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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

현대신학과 몰트만의 종말론

by 이덕휴-dhleepaul 2019. 11. 26.

현대신학과 몰트만의 종말론

 

조윤진

 

 

 

Ⅰ.  현대신학의 종말론과 몰트만의 비판

 

1.  19C : 요한네스 바이스(J. Weiβ)와  알버트 슈바이쳐(A. Schweitzer) - 철저한 종말론

 

1)  바이스

 

리츨(A. Ritschl)의 사위인 바이스는 신학계에 놀라움과 충격을 야기했다.  그는 예수의 메시지와 실존, 원시 기독교의 종말론의 중심적 의미를 재발견함으로써, 그 당시 관념주의적인, 본질적으로 세계내재적이고 윤리적 특징을 갖춘 하나님의 나라 이해(특히 리츨 → 하르낙(Harnack))에 대해 묵시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 이해를 날카롭게 대립시켰다.  특히 그는 그의 장인 리츨의 하나님의 나라 사고가 칸트와 계몽 신학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예수의 선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개념과 아무런 연결점이 없음을 지적했다.  리츨이 옳은 점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그의 신학의 중심에 놓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그의 사고는 예수의 선포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바이스는 예수의 선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연구하기 위하여 신약성서의 임박한 종말 기대의 구약성서적이고도 후기 유대교적인 원형에서부터 출발하여, 예언자들과 묵시문학가들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설립이 두드러져 있음을 확인했다.  여기서 본질적으로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자기 실증, 인간의 운명 속으로의 개입, 역사의 결정적 전환인데, 바이스는 이것이 예수의 선포 속에서도 드러나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이 시대가 끝장날 것임을 예수가 기대했다고 믿었다.  예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종말적인 실체이고, 현재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면 종말이 이미 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이스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표상의 유래를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에서 찾았다.  구약성서에는 그 원형이 없고,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표상을 지배하는 이원론은 포수기 후의 유대교의 절망의 표현으로서 다른 기원, 즉 페르샤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바이스가 해명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표상의 원형 3가지 요소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 이원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희망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표상은 완전히 초월적인 것, 완성기의 천상의 축복의 총체로서 이해되었다.  예수는 그 초세계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박하게 도래할 것임을 선포했다.  그러기에 거기엔 세계내재인 흔적이 전혀 없다.(C.Walter)

 

 2) 슈바이쳐

 

슈바이쳐도 19C의 자유주의적 예수상에 드러난 현대적 이념에 대해 반기를 들고, 예수의 인격과 삶의 역사적 지식을 유대적 묵시문학에 비추어 해석했다.  슈바이처의 주장은 ①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이해는 묵시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 ② 예수의 메시지는 철저히 종말론적, 묵시적이다. ③ 예수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생애 중에 곧 오리라고 믿었다.  이로써 슈바이처는 예수를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착각한 묵시적 환상에 맹신적으로 자기의 삶을 던져버린 미친 광신자로 이해하여, 그가 재발견했던 예수의 메시지의 종말론적 의미를 극복, 폐지했다. :

 

"사방이 고요했다.  그때에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 외친다.  곧 그 뒤를 이어 스스로 와야 할 인자로 자각한 예수가 세계의 수레 바퀴살에 끼워져서 그것을 움직여서 최후적인 회전을 시키고 일반 세계사의 종결을 가져오려고 한다.  그러나 바퀴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바퀴는 돌고 그는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는 종말론을 가져오는 대신 그것을 파괴했다.  그런데 세계라고 하는 수레바퀴는 계속 돌아가고, 자신이 인류의 영적 지배자이며 인류 역사를 자기의 목적대로 굽힐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사람의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의 조각들이 아직도 그 수레바퀴에 달려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승리이며 통치이다."

