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w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법』
글 권혁철(자유경제원 전략실장)
Frederic Bastiat(1801~1850)
프랑스의 고전경제학자로 자유무역과 시장경제를 강조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일찍 여의고 지병 때문에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했다. 장려하던 사업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결혼생활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1830년 혁명의 와중에서 지방판사, 지방의회 의원으로 일하며, 끈질긴 기고 끝에 처음 채택된 ‘양초업자의 탄원서 풍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 후, 제헌·입법의원, 평론가로 일을 하면서 재정축소와 자유무역 확대에 매진했으나 지병이 도져 49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바스티아는 권리이론, 조화이론을 개발해 재산권과 시장경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 틀을 제공했고, 간섭주의 이론을 개발해 정부간섭의 근본적 문제를 파헤쳤다.
어떤 책인가
태양을 막아주세요!
1840년대 어느 날, 프랑스 양초제조협회 등 조명관련업자들이 의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한다.
“존경하는 의원님들께. 우리 양초제조업자들은 값싸고 질 좋은 조명기구를 만드는 외국 업자와의 불공정한 경쟁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이 경쟁자가 나타나는 순간 우리 제품의 판매는 중단되고, 모든 소비자가 이 경쟁자에게 모여듭니다. 빛을 생산함에 있어 그 경쟁자는 우리보다 우월한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처럼 저렴한 가격으로 우리나라의 전체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 경쟁상대는 다름 아닌 태양입니다.
태양의 자연광(自然光)을 차단해 인공조명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게 되면 프랑스에서 수많은 산업이 발달하게 될 것입니다. 양초산업이 살면 유지(油脂)를 제공하는 소와 양이 더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목장, 육류, 모직, 가죽, 비료를 비롯한 농업자원이 늘어날 것입니다. 항해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천 척의 배들이 고래를 잡으러 떠날 것이고, 머지않아 우리는 프랑스의 명예를 지킬 수 있고 청원인들의 애국적 자존심에 부응할 수 있는 해군을 갖게 될 것입니다. 파리의 상점들은 또 어떻겠습니까? 샹들리에, 램프, 천정등, 촛대의 금장식, 구리, 크리스털이 넓은 상점에서 반짝일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신다면 우리 조명업자들의 청원으로 생활조건이 개선되지 않는 프랑스 국민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불공정한 상황을 시정할 법을 하나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탄원은 우리 국민 모두가 낮에는 모든 창문들과 모든 틈새들을 막고 커튼을 쳐서 햇빛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하는 법률을 제정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부디 햇빛을 차단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양초업자 일동.”
물론 이 청원은 실제로 의회에 제출되었던 청원은 아니다. 19세기 당시 프랑스에서 기승을 부리던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비판을 하고자 청원서 형식으로 쓴 글로서, 이 글을 쓴 사람은 프레데릭 바스티아(Frederic Bastiat)다.
바스티아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바스티아는 ‘19세기 가장 위대한 경제자유의 챔피언’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강원대학교 민경국 교수의 말에 따르면, 바스티아는 멩거·미제스·하이에크 등을 주축으로 하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적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화폐는 자유로운 진화의 결과라는 인식, 가치는 주관적이며 자발적인 교환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가치이론, 가격통제와 정부개입의 무능, 시장은 수많은 시장 참여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라는 견해 등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적 핵심은 바스티아에서 비롯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 『법』(김정호 역, 자유기업센터, 1997)은 미국경제교육재단(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에서 영문판으로 출판한 『Selected Essays on Political Economy』의 제1장에서 제5장까지를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서 바스티아의 최대 관심은 정부와 정치권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억제하여 경제자유를 보호하는 논리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자유시장은 번영의 발판이고, 평화의 초석이며,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사회통합을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그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가 생명과 재산과 자유에 대한 권리이며, 법은 이 권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런 기능을 해야 하는 법이 타락하여 누군가에게 빼앗아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면, 투쟁이 만연하고 결국 사회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또한 그는 이 책에서 눈앞의 즉각적인 현상만을 바라보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나타나는 이익이나 손해를 바라보지 못하는 정치가들이나 학자들을 특유의 재기 넘치는 사례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들 논리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바스티아는 누구인가
이 부분은 Jim Powell이 쓴 『Frederic Bastiat, Ingenious Champion for Liberty and Peace』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바스티아는 가장 탁월한 경제적 자유와 국제평화 수호자 중 한 사람이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던 하이에크(Hayek)는 바스티아를 일컬어 천재적인 경제평론가라고 했으며, 위대한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미제스(Mises)는 바스티아의 저작들을 불후의 명작이라고 평했다. 베스트셀러 경제학 서적 『경제학 1교시』를 출간한 해즐릿(Hazlitt)은 바스티아의 비상한 통찰력에 감탄했다. 머레이 로스바드(M. Rothbard)는 이렇게 말했다. “바스티아는 탁월한 학자였다. 그가 써낸 재기에 넘치는 글들은 모든 형태의 보호무역주의, 정부개입이나 지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논리로 남아 있다. 그는 진정 재기 있고 자유로운 자유시장의 수호자였다.”
