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는 같은 해에 나온 강연록 <시간과 타자>(1947)와 함께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 출발했지만 바야흐로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을 구축하기 시작한 레비나스의 '야심작'이다. 비록 아담한 판형에 분량도 100쪽이 조금 넘을 정도로 소략하지만(영역본은 100쪽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20세기의 '철학사적 사건'이라 명명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책이기에 그러하다(두 사람의 대결을 제대로 관전하기 위해선, 따라서 하이데거에 대한 예비적인 독해가 필요하다. 하이데거가 얼마나 강자인가를 확인해두어야 이 '도전장'의 의미가 음미될 수 있다. 가서 하이데거에게 얻어맞는 일은 각자가 해보시길).
잘 알려진 바대로, '존재자에서 존재로'(하이데거)에 대항하는 레비나스의 구호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이다. <존재와 시간>이 '철학사적 사건'이라면 '논리적으로 볼 때' <존재에서 존재자로> 또한 그에 버금하는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물론 팜플렛적인 저작으로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레비나스 사건'의 프로그램적 윤곽 정도를 그리고 있을 따름이며(그러니까 이건 '전체주의' 철학의 거두 하이데거에 던지는 레비나스의 잽이다), '사건'의 전말이 다 드러나게 되는 것은 <전체성과 무한>(1961)에 와서이다(이게 어퍼커트이다).
<전체성과 무한>은 아직 우리에게 번역/소개되지 않은 관계로(물론 해설들은 차고 넘친다), 우선은 레비나스의 잽만 맛보기로 한다. 그런 생각으로 집어든 것이 오래전에 사둔 국역본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이다. 당시에 내겐 비교해볼 만한 영역본이나 러시아어본이 없었기 때문에 독서는 자연스레 미루어졌는데, 어느덧 3년전이다. 한데, 이번에 주문받은 글도 있고 해서 (없는 시간이지만) 이참에 완독해보리라 책을 펼쳤다. 알폰소 링기스의 영역본(3판, 1995)과 러시아어본(2000)도 백업으로 준비하고서.
한데, 분량상 수월하게 읽을 줄 알았던 국역본은 초반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인문 번역서의 첫페이지부터 오역이 등장하는 건 절대로 드문 일이 아니지만(차라리 그런 게 고마운 일이긴 하다. 책에 대한 '판단'을 빨리 할 수 있도록 해주니까), 이 공들인 번역서에서(역자는 부록에서 번역어에 대한 해설과 일람표까지 제시하고 원서의 오기까지도 교정하고 있다) 어떻게 첫문장에서부터 오역이 튀오나올 수 있는지 정말 미스터리하다('철학책'들이 '추리소설'과 얼마나 동종적인가를 새삼 확인시켜주는 역자의 고난도 유머가 아닌가란 생각도 했다). 서론의 그 첫문장이다.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 개별자, 유, 집단, 신 - 이런 것들은 명사들 및 그것들의 존재 사건 또는 존재 활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인데 - 사이의 구별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19쪽)
단어들에 병기된 불어는 인용에서 삭제했는데, 중간의 삽입절까지 삭제하면 이 문장의 요체는 이렇게 된다: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 개별자, 유, 집단, 신 사이의 구별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여기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번역문에 따르면, (1)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 (2)개별자, 유, 집단, 신 사이의 구별이다. 그리고, 조금 주의깊은 독자라면, 구문적으로 병행적인 이 두 가지 구별이 실상 같은 사실을 반복진술하는 것일 터이기에 뭔가 아귀가 안 맞는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1)에서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은 다시 말해서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구별이지만, (2)에서 나열된 "개별자, 유, 집단, 신"들은 모두 '존재자'이므로 이건 그냥 존재자들 사이의 구별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두 가지 구별은 같지 않으며, '존재자들 사이의 구별'은 하이데거나 레비나스에게서 상대적으로 아무런 철학적 의의도 갖지 않는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영역본을 옮겨오면 이렇다(집에 놔두고 온 불어본의 경우도 내가 아는 한 같은 내용이다): "The distinction between that which exists and its existence itself, between the individual, the genus, the collective, God, beings designated by substantives, and the event or act of their existence, imposes ifself upon philosophical reflection."(17쪽)
이 문장의 통사적 핵심은 두 차례 등장하는 'between A and B' 구문에 있다. 해서, "A와 B 사이의 구별, 즉 C와 D 사이의 구별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는 게 문장의 내용이다. 국역본의 역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여기서 두번째 'and'이다. 그걸 연결된 수식어구로 본 것(그래서 '및'이라고 옮긴 것이리라). 영어본 문장에서 수식어구를 삭제하면 이렇게 된다: "The distinction between that which exists and its existence itself, between the individual, the genus, the collective, God and the event or act of their existence, imposes ifself upon philosophical reflection."
