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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먼저 드리는 글 3
제1과 태초의 하나님 (창 1:1) 8 바로가기
제2과 천지개벽의 상황 (창 1:2) 10 바로가기
제3과 첫째 날의 창조 (창 1:3~5) 11 바로가기
제4과 둘째, 셋째 날의 창조 (창 1:6~13) 13 바로가기
제5과 넷째, 다섯째 날의 창조 (창 1:14~23) 15 바로가기
제6과 여섯째 날에 하신 일 (창 1:24) 17 바로가기
설교보충 1. 창조사역과 각종교훈 (창 1:1~31) 19 바로가기
제7과 창조 후의 안식과 창조의 재설 (창 2:1~8) 27 바로가기
제8과 에덴의 환경과 최초의 명령 (창 2:8~17) 29 바로가기
제9과 여자를 만들어 가정을 이루어 주심 (창 2:18~25) 31 바로가기
설교보충 2. 최초의 혼인과 범죄 (창 2:18, 21~24) 33 바로가기
제10과 최초의 범죄 (창 3:1~6) 35 바로가기
제11과 범죄 후에 된 일 (창 3:7~13) 37 바로가기
제12과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 (창 3:14~19) 39 바로가기
제13과 타락자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 (창 3:20~24) 41 바로가기
설교보충 3. 인류의 범죄와 하나님의 섭리 (창 2:~3:) 42 바로가기
제14과 인간의 번성과 생활 (창 4:1~8) 52 바로가기
제15과 가인을 문책하여 징계하심 (창 4:9~15) 54 바로가기
제16과 가인의 후손과 그 생활 (창 4:16~24) 56 바로가기
제17과 아벨 대신 셋을 주심 (창 4:25~26) 58 바로가기
설교보충 4. 가인의 제사와 완악 (창 4:3~7) 59 바로가기
제18과 아담 자손의 계보 (창 5:1~32) 61 바로가기
설교보충 5.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 (창 5:21~24, 6:9) 63 바로가기
제19과 최초인류의 범죄와 하나님의 심판계획 (창 6:1~8) 65 바로가기
제20과 노아의 사적과 방주제조 명령 (창 6:9~16) 68 바로가기
제21과 홍수심판에서 구원받을 자 (창 6:17~22) 71 바로가기
제22과 홍수심판을 실현하심 (창 7:1~24) 72 바로가기
설교보충 6. 홍수 입증 (창 7:1~24) 74 바로가기
제23과 홍수의 그침과 노아의 제사 (창 8:1~22) 75 바로가기
설교보충 7. 홍수의 역사일정 (창 8:1~22) 77 바로가기
제24과 홍수 이후에 주신 복 (창 9:1~19) 79 바로가기
제25과 노아의 생업과 예언 (창 9:20~29) 82 바로가기
제26과 노아의 후예와 분포 (창 10:1~32) 85 바로가기
제27과 바벨탑 사건과 셈의 후예 (창 11:1~32) 87 바로가기
설교보충 8. 바벨탑 (창 11:1~9) 91 바로가기
설교보충 9. 아브람의 순종의 성격 (창 12:4~5) 93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가나안 땅 (창 11:31) 94 바로가기
제28과 아브람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내려감 (창 12:1~9) 95 바로가기
제29과 남방 애굽에서 있었던 일 (창 12:10~20) 97 바로가기
설교보충 11. 남방으로 옮겨감 (창 12:6~10) 98 바로가기
설교보충 12. 복을 주시는 하나님 (창 12:2~3) 99 바로가기
설교보충 13. 아브람의 연약 (창 12:10~20) 100 바로가기
제30과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옴과 그 당시에 있었던 일 (창 13:1~18) 101 바로가기
설교보충 14. 바른선택과 축복 (창 13:1~13) 104 바로가기
제31과 롯이 전화(戰禍)를 당하고 구출 받음 (창 14:1~16) 106 바로가기
제32과 아브람이 이기고 돌아왔을 때 (창 14:1~24) 109 바로가기
설교보충 15. 십일조에 대한 신앙 (창 14:20) 111 바로가기
제33과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 (창 15:1~21) 112 바로가기
설교보충 16.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창 15:6~7, 롬 4:16~22) 117 바로가기
제34과 아브람의 취첩과 그 결과 (창 16:1~16) 120 바로가기
설교보충 17. 네가 어디로 가느냐 (창 16:8) 123 바로가기
제35과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심 (창 17:1~14) 124 바로가기
제36과 사라가 득남할 것을 예고하심 (창 17:15~27) 127 바로가기
제37과 아브라함의 손님 접대와 사라에게 약속하심 (창 18:1~15) 128 바로가기
제38과 아브라함의 기도 (창 18:16~33) 130 바로가기
설교보충 18. 아브라함의 기도 (창 18:22~33) 132 바로가기
제39과 소돔의 죄악 (창 19:1~11) 134 바로가기
제40과 소돔성에서 탈출시키심 (창 19:12~23) 136 바로가기
제41과 소돔 고모라의 멸망과 두 딸의 생산 (창 19:24~38) 137 바로가기
설교보충 19. 속한 자를 이끌어 내라 (창 19:12) 139 바로가기
설교보충 20. 장망성을 떠남 (창 19:12~19) 140 바로가기
제42과 아브라함의 “그랄”에서 있은 일 (창 20:1~18) 143 바로가기
제43과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창 21:1~21) 146 바로가기
제44과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음 (창 21:22~34) 149 바로가기
제45과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림 (창 22:1~19) 151 바로가기
제46과 나홀의 자손 (창 22:20~24) 155 바로가기
설교보충 21. 아브라함의 순종과 모범 (창 22:18) 156 바로가기
제47과 사라의 장례 (창 23:1~20) 159 바로가기
제48과 이삭을 결혼시킴 (창 24:1~67) 161 바로가기
설교보충 22. 이삭의 혼인과 비유적 교훈 (창 24:1~9) 165 바로가기
제49과 아브라함의 죽음과 그의 서자들 (창 25:1~18) 167 바로가기
제50과 이삭의 두 아들 (창 25:19~34) 170 바로가기
설교보충 23. 야곱이 성공한 이유 (창 25:19~34) 173 바로가기
제51과 이삭이 그랄에 감 (창 26:1~22) 174 바로가기
제52과 브엘세바에서 된 일 (창 26:23~35) 178 바로가기
제53과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함 (창 27:1~29) 181 바로가기
제54과 에서의 탄식과 야곱의 피신 (창 27:30~46) 184 바로가기
제55과 야곱이 여행 중에 받은 계시 (창 28:1~15) 187 바로가기
제56과 야곱의 제사와 서원 (창 28:16~22) 189 바로가기
설교보충 24.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창 28:10~22) 192 바로가기
설교보충 25. 사다리 계시의 의미 (창 28:12) 193 바로가기
제57과 야곱이 외가에 감 (창 29:1~14) 195 바로가기
제58과 야곱의 결혼 (창 29:14~20) 197 바로가기
제59과 야곱이 열한 아들을 낳음 (창 29:31~30:25) 199 바로가기
제60과 야곱이 재산을 확보함 (창 30:25~43) 202 바로가기
설교보충 26. 성도의 윤리생활 (창 29:15~30, 마 22:36~40) 206 바로가기
제61과 야곱이 귀향길에 오름 (창 31:1~20) 210 바로가기
제62과 추적과 화해 (창 31:21~43) 213 바로가기
제63과 증거의 무더기 (창 31:44~55) 216 바로가기
설교보충 27. 야곱에게 배울점 (창 31:38~42) 218 바로가기
제64과 야곱이 형 만나기를 시도함 (창 32:1~20) 219 바로가기
제65과 하나님 앞에서의 승리 (창 32:21~32) 222 바로가기
설교보충 28. 야곱의 환도뼈를 치심 (창 32:22~32) 225 바로가기
제66과 야곱과 에서의 상봉 (창 33:1~20) 227 바로가기
제67과 피해와 보복 (창 34:1~31) 230 바로가기
제68과 야곱이 벧엘에 거함 (창 35:1~8) 232 바로가기
제69과 야곱이 고향에 감 (창 35:9~29) 235 바로가기
설교보충 29. 벧엘의 의미 (창 35:1~8, 28:18~19) 239 바로가기
제70과 에서의 자손과 족장들 (창 36:1~19) 242 바로가기
제71과 세일 땅에 거주한 자들 (창 36:20~43) 244 바로가기
제72과 꿈을 꾼 요셉 (창 37:1~11) 245 바로가기
제73과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감 (창 37:12~28) 247 바로가기
제74과 아버지를 속임 (창 37:29~36) 249 바로가기
설교보충 30. 꿈꾸는 성도 (창 37:5~11) 251 바로가기
제75과 유다의 불륜사건 (창 38:1~30) 254 바로가기
제76과 요셉의 애굽생활 (창 39:1~23) 258 바로가기
설교보충 31. 유혹을 이긴 요셉 (창 39:7~12) 260 바로가기
설교보충 32. 역경에서 형통하게 하심 (창 39:20~23) 261 바로가기
설교보충 33. 요셉이 받은 복 (창 39:2~3) 262 바로가기
설교보충 34. 요셉이 성공한 이유 (창 39:21~23) 263 바로가기
제77과 요셉의 꿈 해석 (창 40:1~22) 265 바로가기
제78과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함 (창 41:1~36) 268 바로가기
제79과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 (창 41:37~57) 270 바로가기
제80과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사러 감 (창 42:1~25) 272 바로가기
제81과 일차 곡식을 가져옴 (창 42:26~38) 275 바로가기
제82과 야곱이 2차 여행을 허락함 (창 43:1~15) 277 바로가기
제83과 요셉이 형제들을 대접함 (창 43:16~33) 279 바로가기
제84과 요셉이 은잔을 숨김 (창 44:10~34) 282 바로가기
제85과 요셉이 자기를 나타냄 (창 45:1~15) 284 바로가기
제86과 바로가 야곱의 가족을 초청함 (창 45:16~28) 286 바로가기
제87과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감 (창 46:1~34) 288 바로가기
제88과 야곱이 바로를 알현함 (창 47:1~12) 291 바로가기
제89과 요셉이 양식을 팜 (창 47:13~31) 293 바로가기
제90과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함 (창 48:1~22) 297 바로가기
설교보충 35. 야곱의 하나님 호칭 (창 48:1~4, 15~16) 300 바로가기
제91과 야곱이 열두 아들의 후일을 예언함 (창 49:1~21) 302 바로가기
제92과 요셉, 베냐민에 관한 예언과 야곱의 죽음 (창 49:22~33) 306 바로가기
제93과 야곱의 장례 (창 50:1~14) 309 바로가기
제94과 요셉이 형을 위로하고 세상을 떠남 (창 50:15~26) 310 바로가기
창세기 강론을 출판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이 책을 출판할 수 있도록 편집에 수고하신 김호룡 전도사님과 인쇄 제본에 봉사하신 최용만 집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식자, 편집, 교정에 봉사하신 분이 안계시면 출판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출판한 이유는 본인 자신이 묵상하고 증거한 말씀을 글로 남기기 위함이었고, 또 이 책이 성도들에게 읽혀질 기회가 있다면 성경을 많이 접근하지 못한 성도님들이 창세기의 내용의 겉껍질을 벗기는 정도로 상당한 지식을 갖게 함에 목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쓰면서 읽으시는 분들의 의문될 만한 점들을 빠짐없이 설명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시는 성도님들이 성경공부에 흥미를 느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관념과 의지의 대상으로만 알고 연구와 친교의 대상으로는 알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며, 성경으로 하나님을 교제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는 최초에 주신 말씀일 뿐 아니라 우주와 만물과 인류의 시작, 하나님의 통치의 섭리, 타락과 구원의 은혜를 전개시키는 말씀이란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할 것입니다.
성경 66권의 강론을 다 쓰지 못할 바에는 우선 창세기와 마태복음과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을 먼저 써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는 성도님들이 이 책에서 잘못 표현된 점이나 가리운 부분을 발견하셨다면 그것은 성경 연구의 큰 발전임을 인식하시고, 더 깊고 넓은 연구와 교훈에 이끌리시기를 바랍니다. 책을 많이 쓴 경험이 부족하여 표현과 글자에 미숙함이 있을 것이오니,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라오며 말씀을 읽어서 복을 받도록(엡3:3, 계1:3) 노력하시고 이웃에도 권장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1996. 7. 27.
필자 지 영 근 드림
제 1 과 태초의 하나님 (창 1:1) 목록으로
1. 지금 저희들은 최초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1) 말씀이 있음을 보니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지 않아도 계시지만 말씀을 보아 그의 존재는 더욱 분명합니다.
2) 저희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또 그 말씀을 기록(문자)으로 주셨음에 대하여 큰 감명을 느끼셔야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사람은 비단 기록으로 주신 말씀을 읽을지라도 감사와 감격과 은총을 느끼게 됩니다. 또 하나님을 직접 대한 것과 같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3) 하나님은 말씀을 기록된 성경으로 주심으로써 더욱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살필 수 있고, 대대로 보존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최초에 주신 말씀과 모든 구약성경의 말씀은 전부 히브리어로 되어 있습니다. 우선 본문만을 히브리말로 읽어보면 “베리지트 빠라 엘로힘 에트 하 사마임 왜 에트 하 알레스”라고 합니다. 참 신비한 말씀입니다. 옛날의 모세와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언어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2.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1) 태초란 “만물의 때”를 의미하므로 유한적 시간의 때를 의미하신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그 시기에 만물(현상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태초가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는 이유는, 요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하신 “태초”의 의미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1:1의 태초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성육신하시기 이전에 말씀으로 존재하심에 대하여 그 존재시작이 영원전이라는 것”을 표현하신 의미로 “태초”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1:1의 태초는 영원전의 태초이고, 본문의 태초는 현상계의 창조 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란 용어가 원문에는 “하나님들”(엘로힘)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분 이상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롬10:2; 3:30; 고전8:4~6; 딤전2:5). 그러면 왜 한 분이신 하나님을 하나님들이라고 하였을까요? 이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있으니,
① 성부, 성자, 성령님의 삼위를 각각 일컬었기 때문이요,
② 히브리 원문 어법에 장엄복수란 것이 있어서 장엄하고 광대한 것은 하나라도 복수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말 명사 어미에 “임”이 붙은 것은 다 복수인데, 하늘을 “사마임”이라 하고, 물을 “마임”이라고 하여 모두 복수로 표현됩니다(창1:1, 6; 7:17). 하나님은 장엄하시고, 또 삼위로 존재하시는 만큼 원문은 이를 복수로 표현하였습니다.
