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 착한이. 나의 싸이버 아이디다. 아이덴티티를 나는 왜 그렇게 정했을까. 신앙을 버리고, 신을 용도폐기하고 나에게 남은 것은 나 자신 뿐. ‘나’라는 인간.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를 착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그것은 나약함의 또 다른 현상일 뿐이었다. 쉽사리 종교에 빠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나약함을 위장하려는 자기기만적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착하게 보인다. 이른바 경향성이다. ‘착하다’는 것에 대한 회의는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착하게 산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착하게 살아보겠다는데 누가 싫어라 하겠는가. 역시 타인의 시각을 의식한 계산이다. 나쁜(?) 놈이라면 누구나 접근을 꺼려할 것이다. 그러나 나쁜 놈의 접근을 꺼려하는 놈들 역시 그렇게 착한 놈들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그들 역시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순수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착하게 살아야한다고들 말한다. 인생을 살아본 경험에 비추어 그렇단 말인가? 삶의 지혜? 착하게 살고자하는 것이 삶의 지혜라면 우리는 착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 아니, 어쩌면 착하게 살지 않는 것이 더욱 정직해 보인다. 삶의 지혜란 표면적(수단적)으론 호혜평등이지만 목적적으론 자기 이기성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선과 악적인 힘을 적절히 사용하는 게 삶의 지혜이다.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경험 일반은 인간이 왜 착하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다. 그럼에도 착하게 살아야한다. 왜. 도대체 왜.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하는가? 이런 의지는 도대체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이 의지는 순수한 의지가 될 수 있는가?
2. 칸트 옹호하기 인간에게 순수의지란 있을 수 있는가? 칸트에 의하면 있다. 그것은 신에게서 비롯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신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신을 부정한 칸트가 신을 끌어들이다니? 칸트는 존재론적 신을 부정한다. 완전한 것(신)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신의 존재론적 논증이다. 칸트에 의하면 이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여부와 속성은 별개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속성만을 들어 존재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겠는가? 그럼, 칸트의 신은 무엇인가? ‘도덕적 완전성을 구비한 인간(이성적 세계 존재 일반)은 신에게서 신의 결단의 대상이 되며 세계 창조의 목적이 된다. 행복은 완전성을 최고의 조건으로 하며 신의 의지로부터 직접 결과한다. 이같이 신의 뜻에 맞는 인간은 영원 전부터 신 안에 존재한다. 그러한 인간의 이념은 신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한 한에서 그는 결코 피조물이 아니라, 신의 독생자이다. 그는 그를 통해서 다른 모든 사물이 창조되었고,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말씀(그렇게 되라!)인 것이다.(왜냐하면 그를 위해서, 즉 세계 안에 있는 이성적 존재를 위하여, 그가 그의 도덕적 운명의 빛에서 고려되는 한에서 - 모든 것이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70쪽 인용) 기독교의 역사적 신과는 좀 다르다. 아무튼 칸트에게는 신이 필요했다. 데카르뜨가 주체를 위해 신을 필요로 했듯이 칸트에게는 인간에게 순수의지를 부여하기위해 필요했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순수 이성의 근원으로부터 획득된 도덕이 발생했다. 따라서 삶의 지혜로서의 선이 아닌 선천적이며 이성적이고 무제약적인 선에의 의지가 발견되었다. 신(?)으로부터 발생되었지만 우리가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이념에 부합되는 하나의 법칙이 될 수 있다는데 있다.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법칙. 이런 절대성이야말로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규칙이다.
