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직신학 신학방법론]루터, 칼빈, 웨슬리, 칼바르트, 폴틸리히의 신학방법론
A 신학방법 총론
1. 신학방법의 4가지 방향
1) 생산적 기능 현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신학을 정립한다. 생산적 기능이 지나치면 ‘현대주의’에 빠질 수 있으며 기독교 메시지의 손상(세속적)을 가져올 수 있다.
2) 재생산적 기능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신학을 현대 상황에 맞게 재해석한다. 재생산적 기능에 지나치게 치중하게 되면 ‘전통 주의’에 머물게 된다.
3) 합리적 기능 정치, 사회, 과학,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변증적으로 증명 이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이해하도록 한다. 도덕·윤리적 지평에서 객관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합리적 기능이 지나치면 ‘합리주의’에 빠질 수 있다.
4) 실존적 기능 개인의 주관적 경험에 의한 접근.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실존적 기능이 지나치면 자기 경험에 빠져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기적 신학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위에 4가지 어느 특정 기능에 기울여 질 수 있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를 일컬어 이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치우쳤던 특정 기능에서 다시 돌아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단은 신앙고백문제에 관련이 있지만 신학은 얼마든지 한계를 넘나 들 수 있다.
2. 신학방법론의 흐름
사도 바울부터 기독교 신학방법의 주요흐름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변화됐다. 때로는 합리적으로 때로는 실존적 경험에 근거한 신학을 시도했다. 합리적 기능이 기독교 신학방법의 흐름을 지배할 때는 이에 맞서 실존적 기능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나타났고, 반대로 실존적 기능을 강조하는 신학의 흐름이 지배될 때는 합리적 기능을 강조한 신학자들이 나타났다. 이처럼 신학방법의 흐름은 당시의 세계관에 따라서, 또는 이를 보완하기 위한 많은 신학적 방법의 시도와 노력이 있었다.
3. 21세기의 신학방법론
그렇다면 21세기에는 어떤 신학방법을 추구해야 하는가? 21세기의 직면한 문제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1세기의 다양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기독교 신학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가? 지난 2000여 년간 합리적과 실존적 신학방법이 교차하면서 많은 시비를 가져왔지만 21세기는 합리적방법과 실존적 방법을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신학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어거스틴] 이 시도한 교회의 생산적 기능과 재생산적 기능을 겸비한 상호보완의 신학방법이 요구된다.
B 신학전개의 다양한 방법들
1. 마틴 루터의 신학방법론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교 교리를 구원론적인 입장 곧 교리의 하나하나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진 의의에서 소개한다. 루터의 신학은 하나님을 정의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을 전혀 형이상학적 용어로 정의하려고 한 스콜라 철학적 방법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한 것이다. 루터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표준은 “만”이란 표현방식이다. 바로 믿음만, 은총만, 그리스도만, 성서만이다. 그에게 있어 믿음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육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의 공중 교량이 있을 뿐이다. 이런 신앙에 대해서는 아무 철학적인 증명이나 논리가 있을 수 없으며 이러한 증명이나 논리를 찾는 것은 바로 신앙의 본질과 모순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은 기적이며 은총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가 자신의 행위 곧 자신의 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만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뜻이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이런 복음주의 법칙에 반대하는 의견에 대해 이런 답변을 한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돌아서는 사람이다. 마음에서 하나님께 정복당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사랑과 원하고 주는 모든 것과 함께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종속되는 것이다.” 루터의 신앙고백서에서 은총은 “십자가 신학”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설 때에는 ‘공로’나 ‘인간의 협조’같은 말들이 우리의 입술에 오르지 않는다. 은총은 우리를 참으로 자유케 하며 루터가 무서운 내적 투쟁을 겪은 후에 종종 증언한 바와 같이 엄청난 해방이다. 이런 은총은 인간이 자기 자신, 기껏해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자신의 도덕적 상태, 그런대로 선한 자신의 의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심 때문에 꼭 보상해 주시는 다소간의 선행이나 공로들 등 인간이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보존하려고 하는 위신들을 마침내 포기할 때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루터의 ‘은총만’이라는 설교에 대해 “인간이 죄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 인간을 너무 낙심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 것이다.”라는 반대의견도 있었지만 루터는 확고했다. 그는 은총에 대해 “자신을 은총에 맡겨 버리고 그 은총이 자기로서는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신앙의 세 번째 기본 법칙은 “그리스도만”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심오한 형상은 아버지의 형상이며,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자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가장 친밀한 관계는 결혼관계이다. 루터의 성서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적 추구는 구약성서를 율법적 혹은 역사적 교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내용에서 평가했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그리스도의 강보와 구유’를 보았다. 이런 신앙에 비추어 루터는 대담하게 교리, 경건한 의견, 의식, 예식 및 교회의 전통을 검토했으며, 또한 그의 생각에 반그리스도교 적이라고 여겨진 모든 것을 내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루터의 신학에 있어서 기본 법칙은 “오직 성서만”이다. 성서는 낱말마다 똑같이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일률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서는 유기적이며 분절적인 것이다. 성서는 하나의 중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의미는 그리스도이며 복음이다. 성서가 역사의 소산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아직 사라져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현존해 있으면서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여전히 성서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데려다 준다고 말한다. 루터의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서만이라고 하는 좀 배타적이고 반발적인 인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인상은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만 그렇다. 루터의 신학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선물을 주려는 것이다. 곧 전적으로 믿음, 은총, 그리스도, 성서에 의해서만 아무 보충도 필요 없고 자유와 충만함 삶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2. 존 칼빈의 신학방법론
칼빈 신학의 첫째가는 독특한 특징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정에 관한 관념’이다. 칼빈은 예정에 대한 관념에서 “절대적 주권적 의지로서의 하나님의 특성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칼빈에게 중심점은 피조물의 개인적 구원이나 신적인 사랑의 의지의 보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칼빈 신학이 하나님 중심적이냐, 그리스도 중심적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 전에, 워필드(Benjanin B. Warfield)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했다. 그 이유는 칼빈 신학적 해석학의 전제는 인간과 성령의 영감으로된 성서의 관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칼빈이 성령을 강하게 강조하는 신학적 배경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성령의 조명 없이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서의 영적 진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육은 하나님의 영으로 조명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을 결코 깨달을 수 없다.”고 한다. 칼빈은 중생하기 이전의 인간 이성은 성서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복음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나 우리의 명석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서해석은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칼빈이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활동으로서 강조한 요소들은 첫째, 성령이 성서의 참된 저자라고 강조한다. 칼빈은 “성령 그 자신이 해석자”라는 말로써 그의 해석학의 신학적 전제를 설명한다. 둘째, 성령의 의도를 성서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했다. 칼빈은 해석자는 성서를 해석할 때 성령의 의도를 찾아야 하며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성서의 참된 의미를 알수 없다고 말한다. 셋째, 성령의 조명에 의하여 성서를 이해하는 것은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칼빈은 “믿음은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며 오직 믿음에 의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복음의 빛으로 인도한다.”고 한다. 오직 믿음이 이해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이해와 믿음은 분리될 수 없다고 한다. 넷째, 우리가 성서를 해석하기 위하여 성령의 조명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칼빈은 우리의 부족과 무지를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하고, 성령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믿었다. 칼빈은 신학방법론에 뚜렷하게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칼빈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신학 구조를 찾아내려고 했다. 칼빈이 특히 성서해석에 있어서 여러 가지 학문적인 방법을 사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성령의 조명에 의한 신학적 해석 방법을 가장 중요하게 간주했다. 그는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참된 성령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중생하지 못한 인간의 이성이 가는 대로 끌려간다면 아무리 좋은 방법을 사용해도 그 결과는 잘못된 것을 낳을 것이라는 것이라 말한다.
3. 존 웨슬리의 신학방법론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방법론을 논리화하거나 개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학체계에는 독특한 방법론이 형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960년대에 아우틀러(Albert C. Outler)는 웨슬리 신학의 4요소(성서, 전통, 이성, 경험)를 묶어 “웨슬리의 4변형”(The Wesleyan Quadrilateral)이라고 명명하였다. 웨슬리의 신학은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이 상관관계구조로 방법론을 형성하고 있다. 웨슬리 신학은 성서에 기초하고 있으며, 모든 문제에 최종적인 해답을 성서에서 찾는다. 그의 편지에서도 밝혔듯이 웨슬리는 오직 “한 책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웨슬리는 성서가 신학의 가장 권위 있는 자료이며 출발점, 하나님의 계시가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며 유일한 구원의 도구라고 말하고 있다.또한 웨슬리는 성서원본에 대해 무오성을 확신했다. 성서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조금의 오류도 없다고 믿었다. 성서에 하나의 오류가 있다면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온 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고 기독교 고전(초대 교부들의 저작, 에큐메니칼 회의의 신조, 교훈 집과 공기도서 등)에 큰 권위를 인정하였다. 웨슬리가 성서해석에 있어서 이런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첫째, 성서가 기독교 신앙의 최고 권위서이지만 해석이 필요하며 이단들과 싸우기 위해 정통적 해석과 교리들이 성서 해석의 규범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이 자신의 종교적 이해나 문화적 배경에 의해 선입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데 선입관을 벗어나 있는 전통을 중요하게 여겼다. 셋째, 신학을 오늘의 상황에 적응하려고 할 때 전통이라는 규범이 필요하다. 그러나 웨슬리는 전통을 언제나 성서의 권위 아래에 두었다. 그가 복음전파에 방해가 되는 영국국교회의 전통을 과감히 배격해 버리며 야외설교, 즉석기도, 평신도와 여성설교자, 안수문제 등을 시도했다. 웨슬리는 기독교를 이해하고 성경을 해석할 때 이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성은 이해와 판단과 논술의 도구이며”, “이성을 버리는 것은 곧 종교를 버리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하여 비이성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성에 대한 그의 자세는 이신론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의 양극단을 수정한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성이 불완전하며 제한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이성은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과 그 밖의 참된 행복을 주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성은 하나님의 인도 아래서 복음을 섬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는 단순히 이성만으로 자연신학을 발전시킬 원칙들을 갖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에서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웨슬리의 태도는 그의 회심에서 기인한다. 그는 1738년 5월 24일(수) 오후 9시 15분전 쯤 올더스게이트 가에 어느 교회에 갔는데 루터의 로마서 주석서문을 듣고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는 그 경험을 통해 “과거에는 자주는 아니었지만 때때로 승리했으나 현재에는 늘 승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그의 일기에서 밝힌다. 웨슬리는 성서를 전통과 이성으로 해석한다해도 자신에게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의식 혹은 경험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체험의 역할에 대해 첫째 계시의 중개역할이다. 즉 성령의 조명에 의한 경험이 성서에 나타난 진리 곧 계시를 받아들이게 한다. 둘째, 진리를 확증한다. 체험이 성서의 내용을 확인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셋째 성서를 해석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체험 자체가 진리의 근원이 되지 못하며 성서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웨슬리는 신학 이론보다는 신학의 적용에 보다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영국국교회, 이신론, 신비주의, 율법폐기론, 칼빈주의 등 당시에 18세기를 지배하고 있던 사상이나 전통들을 변증하며 복음을 전했다. 웨슬리는 이들이 한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오류를 성서의 절대적 우위성 아래 창의적으로 종합하였다. 그는 복음전파의 목적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4. 칼 바르트의 신학방법론
칼 바르트는 “우리들 자신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하등의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하나님의 은폐성이 가로 놓여 있다.”고 말하고 있다. 칼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으며 이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님 자신의 준비성>에 기인하는 것이며 인간은 그저 하나님을 부인하고 멀리하며 죄 가운데 살고자 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준비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는 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선물로 주셨다고 말한다. 칼 바르트는 이 은혜를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출발하며 이 계시는 삼위일체론적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단 한 번의 인식행위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며 여전히 은폐되어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한 순간에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인식되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상을 통해서 인식된다. 칼 바르트의 신학방법은 인간의 주관적인 요소로 이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이다.
5. 폴 틸리히의 신학방법론
틸리히는 신학이 교회의 두 가지 요구에 봉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두 가지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진술하는 것과 이 진리를 새로운 세대마다 거듭 새롭게 재해석하는 일”이다. 틸리히의 신학이 주시하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 상황과 세계의 문제, 존재와 역사의 모호성이 내포한 질문에 있음을 보여준다. 틸리히에 의하면 “신학이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메시지와 인간 상황의 양극을 오가는 변증법적 관계이다.” 틸리히의 신학은 인간 실존 상황 속에 내포된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영원한 진리가 갖는 능력 안에서 상황이 제공하는 방법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틸리히의 ‘상관관계의 방법’을 사용하는 조직신학은 변증적인 성격이 있지만 단순히 변호하는 기능뿐 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구원 메시지인 케리그마 신학의 기능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는 케리그마 신학의 고유한 의미와 변증신학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 상관관계의 방법을 제시한다. 틸리히가 사용하는 ‘상관방법’은 적용과 해석의 보조 수단이다. 그는 ‘상관’이라는 개념을 세 가지로 밝히고 있다. 첫째, 종교 지식의 중심문제들에 관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진술이다. 셋째, 종교적 경험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사가 범한 세 가지 방법론을 극복하고자 ‘상관방법’을 주장했다. 틸리히는 성서의 문자와 교리 신학의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로서의 영원한 진리 또는 케리그마는 성서와 전통 안에 내포되어 있지만, 성서와 전통 그 자체가 곧 영원한 진리는 아니라고 본다. 신학이 ‘상황’과 상관시켜야 하는 ‘케리그마 메시지’, 곧 ‘영원한 복음 진리’란 바로 구체적인 예수의 생명 안에서 드러나 새로운 존재의 능력이다. 틸리히는 성서를 계시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해석학적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의 신학은 전체적으로 변증적 입장에서 쓰였으며, 영원한 메시지 안에서, 상황 안에 내포된 물음에 대답하는 신학 즉 변증적 신학이다. 틸리히의 변증적 신학은 단순히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옹호하는 소극적 신학이 아니라 대답하는 신학으로써 인간의 영원한 실존적 물음에 응답하는 신학인 것이다.
■ [조직신학 신론(성부론)]루터, 칼빈, 웨슬리, 칼바르트, 폴틸리히의 성부 이해
(히브리어 '야웨') A 신 이해 총론
1. 포스트모던 시대의 신관과 방향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소위 포스트 모던시대라고 말한다. 포스트 모던시대의 특징은(종교적 관점에서) 인간들이 세속화되며 종교를 떠나는 탈 종교적 상황과 종교가 필요하지만 다양한 종교를 체험하고 부흥하는 다종교적 상황이다. 종교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신 또는 초인간적 존재를 우주와 사람의 지배자이며 인도자로 믿고 복종하면서, 일정한 의식을 통하여 예배하며 일정한 윤리나 철학의 기본으로 삼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러 인간들은 신에 대한 여러 가지 개념을 갖게 되었다. 종교와 신에 대한 정의에 혼란이 오면 종교 간의 마찰은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종교와 종교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일한 종교 안에 인간과 인간과의 마찰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어떤 신관을 가지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종교생활은 물론 목회자나 신학자의 목회나 사역이 달라질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 신학은 계시가 아니라 계시에 대한 반응이다. 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서이다. 신학은 항상 상대적이며 신학자들마다 인식하는 것이 다르다. 위대한 신학자들도 시대의 산물이며 그 신학은 시대에 맞는 책임 있는 자기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신학은 항상 갱신되어야 하며 성서는 항상 새로운 언어와 형태로 해석되어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신관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했는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는 율법을 근거로 한 신앙이었다. 그 때문에 유대인은 하나님을 심판주로 인식해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인식했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주인’이오 자신은 ‘종’이라는 것을 강조해 마성적으로 빠졌다. 중세시대에 가톨릭의 종교지도자들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면죄부도 판매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강조하신 하나님의 인격은 ‘아버지’였다. 이러한 예수님의 신관이 예수님을 만들었다. 유대인들이 인식한 하나님은 부계적이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은 법적관계이므로 단절될 수 있으며 집단적, 민족적인 인식을 가졌다. 반면 예수님께서 인식한 하나님은 부성적이었다. 즉 양자라고 할지라도 아버지가 아들의 눈높이를 맞추며 관계하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며 개인적인 인식을 가졌다. 예수님께서는 기존에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파격적으로 바꾸셨다. 예수님의 신관은 누가복음 15장(초청, 용서, 은혜, 찾으시는 하나님)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3. 인격적 신관과 비인격적 신관의 조화
아시아의 상황인 비인격적 신관에서 어떻게 인격적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가? 샤머니즘과 혼합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아시아는 비인격적 신앙을 갖고 있다. 샤머니즘은 공동체성을 강조하지 않고 개인과 신과의 초자연성을 강조한다. 기독교와는 매우 다른 성향을 갖고 있다. 비인격적 신관은 인격적 만남을 갈망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샤머니즘은 사물을 인격화시켰으며 이는 우상숭배로 발전했다. 인격적 만남(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서로에 대한 책임이 존재하지만, 비인격적 만남(나와 물질의 관계)에서는 책임이 사라진다. 20세기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리버는 “인격적 관계에는 책임이 있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는 책임이 있다”는 ‘책임적 자아’를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이 비인격적인 삶을 산다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며 책임윤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바른 신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심을 균형 있는 조화를 이루는 신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B 신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1. 마틴 루터의 신론
루터는 1515년~1516년의 『로마서 강의』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짐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사변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가슴에 빛을 가져오신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루터는 『로마서 강의』에서 중세의 사중적인인 의미의 성경해석법을 버리고 율법에 의한 인간 심판과 복음을 통한 이신득의를 중심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두 가지(일반적인 지식, 특별한 지식)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지식은 로마서 1장 19절의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말씀에 따라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일반적인 지식을 자연적으로 갖고 있으며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악한 자들을 징벌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특별한 지식은 인간이 죄와 사망에서 구속되고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시고, 무엇을 뜻하시고, 무엇을 주시고, 무엇을 행하실지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본성적으로 알고 있으나,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당신을 향한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역설한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자존적이고 급박하게 다가오는 정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져 그것을 통해 우리가 그 앞에 경건하게 되고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계시된 은혜와 자비”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의는 정죄하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의롭다 하는 의”라는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을 원하며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수한 흔쾌함을 통하여 움직이기를, 그리고 그 의지가 전적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의 의지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은 그 자체를 위하여 성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는 “마음의 신뢰와 믿음만이 하나님을 만드며 믿음과 신뢰가 바르다면 그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다”라고 말한다. 루터에게 있어 믿음과 하나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2. 존 칼빈의 신론
칼빈은 그의 저서『기독교 강요』1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소개한 다음 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말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떠나서 다만 우주와 인간 자신을 통해서도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인간이 어떤 신(神)이 존재한다는 의식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져서 골수에까지 깊이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계시에 의해서만은 구원의 신(神)지식이나 구원의 신앙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에 새겨진 그의 형상으로 충분치 못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말씀’의 도움을 마련해 주셨다”고 한다. 칼빈은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 선, 자비, 공의, 심판, 진리가 열거되고 있다고 하며, 특히 자비와 심판과 공의를 강조한다. 자비는 인간의 모든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으며, 심판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시행되며, 공의로서 신자들이 보존되며 가장 자애롭게 양육된다고 말한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사랑, 경건이 바로 참다운 신인식의 내용을 구축한다. 그는 경외와 사랑의 결합된 경외심을 ‘경건’이라 부르는데 “이 경외와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생각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고 말한다. 칼빈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유일하고 단일하신 본체를 이해하고, 이 본체 안에 세 위격 혹은 품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며 성자께서 성부와 결합된 곳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지므로 위격 사이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관계한다. 만물 안에 있는 결정적 원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움직여지지만, 이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는 매개자를 통하여 때로는 매개자 없이 그리고 때로는 모든 매개자에 역행하여 일어난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가 인류 전체 위에 나타나지만 그의 교회를 위해서는 특별하다고 역설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항상 존재하는 능력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탱하신다. 마치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붙들고 계시는 것처럼 이 하나님은 아버지의 손길에 의하여 나무, 풀, 음식, 건강과 병, 부와 가난 등 모든 사건을 섭리하신다.
