다. 선의 가능성은 하나님에게 오지만 의지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인간들의 해야 할 일이다. 펠라기우스 사상은 인간이 가지는 세 가지 기능에서 유래한다. 즉 가능성과 의욕과 행동이라는 것이다. 가능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따라서 우리 힘으로 좌우할 수 없고,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의욕과 행동은 우리 자신의 것이며 우리에게서 생긴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가정은 그에게 있어서는 창조주에 대한 모욕으로 보였다. 그는 말하기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있으며, 아담의 죄나 마귀까지도 이 능력을 파괴 시킬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현재 인간의 도덕적 상태는 아다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와 모든 면에서 동일하게 보았다.
인간은 선과 악을 일일이 선택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조화를 이룬다는 형식적인 자유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펠라기우스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 생활에 크게 작용하지 않으며, 어거스틴이 주장한 인간의 죄의 필연성도 맞지 않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이 타락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담의 자연적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정신적 죽음에 지니지 않는다는 보았다. 아담은 본래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범죄와 상관이 없이 자연사한 것이다. 그는 아담을 다만 인류와 단절된 개체로 보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인간의 아담의 타락 이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죄로 말미암아 약해졌거나 변하여진 것이 아니며 조금도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가 없다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단지 어거스틴이 주장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죄의 필연성을 거부한 것이다.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미친 영향은 유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보기에 의한 것이다. 즉 아담의 후손들이 그에게서 어떤 허물을 전해 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 죄를 지은 그를 모든 후손들이 모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죄가 인간을 얽어매는 힘은 습관이며, 이 힘은 범죄의 계속적인 행위에 의해 형성되는 힘이라고 보았다. 결국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범죄하게 되고 죄를 배운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의지에 대한 논하기를,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한 일 혹은 악한 일을 행하거나 말하며 생각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이 가능성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선한 일의 원인이나 악한 일의 원인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했다. 펠라기우스는 은총을 처음부터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총과 더움은 개개의 행동에 대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자유의지 또는 율법과 교훈으로 주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이 돕는 것은 의지와 행동의 '가능성'이지 의지와 행동 자체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이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더 쉽게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펠라기우스의 이런 사상은 결국 인간 의지에 선을 택하도록 어떤 특별한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는 반대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세 가지 기능 중에서 첫째 가능성은 본래적 은총 또는 창조의 은총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창조의 은총과 더불어 '계시의 은총' 혹은 '가르침의 은총을 주장했고 마지막으로 '용서의 은총'을 주장했는데, 이 은총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올바르게 생동할 수 있는 노력을 하게 하며, 자신이 행한 잘못을 고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자신들이 가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믿음을 가지게 되며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상으로 볼 때, 펠라기우스의 은총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은 이성적 의지와 함께 원초적으로 부여된 힘으로 인해 죄없이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둘째; 율법과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 계시가 하나님의 은총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교훈은 율법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과 구원에 적합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354-430)의 사상은 이렇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으로 분류하였다. 첫째: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인간이 있게 된 것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모상이로되 참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영역이 있다. 그 영역을 그 대로 반영하는 분이 성모 마리아다. 인간의 영혼은 바로 하나님의 모상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셋째: 이같은 모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참여적인 모습일 뿐이다. 어거스틴의 영성의 본질적인 부분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회복에 있다. 어거스틴은 형상과 유사함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 교부들에게 있어 전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지성으로 연결되었음 있음을 말한다면, 후자는 원죄에 의해 상실된 것으로 언급된다. 