3, 칸트의 근본악 우리는, 이제 칸트에게 이렇듯 선에의 순수의지를 가진 인간이 왜 악한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인간은 왜 악한가? 사실, 삶의 지혜 일반으로서의 선으로도 이 세상은 어느 정도 무리 없이 돌아간다. 더욱이 순수 선의지를 발동케하는 양심이라는 도덕법칙이 가세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보다 나은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경향성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선에의 순수의지 역시 퇴색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될 것이다. 경향성이란 그 어떤 위대한 준칙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준칙은 정확성과 견고성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칸트는 그래서 왜 인간은 악한가에 대한 문제를 다시 신에게로 끌고 간다. 만약 그 악함의 근원이 인간 스스로에 있다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도덕을 세우기 위해 종교를 도입한다. 칸트의 입장에서 신이 악하다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적 계시신앙을 차용한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원죄의 신화를 모델로 한다. 아담이 뱀이라는 외적 존재로 인해 타락했듯이 그렇게 ‘근본악’은 인간의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근본악’이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비본래적인 것이다. 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적(본래적) 본성으로서의 선에의 소질은 남아있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다? 근원에는 두 가지의 개념이 있다. ‘이성적’ 근원과 ‘시간적’ 근원. 전자의 근원은 현존재가 고찰될 뿐이다. 문제는 후자의 개념이다. 이 ‘시간적 근원’이란 말 그대로 시간 안에 있는 그 원인에 관련된다. 따라서 결과적 개념이다. 이 결과적 개념으로 보자면 인간은 악하다. 즉 행위적으로 봤을 때 악하다는 말이다.(48쪽 참조) 어디서 비롯됐을까? 칸트가 원죄 신화를 모델로 설명을 했듯이 그 악은 세계의 시초에 인간 안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보다도 한층 숭고한 운명을 지녔던 영 안에 놓여져 있다. 그 악 일반의 최초의 시작은 우리에게는 파악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54쪽 참조) ‘근본악’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악하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비본래적인 것으로써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다. 신에게도 책임이 없다. 그럼 누구에게 책임이 있나? 인간은 단지 뱀(?)의 유혹에 의해서 약속을 어긴 것이다. 비본래적이므로 책임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책임이 있다. ‘시간적 근원’ 차원에서 보이는 인간의 악과 ‘이성적 근원’ 차원에서 보이는 인간의 악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왜 일까? 이 세계에 산다는 것과 인간의 숙명과 한계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인간 세계의 배경에 뭔가가 있지 않을까? 배경이 있기 위해서는 ‘인간은 악하다’여야 한다. 나는 나의 배경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선한 심성 또는 악한 심성을 생득적 성질로서 본성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함은 이런 경우에는 이 심성이 그것을 지닌 인간에 의해서 획득된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인간이 그의 창시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심성이 시간 안에서 획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항상 선하거나 또는 악하거나 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30쪽 인용) 악의 창시자는 인간인 셈이다. 어렸을 때부터 항시 선하거나 또는 악하거나 할 수 없다는 의미는 그런 심성을 자유로운 선택 의지에 따라 자신이 채용했다는 뜻이다. 착하거나 악하거나 그것의 책임을 어떻게든 인간에게 책임지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책임 하에 인간은 착해질 수 있는가?