3) ‘천지’란 말씀은 “그 하늘들과 그 땅”이란 뜻인데, 여기에 땅은 하늘에 비할 때 협소한 고로 단수로 표시되었고, 이 하늘들과 땅은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을 총괄하여 일컬은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말씀입니다. 또 “그 하늘들과 그 땅”이라고 번역해야 하는 정관사 “하”의 용법은 하늘과 땅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이 용법은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사용하는 인간에게 주신 하늘과 땅 같은 것이 다른 우주에는 없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지반 위에 공기가 있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이 세상뿐입니다.
4)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기존 재료를 변형하여 만든 것이 아니고, 없는 상태에서 있게 하시는 사역이란 것은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천지를 창조하시고(1:1), 궁창을 만드셨을 때(1:7), 또 광명을 만드셨을 때(1:16; 사4:5) 뿐만 아니라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을 때와(1:27) 물질이 아닌 흑암이나(사45:7) 새 마음을 지으실 때에도(시51:10)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만든다’의 의미로 “바나”(창2:22), “마야섹”(출32:16; 신4:28)이 있는데, 이 용어는 기존 재료를 가지고 다른 모양의 것을 만들 때 (예 : 흙으로 벽돌을-출5:16, 목석으로 우상을-출20:4) 사용되었지만, 창조와 같은 의미인 궁창과 사람과 물고기를 만들 때에도(1:7,26; 출20:11) 사용되었으므로 언어의 적용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림은 앞으로도 원문의 뜻을 약간씩 설명드릴 때 오해가 없으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3. 그러면,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까?
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고,
2)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며,
3) 문자로 기록된 성경으로 뜻을 계시하여 자기를 알리시고,
4) 사람과 언어로 교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 받은 인생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다름없는 영광을 맛보아야 하며, 성경을 계속 접할 때마다 그런 느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만큼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능력자요, 또 만물의 주인이심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만물을 다 인간에게 주셨습니다(창1:29; 롬8:32).
6) 많은 인류가 만물의 출처를 몰라서 연구를 거듭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때부터 만물의 출처가 밝혀진 것입니다. 불신자는 아직도 이 사실을 믿지 않지만 성도는 이 사실을 성경대로 믿음으로 지혜인이 됨을 증거한다고 하였습니다(히11:3). 창조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만물을 주신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 성경말씀으로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 과 천지개벽의 상황 (창 1:2) 목록으로
1. 위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1) “땅이 혼돈함”은 이미 만들어진 땅이 하나님의 자연통치 규범에 붙잡혀 있지 않으므로 운행의 질서가 없었다는 뜻이요.
2) “공허하였다”함은 지구상의 생물들이 없는 상태로 비어있음을 의미하며.
3) “흑암이 있었다” 함은 빛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어둠 상태를 의미함이요.
4) “그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음”은 어둠과 공허가 만유인력이 없는 상태로 유통함을 의미하며,
5)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음”은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조물인 현상계(땅이 물로 휩싸인 상태)위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 안에 갇힌 자처럼 계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5:27).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늘과 땅이 창조된 후 공허를 채우시고 우주의 2차적 창조와 질서를 잡으신 것을 의미하는것입니다.
2. 여기에서, 저희들은 몇 가지 의문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1) 창조기사 중에 물과 공기를 만드신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창1:1의 천지란 말씀에 다 포함될 수 있고, 1:6의 궁창이란 말씀도 물(구름)과 공기가 있는 하늘을 의미하므로 궁창에는 물과 공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2:1에서도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었다”고 하였으니까요.
2) 1절과 2절 및 3절 이하의 관계는 어떠하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1절은 전체창조를 나타낸 서론이요, 2절은 빛과 태양 등 계속 창조와 자연계의 질서를 유지하실 필요성을 말씀한 것이며. 3절 이하는 계속 창조와 질서유지의 필요성을 충족하여 이루신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정통적인 학자들 중에서 1절의 말씀을 “2절 이하 창조사역의 서론”으로 보는 경우가 있으나 분명히 2절 이하의 말씀은 물과 혼돈된 땅에서 그 다음 창조사역을 계속하셨으므로 1절 말씀은,
① 하나님은 우주 전체를 창조하셨다.
② 땅과 물과 공기도 이미 창조하셨다.
③ 계속 창조하여 자연 질서를 이룩하실 것이다 라는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3)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6일 이상 걸렸으며, 원창조(땅, 물, 공기)와 재창조(2절 이하의 창조사실)로 나누어 생각해야 하느냐 할 때 하나님의 고유능력으로 만물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며칠 몇 번에 나누어 하셨든지 문제될 것이 없으며, 창2:2에서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셨다”고 하신 것은 표현의 의미대로 마친 때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3 과 첫째 날의 창조 (창 1:3~5) 목록으로
1. 위의 말씀을 요약하면,
1)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심,
2) 빛을 명하여 있게 하심,
3) 그 빛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음,
4)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심,
5) 빛을 낮이라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심,
6) 저녁이 가고 아침이 오므로 하루가 소요됨 등입니다.
2. 위의 말씀을 해석하면,
1) 창1:3에서, 하나님께서는 흑암의 세계에,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과(2:6) 짐승, 조류(2:19)만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이를 포함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다 말씀의 능력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시고(요1:1), 또 그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므로(눅1:37), 우리는 그 말씀이 곧 하나님 본질이요, 능력임을 알게 되며 믿게 됩니다(히11:3).
2)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하심은 창조기사 중에 여러 차례 말씀하신 것으로(1:4,12,21) 하나님께서 자신의 솜씨와 목적에 만족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빛의 성격입니다. 넷째 날에 만드신 태양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다른가 할 때에 이 빛은 14절에서 창조하신 태양이 아닌 다른 빛을 의미함이요, 그 다른 빛은 상상을 초월할 만한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주광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의 “빛”은 “오르”라는 말로서 창1:14의 광명이라고 하신?해와 달의 빛”(마오르)과 구별이 됩니다. “오르”는 광명의 근원으로 생물체를 생존케 하는 힘이고 “마오르”는 “빛을 비추는 자”라는 뜻으로 근원에 의하여 나타난 광명이라고 해석한 것을 보았습니다. 혹 해와 달이 쓸 데 없고 밤이 없으며 항상 밝기만 한 천국의 빛이 바로 그 빛(오르)에 의한 것이 아닐까요?(계1:16; 14:1; 21:23; 22:5)
3) 또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어두움을 밤이라” 하셨으니 이는 그 당시의 빛이 우주 전체를 다 밝힌 것이 아니므로, 어두운 부분을 밤이라, 또 밝은 부분은 낮이라 칭하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의하여 밤과 낮을 구별하셨고, 이 밤과 낮은 지구상의 밤과 낮을 초월하는 우주적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창1:14에서, 지구상의 밤과 낮이 별도로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4)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하셨는데, 이 첫째 날이란 기간은 14~19절 말씀인 넷째 날에 구분된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날”이란 24시간의 기간을 미리 앞당겨 사용하시고, 넷째 날부터 24시간의 일정을 이름 지워 시행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24시간의 일정을 미리 구별하시고 창조 첫 날부터 사용하신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는 말씀은 그 하루의 기간이 24시간 이상을 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4. 1절의 창조기사와 3절 이하의 사실 사이에 간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창조 첫째 날이 3절부터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1절에서 말씀한 창조사역 속에는 3절 이하 사역에 포함되지 않은 땅, 물, 공기(이를 원창조라고도 함)를 만드신 것이 첫 날 이전인 것으로 봄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과학자들이 계산하는 지구의 나이가 퍽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절과 3절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다고 봄이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1일, 2일, 3일은 넷째 날에 하루 24시간됨을 선포하셨을지라도 다 같은 날인 “욤”(24시간의 날)을 적용하셨고 또 창조 6일과 안식일을 기준하여 한 주간을 만드셨기 때문에(창2:3) 같은 날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주장을 다 신임할 것은 아니나 지구의 나이가 인류창조 훨씬 이전이라고 할 때 1절과 3절 사이의 상당시간이 있었다는 사실로 증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5. 1절의 창조를 원창조로, 3절 이하를 질서와 재창조로 볼 때, 성경이 원창조의 기사를 자세히 나타내지 않은 이유를 들어서 “이원론적 창조론”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원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창1:1, 2을 번역하기를,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시작하실 때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함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이전에 다른 원인에 의한 혼돈된 땅이 있었던 것으로 주장하여 우주전체의 시작과 창조를 성경으로 포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절대 합당치 않습니다. 욥38:41에서, “이방의 신들은 우상이나 하나님은 하늘을 만드셨도다”하였고, 사40:26에서는 “너희는 누가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창조는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성경이 전부 포괄하고 있음을 믿으셔야만 합니다. 저희들은 이 자연의 빛을 볼 때에 그 빛의 창조자 되시고, 주인이 되시며, 또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마4:16; 요1:5; 요일1:5)을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1절에서 말씀한 창조물을 3절 이하에서 정돈하셨다고 믿는 것을 중건설이라고 합니다. 중건설은 한번 창조된 것을 정돈한다는 뜻이나 저는 1절과 3절 이하를 연속창조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3절 이하에서 빛과 해와 달 생물들이 창조되었고 거기에 나타나지 아니한 땅과 물과 공기는 1절에서 창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죄와 마귀를 제외한 모든 것의 창조자시며 주인이시며 보존자시며 통치자이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제 4 과 둘째, 셋째 날의 창조 (창 1:6~13) 목록으로
1. 위의 말씀에는 둘째, 셋째 날에 창조하신 일이 기록되었습니다. 둘째 날의 사역은 궁창을 만드신 일로써 혼돈상태에 있는 물과 땅을 정리하시는 과정에서 궁창을 이루어내신 것이요, 셋째 날의 사역은 풀과 채소와 과목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2. 궁창이란 맑고 높고 푸른 하늘을 의미합니다.
이미 창조된 천지가 개벽되는 과정에서 우주와 자연의 법칙이 실현되기 전이므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은 중 첫 날에 빛을 창조하시므로 흑암을 해결하셨고 둘째 날에는 혼돈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수면을 윗물과 아랫물로 나누시니 거기에서 땅이 드러나게 되고 또 적당한 기상조건을 부여하여 궁창을 이루신 것입니다.
3. 여기에서 생겨나는 의문점은 윗물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아랫물은 지하수와 지상수(바다, 강, 호수)를 의미하지만 윗물은 현상계를 초월하는 물의 세계가 아닌 공중에 증발되어 떠돌고 있는 물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7:11에서 “하늘의 창이 열려”큰 비가 왔고 그 물로 지구를 덮었다고 가상할 때는 우주 공간 밖에 있는 물을 연상할 수 있지만 현재 알고 있는 대로 대기권 밖에는 물이 없고 또 노아 홍수는 지구 전부가 물에 잠긴 것이 아니고 인류가 번성하고 있는 지역을 덮은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만유의 인력과 기상의 이변은 상당한 분량의 물을 증발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둘째 날에 그런 사역을 하시므로 궁창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4. 둘째 날 사역을 마치신 다음부터 마지막 창조 시까지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작품을 보시고 크게 만족하셨으니 곧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작품에 대하여 만족과 기쁨을 느끼셨습니다. 저희들도 그 기쁨의 대상이 되어 드리고 저희들 자신이 주님 안에서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서도 그런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 11절 이하에서 셋째 날에는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종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만드셨습니다.
1) 여기에서 씨가진 과목은 계속 보존과 생산을 위함이고,
2) “땅은…을 내라”하신 것은 말씀의 능력이 땅을 움직여 식물이 나게 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에만 역사하신 것이 아니고 무인격체에게도 역사하심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6. 하루가 바뀔 때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1) 이것은 하루의 기준을 저녁부터 시작하였다는 것이 아니고 아침이 되었으므로 하루가 지나갔고 아침부터 새날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2) 유대인들은 “저녁이 되고”란 말씀을 근거로 안식일이 저녁부터 시작되는 줄 알고 “금요일 저녁 어두울 때부터 성문을 닫은 일이 있었습니다(느13:19).
그러나 복음이 세계로 퍼지면서 밤과 낮이 일정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고 또 날과 달을 지키는 예법은 이미 폐지되었기 때문에(골2:16) 날의 기준문제를 놓고 성경적 의미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창조도 하시고 창조과정에서 흑암을 빛으로 제거하시며 광명과 어두움을 필요에 따라 분간하시고 자연계에 법칙을 세워 혼돈을 막아 질서를 세우셨을 뿐 아니라 지구와 궁창(우주)에 생물과 별들까지 만들어서 공허를 채우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제 5 과 넷째, 다섯째 날의 창조 (창 1:14~23) 목록으로
1. 하나님은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들과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두 광명(해와 달)으로 낮과 밤을 각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1) 이 모든 일을 말씀으로 명하사 그대로 되게 하신 것과 창조물 및 자연의 움직임 등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 것은 전날과 같습니다.
2) 다만 저희들이 구별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은
① 모든 창조와 피조물들의 운행 활동이 말씀의 명령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② 무에서 유를 나타내신 것은 창조요, 피조된 자연을 정리 운행시키심으로 나타난 상태는 “되게 하심”, 또 기존물질을 이용하여 무엇을 만드신 것은 “만드신 것”으로 아셔야 합니다.
3) 하나님은 해와 달을 창조하여 땅과 함께 운행하게 하시고 여기에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셨으며 또 큰 광명인 태양으로 낮을, 작은 광명인 달로 밤을 주관케 하셨고 이어서 별들도 창조하셨습니다.
① 달을 작은 광명이라 하신 것은 태양빛에 비교하신 말씀일 뿐 암체가 아니라는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② 해와 달이 낮과 밤을 주관케 하심은 그것들이 낮과 밤을 장식하며 또 그것들의 자전 공전으로 주야가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③ 징조란 천체들의 운행을 통하여 나타나는 지구상의 기상의 변화들을 의미하고 그 일기변화에 따라 춘하추동 사시와 지구의 자전기간인 24시 1일과 공전기간인 1년의 연한을 이루셨음이요.
