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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

[끌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 법

by 이덕휴-dhleepaul 2019. 7. 17.

제목은 법이지만 사실은 법의 사회적 측면과 경제학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끌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
  옮긴이:김정호
  발행인:송자
  발행처:자유기업센터
  1판 1쇄 발행 1997년 12월 10일



         차례

    영문판 서문
    서문

   

제1장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1. 깨어진 창
  2. 동원해제
  3. 조세
  4. 극장과 예술
  5. 공공사업
  6. 중간상
  7. 무역에 대한 규제
  8. 기계
  9. 신용
  10. 알제리아 문제
  11. 절약과 사치
  12. 노동의 권리와 이윤에 대한 권리

    제2장 법
  법의 타락
  인간의 본성
  재산과 약탈
  부세
  페넬론
  몽테스키외
  루소
  레이날
  마블리
  콩디악

    제3장 재산권과 법

    제4장 정의와 박애

    제5장 국가

    바스티아의 일생
    역자후기
@ff
    영역판 서문

  프레데릭 바스티아는 그의 사상을 전달할 목적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옳지
못한 생각과 싸울 목적으로 수많은 논문과 전단을 발간하였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추려서 이 책에 실었다. 그 중에는 "법"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미 널리 알려진 것도 있지만 다른 대부분의 것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단숨에 읽는 경제학"의 저자 헨리 해즐릿(Henry Hazlitt)은 그 책의 서문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논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 책에서 쓴 내용은 바스티아의 논문을 현대적 상황에 맞도록 변형시키고
일반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편집자의 책임 하에 정리했다.
  이번 영문 번역판은 바스티아의 프랑스어 원본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다른 책에 들어 있는 논문들을 서로 참조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주석도 달았다.
  주석은 세 종류로 준비했다. 영역자 주는 일반독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주로
인명과 시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편집자 주는 프랑스어 판의 편집자가,
바스티아 주는 바스티아 자신이 작성한 것이다. 영역자 주를 비롯한 나머지 주는
각주로 처리하여 각 주마다 주의 성격을 표시했다. 독자들로 하여금 읽기 쉽도록
하고, 또 편집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프랑스어 판에 나오는 경제적 조화, 또는
경제적 궤변에 대한 참조조항들은 영역판에 적합하도록 수정했다.
  이 책을 포함한 바스티아 논문 모음집 세 권이 동시에 출판되기는 했지만, 영역자
주와 편집자 서문에 중복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각 권의 독자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이모어 케인(Seymour Cain), 헤이든 보이어스(Hayden Boyers)에게 감사드리며,
서문을 써주신 하이에크(F. A. Hay)다 교수에게도 감사드린다. 아서 고다드(Arthur
Goddard)와 윌리엄 볼커 재단(William Volker Fund)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게오르그 B. 드 후스자르(George B. de Huszar)
@ff
    서문

  프레데릭 바스티아(1801__1850)는 천재적인 경제평론가였다. 그의 이론적 깊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사실만은 인정한다. 조셉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그를 가리켜 "역사상 가장 재기가 뛰어난 경제저술가"라고 불렀다.
이 책에는 그가 대중을 상대로 썼던 논문들 중 가장 성공적인 저작들이 들어 있다.
그의 책을 소개함에 있어 그 정도의 찬사는 필요할 것 같다. 설령 "그는
경제이론가가 아니었다"고 했던 슘페터의 평가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고 그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극히 짧은 저술활동의 막바지에 그는 자기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학자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저술활동 기간이 5년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이론적
작업은 마지막 몇 달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에게 성공적인 이론적
정당화를 요구한다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치명적 지병으로
인한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고, 또 당대를 풍미하던 주장들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정당화해야 했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어렵게 했을 것이다. 혹자들은 마흔
아홉이라는 나이에 생을 마쳤다는 사실만으로 과연 그가 충분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쟁적인 저작들은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에 대한 통찰력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천재성을 증명하고 있다. 만약 그에게 충분한 시간만 주어졌다면
그는 그같은 통찰력과 천재성을 가지고 과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을 것이다.
  이 책의 제1장으로 실은 논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같은 사실을
매우 잘 보여준다. 합리적 경제정책에 대한 장애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내가 한 마디
보태자면 경제적 자유가 왜 필요한지를 그 제목만큼 잘 표현한 말은 일찍이 없었다.
내가 서문을 시작하면서 천재라는 말을 쓴 것도 이 짧은 제목 속에 함축되어 있는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모든 자유주의적 경제정책들이 이 논문과 같은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형식적으로는 제1장만이 그 제목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상 나머지 다른 논문들도 모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스티아는 당시를 풍미하던 오류를 논박하면서 계속해서 그같은
아이디어를 사용했다. 바스티아가 타파하려고 했던 견해들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논리가 더욱 정치해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과거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그것을 논의하기에 앞서 그의 중심사상이 무엇이며 그 의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몇 마디 해둘 필요가 있다.
  중심사상은 이렇다. 만약 우리가 경제정책 수단들을 평가할 때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그리고 구체적으로 예측 가능한 효과에만 집착한다면 질서와 자유는
파괴될 것이다. 따라서 그같은 정책을 통해서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아질
것이다. 각 개인들만이 지닌 구체적인 지식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불가피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타인들을 위해서 일하도록 강요했을 때, 그 과정을 통해서 어떤 유익한 행동들이
사라져버릴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모든 형태의 정부개입은 자유를 제한하여
그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개입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같이 눈에 보이는 것 말고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함으로
인해 (정부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각자가 취했을 유익한 행동들 중에서) 사라져버릴
것이 어떤 것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후자의 것들은 그저 단순한 가능성에 불과하기 때문에 간과되기 쉽다.
따라서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가 자유를 수호한다는 원칙이 아니라 개별정책별
구체적 예상효과의 비교형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자유는 필연적으로
소멸해버리고 말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유라는 것을 다른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언제고 희생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만 할 도덕률로
간주했던 바스티아가 옳았다. 자유가 파괴되어 나타날 구체적 결과들을 속속들이
밝혀야 한다면 아마도 남아날 자유는 거의 없을 것이다.
  바스티아가 타파하려고 했던 것은 그의 시대를 풍미하던 오류들이었다.
오늘날에는 그처럼 엉성한 주장을 펴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독자들이여, 속지 마시라. 보다 정교한 형태로 위장하고 있어서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지만, 과거와 같은 오류투성이 주장들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매우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논증을 통해서 이끌어내는 결론이 결국 과거와 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면 일단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현대경제학의 상당부분이 여전히
"지출은 좋은 것이고 저축은 나쁜 것이다" "낭비는 대중들을 이롭게 하며 절약은
해롭게 한다" "같은 돈일지라도 정부가 지출하는 것이 개인이 지출하는 것보다 더
낫다" "정부는 모든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하는 대가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등의
잘못된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매우 편리하고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옳지 못한 주장이다.
  이같은 주장들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바스티아가 활동하던
당시와 다른 전이 있다면, 그 당시에는 전문적인 경제학자들이 모두 바스티아의
편이었고 싸움의 대상이 일반대중들(이익집단들이 그런 믿음을 악용했었다)이었던
반면, 오늘날에는 유수한 경제학자들 자신이(일반대중들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해서) 그런 믿음을 정당화하고, 또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스티아가 영원히 박멸하고자 했던 믿음들 중에서 실제로 그렇게 된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의심스럽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바스티아의 다른 책을 보면
양초제조업자가 햇빛을 가려달라고 국회에 청원하는 우스개 대목이 나온다. 집의
창문을 모두 없애버리면 양초제조업이 번창할 것이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는 식의 논리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널리 사용되는 어느
경제학사 교과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케인즈의 이론에 따르자면 실업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승수효과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양초제조업자들의 주장에는 틀린 것이 전혀 없다."
  세심한 독자들이라면 바스티아의 논문이 우리시대를 위협하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음을 간파하게 될 것이다. 정부 재정적자에 따르는 인플레이션의
문제가 그것이다. 물론 바스티아도 금융기관의 신용배정에 대한 정부개입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정부지출의 증가를 즉각적인
조세부담의 증가로만 여겼을 뿐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화폐가치의
지속적인 하락이라는 현상을 애초부터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 중에 바스티아가 글을 썼던 당시의 우매한 대중들보다는 자기가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반성해보라. 어떤 면에서는 1백
연도 전에 살았던 바스티아 시대의 사람들이 우리 세대들에 비해서 훨씬 더
현명했을 수도 있다.

  하이에크 F. A. Hayek
@ff
    제1장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What Is Seen and What Is Not Seen
@ff
    1.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주1)

  경제활동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그것이 하나의 행동이든, 제도이든
법이든 간에 한 가지 효과에만 그치지 않고 일련의 연속된 효과들을 만들어낸다.
여러 가지 효과 중에서 당장 나타나는 효과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눈에 잘 띈다. 반면 시간을 두고 서서히 나타나는 효과들도 많은데, 그런
효과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 간접적인 효과들을 미리 내다볼 수
있다면 무척 다행이다.
  사이비 경제학자와 진정한 경제학자들 사이의 차이는 오직 한 가지이다. 사이비
경제학자들은 오직 눈에 쉽게 띄는 효과들에만 집착한다. 반면 진정한 경제학자들은
보이는 효과뿐만 아니라 시간을 두고 나타나는 간접적인 효과까지도 내다볼 수
있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차이지만, 그로 인한 결과의 차이는 엄청나다. 눈에 당장
보이는 효과가 좋아 보일 경우 그로 인한 장기적이고 간접적인 효과들은 십중팔구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주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이비 경제학자들은 당장 눈에 띄는
하잘것없는 이득에 집착한 나머지, 두고두고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반면 진정한
경제학자들은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더 큰 이득을
추구한다.
  인간의 건강이나 도덕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당장 달콤하게 느껴지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습관들은 나중에 쓰디쓴 결과를 안겨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방탕과 게으름, 낭비벽 같은 것들이 모두 그렇다. 당장 눈에 띄는 효과에만
사로잡혀, 두고두고 나타나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대개 고약한 습관에
탐닉하게 된다. 본능에 이기지 못해 그러는 사람도 있고, 또 의도적으로 그러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인간의 고통스런 진화과정과도 관련이 있다. 태어나서 강보에 싸여 있을
때 인간은 무지의 장막에 가려져 있다. 아기는 자기의 행동으로 생겨나는 즉각적인
효과, 즉 자신의 눈에 띄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 시간이 흘러서 한참 자란
후에야 비로소 아이는 자기 행동의 보이지 않는 효과도 고려할 수 있게 된다.(주2)
이것이 가능하려면 경험과 예측이라는 두 가지를 습득해야 한다. 경험은 유용하지만,
고통스럽다. 경험은 우리가 취한 행동의 결과를 직접 느끼게 함으로써 우리의
행동에 의해 초래되는 모든 결과들을 알게 해준다. 불에 데어본 사람은 불에 가까이
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이같이 경험이라는 잔인한 선생 대신 예측이라는 좀더 점잖은 선생을
소개하고 싶다. 지금부터 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오직 예측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을 비교해 보이기로 한다.

  1. 깨어진 창

  굿펠로우씨(Mr.Goodfellow)는 화가 잔뜩 나 있다. 그의 아들이 유리창을 깬
것이다. 모여 있던 구경꾼들이 입을 모아 위로의 말을 하고 있다.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경제가 살아날 수도
있다고요. 다른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지요. 아무도 유리를 깨지 않는다면 유리
만드는 사람은 무얼 먹고 살라고요?"
  우리가 겪고 있는 대다수 경제제도들이 이같은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 단순한 위로의 말을 분석해보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리를 갈아끼우는 데 6프랑이 든다고 해보자. 그 6프랑이 유리제조업의 성장을
촉진할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유리업자는 그 돈으로 자기자신의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부주의한 아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보이는 효과이다. 일련의 결과들 중 보이는
일부분의 결과일 뿐이다.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유리 깨는 일을 좋은 일로 간주하고 있다.
누군가가 유리를 깼기 때문에 돈이 들고, 산업이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가. 그런 궤변이 어디 있는가. 당신의 그같은 주장은 보이는
결과에만 사로잡힌 소치이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한다.
  6프랑의 유리를 사는 데에 지출한 결과 다른 물건에 대한 지출이 그만큼 줄었다는
것을 당신은 보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 돈을 유리 사는 데에 쓰지 않았다면 새
구두를 사거나 책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엔가 돈을 지출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지출할 돈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경제 전반에 대한 효과를 살펴보도록 하자. 유리가 깨진 결과 유리산업이
6프랑만큼의 자극을 받는다. 그것이 유리가 깨짐에 따른 보이는 결과이다.
  만약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면 신발산업(또는 다른 어떤 산업)이 그 돈만큼의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눈에 띄지 않는 결과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효과까지를 고려할 경우, 유리가 깨지든, 안 깨지든 간에 산업
전체, 또는 국가 전체의 고용량에는 달라질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이제 굿펠로우씨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유리가 깨졌다고 할 때, 굿펠로우씨가 최종적으로 누리는 것은 유리 한 장이다.
반면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그 6프랑으로 신발을 샀을 테고,
굿펠로우씨는 최종적으로 유리와 신발을 가질 수 있다.
  결국 굿펠로우씨도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사회는 유리가
깨짐으로 인해 그 유리의 가치만큼을 잃게 되었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같은 논의는 다음과 같이 일반화될 수 있다.
  "무엇인가가 불필요하게 파괴되었다면 사회는 그것의 가치만큼 손실을 입는다."
  보호주의자들에게는 끔찍한 말이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부수고, 파괴하고, 낭비한다고 해서 고용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파괴를 통해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같은 말에 대해서 "산업신보"(주3)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어처구니없게도
파리가 불에 타버릴 경우, 그것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창출될 부의 크기를 정확히
계산해냈던 존경하는 생샤망(M. de Saint-Chamans)(주4)씨와 그의 추종자들은
무엇이라고 할까?
  입법에까지 반영된 그의 정교한 논리를 망쳐놓은 것에 대해 생샤망씨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제발 보이지 않는 결과까지도 계산에 넣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독자들도
주의하시라. 내가 처음에 꺼낸 이야기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하시라. 한 사람이 더 있다. 소비자인 굿펠로우씨는 유리가 깨진 결과 그렇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었던 새 신발의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두 번째의
등장인물은 유리업자이다. 그는 이 사고로 인해서 득을 보게 되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 두 사람 말고도 그늘에 가려진 제3의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신발제조업자(또는 다른 어떤 기업)이다. 그는 유리가 깨어진 사건으로 인해서
손해를 보았다. 이 사람은 보이지 않는 효과를 대표한다. 만약 우리가 이 제3의
인물을 놓친다면 문제의 핵심을 간과하는 것이 된다. 이 그늘에 가려진 제3의
인물을 잘 인식한다면 유리가 깨어졌기 때문에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는 식의
어리석은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우리가 이 제3의 인물을 잘 인식한다면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입을 억제해야 한다는 식의 어리석은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수입을 제한하는 것은 유리를 깨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외국물건의
수입에 대한 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 보면 그 밑바닥에는
바로 다음의 논리가 놓여져 있다.
  "만약 유리가 깨지지 않는다면 유리제조업자는 무얼 먹고살라는 말인가."

  2. 동원 해제

  나라라고 해서 개인과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가 과연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가에게 있어 국가안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만약 국가안보를 위해서 10만의 병력과 1억 프랑의 자금이 필요하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 할말이 없다.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어느 국회의원이 10만 명의 군인들을 제대시키자는 제안을 내놓았다고 해보자. 그
결과 납세자들은 1억 프랑의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런 반대를 한다.
  "이 10만의 병력과 1억 프랑의 세금은 우리의 국가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된다. 물론 그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같은 고통이 없다면 프랑스는 내전이나
외적의 침입을 막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대해서 어떤 이견도 없다. 물론 구체적인 숫자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경제학의 원리에 충실하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희생이
희생이 아니라(누군가에게 득을 가져다준다는 이유로) 이득으로 간주되기 시작할 때,
그같은 논리는 경제학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군대를 줄이자는 제안자들이 연단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누군가가 나와서 목청을
높일 것이다.
  "병사 10만 명을 내보내겠다고? 도대체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알아서 먹고살라고 하겠지. 하지만 당신도 실업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 않소. 어디나 일자리를 찾는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소. 당신은 그 군인들을 살벌한 경쟁으로 넣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임금까지
낮추게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겨우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세상에, 국가가 10만
명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오. 게다가 그 군대가 와인과
의복과 무기를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시오. 그것 때문에 공장들이 돌아가고,
주둔지의 경제가 돌아가지 않소. 10만 명의 군대는 수많은 기업들에게 하나님이
내린 선물이잖소. 그런데 당신은 끔찍하게도 그같이 좋은 경제활동에 종지부를
찍자고 주장하고 있군요."
  이 사람은 군대가 제공하는 본래의 서비스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내세워서 군대의 축소를 반대하고 있다. 내가 문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주장이다.
  10만 명의 군인들이 있음으로 해서 납세자들은 1억 프랑을 부담해야 하지만 그
덕에 그 군인들이 먹고살게 되고, 그들에게 물품을 제공하는 공급자들에게 사업의
기회가 생긴다. 그것이 군인이 있음으로 인한 보이는 결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1억 프랑의 세금을 납부한 결과 납세자들은 그만큼
소비를 줄여야 하며, 세금이 없었다면 구매했었을 상품의 공급자들이 상대적으로
타격을 받게 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전체의 대중들에게 도대체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계산한 것이 있다면 내게 알려달라.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서 10만 명과 1억 프랑이 아니라 한 사람과 1천 프랑을
가지고 설명하기로 한다.
  우리는 갑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다. 신병모집자들이 돌아다니다가 한 명의 신병을
확보했다. 세무서 직원도 같이 돌아다니면서 마을주민들로부터 1천 프랑을 거두었다.
이제 그렇게 뽑힌 사람과 1천 프랑을 메츠라는 도시로 보내기로 했다. 메츠는 그런
식으로 뽑힌 사람들이 그렇게 거두어진 돈으로 무위도식하는 도시이다. 메츠만을
놓고 생각하면 당신의 말이 맞다. 마을마다 한 사람을 뽑아서 놀고 먹이는 것이
유익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갑이라는 마을 전체로 눈을 돌려본다면 다른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 마을은 한 명의 청년이 기여했을 노동력을 잃었고,
그에게 주어졌을 임금, 그리고 그 돈이 소비됨으로 인해서 늘어날 산업활동을 잃게
된다.
  어설프게 생각하면, 이 마을이 겪는 손실이 메츠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의해서 상계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극복하기 힘든 차이가
있다. 그 청년이 마을에 남아 있었다면 노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츠시에서는
노동 대신 좌로 나란히, 우로 나란히 정도나 하는 군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국가안보의 필요성이 줄어, 10만 명의 군인이 남아돌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청년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청년이 어디에 있건, 돈이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마을에 있었다면 365일 생산적인 노동을
했을 테지만, 메츠시에서는 비생산적인 노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이들을 제대시키기로 했다. 당신은 그로 인해서 노동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임금은 내려갈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는 결과뿐이다.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10만 명의 군인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1억
프랑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납세자들에게 돌려주는 것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당신은 10만 명의 노동력이 경쟁에 돌입한다는 것은 보고 있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지급될 1억 프랑의 돈도 소비자들에게 되돌려진다는 사실은 보지 못하고
있다. 노동의 공급이 느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군인들을 제대시킬 경우 임금이 낮아질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당신은 10만 명의 군사와 1억 프랑의 세금은 같이 붙어 다닌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할 일도 없이 군대에 붙잡아둔다면 1억 프랑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10만 명의 군인들에게 지급되지만, 그들을 제대시킨다면 같은
돈이 노동의 대가로 그들에게 지급된다. 그들도 노동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또 있다. 납세자들이 그 돈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군인들에게 주어버리든지, 아니면 일한 대가로 노동자들에게 지급 하든지와는
무관하게 궁극적인 차이는 납세자들이 돈을 낸 대가로 무엇을 받느냐의 차이이다.
그 돈을 군인들에게 지급한다면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는 셈이다. 반면 군인들을
제대시킨다면 납세자들은 돈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된다. 결론적으로 할 일이 없어진
군인들을 제대시키지 않고 세금으로 먹여살리는 것은 국가적으로 순손실이다.
  그들의 주장을 확장시켜 보면 그들의 주장이 궤변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만약 군대의 규모를 확대하는 것이 나라 전체에 이익이 된다면, 왜 이 나라의 모든
남성들을 군인으로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3. 조세

  이런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조세는 최선의 투자이다. 그것은 마치 생명수와 같다. 조세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이어나가는지 생각해보라. 게다가 그것이 산업에 미치는 간접적인
효과까지 생각해보라. 조세의 좋은 점은 끝이 없다. 마치 생명 그 자체와도 같다."
  이같은 주장과 맞서기 위해서 나는 앞에서 동원했던 논리들을 반복해야겠다.
  조세수입으로부터 나오는 월급으로 공무원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조세의 보이는
효과이다. 공무원들을 상대로 물건을 공급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이득도 보이는
효과이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코앞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눈에 잘 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납세자들이 겪어야 하는 불이익은 보지 못한다. 게다가 그
납세자들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자들이 겪는 불이익은 더욱더 보지 못한다. 조금만
생각을 돌리면 너무나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부의 공무원이 자기자신을 위해서 1백 원을 쓰면, 납세자들의 지출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무원들의 지출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잘 띄는 반면, 납세자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국가를 메마른 땅으로, 그리고 세금은 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단비로
비유한다. 하지만 당신은 그 비가 어디에서 오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조세는 그 대지의 습기를 앗아가고 결국 땅을 메마르게 하지 않을까? 비가 오려면
대지로부터 증발된 습기보다 비의 양이 더 적지는 않은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굿펠로우씨는 1백 원을 세금으로 바치지만 그에 대한 직접적인 대가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에게 대가가 돌아오는 것은 나중에 공무원들이 그 돈을
지출하면서부터인데, 그때도 직접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식량이나 노동력 같은
형태로 돌려준다. 그 과정에서 굿펠로우씨는 예를 들어 5프랑의 손실을 입게 된다.
  물론 굿펠로우씨가 낸 세금액수만큼의 서비스를 정부가 굿펠로우씨에게 돌려주는
경우도 종종 있기는 하다. 이 경우는 누구도 손해가 아니다. 단순히 교환이 일어났을
뿐이다. 그처럼 정부가 유용한 기능을 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정부기관을 만들고 싶다면 그것이
쓸모있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보여달라. 납세자인 굿펠로우씨에게 세금의 대가로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사실을 보여주라. 그것이 바로 정부의 정당한
필요성이다. 그것이 아니라 공무원과 그 가족, 또 그들에게 물품을 공급하는
업자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세금을 거두어야 한다면, 또는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서
세금을 거두어야 한다면 아예 말도 꺼내지 마시라.
  굿펠로우씨가 정부로부터 진정 유용한 서비스를 공급받기 위해서 세금을 낸다면
그것은 구두수리를 해달라고 그 돈을 구두수선공에게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주고받는 관계일 뿐 어느 쪽에도 손해가 아니다. 하지만 굿펠로우씨가
세금을 내고 정부로부터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했다면, 아니 오히려 불편함만을
정부로부터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마치 그 돈을 도둑에게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세금으로 납부된 그 1백 원이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말은 꺼내지도
마라. 길을 가다가(불법적이건 합법적이건 간에) 기생충 같은 강도를 만나 돈을
뺏기지 않았더라면 그 돈은 굿펠로우씨가 썼을 테고, 국민경제는 왕성해졌을 것이다.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도 살펴보자.
  작년의 일이다. 헌법의회가 반대자들을 적극적으로 배척하지 않았던 덕에 나도
재정위원회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헌법초안자들은 아주 현명하게
처신했다.
  티에르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평생을 정통주의자파(legitimist party)와 성직자파(clerical a party)와
투쟁하는 데 보냈다. 그러다가 얼마전 공통의 위험에 처한 나머지 그들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도 옛날에 생각했듯이 그런 괴물만은
아니었다."
  그 말이 맞다. 상대방과 교류를 하지 않으면 대립은 더욱 격화되고 증오는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다수파가 소수파의 위원회 진입을 허용하게 되면, 십중팔구 서로의
견해차가 과거에 생각했듯이 그렇게 크지 않으면, 상대방의 생각이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나는 작년에 재정위원회의 일을 했다. 우리의 동료가 공화국 대통령과
장관들과 대사들의 보수를 동결시키자고 했을 때, 늘 터져나오는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다.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정부기관의 사무실을 위엄 있게 보이도록 치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수한 인재들이 공무원이 되려고 합니다. 곤경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공화국 대통령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했을 때 매번 그것을 거절하는 고통을
겪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입헌정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 관공서와 외교관에게
어느 정도의 겉치레를 허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고, 내가
그 문제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틀렸든 맞았든 간에 그들의
주장이 공공의 이익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편협한 절약주의나 질투에 눈이 먼 케이토주의자들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의견에 더
호의적인 편이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늘 그래왔듯이 예의 그 진부한 주장을
되풀이할 때는(그 주장은 늘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내 경제학자적 양심이
그것을 허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 프랑스의 지적 수준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고위직 공무원의 사치품 소비는 예술과 산업과 고용을 촉진할 것입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베푸는 크고 작은 연회들은 그와 관련된 산업들의 성장을 촉진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월급을 줄일 경우 파리의 산업은 위축될 것이고 그것의
파급효과는 곧 전국으로 미칠 것입니다."
  세상에 맙소사! 선생, 제발 산수 공부 좀 제대로 하시오. 큰 것에다 작은 것을
더하는 것과 작은 것에다 큰 것을 더하는 것이 다르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말을
프랑스 의회에서 버젓이 할 수 있다는 말이오? 창피하니 그만두시오. 누구도 당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어떤 일꾼에게 1백 원을 주고 배수로를 파게
하려고 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세무서 직원이 그 1백 원을 빼앗아다가
내무부장관에게 건네주었다. 배수로를 파려던 내 계획은 무산되었고, 내무부장관의
식탁에는 요리 하나가 더 늘게 되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식의
정부지출이 산업을 발전시킨다고 주장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소비의 이전, 또는
노동력의 이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그 장관의
식탁이 좀더 호화스러워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농부인 내 밭의
배수가 잘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파리의 출장요리업자가 1백 원어치의 추가주문을
받은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시골의 일꾼이 5프랑을 잃게 되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장관의 식탁에 요리가 추가된 것과 요리업자의 이익이 더해졌다는 것,
그것은 보이는 효과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효과를 생각하라. 물이 질척거리는
전답과 일거리를 못 얻은 시골의 일꾼이 그것이다.
  좋으신 하나님, 2더하기 2가 4라는 것을 경제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설령 그것에 성공한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소리쳐댄다.
  "그것은 너무나 진부해."
  그들은 결국 당신이 증명해놓은 것과는 무관하게 투표를 하고 말 것이다.

  4. 극장과 예술

  국가가 예술을 지원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찬반의견이 분분하다.
  지원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예술이 우리 민족의 영혼을 넓히고, 높이며, 또
시화시킨다고 주장할 것이다. 예술에 대한 지원은 인간이 물질적인 욕구에만
사로잡히는 것을 막아주고, 그 대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태도나 관습, 도덕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며, 심지어는 산업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한다. 이타리엥 극장이나 음악원(Conservatory)이 없었다면 지금의 프랑스
음악이 어떻게 가능했을 것이며, 프랑세스 극장이 없었다면 지금의 프랑스 연극이
어떻게 가능했을 것이며,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그림과
조각들이 어떻게 가능했겠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앙집권과 그에 따른
미술에 대한 지원이 없었더라면, 프랑스 노동자들의 고상한 취향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아름다운 상품들을 전세계에 수출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결과들을 놓고 볼 때, 모든 유럽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성취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세금 좀 부과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들의 논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반대논리를 들어본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첫째, 그들의 주장은 분배의
정의라는 것과도 어긋난다. 노동자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뺏어다가 예술가들의
이익을 높여주는 입법자들을 과연 정의롭다고 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라마르탱(Lamartine)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극장지원금을 뺏아가려고 하는데, 당신이 하는 일이 그 정도에서 그치겠는가.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은 당신이 일하는 대학과 박물관과 연구소와 도서관에 대한
지원금도 없애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모든 선한 것과 모든 유용한 것들에 대해
지원해야 한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어느 정도가 될는지 알기나 하는가. 농업,
제조업, 상업, 복지와 교육 등 대부분의 활동들이 당신의 지원목록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게다가 예술에 대한 지원이 예술을 발전시킨다고
가정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과연 맞는 말인가. 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더 깊이
따져보아야겠지만, 지금까지 관찰한 바에 따르자면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극장들이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제 좀더 고상한
차원으로 넘어가 보자. 인간의 필요와 욕구는 서로서로 상승작용을 하여 소득이
높아질수록 점점더 세련된 상태로 발전해간다(주5)고 할 수 있다. 정부가 그 과정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정부가 사치재를 생산하는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어갈 경우, 사치재가 아니라 필수재를 만드는 산업이 피해를 입게 되고, 결국은
문명의 정상적인 발전경로에 역행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정부가 사람들의 욕구나
취향, 노동과 인구의 배치 등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게 되면, 사회는 그 확고한 기반을
잃고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의해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이것이 국가개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리이다.
  나는 선택과 충동은 위로부터, 즉 입법자로부터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즉 시민들 스스로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형성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 반대의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말살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 경제학자들을 비난한다. 우리가 예술활동에 대해서
지원하지 말자는 것이었지 예술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활동들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그에 대한 보상도 예술가들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우리가 예술 그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으로 매도해버린다. 이것은 마치 국가가 시민들에게 국교를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우리가 시민들이 종교 자체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매도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교육에 대해서 국가가
지원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 그들은 우리를 교육 그 자체에 대한 반대자로
몰아버린다. 우리가 특정한 산업이나 토지가격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면, 그들은
우리가 재산권이나 노동에 반대하는 것으로 매도해버린다. 예술에 대한 국가지원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은 우리를 예술의 가치도 모르는 야만인으로 몰아세운다.
그들의 비난은 틀렸을 뿐 아니라 정당하지도 못하다.
  나는 내 모든 힘을 다해 그들의 주장에 저항한다. 우리는 종교나 교육, 재산이나
노동이나 예술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같은 활동들이 남의 것에
기생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자유롭게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같이 중요한 활동들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조화롭게 발전해야 하며,
그리하여 이같은 활동 중 어느 것도 분쟁과 남용과 폭정과 무질서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지원이나 규제의 대상이 아닌 것들은 모두 없어지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그 반대이다. 그들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입법자에게 희망을 건다. 우리는 입법가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희망을 건다.
  라마르탱씨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우리가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따르게 된다면 결국 이 나라에 부와 명예를
안겨주는 전람회를 폐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마르탱씨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없애버리는 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소. 국가가 살리기로 작정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당신에게는 당연한 결론일 것이오.
결국 당신은 국가가 조세수입으로 먹여살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도 존속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오. 나는 당신이 내세우고 있는 그 전람회를 가지고 당신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이려고 하오.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자유로운, 그리고 인간적이라고 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박람회가 지금
런던(주6)에서 조성되고 있는 중이오. 그리고 그 박람회에 대해서 영국정부는 어떤
개입이나 지원도 하고 있지 않소.
  아까도 말했듯이 미술계에 국가지원이 필요한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내가 이 자리에서 그 논쟁에 대한 결론을 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하지만 라마르탱씨가 제기한 주장 가운데에서 내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경제학 논리에 비추어볼 때, 다음의 주장은 말이
안되는 소리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과 관련된 경제문제는 고용이란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 노동의 성격이
무엇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노동이든 생산적이고 유용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극장산업은 도장공, 석공, 장식업자, 의상업자, 건축업자 등 8천 명에게
임금을 주어 먹여 살리고 있다. 그들은 파리라는 이 도시의 곳곳에 박혀 살아가고
있다. 당신은 그들의 요구를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동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보조금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라.
  그의 연설은 계속된다.

  파리사람들의 즐거움은 지방의 관공서들에게 일자리와 생필품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부자들의 호사는 공화국내의 모든 극장산업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그리고
이같이 고상한 활동이 있음으로 인해 생필품을 제공받고 있는 20만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임금과 빵을 제공해준다. 당신들이 이 6만
프랑의 보조금을 승인함으로써 그들에게 그 돈을 나누어줄 수 있게 된다(옳소! 옳소!
박수갈채).

  옳다고? 틀렸소! 정말 틀렸소! 최소한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경제학적인
논리에 비추어본다면 그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6만 프랑 중 일부가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중의 일부는 분배되는 과정에서 어디로든 사라질 것이다.
문제를 좀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파이의 대부분이 다른 곳으로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빵이 몇 조각이라도 남아 있다면
무척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6만 프랑이 도장공과 장식업자, 의상업자,
미용업자들에게 모두 돌아간다고 해보자. 그렇더라고 그것은 보이는 효과에
불과하다.
  그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이 동전의 뒷면이다. 그 뒷면은 앞면만큼이나
중요하다. 그 돈이 누구에게서 나오는가. 만약 의회가 그 돈을 리볼리가로 가게 하지
않고 원래대로 그레넬가(주7)로 향하게 했다면 그 돈이 누구에게 갔겠는가.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누구라도 그 돈이 투표함에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투표함이 우리 국부를 증가시킬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투표한다고 해서 없던 돈이 새로 생겨날 수 없음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딘가에 있던 것을 뺏어다가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누군가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그 돈을 뺏겨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1프랑을 세금으로 낸 사람은 더 이상 그 1프랑을 자신을 위해서 쓸 수가 없다. 그
1프랑에 해당하는 만큼의 만족을 잃게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1프랑어치의 만족을
위해서 일했던 노동자는 세금 때문에 그만큼의 만족을 빼앗겨버리는 셈이다.
  5월 16일날 국회에서 벌어진 표결 결과, 국가의 복지와 고용이 늘어났다는 식의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은 더 이상하지 말자. 보조금은 재산과 임금을 재분배하는
것일 뿐이다.
  보조금 때문에 만들어지는 직업들과 그 직업들의 유용함이 그 보조금 때문에
없어지는 직업과 그것의 유용함에 비해 더 급하고 더 도덕적이며 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 6만
프랑을 세금으로 낸 결과 농부와 도랑 파는 사람과 목수와 대장장이들의 임금을
줄이는 대신, 같은 액수만큼 가수와 미용사와 장식업자와 의상업자의 임금을
올려놓았다. 후자의 직업이 전자의 직업보다 더 중요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라마르탱씨도 최소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후자의 직업이 전자의
직업들만큼 생산적이고 유익하다고 했다. 그 말조차도 의문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극장산업이 다른 산업의 지원을 요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산업의 중요성이
덜하다는 증거 아닐까?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어떤 직업이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지를 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라마르탱씨와 그의 동조자들을 배우들에게
물건을 공급해주는 사람들의 임금만이 아니라 납세자들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사람들이 입게 되는 손해도 고려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한 그들은
재분배와 부의 창출 사이의 차이도 모른다는 놀림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논리적이었다면 무한대의 보조금을 요구했어야 했다. 6만 프랑에 의해서
새로운 부가 창출되는데, 10억 프랑의 보조금을 지급한다면 더욱 많은 부가
창출되지 않겠는가.
  조세를 거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면 좀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하라. 제발
"공공지출이 있기에 노동자들이 먹고 산다"는 식의 한심한 말은 이제 그만두라. 그런
말은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은폐해버린다. 즉 공공지출은 항상
민간지출을 줄여서만 가능하며, 그 결과 노동의 종류가 달라질 뿐 경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주장이 인기를 끄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잘못된 추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5. 공공사업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대규모의 사업이 필요하다면, 국가는 당연히
시민들로부터 돈을 거두어서 사업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때는 난감해진다.
  "그 밖에도 공공사업은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부는 도로를 만들고 유지 관리하며, 궁전을 짓기도 하고 운하는 파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일부의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보이는
효과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다른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도로 놓는 일을 한번 생각해보자. 매일 아침 1천 명의 노동자가 일터로 나왔다가
임금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이 점은 분명하다. 만약 정부가 도로를 놓지
않았다면 이 선량한 노동자들이 그같은 일자리를 얻지 못했을 테고 임금을
받아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시야를 좀더 넓히면 다른 무엇이 있지 않을까?
듀팽(Dupin)(주8)씨가 도로사업을 위한 예산이 통과되었음을 선포하는 순간 돈이
달빛을 타고 하늘에서 포울드(Fould)(주9)씨와 비노(Bineau)(주10)씨의 금고로
떨어지는 것일까? 일이 제대로 되려면 정부는 지출을 결정하면서 동시에 그 돈을
어떻게 거둘 것인지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세무공무원들을 내려보내서
세금을 거두어들여야만 하지 않겠는가.
  이같이 문제의 양면을 같이 보아야 한다. 1백만 프랑의 돈을 지출했을 때 어떤
좋은 일들이 벌어지겠는가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만약 그 돈을 세금으로 내지
않았을 경우 납세자들이 할 수 있었던 일도 같이 생각하라. 당신은 공공사업이라는
것이 양면을 가지고 있는 동전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앞면에는
부지런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것은 보이는 효과이다. 반면 그 뒷면에는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내가 지금 비판하고 있는 이 엉터리 논리는 공공사업에 가면 더욱 심각하다. 가장
어리석고 낭비적인 사업들이 공공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다. 철도나 교량이
필요해서 지어야겠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런데 그같은 이유가
없을 때는 이상한 논리를 갖다대면서 공공사업을 벌이려 한다.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공공사업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샹데마르(주11)의 사열대를 지었다가 부수었다가 하는 식이다. 위대한 나폴레옹은
노동자들에게 도랑을 팠다가 묻었다가 하는 일을 반복하도록 시켰는데,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매우 자비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결과는 같은 것 아닌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부가
노동자들에게 분배되도록 하는 것 아닌가."
  문제의 근본으로 내려가보자. 화폐는 우리에게 환상을 가져다준다. 공통의 사업을
위해서 돈을 갹출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그 돈에 상당하는 노동력을 갹출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협동작업을 해야 할 경우 그것을 문제시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노동에 대한
보상은 일의 결과물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구실로 사람들을
불러모아다가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도로나 아무도 살지 않는 궁전을 지으라고
강요한다면 매우 어리석은 일임이 분명하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니 차라리 나
자신을 위해서만 일을 하겠다고 시민들이 대들더라고 할말이 없다.
  협조의 수단이 직접적인 노동이 아니라 납세인 경우에도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차이가 있기는 하다. 공공사업을 위해서 직접적인 노동을 제공할 경우
잘못된 사업으로 인한 손해는 모든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반면 조세라는 수단을
택하게 되면 그 공공사업 때문에 일자리를 갖게 되는 사람들은 손해를 면하게 된다.
물론 그만큼 다른 납세자들의 부담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헌법에 다음과 같은 조항이 나온다.
  "사회는 국가나 정부부처, 지방자치 단체들로 하여금 실업자 구제를 위한
공공사업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발전을 장려하고 돕는다."
  위기상황이나 혹한기처럼 예외적인 상황에서 잠정적으로 국가가 공공사업을
시행하는 것은 납세자들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국가가 보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일자리의 숫자를 늘린다거나 임금을 높일
수는 없다. 평상시에 약간씩 일자리와 임금을 저축해두었다가 어려울 때에 다시
돌려주는 정도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하지만 일단 그것이 영구적이고 일반적인 정책으로 변해버리면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속임수가 되어버린다. 공공사업을 통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임금을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주장은 모순일 뿐이다. 공공사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일자리가 생겨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보이는 효과에 불과하다. 보이지는
않지만 숨은 효과가 그보다 더 크다. 공공사업을 위해서 세금을 거두어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일자리보다 훨씬 더 많은 일자리들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6. 중간상

