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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판단과 비판

by 이덕휴-dhleepaul 2019. 2. 1.


판단과 비판 -칸트 판단력비판_박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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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력은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 아래에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 능력”이다. 한낱 특수를 그 개념이 주어져 있는 보편 아래 포섭하는 능력일 뿐 아니라, 또한 거꾸로, 특수에 대한 보편을 찾아내는 능력이기도 하다. 전자를 규정적 판단력, 후자를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부른다.

이 판단력이 반성적으로 얻은 합목적성인바, 반성적 판단력은 다시금 주관적 형식적 합목적성을 쾌, 불쾌의 감정에 의해서 판정하는 미감적 판단력과 객관적 실재적 합목적성을 지성과 이성에 의해서 판정하는 목적론적 판단력으로 나뉜다. 반성적 판단력을 주제로 삼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은 그래서 미감적 판단력 비판과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의 두 부문을 갖는다. 첫째 부문은 미감정 ‘판정들에서의 판단력의 원리에 대한 비판적 연구’이고, 둘째 부문은 ‘자연에 대한 논리적’, 목적론적 ‘판정들의 비판적 제한’이다.


철학, 구분

철학이 개념들에 의한 사물들의 이성인식의 원릳르을 함유하고 있는 한에서 철학을 보통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으로 구분한다.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의 원리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원리라는 것은 ‘자연개념’과 자유개념’이다. 자연개념은 선험적 원리들에 의해서 이론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지만, 자유개념은 이로적 인식과 관련해서는 단지 소극적 원리만을 이미 자기 개념 안에 수반한다.

반면에 의지결정을 위해서는 실천적이고 확장적인 원칙들을 사용하게 된다. 자연철학은 이론들의 것이며, 도덕철학은 실천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한 실천이성이 자연철학을, 실천이성이 자유개념을 포함한 도덕철학을 이야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칸트찰학의 기본 구성

칸트, 의지

욕구능력으로서 의지는 곧 세계 내의 여라가지 자연원인들 중 하나의 원인이다. 곧, 개념들에 따라 작용하는 그런 원인인 것이다. 의지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또는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모든 것은 실천적으로 가능한 것또는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불린다.

인과성을 결정하는 개념이 자연개념이라면 그 원리들은 기술적-실천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자유개념이라면 도덕적-실천적인 것이다. 의지는 기술적-실천적 영역이 아니라 도덕적-실천적 영역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의 빅픽쳐


칸트, 목적

칸트는 합목적성을 3가지로 나눈다. 그것은 내적합목적, 외적 합목적성, 궁금목적적 합목적성이다. 내적합목적성은 자연목적이라고 부르며 유기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연산물들이 목적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한다. 자연은 이신론적 토대에서 보는 것과 같이 처음 만들어진 후에는 알아서 목적을 이루어가면서 자연목적을 이루어 낸다.

외적 합목정성은 어떤 목적에 대해서 수단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니깐 인간이 자연생태계의 유지를 위해서 상위포식자로 존재하게 되고, 우리의 손은 두뇌의 자극을 실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외적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궁극목적적 합목성은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이면서 인간스스로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목적이 ‘행복’인가 혹은 ‘행복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궁극적 합목적성 안에서 인간은 ‘동물성-인간성-인격성’의 차원에서 볼 때 행복이 속한 인간성 보다 더 높은 인격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칸트가 정의하는 오성

세계 기민적 관점, 보편사의 이념

우리가 의지의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무엇을 주장하든 간에, 의지가 외부로 나타난 현상이 인간 행위이며, 그것은 여타의 자연적 사실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규정된다. 역사는 이러한 현상들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러한 현상들의 원인이 아무리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역사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가 발휘되는 과정을 긴 안목으로 고찰해 본 다면 우리는 그 속에 어떤 규칙적인 진행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각 개인에게는 얽혀 있고 불규칙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인류 전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근원적인 소질의 발전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인간은 전적으로 본능적으로만 행동하지도 않고, 이성적인 세계시민의 보편성으로도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밝혀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역사, 국가의 미래를 고민해볼 때 ‘반성적 판단력’을 가지고 특수한 역사 속에서 보편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해보면 다음과 같은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보편성, 명제

1.생명체의 모든 자연적 소질은 언젠가는 완전하게, 그리고 목적에 맞게 발현되도록 결정되어 있다.