3. 존 웨슬리의 신론
존 웨슬리는 그의 논문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사상’(Thoughts about God's Sovereignty)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전체 신학의 기본이 된다고 했다. 웨슬리 신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면서, 기독교에 크게 공헌한 것 중의 하나인 성결론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 즉 신론에 의하여 좌우된다. 웨슬리의 설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식은 거룩(성결)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통일성”(The Unity of the Divine Being)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분이시고, 영원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은 전적으로 완전하시다. 그 분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완전을 소유하시고, 인간의 마음이 인식할 수 있는 이상으로 무한하시다. 그렇다. 그의 무한성은 하늘의 천사도 인지할 수 없다. 이러한 완성을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구원에 의해서 신론을 전개한 웨슬리에게는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이 그 중심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사랑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시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개념은 곧 “사랑 안에서의 완전”(요일4:18)이었다. 웨슬리는 그의 모든 신학이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말한다.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다면, 웨슬리는 “거룩한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칼빈의 이중예정론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하나님이 통치자 또는 심판자로 일하시는 것은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이신 사랑과 공의에 의하여 공평하게 심판하신다고 말한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으로 가능하다. 웨슬리는 “은총에 의한 구원”이라는 점에서 “은총만으로”라고 외친 종교개혁자들과 함께한다. 그러나 은총의 역사하는 방법과 범위에서 현저하게 구분된다. 웨슬리에게 있어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 안에서 자유롭게,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웨슬리는 은총의 보편성과 구속의 보편성을 믿었기 때문에 칼빈주의의 이중 예정설을 배격하고 비성서적이라고 지적했다. 웨슬리는 그의 “선행적 은총”의 사상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지금 여기에서 모든 사람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시므로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것이 구원을 결정하게 된다. 이런 결정의 능력 곧 자유 의지를 인간은 회복 받고 있는 이것도 은총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거룩한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소개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우주적 아버지 되심과 양자됨에 의해 영적인 의미에서 아버지 되심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에게 선하시고 의로우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창조주, 보호자, 주님의 아버지, 그리고 양자됨과 은총에 의해 주님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시다. 나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과 천사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은 나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뿐만 아니라, 동시에 나와 이웃이라는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내 이웃 또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발견할 때 참된 이웃 사랑이 가능하게 된다. 이를 웨슬리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웨슬리는 “성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의와 참 성결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성결은 양자된 자가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것이 성결의 목표요 완성이다.
4. 칼 바르트의 신론
칼 바르트는 19세기의 신학적 전통(자유주의 신학) 속에서 신학 훈련을 쌓았으나 이 신학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20세기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수립한 인물이다. 인간을 사고의 중심점으로 삼은 19세기의 거대한 시대의 사조 속에서 신학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신학 사조 시대의 반기를 들고 나온 바르트의 신학적 사고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여 우리의 신학적 사고를 형성함에 있어서 좋은 지침이 되는 것은 그의 하나님 인식론이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인식론의 방법론적 원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통하여 인식된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와 악의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이 현실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직관은 우상의 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하등의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은폐성을 가로 놓여 있다.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님 자신의 준비성”에 기인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준비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 가운데에서 살고자 하는 존재이다. 물론 인간의 준비성이 얘기될 수 있지만 이 준비성은 “하등의 자립적인 독자성”이 아닌 “단지 하나의 대여된, 간접적이고 뒤를 따르는 독자성”에 불과하다. 인간의 준성은 하나님의 준비성에 포괄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준비성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하등의 가능성이나 준비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자신을 인식의 대상으로 세우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질문하고 인식하도록 계획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식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요, 하나님의 언제나 자유로운 행위 즉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실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등의 필연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거저 주시는 사랑의 선물, 곧 은혜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은혜를 통하여 인식되든지 아니면 그것은 인식되지 않는다.” 바르트의 하나님 인식론의 대원리는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을 통하여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의미한다. 또한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은혜라고 한다면 바르트의 하나님 인식론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원리”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가 그의 하나님 인식론의 중심개념이라고 말한다.
5. 폴 틸리히의 신론
틸리히의 신관은 그의 신학의 영역 중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 논쟁이란 대부분은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본질과 실존 너머에 계시는 존재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논증하는 것은 그를 부인하는 것이다.” 틸리히는 그의 저서 『Systematic Theology』제1권 제2부 ‘존재와 하나님’에서 그의 신관을 체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거기서 틸리히는 하나님을 ‘존재 자체’라고 부른다. 만일 하나님이 하나의 존재라고 한다면 그는 비록 최고의 존재라 할지라도 상대적인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존재 자체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다른 것과 병행하거나 다른 것 위에 있는 존재로 이해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하나의 존재라면 그는 유한된 세계의 범주, 특히 공간과 물질에 종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신학이 출발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쉽게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 당신이 그 존재의 유무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는 그 하나님은 우준 안에 존재하는 만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그러한 존재가 정말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것도 매우 정당하다.” 한편,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려면, 즉 하나님이 참으로 절대자가 되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거나 존재의 지반 또는 존재의 힘이라야 한다. 하나님이 존재 자체가 된다는 말은 유한한 존재에 속한 삼라만상을 초월하신 분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은 틸리히가 존재를 유한한 수준에 다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성을 기술하면서, 틸리히는 끊임없이 깊은 심연과 같은 하나님의 본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존재들을 초월하시되 무한히 초월하시기 때문에 개개 존재가 다 그 깊은 심연에 삼켜져 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서술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적 본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유한한 만물은 존재의 무한한 힘을 공히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의 지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존재 자체라는 것과 절대자라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진술도 문자적인 진술이 아니라 상징적인 진술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존재 자체라고 하는 단적인 주장을 제외하면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말은 다 상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틸리히는 성경의 비문자화를 주장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아나 세계라는 개념을 통해서 포착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아’라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자아의 개념을 부여한다면 하나님은 비자아 즉 자아 아닌 어떤 것과 대응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므로 절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세계가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하나님은 초월해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등으로 부르는 것은 다 상징적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단지 간접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 따라서 틸리히는 하나님이 비인격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인격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 열정, 기대, 기억, 고난, 기쁨 등과 같은 인격적인 표현은 존재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살아있는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한 인격 혹은 한 인격자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모든 인격적인 모든 것의 지반이 되며 모든 인격적인 것들 안에서 존재의 힘이 됨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고대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인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격이란 용어를 하나님 자체가 아닌 삼위일체의 개체에 사용했을 뿐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간주하게 된 것은 19세기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므로 틸리히는 하나님의 인격을 상징적인 의미로 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틸리히는 그의 다른 저서 『The Courage to be』 에서 “하나님 이상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 말은 진정한 하나님은 신학적 유신론의 하나님을 초월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틸리히에 의하면 신학적 유신론의 하나님은 한 존재는 될지언정 존재 자체는 되지 못하므로, 주체와 객체의 이율적 구조 속에 얽매이게 된다. 주체로서의 하나님은 나를 객체, 즉 한 개의 물건으로 만든다. 그는 나의 주관을 빼앗아간다. 그는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앞에서 무능무력하게 된다. 나는 그와 같은 하나님에게 반기를 든다. 따라서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 이상의 하나님’은 신학적 유신론의 하나님을 초월하고자 하는 노력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틸리히는 말하기를, ‘하나님 이상의 하나님’은 인간의 회의와 번뇌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질 때 나타나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틸리히가 신학적 유신론의 하나님의 부정을 통해서 어떤 다른 의미에 있어서 유신론의 수립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와 같은 부정을 통해서 ‘초인격적인 하나님’, ‘하나님 이상의 하나님’의 개념에 도달했다. 틸리히가 무신론자와 같은 성향을 보인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참람하고, 형상화시키고, 신비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대항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조직신학 기독론]루터, 칼빈, 웨슬리, 칼바르트, 폴틸리히의 그리스도 이해
A 그리스도이해 총론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1. 초대 기독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물음은 초대 교회에서부터 내내 논의되어온 문제이다. 제 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시작하여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과 인성의 논쟁을 해결할 때까지 많은 의견이 분분했다.
1) 신성 - 가현설(Doceticism) 2세기에 영지주의가 주장한 것으로 육신을 가진 자는 모두 죄를 범함으로 예수는 인간처럼 보일 뿐 신성만 가지신 분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들은 그리스도교 구원자에 대한 가르침의 근본인 성육신을 부인한다. 이런 Doceticism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신학에서 계속 나타난다. 영지주의의 경우 역사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무시되어 버리고 나아가 역사 속에서 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도 결국 허무한 것으로 돌아가 버린다.
2) 인성 - 에비온 주의(Ebionism) 에비온 주의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이레내우스의 저술들(185년경)에서 처음 발견되며, 그들은 4세기에도 여전히 존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비온 주의는 그리스도교에 속하면서도 유대교의 강조점을 보존하고 강조했다. 그들은 야웨만이 유일한 하나님인데 예수가 하나님이면 다신론이 됨으로 예수는 천사보다 나은 존재이지만 하나님보단 못하다는 주장했다. 3) 반신반인 - 아리우스 주의(Arianism)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령의 세 위격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 신이되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나님의 양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자를 반신반인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인간과 하나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하였다고 반박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2. 현대 기독론
현대 교회에서도 기독론에 대한 논쟁이 초대교회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신성 또는 인성의 극단적인 선택이 아닌 양성을 인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느 한 본성을 강조하여 기독론을 형성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신성에 근거하여 신적 권위를 강조한 보수적 신학은 신성을 강조하여 신학을 발전시켜 개인전도나 해외선교 등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약화된 신학의 한계를 보였다. 반면 진보적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간성의 근거하여 인성을 강조했다. 진보적 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부각시켜 사회적 참여와 삶과 인권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약화된 신학의 한계를 보였다. 현대 기독론에도 과거 에비온니즘과 흡사한 신학이 등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이 그것이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기독론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기독론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과 삶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신학에 있어서 편협적인 시각은 결코 바르지 않다. 보수적, 진보적 신학의 조화만이 현대에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전파하는 명쾌한 수단일 것이다.
3. 성서에 나타난 메시아(그리스도)
1) 구약에 나타난 메시아 개념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명칭은 ‘예수아’이다. 메시아는 제사장, 선지자, 왕의 직능을 갖고 있으며 기름부음 받은 구별된 자이다. 당시의 메시아의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 또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 심판자라고 생각했다. 즉 당시에 메시야의 개념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안수를 받은 자의 개념이며 반드시 신일 필요는 없다고 인식했다. BC 6세기~ AD 70년(제 2성전 시대)에 제사장 부류가 등장하면서 메시아의 개념에 대한 많은 교파들이 발생되었다. 사두개파는 제사장이 주류를 이루었던 계층으로 모세오경을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메시아사상이 없었으며 부활자체가 없다고 주장했다. 바리새파는 일반 중산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보편적으로 메시아사상이 있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도바울과 니고데모를 들 수 있다. 쿰란공동체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포함되어 있던 에세네파도 메시아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파와는 연대관계가 있었지만 메시야 사상이 없는 사두개파와는 교류가 없었다. 유대인 민중들의 대부분은 이 세 부류 중 바리새파를 존중했다. 또한 에세네파가 금욕적인 삶을 살며 순수한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본받기도 했다. 그러나 사두개파에 대해서 좋지 못한 인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사두개파가 로마 정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라는 3대 절기가 있었다. 3대 절기에 유대인들은 성전에 모여 예배드렸다. 이 3대 절기는 기독론과 분리할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에 있다. 유대문화와 유대의 절기가 없이는 우리는 기독론을 전개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신약에서 나타난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연계된다.
2) 신약에 나타난 메시아의 개념 신약시대를 열며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하는 한 인물은 세례요한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이스라엘의 문화와 3대 절기의 완전한 실현이다. 죄를 해결한다는 것은 죄를 없이 한다는 것,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죄판결을 내리는 것(justified)이다.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justified이다. 당시 유대의 상황은 율법주의 사회이자 문화였다. 토라의 613개의 계명을 지키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의인이냐 죄인이냐가 구별되었다. 율법의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정죄를 받던 시대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는 외면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세리, 창기, 병자, 여자, 율법을 배울 기회가 없는 아이, 어부 등 직업, 성별, 나이, 병 등의 이유로 유대사회에서는 그들을 차별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던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오면서 예수 공동체가 생성되었다. 예수 공동체는 율법 공동체와 대비되면서 충돌을 가져왔다. 예수 공동체는 율법의 준행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은혜의 공동체였다. 예수께서는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누가복음19:10)”고 선언하셨다. 신약의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자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이 완성자이시며 율법이 육신이 된 참 메시야였다. 예수께서는 율법 공동체를 반격하면서 율법을 준행의 문제가 아닌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율법을 준행하는 것으로 가르쳤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들의 통로로서의 메시야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메시야가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통해서 아버지가 영광을 받아야 함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간들의 죄 사함과 성령의 임재였다. 성서에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성서이다. 4복음서에서 예수의 인격에 대해 가장 잘 표현된 언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마태복음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이며, 예수의 사역에 대해 함축된 언어는 ‘메시아’(요한복음1:41)이다.
B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1. 마틴 루터의 기독론
루터는 그의 주기도문 해설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잘 나타낸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한 독생자이심과 하나의 영원하고 신성한 성품과 본질 안에서 영원으로부터 탄생하셨음을 믿을 뿐 아니라, 만물이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 그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어졌고, 그의 인성으로 그는 나와 만물의 주가 되셨고, 그의 신성으로 아버지와 함께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또한 루터는 그리스도의 사역 즉 대속, 부활, 승천에 대해서 “지구상에서 이제껏 가장 거대한 경이”라고 표현한다. 성부께서 본성적으로 하나님이신 그의 유일하게 나신 아들에게 “가서 그들이 너를 교수대 위에 매달도록 하라”고 말씀하셔야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성부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시며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지만 그는 벌레같이 참담하게 내버려졌고, 사람들에게 경멸당했으며 버림받았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호의를 가질 수도 없으시고, 가지려고 하지도 않으신다. 대신에 그의 진노만이 영원히 불변적으로 그 위에 머무르기 때문에 구속은 죄를 속하고, 죄책을 떠맡고, 진노의 대가를 치루고, 죄를 소멸하기 위해 그것에 합당한 가치 있는 속전을 치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며 그리스도의 희생과 대속을 설명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승천의 이유에 대해 “그의 사역을 가장 잘 행하고 통치를 행사하기 위해서 그리로 승천하셨다. 만약 그가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형태로 땅 위에 머무르셨다면 그는 효과적으로 사역을 수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와 함께 있고,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 설교했다. 루터는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필요성과 은혜가 절실하며, 인간이 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은혜를 얻을 수 없는 이유는 “인간 본성이 은혜를 획득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중재자나 중보자로서 불필요하게 된다. 인간 본성은 오직 수치만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중보자인 인간, 사람을 위한 중보자 그리스도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내적 인간을 위한 영적 제사장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해서’라는 논문에서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인간을 신부로, 믿음을 결혼반지에 비유한다. “믿음이라는 담보에 의해서 믿는 영혼은 그의 신랑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되고, 사망과 지옥에 대해서 안전하며 그의 신랑인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와 생명과 구원을 수여받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흠과 주름이 없는 영광스러운 신부로 나타나게 하며, 생명의 말씀으로 즉 믿음으로 생명과 의와 구원의 말씀으로 씻어 우리를 정결하게 한다”, “호세아 2장에서 말한 것과 같이 믿음 안에서 사랑 안에서, 자비 안에서, 의 안에서, 심판 안에서 우리와 결혼한다”고 말한다. 루터의 기독론의 표현은 객관적이며 사변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존적이며, 인격적이며, 구원론적으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론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전통적으로 믿어온 교리를 실제적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2. 존 칼빈의 기독론
존 칼빈의 기독론은 그의 저서인 기독교 강요 제Ⅱ권 전편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기독론이 시작되는 부분은 제4장부터라고 할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명하게 주장되고 있다. 또 칼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조금도 성경적 이해를 벗어남이 없이 올바른 주장을 하였다. 즉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성경대로 이해하고 믿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어서 “심지어 옛 언약도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칼빈은 그의 완전한 기독론을 그의 신학적 프로그램의 초점으로 잘 채택하여 정립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신학의 진정한 과업은 “그리스도가 모든 그의 복과 함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칼빈의 기독론을 지배하고 있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실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속적 역할 속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다. 칼빈은 성육신의 동기에 관하여 “그리스도는 자비로 익숙해진 인성으로 옷 입혀질 필요가 없었으나 그는 사람들을 그렇게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즉 인간의 불행으로 말미암아 만일 시험(검증)받지 않는 한 그는 친절하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악들이 우리를 억압할 때, 이것이 우리의 직접적인 위로(위안)가 되게 했고, 하나님의 아들자신이 경험하시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일어나게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고, 마치 그가 우리와 같이 고뇌를 당하신 것처럼 우리와 함께 고뇌 속에 있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이 모든 쇠사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할지라도 그의 상태(조건)는 그가 너무 미천하기 때문에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성육신을 위하여 그저 단순한 필연성이나 절대적인 필연성을 부인했다. “만일 누가 왜 이것이 필연적인가고 물을 때, 그것은 단순한 필연이나 절대적인 필연이 아니라 그것의 원인은 하나님의 작정, 즉 인간들의 구원이 의존하고 있는 신적 작정으로부터 거슬러 올라 간 것이다”라고 칼빈은 말한다. 칼빈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예증된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칼빈은 바울의 증거를 따르면서 하나님과 화목되기 전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들로 판결을 받았음을 주장했다. 동시에 속죄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객관적인 특성을 강조한 신학자들의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주관적인 국면을 무시하지 않았다. 즉, 우리의 행위에 관한 그리스도의 사역적인 면이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우리의 순종적인 면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우리가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본래의 순종의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3. 존 웨슬리의 기독론
웨슬리의 기독론에 대한 견해는 니케아 회의와 칼케돈 회의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웨슬리는 예수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셔서 하나님이 그의 육체 안에 거하셨다는 것이 사실이시지만, 그는 완전한 인간성을 소유하셔서 인간의 모든 속성을 가지셨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웨슬리는 양성론에도 불구하고 인성보다 신성을 강조하고 중요시 하였다. 웨슬 리가 신성을 더욱 강조한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더욱 중요시하였다고 보았다.그렇다고 해서 그의 기독론이 가현설적인 기독론은 아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면서도 성육신의 필요성을 논하며 그리스도의 인성을 ‘완전한 인간성’을 소유하신 분이라고 이해했다. 웨슬리의 사상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상징하며 구현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구원과 성결의 삶에 중점을 두었던 만큼, 그리스도의 인격 문제보다는 사역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 웨슬리의 주요 관심사는 그리스도께서 하실 사업과 우리를 위하여 하실 수 있는 것에 있다. 인격보다 사역을 중요시하는 웨슬리의 자세는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함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모든 철학적 사변을 피하기로 한” 그의 일관된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는 로마서 14:19의 주해에서 “실용적 신학은 평화와 교화로 지향한다. 논쟁적 신학은 비록 그것 없이는 신학의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직접적 교화로 이끄는 힘은 적다”고 하였다. 또한 웨슬리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결론은 그리스도 중심이며 성결의 삶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다. 웨슬리가 순회 설교자 코프란에게 보낸 편지에는 성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성결이 사랑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인증,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그리스도가 품으셨던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처럼 행하게 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사람이 성결을 얻는 조건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성서적 구원’이라는 설교에서 믿음으로 성화된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구원함을 받으며, 의롭다 하심을 받으며, 또한 성결함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화를 얻는 오직 하나의 길입니다...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성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결함을 받는 것입니다. 당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결함을 받는다고 믿으십니까? 그러면 당신의 원칙에 진실하십시오! 그리고 이 축복을 구하십시오!
