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 Sola Fide (롬 3:28)
성경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고 말씀합니다. 루터는 이 말씀을 번역하면서 “믿음으로”라는 말씀 앞에 ‘오직’을 첨가했지요.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처럼 행위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은 ‘이신칭의’의 교리로 표현되었는데, 개혁자들은 이것을 ‘실질적 원리’라 불렀습니다. 다른 교리들이 흘러나오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복음의 핵심이자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의 행위도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조하는 행위로 여기고 저주를 선언했습니다(갈 1:6-9). 즉, 이신칭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사도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됩니다. 이신칭의를 부인한다면 참 교회가 아니며 저주받을 집단입니다.
이신칭의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칭의’(稱義)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로마 가톨릭은 칭의를 ‘본질적으로 의롭게 되는 변화’인 성화와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칭의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선언과 관련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성화는 성도의 일생에 걸친 변화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 땅에서는 완성되지 않는 성격을 가졌습니다. 반면에 칭의는 한 순간에 선언되며 반복이 필요 없는 단회적 성격을 가졌습니다. 이 단어가 법정에서 무죄를 선언하는 판사의 행위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입니다.
판사의 무죄 선언은 전적으로 판사의 행위입니다. 또 한 순간에 영원히 결정되는 단회적 행위입니다. 무죄 선언이 의롭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판결의 순간부터 의롭다고 간주될 뿐이지요. 이처럼 칭의도 전적인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의롭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당장 그의 성품이 그 순간에 의롭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으며 현재 어떤 성품을 소유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그 순간부터는 하나님께 의인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그 선언은 결코 번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인정하시면 영원한 효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형벌 받아야 마땅할 죄인을 아무런 ‘근거’ 없이 의롭다고 선언한다면 공의롭지 않다는 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의 근거로서 제사제도를 계시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죄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흠 없는 제물의 머리에 손은 얹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그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된 것으로 믿었고, 제물의 피 흘림을 통해 죄 값이 대신 지불된 것으로 믿었지요. 죄인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법을 믿음으로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화평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는 진정한 근거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근거의 실체와 원형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a).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를 근거로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성도를 죄 값을 대신하여 다 치르셨지요. 성도의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었고 예수님의 피 흘리신 공로는 성도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시는 동시에 죄인을 의롭다고 칭할 수 있는 ‘근거’를 친히 마련하셨습니다.
구원과 관련하여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직’이라 말하면서도 3가지가 있어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3가지는 칭의에 대한 3가지 측면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나의 공로는 없고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므로 칭의의 ‘근거’가 그리스도께만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은혜는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칭의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의미하지요. 오직 믿음은 의롭다 함을 받는 ‘방법’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임을 의미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칭의의 수단적(instrumental) 원인을 성례로 보았습니다. 의는 믿음을 통해 ‘전가’(imputation)되지 않고 성례를 통해 ‘주입’(infusion)된다고 가르쳤지요. 그들은 트렌트 회의에서 믿음으로 성례를 행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세례 받으면 이전의 모든 죄가 사해지지만, 그 후에 선한 행위를 통해 공덕을 쌓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지요. 하지만 바울 사도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a)라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믿고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신’(以信)은 “믿음으로”라는 말의 한문 표기입니다. 이 말이 ‘믿음이라는 행위로’를 의미하지 않음은 분명하지만 행함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약 2:17). 이 말씀은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죽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행함이 없으면 애당초 참 믿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교인 스스로는 믿음이라 생각할지라도 거짓 믿음으로 판결되는 종류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에서 ‘믿음’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믿음과 회개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함께 합니다. 믿음을 가졌다면 회개한 것이고, 회개했다면 믿음을 가진 것이지요. 개혁자들은 성경적 회개를 전인의 반응으로 보았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를 깨닫는 지성과 죄에 대해서 마음으로 애통해하는 감성과 죄로부터 돌아서는 의지적가 함께 반응한다는 것이지요. 죄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애통은 넋두리이며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는 애통은 후회에 불과합니다. 밖으로 강하게 드러내든 속으로 하든 정도차이는 있지만 참된 회개에서 애통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참 믿음도 전인의 반응입니다. 따라서 지성적 요소와 감성적 요소와 의지적 요소가 함께 있어야만 구원 얻을 만한 참 믿음이지요.