바스티아는 1801년 6월 30일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항구 베이요느(Bayonne)에서 태어났다. 베이요느는 조용한 중세풍의 전원지역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소외된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금융업을 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수출도 하고 있었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잃고, 2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잃은 바스티아는 삼촌과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란다.
베이요느에서 학교를 다닌 바스티아는 소레제에 있는 베네딕틴 대학으로 진학한다. 이 학교는 영국, 그리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폴란드, 스페인, 미국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는 여기서 영어와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익혔으며, 문학과 철학을 배우고 첼로(Violoncello)를 연주했다.
17세 되던 해에 바스티아는 소레조를 떠나 아버지가 근무했던 회사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는 상업 자체보다는 상업이 사람들을 문명화시키는 과정이라든가, 법이 사람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현상들에 관심을 쏟았다. 예를 들어 1816년 새로운 관세법이 시행된 결과 베이요느 일대의 창고들이 텅텅 비고 항구는 한산해지는 것을 목격했다. 또 1819년 정부가 옥수수, 고기와 설탕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자 가난한 사람들이 쓸데없이 값비싸진 식량으로 고초를 겪는 것도 목격한다. 영국과 스위스의 목화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자 대대적인 밀수가 행해지는 것도 보았다. 이러한 구체적 경험들은 무역규제 등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에 반대하고 자유시장경제를 주창하게 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1824년 바스티아는 파리로 가고 싶어 했으나 가족 농장이 있는 무그론(Mugron) 근처의 작은 동네에서 살 것을 바라는 할아버지의 청을 받아들여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나는 내가 야심차게 하고 싶었던 것들을 미뤄놓고 외로운 공부를 계속했다.” 그곳에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과 씨름하면서 보냈다.
그러던 중 이웃에 사는 코르도이와 사귀게 된다. 변호사였던 코르도이도 책 읽는 것을 즐겨, 두 사람은 읽은 책들을 교환하기도 하고 토론도 즐겼다. 당초 루소를 추종하는 사회주의자였던 코르도이는 이 과정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자로 전향하게 되고, 이 두 사람의 끈끈한 우정은 이후 20년간이나 지속된다.
1830년경 결혼을 했으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전기 작가 루이스 보댕(Baudin)에 따르면, 바스티아는 Marie Hiard와 결혼하지만, 무슨 일인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신부를 교회에 혼자 남겨두고 떠나버리고는 평생을 독신과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어찌되었든 둘 사이에 아들 하나는 태어났으며, 그의 부인은 계속해서 친정식구들과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30년 7월 26일 샤를 10세는 언론자유를 폐지하고 프랑스 상공회의소를 해산했으며, 중산층의 투표권을 박탈하고는 귀족들만으로 의회를 재구성하여 절대왕정을 복구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혁명을 유발했고, 샤를 10세는 물러났다. 이즈음 바스티아는 작은 직책이지만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1830년 혁명 직후 그는 무그론(Mugron)의 평화판사로 임명되었고, 란데스(Landes) 지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된다. 한편,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면서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무역 규제의 어리석음을 또 목격하게 된다.