웨슬리는 그의 성결론을 그리스도 중심의 성결론으로 전개하였다. 그는 “성결의 유지 역시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이는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에서만 가능하다 성결한 자는 의지적인 죄를 범하지 않을지라도 그 역시 무의지적인 죄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고 말한다. 진정 웨슬리의 성결은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함으로써 유지되는 완전이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언제나 인간의 구속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핵심인 성결로 이어져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성결의 근거가 되며 그리스도의 삶은 성결한 자의 삶의 모델이며 목표가 되며, 그리스도의 임재만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4. 칼 바르트의 기독론
바르트 신학에 있어서 기독론은 단연한 핵심이다. 그의 기독론은 죄인인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위로부터 오는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르트에 있어서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그의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설명되어지는 “절대적 초월자”이며, “전적인 타자”이다. 절대적 초월적 하나님과 인간과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는데 하나님이 자기계시인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역사에 침투해 오며, 비로소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자신을 나타내신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해야지, 하나님의 계시에 앞서서 또는 그것을 떠나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알려진 것과 다른 어떤 방식으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예수 자신의 아들 됨의 관계, 성령에 의해 중재되고 능력을 입게 되는 관계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의 삼위일체적 구조는 예수의 인간적 인격 및 역사가 하나님 자신 안에 속한 것이라는 영원한 근거로 제시되어진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되고 초점이 맞추어지는 신학의 궁극적인 근거의 틀을 제공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기독론과 그리스도의 세 직책 또는 사역에 관한 구원론 사이의 전통적인 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둘은 화해의 교리 안에서 그것들의 적절한 위치가 주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다. 이와 같이 바르트는 기독론을 3중적인 구조를 통해 진술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일하시는 참 하나님이다. 그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 자신이다. 둘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와는 다른 방식 안에서의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우리의 인간성과 전적으로 동일한 분이다. 셋째, 예수그리스도는 한분 하나님, 인간이다. 그는 종이 되신 주님이고 주님이 된 종이다. 그는 화해하시는 하나님이며 화해된 인간 둘 다이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의 보증이다. 그는 구속의 진리를 보증한다. 바르트에 있어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본질은 하나님과의 동일성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 강조는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예수 이해(하나님에 대한 의욕 및 경건성으로서의 인간 예수에 대한 이해와 자연신학) 및 존재의 유비에 대한 배격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로 보고자 하는 입장을 주장함으로써 계시를 자연과 연결시키려는 자연신학의 입장을 배격할 뿐 아니라 창조의 영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의 영역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모습이 있다. 바르트의 신학은 기독론을 급격하게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 일원론’이라는 비판을 얻고 있다.
5. 폴 틸리히의 기독론
현대 신학자 중에서 전형적이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람은 폴 틸리히이다.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은 인간의 상황과 접촉하는 그의 상관 관계방법이 귀결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구원은 오직 인간의 상황에 전적으로 참여한 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땅에서 배회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틸리히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의 역설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모습이 실존적인 조건 아래서 출현했다고 하는 역설로부터 출발한다. 틸리히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탐구는 두 가지의 유형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한쪽은 새로운 존재가 역사를 초월해서 탐구되고, 다른 한쪽은 역사의 목적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틸리히에 있어 무엇이 새로운 존재인가? 틸리히는 실존의 상태를 ‘소외’의 상태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소외의 문제에 대한 답변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에 실존에 참여하고 실존의 소외를 극복한 새 존재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새로운 존재가 예수 안에 나타났다고 알 수 이유는 “예수의 말, 행동, 고난과 그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존재에 대한 표현에 불과하며 예수를 그리스도 되게 하는 것은 본질적 존재와 실존적 존재의 분열을 넘어선 예수의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개개의 사건들은 그의 존재에 종속되며 그의 존재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틸리히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르며 그가 소외를 극복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에 대한 성서의 상에는 어떠한 소외의 흔적도 없다. 그는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 의식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오만이나 자기 높임의 흔적은 없다. 이것은 사탄에 의해 그리스도의 가능한 약점으로 이용되었으나 그에게는 아무런 욕망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적어도 성서적 상에서는 그렇다.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적 상은 세 가지로 강조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유한성, 둘째는 거기에서 오는 유혹의 진지함, 셋째는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메시아의 직능을 파멸케 하는 유혹으로부터의 승리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실존에 대한 구원 사역은 인간의 실존적 소외 대한 그의 전적인 참여와 이 소외에 대한 승리에 의해 성취된다. 이런 전적인 참여와 극복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다”라고 설명한다. 틸리히는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된 사건으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십자가의 상징은 인간 실존적 소외에 대한 그리스도의 전적인 참여를, 부활의 상징은 인간의 실존적 소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낸다. 틸리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상징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 상호의존적인 관계가 있다”고 한다. 틸리히는 십자가와 부활의 두 사건에 사실적 요소가 있음을 확신한다. 만약 사실적 요소가 없다면 그리스도는 실존에 참여 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틸리히는 인간실존의 문제를 분석함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새 존재’를 제시해 준다. 새 존재는 실존의 소외에 참여하여 소외의 모든 결과를 극복하고 하나님과의 통일성을 유지한다. 새 존재는 구원의 힘이며 이런 새 존재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참여하며 이를 통해 변화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불안, 고독, 우울 등의 소외 현실을 잘 분석하여 변증적인 신학을 전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직신학 성령론]루터, 칼빈, 웨슬리, 칼바르트, 폴틸리히의 성령론 이해
A 성령이해 총론
1. 동방교회의 성령이해
동방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온다고 보는 성부 중심의 성령으로 이해하였다. 성부 중심의 성령이해는 보편적이며 우주적이고 관념적이다. 동방교회는 유대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성부를 통한 성령이해를 강조한다. 동방교회는 하나님과 아들은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오리겐은 수련과 기도를 강조하여 아버지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하는 성부를 통한 성령을 강조했다.
2. 서방교회의 성령이해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와는 달리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온다고 보는 성자 중심의 성령으로 이해하였다. 성자중심의 성령이해는 구체적이고 인격적이며 윤리적이다. 즉 인간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관심을 두었다. 서방교회에서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성자를 통해 성령이해를 강조하는 것이다.
3. 삼위일체론적 성령이해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내려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5:26) 보혜사 성령을 언급한 요한복음15장 26절을 볼 때 성령은 예수가 떠나가신 후에야 오신다. 성령의 보냄은 아들의 보냄과 밀접한 병행을 이루고 있다. 보혜사는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어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보혜사는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시는 간격을 메우기 위해 오신다. 그러나 보혜사는 단순히 예수의 사역을 계승하는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성령은 원래의 주어진 예수 교훈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진리로 인도한다. 성부가 성령을 약속하셨고, 성자가 성부로부터 그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령은 예수를 증언한다. 이를 볼 때, 성령을 받는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다. “여러분은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은 성령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버지의 영과 아들의 영은 같은 영이라고 보았다. 이 세상 만물이 살아나는 것은 보편적인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자연 만물 속에 생명의 원동력으로 역사하신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령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사역에서 성령과 함께하셨다. 예수께서 시험을 받기위해 광야에 갈 때도 성령에 이끌리어 갔다.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은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성령에 이끌리어 하신 것, 즉 삼위일체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성부만을, 혹은 성자만을, 혹은 성령만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삼위일체적으로 세 위격의 균형에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B 성령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1. 마틴 루터의 성령론
루터는 조직적인 성령론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성령론을 전체적으로 조직신학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한계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의 글들을 살펴보면 여러 다양한 말들 가운데서 그만큼 성령에 대한 언급들도 등장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루터는 야고보서가 정경성을 갖지 않는 이유들을 제시했는데, 그 이유들 중 하나가 야고보서가 “성령에 관해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루터는 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어떤 책의 정경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여겼다. 루터의 성령론은 그의 내적 고뇌에 대한 경험과 ‘십자가 신학’에 대한 반성을 거치면서 다듬어졌다. 루터에게서 성령은 어거스틴-스콜라주의 틀에서 주장되는 은총의 특질이 아니라, 고난과 절망 가운데 서 있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자신이다. 루터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신앙은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외적인 말씀이 없이도 매 한가지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사전에 그 외적인 말씀을 들어야 하며,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것을 경시하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의 골방으로 와서 너와 함께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결의된 것이며, 외적인 말씀은 설교되고 또 선행해야 한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말씀을 귀와 마음에 담았다면, 그리고 나서 참된 스승인 성령이 와서, 말씀이 옷 입도록 그 말씀에 힘을 준다”고 말한다. 루터는 성령이 말씀에 매여 있음은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삶에 매여 있음을 의미하며, 영의 역사가 말씀에 매여 있음은 율법과 복음으로서의 신적인 이야기의 명백성을 분명히 한다. “수단없이” 일어나는 영의 말은 많은 내용을 지닐 수 있으나 말씀은 일의적임을 설명한다. 루터의 신학에 있어서 성령이 주는 것은 단순한 은총의 주입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영적 체험이며, 이 실제적인 체험이 루터의 의인론이 담고 있는 영성의 지평을 가늠한다. 사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출발은 그의 의인론에 담겨있는 성령론적 차원을 간과할 때 믿음은 쉽게 ‘공적주의화’되거나 인간의 심리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성령은 더 이상 초월적인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에 주입되는 신적 에너지이거나, 이것을 통해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을 향한 숭고한 충동인 사랑이 산출되는 플라톤적인 철학을 말하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어거스틴적 스콜라주의의 은총주입신학 내지는 신플라톤주의적인 영성신학에 저항하는 ‘성령론에 대한 재발견’으로 해석될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성은 ‘모방의 경건’이나 ‘인간의 숭고한 영적 노력’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신 성령과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만남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2. 존 칼빈의 성령론
1909년 프린스톤의 유명한 신학자 워필드(B. B. Warfield)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르면서, 신학에 대한 칼빈의 가장 위대한 기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교리인데, 그의 성령론의 성격은 구원론적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로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성취하신 화해 내지는 구속이 성령에 의하여 어떻게 인간에 실현되는가를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 제 Ⅲ권에서 취급한다. 이 부분이 그의 성령론에 해당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1권 13장에서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는데 특별히 성령의 신성(deitatem Spiritus)에 대하여 14절-15절에서 취급한다. 그는 먼저 13장에서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면서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위격(persona)이란 용어에 대한 비난에 대하여 성자를 그 본체(hypostaseos)의 형상(히1:3)이란 구절에 근거하여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는 실재(subsistentiam)이고, 이 이론은 성령에게도 적용되어 성령도 성부와 구별되나 본질의 구별(distintio essentiae)은 아니라고 하였다. 칼빈에게서 성령의 활동은 성령과 우주, 성령과 인간, 성령과 교회의 삼중적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칼빈은 성령의 사역의 가장 큰 원의 사역을 삼위일체와 관련시켜 기독교 강요 1권 13장 14-15절에서 다루었고, 두 번째 원에 대해서는 2권 2장 12절-17절에서 다루었고, 가장 좁은 원은 3권과 4권의 성령론에서 다루었다. 첫 번째 원인 우주 그 자체에서 성령의 활동을 칼빈은 질서를 유지하고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이해한다. 성령의 능력은 첫 번째로 창조 세계가 무질서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창조의 질서와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성하기 전에 그것은 엉성한 덩어리였다는 것을 이미 들었다. 그(모세)는 이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통치 혹은 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무질서한 덩어리들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이 마음에서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덩어리는, 아무리 혼란스럽다 하더라도, 당분간 성령의 비밀한 효율성에 의해 안정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또한 모든 인류와 관련된 성령의 사역을 취급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성령의 은총이기 때문에 일반 은총이라 불리는데, 기독교인과 일반 은총의 관계에 대하여 지금도 견해가 다양하다. 칼빈은 사도행전 17:28에 대한 주석에서 하나님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영감을 통해 자신이 무로부터 창조한 것들을 보존하신다고 언급한 후에 사람의 생명은 운동보다도 훨씬 더 우월하며 운동은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하였다. 그는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야만적인 짐승들과 공통으로 감각과 운동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지 않은 이성과 지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 속에 있는 생명은 짐승 속에 있는 생명보다 우월하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사람이 이성과 지성을 소유하여 다른 피조물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에 의해 우리 안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것의 원래의 모습은 그것의 회복으로부터 판단할 수 있다. 골로새 3:10절과 엡4:23에 호소하면서 칼빈은 회복된 형상이 부분적으로 참된 거룩과 의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칼빈은 성령의 성화와 연관시켜 “성령은 선악을 분별하지 않고 돌진하는 경박한 영이 아니라, 지혜가 가득하고 공정과 부정을 바르게 분별하는 총명이 가득한 분이시며, 사람에게 한도와 절제를 지키도록 가르치시는 영이라고 지적하였다. 성령은 신자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파견되셨으므로, 많은 죄와 무기력에 둘러 싸여 있는 신자들은 꾸준히 계속해서 전진하면서, 죄와 싸워야 한다”고 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의 본질, 교회의 정치, 교회의 직제와 권세, 다음으로 성례 등 교회론에 대하여 논하였다. 칼빈의 교회론 중에서 성령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몇 가지 점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칼빈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장로교회의 4중 직제와 조직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1541년의 제네바 교회 법규와 기독교 강요에서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4중 직제를 논하였다. 교회 법규와 기독교 강요의 직제에 대한 논의는 주로 이들의 선출 방식이나 임무 등과 같은 외적인 측면을 다루었고, 그들의 소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 주석과 설교 등에서는 성직자들의 소명을 성령론과 연결시켜 심도있게 논하고 있다. 칼빈은 성령이 단순한 신적 능력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제 3위임을 강조하고, 성령께서 창조와 우주 질서를 유지하시며, 모든 사람에 공통적인 일반 은총의 근원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그의 성령에 대한 언급은 주로 교회와 관련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령의 역사의 우주적 사역, 인간 사회의 일반 은총의 사역을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관련된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3. 존 웨슬리의 성령론
웨슬리의 신학에 있어서 성결은 핵심주제이다. 성결은 성부 하나님의 뜻이요 목적이며, 그의 거룩한 사랑에서 기인한다. 또한 성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목적이요, 그 결과이다. 또한 성결은 성령의 활동에 의해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구원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 죄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만, 인간 심령 속에서의 구원의 역사와 성결의 성취는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다. 사람이 칭의될 때 그는 거듭나게 되며 성령으로 났기 때문에 그것은 성화의 완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성화의 문에 들어간 것은 틀림없다.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인간의 주체성의 내면으로부터 활동하는 것은 성령이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내적 은혜는 우리 안에서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자신인데, 곧 성령이신 하나님이시다. 성화는 성령이신 하나님의 행위인데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영혼을 죄로부터 해방하시며, 성령충만에 의한 사랑으로 온전케 하시는 은총이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현존이다. 또한 성령은 성자 하나님의 현존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하는 적극적인 진술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리스도는 멀리 떨어진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그의 성전으로 만들어 믿음에 의하여 우리의 심령에 거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 구원론적인 면에서 고찰할 때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건을 현재화하고 구체화 시킨다. 이는 성령이 우리로 그리스도에게 신앙적으로 의존하도록 이끄시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성령관에서 중요한 점은 성령이 하나님의 내재를 나타내며 그가 사람의 요구를 섬기기 위해 항상 함께 계시다는 점이다. 웨슬리는 “모든 진실한 믿음과 선한 사고와 행동 즉 구원의 전 과정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성령은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의 성취자로서 큰 비중을 지니고 있다. 곧 성령은 구원의 사역자이시다. 구원의 사역자이신 성령께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부패한 심령에서 솟아나는 모든 죄를 깨닫게 하여 천국민의 자격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인간의 지성을 계몽하여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깨닫게도 하신다. 또한 성령은 인간의 의지와 감정에도 작용하여 악에서 돌이켜 선한 생각을 갖게 하여 선을 행하게 하기도 한다. 성령은 우리의 모든 거룩한 것과 선한 것의 원천이 되신다. 성령은 자발적인 사역자이시며 “하나님의 집행자”이시다. 성령이 또한 ‘성결의 영’으로 묘사되는 것은 사람이 성결함을 받고 거룩하여지는 것도 오직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성결은 그 시작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성령으로 말미암아’이루어지는 것이다.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를 상관성이란 말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칭의의 역사는 그리스도에게 해당하고, 성화의 역사는 성령에게 해당된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역사에 의존하고, 신생과 함께 시작하는 성화는 성령의 주관적 사역에 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웨슬리의 신학은 일반적으로 경험의 신학으로 불리웠다. 그의 특색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긍정한데 있다. 그렇다면 웨슬리가 의미하는 경험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이 사랑의 하나님의 임재를 뚜렷하게 직감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웨슬리는 경험과 실재를 동일시 하였다. 당시의 이신론과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웨슬리는 경험주의적 신학을 내세웠다. 당시의 종교는 인간의 선행을 강조하였고, 형식주의에 빠졌으며, 신앙은 이성적 기준에 냉랭하게 차가워 졌으며, 신학이나 설교도 기독교를 변증하느라 생명이 없는 이성적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웨슬리는 자신의 복음적 회심 체험에 근거하여 성령의 의한 마음과 생활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웨슬리 신학에서 경험은 중요한 요소이자만 권위의 원천이 아니라 권위의 활용이다.
4. 칼 바르트의 성령론
칼 바르트가 그의 인생의 황혼기에 바젤 대학에서 1961년-1962년 사이에 행한 강연에서 성령에 관한 자신의 신학을 정리하였다. 그는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3:17)는 말씀에서 말하고자 하는 자유는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개방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개방케 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자유이다.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은 주 하나님이신바 바로 성령이시다”라고 말한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오 성부, 성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이 성령은 창조주, 화해주, 계약의 주로서도 행동하셨고, 바로 이러한 주님으로서 하나님의 행동(창조, 화해, 계약)을 조명하는 힘으로 인간들 가운데뿐만 아니라 인간들 속에서 거하시고, 거하셨고, 거하실 것이다. 성령은 운동하는 공기요, 움직여진 대기이다. 인간은 이 공기와 대기 속에서 이 성령에 의하여 인식된 자와 이 성령을 인식하는 자로서, 이 성령에 의하여 부름 받고 이 성령에게 순종하는 자요 성령의 말씀에 의하여 증거 받은 자로서 살 수 있고, 사고할 수 있으며, 말할 수 있다. 성령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하는 고백을 깨우치시고 산출시키는 힘이다. 이 성령의 실존과 행동은 이 세상 속에 기독교를 가능케 하는 힘이다. 성령은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말씀을 증언하는 자들로서 각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행동을 가능케하고 실현시킨다.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에 대해 “성령의 힘 영역 내에서만 복음의 하나님에 대한 겸손하고, 자유로우며, 비판적이고, 기쁨에 넘치는 학문이요 영적인 신학이 될 수 있으며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신학은 성령께서 진리이심을 신뢰하는 용기를 가질 때만 진리물음을 제기하기도 하교 대답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성령이 신학에 임재하고 신학 위에 군림하는 일이 신학에 일어날 수 있으며 이 경우 신학은 이를 피하지도 말고, 자기마음대로 제어하게도 말고 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한다. 성령을 떠난 신학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에 속한다. 신학이 성령을 떠나면 역사화, 심리학화, 합리화, 윤리화, 낭만주의화, 교리화 그리고 골똘히 생각하고 꼬치꼬치 물으면서 회전운동을 한다. 성령은 신학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에 의하여 수용되기를 기다리시며, 새롭게 예배와 찬송을 받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신학은 성령을 움켜쥔 다음 소유물로 만드는 식으로 이 성령을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성령이 물, 불, 전기, 원자에너지등과 같이 인간에 게 발견되어지고 제어되었으며 운영되고 있는 자연의 힘인 것처럼... 성령이란 전제로서의 영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성령을 전제하는 신학은 비영적인 신학일 뿐이다. 따라서 교회공동체와 신학이 항상 새롭게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려면 “창조자 성령이여 어서 오시옵소서”, “오시옵소서 오시옵소서 당신, 생명의 성령이시여”라고 탄식하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신학도 민첩하고 활발하게 이와 같이 간청하는 일을 해야 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 부유하다. 신학은 다른 전제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대단하며 가난하지만 부요하고 지탱받으며 유지된다. 왜냐하면 신학은 성령의 약속을 확고히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꿰뚫고 탐구해 들어가되 하나님의 심오한 것 까지 알아내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바르트의 성령에 대한 이해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의 신학은 성령론적인 관심 속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윤리적이며 현실적이었고, 또한 그리스도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상황적이 아니라 텍스트적이었다. 바르트의 신학이 그리스도론적 사고로 우리의 삶의 근거를 마련했다면, 성령론적 사고는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도록 하였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요구하고 있다.