믿음의 지성적 요소는 믿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측면을 말합니다. 내용도 모르고 무조건 믿는 것은 맹신이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칼빈은 “믿음은 경건한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기초를 둔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감성적 요소는 머리가 알고 있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측면을 말합니다. 이를 칼빈은 “지성이 흡수한 것을 마음속에 부어 넣는 것”이라 했고, 로이드 존스는 ‘동의’, 스펄전은 ‘확신’, 웨슬리는 ‘가슴이 뜨거워짐’으로 표현했습니다. 믿음의 의지적 요소는 자신의 전부를 주께 의탁하는 측면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를 ‘헌신’이라 했고 스펄전은 ‘신뢰’라고 불렀지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밭에서 엄청나게 값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구매했고, 진주 장사도 그렇게 했습니다(마 13:44, 46). 자기의 전부를 보화를 위해 던진 것이지요. 보화가 묻혔음을 깨닫는 지적인 측면과 그것을 가치를 뜨거운 마음으로 동의하고 확신하는 측면과 이에 따라 의지가 반응하는 측면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참으로 복음을 믿었다면, 신령한 복인 줄 깨닫는 측면, 참으로 그것이 가장 복되며 그것에 비해 세상이 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측면, 그리고 그 가치를 확신함에 따라 의지가 전환되는 측면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로 어떤 사람에 대해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셨고(마 8:10, 15:28),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 8:26, 17:20). 참 믿음은 죽었다가 살았다가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믿음은 적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은 처음엔 적었다가 나중에 커졌지요. 즉 믿음의 지성적인 요소와 감성적인 요소와 의지적인 요소 중에서 어떤 것은 많고 어떤 것은 적을 수 있습니다. 세 요소 모두 적을 수도 있고 전체적으로 많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아무리 겨자씨 한 알 만큼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한 가지라도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믿음의 열정은 있으나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향이 있습니다. 신조라는 것이 우리가 믿는 내용을 잘 정리한 것인데, 신조에 대한 가르침이 계속 적어지고 있지요. 무엇을 믿고 있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신앙의 형식만 배웁니다. 그러다 보니 참으로 믿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믿는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 다음 세대에 잘 전수가 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다음 세대들은 이 문제가 좀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무너지고 있다면 복음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고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지적 요소를 갖춘다고 해서 반드시 열정적인 감성반응과 헌신적인 의지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른 내용을 알고 깨닫기 전에는 지속적인 바른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내용에 대한 관심과 교육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예배당을 세우려는 열심보다 더 중요한 일은 무너지고 있는 복음 진리를 세우고 보존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복음의 핵심을 분명히 고수함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은 거짓된 교회로부터 참된 교회로 개혁했습니다. 개혁자들의 후손인 우리는 그들처럼 복음의 핵심을 분명히 알고 철저하게 복음을 고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성경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고 말씀합니다. 루터는 이 말씀을 번역하면서 “믿음으로”라는 말씀 앞에 ‘오직’을 첨가했지요.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처럼 행위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은 ‘이신칭의’의 교리로 표현되었는데, 개혁자들은 이것을 ‘실질적 원리’라 불렀습니다. 다른 교리들이 흘러나오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복음의 핵심이자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의 행위도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조하는 행위로 여기고 저주를 선언했습니다(갈 1:6-9). 즉, 이신칭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사도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됩니다. 이신칭의를 부인한다면 참 교회가 아니며 저주받을 집단입니다.
이신칭의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칭의’(稱義)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로마 가톨릭은 칭의를 ‘본질적으로 의롭게 되는 변화’인 성화와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칭의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선언과 관련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성화는 성도의 일생에 걸친 변화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 땅에서는 완성되지 않는 성격을 가졌습니다. 반면에 칭의는 한 순간에 선언되며 반복이 필요 없는 단회적 성격을 가졌습니다. 이 단어가 법정에서 무죄를 선언하는 판사의 행위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입니다.
판사의 무죄 선언은 전적으로 판사의 행위입니다. 또 한 순간에 영원히 결정되는 단회적 행위입니다. 무죄 선언이 의롭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판결의 순간부터 의롭다고 간주될 뿐이지요. 이처럼 칭의도 전적인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의롭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당장 그의 성품이 그 순간에 의롭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으며 현재 어떤 성품을 소유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그 순간부터는 하나님께 의인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그 선언은 결코 번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인정하시면 영원한 효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형벌 받아야 마땅할 죄인을 아무런 ‘근거’ 없이 의롭다고 선언한다면 공의롭지 않다는 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의 근거로서 제사제도를 계시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죄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흠 없는 제물의 머리에 손은 얹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그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된 것으로 믿었고, 제물의 피 흘림을 통해 죄 값이 대신 지불된 것으로 믿었지요. 죄인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법을 믿음으로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화평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는 진정한 근거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근거의 실체와 원형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a).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를 근거로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성도를 죄 값을 대신하여 다 치르셨지요. 성도의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었고 예수님의 피 흘리신 공로는 성도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시는 동시에 죄인을 의롭다고 칭할 수 있는 ‘근거’를 친히 마련하셨습니다.