 

 3)  철저적 종말론에 대한 비판

 

몰트만은 바이스의 철저적 종말론에 대해 "여기서 예수는 산상설교이 도덕교사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종말론적 메시지와 같이 묵시문학적 열광주의자가 되었다.(J. Moltmann, 45f.)"고 비판했다.  그리고 슈바이쳐에 대해서는 "같은 것의 영원한 순환의 상징인 '역사의 바퀴'가 역사의 종말론적 화살의 방향을 대신한다.(J. Moltmann, 46f)"고 했다.  

몰트만은 슈바이쳐와 그의 뒤를 따르는 마르틴 베르너(Martin Werner)와 프리츠 부리(Fritz Buri)의 "철저적 종말론"에 대해 "그들 학파는 종말론을 철저히 폐기해 버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오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들은 종말론을 시간화하였으며, 종말론에서 그들은 시간 자체의 아무런 변화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참된 종말론은 미래적 역사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미래와 관계가 있다.  슈바이쳐처럼 종말론을 역사 속으로 '끌어넣는' 사람은 종말론을 이미 포기한 것이다.  역사내재적인 묵시사상은 역사내재적인 천년왕국과 마찬가지로 종말론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내재적인 천년왕국설은 슈바이쳐가 관심을 갖던 "세계의 윤리적 완성"에 대한 표상 속에 담겨 있다.  예수와 원시 기독교의 종말론의 신학적 인식을 위한 투쟁은, 원시 기독교에 있는 그의 정당성의 기초를 역사적-비판적으로 제거하려는 데 대한 문화 기독교의 투쟁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역사적 기초는...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바이스와 슈바이쳐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문화 기독교가 재발견된 원시 기독교로부터 분리됨으로 말미암아, 근대 개신교의 문화 기독교는 그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경악 속에서 몰락하기 전, 이미 내적으로 공허하게 되었으며 설 수 있는 근거를 잃어버렸다."(Moltmann, 오시는 하나님, 37-38ff)

 

2.  루돌트 불트만(R. Bultmann) - 실존적 종말론-

 

 1)  불트만의 종말론

 

불트만의 신학에서 종말론은 역사의 종말로서 미래성을 잃고 있다.  왜냐하면 그에 의하면 "매 순간이 종말적이기" 때문이다.

 

"매 순간은 하나의 종말론적 순간이 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 가능성은 실현된다. 역사의 의미는 항상 현재에 있다.  그리고 이 현재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의해서 종말론적 현재로서 파악될 때 역사의 의미는 실현되는 것이다.", "항상 현재 속에 역사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방관자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책임적인 결단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매 순간 속에 종말론적인 순간이 되는 가능성이 잠들고 있다.  너는 그것을 깨워야 한다."(Bultmann,195f.)

 

인간이 하나의 궁극적으로 의미있는 결단을 하는 그 순간은 언제나 종말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처럼 종말론을 각자의 현재에서의 실존적인 만남(하나님 앞에서의 본래적 실존을 위한 결단)으로 철저히 전환시켰는데, 그는 바울, 특히 요한의 철저한 종말론의 현재화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리고 그는 제4복음서 속의 미래적 종말론(시간과 관련된 종말론)을 후대교회의 개작이라고 추측했다.

 

 2)  실존적 종말론에 대한 비판

 

불트만의 실존적 종말론에 대해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해석에서 종말론은 역사의 목표로서는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하고 결국 개인의 존재의 목표로서 이해되어 있다."(J. Moltmann. 희망의 신학, 76.) "신앙은 그 자체가 역사의 사실상 종말이고, 신앙인은 그 자체로서 이미 완성된 자가 될 것이다. 그에게는 기다려야 할 것이 더 이상 없게 될 것이고, 그가 세상적, 육체적, 역사적으로 달성해야 될 목표도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미래성'은 '영원한 것'일 것이고, '이 완성의 상태에 있는' 인간의 개방성도 역시 '영원하고',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처럼 '종말론적으로' 이해된 신앙의 실존은 '영원한 현재의 나타남'의 새로운 형태로 바뀌어질 것이다."(J. Moltmann, 83)-"우주적인 종말론이 없이는 인간의 종말론적 실존을 말할 수 없다."(83f)