5. 폴 틸리히의 성령론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 제3권의 내용을 중심으로 성령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두 가지 주제를 각각 생명 현상 및 역사와 연관시켜 다루고 있다. 틸리히는 종교적 상징성이 모호하지 않은 삶을 표현하기 위해 중요한 상징을 낳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영(성령)”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피조물의 삶속에 있는 신적 삶의 현존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현존으로서의 하나님의 영은 삶의 모든 차원에 영향을 주어 인간의 영(spirit)안에서 이해되어질 뿐이다. 성령의 현존은 인간에게서만 발생한다. 인간은 자기를 인간으로 경험할 때 그 본성에서 그의 삶의 한 차원으로서의 영에 의하여 결정되는 존재라는 것을 의식한다. 이 직접경험은 상징적으로 영으로서의 하나님(God as Spirit)에 대하여 또 하나님의 영(The divine Spirit)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용어들은 하나님에 대한 다른 모든 명제처럼 ‘상징’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 안에 머무르며, 그리고 행동하고 있다고 보며 이것은 인간의 영이 무엇인가의 궁극적인 것, 무조건적인 것에 붙잡힌 것을 말한다. 이때 성령의 현존에 의해 붙잡힌 상태를 황홀(Ecstasy)이라고 한다. 황홀은 성령의 현존 밑에 인간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령의 현존은 계시경험과 구원의 경험에 황홀상태를 창출하여 인간의 영으로 자기를 넘어서게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인, 다시 말하면 합리적인 구조를 파괴하는 일은 없다. 황홀은 통합된 자기의 중심성을 깨지 않는다. 영적 현존경험의 황홀적인 성격은 인간정신의 합리적 구조를 파괴하지는 않지만 인간정신만으로는 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한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언제나 본질적 요소와 실존적 요소가 함께 섞여 있다. 삶의 본질적 측면을 이해하려 할 때 비로소 삶의 다양성과 통일성이 이해되고 삶의 본질적 측면이 이해될 때만 삶의 실존상황 속에 내포된 삶의 모호성을 이해하게 되고 삶의 완전 상태를 요청할 수 있게 된다. 틸리히에 의하면 인간의 삶에는 개체화와 참여의 양극성 원리와 형식과 역동성의 양극성 원리, 그리고 자유와 숙명적 제약의 양극성의 원리가 있다. 그런데 삶의 세 가지 기능은 인간실존 상황에서 좌절이나 충돌없이 전개 되지 못하고 언제나 굴복되고 좌절된다. 그래서 삶은 언제나 모호성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틸리히는 삶속에 깃든 모호성을 상황의 실재로 분석․해명하고 모호하지 않고 분명한 참된 삶, 영원한 삶을 요청함에 있어서 그 요청을 기독교 신앙은 성령의 능력 속에서 새로워지고 성취된 생명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삶의 한 차원으로서 인간 삶은 모든 삶이 그런 것처럼 모호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은 모호하지 않은 삶을 창조한다. 본질적 존재와 실존적 재결합에서 모호한 삶은 그 자신을 넘어서 그 자신의 힘으로 달성할 수 없었던 초월로 높여진다. 초월적 결합은 삶의 모호성에 합축된 일반적 물음에 대답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 내부에서 황홀 운동으로 나타나며 어떤 관점에서는 믿음(또는 신앙)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다른 관점에서는 사랑이라고 불린다. 이 두 가지 상태는 초월적 결합을 나타내며 인간 삶 속에서 성령의 현존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현존은 신앙과 사람을 통하여 인간을 모호하지 않은 초월적 통이로 높이는 동시에 본질과 실존사이의 틈을 넘어서, 결과적으로 삶의 모호성을 넘어 ‘새로운 존재’를 창조한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게서 왜곡되지 않고 현존했다. 그의 삶은 성령에 의하여 사로잡혀 있었다. 즉, 하나님이 그의 안에 계셨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되게 했다. 예수를 그리스도가 되게 한 것은 나사렛의 예수로서의 인간의 영이 아니고 그의 개인 영을 사로잡아 움직인 성령의 현존이며 그의 안에 계신 하나님의 것이다. 또한, 예수 안에 그리스도를 창조한 성령은 인류를 예수 안에 ‘새로운 존재’와 만나게 하기 위해서 과거에 준비하였으며 지금도 또한 계속 준비하고 있는 같은 성령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성령의 현존에 의해 창조된 영적 공동체는 새로운 공동체인데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체험을 통해 형성된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반성이다. 오순절 사건에는 다섯 가지 의미가 있는데 이 요소가 성령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교회 안에 있다고 보았으며, 그리고 모든 역사와 모든 종교현상의 부분(잠재적 교회)안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보았다. ■[조직신학 인간론]루터, 칼빈, 웨슬리, 칼바르트, 폴틸리히의 인간론 이해
A 인간이해 총론
1. 인간이해 방법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신체를 이해하는 의학,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 인간생활을 연구하는 문화인류학, 인간의 사상과 정신을 연구하는 철학, 인간행동의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사회학이 있다. 그렇다면 신학적으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신학적 인간학을 다루기에 앞서 동·서양의 인간 이해가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 두어야 한다. 인간이해는 시대별, 개인별로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보편적으로 동양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보고 있다. 반면에 서양은 인간을 자연의 정복자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데올로기에 잡혀 있느냐에 따라 인간 이해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종교에 따라 인간 이해가 다르다.
2. 신학적 인간이해
신학적 인간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성서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성서 안에서 인간 이해를 알기 위해서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기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인간창조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께서 손수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인간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시 되었으며 인간창조는 말씀에 의해서 발현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늘의 신성한 것이 땅의 재료를 이용하여 인간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류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은 영, 혼, 육이다. 인간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3원론이 아니라 그 자체이며 전인적인 것이다.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신학의 방향이 결정된다.
1)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인간 코람데오란 “하나님 앞에”있는 인간 곧 죄인 됨을 뜻한다. 이 말의 중요한 의미는 정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의식하고 몸 둘 바를 모르는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죄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과격하게 대치하는 관계가 발생하였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코람데오의 인간은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창세기3:10)”라는 본문을 근거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도망자”임을 설명한다. 이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없이는 구원될 수 없으며 “나는 죄인이다”라는 고백만이 사죄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코람데오의 인간이해는 인간은 오로지 저주받을 상태밖에 없다고 보고, 인간의 철저한 불가능성(선을 행할 수 없는)을 강조하였다. 이런 인간이해는 현대 개신교 신학에서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2)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라틴어로 ‘이마고 데이’(Imago Dei)인데 그 뜻은 하나님의 모양, 혹은 모습이란 뜻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종속되고 의존적인 존재인 반면 아주 독특한 개체적인 특성을 지닌 독립적인 존재라고도 말한다. 즉 종속성과 독립성을 두개를 다 말하는 아주 신비적인 개념이라고 말한다. 또한 육신을 가진 육신적인 것과 함께 정신적 영적인 면까지 모두 갖춘 전인적인 인간으로 설명한다. 인간을 좀 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존재로서 바라보는 “이마고 데이”는 현대 개신교 신학에서 좀 더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3. 예수의 인간이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은 성육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생애를 준비하기 위하여 40일 금식기도를 했다. 금식 직후에는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 예수께 가해진 마귀의 시험은 3가지(육체적 생명을 겨냥, 영적생명을 겨냥, 수단, 사명, 사역 자체를 겨냥)였다. 예수께서 받은 시험은 인간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충분했다. 예수께서는 말씀에 복종해야 하며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게 사는 것을 인간의 삶의 목적임을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사회는 율법주의 사회였다. 율법의 기준에 의한 선과 악의 구분이 있었던 지라 율법을 지킬 수 없었던 계층(세리, 창녀, 여성, 아이, 어부 등)은 유대사회에서 소외대상이었다. 누가복음 15장에 잃어버린 양과 돌아온 탕자, 잃어버린 은전에 대한 비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대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과 악의 구분은 율법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었다. 예수께서 당시의 세리, 창녀 등과 더불어 교제하셨던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다시 회개시켜 새로운 세계를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즉 율법의 세계에서 믿음의 세계로 가게 하는 것이었다.
4. 현대의 인간 이해와 문제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평등하게 창조하셨다. 또한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에 대한 뚜렷한 구별을 하셨다. 그러나 곧 성 질서가 붕괴되면서 인간의 본질도 붕괴되었다. 성 구별이 없는 이데올로기는 동성연애자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동성연애자들 또한 성 구별이 모호한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이르러 인간복제연구는 활성화되었다. 인간복제는 종교적 입장뿐만 아니라 윤리적 입장에서도 부당하다고 여겨진다. 만일 인간복제 연구가 성공하여 복제인간이 탄생된다면 과연 복제된 인간에게 ‘영혼’이 존재하는가? 인간복제(Cloning)― 복제 될 인간의 영혼이 있는 것인가? 인간복제는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 질서 안에 있는 과거의 성경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우리는 21세기에 발생하는 문제와 발생할 문제들, 과거로부터 진행되고 있지만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정당하게 답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21세기에 나타나는 인간의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인간 이해에 대한 성경적인 뚜렷한 정의가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B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1. 마틴 루터의 인간론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가지 본성을 지닌 존재이다. 영적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육적인 존재, 내면적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외적인 존재, 그리고 옛 사람인 동시에 새로운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의 두 본성에 대한 특성은 그의 칭의론 신학에서 주장하는 “인간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라는 말속에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루터에 의하면 인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세속권력: 어느 정도까지 복종되어야 하나”(1523)에서 루터는 인류를 두 그룹(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리는 아담의 자손들, 즉 모든 인류는 두 계층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있는 자들과 세상 나라에 속해 있는 자들로 구분되어진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실한 신자들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세상 나라에 속하며, 법 아래에 있다. 거기에는 기독교적 삶을 살거나 악을 대적하지 않고 그들 자신도 악을 행치 않는 참된 신자들은 거의 없다” 루터에게 비 그리스도인(자연인)은 육적인 존재이며 외적인 사람이요 세상 왕국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의롭게 여겨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루터의 칭의론, 즉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주장에서 두 가지 포인트를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첫째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인 죄인이다’라는 인간이해와 둘째는 ‘인간의 어떠한 선행도 구원에 상응할 만한 조건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간 본성은 전적으로 원죄에 의해서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지 그 자신의 공로나 선행에 의해서 자신의 구원에 공헌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순전한 선물이다. 칭의는 인간의 본질적인 죄악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 지금 여기에서 의롭게 된 존재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자신들의 죄 된 본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 본성의 이중구조(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는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실존방식에 기본적인 틀을 제공한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할지라도 그들은 세상 권력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세상 끝날 까지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로마서 강해”(1515-1516)에서 루터는 말한다.
우리는 죄인들이다. 하지만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써(imputation)에 의해서 의롭게 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자유 하도록 약속하시는지를 믿는다. 한편 우리는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갈망하면서 하나님께서 죄를 우리에게서 취하실 때까지 죄에 저항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 사실상 죄인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하게 치유하실 때까지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계속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확실한 죄 사함의 보증에 의해서 의로운 사람이다.
의롭게 된 사람들일지라도 여전히 세상 정부의 칼의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세상 법의 지배를 받으며 법에 의해서 통제 받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죄와 악마의 노예들이기 때문이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라는 이원구조에서 인간 본성을 파악하는 루터의 입장은 정치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그의 태도를 기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항상 세상의 악마적인 힘들과 타락의 정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사회의 오류들은 사회 제도들이 아닌 인간의 악한 본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루터는 사회나 정부 기관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악한 사회구조는 악한 인간들에게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회개혁 방법은 제도나 기관들의 개혁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인 개혁에 놓여있다. 어떤 점에서 루터의 정치사상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그는 기존 사회 질서나 구조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에게 문제는 세상의 기관들이 아니라 그 기관들에서 일하는 인간이다. 다른 한편 그의 사상은 강력한 도덕적 급진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세상은 인간 본성의 죄 성에 의해서 악하게 타락하였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사회개혁을 위해서는 통치자들과 백성들의 도덕적인 삶의 철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의롭게 여겨진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선행을 계속해야 한다.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의 원칙은 중세 후기 교회의 선행의인화(works-righteousness)신학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또 다른 면으로 세상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에서 루터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모든 만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주인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 모든 만물에 완전히 의무를 다해야 하는 종이다.” 루터는 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이중적인 도덕성을 보여준다. 아무튼 루터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인 이해는 난해하고 복잡한 질문을 제기한다. 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윤리적인 계명들을 악이 지배하는 세상 현실에서 실천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한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어찌 보면 서로 대립되고 모순된 두 영역에서 동시에 살 수 있는가? 루터는 이 문제를 그의 두 왕국 시스템에 의해서 해결한다. 따라서 루터의 두 왕국론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라는 인간 존재의 두 본성들에 대한 루터의 이해에 상응하면서 그리고 신학적, 인간학적인 고려들의 기초 위에서 세워진 인간 상황에 대한 방법론적인 해석을 구성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 관계적인 존재로서 규정한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루터는 서방 역사에서 바울, 어거스틴 이후로 인간의 죄 성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질문하고 거기에 도전했던 사람이었다. 루터는 인간을 갈등과 대립과 긴장이 되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세속인간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의 현실적인 실존방식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2. 존 칼빈의 인간론
칼빈은 인간론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서두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제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작품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 지혜, 선에 대한 가장 고귀하고 가장 두드러진 표본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음에 말한 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상응하는 인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 지식은 이중적이다. 즉,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상태는 어떠했으며,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선 칼빈은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혼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가 이해하기로는 ‘영혼’이라는 말은 불멸적이면서도 창조함을 받은 본질을 의미하며, 이것은 인간의 보다 고귀한 부분이다.” “신적인 요소가 영혼 혹은 정신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보다 영혼에 관련된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영광이 외적 인간에 빛나고 있지만, 그의 형상의 본래의 자리가 영혼 안에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실상 나는 우리의 외적 형태가 우리를 동물과 구별하고 분리시키며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결합시켜 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모든 생물들은 땅을 내려다보도록 굽어져 있으나 사람은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하늘을 응시하며 별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형상’과 결부시키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 대해서 강한 논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단, 이 외적 표지들 속에서 보이고 번쩍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영적이라는 것을 확고한 원리로 삼는다면 말이다.” 칼빈은 창세기에 나오는 ‘형상’이라는 말과 ‘모양’이라는 말을 현대 구약학자들이 ‘동의적 평행법’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형상’이라는 말과 ‘모양’이라는 말에 대해서 해석가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 두 말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차이점을 찾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모양’이라는 말은 설명을 위해서 첨가된 것일 뿐 그 두 말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첫째로, 우리가 아는 바로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흔히 있는 일인데, 그들은 한 가지 것을 두 번 되풀이하여 표현한다. 다음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까닭에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다. 따라서 이 두 말을 더욱 난해하게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이상스럽게 보인다. 그들은 ‘젤렘’ 즉 형상이라는 말을 영혼의 실체에 적용하고 ‘데무트’ 즉 모양이라는 말을 영혼의 성질에 적용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이어서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 말은 아담이 받았던 완전함을 의미한다. 아담은 바른 이해력을 충분히 소유하였고 감정을 이성의 경계 내에 두었으며 일체의 감각을 적절한 질서에 따라 조절하였다”하고 말하였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에는 정신의 빛과 심정의 바름과 모든 부분의 건전함에서 가시적이었다는 점이다.” 칼빈은 영혼의 기능에 대해서 다룬다. 이 문제에 있어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서 철학자들의 견해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였다. “나는 이 기능에 대하여 정교하게 논하는 일을 철학자들에게 넘기기로 하겠다. 우리에게는 경건의 확립을 위한 단순한 정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사실상 나는 그들이 가르치는 것들이 참되며,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배워서 유익한 것이며, 또한 능숙한 솜씨로 수집된 것임을 인정한다. 나는 그들을 연구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금하지 않는다.” 또한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플라톤의 견해는 더욱 정확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 안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칼빈은 either/or 의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철학에 대해 비판적으로만 보았으나 후기의 칼빈은 그 사고 구조가 both/and 로 변화되어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철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후기에 와서도 성서의 가르침과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동등하게 둔 것이 아니라 성서의 가르침을 중심에 두고 철학자의 가르침을 보조적인 것으로, 혹은 주변적인 것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영혼은 무형의 실체이다. 그리고 영혼이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집에 머물 듯이 육체에 머물며, 육체의 모든 부분에 생기를 넣어 주고, 육체의 모든 기관을 각각의 행동에 적절하고 유용하게 한 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첫째 자리를 차지하며, 그리고 지상 생활의 의무만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자극한다는 사실이다”하고 칼빈은 영혼의 기능을 설명하였다. 칼빈은 영혼이 두 부분, 즉 지성과 의지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성의 직임은 대상을 식별하여 대상을 시인하든가 시인하지 않든가 하는 것이다. 한편 의지의 직임은 지성이 선이라고 선언하는 것을 선택하며 따르고 지성이 부인하는 것을 배격하며 피하는 것이다”고 설명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결코 하나님의 본체의 주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형상의 회복에 관해 논의할 때 우리는 그의 말에서 인간은 본체의 유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과 권능에 의해 하나님께 일치함을 받는다는 것을 추론해야 함이 분명하다. 성령은 확실히 우리 안에서 일하지만 우리를 하나님과 동일 본질로 만들지는 않는다” 또한 칼빈은 이 형상은 하나님이 본성에 의해 우리에게 넣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에 의해 우리에게 넣어 준 것이라고 말하였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완성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기 시작하며 매일 더욱 더 그것으로 변형된다. 그러나 형상은 영적인 중생 안에 이루어진다. 칼빈의 인간이해는 비록 현재의 인간의 모습은 온전치 못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영화의 나라에서는 온전케 될 것임을 말한다.