④ 또 17절에서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셨다”는 것은 만유인력을 통하여 천체를 질서 있게 붙드심을 의미하며 또 “땅에 비취게 하셨음”은 모든 천체가 사람이 사는 땅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넷째 날에 귀한 일들을 하셨고,
2. 다섯째 날에는 물과 공중에서 서식하는 동물, 즉 어족과 조류를 창조하셨습니다.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하여 물에서 사는 어족을 창조하셨는데, 이 모두를 종류대로 지으셨다고 하셨고, 생육, 번성, 충만의 복도 허락하셨습니다.
1) 물이 생물을, 궁창이 새를 나타낸 것 같으나 물과 궁창이 창조의 제 2 원인은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는 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2) 그리고 물의 생물이란 뜻은 물에서 사는 동식물을 포함하는 것으로 그 신비한 광경을 족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종류대로 지으셨다”함은 교배생산이 불가능한 종류들로 분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화론적 의미를 반대하는 것이며 유전학적 번성과 돌연변이 그리고 잡종교배 생산의 가능성을 포함하는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요.
4) 하나님은 그 모든 생물에게 생육 번성하게 하셨으니 물고기는 바다와 물에서 충만하고 새들은 땅위에서 번성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섯째 날을 보내셨습니다.
5) 사람이 거두지 않아도 잘 번성하는 생물들을 보면 창1:22의 말씀이 실감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6 과 여섯째 날에 하신 일 (창 1:24) 목록으로
1.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 땅 위에 사는 생물(짐승, 육축, 기는 것)들과 사람을 지으시고 복을 주셨으며 크게 만족하셨습니다.
1)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즉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본래 하나님은 신령한 분이시라 육체가 없으시므로 하나님의 영적 형상을 품부해 주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형상은 하나님의 선과 의와 거룩을 뜻합니다. 선과 의와 거룩의 표준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이 그것들로 자기를 닮게 하시기 위하여 영적 속성을 품부하셨고,
2) 흙으로 육체를 빚어 영혼과 합한 생령체인 사람이 되게 하셨으며,
3) “우리”(우리의 형상이란)는 성부 성자 성령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방법과 땅에 사는 동물을 만드신 방법이 창2:7,19에 나타나 있음을 유의하십시오.
2.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창조하신 사람에게와 다른 동물들에게도 복을 주셨습니다.
1) 28절을 보시면 생육, 번성, 땅에 충만, 땅을 정복함, 그리고 바다와 땅위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고(26절)
2) 식물성 채소와 열매들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나중엔 동물성도 양식으로 주셨음 창9:3).
3) 그리고 30절에서는 일반 동물들에게도 풀들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3. 여기에서 더 살펴야 할 것은 축복의 성질입니다.
1) “생육하라”는 것은 생명보존과 발육에 복을 주심이요.
2) “번성하라”하심은 생산과 증가를 뜻함이요.
3) “땅에 충만하라”하심은 땅에 가득하도록 분산되라는 것이요.
4) “땅을 정복하라”하심은 자연을 유익하도록 관리하고 활용하라는 것이요.
5) “다스리라”는 것은 자연의 대상을 인간이 힘닿는 한 유익하도록 지배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든 자연과 원소나 지하자원까지 이용하여 개발할 것과 좋은 환경 조성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 사람이 이용하거나 다스릴 수 없는 자연의 영역도 있지만 과학적 지식을 통하여 최대한 다스릴 것을 허락해 주셨으니 이것은 인간의 문화발달에 따라 가능한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인류를 위하여 땅을 창조하셨고 모든 천체가 땅을 중심으로 운동하도록 하셨으며 자연계의 일부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다스리도록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5. 이렇게 하여 6일 동안의 창조를 끝내셨습니다.
* 창조기사에 관한 도표
설교보충 1. 창조사역과 각종 교훈 (창 1:1~31) 목록으로
1. 창조적 신앙을 갖자.
창1:에 나타난 창조의 기사는 우리에게 많은 신비와 능력과 의문을 안겨주십니다.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지으신 것과(히1:2), 또 말씀으로 지으신 것을(히11:3) 믿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2. 말씀의 능력을 믿자.
하나님이 가라사대…이 있으라(창1:3)…하리라(창1:6)…되라(창1:9) 하시매 “그대로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이 말씀과 동반하셨음을 알게 하심이요. 그 능력 그 신비는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신비요, 이해할 수 없는 실제적인 것으로 모든 생명의 신비와 함께 무한의 지혜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피조물로서의 마땅한 겸손을 가지고 창조자를 경외해야 할 것이며, 빛 되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에서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공허를 채워주심으로 합당한 자연계를 만들어 영광을 받으셨은즉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빛 된 생활, 질서 있는 생활로 만족함을 누리셔야 할 것입니다.
4. 진화론을 믿지 말자.
미생물이나 하등동물이 고등동물로 진화되었다는 진화론은 “종류대로 지으셨다”는 말씀 한 마디로(창1:11,12,21) 일축되어야 하고 ‘만물이 창조자의 표현’이라는 범신론도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이 구별된 점을 근거로 일축되어야 하며, 막연한 대상을 근거로 자연이 발생하였다는 유출설도 인간의 무지와 한계를 드러낸 어리석은 논법임을 지적해야 합니다.
5. 역사연대는 예측하기 어려움.
인간이 창조 받은 역사적 연대가 얼마나 되느냐에 대하여 이것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최초 6일 창조기간 중 마지막 날에 창조되었으므로 5일을 제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 후에 계속된 역사적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맛소렛”이란 유대문법학자(AD600~1000)는 그들이 정리한 문헌에서 인류 역사를 주전4004년으로 보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결성된 72인의 히브리 학자(BC300년경 70인역을 만듦)들은 5411년으로 연구하였다 하니 그 연대의 확실성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연대를 맞추는 역사책이 아니란 점도 아셔야 합니다. 마1:1~17에서도 아브라함 때부터 예수님까지의 계보가 상세하게 나온 것 같으나 다윗의 계보 안에서도 아하시야, 아달랴, 요아스, 아마샤(9, 10, 11, 12대)가 빠져 있고, 마1:8에서는 “요람이 웃시야를 낳았다”고 하였으나 사실상 웃시야는 요람의 4대 손이며, 또 삼하12:23에서 솔로몬이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둘째 아들처럼 되어 있으나 대상3:5에서는 넷째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연대와 계보에 생략이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6. 근거 없는 세대주의
초대교회 당시의 요세프스(1C), 이레네오(2C), 오리겐(3C), 어거스틴(4C)은 창조 6일을 각각 한 세대씩으로 여겨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는 뜻을 한 세대가 지나고 새 세대가 밝아오는 것이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1일을 한 세대로 해석하는 근거는 벧후3:8을 인용합니다. 벧후3:8의 말씀은 “하루를 천년으로 계산하여 이 세상의 연한을 채운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은 시간의 제재 없이 천년을 하루처럼 하루를 천년처럼 활용하실 수 있음을 뜻한 것입니다. 따라서 벧후3:9은 “주님의 재림 약속을 더디게 생각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에 쉬신 것”은 이 세상을 6000년에 끝내시고 7000년째에 천년왕국이 있음을 뜻한다고 예측하지만 그것도 지나친 예측 또는 억측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하시고 현실적 창조를 끝내셨으므로 다음 7일에 안식(멈추심)하신 것은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나 만물의 역사 또 현실의 시한부는 추론일 뿐이므로 그것으로 말세를 점치는 어리석음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7. 창조사역과 관련된 생활의 은혜
1)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무에서 유로 창조하시는 분인즉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임을 믿으시고(롬4:17) 없는 상태에서도 있도록 은혜를 간구하시고, 또 정신적 창의성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발달하는 과학의 현실을 본다면 아직도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나타날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2) 하나님은 창조의 과정에서 정돈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입한 가구를 정리하는 것 같고 흩어진 구슬을 꿰는 것 같이 질서 있고 규모 있는 생활을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며(고전14:33,40),
3) 또 빛과 어둠을 나누어 그 명칭까지 낮과 밤으로 구별하셨음은 선과 악, 영과 육, 현실과 천국을, 성도와 속인을 구별하여 취급하시는 분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이 구별하여 취급하시는 대상이므로 구별된 생활을 나타내야 함을 교훈하셨으며
4) 창조의 과정에서 땅과 바다와 궁창 물속의 동식물, 땅 위의 동식물, 씨와 풀과 꽃과 열매들, 그 색깔에 이르기까지 평생 보아도 지루하지 않고 퇴색되지 않는 조화를 이루심에 대하여 그 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리 자신들도 그 창조된 조화 속에서 융화를 이루는 사명을 이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낮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밤도 만물의 휴식을 위하여 필요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솜씨와 결과는 하나도 수정할 것이 없는 완벽한 작품입니다.
5) 인간은 이 모든 자연과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지혜와 생명의 근원되심과 사랑과 보호를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8. 하나님이 최초에 주신 축복은 생육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과 땅을 정복할 것과 모든 생물을 다스릴 특권을 주셨은즉,
1) 성도는 생육번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많은 인류(특히 성도)가 온 땅에 고루 퍼져 살도록 번성에 힘쓰고 인권존중에 힘쓰며 생명제한을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2) 땅을 정복함에 있어서 이는 타국영토를 침해하라는 뜻이 아닌 “인류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국은 대단히 쓸모없는 돌산을 옥토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많은 황무지도 개척하려 할 것입니다.
3)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하셨으므로 모든 생물을 유익하도록 양육하여 생활에 이용해야 할 것입니다. 최초의 모든 동물들은 아담이 그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보아서 다 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창2:19). 모든 동물들은 인간이 간섭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키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과 지혜로 그것들을 양육한다면 더 복되고 유용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생육, 번성, 충만, 다스림의 특권을 향유하여 복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발전하는 사람은 다스리기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9. 진화론의 부당성
인생의 기원을 연구함에 있어 진화론적 학설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퍽 관심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그것을 연구하던 중 과학적 차원에서 인간의 생리작용이나 심리작용에 대하여 연구하고, 또 역사적인 차원에서 인종관계와 언어, 문화, 종교발달 등을 연구하는데 이 두 가지를 합하여 일반적 인간학이라고 구별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반적 인간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연구결과로써 진화론이란 학설을 발표하였습니다. 진화론이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어떤 기존인자가 점차적으로 발달하여 사람의 형상이 되기까지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진화론 주장자들 가운데도 여러 가지로 의견이 분분하여 무신론적 진화론자가 있고, 유신론적 진화론자가 있으며 자연신론적 진화론자가 있습니다.
① 무신론적 진화론이란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고,
②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인간의 기존인자를 하나님이 창조하였다는 것이며,
③ 자연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이 자연법칙을 통하여 인간의 진화를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진화론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① 인간의 연대계산이 확실치 않고,
② 기존인자 자체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하며,
③ 역사적으로도 입증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입증이란 원숭이가 사람과 근사하여 사람의 호적에 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수천 년의 역사 중에서도 그러한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진화론 반대운동이 기독교세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많은 신앙적 과학자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고, 레이건 대통령도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진화론 취소운동에 동의하여 “미국 교과서에 기재된 진화론을 삭제하라”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진화론 반대 입증이 과학에 의한 반대가 아니고 종교적 신앙에 의한 반대이기 때문에 그 이유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여 취소된 일이 있었습니다(82년 초 신문 근거). 그래서 진화론이란 학설은 인간의 기원을 뒷받침할 만한 진실한 학문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거짓말이라고 단정하여야 합니다.
그런 거짓말이 우리나라 교과서에 나타나고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아메바와 같은 기존인자가 진화되고 변이되어 미생물이 되고, 미생물이 발달하여 파충류가 되고, 파충류가 다시금 진화하여 원숭이 같은 동물이 되고 원숭이가 변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은 그 진화의 부분적 과정에서 과학적으로 약간의 근거를 제시하기도 하나, 하나님이 모든 동물 세계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결코 한 종류가 다른 종류의 2세로 생산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진화론을 믿는다면 인간은 원숭이나 미생물을 조상으로 모시는 어리석음을 자초함이 될 것입니다.
10. 하나님 형상의 훼손과 회복에 대하여(창1:26; 롬8:29) 조직신학적인 내용을 학습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말씀에서부터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씀이 무엇이냐 할 때, 어떤 이는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에 따라(요14:9) “아담의 육체적 모양이 꼭 예수님과 같은 모양이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①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고(요4:24),
② 영은 살과 뼈가 없다(눅24:39)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육체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고,
③ 또 요14:9에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하더라도 그 예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뜻할 뿐 육체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 그 육체적 외모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 하였으므로(사53:2)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 형상과 같다”는 것은 더욱 맞지 않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형상은 인간적 외모로 오신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이란 어디까지나 영적이고 인격적 형상을 의미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은 어떤 것인가 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거룩하신 속성을 품부하여 순결하게 창조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의와 선과 거룩을 힘입은 순결한 인격자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2) 그런데 인간이 그 하나님의 형상을 계속 유지하였느냐 할 때에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형상을 그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훼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과 하와에게 있을 때에는 그들이 서로 옷을 벗은 상태에서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창2:25). 그러나 그들이 불순종하므로 타락하자 제일 먼저 나타난 타락의 결과가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며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낮)과의 접근을 피하여 숨게 되었고 두려움을 나타냈다(창3:7~10)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된 최초의 증거요 결과입니다. 사람도 높은 지위에 있을 때와 낮은 지위에 있을 때의 태도가 다르고, 또 의인으로 있을 때와 죄인으로 있을 때의 태도가 다르듯이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을 때는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나 거짓 핑계가 없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피하는 일은 더욱 없었는데 타락하므로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의와 순결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8:29에서는 “그 아들의 형상을(인격적 형상)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 하였고 갈4:19에서는 “타락 중에 있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여야 하는데 여기에는 복음 사역자들의 해산하는 고통이 따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얼마나 훼손하였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회복하는가를 살피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완전무결한 인격성(의, 선, 거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인격성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대인적 인격성이고 또 하나는 대신적 인격성입니다.