2.지상에서 유일한 이성적 생명체인 인간에 있어서 그의 이성과 사용을 지향하는 자연적 소질은 개인에서가 아니라 유속에서만 완전하게 계발될 수 있다. 한 생명체의 이성은 자신의 모든 능력의 사용에 대한 규칙과 의도를 자연적 본능을 훨씬 넘어서까지 확장시켜 주는 능력이며, 그러한 시도에 있어서 아무런 한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성 자신은 본능에 따르지 않으며, 한 단계의 통찰로부터 다른 단계의 통찰로 점차 진행되어가기 위해서 시행과 훈련과 수업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모든 자연적 소질을 완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오래 살아야 할 것이다.

3.자연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그의 동물적 존재의 기계적인 명령을 넘어서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끌어내야만 하다는 것이며, 또 인간 자신이 본능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ㅇ르 통해서 창조한 행복과 완전함 이외에는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은 쓸데 없는 것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며, 또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을 사용함에 있어서 필요이상의 낭비는 하지 않는다.

4. 자연이 인간들의 모든 소질을 계발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은, 이 항쟁이 궁극적으로 사회의 합법칙적인 질서의 원인이 되는 한에서, 사회 속에서의 인간들, 상호간의 항쟁이다.

5. 자연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해결을 강요하는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보편적으로 법이 지배하는 시민 사회의 건설이다.

6. 시민사회의 건설은 가장 어려운 문제이면서 동시에 인류에 의해 가장 나중에 해결될 문제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단순한 생각이 우리의 눈앞에 이미 제시하고 있는 어려움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인간은 타인과 더불어 유를 이루며 살 때 어떤 지배자를 필요로 하는 동물이다.

7. 완전한 시민적 정치 체계를 확립하는 문제는 합법적인 국제 관계의 문제에 의존하며, 이 후자의 해결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

8. 인류의 역사는 국내적으로도 완전하며, 그리고 이 목적에 맞으면서 국제적으로도 와노전한 국가체제를 성취하고자 하는 자연의 숨겨진 계회고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완전한 국가체제는 자연이 인류의 모든 소질을 완전히 계발시킬 수 있는 유일한 상태이다.

9. 인류의 완전한 시민적 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는 자연의 계획에 따라서 보편적 세계사를 편찬하려는 철학적 시도는 가능한 것으로서, 도 이런 자연의 의도에 공헌하는 것으로서 간주되어야만 한다.


칸트의 개념 이해


칸트, 문화

칸트는 세상의 원리에 대해서 동물성/인간성/인격성으로 나누고 동물성은 욕구를 목적으로 추구되며 인간성은 행복을 목적으로 추구되고, 인격성은 도덕을 모적으로 인해서 추구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문화인데, 문화는 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숙련성과 함께 도덕을 증가시키기 위한 훈육시키고 있다. 보통 서양에서 문화라고 한다면 학문, 종교, 예술이다. 이것은 플라톤에 따라서 진, 선, 미의 구분을 갖는데 지성, 의지, 욕망이 각각 학문, 종교, 예술의 측면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칸트, 역사인식