3. 존 웨슬리의 인간론
웨슬리의 인간 이해는 그의 복음 사역의 동기와 목적을 제공하고 있다. 웨슬리의 인간 이해를 아는 것은 그의 신학과 부흥운동의 이해에 매우 중요하다. 웨슬리의 사상은 루터와 칼빈의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를 살펴보면 인간의 죄성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는 성서적 근거로부터 기원되었다. 원죄는 먼저 아담의 자범죄인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를 말하며 이것이 최초의 죄이다. 이러한 원죄로 인해서 개체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죄성을 지니게 되었고 집단적으로는 인류 전체가 타락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담은 모든 인간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은 인류전체가 지은 것이고 그의 부패는 인류의 부패인 것이다(롬 5:12). 이러한 아담의 타락은 인간 본래의 완전성을 유실하였으며 인간본성의 완전타락을 가져왔다. 그 결과 아담의 후예는 생태로부터 영적으로 죽어있으며 아담에게 있었던 의와 거룩함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 것이다. 이처럼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인간의 상태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원시적인 완전성(primitive peerfection)이 변화되었고,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타락하였다. 예외 없이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다 타고난 죄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에서 근원된다. 곧 웨슬리는 아담의 죄가 인류 타락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744년의 의사록에서 웨슬리는, ‘어떻게 아담의 죄가 전체 인류에게 유전될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아담 안에서 인간은 죽었다. 즉 첫째로 우리의 육신이 그때에 죽을 수밖에 없었고, 둘째로 우리의 영혼이 죽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떨어져 나갔다. 셋째,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죄적이며 악마적인 본성을 지니고 태어났다. 넷째, 따라서 우리는 모두 진노의 자식이며 영원한 죽음을 받을 수밖에 없이 되었다.
이러한 원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웨슬리가 St. Paul과 St. Augustine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웨슬리 신학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의 이러한 심각한 죄관은 종교개혁자들과 후에 나타나는 정통주의자들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은총밖에 있는 인간(자연인)의 상태는 완전 타락한 상태라고 주장하는 웨슬리의 깊은 통찰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담의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는 이 세상에 고통이 생겼다고 하는 사실이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은 인류에게 영원한 짐이 되었다. 왜냐하면 원죄로부터 자범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원죄와 자범죄를 비교해 보면 원죄는 죄의 모체이고 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악한 줄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자범죄이다. 자범죄는 또한 의지적인 자범죄와 무의지적 자범죄로 나눌 수가 있다. 의지적인 죄는 외부나 내적 유혹에 대해서 의지가 결정을 내진 죄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망과 고통이 따르는 죄이다. 의지적인 죄는 마음에 있는 내적인 죄와 행동으로 보인 외적인 죄가 있다. 무의지적인 죄는 비고의적인 실수나, 판단착오, 기억력 상실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죄책이 따르지 않는다. 인간의 이러한 타락은 아담이 그의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이며 인간은 이로 인하여 자유를 상실했다. 그의 자유의지는 이제 전적으로 속박되어 버렸고 다만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에서만 자유롭다. 타락이후로 선한 어떤 것을 어느 것 한 가지라도 선택할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도움을 받는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인간은 완전히 부패하고 죄책을 가질 뿐 아니라 또한 영원한 사망으로 정죄되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만한 곳으로 한 걸음도 내 디딜 수 없는 속박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인은 완전히 타락하여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인간이다. 영적으로 수면 상태에 있으며, 영적인 것에 대하여는 전혀 무지하다. 자연은 선악에 대한 분별력이 없으며 자유의지는 악을 선택하는 데만 자유롭다. 그러나 웨슬리에 의하면 이런 자연인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모든 죄인에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인간이 구원받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인간에게 역사하고 있으며, 그를 구원으로 이끌며 구원시킨다. 이러한 은혜를 웨슬리는 “선행은총”이라고 칭하였다. 웨슬리의 인간, 죄에 대한 이해의 특징은 첫째, 거룩한 인간을 강조하며 거룩성을 회복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둘째, 은총 안에서 낙관적인 인간관을 가졌다. 셋째,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다. 넷째, 인간과 죄관에는 실존주의적 경향이 짙다. 웨슬리의 성화에 대한 의견에 있어서 루터와 칼빈과는 차이점을 보인다. 루터의 성화는 의인에 대한 강조로 인해서 초기적 성화에 머물고 말았으나 칼빈은 이 보다 좀 더 발전된 면으로서 성화의 점진적인 요소까지는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웨슬리는 성결을 현세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한 믿음으로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이 성서가 강조하는 핵심적인 사상임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4. 칼 바르트의 인간론
바르트에 있어서 신학적 인간학의 기초는 그리스도론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신학적 인간학은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한 인간관이며 그리스도 중심적 인간관이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은 인간의 참된 본성의 최후적 계시”로 본다. 이 말은 곧 인간 예수의 본성만이 인간 본성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된다는 말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본래의 인간학적 진리는 다만 그리스도와 우리 관계를 통해서만 분명하게 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그의 인간학에서 그리스도론에 기초하여 인간의 본성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리스도론적 기초 위에서가 아니면 안 되는 지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늘아래, 땅위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계시된 피조물이다. 또한 인간본질은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으로서, 계약의 대상으로서 영원 전에 정초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선택하시고 그의 계약 대상자로 삼으신 것이다. 계약 대상자로서 인간과 신의 관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를 통하여, 그로 ‘더불어’의 관계성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사람이고 참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바로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며 동시에 선택된 인간본질의 원형이며, 인간본질의 처음과 미래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리스도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하며, 인간의 본질과 그 운명은 그가 없이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에 있어서 신학적 인간학의 기초는 하나님의 선택론이요 그리스도론이다. 또한 인간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원역사인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있는 존재,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있는 존재이다. 그 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간됨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감사와 책임성을 가지고 응답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바르트의 신학적 인간학의 근본적인 두 가지 진술을 얻게 된다. 첫째는, 예수와 함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해 있고 둘째는, 이런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그의 삶과 죽음의 계시를 통해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만 인간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영원 전에 한 대상, 참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셨다는 관계성을 앎으로서 확신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신 영원한 뜻은 무엇인가? 첫째, 그것은 그에 의해서 창조되고 그로부터 떨어져나간 인간을 위해서 그 자신을 내어주려는 것이다. 이 뜻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향하시고 인간을 선택하시고 인간에 사랑으로 말미암아 메이시고 ,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인간성이 깊이 스며있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한 것은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과의 교제를 선택하였고, 인간을 위하여 그 자신과의 교제를 선택하였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을 통해서 인간본질의 운명을 계시받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관계 속에 있는 인간’, ‘공존의 인간성’이 곧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데 즉, 그는 하나님의 형상론을 근본적으로 만남과 사귐의 차원에서 관계적으로 파악하였다. 바르트에게는 만남의 존재, 더불어 있음의 존재,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서의 인간다움이야말로 그의 창조주 하나님을 닮은 유사성이요 그것이 곧 ‘하나님 형상’의 비밀이 되는 것이다. 이런 비밀을 바르트는 진정한 인간 예수의 인간성에서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철저히 하나님을 위한 존재였다. 그리고 동시에, 철저히 모든 사람을 위한 존재였다. 그는 인간과 함께, 인간들 가운데 존재하였으며, 모든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완전한 관계 속에 존재하는 진정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바르트는 이제 하나의 형상을 발견하는데 있어, 더 이상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성에서 발견한다. 이런 구도가 인간성의 기본형식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창 1:26절에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 그 양자가 만나서 어우러지는 생명의 현상 속에 하나님의 형상은 현실화 된다. 서구라파는 개인의 주체적인 자유의식이 너무나 강해서 혼자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자유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결정권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라고 하는 것은 너 없이 완성되었다. 너 없이도 나가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은 주체적 자아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바르트에 의하면 나라고 하는 자기의 주체의식 자체는, 너와의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었다. 깊은 너와의 사귐과 관계성 없이 실존적 주체성은 절대로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바르트는 인간을 말할 때 먼저 하나님을 말한다. 그에게는 “인간은 하나님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설명이 인간구조를 설명하는 최고의 표현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spirit)에 의해 실존한다”는 바르트의 언명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이 말은, 육체와 영혼의 통전으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그 존재가 형성,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은 영을 소유한다. 이것이 바르트의 인간학의 기초적 관점이다. 바르트에 있어서 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그 영이 인간 영혼과 육체의 기초요 근거가 된다. 특히, 인간생명의 이해는 신약성서에 증언되고 있는 통전적 인간 예수에게 그 인식의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곧, 기독교 인간관의 기초가 된다. 예수는 육체를 갖춘 영혼이었으며 동시에 영혼을 갖춘 육체로서 그 양자를 동시에 살았던 참 사람이었다. 바르트는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살피고, 이어 인간의 내적 구조, 즉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설명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이며 동시에 육체이다. 그는 영혼과 육체는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전체적 인간의 존재양태로 파악한다. 바르트는 이것을 인간은 ‘자신의 육체의 영혼’(soul of his body)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영혼을 떠난 육체는 육체일 수 없고, 육체를 떠난 영혼은 영혼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영혼은 상호 종속적이다. 이와 같이, 영혼과 육체는 온전한 통일성 속에 있다. 그러나 양자(兩者)는 기능상 구별될 수 있는 특수성을 갖는다. 이 특수성에 기초해서 영혼과 육체는 질서관계를 이루는데, 그것은 영혼이 먼저이고 육체가 나중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살아있을 수 있게 하는 토대가 하나님의 영인데. 이 영을 받는 것이 인간의 영혼이며 이 영혼에 의해 세워짐을 받는 것이 육체라는 것이다. 이런 영혼과 육체의 관계도 관계유비적으로 설명 될 수 있는데, 서로 함께 있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선후의 질서를 갖는 것이, 마치 하나님과 인간, 야훼와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체 등의 관계들과 유사하며, 관계적으로 상응성을 갖는다. 바르트는 인간본질을 시간성에서 규정한다.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서 인간의 생명은 시간적이라는 말이다. 시간은 인간의 유한한 생명을 한정 시켜주면서도 그의 생명을 근거 지워주고 그의 생명을 담아주는 피조물의 형식이다. 반대로 인간존재의 한계를 그어주시는 자는 무(無)가 아니라 그의 창조주, 계약의 대상자, 영원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본질적으로 다른데, 전자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적으로 살며, 후자는 창조된 시간을 살기 때문에 영원자로부터 구분된다. 인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시간을 창조할 수 없고 소유할 수 없다. 인간에게 시간을 주시는 자는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영원성이다. 영원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영원성은 본래적인 시간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그리스도가 곧 시간의 주(主)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시간의 주이심이 드러났다. 시간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것은 하나님이 그의 영원 속에서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에게 등을 돌리시지 않는, 은혜로우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 임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그 자체로서는 유한한 존재요, 사멸하는 존재지만, 죽음자체가 완전한 끝이 아닌 이유는 바로 죽음 너머에 원리나 무가 아닌, 생명의 주, 시간의 주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것을 ‘끝이 있는 생명의 영원화’라고 표현한다.
5. 폴 틸리히의 인간론
틸리히는 다른 신학적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인간이해 역시 성경이나 교회사의 증언이 아닌 인간의 상황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한다. 틸리히에 있어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오늘날 이런 모습으로 살게 되었는가?, 인간의 궁극적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런 가운데 인간은 끊임없이 비실존의 위협 아래 있는 유한한 존재임을 알게 되고 존재론적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틸리히는 이런 존재론적 불안 가운데 인간은 자유를 사용하여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자 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존재해야 할 이유 또는 존재에의 용기를 확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성과 의존성과 제한성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자기의 힘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자율적이며 절대적인 존재로 자신을 만들어 가게 된다는 것이다. 곧 삶의 의미를 자기보다 더 큰 분에게 발견하기보다는 자신이 그 의미가 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 틸리히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를 행사하여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에 따라 결정하지만 자신과 이웃,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다. 사람들이 절망, 공허, 냉소주의, 생의 무의미 등에 빠지는 근본 원인은 자유를 근본적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인간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소외이다. 인간의 실존이란 바로 ‘소외’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의 존재의 근거와 다른 존재들,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본질에서 실존으로의 전이는 개인적 죄책과 우주적 비극을 낳는다고 표현한다. 틸리히는 창세기 3장의 인간 타락 이야기를 통해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기사는 실제 있었던 사실이 아닌 인간이 그의 유한한 자유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어떻게 본질적 상태로부터 실존적 상태로 옮겨갔는지를 말해주는 상징적 이야기 즉 신화라고 본다.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 소외는 불신앙, 오만, 정육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틸리히가 이해한 불신앙은 단순히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려는 인간의 근본적 성향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곧 불신앙은 인간이 그의 지식과 감정, 의지에 있어서 총체적으로 그의 존재의 원천이자 능력인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불신앙은 그의 존재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오만은 우월감이나 자만심을 뜻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끌어 올리려는 인간의 내면 성향을 뜻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한없이 고양시키고 절대화하려는 근본적인 욕구 내지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정욕이란 인간이 자기 삶의 결핍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자기를 위하여 끌어당기고 축적한 후 그것들에 의지하여 생의 불안을 극복하고 삶의 의미를 확보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인간의 불신앙과 오만, 정욕으로 헝클어진 현실 속에서 인간은 이기적이 되고, 자유는 제약과 한계를 잃어버리고 무절제한 방임과 방종이 되며, 존재의 형태는 역동성을 잃어버린 채 모든 형태의 절대주의나 형식주의를 낳게 되고 삶은 분열되고 찢겨진다. 혹은 반대로 개체성을 잃어버리고 집단주의, 획일주의, 전체주의가 된다. 즉 자기 파괴적인 비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인간들이 소외 곧 죄 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율법주의, 금욕주의, 신비주의, 교리주의, 성례전주의 등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여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결코 해결할 수 없었으며 이런 소외는 인간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틸리히는 인간 실존의 모순과 분열을 극복하고 치유하는 새로운 존재로 오신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인간 상황은 질문하며 하나님은 답변한다”는 상관관계법으로 인간과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묶고 있다. 틸리히의 인간이해는 소외로 인한 인간의 부정적 현실을 말하고 있다. 그의 인간이해는 비신앙인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소개하는데 탁월하다.
■ [조직신학 구원론]루터, 칼빈, 웨슬리, 칼바르트, 폴틸리히의 구원론 이해
A 구원이해 총론
1.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영어로는 "Salvation" 으로서 의미 그대로 스스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극심한 괴로움이나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제3자가 건져내 주는 일을 말한다. 즉 건지심과 살리심을 의미한다. 구원이란 죄에서 죽을 수 밖에 없던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사함을 받으며, 영생을 얻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어 날마다 하나님 자녀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추구하며 살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광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2. 구원은 어떻게 얻는가?
웨슬리의 구원관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행(先行)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설득하시고 이를 수락한 인간은 자원하여 순종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을 완성시키신다.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인간이 믿음으로 순종하며 간구할 때,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하신다. 구원은 우리의 선한 행동이나 노력이나 공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3. 구원의 세 가지 차원
1) 개인구원(God in person) 개인구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서 니고데모(요3:1-21), 수가성의 여인(요4:1-31), 삭개오(눅19:1-30)의 이야기이다. 니고데모는 불신앙, 수가성의 여인은 육적생활, 삭개오는 자신의 정체성의 상실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준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5).”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개인구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가능하다. 개인구원을 가장 집중적으로 다룰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신학이 성결신학이다. 성결신학은 개인, 사회, 자연구원 중 개인구원을 집중하고 있다. 개인구원에는 리더십이 있으며 이 리더십은 목회자적인, 제사장적인 사역이다.
2) 사회구원(God in History) 사회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탈출사건(출3장~7장)이나 니느웨 백성의 구원(욘3:1-9) 등이 그것이다. 사회구원의 대상은 공동체의 정체성 상실, 우상숭배, 반윤리적 생활, 구조악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해당된다. “나의 백성아, 나에게 귀를 기울여라. 나의 백성아, 내 말을 귀담아 들어라. 법은 나에게로부터 비롯될 것이며, 나의 공의는 만백성의 빛이 될 것이다(사51:4).”에서는 사회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누가복음4장 18절에서도 사회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겠다, 치유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말씀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으로 사회구원이 이루어진다. 개인구원과 마찬가지로 사회구원의 주체 역시 말씀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회구원에서는 관계의 변화가 일어난다. 사회구원이 이루어 질 때에 관계의 변화가 이루어 진다. 사회구원과 관련에서 신학에서 다루는 것을 정치신학이라고 한다. 정치라고 하는 것은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다. 사회구원에서는 선지자적 성향이 강조된다. 모세, 요나, 아모스가 그 예다. 오늘날에는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3) 자연구원(God in nature)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몸담고 있는 이 자연도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주적이다. 그래서 안식일(출20:10-11), 안식년(레25:1), 희년(레25:10-12)에 자연이 회복되어지고 생태계 전체가 회복되어 진다. 이것은 물질남용, 인위적 행위, 반자연적행위, 불의로 부터의 구원을 추구한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롬8:21-22).” 에 의하면 자연도 말씀, 그리스도, 성령의 사역으로 구원을 받는다. 생태계의 변화가 일어난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원래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지는 모습이 나타난다. 생태정의와 생태계의 질서가 파괴되어 있는데, 이것을 파괴되기 전의 모습으로 회복한다. 생태계의 정의가 이루어 질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자연에도 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의 구원을 통해 창조의 영성이 회복되어지길 원하는 것이 생태신학이다. 생태신학에서는 왕적 리더십이 필요로 한다. 왜 왕과 같을까? 다스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땅을 다스리고 지배하라. 진정한 다스림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다스릴 때에도 위에서 군림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도 종이 되어 오셔서 우리를 섬기셨다.
4. 우리는 어떻게 구원(중생-거듭남)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죄인은 회개를 통하여 믿음으로 인도되며 그는 다시 믿음을 통해 의롭다하심(칭의)를 경험한다.
- 회개 -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참고, 사 1:6) 자신에게 있어 죽음과 지옥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할 때,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회개는 단순히 감정적으로 심판에 대하여 슬퍼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인한 자신의 회복된 의지를 통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참고, 눅 3:8). 회개의 합당한 열매란 "자신의 죄악된 모습에서 탈피하고자는 진정한 욕구와 진지한 결단을 이끌어 내는 죄의 책망"이다.
- 믿음 -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9). 믿음이란 자기포기이자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자기를 포기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하게 하신 것(롬 5:1)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것에 대한 '신뢰'이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는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조금이라도 선한 성품이나 욕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칭의 - 칭의란, 하나님 편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 내지 선언이다(행 13:39; 롬 3:24; 5:9, 16, 18; 고전 6:11; 딛 3:7 등).
- 중생 - 칭의는 '의의 전가'를 의미하며, 중생은 '거룩의 부여'라 할 수 있다. 의인은 객관적인 변화를, 중생은 진정한 변화를 의미한다. 칭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외적 관계를 변화시킴으로 우리를 원수에서 자녀로 변화시키신다. 중생은 우리의 내적 영혼이 변화되어 죄인에서 거룩한 자가 됩니다. 즉 중생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칭의는 죄의식을 제거하고, 중생은 죄의 권능을 제거한다.(Wesley, John Wesley`s Commentary on the Bible, 224)
구원의 확신은 아들의 증거와 성령의 증거와 말씀의 증거를 통해 얻을 수 있다.
1) 아들의 증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증언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두고 증언하신 그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증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그 생명이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요일5:10-1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즉시 성령의 세례를 경험합니다.(행 19:2-6)
이 말씀이 교훈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다면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해 질 것이다.
2) 성령의 증거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롬 8:16).”, "너희도 그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 안에서 여러분은 구속의 날을 대비해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엡 4:30).”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성령께서 또한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 안에 임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서 우리는 구원받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3) 말씀의 증거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 “입으로 예수는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롬10:9).” 우리는 온전히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고 항상 동일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구원을 말씀으로 증거하시며 우리에게 확신을 주신다.