① 대인적 인격성은 사람을 상대하여 교제하고 처세하는 도덕성을 의미하고,
② 대신적 인격성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앙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도덕적 능인과 도덕적 탁월이라고 말합니다. 도덕적 능인은 대인적 인격성으로 신앙력이 없는 부분을 뜻하고 도덕적 탁월은 대신적 인격성으로 대인적 인격성을 포함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능력과 지혜의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4)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두 부분으로 나눈 다음에 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형상 부분들이 어느 정도로 훼손되었으며 또 어떻게 회복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① 인간의 전적타락을 믿지 않고 자유의지를 내세워 ‘믿음을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안파에서는 ‘도덕적 능인’만 하나님의 형상이고 도덕적 탁월은 본래 없었는데 인간이 자유의지로서 믿음을 선택하고 은혜를 받으면 본래 없었던 도덕적 탁월을 획득할 수 있고 따라서 훼손된 도덕적 능인도 더 회복할 수 있다고 하나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② 천주교에서는 도덕적 능인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고 도덕적 탁월만 하나님의 형상인데 인간이 타락하였을 때 도덕적 능인은 훼손되지 않았고 도덕적 탁월만 훼손되었으나 그 훼손된 탁월한 형상을 되찾으려면 교회제도에 따른 제사의식을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 능인은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가 없고 변함도 없으며 도덕적 탁월만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 형상을 회복하려면 제사의식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도 믿지 않습니다.
③ 루터파에서도 천주교처럼 도덕적 탁월만 하나님의 형상부분이며 이것이 전적 타락하였고 중생으로 회복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 탁월만 하나님의 형상이고 이 타락에서의 회복은 중생으로 이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이것과도 다릅니다.
④ 마지막으로 우리가 신봉하는 칼빈주의 개혁파에서는 도덕적 능인과 도덕적 탁월이 다 하나님의 형상인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도덕적 능인은 많이 훼손되었고 (아주 훼손된 것은 아님)도덕적 탁월은 전적으로 훼손되었으며 이것을 모두 회복하려면 중생과 신앙으로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결론이 나올까요?
㉠ 엡2:1에서 인간은 영적으로 전적 타락하였고 중생하여야 새 생명을 얻기 때문에(요3:3) 허물과 죄로 영혼이 죽은 상태를 사실대로 믿어야 하므로 신앙에 관한 도덕적 탁월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임을 깨달아야 하고,
㉡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 악한 면도 많지만 상당한 양심자들도 있으니 그들에게 남아 있는 양심의 근거를 인간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도덕적 능인이 ‘상당히 훼손은 되었으나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며,
㉢ 이 형상을 다 회복하는 방법은 중생으로 시작하여 신앙행위로 이루어질 수 있으니, 이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딤전4:5). 이렇게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곧 거듭남과 함께 죄사함 받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감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성화에 해당하는 것입니다(롬8:29).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의 신앙생활을 열심히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뜻은 바로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면 어떻게 하시겠는가?’를 늘 성경으로 연구하셔서 말씀대로 따르는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화의 완전 성취는 육체를 떠날 때 이루어집니다.(욥19:26; 마26:41; 요3:6; 롬7:18; 8:5~13; 8:19; 고전2:14; 고후7:1).
< 이해를 돕는 도표 >
도덕적 능인 : 도덕적 선행의 힘
도덕적 탁월 : 신앙적 능력의 힘
11. 생육번성 하는 복(창1:28)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세 가지 복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① 생육 번성함과,
② 땅을 정복함과,
③ 다른 생물들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창1:22을 보시면 바다의 어족과 공중의 새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물고기와 새들은 번성을 잘하고 있습니다.
① 땅을 정복하여 인류가 지상에 충만해지는 것과,
② 사람들이 다른 생물들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에게 주신 특별한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요즈음 인간들은 생물을 개발하는 지혜가 많아져서 곡식품종도 많이 개량하였고 씨 없는 수박도 만들며 심지어는 식물을 공중에서도 재배를 하고 자연적으로 번식하던 물고기들도 이제는 많이 다스려서 양식하는 방법도 크게 기술화되었습니다. 개나 원숭이나 곰도 사람처럼 길들이는 시대가 된 것을 보면 사람이 생물을 많이 다스린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땅을 정복하는 문제인데 우리나라도 산을 개간하고 바다를 막는다면 아직도 정복할 토지가 많고 캐나다, 브라질, 인도, 아프리카, 남극, 북극 등 아직도 세계에는 광활하게 빈 지역이 많은 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이런 땅들을 인간이 정복하려면 세계 안에 인종들이 더 많아져야 하고 국제간의 이민제도도 활발해져야 하며, 그 만큼 문화가 발달하여 넓은 땅을 개간하는 기술이 시행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영토가 경상북도만큼 좁다 하나 사막으로 버려진 땅이 3분의 2는 될 것입니다. 그 땅에 물만 공급된다고 하면 큰 도시를 몇 개라도 개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을 인류에게 복으로 주셨습니다.
3) 그런데 제일 문제되는 것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문제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는 한 가정에서 자녀를 네 명만 나으면 온 가족이 놀고먹을 만큼 국가의 지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완전히 그 반대가 되어 일시적이지만 자녀생산을 일찍 근절시키면 무료시술 등 혜택을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축복의 말씀과 대조할 때 문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이 숫자적인 번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지혜롭고 문명화되어서 세상을 다스리라는 의미라고 해석하는 목사님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그 방식대로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 우리에게 순종하는 힘이 부족하여 자녀생산을 많이 못하였다 할지라도 성경은 바르게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② 일반사회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주택은 부족하고 도심은 꽉 차고 교통은 혼잡하며 범죄는 많아지고 물가는 올라가니까 “열 손 버느니보다 한입 더는 것이 낫다”는 옛날의 속담에 따라 산아제한을 하라고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성경과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과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키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니까 당연히 그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지요.
③ 그러나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믿고 메추라기와 만나, 오병이어 등의 기적으로 먹여주신 것을 믿으며, 또 하나님이 모든 생물까지 키우시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축복을 믿으면서 불신자들의 산아제한법에 동조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4) 지금도 현실적 기독교계에서는 자녀를 적당하게 갖는 가족계획을 “이상적인 신앙생활이다, 수태된 생명을 고의로 낙태시키는 것은 죄이지만 수태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은 지혜로운 법”이라 하지만 그 역시 생명의 가치를 경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잉태하게 하시고 복중에서 사람을 조성하신다”고 하였습니다(룻4:13; 호9:11; 사44:2). 그래서 창38:10을 보시면 오난이란 사람이 자녀생산을 꺼려 피임법을 썼다가 하나님이 그 행위를 악하게 여기셔서 그를 죽게 하신 일이 있었으니 이로써 산아제한의 죄가 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그러면 성도가 생산을 힘써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이 명령하셨고 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생육, 번성, 충만은 축복으로 주신 말씀일 뿐 결코 저주로 주신 것이 아니며,
② 또 성도는 한 생명이라도 전도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하늘백성의 수를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씨뿌리는 비유는 막연하게 전도만 하라는 뜻이 아니요, “성도의 구원 특권을 자녀들에게 계승시키라”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시100:5에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라” 하신 말씀이나 출20:6에서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말씀은 자식의 대에 복을 주신다는 뜻이므로 자식을 적게 가지면 그 복을 다 못 받기 때문입니다. 또 전도하기 힘든 것을 생각하면 자식을 낳아서 교회를 인도하는 것이 훨씬 쉽고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③ 믿음 약한 신자는 양육 책임이 어렵다고 하면서 안일주의에 빠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6:32에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요 공중의 새도 기르시는 하나님이 성도의 쓸 것을 다 아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물질생활에 염려하고 생산을 회피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일본 나라의 인구밀도가 가장 높고 살기 어려울 때에 백성들의 두뇌 개발이 가장 컸기 때문에 산아제한을 반대한다는 학자의 주장을 읽은 일이 있었고, 제가 잘 아는 어떤 성도의 아들은 자기 자랄 때에 많은 형제들 때문에 고생한 것을 생각하여 딸 하나만 낳아서 키우지만 여러 가족이 사는 집만큼 경제적 발전을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식구 적은 것이 물질축복을 받는 비결인 줄로 아시면 안 될 것입니다. 물질은 성경대로 살고 근실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잠8:21).
④ 산아제한은 사실상 사회생활과 이성간의 균형을 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농촌에 일손이 없고 도시에는 집 지키는 사람이 없으며 기업체에는 기술자 일꾼들이 없다고 야단입니다. 농촌의 총각이 결혼 못하는 이유는 농촌생활을 싫어하는 이유도 있지만 2남1녀를 장려한 때문에 균형이 깨진 문제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과 호흡과 거주의 연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만 합니다(행17:25).
따라서 인류는
㉠ 세상에 일이 많기 때문에 필요하고,
㉡ 생명의 가치가 만물보다 크기 때문에 필요하며,
㉢ 천국의 생명을 확보하는데도 필요하고,
㉣ 땅을 넓게 넓게 정복해 나가는데도 필요하며,
㉤ 축복을 계승시키는데도 필요하고,
㉥ 전쟁에 대비하여 많이 없어질 것을 예상하여도 필요하며,
㉦ 세상이 포화상태가 되어 말세를 맞이하는데도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신앙적인 차원에서 성도와 교회와 천국의 세계가 번성하고 충만하여지기를 기도하여야 하며 우리의 깨달음과 실천능력이 약하여 자녀생산을 많이 못한 것도 역시 믿음 약한 탓인 줄로 아셔서 솔직하게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7 과 창조 후의 안식과 창조의 재설 (창 2:1~8) 목록으로
위 본문 중 1~3절은 하나님이 만물창조를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 쉬시며 그 날을 거룩하게 하사 복을 주셨음에 대하여, 4~7절은 천지창조의 대략을 재설한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의 창조종료와 안식에 대하여
1) 하나님은 그 지으시던 모든 일을 마치셨으니 이는 유형한 현실적 만물들을 뜻함이며 영적실유까지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2) 하나님은 영적실유 즉 영혼의 창조(중생)나 다른 생명의 창조를 계속하신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자기의 하실 일을 시간 내에 끝내시고 뒤로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4)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므로 6일까지의 시간을 완전히 활용하시므로 시간의 낭비성을 배제하셨습니다.
5) “하나님이 쉬셨다”는 의미는 피곤하여 쉬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실 일을 끝내시고 “영광 받으실 입장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6) 하나님은 계속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거나 능력발동을 안하시면 만물의 보존과 운행이 정지 될 것입니다. 요5:17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 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심은 하나님의 사역이 중지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7) 3절에서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음”은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날에 자기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과 교제하시고 만물들로 영광을 받으시며 축복하시기 위하여 구별하셨다는 뜻입니다.
8) 이것이 최초의 안식일 계명의 명령인가? 할 때 그 당시는 타락 전이었고 또 지키라는 명령이 아니었는 고로 하나님의 의도에 따를 뿐 그것을 계명의 근거로 넘겨짚을 필요는 없습니다.
9) 7일인 하나님의 안식일을 영원한 천국의 모형으로 보아야 하는가? 할 때, 이런 추상이 계속되면 계시의 목적을 변하기 쉽고 세대주의에 빠질 위험도 있습니다. 히4:3에서 에덴동산을 안식세계의 모형으로 말씀한 일은 있으나 창조와 안식기간 7일을 세상의 6000년 기간과 천년왕국의 모형이라고 증거하신 말씀은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2. 천지창조의 보충설명
1) 4절에서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렇다” 하시고 천지 이외의 것까지 설명하시므로 천지란 용어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2) 그 당시 창조된 땅은 안개로만 지면을 적셨고 비를 주시지 않았으며 따라서 사람과 초목과 채소가 없어서 공헌한 상태임을 말씀하시고,
3) 흙으로 사람(육체)을 지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생령체가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4) 여기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생물이 살 수 있는 세계로 변화시키셨음과 모든 만물을 하나님과 사람 위주로 만드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사람을 지으심에 대하여
① 흙으로 지으셨음은 육체의 요소를 흙(아파트: 먼지를 뜻함)에서 취하여 하나님의 예술적 솜씨를 나타내어 형상이 되게 하셨으며,
② 생기란 루학(바람을 뜻함)이란 말로 신비한 생명을 뜻하며,
③ 그것을 코에 불어넣으신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신비한 생명을 주입시켜 코에 호흡이 깃들어 생명을 갖게 되었음을 뜻하고,
④ 생명이란 ‘네페쉬 하이야’란 말로 생물(창1:20, 21, 24; 2:19) 즉 동물의 생물까지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생명체로 아시면 됩니다.
⑤ 다만 사람의 생명에는 하나님의 형상(1:26)이 포함된 신적 생명이란 점이 특수한 것입니다.
⑥ 생명의 신비는 아무리 연구해도 신비할 뿐이요, 사람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창조의 신비, 생명의 신비는 꼭 믿으셔야만 합니다.
⑦ 그리고 사람의 육체는 흙 위에서 살지만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교제하며 살아야 함이 창조의 순리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8 과 에덴의 환경과 최초의 명령 (창 2:8~17)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에덴동산의 환경과 최초 인간에게 명령을 주신 내용입니다.
1. 에덴의 환경에 대하여
1) 그 지역 동방의 위치는 모세가 이 성경을 기록하신 위치(시내 광야)에서 동방인즉 그 방향을 알 수 있는 바 비손강, 기혼강, 힛데겔강, 유프라데 강물의 발원지(10절)라고 하였습니다.
① 비손강은 그 위치를 확인할 자료가 없으나 분명한 것은 네 강으로 합류된 근원지이며,
② “기혼강은 구스 온 땅에 둘렸다”고 하였는데 이 ‘구스’는 에디오피아가 아닌 바벨론의 ‘가시’지역을 뜻한다 하며,
③ 힛데겔강은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고(14절),
④ 유프라데강은 현재 이락와 쿠웨이트 영지에 나타나 있은즉 그 강들의 근원지를 시리아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동방에 인간이 살 만한 자연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삶의 동산을 최초의 인간에게 삶의 출발지로 지정해 주셨습니다(8절).
3) “에덴”이란 동산의 이름은 창설 당시에 주어졌을 것이지만 모세가 성경을 기록할 당시의 이름입니다. 쾌락의 뜻이 있습니다.