  사회란 인간이 서로 서로를 위하여 수행하는 서비스의 총합이다. 그같은 서비스는
자발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고 강제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우리는 강제적인
서비스를 공공서비스라고 하고, 자발적인 서비스를 민간서비스라고 부른다.
  법에 의해서 강요되고 규제되는 공공서비스는 변화가 필요할 때조차도 잘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진 후에도, 심지어는 서비스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성가신 존재가 된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인 서비스는 개별적 책임의 영역에 놓여 있다. 거래
쌍방간의 협상에 의해 각자는 자신의 능력범위내에서 원하는 것을 제공받는다.
그러기에 사적 서비스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자지며, 그것의 가치는 다른 재화에
대한 상대적인 가치에 의해서 측정된다. 전자의 공공서비스는 정체를 면하지 못하는
반면 사적인 서비스는 계속 발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공공서비스의 지나친 비대화는 쓸데없는 노력의 낭비를 가져오고 그 결과 사회는
기생주의에 물들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오늘날의 학자들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인 서비스를 오히려 기생주의의
산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다양한 직업들이 하는 역할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들 학자들이 맹렬히 비난해 마지않는 것은 중간상이다. 그들은 자본가와
은행가와 투기꾼과 기업가와 상인들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이들
중간상들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불필요하게 끼여들어서 폭리를 취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만약에 그들이 해오던 일 그 자체를 없앨 수 없다면, 국가가 그 일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문제에 관한 사회주의자들의 궤변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은 국가에게 바쳐야
하는 대가는 숨기고, 중간상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대가만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해서도 눈에 쉽게 띄는 것과 잘 생각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간의 갈등이 있다.
  특히 대기근(주12)이 들었던 1847년에 이같이 지극히 해로운 사회주의자들의
견해가 지지를 받았다. 곤경에 처할수록 터무니없는 처방에도 잘 넘어가는 인간의
속성(Malesuada fames)(주13)을 사회주의자들은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나 크리미아에서 식량을 도입하는 일을 왜 중간상들에게 맡겨야 하는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식량을 보급하고 저장하는 일을 맡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들은 순수한 원가만을 받고 팔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즉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그리고 무정부적인 거래를 위하여 갖다바쳐야 할 중간상들의 몫이
인민들에게, 그 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인민들에게 되돌려질 것이다."
  사람들이 중간상들에게 갖다바치는 대가는 눈에 잘 띈다. 그것은 보이는 효과이다.
하지만 그들이 국가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공무원들에게 갖다바쳐야 할 대가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중간상들에게 갖다바친다고 생각하는 대가라는 것은 무엇인가.
두 사람이 서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리고 경쟁의 압력하에서 서로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보자. 가격은 서로간의 협상에 의해서 결정된다. 사람들이
착취당한다고 생각하는 대가는 바로 그것이다.
  파리의 시민들이 굶주림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식량이 있더라고
그것이 파리가 아니라 오데사(Odessa)에 있는 한 파리 시민의 배고픔은 해결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배고픈 사람들이 직접
식량이 있는 곳으로 가서 밀을 구해 온다. 둘째, 그같은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긴다. 마지막으로 공무원들에게 그 일을 맡기고, 세금을
거두어주는 방법이다.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가.
  자유로운 사람일수록, 깨인 사람일수록,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발적으로 두
번째 방법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사실이었다. 그 방법이 가장 좋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더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가.
그같이 생활과 직결된 문제에 있어 인류가 스스로를 기만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주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깊이 생각해보자.
  밀을 구하기 위해서 3천6백만 파리시민 전체가 오데사를 향해 떠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첫 번째 대안은 무용지물이다. 소비자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직접 그 일을 할 수는 없다. 공무원이든 장사꾼이든 중간에 매개자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원리상으로는 첫 번째 방법이 가장 원초적인 수단임을 명심하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밀을 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기의 책임이다. 그것은 누구나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이다. 누가 되었든 간에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해 준다면
그는 그 일에 대해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 중간상들도 자신들의 일해 대해서
보상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사회주의자들은 중간상들을 기생충이라고 부른다. 기생충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공무원과 중간상 중 어느 쪽이 더 기생충인가.
  기업들(물론 그 기업들이 자유롭다는 가정하에서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은 자기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기후의 변화를 연구해야 하고, 매일매일 곡물의 생장상태를 확인해야 하며,
세계곳곳에서 들어오는 보고서를 확인해야 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등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데 최대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기업들의 최대 관심사는 가장
싼값에 사서 모든 비용을 축소하고, 가장 작은 노력으로 가장 큰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늘 배를 대기시켜 놓고 있으며, 세계 방방곡곡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 프랑스의 장사꾼들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장사꾼들까지고
프랑스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사업에 필요한 비용을 최소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간의 경쟁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절약의 이익을 소비자들에게 돌려주도록 한다. 일단 밀이 도착하면
기업인들은 위험을 줄이고 이익을 남기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그것을 팔아치우려고
한다. 그리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런 과정은 다시 시작된다.
  기업들이 이 지역에 식량을 분배하는 기준은 가격이다. 식량가격이 가장 높은 곳,
즉 가장 식량이 귀한 곳부터 그 배급이 시작된다. 따라서 이 두 번째 방법보다
배고픈 자의 욕구를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이같은 체제의 진정한 묘미는 그것이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기업인들에게 운임과 이적비와 보관비와 수수료 등을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라. 어떤 체제를 택하든 소비자들이 식량을 운반하고 보관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을 방법이 있는가. 서로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는 중간상들에
의해서 그 일들이 수행될 때, 소비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최소화된다. 그리고
마르세이유의 상인들이 파리의 상인들을 위해서 일하는데, 파리의 상인들이
마르세이유의 상인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리 없다.
  만약 사회주의자들이 의도하는 대로 국가가 중간상들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대중들에게 돌아갈 절약의 이점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소매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4만 개 자치단체의 대표자들이 어느 날
밀을 구하기 위해 오데사에 도착했다고 해보자. 그때 밀의 가격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에게 운송비 절감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공무원들이 중간상들보다 더
적은 수의 배와 선원과 창고를 사용하면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또 그들이 더 짧은 항로를 택하겠는가. 그들이 지출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을 방법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중간상들이 비용을 절약한다고 할 때, 그 절약분이
모두 중간상들의 이윤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공무원들과 당신의 대표자들이 거룩한
동포에게 사로잡혀 오데사까지 공짜로 갈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사용한 시간에 대해서도 보상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대가는 중간상들이 취하게 될 2__3퍼센트의 이윤보다 1천 배나 더 많을지
모른다.
  게다가 그런 방식으로 식량을 배분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거두어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도 한번 생각해보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의롭지 못한
것들과 낭비를 생각해보라. 정부가 져야만 할 책임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라.
  이처럼 엉터리 같은 생각을 만들어내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서
그것을 퍼뜨린 사회주의자들은 가소롭게도 자신들을 '미래를 내다보는 자'라 부른다.
미래를 내다보는 자라, 이 말은 이 신사분들이 보통사람들보다 더 먼 앞날을 내다볼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자신들의 잘못이 있다면 미래를 너무 멀리 내다본
것이라고, 그래서 중간상들이라는 기생충이 살아남아 있는 것은 아직도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들의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오히려
그 반대가 옳다. 지금의 사회주의자들만큼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판치는
야만적인 세상을 어느 시대에 다시 찾아볼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사회주의자 도당들은 사람들간의 자유로운 결합에 대해 끊임없이
반대한다. 자신들이 끊임없이 날조해내는 어떤 형태의 사회보다도 자유로운 사회가
인간들간의 진정한 결합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옷이 만들어지려면 수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땅의 구획을 짓고 비료를 주고
배수를 하고 씨를 뿌려야 한다. 거기서 수확한 것들로 양을 기르고 털을 깎아야
한다. 깎은 털을 실로 잣고 옷감을 만들고 염색해야 한다. 그것을 다시 자르고
바느질을 해서 겨우 옷 한 벌이 만들어진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같은 활동이
가능하려면 직접 관련되는 일 외에도 농기구와 양의 우리와 공장과 석탄과 기계와
마차 등 수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만약 사회라고 하는 것이 인간들간의 진정한 결합이 아니라면, 곡괭이질에서부터
마무리 바느질에 이르기까지 옷을 만들기 위한 전 과정을 자기 스스로 해내야만
한다.
  그러나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는 본능적 성향 덕에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 작업이 분담된다. 한 가지의 특화된 작업만으로도 하나의 산업이 유지될
수 있게 될 때까지의 분업의 정도는 심화되어 간다. 그리고 각각의 과정을 통해서
부가된 가치에 비례해서 전체의 이익이 배분된다. 만약 이것을 인간들간의 진정한
결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무엇이 결합인지 내게 알려달라.
  어느 누구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기 때문에, 모든 노동자들은 서로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주어야 하며, 공통의 목적을 위해서 서로
도와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해보았을 때, 각각의 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서로서로에 대해서 중간상(또는 매개자)들이다. 예를 들어 운송업자와
방적업자와 방직업자가 있다고 해보자. 만약 중간상을 기생충이라고 부른다면,
운송업자는 그 나머지 업자들에게 기생충 같은 존재가 된다. 하지만 운송이
필요없는 일인가.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운송업자는 자신의 시간을 들였고, 고통을 참아내지 않았는가. 실을
잣고 천을 짠 사람들이 운송업자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하였다고 생각하는가. 일의
본질에서 차이가 나는가. 이 세 업자 모두 이익의 분배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이 세 사람 모두가 협상에 의하여 결정되는 가격을 받는 것에
잘못이 있는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형성된 분업이라고 해서 공통의 이익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가. 사회주의자들이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인간들간의
자유로운 결합관계를 깨고 분업을 파괴하며, 인류문명의 발전을 유보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자기의 위치를 자기자신의 책임하에
스스로 결정하고 거래한다고 해서, 그 모든 행위들을 이기적인 동기로 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인간들간의 자발적인 결합의 가치가 덜해지는가. 소위
개혁가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을 우리들에게 강요하고 모든 사람을 자신의
의지에 따르게 해야만 인간들간의 결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자칭 미래를 예견한다고 자인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생각하면 할수록 자기들은
오류를 범하지 않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지를 사람들에게 강요해도
괜찮다는 식의 무지한 생각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나의 논의가 너무 지엽적인 문제로 빠졌더라도 독자들께서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생시몽주의자들(Saint-Simonians)이나 푸리에(Fourier)가
주창한 공동체주의 옹호자들, 카베(Cabet)가 주창한 이상향 이카리아(Icaria)를
흠모하는 자들의 책에 고무되어서, 중간상들을 비난하는 장광설이 언론과 의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리고 노동과 교환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생각해볼 때, 다소 지엽적이긴 했지만 반드시 쓸모없는 일만은 아니었다고
자위해본다.

  7. 무역에 대한 규제

  한 보호주의자 선생(내가 아니라 샤를 듀팽(Charles Dupin)이 붙인 이름이다)께서
자기의 철광석 광산과 제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연조건이 더 나은
벨기에가 우리의 보호주의자 선생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프랑스에 철을 팔기
시작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착한 플란더스(Flanders) 사람들 덕에 과거보다 싼
가격으로 철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기적인 프랑스 사람들, 특히 못 제조업자,
철물제작자, 달구지목수, 기계공, 대장장이, 농부 같은 사람들은 철을 사기 위해서
중간상을 벨기에에 보내거나 자신이 직접 거기까지 가기도 했다. 하지만 보호주의자
선생은 이런 모든 것들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직접 그들을 혼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손해를 보는 것은
자기뿐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만 했다.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 장총을 메고 권총을 허리에 차고, 탄창을 가지고서 내가 직접
전장에 나아가리라. 거기에서 나는 철물제작업자들과 못을 만드는 놈들과
대장장이와 기계공들과 열쇠장이들처럼 나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놈들을 모두 죽여버리리라. 그렇게 본때를 보여준다면 그들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겠지.
  그런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몇 가지 걱정이 앞을 막아섰다. 그는 이렇게
자문해보았다. 가만 있자, 그러다가 나의 동포인 프랑스인들과 나의 적인
벨기에놈들이 맞공격을 해오면 어떻게 하지. 내가 그들을 죽이기 전에 오히려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는걸. 게다가 내 하인들을 모두 전쟁터에 내보낸다고 하더라도 전선
전체를 다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안고. 결국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겠구먼.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자유시장의 힘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돌아서려는 순간, 보호주의자 선생의 머리에 기막힌 생각이 번뜩였다.
  파리에 법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 것이다. 법이라는 것이
뭐야? 하고 그는 스스로 자문해보았다. 법이란 일단 공포되고 나면, 그것이 좋든
나쁘든 간에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만 하는 것이잖아.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경찰이 조직되고, 또 그 경찰을 유지하기 위한 인력과 돈은
국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되지.
  그러니 내가 그 멋진 법공장으로부터 "벨기에산 철의 수입을 금지한다"고 규정한
법을 얻어낼 수만 있다면, 나는 아주 횡재를 하는 셈이지. 내 하인들을 직접 전선에
내보내지 않더라도 정부가 대신 그 일을 해줄 테니 말이야. 정부는 철을 사용하는
금속노동자들이나 열쇠공, 못제조업자, 대장장이, 기능공, 기계공, 농부 같은
사람들의 아들들을 2만 명이나 채용해서 세관에 앉혀 놓을 것이고, 그들이 철의
수입을 막아주겠지. 그들에게 월급을 주려면 2천5백만 프랑 정도는 필요할 텐데, 그
돈은 다시 금속노동자들이나, 열쇠공, 못제조업자, 대장장이, 기능공, 기계공 같이
내가 만든 철을 사용할 사람들에게서 거두어들이면 될 거야. 돈 한푼 안 들여도
나의 사업은 내가 직전 전선에서 싸울 때보다 훨씬 잘 보호받게 되지. 브로커들의
농간에 놀아날 필요도 없을 거야.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철을 팔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그저 나의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들을 보면서 즐기면
그만이지. 그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들이 유럽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정말 멋진 작전이야. 약간 귀찮긴 하겠지만, 분명히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음이 분명해.
  그래서 우리의 보호주의자 선생은 법공장으로 향했다(다음에 언젠가는 보호주의자
선생이 법을 만들어내기 위해 저지르는 어둡고 비밀스런 거래들에 대해서 얘기할
기회를 갖겠다. 하지만 오늘은 공개적인 활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그는
그곳에서 의원들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께 이렇게 말한다.
  "벨기에산 철이 프랑스에서 10프랑에 팔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같은 값으로
팔 수밖에 없지요. 내가 받고 싶은 가격은 15프랑인데 그 괘씸한 벨기에산 철
때문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벨기에산 철의 수입을 금지한다'라는 법을 하나
만들어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장 가격을 5프랑으로 올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좋은 일들이 생기지요."
  "1백 킬로그램당 5프랑씩 더 받게 될 테니 나는 더 부자가 되겠지요. 그러면 내
광산의 채굴량도 늘어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것입니다. 나와 내
고용인들이 더 많은 돈을 소비할 테니 우리들에게 물품을 공급하는 사람들도 이득을
보겠지요. 그 공급업자들은 다른 공장들에게 더 많은 주문을 낼 테니 온나라의
경제가 번영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가 모든 방향에 걸쳐
수많은 동심원을 만들어내듯이 당신이 내 지갑 속에 넣어주는 돈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이 말에 매혹된 나머지, 그리고 법 하나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부를 그처럼 쉽게
늘릴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서, 입법자들은 수입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부를 만드는 것이 이처럼 쉬운 것이라면 도대체 힘들게 노동을 하고 저축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람. 법 하나만 잘 만들면 그만인 것을."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보호주의자 선생이 예측했던 일들은 모두 현실로 나타났다.
하지만 결과들도 같이 발생했다. 즉 그의 추론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불완전한 추론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가 특혜를 요구하면서 내세운
것들은 보이는 효과뿐이었다. 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효과들은 무시해버린
것이다. 실제로는 세 사람이 있는데 그가 언급한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했든지 아니면 잘 모르고 했든지 간에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그같은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다.
  보호주의자 선생의 금고 속으로 들어간 5프랑이 그 자신과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잡게 되는 사람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5프랑이 저 달로부터 공짜로 떨어진 것이라면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돈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금속노동자,
못제조업자, 목수, 대장장이, 농부, 건축업자같이 선량한 시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보호주의자 선생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일반시민들에게는 손해가
되는 것이다. 보호주의자 선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5프랑이 국내산업을 보호하는
데에 쓰인다고 하지만, 그 정도라면 선량한 시민들에게 그 돈이 있을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래는 다른 데에 던져졌을 돌이 법이 그것을 금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 던져졌을 뿐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효과가 보이는 효과를 상쇄한다. 그리고 이 전체의 과정은
정의롭지 못하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그같은 부정의가 법에 의해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그들에 가려진 제3의 인물이 있다.
나는 그를 전면에 내세우고 싶다. 그래서 문제의 그 5프랑이 또다른 손해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그래야만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될 테니까 말이다.
  우리의 굿펠로우씨에게 노동의 대가로 벌어들인 15프랑이 있다(아직 벨기에산
철의 수입규제가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를 가정한다). 그가 그 15프랑으로 무엇을
할지 한번 생각해보라. 그 가운데 10프랑을 가지고 모자 하나를 산다. 그 모자를
산다는 것은 벨기에산 철 1백 킬로그램의 값을 치른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남은 5프랑을 강물에 던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만족에 필요한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부세(Bossuet)(주15)가 지은 "세계사 강론"
같은 책을 구매하는 데에 그 돈을 지출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굿펠로우씨는 국내산업을 진흥시키는 데에 다음과 같은 지출을 한
셈이다.

  파리의 모자제조업자에게 10프랑
  출판업자에게 5프랑

  굿펠로우씨 자신을 생각한다면 15프랑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만족을 얻은
셈이다.

  첫째, 1백 킬로그램의 철
  둘째, 책

  이제 벨기에산 철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우리의 굿펠로우씨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철의 가격이 15프랑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굿펠로우씨는 가진 돈을 모두
보호주의자 선생에게 갖다 바쳐야 한다. 1백 킬로그램의 철 이외에 책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굿펠로우씨가 5프랑을 손해보았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렇다는 사실을 부인할 자가 있는가. 결국 수입제한 때문에 가격이
높아져서 소비자들이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사람들은 그만큼 국내산업이 이득을 볼 것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 수입금지법으로 인해서 바뀌는 것은 돈의 행방일 뿐이다. 그 법이
없었더라면 모자제조업자와 출판업자에게 나누어졌을 돈이 제철업자에게로 몰려가는
것일 뿐이다.
  보호주의자 선생이 전선에서 직접 행사하려고 했다가 법을 이용해서 행사하고
있는 그 폭력은 도덕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세상에는 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한 약탈도 부도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그보다 통탄스러운 상황은 없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불법적인 약탈이든 합법적인 약탈이든 간에 그 경제적 효과는
같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이다. 하지만 문제의
차분히 생각해본다면 합법이든 불법이든 간에 약탈로부터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수입규제가 보호주의자나 그의 산업(또는 당신이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 국내산업)에 5프랑의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두 가지 종류의 손해도 같이 발생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0프랑이면 될 것을 15프랑을 주고 사야만 하는 소비자인 굿펠로우씨와, 그 5프랑의
차이 때문에 수요를 잃게 된 다른 국내산업들이다. 이같은 손해들이 과연 받아들인
만한 손해인가 스스로 판단해보라.

  도덕: 강제력을 사용하는 것은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이다. 하나님!
강제력을 사용해서 무엇인가를 생산해낼 수 있었다면 프랑스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부유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8. 기계

  "기계에서 저주 있으라. 기계의 힘이 커진 결과 매년 수백만의 노동자로부터
일자리와 임금과 빵을 뺏어가고, 그들을 가난으로 몰아넣고 있구나. 기계에게 저주
있으라."
  무지와 편견으로부터 나오는 이런 아우성이 신문지면을 덮고 있다. 하지만 기계를
저주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 그 자체를 저주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같이 말도 안되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주16)
  만약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해보자. 그것은 결국 어리석고 정신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나라,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생각하고, 연구하고,
발명하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선사받지 못한 나라에게만 복지와 부와 행복이
주어진다는 말이 된다. 만약 그들이 옳다면 철, 불, 풍력, 전기, 화학과 물리법칙 등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나라는 누더기와 비참한 오두막과, 가난과 정체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루소가 말했듯이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타락한
동물이다"라는 말이 맞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틀렸다. 인간이란 한순간이라도 더 작은 노력으로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하지 않는 적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들은 생각하고 노력하고
발명을 한다. 따라서 만약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인간은 쇠퇴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인간들의 지적인 열망이라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만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기계가 풍부한 랭카스터(Lancaster) 지방의 주민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기계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아일랜드(Ireland)로 갔어야 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야만의 그늘이 문명을 가리고, 또 무지하고 미개한 시대에
문명이 만개했어야 했다.
  이같은 모순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것 뒤에는 무엇인가 숨겨진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는 그처럼 가려진 것을 찾아내려고 한다.
  수수께끼의 열쇠는 바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 지금부터 보이려는
것은 내가 여태껏 해왔던 것들의 반복일 뿐이다. 문제의 성격이 같기 때문이다.
  인간은 거래를 하려는 자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상대방이 외국의
제조업자든, 아니면 국내의 기계제조업자든 간에 강제적으로 막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노력을 아끼기 위해서 거래에
나서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의 논리는 양쪽 모두 다 같다. 그같은 거래를 허용하면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진정한 효과는 일자리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인간의 노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동일한 장애물 즉 같은 성격의 강제력이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국내에서 경쟁하는 것을 금지하고, 기계가 노동과 경쟁하는 것을 금지한다.
인간으로부터 자유를 뺏아가는 것만큼 인간의 자연스런 성향을 질식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는 입법자들이 한 종류의 경쟁만을 금지하고 다른 경쟁들에
대해서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저 쳐다보고만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그
나라의 입법자들이 일관적이기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잘못된 길을 가다 보면 반드시 모순이 나오게
마련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류는 이미 파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원칙이 완벽하게 실천된 것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다른 곳에서 말했던 것처럼 부조리는 모순의 한계이다. 거기다가 한마디 더
보태고 싶다. 부조리는 모순의 증명이다.
  이제 우리의 논증을 시작해보자.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굿펠로우(James Goodfellow)씨가 2프랑으로 두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작업량을 반으로 줄여줄 수 있는 도구를 발명하게 되었다. 굿펠로우씨는
한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1프랑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노동자 한 명을 해고했다는 것, 그것은 보이는 효과이다. 사람들은 이것만을 보고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가. 자유는 평등과 양립할 수
업어. 인간의 마음이 자연을 정복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 한 노동자는 영원히
빈곤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지. 어쩌면 굿펠로우씨는 두 명의 노동자를 계속
고용할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러나 두 명의 임금을 합쳐서 1프랑만 주었겠지.
노동자들끼리 서로 경쟁할 것이기 때문이지. 그렇게 해서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거야. 사회를 개조해야 해."
  당초의 전제를 인정한다면 그럴듯한 결론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전제와 결론이 모두 틀렸다. 보이지 않는 다른 반쪽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인해서 굿펠로우씨가 돈을 절약하게 되었다는 것과, 절약된
돈의 효과가 고려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발명품으로 인해 1프랑만 가지고도 같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1프랑은 여전히 그의 손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노동을 제공할 사람이 한 사람 더 생겼고, 또 남은 1프랑을
가지고 그를 고용할 자본가가 더 생긴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만나서 결합하게
된다.
  노동의 공급과 수요, 그리고 임금에 대한 수요와 공급 사이의 이같은 관계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과거에 두 사람의 노동자에 의해서 수행되던 작업이 이제 새로운 발명품이
등장함으로 인해 한 사람의 노동자만으로, 그리고 1프랑만으로도 수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나머지의 노동자는 그 절약된 1프랑을 가지고 다른 일을 하게 된다.
  변한 것이 무엇인가. 새로운 발명으로 인해 국가 전체로 보면 만족수준이 높아진
것 아닌가. 다시 말해서 발명이란 싼값으로 자연을 정복하는 수단이며, 그리고
싼값으로 이윤을 만들어주는 수단이다.
  이 말을 듣고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꼬리를 물고늘어질지 모르겠다.
  "기계를 발명해서 나오는 모든 이윤은 자본가의 몫이다. 노동자계급이 단기적으로
보는 손해야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이 새로운 기계로부터 얻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이 말한 바가 옳다면 새로 도입된 기계가 하는 일이란 자원을
재배치하는 것 이외에 무엇인가. 그로 인해서 자원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당신은
말하지만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 아닌가."
  내가 말한 것에 대한 모든 반박논리마다 일일이 다 대꾸할 수는 없다.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은 기계에 대한 편견과 무지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대꾸하는 것이다. 새로 도입되는 기계로 인해
과거에 그 분야에 묶여 있던 노동력이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또 기계로 인한
노임의 절약분은 다른 분야에서의 추가적인 고용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보이고
싶을 뿐이다. 이 추가적인 노동력과 돈이 결합되면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생산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기계의 도입으로 인해 나타나는 최종적인 결과는
과거와 같은 노동력으로 더 많은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추가적인 만족은 누구의 차지가 될까?
  그렇다 당신들의 말대로 처음에는 그 기계를 최초로 사용하게 될 자본가, 또는
발명자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행동에 대한 대가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단계이다. 새로운 기계로 인해서 얼마만큼의 노동력이
풀려나든지 간에 그 결과 절약되는 돈은 새로운 노동력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게 된다.
  자본가들은 어떨까? 자본가들끼리의 경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처음에
얼마의 돈을 절약할 수 있든 간에 자본가들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제품의 가격은
그가 절약한 돈의 크기만큼 낮아지게 된다.
  이런 단계에 들어서게 되면, 새로 발명된 기계의 덕을 보는 것은 더 이상
발명자나 자본가가 아니다. 최종적인 수혜자는 소비자이며 노동자까지를 포함한
대중이며 결국 인류 전체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있다. 즉 가격의 하락으로 인해서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 절약분은 임금으로 지불될 금액을 늘려놓게 된다는 사실이다. 기계가
임금을 빼앗아간 것 같지만 결국은 그 돈을 다 돌려주는 것이다.
  다시 앞의 예로 돌아가 보자. 우리의 굿펠로우씨는 임금으로 2프랑을 주어야만
했다. 이제 새로운 기계가 발명됨으로 인해 1프랑만 주면 되는 상황이 되었다.
  만약 최종 생산품의 가격이 변하지 않는다면, 같은 물건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노동자의 숫자는 하나가 줄어든다. 그것이 보이는 효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굿펠로우씨가 절약한 나머지의 1프랑은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다 보면 가격인하 경쟁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결과
굿펠로우씨가 절약해온 그 1프랑은 없어지게 된다. 그는 더 이상 그 1프랑을 사회의
고용 1인을 늘릴 수 있도록 방출하지 않는다. 그 1프랑은 다른 누군가의 차지가
된다. 누구든 그 상품을 사는 사람은 1프랑 낮은 가격을 지불할 것이기 때문에
1프랑 절약분은 임금으로 지급될 돈을 늘려놓는다. 이 역시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다른 설명방식이 제안되기도 한다.
  "기계는 생산비를 낮추고 제품의 가격을 낮춘다. 그 결과 그 제품에 대한 소비가
늘어날 것이고, 그것이 다시 생산을 촉진하여 결과적으로 기계가 발명되기 전보다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남의 글을 인용하고 억지로 짜맞추는 등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린다. 매우 그럴듯하지만 과학적이지는 못한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이 맞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만약 가격이 하락함에도 불구하고 소비가
늘지 않을 경우, 기계는 고용을 줄인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틀린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모자를 쓰고 다니는 나라가 있다고 해보자. 기계가 도입되어
모자의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모자 소비가 두배로 늘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럴 경우 그 나라 노동력의 일부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잘못된 추론방식을 택한다면 그렇겠지만, 나의 추론방식으로는 그렇지 않다.
모자에 대한 수요가 전혀 늘지 않더라도 임금으로 지불될 돈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기계가 사용되지 않았더라면 모자산업으로 갔어야 할 돈들이 소비자의 손에
남아 있게 되고 그 돈은 결국 기계로 인해 풀려난 노동력에게 임금으로 지불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산업들의 발전이 촉진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들이 바로 사실이다. 과거의 신문값은 80프랑이었다. 이제
그 값은 48프랑이 되었다. 구독자는 32프랑을 절약하게 되었다. 그 32프랑이
신문산업의 다른 제품을 구입하는 데에 쓰여질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어딘가에는 그 돈이 쓰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중의 1프랑은 더 많은
신문을 사는 데에, 다른 1프랑은 음식을 사는 데에, 다른 1프랑은 더 좋은 옷을 사는
데에, 그리고 더 좋은 가구를 사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산업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 각 산업들을 연결하는 통로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광대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한
부분에서의 절약은 다른 모든 부문의 이득이 된다. 이것은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절약한다고 해서 일자리가 줄어든다든가 임금이 떨어지는 법은
없다.(주17)

  9. 신용

  늘 그래 온 것이긴 하지만 지난 수년간 특히 더 심해진 것이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부를 나누어주기 위해서 모든 이들에게 융자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난 2월 혁명(주18) 이후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같은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기사들이 파리의 신문들에만 1만 건이 넘는다고 하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환상만으로는 어느 것도 해결할 수가 없다. 이같은 의미에서 볼 때, 융자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생산물과 경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며, 경화와
단순한 불환지폐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그같은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혼돈 때문이었다.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화, 주화, 은행권 등 교환을 매개하는
수단들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융자의 실제 알맹이는 생산물 그 자체이다.
  어느 농부가 쟁기를 구입하기 위해서 50프랑을 융자받을 한다면, 실질적으로 그가
빌리려 하는 것은 50프랑이라는 돈 그 자체가 아니라 쟁기인 셈이다.
  그리고 어느 상인이 집을 사기 위해서 2만 프랑을 융자받으려 할 경우, 그가
빌리려고 하는 것은 2만프랑이라는 돈이 아니라 집인 셈이다.
  돈이 필요한 것은 여러 거래상대방간의 거래를 원활하게 해주기 위함일 뿐이다.
  피터(Peter)는 쟁기를 가지고 있고 제임스(James)는 돈을 가지고 있다.
윌리암스(William)는 쟁기를 빌리고 싶다. 그런데 피터는 쟁기를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 제임스는 돈을 빌려주려고 한다. 윌리암스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그는 제임스에게 돈을 빌려서 그 돈으로 피터에게서 쟁기를 구입한다.
  누구도 돈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 돈을 빌리지는 않는다. 돈을 빌리는 것은
생산물을 얻기 위함이다.
  어느 나라든 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생산물들을 거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통되고 있는 돈의 액수가 얼마가 되었든간에, 그리고 원하는 물건이
무엇이었든 간에(그것이 쟁기이든, 집이든, 도구이든, 식량이든, 원료이든 간에)
빌리는 사람들이 빌릴 수 있는 것의 총량은 그것의 소유자들의 빌려주는 것의
총량보다 클 수 없다.
  누군가 무엇을 빌린다는 것은 빌려줄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그리고 융자란 바로 그 빌리는 행위임도 잊지 마라.
  사정이 이럴진대, 융자기관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빌리려는 자와 빌려주려는 자들이 서로 서로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해주고,
또 서로 상대방이 원하는 조건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뿐이다. 그들이
개입해서 빌려주려는 것과 빌리는 것의 총량을 늘릴 수는 없다.
  하지만 요즈음의 사회개혁자들이 원하는 대로 하자면 금융기관들은 그같이
불가능한 일을 해내야만 할지 모른다. 소위 사회개혁가라는 이름의 신사분들이
원하는 것은 쟁기와 집과 도구와 식량과 원료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처럼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바로 국가의
지급보증이라는 수단을 통해서이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는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쉽사리
눈에 뜨이지 않는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 두 가지를 다 바라보자.
  쟁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들인데, 실제로 프랑스내에 존재하는 쟁기는
하나뿐이라고 생각해보자. 그 하나뿐인 쟁기의 주인을 피터라고 해보자. 존(John)과
제임스 두 사람이 그 쟁기를 빌리고 싶어한다. 존은 평소에 정직했고, 재산도
있으려니와 명망도 있기에 사람들은 그를 신뢰한다. 즉 존에게는 신용이 있는
것이다. 반면 제임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피터는
자신의 쟁기를 존에게 빌려주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과정에 국가를 개입시키고 싶어한다. 국가는 피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가진 쟁기를 제임스에게 빌려주어라. 제임스가 상환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국가가 나서서 해주겠다. 우리의 지급보증은 존이 스스로의 신용으로 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물론 우리 국가라는 것이 그 스스로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납세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이면 될 테니 얼마나 안전한가. 만약 필요하다면 우리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서 이자와 원금을 모두 갚아주겠다."
  그래서 피터는 제임스에게 그 쟁기를 빌려주었다. 그것은 보이는 결과이다.
  "우리의 계획이 이루어낸 성공을 보라. 국가가 개입한 덕에 가난한 제임스가
쟁기를 쓸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제임스는 더 이상 손으로 삽질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제 그는 스스로 재산을 만들어갈 것이다. 이는 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도 큰 이득임이 분명하다."
  신사분들, 제발 그러지 마시오. 그것이 나라 전체에 이득이 된다고요? 보이지는
않는 결과까지를 생각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거요.
  그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하나뿐인 쟁기가 제임스한테 간 결과 존이 그
쟁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제임스가 손으로 삽질을 하는 대신
쟁기를 쓰게 된 결과 존은 쟁기 대신 손으로 삽질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결국 사람들이 추가적인 융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융자의 재배분일 뿐이다.
  그들이 또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같이 융자를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존에 관한 일이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정직과 능력만으로 융자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부당하게도
자신의 권리를 뺏긴 셈이다. 둘째는 납세자들의 문제이다. 자신과 별관계도 없는
일을 위해서 부당하게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존에게도 똑같이 해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빌려줄 수 있는 쟁기의 숫자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뿐인 쟁기가 둘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의 주장은
빌려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빌릴 수 있다는 결론으로 귀착되고 만다.
  내가 논리를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한
금융제도라고 할지라도 정부개입을 통해서 융자를 늘린다고 해서 융자 총액이 늘
수는 없다. 다만 재분배 효과만이 있을 뿐이다. 한 시점을 놓고 볼 때, 한 국가내에
존재하는 자본의 총량은 일정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어떤 용도로든 쓰이고 있다.
신용이 없는 자들의 융자금 상환을 국가가 보증해줌으로 인해 빌리려는 자들의
숫자가 커지고 그 결과(납세자들의 부담을 통해서) 이자율은 높아진다. 하지만
빌려주려는 사람들의 숫자나 융자액의 총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신용거래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결단코 그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법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차입을 장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차입을 방해하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제도속에 신용이 형성되고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다면
법으로 하여금 그것을 제거하게 하라. 그것만큼 바람직한 것은 없다. 그 이상의 것을
하려는 사회개혁가가 있다면 그는 사회개혁가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주19)