그에게 학문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프랑스와 유럽에 자유시장경제의 이념을 소생시킨 세이(Jean Baptiste Say)였다. 바스티아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이의 『정치경제학 개론Traité d’économie politique』을 읽었으며, 아주 훌륭한 책이라 쓰고 있다. 공화주의자로서 세이는 사유재산과 자유기업, 개인의 주도권이 번영의 기초임을 역설하였다. 또 세이는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을 부인하고 그 대신 가치는 소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기업가의 창조적 역할을 인식했으며, 또 인구의 증가가 식량생산 능력을 초과할 것을 두려워했던 영국의 음울한 비관주의 경제학자인 맬더스의 의견에 반대했다. 세이는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지속적인 번영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바스티아는 수차례 「Journal des économistes」의 편집인들에게 자신의 글을 보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 그러다 마침내 1844년 9월 그의 첫 번째 논문이 게재되었다.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프랑스와 영국 모두에게 안 좋은 것이라는 내용의 논문이었는데, 이 논문은 선풍적인 반응을 몰고 온다. 생시몽주의자였던 당시의 유명한 경제학 교수 세발리에까지도 이 논문을 읽은 후 자유무역주의자로 전향했다고 밝힐 정도였다.
한편 바스티아는 이즈음 평생의 동지라 할 수 있는 영국 자유무역의 선구자 코브덴(Richard Cobden)을 만나 우정과 동지애를 쌓는다. 그는 런던의 신문들을 읽으면서 방적기업을 운영하는 코브덴과 존 브라이트가 반곡물법 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는 전율을 느낀다. 흥미를 느낀 바스티아는 영국 해협을 건너 코브덴을 만나러 갔는데, 이 사실을 모르던 코브덴은 막 맨체스터로 여정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바스티아는 부랴부랴 코브덴의 집으로 달려갔고, 그들은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장시간 대화를 했다. 그리고 반곡물법 운동 본부를 방문하고 활동상황 등을 경청했다. 코브덴의 간청에 따라 며칠 더 머무르면서 여러 경험을 한 바스티아는 코브덴의 인격과 지도력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운동은 영국 의회가 1846년 곡물 관세를 철폐하는 법을 통과시킴으로써 그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게 된다. 이 법은 상호주의에 기반한 기존의 전통적 관세협상으로부터의 작별을 뜻한다. 코브덴과 브라이트는 프랑스를 포함한 그 어떤 나라로부터의 양보나 용인을 구할 필요도 없이 곡물에 대한 관세를 일방적으로 제거할 것을 의회에 요청했다. 그들은 비록 상대국이 자신들의 문을 닫아 걸더라도 자유무역이 영국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며, 특히 값싼 식량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는 점을 설득했다. 나아가 그들은 자유무역은 국제적인 평화에도 기여한다는 점을 설득했다.
바스티아는 보호무역주의의 실패를 공격하는 글들을 계속 발표했다. 예를 들어 그는 관세가 높은 생활수준을 의미한다는 주장, 노동절약적 기계화가 일자리를 파괴한다는 주장, 경제적 독립과 국가의 안전을 위해 관세가 필요하다는 주장 등의 잘못과 허구성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특징적인 것은 그가 모든 것을 소비자의 관점에서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는 경제를 보는 시각을 생산에서 소비로 바꾼 최초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글들은 명료하고, 드라마틱하고, 통찰력이 있으며, 종종 재미있는 풍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이런 글 22편을 모아 1845년에 『Economic Sophisms』를 출간했다. 다른 17편의 글을 모은 제2권은 3년 후인 1848년에 출간됐다. 이 책들은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다.
1845년 후반 바스티아는 프랑스와 벨기에 간의 관세연합을 주창하는 보르도 자유무역협회의 창립에 관여한다. 그는 보르도신문에 글을 쓰고 연설을 하면서 프랑스가 관세연합에서 머물지 말고 전 세계 모든 사람들과의 자유무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여세를 몰아 그는 1846년 5월 프랑스자유무역협회를 창립한다.