4) 그곳은 4대강의 샘물 근원지였고, 하윌라에서 생산되는 좋은 금과 호마노와 베델리엄(진주)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5) 따라서 에덴은 산 좋고 물 좋으며 각종 보석이 많고 평화가 있는 곳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6) 처음에는 그곳에 아담만 혼자 두셨습니다. 8절,15절,16절은 아담 한 사람만을 지적하셨습니다.
2. 최초의 명령에 대하여
1) 최초의 명령은 아담 혼자서 받았으나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입니다(롬5:12).
2) 하나님은 아담을 이끌어 인도하여 그곳에 살게 하셨고(15절),
3)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으니 이 말씀은 자연을 아름답게 가꾸고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취미로운 노동을 부여하셨습니다. 역경 속에서 수고하고 땀 흘리는 노동은 죄 값인데(창3:17) 그 당시 인간은 성인으로 창조되었음이 분명합니다.
4) 최초의 명령은 ‘모든 실과를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① 이 말씀(2:16~17)을 행위계약이라고 합니다(설교보충 참고).
② 하나님이 왜 이런 계약을 하셨을까?에 대하여,
㉠ 우선 말씀을 살피는 성도는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유감의 뜻으로 생각하여서는 안 되며,
㉡ 인간이 거역하고 타락한 일에 대한 불행만 생각하여도 안 되며,
㉢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아시고 계셨을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사람이 상상 못할 깊은 뜻이 있었음을 아셔야 할 것이며(롬11:33~34).
㉣ 하나님은 절대자시라 무슨 명령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며,
㉤ 부모가 자식에게 어떤 약속이나 명령을 할 수 있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으며,
㉥ 창조주와 피조물 하나님과 인간과의 구별을 짓는 일일 수 있으며,
㉦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적 위치에 서게 하시기 위함인즉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함으로 복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 여기에서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권을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은 인간을 귀중한 존재로 또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존재로 대우하신 은혜로 볼 수 있습니다.
③ 허락된 실과와 허락되지 않은 실과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계명과 금지하신 계명을 원시적 대화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특정한 과일나무가 지적되었다 하더라도 허락과 금지의 계명을 포괄적으로 표현하신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④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란 선과 악을 가름하는 분별을 의미하는바 선악의 표준은 하나님께만 있으므로 사람이 감히 자율적 입장에 서서 자기를 정당화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선’이라 하시는 것이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악’인 만큼 하나님의 선을 거역하는 그 자체는 인간이 악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심은 인간의 불순종으로 초래한 죄 값이 결국 사망을 가져온다는 말씀입니다(롬5:12; 6:23) 사망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 아담이 범죄 하자마자 하나님과의 교제를 피하였던 영적 사망을 뜻함이요(엡2:1).
㉡ 육체의 죽음을 당함이며(창3:19),
㉢ 영원한 형벌의 멸망(마7:13; 요3:16) 즉 심판 받고 지옥에 갈 것을 뜻합니다. 구원은 이 세 가지 사망에서 중생과 부활과 심판을 면제받고 영생하는 것으로 회복되며 더 큰 행복이 이루어집니다.
제 9 과 여자를 만들어 가정을 이루어 주심 (창 2:18~25) 목록으로
1. 하나님은 독처(혼자 삶)를 좋지 않게 여기셔서 돕는 배필로 여자(23절)를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1) 독처한다는 뜻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여겨 이웃이 있어야 하는 이유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 말씀은 가정(부부)의 필연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라 하셨으니 아담(남자)의 피조 상태가 돕는 배필을 필요로 하도록 남성답게 지으셨고 거기에 협력하고 보충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인을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남자의 육체적 정신적 성격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돕는 배필’이란 의미를 당초부터 협조하는 종속인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대상이란 뜻입니다.
2. 19절에서 하나님은 각종 들짐승과 새들을 흙으로 지으셨고 아담으로 그 이름들을 짓게 하셨으니 아담은 그 육체와 정신이 아울러 성인적 형태를 이룬 지혜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21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빗대를 취하신 후 그 공간을 살로 채우시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에서 최초 남자의 이름이 아담으로 나타났고 여자의 이름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습니다(2:19;3:20). 아담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일 것입니다(3:9). 그 말의 의미는 붉다는 의미와 사람 또는 남자란 뜻이 있습니다.
2)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음은 하나님이 능력으로 아담의 의식을 몽롱하게 하셨음이고,
3) 그 몸의 갈빗대를 뽑고 대신 살을 채우신 것은 아픔을 모르게 외과수술을 시행하신 일이요,
4) 그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셨음은 마치 흙으로 남자를 지으심과 같은 것입니다.
5) 문제는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신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23절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하고 또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하리라’함으로써,
① 우선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가 있고,
② 여자의 육체적 근원이 남자로부터 나왔은즉 여자라고 이름한 것과,
③ 남자의 가슴뼈로 여자 육체의 요소를 삼으심은 아내가 남편의 가슴에 안겨야 할 것을 의미하여,
④ 마땅히 남자의 내조자(돕는 배필)가 되어야 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6) ‘하나님이 여자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신 것’은 최초의 중매사역이며 아담이 여자를 영접하면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하였음은 아내를 자기의 몸처럼 소중히 여길 의무를 나타낸 것입니다(엡5:28).
4.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 하심은 앞으로 계속될 혼인 제도를 창설하심이요. 부부는 마음과 육체가 하나로 연합하여 삶으로 행복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함은 본래 벗은 대로 창조 받았고 또 수치감을 모르는 무죄시대이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보충 2. 최초의 혼인과 범죄 (창 2:18, 21~24) 목록으로
1. 최초의 혼인(창2:18,21~24)
위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최초의 혼인’이란 제목으로 잠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래는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과 사람을 지으심으로 이 세상을 사람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먼저 남자를 지으시고 그가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셔서 배필 되는 여자를 지어 가정을 이루게 하시므로,
① 부부제도, 즉 가정으로부터 인류의 생활을 시작하게 하셨고,
② 본래 아담도 배필 되는 여자가 없으므로 불편한 상태에 있었으니 그 불편이란 창조의 불완전을 의미함이 아니요,
㉠ 우선 남자 혼자서는 자녀 생산을 못하는 점과,
㉡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지 않으면 원만한 인간생활이 유지될 수 없는 점입니다.
③ 하나님이 부부될 자를 만나게 하신 중매자임도 나타내 주셨습니다.
3) 하나님이 갈비뼈가 없어서 그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셨을까? 에 대하여 하나님은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일남일녀를 지으셨으며(말2:15), 또 여자의 몸을 남자에게서 취하여 만드신 것은 서로가 한 지체임을 책임지게 하심일 것입니다(고전7:1~5).
4) 최초의 혼인을 성취시켜 주신 말씀 중에,
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심은 생산성과 친교와 협력이 없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의 목적은 생산과 상호친교와 협력에 있음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② 따라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살기 위하여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독신생활을 피해야 할 것이며(고전7:2),
③ 부부생활은 정신과 육체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일치연합을 시도하여야 하고,
④ 한 몸을 이루었음 같이 서로 분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고전7:5).
5) 남녀가 혼인하지 않는 것은 반쪽의 인생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혼인을 귀하게 여기고 원만하며 행복한 생활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최초의 범죄(창2:16~17;3:1~6)
1)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순결하였습니다.
2) 하나님은 순결한 인간에게 책임을 부여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① 만물을 다스릴 것과
② 하나님의 계율(창2:16~17)을 지킬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3) 최초의 인간이 이런 명령을 받은 것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의무가 있으며, 의지적인 행동의 자유를 부여하신 축복입니다.
4)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였고, 사단 역시 영물인지라 사람을 상대할 만한 고등동물의 신체적 구조를 이용하여 인격적으로 인간에게 접근하여 유혹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은 사단이 행하였으나 나타난 유혹은 뱀을 통하였고 그 유혹에 이끌려서 범죄한 것은 인간 당사자였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보이지 않으나 많은 사람들과 현실적인 사물들을 통하여 인간을 유혹하지 않습니까?
5) 사단은 거짓말로 유혹하였습니다. 거짓 그 자체는 진리가 아니란 뜻이요, 거짓말은 이렇게 큰 위험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사단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여기고 자기의 말을 참으로 믿고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진리의 상태를 거짓으로 바꿀 때 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하라 하시더냐?”한 질문은 확신을 흔들기 위한 유혹이요, 또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을 “죽을까 하노라”로 바꾼 것은 하나님의 계율을 변질되게 한 것이요, “만지지도 말라” 한 말은 임의로 부가한 말입니다.
의심, 삭감, 부가 이 세 가지는 이미 신앙상의 죄를 범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 사단은 눈이 밝아지고(지혜로워짐),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자율주의), 또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으뜸 됨)는 말로 큰 관심과 의욕을 품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또 그 계율에 나타난 금단의 실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게 보인지라 아담은 자신의 의지로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에 사람이 정욕을 앞세워 따라갈 때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6) 여기에서 하와는 주체성이 약하여 먼저 유혹을 당하였고 아담은 여자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죄는 누룩처럼 번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마귀는 측근자를 통하여서도 유혹합니다(마10:36;미7:5). 이러한 유혹의 역사는 옛날과 같이 지금도 그 방법대로 역사하는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7) 그리고 이러한 유혹을 피하려면
① 진리의 확신을 가지고,
② 진리표준에서 흔들리지 말며,
③ 현실적인 유혹의 대상을 멀리하고,
④ 진리의 가감을 절대 삼가셔야 합니다.
제 10 과 최초의 범죄 (창 3:1~6)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범죄하게 된 경위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여자를 유혹한 뱀의 소행과 금단의 과실이 탐스럽게 보여 주는 유혹에 끌려서 범죄하고 또 남편까지 범죄하게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뱀은 간교한 들짐승이었다고 하였습니다.
1) 현재의 뱀은 이미 그 형태가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게 되었지만(14절), 본래는 들짐승 형태로 있었고 또 사람과 교제할 만큼 영리한 동물이었습니다.
2) 그 뱀이 ‘가장 간교하다’는 것은 이미 사단의 화신으로 이용될 만큼 그 성품이 간교함(거짓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3) 본문에서 뱀이 사단의 화신이 되었다는 말씀은 없으나 계12:9과 20:2에서 옛 뱀, 용, 마귀, 사단을 하나로 묶어 말씀하였으므로 그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인간을 유혹한 그 뱀은 바로 사단의 이용물이 되어 인간을 유혹하는 상대자로 등장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뱀이 고등동물로서 말을 하였으나 거짓으로 유혹한 것은 사단의 조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여자가 유혹을 받은 이유
1) 그가 뱀의 거짓말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진실을 의심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① 뱀은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참’이 아닐 수도 있는 듯이 두드리며 의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② 이때에 여자는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말씀)을 가감하여 대답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은 가한 것이고 ‘죽을까 하노라’한 것은,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에서 상당하게 감한 것이었습니다.
③ 여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확실하게 알지 못한 채 자기 생각대로 대답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말씀의 확신이 없는 탈선입니다. 말씀에 확고히 서지 못하면 누구나 이런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④ 여자에게 확신이 없음을 안 사단은 “결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선악 알기를 하나님처럼 알 것이라”하였으니 여기에 선악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만큼 지혜로워진다는 뜻이고,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은 확신이 없는 자에게 강한 확신을 주는 거짓자의 박력 있는 유혹입니다. 요즈음도 진리의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단자들의 박력 있는 유혹에 현혹되는 것을 봅니다.
2) 그 나무(열매)가 먹고 싶을 만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여 결국은 먹게 되었으니 그 과실이 퍽 훌륭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① 요즈음 겉으로 볼 때 훌륭한 과실은 색깔 좋은 복숭아입니다. 그런 과실이 몸에 보약이 된다고 하면 더욱 탐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이 유혹의 과정이 그 당시에는 과실로 나타났지만, 현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등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이기셨으니 그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 있지 않습니까?
② 여인이 유혹을 쉽게 받은 것은 말씀에 확신이 없고 사단과 대화를 임의로 한데도 원인이 있지만 직접적인 유혹거리를 눈앞에 두고 상상을 한데서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③ 따라서 유혹을 이겨야 할 성도는 말씀의 확신과 사단과의 대화 근절, 유혹의 대상을 피하는 일을 잘하여야 합니다.
3) 여자는 그 실과를 따먹고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① 범죄의 길은 혼자가면 외롭습니다. 동반자가 있음이 좋겠지요.
② 그래서 남편을 유혹하였습니다. 아담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았고 또 여인이 그것을 먹었지만 당장은 아무런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먹은 경험자를 모방하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③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듣기에 알맞을 만큼 미련한 데가 있는 모양입니다. 미7:5에서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키라”하였으니 이런 말씀은 최초부터 여인이 신용을 잃은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최초 인간의 타락의 경위를 거울삼아,
1) 말씀 위에 확고히 서고,
2) 어떤 거짓된 말에도 유혹되지 않으며,
3) 현실정욕을 피하거나 거기에 이끌리지 말고,
4) 진리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으며,
5) 스스로 눈이 밝은 자인 척하여 자고하지도 말고,
6) 자신도 굳게 서고 남도 유혹하지 않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1 과 범죄 후에 된 일 (창 3:7~13) 목록으로
위의 말씀에는 범죄 이후에 타락자에게 나타난 변화와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가셔서 잘못을 추궁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범죄자들에게 나타난 변화
1)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으나 별일이 없으니 구태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필요가 없다, 내 뜻대로 해도 되는데…’ 하는 생각으로 인간이 자기의 지혜를 내세우는 지혜의 눈이 밝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 눈(지혜)으로 즉 자기들의 지혜로 선악을 가름하게 되었습니다. 선악의 표준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기의 정욕으로 선택한 변화요,
2) 자기들의 몸이 벗은 상태에 있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였습니다. 타락 전에는 벗은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는데, 두려운 생각을 가졌은즉 이것은 범죄의 두번째 변화요, 죄의 결과는 두려움입니다.
3) 그들은 자기들의 짜낸 지혜로 나뭇잎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수치를 가리는 방도가 겨우 나뭇잎 치마였으니 이것이 밝아진 인간의 지혜이지만 결국은 미련한 소행을 드러낸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피하여 숨었겠지요. 본래 인간은 옷을 벗고 있었지만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그대로였기 때문입니다(창2:25). 그런데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자신들이 만들고 하나님을 피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죽은 자의 형편입니다.