  10. 알제리아 문제

  네 명의 발언자들이 서로 청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목청을 높이고 있다.
처음에는 한 목소리를 내다가 나중에는 제각각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프랑스의 힘과 영광에 대해서 말한다.
광대한 프랑스 식민지의 미래와 잉여인구의 재배분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씨를 뿌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들의 달변이 도달하는 궁극적인
귀착점은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이다.
  "5천만 프랑의 예산을 통과시켜 주시오. 그 돈으로 우리는 알제리와(Algeria)에
항구와 도로를 만들어 우리의 주민들을 실어나를 것이고, 그들을 위해 집을 짓고
터를 닦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프랑스 노동자들의 실업이라는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며, 아프리카의 고용을 늘릴 것이며, 마르세이유(Marseilles)의
교역량을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5천만 프랑이 쓰여지는 곳만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 돈은 이미
정부의 재정에 들어온 이후의 사태만을 주목한다면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 돈의 출처를 생각해본다며 답이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 돈이 쓰여지면서
좋은 일들을 하지만 그 돈을 거두면서 자행된 나쁜 일들 또한 생각해보라. 그들의
주장처럼 한정된 시야에서 본다면 모든 것이 이득이다. 바베리(Barbary)에 지어지는
집은 눈에 보이는 결과이다. 바베리에서 만들어지는 이윤과 일자리, 프랑스에서의
실업의 감소, 마르세이유(Marseilles)에 주어지는 교역량의 증가 등은 모두 보이는
결과이다.
  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도 있다. 국가가 지출하는 그 5천만 프랑은
납세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가 아니었더라면 납세자들이 그 돈을
지출했을 것이다. 공공지출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좋은 것들 뒤에는 납세자들의
사적 지출이 줄어듦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해로운 것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굿펠로우씨가 공들여 번 5프랑을 가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가정을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하지만 그 돈을 어딘가에 쓰려고
하지 않았다면 왜 그 돈을 벌려고 노력했겠는가. 그 돈으로 정원에 담을 치려고
했었다면 그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농지에
배수시설을 설치하려 한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농지에 배수시설을
설치하려 한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도구를 더 장만하려고 한 사람은 그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세금을 내지 않았더라면 더 좋은 옷을 입을 수도, 더 잘 먹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들의 교육을 더 잘 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딸의 지참금을 더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선단체에 가입했을지도 모른다. 세금을 거둠으로 인해서 이 모든
것들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직접적으로는 그 돈을 이용해서
얻게 될 직접적인 만족들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간접적으로는 도랑파는 사람, 목수,
대장장이, 양복장이, 동네 서당 훈장들의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들 두
가지가 다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우리 프랑스의 시민들은 알제리아(Algeria)의 미래에 대해서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알제리아의 미래가 좋아지는 사이에
프랑스 자신의 형편이 나빠지는 것도 걱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내게 마르세이유의
번영을 말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세금이 거두어졌고 그 결과 다른 지역에서 산업이
쇠퇴해가고, 일자리가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싶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바베리에 옮겨간 주민들 덕에 남아 있는 인구들이 짐을 덜게 된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들을 알제리아까지 수송하기 위해 그들이 국내에서 소비했을 자본의 두세 배나
많은 자본이 빠져나갔다 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주20)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공공지출이 가져오는 좋은
것들의 뒤에는 더 많은 사악한 것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알아채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다해 독자들에게 두 가지 면을 다
고려하라고 권하는 바이다.
  공공지출의 문제를 검토할 때는 그 지출 자체의 효용이 어느 정도인가만을 따져야
한다. 그것으로 인해서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식의 논리는 무시해버린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환상일 뿐이다. 공공지출로 인해서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이라면
민간지출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공공지출과 고용은 서로 관계가 없는
문제들이다.
  알제리아에 투자될 공공지출 그 자체의 필요성을 이 글에서 논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해야 할 것 같다. 경제적 이득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세금을
거두어서 공공지출을 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고?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첫째, 어떤 형태의 조세든 간에 일단 시행이 되면 어느 정도는 정의의 원칙이
침해당한다. 제임스 굿펠로우씨가 1백 수sou를 벌려고 애썼던 것은 그 돈으로
무엇인가 만족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돈을 거두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준다는 것은 그를 불쾌하게 할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돈을 거두는
사람은 왜 그 돈을 세금으로 거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설명할 의무가
있다. 국가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은 정말 메스껍다.
  "당신에게 거둔 1백 수를 가지고 다른 누군가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줄 것이다."
  제임스 굿펠로우씨는 (깨닫자마자)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세상에, 그럴 거라면 내가 직접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겠소."
  납세자의 이같은 주장을 무시하고 나면 정부의 다른 주장들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예산당국과 제임스씨간의 논쟁은 아주 단순화되어 버린다. 정부가
제임스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이 스스로의 안전을 보호하는 대신 우리가 경찰관을 고용하려고 하오. 또
당신이 매일 건너다니는 도로를 만들고, 당신의 재산과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법관을 고용할 것이고, 국경선을 지키기 위해서 군인들을 고용하려고 하오. 그러니
당신이 1백 수를 세금으로 납부하시오."
  사정이 그렇다면 제임스 굿펠로우씨는 두말 없이 그 돈을 낼 것이고, 내가
지금까지 공공정책을 비난한 말들은 무의미해져 버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부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당신에게서 1백 수를 받아가려고 하오. 그 중의 1수를 떼어내서 만약
당신이 농사를 망쳤을 때 당신에게 보상금으로 쓰려고 하오. 또는 당신이 당신
자녀를 가르치고 싶어하지 않을 때 우리가 대신 그를 가르치는 데에 쓸 수도 있을
테고, 1백 가지 음식이 차려진 장관들의 101번째의 음식을 차려놓는 데에 쓸 수도
있을 것이오. 그 나머지의 돈으로는 알제리아에 주택을 짓고, 알제리아 정착민들을
지원하고, 알제리아 주둔군들과 그들을 감독하는 지휘관들을 지원하려 하오."
  우리의 불쌍한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외칠 것임이 분명하다.
  "법이 이런 것이라면 도대체 정글의 법칙과 다를 것이 무엇이오."
  물론 정부도 제임스가 이처럼 반응하리라는 것을 미리 예견한 터라 나름대로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정부는 그 1백 수가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미리 역설한다. 장관의 저녁상을 차리는 요리사와 상인들을
부각시킨다. 정부는 또 5프랑으로 일자리를 얻게 되는 식민지 정착민들과 군인들과
장군들을 부각시킨다.
  다시 말해서 정부는 보이는 효과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제임스가 보이지
않는 결과들에 대한 추론을 할 줄 모른다면 이쯤에서 속아넘어가 버리고 말 것이다.
내가 똑같은 말을 반복해가면서까지 제임스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부의 지출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재배분할 뿐이다. 이
사실로부터 중대한 두 번째의 반론이 제기된다. 일자리의 재배분은 지구상의
인구분포와 관련된 자연법칙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5천만 프랑이 납세자들의 손에
남아 있었다면, 그 납세자들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4만 자치단체들에서 고용이
창출되었을 것이다. 그 5천만 프랑은 모든 이들과 국토를 이어주는 끈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돈은 최대한 많은 숫자의 노동자들과 산업들로 분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시민들로부터 그 돈을 빼앗아 다른 장소에다 쏟아넣으려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본토로부터 노동력이 이동할 것이다. 또 그에 비례하여 국적을 버리는
노동자들과 유랑인구들이 생겨난다.
  감히 말하건대 그렇게 자리를 옮긴 노동자들은 세금으로 지원되는 돈이 바닥날
경우 위험한 지경에 처할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프게도 이같은 일들은 쉽게 눈에 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같이 쉽고 멋지게 얻어지는 것들에 갈채를 보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같은 정책을 반복해달라고, 그리고 확장해달라고 요구한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만약 그 돈이 납세자들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면 같은 숫자의,
그리고 더 유용한 일자리들이 프랑스 국내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조세를 거두어서
그 돈을 알제리아에 투자할 경우, 종래의 일자리들은 없어지고 만다.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11. 절약과 사치

  보이는 결과가 보이지 않는 결과들을 가져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정부의
공공지출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이같은
정치경제학적 현상은 도덕적 기준을 망쳐놓기도 한다. 그것은 국민들로 하여금
도덕적 이해관계와 물질적 이해관계가 서로 대립되는 것인 양 생각하도록 한다.
그것만큼 맥빠지고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잘 생각해보라. 자식에게 절약과 절제를 가르치고 싶어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다 겉치레와 사치를 죄악시한다.
이것은 지극히 좋고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상한 풍조가 만연되고 있다.
  "재물을 쓰지 않고 쌓아두면 사람들의 피가 말라간다."
  "위대한 자들의 사치는 범인들에게 위문품이 된다."
  "낭비벽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망칠지는 모르지만 국가는 살찌게 한다."
  "가난한 자들의 빵은 부자들의 잉여물로부터 나온다."
  이 괴상망측한 말들은 도덕적 사고와 경제적 사고간의 극단적 대립을 보여준다.
생각이 제대로 박힌 사람치고 이 말을 듣고서 마음이 편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결코 이같은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상충되는 두 개의 사고가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간에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인간은 품위를 잃게 된다. 절약만을 강조하다 보면 필요한
것조차 쓰지 못하게 되고, 낭비를 강조하다 보면 도덕적 파탄을 면하기 어렵다.
  다행히도 이같은 대중적 견해들은 절약과 사치간의 관계를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오직 보이는 결과만을 고려했을 뿐 보이지 않는 결과는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이같은 잘못을 고치려고 한다.
  몬도(Mondor)와 아리스테(Ariste)는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덕에 각자가
매년 5만 프랑씩의 소득을 벌 수 있게 되었다. 몬도는 요즘 유행하는 식의 인류애를
실천하기로 했다. 낭비를 하는 것이다. 매년 서너 차례씩 가구를 바꾸었고, 매달
마차도 새 것으로 바꾸었다. 사람들은 그가 재산을 탕진하는 뛰어난 방식을
칭찬했다. 그가 돈을 쓰는 방식은 발자크(Balzac)나 알레산더 듀마(Alexander
Dumas)도 무색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소리 높여 그를 칭찬했다.
  "몬도(Mondor) 얘기를 해주세요. 몬도여, 만수무강하시라. 그는 노동자들의
은인입니다. 그는 인민들에게 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그가 사치 속에 탐닉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의 마차가 행인들에게 진흙을 끼얹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그의
사치로 인해 그의 인간적인 존엄과 인류 전체의 존엄이 상처를 입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라는 말입니까? 그가 스스로 노동을 하지는
않지만, 가진 재산이라도 탕진하는 통에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된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그는 화폐의 소통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정원은 늘
만족스러워하는 상인들로 가득하지요. 사람들이 돈은 돌고 도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아리스테는 전혀 판이한 인생경로를 택했다. 그를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개인주의자임은 분명했다. 그는 돈을 지출할 때 합리적이려고
노력했으며 쾌락을 추구할 때도 적당한 정도의 수준에서 절제를 했다. 또 그는 그의
자녀들의 미래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돈을 저축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아리스테를 두고 이렇게 말할 것이었다.
  "이 야비한 구두쇠 부자놈은 아무 쓸모도 없어. 물론 그가 살아가는 단순한
인생에는 인상적인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 그는 인간적이기도 하고 호의를
베풀기도 하고 관대하기도 하지. 하지만 너무 타산적이야. 그는 자기가 벌어들인
것을 다 쓰지를 않아. 그의 집은 호화스럽게 번쩍이지도 않고 사람들로 넘쳐나지도
않지. 그러니 목수나 마차 만드는 사람이나 말장사나 제빵업자들이 그에게 고마워
할 이유가 없잖아."
  인간의 도덕에 매우 해로운 이같은 판단은 눈에 쉽게 띄는 한 가지 사실, 즉
낭비벽이 심한 사람의 행동에만 기초를 두고 있다. 근검절약하는 다른 형제가 하는
지출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께서 만들어놓은 질서는 정말 위대하다.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신이 만들어놓은 질서하에서는 근검절약과 도덕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테의 지혜는 몬도의 행동에 비해 그저 단순히 가치가 있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더 많은 이윤의 귀속처는 아리스테나 막연한 사회 전체만이 아니다. 현재의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현재의 산업 전체에 이득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증명하고 싶다면 인간의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숨은 결과들을
살펴보면 된다.
  몬도의 흥청망청하는 지출이 가져오는 효과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다.
사륜마차, 이륜마차, 쌍두마차 등 그가 구입한 갖가지의 마차들과 그의 천장화,
화려한 카펫, 위용을 자랑하는 저택 등은 모든 이의 눈에 띈다. 누구든지 그가
경마에 자신의 서러브레드(thoroughbred)를 출전시킨 것도 볼 수 있다. 그가 파리의
집에서 주최한 만찬은 거리의 군중들을 들뜨게 한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멋진 사람이야. 자기재산에 구멍이 뚫릴 텐데도 저렇게 사람들을
대접하다니 말이야."
  이것은 보이는 효과이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리스테의 소득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그 돈이 쓰이는 경로를 끝까지 추적하다 보면 아리스테의 소득도
몬도의 것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일원까지 고용을 늘리는 데에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다. 어리석은 몬도의 지출은 점점 줄어들어서
결국은 파경에 다다를 것이지만, 아리스테의 지출은 매년 늘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이치가 이렇다면 공공의 이익은 도덕적 원칙과 대립되지 않는다.
  아리스테는 매년 그 자신과 그의 집을 위해서 2만 프랑을 지출한다. 만약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아리스테를 현명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자들이 겪는 고통에 마음이 아파서,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의무가 있다는 생각에서 1만 프랑을 기부했다. 사업을 하거나 공장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그의 친구들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곤란의 지경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리스테는 그들을 도와줄 요량으로 1만 프랑을 다시 떼어놓았다.
마지막으로 딸 시집보낼 때에 줄 지참금과 아들의 장래를 위한 자금 등을 위해서
또다른 1만 프랑을 매년 저축해나갔다.
  아리스테의 지출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개인적인 경비 2만 프랑
  자선 1만 프랑
  친구 도와준 돈 1만 프랑
  저축 1만 프랑

  각각의 항목들을 살펴본다면 한 나라의 산업발전을 촉진하지 않는 돈은 한푼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경비: 이렇게 지출된 돈은 노동자들과 상인들에게 배분된다. 몬도의 경우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겠다.

  자선: 여기에 투입된 돈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 산업을 촉진한다. 아리스테가 직접
소비하는 것은 아니지만 돈을 받은 사람들이 그 돈을 쓸 것이기 때문에 제빵업자와
정육업자, 양복장이, 가구상인 등이 혜택을 보게 된다. 이같이 단순한 소비자의
대체는 산업 전체의 구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1백 수를 가지고 아리스테
자신이 그 돈을 지출하는 것이나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돈을 지출하게 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친구 도와준 돈: 아리스테의 도움을 받은 친구가 그 돈을 받아서 내다 버릴 리는
없다. 다른 물건을 구입하거나 빚을 갚는 데에 그 돈을 사용할 것이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산업의 발전이 촉진된다. 몬도가 서러브레드를 구입하기 위해서 지출한
1만 프랑이 아리스테나 그의 친구가 옷감을 사기 위해서 지출한 1만 프랑보다
산업발전에 더 큰 도움이 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나와보라.
만약에 그 돈을 가지고 빚을 갚았다면, 그 돈을 받은 제3의 인물이 그 돈을
지출하게 될 것이다. 사업을 위해서든 공장을 위해서든, 광물자원을 채취하기
위해서든 간에 그는 그 돈을 가지고 뭔가를 할 것이다. 결국 누가 그 돈을 쓰든
간에 그는 아리스테와 노동자들간의 매개자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지출자의
이름은 바뀌지만 지출은 그대로이다. 따라서 산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효과도 다름이
없다.

  저축: 이제 저축한 돈 1만 프랑이 남았다. 예술이나 산업, 노동자들의 고용을
촉진한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몬도가 아리스테보다 나은 것처럼 보이는 돈이다. 물론
도덕적으로는 아리스테가 몬도보다 약간 나은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위대한 자연의 법칙과 경제의 법칙이 그처럼 충돌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는
정신적 고통 이상의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이익과 도덕적으로 옳은 것 중에서
양자택일식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다행히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주21). 아리스테가 도덕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우월하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역설적으로 들리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저축한다는 것은 지출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테가 그 1만 프랑을 저축한 목적이 무엇일까? 마당에다가 파묻어두기
위함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자본과 소득을 늘리기
위함이다. 따라서 당장의 만족을 위해서 쓰여지지 않은 이 1만 프랑은 땅이나
주택이나 정부의 채권이나 기업체의 지분이라는 형태로 투자될 것이다. 십중팔구는
브로커나 은행의 도움을 받을 것이지만. 그 돈이 지출되는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중간매개자가 판매자일 수도 있고 은행가들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그 돈으로
가구나 보석, 말 같은 것들을 구입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산업생산을
촉진하는 용도에 쓰이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아리스테가 저축한 1만 프랑으로 땅이나 국채를 구입한다는 것은 결국 그가 그
돈을 소비에 충당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그것을 이유로 해서
아리스테의 행위에 반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그 땅이나 채권을 판 사람은 그 돈을 가지고 어딘가에 사용할
것이다.
  결국 그 돈의 지출자가 누구인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는 그 돈을 지출하게 된다.
  고용이나 산업생산을 촉진한다는 차원에서 볼 경우 아리스테와 몬도간에는 단 한
가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몬도가 하는 소비는 직접 그 자신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것은 눈에 잘 띈다. 반면 아리스테의 돈은
중간에 여러 명의 매개자가 있고, 또 먼 거리에서 소비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도 눈에 잘 띄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논의의 핵심은 돈이 돌고 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낭비하는 형제의 금고 속에
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약하는 형제의 금고 속에도 돈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약은 산업의 발전에 해롭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산업생산을
촉진한다는 면에서 본다면 절약이나 사치나 다를 것이 없다.
  당장의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긴 시간을 놓고 볼 경우는 어떨까?
  그 후로 10년이 흘렀다고 해보자. 몬도의 재산과 인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몬도는 파산했을 것이다. 매년 5만 프랑의 돈을
경제에다가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짐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상인들에게도, 예술가들에게도, 산업가들에게도 노동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의 후손들에게조차 걱정거리일 뿐이다.
  같은 10년이 흐른 후의 아리스테의 모습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소득을 계속해서
경제에다가 공급하고 있을 것이며, 그 액수는 더욱 더 커져갈 것이다. 그는 국가의
자본총액을 늘리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며 그로 인해서 노동자들에게 지급될 임금의
총액을 늘리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수요는 노동에 지급될
총액의 규모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계급에게 돌아갈 임금수준이
높아지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자손들이 그를
대신하여 진보와 문명의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절약하는 것이 사치하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즉각적인 결과가 아니라 궁극적인 결과에 눈을 돌려볼
경우 절약은 경제적으로도 우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노동의 권리와 이윤에 대한 권리

  "형제들이여, 당신의 돈으로 세금을 내서 나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줄 것이다."
  노동에 대한 권리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가장 본질적인
사회주의이다.
  "형제들이여, 내가 직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세금을 낼지어다."
  이것이 이윤에 대한 권리이다. 앞의 것보다는 좀더 세련된, 제2급의 사회주의이다.
  이 두 가지의 주장은 모두 보이는 효과에 기대어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효과까지를 고려하기 시작하면 어느 것도 살아남을 수 없다.
  세금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일자리와 이윤은 보이는 효과이다. 만약 세금으로 낸
돈이 납세자들의 손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 돈을 다른 용도에 지출하였을 것이고
그로 인해서 일어났을 일들은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1848년에 등장한 노동권은 두 가지의 모습으로 그 자신을 드러냈다. 그런
구체적인 모습 덕분에 노동권에 대한 요구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국영작업장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45상팀(Centimes)(주22)이라는
제도였다.
  매일매일 수백만 프랑이 리볼리가에서 국영작업장으로 옮겨졌다. 그것만 본다면
아주 흡족한 일이다.
  그러나 동전의 다른 면도 있었다. 매일매일 국고로부터 수백만 프랑이
빠져나오려면, 어디로부턴가는 국고가 채워져야 한다. 노동권 옹호자들이 납세자들에
호소하려 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불평이 터져나왔다. 농부들은 이렇게 불평했다.
  "그 때문에 나는 45상팀을 세금으로 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나는 옷도 못 사게
되었고, 밭에 뿌릴 비료도 못 사는 신세가 되었다. 집을 고칠 돈도 없어졌다."
  그 농부가 고용한 인부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인나리가 옷을 사는 데에 쓸 돈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양복장이들의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밭을 갈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인부들도 일이 줄어들었다. 집을
고치지 않을 터이니 목수들과 벽돌공들의 일도 줄어들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거래로부터 두 번의 이윤이 나올 수 없다는 것과 정부가
만들어내는 일자리를 결국 납세자들이 만들어낼 일자리를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노동권이라는 것이 정의롭지 못한
것임은 물론이려니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노동권 소동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노동권의 과장된 형태에 불과한) 이윤권이라는 것은 아직도 건재해서 그
위세를 드러내고 있다.
  보호주의자가 사회에게 요구하는 역할 중에 창피한 것은 없는 것일까?
보호주의자는 사회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
  "너는 나에게 일자리, 그것도 이문이 많이 남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내가 좀 멍청한 나머지 10퍼센트의 손해가 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회, 네가
나만 제외하고 다른 시민들에게 20프랑씩을 세금으로 부과한다면, 내 사업은 다시
흑자로 돌아설 수 있겠지. 이윤은 나의 권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돼. 너는 내게
이윤을 보장해주어야 해."
  이 궤변에 귀기울이고 있는 우리의 사회, 그 궤변가를 위하여 스스로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우리의 사회, 한 산업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산업의 이윤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우리의 사회, 그러니 너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도 싸다.
  지금까지 내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눈치챘겠지만, 누구든
정치경제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현상에 따르는 즉각적인 결과에
현혹되기 십상이다. 경제학을 배우면 즉각적인 결과뿐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궁극적인 결과까지 고려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주23)
  하려고만 한다면 다른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이 글을 끝내려고 한다. 문제가 무엇이든 결국은 설명하는 말이 되고
말아 독자들이 너무 지루해 할 것 같아서이다. 샤토브리앙(주24)이 역사에 관해서 한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겠다. 그의 말은 정치경제학에 대해서도 옳다.

  역사에는 두 종류의 결과가 있다. 하나는 즉시 인식될 수 있는 즉각적인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당장은 잘 안 보이지만 오랜 기간을 두고 나타나는 장기적 결과이다.
이 두 가지의 결과는 서로 상충될 경우가 많다. 전자는 인간의 단기적 지혜로부터
나오고 후자는 장기적인 지혜로부터 나온다. 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끝난 후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라진 뒤에 나타난다. 신의 지혜를 거부하고 싶다면
거부하라. 신의 역사와 그의 말씀을 믿고 싶지 않다면 마음대로 하라. 보통사람들이
섭리라고 부르는 것을 당신들이 환경의 작용이니 이성의 작용이니 하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일이 끝난 후에 돌이켜본다면, 도덕이니 정의니 하는
이름으로 처음부터 계획되고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신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샤토브리앙, "무덤에서의 회상"
@ff
  주
  1. 'Bstiat'의 마지막 저술로서 1850년 7월에 출간되었다. 1년 전부터 출간을
약속했던 논문이었으나 'Choiseul'가에서 'd`Algen'가로 이사하는 도중 원고를 분실한
관계로 출간이 지연되었다. 오랫동안 새 원고를 쓰는 작업을 했으나 일이 잘 안
풀려서, 국회에서 행한 연설을 기초로 해서 다시 원고를 썼다. 하지만 너무 어렵게
씌어졌다고 생각한 나머지 두 번째의 원고조차도 불에 던져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원고를 쓰게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논문은 세 번째 씌어진 작품이다. 편집자 주.
  2. Economic Harmonies의 제10장 참조. 편집자 주.
  3. Moniteur Industriel. 당시 프랑스 국내사업보호위원회의 기관지. 영역자 주
  4. Auguste, Vicomte de Saint-Chamans(1777__1861). 하원의원이자
국가재건위원회 위원. 보호주의자이자 무역수지 균형의 적극적인 주창자였다. 영역자
주.
  5. Economic Harmonies 제3장. 편집자 주.
  6. 1851년,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개최된 대형 박람회를 지칭함. 예술과 산업의
발전을 목적으로 런던예술협회에 의해서 개최됨. 전시물들을 전시하기 위한
수정궁(crystal palace)으로 유명했음.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경이 박람회의
의장을 맡았음. 영역자 주.
  7. 리볼리가는 시청이 있는 거리이고, 그레넬가는 극장용품 공급업자들이 있는
거리이다. 영역자 주.
  8. Charles Dupin(1784__1873). 프랑스의 엔지니어이자 경제학자. 예술 및 기예원의
교수, 하원 및 상원의원 등을 거쳤음. 경제통계 분야를 통해서 경제학에 기여했음.
영역자 주.
  9. Archille Fould(1800__1867). 정치가이자 금융업자. 영역자 주.
  10. Jean Martial Bineau(1805__1855). 엔지니어이자 정치가. 1852년에 재무상을
지냈음. 영역자 주.
  11. 당초 센 강 왼편 둑에 있었던 행진광장이었음. 오늘날에는 에펠 탑과 사관학교
사이에 위치한 공원으로 변했음. 영역자 주.
  12. 1846년 당시 북부와 서부 유럽에서의 곡물 및 감자농사가 실패함에 따라
다음해인 1847년 식량가격의 폭등이 있었다. 그해는 식량문제뿐 아니라 제조업,
금융업이 모두 침체를 면치 못했다. 영역자 주.
  13. 배고픔은 사악한 조언자이다. 'Virgil'의 'Aeneid Ⅳ', 276. 영역자 주.
  14. 'Bastiat'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은 진리라는 식의 예단을 하는 경향이 있다.
Economic Harmonies 제6장의 부록 "Morality of Wealth"를 참조할 것.
  15. Jacques Benigne Bousset(1627__1704). 'Condom'과 'Meaux'의 주교였으며
뛰어난 설교자. 왕족들을 위한 그의 장례식 추도연설은 프랑스 고전풍의 최고로
간주되었음. 루이 14세의 아들의 개인교사였을 당시 저술하였던 세계사(Historie
universelle)는 훗날 오랫동안 교과서로 사용되었음. 개신교에 대해서는 철저히
반대했으며, 갈리아주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프랑스 가톨릭의 독립성을 높여놓았음.
영역자 주.
  16. Economic Sophism 제7장 참조. 편집자 주.
  17. Economic Harmonies 제3장 및 제8장. 편집자 주.
  18. 1848년 2월 22일, 기조Guizot 수상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고, 그 결과 루이
필립Louis Philippe 왕이 그를 해임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계속되었고
급기야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일이 발생했음. 시위는 무장봉기로 이어졌고, 결국 왕이
퇴위하고 제2공화국이 탄생함. 영역자 주.
  19. 프랑스어판 제5권 "무이자 대부에 관한 열두번째의 편지"를 보라. 편집자 주.
  20. 전쟁부 장관의 발표에 따르면 알제리아에 파견된 병사 1인당 8천 프랑의
비용이 지출된다고 한다. 그런데 1인당 4천 프랑이면 프랑스의 저소득계층이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한 명을 떠나게 하려고 두 명분을 지출해야 한다면
어떻게 프랑스를 잘살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21. Economic Sophism 참조. 편집자 주.
  22. 2월 혁명 이후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된 국영작업장과 더불어
실시되었던 제도. 45상팀을 간접세로 징수하였다. 국영작업장은 실패임이
판명되었다. 국영작업장을 폐쇄하고 실업자들을 군대나 공공사업, 기타 민간기업체를
통해서 흡수하려고 하자, 파리의 노동자들은 정부가 직업에 대한 권리를 배신했다고
들고 일어났다. 1849년 7월의 일이었다. 결국 진압되기는 했지만 처절한 봉기였다.
영역자 주.
  23. 만약 어떤 행동의 결과가 행위자 자신에게 모두 돌아간다면 자기행위가
일으킨 결과의 전모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자주
있다. 보이는 효과는 행위자에게 돌아가고 보이지 않는 나쁜 효과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어떤 행동으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나쁜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 그 타인으로부터
반응이 올 때에 비로소 그것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과정은 긴 시간을
요하기 때문에 잘못된 정책이라도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는 10만큼의 이익이 있지만 30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15만큼의 손해가 가는 행동을 했다고 해보자. 타인들이 입는 손해의 총량은 15지만
사람수는 30이기 때문에 각자에게 돌아가는 손해는 0.5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로서는 손해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무언가 손해보는 자들로부터
반응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익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반면, 손해는
널리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손해보는 자들이 무슨 행동을 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Bstiat'의 미발표 논문 중에서).
  24. Vicomte Francois de Chateaubriand(1768__1848).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였으며 부르봉 왕가의 지지자.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부르봉 왕가가
재집권했을 때, 영국과 독일 대사, 그리고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저명한
저작물로는 "기독교의 진수", "무덤으로부터의 회상"이 있다. 영역자 주.
@ff
    제2장 법
    The Law
@ff
    2. 법(주1)

  법이 타락했구나. 더불어 국가의 경찰력도 타락했구나. 법이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어버렸구나.
탐욕을 억제해야 할 법이 오히려 온갖 탐욕의 도구로 전락해버렸구나. 불공정을
벌해야 할 법이 스스로 불공정을 범하게 되어버렸구나. 사태가 이렇게 심각하기에
나는 동료시민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의무를 느낀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모든 선물의 근원이 되는 선물, 즉 생명(육체적, 지적,
도덕적 생명)을 받았다.
  그러나 생명은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는 그것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책임까지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을 위해서, 신은 우리에게 놀라운 재능보따리를 안겨주셨다. 또 많은 자원도
주셨다. 그 재능을 자원에다가 적용시켜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이용한다.
그것이 가능할 때에 비로소 생명은 정해진 길을 갈 수 있다.
  생명과 재능, 생산, 다시 말해서 개별성과 자유, 재산 이 세 가지가 바로 인간 그
자체이다.
  선동적인 강변을 늘어놓지 않더라도, 이 세 가지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어떤
법보다 앞서며, 또 그것을 초월해 있다. 생명과 자유와 재산이 인간의 법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생명과 자유와 재산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법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법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미 다른 곳에서 언급했듯이 법이란 각
개인들이 자기방어를 정당화할 권리를 집단화시킨 것이다.(주2) 우리들 각자는
자연과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인격과 자유와 재산을 방어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
세 가지는 생명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일 뿐 아니라, 또 상호보완적이어서 어느
하나가 빠져 버린다면 다른 것들도 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재능이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면 도대체 재능이 무슨 소용이겠으며, 재산이 재능의 연장이 아니라면 재산은
또 무슨 수용이겠는가.
  각 개인들이 완력을 사용해서라도 자신의 인격과 자유와 재산을 지킬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면, 몇 명이 모여서 서로의 동의하에 공동으로 자신들을 방어할
권리, 즉 자기방어를 위해 완력을 집단화할 권리가 있음도 인정해야만 한다.
  이처럼 집단적인 방어권은 그 존재이유와 정당성의 근거, 그리고 작동원리 모두가
개인적 방어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개인적 완력의 대체물인 집단적인 완력은 그
목적과 기능면에서 개인적 완력과 정확히 같다.
  따라서 각 개인들이 완력을 사용해서 타인의 인격과 자유와 재산을 해치는 것을
정당하다고 할 수 없듯이,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완력을 사용해서 다른
개인이나 다른 집단의 인격과 자유, 재산을 침해하는 것이 정당할 수는 없다.
  완력이 이런 식으로 잘못 사용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택한 대전제와 모순된다.
우리의 권리를 방어할 목적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동포들의 권리를 파괴할
목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력을 선사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개인들이 갖고 있는 완력에 대해서 진리일진대, 개인적 완력의
집합에 불과한 집단적인 완력에 대해서도 당연히 진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세상에 자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법이란
인간이 정당하게 자기를 방어할 천부의 권리를 집단화시킨 것이다. 인격과 자유,
재산권의 안위를 보장하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정의의 지배하에 놓이도록 개인적
완력을 집단적 완력으로 대체한 것, 그것이 법이다.
  만약 이런 원칙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 나라가 있다면, 그런 나라에는
이론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질서가 자리잡을 것이다. 이런 나라라면, 구체적인
정치형태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부담을 적게 주고, 가장 간섭을 작게 하며, 가장 정의로우며, 또
결과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정부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 체제하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각자의 삶을 즐길
것이고, 또 그 결과에 대해서도 각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 또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각자의 인격이 존중받고, 자유롭게 노동하며, 또 노동의 결과물이 모든 정의롭지
못한 침해행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면, 누구도 국가와 다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자신이 거둔 성공에 대해서, 설령 그것이 운이 좋아서 얻은 성공이라 할지라도,
국가에게 감사할 이유는 없다. 운이 나빠서 실패를 했을 때에도(마치 농부가
우박이나 서리를 비난하는 것이 부질없듯이) 국가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라는
것은 그저 안전을 보장해주는 정도의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국가가 개인적인 일에 개입하지 않는 덕분에 필요와 만족, 이 두 가지 모두가
자연적인 질서에 순응하여 형성되어 갈 것이다. 가난한 가정이 빵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문학을 배우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농촌을 희생한 대가로 도시가
성장하거나, 도시를 희생한 대가로 농촌이 성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본이나 노동의
자연스런 분포가 인위적 입법에 의해서 크게 흔들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국가가 인위적으로 개입하게 되면 우리 존재의 근원이 매우 불확실해진다. 게다가
개입이 시작되면 정부가 책임질 일도 함께 늘어나게 된다.

  법의 타락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법은 본래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벗어난 정도가
미미하다면야 별문제가 아니겠지만, 상황은 그보다 훨씬 심각하다. 오히려 원래의
목적과 정반대의 것을 추구하고 있다. 자신의 목적 그 자체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를 확립하는 것이 법의 원래기능이지만 실제의 법은 오히려 정의를 질식시키고
있다. 각자가 가진 권리들이 서로 침해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법의 원래 기능이지만
실제의 법은 권리간의 경계를 파괴하고 있다. 또 타인의 인격과 자유, 재산을
착취하려는 자들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집단적인 폭력을
동원해주고 있다. 약탈행위에다가 권리라는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법은 약탈을
권리로 탈바꿈시켜 버렸다. 그뿐 아니다. 타인의 약탈에 대한 방어를 범죄로
만듦으로써 정당한 방어가 처벌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법이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고, 또 그 결과는 무엇일까?
  법의 타락은 어리석은 이기심과 거짓자선이라는 두 가지의 아주 다른
원인으로부터 비롯된다. 첫 번째의 원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의 본성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보전과 자기개발을 열망한다.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재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또 그 결과물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다면
사회는 실패하는 일 없이 지속적으로 진보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성향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남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의 생존과 발전을 꾀하려 한다. 내가 인간에 대해서 특별히
비관적인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것이 진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역사책을 메우고 있는 끊임없는 전쟁, 대규모의
이주, 성직자들의 독재, 만연했던 노예제, 사기, 독점 같은 것들이 그 증거이다.
이같은 인간의 통탄스러운 성향은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피하려는
원초적이고, 보편적이며, 극복하기 어려운 정서반응, 즉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재산과 약탈