어거스틴 역시 말년에 유사함을 하나님과 인간의 유사함으로, 그런가 하면 형상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특수한 유사함으로 기술한다. 어거스틴은 '말씀'을 진정한 형상으로서 하나님과 동일시한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은 삼위일체의 제2격인 예수 그리스도의 새롭게 하는 능력을 통해서만 온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삼위일체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마음은 그것이 자신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적인 삶을 통해 인간은 지혜를 얻는다. 하나님과 닮을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복음 10:30) 삼위의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과 친교하게 할 뿐만 아니라 믿음과 사랑에 의해 가능해진 기독교 공동체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일체로서의 형상인 인간이 삼위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어떻게 참여하는가에 관심 갖는다. 인간이 동물을 넘어서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데 있으며, 그것은 이성이나 마음 또는 지성으로 불릴 수 있다. 고린도후서 3:18을 어거스틴은 영적 진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것은 매일매일 끊임없이 진보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진하며 의와 진리의 거룩함에서 전진함으로써 날로 새롭게 되는 사람은 사랑을 무상한 것들로부터 영적인 것들에 옮긴다고 했다. 어거스틴에게서 신비는 그리스도의 화육에 있다. 화육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적인 삶을 사셨다. 성령은 그분을 사막으로 인도했고, 성부와 대화하게 했다. 어거스틴은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겸허했고, 이 사랑을 삼위성 안에 존재하는 사랑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 간주했다. 특히 그레고리 나지안주스Gregory of Nazianzus(330-389)의 영향을 통해 어거스틴은 독특한 삼위일체 신학을 발전시킨다. 성자는 성부의 완전한 본질적 표현이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한다. 성부와 성자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서로 만나며 성령은 이 사랑의 친교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성령을 사랑과 동일시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인간학은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으로 묶어지는 존재론에서 잘 볼 수 있다. 이미 고백론에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영혼을 신비한 사랑의 삶으로 이끌어가신 하나님에 관해 표현한 적이 있다. 어거스틴의 신비신학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특징은 우선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 - 이 개념은 동방교부들의 신화(神化)론에 매우 근접한다-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레네우스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373년에 사망)처럼 어거스틴 역시 성육신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성의 신화에 있음을 확인한다. "유한한 인간이 신성에 참여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은 죽음의 참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이해를 위해 삼위일체 흔적은 탐구한다. 인간 존재를 통해 그 흔적을 찾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인간의 혼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곧 기억과 지성과 의지이며 그 중에 결정적인 것은 의지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의지는 다른 두 가지 기능 안에서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의지의 고유한 속성은 사랑 곧 재결합의 욕구이다. 지식과 상이라는 하는 혼의 두 가지 주요한 활동은 애매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느 것이나 한편으로는 자신을 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초월한다. 이러한 것들은 자기 인식 또는 자기 사랑으로서 우리를 대상으로 한다.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존재와 지식을 사랑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의지라는 존재로서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인식과 사랑이란 자기 자신의 인격을 초월해서 다른 존재에로 향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랑의 고유한 영원성이다. 그러나 이 영원성은 우리가 흔히 일컫는 불멸성이 아니고 신적인 삶 곧 사랑이라고 하는 신적인 존재 근거에 참여이다. 이러한 것을 결국 인간이 신적인 것에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기에 인간의 본성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어거스틴는 그의 저서 신국론에서 인간이 육체에 따라 살 때 허약한 것이지 하나님을 따라 살 때에 허약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태초 창세기에 인간의 본성은 본래 순수하고 흠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 본성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다. 비록 어거스틴이 종종 '타락한 본성'들의 표현을 쓴다 할지라도 인간 본성 자체는 타락이나 부패로 간주한 것이 아니다. 육체의 본성 그 자체는 악이 아니지만, 육을 따라 사는 것은 확실히 악이다. 우리의 죄악이나 패덕의 책임을 육체의 본성에 돌려서 조물주를 모독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육체의 본성은 그 본질 및 질서에 있어서 선한 것이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이 모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완전하게 자유와 영원을 가진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어거스틴의 인간에 대한 출발점은 창조주의 손에서 나온 그대로의 인간 본성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그는 원의(原義)와 완전성을 첫 사람에게 돌리는 점증하는 경향을 최고조로 밀고 나갔다.
