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道德經) 8장
상선약수(上善若水)
수선이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
고기어도(故幾於道)
거선지(居善地)
심선연(心善淵)
여선인(與善仁)
언선신(言善信)
정선치(正善治)
사선능(事善能)
동선시(動善時)
부유부쟁(夫唯不爭) 고무우(故無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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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선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의 선함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머물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함을 좋게 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물처럼 어짊을 좋게 하고,
말할 때는 물처럼 믿음을 좋게 하고,
다스릴 때는 물처럼 바르게 하고,
일할 때는 물처럼 능하게 하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때를 좋게 하라.
그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
노자의 도덕경 8장을 인간이 가져야 할 올바른 덕목으로서, 수유칠덕(水有七德)이라는 내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첫째, 겸손(謙遜)이다.
물은 욕심이 없다. 물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찾아 흐른다.
이 땅의 모든 생명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을 때, 물은 자신을 낮추고 낮춰서 낮은 곳으로만 찾아흐르니 이를 겸손이라 한다.
둘째, 지혜(智慧)이다.
물은 다투지 않는다. 흐르다가 막히면 곧장 돌아간다.
오늘날 자신을 거스른다는 이유만으로 묻지마 폭행,
살인을 일삼고 있을 때 물은 폭력보다는 양보의 미덕으로 돌아갈 줄 아니 이를 지혜라고 한다.
셋째, 포용력(包容力)이다.
물은 무엇이든지 다 받아 준다.
깨끗한 것이거나 지저분한 것이거나 모두 다 받아준다.
오죽하면 다 받아준다는 의미로 큰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고 할까? 이것이 곧 포용력이다.
넷째, 융통성(融通性)이다.
물은 담기는 그릇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에 맞는 예쁘고 아름다운 그릇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그릇이나 깨진 그릇에도 서슴없이 담기니, 이를 곧 융통성이라 한다.
다섯째, 인내(忍耐)이다.
물은 끈기와 인내로 지칠 줄을 모른다.
인위적으로 물길을 막지 않으면 끊임없이 흐른다.
물길을 따라 흐르고 떨어지는 낙수는 단단한 바위도 뚫는다.
하루 아침에 뚫는 것이 아니라 오랜시간 끈기를 가지고
결국 단단한 바위를 뚫어 내니 이를 인내라 한다.
여섯째, 용기(勇氣)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겸손을 가졌다.
낮은 곳을 찾아 흐르다보면 때로는 장엄한 폭포에서 자신을 투신해 작은 물방울로 부서지는 아픔을 참는다. 이를 용기라 한다.
칠곱번째, 대의(大義)이다.
작은 물줄기가 부서지고 깨지는 긴 여정을 견뎌 큰 강을 이루고 바다에 모이니 이를 대의라 한다.
위의 내용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내용을 비슷하게 해석을 해왔고 현실에 적용을 해오면서 인간의 덕목으로서 가장
중요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간추려 낸 것들이고,
그것이 이미 널리 알려진 것들이라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선한 삶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다
그 이유는 물의 성격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며 다투지도 않고 언제나 남들이 가장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바로 물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 물은 아래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자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법도 없습니다. 물은 네모난 곳에 들어가면 네모난 모양을 하고, 동그란 곳에 들어가면 동그란 모양을 띱니다. 결코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 주변의 것과 다투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래로 흘러가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다른 것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 바로 물이 지닌 본성이라는 것이지요.
-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씀
마태복음 23:1-12 -자신을 낮추는 영성
기독교 신앙의 핵심도 이러한 물의 성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은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낮아지는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물이 흐르지 아니하고 거기에 멈추어 있으면 아무 것에도 이로움을 주지 못하는 죽음의 늪일 뿐입니다. 하지만 물이 아래로 스스로를 낮추어 흘러가면 살아있는 물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들을 살리는 생명수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를 낮추어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는 사람은 높아진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라는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의 의미를 살펴 보면 보다 명확하게 납득이 가게 됩니다. 높인다는 말의 헬라어 “읍사오ὑψόω”의 뜻은 바로 찬양과 칭송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낮아져서 겸손한 자만이 진정으로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낮추는 자만이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혼자 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얻을 수 없는 타인으로부터의 감사와 경의를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 Strong's Greek - ὑψόω”-
Strong's Greek: 5312. ὑψόω (hupsoó) -- to lift or raise up ...
... Strong's Concordance. hupsoó: to lift or raise up, to exalt, uplift. Original Word: ὑψόω Part of Speech: Verb Transliteration: hupsoó Phonetic Spelling ... //biblehub.com/str/greek/5312.htm - 31k |
Strong's Greek: 5313. ὕψωμα (hupsóma) -- height, that which ...