  인간은 끊임없는 노동, 즉 끊임없는 생산과 이용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재산의 기원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타인의 노동의 결과를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고
삶을 즐기는 것 또한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약탈의 기원이다.
  노동은 고통스럽다. 그리고 인간은 고통을 피하려 하기 때문에, 약탈이 노동보다
쉬운 한 누구나 약탈을 택하려 한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종교도 도덕도
인간의 그런 성향을 막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약탈을 멈출까? 약탈이 노동보다 어려울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약탈을 멈추게 된다.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인간의 이런 해로운 성향을 막는 것, 즉 약탈로부터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법의 정당한 목적이어야 함은 명백하다.
  그런데 대부분 법이란 누군가에 의해서(그것은 한 사람일 수도 있고, 하나의
계급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법은 다수 세력의 승인과
지지가 없으면 존립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입법자들은 다수 세력으로부터
입법권을 위임받아 자신들의 일을 해나간다.
  이같이 다수 세력의 법지배 현상은 불가피하다. 게다가 인간의 심성 속에는
노동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 남들의 재산을 탈취하려는 성향이 내재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법의 타락이라는 보편적인 현상을 가져왔다. 이제 법이 정의롭지 못한
것을 막기보다는 부당함의 도구가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법이
어떻게 해서 (입법자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타인의 인격권을 파괴하는 노예제를 만들어내고,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재산을 약탈하게 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 속에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함에 저항하려는 성향이 내재해 있다.
따라서 입법권을 가진 어떤 집단이 입법을 통해서 다른 집단의 재산을 약탈하려 할
경우, 약탈을 당하는 집단들도 입법권을 손에 넣으려고(그 수단은 평화적일 수도
있고 혁명적일 수도 있겠지만) 노력할 것이다.
  이런 집단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통해서 이루려는 목적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그 하나는 새로이 얻는 자신들의 입법권을 이용해서 모든 형태의
합법적 약탈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스스로 합법적 약탈을 자행하는 것이다. 최종적인 결과가 어느 쪽일지는 각
집단들이 얼마나 높은 식견을 갖추었는지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후자의 상황이 판치는 나라, 즉 입법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만인이 만인을
약탈하는 나라에는 화가 있을진저!
  입법권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던 지난날에는, 입법권을 가진 소수가 다수를
약탈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불공평을 보상이나 받으려는 듯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약탈이 자리잡게 되었다. 법이 사회적 불의를 제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약탈을 당하던 집단이 정치적 권력을 잡은 후에
시작하는 일은 약탈행위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집단을 상대로 해서
조직적이고 보복적인 약탈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행위가 계속된다면
결과적으로 자신들에게도 해가 돌아가게 된다.
  법을 약탈의 도구로 삼는 것, 그것만큼 사회에 해로운 것은 없다.
  법이 타락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 그것들을 모두 쓰려면 여러 권의 책이 필요할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무엇이 정의로운 것이고 무엇이 불의인지에 대한 판단기준이 흐려진다.
  어떤 식으로든 법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는 존립할 수 없다. 법이 존중받으려면
존중받을 만한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만약 법과 도덕이 갈등을 일으킨다면
시민들은 도덕심을 버리든지 법에 대한 존중심으로 버리든지, 양자택일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진퇴양난이다. 양쪽 다 중요한 것이기에 선택하기가 어려워진다.
  법의 본질은 정의가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처럼 법이 본래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면 법과 정의는 하나라는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진다.
  인간에게는 법으로 정해진 것은 정당하다라고 생각하려는 강한 성향이 있다.
심지어는 모든 정의를 법에서 찾아야 한다는 식의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난다. 그래서 법이 약탈을 합법화하게 되면 양심적인 사람들조차도 그런 약탈은
정의롭고 신성한 것으로 간주해버리게 된다. 노예제도, 교역의 제한, 독점 등과 같은
약탈행위는 그것으로부터 득을 보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옹호되었던 것이 아니다.
피해를 입는 사람들마저도 법이 그것을 규정했다는 이유로 그같은 제도들을
지지했다. 이런 제도들의 도덕성을 의심이라도 할라치면 당장 다음과 같은 비난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당신은 매우 위험한 이상주의자(또는 개혁가, 이론주의자)야. 당신은 법을
경멸하고 있어. 결국 당신은 사회의 존립기반을 무너뜨리고 말 거야."
  그뿐 아니다. 만약 당신이 그같은 내용을 윤리학이나 정치경제학 강좌에서
가르치려고 한다면, 공공기관들은 당장 정부에다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할 것이다.
  "경제학 강의가 자유로운 교역(자유와 재산권, 그리고 정의)의 관점만을 너무
강조해서는 안됩니다. 현재의 프랑스 산업계를 지배하는 현실과 (자유와 재산권과
정의를 억압하는) 현행법의 관점도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수들은 스스로 국록을
받아먹는 자임을 명심해서 현행법의 존엄을 해치는 행위를 즉시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주3)
  결국 노예제이건 독점이건, 억압이건 강탈이건 간에, 어떤 불의가 저질러지더라도
법이 그것을 인정하는 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입도 뻥긋하면 안된다는 말인
셈이다. 하기야 그런 법들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그 법의 존엄을
깎아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윤리학이든 정치경제학이든 현행법에 담겨 있는
시각만을 가르쳐야 하다니. 결국 단순히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제도들을 정의롭다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법의 타락이 가져다주는 해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두 번째 결과는
정치적인 열망과 정치적 투쟁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커진다는 사실이다.
  내 주장을 증명해 보이라고 한다면 천 가지 방법으로라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최근 만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보통 선거권 한 가지만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겠다.
  루소학파의 후계자들이(그들은 스스로를 매우 진보적이라고 부르지만 내
생각으로는 족히 2천 년쯤은 시대에 뒤쳐져 있다)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간에,
보통선거권이라는 제도는 그것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것이 범죄시되어야 할 만큼
성스러운 교리는 아니다.
  보통선거권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보통(universal)'이라는 용어가 잘못 쓰여졌다. 프랑스의 인구는 3천
6백만이다. 이 '보통'이라는 말을 쓰려면 3천6백만 모두에게 투표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기껏해야 9백만 명만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네 명 가운데 세 명은
제외되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투표권을 가진 한 명이 나머지 세 명이
누구일지를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슨 원칙에 의해서 2천 7백만 명은
제외되었을까? 무능력자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보통선거권이란
능력자에게만 적용되는 제도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누구를 능력자로 보아야
하는가? 나이와 성별, 범죄기록만으로 과연 능력자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왜 능력자라는 개념을 기준으로 해서
보통선거권이 부여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투표의 결과가 자신들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라면 투표권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분배할 것인지와는 관계가
없다. 어떤 사람을 능력자로 보아야 하는지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이것은
정도의 문제이지 원칙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스나 로마 스타일의 공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투표권을 가지고 나온다면 왜 성인남자들이 나서서 여인들과
아이들의 투표를 금지해야 하는가. 정의롭지 못한 짓이다. 물론 능력이 없다는 말로
정당화할 것이다. 하지만 왜 능력이라는 것이 투표권을 주고 안 주고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그같은 질문에 대해 투표의 결과는 투표자 본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공동체로서는 그 구성원들의 복지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 일정한 기준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답할 것이다.
  처음 대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다음의 대답이 무엇일지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여기서 끝까지 그런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한가지만은
독자들에게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즉 법이 원래 했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왔다면
보통선거권(그리고 다른 모든 정치적인 논쟁거리들)에 대한 논쟁처럼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소란은 아예 문젯거리조차도 안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법이 만인의 인격과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데에만 전념했다면, 또 법이
모든 형태의 억압이나 약탈을 막아내고 처벌하기 위한, 그리하여 개인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는 수단이 되어 있었다면, 과연 사람들이 투표권을 부여하기 위한
능력자의 범위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의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열을 올릴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런 논쟁 때문에 지고의 가치를 가진 공공의 평화가 깨지는 일이
있었겠는가. 투표권에서 제외된 집단들이 조용히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지 않을
이유가 있었겠는가.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이 질투에 가득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애쓸 이유가 있었겠는가.
  만약 법이 원래의 기능만을 해왔다면 모든 사람들은 법과 관련하여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투표권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의
이익을 해칠 염려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법이 그런 원칙에서 벗어나면 비참한 결과가 초래된다. 법이 조직이나
규제, 보호, 장려 등의 미명하에 누군가의 것을 뺏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준다고
해보자. 다른 집단이 취득한 부를 뺏어서 어떤 하나의 집단(그것이 농민일 수도,
제조업자일 수도, 상인일 수도, 조선업자일 수도, 예술가일 수도, 배우일 수도
있다)에게 준다고 해보자. 그런 상황이라면 입법권을 요구하지 않을 집단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투표권을 요구할 것이다. 그런 권리를 얻지 못하느니 차라리
사회를 뒤집어엎는 것이 낫다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할 것이다. 거지나 떠돌이조차도
자신들에게 그런 권리가 있음을 당신에게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와인을 사든, 담배를 사든, 소금을 사든 간에 우리가 세금을 안내본 적은 없소.
그런데 법은 그렇게 거둔 세금을 우리보다 돈 많은 자들에게 장려금, 또는
보조금이라는 명목으로 주고 있소. 또 어떤 자들은 법을 이용해서 빵이나 고기, 철,
옷 등의 값을 올리고 있소. 모든 사람들이 법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데
우리라고 그러지 말라는 말이오? 우리는 법이 우리에게도 공적 부조의 권리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오. 그것은 법이 약탈해 간 것 중에서 우리가 정당하게
차지할 수 있는 몫이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도 투표권과 입법권이 필요하오.
당신들이 당신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당당하게 보호관세를 만들었듯이 우리도
당당하게 우리들 자신들을 위해서 거지수당을 만들 것입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이라고 말하지 마시오. 미메렐(Mimerel)씨(주4)가 제안한
것처럼 마치 강아지들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듯이 우리에게 60만 프랑을 던져주겠다는
말 같은 것은 하지도 마시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오. 어떤 경우가
닥치더라도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듯이 우리도 우리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해나갈 것이오."
  당신이라면 이런 주장에 대해서 무슨 답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법이 원래의
임무를 벗어나 있는 한, 그리고 재산권을 보호하기보다는 그것을 침해하는 한, 모든
집단들이(자신들에게 행해질 약탈을 막기 위해서건, 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약탈을 도모하기 위해서건 간에) 법을 만들기 원할 것이다. 모든 대화에 정치문제가
등장할 것이고 사람들은 정치논쟁에 빠져들게 될 것이며, 정치는 지배적인 관심사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입법부의 문을 두드리게 될 것이다. 입법부
안에서의 투쟁도 그에 못지 않게 치열해질 것이다. 그렇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굳이 프랑스나 영국의 의회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거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안건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법이 이렇게 추잡하게 타락하면 증오와 불화가 생겨나고, 사회의 질서까지도
파괴된다는 것은 굳이 애써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미국을 보라. 이 세상에
미국만큼 법이 본래의 기능인 자유와 재산권을 잘 보장해주는 나라는 없다. 그 결과
미국만큼 사회질서가 안정된 초석 위에 서 있는 나라도 없다.
  하지만 그런 미국에서조차도 건국 이후 서너 번 두 가지(단 두 가지)의 문제로
정치적인 질서가 깨질 뻔한 적이 있었다. 그 두 가지란 바로 노예제와 보호관세를
말한다. 이 두 가지는 이 공화국의 건국 이념과는 위배되는 약탈적 성격의 법에
의해서 지탱되는 것이었다. 비록 법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노예제는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보호관세도 마찬가지이다. 합법적이긴 하지만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다. 다른 논쟁거리들이 많겠지만, 구세계의 유산인 이들 두 가지의
골칫거리는 미합중국의 결속을 깰 수 있고,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법이 불의의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만큼 중대한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런
약탈적인 법이 예외적으로 존재하는 미국마저도 그 제도로 인해 해체될 가능성이
있을진대, 대부분의 법이 약탈도구가 되어버린 유럽은 어떻겠는가.
  몽타렝베르씨(M. de Montalembert)(주5)는 카를리에(M. Carlier)(주6)의 선언문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사회주의와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라는 말을 샤를 듀팽(M. Charles Dupin)이 지적한 대로
약탈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두고 약탈이라고 했을까?
  약탈에는 불법적인 약탈과 합법적인 약탈의 두 종류가 있다. 도둑질이나 사기
같은 것이 대표적인 불법적 약탈행위인데, 이런 행위는 형법의 규율을 받는다.
어떻게 생각해보더라도 이런 행위는 사회주의와 무관하다. 그리고 이런 행위가
사회의 기반을 체계적으로 위협하는 것도 아니다. 몽타렝베르씨나 카를리에씨가
이런 행위와의 전쟁을 주장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 약탈과의 전쟁은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계속되어 왔다. 프랑스만 하더라도 그런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2월 혁명이
있기 훨씬 오래전부터, 그리고 사회주의가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사법부와 경찰,
무장경관, 감옥, 지하감옥, 교수대 등 온갖 수단이 동원되어 왔다. 이 전쟁을
수행해온 것은 법 그 자신이었다. 나는 약탈에 대한 법의 그같은 태도가 변함없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법은 때때로 약탈자의 편을 들어왔다.
때때로 법은 약탈자가 느끼게 될 부끄러움과 위험, 또 양심으로부터 솟아나오는
불안감을 덜어주기 그 자신의 손으로 약탈을 자행하기까지 한다. 때때로 법은 전
사법부와 경찰, 보안관, 감옥 등을 약탈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며 약탈당한
사람이 스스로를 방어라도 할라치면, 오히려 그를 감옥에 처넣어버리고 만다. 이런
것이 합법적인 약탈이다. 몽타렝베르씨가 지적하는 약탈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지금 당장은 법 전체에서 이런 종류의 합법적 약탈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할지
모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그것들을 없애버려라. 아무리
기득권자들이 아우성을 치더라도 말이다. 그런 법을 어떻게 찾아내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주 간단하다. 법이 누군가로부터 그 재산을 뺏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지의 여부만을 확인하면 그만이다. 그 법이 없었더라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을 법이 스스로 나서서 하고있지는 않은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 법은 당장 폐지해야 한다. 그런 법이 부당하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법을 수단으로 해서 합법적 약탈을 시작하면 사태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런 법에 의해서 약탈당하는 사람들은 또다른 법을 만들어서 보복적인
약탈을 자행하게 되고, 당신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예외에 불과하던 법들이 점점
일반화되어 나갈 것이다. 그런 법들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 저항의
목소리를 높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누려온 권리가
애써 노력한 결과라고 강변할 것이다. 그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산업을 보호하고
지원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들은 또 국가가 자신들이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소비를 많이 할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도 더 많은 돈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런 궤변으로부터 등을 돌려야 한다. 합법적 약탈은 바로 그런
식의 정교한 논리를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제로 벌어져 온 일들이다.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해서 잘살 수 있다는 환상이 우리시대를 풍미하고 있다. 조직화라는
미명으로 약탈을 보편화해온 것이다.
  합법적 약탈을 자행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관세, 산업보호정책, 장려금,
보조금, 누진소득세, 무상교육, 근로의 권리, 이윤에 대한 권리, 임금권, 생존권,
생산수단을 소유할 권리, 무이자 대부 등 수없이 많은 것들이 합법적 약탈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같은 합법적 약탈의 수단들을 모두 합치면 사회주의가 된다.
  사회주의란 그런 식의 교리가 구체화된 것일진대, 그들과 치러야 할 전쟁이
교리의 전쟁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런 교리가 틀렸고, 어리석으며,
혐오스럽다는 데에 동의하는가. 그러면 논박하라. 그 교리가 틀릴수록, 어리석을수록,
그리고 혐오스러울수록 당신이 그 교리를 논박하기는 쉬워질 것이다. 당신이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법 속에 침투해 있는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없애버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물론 그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몽타렝베르씨는 사회주의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반대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가 비난받는 것은 부당하다. 예전에 그는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
적이 있다.
  "우리는 법과 명예, 정의와 양립 가능하지 않은 사회주의에 대해서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몽타렝베르씨는 어떻게 스스로가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모를
수 있을까? 당신은 법을 이용해서 사회주의에 대항하려 한다. 그런데 사회주의도
법에 호소하려 한다. 사회주의는 법을 이용한 약탈을 도모한다. 모든 형태의 독점이
그러하듯이, 사회주의도 법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려 한다. 일단 법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간 상태에서 그 법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이용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사법부와 경찰과 감옥이 사회주의를 타도하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사회주의자들이 입법에서 손을 떼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은 그들이 입법부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내가 감히
예측하건대, 그들이 입법부에 들어가 있는 한 합법적 약탈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사회주의자들의 입법부 진출을 허용하면서도 합법적 약탈을 막을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은 사악하고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이 합법적 약탈의 문제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왔다. 약탈은 소수의
다수에 대한 약탈(부분적 약탈), 만인의 만인에 대한 약탈(보편적 약탈), 어느 누구도
약탈을 하지 않는 상태(약탈의 부재)의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부분적 약탈, 보편적
약탈, 약탈의 부재, 이 세 가지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법은 이 세 가지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부분적 약탈체제로의 복귀를
희망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 일부에게만 선거권을 주자는 말과 같다.
  보편적 약탈이란 보통선거권이 정착되면서 우리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으로
대중들이 그들 이전의 권력자들이 입법권을 행사했던 것과 같은 식으로 권력을
행사해온 결과이다.
  내 허파(주7)의 모든 힘을 다해서, 그리고 내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힘을
짜내어 외치노라. 약탈은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만 정의와 평화, 질서, 안정, 조화,
호의 같은 것들이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약탈의 금지 이상의 것을 법으로부터 기대해서도 안된다. 제대로 된
법이라면 만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법이
그 이상의 것을 하려고 시도한다면 그 뒤에 오는 결과는 필연적으로 인권의
침해이다. 이것은 가장 치명적이고, 또 가장 비논리적인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고 있는 사회문제에 대한 해법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법은 조직화된 정의이다.
  법으로, 또는 강제력으로 정의를 조직한다는 것과 인간행위의 다른 측면들, 예를
들어 노동, 자선, 농업, 상업, 제조업, 교육, 예술, 종교 같은 행위를 법으로 조직하

것과는 양립할 수 없다. 그런 조직들은 조직화된 정의로서의 법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어떤 강제력이 시민들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정의를 파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법이 원래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피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나는 오늘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편견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법이 정의롭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박애정신 위에 서 있기를 바란다.
그들은 정의를 확립하여 모든 시민들이 자유롭게, 그리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들의 육체적, 지적, 도덕적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들은 법이 복지정책과 교육, 그리고 도덕을 전국에 나누어줄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의 유혹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다시 반복해서 말하거니와 법의 이 두 가지 기능은 공존할 수가 없다.
시민들을 자유로운 동시에 자유롭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언젠가
라마르탱씨가 내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당신의 주장은 내가 제안하는 계획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논리는
자유에서 멈추었지만 나는 거기에다가 동포애를 더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제안의 두 번째 절반(동포애)은 처음의 절반(자유)을 파괴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나는 '동포애'라는 말과 '자발적'이라는 말을 분리할 수 없다.
법적으로 강요되는 동포애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유를
파괴하고 정의의 기반을 잠식할 것이다.
  합법적 약탈은 두 가지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이기심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박애주의이다.
  논의를 더 진행시키기 전에 '약탈plunder(주8)'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좀더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남들이 흔히 그러듯이, 약탈이라는 단어를 모호하고 은유적인 용도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약탈이라 부르는 것은 정확하고 과학적인 것으로서
사유재산의 개념과 정반대의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재산이 소유자의 동의 없이,
그리고 보상 없이 소유자로부터 그 재산을 창조하지 않은 사람에게로 이전되어
간다면 그 수단이 강제력이든 사기든 간에 나는 그것을 재산권의 침해라고 부르는
동시에 약탈이라고 부른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법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법이 마땅히 막아야 할 것들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범한다면 그것 역시 약탈이며,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 걱정스러운 약탈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그 약탈의 책임이 약탈자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법과 입법자, 심지어는 사회 그 자체가 정치적
위험에 빠지게 된다.
  사실 나는 '약탈'이라는 단어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너무 공격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반대자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단어를 찾으려고도 해보았다. 하지만 약탈 이외의 다른 마땅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내 말을 믿을지 모르지만 나는 반대자들의 선한 의도나 도덕성에
대해서 비난할 의사가 전혀 없다. 나는 내가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주장을 공격하고
있을 뿐이다. 또 우리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리고 남들을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도 없이 우리를 정의롭지 못하게 만들어가는 정치체제를 공격하고 있을 뿐이다.
  보호무역주의나 사회주의, 심지어는 공산주의 중 어느 하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이념이나 정치적인 두려움 때문이다. 이 세 가지(보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그 발전단계가 다를 뿐 같은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보호주의와 공산주의가 그것의 부분성(partiality)(주9)과
보편성(universality) 때문에 사회주의에 비해서 더 약탈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사회주의가 가장 모호하고 그 정체가 불분명하며, 따라서 가장 진실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합법적 약탈의 뿌리가 잘못된 박애주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 동기의 문제는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이것을 이해했으면, 이제 보편적 약탈을 통해서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열망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디에서 왔으며, 앞으로 어디로 향하게
될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사회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법이 조직화된 정의라고 한다면, 그 법을 가지고 노동과 교육, 그리고 종교를
조직하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법을 통해서 노동과 교육과 종교를 조직하다 보면 정의의
원칙이 파괴된다는 사실, 그것이 문제이다.
  법은 강제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따라서 법의 영역은 정당한 강제력의
범위를 넘어설 수가 없다.
  법과 강제력이 인간을 정의의 영역내에 가두어두려고 한다면, 단순한
금지(negation) 이상의 것을 인간에게 부과해서는 안된다. 법과 강제력이 요구해야
하는 것은 타인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의무뿐이다. 인간의 인격이나 자유, 또는
사유재산을 침해해서는 안된다. 제대로 된 법이 할 일은 인격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보호하는 것뿐이다. 법과 강제력은 방어자의 편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권리를 보호할 뿐이다. 법과 강제력은 그 무해성이 자명하고, 효용이
분명하고, 정당성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명을 완수할 뿐이다.
  이것은 너무나 지당하기 때문에 언젠가 내 친구가 말했듯이 '법의 목적은 정의가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너무 막연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대신 법의
목적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정의란 정의롭지 못한
것이 사라진 상태이다.
  그러나 법이라는 것이 그것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강제력을 이용해서 노사관계의
체계를 강요하건, 교육의 방법 및 내용을 강요하거나, 신앙이나 종교를 강요한다면,
법은 금지negation의 원칙이 아니라 허용positive의 원칙 위에 서게 된다. 그 결과
입법자의 의지가 시민 각자의 의지를 대체하고, 입법자들의 주도권이 시민 각자의
주도권을 대체한다. 시민들에게는 더 이상 서로 협의해야 할 이유도, 비교해야 할
이유도, 앞날을 내다볼 이유도 없어져버린다. 법이 그들을 대신해서 모든 것을
해주기 때문이다. 지성은 쓸모 없는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기를 멈춘다. 인간은 인격과 자유와 재산을 상실한다.
  강요된 노사관계하에서 자유가 파괴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가 강제로
인정되는데 사유재산권이 파괴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법에
의한 노동과 산업의 조직이 필연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상태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를 생각하는 정치가라면, 그 사회내에 존재하는 심각한 불평등을 보고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는 고통받는 많은 동포들을 보고 마음 아파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고통이 일부 계층의 사치와 풍요로움과 대비될 때 그의 마음은 더욱 아파질 것이다.
  이같은 문제에 당면해서 정치가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이같은
일이 발생한 것은 오래전의 정복이나 강탈, 또는 근자에 벌어진 합법적인 약탈
때문은 아니었을까?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복지와 인격의 완성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았을 때,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상태에서 우리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최대의 발전과 최대의 평등은 정의의 원칙이 철저히 적용될 때 달성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것이 자신의 책임에 따라 선과 악, 그리고 그에 따르는 보상과 처벌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신께서 인류에게 내리신 의도에 합치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정치가들이 그같은 의문을 제기해보았을 리 없다. 그의 관심은 오직
탁상에서의 계획과 타협, 법적, 또는 파당적인 조직에만 가 있다. 결국 그가
찾아내는 치유책이란 그같은 사회문제를 만들어 낸 조건들을 영속화하고, 더욱
증폭시키는 것일 뿐이다.
  이같은 해결책 중에서 약탈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당신은 돈이 한푼도 없는 사람이 있으니 법으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법이란 저절로 채워지는 어머니의 젖이 아니다. 사회로부터 끌어오지
않는다면 그 젖은 나올 수가 없다. 특정의 시민, 또는 계층의 이익을 위해서 국고에
자금을 채워넣어야 한다면 다른 시민이나 계층이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물론 각자가 기여한 만큼만 국고에서 가져간다면 당신들의 법이 약탈적인 법은
아니다. 그러나 돈 한푼 없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안한 것이 된다. 그런 법은
평등을 위해서 무용지물인 것이다. 법이 평등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려면
누군가로부터 뺏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약탈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호관세나 보조금, 이윤권(rights to profit), 노동의 권리, 공적
부조의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 누진세, 무이자 신용대출, 공공사업 같은 것을 한번
생각해보라. 아마도 당신은 그것들에서 합법적 약탈과 조직화된 부정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또 이 세상에는 무지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법에 호소한다. 그러나 법은 가까운 곳에만 빛을 비추어주는
횃불이 아니다. 법이라는 횃불은 지식이 있건 없건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주는 횃불이다. 어떤 사람은 배우려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기꺼이
가르치려 할 것이다. 법이 할 수 있는 일은 다음의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 하나는 자유로운 거래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 즉 그와 같은 필요가 자발적으로
충족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를 무료로 가르치는 교사를 고용하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돈을 강제로 뺏어내는 것이다. 만약 두 번째의 대안을
택한다면 반드시 자유와 재산권은 침해되고 만다. 그것은 합법적인 약탈이다.
  당신은 또 이 세상에는 도덕심이나 신앙이 없는 사람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법에 호소하려 한다. 그러나 법은 강제력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법이라는 강제력을 동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여러분은 사회주의자들이(그들이 스스로에 대해서 얼마나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들이 만들어낸 계획과 노력을
합법적인 약탈이라는 괴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짓을 한번 보라. 그들은 동포애나 대동단결, 조직, 협회 같은
이름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계획이 약탈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심지어는 자신의 눈으로부터도 숨긴다. 게다가 우리가 법에 대해서 정의 이외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가 동포애나 대동단결, 조직과 협회 같은
것을 배척하는 사람으로 매도해간다. 그들은 우리를 개인주의자라고 멸시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자발적인 조직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배척하는 것은 강요된 조직일 뿐이다.
  우리가 자발적인 협회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배척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협회일 뿐이다.
  우리는 자발적인 동포애를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가 배척하는 것은 법적으로
강요된 동포애일 뿐이다.
  우리는 신의 뜻에 따르는 대동단결을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가 배척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그리고 책임회피에 불과한 인위적 단결일 뿐이다.
  사회주의는 그것의 뿌리인 원시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정부와
사회를 혼동하고 있다. 정부는 이런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우리를 보고
마치 우리가 그런 일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인 양 사회주의자들이
우리를 비난하는 것은 그 같은 혼동 때문이다. 공교육에 대해 반대하면 마치 우리가
교육을 반대하는 것으로 여긴다. 국교에 대한 반대를 종교에 대한 반대로 여긴다.
국가에 의해서 강요되는 평등을 반대한다고 해서, 우리가 마치 평등 그 자체에
반대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국가에 의한 곡물경작을 반대한다고
해서 인간이 먹는 것을 반대하는 것쯤으로 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법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부, 과학, 종교 등의 긍정적인 것들)을 법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식의 이상한 생각이 정치의 영역에서 통용되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오늘날의 정치학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주의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교리는 그 구체적 형태야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된 가설 위에 서 있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가설일 뿐 아니라, 인간의 두뇌 속에 들어온 아이디어 중에서
가장 오만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눈다. 그 하나는 일반대중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학자,
즉 자신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가장 중요한 존재로 여긴다.
  실제로 그들은 인간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없고 또 분별력도 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들은 또한 인간에게는 독창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을 기껏해야
자신의 존재형태에 무관심한 식물 정도로 여긴다. 그들은 또 인간이 피동적인 물질,
분자, 또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서 대칭적이고,
예술적이고, 완벽한 형태로 빚어질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들은 인간이라는 뿔뿔이 흩어진 재료를 이용해서 사회를 만들어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여타의 인간들에게 자기들은 의지이며, 손이며, 우주의
운행자이며, 창조적 힘이다.
  정원사들이 나무를 가지고 마음 내키는 대로 피라미드, 파라솔, 정육면체, 원뿔,
꽃병, 시렁, 실패, 부채 같은 것으로 다듬듯이 사회주의자들도 불쌍한 인류를 가지고
집단으로 나누고, 줄 세우고, 중심과 변두리를 가르고, 세포조직을 만들고,
국영작업장으로 편성하고 조화시키고 대조시키는 등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회를
빚어내려고 한다.
  그리고 정원사들이 도끼와 톱과, 갈고리와 가위를 필요로 하듯이, 인위적으로
계획된 사회질서의 옹호자들은 사회를 제멋대로 조작하기 위해서 관세법, 조세법,
구호기금법, 교육법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을 자신들이 원하는 틀로 새로 빚어내야 하는 원료로
생각하지만 간혹 자신들조차도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그럴 때 그들은 인류를 실험재료로 간주한다. 모든 시스템을 가지고
실험을 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들에게 얼마나 인기있는지를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회주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은 한 지역을 실험대상으로
지정해달라고 의회에 진지하게 요청한 적까지 있을 정도이다.
  마치 발명가가 대형 기계를 만들기 전에 작은 모형을 만들어보는 식이다. 또 마치
화학자들이 실험용 약품을 희생해버리듯, 농부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하기
위해 작은 양의 씨앗을 희생하듯이 말이다.
  정원사와 나무, 발명가와 기계, 화학자와 시약, 농부와 씨앗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과 나머지 인류들간에도 그같은 거리가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
  19세기의 정치학자들이 사회를 천재적인 입법자들의 인위적인 창조물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두고 놀랄 필요는 없다.
  오랜 교육의 산물인 이 아이디어가 우리나라의 모든 사상가들과 저술가들을
지배했었다.
  이들은 인류와 입법자간의 관계를 진흙과 도공간의 관계로 본다.
  물론 그들도 인간에게 행동력과 분별력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들 두 가지 능력이 인류에게 재앙과 타락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제멋대로 종교를 믿게 하면 무신론으로 빠지고, 제멋대로 교육을 받게 하면 무지로
빠져들며, 제멋대로 노동과 장사를 하면 빈곤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불행중 다행히도 세상에는 그런 범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뛰어난 능력을 부여받고 태어난 인간들(통치자, 또는 입법자)도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대다수의 인류가 죄악을 향해 치닫는 중에도 그들은 선을 추구한다.
대다수의 인류가 암흑을 향해 나아갈 때, 그들은 빛을 향했다. 대다수의 인류가
악덕을 저지를 때, 그들은 덕을 행한다. 이런 가정에 바탕을 두고서 그들은
억지로라도 대다수 인류가 가지고 있는 성향을 자신들의 고매한 이상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즉 인간은 무력한 원재료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생명과 조직과
도덕과 부를 정부로부터 부여받아야 한다는 생각, 게다가 인간은 제멋대로 놔두면
타락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입법자의 신비로운 손으로 그런 추세를 막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에 얼마나 뿌리깊이 박혀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철학이든, 역사든, 정치학이든 아무 책이나 한권 꺼내어 보라. 사회는 원래
수동적인 존재인데 그 뒤에 법, 또는 입법자라는 신비로운 힘이 있음으로 인해
사회가 생명을 얻고 윤택해진다는 생각을 어디에서건 발견할 수 있다.

  부세(Bousset)

  그들(누구?)이 이집트인들의 마음에 가장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애국심이다... 국가에 무익한 존재가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법은 각자에게
선대로부터 내려온 가업을 직업으로 부여했다. 누구든지 두 가지의 직업을 가질
수가 없었고, 또 바꿀 수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종사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법과 지혜를 공부하는 일이었다. 종교에 대한 무지,
그리고 국가의 규제에 대한 무지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았다. 게다가 각각의
직업에는 특정의 구역이 배당되었다... 좋은 법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준법정신을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당시의 이집트를 놀라운
발명품들로 가득 채웠으며, 삶을 유용하게 하고 평화롭게 하는 데에 필요한 거의
모든 지식을 남겨주었다.
  부세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기들 스스로는 어떤 것도 얻어낼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것이 애국심이었든, 부였든, 근면함이었든, 지혜였든, 발명품이었든, 농업이었든,
과학이었든 간에 모든 것이 법과 왕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그저 그들이 법이나 왕이 무엇인가를 하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집트인들이 레슬링과 음악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비난을 하는 디오도로스를 보고
부세는 다음과 같이 훈계한다. 이런 것들이 트리스메지스투스에 의해서 발명된
것일진대, 이집트인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페르시아인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왕자가 짊어져야 할 첫 번째 책임은 농업을 번성시키는 일이다... 군대를 감시하는
초소가 있듯이 농사일을 감시하는 초소도 있었다. 왕실의 권위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존경심은 크다 못해 넘칠 정도였다.

  매우 지적이긴 했지만 그리스인들도 말이나 개와 마찬가지로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옛사람들은 자신의 내부로부터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밖에서 주어질 뿐이었다.

  용기와 지성으로 충만한 그리스인들은 어릴 적부터 왕이나 이집트로부터 파견된
이주민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에게서 체조와 달리기와 경마를
배웠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이 그들에게 가르쳐준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유순해지는 것, 즉 법에 의해서 공공의 선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지려는 태도이다.

  페넬론(Fenelon)(주10)

  페넬론은 루이 14세의 막강한 힘을 보았다. 그는 고전을 공부했고, 또 그것들을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인간을 피동적인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그에게는 불행이나 번영, 악덕이나 덕성 등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본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입법자와 그들이 만드는 법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는 살렌텀(Salentum)(주11)이라는 유토피아를 제안했다. 그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재능, 욕망과 전재산이 모두 입법자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어야
했다. 무슨 문제가 생기든 간에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입법자, 즉 왕이어야 한다.
왕은 국가를 구성하는 수많은 국민들의 영혼 그 자체로 묘사되었다. 왕만이 생각을
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왕만이 사람들에게 진보를 가져다줄 수 있었고, 모든
집단들에게 행동의 원칙을 제시할 수 있었다. 왕은 모든 것에 책임을 지는 존재였다.
  페넬론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그의 저서
"텔레마키(Telemaque)" 제10권을 모두 소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더 알고 싶은
독자들은 직접 읽어보시라. 나는 단지 그 책 중에서 몇 개의 문단만을 인용해서
비판하려고 한다. 아마도 그의 글에 대해서 올바르게 비판하는 것은 내가 처음일
것이다.
  고전연구가들은 고전원문 속의 내용을 너무나 쉽게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고전
속의 내용들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이치에 닿는지를 따져보지 않는 것이다. 페넬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이집트인들이 매우 행복하게 살았다는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원인이 이집트인 자신들의 지혜 때문이 아니라 왕이
지혜로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부유한 도시들과 농가들은 모두 최적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농사를 쉬는
일이 없는 밭에는 황금빛 곡식들이 넘쳐났고 목초지에는 가축들이 많았다. 농부들이
다 져 나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과일들이 생산되었다. 목동들의 피리소리도
아름답게 메아리쳤다. "지혜로운 왕을 가진 백성들이여,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사부(Mentor)(주12)는 말했다.
  이어서 사부님은 이집트 전역에 넘쳐나는 즐거움과 풍요에 관해서 말했다.
이집트에는 2만 2천 개의 도시가 있었다. 그 도시들을 다스리는 행정관들은 매우
훌륭한 사람들이었으며, 재판은 정의롭게 이루어져서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아이들에게도 좋은 교육이 주어졌다. 그 결과 아이들은
복종과 노동과 절제를 배우게 되었고 예술과 문장에도 능하게 되었다. 모든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남을 위하는 마음과 충직함과 신에 대한 두려움을
깨우쳐주었다. 사부님은 이같은 멋진 질서에 매우 흡족해 했다. 그는 내게 이같이
말했다.
  "지혜로운 왕의 통치를 받아 이같이 살고 있는 백성들은 너무나 행복하여라."

  크레테(Crete)에 대한 페넬론의 묘사는 더욱 목가적이다. 여기에도 사부님이
나오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아름다운 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미노스(Minos)의 법이 만들어놓은
결과이다. 그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교육은 그 아이들의 육체를 건강하고 강인하게
만든다. 아이들에게는 처음부터 절제와 근면이 가르쳐진다. 쾌락은 몸과 마음을 모두
약하게 하는 것이다. 덕성으로 완전무결하게 무장하고 영광을 얻는 것만이 그들에게
허용되는 유일한 쾌락이었다. 배은망덕과 위선과 탐욕은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허례허식과 안일한 생활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크레테에 그런 것은
존재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레테에서 값이 비싼 가구나 화려한 의상이나
사치스러운 파티나 휘황찬란한 궁전 같은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해서 스승은 왕자에게 이타카(Ithaca)에 사는 그의 백성들을 가지고
원하는 어떤 것으로라도 만들 수 있는 준비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의도가
선하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겠지만 말이다. 살렌텀 얘기는 스승이 왕자에게
그같은 사명에 대한 확신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서 등장한다.
  최초의 정치적인 이념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올리비에 세레스(주13)가
농부들에게 흙을 다루는 법을 가르치듯이 입법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배워온 것이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

  이제 위대한 몽테스키외의 말을 들어보자.

  상업적 기풍을 유지하려면 법들이 그러한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또 그 법들은
상업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부를 잘 분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남들 못지않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것은
부자들에게 득이 될 것이다. 부자들의 돈을 거두어다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다면 부자들이 게을러지는 법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법은 모든 부의 분배자가 되어버린다.

  부의 균등한 분배가 민주국가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균등한
분배를 한치의 착오도 없이 달성하기란 매우 어렵다. 처음에는 그저 불균등을
일정한 수준 이하로 줄여주는 정도만으로 충분하다. 일단 그렇게 해놓은 다음
부자에게는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보조금을 주는 식으로 해서
차차 그 격차를 더욱 줄여갈 수 있다.

  이번에도 역시 법은 강제적으로 부의 균등분배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리스에는 두 종류의 공화국이 있었다. 스파르타처럼 군사적인 특성이 강한
공화국들이 있었고, 아테네처럼 상업에 기반을 둔 공화국들도 있었다. 스파르타는
시민들이 그저 빈둥거리기를 원했다. 반면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에게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독자들이여, 이 위정자들의 놀라운 천재성을 보라. 그들은 기존의 모든 관습과
모든 가치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듦으로써 세상의 존경을 받게 될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다. 리쿠루쿠스(Lycurucus)는 가벼운 절도는 오히려 정의로운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 극단적인 자유를 위하여 극악무도한 노예제를 택했고, 잔인한 심성을
좋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그렇게 해서 스파르타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스파르타로부터 모든 자원과 예술과 상업적인 행위와 방어수단을 제거해버린
듯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야망이 남아 있기는 했으니 노력한다고 해서 성공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애정도 남아 있기는 했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자식과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이 허용되지 않았다. 순결마저도 칭송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이 스파르타를 장대하고 영광스런 국가로 만들어갔다.
  그처럼 비범한 현상이 그리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에도 그같은 예는 찾아볼 수 있다. 간혹 고결한 입법자들이 나와서
사람들을 성실하게 빚어내기도 한다. 마치 스파르타의 위정자들이 스파르타인들을
용감한 인간으로 빚어냈듯이 말이다. 펜(Penn)씨는 진정 현대판 리쿠루쿠스라고
불릴 만하다. 사람들을 인도해가고자 하는 방향에서나, 사람들에게 행사하려고 했던
영향력의 성격, 그들이 극복해야만 했던 편견, 그리고 열정 등 모든 면에서 그 둘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다만 리쿠루쿠스가 추구했던 것이 전쟁이었던 반면 펜씨가
추구했던 것은 평화였다는 사실만이 다를 뿐이었다.
  파라과이(Paraguay)는 또다른 사례로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명령하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낙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중대한 사회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스려지는 사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스린다는 것은 분명
숭고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같은 사회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하라. 플라톤의 공화국에서처럼
사유재산을 몰수하여 공유화시켜라. 플라톤이 명한 대로 신을 경배하라. 또 관습을
보존하기 위해서 외국인들과 피를 섞지 못하게 하라. 상업은 시민들에게 맡기지
말고 국가 자신이 수행하도록 하라. 입법자들은 시민들에게 사치품이 아니라
예술품을 공급해주어야 한다. 시민들의 정욕을 억제하는 대신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경솔한 대중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그 유명한 몽테스키외가 그렇게 말했대. 정말 굉장하잖아. 정말 멋진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뭐라고! 그런 형편없는 생각을 어떻게 굉장하다고 부를 수 있단 말이오.(주14)
정말 구역질이 날 뿐이오."

  이 정도면 몽테스키외가 인격과 자유와 재산, 즉 인류 그 자체를 입법자들이
자신의 지혜를 다해서 새로이 빚어내야 하는 원재료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이해하겠는가?

  루소(Rousseau)

  루소는 민주주의자 중에서도 으뜸이다. 그는 사회를 일반의지라는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루소만큼 인간은 입법자 마음대로 빚어낼 수 있는 피동적
존재라는 가설을 철저히 받아들인 사람은 없다.

  위대한 왕이 진귀한 존재일진대, 법을 만드는 사람이야 오죽하랴. 위대한 왕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모형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입법자가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왕은 그것을 켜고 작동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켜고 꺼지는 기계, 심지어는 그 기계를
만드는 재료 정도로 간주될 뿐이다.
  따라서 입법자와 군주는 농학자와 농부 정도의 관계로, 그리고 군주와 국민의
관계는 농민과 농토간의 관계 정도로만 간주될 뿐이다. 그럴진대 입법자들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정치학자 그 자신의 고매함이랴.
  그는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입법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국가의 안정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양극단간의 간격을 좁혀라. 부자가 있어서도
안되고 거지가 있어서도 안된다.
  농토가 척박한가, 또는 국토가 사람들이 살기에 너무 좁은가? 그렇다면 제조업과
기예를 발전시켜서 필요로 하는 것을 사오라. 농토는 비옥한데 인구가 부족한가?
그렇다면 농업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기예는 억제하라. 기예는 인구를 더욱 줄인다
...(중략)... 질고 접근성이 좋은 해안을 끼고 있다면 그 바다를 배로 덮어버려라.
그러면 짧지만 화려한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바다에 암초가 많은가.
그렇다면 야만인들처럼 생선으로 연명하라. 그러는 편이 항해자가 되는 것보다
평화롭고, 유복하고 행복한 삶을 가져다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국가에
공통되는 교훈을 제외한다면, 모든 나라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상황에 처해 있고,
그에 맞는 독특한 법을 필요로 한다. 히브리족과 아랍인들에게는 종교가,
아테네인들에게는 글자가, 카르타고와 티르인들에게는 상업이, 로도스인들에게는
항해술이, 스파르타인들에게는 전쟁이, 그리고 로마인들에게는 덕행이 있었다. 법의
정신의 저자는 법제정자가 어떤 기술을 가지고 각 나라에 맞는 목표를 가르쳤는지를
밝히고 있다. ... 그러나 법제정자가 실수를 해서 자연이 정해준 원칙을 벗어난다면,
즉 어떤 자는 노예제를 추구하고 어떤 자는 자유를 추구한다든가, 어떤 자는 부를
추구하고, 다른 자는 인구의 증가를 추구한다든가, 어떤 자는 평화를 추구하는 반면
다른 자는 정복전쟁을 추구한다면, 법은 약화되며, 헌법의 기반이 약해지고, 국가는
지속적인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결국 자연상태가 도래할 때까지 국가는 붕괴의
길을 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자연의 힘이 그처럼 막강하다면, 왜 루소 자신은 입법자가 인간의 심성에
대한 통제욕구를 버려야 함을 인정하지 않는가. 왜 리쿠루쿠스나 솔론, 혹은 그
자신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토양이 비옥하면 인간이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 농사를
지을 것이고, 해안선이 길고 접근성이 좋으면 상업을 시작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가. 루소가 사회의 발명자, 설립자, 지도자, 법제정자,
조작자에게 얼마나 큰 책임을 지우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루소는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

  누구든지 감히 나라를 세우려는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홀로 있으면 완벽하고 완전한 전체이지만,
그들을 더 위대한 전체의 일부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변화시켜야 한다. 인간은 그
위대한 전체로부터 자기 삶의 일부분, 또는 전부를 부여받는다. 또 그것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헌법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또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육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의존적이고 도덕적인 삶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지도자는 인간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힘을 빼앗는 대신, 그의 의지와는 무관한 어떤 것을 주입시켜야 한다.

  불쌍한 인류 같으니라고. 루소의 사도들에게 당신의 존엄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레이날(Raynal)(주15)

  공기나 토양 같은 자연조건들이 법제정자가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지침이다.
그에게 주어진 자원이 그의 의무를 규정한다. 가장 먼저 그는 위치를 생각해야 한다.
해안에 위치한 민족이라면 항해와 관련된 법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내륙 깊은 곳에
식민지를 만들었다면, 입법자는 토양의 형태와 비옥도를 고려해서 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가 만든 법의 지혜가 드러나는 것은 재산의 분배방식이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세계 어디에서건, 식민지를 만들려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할 만큼 토지를 분배해주어야 한다.
  어린아이들을 무인도에 정착시키려 한다면, 그들의 이성이 발달함에 있어 진리의
씨앗이 싹틀 수 있도록만 해주면 된다 ...(중략)... 그러나 기존의 국가를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면 해법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입법자들은 특히 성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해로운 생각들과 관습들에 유의해야 한다. 그같은 사고방식이나
관습들이 다음 세대로 전염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린이들을 공립학교에 보내서
어른들의 잘못된 사고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식민지를 건설하려면 군주나 입법자들은 반드시 어린이를 교육시킬 현명한 교사도
같이 파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새로운 식민지의 입법자들에게는 자기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주민들의 태도와 도덕심을 좋게 만들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이
주어져 있다. 천재성과 덕성을 조금이라도 가진 입법자라면 그가 다스려야 할
대지와 주민들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좋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글은 마치 농업을 가르치는 교수가 자신의 학생들에게 하는 말을 옮겨놓은
것 같지 않은가? 기후는 농부들에게 지침이 된다. 그의 자원은 그의 의무를
규정한다. 그가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위치이다. 만약 그의 농지가
점토질이라면 이러이러한 식으로 해야하고 모래땅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한다.
자기의 농토를 개간하고 지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머리만 있다면 그에게 주어진 비료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명한 학자님들이시여, 당신들이 진흙과 모래와 두엄덩이처럼 여기고
있는 이 재료들은 바로 당신과 다름없이 지능이 있고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임을
기억하시라. 그들도 당신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위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기억하라.