"종말론은 역사의 목표로서는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하고 결국 개인의 존재의 목표로서 이해되어 있다.(53f.) 주관적 확실성의 체험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 이해는 반성철학의 산물이다.(55f)"

"종말론에 대한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은 그 자신의 개인적 실존에 집중하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세계사와 자연사를 도외시하는 점에서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세계사가 실존의 역사성으로 대체됨으로써, 세계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미래가 개인의 미래성으로 인지된다 하여, 미래가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최후의 날'이 나의 죽음으로 대체된다 하여, 죽은 자들의 미래에 대한 질문이 답변되는 것은 아니다."(Moltmann, 오시는 하나님, 55f)

 

 3.  칼 바르트(K. Barth)와 폴 틸리히(P. Tillich) - 변증법적 종말론

 

 1)  초기 바르트(변증법적, 초월적, 가치론적 종말론)

 

"하나님의 통치가 시간의 의미라고 한다면, 그것은 시간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물들과 나란히 있는 시간적 사물도 아니다.  시간 속에 있는 것은 죽음의 한계에 아직 이르지도 못했고 하나님에 의해 장악되거나 통치되지도 않는다. - 마지막 나팔의 소리가 들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며 살아있는 자들이 변화되는 순간, 이러한 시간의 순간, 물론 시간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그 종말, 그 무시간적 목표와 끝 - 그리스도의 부활 혹은 그의 재림, 이것은 시간적인 사건이 아니다. - 새 시대의 도래, 그때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 올 것의 통치, 이것이 부활이다."(Biblische Fragen, Einsichten und Ausblicke ; 1920)

 

"어떠한 시간 속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그분의 출현,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시간의 신비, 지양, 기초 및 영원이기 때문이다."(Ro-2,402)-"시간이 영원과 같이 되었고 영원이 시간과 같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바로 그 때 이 가능성이 생긴다.  그것은 '순간의 인식' 속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들 사이의 한 '순간'이며, 결코 시간 속의 한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 속의 모든 순간이 이러한 순간의 완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이 순간은 과거가 물러가고 미래가 다가올 때 과거와 미래가 멎게 되는 영원한 순간, 지금이다.  시간은 그 신비를 노출한다."(Ro 2, 481)

 

여기서 시간의 전환이 종말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순간에 '시간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수직적으로 개입하는 창조적인 하나님의 행동이다.  모든 현실을 포괄하는 종말은 이미 현존하고 있다.  미래는 곧 현재이며, '부활의 미래'는 '영원한 순간'과 동일시된다.  영원한 하나님 안에서 종말론은 태초론과 동일하다.  여기서 종말은 초월과 같은 뜻을 의미한다.(N.T, Bakker, In der Krisis der Offenbarung,39)  역사의 종말은 모든 시간과 그 시간에서 일어나는 것의 근거가 되는 원역사(Urgeschiche ; Overbeck)와 동일시되었다.  시간의 한계는 모든 시간의 한계이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기원이다.  "참된 종말에 관해서는 매 시간마다 말할 수 있다. ; 종말은 가까이에 있다!  그것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에 관해서도 원칙적으로 해당된다."(Die Auferstehung der Toten, 1924, 61f)

 

 2)  폴 틸리히(영원한 지금, System. Theo.Ⅲ)

 

틸리히도 역시 종말론의 문제를 영원과 시간의 변증법적 개념으로 생각하였다.