4. 도덕적 인격과 신 우리에게는 이제 신이 부여한 선성과 뱀(?)이 부여한 악성이 있다. 인간의 선성과 악성의 싸움. 근본악의 한계 상황을 짊어진 타락한 도덕적 인격이 어떻게 그의 선한 본성을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가? 칸트에 의하면 투쟁뿐이다. 자연적 ‘경향성’의 선한 것을 배척할 이유는 없으나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선에의 소질을 발전시키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악의 원리와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초, 최후의 참된 선은 경향성 안에서가 아니라, 전도된 준칙과 자유 자체 안에서 찾아지는, 악에서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향성은 단지 그에 대립하는 선한 준칙의 수행을 방해할 뿐이다. 그러나 본래적인 악은 경향성이 법칙을 위반하도록 자극할 때, 그것에 저항하기를 원치 않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심성이 사실 진짜 적인 것이다.(67쪽 참조)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따르지 않는다’는 성경 구절은 도덕적 인격이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가? 아니, 우리는 이렇게 묻기에 앞서 싸울 자격, 혹은 의사를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앞서 인용(70쪽)한 ‘그러한 인간의 이념은 신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할 때 ‘그러한’ 인간은 신의 뜻에 맞는 인간이다. 도덕적 완전성을 구비한 인간. 현존재로서의 인간. 자신이 의지로서의 이런 인간이 되고자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신의 뜻에 합치하는 인간성의 이념(즉 욕구들과 경향성에 의존하는 세계 내 존재자에게 가능한 도덕적 완전성의 이념)을 우리는 모든 인간적 의무를 스스로 수행하면서, 그와 동시에 또한 교훈과 모범을 통해서 선을 그의 주위에 가능한 한 널리 전파할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유혹에 직면하면서도, 가장 치욕스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난을(더욱이 그의 적을 위하여) 기꺼이 짊어지려고 하는 그러한 인간의 이념 밑에서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면 사람은 장애와 투쟁하고 있는, 그리고 최대의 시련 밑에서도 그것을 극복해 나아가는 자기 자신을 표상함에 의해서밖에는, 도덕적 심성의 힘의 정도 및 강도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71쪽 인용) ‘신의 뜻에 합치하는 인간성의 이념’이란 곧 욕구와 경향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 내 존재’이지만 가능한 한에서 도덕적 완전성에 도달하려는 의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힘든 싸움이다. 이 싸움 과정에서 우리 인간은 신을 요청하게 된다. 도덕적 인격은 그의 자기 실현의 과정에서 세 개의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 ‘우리가 우리 안에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되는 선과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악과의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법칙의 거룩함에 일치하는 행위는 언제까지라도 불가능하다’(70쪽 참조)는 것. 둘째, ‘인간은 자기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오랫동안 선을 향한 지속적인 태도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없으며, 또한 자기의 행위의 최고의 주관적인 근거, 즉 자기의 근본적인 내면의 태도가 과연 순수한 것인지에 대해 직접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다’(71쪽 참조)는 것. 셋째, 도덕적인 선의 추구함에 수반되는 ‘죄책 의식’이다. 사실, 도덕적 완전성의 이념이란 우리 인간의 창시물이 아니다. 그 원형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왔다. 이 이념이 (그 자체로는 악하지 않은)인간성을 채용해서 스스로를 인간 존재에로 낮춘 것이다.(71쪽 참조) 따라서 이러한 이념이 우리에게 원형으로서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겐 우리의 심성과 원형의 합일을 이룰 만한 자격이 없는 것이다.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되는 선’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악’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두 번 째로 지적된 도덕적 행복의 지속성과 불변성은 더더욱 담보될 수 없는 것이다. 도덕적 인격이 신을 만나야 하는 시점이다. 칸트의 도덕적 인격이 한계에 다다랐다. 여기서 예수가 등장한다. 도덕적 인격은 그 모든 행위에서 자신의 행위의 불완전성 때문에 면할 수 없는 양도 불가능한, 전적으로 개인적 죄책에도 불구하고, 새 사람이 되려는 그의 선한 의도 또는 그의 주체 속에 내재하는 선의 이념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에 양심 앞에서 자기를 변호할 수 있고 죄책을 면할 수 있다. ‘새 사람이 되려는 선한 의도 또는 그의 주체 속에 내재하는 선의 이념에 대한 믿음’이 곧 예수라는 상징적 실재라는 것이다.(79쪽 참조) 구원을 얻은 것이다. 이제, 도덕적 인격은 필연적으로 신과 만날 수밖에 없다. 도덕적 인격의 자기 의식이란 곧 신의 의식이 된 것이다. 도덕적 인격이 ‘선의 이념을 믿고(구원 받음) 그 실현을 향해 투쟁해 나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보며, 인간의 결함을 그의 내면적 의도에 비추어서 은혜롭게 심판하는 신의 의식에 도달하게 되었다.