  마블리(Mably)(주16)

  마블리도 법과 입법자의 역할에 대해서 글을 남겼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로 법이 그 효력을 잃어가는 상황을 가정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렇게 될 정도라면 정부의 나사가 너무 헐거워졌음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새로운
긴장을 주어보라. 그러면 병폐들이 치유될 것이다. ...(중략)... 잘못을 벌주기보다는
잘한 것을 격려하도록 하라. 그러면 나라의 젊음이 회복될 것이다.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들이 자유를 잃게 된 것은 이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상적인 절차로 해결하기 힘든 해악이 닥친다면 강력한 힘을 동원하라. 시민들의
사고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들라면 스무 권도 넘을 것이다.
   고전교육에 기초한 이같은 가르침 때문에 한때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는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남들을 관리하고 조직하고 교육시키려고 한 적이 있었다.

  콩디악(Condillac)(주17)

  나의 하나님, 리쿠루쿠스나 솔론이 했던 것과 같은 나라를 만들게 해주소서.
그리고 이 논문을 다 읽으시기 전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야만인들에게 법을
내려주소서. 이 유목민들에게 정착된 삶을 주시고 집단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소서 ...(중략)... 자연이 그들에게 선사한 재능을 계발하게 해주소서 ...(중략).
..
그들이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라고 명을 내리소서 ...(중략)... 그들이 쾌락에
탐닉하지 못하도록 그들에게 벌을 내리소서. 그같은 법을 통해서 이 야만인들의
사악함은 사라지고 새로운 덕성이 그들의 가슴속에 자리잡을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법을 가졌지만 진정 행복한 민족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는 가족들을 공통의 이해관계로 묶어두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입법자들이 몰랐기 때문이다.
  법이 불편부당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재산이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고, 시민들의 존엄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법이
시민들에게 평등을 보장할수록 시민들은 서로를 더욱 소중하게 대할 것이다
...(중략)... 법에 의해서 재산의 평등한 분배가 보장되고, 평등한 상태의 파괴가
허용되지 않을진대 어떻게 탐욕과 야망과 육욕과 나태와 시기와 증오와 질시가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겠는가(이 뒤로 목가적인 문장들이 이어진다).
  스파르타에 관해서 배운 것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역사상 스파르타만큼 자연의 질서, 그리고 평등의
질서에 합치되는 법을 가진 나라는 없었다.(주18)

  17, 8세기의 사람들은 인간을 입법자이자 천재이기도 했던 군주의 하명만을
기다리는 피동적인 존재로 간주했다. 인간의 형태, 모습, 충동, 행동, 그리고 생명 그
자체까지 군주의 명령에 의해서 결정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사고가
고대국가들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 해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랄
만한 사실은 아니다. 그들의 연구대상이었던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의
고대국가들은 모두 소수의 특권층들과 그들이 폭력을 이용해서, 또는 사기를 쳐서
끌어다놓은 다수의 노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소수의 특권층이 다수의
노예들을 자기들 멋대로 다루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이 한 일이라고 해서 다 잘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역사란 진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많은 실수와 무지와 독재와 노예제도와 미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전부 잘못만을 저질렀다고 볼 수는 없다. 고대국가의
제도들이 그렇게 생겼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중요한 공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고대의 제도들을 무작정 동경한 나머지 미래의 세대들도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분명 잘못이다. 그처럼 무비판적으로 고대의 것들을 받아들인 나머지
고대국가의 모든 것들이 장대하고 존엄하고 도덕적이고 행복을 가져다주었다는
결론을 너무 쉽게 도출해버렸다. 그들은 인간의 지식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자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 지식이 자라남에 따라 힘이 정의의 편에 서게
된다는 것과, 독재자 대신에 사회가 다시 스스로 서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세계정세 속에서 겪고 있는 현상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민족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주19) 듣는 이들의 심장을 뛰게 하고 세상을 온통 흔들어놓는 그 자유라는 것.
우리는 무엇을 두고 자유라고 부르는가. 양심의 자유, 교육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여행의 자유, 노동의 자유, 교역의 자유,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이 자유
아닌가. 각자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이 가진 재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자유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종류의
독재(합법적 독재까지 포함)가 제거된 상태, 그것이 자유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법이 개별적 자기방어권(또는 부당함에 대한 처벌권)의 집단화라는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 상태, 그것이 자유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프랑스에서는 진보를 향한 인류의 이같은 움직임이 도전을 받고 있다. 이는
고전연구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치명적으로 잘못된 욕망에 기인한 바 크다.
그들은 자기자신들이 여타의 인간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꿈꾸는 대로
인간들을 조직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자유를 향한 몸부림을 계속하는 와중에도 이들 저명한 학자들은
17,8세기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인류를 자신들이 고안해낸 체계,
즉 인류애의 탈을 쓴 폭정에다가 끼워 맞추려고 할 뿐이다. 루소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자신들의 상상의 산물인 사회복지의 멍에 속에 인간을 억지로 가두어두고
싶어한다.
  1789년의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구체제가 붕괴되기는 했지만, 사회는 또다른
인위적 질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을 뿐이다. 법의 전지전능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새로운 인위적 질서의 출발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목청을 높였던 사람들의 말을 한번 들어보라.

  생 유스트(주20): "모든 미래의 일들은 입법자의 명령에 따른다. 인류의 선함은
입법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만이 각자의 인간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로베스피에르: "정부가 할 일이란 공화국의 탄생목적이 달성되도록 나라 안의
모든 물질적 도덕적 역량을 몰아가는 것이다."

  빌로 바렌(주21): "자유를 되찾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다시 태어나야 한다.
강력한 힘과 행동을 통해서 과거의 편견이 제거되고 기존의 관습이 변화되고,
타락한 감성적 애정이 고쳐져야 한다. 지나친 욕구는 자제되어야 하고 뿌리깊이
박힌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중략)... 동무들, 리쿠루쿠스의 굽힐 줄 모르는
엄격함이 스파르타를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솔론(Solon)은
시민들을 너무 믿은 나머지 아테네를 노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정부를
운영함에 있어 어느 쪽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르켈레티에르(주22): "인간의 타락상을 고려해볼 때, 완전한 인간개혁, 또는
인간개조를 단행해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내야 한다."

  이같이 인간은 한낱 원재료 정도로밖에는 취급되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는
선해지려는 의지도 없고, 또 선해질 수도 없다. 입법자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생
유스트의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란 바로 입법자(생 유스트 자신)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소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추종하였다. 입법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국가의 목표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국내의 모든 물리적
도덕적 역량을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투입하여야 한다. 국민들은 그저 피동적인
존재로 남아 있을 뿐이다.
  빌로--바렌의 말도 같은 맥락 속에 있다. 편견이든, 습관이든, 심리적 성향이든,
욕구이든,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국민들은 그저 입법자들이 허용하는 것만을
가져야 한다. 그의 주장은 한 인간의 굽힐 줄 모르는 엄격함만이 공화국의 기반을
튼튼하게 한다는 논리로까지 이어진다.
  또 마블리는 통상적인 통치만으로 악이 제거되지 않을 경우는 선을 구현하기
위해서 독재를 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통상적인 절차로 해결하기 힘든 해악이
닥친다면 강력한 힘을 동원하라. 시민들의 사고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마블리의 말은 그것을 뜻하고 있다.
  로베스피에르의 말을 들어보라.

  공화국 정부는 고결함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수단은
공포정치이다. 우리는 이기심 대신에 도덕이, 명예욕 대신에 정직함이, 관습 대신에
원칙이, 사유재산 대신에 의무가, 유행의 폭정 대신에 이성의 지배가, 불행에 대한
경멸 대신에 악덕에 대한 경멸이, 오만 대신에 긍지가, 허장성세 대신에 진정한
위대함이, 돈에 대한 집착 대신에 영광에 대한 동경이, 좋은 사회 대신에 좋은
사람들이, 음모 대신에 공로가, 순간의 재치 대신에 진정한 창조성이, 겉치레 대신에
진실이, 관능의 지루함 대신에 행복이, 위대한 자의 쩨쩨함 대신에 보통인간의
위대함이, 상냥하지만 경솔하고 초라한 인간들 대신에 관대하고 힘있고 행복한
인간들이 자리잡길 바란다. 다시 말해서 군주제하에서의 모든 악덕과 어리석음이
공화국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고결함과 기적들로 대체되기를 희망한다.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에게 부여한 위치가 다른 인류들에 비해서 얼마나 높은
자리인지를 알겠는가. 그리고 그의 말 속에 스며들어 있는 오만함에 주목하라. 그는
인간의 영혼이 다시 깨어나도록 기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또 통상적인
정부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그 자신의 힘으로
인간을 개조하려고 하고 있고, 그것도 공포정치를 통해서 하려고 하고 있다. 이같이
치기어린 모순투성이의 문장들은 그가 혁명정부의 행동원칙(도덕적 원리)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로베스피에르가 독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
외적의 침입이나 내부의 반란세력을 진압하기 위함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 자신이 고안해낸 도덕원칙을 강요하겠다는 것도 그가 독재를 요구하는 중요한
목적의 하나이다. 물론 그는 이같은 조치가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지기까지만 유효한
잠정적인 조치라고 밝히고는 있다. 하지만 그가 하려는 일을 한번 생각해보라. 그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모든 이기심과 명예욕과 관습과 유행과 허세와 돈에 대한
집착과 동료애와 음모와 재치와 육욕과 가난을 영원히 없애고 싶어한다. 이같은
기적이 완성되기 전까지 그는 결코 정상적인 법의 지배를 결코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가련한 자들이여! 자칭 위대하다는 자들이여!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이여!
당신들은 모든 것을 개조하려고 하지만 정작 개조되어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오. 당신들에게는 그 일만 가지고도 벅찰 거요.
  물론 대다수의 저명한 개혁자들, 입법자들, 그리고 정치학자들은 로베스피에르처럼
직접적인 독재를 하겠다고 나서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같이 극단적인 독재를
하기에는 너무 온유하고 인류애에 충만해 있다. 그 대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법에
의한 독재, 법절대주의, 법만능주의 같은 것들이다. 그들의 소망은 오직 법을 통해서
그같은 일을 하고자 함이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이같은 성향이 얼마나 보편적인 현상인가를 증명하려면,
마블리, 레이날, 루소, 페넬론, 부세, 몽테스키외 같은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는 것뿐
아니라 의회의 의사록을 전부 다 제시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원한다면 직접 그 문헌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같은 아이디어가 나폴레옹과 맞아떨어진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같은 아이디어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정력적으로 실천에 옮겨갔다. 그는
자신을 화학자로 여겼고, 유럽의 인민들을 실험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의 시약들이 매우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정도
미몽에서 깨어난 그는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인민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유에 대한 반감을 어느 정도는 누그러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의 그의 아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통치한다는 것은 도덕과 교육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모렐리(주23), 바보이프(주24), 오웬(주25), 생시몽, 푸리에 같은 학자들이 자신들

교의를 어떤 문헌으로부터 얻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밝힐 필요가 있을까? 단지 루이
블랑(주26)의 저서 중 노동의 조직에 관한 장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우리의 계획에 의하면 사회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원동력은 정부이다."
  그 위에 루이 블랑의 계획이 강요된다.
  반면에 사회라는 것은 인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인류는 루이 블랑씨로부터 원동력을 부여받는다.
  인류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 두말 할 필요 없이 인류가
누구로부터의 조언을 받아들이든 그것은 자유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루이
블랑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는 그의 계획이 법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강제력에
의해서 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계획에 의하면, 국가가 할 일은 일련의 법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활동은 완벽히 자유로운 조건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국가가 할
일은 사회를 경사면에다 갖다놓는 일이다. 일단 그 일이 끝나게 되면 사회는 자연의
힘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굴러가게 된다.

  그런데 이 경사면이라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바로 루이 블랑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인류를 골짜기로 빠뜨리지는 않을까?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어가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사회는 자생적으로
행복해질 수 없을까? 사회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움직일 힘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 움직일 힘은 누구로부터
나오는가. 그의 답은 정부이다. 정부에게 그 힘을 주는 것은 누구인가. 바로 그같은
메커니즘을 설계한 루이 블랑 자신이다.
  인간은 피동적인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법을 만들어서 움직여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순환논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
  사회가 그런 경사면 위에 놓여질 경우에도 어느 정도의 자유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을까? 물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때의 자유란 어떤 것일까?

  이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자. 자유란 주어진 권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의가 지배하고 법이 보호하는 가운데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또 그 재능을
행사할 수 있는 힘, 그것도 자유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권리와 힘간의 이같은 구분은 공허한 언어의 유희가 아니다. 그 결과의 차이는
엄청나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실현시킬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보자. 그러면 사회에게는 국민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시켜주어야 할 의무가 생겨난다.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인간의 심성이 발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사회는 국민들에게 생산수단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생산수단 없이 인간의 근면성이 발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것들을 제공해줄 수 있겠는가.

  결국 자유는 힘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 힘은 무엇으로 구성될까? 교육과
생산수단의 소유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제공해야 하는가? 그것을
제공할 의무는 사회에게 있다. 사회의 구성원 중 누구에 의해서 그것이 제공되어야
하는가? 정부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러면 정부는 누구에게서 그것들을
뺏어다가 나누어주어야 하는가?
  독자들 스스로 이 질문에 답해보라. 그리고 이같은 논리의 귀결점이 어디인지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일, 그리고 우리의
후세들을 경악시키게 될 일은 삼중의 가설(인간의 피동성, 법의 전지전능성, 그리고
입법자의 무오류성)에 기초한 이상한 교리가 자칭 민주정당들의 상징으로서
신성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라는 말 속에는 인류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 깔려 있다. 하지만 그들은 민주
말고도 '사회적(social)'이라는 말도 같이 사용하고 있다. 이 사회적이라는 단어
속에는 인간을 진흙 정도로밖에는 간주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배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정치적 권리의 문제에 대해서 민주주의자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그리고
일반국민들에 의해서 입법자들이 선출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하,
그런 문제라면 일반대중들에게도 본능적인 지혜가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국민들은
뛰어난 인지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들의 의지는 항상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의지는 오류를 범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투표권은 아무리 널리 보급되더라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투표권자들은 자신에게 투표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 보일 의무가 없다. 현명하게
표를 던질 것이라는 점이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이 어떻게 오류를
범한단 말인가. 오늘날 우리는 깨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뭐라고? 그런
사람들을 항상 끈으로 묶어두어야 한다고? 그들 스스로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서
지금 누리고 있는 그들의 권리를 쟁취했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만하면 그들의
지성과 지혜가 증명된 것 아닌가. 그들이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판단할 수 있지 않은가. 그들 스스로 자신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을 대신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을 만큼 더 현명하다고 감히 자처하는 자가 누구인가.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이미 자유롭고, 또 자유로워야 한다. 누구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일을 처리하고 싶어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일단 입법자들이 선출되고 공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면, 세상에
맙소사, 그들의 말은 변하게 마련이다. 사회는 피동적인 존재고 복귀되어 버리고,
입법자들은 다시 전지전능한 몸이 되어버린다. 사회는 그의 발명품이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하며, 그의 충동의 대상이며, 조직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인간은 그저
무엇인가 일이 되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완전한 전제정치의
시간이 오고 말았다. 잠시 전까지만 하더라도 문명인이었고 도덕적이었고, 완벽하던
인간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들이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들은 이제 타락의 근원일 뿐이다.
  우리는 자유가 허용되면 경쟁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콩시더랑씨의 주장에 의하면 경쟁은 필연적으로 기업가와 소비자 모두를 파멸에
몰아넣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한 국가가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파멸에 더욱
가까워진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스위스와 네덜란드와 영국과
미국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또 루이 블랑씨는 경쟁은 필연적으로 독점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같은 이유로
해서 생산비가 낮아지면 가격은 높아진다고 한다. 경쟁은 소비에 충당할 것들을
소진시켜 버리며, 또 생산활동을 파괴적인 활동으로 만들어간다고 한다. 그래서
경쟁은 생산은 늘려놓은 반면 소비는 줄이게 된다고 한다. 결국 자유인들은 소비할
목적도 없이 생산하는 셈이다. 그리고 자유란 억압과 광기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그래서 루이 블랑씨께서 손수 나서시어 사태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한다.
  그 이상의 어떤 자유가 그들에게 남겨져 있는가? 양심의 자유인가?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은 모두 무신론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누리려고 할 것이다. 교육의
자유여야 할까? 그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자기자식들에게 부도덕과
실수를 가르치기 위해서 교수들을 고용할 것이다. 게다가 티에르씨의 주장에
따르자면 아이들에게 애국심으로 가르치는 대신 힌두나 터키의 사상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매우 다행인 것은 대학의 전회 덕분에 우리 자녀들에게 고매한 로마의
사상을 가르치게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노동의 자유라고? 그렇게 되면 경쟁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생산물들이 소비되지 않은 채로 쌓이게 되고,
보통사람들은 씨가 마를 것이며 기업인들은 모두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자유무역이라고? 보호무역주의자들이 실증이 나도록 말해왔듯이, 그렇게 되면
인간은 파멸에 이르게 된다. 교역의 자유는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결사의 자유라고?
사회주의자의 교리에 따르면, 자유와 결사는 양립할 수 없다. 사회주의는 인간간의
결합을 강제적으로 달성하려 하기 때문에 자유는 박탈되어야 한다.
  물론 좋은 의도에서이긴 하지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인류에게 어떤 자유도
허용할 수 없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신사분들(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는 한, 인간은 그 본성상 타락과 풍기문란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그들이 보통선거권을 강력하게 요구한다는 사실과는 모순되지
않는가.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는 또다른 궁금증을 자아낸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한 질문을
그들에게 했지만 내가 아는 한 그들은 결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이
그리도 사악하고, 그 때문에 그들로부터 모든 자유를 박탈해야 한다면, 사회주의자
자신들의 본성은 선하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입법자들과 그들의 하수인들도
인류의 일원인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닌가. 그들은 여타의 인간들과는 다른 흙으로
빚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사회는 그 본성이 사악하기 때문에 제멋대로
내버려두면 필연적으로 파괴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강제로라도 인류가 타락의 비탈길을 굴러내려가지 못하도록 한 후, 인류가
가는 방향을 틀어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지능과 덕성을 하늘로부터 타고났다면, 그 증거를 대보라고 하라. 그들은
우리를 보고 양이 되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목동이 되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통의 인간들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한 자질을 타고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지시에 따르기 전에 그들이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의 비용과 위험을 부담하는 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고안해내고,
그들이 개혁안을 전파시키고, 그것을 채택할 것을 설득시키고, 자신들 스스로에게
그것을 실험하는 것에 대해 반대할 의사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법을 통해서,
즉 경찰력과 우리 모두가 낸 세금을 이용해서, 우리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완강히 반대한다.
  카베주의자(Cabetists)(주27), 푸르동주의자(Proudhonians), 고전주의자들에게
특정의 어떤 사상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발상, 즉 강제적으로 우리를 그들의 집단에 넣으려 하고, 무이자 은행을
받아들이라고 하고, 그리스--로마식의 도덕을 강요하고, 자기들식의 상업규제를
강요하려는 발상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계획과
도덕이 우리의 양심과 일치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그것들을 심판할 권리를 달라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조세와 정부의 강제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사회질서의 계획가들은 전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없고 그
나머지의 인간들은 모두 무능력자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리고 만약 인류가 자기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전제한다면 보통선거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불행하게도 이같은 모순은 역사적인 사실로도 증명된다. 인권과 정치적 권리를
쟁취함에 있어 프랑스 국민은 다른 어떤 나라의 국민들보다 앞서 있었지만, 다른
어느 나라의 국민들보다 훨씬 더 통치당하고 통제당하고 관리당하고 속박당하고
착취당하고 있음은 웬말인가.
  프랑스는 또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정부이다. 인간은 자신의 힘과 지능으로는
도덕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법에
바라고 있어야 한다. 국민들은 양이고 정치학자들은 목동이다. 대부분의
정치학자들이 받아들이는, 그 중에서도 특히 루이 블랑씨가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같은 생각이 지속되는 한 정부의 역할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선과 악, 덕성과
부덕함, 평등과 불평등, 부와 빈곤, 이 모든 것들이 정부에서부터 나와야 한다.
정부는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지며, 모든 일을 맡아서 한다. 우리가 행복하면
정부는 그 행복에 대해 감사받을 권리를 갖는다. 우리의 처지가 형편없이 되었을 때,
그 비난도 정부의 것이다. 그러고도 정부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제멋대로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법이 전지전능한 척을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교육을 독점하면서 법은 가장들로부터 자유를 박탈하는 대신 그들의 희망을
대신 충족시켜 주겠다고 나섰다. 그것이 기만이었을 때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정부가 특정의 산업을 규제하고자 나섰을 때, 그 정부는 그 산업을 번창시킬 책무
또한 떠맡은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산업으로부터 자유를 뺏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 산업이 곤경에 처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관세를 조작해서 무역수지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면, 정부는 교역을
번창하게 할 책무 또한 떠맡은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 교역량이 줄어든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만약 정부가 조선산업으로부터 자유를 빼앗는 대신 특별한
보호조치를 제공한다면, 정부는 조선업의 이윤을 보장해준 셈이다. 그런데
조선산업의 이윤이 형편없어질 경우 누구의 책임인가.
  그래서 이 사회의 모든 못된 현상들 가운데에 정부가 자발적으로 책임을 떠맡지
않은 것은 없다. 이러고도 조그마한 고통이라도 혁명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지경이다.
  답이라고 제시한 해결책은 더욱 가관이다. 법의 영역, 즉 정부의 책임을
무제한도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임금을 규제하거나 올리려고 한다.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도우려 한다.
모든 근로자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려 한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생산의 도구를
지급하려 한다. 돈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려고 한다.
라마르탱(Lamartine)씨가 말했듯이 정부는 국민들의 영혼을 계몽하고, 강화하고,
계발하고, 신성하게 할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같은 임무에
실패한다면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원래 내가 말하려던 것으로 돌아가자. 경제학과 정치학(주28)의 경계선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해답이 주어져야 한다. 법은 무엇인가. 법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의 관할영역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그것의 한계는 어디여야 하는가.
입법자의 권리는 어디에서 제한되어야 하는가.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 법이란 정의롭지 못한 것을 막기 위해서
조직된 집단적인 강제력이다. 다시 말해서 법은 정의이다.
  입법자가 우리의 인격과 재산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입법자가 있기 이전에 이미 인격과 재산은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법으로 인격과 재산을 보장해주는 것일 뿐이다.
  법은 원래 우리의 양심과 사고와 의지와 교육과 의견과 노동과 상업행위와 재능과
여가시간을 통제하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법이 해야 할 일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막아주는 데에서
그쳐야 한다.
  개인적인 폭력이 개인적인 방어를 위해서 사용될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듯이,
각자가 가진 폭력의 합인 법도 자기방어 이외의 다른 어떤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법이란 각 개인의 자기방어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던
각자의 권리를 집단화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법은 정의이다.
  그 목적이 설령 박애주의를 펴기 위함이라 할지라도 법이 개인의 인격을 억압하고
재산을 약탈해도 좋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 법의 원래역할은 인간의 인격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 억압과 약탈이라는 수단에 의존하는 한 박애라는 말을 꺼내서도 안된다.
박애와 약탈, 또는 억압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법은 인간의 인격과 재산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만약 법이 인격과 재산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법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격적 자유와 재산을 파괴하고 만다.
  법은 정의이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왜냐하면 정의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그 한계를 벗어나서 법을 종교나 동포애, 평등주의, 박애, 산업적,
문학적, 예술적으로 만들어버린다면, 당신은 모호함과 불확실성 속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다. 강요된 유토피아 속에서, 심지어는 서로 법을 장악하려고 하는 여러 개의
유토피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될 것이다. 정의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지만
동포애나 박애주의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경계를 그을
것인가. 법은 어디에서 금을 그을 수 있겠는가. 생 크릭씨 같은 사람은 그의
박애정신을 특정한 기업가계층에만 적용했다. 그래서 법은 생산자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서 소비자를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노동자들의 주장을 옹호하는
콩시더랑(Consederant) 같은 사람은 노동자들에게 의복과 주택, 음식, 기타 모든
생활필수품들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로 루이 블랑 같은 사람은
그 정도는 박애주의가 지향하는 것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생산의 수단과 교육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불평등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법이 낙후된 오지에도 사치품과 문학과 예술이 보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우리를 결국 공산주의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입법의 장인 의회는 이미 조잡한 망상과 고삐 풀린 탐욕들간의 각축장이 되어 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법은 정의이다.
  이런 원칙 위에 서 있는 정부라면 단순하고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경찰력의
임무가 정의롭지 못한 것을 제어하는 데에만 국한되어 있을 경우, 그것에 대한
혁명이나 폭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은 무시한다. 그런 체제하에서 사람들은 더
큰 번영을 누릴 것이고, 그것의 분배는 더욱 평등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고통
앞에서조차, 어느 누구도 그것을 정부의 탓으로 돌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마치 날씨가 나빠 농사를 망친 것이 정부의 탓이 아니듯이 정부의 탓이
아니다. 최저임금이나 저리자금, 생산수단의 분배, 보호관세, 공공사업 등을 요구하기
위하여 군중들이 법원에 난입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대중들도 그같은 것들이
판사들의 권한 밖이라는 것을, 그리고 마찬가지로 법의 영역 밖에 놓인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일단 법이 박애주의의 원칙 위에 놓이게 되면, 또 모든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법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리고 법이 모든 개별적인 불행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사회는 끊임없는
불평과 분노와 혼란과 혁명의 와중으로 빠져들게 된다.
  법은 정의이다.
  그리고 법이 정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이상하다.
정의란 권리 아닌가? 그리고 그 권리는 평등한 것 아닌가. 법이 무슨 권리로 나로
하여금 메스르씨나 미메렐씨, 드 멜룬씨(주29), 티에르씨(주30), 루이 블랑씨가
짜놓은 질서에 복종하도록 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옳다면 왜 그들로 하여금 내가
짜놓은 질서에 복종하도록 하면 안된다는 말인가. 하늘은 나에게만 유토피아를
계획할 수 있는 상상력을 주지 않았단 말인가. 그같은 망상들 중의 하나를 골라서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법의 역할이라는 말인가.
  법이란 정의이다.
  그렇게 되면 법이 무신론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무자비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법은 인간 자체도 그렇게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인간이 법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어리석은 발상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다.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진다고 해서, 우리의 움직임이 멈추어지는가. 법이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동기가 없어지는가. 법이 우리의 재능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해서 우리의 재능이 마비되는가. 법이
우리에게 종교와, 집회의 방법과, 교육의 방법과, 노동의 규칙과 무역의 규제와,
자선방법 같은 것들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무신론과 고립과 빈곤과
이기적인 행동으로 빠져들게 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더 이상 신의 능력과
선함을 잊게 되고, 우리 서로간의 사귐을 중지하고, 서로 돕지 않고 불행에 빠진
동포를 돕지 않고, 자연의 신비를 탐구하지 않으며, 우리자신을 완성하기를 멈추게
될까?
  법이란 정의이다.
  그같은 정의로운 법 아래에서만, 그리하여 권리와 자유와 안정과 책임의 원칙이
지켜질 때에만,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의 존엄과 존재가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또
그럴 때에만 인류는 질서정연한 가운데에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
  이성은 나의 편에 서 있는 것 같다. 어떤 문제이든(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철학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간에, 그리고 그것이 도덕,
평등, 기본권, 정의, 진보, 책임, 연대, 재산, 노동, 무역, 자본, 임금, 조세, 인구,
신용,
정부, 그 어떤 것과 관련된 것이든) 과학적으로 그 문제를 탐구하다 보면 항상 같은
결론에 이른다. 사회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자유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들도 내 편임이 분명하다. 오늘날의 세계를 생각해보라. 어느 나라가
가장 행복하고 가장 도덕적이며, 가장 평화로운가. 법이 민간인의 활동에 가장 작게
개입하는 나라, 정부의 힘이 작게 느껴지고 개인의 활동영역이 넓은 나라, 자유로운
여론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 조세부담이 가장 작고, 또 모든 사람이 거의 같은
액수를 내는 나라, 집단적인 불만이 최소화되어 있고, 또 정당화되지도 않은 나라,
개인이든 집단이든 간에 책임의식이 철저한 나라, 현재의 도덕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향상되어 가는 나라, 상거래와 계약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제약이
최소화된 나라, 노동과 자본과 인구의 이동에 대한 인위적 간섭이 최소화된 나라,
인간 고유의 성향이 가장 잘 표출되는 나라, 인간의 발명품들이 하나님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는 나라, 그런 나라들 아닌가. 다시 말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잘 따를
수 있는 사람일수록 더 큰 행복과 도덕적 올바름과 더 큰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비록 인간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유일한 희망은 일정한 한도내에서 그
인간들에게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행동을 허용하는 것뿐이다. 법, 또는 강제력은
보편적 정의를 실현시키는 것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이 말만은 반드시 해두고 싶다. 이 세상에는 입법자와 계획가와 건국의 아버지와
국가의 영도자 등등 위대한 사람이 너무 많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인류들의
머리 위에 서서 그들을 이끌어 가려고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아닌
다른 인류를 위한 직업을 택하고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너 자신도 그렇지 않느냐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인류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이고 전혀 다른 목표를 위해서이다. 내가 개혁자들 가운데 하나로 낄 수
있다면, 내가 할 일은 다른 개혁가들로 하여금 인류로부터 손을 떼도록 하는 것이
내 임무이다. 내가 인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보칸송(Vaucanson)(주31)씨가 자동인형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생리학자가 인간의 신체를 대하는 것과 같다. 즉 인간을 연구하면서 그것의 능력에
놀라워하는 것이다.
  내가 인류에 대해서 가지는 관심은 여행자의 영혼과 같은 것에서 시작된다.
  그는 어느 야만족의 부락에 도착했다. 점쟁이와 마술사와 무당들이 고리와
꼬챙이와 채찍을 들고 갓태어난 아기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말한다.
  "만약 내가 이 아기의 콧구멍을 벌려놓지 않는다면 이 아이는 결코 파이프 담배의
냄새를 맡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사람이 말한다.
  "만약 내가 이 아이의 귀를 어깨까지 내려오게 하지 않는다면 이 아이는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 사람이 말한다.
  "내가 그의 눈에 경사각을 주지 않는다면 이 아이는 결코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네 번째 사람이 말한다.
  "내가 그의 다리를 굽혀주지 않는다면 이 아이는 결코 바로 설 수 없게 될
것이다."
  다섯 번째 사람이 말한다.
  "내가 그의 머리뼈를 납작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이 아이는 결코 생각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만들 둬!" 하고 그 여행자는 외친다.
  "하나님의 일은 당신 자신이 가장 잘하신다. 하나님보다 더 잘 아는 척하지 마라.
그가 그의 피조물들에게 주신 오장육부이니 그것들 나름대로 크도록 내버려두라.
지금은 비록 약하지만 스스로 자유롭게 운동하고 시행착오를 거치고, 많은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 성장하게 자유를 주어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들의 운명을 완수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주셨다. 인간
각자에게 신이 내린 개별적인 생리작용이 있듯이 사회에 대해서도 그 같은
생리작용을 주셨다. 사회의 오장육부들도 자유속에서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사이비 무당들과 계획자들은 물러갈지어다. 고리와 쇠사슬과
꼬챙이들은 물러갈지어다. 그들의 억지도 물러가라. 공동작업장과 공동거주지,
국가주의, 중앙집권, 관세, 대학, 국가종교, 저리자금, 은행독점, 규제, 설교, 조세를
통한 평등도 모두 사라져라. 헛되이 수많은 제도들을 시험해보았으니 이제 이쯤에서
그만두고 새로 시작하자. 이제 억지춘향식의 제도는 벗어던지고 자유에게 기회를
주자. 자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ff
  주

  1. 1850년 6월 저자가 무그론에서 가족들과 같이 지내는 며칠 동안 쓴 팸플릿.
영역자 주.
  2. 'Plunder and Law'의 마지막 두 페이지를 보라. 편집자 주.
  3. 1850년 5월 6일 개최된 상공농업위원회의 회의자료. 편집자 주.
  4. Pierre Auguste Remi Mimerel de Roubaix(1786__1872). 직물제조업자이자
정치가. 보호주의적 주장을 해서 'Bastiat'의 분노를 사다가, 나폴레옹 III에 의해서
왕실 자문위원과 제조업위원회의 일원으로 위촉되었음. 그후 1849년 하원으로
선출되었고, 1852년 나폴레옹에 의해 상원의원으로 임명됨. 영역자 주.
  5. Charles, Count de Montalembert(1810__1870). 가톨릭 자유주의의 옹호자이자
정치평론가. 영역자 주.
  6. Pierre Carlier(1799__1858).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경찰공무원. 1830년, 1848년

양차 혁명기간 중 파리 경찰청장을 역임했으며 1849년 완전한 경찰인의 칭호를
받음. 영역자 주.
  7. 당시 'Bastiat'는 생명에 치명적인 허파질환을 가지고 있었다. 영역자 주.
  8. 이것의 프랑스어는 'la spoliation'이지만 영어의 'spoliation'보다는 'plunder'
가 더
적합한 단어로 보인다. 영역자 주.
  9. 만약 보호조치가 특정한 하나의 산업에만 주어진다면 그것의 약탈적 성격이
너무 분명히 드러나버린다. 그래서 보호를 받는 산업들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마치
모든 사람들이 보호의 대상인 것처럼 만들려고 하는 본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10. Francois de Salignac de La Mothe-Fenelon(1651__1715). 'Cambrai'의
대주교이자. 루이 14세 손자의 목사. "우화모음집" "사자와의 대화" "텔레마키" 등을
저술했다. 영역자 주.
  11. 프랑스어로는 'Salente'. "텔레마키"에 나오는 전설적인 도시. 'Fenelon'이
거기에다가 가상의 유토피아 정부를 세움. 영역자 주.
  12. "텔레마키"에서는 젊은 왕자를 가르치는 선생을 가리켜서 사부라고 부르고
있다. 영역자 주.
  13. Olivier de Serres(1539__1619). 프랑스 농업의 아버지 가운데 한 명이며, 헨리
4세의 자문관이기도 했음. 영역자 주.
  14. 형편없는 소네트를 놓고 훌륭하다고 칭송해 마지않는 그의 친구인 'Philinte'의
위선을 보면서 'Alceste'가 한 말(Moliere, Le Misanthrope, 제1막 제2장). 영역자
주.
  15. Abbe Guillaume Raynal(1713__1786). 역사학자이며 철학자. 프랑스 중세사에
대한 연구로 유명함. 영역자 주.
  16. Gabriel Bonnot de Mably(1709__1785).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자. 유명한
'Condillac'과 형제임. 영역자 주.
  17. Etienne Bonnot de Condillac(1715__1780).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중요 인물.
모든 지식과 경험을 감각으로부터 도출한 'Rocke'의 이론을 발전시켜서
"감성론(Treatise on Sensation)"을 저술하였음. 그의 정치경제학 관련 이론은 'Le
Commerce et le gouvernement'에 담겨져 있음. 영역자 주.
  18. 'Bastiat'는 'Academic Degree and Socialism'에서 이같은 오류들이 이떻게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19. 한 민족이 행복해지려면, 그것을 구성하는 각 개인들이 예지와 신중함과
타인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이같은 것들은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예지를 가지지 못해서 고통을 당한 후에야 신중함을 터득하게
된다. 자유라는 것도 예상치 못했던 사악한 결과와 더불어 시작된다. 이런 현상들을
보고는 어떤 사람이 일어나 자유를 박탈하자고 외친다.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국가로 하여금 예측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하라."
  나는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1.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경험이 없는 민족으로부터 경험 있는 국가, 또는
정부가 나올 수 있는가?
  2. 설령 그럴지라도 그로 인해 경험의 축적이 방해를 받지는 않겠는가. 만약
인간에게 특정한 행동이 강요된다면 어떻게 인간이 자기행동의 결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겠는가. 영원히 국가가 그 사람을 보호해줄 수 있는가.
  그리고 모든 것을 지시하는 국가는 결국 모든 것에 책임져야만 할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기에 끊임없는 혁명이 생겨난다. 정부로 인해 학습이 방해를 받을
뿐만 아니라 진보 자체가 방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Bastiat'의 미발간 원고
중에서).
  20. Louis Antoine Leon de Saint-Just(1767__1794). 프랑스혁명 당시의 중요한
인물. 공포정치의 주역이었던 공안위원회의 일원이자 'Robespierre'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가 참여했던 정권이 번복되자 'Robespierre'와 같이 길로틴에서
처형되었다. 영역자 주.
  21. Jean Nicolas Billaud-Varenne(1756__1819). 프랑스 혁명의회의 일원으로
처음에는 'Robespierre'를 지지했으나 나중에는 적이 되었음. 정권이 붕괴된 후
공포정치에 가담한 죄로 추방당했음. 영역자 주.
  22. Louis Michel Lepeletire de Saint-Fargeau(1760__1793). 프랑스 혁명의회의
일원,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하는 투표를 한 후 암살되었음. 영역자 주.
  23. 신상이 분명치 않은 18세기의 철학자. 저작물로만 알려져 있다. 열정적으로
사회개혁을 주창했다(Essai sur humain, Essai sur le coeur humain, 1745; Physique
de la beaute, 1748; Le Prince ...... systeme d`un sage gouvernement, 1751). 그의
저작 중 유토피아적 서사시인 'Naufrage des ils flottantes ou Basiliades', 1753과
'Code de la nature', 1755는 순수한 공산주의의 개념을 담고 있다. 'Babeuf'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영역자 주.
  24. Noel Babeuf(1764__1797). 완전한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La
Republique des egaux'를 설립. 1796년 그의 추종자와 함께 'Directory'의 전복을
꾀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Babeuf'는 죽고 나머지는 체포됨. 영역자 주.
  25. Robert Owen(1771__1858). 영국의 개혁가이자 사회주의자. 공장노동자들의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힘씀. 영역자 주.
  26. Louis Blanc(1811__1882).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의 특성을 결합한 국영작업장을 창설했음. 그는 모든 사회악들이
경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경쟁의 원칙 대신 능력에 따른 노동, 필요에
따른 분배의 원칙을 제안했음. 영역자 주.
  27. 사회주의 이론가이며 실험주의자였던 'Etienne Cabet(1786__1856)'를 추종하는
무리. 프랑스뿐 아니라 텍사스의 'Red River', 일리노이의 'Nauvoo' 등에서도
공동체를 만들어 그의 저작 "이카리아로의 항해"에 나오는 이론들을 실천했다.
영역자 주.
  28. 경제학은 정치학에 우선한다. 인간의 이해관계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아니면 적대적인지는 경제학으로서만 알 수 있다. 정치학자들은 정부에게 특권을
부여하기 전에 먼저 경제학의 연구결과를 알아야 한다.
  29. Armund de Melun(1807__1877). 저명한 박애주의자. 'Saint Vincent de Paul'
협회의 지도자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온건보수주의자. 영역자 주.
  30. Louis Adophe Thiers(1797__1877).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역사학자. 자유무역에
반대했으며, 'Bastiat' 당시에 강력한 반영국정책을 옹호했음. 영역자 주.
  31. Jacques de Vaucanson(1709__1782). 그는 플루트를 부는 사람과 오리의
관계에서처럼 자동인형 이론으로 유명하다. 영역자 주.
@ff
    제3장 재산권과 법
    Property and Law
@ff
    3. 재산권과 법(주1)

  나를 신임하는 내 주변의 동료시민들이 나에게 입법자라는 명칭을 주었다.
  그러나 만약 그 입법자라는 호칭이 루소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을 뜻한다면
나는 그 입법자라는 명칭을 사양했어야 했다.
  루소는 말한다.