어거스틴은 아담은 육체적인 질병에 되지 않고 지적인 재능도 뛰어났다고 주장한다. 아담은 의로움과 조명과 복락의 상태에 있었다. 아담이 가지고 있는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뜻에서 자유이다. 본디 인간의 자유란 선을 지향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선이란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을 지향하는 한 인간은 자유다. 그렇다면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은 왜 타락했나? 어거스틴에 의하면 아담의 타락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그리고 아담이 인간을 하는 이상 아담 이후의 인간은 그 원죄에 물들게 되었다. 죄로 인해 근본적인 선들은 어둡고 약하게 되었기에 조명과 치료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은 잘못이 없는 창조주에게 온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해 저질러진 원조로부터 온 것이다. 아담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은 결코 짐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담의 유일한 약점은 그의 피조성이었다. 이것은 그가 본성상 가변적이고, 그렇게해서 초월적인 선으로부터 돌이켜 떠날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 어떤 비난일지라도 오직 그 자신의 의지에 대해서만 해야 하는 것이다. 의지는 비록 선을 향하고 있을지라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 선택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로서 아담은 죄된 의지를 가진 죄인이 되었다. 영혼은 하나님의 도움을 상실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육체에 대한 지배력도 상실되었다. 마음은 정욕으로 가득차게 되었으며, 저급하고 변하기 쉽고 불확실한 사물을 의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어거스틴은 원죄의 실재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결과는 무엇인가?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이라서 아담의 죄는 인류 전체의 죄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전체로서 인간의 본성이 최초의 인간에게 이미 종자상태(種子狀態)로 나타나고 있다고 가르쳤다. 즉 개인적 행위로서의 최초의 죄는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행위였다. 그러나 인간을 집단적 공동존재로 볼 때에는, 그것은 실로 인류의 공통적인 행위이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우리는 자신해서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에는 그의 후손의 의지가 작용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전 인류의 죄이다.
어린이는 비록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모두 이러한 죄된 상태에 포함된다. 따라서 어린이도 세례를 받아아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원죄가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수단은 불순한 성질의 성적 욕망 즉 육체적 출산 행위에 의하여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이러한 주장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키므로 어거스틴은 터툴리안 Tertullian(?-225)의 이론이 내포하고 있는 스토아적 물질사상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터툴리안이 주장한 영혼의 유전(죄와 더불어서 유전)이란 부모의 신체적 특성이 자녀들에게 유전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영혼이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된다는 '유전설'은 기피하면서 하나님이 각 개인의 영혼을 직접적으로 창조해 주신다고 믿는 창조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창조설은 원죄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하므로 어거스틴은 다시 유전설을 옹호하였다.
어거스틴의 이론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박탈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의지의 사용은 결국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끝없는 죄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는 신세인가? 어거스틴은 '아니다'라고 답변을 한다. 이 죄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은총이라고 그는 가르친다. 인간의 회복은 오직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은총은 상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구원을 필요로 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포착하게 한다. 은총의 영이 하는 일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사람에게 있는 죄는 그 본성과 반대되며, 그 죄를 치유하는 것이 바로 은총인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은총은 세례로부터 시작된다.
세례는 은총을 필요로 하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관계를 맺게 하는 최초의 행위이다. 세례를 통해서 인간의 원죄가 제거된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총은 율법이 행할 수 없는 일, 즉 정욕을 이기는 일을 행하며 세례의 과정에서 성령이 인간 속에 신앙을 만들어내며, 타락을 통해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던 영적 무지를 몰아낸다. 이러한 신앙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어야 하며 소망과 사랑이 더 첨부되어야 한다. 이처럼 사랑이 주입됨으로써 인간의 의지는 점점 더 자유롭게 해방되며, 인간의 본성은 회복되어 변화되어 간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상반된 이론을 볼 수 있는데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변화는 자연적 심리학적 발전의 결과라고 하는 반면,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에 미친 초자연적 하나님이 세력의 결과라고 하는 점이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인간 스스로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의 덕분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어거스틴의 자유의지에 관한 사상은 두 단계를 거치고 있다. 첫 단계의 사상은 펠라기우스가 나타나기 전의 사상으로서, 이 때의 자유의지론이 사실상 주체는 악의 본질과 기원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 자유의지론은 펠라기우스를 반대하기 위한 자유의지론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사상은 (Privatoi Boni 사상)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부터 등장한다. 따라서 이 사상은 서방 교회의 신앙의 관점에서 당시 기독교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마니교 사상을 비판 한 것, 즉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전능과 선을 반영해 준다는 당시 서방 교회의 입장을 수호하기 위해 선과 악, 영과 물질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악을 실체로 규정했던 마니교 사상을 반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거스틴은 악을 실체로 보지 않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다.
