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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학

교회란 무엇인가?

by 이덕휴-dhleepaul 2019. 10. 31.


      Ⅰ. 교회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교회를 뭘로 보느냐? 물로 보느냐? 아니면 불로 보느냐? 아니면 돌, 반석으로 보느냐? 여러분이 "교회"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이미지의 시대에 먼저 우리가 떠오르는 이미지로부터 출발하여 교회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대개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할 때, 먼저 교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건물을 떠올린다. 교인들의 생활이 주로 교회 건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 하면 "교회 건물"을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교회는 일차적으로 건물, 장소가 아니다. 건물로서의 교회는 "교회당" 혹은 "예배당"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야 한다. 교회를 교회당과 동일시하게 되면, 물론 교회 건물에 대한 애정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교회당 건물을 떠나 있으면 교인들이 마치 교회 밖에 있는 듯이 착각하기 쉽게 만든다. 어디든지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바로 그곳이 교회일 텐데 말이다(마 18:20).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지은 건물 안에 갇혀 계시겠으며, 거기서만 예배를 받으시겠는가? 아마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예배와 생활을 따로 생각하고, 이중적인 삶을 잘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대개가 가정이나 동굴 같은 곳(카타콤)에서 모였고, 313년에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아 공적인 기관(공회)이 된 후로부터 비로소 교회의 건물은 공적인 장소로서 화려하게 지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한국의 실정에서도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은 상당한 경비가 들어가고 좁은 공간에 교회가 지나치게 밀집해 있으므로, 앞으로는 "건물이 없는 교회"를 심각학 고려해 보아야 한다.

      건물 다음으로 "교회"를 연상케 하는 것은 대개 "성도들의 교제"이다. 사도신경에서 고백되고 있듯이,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는다. 성도의 교제로서의 교회상은 교회 건물로서의 교회상보다는 훨씬 건전한 것이다. 건물이 있든 말든, 성도가 모인 곳에 바로 교회가 형성된다. 그래서 예수원의 토레이(Torey, 대천덕) 신부는 교회(敎會)라는 용어를 교회(交會)로 고쳐부를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 카톨릭 교회가 제도로서의 교회와 함께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 건물을 강조해 왔다면, 개신교회는 제도나 건물보다는 신앙하는 자들의 모임을 강조해 왔다.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에 의하면, 교회는 제도나 건물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 '아우그스부르크 고백신조'(Confession Augustanna: 1530년에 채택된 루터교회의 신앙고백) 제7항은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항상 하나의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존속하는데, 그것은 모든 신도들의 모임이며, 거기에서는 복음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거룩한 성례가 복음에 따라 집행된다고 가르친다(H. Steubing[Hg.], Bekenntnisse der Kirche, Wuppertal 1985, 42.). 두 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 그분의 영과 숨결을 받아들이는 그곳에 교회가 있다(K. Barth, Verheißung und Verantwortung der christlichen Gemeinde im heutigen Zeitgeschehen, 1945.). 개신교회의 교회관은 로마 카톨릭 교회관에 대한 불가피한 교정이었다. 그곳에는 종종 신앙보다 제도가, 믿는 신앙인들보다 서임을 받은 성직자가 우선권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맞서 개신교회는 성도들의 사귐(Communio Sanctorum)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교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갱신하는 주체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고백과 구체적인 순종이 없는 신앙인들의 모임은 하나의 인간적인 집단, 즉 종교심이 강한 자들의 자발적인 집단일 수 밖에 없다. 교회는 특정한 인물이나 전통, 같은 종교 성향 때문에 결합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단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님이시다"는 고백은 특히 히틀러의 교회 장악에 저항하며 독일 고백교회가 기초하였던 '바르멘 신학선언'(1934년, 칼 바르트가 기초함)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바르멘 총회가 소집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님이 되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바르멘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님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천명함으로써, 오래 동안 잊혀졌던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을 회복하여 주었다(이신건, 칼 바르트의 교회론, 136쪽 이하 참조).

      교회는 종교적인 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즉 그리스도의 임재와 통치의 영역이다. 바로 이 점을 분명히 고백함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이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그러나 이 세상을 도피하지 않고 이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공동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사는 대안 공동체(G. 로핑크, 예수는 어던 공동체를 원하셨는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Ⅱ. 성서의 교회론적 용어

       1. 구약성서의 교회론적 용어

       신약성서에서 교회를 지칭하는 보편적인 용어는 에클레시아(ecclesia)이다. 이와 상응하는 구약성서의 교회론적 용어는 카할(qahal: 콜[소리]에서 유래하여, "모임을 위해 부르다"는 뜻을 지님)이다. 70명의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은 구약성서의 카할을 약 100번 이상 에클레시아로 번역하고, 35번 시나고그(회당/함께 모으다)로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카할이 헬라어 에클레시아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히브리어 "카할"은 123번 나오는데, 그 중에서 73번은 에클레시아로 번역되고, 35번은 시나고그로 번역되었다. 구약성서 앞 부분에서 카할은 숫자와 목적과 관계 없이 그저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하였으나(창 49:6, 민 22:4), 점차로 이스라엘의 모임을 뜻하는 단어로 보편화되었다(출 16:1, 민 10:3, 14:5, 16:2 등).  

      대개의 경우 카할은 야훼를 예배하기 위한 모임이었다(미 16:1, 욜 2:16, 시 22:23, 35:18, 40:9-10, 89:5, 107:32, 149:1). 신명기에서 카할은 율법을 수여받기 위해 모인 이스라엘(5:22, 9:10, 10:4, 18:16), 예배하는 모임(23:3-4,9)을 지칭하고 있다(K.Giles, 홍성희 역, 신약성경의 교회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46ff, 341ff). 그 밖에도 카할은 전쟁을 준비하는 모임을 지칭하였으며, 율법과 풍습의 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N.A.Dahl, Dsa Volk Gottes, Darmstadt, 1963, 6ff).