  누구든지 감히 나라를 세우려는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홀로 있으면 완벽하고 완전한 전체이지만,
그들을 더 위대한 전체의 일부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변화시켜야 한다. 인간은
그 위대한 전체로부터 자기 삶의 일부분, 또는 전부를 부여받는다. 또 그것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신체적 구조까지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중략)
위대한 왕이 진귀한 존재일진대, 법을 만드는 사람이야 오죽하랴. 위대한 왕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모형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법제정자를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왕은 그것을 켜고 작동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사회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루소로서는 법과 입법자들을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올려놓아야만 했다. 마치 기계를 발명한 사람과 기계를 만드는 재료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놓여 있듯이 법을 만드는 사람과 그 나머지의 인류 사이에도
극복하기 어려운 간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법은 인간을 개조시켜야 하고, 또 재산을 만들 수도 안 만들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사회, 인격, 재산은 법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재산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법이 있기 때문에 재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산이 있기 때문에 법이 있는 것이다."
  이 두 체제 사이의 대립적 관계는 근원적인 문제에서 출발한다. 거기에서
비롯되는 결과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먼저 문제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첫째, 내가 재산이라고 말할 때의 재산이라는 개념은 부동산이 아니라
일반적인 개념이다. 유감스럽게도 재산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토지의
소유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내가 말하는 재산이란 노동자가 그의 노동을
이용해서 창조한 가치에 대한 권리를 뜻한다.
  이같은 전제하에서 내가 질문하고자 하는 것은 재산권이 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가, 아니면 그와는 정반대로 법보다 우선하고 우월한가의 문제이다. 만약 앞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입법자는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재산권을
조직하고 수정하고 없앨 수도 있다. 반면 후자의 견해가 옳다면 입법자들이 할 일은
재산권을 보장하고 지키는 일뿐이다.
  오늘날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라메네이씨(주2)가 쓴
헌법 초안의 서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프랑스 인민들은 모든 실정법보다 먼저 있어왔고 그것보다 우월하며, 그것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권리와 의무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선언한다.
  신으로부터 직접 비롯된 이같은 권리와 의무는 평등, 자유, 박애, 이 세 가지의
신성한 교의로 표현된다.

  내가 묻고자 하는 질문은 재산에 대한 권리도 실정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법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것 때문에 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내가 제기하는 이 질문이 지나치게 이론적이거나 불필요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매우 실질적이고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사회의 모습이 엄청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두
체제의 기원과 그 결과를 비교해본다면 독자들도 그 중요성을 납득하게 될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재산권을 인격과 마찬가지로 신이 내린 축복으로 생각한다. 법
때문에 인격이 생겨난 것이 아니듯이 재산도 법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재산권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 결과이다.
  글자 그대로 인간은 소유하는 존재proprietor이다. 인간은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충족되어야 하는 욕구와 그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오장육부
및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재능은 인격의 연장일 뿐이다. 그리고 재산은 재능의
연장에 없다. 인간에게서 그의 재능을 분리한다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서 그의 재능으로 만든 생산물을 분리한다는 것도 죽음을 뜻한다.
  정치학자들 중에는 신이 어떻게 인간을 창조했어야 했는가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 창조한 그대로의 인간을 연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인간은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 노동의 결과를 스스로의 욕구충족에
사용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을 경우, 인간은 노동을 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재산권이라는 것이 신이 만들어놓은 제도이며, 인간의 법은
재산권의 보호를 그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믿는다.
  재산권이 법보다 앞선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어서 심지어는 법이
없는(최소한 명문화된 법이 없는) 야만인들조차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누가
자기의 노동력을 투입해서 오두막을 하나 지으면 야만인들도 그것이 그 사람의
소유라는 사실을 가지고 다투지 않는다. 물론 더 힘이 센 자가 강제로 그것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부족 전체의 분노와 경악에 맞닥뜨려야만 할 것이다.
연합이나 협약, 그리고 법이 생겨나는 것은, 그리하여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강제력을 사용하게 되는 것은 이같은 강제력의 남용을 막기 위함이다. 따라서
재산으로부터 법이 태어난 것이지 법으로부터 재산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재산권의 원칙은 동물들 사이에서조차도 지켜진다. 제비들이 자신의 새끼를
돌보는 둥지는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심지어는 식물들조차도 그같은 과정을 통해서 생존하고 성장해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닿는 범위내의 물질들, 기체들, 소금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생존한다.
이 과정을 방해하면 그들은 시들어 죽어버리고 만다.
  인간도 외부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취함을 통해서만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그것은 신의 은총이 깃든, 그리고 생명의 유지에 없어서는 안될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재산이란 그같은 과정의 결과이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자연상태로 있던
무엇인가를 유용한 형태로 바꿀 때, 그같은 행위가 왜 자기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여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법의 필요성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인간은 생명의
유지와 자기발전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리고 강자는 약자가 노력한 결과물을
약탈해서 그같은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어한다. 따라서 사회는 구성원 전체의 집약된
폭력을 이용하여 그같이 부당한 폭력을 예방하고 억압하는 데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법의 역할은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법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내가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제도가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의 과거 헌법들은 재산권이 신성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마치 사회적 조직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한 자유로운 사적 결사와 개인들의 발전을
보장하는 것인 듯 씌어 있다. 재산권이 법에 우선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법의
유일한 목적은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같은 구절들이 그저 본능적으로, 다시 말해서 진정
그것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목적으로 넣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피할 수가 없다. 글은 그것이 씌어진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말로는 그처럼 재산권의 원칙을 인정하고서도, 실제로는 재산과 신용과 노동의
자연적 질서에 인위적 수정을 가하고 손상시키고, 변형시키고, 균형을 맞추고
균등하게 하고 조직하는 등의 일이 밥먹듯이 벌어져 왔다. 그들이 선언한 대로
재산권의 신성성을 진정으로 믿었다면 어떻게 그같은 일이 가능했겠는가.
  이는 인격과 재산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이 법에게, 따라서 입법자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이같은 아이디어들은 로마법과 로마의 문헌으로부터 비롯된다.
  나는 법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부터 하려는 말을 하기 위하여 굳이
법학을 전공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로마인들은 재산권이라는 것을 (성문법으로 규정되어야 할) 순수한 의미에서의
협약 같은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경제학자들처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욕구와 재능과 노동과 재산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런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어리석은 짓이었을 뿐 아니라 자살행위 같은
것이기도 했다. 약탈을 주업으로 해서 살아가는 터에, 그리고 생활 자체가 노예들의
노동에 의존하고 있는 터에 어떻게 진정한 의미의 재산권 개념을 택할 수 있겠는가.
사회의 기반을 근본부터 부수어버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진정한 재산권이 그것을
생산해낸 자에게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같은 재산권 개념을 가질
수도 없었고, 또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jus utendi et abutendi'(이용과 남용

모두 할 수 있는 권리)라는 순수하게 경험적인 재산권의 개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원인이나 근원이 아니라 결과만을 염두에 둔 개념이다. 후자는 전자를
감추어버리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조차도 법학은 노예제를 정당화시켰던 고대의 원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같은 현상은 그리 어렵지 않게 설명될 수 있다.
  프랑스의 법학교육은 독점의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독점은 발전을 방해한다.
물론 법조인들에 의해 모든 여론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일반
대학교육과 신학교육은 프랑스의 젊은이들에게 이 문제에 관한 기존 법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고 있다. 프랑스의 교육제도는 젊은 시절의
중요한 10년 동안을 로마사회를 풍미했던 전쟁과 노예제의 분위기 속에 가두어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산권이라는 것은 인간, 즉 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로마식의
사상이 18세기에 다시 등장했다고 해서 그리 놀랄 것은 없다. 그렇게 해서 법이
있어야만 재산이 존재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루소는 한술 더 뜬다. 그에게는 재산뿐만 아니라 사회 그 자체도 사회적 계약의
산물일 뿐이다. 그에게 있어 재산은 발명되는 것이고, 입법자의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사회적 질서는 다른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성스러운
권리이다. 그러나 이 권리가 하늘로부터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 권리는 인간들간의
계약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하거니와 루소에게 있어 다른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권리는 사회적인 계약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재산권이라는 것도 종속적인
권리에 불과하다. 즉 재산도 사회적 계약의 산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로베스피에르(Robespiere)도 루소의 사상에 흠뻑 빠져 있었다. 루소의 사도인 그가
재산에 관해서 한 말들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루소의 이론에 심취해 있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이여, 나는 당신들에게 기존의 재산권 이론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를 제시하노라. 이 말에 놀라지 말지어다. 금은보화만을 탐하는 이 탐욕스런
영혼들아, 놀라지 말지어다. 나는 너희들의 더러운 보화에 손도 대지 않으리라...
나는 내가 루쿨루스(Lucullus)의 궁전보다는 파브리쿠스(Fabricius)의 오두막에서
태어났기를 바라노라...

  여러분도 이 점만은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사람들은 재산이라는 것을 부, 그것도
부당하게 얻어진 부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한다. 불합리하고 위험한 발상이다.
루쿨루스(주3)의 궁전이 재산인 것처럼 파브리쿠스(주4)의 오두막도 엄연한
재산이다. 다시 로베스피에르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인간의 모든 권리 중 가장 으뜸이며, 자연권 중에서 가장 성스러운 권리인
자유를 논할 때,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자유가 인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회적 제도의 산물인 재산권에 대해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간의 계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영원한
자연의 법칙보다 더 신성불가침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렇게 서문을 시작한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제1조, 재산권이란 각각의 시민들이 법에 의해서 보장된 범위 안에서만 누리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이다.
  제2조,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재산권도 다른 사람들의 재산권을 존중하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된다.

  이렇게 해서 로베스피에르는 자유와 재산을 대립적인 관계로 만들어버렸다.
그에게 있어 이 두 개념은 서로 다른 뿌리를 갖는 것이었다. 자유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재산은 인간들간의 약속에 의한 사회적 제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자유는 자연권이지만 재산은 인간들간의 약속의 산물이었다.
  만약 로베스피에르가 올바른 사고를 가졌더라면 자유와 재산권이 동일한 제약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으로부터 그 두 가지의 권리가 같은 뿌리로부터 태어났다는
추론을 했을 법하다. 재산권이든, 자유권이든 간에 타인들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그 권리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 권리를 제대로 인식하고
확인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 두 가지의 권리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범위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의 권리가 법이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해왔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권리간의 경계가 지켜지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법의 역할이다.
  어쨌든 간에 루소의 가르침을 받은 로베스피에르는 재산을 사회제도의 산물, 즉
인간들간의 약속의 결과로 간주했음이 분명하다. 재산권이 인정되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 즉 노동과의 관계는 완전히 무시해버린 것이다. 그에게 재산권이란 법이
보장하는 범위 안에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에 불과한 것이다.
  루소와 로베스피에르를 매개로 해서 로마식의 재산권 개념이 이 시대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전수되었음을 굳이 상기할 필요는 없겠다. 혁명에 관한 루이
블랑(Louis Blanc)의 첫 번째 저작이 제네바의 철학자들과 컨벤션(주5)의 리더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은 여러분들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재산권이란 사회적 제도의 산물이며, 입법자들의 발명품이며, 법의
창조물이라는 사상, 다시 말해서 자연의 상태에서는 재산권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상은 법학교육과 고전학 연구와 18세기의 정치학자들과 오늘날 사회계획
옹호론자들에 의해서 로마인들로부터 우리에게까지 전수되어 왔다.

  이제 지금까지 내가 대비시켜 온 두 체제를 택할 경우 그 결과가 어떻게 다를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법이 재산권의 내용을 좌지우지하는 체제로부터 시작해보자.
  첫 번째의 결과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들에게 무한정의 활동무대를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재산권이 법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몽상가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법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노동을
조직화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인간과 재산을 배열하고 합치고
형성하는 것이 입법자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고 나면,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상상의 범위가 무한한 만큼이나 많아진다.
  노동을 조직화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이미 파리에서 나돌고 있는 제안서의 숫자는
최소한 5백 개는 족히 된다. 대출방식에 관한 제안서의 숫자도 그에 못지 않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이들 각 제안들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재산권이 법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사고방식이다. 노동과 노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은 스스로를 절대자로 여기는
입법자들의 손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어야 하는 대상일 뿐인 것이다.
  이같은 무수한 제안서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끌어온 것은 푸리에(Fourier)와
생시몽(Saint Simon), 오웬(Owen), 카베(Cabet), 루이 블랑(Louis Blanc)의 것이다.
  하지만 이들 몇 사람의 제안만이 실현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임이 분명하다. 그같은 제안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매일 아침마다 그전의
것보다 더 매력적인 제안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하나의 계획안이 실천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계획으로 대체되어야 할 경우, 인간의 생활이 도대체 어떤
지경이 될지에 대해서는 독자들 스스로 상상해보시기 바란다. 인간은 매일 아침
생활방식을 바꾸어나가든지 아니면 (끊임없이 옛날 것보다 좋다고 주장하는
제안들이 쏟아져나오기 때문에)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 생활방식을 영원히 끌고
나가든지 두 가지 중의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째의 결과는 이들 몽상가들로 하여금 권력을 갈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노동을 조직화하기 위한 체제를 계획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다른 사람들이
내 계획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주도권은 내게서
떠나버리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이 체제에서는 주도권이
입법자들에게 있다. 루소가 말했듯이 "입법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입법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내가 계획한 사회적 질서를 다른 인간들에게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산권이라는 것이 인간이 만든 제도의 산물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사회는 일부에게만 특권이 집중된 사회이거나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 둘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다. 만약에 집권자의 의도가 불순하다면 앞의 것이 될 것이고 좋은
의도를 가졌다면 뒤의 것이 될 것이다. 그가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다수의 이익을 희생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인도주의 정신에
충만하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생활수준이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생산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차지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다. 다만 그런 체제가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을 생산할 수 있을까의 의문은
여전히 남지만 말이다.
  최근에 룩셈부르크(Luzembourg)에서 열렸던 국민의회는 이와 관련된 흔치 않은
예를 보여준다. 19세기 중반, 자유를 명분으로 해서 일어난 2월 혁명 직후,
임시정부의 각료 이상의 영향력을 가졌던 한 사람이 어떤 식으로 임금을 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노동자의 능력과
재능, 근면함, 즉 그 노동자가 생산해낸 부의 크기에 따라 임금을 결정해야 할지,
아니면 개인적인 능력과 생산실적과는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급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는 마치 게으름뱅이가 생산한 한 필의 천이
부지런한 자가 생산해낸 두 필의 천과 같은 값에 팔려야 하지 않느냐고 고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얼마나 좋은 상품을 얼마나
많이 시장에 내다 팔았는지와는 무관하게 모든 투자자들에게 동일한 이윤이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하게 된 것이다. 자연상태하에서야 2는 어디까지나 2이지만,
이들의 알량한 지혜로 짜낸 법에 의하면 2는 1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법이
자연보다도 강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아주 당연하게 도출되는 결론이다.
  그가 보살피고자 했던 노동자들은 그같은 임금체계가 인간의 본성과 조화될 수
없음을, 즉 한 필의 천을 생산해낸 자와 두 필의 천을 생산해낸 자가 같은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더 좋은 질의 더 많은 천을
만들기 위한 (정상적인) 경쟁이 사라지는 대신 그보다 수천 배나 해악이 큰 다른
형태의 경쟁이 자리를 잡게 된다. 모든 노동자들은 자기가 가장 일을 적게 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일의 양이야 어떻든 간에 언제나 같은 임금이
법으로 보장되기 때문이다.
  시민(주6) 블랑(Blanc)도 이같은 부작용을 내다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나태함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모든 공동체마다
게시판을 세워, 게으름을 부리는 자들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누가 게으른 자를 찾아내야 하는지, 벌은 누가 결정할지, 그리고 벌칙을 누가
집행할지에 대해서는 어떤 고려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말은 꼭 해두고 싶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법을 집행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정부조직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룩셈부르크 국민의회 의원들이 신뢰성을 잃어갈 즈음, 루이 블랑의 비서였던 시민
비달(Vidal)(주7)이 루이 블랑의 주장을 용감하게 마무리하고 나선다. 루소의
가르침에 따라 그는 인간의 본성을 신의 섭리(주8)로 대체하자는 투의 과감한
제안을 한다.
  신은 인간에게 특정한 재능뿐 아니라 욕구, 다시 말해서 이기심을 내리고서
기뻐하셨다. 이기심은 다르게 표현한다면 자기보존의 본능이자 자기발전에 대한
욕구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위대한 힘이다.
  비달씨는 이 모든 것을 바꾸고 싶어한다. 그는 신이 창조해놓은 세계를 보고
만족할 수 없었던 나머지, 법과 입법자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법으로 인간의 이기심까지도 억누르려고 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을
명예법전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인간의 노동이 더 이상 자신의 가족을 부양할
목적에 봉사해서는 안되었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목적은 명예를 지키고, 게시판에
이름이 나붙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어야만 했다. 그런 행위조차도 결국은 이기심의
발로일 뿐인데도 말이다.
  비달씨는 계속해서 군대가 어떻게 명예의 법전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들먹인다. 오,
세상에 맙소사, 그에게 진실을 말하게 하소서. 만약 그가 노동자들을 군대처럼
조직할 참이라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 서른 개나 되는 계엄령을 노동법으로
삼으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털어놓게 하소서.
  더 큰 문제는 그들의 원칙이 다모클레스(Damocles)의 칼처럼 노동, 자본, 상업,
제조업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불확실성을 높여 놓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감히 독자들에게 특별히 주목해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미국처럼 재산권이 법보다 중요시되고 있고 경찰력의 유일한 임무가 이같은
천부적인 권리를 보호하는 것인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있게 자신이 가진
자본과 노동력을 생산활동에 투입하게 된다. 사람들은 잦은 법개정으로 인해 자신의
계획이나 계산을 바꾸어야만 하는 사태를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노동이 아니라 법이 재산의 근원이 되는 나라, 그리고
유토피아주의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틀을 법을 통해서 강요하도록
허용하는 우리나라와 같은 체제하에서는 자연이 인간에게 선사한 예지와 분별력이
경제발전을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지
않은가.
  어느 투자자가 감히 공장을 세우려 하고, 누가 기업을 시작하려 하겠는가. 어제는
하루에 몇 시간 이상을 일해서는 안된다는 법을 만들고, 오늘은 또다시 어떤 직종에
대해서는 얼마 이상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 것이다. 내일, 모레,
그리고 계속해서 어떤 법들이 만들어질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일단 입법자들이
다른 시민들과 극복할 수 없는 거리를 두게 되고, 또 그들이 그들 자신의 재산처럼
되어버린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노동력과 거래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한, 법이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바꾸어갈지에 대해서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상황하에서 과연 누가 새로운 사업을
벌일 수 있겠는가.
  물론 이같은 원칙하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제도들의 상당수가(또는 대다수가)
선의의 의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원칙 그 자체가
사악하다는 것이다. 각각의 계획들이 내세우고 있는 의도는 모든 사람에게 번영의
결과를 고루 나누어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야 어찌됐든 그 결과는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가난을 나누어주는 것일 뿐이다. 좀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부자는 가난하게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심각한 상태에 와 있는 우리나라의 재정위기가 이같은 원칙 때문에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 같아 심히 걱정이다.
  지난 2월 24일 제안된 지출예산 규모는 징수 가능한 조세수입의 규모를 이미
넘어섰다. 한술 더 떠서 현재의 재무장관은 거의 10억 프랑에 달하는 국채를
발행하겠다고 나섰다.
  더욱 큰 문제는 정부의 지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해온 반면 조세수입은
감소해왔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사람들은 방탕을 조장하는 두 가지 종류의 약속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그 약속 중 하나에 따르면 엄청난 비용을 수반하는 수많은
자선기관들이 공공의 비용으로 설립될 것이라 한다. 또다른 약속에 따르자면 모든
세금을 낮추어 조세부담을 줄이겠다고 한다. 유아원과, 보호시설과, 무료
초중등학교와, 국영작업장과, 퇴직연금들이 생겨날 것이다. 노예소유자들에게는
노예해방의 대가로 배상이 주어질 것이고, 해방된 노예들에게는 과거의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이 이루어질 국가가 직접 금융기관을 설립해서 노동자들에게 생산수단을
마련할 자금을 저리로 빌려주게 될 것이다. 육군은 두 배로 늘리고 해군은 전면
개편될 것이다. 이처럼 정부의 예산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업들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도 또 한편으로는 소금세, 통행료 등 국민의 원성을 사고 있는 물품세들은
모두 없애버리겠다고 한다.
  현재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재원이 얼마든 간에 이 두 가지의 명백하게 서로
상반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 늘어나야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같이 괴상한 움직임의 중심에는 '재산권은 법이 만들어놓은 산물이다'라는
부르짖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입법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론에 따라
언제든지 경제계의 예측을 뒤엎는 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 노동자가 자기노동의
산물을 일부라도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그것을 만들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현행 법이 그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 그 법이 다시 바뀔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현재는 합법적으로 간주되는 재산권도 불법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무엇일까? 자본과 노동은 경악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미래를 믿을 수 없게 된다. 이같은 원칙이 통용되는 한 자본은 숨어버리거나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도 동정하고 애틋하게 여기는 노동자들은
어떻게 될까? 농업생산이 멈추는데도 노동자들을 더 잘 먹일 수 있을까? 아무도
공장을 지으려 하지 않는데도 그들을 더 잘 입힐 수 있을까? 자본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데도 그들에게 더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세금은 어디서 거두려고 하는가. 국고는 무슨 방법으로 채우려고 하는가.
군대의 급료는 누가 줄 것이며, 국채는 어떻게 갚을 수 있단 말인가. 무슨 돈이
있어서 노동자들에게 생산수단을 제공해준다는 말인가. 설립하는 것이야 법으로
선포하면 그만이겠지만, 무슨 돈이 있어 그 많은 자선단체들을 꾸려나가려 하는가.

  이런 우울한 생각들은 이제 그만하기로 하자. 이제부터는 오늘날의 프랑스를
풍미하는 사조와는 반대되는 원칙, 즉 경제학자들의 원칙이 실현된다면 어떤 결과가
올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 원칙에 의하면 재산권은 법보다 우선한다. 한 사람의 재산권이 다른 사람의
재산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그 재산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든 간에, 그리고
혼자서 만들었든 여럿이 모여서 만들었든 간에, 그것을 지켜주는 것이 법이 맡아야
할 유일한 임무이다.
  첫 번째의 결과는 법만능주의 원칙이 실질적으로 노예제를 가져다주는 반면,
경제학자들의 원칙은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재산권, 자기노동의 산물을 누릴
권리, 국가의 개입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일하고, 발전하고 자기의
재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 그것이 바로 자유가 뜻하는 바이다.
  나는 자유의 원리에 어긋나는 체제를 강요하려는 도당들이 어떻게 감히 공화국
국기에다 자유의 상징을 여전히 새겨 가지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그들
중에는 자유라는 말을 없애고 그 대신에 결속(또는 연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소한 정직함, 또는 논리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그들이
다른 사회주의자들보다는 낫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결속이라는 말보다는
공산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편이 더 정직하고 논리적이다. 재산권과 마찬가지로
인간 이해관계의 결속이라는 현상은 법이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경제학자들의 원칙이 통일성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만약 재산권의 성격을 입법자들 마음대로 결정한다면, 세상에는
그들 두뇌 속의 망상이 빚어낼 수 있는 오류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재산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재산권은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어서 법보다도
우선해야 하며, 법이 할 일은 그 재산권의 보호로만 국한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러한 체제는 그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체제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또 경제학자들의 원칙은 안전을 가져다준다. 모든 증거들을 살펴보건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각자의 노동의 결과는 그
자신에게 속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며, 그리고 인간이 만든 법은 그 같은 재산권을
보장하는 정도로만 그 역할이 제한된다면, 인간의 노력은 가장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이런저런 법들이 차례로 나와서 이미 세워 두었던
계획을 망치고 예측을 좌절시킬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안정이
보장된다면 자본은 급속하게 불어날 것이다. 자본축적량이 늘어남에 따라 노동의
가치도 올라갈 것이다. 그 결과 노동자 계급의 삶도 윤택해질 것이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여 새로운 자본을 형성해갈 것이다. 그들이 임금노동자의 신분에서 투자자로
변신하고, 또 스스로 기업을 만들어 존엄을 회복하는 일도 더욱 쉬워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가는 직접 무엇을 생산하는 자가 아니라 안전을 제공하는 역할에만
그쳐야 한다는 영원한 원칙이 지켜질 경우, 국가 재정을 운영함에 있어서도 절약과
질서가 찾아온다. 이 원칙만 가지고도 번영은 찾아오겠지만, 그 밖에도 공평한
조세부담이라는 부가적인 혜택도 주어진다.
  국가는 그 스스로는 어떤 자원도 가지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노동자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뺏어오지 않는 한 국가는 어떤 것도 가질 수가 없다.
그런데 국가가 무엇인가에 끼여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은
국가의 대리인들이 저지르는 한심하고 값비싼 행동들로 대체되어 버린다.
  만약 미국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국가의 기능이 모든 사람에게 안전을 제공하는
역할로만 제한될 수 있다면, 몇억 프랑 정도의 비용만 가지고도 그 기능을 충분히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부의 기능수행 비용이 줄어들고, 산업은 번성할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모든 잡다한 세금들을 폐지하는 대신, 모든 재산소유자들에게
동일한 세율을 부과하는 단일세의 도입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런 일이 가능해지려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아마도 매우 잔인한
경험이 되겠지만) 국가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대신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신뢰를 더
쌓아야만 할 것이다.
  이제 내가 관여하고 있는 자유무역협회(주9)에 대해서 몇 가지 언급하면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같은 이름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 비판을
가해왔다. 협회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기뻐했고, 동조자들은 괴로워했다. 양측이 모두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동조자들조차 이런 식으로 말했다.
  "왜 이런 식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그리도 원칙에 집착하는
겁니까? 그저 조심스럽게 관세율을 낮추자고 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습니다.
그쪽이 보다 더 현실적으로 쉬울 것 같습니다."
  왜냐고? 내 눈에는 자유무역이라는 것이 단순히 관세율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권, 정의, 공공의 질서, 그리고 재산권의 문제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색깔의 옷을 입고 나타나든지 간에, 특혜라고 하는 것은 재산권을
부정하거나 경멸하는 행위이다. 부의 평등한 분배, 즉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해서 다른 누군가의 몫을 늘리기 위한 국가의 개입은 공산주의이다. 한 방울의
물이든, 대양 속의 물이든 어차피 물은 물인 것과 같다. 내가 그토록 원칙에
집착하는 것은 재산권에 대해서 일단 누가 공격을 개시하게 되면, 곧이어 수많은
다양한 형태의 후속공격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원칙에 집착하는
것은 내가 만약 원칙을 버리고 남들처럼 관세율을 낮추자는 정도의 운동에 참여할
경우 법이 재산권에 우선한다는 잘못된 관념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원칙에 집착하는 것은 지주들과 산업자본가들이 스스로 관세를 높여달라고
정부에 요구함으로써 지금은 그들 자신이 두려워 떨고 있는 공산주의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윤을 더 높이기 위하여 노동자들의 이익을
희생시킨 것이다. 자기들은 그렇게 해놓고 노동계급이라고 해서 법을 이용해서 부의
균등한 분배를 추구하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되면 공산주의만이
있을 뿐이다.
  1846년 5월 10일 협회의 예비모임에서 발표된 강령을 우리의 비판자들이
읽어본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협회의 지배적인 사상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교환의 권리, 그것은 재산권과 마찬가지로 천부적인 권리이다. 모든 시민들은
각자가 생산했거나 취득한 물건을 자기자신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권리와
더불어, 그 상대가 지구상의 누구든지 간에 서로가 동의한다면 각자가 원하는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도 허용되어야 한다. 공공의 질서나 도덕을 해치는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사람으로부터 교환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그것도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교환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약탈을 합법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정의의 법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너무 추상적인 언급이었던 것 같다. 관세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서명자들은 관세가 순수하게 국가의 재정을 충당할 목적으로 부과되는 한
그것에 반대할 의사가 없다.
  하지만 관세가 순수한 재정자금 조달의 목적을 벗어나 외국상품의 유입을
저지함으로써 국내생산자들의 이익을 보호할 목적으로 부과된다면, 그래서 해당
상품의 국내가격을 높이고, 특정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나머지 사람들의 이익을
해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관세는 약탈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우리 협회가
뿌리뽑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식의 관세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고방식들이다.

  만약 우리가 즉각적인 관세의 감축을 위해서 노력했다면, 남들이 비난하듯이
우리가 특정한 이익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면, 우리는 우리 협회의 깃발 속에 우리의
원칙을 의미하는 단어를 넣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정의롭지 못한 것과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우리의 앞에 놓여질 장애물들을 예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애매한 전술로서 우리의 진의를 숨긴다면 부분적이긴 하지만 더 쉽게 이런저런
승리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몰랐겠는가. 하지만 그런 식의 덧없는 승리를
통해서 위대한 재산권의 원칙을 되찾고, 그것을 지키는 일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다시 한 번 반복하거니와, 우리는 보호주의 체제의 완전한 철폐를 요구한다.
정부의 정책을 정상화시킨다는 차원이 아니라 정의로운 행동으로서, 자유를
실천하려는 행동으로서, 그리고 법보다 앞서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보호주의
체제를 전면 폐지하라. 우리는 오도된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숨기고 싶지 않다.(주10)
  우리 협회가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고집해온 것이 잘한 일임이 밝혀질
날이 다가오고 있다. 힘은 원칙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원칙만이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 있으며, 원칙만이 사라져가는 신념을 되살릴 수 있다.
  최근 들어 프랑스 전역이 공포의 전율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놀라는 지경이 되었다. 이상한 제도들과 파괴적인 법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또 언제 다른 더 파괴적인 이상한 법들이 등장할지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도대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우려를 금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고, 예금은 해외로
도피되고 있으며, 노동자들과 톱과 망치들은 일하기를 멈추었다. 마치 전기에
감전되어 몸과 마음이 모두 마비된 듯한 상황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미 보호주의 정책에 의해서 더럽혀진 재산권이 끊임없이
다른 제도들에 의해서 공격받고 있기 때문이다. 보호주의 정책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이 가격을 안정시키고 소득을 평준화시킬 목적으로 법을 통해서 경제문제에
관여해왔으며, 그것이 수천 가지의 다른 형태로 경제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문제는 내놓고 말할 때가 되었다. 재산소유자의 대표격인 지주들이
재산권을 훼손한 장본인들이다. 그들은 토지의 가치와 (토지의 산물인) 농산물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이기 위하여 법의 보호를 요구했다. 법에 의한 부의 균등화를
주장한 자들은 바로 자본가, 그 자신들이다.
  보호주의는 공산주의의 전주곡이 되어왔다. 내가 보기에 보호주의는 공산주의의
초기 형태로 보인다. 오늘날 고통받는 계급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가. 자본가들과 지주들이 법에 대해서 요구했던 것들을 노동자들도 똑같이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가. 평등하고 균형잡힌 부의 재분배를 달성하기
위해서 법이 개입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가들과 지주들이 보호관세를
통해서 얻으려 했던 것을 노동자계급들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수단만 다를
뿐이지 그들의 요구는 같은 원칙으로부터 나온다. 누군가에게 빼앗아 다른
누군가에게 줄 목적으로 법을 이용한다는 원칙이다.
  자본가와 지주들이여, 당신들보다 운이 나빴던 노동자들이 당신들에게 재분배를
요구한다고 해서 불평하지 말지어다. 재앙을 몰고 오는 원칙을 먼저 요구한 것은
바로 당신들 아닌가. 그렇게 만들어진 부에 대해서 노동자들도 분배를 요구할
권한이 있지 않겠는가.(주11)
  다행히도 드디어 사람들의 눈이 열려가고 있다.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을 파괴한 결과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혼란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에게 더 큰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고 집요하게 요구했던 그 타락한
원칙이 이제는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파괴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같은 인과응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정의를 드러내시고 있음이 분명하다.
  보호주의자들이여, 당신들은 공산주의의 후원자일 뿐이다. 재산을 가진 자들이여,
당신들은 우리들의 마음에서 재산의 진정한 의미를 지워버렸다. 정치경제학 덕분에
우리는 재산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신들은 재산권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시키기 위해 당신들이 누려온 부당한 특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제학을 부인해왔다.(주12) 하지만 당신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사회주의적
이념이 세력을 잡았을 때, 그 사람들이 제일 먼저 시도했던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경제학을 억제하는 일이었다. 당신들이 이미 그 덕을 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당신들의 본을 받아 이제사 추구하고 있는 것, 즉 법을 통한 평준화, 경제학이 그
평준화에 대한 영원한 적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법에 대해서 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요구했으며, 법이 줄 수 있는 이상의 것을 달라고 한 것이다. 당신들은 법에게
안전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재산권을 침해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초과이익, 즉 정당하게 당신에게 속한 것 이상을 법에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옛날에는 당신들만이 그랬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요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신들을 위협하고 있는 폭풍을 막고자 한다면 길은 한 가지이다. 그것은
당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누려온 특권을 포기하라. 법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으라. 그리하여 입법자들도 본래의 임무에 복귀하도록 하라. 당신은
우리를 버렸다. 당신은 우리를 공격했다. 우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당신들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절망의 나락이 당신들의 발 앞에 놓여 있음을
보지 못하는가. 이제 우리와 같이 재산권의 진정한 의미를 지키자. 우리 함께 넓은
의미의 재산권을 되찾자. 인간의 모든 재능과 그 재능(노동이든 교환이든 간에)에
의해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재산이라는 사실을 전파하자.
  우리가 수호하려고 하는 이 교리는 너무나 단순하다. 법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은
안전뿐이다. 이 단순함이 사람들의 반발을 사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처럼 단순한
원칙에 의해 정부의 기능이 유지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의
원칙이 요구하는 대로 법이 보편적 정의만을 다룬다면 박애정신은 담을 수가 없다고
비난한다. 경제학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ff
  주

  1. 1848년 5월 15일, 'Journal des  conomistes'에 발표된 내용. 편집자 주.
  2. Felicite de Lamenais(1782__1854).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가톨릭 성직자,
개혁주의자. 노동자계급의 열정적 옹호자였음. 영역자 주.
  3. Lucius Licinius Lucullus(110__56BC). 로마의 장군이자 부호. 호화스럽고
우아한 생활로 유명했음. 특히 그의 미식가적 취향이 유명했음. 영역자 주.
  4. Gaius Lucinus Fabricus. 저명한 로마의 장군이자 집정관. BC 280년 포로송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사로 파견되었다.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포로를 귀환시켜
'Pyrrhus'를 감동시켰다. 너무 가난하게 죽은 나머지 정부가 그의 딸을 돌봐주어야만
했다. 영역자 주.
  5. 1660년과 1688년에 국왕의 요청 없이 열린 영국의 의회. 역자 주.
  6. 프랑스혁명 당시에 주로 사용되었던 '시민'이라는 호칭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사용되고 있는 '동무'라는 호칭과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다. 따라서 시민 블랑은
블랑 동무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영역자 및 역자 주.
  7. Francois Vidal(1814__1872). 저술가이자 정치가. 경제문제에 대해서 글을 씀.
노동과 자본간의 관계에 대해서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음. 'La
Presse'를 비롯해서 여러개의 출판물을 편집했음. 1848년 혁명 직후 'Louis Blanc'은
그를 노동위원회의 사무장으로 임명했음. 나중에 'Louis Napoleon'의 반대진영에
섰음.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것은 'De La repartition de richness ou de la
justice distributive en economie sociale(1846)'임. 당시의 경제학적 교리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내용으로 함.
  8. 프랑스어판 제1권에서 'Bastiat'가 'M. Vidal'의 "부의 분배에 관하여"라는
논문에 가한 논평을 참조하라. 제2권에는 'Vidal'이 일간지 'La presse'에 실었던 다

편의 서간문에 대한 응답이 있음.
  9. 1846년에 'Bastiat'는 보르도에서 자유무역협회가 발족하는 것을 도왔다. 곧이어
파리에서도 이와 거의 유사한 단체가 생기게 되는데 'Bastiat'는 그 단체의
사무총장이 된다. 영역자 주.
  10. 'Bastiat'가 1845년 1월 'Lamartine'에게 보낸 편지를 참조하라. 프랑스어판
제1권. 편집자 주.
  11. 프랑스어판 제2권에 실려 있는 보조금에 대한 논문들을 볼 것. 편집자 주.
  12. 이 책의 영문판에 실려 있는 "Plunder and Law"(제8장)와 "Declaration of
War Against the Professors of Political Economy"(제10장)를 참조할 것.
@ff
    제4장 정의와 박애
    Justice and Fraternity
@ff
    4. 정의와 박애(주1)

  여러 가지 면에서 경제학의 학풍은 (스스로를 보다 진보적이라고 부르며, 또한
보다 활동적이고 대중적인) 사회학의 학풍과 대립해 있다. 공산주의자(주2),
푸리에주의자, 오웬주의자, 카베, 루이 블랑, 부르동, 피에르 루르(주3) 등의 사람들

우리 경제학자들의 적(험담꾼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이다.
  묘한 사실은 그들과 우리가 다른 것만큼이나 자기들끼리도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원칙(경제학자들은 그 원칙에
동의하지 않는다)이 있기는 하지만 그 구체적인 형태는 천차만별이다.
  나는 우리와 그들을 확연하게 구분해주는 것은 법에 대해서 무엇을 요구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치경제학은 법으로 하여금 보편적 정의만을 요구한다. 반면
사회주의는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하지만, 법으로부터 보편적 정의 말고도 박애의
원칙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 루소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들은 법을 모든
사회질서의 근원으로 본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루소는 사회를 계약의 산물로
만들어놓았다. 루이 블랑은 그의 혁명에 관한 저서 첫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애의 원칙이란 인간의 창조물인 사회를, 그리고 거대한 한 가족으로서의 사회를,
신의 창조물인 인체를 모델삼아 다시 조직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를 인간, 또는 법의 창조물로 보기 때문에 사회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입법의 결과물로 비쳐지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는 법에 대해서 정의만을 그것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보편적 정의만을 추구하는 경제학이 박애주의 정신도 없는 학문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그들의 추론은 지극히 논리적이다. "사회질서는 전적으로 법에 의존하기 때문에
당신이 법에게 정의만을 요구한다면 당신은 법으로부터 박애정신을 박탈하는
것이다. 또 사회로부터 박애정신을 박탈하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학과 경제학자, 그리고 경제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고집불통이고 냉혈한이며, 완고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그들의 대전제가 온당한 것일까? 사회의 질서가 전적으로 법에 의존한다는
주장은 옳은 것일까? 만약 그들의 대전제가 옳지 않다면 그들이 경제학에 대해서
퍼붓는 비난도 근거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실정법은 권위와 강제와 강제력과 총칼과 감옥에 의해서 유지된다. 그같은
실정법에는 호의, 우정, 사랑, 자기부정, 헌신, 희생 같은 것들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결국 법 속에는 박애정신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본성의 고귀한 속성들을 말살하거나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단지 사회가 법보다
크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행동들과 느낌들이 법을 초월해서 만들어지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경제학자들이 법의 한계 밖에 놓여 있는 모든 것들을 부정한다는 식의
잘못된 해석에 대하여 내 모든 힘을 다해서 엄중히 항의한다. 1800년 전부터
성스러운 산의 정상으로 내려왔고 우리 공화국의 국기에 영원히 아로새겨져 있는
박애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도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것을 믿어달라. 우리도
개인들과 가족들과 민족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고, 이 모진 삶을 살면서 역경을 겪을
때 서로 돕고 사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우리도 고귀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맺힌다. 그것이 보통사람들의 삶에 밝은 빛을 비추어주는
일이든,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결속을 다져주는 일이든, 또는 운명적으로 선택된
민족의 진보와 문명을 촉진하는 일이든 간에 말이다.
  너희들이나 잘하라고 그들이 우리를 윽박지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문제라면 우리도 양보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무수한 정치 이론가들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기심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개인주의를 저주하는
대신 헌신과 희생과 박애 같은 단어들을 끝없이 되뇌이고 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을
한번 돌아보라고 하라. 그들이 남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거창한 덕목들을 과연
자기자신들은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으며 매사를
자신의 이익을 떠나 처리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이
우리들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다루겠다.
  데시우스 부자(주4)처럼 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하면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지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들의 견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을 우리가 그들로 인해 우리의 재산과 사회적인 특권들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결단코 그런 이유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반대하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이 유치할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재앙을 불러 올 것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인위적인 사회체제나 강제적인 박애를 선포함으로써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우리 경제학자들 중에서도 우리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쏟아가면서라도 그같은 계획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박애라는 것이 강요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조할 수 없다. 우리는
법적인 강제력이 배제된 상태에서 베풀어지는 박애만을 인정한다. 자발적이지 않은
박애는 있을 수 없다. 법으로 박애를 선포하는 것은 박애를 절멸시키는 것이다. 법이
인간에게 정의로움을 강요할 수는 있지만, 자기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이것은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 아니다. 조금전에 언급했듯이 1천8백여 년 전에
이미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의 창시자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법 가라사대: 네 이웃이 네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네가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
  법 가라사대: 네 이웃이 네게 해주기를 원하는 일을 너도 네 이웃에게 하라.