5)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시고 그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숨은 위치를 모르셔서 질문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깨달아 처신하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타락한 아담은 자신의 눈 밝은 지혜로써 핑계와 위장을 일삼았습니다. 이때에 아담은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하였고, 여자는 대답하기를 “뱀이 꾀어서 먹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핑계하는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의 책임을 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돌이키는 것입니다.
2. 범죄사건이 있은 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 우선 도피한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아담 내외는 나뭇잎 치마를 입고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을 때 피하였지만(8절),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 만나셨습니다. 이것이, 곧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최초의 거동이십니다(마9:13 -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2) 피하여 숨은 자를 기어코 만나시고 대화의 상대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사1:18 -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3) 핑계와 전가로 죄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인간, 또 그 책임을 스스로 질수도 없는 인간을 불쌍히 보셔서 구원의 원시복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15절)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찾아오셨고 대화의 대상이 되어 주셨으며 또 구원의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제 12 과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 (창 3:14~19) 목록으로
위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뱀에게 저주를 선포하셨고 또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에게 최종적으로 패할 것과 여자와 아담에게 각각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1. 하나님은 뱀에게 먼저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저주의 내용은,
1) (짐승의 형태에서) 파충류의 형태로 도태시켜 배로 다니게 하셨고,
2) 또 종신토록 흙을 먹게 하셨으니 이는 땅 속을 거주지로 삼게 하심이요.
3) 그리고 “너와 여자와 원수 되게 한다” 하심은 그 당시의 뱀이 최초의 사람 여자와 원수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뱀이 거짓말로 여자를 유혹 타락하게 한만큼 서로 원수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의 여자는 성도를 상징합니다.
2.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 된 중에 뱀이 치명타를 받을 것을 말씀하셨으니,
1) 이 말씀이 곧 15절의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 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① 너의 후손은 곧 뱀의 후손인데 뱀의 후손을 뱀의 새끼라 하지 않으신 것은 바로 사단의 후손인 불순종의 사람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원수시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 하였고(마3:7), 바울사도도 마귀를 추종하며 세상풍속을 좇고(엡2:2) 헛된 말로 속이는 자를(엡5:6)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창6:2에서는 불순종의 무리를 사람의 딸들이라고 묘사하였으므로 너의 후손(뱀의 후손)을 마귀의 자식(행13:10;요일3:8,10)이라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② 여자의 후손은 메시야를 뜻합니다.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으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동정녀의 몸을 통하여 출생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7:14). 예수님과 성도 그리고 사단과 그 추종자들 간에 늘 원수지간이 될 것을 예언하셨고 예수님과 사단이 서로 원수 됨같이 성도는 사단과 사단의 역사를 원수시하여 늘 싸워야 할 것입니다.
2)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한다는 것은 메시야 예수님이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고 정복할 것을 예언하신 것이요, 또 “머리를 상한다”는 뜻은 발을 상하는 일에 반대되는 말씀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가하여 힘을 쓰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으로, 이는 예수님의 부활승리로 사단의 역사를 완전히 이기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사단이 메시야를 대항하여 싸울지라도 성도를 핍박하거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 이상은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사단의 무기는 사람의 육체를 해하는 것으로 한계가 있고(마10:28) 예수님의 능력은 무한하여 부활로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실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3. 여자에 대한 선포입니다.
1) 먼저 이 여자는 유혹을 받아 범죄한 최초의 여인이며 모든 여성을 뜻합니다. 그 이유는 최초의 여성이 받은 징벌이 모든 여성에게 다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는 아담에게 선포된 것이 모든 남자에게 전가된 것도 같은 입장입니다.
2)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한다”하셨은즉 본래부터 잉태의 고통이 있었던 것을 타락의 죄 값으로 더 고통스럽게 하신 것입니다. 왜 여인이 잉태할 때 본래부터 고통을 당해야 할까요? 아마 인내심을 키워서 수고하는 생활에 면역을 가하게 하심이겠지요. 유익을 주는 고통 이상 더 당하게 하시는 것은 죄의 결과로서 그런 고통이 있을 때마다 모든 여인들은 최초 여인의 범죄 양상을 기억하면서 여인의 연약을 깨달으며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수고하고 자식을 낳게 하신 것도 잉태의 고통과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으며,
4) 남편을 사모하며 남편이 아내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선배 후배가 있다 하여 후배의 인권을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듯이 여자가 남자의 후배 된 입장에서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고 그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것은 인권차원이 아닌 선후배의 미덕으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사실을 죄책에 포함시키신 것은 여자가 먼저 타락하여 남자를 유혹하였으므로 여자의 입장에서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고 존경하고 복종할 것을 더욱 강조하신 것입니다(엡5:22).
4. 17~18절에서 아담에게 내리신 선포입니다.
1)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것을 먹은 것은 잘못이라” 하심으로 아내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이 잘못임을 지적해 주셨고,
2) 아담의 범죄 때문에 땅을 저주하여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땅이 사람을 위하여 있으므로 타락한 인생에게 삶의 고통을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노력은 신성한 노동일 것이나 땅이 죄 값으로 저주를 받음으로 인간의 수고를 가중시킨 것은 인간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면서 종신토록 허락하신 삶의 수고를 복종과 인내로 감당하여야 함을 나타내 줍니다. 채소는 인간에게 주신 기본적인 양식이며 수고와 땀 흘림 역시 건강을 지키는 은혜의 선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5. “육신은 흙에서 취하였으므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 하심은 육신적 생활에 기한이 있음과 육체가 죽음으로 흙이 될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이 본래 흙에서 취한 육체이므로 필경 흙으로 돌아가도록 만드셨다는 의미 같으나 이 말씀이 타락의 결과를 나타내시는 선포로 주셨고 또 구원의 사역이 육체의 부활과 함께 육과 영의 더러운 것에서 깨끗케 하시는 것이므로(살전4:16;고후7:1) 육체의 죽음도 죄의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타락 후에 하나님이 내리신 선포는,
1) 뱀 자체에 대한 저주와,
2) 인간을 유혹한 사단에게 패배와 멸망을 경고하심과,
3) 인간의 생활에 수고와 고난을 가중시키기 위하여 땅을 저주하심과,
4) 여자에게 고통을 주어 각성하며 주의하게 하심과,
5) 남자의 수고와 땀 흘림의 생활,
6) 그리고 죄로 인한 육체적 죽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고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3 과 타락자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 (창 3:20~24) 목록으로
위의 본문 말씀은 범죄자에 대한 징계를 선포하신 후에 타락한 인간에게 내리신 사후 처방의 말씀입니다.
1.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여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을 표현하였으니 산 자의 조상 할머니란 뜻입니다.
2. 하나님이 두 사람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1) 타락자의 수치를 가리워 주심이며,
2) 이를 인하여 짐승이 희생을 당하였고,
3) 그 가죽옷은 수치를 가려주시는 완전한 방법인즉 이 사실은 메시야의 속죄사업으로 우리의 허물을 가려주시는(시32:1) 구속의 은혜를 예표하신 것입니다.
3. “타락자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임의로 선악을 가름하는 자율권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타락자의 오만한 태도이므로 하나님은 이를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요, 따라서 생명나무 실과를 임의로 따먹고 영생하는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4. 타락은 임의로 하였지만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하는 것은 임의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선택자에 한하여만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엡4:5). 22절에 나타난 ‘생명나무실과’는 창2:16의 각종 나무실과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서 여기서 새롭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5. 이 생명나무실과는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방도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허락하시는 자에 한하여 그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일단 에덴의 낙원에서 쫓아내셨고 농사를 짓게 하셨으며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의 동편의 길을 천사(그룹, 화염검)로 하여금 지키게 하심으로 타락한 인간의 지혜나 힘으로 구원받지 못하도록 조치하신 것입니다.
6. 생명나무가 에덴동산 동편에 있었다는 것은 그 지경에 구원의 방도를 예표하는 과실을 상징으로 주셨는지에 대하여 잘 알 수 없지만 “에덴동산의 동편 길”은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러 오시는 노정을 계시한 말씀입니다(겔43:2).
결론적으로 타락은 인간이 자유로 할 수 있었지만 구원은 자유로 받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방도를 하나님이 그의 선택자에 한하여 은혜를 주시고 길을 열어주실 때에만 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3. 범죄와 관련한 섭리들 (창세기3장) 목록으로
1.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내셨을까?(창2:15~17).
여기의 선악과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뜻하며 또 그것을 먹지 말도록 계율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1)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왜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셨을까? 그것을 설정하지 않았으면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그것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아담이 범죄한 것이니까 그 죄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왜’자를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라는 말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자기의 생각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요, 불신앙적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롬11:33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깊고도 부요하여 사람은 그의 판단을 측량치 못하며 그 길을 찾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의문이 있으면 언제나 자신의 무지를 탓하면서 진지하게 배우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하셔야 합니다.
3) 그러면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요?
본문 강론에서도 일부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① 하나님이 만유의 주인이시며 지배자 되심을 사람으로 깨닫게 하려 하심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출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가져야 할 것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런 계율을 주시지 않았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의식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전이나 오늘이나 말씀으로만 의식하고 유형한 만물로만 의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담은 그 선악과를 볼 때마다 창조자요 지배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또 그의 말씀도 기억하게 되며, 만물이 그의 것임도 알게 될 것입니다.
② 인간에게 주신 자유를 통제하실 필요를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위와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는 인간을 기계처럼 만들지 않으시고 인격적 존재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통제하시는 말씀이 없으면 인간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절대자와 인간 사이에 구별이 없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완전하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인간임을 항상 알게 하시기 위하여 선악과가 필요하였습니다.
③ 하나님은 법의 질서를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법이란 ‘할 것과 말 것’을 세우는 것입니다. 십계명과 율법도 할 것과 말 것을 증거합니다. 따라서 에덴의 각종 실과 중 먹을 것을 말씀하셨은즉 먹지 말 것도 말씀하심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법령의 합리성을 나타내 주셨고,
④ 인간의 지혜에 끌리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에만 끌려가게 하심입니다. 고후13:8을 보시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 하므로 진리절대주의를 말씀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계율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 본위의 선악을 연구할 것입니다. 결국은 진리 본위를 떠나서 인간 본위의 타락을 하였지만 인간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만이 복이 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⑤ 그 계명을 순종할 때 큰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큰 복이란 바로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를 음미해 보시면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금지시킨 깊은 뜻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2. 행위계약에 대하여(창2:16~17)
위 본문 말씀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행위계약이라고 합니다.
1) 이 행위계약이란 뜻은 하나님과 인간의 대표인 아담 사이에서 맺어진 계약으로 하나님의 율례를 잘 지키면 복을 받으나 거역하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선포대로 시행하실 것을 쌍방이 승인하였다는 뜻입니다. 마치 물건계약서에 날인한 것과 같은 의미이지요.
2) 하나님은 자기를 찾고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히11:6) 능히 그런 경품을 내놓으실 만하신 것입니다.
3) 이 계약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쌍방적으로 된 계약이고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이 계약을 순종함으로(실천하여) 복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결국은 그 반대가 되므로 온 인류에게 불행을 가져왔고 하나님의 새로운 구속의 은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선을 행하지 못할 것을 아시고(렘13:23) 원시복음을 계시해 주심으로(창3:15,21) 구원의 방도를 알리셨으니 이것을 은혜계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약은 쌍방이 하는 것인데 은혜계약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의논하여 하신 계약이므로(엡1:4) 인간에게는 일방적 계약이 된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기 때문에(고후1:20) 반드시 실현되는 계약을 해 주신 것입니다.
5)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현실 낙원으로 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또 받으니 부활과 영원한 천국이 주어지므로 더 좋은 결과를 힘입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많은 비택자가 하나님의 제한적 구원으로 인하여 지옥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3. 사단의 범죄 유혹술(창3:1~6)
1) 사단은 영물이므로 어떤 인간이나 사건을 통하여 순결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2) 사단의 유혹방법
① 유혹의 대상에 접근하여 우선 대화를 갖는 것입니다.
창3:1을 보시면 먼저 뱀이 여자를 찾아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런고로 성도는 각별히 주의하여 간교한 자와의 대화를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②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하는 변론을 시도하였습니다.
물론 성도가 성경에 확고하면 그런 유혹을 받지 않지만 사단은 성경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만을 미리 알고 말을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하시더냐?’,?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다’라는 식으로 의문을 야기시키는 일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③ 성도가 성경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도록 유도하는 일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하와가 “먹지도 말고…죽을까 하노라”라고 대답한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한 것입니다. 계22:18~19을 찾아보십시오.
④ 사단은 성도에게 명예와 권위의식을 조장하는 방법으로 유혹을 합니다. 사단의 말대로 하면 “오히려 지혜가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된다”고 한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명예와 권위, 영광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만 영광의 좌소에 계시게 하고, 성도 자신은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여 세속의 어떤 명예라도 탐하여서는 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불법의 접근을 피하고, 말씀을 의심하거나 가감하지 말며, 성경에서 이탈하지 말고, 명예나 권위의식에서 떠나는 것이 사단의 유혹을 피하는 방법입니다.
4. 아담을 부르신 의미(창3:9)
하나님께서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한 아담을 부르신 의미는,
1) 아담 스스로를 반성케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회개한 것처럼(마26:75) 아담도 하나님의 찾으시는 음성을 들을 때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였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이 그를 만나 대화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려움 당한 인생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만나야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 그런 역할을 하시려고 기다리십니다(사1:18;50:15;호6:1;마11:28).
3) 아담의 영적타락의 위치를 밝히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숨은 위치를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니므로 영적타락의 입장을 깨달으라는 의미입니다. 저희들은 영적 타락의 입장을 하나님과의 거리감 측정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구조를 받아야 할 배가 자신의 좌표를 알려야 함과 같은 것입니다.
4) 책망과 징계를 선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3:14~19). 범죄하였으면 하나님의 책망이 있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5) 거듭나게 하여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타락자는 허물과 죄로 그 영혼이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중생시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으므로(엡2:1), 하나님은 중생케 하여 부르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6) 구원을 약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3:15의 원시복음과, 3:21의 가죽옷을 입혀 주신 사실입니다. 가죽옷은 양의 희생을 의미하며 그 희생의 양은 예수님을 예표하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도 바른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배울 때 그 말씀의 요구에 따라 바른 대답과 처신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5. 최초의 범죄(창2:16~17;창3:1~6)
인류의 범죄는 타락과 불행의 원인이었으므로 그 범죄의 경위를 살피며 또 저희들이 범죄로 오는 불행을 막기 위하여 죄에 대한 민감한 처신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최초의 범죄 상황을 살펴보면,
1) 뱀이란 들짐승이 먼저 여자에게 말을 걸어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① 뱀은 피조물 중에 가장 간교한 들짐승이었고 이 동물이 사람과 대화를 할 만큼 영특한 동물이었습니다.