 

"우리의 시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은 우리가 '현존'하고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시간을 끝없는 흐름으로 생각하면 '현재'는 없다.  현재의 수수께끼는 시간의 모든 수수께끼 중에서 가장 깊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시간을 포함해서 그것을 초월하는 것, 즉 영원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답이 없다.  우리는 현재에 산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언제나 새로운 '현재'로 갱신된다.  이것은 시간의 모든 순간이 영원한 것에 도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를 위하여 시간의 흐름을 멈추는 것이 영원한 것이다. 이 현재는 우리를 위하여 일시적인 '지금'을 마련하는 영원한 '지금'이다.  모든 시간의 소모된 힘을 뛰어 넘는 오직 하나의 힘은 영원이다.  그는(예수는) 전에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앞으로 오실 분- 처음이며 나중이다.  그는 '그'의 영원한 '현재'에서 우리로 하여금 쉬게 하신다."(영원한 지금, 139ff)

 

과거와 미래는 현재 속에서 만난다.  둘 다 영원한 '지금' 안에 포함되어 있다.  종말(eschaton)은 그 미래적 차원을 상실하지 않고서도 현재적 체험의 일이 된다.  우리는 '지금' 영원의 얼굴 속에 서 있다.  역사의 완성은 영원히 현재적인 역사의 끝에 놓여있다(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적 차원: 영생).  역사의 끝은 시간이 영원으로 이끌려 올라가는(고양되는,초월되는) 것이다.(System. Theo.Ⅲ. 359f.)

 

 3)  변증법적 종말론에 대한 비판

 

"로마서 강해 제 1 판에서는 동적이고 우주적인 전망에 대해서 박정하지 않았던 종말론이 그 후로는 바르트에게서 뒤로 물러가고 시간 - 영원의 변증법에 의해 움직이고, 칸트의 초월적 종말론에 이끌리는 것은 이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은 '근원'과 같은 뜻이 되었고, 종말은 영원을 통한 시간의 초월적인 한계가 되었다." (Moltmann, 희망의 신학, 61)

"바르트의 초월적 종말론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결부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는 바르트의 명제는 신플라톤적 영지주의에서 온 것으로서 중세기 신비주의의 명상과 헤겔의 종교철학에서도 나타났다. 그것은 그리스의 종교철학의 지반 위에 있는 절대자의 자기반성의 최고의 단계를 표현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가 약속된 미래의 묵시로서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의 나타남으로 생각되었다.(49) 그 하나님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하나님이다 (유일한 존재는 현재에 전체로서 존재한다. 그의 진리는 '현재에' 있고, 그의 영원은 현재이다).(23)"

"'종말'이 마지막 시간을 뜻하지 않고 영원을 뜻한다면, 종말론은 더 이상 미래와 관계가 없다.  그것의 긴장관계는 현재와 미래, '지금 이미'와 '아직 아님'에 있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있는 영원과 시간에 있을 따름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을 선포할 때, 그는 시간적인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하늘을 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로부터 현재 속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로부터 땅으로 오는 것으로 생각된다."(Moltmann, 오시는 하나님, 45-46ff)

 

4.  판넨베르크(W. Pannenberg) -보편사적 종말론(선취된 종말론)

 

1)  판넨베르크의 종말론

 

판넨베르크는 라트(G. von Rad)의 구속사 개념을 확대하고(역사는 전통의 전승과정이고, 신학은 역사의 해석이다 : 구속사 신학), 묵시론적 역사 이해에 근거한 보편역사와 예수의 출현(특히 부활)의 종말론적(예기적) 성격에다가 헤겔적인 계시이해(역사의 종국과 완성에서 역사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사고 : 역사철학)를 종합함으로써, 보편사적 역사와 계시의 이해, 보편사적 종말론을 전개하였다.