1848년 2월 시민들이 부패한 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군인들이 공화주의자들을 사살하는 일이 발생하고 왕은 퇴위하기에 이른다. 급기야 프랑스 하원은 프랑스가 왕정을 포기하고 공화국임을 선언한다. 같은 해 4월 바스티아는 보통선거에 의해서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지만, 같은 해 5월 국영 작업장의 근로자들이 의사당을 점령하고 의원들을 쫓아내는 사건이 발생한다. 제헌의회는 계엄령을 내리고 약 2만 명에 달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이들과 군대와의 충돌로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1만1천여 명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1849년 제헌의회는 입법의회에 그 역할을 넘겨준다. 바스티아도 다시 입법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정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된다. 여기서도 그는 정부 지출의 삭감과 낮은 조세, 그리고 자유무역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나간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의 무지와 편협한 이기주의로 인해 그의 주장은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1850년 무그론으로 돌아온 바스티아는 그의 빛나는 저작 중 하나인 『법』(이 책의 제2장)을 집필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이 법이 있기 때문에 개성과 자유, 재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인간이 법을 만들기 이전에 이미 개성과 자유, 재산은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합법적 약탈’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여기서 ‘합법적 약탈’이란 법이 정치적으로 연계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러한 법들이 어떻게 사적 생활을 정치화시키는지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1850년 8월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바스티아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이탈리아 로마로 휴양을 떠나지만, 글씨조차 쓸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마침내 1850년 12월 24일 바스티아는 다음의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la vérité! (the truth, 진리)”
법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면 우월한 경쟁력을 갖춘 외국산 농산물의 수입으로 인해 국내 농가는 초토화된다고 한다. 우월한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영역에 침범하면 열악한 조건의 중소기업은 다 망하게 되기 때문에 중소기업 보호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한다. 대형마트와 SSM이 진출하게 되면 골목상권이 전부 무너지므로, 골목상권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형마트와 SSM의 진출을 규제해야 한다고 한다. 공공근로 제도를 만들어 노인들에게 일거리를 주면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주장도 한다. 근로시간을 단축하여 남는 시간을 실업자들에게 주면 실업이 줄고 근로자들의 여가는 늘어 내수경기도 살아난다는 주장도 있다. 바스티아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당장 “이 사이비들아!”라며 질타했을 것이다.
바스티아는 경제활동이나 경제정책에서 나타나는 효과는 즉각적인 효과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일련의 연속된 효과들을 만들며, 그 중 당장 나타나는 효과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만을 중시하고 주목하는 사람들, 특히 경제학자들을 ‘사이비 경제학자’라고 불렀다. 그는 사이비 경제학자와 진정한 경제학자를 구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이비 경제학자들은 오직 눈에 쉽게 띄는 효과들에만 집착한다. 반면, 진정한 경제학자들은 보이는 효과뿐만 아니라 시간을 두고 나타나는 간접적인 효과까지도 내다볼 수 있다…그래서 사이비 경제학자들은 당장 눈에 띄는 하잘 것 없는 이득에 집착한 나머지 두고두고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반면 진정한 경제학자들은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더 큰 이득을 추구한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스티아는 유명한 ‘깨어진 유리창’ 이야기를 한다. 한 아이가 유리창을 깨면 그 유리창을 새로 해야 하고, 그렇게 때문에 유리를 끼우는 사람, 유리를 만드는 사람, 유리와 연관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소득이 늘고, 이들이 늘어난 소득으로 소비를 하면서 전체 경제도 활기를 띠게 된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그것 때문에 경제가 살아날 수도 있다고요. 다른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지요. 아무도 유리를 깨지 않는다면 유리 만드는 사람은 무얼 먹고 살라고요?” 이렇게 될 경우 우리는 유리를 깬 아이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눈에 보이는 효과에 불과하다. 그 유리를 끼우기 위해 돈을 지불하기 때문에 다른 물건에 대한 지출이 그만큼 줄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다른 물건을 샀을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두 가지의 물건을 가질 수 있다. 개인이나 사회나 마찬가지다. 결국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면 사회 전체적으로도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할 수 있었는데, 유리가 깨짐으로 인해 그 유리의 가치만큼을 잃게 된 것이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효과다. 다시 말해 “무엇인가가 불필요하게 파괴되었다면 사회는 그것의 가치만큼 손실을 입는다… 부수고, 파괴하고, 낭비한다고 해서 고용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파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대부분의 현대 정부들이 신봉하는 케인즈의 승수효과도 깨진 유리창의 긍정적 효과라는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잘못된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승수효과란 간단히 말해, 정부가 1원을 투자하면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소득이 늘고, 이들이 소비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소득이 늘어 사회 전체적으로 소득이 늘고 고용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바스티아는 비록 케인즈보다 일찍 태어나 케인즈의 승수효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깨진 유리창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조세로 인한 긍정적 효과는 그것이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보이는 효과일 뿐이며, 정부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납세자들이 겪는 불이익은 보이지 않는 효과라고 말하고 있다. “공무원들의 지출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잘 띄는 반면, 납세자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게다가 그 납세자들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자들이 겪는 불이익은 더욱더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긍정적 승수효과가 있다면, 납세자들의 비용과 그로 인한 전체 경제의 하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이익이다.