  나는 이 두 가지의 말이 정의와 박애 사이의 경계를 긋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법의 영역과 인간의 무제한의 자발적 행동 사이의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경계를 짓는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가족들이 생존하고, 번영하고, 스스로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각자가 가진
폭력을 집단화했을 때, 그 집단화된 강제력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모든 사람의 인격과 노동의 결과물과 재산과 모든 권리와 모든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을 보편적 정의라는 이름 말고 다르게
부를 수가 있겠는가. 각자의 권리는 다른 사람도 가지고 있는 비슷한 권리에 의해서
한계지어질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법은 그같이 각자가 가진 권리간의 경계를
인식하고 그것이 지켜지는가를 감시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는 없다. 누군가 그
경계를 넘어서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법은 정의롭지 못하게 된다. 만약 법이 그같은 한계를 벗어나
누군가에게 경계를 넘어설 것을 명령한다면 그 법은 더욱더 정의롭지 못한 것이
된다.
  재산을 예로 들어보자.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각자의 노동을 통해서 생산한 것은
각자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다. 숙련도나 생산성 등 노동의 질에 차이가
난다면 더욱더 그렇다. 만약 두 사람의 노동자가 공동으로 생산한 결과물을 서로가
동의한 조건에 의해 같이 나누기를 원한다면 어떨까? 또는 각자가 만든 생산물을
교환하기 원하거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빌려주거나 선사하기를
원한다면 어떨까? 이런 것들이 법과는 어떤 관계를 가질까? 내 생각은 이렇다. 만약
법이 계약조건의 준수를 보장하고 허위의사 표시, 폭력, 사기 등만 막아줄 수 있다면
각자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법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법이 자기희생이나 관용을 막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누가 감히
그런 말을 하는가. 명령을 한다고 해서 자기희생과 관용이 실천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바로 경제학자와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차이이다.
  만약 일부의 사람들이 불행한 사태에 처했을 때 국가가 그들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원의 일부를 따로 떼어놓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이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우리도
거기에 반대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런 일은 시행되고 있으며 더욱더 잘
이루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다. 정부의 선견지명이 각자의
선견지명을 대체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예측력이 파괴되는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된다. 이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정부에 의한 자선행위는 당장은 좋은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많은 해악을 끼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같이 예외적인 정책수단에 대해 더 이상 논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것은 법의 기능이 무엇인가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상호의존적 권리 사이의 경계를 긋고 그 경계가 지켜지는지를 감시하는 것이 법의
임무인가, 아니면 인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구실로 자선행위나 자기절제, 또는
상호희생 같은 것을 강요하는 것이 법의 임무인가.
  후자를 법으로 선택할 경우에 겪게 될 가장 큰 문제는(내가 이 문제를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의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하여 부과하는
불확실성이다. 그 불확실성 때문에 사회의 모든 기능이 마비될 수도 있다.
  정의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고 변치 않는 그 무엇이다. 만약에 법이 정의의 원칙을 따른다면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박애를 한번 생각해보자. 도대체 어디까지가 박애인가. 박애라는 것의
구체적인 형태는 무엇인가.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모든 일이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박애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각자의 자유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한 나는 박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그것에 갈채를 보낸다. 그 희생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더욱더 그것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법으로 강제되는 박애를 한번
생각해보라. 다시 말해서 노동자 자신이 원래 가진 권리와는 무관하게 노동의
결과물을 법에 의해서 재분배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디까지 이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고, 재분배의 구체적 형태는 무엇이며, 또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어떤 제도가
만들어져야 하는가. 그같은 상황에서 과연 어떤 사회가 존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의와는 달리 희생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길가의 거지에게 동전
한닢을 던져주는 것에서부터 생명 그 자체를 바치는 행위(usque ad mortem,
mortem autem crucis)(주5)까지가 모두 희생이다. 인간에게 박애를 가르쳤던
복음서는 완덕의 권고(councel of perfection)를 하고 있다.
  "누가 네 왼 뺨을 때리거든, 오른 뺨을 내밀어라..."
  골고다 언덕에서의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박애에 대한 단순한 설명 이상의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박애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 가장 감동적이며 가장 숭고한
예이기도 하다.
  입법과 행정수단을 통해서 박애의 원칙을 그 정도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중간의 어느 선에서 적당히 멈추어야 하는 것일까? 어디에서 어떤 원칙에
의해 그것을 결정해야 하는가. 오늘날 그것은 누군가의 표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으며 내일은 또다른 유권자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도 동일한 불확실성이 게재되어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소수를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소수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킬
것인가? 법이 이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박애를 성취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대여섯 개 정도의 편지가
내게 오지만 제안하는 것은 편지마다 다르다. 만약 입법자가 수십만 가지의 박애적
제도 가운데에서 매일매일 자기가 마음 내키는 것으로 바꾸어간다면 어느 국가도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이며, 번영을 누리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제 우리 앞에는 경제학자가 추천하는 제도와 사회주의자들이 추천하는 제도 두
가지가 놓여 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했을 때 나타날 결과를 비교해보자.
  첫째, 보편적 정의를 입법의 원칙으로 삼고 있는 나라를 상상해보라. 이런
나라에서라면 사람들은 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우리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책임을 진다. 그것이 노동이든, 사업이든, 교육이든, 자기계발이든,
신앙이든 간에 우리의 일은 우리 스스로 알아서 한다. 정부,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가 가진 권리의 한계내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다.
  사회체제에 대한 수많은 실험이 행해져온 판에 우리나라든 어느 나라든 간에 이런
체제도 한번 실험을 해봤으면 좋겠다. 이같은 체제는 누가 보더라도 너무나
단순하다. 누구든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이러한 체제에 가까운 나라일수록 안전과 번영, 평등, 존엄 등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들을 앞서게 된다는 가설을 검증해본다면 더욱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살 수 있는 날이 앞으로 10년이나 남았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1년만이라도 그같은 실험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나머지 9년은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행복한 결과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첫째, 법의 영향력이라는 측면만을 놓고 본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정의라는 것은 매우 분명한
것이기 때문에 정의만에 입각한 법이라면 실질적으로 그 내용이 변할 수가 없다. 한
가지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면 (법의 유일한 목표인) 인간과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의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체제하에서라면 누구든지 잦은
법개정에 따른 불확실성을 염려하지 않고 정직하게 자기자신의 사업을 벌여나갈 수
있다. 인생의 모든 경로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흥미와
성향과 적성과 상황에 맞도록 자신의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특권도 독점도 제한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정부조차도 자신이 가짐 힘을 원래 자기의 일이 아닌 것들에 낭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정부 본래의 임무, 즉 허위 의사표시, 사기, 직무태만, 범죄,
폭력 등의 예방을 더욱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정의롭지 못한 것을 억제하고 예방하는 것이
정부의 주된 기능이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같이
중요한 일, 즉 정의롭지 못한 것을 예방하고 제지하는 이에 별진전이 없는 것일까?
그 기유는 엉뚱한 일을 하느라고 원래 정부가 했어야만 하는 일들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 프랑스는 안전과는 거리가 먼 나라가 되어 버렸다.
  안전은 내가 지금껏 주장해온 체제 아래에서 극대화될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미래에 대한 안전이 보장될 수 있다. 근거 없는 유토피아가 강요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다. 경찰력을 이용해서 정의롭지 못한
것들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안전이 가져다주는 결과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안전이
보장된다면 여러 가지 형태의 재산권들(부동산, 동산, 지적 재산권, 산업재산권 등)은
완벽하게 보장될 것이다. 악인들의 공격으로부터도, 또 심지어는 법의
공격으로부터도 그같은 재산은 보호될 것이다. 노동자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든, 노동자 상호간의 교환이든, 외국과의 교환이든 간에, 그
서비스는 자연적인 가치를 간직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가치는 수많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겠지만, 최소한 법의 변덕이나 세금, 의회의 요구나 음모,
정치적 영향력 등에 의해서는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재화나 용역의 가격변화는
최소화될 것이다. 이같은 조건이 갖추어 졌을진대, 산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지
않고 부와 자본이 급속히 쌓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자본이 몇 배로 축적되었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들간에 경쟁이 생긴다.
자본에 대한 보상, 즉 이자율은 떨어져서 상품의 값에서 자본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줄어들고 노동에 대한 분배분은 늘어난다. 자본의 가격이 낮아지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산수단의 소유가 분산된다. 자본에 대한
분배분이 줄어드는 만큼 소비재의 가격도 낮아진다. 생활비도 떨어지며, 그 결과
노동자계급의 독립성도 확장되어 간다.(주6)
  자본축적량이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임금수준도 올라간다. 자본이란 사용되지
않으면 어떤 수익도 내지 못한다. 임금기금이 늘어날수록, 그리고 정해진 수의
노동자당 자본의 이용도가 높아질수록 임금 수준은 올라간다.
  따라서 엄격한 정의에 입각한 체제, 따라서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는 체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경로를 통해서 고통받고 있는 계급들의 고통을 덜어주게 될
것이다. 첫째는 생활비를 줄이는 것이고, 둘째는 임금을 올리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도덕적인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그들의 생활여건을 그같이
이중으로 개선시킬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평등한 사회를 향한 길에
들어서게 된다. 내가 말하는 평등은 법 앞에서의 평등만이 아니다. 그런 식의 평등은
체제를 도입한 결과가 아니라 체제의 일부이기 때문에 논의할 필요조차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같은 체제에서는 물질적이고 도덕적인 평등까지고 달성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에 대한 대가는 높아지는 반면 자본에 대한 대가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는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평화를 추구할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나라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유일한 외교정책이 될 것이다. 다른
나라를 위협할 이유도 위협을 받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런 나라에게는
외교정책이라는 것이 것이며, 하물며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외교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보편적 정의라는 원칙 때문에 누구도 자국인들이 외국인들과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는 많은 다른 나라들과 자유로운
교역관계를 맺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같은 교역관계가 다른 나라들과의 평화로운
관계에 기여할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교역관계는 그 자체가
실질적이고 귀중한 방어수단이기 때문에, 총포도, 요새도, 해군도, 상비군도, 거의
필요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 나라가 가진 모든 에너지는 생산적인 노동에만
투입될 것이고, 그 결과 자본축적량은 더욱 늘어날 것이고, 앞에서 말한 좋은
효과들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그런 나라의 정부라면 그 크기가 매우 작고, 행정조직도 매우 단순하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경찰로 하여금 정의가 물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프랑스라면 2억6백만 프랑이라는 적은 비용으로도 그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나라라면 거의 세금을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문명이 더욱 발전할수록 정부의 규모는 더욱 작아지고, 더욱
단순해질 것이다. 좋은 사회적 관습들에 의해서 새로운 정의의 관념이 등장하고
그런 정의는 실행하기가 더욱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통계학자들이나 세무공무원들은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마음조차 포기해버렸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은
부자들의 어깨 위에 세금부담을 집중시키는 일이다. 국가가 많은 돈을 거머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특히 대중들로부터 돈을 거두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고 있는 이 체제하에서는 몇백만 프랑 정도의 적은 돈으로도 정부가
운영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단순비례세가 가장 손쉬운 과세방식일 것이다.
재산가치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일정비율을 부과하는 단일세 정도라면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기생충 같은 재무성이나 관료들에게 돈을 갖다바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간접적인 헌금을 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돈을 낼 필요도 없다. 또 생산적
노동을 함에 있어 요소요소에 매복해 있는 재정적 함정들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
그같은 함정들은 그것 때문에 돈을 내게 한다는 사실보다, 그것으로 인해 자유가
손상된다는 점이 더욱 해롭다.
  그같이 정의에 입각한 체제에서는 필연적으로 질서가 형성된다는 것을 굳이
증명해야 할까? 무질서란 어디서 오는가. 가난이 무질서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특히
그 가난이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 온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설령 우연히, 또는
일시적인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누구도 국가나 정부나 법에 그 책임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부를 재분배하는 것이 국가의 임무라고 간주되고
있는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같은 고통의 책임들 당연히 국가로 돌리게 된다.
그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금부담을 늘려야 할 것이며, 그 결과 그 돈으로
해결하는 가난보다는 새로 만들어지는 가난이 훨씬 더 클 것이다. 대중들은
정부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요구할 것이고, 정부는 새로운 세금을 계속
만들어내야만 할 것이다. 그같은 상황이 계속되는 한, 하나의 혁명은 그것 자체로
끝나지 못하고 불가피하게 또다른 혁명을 낳는다. 그러나 만약 국가가
노동자들로부터 사기나 폭력을 막는 데 꼭 필요한 만큼만 거두어간다면 무질서가
생겨날 이유가 없다.
  혹자는 그같이 매우 단순하고 쉽게 만들 수 있는 사회에서는 생활이 매우
우울하고 슬퍼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국가가 해온 위대한 일들은 다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정치인들은 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되면 국회라는 것도 민법이나 형법을 개정하는 따위의 일만
해야 할 테니 정치인들간의 열띤 논쟁이나 극적인 투쟁을 보는 재미도 없어지지
않겠는가.
  이같은 염려는 정부와 사회를 같은 것으로 보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것만큼 위험하고 해로운 생각은 없다. 만약에 그런 생각이 옳다면 정부를
단순화시키는 것이 사회의 역할을 줄이는 것과 동일시되어 버린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라. 경찰이 정의를 확립하는 정도의 역할만 한다고 해서
시민들의 주도권이 손상되는가. 시민들의 행동이 법이 정한 울타리 안으로
가두어질까? 각자의 행동이 정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가지가지의 개별적인
조직과 모임(종교조직, 자선단체, 농업단체, 학술단체, 기업들의 모임, 농민모임,
심지어는 모험적인 모임까지도)을 만든다고 해서 경찰이 그것을 방해하겠는가.
자본이 풍부해질수록 이같은 사업들이 번창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닌가. 그러나
각자는 그같은 모임에 가입함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면서 그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같은 단체들을 정부의 비용과 정부의 위험부담 하에 만들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분명히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그래, 그런 체제하에서 정의가 살아나고 경제가 번성하고, 자유와 부와, 평화와
질서와 평등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애정신은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질문해보라. 인간의 마음속에 입법자가 집어넣은
것만이 존재하는가. 박애정신이라는 것이 투표함에서 나온 것인가. 법이 당신에게
정의만을 요구하고 박애는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이 자발적으로 자선행위를
하는 데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법으로 자기희생과 연민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인들의 마음속에서 자기희생과 연민의 심성이 사라지겠는가.
  젊은 여인이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음침한 노인들의 집에서 봉사하는 것이
법전의 몇 조에 나와 있는가. 사람들이 성직자를 자원하는 것이 도대체 법전의 몇
조인가. 기독교가 만들어진 것과 사도들의 열정과 순교자들의 용기와
페넬론(Fenelon)이나 프랑시스 드 폴(Francis de Paul)의 사랑과, 오늘날까지도
인민들의 승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려는 수천의 젊은이들의 용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도대체 어떤 실정법이고, 어떤 정부의 규제인가.(주7)
  우리가 선하고 아름다운 행동을 볼 때마다 사회 전체가 그런 행동들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문제는 그같은 행동을 법으로 명령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발성을 본질로 하는 행동이 법으로
강요된다면 그런 행동은 퇴화되어 버리고 만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강제력을
본질로 하는 법을 가지고는 정의롭지 못한 것을 억제하고, 권리(또는 옳은 것)를
보호하는 것 이외의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정의가 지배하는 나라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자. 법은 정의뿐만 아니라 박애정신을 구현하는 수단이기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래 생각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 말한 것의 정반대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면 된다.
  먼저 사람들은 모든 사적인 행동을 함에 있어서 엄청난 불확실성과
두려우리만큼의 불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박애라는 것은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것을 구체화한 법도 수없이 다양한 형태를 취할 것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무수히 많은 개정안들이 제기되어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을 위협할 것이다.
  박애주의라는 미명하에 어떤 이는 균등한 임금을 요구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노동자들은 카스트제도하의 인도사람들처럼 되어버리고 만다. 능력, 용기, 근면함,
지성 어느 것도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잿빛의 법률이
능력 있는 자를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과 같은 세상이
될 것이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또 어떤 자는 박애주의라는
미명하에 근무시간을 10시간, 8시간, 6시간, 또는 4시간으로 줄여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리하여 조만간 생산활동은 중단되어 버릴 것이다. 굶주린 배를 채워줄
빵도, 추위를 막아줄 의복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세 번째 사람이 나타나
빵과 의복 대신에 돈을 주자는 제안을 하게 될 것이다. 돈만 있다면 물건을 살 수
있지 않은가. 돈을 많이 찍어서 많은 빵과 의복을 살 수 있게 만들자. 결국 종이만
많이 있으면 된다. 증명 끝. 네 번째 사람은 법으로 경쟁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섯 번째 사람은 법으로 이기심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자는
국가가 노동자에게 일을 주어야 하며, 또 어떤 자는 교육비를, 연금을 주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지구상의 모든 왕들을 몰아내기 위해 법으로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제 그들의 주장은 그만 듣기로 하자. 우리가 이같은 길로 들어서게 된다면
새로운 유토피아는 끝없이 생겨난다. 새로운 유토피아에 대한 제안은 무시하면
된다고 할지 모른다.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의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유토피아를 추가할 가능성은 늘 상존한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만으로도 불확실성은
생겨난다. 그 결과 근로의욕은 죽어버리고 만다.
  이같은 체제하에서는 자본도 형성되지 않는다. 그나마 얼마 안되는 자본마저도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버린다. 그로 인해 임금은 떨어지고, 계급간의 불평등은 계속
확대되어 간다.
  머지않아 국가의 재정도 완전한 무질서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국가가 나서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질서가
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은 무거운 세금부담에 짓눌릴
것이고, 국가의 빚은 계속 늘어만 갈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현재를 모두
고갈시키고 나면 결국 미래까지도 소진시키려고 달려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민들이 아니가 국가가 박애주의의 실천자가 된다면 모든 사람이
국가에게 손을 벌리려고 할 것이다. 부동산업자, 농민, 기업과 기업가, 상인,
조선업자 등 모든 사람이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으려고 애쓸 것이다. 국고는
그야말로 약탈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법적으로 규정된
박애주의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고 해도 할말이 없다.
  "혜택은 나에게 주고, 비용은 남들에게 부담시켜라."
  법이 제공하는 박애주의적 혜택을 차지하는 데에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낭비될
것이다. 마땅히 가장 큰 시혜가 주어져야 할 가장 고통받는 계급에게 그같은 시혜가
돌아가라는 법도 없어진다. 그 와중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숫자는 끊임없이
불어나게 되고, 결과적으로 국가는 끊임없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소위 법적 박애주의라는 사상을 채택하게 되면, 우리의 눈앞에
우울한 광경이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몇몇 나라에서 이미 그 서막을 보고
있다.
  물론 이같은 사상이 인간의 숭고하고 사심 없는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쩌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그같은 사상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그 동기가 숭고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판명될 때, 대중들의 앞에 놓인 절망의 낭떠러지는 더욱 골이 깊다.
  나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기를 바란다. 좋으신 하나님, 만약
보편적 박애정신이라는 것이 법으로 강요될 수만 있다면, 또 루이 블랑이 소원하듯
이기심이 그렇게 쉽사리 없어질 수만 있다면, 평화적인 민주주의라는 프로그램이
담고 있듯 법을 통해서 이기심 없는 세상이 실현될 수만 있다면, 사람들로부터 한
푼도 거두지 않고서도 국가가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제공해줄 수만 있다면,
부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렇게 해주소서. 그렇게만 된다면 이 몸도 기꺼이
그같은 법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고, 인간이 그같이 쉽게 완전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관념은 너무나 터무니없어 유치하기까지 하다. 그들이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는 노동자계급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게 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능한 정치학자들까지 잘못된 길로 들어서도록 한 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이들 사회주의자들은 오늘날 우리 동포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자유, 즉 정의
때문이라고 매도한다. 그들은 엄격한 정의와 자유의 체제가 실패로 판명되었다는
주장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따라서 이제는 단순한 정의에서 한발 더 나아가
박애주의를 실천할 때라고 결론짓는다. 그래서 생시몽주의자, 푸리에주의자,
공산주의자, 오웬학파가 나왔다. 노동력을 동원하려는 움직임이 나왔다. 국가가 모든
시민들의 생계와 복지와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국가는 모든
시민들에게 너그럽고 자비롭고 헌신적이어야 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국가가
어린아이에게는 먹을 것을, 젊은이들에게는 교육을, 정상인에게는 일자리를,
장애인에게는 연금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가는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서 모든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모든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하며, 모든 기업들에게 자본을 대주어야 하고,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계몽해야 하며, 심지어는 프랑스인들을 희생시키더라도 지구상의 모든
억압받는 자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법이라는 것이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아서 그같은 혜택들이 끊임없이 주어질
수 있다면 누가 그것에 반대하겠는가. 만약 모든 고통과 조심, 책임과 의무, 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섭리에 의해 우리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들은 모두 국가가 대신
져주고, 사람들은 만족, 즐거움, 확실함, 고요함, 휴식, 보장된 현재, 밝은 미래,
걱정이 따르지 않는 풍요로움, 책임질 필요가 없는 가족들, 담보가 필요없는 융자,
노력이 필요없는 인생같이 순탄한 길만을 걸을 수 있다면 누가 그것을
마다하겠는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누구든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국가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를 쓰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이처럼 의인화된 국가의 개념
뒤에 가장 굴욕적인 속임수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 최고의 덕성을 갖고 있고, 모든
의무를 부담하며, 모든 이에게 후하게 나누어주는 이 국가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면 그러기 위한 자원이 있어야 할 텐데 그 자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결국 받는 사람이 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과정에서
기생충처럼 탐욕스럽게 제 몫을 챙기는 거간꾼(공무원)들을 거쳐야만 할 텐데, 그
과정에서 거두어진 자원이 줄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정부의 모든
조직들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유용한 자원들을 삼켜버려서 근로자들에게 남는 것은
별로 없어진다는 사실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그렇게 해서
생활수준이 낮아지는 것 말고도 노동자들이 자유를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법에 대해서 정의 이외의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법으로 종교의 문제를 다룬다고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 진실된
신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신앙과 경전과 예배의식은 그것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같은 통일이
바람직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 종교야말로 진정 진실된 신앙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토론과 탐구가 이루어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아무리 박애정신의
이름을 내건다고 하더라도 국가에 의해 강요된 종교의 통일은 누군가를 억압하는
행위, 즉 정의롭지 못한 행위이다. 진리는 다른 곳에 있는데 국가가 나서서 엉뚱한
믿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단일종교라는 것은
사람들이 자유로이 생각하는 가운데에 진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스스로
확신이 들 때만 가능해야 한다.
  우리가 법에 대하여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종교라도 믿을 수 있는 자유,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으로 인해 어떤 종류의 지적인 무정부 상태가 올지라도
말이다. 그같은 무정부 상태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지적 무정부 상태의
끝에는(시작이 아니라) 통일이 찾아온다. 지적인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말이다.
통일이라는 것은 시작점이 아니라 종착점이다. 단일종교를 강요하는 법은 정의의
원칙에 위배된다. 정의가 항상 박애주의를 사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박애정신은
정의롭지 못한 것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만 한다.
  교육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이 최선의 교육방법과 최선의
교육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의견일치를 볼 수 있다면, 획일적인 공교육이 가장
바람직스러울 것이다. 실수는 모두 법으로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기준을 발견할 수 없는 한, 그리고 입법자들이나 교육부 장관이
완전무결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한, 시행착오와 실험과 각자의 이익을
위한 결과의 선택과정이 작동할 때, 한마디로 말해 자유가 있을 때에 최선의 제도가
찾아질 가능성이 가장 크다. 최선의 제도를 발견할 가능성은 정부가 법으로 획일적
교육제도를 강요할 때에 가장 작아진다. 오류가 고쳐지지 않고 영원히 고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애주의라는 미명하에 법으로 교육내용을 정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틀린 것을 가르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법으로 교육내용을 강요하면, 스스로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마음이 오도될 것이고, 그로 인해 결국 진리 자체가 오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묻노니, 법으로 박애를 강요하는 것은 결국 인류에게 실수를 강요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다양성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다양성을 무정부상태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의견과 신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같은 다양함이 하나로 수렴되는 것은 토론과 연구와 경험을 통해서이다.
아직도 그 과정이 끝나지 않았는데 어느 하나의 체제가 다른 체제를 법으로 대체할
수 있는 권리를 누가 주었는가. 우리는 법을 악용하려는 거짓 박애주의가 정의의
원칙과는 양립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언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로서는 획일적인
공교육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왜 획일적인 국가언론을 요구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언론도 일종의 교육이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토론이 허용되며 실상 그것을
통해서 언론은 먹고 살아간다. 그래서 언론계는 다양하다 못해 무정부 상태하에
있다. 따라서 왜 언론부를 새로 만들어서 프랑스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책들과
신문들을 관리하지 않는가. 만약 국가라는 것이 완전무결하다면 우리의 마음을
국가의 통제하에 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국가가
언론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듯이 교육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외교문제에 대해서도 정의 말고는 법으로 표현될 만한 어떤 원칙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국가간의 관계를 법적이고, 강요된 박애주의 원칙하에 둔다는 것은 영원한
세계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입법자들이 동정심을 느껴
도와주어야겠다고 판단한 다른 나라로 우리의 힘과 피와 재산을 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가 옛날에 이미 상징적으로 표현했듯이 실로 이상한 종류의
박애정신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강요된 박애주의의 폐해가 가장 큰 경우는 노동분야이다.
박애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강요된 박애주의를 법전 속에
넣어놓고서는 그것도 모자라 형벌조항까지 넣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애정신이란 항상 헌신과 희생을 뜻한다. 박애가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의 대상인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사회주의자가 말한 대로
박애주의적 현상이 그 당사자에게 이익이 되도록 할 양이라면 굳이 법으로 박애를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은 법이 명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이익은 알아서
챙기기 때문이다. 박애정신에 대한 이같은 견해는 순수한 박애정신을 타락시키고
더럽히는 것이다.
  이제 동료애의 감정에 의해 유발되는 자발적인 희생이라고 정의되는 박애의
본질을 받아들이자.
  만약 박애가 법으로 강요된다면 박애의 본질 중에서 무엇이 남겠는가. 물론 그런
식의 희생도 희생은 희생이다. 하지만 그것은 닥칠 벌이 무서워 마지못해 하는
억지희생에 불과하다. 도대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누군가에게 강요되는
희생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이 박애란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그것은 법적인 약탈이라고, 그것도
최악의 약탈이라고. 다른 어떤 종류의 약탈보다도 조직적이고, 항구적이며, 피할
방법도 없는 약탈이기 때문이다.
  5월 15일 의회에서 바르베(Barbes)(주8)가 고통받는 계급을 위해서 10억 프랑
상당의 조세를 통과시켰을 때, 그가 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당신이 원하는 강요된
박애의 원칙을 관철시켰을 뿐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서론으로 시작되는 성명서를
발표했던 소브리에(Sobrier)(주9)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박애정신이 공허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 정식문서로 남기기 위해,
그것을 입법화하자. 자본가들은 돈을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 자신들의 생각이 그럴진대 무슨 권리로 이 두 사람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조금 더 논리적으로 표현했을 뿐 아닌가.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같은 원칙이 일단 입법화되기 시작하면 조만간
자본의 형성과 노동의욕을 마비시켜 버리고 만다. 그같은 식의 법이 어디까지
확장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일한 결과를 취할 수 없을 때,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또는 적게 하려 한다는 사실을 길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불안정성은 자본의 축적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그것은 자본의 탈출을 촉진시키고 새로 생성되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된다면
고통으로부터 구제되어야만 할 계급들은 어떻게 되는가. 내가 진심으로 믿거니와
이것만으로도 가장 풍요로운 나라가 순식간에 터키(Turkey)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전락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세금의 형태로 일부 사람들에게만 희생이 강요될
경우, 그같은 희생은 박애의 본질을 훼손한다. 그럴 경우 도대체 누구에게 희생의
영예가 돌아가야 하는가. 입법자로 보아야 하는가? 그같은 희생을 위해 입법자가
치르는 비용은 자기가 가진 표를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 세무공무원으로 보아야
할까? 하지만 그가 세금을 거두는 것은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일 뿐이다.
납세자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납세자도 마지못해 세금을 낼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기희생에 응당 따라야 할 영예는 누구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응당
있어야 할 도덕심은 어디에서 찾아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불법적인 약탈은 모든 사람들이 혐오한다. 여론도 모든 힘을 다해서 그것에
저항하며, 정의를 세우기 위해 힘을 행사한다. 반면에 합법적인 약탈은 양심의
가책도 없이 저질러진다. 이렇게 되면 나라의 도덕은 반드시 약화되고 만다.
  용감하고 신중하기만 하다면 누구든 불법적인 약탈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합법적인 약탈로부터는 누구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합법적인 약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고 해보자. 법으로 무장한
약탈자와 그 법에 저항하는 제물이라니, 딱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박애주의라는 미명하에 법으로 희생이 강요되는 상황에서도 인간의 본성은 그것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다. 그러려면 돈을 거두어서 공동의 기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낼 돈은 되도록 줄이고, 가져갈 몫은 최대로 늘리려고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최대 수혜자가 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가장 영향력이 크고, 타산적인 사람들이 최대의 수혜자가 되게 마련이다.
  그런 식의 박애주의가 단결과 화합, 조화를 가져다줄까? 박애라는 것이 개인과
가족과 민족과 인종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성스러운 끈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박애정신이 원래의 모습, 즉 가장 자발적이고,
가치있고(meritorious), 종교적인 감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날조된 박애주의로는 그같이 경이로운 일을 이루어낼 수 없다. 합법적인 약탈행위가
박애주의의 이름과 겉모습과 형식은 빌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불화와
혼돈, 부당한 권리, 공포, 불행, 아둔함, 증오를 담고 있을 뿐이다.
  우리들에게 심각한 반대의견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유와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것이 정의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식의 정의를 엄격하게 적용하다 보면 부자와 가난한 자, 강자와 약자, 현명한 자와
무지한 자, 유산자와 무산자, 우리의 동포와 외국인간의 차이를 고려할 수 없다.
인간의 이해관계란 본래 서로 적대적이기 때문에 정의의 원칙만을 고집하다 보면
희생되는 쪽은 늘 무기도 없이 결투장에 나가야 하는 가난한 자, 무지한 자,
무산자들이다.
  이 문제에 대해 콩시더랑(Considerant)씨의 의견을 들어보자

  "우리가 그토록 의존해온 경제적 자유, 또는 흔히 민주적이라고 불리는 그
자유경쟁의 원칙을 택해서 나오는 결과가 무엇인가. 대중들이 노예의 상태와
집단적인 재산헌납 이외에 얻는 것이 무엇인가. 생산수단 등의 여러 가지 장비를
갖춘 계급에 의해 자본과 생산수단,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육기회를 뺏기는 것
이외에 대중들이 얻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경제학자들)은 또 우리에게 말한다.
  "자격제한은 없다. 모든 사람들이 경쟁에 참여할 수 있다. 모든 경쟁자들이 같은
조건에서 싸운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들은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다. 이 위대한 전쟁터에서
어떤 사람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았고 기강이 있으며, 철저히 무장하고 있다. 그들은
식량을 비롯해 넉넉한 군수품과 전투수단을 갖추고 있어서 늘 전략적으로 우세한
지위를 점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 즉 수탈되고, 굶주리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매일매일 아내와 자식들의 입에 풀칠해주기에 바쁜 그들로서는
아무리 낮은 임금이라도 감수하고서 그들의 적들에게 아무 일이나 주십사하고
구걸해야만 한다.(주10)

  세상에 맙소사! 경제를 전쟁에 비유하다니. 그들이 전쟁물자라고 간주하는 것은
자본이다. 이 자본은 자연적인 조건을 극복하는 일 이외의 다른 용도로는 사용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쟁터에서 서로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사용되는 피로
얼룩진 무기에다가 그것을 비유하고 있다. 이 무슨 궤변인가. 경제질서를 비난하기
위해 전쟁에서나 쓰이는 용어들을 갖다붙인다면, 경제적 질서는 너무나 쉽게
망가져버릴 것이다.
  사회주의자들과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이처럼 근본적이고 타협이 안되는 이견이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의 이해관계가 본질적으로
대립적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경제학자들은 이해관계가 저절로 조화를 이룬다고,
혹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조화를 찾아간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차이이다.
  사회주의자들이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인위적으로 조직하건, 또는 할 수만 있다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이기심까지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이해관계의
적대성이라는 대전제로부터 도출되는 논리적 필연일지 모른다. 그들이
룩셈부르크에서 하려고 했던 일도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로 그것을 시도할 정도로 정신이 나갈 수는 있지만,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그들은 심지어 그 자신들조차도 개조할 수가 없다. 자기가 쓴
책에서 실컷 개인주의를 비난해놓고는 뒤돌아서서 그 책의 인세를 챙길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그들은 이기적인 다른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행동할 것임이
분명하다.
  만약 인간의 이해관계가 서로 적대적이라면 우리는 정의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같이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모두 걷어치우는 것이 좋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도 끊임없이 제안되는 새로운 계획에 따라 세상을 재구성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이기심 대신에 법으로 강요된, 그리고 비자발적인
자기희생, 한마디로 말해서 합법적인 약탈을 실천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자면 수많은 저항이 따르겠지만, 처음에는 박애정신이라는 것으로
위장하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법으로 만들어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신의 섭리에 오류가 없다면,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이해가 정의의 법 아래서
서로 조화를 향해 스스로를 조절해가는 경향이 있다면, 또 라마르탱씨가 말했던
것처럼 아무리 많은 독재자를 데려다놓더라도 이룩할 수 없는 정의를 자유의 체제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면, 그리고 법 앞에서의 평등이 실질적인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라면, 우리가 법에 대해서 요구할 것이란 정의와 자유와 법
앞에서의 평등밖에는 없다. 그것은 마치 한 방울의 물을 넓은 바다로 보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장애물을 거두어내는 일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경제학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결론이다. 경제학이 그 결론을
얻기 위해 억지로 노력한 것이 아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도출된 결론이다. 하지만
정치경제학은 그같은 결론에 기뻐한다. 다른 학문에서는 억지로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판에 자유로운 가운데에서도 조화가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어찌 지고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사회주의자들이 우리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들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만약 불행히도 우리가 틀렸다면, 그들도 그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겨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본다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은 이렇다. 심사숙고한 결과 우리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
하신 일은 참 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와 자유가 있을 때에 비로소
발전가능성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우리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마음 한구석에서나마 꺼림칙한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억지로 만들어놓은 것 대신에 자연스런 것을, 독재 대신에
자유를, 인간이 만들어놓은 임시변통의 것 대신에 영원하고 성스러운 신의 섭리를
택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화학교수가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이 세상에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좀더
조심스러웠어야 했다. 인간이 숨을 내쉴 때 나오는 공기를 분석해본 결과, 인간이
호흡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 머지않은 장래에 이 지구상의 공기는
완전히 오염되어 인간은 숨을 쉴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발명한 인공호흡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모두 폐병으로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다른 교수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말한다.
  "터무니없는 말이다. 인류가 그렇게 멸망하지는 않는다. 동물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호흡을 해야 하며, 호흡의 결과 그 주변의 공기가 오염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오염된 공기는 식물이 필요로 하는 성분이다. 그리고 인간의 호흡은
식물의 배기가스를 필요로 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신의 실수를 범했다는
주장은 섣부른 결론이다. 더 잘 연구해본다면 신의 작품이 얼마나 조화롭게
설계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호흡은 계속될 것이며, 그것은 자연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교수가 두 번째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욕설을
퍼붓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은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냉혈한이구먼. 그리고 끔찍한 자유방임의 원칙을
떠들어대고 있으니 말이야. 내가 고안한 인공호흡기를 쓸모없다고 치부하다니,
당신은 인류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임이 분명해."
  이것이 바로 우리 경제학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대립의
본질이며 요점이다. 조화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우리나 그들이나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그 조화를 인간과 사물의 본질을 통해서 추구하는 반면, 그들은 자신들이
고안해낸 무수한 억지계획을 법으로 인간에게 강요함으로써 그 조화를 추구한다.
  인간의 이해관계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경향이 있음을 이쯤에서 보여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바로 그 점이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그러려면 최소한 한 학기 정도의
강의가 필요할 테니 말이다.(주11) 단지 이 한가지만은 말해두고 넘어가야겠다.
경제학이 인간의 이해관계가 대립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자들처럼 어떤 현상의 즉각적인 결과만을 보지 않고 그것의
궁극적인 결과까지를 추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경제학의 비밀이다.
경제학자와 사회주의자들간의 차이는 내가 조금전에 예로 들었던 두 사람의
화학자간의 차이와 정확히 같다. 한쪽은 부분만을 보는 반면 다른쪽은 전체를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사회주의자들이 경쟁의 결과를 끝까지
생각할 수 있다면, 즉 경쟁이 생산자에게 미치는 효과에서 중지하지 않고, 소비자에
대한 영향까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면, 국내시장에서건 해외시장에서건 경쟁이라는
것이 평등과 진보를 이루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경제학이 "배울 것은 많지만, 할 것은 별로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궁극적인 효과면에서 인간의 이해가 조화될 수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배울 것이 많다라고 한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효과들을 다 알아내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은 장기간 동안 나타나는
궁극적인 효과를 통해서만 이해관계의 조화가 달성되기 때문이다.
  일전에 나는 혁명과정에서 유명해진 한 신사분과 이 문제에 대해서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다.
  "법이란 강제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법에 대해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정의뿐입니다."
  그는 인민들이 정의 말고도 박애정신을 법에 대해서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다. 지난 8월 내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내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해야 할 위치에 있다고 한다면 당신의 생각은 내가
믿고 있는 것의 절반에 불과할 뿐입니다"(주12)
  나는 그분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당신이 갖고 있는 믿음의 절반(즉 법으로 강요되는 박애정신)은 다른
절반(정의)을 죽이게 될 것입니다. 박애정신을 법으로 강요하게 되면 반드시
누군가의 정당한 권리가 침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맺으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사회주의자들에게 해주고 싶다. 경제학이
연합이나 조직, 박애정신 같은 것을 부정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연합! 당신들은 사회 그 자체가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연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조직! 당신들은 이질적인 것들이 아무렇게나, 또는 억지로 모여있는 상태가 조직이
아니라 위대한 자연의 걸작이 조직임을 언제나 깨닫겠는가.
  박애! 당신들은 박애와 정의간의 관계가 충동과 냉철한 계산 사이의 관계와
같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당신들과 뜻을 같이한다. 우리는 당신들이 먼 훗날 열매를
거두기 위해 인류에게 씨를 뿌리고 있는 행위에 갈채를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이 그것을 위해 법과 조세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강압이고 약탈이고 간섭일 뿐이다. 당신들은 인류가 전체로서 가지고 있는 비범한
재질보다는 당신들 스스로의 능력을 더 믿고 있다. 그같은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당신들은 자연의 질서 그 자체에 개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신들이 이 땅에
이룩하려고 그토록 애쓰는 박애정신의 본질을 해치고 있는 것이다.(주13)
@ff
  주