판넨베르크는 그의 논문 '역사로서의 계시'에서 바르트의 말씀 계시(하나님이 말씀하셨다. Deus dixit)에 반대하고, 또 다른 한편 불트만의 실존적 계시이해(객관화할 수 없는 인간의 자기의식에서 증명되어지는 하나님, 실존의 의미성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됨)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판넨베르크는 라트의 구속사 신학을 수용, 발전시켜서 역사를 하나님의 보편역사의 관점에서 보았다.  역사는 인류의 창조에서부터 시작해서 인류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이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 의해 그 정점에 도달하는 전체로서의 역사로 간주되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러한 보편사적 지평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계시는 계시의 역사의 처음에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 마지막에 일어난다.  야웨의 신성은 계시의 사건들이 완전히 종결될 때에 비로소 증명된다.  묵시록의 역사표상에 따라 판넨베르크는 세계의 전 역사가 마지막까지 이르는 종말사건에 의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신성의 인식)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판넨베르크는 유대교의 묵시록이 이러한 보편사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님 인식은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계시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했다.  그러므로 판넨베르버크는 호프만(Hoffman), 쿨만(Cullmann)과 같이 역사를 세속사와 구속사로 구분하지 않고 역사를 보편사로 간주하여, 신앙을 지참하지 않고서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역사의 종말은(즉 하나님의 신성의 보편적 계시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미리 앞당겨 일어났다.  예수의 지상적 선포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예기(prolepse)였고, 예수의 부활은 세계 종말시에 일어날 부활의 선취(先取) 행위이다.  물론 예수의 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일어난 계시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선취적인 것이지만,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 선취적 형식에서 최종적인 계시이다.  예수의 출현은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그의 운명은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다.  그의 인격 속에서 모든 시대의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신성의 최종적 계시가 먼저 사건이 되었다.(Vorwegereignis : 선취(先取)적 종말론)  예수는 종말적 하나님의 계시자이고 예수의 부활은 종말 자체의 도래(여명)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이미 역사종말의 선취로부터 살고 있다.

 

 2)  보편사적(선취적) 종말론에 대한 비판

 

역사로서의 계시는 현실 전체에 대한 물음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물음으로서, 우주로부터의 하나님의 증명에서 비롯한 것이다.(67) 이 보편사적 신학은 분명히 그리스의 우주론적 신학의 확장과 그 극복이다.(68) 역사가 역사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간접적인 계시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전체로서의 실재인 역사이해), 이것은 희랍의 우주론적 신학의 사고구조가 종말론적으로 적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69)

그리고 만일 예수의 부활의 운명만이 역사의 종말에 앞서서 일어난 사건, 그 선취, 예기라고 한다면, 부활한 예수 자신은 어떤 미래도 가지지 못할 것이며, 교회가 기다릴 것은 예수 자신이 아니고 그의 운명의 반복일 뿐일 것이다.(72f.) 여기엔 약속과 성취라는 근본인식이 포기되어 있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사건은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약속과 그 약속의 미래의 성격을 갖는다. 예수의 부활은 단지 종말의 만인부활의 첫 사례(Fall)가 아니라 그 시작(근원 ; Anfang, Ursprung)으로 이해되어야 한다(73). 그리고 신학자는 단순히 세계, 역사, 인간을 다만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갱신의 기대 속에서 그것을 갱신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74) 역사의식은 파송(사명)의식이고, 역사에 관한 지식은 변혁의 지식이다.(79)

 

Ⅱ.  몰트만의 종말론

 

1.  종말론의 의의와 출발점(J. Moltmann : Theologie der Hoffnung/ 희망의 신학,1964)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의 종말론은 기독교의 희망론을 의미한다. 종말론은 올바른 신학의 마지막, 부록이 아니라, 그 시작이다.

