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시니” (신 6:4)
이스라엘의 신앙교육은 ‘쉐마’교육으로 대표된다.
‘쉐마’는 ‘듣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샤마아’의 명령형으로, 우리말로는 ‘들으라’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쉐마’는 ‘이스라엘아 들으라’(히브리어로는 ‘쉐마 이스라엘’)로 시작되는, 신명기 6장 4~9절의 문절 제목이다. 유대인들은 문절 혹은 책의 제목을 정할 때 첫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관습이 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 창세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베레쉬트’인데, 이것은 창세기 1장 1절의 첫 단어인 ‘태초에’다. 그러므로 ‘쉐마’는 신명기 6장 4~9절을 지칭하며, 그 내용은 가정에서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규명해 준다.
1. 들으라 이스라엘아
셰마 이스라엘(히브리어: שמע ישראל, 이디시어: Sh'ma Yisroel ‘들으라 이스라엘’. ‘셰마’ 또는 '쉐마' 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는 신명기 6:4-9, 11:13-21, 민수기 15:37~41에 나오는 성경 구절을 두루 이르는 말로서, 유대인들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배 때에 읊는 기도를 말한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여 하루에 두 번씩 암송하도록 되어있는 ‘쉐마’는, 이스라엘의 의식구조와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앙고백문이다. ‘쉐마’를 정기적으로 암송하는 관습이 구약시대부터 정착되어 있었다.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이 말씀을 강론하라”(신 6:6-7)를 본문 낭독의 명령으로 이해하였고, 신명기 6장 7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이든지”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아침과 저녁에 한 차례씩 ‘쉐마’를 암송하는 제도로 삼았다.
바벨론 탈무드에 의하면, 유대인 남자 아이가 태어나 말을 시작할 때에, 부모들은 가장 먼저 ‘쉐마’의 첫 절인 신명기 6장 4절을 가르치도록 규정되어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주후 2세기 랍비였던 아키바가, 로마군에 의하여 처형당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쉐마’를 암송하였다. 그런 전례를 따라, 다른 순교자들도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쉐마’를 암송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 직전의 모든 유대인들이, 자신의 마지막 신앙고백으로 ‘쉐마’를 암송하는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결국 ‘쉐마’는 유대인들은 태어나 제일 먼저 배우는 신앙고백이면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암송하는 신앙고백인 셈이다.
‘쉐마’는 ‘듣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샤마아’의 명령형으로, 우리말로는 ‘들으라’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쉐마’는 ‘이스라엘아 들으라’(히브리어로는 ‘쉐마 이스라엘’)로 시작되는, 신명기 6장 4~9절의 문절 제목이다. 유대인들은 문절 혹은 책의 제목을 정할 때 첫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관습이 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 창세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베레쉬트’인데, 이것은 창세기 1장 1절의 첫 단어인 ‘태초에’다. 그러므로 ‘쉐마’는 신명기 6장 4~9절을 지칭하며, 그 내용은 가정에서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규명해 준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여 하루에 두 번씩 암송하도록 되어있는 ‘쉐마’는, 이스라엘의 의식구조와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앙고백문이다. ‘쉐마’를 정기적으로 암송하는 관습이 구약시대부터 정착되어 있었다.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이 말씀을 강론하라”(신 6:6-7)를 본문 낭독의 명령으로 이해하였고, 신명기 6장 7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이든지”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아침과 저녁에 한 차례씩 ‘쉐마’를 암송하는 제도로 삼았다.