구원과 관련하여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직’이라 말하면서도 3가지가 있어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3가지는 칭의에 대한 3가지 측면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나의 공로는 없고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므로 칭의의 ‘근거’가 그리스도께만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은혜는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칭의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의미하지요. 오직 믿음은 의롭다 함을 받는 ‘방법’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임을 의미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칭의의 수단적(instrumental) 원인을 성례로 보았습니다. 의는 믿음을 통해 ‘전가’(imputation)되지 않고 성례를 통해 ‘주입’(infusion)된다고 가르쳤지요. 그들은 트렌트 회의에서 믿음으로 성례를 행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세례 받으면 이전의 모든 죄가 사해지지만, 그 후에 선한 행위를 통해 공덕을 쌓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지요. 하지만 바울 사도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a)라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믿고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신’(以信)은 “믿음으로”라는 말의 한문 표기입니다. 이 말이 ‘믿음이라는 행위로’를 의미하지 않음은 분명하지만 행함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약 2:17). 이 말씀은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죽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행함이 없으면 애당초 참 믿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교인 스스로는 믿음이라 생각할지라도 거짓 믿음으로 판결되는 종류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에서 ‘믿음’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믿음과 회개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함께 합니다. 믿음을 가졌다면 회개한 것이고, 회개했다면 믿음을 가진 것이지요. 개혁자들은 성경적 회개를 전인의 반응으로 보았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를 깨닫는 지성과 죄에 대해서 마음으로 애통해하는 감성과 죄로부터 돌아서는 의지적가 함께 반응한다는 것이지요. 죄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애통은 넋두리이며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는 애통은 후회에 불과합니다. 밖으로 강하게 드러내든 속으로 하든 정도차이는 있지만 참된 회개에서 애통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참 믿음도 전인의 반응입니다. 따라서 지성적 요소와 감성적 요소와 의지적 요소가 함께 있어야만 구원 얻을 만한 참 믿음이지요.
믿음의 지성적 요소는 믿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측면을 말합니다. 내용도 모르고 무조건 믿는 것은 맹신이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칼빈은 “믿음은 경건한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기초를 둔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감성적 요소는 머리가 알고 있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측면을 말합니다. 이를 칼빈은 “지성이 흡수한 것을 마음속에 부어 넣는 것”이라 했고, 로이드 존스는 ‘동의’, 스펄전은 ‘확신’, 웨슬리는 ‘가슴이 뜨거워짐’으로 표현했습니다. 믿음의 의지적 요소는 자신의 전부를 주께 의탁하는 측면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를 ‘헌신’이라 했고 스펄전은 ‘신뢰’라고 불렀지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밭에서 엄청나게 값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구매했고, 진주 장사도 그렇게 했습니다(마 13:44, 46). 자기의 전부를 보화를 위해 던진 것이지요. 보화가 묻혔음을 깨닫는 지적인 측면과 그것을 가치를 뜨거운 마음으로 동의하고 확신하는 측면과 이에 따라 의지가 반응하는 측면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참으로 복음을 믿었다면, 신령한 복인 줄 깨닫는 측면, 참으로 그것이 가장 복되며 그것에 비해 세상이 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측면, 그리고 그 가치를 확신함에 따라 의지가 전환되는 측면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로 어떤 사람에 대해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셨고(마 8:10, 15:28),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 8:26, 17:20). 참 믿음은 죽었다가 살았다가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믿음은 적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은 처음엔 적었다가 나중에 커졌지요. 즉 믿음의 지성적인 요소와 감성적인 요소와 의지적인 요소 중에서 어떤 것은 많고 어떤 것은 적을 수 있습니다. 세 요소 모두 적을 수도 있고 전체적으로 많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아무리 겨자씨 한 알 만큼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한 가지라도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믿음의 열정은 있으나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향이 있습니다. 신조라는 것이 우리가 믿는 내용을 잘 정리한 것인데, 신조에 대한 가르침이 계속 적어지고 있지요. 무엇을 믿고 있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신앙의 형식만 배웁니다. 그러다 보니 참으로 믿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믿는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 다음 세대에 잘 전수가 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다음 세대들은 이 문제가 좀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무너지고 있다면 복음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고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지적 요소를 갖춘다고 해서 반드시 열정적인 감성반응과 헌신적인 의지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른 내용을 알고 깨닫기 전에는 지속적인 바른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내용에 대한 관심과 교육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예배당을 세우려는 열심보다 더 중요한 일은 무너지고 있는 복음 진리를 세우고 보존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복음의 핵심을 분명히 고수함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은 거짓된 교회로부터 참된 교회로 개혁했습니다. 개혁자들의 후손인 우리는 그들처럼 복음의 핵심을 분명히 알고 철저하게 복음을 고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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