 

"기독교는 다만 부록으로서만 종말론이 아니라, 전적으로 완전히, 앞을 향한 희망, 전망고 진군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또한 현재의 변혁과 갱신이다. 종말론적인 것은 기독교에 덧붙여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매체이며, 모든 소리가 집중되어 조율되는 원음(原音, Ton)이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기대되는 새날의 여명의 색깔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래도록 종말론을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이나 '최후적인 것들에 관한 가르침'으로 불러오면서, 이 마지막 일들을 언젠가 마지막날에 세상, 역사 및 인간 위로 돌입해 올 사건으로 이해했다. 이 사건들은 역사의 피안에서부터 차안으로 뚫고 들어와서, 모든 것들이 일어나고 움직이는 장소인 역사를 끝장 낼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러한 사건들이 '마지막 날'로 연기됨으로써, 그것들은 종말의 이쪽에서 역사 속에서 영위되는 모든 날들을 위한 그 지시적, 고무적, 비판적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기독교 신앙이 전수해 준 성서적 증언은 이 땅을 위한 메시야적 희망으로 넘쳐흐르는 것인데, 자신을 지탱하는 이 미래의 희망을 그 삶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이 희망은 곧장 교회로부터 벗어나가게 되었고 결국에는 희망의 왜곡된 형태로서 항상 교회를 대항하면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론은 본래 기독교 교리의 한 부분일 수가 없다. 오히려 모든 기독교적 선포, 기독교적 실존, 전 교회의 특징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오직 하나만의 실제적 문제, 즉 미래의 문제만을 가질 뿐이다. 왜냐하면 희망에 관한 성서적 증언들 속에서 우리에게 타자로서, 즉 우리가 주어진 세계와 기존 경험으로부터 고안하고 묘사할 수 없는 자로서 다가오는 것은 새로운 것의 약속,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은 세계 내적인 하나님이나 세계 외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희망의 하나님'(롬 15:13), '미래를 존재의 속성으로' 가지는(E. Bloch) 하나님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종말론은 미래 일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특정한 역사적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미래, 그 미래적 가능성, 그 미래적 힘을 고지한다. 즉 기독교의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에 관해 말한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의 현실을 인식하고 부활한 자의 미래를 선포한다. 그러므로 미래에 관한 모든 진술을 예수의 인격과 역사 안에서 정초하는 일이야말로 종말론적, 유토피아적 정신의 시금석이다.(11-13)

 

그런데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의 종말론의 본래적 언어는 그리스적 로고스가 아니라 약속이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언어, 희망, 경험에 의해 각인된 것으로서, 이스라엘은 영원한 현재의 나타남의 로고스에서가 아니라 희망을 기초하는 약속의 언어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했다. 그러므로 약속의 언어 속에 있는 기독교의 종말론이야말로 기독교 진리를 풀 수 있는 본질적인 열쇠가 된다.(34-35)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말과 명제는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의 명제와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약속의 방식으로, 약속의 역사 속에서 계시하신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신앙의 특이한 특성인 '약속의 종교'가 이스라엘 주변세계의 계시된 신들의 '에피파니의 종교들'로부터 구별되게 된다.(36)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은 직접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사건과 결부되어 있다.(89)

그런데 신학적 사고의 매체인 종말론을 상실한 것은 결국 기독교가 그 주변세계에 적응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신앙을 단념(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 되었다. 즉 신학적 사고에서 기독교가 그리스의 정신 속으로 흡수됨으로써 자신의 종말론적 희망의 비판적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35) 몰트만은 현대신학에서도 여전히 종말론의 사고가 온통 그리스적 정신의 사고형태를 띠고 있다고 지적하고 비판했다.

 

2.  오시는 하나님(J. Moltmann, 오시는 하나님)

 

"오시는 하나님"에서 종말론은 "계속 진행되는" 역사가 모든 종말론을 삼켜버리거나, 언제나 현재적인 영원이 모든 역사를 폐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미래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종말"(Eschaton)은 시간의 미래도 아니고, 무시간적인 영원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Zukuft)와 오심(An-kunft)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미래의 강림절적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성서가 보도하는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경험과 기다림으로부터 생성된다.(57)