얼마 전 소설가이면서 SNS를 열심히 하는 한 작가에 대해 지자체가 주택과 토지 등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 ‘국가가 예술을 지원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 바스티아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가 거부하는 이유는 이렇다.
그런 것은 우선 분배의 정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뺏어다 예술가들의 이익을 높여주는 입법자들을 과연 정의롭다고 해야 하는가.” 예술이 좋은 것이라고 해서 지원해야 한다면, 도대체 지원해야 할 것들이 어느 정도나 될 것인지 상상해보라면서, 예술에 대한 지원이 예술을 발전시키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국가가 인간의 욕구와 필요에 자의적으로 개입해서 조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사람들의 욕구나 취향, 노동과 인구의 배치 등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게 되면, 사회는 그 확고한 기반을 잃고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시민들은 시민들의 판단에 의해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형성한 선택과 충동이 아닌 국가의 강요나 개입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말살하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공공사업에 대해서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보라고 충고한다. “당신은 공공사업이라는 것이 양면을 가지고 있는 동전과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앞면에는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것은 보이는 효과다. 반면 그 뒷면에는 (납세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효과다.” 나아가 바스티아는 공공사업이 가장 어리석고 낭비적인 사업이라고 비판한다. 예컨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공공사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나폴레옹의 사례를 들며 비판한다. “위대한 나폴레옹은 노동자들에게 도랑을 팠다가 묻었다가 하는 일을 반복하도록 시켰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매우 자비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행하는 공공사업은 이와는 성격이 다른가.
바스티아는 중간상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상인에 대한 비난도 보이는 것만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외국으로부터의 식량도입을 “왜 중간상들에게 맡겨야 하는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식량을 보급하고 저장하는 일을 맡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들은 순수한 원가만을 받고 팔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즉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그리고 무정부주의적인 거래를 위하여 갖다 바쳐야 할 중간상들의 몫이 인민들에게, 그 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인민들에게 되돌려질 것이다”는 주장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알뜰주유소’나 ‘반값 식당’ 논리도 이와 동일하다.
이에 대해 바스티아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들이 중간상들에게 갖다 바치는 대가는 눈에 잘 띈다. 그것은 보이는 효과다. 하지만 그들이 국가나 사회주의 체제에서 공무원들에게 갖다 바쳐야 할 대가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효과다.” 다시 말해 공무원이 되었든 장사꾼이 되었든 중간 매개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나 대신에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해주게 되면 우리는 그 일에 대해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장사꾼에게는 이익이라는 보상을 주지만, 공무원에게는 세금이라는 보상을 주어야만 한다. 장사꾼의 이익은 보이는 효과지만, 공무원에게 내는 세금은 보이지 않는 효과인 것이다.