② 거짓말로 유혹을 일삼는 마귀는 영물이기 때문에 뱀에게 자극을 주어 뱀으로 하여금 사람을 상대하여 거짓으로 유혹하도록 작용을 하였습니다.
③ 최초의 사람은 순결하였고 또 교제의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뱀과의 대화를 나누었지만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대화 및 교제의 대상을 선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④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의 이용도구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⑤ 뱀이 사단의 조종을 받아 여자를 먼저 유혹한 것은 여자가 하나님의 계율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으므로 그 지식이 허술할 것과 또 남자보다 만만한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사단은 종시 ‘참’(하나님 말씀=진리)에 도전하는 대화로 여자를 상대하였습니다.
① 사단(뱀)은 “참으로 하나님이 그런 말을 하셨느냐?” 함으로 ‘참’을 확신 않는 상태로 질문하였고,
② 여자는 대답할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의 나무”라 함으로 그 나무의 본질적 의미를 모르는 관계로 그 위치에만 관심을 나타냈으며,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은 것을 ‘만지지도 말라’ 하셨다고 하여 이를 부가하고,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은 “죽을까 하노라”하셨다고 함으로 그 의미를 감소시키는 말을 한 것입니다.
③ 보통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별스럽지 않게 듣고 지나가겠지만 진리를 민감하게 연구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안하신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을 저런 뜻으로 설명하는 것을 크게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단과 거짓은 작은 것 한 마디에서부터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④ 말씀의 확신이 없는 여자에게 사단은 인간심리의 허점을 이용하여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인간이 높아지고 명예로워지기를 좋아하는 심리에 부채질을 한 것이며 거기에 따라서 그 실과의 모양도 호기심을 줄만큼 보였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사람의 호기심을 일으킬 만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선악과처럼 보이는 것들, 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명예로워질 듯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성도는 예수님만 제일로 믿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런 세속적인 것에 마음이 끌리면 안 됩니다(요일2:15~17).
⑤ 결국 최초의 여인은 하나님의 참된 경고를 불신하고 마귀의 말을 신용하여 불순종의 죄를 짓고야 말았습니다.
3) 그는 또 같이 있는 남편 아담에게 권하였습니다.
① 아담은 아내가 권하니까 비판 없이 받아먹음으로 역시 범죄하였습니다.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서로 살펴야 합니다.
② 또 여자가 범죄하자마자 하나님의 진노로 불행한 결과가 속히 나타났다면 아담은 아내의 요구를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자에 대하여 오래 참아 주시기 때문에(벧후3:9) 그 사이에 아무 탈이 없는 줄 알고 계속 범행한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으나 그것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③ 여자가 남편을 설득하여 범죄하게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만큼 요즈음도 아내의 말에 맹종하는 남편이 많다고 합니다.
④ 죄는 누룩처럼 번져나가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매도 여러 사람이 같이 맞는 것이 쉬운 것처럼 범죄자도 동반자를 구하려 하기 때문에 그런 유혹까지 피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아무리 부부는 일신이라 하여도 범죄까지 일신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마귀는 그 아내를 통하여 욥을 흔들었고(욥2:9) 렘12:6에서는 “형제와 아비의 집도 너를 속인다”하였으며, 마10:36에서는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하였고, 미7:5에서는 “친구와 아내도 믿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든든히 붙드셔야만 거짓의 유혹을 피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최초인의 유혹됨을 거울삼아 죄를 멀리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6. 범죄 후에 된 일(창3:7~24)
위의 말씀에는 범죄 후에 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것은 사단이 ‘지혜로와질 것이라’는 말대로 된 것으로 세상적인 눈이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표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을 지혜로운 일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삿17:6). 선악의 표준이 하나님께 있지만 그들은 인간 자율적 판단으로 선악을 가름하려고 합니다(마11:25;롬1:22;고전1:19~20). 하나님 중심을 무시하고 사람 중심을 내세우는 것이 바로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2) 자신들의 벗은 몸의 수치를 깨달았습니다. 이 형편은 본래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습니다(창2:25). 그런데 범죄 이후 그 상태가 부끄러워졌으니 웬 일일까요? 그들을 감싸주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롬8:29), 자신들의 가책에서 느끼는 감정이 스스로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긴 것입니다. 타락한 인생이나 불신자라도 남아 있는 양심의 가책이 없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3) 그들은 자기들의 지혜로 대책을 세워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뭇잎 치마는 완전하지 못한 의복이므로 인간 스스로의 우매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거나 해결할 힘이 없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4)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고 숨었습니다(8절). 하나님의 음성과 낯을 싫어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하면 망한다고 하셨는데(시73:27), 그들은 망하게 되는 일을 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영적 죽음의 증상입니다. 그 때는 서늘하고 열매도 있었으므로(7~8절) 가을철임을 연상할 수 있고 하나님은 그 동산을 거니시며 말씀(음성)으로 나타내 주셨으나 최초 인간은 그 말씀을 피하여 숨은 것이지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시139:1~16).
5) 하나님의 문책이 있었습니다.
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신 것은 바로 반성을 촉구하시는 문책이요.
② 벌거벗은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 만큼 문책의 사건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금단의 과실을 먹은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③ 아담은 자신의 죄를 여자에게 전가하려 하였고 여자는 뱀에게 전가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타락한 모든 인류의 회개치 않는 완악한 근성을 보인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책임지려 하는데서 시작됩니다.
④ 하나님은 뱀에게 문책하시지 않았으니 뱀은 대화의 인격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6) 범죄한 종류에 따라 심판과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① 뱀에게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14절에서 뱀을 저주하실 때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라”고 하셨으니 여기에 ‘더욱’이란 말씀은 다른 육축과 짐승도 저주를 받았는데 그 중에도 범죄의 도구로 쓰여진 뱀이 더욱 저주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뱀이 “배로 다닌다”는 것은 하등동물로 도태됨을 의미하고, “흙을 먹는다”는 것은 땅속을 거주지로 삼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사단에게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본문 15절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한다” 하셨으니 이것은 성도가 사탄과 원수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마귀와 원수 됨은 성도가 구원받는 과정이고 마귀의 머리를 상함이 성도의 승리이며 이 승리는 동정녀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이 이룩하실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창3:15).
③ 하나님은 원시인간에게 구원의 복음을 약속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원시복음(창3:15)이고 ‘하와’라는 이름(생명, 산 자의 어미) 에서도 밝혀주셨으며 나뭇잎 옷 대신 가죽옷을 입혀 완전하게 수치를 가려주심으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21절).
④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하신 후에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 여자에게는 잉태하는 고통과 해산하는 수고, 또 남편을 사모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는 생활인데 이는 남자에 비하여 퍽 관대한 것 같으나 하나님이 여자를 여자로 지으신 까닭으로 거기에 합당한 징계를 내리신 것이며,
㉡ 남자에게는 땅과(17절) 동물이(14절) 저주 받은 상태에서 본래 주신 활동분량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노력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이 수고와 노력은 종신할 때까지 하게 하셨으며 식물로 주신 채소를 먹으려면 땅에서 나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농사는 인간의 근본 직업입니다(23절). 놀지 않고 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와 뜻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 흙으로 돌아가는 영육분리의 상태 즉 육체의 죽음을 선포하셨고,
㉣ 낙원에서의 추방과,
㉤ 생명과의 길을 통제하여 인간의 자율적 구원의 방도를 막으셨습니다. 22절을 보시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하게 되었음은 인간이 자율적으로 자기의 지혜를 쓴다는 뜻이요, 이에 따라 하나님은 생명과의 길을 막으심으로 영생을 못 얻게 하신 것입니다.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과의 길을 막았다는 것은 인간이 자율적으로 살아보려고 타락하였으니까 삶을 지속하는 생명과를 임의로 먹지 못하도록 통제하신 것입니다.
창2:9을 보시면 에덴동산에 각종나무 열매가 있는 중에(2:17), 이름 있는 나무 두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그러면 이 두 나무의 뜻이 무엇이냐 할 때 이것은 마치 뱀이 사단의 화신이 된 것처럼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영생하는 생활의 방도이고, 선악과는 거역하여 불순종함의 상징인 것입니다.
원시적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말씀만으로 들어서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계시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생명나무를 볼 때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명령을 기억하고 선악과를 볼 때는 ‘금지하신 법’을 기억하면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은 순종을 잘하였으니까 영생하고 선악과를 먹으면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벌 받는 것인데, 생명과를 먹어 보기도 전에 선악과를 먼저 먹고 타락한고로 생명과를 먹을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까지는 하나님이 구원의 복음적 약속은 계시하셨으나 ‘아담과 하와의 죄를 용서하고 영혼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나타내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아담과 하와도 구원적 은혜의 선택에 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고(롬5:14) “하와는 산 자의 어미”란 말씀이 증명하기 때문입니다(창3:20).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조상의 타락으로 불행하여진 상태를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총으로 회복되게 하시고 천국의 은혜까지 주신 것을 널리 자랑하셔야 할 것입니다.
7. 땀 흘리며 일하게 하심 (창1:28;시126:5~6)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에게 땀 흘리고 수고해야 먹고 살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은 타락 전에도 수고의 일거리를 주셨으니, 그것이 곧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2) 그 후에 인간이 타락하자 그 죄 값으로 수고를 가중시키신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과 의무적인 일, 그리고 죄 값으로 주신 고생하는 일로 구별할 수 있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의 매라도 감심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에(히11:9) 일단 모든 수고하는 일을 취미와 축복으로 여겨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매를 순히 맞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하라”(미6:9)고도 하였습니다.
3) 따라서 성도는 본래의 수고와 징계로 받는 고통을 가릴 것 없이 땀 흘리기를 좋아해야 할 것입니다. 시126:5~6에서도 “네 손이 수고 한대로 먹을 것이요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 하였고, 바울 사도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 하였으니 수고는 인간 생활에 종신토록 해야 할 삶의 방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하나님과 예수님은 죄가 없으셔도 일하셨고(요5:17), 예수님은 더욱 더 애쓰시며 일하여 피곤하고 시장하셨으며(막14:40;마26:43;요4:6) 바울사도도 수고하며 애쓰는 본을 보였습니다(살후3:8). 구약의 안식일 계명을 주실 때도 육일 동안은 힘써 일하고 쉴 때는 쉬라고 하였습니다(출20:8~9).
5) 수고의 대가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네가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시126:5)한 말씀이나 “공중의 새를 보라”(마6:26) 하신 것도 수고자에게 대가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출34:21). 우리사회에서 노는 사람이 없어야 하겠고, 일을 생활의 철학으로 여기도록 계몽되어야만 잘 사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6) 사람이 수고를 잘하면,
①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고,
② 잡념이 없어져 범죄의 유혹을 피할 수 있으며,
③ 근실하여 매사에 발전하게 되고,
④ 건강하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7)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1835~1919)는 자랄 때에 퍽 가난하였다고 합니다. 14세 때 방직공장의 실 감는 직공으로 들어갔으니 초공이라 일은 힘들고 보수는 적었습니다. 땀도 흐르고 짜증도 났겠지요. 그러나 거기서 실 감는 일등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 사람의 근실성을 인정한 후견인이 그를 우체국 배달부로 취직을 시켰는데 배달부 역시 일은 고되고 보수는 적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맡은 일에 충성하여 골목의 주소를 다 외우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후에 또 전신기수로 일을 하다가 큰 실업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을 언제나 신성한 일로 여겨서 귀천을 물론하고 근면 성실하기만 하면 매사에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 성도가 수고해야 될 일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① 생존을 위한 수고입니다. 이것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는다’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므로(창3:19) 수고를 안 하는 자가 가난해짐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일의 귀천을 가리지 말고 남이 잘 안하는 일에도 우선적으로 뛰어드는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② 사회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이웃이나 국가와의 관계에서 상호유익을 위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받은 달란트를 성실하게 활용하고 또 주인은 그 대가를 상당하게 주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마25:21).
③ 신령한 사명의 수고입니다. 하나님은 구속 사업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수고를 대신 져주시고 벗겨주신 분입니다(마11:28).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적 수고를 하셨으니 만큼(눅22:44;요4:34) 저희들은 자신의 성화됨과 이웃구원을 위한 전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마28:18~20;고후5:20).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른다”(잠10:16) 하였고, 밤잠을 다 자지 않는 자의 근면은 복 있는 일이며(잠31:15),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로 가서 배우라”(잠6:6)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수고를 부여하심은 인간을 복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성도는 감심으로 수고하고 귀천을 가리지 말며 종신하는 날까지 자기의 맡은 일을 다 하고 놓지 않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8. 흙으로 돌아가리라(창3:19;빌1:21)
하나님은 인류가 그 죄 값을 받는 중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선포하셨습니다.
1) 흙으로 돌아간다는 뜻은 육체가 죽어 썩는다는 뜻이요,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2) 죽음에는 영적 죽음(하나님과의 단절), 육적 죽음(본문), 법적 죽음(영원한 심판)의 세 가지 종류가 있지만 이 시간에는 육적 죽음과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3) 죽음에 대한 감정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프랑스 왕 루이 15세는 “누구든지 내 앞에서 죽음에 관한 말을 하지 말라”하였고, 반대로 현실을 비관하는 자들은 자살을 하기도 하며, 실존주의자 ‘하이덱거’는 “인생의 죽음이란 자연현상이기 때문에 마땅히 소망해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죽음을 자연현상으로 보는 현상은 큰 잘못입니다. 자연현상에는 고통이 동반하면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피곤할 때 자연히 잠을 자게 되는데 그것이 고통으로 임하지 않는 것처럼 죽음도 자연현상이라면 그래야 할 것입니다.
4) 인생의 죽음에는 고통과 두려움이 동반합니다. 고전15:55에서 사망을 “쏘는 것”이라 하였으니 어찌 자연스러운 일일 수가 있겠습니까?