"중단"(Unterbrechung)이 종말론적인 것의 범주가 아니라, "전향"(Umkehr)이 그 범주이다.  중단은 사물들의 정상적인 과정과 자신의 일들의 목적을 방해한다.  종말적인 것이 시간의 과정들을 "중지시킬" 때, 시간의 과정들은 철저하게 변화한다.  예언자들은 당분간 "중지시키지'" 않고, 백성들이 시간의 과정을 전향시키도록 요구한다.  전향과 새로운 생명으로의 거듭남은 시간과 시간의 경험을 변화시킨다.  현재화된 미래는 역사적 가능성들의 새로운 조건들을 창조한다.  단순한 "중지"는 방해할 뿐인 반면, 전향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57-58)

 

1)  오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1:4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그가 과거에 계셨고, 지금 계신 것 같이 장래에도 있을 것이라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활동 가운데 계시며 세계를 향해 오신다는 데 있다.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Werden) 속에 있지 않고, 오심(Kommen) 가운데 있다.

종말론적인 오심 속에서 하나님과 시간은, 하나님의 존재가 세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시간의 미래가 신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희망의 하나님은 오시는 하나님이다.(사 35:4, 40:5)  하나님이 그의 영광과 함께 오실 때, 그는 온 우주를 그의 영광으로 가득 채울 것이며, 모든 사람이 그를 볼 것이며, 그는 죽음을 삼켜 버릴 것이다.  이 미래는 역사에서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다.  미래의 힘은 시간에서 그의 힘이다.  그의 영원은 무시간적 동시성이 아니라, 모든 역사적 시간에 대한 그의 미래의 힘이다.(60-61)

하나님의 오심으로써 새로운 인간됨이 가능하게 된다.  가까운, 도착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는 미래에 대한 인간의 전향(회개)을 가능하게 만든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4:17)  하나님의 향하여 오심과 인간의 회개의 이 통일성이 "성취된 시간"(막1:15)이다.  요한일서도 인간적이 된다는 것과 하나님의 오심을 결합한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요일3:2)  여기서 뜻하는 것은 재림의 그리스도이다. 오시는 하나님의 종말론ㄷ은 인간의 새로운 역사를 생성한다.  그것은 지나감(Vergehen)이 없는 과정이요, 하나님의 오시는 현재 속에 머무는 존재로의 힘이다.(61-62)

 

2)  미래: 미래(Futur)인가, 강림(Advent)인가?

 

Futurum은 되는 것을 가리키며, Adventus는 오는 것을 가리킨다.  Futurum은 과거와 현재로부터 발전되는데, 과거와 현재가 됨(Werden)의 잠재성을 그들 자신 안에 가지고 있으며 "미래를 잉태하기"(Leibniz) 때문이다. 존재 속에 이미 들어 있으며 역사적 과정의 경향(Tendenz)과 잠재성(Latenz) 속에서 그 자신을 알려주는 것만이 무언가로 될 수 있다.(62)  

Futurum은 희망에 대한 아무런 동기도 주지 않는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언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과거가 더 큰 무게를 가진다.  미래적인 것은 과정의 경향들 속에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놀랍게 새로운 것을 가져올 수 없다.(63)

독일어 "Zukunft"(미래)는 라틴어 futurum의 번역이 아니라 adventus의 번역이다.  그리스어로 adventus는 "파루시아"에 해당한다.  세속 그리스어로 파루시아는 사람의 도착이나 사건의 발생, 축자적으로 현재를 뜻함에 비하여,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언어를 통하여 이 단어는 희망의 메시아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파루시아(우리말로 재림)에 대한 희망은 강림에 대한 희망(Adventshoffnung)을 뜻하게 되었다.  신약성서에서 파루시아는 육을 취하고 있던 그리스도의 지나간 현재를 뜻하지 않고, 영광 가운데 나타날 그의 도래하는 현재를 뜻한다.  강림에 대한 희망을 제거하기 위하여 나중에 신학적 전통이 말한 바와 같이, 육과 영과 영광 가운데서 일어날 "세가지 파루시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루시아는 강림(혹은 오심)을 뜻함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정당하게도 "그리스도의 미래"로 번역하였으며, 희망의 메시아적 의미를 단어에 부여하였다.  "재림"(Wiederkunft)이란 단어는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얼마간의 부재(Abwesenheit)를 전제하기 때문이다.(63)

