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 번쯤은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이다. 특히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의 목표치에 다다르지 못한 경우에 할 수 있는 질문이다.
내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은 내게 주어진 짐을 지고 골고다에 오르는 여정의 한 싯점에 놓여있을뿐, 다른 아무 의미가 있는 것은 없다. 전혀없다.
사도 바울이 전한 말씀 중에 -갈라디아서 6:3-5 말씀을 보면;
관주성경
3. 萬一(만일) 누가 아무 것도 ㅈ되지 못하고 ㅊ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4.ㅋ各各(각각) 自己(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自己(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ㅌ各各(각각) 自己(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Galatians 6:
New International Version King James Bible
3If anyone thinks they are something when they are not, they deceive themselves. | 3For if a man think himself to be something, when he is nothing, he deceiveth himself. |
4Each one should test their own actions. Then they can take pride in themselves alone, without comparing themselves to someone else, | 4But let every man prove his own work, and then shall he have rejoicing in himself alone, and not in another. |
5for each one should carry their own load. | 5For every man shall bear his own burden. |
현재의 나는 과거의 시점에서 그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나는 세상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자신임을 깨닫지 못하고 말 할 수 없는 실의에 빠진 나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나만 내 자신을 사랑하고 붙잡고 놓지 못하는 비참한 지경에 빠졌음을 한탄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다 할 수 있잖아????
사도는 말한다. 네 짐을 지고 가거라.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짐을 그 누구도 져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직 주님만이 내 짐을 져 주신다고 하시면서 다 내게로 오라고 하였다.
내가 지금 살아 가야 하는 이유를 "죽음의 수용소"(프랭클)라는 책자를 통해서 먼저 알아보자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은 1905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유태인이며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가족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유태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끌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두 잃고 네 곳의 수용소를 전전하다 기적처럼 살아서
돌아온다.
그가 경험한 수용소 생활은 처참했다. 매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빵 한 조각으로 연명하며
고통스러운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한마디로 삶이 죽음보다 못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철저히 박탈당한 자유 속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빵을 힘든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힘겨운 시간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용기는 북돋았다.
자신을 넘어 남을 위해 뭔가를 해내는 삶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시련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빅터
프랭클은 큰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시련의 연속이며 이런 시련을 이겨내려면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삶에 대한 의미를 찾은 사람들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으며 그 고통의 시간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냄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정리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 그것은 곧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삶은 자유를 빼앗기고 구속당하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이유와 가치를 발견하고 살아야 하는 의미를 발견한 이들이 사는 방식은 달랐다.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자신의 것을 당당히 나누며 시련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덕분에 그들의 의지는 더욱 강해졌으며, 육체적으로도
건강했다. 결국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기만의 의미를 발견한 이들이었다. 수용소의 삶은 갇혀 있고
자유가 제약당하며 그 갇혀 있어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목표를 찾을 수 없고 꿈꿀 수
있는 미래도 사라졌다. 지금 우리의 삶도 수용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는 힘겹고 직장은 밥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빈익빈사회는 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느낀다.
허무감으로 의지를 빼앗긴 삶에 번개탄 연기만 자욱하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빅터 프랭클은 심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게 된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 의미치료)가
그것이었다. 석가모니가 인생을 고통의 바다에 비유했듯이 우리 삶은 끝없는 시련과 어려움들이
기다린다. 이런 삶을 딛고 일어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슴에 품고 있을 때 가능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빅터
프랭클은 심리적 공황상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의지를 되살려줌으로써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치료에 매진한다. 덕분에 프로이트와 융, 아들러 같은 심리학자들에 버금가는
심리치료에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된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삶이 무엇인가를 해주길 기대만 할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만 해서는 찾을 수 없다. 의미는 구체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행동과 태도가 올바른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삶을 통해 무엇인가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그 반대다. 삶에서 얻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현명한
방법이다.
“성공을 목표로 삶지 마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 그것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현명한 방법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짐이 주어진다.
누구도 그 짐을 피해갈 수 없고, 다른 사람이 대신 질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어떤 방식으로 지고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다. 시련을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할 기회로 산다면 우리는 보다 가치있게 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해법은 이렇다.
갈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法)을 성취(成就)하라
각자 자기의 짐을 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버겁고 감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짐은 바로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짐이기에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질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성공은 무엇인까? 금전은 무엇인가? 명예는 무엇인가?
이것들이 꼭 내가 성취해야 할 목표인가???? 그것은 내 자랑의 한 요소일 뿐이다. 주님 앞에서는 자랑거리가 안된다.
- 이덕휴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