법이란 무엇인가
바스티아는 개인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이 인간 그 자체이며, 이 세 가지는 인간이 만든 어떤 법보다도 우선한다고 천명한다. “생명과 재능, 생산, 다시 말해서 개별성과 자유, 재산, 이 세 가지가 바로 인간 그 자체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어떤 법보다 앞서며, 또 그것을 초월해 있다. 생명과 자유와 재산이 인간의 법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생명과 자유와 재산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법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 각자는 그것들을 방어할 천부적 권리를 갖는다. 각자가 가진 이런 권리를 인정한다면, 개인들의 동의하에 공동으로 자신들을 방어할 권리, 즉 자기방어를 위해 완력을 집단화할 권리가 있음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그는 ‘법이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 “법이란 과연 무엇일까?… 법이란 각 개인들이 자기방어를 정당화할 권리를 집단화시킨 것이다… 법이란 인간이 정당하게 자기를 방어할 천부의 권리를 집단화한 것이다. 인격과 자유, 재산권의 안위를 보장하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정의의 지배하에 놓이도록 개인적 완력을 집단적 완력으로 대체한 것, 그것이 법이다.”
중요한 것은 법으로 표현되는 집단적인 방어권도 그 존재이유와 정당성의 근거, 작동원리 모두가 개인적 방어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개인적 폭력과 마찬가지로 집단적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 “개인적 완력의 대체물인 집단적 완력은 그 목적과 기능면에서 개인적 완력과 정확히 같다. 따라서 각 개인들이 완력을 사용해서 타인의 인격과 자유와 재산을 해치는 것을 정당하다고 할 수 없듯이,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완력을 사용해서 다른 개인이나 다른 집단의 인격과 자유, 재산을 침해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정의의 지배하에 놓이도록 해야 하는 법이 타락하는 것에 대해 그는 매우 비통해한다. “법이 타락했구나… 법이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어버렸구나. 탐욕을 억제해야 할 법이 오히려 온갖 탐욕의 도구로 전락해버렸구나. 불공정을 벌해야 할 법이 스스로 불공정을 범하게 되었구나.”
바스티아는 법이 타락한 원인을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보전과 자기개발을 열망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의 생존과 발전을 꾀하려 한다… 이 같은 인간의 통탄스러운 성향은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피하려는 원초적이고 보편적이며, 극복하기 어려운 정서반응, 즉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인간의 본성이 이러하므로, 고단한 노동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인간은 가능하다면 고통스러운 노동을 피하고 타인의 노동의 결과를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고 삶을 즐기고자 한다. 만약 “약탈이 노동보다 쉬운 한 누구나 약탈을 택하려 한다… 종교도 도덕도 그런 성향을 막지는 못했다.”
따라서 인간의 이런 부정적 성향을 막는 것, 즉 약탈로부터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법의 정당한 목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다수 세력의 승인과 지지를 얻어야 하는 입법자들은 법을 그들의 구미에 맞게 만들게 된다. 가능한 노동의 고통을 덜고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려는 인간의 본성과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의 입맛에 맞게 법을 만들어야 하는 이 두 가지 사실이 법의 타락이라는 보편적인 현상을 불러왔다. 그 결과 “입법권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던 지난날에는 입법권을 가진 소수가 다수를 약탈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불평등을 보상이나 받으려는 듯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약탈이 자리 잡게 되었다. 법이 사회적 불의를 제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법이 타락하여 약탈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만큼 사회에 해로운 것이 없다면서, 그 결과 사회는 이렇게 변한다고 말한다. 첫째, 무엇이 정의로운 것이고 무엇이 불의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기준이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법이 존중받으려면 존중받을만한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만약 법과 도덕이 갈등을 일으킨다면 시민들은 도덕심을 버리든지 법에 대한 존중심을 버리든지, 양자택일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 해악은 모든 것이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되고 사회의 정치화가 지나치게 커진다는 점이다. “법이 조직이나 규제, 보호, 장려 등의 미명하에 누군가의 것을 뺏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준다고 해보자… 그런 상황이라면 입법권을 요구하지 않을 집단은 없을 것이다… 모든 집단들이 법을 만들기 원할 것이다. 모든 대화에 정치문제가 등장할 것이고, 사람들은 정치논쟁에 빠져들게 될 것이며, 정치는 지배적인 관심사가 될 것이다.”