바벨론 탈무드에 의하면, 유대인 남자 아이가 태어나 말을 시작할 때에, 부모들은 가장 먼저 ‘쉐마’의 첫 절인 신명기 6장 4절을 가르치도록 규정되어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주후 2세기 랍비였던 아키바가, 로마군에 의하여 처형당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쉐마’를 암송하였다. 그런 전례를 따라, 다른 순교자들도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쉐마’를 암송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 직전의 모든 유대인들이, 자신의 마지막 신앙고백으로 ‘쉐마’를 암송하는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결국 ‘쉐마’는 유대인들은 태어나 제일 먼저 배우는 신앙고백이면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암송하는 신앙고백인 셈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만큼이나 긴 전통을 지닌 ‘쉐마’는,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지킨 신앙의 기본 핵심이다. 전체가 5,845절로 이루어진 모세오경 중에서 ‘쉐마’의 첫 절인 신명기 6장 4절이 구약 전체의 요지(keynote)이며, 신명기서 전체가 쉐마의 핵심인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는 명령의 해석서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쉐마’는 이스라엘 신앙의 요체이며, 다른 모든 것은 이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신명기 6장 4절의 중요성 때문에, 히브리어 마소라 성경은 이 절의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의 끝 알파벳을 다른 글자보다 크게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관습은 이 절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면서, 이 절을 보다 더 정확하게 읽어야 함을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큰 글자로 쓰인 두 알파벳을 합치면 히브리어 ‘에드’가 되는데, 이는 ‘증인’이라는 뜻이다. 곧 ‘쉐마’를 암송함으로, 하나님의 유일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모든 계명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묻는 서기관에게, ‘쉐마’의 첫 부분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답변을 대신하셨다(막 12:28-34; 마 22:34-40). 비록 크고 첫째 되는 계명 속에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추가하긴 했지만, 예수의 답변은 당시 유대인들이 지켜오고 있던 ‘쉐마’의 중요성을 그대로 인정하심을 보여준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확신을 가지고 믿어야 한다
사도바울의 가르침에 소위 믿음장이라고 말하는 히브리서를 인용하면;
히브리서 11장 1,2절을 보십시오.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장을 시작하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NIV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요,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증거란 말입니다. KJV성경도 ”substance" "evidence"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말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실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훈련하실 때에도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은 자식 한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로 빚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라도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브라함에게 원한 것은 그의 내면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요, 그의 내면에 열국의 아비로서의 내면성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내면에 믿음과 열국의 아비로서의 내면성이 생겼을 때 약속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셨습니다. 마리아에게 부활신앙을 심으시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임을 가르쳐주는 가장 명백한 가르침은 예수님이 생의 마지막 주간 예루살렘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으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워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믿음이 바라는 것의 실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을 바다에 던지우라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그것이 실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으면 그대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체라는 말씀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애 내내 제자들을 훈련하셨는데 그 목표는 제자들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산을 옮기는데 도전하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산을 옮기는 사람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음으로 기도응답을 받는 믿음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망을 크게 가지면 절망도 크기 때문에 소망을 크게 가지지 않는다고 자랑을 합니다. 하지만 믿음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것이며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산을 옮기기를 바라는 것이며, 인간적으로 도무지 이룰 수 없는 일들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원래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 사람은 반드시 믿음으로 산을 옮긴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 하루를 살아도 단 한 순간을 살아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을 소망하며 그 소망을 실체로서 이루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3. 본문의 신약인용(마22:34~46)
34~40절은 가장 큰 계명이 어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묻는 말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마디로 간단히 대답하십니다.
여기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명기 6:5절의 인용입니다. 이 구절은 유대교의 근본 신조였던 ‘쉐마’의 일부였는데 이스라엘의 아이들이 제일 먼저 외는 문구가 바로 쉐마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 19:18의 인용입니다.
결론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시19:1~14 09.06.11. 성목사님 설교녹취/정리
◑1.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레마의 말씀> 을 듣는 것
▲오늘도 땅 끝까지 증거 되는 하나님의 말씀
말씀에 마치 바퀴라도 달린 듯 (‘발통’이란 말이 더 실감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온 세계로 쉬지 않고 전파된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는’ 것이다.
시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 시편19편을,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대로 인용한다.
롬10:18, 그러나 내가 말하였노니 저희가 듣지 아나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구슬이 세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이
약방의 감초처럼 흔해 빠져도, 약탕간에 들어가야 감초가 단맛을 내듯이
그 흔하게, 땅 끝까지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그것이 아무리 많아도
→내 귀에 그것이 '들려져야' 보배가 된다.