        카할 외에도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의 계약의 백성으로서 지속하는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용어인 에다(edah : 지정하다, 모이다, 만나다는 뜻을 지닌 jaad에서 유래함)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주로 사제(P) 문서에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편이며, 그 외에는 매우 드물게 나온다(시편:10회, 렘 6:18, 호 7:12)에 조금 나온다. 에다는 예배와 율법 공동체만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를 뜻하기도 한다(L. Coenen hg., Theologische Begriffslexikon zum NT, B2. R. Brockhaus Wuppertal 1983, 786). 어떤 학자들은 에다가 카할의 동의어로서 계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종종 카할과 에다는 같은 의미를 지니는 단어로 나타나며, 종종 카할이 에다를 대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하지만 카할의 의미가 점차로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후기에 와서, 특히 신명기와 역대기에서 에다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 같다. 쿰란 문헌 속에서도 카할과 에다, 모두가 발견되는데, 에다가 좀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신약성경의 교회론, 46ff, 341ff).  

               

      2. 신약성서의 교회론적 용어

      에클레시아(ecclesia)는 원래 그리스 도시 국가(폴리스) 시민들의 총회를 뜻하는 세속적인 용어였다. 에클레시아는 정치적, 법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소집된, 민주적인 성격을 띤 모임이었다. 그런데 사복음서에서 - 마 16:16-18, 18:17을 제외하고는 -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초대 기독교의 모든 저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에 시작된 공동체를 위해서만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역사적 예수의 시대에, 그리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지칭하기 위하여 에클레시아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물론 예수는 12 제자들을 친히 불러 모았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하지만 예수가 활동 당시에 에클레시아를 설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예수가 교회의 설립을 소원하였는지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Theologische Begriffslexikon zum NT, B2., 788f).  

      "예수와 교회"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프랑스 학자 르와시(A. Loisy)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된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런데 온 것은 교회였다." 예수는 생전에 교회를 설립하였는가? 아니면 그의 사후에 교회가 설립될 것을 예상하거나 제자들(베드로)에게 교회 설립을 분부하였는가? 아니면 교회는 예수의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제자들의 창작품, 아니 하나님의 나라를 대체한 새로운 집단이었는가?

      예수의 활동에 대한 보도와 말씀은 긴 전승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역사적 자료를 분명히 확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예수에게 소급될 수 있고, 또 어떤 것이 초대 교회에 의해 변형, 첨가되었는지 분명히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예수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이 나라는 물론 임박한 실재이면서도 분명히 동시에 미래적인 실재였다. 예수는 이스라엘과 모든 백성들을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로 불렀다. 예수는 완전히 이스라엘 백성 한 가운데서 살면서, 이스라엘과 온 백성을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고, 이를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는 데 온통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어떤 새로운 종교 단체, 교회를 만드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수가 생전에 교회를 설립하였다는 어떤 기록도, 흔적도 없다. 그렇다면 예수는 교회 설립을 원하지 않았는가? 최소한 그는 사후에 교회가 설립될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마 16:18 이하와 18:17 이하에 대한 정확한 해석에 달려 있다.

      마 18:17 이하는 후대 교회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이 내용은 예수에게 소급하기는 어렵다. 마 16:18 이하는 해석이 분분하고 엇갈리는 본문이다. 카톨릭 교회는 이 본문을 생전의 예수에게 소급하고, 예수가 제자들의 우두머리였던 베드로(반석) 위에 장차(예수의 부활 후?) 교회가 설립될 것을 예언하고, 또 베드로에게 이 사명을 위임하였다고 해석한다. "베드로의 수위권"과 "교황의 계승권"도 여기서 도출된다. 하지만 대개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 본문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이 본문은 아람어(게바)를 말하는 교회로 소급될 수 있고, 예수에게 소급될 가능성은 매우 약하다(E. Schweizer, Gemeinde und Gemeindordnung im NT, Zwingli Verlag Zurich, 1959,14ff). 교회(에클레시아) 관한 예수의 발언과 그의 교회 설립의도를 복음서에서 찾기는 어렵다. 예수는 배타적 경향의 바리새의 단결도 원치 않았고, 엣세네 식의 종파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온 이스라엘을 하나의 단일체로, 목자 없는 불쌍한 양떼로 보고 있다. 제자들도 예수에 의해 조직적으로 집단화될 일은 없다.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예수가 부활한 후부터 비로소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H.Kung, 교회란 무엇인가? 72ff).

      하지만 이 말은 제자들의 교회 설립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와 완전히 무관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비록 예수의 생애 중에 교회 설립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예수의 생애가 없이는 교회도 없다(H.Kung, 교회란 무엇인가? 76ff). "무리"에 관한 에수의 말씀(눅 12:32, 막 14:27)이 예수에게 소급된다면, 이것은 예수의 말씀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택된 그룹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분명히 아무런 공동체가 없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교회(에클레시아)는 예수의 부활 이후, 특히 성령 사건과 함께 점차로 이스라엘 공동체와 분리되면서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발전한 것이지만, 교회는 이미 예수의 생애 전체를 통해 암시적으로 준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도 말한다. "신약성서의 복음서 중에서 나사렛 예수가 교회를 설립하거나 제정하였다고 분명히 말하는 곳은 없다. 교회의 특별한 설립 혹은 제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복음서의 모든 이야기는 늦어도 예수의 세례로부터 오순절 사건에 이르기까지 암시적으로 교회의 시작, 교회의 소집, 보존, 건립, 조직과 파송에 관한 이야기다. 교회의 가장 오래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역사 안에 매우 분명히 반영되어 있다(KD 4/3, 782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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