바스티아에 따르면 약탈에는 합법적인 약탈과 불법적인 약탈 두 가지가 있다. 도둑질이나 사기 같은 것은 불법적 약탈인데, 이런 행위는 형법의 규율을 받는 반면, 법이나 정치의 도움으로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는 것이 합법적 약탈이다. 바스티아는 이 합법적 약탈은 약탈자가 느끼게 될 부끄러움과 위험, 또 양심으로부터 솟아나오는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법이 자신의 손으로 약탈을 자행하기까지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합법적 약탈이 자행되는지 여부는 이렇게 판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여부는 “법이 누군가로부터 그 재산을 뺏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지의 여부만을 확인하면 그만이다. 그 법이 없었더라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을 법이 스스로 나서서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무상의료·무상보육·무상교육·반값등록금 등 이른바 ‘3무1반’이 누군가의 돈을 뺏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 역시 합법적 약탈에 다름 아니다. 납세자들의 돈을 빼앗아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공짜로 나눠준다고 하는 것 역시 합법적 약탈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약탈의 방법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그것들을 합치면 그게 바로 사회주의라고 했다. “합법적 약탈을 자행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관세·산업보호정책·장려금·보조금·누진소득세·무상교육·근로의 권리·이윤에 대한 권리·임금권·생존권·생산수단을 소유할 권리·무이자 대부 등 수없이 많은 것들이 합법적 약탈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합법적 약탈의 수단들을 모두 합치면 사회주의가 된다.”
복지국가란 무엇인가
바스티아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고 있는 이른바 복지국가(그는 복지국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그가 열거하는 국가의 역할은 현대의 복지국가가 지향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보기 때문에 복지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라는 것을 자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그런 국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해달라고 풍자하고 있다. “당신들은… 국가라는 것을 마치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가정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국가가 모든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대신 일을 해주며, 기업가들에게는 자본을, 사업을 하려는 자에게는 대출을, 상처받은 자에게는 바를 약을, 고통 받는 자에게는 향유를, 곤란에 처한 사람에게는 조언을, 모든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해결책을,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지루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락을, 어린이에게는 우유를, 노인들에게는 포도주를 나누어줄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주고, 우리의 모든 욕구를 미리 알아서 해결해주며,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우리의 잘못을 고쳐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과연 그런 국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해주십시오.”
그는 국가가 어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한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근거로 국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들을 국가에게 요구하고 있지만, 국가로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추가적인 노동을 부과하지 않고는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국가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밖에 없다… ‘국가라는 것은 만인이 만인을 등쳐먹고 사는 거대한 허구다.’” 노동의 고통을 피하고 다른 사람의 노력에 편승해서 살아가기를 좋아하는 인간들이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대놓고 말할 수는 없기에 “그 해결 방안으로 고안해 낸 것이 국가라고 하는 중재자다.”
여기서 바스티아는 복지국가가 필연적으로 비대화되고 거대화되어 시민들의 모든 것을 조종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국가라는 작자는 그같이 악마적인 요구를 기꺼이 들어줄 태세를 갖추고 있다.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각료들이나 관료들도 그들의 부와 영향력이 확대되기를 원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그것이 자신들에게 가져다줄 기회를 놓칠 이유가 있겠는가… 국가는 모든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 기회를 이용해서 국가는 조직과 특권을 늘려갈 것이다.” 이 부분은 마치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연상시킨다.