'존재하는 것(ce qui existe; that which exists)'이 소위 '존재자(existant; existent/being)'이다. 즉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존재(불어, 영어로 existence)'라는 건 존재자들의 '존재함이라는 사건 혹은 행위'(existing; Being)를 가리킨다. 이 '존재'를 흔히 우리말로 '있음'이라고도 옮기는데, 나는 '있다는 것'으로도 새긴다. 그러니까 '있는 것들'과 그것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 사이의 구별이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구별이며, 이 둘 사이의 차이, 즉 (하이데거의 전매특허이기도 한) '존재론적 차이'가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의 가장 중요한 기여로 꼽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덧붙이자면, 하이데거에게서는 이 존재자(=있는 것들)와 존재(=있음)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항상 '존재자의 존재'이다. 반면에 레비나스는 그 둘 간의 분리를 가정한다. 소위 '존재자 없는 존재' 그것이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점이다.
어쨌든 첫문장이 왜 오역인지는 확인한 셈이다. 사실, 영역본이나 러시아어본과 대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나는 왜 이런 '실수'가 빚어졌는지 궁금해서 불어본(1947년판이었다)을 도서관에서 복사하기까지 했다. 한데, 원서라고 해서 특별히 미스터리한 구석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내가 갖게 된 결론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역자나 교정자도 책을 그다지 꼼꼼하게 읽지 않는다는 것. 먹고 살 만한 고상한 독자들은 번역서를 외면하며 일반독자들이라면 이런 고상한 철학서는 일찌감치 독서 목록에서 제외된다.
하여, 이 책이 작년에 학술원 주관으로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데는 그런 이유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정도 흠이라면 문제삼을 만하지 않다는 판단을 심사위원들이 했었는지 모르겠지만(나는 그보다는 아무도 읽지 않았을 거라는 데 내기를 걸겠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대한민국 학술원은 우리의 학술 수준을 대단히 얕잡아보고 있음에 틀림없다(일리가 없지는 않으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적어도 체면이 있지 않은가?). 왜냐면 오역은 이 첫문장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처음 이런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나름대로 '옥에 티'를 발견한 거라 생각하여 부듯했다: "존재 안의 이 자리는 현재의 노동이라는 주제로 제한된다."(9쪽) 이 대목의 영역은 "The theme of the present work is limited to this position in Being."(15쪽)이고, "이 책의 주제는 존재 안의 이러한 자리로 한정된다." 정도의 뜻이다. 'present work'를 '현재의 노동'으로 옮긴 것인데(역자는 불어의 'travail'를 번역 일람표대로 '노동'이라 옮겼다! 한데, 다른 대목들에선 '연구'라고 옮기기도 했으므로 역자가 문맥을 잘못 본 것이라고 할 밖에) 번역이라는 노동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가를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그렇게 한번 웃으면서 지나갔지만, 막상 서론의 첫문장과 대면하니까 이게 웃을 일이 아니었다. 이 국역본이 런닝 바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전혀 아니며 중무장을 요구한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에(이젠 조금이라도 뜻이 들어오지 않으면, 불어본과 다른 두 번역본을 뒤적여야 한다).