  1. 1848년 6월 15일 'Journal des economistes'에 출간된 내용. 편집자 주.
  2. 'Karl Marx'의 저작이 나오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Bastiat'는 평등을 달성하려

집산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이론가들을 지칭하기 위해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영역자 주.
  3. Pierre Leroux(1797__1871).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저술가이며 백과사전학파의
한 사람. 'Saint-Simon'의 추종자였음. 영역자 주.
  4. Publius Decius Mus 부자를 가리킴. 두 사람 다 BC 350년에서 275년까지
로마의 군사지도자였음. 로마의 군대가 패하고 있을 때, 자진해서 적진에 뛰어들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음. 영역자 주.
  5.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까지라는 뜻의 희랍어. 영역자 주.
  6. 'Economic Harmonies'의 제7장인 "Capital and Rent"를 보라. 편집자 주.
  7. 실상 인간은 늘 사업상의 거래와 순수한 자선적 행위를 구분해왔다. 나는
가끔씩 가장 헌신적인 사람을 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내가 사는 마을의 목사님은
자신의 이웃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이다. 가끔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부자들로부터 돈을 받아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는 그 일에 그리
꼼꼼하지 못하다. 언젠가 그는 혁명의 와중에서 갈 곳을 잃은 75세의 수녀를
자기집에서 돌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수녀에게 소일거리를 주기 위해서
생전 카드라고는 손도 대지 않던 그 양반이 피켓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양반은
수녀가 자기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카드게임에 매우 열중하는
척하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수녀는 진정으로 자기에게 묵을 곳을 제공한 목사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런 식의 카드놀이가
15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그 수녀는 암에 걸리게 되었고 비록 본인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주위사람들에게 참기 힘든 악취를 풍기게 되었다. 그러자 그
목사는 평소에 피우던 담배마저도 카드게임 중에는 피우지 않게 되었다. 그녀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지난 노동절날 많은 사람들이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우리 동네의 목사님이 15년간이나 해왔던 일을 단
하루만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중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시장에 가서 물건값을 흥정할 때는 파리의 어떤 장사꾼들보다 더 빈틈이
없다. 무게와 크기, 물건의 질, 가격 등을 철저히 따진다. 그 목사님도 자선행위와
사업상의 거래는 철저히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박애라는 말에서 유치하고 잘못된 의미들은 제거해버리자(1847년
말경에 씌어진 미발표 원고에서). 편집자 주.
  8. Armands Barbes(1809__1870). 'Babeuf'의 추종자. 1838년 당시 'Louis
Blanqui'와 'Martin Bernard'와 같이 시즌협회'Society of Seasons'를 결성했음.
1839년 이 협회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음.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해졌고, 1848년 혁명의 와중에서 석방되었음. 나중에 망명을 하였으며
망명중 사망. 영역자 주.
  9. Marie Joseph Sobrier(1825__1854). 1848년 'Jeorge Sand, Eugene Sue'와 함께
일간지인 "파리코뮨"지를 창간, 그들과 함께 편집을 맡았음. 1849년 9월 폐간. 영역자
주.
  10. 영역판 제6장 "Property and Plunder"를 볼 것. 편집자 주.
  11. 당시 'Bastiat'는 이같은 목적으로 이미 'Economic Harmonies'에 포함될 여러
편의 논물들을 'Journal des economistes'에 출간해놓은 상태였음. 따라서 그는 그
책에 포함될 나머지의 논문들도 조속히 완성해야 된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음. 편집자 주.
  12. 1847년 8월 마르세이유에서는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대중집회를 개최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그때 'Bastiat'는 그곳에서 'Lamartine'을 만나 경제적 자유를
포함한 자유의 모든 것, 그리고 경제학의 근본원리에 대해서 대담을 나누게 되었음.
편집자 주.
  13. 인간이 몸담고 살 수 있는 공간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그 중 가장 천한
곳은 약탈이라는 곳이고, 가장 고귀한 곳은 사랑이라는 곳이며, 그 가운데에
정의라는 곳이 있다.
  정부가 하는 일은 모두 강제력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 정부가 사람들에게
정의롭기를 강요할 수는 있지만 억지로 사랑을 베풀라고 강요해서는 안된다. 윤리가
설득을 통해서 하는 일을 만약 법이 강제력을 동원해서 해내려 한다면 법은 결국
사랑이 아니라 약탈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다. 법과 정부가 발붙이고 살아야 할
곳은 정의라는 곳이다.
  ('Bastiat'가 직접 작성한 이 글은 그가 1850년 런던의 엑스포 당국자에게 보냈던
것으로 그의 자서전 중에 포함되어 있다. 이 구절을 여기에서 인용하는 것은 그것이
앞의 본문을 잘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ff
    제5장 국가
    The State
@ff
    5. 국가(주1)

  누군가 국가라는 단어를 단순하고 알기 쉽게 정의하는 사람에게 큰 상금을
걸었으면 좋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큰 도움을 받겠는가.
  국가, 그것은 무엇일까? 어디에 있는 것이며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하지만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정체가 매우 아리송한 친구라는
사실뿐이다. 아마도 국가라는 친구만큼 졸림을 당하고, 많은 고문을 당하고, 바쁘고,
잔소리를 듣고, 비난을 받고, 약올림을 당하는 존재도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 자리에 계시는 선생님들, 당신들이 어떤 분들이신지 알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당신들은 지난 6개월 동안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유토피아를 만드는 책임을 국가에게 지웠을 것입니다. 내기를 합시다. 내가
맞다면 당신이 내게 하나를 주시고 틀렸다면 내가 당신에게 그 열 배를 주겠습니다.
  그리고 숙녀 여러분, 당신들은 틀림없이 인류의 모든 고통이 치유되기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에게 그 역할을 해달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뿔싸! 마치 피가로(Figaro)처럼 불쌍한 국가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또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수십만 가지의 목소리들이 다음과 같은
소리들을 외쳐댄다.

  노동을 조직화하라.
  이기심을 뿌리뽑아라.
  자본의 횡포를 막아라.
  비료와 달걀을 개량하기 위해 실험을 수행하라.
  낙후지역에 철로를 개설하라.
  평야지대에 관개시설을 하라.
  산에 나무를 심어라.
  시범농장을 건설하라.
  작업장을 화목하게 하라.
  알제리아를 식민지로 점령하라.
  어린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라.
  청소년들을 가르쳐라.
  노인을 구제하라.
  도시의 주민들을 농촌으로 분산시켜라.
  모든 사업의 이윤을 균등하게 하라.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자를 받지 말고 돈을 빌려주어라.
  이탈리아와 폴란드와 헝가리를 해방시켜라.
  말의 종자를 개량하라.
  예술을 장려하고 음악가와 무용수들을 훈련시켜라.
  무역을 규제함과 동시에 상선단을 만들어라.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의 머릿속에 넣어달라.
  민족의 영혼을 계몽하고 계발하고 강화하고 풍부하게 하라.(주2)

  선생님들, 제발 조금만 참으세요. 국가가 애처롭게 대답한다. 선생님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제게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대여섯 개 정도의 새로운 세금을 준비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내면서 얼마나 기뻐할는지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려왔다. 수치로다! 수치로다! 돈이 충분하다면
누군들 그 일을 못할까. 그런 자원을 요구할 양이라면 네가 가진 국가라는 이름이
부끄럽다. 새로운 세금을 취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존의 세금조차도 없앨
것을 명한다.

  소금세를 없애라.
  음료세를 없애라.
  물품입시세(octroi)(주3)를 폐지하라.
  면허세를 폐지하라.

  대중들의 욕구를 모두 채워주지 못했다고 해서 국가의 형태가 두세 번이나
바뀌고도 아직도 잠잠해지지 않은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이같은 주장들이 서로
모순된 것임을 지적했었다. 오 하나님, 제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제자신도
상반된 주장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영원히 불신을 받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나를 무자비하고
무미건조하며 개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철학자로 매도하고 있다. 나를 영국,
또는 미국식의 사대주의적 경제학자 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모순조차도 마다하지 않는 위대한 저술가님들이시여, 내 말 좀 들어보소. 내가
틀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저지른 잘못을 거두어들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도
요구할 것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국가라는 것을
마치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가정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국가가
모든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대신 일을 해주며, 기업가들에게는 자본을, 사업을
하려는 자에게는 대출을, 상처받은 자에게는 바를 약을,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향유를, 곤란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조언을, 모든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해결책을,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지루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락을, 어린이에게는 우유를,
노인들에게는 포도주를 나누어줄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 우리의 모든 욕구를 미리 알아서 해결해주며,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고, 우리의 잘못을 고쳐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국가가
제대로 일하는 한 우리는 미래를 내다볼 필요도, 신중할 필요도, 결단을 내릴
필요도, 현명해질 필요도, 경험할 필요도, 질서를 지킬 필요도, 절약할 필요도,
절제할 필요도, 근면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과연 그런 국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해
주십시오.
  당신들은 내가 왜 그런 국가를 원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와 학식과 충분한 의료와 무제한의 국고와 무오류의 조언, 그런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국가라면 난들 왜 그런 국가를 마다하겠습니까.
  내가 당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지 그런 국가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달라는
것뿐입니다. 내가 그 일을 해주는 사람에게 상금을 걸자고 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결국 그 일에 성공한 사람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혁명을 통해서 국가를
뒤엎어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국가가 할 수 있다고 호언한 모순투성이의
계획들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 이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던 수많은 환상들 중에서 가장 괴상한
환상에 의해 우리 모두가 기만당해 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력의 고통과 결핍의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저주받은 존재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의 고통스러움을 참든지 그것이
싫다면 결핍의 고통을 받아들이든지의 양자택일만이 가능할 뿐이다. 두 가지의
고통을 모두 피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 수 있는가.
  하기야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다. 다른 사람이 생산해놓은 것을 즐기는
방법이다. 고통과 즐거움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자연적 질서하에서는 수고하는
자들이 즐거움도 가져가게 되나, 이런 체제에서는 고통을 부담하는 자와 즐거움을
누리는 자는 따로 있다. 착취를 당하는 자와 착취하는 자로 구분되는 것이다.
  노예제는 바로 이같은 원칙에 뿌리를 박고 있다. 전쟁, 폭행, 무역의 제한, 사기,
왜곡된 의사표시(misrepresentation) 등의 행동들도 물론 같은 부류에 속한다. 끔찍한
행동들이지만 그 행동들을 가능하게 한 원칙, 즉 남의 수고에 편승한다는 원칙으로
따지자면 일관성이 있는 행동임에는 분명하다. 누구든 압제자와 맞서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압제자들이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노예제도는 이제 끝나가고 있으며, 재산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천부적인 성향 때문에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약탈도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는 남아 있다. 고통스러운 것은 남에게 전가하고 좋은 것은 자기가 취하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성향은 없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이 표출되는 구체적인 형태야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압제자들은 더 이상 피압제자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양심은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국가, 또는 법이라는
것을 매개로 해서 압제가 이루어진다. 양심의 가책을 잠재우는 데에 국가만한 것이
있겠는가. 약탈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에 국가를 내세우는 것 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겠는가. 그래서 무슨 요구를 하든, 어떤 구실을 갖다붙이든
간에 모든 사람들이 국가에 호소하려고 한다. 그 말을 한번 들어보자.
  "내가 누리는 것은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 너무 작습니다. 다른 사람의 재산을
뺏어다가 내가 누린다면 균형이 맞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지요. 좀 쉽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나에게 공무원 자리를
하나 주든지, 아니면 내 경쟁자들의 발목을 묶어줄 수는 없는지요.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출연받아서 나에게 무이자로 대출해주든지, 내 아이들을 무료로 교육시켜
주든지, 나에게 보조금을 주든지, 50세 이후의 노후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도 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이 그 일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또 직접적인 약탈에 따르게
마련인 위험과 나쁜 평판을 걱정할 필요 없이 약탈의 이점을 누릴 수 있게
되겠지요."
  우리 모두가 그런 것들을 국가에게 요구하고 있지만, 국가로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추가적인 노동을 부과하지 않고서는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더 좋은 개념 규정을 하기 전까지 나는 국가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밖에 없다. 혹시 누가 아는가, 그 상이 내게 주어질지.

  국가라는 것은 만인이 만인을 등쳐먹고 사는 거대한 허구이다.

  옛날에도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노력에 편승해서 살아가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다는 사실을 내놓고 말할 수가 없다. 자기
스스로에게도 숨기고 싶어한다. 그 해결방안으로 고안해낸 것이 국가라고 하는
중재자이다. 사람들은 그런 국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도 공정하고 명예롭다는 소리를 듣는 국가에게
이르노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줄지어다."
  세상에 맙소사! 국가라는 작자는 그같이 악마적인 요구를 기꺼이 들어줄 태세를
갖추고 있다.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각료들이나 관료들도 그들의 부와 영향력이
확대되기를 원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그것이 자신들에게
가져다줄 기회를 놓칠 이유가 있겠는가. 국가는 대중들이 자신들에게 맡긴 일로부터
많은 이익이 생긴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챈다. 국가는 모든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 기회를 이용해서 국가는 자신들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떼어놓을 것이다. 그것을 이용해서 국가는 조직과 특권을 늘려갈 것이다.
대중으로부터 데어낸 자원의 압도적인 부분을 자신의 몫으로 착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대중들이 이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놀랄 정도로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포로들을 노예로 삼았던 옛날의 군인들을 야만적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어리석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원하던 것도
나들의 노력에 편승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었어도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또다른 수단을 이용해서 같은 일을
하게 해달라고 국가에게 요구하고 있다. 만인의 만인데 대한 약탈은 약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는가. 합법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진다고 해서 약탈을 약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만 하는가.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방탕한 존재 덕분에 국민
대다수의 복지가 악화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는가. 게다가 우리는 이같이 엄청난 미신을 헌법의 서문에까지 넣어 놓았다.
사람들을 교화시킬 양으로 말이다.

  프랑스는 모든 시민들을 계몽하고 그들의 도덕심과 복지를 고양시키기 위해
공화국을 세웠다.

  실체는 프랑스 국민들이다. 그런데 추상적 존재인 프랑스가 실체인 프랑스
국민들의 도덕심과 복지 등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도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기괴한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조항이
가능했겠는가. 프랑스 국민들을 위해 모든 혜택을 베풀어줄 덕망 있고 깨어 있으며,
풍요로운 존재가 프랑스 국민들 위에 서 있다고 생각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했겠는가. 프랑스 국민들 전체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는 프랑스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실제의 프랑스 국민들간에 아버지와 아들, 보호자와 피보호자,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와 같은 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가정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우리가 아버지 나라라든가, 자애로운 어머니 프랑스같이 은유적인 표현을 쓸
수도 있고 그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전문의 주어와 목적어를
뒤집어놓는다면 현재의 문장이 잘못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문을
다음과 같이 바꾼다고 해서 표현의 정확성에 흠집이 생기는가?

  프랑스국의 도덕수준과 복지수준을 더욱 고양시키기 위하여 프랑스 국민들은
공화국을 세웠다.

  이렇게 주어와 목적어를 바꾸고 난 후 헌법 전문의 가치는 어떻게 되었는가?
누구든 "어머니가 아이를 양육한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그
문장을 "아이가 어머니를 양육한다"라고 바꾸어버린다면 어찌되겠는가.
  미국헌법 전문에 나타나 있는 시민들과 정부간의 관계는 프랑스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우리들 사이의 결속력을 더욱 공공히 하고 정의를 확립하며, 나라 안의 평안과
공동의 방위를 도모하며, 모든 국민들의 복지를 증진하며,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이
자유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 미국시민들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여기에는 어떤 허구의 존재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시민들이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응석을 부릴 만한 추상적인 존재도 없다. 미국인들은 자기자신들과
자신들의 노력 이외의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형이상학적 탁상공론을 벌이기 위해서 헌법 전문의 문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국가를 의인화함으로써 나타나는 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각종 재난과 혁명과 같은 정치적 소용돌이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래왔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기 한편에는 국민들이 서 있고 다른 한편에는 국가라는 서로 별개의 존재가 서
있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주기에 여념이 없고 국민들은 국가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요구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진실은 이것이다. 즉 국가의 손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국가가 늘
국민들에게 주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가는 양손을 가지고 있다. 한손으로는
국민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뺏어다가 다른 손으로는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한손은 친절하지만 다른 한손은 거칠다. 친절한 손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쪽
손이 거친 행동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뺏어만 가고 다시 돌려주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손은 착복을 하려는 습성이 있다. 우리는 실제로 그같은
일을 보아왔다. 국민들에게 나누어준다는 명복으로 거두어가 놓고서는 그 일부, 또는
전부를 착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다. 국민들로부터 거두어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국가가 국민들에게 나누어준 적은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반드시 그럴 것이다. 따라서 국가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요구할 때 거지처럼
구걸해야 할 이유가 없다. 국가가 누군가에게 특별한 이익을 주는 행위는 반드시
사회 전체에 그것보다 더 큰 손해를 끼치게 마련이다.
  따라서 국가는 악순환의 굴레 속에 빠지게 된다. 만약 시민들의 요구를 거절하게
되면 무능하고 사악한 국가(또는 정부)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그
요구들을 들어준다면 국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하고, 베푸는 혜택보다
더 많은 손해를 끼쳐야 하며, 결국 전반적인 불만수준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따라서 국민들은 정부에게 혜택은 많이 주고 세금은 거두지 말라고 요구할 것이며
국가도 그런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게 된다. 하지만 그같이 모순된 요구나
약속은 결코 실현될 수 없다.
  결국 그같은 기대가 좌절되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이처럼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주겠다고 헤픈 약속을 하는 국가와 실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국민들 사이에 두 종류의 인간들이 끼여든다. 야심가들과
몽상가(유토피아주의자)들이다. 그들이 할 일은 뻔하다. 그들은 대중들의 귓속에다가
이런 선동적인 말을 속삭인다.
  "지금 권력을 잡은 자들이 당신들을 속이고 있소. 만약 우리가 권력을 잡게
된다면 당신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안겨줄 것이오. 그러면서도 당신들은 세금 한푼
낼 필요가 없을 것이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일단 혁명이 성공하고 나면 대중들은 새로운 집권자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해 올 것이다.
  "나에게 일자리를 주시오. 그리고 먹을 것과 구호물자와 저리융자와 무상교육의
혜택을 주시오. 식민지도 만들어야 하오. 또 세금을 거두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키시오."
  새로 탄생한 정권이라고 해서 과거의 정권과 무엇이 다를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약속을 할 수는 있지만 누구든 그것을 지킬 수는 없다. 새 정부는 자신들이
추진하는 야심찬 계획들이 결실을 맺을 때까지 시간을 벌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계획을 실천해가려 한다. 초등교육의 범위를 확장해보려고도
하고 1830년에 했던 것처럼 음료품세를 약간 내려보려고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자가당착을 피할 수가 없다. 시혜를 베풀려고 하면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야만
할 것이고, 세금을 줄이려고 한다면 시혜를 줄여야만 한다.
  이처럼 낮은 세금과 많은 시혜라는 두 가지의 약속은 항상 상충되는 관계에 있다.
이같은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요즈음처럼 빚을 지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를 미리 당겨다 쓰는 것일 뿐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조그마한 이익을
위하여 미래에 엄청나게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신용질서를
송두리째 위협하는 파산의 위험을 높여놓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지경에 처한 새 집권자들이 취할 다음의 행동은 무엇일까? 그들은 반대자들을
억압하는 일에 착수한다. 권력을 유지할 목적으로 경찰력을 재편하고 자유로운
여론을 질식시킨다. 과거에 내세웠던 약속들을 폐기하고 인기에 연연해 하지 않고
통치해나갈 것이라고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글자 그대로의 통치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다른 선동가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하나도 없다. 똑같은 환상을 팔아서 집권을
하고 똑같은 질곡에 빠져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2월 혁명이 만들어진 경위이다. 더구나 그 당시는 사회주의의
교리가 판을 치고 있던 터라 대중들이 탐닉했던 환상의 정도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심각했다. 사람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시혜와 낮은 세금부담을 공화국
정부에 요구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많이 속아왔지만, 앞으로는 절대 다시 속지 않으리라. 그러기 위해서
두눈을 부릅뜨고 있으리라.'
  이런 상황에서 당시의 임시정부가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아뿔사!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같은 상황에서 걸었던 길, 즉 시간을 벌기 위해서 약속을 남발하는 일을
그들도 예외없이 저지르고 말았다. 게다가 약속의 현실성을 더한다는 구실로 더욱
구체적인 약속들을 남발하고 말았다.
  "복지혜택을 누리고, 근로시간은 줄일 것이며, 구호물자의 공급과 저리융자,
무상교육의 범위, 농업보조금도 늘릴 것이다. 개간도 더 많이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소금과 음료와 육류와 편지에 부과되는 세금부담을 낮출 예정이다. 다음번
국회가 열리면 이와 관련된 모든 법안들이 통과될 것임을 약속한다."
  그렇게 해서 국회가 열렸다. 그러나 서로 모순되는 법안들을 통과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임시정부가 제안했던 정책안들은 하나씩 둘씩 철회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실망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뭔가 하는
시늉은 내야만 했다. 실제로 지켜진 약속도 일부 있기는 하나 많은 경우 이름만
있고 내용은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현정부는 그나마의 약속이라도 지키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세금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몇 달 있으면 새 정부의 공무원들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상속재산이나
소득이나 농업소득 등에 대해서 세금을 매기려고 할 텐데 그때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슬픈 상념에 잠겨본다. 오, 하나님, 나의 예감이 틀리기를
바라나이다. 하지만 선동가들이 이미 벌여놓은 일을 어떻게 수습하겠나이까?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발표된 몽타냐르(주4)의 마지막 선언문을 한번
읽어보시라. 약간 긴 선언문이긴 하지만 그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야 하며 동시에 되도록 세금부담은 가볍게
해야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전술은 항상 같은 내용이다. 결국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무상으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그 교육은 국민 각자가 처한 필요와 직업과 능력에 적합한 내용이 되도록 가능한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신과 동류인간들과 자기자신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또 국민 각자의 감정과 적성과 재능을 개발시켜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국민 각자의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높여 주고, 자신의 관심이 무엇인지,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어야 한다.
  국가는 국민 각자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강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국가는 국민들에게 문학과 예술, 선조들의 지적 유산, 그리고 모든 지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다주는 재난과 화재와 홍수 등(이 하찮은
'등'이라는 단어 속에 얼마나 엄청난 것들이 포함되는지 아는가?)으로부터의 피해를
보상해주어야 한다.
  국가는 자본과 노동간의 관계에 개입해야 하며 대출금의 분배에도 관여해야 한다.
  국가는 농업을 장려하고, 또 외국 농산물로부터 보호해주어야 한다.
  국가는 철도와 운하와 광산을 국유화해야 한다. 그리고 전문적인 행정능력을
이용해서 그것을 잘 관리해야 한다.
  국가는 유망기업을 찾아내어 장려해주고 그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국가는 대출자금의 적정한 분배에 관여함으로써 산업과
농업의 성공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국가는 오늘날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간에 위의 정책들을 밀고
나가야만 한다. 그래서 외국에 대해서는 늘 위협적인 태도를 유지해야만 한다.

  성스러운 연대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그리고 공화국 프랑스의 선조들과도
연결되어 있는 우리 정책발안자들은 과거의 전제정권들이 만들어놓은 국가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우리가 누리고 있는 희망을 압제에 시달리던 국민들을 대신해서
다른 나라에도 전파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영광스런 군대가 다시 한 번
자유의 군대가 되기를 갈망한다.

  몽타냐르 정부하에서는 친절한 한쪽 손이 많은 시혜를 베푸느라고 몹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주머니로부터
세금을 거두느라고 거친 다른쪽 손도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기만당하지 마라. 선동가들은 당신들에게 거친 손은 숨긴 채 늘
친절한 다른쪽 손만을 보여준다. 만약 두손을 동시에 아 보여주어야 한다면
선동가들이 설 자리는 없어지고 만다.
  만약 그들의 말대로만 된다면 그들의 통치기간은 납세자들에게 축제의 나날들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금은 사치품에만 부과될 것이다. 생활필수품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남아도는 돈만을 거두어다가 시혜를 퍼부어준다는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몽타냐르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세금을 내는 일은 더 이상 강제성을 띄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동포애에 겨워
세금을 내게 될 것이다."
  아, 멋진 날들이여!
  나는 사람들이 유행처럼 동포애라는 말을 아무 데나 갖다붙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금 거두는 일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이 글은 그들의
제안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소금이나 음료품 등의 생활필수품에 부과되는 모든 세금을 폐지할 것을
제안한다.
  부동산세와 물품입시세와 면허발급 수수료의 전면 개혁을 요구한다.
  서류와 경비를 줄여서 인지세를 낮춰라.

  부동산세와 물품입시세와 면허수수료와 인지세와 소금세와 음료세와 우편세 등
모든 정부의 수입이 사라져야 한다. 이 신사분들은 거친 한쪽 손은 숨기고 친절한
다른쪽 손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비밀을 알아채고 말았다.
  정말 그렇다. 생각이 있는 독자라면 내 질문에 답을 해보라. 그들의 생각을
어리석다고, 아니 위험할 정도로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가에 내는
것은 없이 많은 것을 받기만 해야 돼'라는 식의 모순된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데,
어찌 혁명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몽타냐르들이 정권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남발한 약속들의 희생제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믿지 못하겠는가.
  시민들이여, 이것만은 기억해두시오. 역사에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두 가지
종류의 정치체제가 등장하오. 그리고 두 체제 다 그럴듯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소. 그
중 하나는 국가의 역할이 큰 체제요. 국가가 많은 것을 베풀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뺏어가기도 하는 체제요. 반면 이 두 가지가 다 최소한도로 억제된
체제도 있소. 우리는 이 두 가지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오.
  물론 이것 말로 제3의 체제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기는 하오.
거두어가지는 않고 주기는 하는 체제 말이오. 하지만 그처럼 어처구니없고
모순덩어리이며 위험하기까지 한 주장이 어디 있겠소.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다른 모든 형태의 정부들을 비난하고 당신들로 하여금 그런 정부를 뒤집어엎으라고
부추기지만 결국 그들은 당신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자기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오.
  우리의 생각을 말할 것 같으면, 국가란 공통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조직된
경찰력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오. 억압과 상호약탈의 수단이 아니라 국민 각자에게
노력의 결과를 지켜주고, 정의와 안녕을 보장해주는 경찰력 말이오.(주5)
@ff
  주

  1. 1848년 9월 25일판 'Journal de debats'에 실렸던 내용. 이 글이 독특한 형태로
씌어진 것은 그 때문임. 편집자 주.
  2. 이 구절은 'Bastiat'가 'Lamartine'의 발언을 인용한 것임. 'Bastiat'는 이 구절

제2장 "법"에서도 인용하고 있다. 편집자 주.
  3. 식품, 사료, 주류, 연료, 건축자재 등을 해당 자치단체에 반입하는 대가로
부과되는 지방세. 영역자 주.
  4. 1848년 당시 사회민주당의 일원이었음. 물론 그 이름 자체는 프랑스혁명 당시
'Danton'과 'Robespierre'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호전적인 산악당(Mountain Party)의
이름을 좇아 지어졌다.
  5. 'Economic Harmonies'의 제17장을 볼 것. 편집자 주.
@ff
    바스티아의 일생(주1)

  끌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Claude Frederic Bastiat)는 가장 탁월한 자유의 수호자
중 한 사람이었다. 뛰어난 경제학자들이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던 하이에크(F. A. Hayek)는 그를 천재적인 경제평론가라고 평가했다.
오스트리아학파의 거장이었던 미제스(Ludwig v. Mises)는 바스티아의 저작들을
불후의 명작이라고 평했다.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로스바드(M. Rothbard)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스티아는 탁월한 학자였다. 그가 써낸 재기에 넘치는 글들은 모든 형태의
보호무역주의, 정부개입이나 지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논리로 남아 있다. 그는
진정으로 재기 있고 자유로운 자유시장의 수호자였다."

  바스티아는 1801년 6월 30일 프랑스 남서부의 베이요느(Bayonne)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중세풍의 전원지역으로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금융업을 하면서 스페인, 푸르투갈 등에 수출도 하고 있었다. 바스티아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다. 어머니는 일곱 살에, 그리고 아버지는 2년 뒤인 아홉 살에
세상을 떠난다. 그 후 바스티아는 친할아버지의 손에 자란다.

  어린 시절 베이요느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나중에 소레제(Soreze)에 있는
베네딕틴대학으로 진학한다. 이 학교는 영국, 그리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미국 등 여러 나라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영어와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익혔으며, 문학과 철학을 배웠다.

  17세 되던 해에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에 취직한다.
거기에서 그는 장사 자체보다는 상업이 사람들을 문명화 시켜가는 과정이라든가,
법이 사람들의 이익을 참해하는 현상들에 관심을 두었다. 예를 들어 1816년 새로운
관세법이 시행된 결과 베이요느 일원의 창고들이 비고 주민들도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스티아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듯하다.

  비록 짧은 동안이었지만 바스티아는 영국에서 근무할 기회를 가졌었다. 당시의
직장상사가 그에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권해 읽게 되었다. 그 책을 통해 그는
경제에 관한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789년 첫 번째 저작물을 발표했는데, 언론의 자유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후 'La
Decade Philosophique'라는 정기간행물의 공동설립자가 되었고, 1799년 혁명의
이념을 수용한 그는 호민관의 직책을 맡았다.

  바스티아에게 학문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프랑스와 유럽에
자유시장경제의 이념을 다시 소생시킨 세이(Jean Paptiste Say)였다. 그 이전에도
튜르고(Turgot)를 비롯한 중농주의 학자들(Physiocarats)이 자유 경제의 이론을
제창하였으나 절대왕정이나 농지소유 귀족의 지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자유주의라고는 볼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과도 양립할 수가 없었다.
그들과는 달리 세이는 사유재산과 자유기업, 개인의 주도권이 번영의 기초임을
주장한다.

  1803년 세이의 정치경제학 강론(당시의 정치경제학이란 오늘날로 치면
경제학이다)이 출간되었다. 세이는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을 부인하고 그대신
상품의 가치는 소비자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이론을 제창하였다. 또 영국의
경제학자였던 맬더스(T. Malthus)의 비관론적 이론에 반대해서 자유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는 영원한 번영을 누릴 것임을 예견했다. 그는 대규모의 정부지출과 징병제,
노예제 등에 대해서도 격렬히 반대했다. 세이의 이같은 이론은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바스티아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824년 바스티아는 그의 고향을 떠나 파리로 가고 싶어했으나 할아버지의 만류로
고향에서 농장을 경영해야만 했다. 그러나 농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이웃에 사는 코드로이라는 사람과
사귀게 된다. 변호사였던 그도 책 읽는 것을 즐겨, 자기가 본 책을 바스티아에게
권하기도 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된다. 당초에 코드로이는 루소를 추종하는
사회주의자였으나 바스티아의 영향을 받아 고전적 자유주의자로 전향하게 된다.
그들의 우정은 20년 간이나 지속된다.

  바스티아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830년에 결혼을 하지만,
거의 독신과 같은 생활을 계속했으며 그의 부인도 친정식구들과의 생활을 계속한다.
그런데도 어쨌든 아들 하나는 두었다.

  1830년 7월 26일 샤를르 10세는 언론자유를 폐지하고 상공회의소를 폐지했으며,
중산층의 투표권을 박탈한 후 귀족들만으로 의회를 재구성하려고 했다. 그 결과
혁명이 일어났고 왕은 물러났다. 이때부터 바스티아의 공인생활이 시작된다. 혁명
직후 그는 무그론(Mugron)의 판사로 임명되었다가 란데스(Landes) 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된다.
  1844년 9월 여러 번 고배를 마신 끝에 (Journal des economistes)에 첫 번째의
논문이 실리게 된다.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프랑스와 양국 모두에게 나쁜 것이라는
내용의 논문이었는데, 이 논문은 선풍적인 반응을 몰고 온다. 생시몽주의자였던
당시의 유명한 경제학교수 셰발리에까지도 그의 논물을 읽은 훈 자유무역주의자로
전향했다고 밝힐 정도였다. 그 후로도 같은 잡지에 계속 논문을 발표했으며 그
가운데 22편을 모아서 'Sophisme Economiques'(Economic Sophism)로 출간을
하기에 이른다. 1845년의 일이다. 3년 후에는 그 이후에 발표된 17편의 논문으로
같은 제목의 제2권이 간행된다. 이 책들은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1845년이 끝나갈 무렵, 바스티아는 프랑스와 벨기에간의 자유무역을 주창하는
보르도 자유무역협회의 창립에 관여한다. 1846년 5월에는 그 여세를 몰아 파리에서
프랑스 자유무역협회를 창립한다. 같은 해 11월에는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주간지 'Le
Libre-Exchange'를 창간한다. 바스티아의 이같은 운동은 벨기에,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지의 자유무역 옹호론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1847년 프랑스 정부는
기존 관세의 절반 정도를 폐기하기 위한 법률개정안을 제출하나 결국
보호주의자들의 로비에 의해서 무산되고 만다. 그같은 사태에 실망한 나머지 그해
4월 자유무역협회도 해체되고, 'Le Libre-Exchange'도 폐간되어 버린다.

  1848년 2월 시민들이 부패한 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를 일으킨다. 그 과정에서
군인들이 20명의 공화주의자들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왕이 퇴위하기에
이른다. 급기야 프랑스 하원은 프랑스가 왕정을 포기하고 공화국임을 선언한다.
사회주의자였던 루이 블랑을 포함한 10명의 공화주의자들이 제헌의회가 구성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어간다. 같은 해 4월 바스티아는 보통선거에 의해서 제헌의
회의 의원으로 선출된다. 같은 해 5월 불만을 품은 국영작업장의 근로자들이
제헌의회가 열리고 있던 의사당을 점령하고 의원들을 쫓아내는 사건이 발생한다.
제헌의회는 계엄령을 내리고 약 2만 명에 달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이들과 군대간의 충돌이 빚어진 결과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1만 1천
명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1849년 제헌의회는 입법의회에 그 역할을 넘겨준다. 바스티아도 다시 입법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정위원회의 부의장이 된다. 여기서도
그는 정부지출의 삭감과 낮은 조세부담, 그리고 자유무역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나간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의 무지와 편협한 이기주의로 인해 그의 주장은
번번히 좌절되고 만다.

  1850년 6월, 지병인 폐병 때문에 그는 무그론(Mugron)으로 돌아간다. 거기에서
그의 저작 중 가장 명작인 "법"(이 책의 제2장)을 집필한다. 그리고 슘페터의 혹명을
받았던 'Harmonies Ecomomiques' 제1권의 집필을 마친다. 하지만 결국 제2권은
끝내 마치지 못한다. 같은 해 의사의 권유로 로마로 옮겨가지만, 1850년 12월 24일,
병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그는 죽으면서 한마디 말을
남겼다. '진리(la verite)'였다.
@ff
  주

  1. Jim Powell, Frederic Bastiat, "Ingenious Champion fro liberty and
Peace"(Freeman: Ideas on Liberty, June, 1997; 370__82)를 요약, 재구성한 내용.
@ff
   

 역자후기

  이 책은 미국경제교육재단(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에서 영문판으로
출간한 "바스티아 논문선집(Selected Essays on Political Economy)"의 제1장에서
제5장까지를 번역한 내용이다.
  씌어진 지가 1백년도 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들이 마치 바스티아가
살아나서 무지한 오늘날의 정치가들이나 학자들을 꾸짖는 듯 생생한 느낌을 준다.
단지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정부개입주의자라든가, 지나치게 시장의 실패를 강조하는
사람들 정도로 바꾸어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지적 수준이
바스티아 당시의 프랑스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재기가 뛰어났던 학자였던 만큼 바스티아의 글들은 유머와 냉소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도 글자 한 자 한자의 직역보다는 그같은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 저자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들이
왜곡되거나 빠지지는 않았을지 걱정스럽다.
  이 책의 번역을 권해주고 늦어지는 마감일을 참아내 주신 자유기업센터의 공병호
소장에게 감사를 드린다. 권오성씨는 초역된 원고의 교정을 꼼꼼히 보아주었다.
출판을 맡은 자유기업센터의 신재화 실장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김정호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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