한편으로 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회를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기획하고 조종하며 만들어가고자 하는 박애주의자들이나 야심가들, 혹은 우리들 속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바스티아는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이냐고 묻는다. 국민이 대표자를 뽑고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분명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하, 그런 문제라면 일반 대중에게도 본능적인 지혜가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국민은 뛰어난 인지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들의 의지는 항상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던 그들이 대표로 선출되고 나면 그들은 이렇게 행동한다. “사회는 피동적인 존재로 복귀되어 버리고, 입법자들은 다시 전지전능한 몸이 되어버린다. 사회는 그의 발명품이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하며, 그의 충동의 대상이며, 조직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잠시 전까지만 하더라도 문명인이었고 도덕적이었고, 완벽하던 인간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우리의 경우에도 선거가 끝난 뒤에는 우리는 ‘위대한 국민의 선택’이니 ‘황금분할’이니 하며 국민의 선택이 매우 훌륭했다는 찬사의 소리를 정치인들로부터 항상 듣는다. 그런데 그런 훌륭한 선택을 하는 현명한 국민을 스스로는 노후대비를 못하니까, 스스로는 자식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니까, 스스로는 자신의 삶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니까 국가의 지원과 보호와 보살핌과 지시와 명령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바스티아는 복지국가를 부추기는 선동가들의 말에 속지 말고 그들의 실제 모습을 직시하라고 당부한다. “이처럼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주겠다고 헤픈 약속을 하는 국가와 실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국민 사이에 두 종류의 인간들이 끼어든다. 야심가들과 몽상가들이다… 그들은 대중들의 귓속에다가 이런 선동적인 말을 속삭인다. ‘지금 권력을 잡은 자들이 당신들을 속이고 있소. 만약 우리가 권력을 잡게 된다면 당신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안겨줄 것이오. 그러면서도 당신들은 세금 한 푼 낼 필요가 없을 것이오.’” 이들이 집권하고 나면 국민은 이들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하겠지만, 이들이라고 해서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킬 수는 없다. “시혜를 베풀려고 하면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야 할 것이고, 세금을 줄이려고 한다면 시혜를 줄여야만 한다.” 이 부분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기초연금을 둘러싼 집권여당의 고민과 공약을 지켜야 한다고 외치는 야당 모두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진실은 이것이다. 즉 국가의 손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국가가 늘 국민에게 주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가는 양손을 가지고 있다. 한 손으로는 국민로부터 무엇인가를 뺏어다가 다른 손으로는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한 손은 친절하지만 다른 한 손은 거칠다. 친절한 손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쪽 손이 거친 행동을 해야만 한다.” 국가의 이런 실제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현명한가?
바스티아가 이 글을 쓴 이후 거의 두 세기나 흐른 지금 우리의 생각과 태도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얼마나 달라졌는가.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상(FTA), 한국-미국 자유무역협상, 한국-EU 자유무역 협상 당시 반대했던 사람들의 주장들은 어땠는가. ‘우리의 밥상까지 외국산 농산물에 점령 당한다’ ‘포도 농가의 생존권이 위협 받는다’ 등 자유무역 협정을 체결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비등했었다.
자유무역협정 반대의 백미는 단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했던 이른바 ‘광우뻥’ 사태였다. 한 유명 연예인은 ‘미국산 쇠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먹는 게 낫다’는 식의 발언을 하면서 대중선동을 했고, 청소년들은 ‘어린 나이에 죽고 싶지 않다’며 울부짖고, ‘축산 농가는 다 죽으란 소리냐’ ‘한우 시장은 초토화될 것’이라는 등 한-미 FTA 반대 데모대가 수십일 간이나 서울의 중심가를 점령하며 온 나라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재개된 이후 한우의 시장 점유율은 경기변동 등으로 인한 약간의 기복을 제외하면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은 최근에도 벌어지고 있다. 골목상권을 살린다는 명분의 SSM과 대형마트 규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꾀한다는 명분의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과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은 모두 경쟁상대인 ‘태양’의 빛을 가려달라고 청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책의 서문에서 하이에크는 이렇게 말했다. “바스티아가 타파하고자 했던 것은 그의 시대를 풍미하던 오류들이었다. 오늘날에는 그처럼 엉성한 주장을 펴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독자들이여, 속지 마시라. 보다 정교한 형태로 위장하고 있어서 찾아내기가 쉽지 않지만, 과거와 같은 오류 투성이 주장들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매우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논증을 통해서 이끌어내는 결론이 결국 과거와 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면, 일단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독자들 중에 바스티아가 글을 썼던 당시의 우매한 대중보다는 자기가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반성해보라. 어떤 면에서는 1백 년도 전에 살았던 바스티아 시대의 사람들이 우리 세대들에 비해서 훨씬 더 현명했을 수도 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19세기에 살았던 그들보다 현명한가?
[출처]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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