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원적 의미
기독교 변증학의 주된 임무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변증학(apologetics)은 ‘사과하다’라는 말의 뜻이 함의된 ‘어폴로지’(to apology)가 아니라 ‘변호하다’(to defend)라는 변론의 의미다. 따라서 우리는 헬라어 ‘어폴로기아’(apologia)라는 단어는 행위나 절차를 ‘변호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어폴로기아의 말은 베드로전서 3장 15절, 사도행전 22장 1절, 고린도전서 9장 3절, 빌립보서 1장 7절 그리고 빌립보서 1장 16절에서 찾을 수 있다.
벧전 3: 16—“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reason)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gentleness)와 두려움(respect)으로 하고” (But in your hearts set apart Christ as Lord. Always be prepared to give an answer to everyone who asks you to give the reason for the hope that you have. But do this with gentleness and respect).
행전 22: 1—“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defense)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Brothers and fathers, listen now to my defense).
고전 9: 3-4—“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my defense)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This is my defense to those who sit in judgement on me. Don't we have the right to food and drink). 발명이란 변명하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무엇인가 문제를 제기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믿음을 변호하는 것을 말한다.
빌1: 7—“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defending)과 확정함(confirm!ing)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It is right for me to feel this way about all of you, since I have you in my heart, for whether I am in chains or defending and confirm!ing of this).
빌1: 16—“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for the defense)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The latter do so in love, knowing that I am put here for the defense of the gospel)
2. 기독교 변증학의 필요성
왜 기독교 변증학이 필요한가. 다른 방식은 없는가. 우리는 기독교 변증학이 갖는 필요성을 논의하기로 한다.
첫째, 기독교 변증학은 공격적 언행이나 열성적 신앙에 의해서 특징짓지 않는다. 기독교 변증학은 이 변론이라는 의미에서 시작했고, 그것은 바울이 지적하듯이 ‘온유와 존경으로’ 행하라는 충고처럼 단지 공격하는 답변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적극적인 확증이나 논증의 형식을 가지고 답하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보인다.
둘째, 기독교 변증학은 맹목적이고도 맹신적 신앙을 거부한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맹목적이고도 맹신적 형태의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에 근거된 합리적 신앙이다. 마태는 이렇게 표현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Jesus replied: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뜻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는 말에서 뜻이란 정신 혹은 이성을 의미한다. 감정과 대립되는 어휘로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감정에 휩싸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사랑하라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의미는 헬라어 ‘누스’(nous-mind), 즉 이성을 가지고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에는 언제나 지(mind), 정(emotion) 그리고 의(will)의 삼중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면, 우리에게 합리적 신앙은 매우 중요하다고 보인다. 폴 리틀이 적절히 지적하듯이, “기독교 신앙은 증거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합리적 신앙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거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셋째, 기독교 변증학은 기독교를 변론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진리라는 명제에서 그것을 변호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론을 위해 우리는 논증의 형식을 배워야 한다. 변증학은 이런 점에서 논리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증거에 의한 논증이든지, 아니면 경험에 의한 증거이든지 우리는 어떤 근거에서 기독교가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증을 전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진리란 목소리의 크기에 의해서 좌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요일1: 1-3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점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그리고 사도행전 1장 1-3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convincing proofs)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누가복음 1장 1-2절에서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fact)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사실 그대로의 진술의 의미)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넷째, 기독교 변증학은 철학적 방식을 받아들인다. 로날드 내쉬는 이렇게 표현한다.
“세계관의 많은 요소는 본성상 철학적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철학의 중요성을 좀 더 의식할 필요가 있다. 철학과 종교는 많은 경우에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둘 다 같은 문제를 다룬다. 예를 들어 존재한다는 것(존재론, 형이상학)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윤리학)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아는가(인식론)에 관한 물음이 있다. 철학은 중요하다. 기독교 세계관은 철학이나 관념 세계와 내적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철학은 중요하다. 기독교에 반대하는 체계가 철학의 방법과 논증을 사용한다.” (《이성과 신앙》, p. 36.)
다섯째, 기독교 변증학은 신앙의 반지성적 태도에 저항한다. 모든 지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못된 믿음과 신념 혹은 신앙에 대항하는 것이 기독교 지성의 임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스며든 것 가운데 하나인 영성을 위해 지성을 포기하는 행위에 대항하여야 한다. 영성을 위해 지성을 포기하는 행위는 마치 배교하는 행위와 흡사하거나 아니면 기독교 신앙을 반쪽 진리로 만들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진 에드워드 비스는 <지성으로의 초대>에서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인은 지성을 계발하고 사용해야 한다. 인간의 정신적 기능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다. 지식을 추구하고, 학문을 닦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기독교적 소명을 이루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지성이란 사고하고, 발견하고, 관찰하며, 상상하고, 의문을 품는 속성이자 능력이다. 이 같은 지성은 영성을 위해서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인물들은 지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열정만으로 세계를 변화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이다. 그들이 영성만을 정말로 추구한 사람들이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의 위인들이 좋은 예들이 될 수 있다. 모세는 어떠했을까. 사도행전 7장 22절의 보도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했노라.” 애굽 교육은 당시 시대에 앞선 선진교육이었다. 그가 앞선 시대의 학술을 배웠기에 하나님의 사역에 도움이 되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흔해 빠진 이야기로 생각하고 사자 굴에 빠진 다니엘과 풀무 불 가운데 던져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용맹한 신앙적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들의 신앙이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너무나 잘 기억한다. 하지만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궁궐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히브리 청년들로서 바벨론의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대학생들이었다. 학문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우리시대에 만연해 있는 사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성을 멀리하는 것이다. 시대를 선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속적 학문의 필요성을 멀리하고 신앙만이라고 주장하는, 그것도 매우 맹목적이고 맹신적인 신앙의 형태로만 따르려고 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 변증학은 기독교 지성을 강조하는 학문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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