성령은 믿는 자의 구원의 보증(지불금)이 되어 주신다(엡 1:14).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5. 우주론적 구원 이해
구원이라는 것은 가까이는 육체적 치료, 보이는 피지컬, 물리적인 것을 치료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을 치료하는 것, 영, 혼, 육을 치료하는 것이고, 왜곡된 것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질서로 회복하는 것이다. 개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구원이 아니라, 구원은 우주적이고 총체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생태신학, 어떤 사람은 정치, 어떤 사람은 성결신학으로, 구원의 장르가 다를 뿐이지, 하나님은 동시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것이 통합적으로 필요하다.
B 구원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1. 마틴 루터의 구원론
루터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많은 고민을 한 인물이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중세교회의 구원의 교리를 이해해야 한다. 중세교회의 구원관은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올바로 순종할 수 있는 어떤 도움을 주시는 데, 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을 은혜라고 한다. 이 은혜를 '성화케 하는 은혜'(sanctifying grace), '후속은혜'(subsequent grace), '공동협력 은혜'(cooperating grace), '효능 은혜'(efficacious grace), 또는 '성화를 가능케 하는 능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일정한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그의 종교개혁에서 5가지 슬로건을 걸었다.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은 그의 저술에서 반복해서 사용되고 강조되고 있는 말들이다. 이들 슬로건들은 칭의의 본질을 설명하는 동시에 중세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배격하는 말들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하다는 강력한 주장인 것이다. 1520년 11월 출판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루터는 "오직 믿음이 행위 없이, 의롭게 하며, 자유케 하며, 구원한다"는 이신칭의를 말하고 있다. 또한 루터는 이 글을 통해서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먼저 그는 두 가지 명제를 세웠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는 것이었다. 첫째 명제에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는 모든 인간의 삶의 모든 것들 즉 먹는 것, 자는 것 등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고 어느 누구도 그런 자유로운 인생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 명제는 모든 것을 섬기며 모든 사람을 섬긴다는 의미이다. 루터는 이 두 가지 명제를 설명하기 위해 영적이며 육적인 인간에 대해서 먼저 설명한다. 이에 대해 루터는 고후4:16에서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라고 말했듯이 성경에서 영적, 육적 인간에 대해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그의 "두 종류의 의"(Two Kinds of Righteousness)란 설교에서 이제 살펴본 바의 믿음의 단계를 "외인에 의한 의"(alien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이며, 침례 가운데서 주어지는 의이다. 이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의가 되며, 이 의는 곧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의를 믿음 그 자체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 의는 근본적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실질적인 의에 대한 자료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담이 상실한 원래의 의를 대신해서 주어진 의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의가 된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날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자라는 데까지 일치하여 더욱더 옛 아담을 몰아내신다. 왜냐하면, 외인에 의한 의는 단번에 모든 것이 부여되지 않으며, 그것은 시작이요, 발전되며, 죽음을 통하여 마지막 때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루터는 의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살며, 그의 형상으로 변화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믿음에서 시작되어 하나님의 전가로써 완성된다. 믿음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가 없이는 완전하게 되지 못한다. 따라서 믿음이 의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전가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것을 완성시킨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루터의 구원관은 중세교회가 인간의 공덕을 주장한 것과 정반대가 된다. 이 단계에서는 불완전한 우리의 의가 완전한 의로 받아드려지고 죄의 잔존에도 불구하고 죄를 죄로 간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죄의 잔존을 벌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저주하시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덮으시며 거저 용서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며, 거룩하면서 불경스러우며, 하나님의 원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이다"라고 루터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선 행위는 우리의 의가 믿음으로 된 의임을 입증하는 외적 표적이다. 선행은 믿음에서 나오며 좋은 열매가 좋은 나무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선행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인된 사실을 입증하는 외적 표적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론은 그의 종교개혁의 화두였다.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걸출한 인물이기 이전에 자신의 구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한 사람이었다. 루터는 누구도 엄두내지 못할 아니 감히 맞서지 못했던 가톨릭의 거대한 체계를 “이신칭의”라는 작은 송곳으로 뚫은 것이다.
2. 존 칼빈의 구원론
칼빈에게 있어서 그의 구원관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 강요 제3권 성령론의 부분에서 설명되고 있다. 왜냐하면 칭의와 성화가 모두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기 떄문이다. 다시 말해서 칼빈에게는 믿음을 통해 칭의 받는다면 그 믿음은 성령의 역사라고 파악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칼빈은 예정론을 신론이 아니라 성령론에서 다뤘는데 그것은 예정론이 신앙과 삶, 희망, 성도의 인내 등 성령의 활동과 하나님 은총에 의한 확증 속에 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구원론은 예정론의 맥락에 놓여 있으므로 구원단계가 애매하다. 그러나 구원단계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역사를 인간의 마음에 적용시키는 순서로써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므로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연구한다. 칼빈신학의 구원단계 근거는 롬 8:29-30으로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 사상을 논리적으로 발전시켜 칼빈신학에서 세부적으로 단계 순서를 규정하는데 ① 예정, ② 소명, ③ 중생, ④ 믿음, ⑤ 회개, ⑥ 칭의, ⑦ 성화, ⑧ 견인, ⑨ 영화이다. 칼빈의 구원단계가 예정론을 기초로 함으로 예정 다음에는 자연히 택한 자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이 온다. 이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이다. 하나님이 자신 안에 숨겨두었던 선택을 부르심으로 표명함은 하나님이 이 순서를 택하신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이미 아들의 위치에 택하셨으나 칼빈은 부르심 받은 자만이 이 위대한 긍휼을 소유하게 된다고 본다. 소명과 중생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중생 없이는 전체 구원론은 언급할 수 없다. 중생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의식하는 것과 무관하게 성령으로 직접 나게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 밖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지므로 중생은 인간이 거절하거나 용납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절대은총에 의한 예정,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존하는 것이다. 중생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이뤄지며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상실한 하나님의 의 가운데로 회복되는 것으로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속에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칼빈은 믿음에 대하여, “신앙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값없이 주시는 진리의 약속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성령을 통해 우리 심정 위에 인치시는 것이다.” 라고 한다. 칼빈은 회개를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두 형태로 본다. 율법적 회개는 그것으로 죄인은 뼈아프게 생각하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자기 상처를 위한 약으로, 공포에 대한 위로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다. 회개와 신앙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으나 칼빈은 구분시킨다. 회개의 뜻은 신자의 생활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전향하는 것이며, 그 전향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할 때 일어난다. 그것은 옛사람과 육신이 죽는 것과 성령에 의해 새로 사는 것이다. 이 갱생은 순간의 사업이 아니라 죄와의 투쟁에 있어서 신자의 지상생활 중 계속하는 것이다. 비록 허물은 씻겼으나 죄의 사실이 정욕 가운데 남아 있기 때문이다. 회개는 지적수준에서 정적 수준으로 향상되어야 하며 완숙한 회개는 의지적 단계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것은 과거 지향적이 아니라 앞으로 삶을 결단하는 것이다. 칼빈은 칭의에 대해 ‘의의 전가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죄사함을 받음’을 말한다. 칼빈은 스콜라주의의 선행 즉 행함으로 얻는 의를 반박하며, 거듭난 자의 선행도 의를 가져올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됨을 주장한다. 칭의는 선행에 대한 값이 아니고 값없는 은혜인 것이다. 칭의는 근거가 우리 밖에 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롭기 때문이다. 이 칭의의 방법은 놀라운 것이며 그리스도의의로 옷 입고, 심판대에서 두렵지 않으며, 인간 스스로는 정죄하지만 외부에서 의롭다함을 선고받는 것이다. 이것으로 칼빈의 칭의는 “오직 우리 밖에” 즉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지적하므로 중생교리만 아니라 칭의 교리에서도 계시신학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칼빈에 의하면, 죄용서와 성화 또는 의인과 중생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합일로 얻게 되는 최상의 선물이다. 칼빈은 강요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부여하신 은총과 그리스도가 가지는 모든 것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와의 합일이다. 그러나 칼빈은 순식간에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 성화과정을 말하며 그동안에도 여전히 죄인이므로 평생 회개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서 선택된 자의 인내가 보증된 것이다. 성도의 견인은 신자가 구원의 길에서 인내하는 계속적 활동을 암시해 주지만 실제 견인은 신자의 활동이기 보다 하나님의 사역으로 신자가 이 활동에 참여한 것이다. 이는 성령이 신자 내부에서 이루시는 계속적인 구원완성을 위한 작용이다. 성도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음은 이런 하나님의 견인은혜를 믿을 때이다. 참 신자는 신앙과 복음의 말씀에서 이미 명하신 선택의 확실한 기초가 있으므로 결코 타락할 수 없다. 그들의 구원은 세계의 전 구조가 흔들린다 해도 확실성 자체는 변함없이 확고한 기초위에 있으므로 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의 것이 된 이상 우리가 영원히 안전함을 확신하게 하신다. 칼빈의 구원관은 이처럼 예정론에 근거하여 구원된 성도를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시는 견인에서 절정에 이른다.
3. 존 웨슬리의 구원론
웨슬리의 구원론은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죄인으로서의 상태에 관한 그 자신의 이해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바의 인간의 상태는 세 가지로 설명이 되는데, 첫째는 자연적인 인간의 상태이고, 둘째는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이고, 셋째는 은총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특별히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에 대한 진술은 인상적이다. 웨슬리는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인간이라고 진술하였다. 자연인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방치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 속에서 선행적인 은총으로 역사하여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을 율법의 심판 아래로 이끌어 들임으로서 타락의 조건을 인식하게 한다. 선행의 은총으로 인간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사실 그 양심으로 죄책감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선행의 은총을 양심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죄인임을 깨달음으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선행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욕망이 있게 되며 어느 정도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즉 율법으로 회개의 촉구를 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자각을 한 인간에게 구원은 “확신적 은총”에 의해서 수행된다. 확신의 은총으로 죄인임을 깨달아 인정하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기를 포기한다면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이렇게 죄인임을 인정하고 포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회개이다. 이 회개는 이제 선행의 은총으로 아는 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회개 이후에 오는 것이다. 확신의 은총으로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때 하나님은 복음으로 역사하신다. 그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의인, 곧 칭의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오직 ‘믿음’ 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의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속죄, 곧 죄의 용서이다. 사망선고를 받은 죄인을 생명으로 옮겨놓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칭의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은 첫째, 현재의 구원이다. 둘째, 모든 죄(원죄, 자범죄)에서의 구원이다. 셋째,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이다. 현재의 구원이란 현재 이 땅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모든 죄에서 구원이란 이제 더 이상 죄를 짓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습관적인 죄나 고의적인 죄 그리고 죄된 욕망에서부터 나온 죄를 짓지 않는다. 죄책으로의 구원은 율법으로 부터의 구원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고 정죄한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죄책에 대해서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웨슬리의 구원관에 따르면 의인의 사건에 동반되어 일어나는 사건으로 “거듭남”이라고도 말하는 “신생”의 사건이 설명된다.의인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외적인 관계성을 변화시킴으로서 원수의 관계였던 것을 자녀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인간의 내적 영혼을 변화시킴으로서 죄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의인은 죄책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신생은 죄의 세력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상이한 것이다. 불신자와 신생한 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웨슬리는 신생하지 못한 사람은 죄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다. 이에 비하여 신생한 자는 죄에 순종하여 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신생한 사람은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죄에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이다. 신생한 자는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모든 성품” 즉 “격정과 교만, 육욕과 허영, 야심과 탐욕”에서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에서 초연하다(요일2:16)”고 한다. 신생한 자는 삶에서 말로서 죄짓는 일들 즉 “거짓말, 허위, 사기, 궤사, 정의나 자비에 어긋나는 말, 비방”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고의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행위는 십계명에서 지적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런 자는 성화된 자이다. 웨슬리의 설명에 의하면, 분명히 점진적인 성결을 거친 사람이 마침내 완전한 죽음에 이르며, 그 때에 온전한 성결을 경험하게 된다. 웨슬리는 어느 한 순간에 경험된 온전한 성결 즉 성화를 “기독자 완전”이라고 누누이 언급하였다. 온전은 깨끗해진 마음을 의미하며, 죄성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결단코 절대적 완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절대적 완전은 영화의 은총을 거쳐서 도달하는 최후의 종착역이다.
4. 칼 바르트의 구원론
칼 바르트는 구원론을 직접적으로 전개하지 않았지만 그의 화해론을 중심으로 바르트의 구원론을 전개하려고 한다. 몰트만은 바르트가 만약 구원론이나 종말론을 썼다면 만인 구원론으로 갔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은총의 승리가 되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화해론은 그의 신학 프로그램, 즉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에서 이미 설계되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유기했다는 그의 예정론에서 그의 화해론적 입장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시고 모든 인류를 택했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 그 분 한 분만이 버림 받으신 분이다. 십자가는 죄로 인해 갈라진 하나님과의 담을 헐은 화해의 징표이다. 나와 너와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따라서 그 십자가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화해의 근거가 된다. 십자가는 나누어지고 찢어진 인류에게 화해의 동기가 된다. 그는 인간의 모든 잘못, 모든 죄악을 스스로 짊어지는 결단을 하신 것이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모두 떠났다. 따라서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철저하게 타락했고, 인간 자체로서는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악에 빠져 있는 인류를 보고 결단하신다. 예수그리스도를 유기하시고 다시 그를 택한다. 이것은 십자가의 신비요, 비밀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그들은 화해 속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화해의 사건 속에 들어온 것은 전적으로 십자가 덕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결단이 중요하다. 인간은 시간 안에서 결단하지만 하나님은 영원에서 결단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결단을 측량할 수 없다. 초대교회 전승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부터 부활하기까지 음부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건은 십자가의 의미가 죽은 사람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옥문을 파괴시킨 것이다. 바르트의 그리스도를 통한 객관적 화해는 시간을 넘어 죽은 자들에게 소급된다.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은 정통적 이중 예정론을 거스른다. 바르트의 이런 은총적 선택론, 즉 화해의 사건은 결국 보편적 구원론, 만인 구원론의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절대 은총”을 말하지만, 그것은 “만인 구원론”이지 “보편 구원론”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강조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주권은 이제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 하는 결단의 순간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단이 가능한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은총의 부르심이 앞서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불가항력적 은혜로 표현되고 있는 복음을 말한다.
5. 폴 틸리히의 구원론
틸리히의 구원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계시 이해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계시란 문자적인 의미에서 계시는 ‘숨겨져 있던 존재가 특별하고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가려져 있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즉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전달 이상의 것으로 존재의 심연, 존재의 궁극적 관심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이 점에서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결코 계시가 될 수 없으며, 또한 계시사건 속에서도 신비는 여전히 신비로 남고 일상적 사건으로 축소・변형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틸리히는 신비의 드러남으로써의 계시사건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계시는 존재의 근거와 능력이 드러남으로 인해 비존재가 극복되는 사건이다. 즉 계시가 나타날 때는 동시에 비존재의 위협 아래 있던 존재들은 승화, 고양되어 존재의 능력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계시는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만 수용되는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계시는 언제나 그것을 경험한 개인이나 공동체에게만 해당될 뿐이므로 그것이 다른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전달될 때, 그 전달은 단지 보고일 뿐 계시적 사건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계시의 주관적 측면을 ‘황홀경’이라는 말하며 정신이 일상의 주객 구조를 넘어서 특별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 때 이성은 거부되지 않고 오히려 그 한계를 돌파하고 근원과 합일하게 된다. 곧 신비에 의해 인간 이성이 가지고 있던 여러 제약들이 극복되고 치유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또한 객관적 측면의 계시를 ‘기적’이라고 말한다. 기적은 존재의 합리적 구조 안에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기적은 실재의 합리적 구조와 모순되지 않으면서 놀라게 하고, 특별하며 요동케 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존재의 신비를 드러내며 명확한 방식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사건이며 황홀경험 속에서 표시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즉 “황홀경은 정신의 기적이며 기적은 실재의 황홀경이라는 것이다. 틸리히는 계시의 매개체로서 세상의 모든 것 곧 자연, 개인과 공동체, 인류 역사 그리고 외적・내적 말씀 모두가 계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계시가 일어날 때 구원도 함께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계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곧 구원이 경험되는 곳에는 반드시 계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계시가 발생할 때마다 구원이 이루어지기에 구원은 단순히 일회적 사건이 아닌 다회적 사건이며 부분적이 아닌 총체적인 사건이다. 즉 틸리히는 구원사건이 한 사람의 일생동안 끊임없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이 성서를 통하여 자기를 계시한다고 하여 성서를 계시의 매개체로 보지만 틸리히는 계시의 매개체를 더욱 보편화하고 있다. 즉 계시의 보편성뿐만 아니라 구원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다. 틸리히의 구원이해는 소위 만인구원설의 여지가 있기에 교회의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조직신학 교회론]루터, 칼빈, 웨슬리, 칼바르트, 폴틸리히의 교회론 이해
A 교회이해 총론
1. 교회의 분류
1) 제1교회 [고대 교회(2세기~10세기)] 제1교회에서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희랍정교회이다. 희랍정교회는 성부 하나님을 강조하여 성부와 성자가 어떻게 동등할 수 있겠느냐 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2) 제2교회[중세교회(10세기~20세기)] 제2교회의 중심되었던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구미교회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리스도론에 대해 강조했다. 가톨릭교회와 구미교회는 20세기이후 침체되어 가고 있다.
3) 제3교회[현대교회(21세기)] 제3교회의 중심되고 있는 교회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교회이다. 이 교회들은 그동안 정통교회로부터 외면당했던 교회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현대교회는 과거 구미교회가 누렸던 영광을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형편이다. 제3교회는 영의 운동, 성령의 운동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성령뿐만 아니라 각 종교에서 말하는 영까지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는데 종교 간의 만남에 있어서 굉장히 폭발적인 상승이 있다. 그러나 영의 정체성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되고 있다.