그렇다면 현실의 악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 손실, 부패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악의 원인은 무엇인가? 악의 근원은 인간의 자유 의지의 전도(顚倒)에 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플로티노스의 사상(유출설) 구조를 받아들인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이 세계에는 악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존재의 계층만이 존재하는데, 인간의 의지가 자신의 위에 있는 존재를 향하지 않고 밑에 있는 것을 향할 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물질 세계를 향할 때 인간의 의지가 전도되고 이러한 전도된 의지에 의해 악한 행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인 물질 세계나 자유 의지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세계에로 향하는 의지의 전도가 악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적 악 또는 인간의 고난과 고통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따라서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의 원인은 모두 인간의 의지의 전도에 있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악을 인간의 죄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제시했다. 이러한 사고의 의미는 마니Mani교와 비교해 볼 때 명백해진다. 마니교는 유대교를 단호히 거부하고 페르샤 내지는 인도사상을 기독교 이념과 결합시킨 종파이다. 마니가 내세운 교리는, 영겁의 상태로부터 이미 병존하여 온 두 가지 세계에 관한 표상에서 발달된 것으로서, 즉 하나는 광명으로서의 하나님 아버지에게 지배되는 광명의 세계와 또 다른 하나는 암흑과 그의 마귀에 의해 지배되어 있는 - 마니는 이것을 유대교의 여호와와 동일시하였다.- 암흑의 세계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있어서의 예수란 광명의 세계로부터 강림하신 인류의 구세주로 보고 있다. 이 종교의 윤리관을 대단히 엄격해서 불교와 같은 고행을 독촉했고, 동물성 음식물이나 성적 충족은 물론 심지어 하찮은 수공업에 종사하는 것까지 금지시켰다.
마니교 및 영지주의에 의하면 악은 의지의 행위라기 보다는 악한 원리(어둠의 신)의 실현이다. 따라서 인간은 악한 신과 창조의 희생자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서 어거스틴의 '선의 결핍' 사상은 한편으로는 악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본성의 전도 또는 왜곡이기 때문에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악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인간에게 돌린다. 즉 악은 창조 후 인간에 의해 이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며 원칙적으로 구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창조가 선하며 악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는 확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책임성을 심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는 그들 자신보다는 물질과 유한 존재의 운명의 탓으로 돌린다. 따라서 자신을 창조의 파괴자가 아니라 희생자로 이해된다. 그래서 고대 세계는 유한과 역사 내에서의 구속의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유한으로부터 영원으로 비약할 때만 악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세기의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어거스틴의 이론을 비판하기를, 인간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성을 항상 무의식 속으로 숨겨놓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잠재력이 2차 세계대전의 집단적 잔혹성으로 폭발되었다는 말이다. 즉 악과 하나님에 대한 도덕적 해가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을 야기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 비판하기를, 하나님을 사(4)위일체, 즉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의 역설적 통일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의 대극들의 긴장 속에 살면서 양자를 통합시켜 나가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탁월성으로 보고 있다. 즉 악은 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부정되기보다는 긍정되어야 하며, 억제 되기 보다는 인격 속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악은 삶의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뵈메(Jakob Boehme)에 의하면, 절대자 안에는 실재의 어두운 원리가 빛의 원리로 총합되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지 않지만, 이 세계에서는 이러한 조화가 상실되어 있기 때문에 실재의 어두운 원리가 악의 원리가 된다고 한다. '선의 결핍'이론은 고대 교회 도처에서 발견된다. 사실상 '선의 결핍'이론은 어거스틴 이전에존재했던 개념이다. 어거스틴의 이론은 당시 서방 교회 교부였던 암부로시우스Ambrosius(339-397)로부터 받아들였음을 암시해 준다. 또 '선의 결핍' 사상은 동방 교회에서도 나타난다.
* 위의 글의 원본내용은 본인의 아들(이경준전도사)의 신학대학 졸업논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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