내 마음 판에, 잘 박힌 못처럼 콱 박혀져야.. 그 말씀이 내게 보배가 된다.
그 사실을 아래 구절이 설명하고 있는데...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오늘날 교회는, 이 구절을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 라고 이해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저는, 그저 ‘성경 많이 읽으세요’ 정도로 이해하면 안 된다고 본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의 본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판과 내 귀에 특별히 와서 콱 박히는 것>을 뜻한다.
즉, 소위 말하는 '레마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야 믿음이 생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다.
평소에는 그저 그렇게 예사스럽게 들리던 그 말씀이
어느 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정말 쉽게 잊혀지지 않는 말씀으로
즉 하나님이 내게 개인적으로 특별히 주시는 말씀으로 콱 박힐 때가 있다.
바로 그 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는 말씀이 제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소위 그런 ‘레마의 말씀’을 많이/자주/종종 받아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라는 말씀처럼
내게 믿음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저 녹음기 틀어놓듯이 하나님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는 말씀이.. 글쎄, 잘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형식적이라도 말씀을 듣다가, 어느 날 말씀이 콱 박히게 되겠지만...
롬10:18, 그러나 내가 말하였노니 저희가 듣지 아나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레마의 말씀’처럼, 그들의 마음 판에 콱 박히는 말씀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레마의 말씀’이란 표현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지만,
맞다면 맞을 수도 있고, 틀리다면 틀릴 수도 있는 표현이다.
다만 별다른 대체할 만한 뾰족한 말을 찾지 못하기에, 그냥 ‘레마의 말씀’으로 쓴다.
헬라어에 '말씀'에 해당하는 단어 중에 레마와 로고스가 있는데, 성경은 둘을 혼용한다.
그 말씀 구절들을 일일이 살펴 보면,
'레마'라고 쓴 말씀의 대부분 (80%)는 <개인적, 주관적으로 주어진 말씀> 즉, 오늘날의 레마의 말씀이고,
'로고스'라고 쓴 말씀의 대부분 (80%)은 <그냥 객관적인, 말 또는 말씀>인 것이다.
'레마의 말씀'이란 용어 자체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 20%의 혼용하는 예외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고,
'레마의 말씀'이란 용어가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약에 나오는 '레마'의 80%의 용례가
개인적/주관적(소위 레마의 말씀)인 용례로 쓰이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말씀을 정리하면 이런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많이 듣는다고.. 다 자기에게 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이 마치 자기에게 ‘레마의 말씀’처럼 ‘특별히 들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말씀을 통해, 내가 진정한 믿음을 세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레마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사실을 알면,
우리가 말씀을 듣거나, 설교를 들을 때.. 더욱 예민해지게 된다.
그저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그저 설교를 듣거나 하지 않고,
그 중에서 ‘내게 주시는 말씀’(레마의 말씀)을 받으려고.. 내가 예민하게 깨어있게 되고,
내가 평소에 기도할 때에도 ‘그것을 주십사고 사모’하게 된다...
◑2.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믿음을 통해서.. 레마의 말씀이 들린다>
▲다윗은 어떻게 그 아름다운 시편들을 쓰게 되었을까?
시편을 읽어보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데...
그 때 당시에, 성경은 모세오경 밖에 없었다.
다윗이 혹시 모세오경을 읽고서, 마음에 큰 은혜와 감동을 받고서,
이런 주옥같은 시편들을 지었을까? (시편 150편중 2/3가 다윗의 저작)
그런데 시편에, 모세오경에서 인용된 구절들은.. 뚜렷하게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다.
다윗이 모세오경을 읽었겠지만,
그 내용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거나 재해석해서 시편을 짓지 않았다.
다윗의 시편은 거의가, 다윗의 독창적인 창작품들이다.