하나님의 개념을 가지며 미래를 advent로 이해하는 종말론의 "종말"은 시간 속으로 등장할 수도 없고 시간 속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채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영원이 아니라, 시간의 초월적 조건들의 변화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오심과 함께 미래의 시간은 끝나며, 영원한 시간이 시작한다.  시간의 이와 같은 변화 없는 종말론은 생각될 수 없다. 본래 이것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표상으로부터 유래되며, 그 속에 죽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세계의 삶으로부터 유래된다.(65)

"미래적 종말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모순이다.  미래는 종말론적 범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한 현재"의 종말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모순이다.  그것은 시간을 지양하기 때문이다.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표상과 이 하나님에 상응하는 강림적 시간이해가 비로소 종말론의 범주를 열어준다.(65)

 

3)  새로움의 범주

 

"신적인 것을 나타내는 범주는 새로움이 아니라 영원이다."  불트만의 이 말은 그리스 종교의 신적인 것에 해당하겠지만, 성서적 근원을 가진 메시아적 종교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메시아적 종교에서 새로움의 범주는 종말론적 미래 개방성의 역사적인 면이다.(65-66)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과 가나안 땅 점령의 회상된 과거로부터 알고 있던 역사의 하나님은 "숨어 계신 하나님", "그의 얼굴을 이스라엘에게서 돌린", "먼 데 계신 하나님"이 되어 버렸다.  587년 대재난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이러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심판과 함께 그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행위를 선포한다. 그들은 과거의 하나님 전통을 해석하지만, 옛 전통에 비하여 새로운 것을 말한다.  그들은 역사의 하나님을 새로운 미래의 창조자로 선포한다.  이리하여 구원의 근거는 경험된 과거로부터 기다려지는 미래로 옮겨진다.  중단된 회상으로부터 새로운 희망이 생성된다.(66)

예언서에서 새로움의 개념은 적어도 두가지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진다.  첫째, 새것은 옛것에 대한 심판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옛것으로부터 생성하지 않고, 옛것을 옛것되게 한다.  그것은 옛것의 새로운 형성일 뿐 아니라, 새로운 창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창조 "barah"를 가리키는 배타적인 단어가 사용된다.  둘째, 하나님이 지으시겠다고 약속한 새로운 미래의 첫 선취(Vorgrff)는 역사적 유비("새 출발", "새 성지 점령", "새 계약", "새 예루살렘")를 갖는다.  그러나  "새 출애곱"과 "새 예루살렘"의 상들은 과거에 있던 것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과거에 하나님에 의하여 일어난 것은, 희망에 있어서 미래의 서곡(Prolog)이 된다.(67)

새로움의 범주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종말론적 언어를 지배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의 부활절 현현에 있다.  부활절의 현현은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의 종말론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가리켜 보여준다.  새것, 카이노스(kainos), 궁극적으로 새로운 것(novum ultimum)은 종말론적 미래를 가져오는 전혀 다른 것, 놀라운 것의 총괄개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 창조의 미래가 옛 세계의 현재 속으로 비추어 들어오며 "이 시대의 고난" 속에서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일으킨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움의 범주를 종말론적 범주로 만드는 두가지 특성을 다시 발견한다.  첫째, 부활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로부터 발전될 수 없듯이, 궁극적 새로움도 옛것의 역사로부터 생성될 수 없다.  둘째, 오시는 하나님은 새 하나님(Deus novus)이 아니라, 그의 창조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새 창조(creatio nova)는 죄와 불의로 멸망하고 있는 이 창조의 새 창조이다.(6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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