2. 성서 안에 나타난 교회의 모델
1) 구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델 구약성서의 교회의 모델은 이스라엘 공동체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회막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겼다. 회막은 하나님이 나타나는 계시사건을 이야기 해주며 회막 안에 있는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가 함께하는 곳이 성막이었다. 성막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성막을 대신하여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교회는 성막, 성전 자체가 교회가 아니라 성막 또는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이다. 이것이 구약 신학적 교회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2)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델 신약성서의 교회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제자 공동체 또는 예수 공동체이다. 예수께서는 항상 성전중심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변두리인 갈릴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렇다고 해서 갈릴리의 회당에서 활동한 것이 아니라 그가 계신 곳이 활동의 중심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성전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법궤였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자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된다. 성전과 성막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에서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 바뀌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 승천 이후 예수 공동체는 성령에 의한 영적 공동체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첫 성령 공동체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졌다. 성령 공동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시작했고, 전 세계로 두루 퍼져 나가게 되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공동체를 형성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베드로 공동체가 요한을 중심으로 요한 공동체. 바울을 중심으로 하는 바울 공동체 등이 발생되었다. 이 계기로 지역교회가 형성되었다. 지역의 상황과 특색에 따라서 교회는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지역의 상황에 따라서 각각의 지역교회의 문제가 다르기 때문에 메시지가 달라지며 다양성을 가지게 되었다. 3. 교회의 변천에 따른 다양성
처음에는 성막, 성전, 예수공동체, 성령공동체는 다양성이 없었다. 그러나 전 세계로 교회가 뻗어나가면서 다양해 졌다. 고대 교회는 다양성에 조화를 주어 ‘하나의 일치된 보편적이며 거룩한 사도적 교회(Una Samcta Caholica Apostolica)’를 추구한다. 제2교회에서 The Church는 로마 가톨릭교회였다. 사도적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뿐이라고 여겼다. The church는 ‘하나의 일치된 보편적이며 거룩한 사도적 교회’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무시무시한 선언이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1960년대에 두 가지 운동이 발생되었다. 하나는 가톨릭의 제2바티칸 공의회가 있었고, 두 번째는 WCC가 있었다. WCC는 교회 일치운동이었고, 제2바티칸공의회는 가톨릭교회 갱신운동이었다. 제2교회는 이때부터 쇠퇴하게 되었고 제3교회가 일어나게 되었다. 교회일치운동은 제3교회에서는 중요한 운동이 되었다. 현대의 가톨릭교회에서는 개신교를 ‘우리로부터 떠난 형제들'로 본다. 과거에 로마 가톨릭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본 것과 대조된다. 정통과 정통을 유지하면서 갱신을 추구하는 것이 제2바티칸공의회이다.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조상숭배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과거에는 미사를 라틴어로만 하게 했는데, 이 공의회 이후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4.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역사적으로 볼 때 선교(mission)라는 말은 13세기에 탁발 수도회에서 특수한 임무를 부여하여 세상에 파송한 사람들을 '선교사(missionary)'라고 부른 데서부터 유래한다. 그들은 단지 복음을 듣지 못한 지역에 가서 복음을 설파하는 임무에 국한하지 않았다. 학교와 병원과 급식소 등을 세워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하여 보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로부터는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원정을 가는 것을 기독교 선교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에는 위대한 해외선교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선교개념의 일대 변화가 생겨났다. 1968년 WCC(세계교회협의회) 제4차 대회(웁살라 대회)에서 비기독교 인들에게 복음 전파하는 좁은 의미에서의 '교회의 선교' 대신에 교회 안팎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현한다는 뜻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을 등장시켰다. 하나님의 선교는 개인의 영적 구원을 지향하는 것과 더불어 사회의 변혁을 통한 삶의 질적 향상을 지향하는 사회선교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구원이나 사회선교라는 개념이 부각되었다.
5. 선교를 위한 교회론
하나님이 세상을 접근 할 때에는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교회를 통해 세상을 섬기고 선교한다고 보았지만 이 하나님의 선교라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선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세계를 위해서 봉사한다. 하나님이 교회가 없이도 선교를 하신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신학처럼,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선교하게 된다면, 교회의 법, 교단의 법, 전통 때문에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교회가 세계를 향해서 침투할 수 없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너무나도 교회적 종교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세계에 간다고 보았을 때에는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활용해서 그 나라를 다스리고 갱신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이 이러한 일을 하시는데 함께 협력한다. 하나님이 직접 세속적인 사람들을 세속적인 정치와 방법을 통해서 직접 사역하신다. 단순히 패러다임만 바뀐 것 같지만 이것에는 상당한 변화가 나타났다. 여기에서는 교회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약해졌다. 전통적인 선교에서는 선교의 비전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선교를 위해서 우리는 전통적인 선교방법과 새로운 시각의 선교방법의 조화를 이루어 이 시대에 적합한 선교방법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B 교회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1. 마틴 루터의 교회론
루터의 신학에서 교회론은 언제나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이다. 교회론의 교리는 모든 그리스도교 교리의 개요이다. 루터의 신학에 있어서 교회란 복음이 순수하게 설교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성도들과 믿는 자들의 회중으로 정의한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이 땅 위에는 온 세상을 통하여 하나의 거룩한 기독교적 교회가 있는데 이것은 성들의 회중 혹은 회집이다. 그런데 이 성도들이란 성령에 의하여 회집되고 보존되고 지배받는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믿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의 수는 성례전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매일 증가한다.”
마틴 루터에게 교회란 이신칭의를 얻은 ‘성도들의 회중’인 말씀의 피조물이다. 성도들이란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한 모든 믿는 사람들 ‘성령에 의하여 회집되고 보존되고 지배받고’ 나아가서 ‘매일같이 성례에 의하여 그 수가 증가되는 무리들이다. 교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성도들의 교제에 있다. 교회는 복음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한 성도들의 회중은 공유하고 있는 선물을 나누며 교제해야 한다. 성도들의 교제란 이신칭의 얻은 성도들 각자가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베푸는 기도와 선행에 의하여 이룩되는 수평적 인간관계이다. 무엇보다도 기도를 비롯한 기독교인의 모든 선행의 나눔이다. 이러한 성도들의 교제는 만인 제사장직 사상의 근거이다. 루터에게 있어 성례전은 약속의 말씀과 표징과의 결합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표징이 덧붙여진 약속이며 약속이 덧붙여진 표징이다. 루터는 “모든 보이는 행위는 무엇인가를 의미할 수 있으며 보이지 아니하는 실재성을 나타내는 상이나 비유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상징적인 행위는 아직 성례전의 성격을 가지지 못한다.”고 말한다. 성례전의 성격은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임재 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성립된다. 또한 세례에 대하여 루터는 “우리와 계약을 맺으시고, 우리의 죄를 전 삶에서 사하시는 동시에 우리의 죄를 죽음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는 또한 세례와 함께 시작하시며, 우리가 죄에서 자유롭고 신앙 안에서 강하게 되도록 우리의 신분과 소명을 통하여 많은 고난을 통하여 일생동안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즉 죄가 궁극적으로 죽는 죽음을 목표로 우리를 훈련시키신다”고 설명한다. 교회가 비록 예식과 의식 등 외적인 것에 존재하지는 아니하며 또한 교회의 참된 본질이 불신자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의 존재는 복음의 선포와 성례전의 집행으로 수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와 성례전의 집행은 교회의 표지들이 된다.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한 각 기독교인 개인들은 성도의 교제 속에 있는 이때에 각 기독교인들은 다른 기독교인을 위한 제사장이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인 개개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제사직에 동참한다. 다른 기독교인을 위한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로서 이웃을 향한 ‘넘쳐흐르는 사랑’을 통하여 서로가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서로가 죄의 고백과 죄의 용서를 할 수 있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한다. 이것이 루터의 만인 제사장론에 실질적인 내용이다. 루터는 또한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지만 공동체의 선출에 의하여 어느 특정인물이 임직한다고 주장한다. 루터에게 있어 교역자란 ‘성도들의 회중’, ‘성도들의 교제’, ‘만인 제사장직’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루터에게 있어 교역자는 결코 독재적이거나 개인적일 수 없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당시 중세교회에 대한 엄청난 비판이었다.
2. 존 칼빈의 교회론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4권 서두에서 교회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복음이 성령의 역사로 우리 마음에 와 닿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는 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과 영원한 축복에 참여한다. 그런데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신앙을 시발시키고 증강시키며 이 신앙의 목적을 향하여 우리를 이끌고 갈 보조기관인 교회가 필요하다.
칼빈의 교회론은 주로 말씀과 교회의 관계에로 집중되고 있다. 칼빈의 교회론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참 교회의 두 가지 표지로서 말씀과 성례전을 언급하였지만 성례전도 궁극적으로는 말씀에 의존하기 때문에 말씀은 교회론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칼빈은 성서에서 교회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때때로 그들이 교회라고 말할 때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입양의 은총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성령의 성화에 의해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들이 된 자들 이외에 아무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사실상 교회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시작으로부터 존재해 온 모든 선택된 자들을 포함한다. 하지만 종종 교회라는 이름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예배한다고 고백하는 땅 위에 퍼져있는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말씀과 예전을 성례전을 중심으로 모여진 믿는 자드르이 공동체이다. 그는 또한 거룩한 ‘불가시적 교회’와 많은 위선자들을 내포하고 있는 ‘가시적 교회’를 구별하였다. 또한 교회의 객관성에 관해서 칼빈은 루터와 전적으로 일치된 의견을 보인다. 특별히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의 개념을 종합한다. 두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두 가지 방법으로 교회를 말하고 있다. “교회”라는 말이 때로는 실재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의 교회에는 현재 지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천지 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은 빈번히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사람을 지시한다. 우리는 세례에 의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들어가게 되며, 성만찬에 참예함으로써 진정한 교리와 사랑에 의한 우리의 연합을 증거하고, 주의 말씀 안에서 일치하며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사역을 보존하신다. 이러한 교회 안에는 이름과 외형만 있고 그리스도는 전혀 없는 위선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 야심과 탐욕과 시기에 찬 사람들 또 중상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고 이런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재판 기관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보인다고 믿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후자, 즉 사람들과 관련한 “교회”라고 하는 것을 중히 여기고 그 교회와의 교통을 계속해야 한다. 특별히 칼빈이 가시적, 불가시적 교회라는 개념을 적용한 것은 선택된 것으로서의 교회와 신 앞에서만 분명하게 되는 교회에 관하여 그의 주장에서 신만이 그의 백성을 안다는 진리에 대해서 그가 말한 것은 교회 즉, 우리가 지상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가 신과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 한, 그것에서 절단되지 않는다는 그 교회에 엄밀히 적용된다. 칼빈은 루터가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 가시적, 불가시적 교회라는 개념을 탁월하게 진술했다. 또한 진정한 교회란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교회’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신도들의 모체는 교회이며 우리가 교회에 연합해야 함을 일깨워 준다.
3. 존 웨슬리의 교회론
웨슬리는 그의 설교 “교회에 관하여”, “예배 참석에 대하여”, “분열에 대하여”, “교직”, 25개 신조, 신약성서 주해, 1745년의 연회록, “감리회 약사” 등에 교회에 대한 웨슬리의 사상이 정리되어 나타나 있다. 웨슬리는 교회의 본질이란 제도나 의식, 교직, 교권, 외형적인 건물이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모인 회중 즉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보았다. 웨슬리는 가시적 교회의 본질적 요소를 세 가지로 강조하였다. 첫째, 산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교회는 그것이 가적 교회이다. 둘째, 설교이다. 가시적 교회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쇠약해지고 죽을 것이다. 셋째, 성례전의 정당한 집행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제정하신 방법을 통해 믿음을 증강시키신다. 교회의 표적으로서 믿음을 강조하는 웨슬리는 교회의 전통보다 성서의 강조점을 따른 것이다. 또한 교회의 성립요건으로 “교회는 한 성령으로 연합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한 믿음, 한 소망, 한 세례,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양자의 영을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들을 말한다. 교회의 표적에서 웨슬리는 교직을 제외시킨 것은 그가 전통적인 개신교의 입장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웨슬리의 신학에서 교회의 특성으로 일치성, 보편성, 사도성, 거룩성을 가진다. 웨슬리는 영국교회가 가장 잘 조직된 성서적 교회라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제도에 대해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찬성하였다. “나는 교회 정치에 있어서 감독제도가 사도적이며 성서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장로교식 혹은 독립적인 제도가 좋다고 생각하거든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웨슬리는 성경에 교회제도에 대해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다양성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교회의 제도나 기구 등을 교회구성의 절대적 요소라고 보지 않고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웨슬리의 교회론에서 특별한 점은 바로 “교회 안에 작은 교회”이다. 웨슬리를 통해 회심한 사람들은 그를 정기적으로 만나기 원했고 이를 위해 웨슬리는 목요일 저녁을 지정하여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이것이 신도회의 시작이다. 이러한 신도회는 속회와 조, 반으로 나누어진다. 속회는 1742년 브리스톨에서 우연히 조직되었고, 그들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속회의 주목적은 전도와 제자훈련의 기능을 주로 하였으며 감리회의 재정 조달의 중심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도회는 속회로 나누어지고 속회는 조로 나누어 편성되었다. 조는 나이, 성별, 결혼여부, 직업별로 분류하여 조직되었다. 조원들은 평균 일주일에 한번은 모임을 가졌으며 주목적은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는 말씀에 따라 서로 죄를 고백하고 위로와 권면을 받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또한 조의 인원 중 믿음과 행실에 모범을 보인 자들을 선발(특별) 신도회로 조직하였다. 이들은 뚜렷하게 개인적 성결의 체험을 고백한 자였다. 웨슬리는 교회를 제도, 의식, 교권, 건물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되어 가는 자들의 '사랑의 교제', '사랑의 공동체'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성화이고, 그리스도의 피로 획득한 믿음과 사랑과 경건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웨슬리는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교회의 모습을 닮으려고 노력했던 지도자였다.
4. 칼 바르트의 교회론
바르트에 의하면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이다. 바르트는 참된 교회의 표지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셨으므로 인간이 그 말씀을 듣는 바로 그곳에 교회가 존재한다고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사실만이 교회를 세우고 보존하며 교회를 참된 교회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교회의 충성은 구체적으로 오직 성서에 대한 충성일 뿐이다. 또한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계시 속에서 행동하시고 심판하시며 용서하시고 성화 시키시고 약속하시면서 인간에게 대면해 오시는 인간의 진정한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된 성서를 항상 겸손히 연구하고 주석해야 하며, 여기에 자신을 견주어 보아야 한다. ‘바르멘 선언’ 제 1항에서 볼 수 있듯이 바르트는 성서의 원천 및 그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았다. 두 세 사람이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 그분의 영과 숨결을 받아들이는 그곳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현존하시면서 항상 새롭게 교회를 창조하시며 보존하시는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본질적인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가 제도화된 하나님의 계시인 양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관을 배격했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뜻, 진리 및 은총이 인간의 소유물이 되거나 인간이 처분하고 다스릴 수 있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교회가 인간의 구원 방법과 구원 장치와 동일시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님을 강조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의 중간시기에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실존 형태일 뿐이다. ‘바르멘 선언’ 제 3항에서 바르트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시는 형제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있는 몸이다. 교회는 민족, 국가, 사회단체가 아니라 형제들의 공동체이며 그것도 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삼은 그러한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시고, 이 행동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교회를 창조하시며 교회를 보존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분은 교회의 첫째가는 본질적인 주체이시다. 바르트에 의하면 특정 시대 속의 명확한 고백으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교회로 하여금 당대의 시대사에 대하여 책임적이게 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고 선포할 때, 시대를 떠난 어떤 추상적인 영역 속에 있지 않고 바로 그 시대 속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시대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연루되어 있고, 그것의 도전과 요구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시대에서 시대사에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르트는 당시 독일의 고백교회가 증언해야 할 세 가지 책임을 지적하였다. 첫째는 교회는 참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증언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악한 세상도 통치하시며, 악한 사람들의 주님도 되시며 그들의 심판자, 구원자 및 보호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선포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둘째는 하나님은 지상에서 옳고 자유로운 국가를 필요로 하신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정의와 자유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백성들과 통치자들에게 증언해야 할 사명이 있으며 국가 안에서 국가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셋째는 사죄에 관한 말씀으로 교회는 죄인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고 생명을 얻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의 임무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 요약하고 있다.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자로서 그 시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시대에 필요한 교회의 역할을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성령의 일하심의 결과로써 교회가 생겨났음을 말하고 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회집되고 생동감을 얻게 된 인간들의 활동 안에서 일어난 것이 성도들의 교제이다. 또한 바르트는 교회의 질서가 그 본질에 있어 필수적이며 이것은 명백하게 기독론적, 교회론적 개념에 따라 그리스도 통치의 형태로, 즉 봉사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교회는 세계사의 한 복판에 서서, 그것에 책임감을 가지고 참여해야 하며, 교회는 그 자체 상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바르트는 말하고 있다. 그의 신학에서 모든 교회론은 그리스도론 안에서 말하여지며 또한 제한된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교회도 없고, 그리스도론이 없으면 교회론도 없다.
5. 폴 틸리히의 교회론
틸리히 교회론의 특징은 상관의 방법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교회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측면과 실천신학적인 측면을 모두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틸리히의 교회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자신의 가장 독창적인 사고의 하나라고 보았던 ‘마성(The demonic)'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에 의하면 마성은 인간 삶 속에 들어있는 구조적이며 본래적인 충동이자 에너지이며 인간 정신의 깊이의 차원을 의미한다. 틸리히에 의하면 마성은 구약과 신약, 예수와 바울에게 있어서 분명한 형태로 의식되고 있었고, 루터가 자신의 내면과 그의 시대 속에서 투쟁했던 것이며, 고대 원시인의 문화나 아시아 문화권의 탈춤 등에서 사용되는 신상들, 귀면탈, 조각들처럼 강력하고 원색적이며 흉측하고, 소름끼치는 원초적인 것의 표출로 나타나기도 하고, 현대의 국가주의나 집단주의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틸리히가 말하는 마성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마성은 한편으로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요소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파괴적이고 부정적이며 혼돈과 비합리적인 요소가 있다. 마성이 창조적인 형태로 나타나면 천재의 창조성으로 나타나며, 파괴적인 형태로 나타나면 정신병자나 범죄자의 경우처럼 파괴성이 된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현대인에게는 낯설게 이해되는 ‘마성’이라는 개념을 이성 중심주의적 사고에서 찾는다. 근대정신이 합리성의 이름으로 비합리적이며 충동적인 생의 에너지와 깊이, 개인과 사회의 충동성을 과학시대 이전의 무의미한 것으로 무시해 버렸고, 이로 인해 마성에 대한 의식이 사라졌다. 종교 또한 단순한 교리나 윤리로 축소되어 버렸다고 말한다.그렇다면 이 마성적인 것이 어떻게 창조적인 것으로 승화될 수 있는가? 틸리히는 마성적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형태에 의해 승화된다고 본다. 하나님의 은혜 임재 속에서 마성은 그 파괴적인 힘을 극복하고 생명을 살리는 창조적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은혜의 형태가 단지 기독교회를 통해서만 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교회도 마성적인 것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사탄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은혜의 형태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존재가 나타날 때 이루어지며, 그것은 세계 곳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은혜의 형태가 나타나 구원을 이루어지는 곳을 ‘잠재적인 교회’라고 정의했다. 틸리히는 교회 밖에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새로운 존재의 능력이 현존하며, 사람들이 거기에서 은혜에 참여하고 구원 또는 연합, 치유를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즉 계시와 구원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이런 개념 하에 그의 교회론의 특징은 교회를 "명시적인 교회"와 "잠재적인 교회를 구분한다. 틸리히는 무엇보다 '잠재적' 그리고 '명시적'이라는 두 개념을 통해서 교회와 현대사회의 상호독립성과 상호작용을 보다 잘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학이나 복음주의 신학에서 그의 교회론은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조직신학 종말론]루터, 칼빈, 웨슬리, 칼바르트, 폴틸리히의 종말론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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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종말 이해 총론
1. 종말론(내세론)
“종말론”(eschatology)이라는 용어는 19세기에 독일에서 만들어진 조직신학적 용어로서, 그리스어 εσχατος(“마지막”, “끝”)와 λογος를 합성하여 만들었다. 종말론은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종말은 마침과 목표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마침이란 시간과 역사의 마무리를 의미하며 목표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를 의미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대체로 인간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종말에는 인간지배의 세상이 마치고, 하나님의 지배가 시작되는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목표이다.
1) 철저 종말론(Radical End) 18,19세기의 지배적인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은 ‘도덕교사’였다. 도덕교사라고 하는 것은 현 세대에 있어서 모델이 된다. 그의 산상수훈이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도덕교사로서 탁월한 모습이고 현 세대에 살아가야 할 때에 필요한 도덕적 양식을 보여주었다. 1906년에 알버트 슈바이처가 기념비적인 예수 연구서를 냄으로써 예수그리스도의 종말론의 이해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슈바이처는 예수께서 이 시대에 도덕적 삶만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저 세계에서 오는 임박한 종말을 대비해서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는 묵시사상가였다고 말한다. 도덕교사라는 이것은 인간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형성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슈바이처는 하나님에 의해서 초월적으로, 초월적인 힘에 의해서 다가오는 나라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에 쏟아져 나왔던 예수 전 연구의 한 중요한 경향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것으로 오는 것 즉 묵시문학적이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도래하는 나라를 위해서 살았는데, 이 나라를 도래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슈바이처는 예수의 종말론적인 사상 속에 숨어있는 두 가지(윤리적 의지와 세계의 윤리적 마지막 완성)에 대한 예수의 희망을 예수의 종말론 속에서 찾고자 했다.