... Thayer's Greek Lexicon. STRONGS NT 5313: ὕψωμα ὕψωμα, ὑψωματος, τό (ὑψόω), thing elevated, height: properly, of space, opposed to ... //biblehub.com/str/greek/5313.htm - 11k |
Strong's Concordance hupsoó: to lift or raise up, to exalt, uplift Original Word: ὑψόωPart of Speech: Verb Transliteration: hupsoó Phonetic Spelling: (hoop-so'-o) Definition: to lift or raise up, to exalt, uplift Usage: (a) I raise on high, lift up, (b) I exalt, set on high. HELPS Word-studies 5312 hypsóō (from 5311 /hýpsos, "height") – properly, raise high (elevate), exalt. NAS Exhaustive Concordance Word Originfrom hupsos Definition to lift or raise up, to exalt, uplift NASB Translation exalt (2), exalted (9), exalts (3), lift (1), lifted (4), made...great (1). Thayer's Greek Lexicon STRONGS NT 5312: ὑψόωὑψόω, ὑψῶ; future ὑψώσω; 1 aorist ὕψωσα; passive, 1 aorist ὑψωθην; 1 future ὑψωθήσομαι; (ὕψος); (Batr. 81; Hippocrates, others); the Sept. very often for רוּם, also for גָּבַהּ, נָשָׂא, גָּדַל, etc.; to lift up on high, to exalt, (Vulg.exalto): τινα or τί, properly, of place, John 3:14{a}; used of the elevation of Jesus on the cross, John 3:14{b}; Strong's Exhaustive Concordance exalt, lift up. From hupsos; to elevate (literally or figuratively) -- exalt, lift up. see GREEK hupsos Forms and Transliterations υψοί ύψου υψούνται υψούσθωσαν υψούται υψούτε υψωθεις υψωθείς ὑψωθεὶς υψωθείσα υψωθή υψώθη υψωθηναι υψωθήναι ὑψωθῆναι υψωθής υψώθης υψώθησαν υψωθησεται υψωθήσεται ὑψωθήσεται υψωθηση ὑψωθήσῃ υψωθήσομαι υψωθήσονται υψωθητε υψωθήτε ὑψωθῆτε υψώθητι υψωθήτω υψωθω υψωθώ ὑψωθῶ υψωθώσι υψωθώσιν υψωμένος υψων υψών ὑψῶν ύψωσα ύψωσά υψώσαι υψώσαί ύψωσαν ύψωσας ύψωσάς υψώσατε ύψωσατε υψωσάτωσαν ύψωσε ύψωσέ υψωσει υψώσει ὑψώσει υψώσεις υψωσεν ύψωσεν ὕψωσεν υψωση υψώση ὑψώσῃ υψώσης υψωσητε υψώσητε ὑψώσητε ύψωσον υψώσουσιν υψώσω υψώσωμεν hypson hypsôn hypsōn hypsō̂n hypsose hypsōsē hypsosei hypsōsei hypsṓsei hypsṓsēi hypsosen hypsōsen hýpsosen hýpsōsen hypsosete hypsōsēte hypsṓsete hypsṓsēte hypsotheis hypsotheìs hypsōtheis hypsōtheìs hypsothenai hypsothênai hypsōthēnai hypsōthē̂nai hypsothese hypsōthēsē hypsothḗsei hypsōthḗsēi hypsothesetai hypsothḗsetai hypsōthēsetai hypsōthḗsetai hypsothete hypsothête hypsōthēte hypsōthē̂te hypsotho hypsothô hypsōthō hypsōthō̂ upson upsōn upsose upsōsē upsosei upsōsei upsosen upsōsen upsosete upsōsēte upsotheis upsōtheis upsothenai upsōthēnai upsothese upsōthēsē upsothesetai upsōthēsetai upsothete upsōthēte upsotho upsōthōLinks Interlinear Greek • Interlinear Hebrew • Strong's Numbers • Englishman's Greek Concordance • Englishman's Hebrew Concordance • Parallel TextsEnglishman's Concordance Matthew 11:23 V-FIP-2S GRK: ἕως οὐρανοῦ ὑψωθήσῃ ἕως ᾅδου NAS: And you, Capernaum, will not be exalted to heaven, KJV: which art exalted unto INT: to heaven have been lifted up to Hades Matthew 23:12 V-FIA-3S Matthew 23:12 V-FIP-3S Luke 1:52 V-AIA-3S Luke 10:15 V-FIP-2S Luke 14:11 V-PPA-NMS Luke 14:11 V-FIP-3S Luke 18:14 V-PPA-NMS Luke 18:14 V-FIP-3S John 3:14 V-AIA-3S John 3:14 V-ANP John 8:28 V-ASA-2P John 12:32 V-ASP-1S John 12:34 V-ANP Acts 2:33 V-APP-NMS Acts 5:31 V-AIA-3S Acts 13:17 V-AIA-3S 2 Corinthians 11:7 V-ASP-2P James 4:10 V-FIA-3S 1 Peter 5:6 V-ASA-3S Strong's Greek 5312 |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를 낮춘다는 말의 신앙적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이에 대한 몇가지 단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율법을 신봉하는 유대교의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하시면서 영적인 낮아짐의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율법학자나 바리새인은 율법을 수호할 뿐만 아니라 실제 삶으로도 실천하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자리’(2절)에 앉았다고 하실 만큼 그들이 율법과 매우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에 대한 그들의 언행이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분부하셨던 겁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행실이 위선적이라는 점을 예수님은 지적하고 계셨던 셈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매우 구체적으로 예시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4절의 내용은 그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묘사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나름대로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여러가지로 쏟았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렴 손하나 까딱하지 않았겠습니까? 문제는 율법이 행하라고 하는 것을 아무 것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어찌됐든 그들은 신앙과 관련된 일을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직업 종교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목사나 신부 혹은 승려와 같은 입장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과는 구별되는 것이라 여기는 종교적인 생활을 삶의 방편으로도 삼고 사는 이들입니다. 저도 목사로 살아가면서 물론 힘이 드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늘 감사의 조건이라 여겨지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업으로 삼고 산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예배하고 말씀을 읽고 기도생활 하는 것이 매우 당연한 삶의 일상(routine)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율법과 관련된 일체의 모든 활동이 그들의 삶의 전부라고 해도 틀리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매일의 일과처럼 되었다고 해서, 다른 이들도 똑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자신의 상황에 그대로 껴 맞추어 적용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육상 선수가 매일 자신의 훈련 스케줄을 일반인에게 요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몸에도 좋을 수 있고, 특정한 부분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요. 