시민사회가 등장하기 전에 동물성이 지배하던 시대를 자연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본능에 의한 투쟁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물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홉스와 로크, 루소와 같은 학자들은 ‘계약’에 의한 동물성의 극복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동물성을 계약을 통해서 극복한 ‘합법성’의 시대에서는 시민사회 혹은 국가가 등장하였고 이것은 인간성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성의 근간에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의 최대치는 국가안에서 가능한데, 국가와 국가사이에서는 서로 투쟁하는 전쟁상태가 또 발생하게 된다. 그러한 전쟁상태를 극복하고 영구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계시민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논리이다. 이러한 영구평화론을 가지고서 국가와 국가의 연합을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될 수는 없고, ‘국제연맹’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제연맹은 국가간의 ‘국제법’으로 규정되는데 이러한 국제법은 국가내의 헌법과는 다르게 강제력이 없으므로, 강제력이 아닌 도덕성에 근거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인격성이 지배하는 도덕성이 기반이 된 사회이다. 세계시민사회는 국제법이 도덕성에 의해서 인간의 인격성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판단력이란 보편적인 것으로 흡수시키는 이성의 능력과 특수한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들을 찾는 사고 능력이다. 보편적인 것으로 흡수시키는 과정은 ‘이것은 아름답다!’라고 하는 것처럼 규정하고서는 연결시키는 능력이다. 이것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규정적 판단력은 그래서 떨어져 있는 것을 연결하는 과정이다.

특수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서 그것 안에 들어 있는 보편성을 찾아내는 것이 ‘반성적 판단력’이다. 그러니깐 반성적 판단력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분할하여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은 서로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강화해 간다. 인간의 판단력은 그래서 자연 상태와 도덕 상태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 분리하는 반성적 판단을 하기도 하고, 서로 이어가는 규정적 판단을 하기도 한다.


판단의 여러 층위


칸트는 1774년 동프로이센의 항구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1804년까지 80세의 인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늦게 강단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살에 대학에 들어갔고 거기서 철학, 수학, 자연과학을 폭넓게 공부했다. 특히 자연과학에 대한 공부는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을 ‘자연상태’로 보기 시작하는 단초를 제시한다. 16세기 계몽주의가 시작되는 시기에 수 많은 연구와 발견이 일어나는 시기의 자연과학은 그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러한 자연과 철학을 수학적 방식으로 연결하기 위해서 칸트는 ‘사실’로서 존재하는 실제적인 것들은 모두 ‘오감’인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맡는 것들로 파악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또한 인간은 그렇게만 목적되어지지 않고 이성의 개념안에서 당위와 실천의 과제를 가지게 되는 의지의 영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어느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대한 ‘가치’의 문제를 가지고 온다.

1770년에 정교수가 되면서 1981년에 순수이성비판을, 1788년에 실천이성 비판을, 1790년에 판단력 비판을 쓰면서 비판철학의 기본을 다지게 된다. 칸트 이후에 더욱 발전하는 자연과학은 마침내 우세하게 인간을 규정하는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칸트가 순수이성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실천이성은 말과 글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고 던진 것은 자연과학이 가치의 중립성을 인정받은 채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칸트는 1793년에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펴내면서 판단력 비판의 말미에서와 같이 신학과 종교에 대한 고민으로도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 원본

민네이션, 목적

칸트는 목적론에서 인간이 스스로 목적을 인식하고 도덕적으로 살게되는 한에서 최종목적이라고 말한다.내적목적은 유기체안에서 운영원리로 이루어지는 것들이고, 외적목적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 수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궁극적 목적은 바로 도덕적 인간이다. 이러한 도덕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문화 안에서 훈육을 통한 도덕의 발전이 시민사회와 국가의 주요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칸트는 최고선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최고선을 유지시켜주는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이러한 도덕성이 기반이 될 때 실천이성을 사용하면 영구평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에서만 보면 목적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을 고민해보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 같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목적을 ‘코나투스’라고 하면서 존재하려는 목적이라고 이야기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하면서 이성적 인간을 상정한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하는 것은 ‘종교혁명’이후에 새로운 인간에 대한 정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도덕을 추구하는 목적을 가지고 최고선을 실행할 수 있는 존재라고 칸트는 말한다. 여기서 나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경험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원래 놓여 진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역사와 과거의 이야기에서 미래로 가기 위한 인간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