2) 실존적 종말론 “예수가 착각에 빠져 있던 시한부 종말론자였다”는 오해로부터 예수를 구출하려는 사람은 신약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이었다. 그의 신학적 도구였던 실존주의 사상으로 이 구출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는 예수의 종말론이 철저히 미래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슈바이처의 이론에 동의하였다. 그는 예수 전승을 제대로 본다면,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전승 분석에 있어서 정직하려고 하였다. 그 대신 불트만은 예수의 미래적 종말론이 신화적인 세계관 속에서 만들어진 기대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비신화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예수의 이 말씀들의 비신화화를 시작하고 있다고 본다. 예수가 말한 것은 역사에 일어날 어떤 사건을 말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결단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주적인 위기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예수가 사용한 신화적 틀이고, 이 신화적 틀은 개인을 현재적인 결단의 위기 속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미래적 종말론적 선포는 구원을 향한 결단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예수와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우주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자기이해가 발생한다고 본다.
3) 구원사적 종말론 오스카 쿨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미 성취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already but not yet’ 이미 시작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점으로 해서 이지 시작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기다림의 순간이 있다. 구원사적인 종말론이다. 지금은 종말이 진행 중이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예수의 전승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있음을 확신하였고, 그 사역이 인자의 재림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4) 보편사적 종말론 판넨 베르크는 세계사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보았다. ‘신적 현실의 흔적’, ‘하나님의 임재의 현실’이 세계사이며,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의 현존의 흔적이다. 미리 일어난 역사의 종말인 예수의 운명 속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한분 하나님이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안에서 완전히 계시하게 되는 보편사적 종말론이다. 종말론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사를 통해서 나타난다. 역사는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종말이라는 것은 보편적 역사 속에서 계시된다고 보는 주장이다.
5) 메시아적 종말론 몰트만에게 있어 복음은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다. 복음은 메시아가 온다는 구약의 약속이 역사적으로 성취함과 동시에, 메시아의 나라가 약속이 된 것을 말한다. 둘째로 메시아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약속이 새로운 약속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메시아가 지배하는 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다. 구약의 약속이 이루어진 초림과 동시에, ‘메시아의 나라가 올 것이다’라는 약속의 성취와 새로운 약속의 주어짐이 복음이다. 시간이란 과거로부터 현재에 걸쳐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 내가 이 시간에 있는 것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온 것이다. 그래서 미래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시간은 메시아적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시작되어 역사의 미래로부터 시간이 온다. 부활로부터 종말이 시작되어 미래로부터 역사의 시간이 온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항상 새로운 것이다. 종말은 예수로부터 시작했고,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 즉 메시아적 나라가 온다. 몰트만은 “종말론적 사고를 가질 때 미래에서 오는 변혁을 생각할 수 있으며 이것이 희망이다.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오는 변혁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의 희망이다. 비록 내가 경제적 육체적 군사적인 억압이 있지만 내게는 항상 미래에서 오는 공급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나는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3. 예수그리스도의 종말론 이해
예수그리스도는 진정 종말론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행동이 자신의 사역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믿었으며, 그 구원 행동은 머지 않아 완성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실, 겉으로 볼 때, 이 두 경향은 상호 모순적인 느낌을 준다.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이면서 또 미래적이 될 수 있는가? 이런 이유로 학자들은 어느 한 측면만을 역사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다른 차원을 초대 교회의 창작으로 돌리는 실수를 범해 왔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공간적으로 생각을 하다 보니, 현재적인 실현에 대하여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앞에서 정의한 대로, “종말”과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두 가지의 차원은 전혀 무리 없이 공존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앞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은 예수가 말한 “성장의 비유들”(parables of growth) 안에서 잘 통합되어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겨자씨처럼 이미 예수의 사역 속에서 숨겨져 있다. 그것은 또한 누룩처럼 반죽 속에 숨겨져 있다. 심겨진 씨앗이나 넣어진 누룩은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실현이라고 볼 수 없다. 아직 미래가 남아 있다. 실현은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실현이 될 것이며, 그 이전까지는 믿음을 통한 개인적, 영적 실현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종말론적 변화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며, 역사적 성격을 가진다.
B 종말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1. 마틴 루터의 종말론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교 교리를 영원에 비추어서 생각한다. 즉 신앙에 있어서 구원은 이미 현재적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계속하여 최후의 계시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이며 십자가의 신학에 머물면서 필연적으로 종말론이 된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계시될 미래를 동경하고 대망한다. 루터의 신학은 엄격한 종말 대망의 의미로 철저하게 종말론적이다. 이런 종말론적 강조는 엄밀한 의미로서의 교회와 경험적인 교회를 구별하게 한다. 지금은 위선자들이 교회와 혼합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시 참된 교회와 위선자들은 영원히 분리될 될 것이다. 또한 모든 성도들 안에 있는 부패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본성에서 영원히 제거될 것이다. 루터는 결코 육체적인 죽음, 삶의 종료 그 자체만을 생각하지 않고 죽음의 인격적인 중심과 깊이에 주목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에 대해 “우리의 죽음은 다른 생물들의 모든 죽음뿐만 아니라 인간의 죽음과 곤경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하나님의 진노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을 보존하기 위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맞붙여 싸우도록 강요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의 율법과 진노에 대해서 깨어있는 거처럼 죽음의 운명에 대하여 전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율법 아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복음을 듣는다.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 및 죽음의 모든 체험의 완전한 변형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부정은 죽음의 사건을 자만하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간과 만난다는 것이다. 심판의 부정은 죽음을 통하여 나의 옛 죄된 본질에서 나를 제거하셔서 나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본질을 선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방문의 아버지의 부정으로 변화된다. 죽음은 “아버지의 회초리와 아이에게 주는 벌”이 된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세례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약속하신 것 즉 그의 죄를 죽음에게 넘겨준다는 것을 성취한다. 이것은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과하시는 과업과 고난을 통하여 시작되나 그것은 오직 육체적인 죽음에서 한 순간에 완성된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완성을 바로 이 죽음에 대한 갈망으로 이해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죽음의 율법은 동시에 복음의 형태가 된다. 죄와 벌이었던 죽음은 이제 죄를 치유하는 약이 된다는 것이다. 죽음 저 편에 대한 모든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품 안에 쉬며, 이 품은 그리스도의 말씀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최후의 심판 때까지 그리스도의 품에서 품어지고 보존되어 주거와 휴식처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종말론에 있어서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루터는 그리스도교의 종말의 대망은 개인의 유한한 미래와 관계될 뿐 아니라 역사의, 세계의 미래와 관계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이 죽음과 부활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에 대하여 열망하라고 명하는 바와 같이 그들의 시선을 동시에 이 세상 형태의 종말과 예수그리스도의 날의 도래 쪽으로 돌리고 이에 대하여 열망하라고 가르친다. 사람들이 모두 죽음의 심판과 그들 몸의 부패를 거쳐 가야 하며 단지 이 방식으로만 영광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처럼 이 세상 형태는 불로 파괴되고 나서 궁극적인 새로운 세계로 새롭게 창조된다. 루터는 이 모든 것을 로마서8:20절 이하와 베드로후서3:10, 13, 이사야65:17등과 같은 성경구절을 근거로 주장한다. 이는 루터가 얼마나 감정적이며 실재적으로 피조물의 영광의 형태에 대한 희망을 피조물의 지금의 심신 상태와 달리 표현할 수 있었는가는 유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영원한 생명과 새로운 창조를 구체적으로 그려 내려는 모든 시도를 동시에 유보한다. “어린 아이들이 태중에서 그들의 출구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하듯이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루터는 종말론에서 ‘구원론적 선택의 교리’를 내세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안에서 용서를 얻어야 하며 죄와 싸워야 하고, 시험을 받을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이 영원한 선택을 선포하셨다는 것을 인지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또한 종말은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쉼을 의미하고 있다. 2. 존 칼빈의 종말론
칼빈의 전체 신학은 예정론과 종말론을 두 기둥으로 하여 구성된다. 천국의 기업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받아들여졌고 또 영원히 택함을 받았다는 것으로부터 온다. 뒤로 돌아보는 신앙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기초할 때에 그것의 기초가 하나님의 영원한 택정함에만 있는 것과 꼭 같이, 그것의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내다보는 것은 동등하게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최고의 행위이신 영생으로의 부활이다. 천국의 기업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받아들여졌고 또 영원히 택함을 받았다는 것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예정해 놓으셨으며, 이 예정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 지상의 삶은 천국의 삶에 비해서 경멸해야 할 것으로서, 이 지상의 삶을 종결하는 죽음은 천국을 소망하는 신자들에게는 당연히 동경해야 할 것으로 비쳐진다. 죽음에 대한 동경은 지상의 죄악된 삶의 종결로서의 죽음에 대한 동경을 의미한다. 죄악의 결과로 지상의 생명이 시작되었으므로 지상의 생명이 끝나야 온전하게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절망으로부터 생겨나는 죽음에 대한 거짓된 동경과는 구별된다. 한편 기독교인은 죽음 속에서 목표를 발견한다. 죽음이 그에게는 절멸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분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혼과 육체 사이의 싸움의 종식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영혼은 이미 육체의 부활의 기대 속에서 하늘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며, 또한 육체의 부활은 영혼을 완전한 축복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그러나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의 영혼은 최후의 심판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감옥에 갇혀 있게 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칼빈의 이해의 중심이다. 자기 부정, 십자가를 짊어짐, 현세의 삶에 대한 경멸, 역사관, 미래에 대한 전망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의해서 규정된다. 세계 역사의 의미와 미래는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원 사역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에, 칼빈은 세계 역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죽음과 부활은 칼빈에게 있어서 세계 역사의 종말론적인 전환점이었다. 그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의 변혁이 이루어졌다. 인간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에 이런 결정적인 사건은 다시없었다. 그 뒤에 있는 모든 사건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일어났던 세계의 변혁과의 연관되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모든 세계의 변혁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일어났지만, 세계는 아직 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만물의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새로워짐은 아직 완성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다. 사탄의 왕국이 멸절되기까지는 만물의 바른 질서는 세계에서 실제적으로 정립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것과 아직 이루어야 할 것 사이의 이러한 긴장 상태가 칼빈의 종말론적 전망을 지배하고 있다. 승천은 부활과 같이 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면 우리는 하늘로 승천한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와 함께 있도록 우리를 끌어 올릴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은 그리스도가 한 번 오신 이래로부터 신자에게는 깨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남겨진 유일한 일이라는 사실이다.하나님이 십자가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십자가의 고난의 형태가 될 것이다. 역사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낙관적이라기보다는 희망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천국의 능력이 계속적으로 악의 세력을 쇠퇴시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온전히 함께 하실,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재림이 있기까지는 우리에게 언제나 혼란과 갈등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3. 존 웨슬리의 종말론
웨슬리의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주장과 완전 개념은 역사 속에서도 완전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연결되어 모든 창조의 개혁과 재창조의 비전으로 발전한다. 웨슬리의 설교 ‘성경적 기독교’를 보면 개인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사역이 시작되어서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종국에 가서는 전 세계를 덮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종말을 향해 정위되는 전망과 함께 성령의 마지막 날들이 도래하는 것으로 목격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큰 일들을 우리가 보게 될 것이 아닌가? 진실로 세상의 처음부터 이제까지 일어난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한 일들을 보게 될 것이 아닌가?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를 망칠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혹은 그의 약속들이 무효가 되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가 만유에 편만하고 지상을 덮을 때가 올 것이다. 웨슬리의 종말론적 비전은 그의 은총의 낙관론에 근거를 두면서 하나님의 창조적 미래와 이에 대한 소망을 중심으로 한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종국적인 영광의 나라를 현재적인 은혜의 나라에 있어서 앞당겨 체험하는 소망의 차원이다. 즉 어떠한 현재적 종말론이나 미래적 종말론의 양극이 아닌 그 종합으로서의 웨슬리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신자들 속에서 종국적인 하나님의 영광 속에 성취될 영원한 완성과 지복으로 그의 현재적 역사를 주도하시는 성령에 대한 역동적 증거가 된다. 웨슬리의 종말론적 목표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내주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해서 보는 최고의 닮아감으로서 하나님과 같아짐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종말론적 마지막 상태는 가장 완전한 행복이요, 하나님의 형상과 같은 모습에 참여하는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인 것이다. 웨슬리는 인류의 전적 타락보다 사랑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강조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 주는데 이로부터 우주에 대한 그의 낙관적 태도가 표현된다. 이는 그의 하나님의 역사들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인정이라는 창세기 주석 설교에서 잘 드러난다. 창조 세계 자체도 타락한 무질서의 고정된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실현의 섭리적 과정으로서 그 안에서 그 잠재성이 그의 원래의 의도에 근거하여 진화되어 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타락으로 인해 초래되는 파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의지는 그의 창조의 역사를 완성, 실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후기 설교인 ‘새 창조’에서는 이와 같은 우주적 종말론의 비전을 표현하고 있다. 이 속에서 웨슬리는 인간적인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인정하면서, 성경의 계시에 입각해서 새 하늘, 새 땅이 어떤 것일지를 그려보고 있다. 그는 당시의 물리학과 성경의 계시 내용 등에 따라 새 세계의 상을 그리되, 그것이 원창조를 무한히 능가하는 것임을 덧붙인다. "모든 땅은 아담이 보았던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낙원이 될 것이다" 웨슬리의 하나님의 나라의 이해로서 우주적 종말론의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그에게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본래적 창조에로의 회복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성화의 역사에 의해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 인간만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성화되어 가는 우주적 구원이 시작된다. 웨슬리는 성령의 갱신과 변혁과 창조의 성화의 사역이 개인적 내면적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발전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구원과 새 창조는 전 우주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4. 칼 바르트의 종말론
칼 바르트는 사람의 삶에 있어서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견해를 주장한 바 있다. 죽음은 그 자체에 있어 심판이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도 아니다. 죽음은 유한한 인간 존재의 한계이며, 그 자체로서 인간의 자연에 속한다. 그러나 또한 바르트는 인간의 죽음이 인간의 죄와 죄책과 관련되어지며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에게 두 가지의 측면을 말하고 있는데 곧 자연적 죽음과 심판으로서의 죽음이다. 바르트는 죽음이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작정되어진 것이며 그러므로 죽음이란 옳고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본질상 죽음이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원래적으로 가도록 예정된 삶의 과정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죄에 떨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인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땅 위에 인간의 생명은 끝을 갖도록 계획하였다.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이 죄인이기에 인간의 죽음은 지금 인간 위에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한 표징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거되었다고 한다. 즉 그는 인간은 무(無)존재로부터 나와 제한된 횟수를 땅위에서 지내다가 다시 무(無)존재 속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존재이다. 종말에 관한 바르트의 이해는 로마서 13:11 주석에서 이어지는 데. 그는 종말은 연대기적 구원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가까이 옴을 말하고 있다. 바르트의 종말론은 더 이상 미래에 발생하게 될 어떤 사건들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종말론이란 우리가 그리스도를 직면하는 순간마다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 바르트의 종말론은 영원한 종말론이다. 모든 순간은 영원한 순간의 비유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순간은 영원의 비유다. 오늘 이 순간은 영원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이다. 그러므로 모든 순간은 영원한 순간의 가치를 가진다. 여기에, 그리고 지금. 종말은 시간의 종점이 아니라, 시간의 모든 순간 속에 있는 영원의 현재이다. 역사의 종말은 역사의 미래에 시간의 저 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순간 속에서 경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의 반대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속의 핵이다. 바르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간에 영원을 경험하지 못하면 따로 영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순간순간을 종말론적으로 생활해야 한다. 종말론적 미래라는 것은 바르트는 관심이 없으며 의미도 없다. 그에게 항상 ‘여기 지금’이 중요하다.
5. 폴 틸리히의 종말론
틸리히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종말론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역사 철학의 문제였다. 그가 종말론에 대해 다룬 문헌은 1927년에 쓴 “종말론과 역사”, “조직신학Ⅲ권” 후반부에 기술된 종말론이 있을 뿐이다. 틸리히는 종말의 대한 이야기 역시 그의 조직신학의 방법인 상관관계의 방법에 따라 기술한다. 즉 역사의 문제들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이 문제에 대해 역사의 종말 곧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부터 답변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종말론을 제시한다. 따라서 틸리히에 의하면 종말은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만 다루어질 수 있다. 종말론은 세계사 위에 있는 혹은 세계사가 끝난 다음에 올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사에 있어서 종말의 의미와 기능을 다룬다. “모든 종말론적 개념들이 역사에 대한 상관관계를 잃어버릴 때, 그리고 하나의 독립적인 대상 영역을 가질 때 이는 무의미하게 된다. 틸리히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영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와 정의가 구현된 사회적 실재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인격적이며 개인적인 특성을 가진다. 즉 개개인의 존엄성과 가치가 온전히 완성되는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의 온전한 성취가 있는 곳, 곧 보편적 실재이다. 틸리히가 보는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이며 사회적, 인격적일 뿐 아니라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실재이다. 틸리히는 역사의 모든 사물들 안에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의 종말 곧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의 중심적 나타남이 그분 안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가 “역사의 중심”이다. 계시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의 보편적 중심이 그 속에서 인식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그분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나타남의 역사에 있어서 중심일 뿐 아니라, 역사의 차원이 완전하고 보편적으로 현실화 되어 있는 단 하나의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나타남은 역사가 그 자신과 그의 의미를 의식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틸리히는 역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궁극적 나타남을 위한 준비의 단계 혹은 성숙의 단계와 수용의 단계로 파악한다. 준비의 단계는 구약성서의 역사는 물론 종교사를 포함한다.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역사를 포함한 종교의 역사 전체는 중심적 사건을 위한 보편적 기초를 형성한다. 종교사의 보다 넓은 기초와 예언자들의 비판의 보다 좁은 기초, 그리고 후자를 통한 전자의 변형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성숙의 과정 혹은 준비의 단계는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에도 진행되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리스도 이후의 역사 곧 수용의 단계는 “교회의 역사” 혹은 교회의 시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교회의 기능은 과거에 일어난 것을 단순히 수용하고 그것을 나타내는 데 있지 않고, 미래에 일어날 것을 그의 잠재적 실존 속에서 앞당겨 오는 데에 있다. 틸리히의 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오기 이전의 세계사 속에서 준비되고 있고, 또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와 신 역사에서도 준비되고 있고, 또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와 신적인 영의 현존은 시간의 어떠한 순간에도 결코 부재하지 않았다.” 틸리히에 의하면 시작과 끝에 대한 모든 시간적 계산과 확정은 불가능하다. 역사가 언제 시작하였으며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에 대한 모든 시간적 확정은 언제나 다시금 오류로 드러났다. 역사는 “인간이 그의 소외된 실존과 이 소외를 극복해야 할 그의 규정을 의식하는 순간에 시작한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은 “인간이 그의 실존의 마지막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더 이상 제기하지 않는 순간 속에 있다.” 틸리히는 영원한 생명을 단순히 죽음 뒤에 오는 현재의 삶의 새로운 형태 속에서의 연장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현재적으로 파악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한다. 하지만, 죽음 후의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는지, 죽음 후의 영원한 생명 대신 "본질화"를 통한 영원의 현재적 참여에서 머물고자 하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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