그렇다고 자신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신의 기준으로 무조건 비판하고 문제를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지나친 요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 율법의 지나친 강조와 요구가 대다수 일반 대중들에게는 커다란 짐이 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아시고 예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언급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율법의 지나친 요구가 얼마나 사람들의 심신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며 당시 힘들어 하는 이들을 위로해 주셨던 겁니다. 반면에 율법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율법에 대한 강조를 통해 자신들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또 그렇게 해야만 성전의 세력이 더 강화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지금도 소위 성장하는 교회들 중에서 말씀이나 교리에 대해 엄격하게 적용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오히려 강력한 신앙의 규제가 개인의 믿음은 물론이고 교회의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입장입니다.
오래 전 부흥사로 잘 알려진 어떤 목사님이 어떻게 해야 집회에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성도들을 말씀으로 조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신앙을 흔들림없이 유지하려면 그렇게 이따금씩 조져야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맞으며 크는 것에 익숙했던 세대에게는 아주 이상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요즘도 가끔씩 그분이 말씀을 전할 때 그 집회에 참석한 많은 성도들이 크게 열광하는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라는 단어가 문득 생각이 나곤 합니다. 그 분의 말씀대로 한쪽에서 조지면 감탄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마치 신앙의 비뚤어진 자학증세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경건한 신앙을 흔히 말하듯 얌전하고 근엄한 모습이라고 규정하여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율법학자나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은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이러한 모습에 더 가까웠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몸을 주체하지 못해 기뻐 춤추는 모습을 적어도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다윗이 말씀의 궤를 되찾고 기뻐 춤추는 모습을 사람들이 한마디로 왕의 채신머리가 없다고 혀를 차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박수 치며 몸을 흔들고 찬양하는 모습이 영 불편한 분들도 적지 않으실 겁니다. 예수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의 위선을 지적하신 부분도 이처럼 보여지는 외면적 신앙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신앙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비판하고, 자신의 방식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려는 태도인 것이지요. 이렇게 남의 잘못을 지적하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은 무조건 옳다는 위선적인 착각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높이는 모습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할만한 증거를 본문 5절의 말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경건한 체 한다고 지적하시면서 그들의 위선에 대해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문적인 직업훈련을 받고 매일 반복하며 사는 사람을 따라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찬송하며 말씀에 대한 이해도 상대적으로 잘 훈련되었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행위는 목적이 왜곡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도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통해 다른 사람 보다 위에 서고자 하는 과시와 욕심을 이루는 것 밖에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경건한 신앙을 순수한 믿음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니 그 자체로 위선적이라 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마음도 없이 그저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을 통해 그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욕심일 뿐이라는 겁니다. 예수께서 당시 유대의 경건한 종교 지도자들을 위선적이라고 보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력이 있는 물은 위에서 아래로 계속해서 흐릅니다. 위로 오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내려 갈수록 생명의 힘은 커지기 마련입니다. 비록 흐르기 위해서는 높낮이가 어쩔 수 없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흘러가기 위한 요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회나 교회에서 필요한 위계 구조는 어떤 목적을 위한 요건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수단이지 그것이 목적일 수 없다는 겁니다. 그저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오르려고 사는 것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함께 나누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정치가가 된다는 것은 남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그들을 대변하여 봉사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목회자나 평신도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교회의 윗자리를 차지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섬김을 통해 솔선수범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스스로를 낮추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대개가 자신을 낮추면 짓밟히는 기분을 안고 사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낮추어 살면 나중에라도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도 그런 뜻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아지는 것 자체가 바로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하나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낮아지는 것은 누구를 의식하고 행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주님과 하나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낮추셨던 주님의 길에 우리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지금 낮아짐의 영성을 다시 회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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