서론의 25쪽도 그런 대목이다. '목적을 향한 탈자태'(영역은 'toward the end')에서 'fin'을 '목적'이라 옮긴 건 '유한성'을 다루고 있는 문맥상 '종말'이 더 적절했을 거라는 건 아쉬움이지만, "불안 없는 존재란 무한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은 모순이 아니다."라는 번역문은 유감이다. 영역은 "A being without anxiety would be an infinite being - but that concept is self-contadictory."(20쪽)
이 대목의 불어문장은 내가 보기에 가정법 문장이고, 러시아어본도 가정법으로 옮겼지만("만약에 이 개념이 모순이 아니라면") 영역본과 국역본은 직설법 문장으로 바꿔 옮겼다. 그런데, 뜻은 정반대이다. 영역본에 따르면,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은 자기모순적이며, 국역본에 따르면 '모순이 아니다'. 역자가 참고했을 것으로 보이는 독역본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읽은 불어본과 러시아어본, 영역본은 모두 같은 뜻이며 '무한한 존재(infinite l'être)'를 개념적으론 모순형용이라고 진술한다. 그건 내가 보기엔 '무한한 존재자'라고 해야 한다.
우리말 '존재'도 그렇지만, 불어의 'l'être'도 모든 문맥에서 하이데거의 'Sein'에 상응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사실 역자도 "존재라고 번역하는 l'être가 문맥에 따라 '존재자'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두기 바란다"(175쪽)고 적고 있지 않은가? "대부분 문맥상 어떤 뜻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물론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구별은 단어상으로는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다(레비나스는 어감상의 이유로 기존의 역어 대신에 'existence/existant'를 사용함으로써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다). 그러한 혼란은 영역본 등의 다른 번역본들에서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읽은 바 이 대목의 다른 번역들은 국역본을 지지하지 않는다. 국역본을 내가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보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번역 작업은 '번역자에서 번역으로' 이행하지만, 이 레비나스 국역본은 부득불 '번역에서 번역자로' 관심을 돌리게 한다. '신뢰할 수 없는 번역'과 '신뢰할 만한 번역자'(그는 같은 세대의 훌륭한 인문학자이면서 경탄할 만한 논저들의 저자이다) 사이에서 나는 잠시 길을 잃는다. 이 '미스터리 극장'에서...
06. 02. 20.
P.S. 일견 단순해 보이는 오역들이어서 나는 2쇄 이후에 번역문이 혹 수정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구내서점에 가보았지만 재고가 없었다(내가 갖고 있는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1판 1쇄이다). 혹 출간 직후의 서평들에서 이러한 일부 오역들이 지적되지 않았을까도 싶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가까이에서 찾을 수 없기에 일단 이 번역서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올려둔다.
P.S.2. 충실한 역주와 해제 등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모범적인 번역의 사례로 꼽힐 만하지만, 이 책의 '번역원칙' 한 가지는 나로선 불만스럽다. 그건 'existence'와 'existant'의 역어로서의 '존재' '존재자'에 대해서는 항상 원문을 병기해준다는 원칙이다. 즉, 본문에서는 항상 '존재(existence)'와 '존재자(existant)'로 기재된 형태만을 만나볼 수 있다. 두 용어는 레비나스 자신이 하이데거의 '존재(Sein)'와 '존재자(Seindes)'의 역어로 채택한다고 밝힌 바 있고, 역자 또한 이를 분명하게 언급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그렇다면 같은 개념인 etant/l'être와 혼동의 여지가 없는 거 아닌가?) 매번 원문을 병기해준다는 것은 '원문에의 충실성'이라는 강박관념의 소산으로 보인다. 덕분에 훼손된 건 우리말 번역문의 말끔함이다. '존재'/'존재자'란 우리말 역어가 그렇게 못 미덥다면, 그냥 원문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아무리 '타인의 취향'이라고 해도 동감할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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