5. 칸트의 종교론(이 책 부록으로 실려있는 신옥희의 논문을 주로 인용, 참조했음) ‘이성적 한계 안에서의 종교’는 다른 말로 ‘도덕적 인격의 이성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의정언적 명령, 즉 ‘의무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다’는, 그래서 우리는 투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도덕적 인격은 이성적인 방식으로 신의 자비와 의를 기대할 수 있다. ‘실천이성비판’의 신앙이 형식적이고 객관적 규정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주체적 측면에서 체험된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내용이 채워진 것이다. 실천이성비판에서의 신의 요청이 실천적인 필연성 때문이라면 이 ‘종교론’에서의 신의 요청은 도덕적 한계 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전적인 무지를 체험한 이성의 겸허한 희망 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 일반 또는 인류 일반의 보편적인 차원에서 일 뿐이다. 칸트가 제시하는 도덕적 인격의 보편적, 비역사적 성격은 자신에 의해 제시되는 신과 인간의 관계의 추상적. 비역사적 성격과 직결된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적 인격은 신에게 대해서까지도 이성 일반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 있는 것밖에는 상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인 사고를 초월하는 구체적인 신앙생활의 역사적인 현실에 참여할 수가 없다. 칸트의 ‘이성적 인격’은 실천 이성의 요청으로서의 신존재 증명을 넘어서 근본악과 대결하는 역설적인 자기 확신 속에서 불가해하며 초이성적인 자유의 신비 및 그 근원으로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신의 은총의 신비를 만난다. 그러나 칸트의 ‘도덕적 인격’은 도덕적인 한계 상황과 대결하는 본래적 자기 확신 속에서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의 현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이지, 그 신비 속에 스스로 참여하고 침잠하는 단계에까지는 도달할 수 없다. 칸트의 도덕적 인격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한계 안에서만 신과 관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칸트의 이성 종교가 역사 종교에서 이성의 한계를 넘는 비이성적 신비의 차원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역사 종교의 방식으로 신을 이해하면 신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입장에서 신존재 증명은 도덕 법칙을 세우기 위한 신의 개념(?)일 뿐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는 차안에서, 공간적으로는 인류 사회 한가운데 건설되어야 할 보편적, 윤리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류의 공동체적, 도덕적 협동 운동을 가능케 하는 필요 불가결한 조건으로서 도덕적 세계 지배자로서의 신의 존재가 증명되어야 함을 뜻한다. 이것은 종교의 피상성을 극복하고, 최고선의 개념을 지상에서 건설해야 할 도덕적 왕국 또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통해 신의 존재로 하여금 지상에서의 인류의 도덕적 진보와 직접적, 구체적 관련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교회의 역사적 신앙의 여러 형태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보편적인 기반은 유일의 절대 불변하는 순수한 종교 신앙이다.(117쪽 참조) 그리고 역사적 신앙은 단지 순수한 종교 신앙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순수한 종교 신앙의 본질인 내면적 도덕성의 강화와 완성을 돕기 위한 것이다.(134쪽 참조) 칸트가 철저히 역사 종교(계시 종교)의 상징들을 차용해 자신의 이성 종교를 확립하려 한 의도를 알 수 있다. 이성 종교를 우위에 두기 위해 전략적 수단으로서 역사 종교를 이용한 것이다. 이것은 이성 종교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기성의 역사 종교에도 이로운 것이다. 오히려 역사 종교에 호소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당시 계몽주의자들처럼 역사 종교를 가볍게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윤리적, 이성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며, 이성적인 도덕적 종교의 이념과 완전한 일치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계시 종교를 이성 종교의 구체화를 위한 불가결의 수단이요, 이성 종교의 이해를 가능케 하는 불가결의 도식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성 종교를 우위에 두기 위해 역사 종교를 이용했듯이, 어떤 면에서 칸트는 도덕을 우위에 두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다. 도덕은 최고선의 실현 불가능성 앞에서 ‘너는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실천 이성의 정언적 명령을 제시할 뿐이다. 종교는 이 도덕의 영역에 최고선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소망을 부가시켜 준다.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불가피하게 종교에로 이끌려 가게 된다. 그래서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도덕에서 종교에로의 비약은 그 자신의 도덕적 한계 상황에 직면한 도덕적 인간에게 실천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칸트는 주장한다. 그래서 칸트의 ‘종교’는 모든 인간에게 실천적 타당성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다시 ‘도덕’인 것이다. 도덕이 종교보다 보편 타당하기 때문이다.
6. 나가기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만 빼고 누구나 칸트를 비판할 수 있다. 아니,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도 칸트를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인간은 책임 있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도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해야 할 일(당위)을 하지 않으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도덕 법칙이 필요한 이유이다. 칸트는 인간에게 무한의 책임을 지우려 한다. 그러나 이런 무한의 책임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만약 자유의지가 없다면 주체나 도덕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선지 칸트의 종교에는 자유의지가 부정되는 듯이 보인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을 그렇게 믿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평생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은 돈이 있어서 그러한 입장에 놓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니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가라타니 고진의 ‘윤리21’ 100쪽 인용)면 어쩌겠는가. 빠져나갈 구멍이 보인다. 칸트는 왜 ‘도덕적 인격’을 내세워 이성적 종교를 완성하려 했는가? 결국 보편성과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랬다. 도덕의 법칙이 그래야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에게 책임과 자유를 짊어지게 하는 것. 착하려는 자는 기꺼이 짊어질 것이다. 그에게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빠져나갈 수 있는 자. 칸트를 돌로 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