다윗은 전혀 독자적인 영성과 독자적인 표현으로
아름다운 시편을 약 1백편 가까이 지었다.
▲여러분, 지금 사도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편지한다.
그런데 그것을 인용한 구절이 시19:3~4절이다.
여러분, 만약에 제가 사도바울이라면, 만약에 제가 로마서를 쓰고 있다면,
로마교인들에게 '믿음'을 설명할 때
시19:2~4절이 아니라, 시19:7~11절을 인용했을 것이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이렇게 ‘계명’(시19:7~9)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로마교인들이 믿음을 가지라고 소개할 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편지하면서,
그러나 내가 말하였노니 저희가 듣지 아나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롬10:18
라는 시19:2~4절을 인용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위에 복잡한 설명은 몰라도 된다.)
사도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여러분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들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이미 땅 끝까지 이르러 있다’는 것이다. 롬10:18, 시19:2~4
여러분 중에 만약 지금 누가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아직 말씀/복음을 못 들어서가 아니라 (그것은 이미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여러분이 그것을 소위 ‘레마의 말씀’으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이 많이 귀에 들리지만,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앗과 같이.. 물거품이 사라져 없어져 버리듯이
그 들리는 소리를... 아무 소용없이 그 말씀들이 다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는도다 시19:3~4
‘소리’는 히브리어로 ‘카브’인데 ‘선 line’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연결선/라인’이 생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여러분 지금 이 예배실안에도
‘들리는 (외부의) 소리는 없지만’ 사실은 이 방 안에도 ‘소리’들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라디오(트랜지스터)를 틀어보면
‘삐오삐오, 두두두’ 하는 무전 소리로부터
일본방송, 중국방송, 여러 개의 한국방송, 러시아 방송까지 다 잡힌다.
들리는 소리가 없지만, 지금 이 예배실 안에도, 사실은 소리로 가득 찬 것이다.
여기서 ‘믿음’을 트랜지스터에 비유해 본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있고, 그것이 세상에 가득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고, (믿음의 트랜지스터를 가진 사람)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소리’ - 여기서는 레마의 말씀
다윗이 주옥같은 시편을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속에 ‘믿음의 트랜지스터’가 있어서
날이 날에게, 밤이 밤에게 전하는 소리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 들을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음성/말씀들을
그는 잡아낼 수 있었다. 들을 수 있었던 귀를 가졌던 것이다.
▲마치는 말: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왜 내 귀에, 하늘과 궁창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음성을 듣지 못하는가?
‘내 믿음의 라디오’를 점검 받아야 한다.
그 ‘믿음의 라디오’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은, 오늘도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도다. 롬10:17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나이다.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다윗은, 믿음의 라디오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시편을 썼던 것이다.
오늘 우리도, 다윗처럼, 믿음을 갖고서,
온 천지에 가득 찬 하나님의 말씀을 ‘레마의 말씀’으로 받게 되기를 바란다.
◑3.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가장 전통적인 해석 (그냥 참고하세요)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해 왔다.
하나님의 말씀/ 일반은총/ 하나님의 존재의식 등은
날이 날에게, 밤이 밤에게 소식을 전하듯이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저절로, 자동적으로 온 세상에 전파되어진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렇게 말씀한다.
롬10:18, 그러나 내가 말하였노니 저희가 듣지 아나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선교사가 그 지역에 이르기도 전에,
사람들의 마음에, 벌써 하나님의 신존재에 대한 본능적 인식이 있고,
복음이 그 사람에게 전파되기 전에도,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해 알고/믿고/사모하고 싶은 마음’이 사전에 형성되어 있다.(일반은총)
그런데 선교사가 가는 것은,
이미 준비되어진 밭을, 알곡을.. 추수하러 가는 것이다.
이런 예가 적절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공중에서 공군을 통해서 이미 승리하신 것을
육군 보병인 선교사가 직접 가서 점령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선교적 관점에서 위 구절을 이렇게 해석해 왔다. 이런 해석도 맞다. ▣ 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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