5) 타락한 인생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히9:27) 필경 죽는다고 하셨지만(본문) 이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요 인간의 죄 값으로 주신 벌이며, 또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하였습니다(삼상2:6;행17:26).
6) 요14:1~3을 보시면 성도의 죽음을 “예수님께서 친히 주관하신다” 하였고, 빌1:21에서 바울 사도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부활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7) 성도는 죽음에 대하여 어떤 관심과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① 죽음을 죄 값으로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이 속죄와 부활과 영생의 복을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하며,
② 사람이 죽지 않으면, 현실을 벗어날 수 없고 현실이 포화상태가 되어 무질서해질 수밖에 없지만 죽으므로써 현실의 질서를 유지하신 것이며(전1:4),
③ 또 성도는 영원을 사는 과정에서 주님의 특별한 인도를 받는 것이므로 더 희망적이며,
④ 죄악에서의 도피, 내세에서의 안식, 주 하나님과의 실제적 대면 및 영원한 복락을 믿고 소망할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8) 가끔 보면 성도들이 죽을 병이 들었을 때 민망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민망함을 나타내지 않도록 미리 결심하십시다.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하였고, 회개하며 죽는 강도는 “우리의 당하는 일이 당연하다”하였으며, 무디 선생님은 “땅은 물러가고 하늘은 열린다”고 하였고, 웨슬레는 “가장 좋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여”하였고, “만세반석 열리니”(찬송가 188장)을 작곡한 ‘탑레디’는 “나는 나의 영혼 속에 벌써 천국을 맛본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고통일 수 없었겠지요. 고통이 죄 값일 진데 저희들은 죽음에 앞서 고통이 없도록 미리 회개하셔야 할 것입니다.
9) 계14:13에서”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복 있는 죽음과 죽음 이후의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필경 죽게 하셨고 예수님도 그런 죽음을 맛보셨으니 만큼(히2:9) 우리의 당면하는 죽음도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복으로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10) 죽음은 생명의 귀중함을 알게 하며, 죽음에 대한 감정이 우리에게 회개를 자아내고, 또 현실을 나그네처럼 살게 하시는 자극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 성도의 죽음은 부활의 씨를 심음이며(고전15:44) 하나님을 밝히 보러 가는 과정인즉(고전13:12), 성도가 거기에 소망을 걸지 않는다면 죽음을 자유의 대상으로 정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9. 아담과 하와의 구원받은 증거
성경에 아담과 하와가 구원을 받았다는 직접적인 표현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질문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1) 여기에 대하여 의아심을 갖는 이유는,
① 창3:15의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한다”하심은 메시야가 사단을 정복하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으로 이를 원시복음이라 하지만 이 말씀은 뱀에게 주신 선포이므로 아담이 직접 받은 말씀이 아니며,
② 창3:21에서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생명과의 나무를 지키게 하신 것은 아담의 자유 취득을 통제하신 것이며,
③ ‘아담을 구원하시니라’ 하신 직설적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① 창3:20에서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하와”로 지을 때 ‘산 자의 어미’란 뜻을 부여한 것은 하와가 산 자요, 산 자의 조상이란 뜻이므로 하와에게 구원을 주셨음이 분명한즉 아담도 구원 대상이 되었음이 사실이요,
② 창3:21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셨음”은 구원의 은총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니 이는 희생된 양의 가죽으로, 죄의 결과로 온, 수치를 가리워 주신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③ 롬5:14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하므로 아담이 메시야의 표상이 된 것은 그가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이요(마22:32).
④ 가장 확실한 증거는 성경에 선민의 계보와 비선민의 계보가 소개되어 있는 바 비선민의 계열은 창4:16~22에서 가인으로부터 라멕의 아들들까지 8대로 그치지만 선민의 계열은 창5장과 눅3:23~38에서 아담과 셋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야 계보는 구원받은 선민의 계보이기 때문입니다.
제 14 과 인간의 번성과 생활 (창 4:1~8)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최초의 인류번성과 생활(1~2절), 가인과 아벨의 제사(3~4절), 가인의 분함과 살인(5~8절)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최초의 인류 번성과 생활에 대하여(1~2절),
1) 인간의 번성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본능적 생리적 방법에 의하였습니다(1절).
2) “가인”이란 이름의 뜻은 ‘소유물’이고, “아벨”의 뜻은 ‘생기’라고 합니다. 최초부터 인간은 뜻을 가진 이름을 짓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3) 가인은 농사를, 아벨은 양을 쳤으니 농업은 인간의 근본 직업입니다. 이는 사람이 땅에서 나는 식물과 동물로 양식을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2.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3~4절),
1) 이 제사법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2) 가인은 자기의 농사지은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3) 가인과 그 제물을 아울러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이 첫 소산을 드리지 않음에 대한 정성에도 문제가 있거니와 그에게 죄의 소원이란 정신적 결함이 있었고, 또 피의 제사, 즉 중보자 메시야의 신앙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피를 상징하는 어린 양의 제물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신과 그 제물이 다 열납되지 않은 것입니다.
4) 아벨의 제사는 첫 새끼로 드린 정성과 메시야의 피를 상징하는 양의 희생물로 드렸기 때문에 중보자의 은혜를 믿음으로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5) 그 당시부터 선민과 비선민(즉 신자와 불신자)의 계열이 나타났습니다.
6) 그 당시에 제물을 어떻게 열납하셨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당사자들에게는 깨달을 만한 징조가 있었을 것이며 그 후시대에 노아는 말씀으로(창8:21), 아브라함은 불로 열납을 받았습니다(창15:17).
3. 가인의 분함과 살인에 대하여(5~8절)
1) 가인은 자기의 제사에 열납이 없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으니 분을 품는 것이나 그 분기가 얼굴에 나타남은 위험한 증상입니다.
2)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냐?”하심으로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하여 인간이 마땅치 않게 생각함은 잘못임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네가 잘하였으면 왜 낯을 들지 못하느냐? 네게는 죄의 소원(타락의 증상이 농후함)이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리듯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가 선을 행하지 않음은 네게 죄의 소원이 있기 때문인즉 죄짓는 일이 네 앞에 엎드려 굴복을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가인에게 미움과 시기, 욕심과 불평, 반항, 의심 등 악의가 넘쳐서 그가 마귀의 도구로 쓰임이 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3) 그 후 가인은 아벨에게 자기의 불행한 형편을 고하고 동생을 미워하여 쳐 죽임으로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8절).
4)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이유는 불행을 느끼는 자가 행복을 누리는 자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죽였으니 이런 형식의 범죄는 지금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5) 가인은 최초의 비택자(불신자)의 원조로서 그 후손들의 불행함을 16절 이하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제 15 과 가인을 문책하여 징계하심 (창 4:9~15) 목록으로
위 본문은 하나님이 가인의 범죄를 지켜보셨으므로 가인을 문책하시고 그에게 유리하도록 저주를 내리셨으나 그 생명은 다른 이로부터 죽임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1) 이 말씀은 창3:9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신 말씀의 뜻과 같습니다.
2) 그러나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합니다”하며 거짓말로 회피하였고, 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면서 형제간의 상부상조에 대한 의무조차 모르는 체 하였습니다. ‘지킨다’는 뜻은 ‘목자 노릇을 한다’는 뜻으로 ‘아벨은 양의 목자이지만 나는 동생의 목자가 아니라’는 뜻도 있다고 해석한 분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 가인은 동생의 목자직을 자신의 농사직에 비하여 멸시한 어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네 아우’는 그의 이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하심은 네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이웃사랑의 의무를 부여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깊은 산으로 곰 사냥을 나갔다가 곰에게 총을 겨냥하고 쏘려 하는데 그 곰이 사람같이 보여져서 다시 살피니 바로 자기 동생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자신의 형제로 볼지언정 곰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4) “아우의 피소리가… 호소한다” 또 “땅이… 피를 받았다” 하신 말씀은 ‘억울한 자의 당하는 정황이 그대로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땅으로, 억울한 사건을 피로 비유한 것은 가인이 눈으로 본 상태를 하나님이 보신 것으로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하나님은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게 저주를 내리셨으니(11~12절),
1)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네게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에게는 지상의 엉겅퀴가 날 것을 말씀하셨으나 가인의 경우에는 흙 자체의 효력이 감소될 것을 말씀하심으로 농사를 짓기에 어렵게 하신 것입니다.
2) 또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 하심은 땅이 효력을 주지 않으므로 그가 일정한 지역에 정착을 못하고 마치 땅을 피하는 자처럼 유리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 것이니,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인륜을 범하면 사람과 멀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3. 저주를 받은 가인은 그 죄벌로 인하여 고민을 하였고, 그는 자신의 고민을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13~14절).
1) “지면에서 쫓아 내셨다”는 뜻은 그 지역에서 농사가 되지 아니하므로 살 수 없게 하셨음이요.
2)”주의 낯을 뵈옵지 못 할 것이라”는 뜻은 가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가 그 지역에서만 나타나 주시는 줄로 알고 한 말이지만 그의 예측대로 하나님은 다시 가인과 대면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3) 그는 땅에서 피하는 자가 되고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을 말하였고 또 만나는 자가 자기를 죽일까 염려하였습니다.
① 그가 누구에게 피하며 누가 그를 죽일 것인가? 그 때는 아담과 하와와 자기뿐이 아니던가? 그러나 성경이 아담의 두 아들만을 거론하셨다고 하여 다른 자녀들을 탄생시키지 않았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다만 가인과 아벨과 셋이 하나님의 계시기구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 이름만 거론된 것입니다.
② 가인은 자기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다른 아우들의 눈을 피하여 살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그 형제들이 자기를 살인자라 하여 죽일 수도 있을 것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너를 죽이는 자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자가 또 있다면 벌을 7배나 받게 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심판권을 침해하는 죄를 크게 여겨 중벌을 내리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 하나님은 가인에게 죽임을 면케 하는 표를 주셨으니 이 표가 어떤 것일까요? 이 표는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증표였습니다. 노아에게 다시는 홍수멸망을 아니하시겠다는 약속으로 무지개 증표를 보이신 일이 있었습니다(창9:11~15). 가인에게도 어떤 표를 주심으로 그를 해롭게 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계9:4).
제 16 과 가인의 후손과 그 생활 (창 4:16~24)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가인의 후손과 그 생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1.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난 것은 하나님을 등진 불신앙의 생활이요(16절), 그 생활을 에덴동편 놋 땅에서 하였으니 이곳은 에덴의 동쪽 거친 땅(놋: 유리한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가인도 하나님이 베푸신 생육번성의 복을 받아 ‘에녹’을 낳았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에녹성을 건립하였습니다(17절). 우리는 성으로 보호받기 전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시127:1). 가인은 하나님대신 사람을 가까이 하는 자이므로 성을 쌓고 집단주의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창11:4).
3. 또 가인의 아들 에녹은 이랏을, 이랏은 므후야엘을,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으므로 5대가 번성하였습니다.
4. 가인의 5대손(아담의 6대손) 라멕은,
1) 두 아내를 취하므로 가정윤리와 질서를 파괴하였으니(창2:24; 말2:15) 이는 인간의 색욕 중심의 생활을 자신의 정욕 따라 행한 것이며(롬1:26),
2) 첫 여인 ‘아다’에게서 낳은 ‘야발’은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는데 이 사실을 선한 의미로 해석한다면 산업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당시는 하나님이 채소를 먹게 하셨고(창3:18) 고기를 먹는 문제는 창9:3(노아 홍수 이후)에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의 육축 사육은 물질주의에 입각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그의 동생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므로 이는 향락주의의 조상이 됨이며,
4) ‘라멕’의 다음 여인 ‘씰라’에게서 난 ‘두발가인’은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으므로 그 기계로 사냥을 하거나, 폭력, 또는 자기방비 등의 수단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므로 이는 폭력과 살생과 전쟁주의자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멕은 두발가인 다음에 딸 ‘나아마’도 낳았습니다.
5) 가인은 살인죄를 범한 후 성을 쌓고 모여 삶으로 스스로를 방비하는 생활을 꾀하였고, 그의 6대손 ‘라멕’은 살인과 가정윤리의 파괴를 일삼았으며 그의 아들들로부터 물질주의, 향략주의, 침략주의가 발생하였습니다.
6) 라멕과 같은 아담의 7대 손인 선민계열의 ‘에녹’은 그 시절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생활을 하였습니다(창5:23).
4. 또 라멕은 살인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받은 창상”이란 라멕이 그의 아들 두발가인이 만든 날카로운 기계로 인하여 타인으로부터 약간의 창상을 입은 것을 이유로 소년을 죽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가인의 5대 손이 또 살인을 하였다는 뜻이며 이로 인한 보복을 염려하는 두 아내에게 오히려 큰소리치며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살인을 하였어도 괜찮다 살인자 5대 조부(가인)도 다른 사람이 그를 해하면 7배의 벌을 준다 하셨으니까 만일 나를 건드리는 자는 그보다 더 큰 77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으로 노래하며 큰소리친 것입니다. 이것은 라멕의 여전한 완악이요, 5대만에 살인죄가 세습되었고 그는 무신론주의를 전개시킨 원조라 할 것입니다. 불신자는 하나님과 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창20:11).
제 17 과 아벨 대신 셋을 주심 (창 4:25~26) 목록으로
1.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이란 아들을 또 낳게 하셨습니다. ‘셋’은 ‘대신 주셨다’는 뜻입니다.
2. 셋은 ‘에노스’를 낳았는데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중단되었다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창12:7~8과 13:4은 그 의미를 밝혀 줍니다.
3. 셋은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의 후예이므로 마땅히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할 것입니다.
4. 가인은 살인과 같은 인간의 수단으로 자기의 욕구를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신령한 복은 더욱 그러하며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악한 자의 계보로 말미암지 않음을 알게 하여 주십니다.
설교보충 4. 가인의 제사와 완악 (창 4:3~7) 목록으로
1. 가인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이유(창4:3~7)
1) 그 마음에 선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받으시며(마5:8; 22:37), 또 마음을 감찰하십니다(롬8:27). 가인은 자기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을 때 분한 표정을 나타냈습니다(4:5).
2) 선을 행함도 없었습니다. 7절 말씀에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시고 그에게 선한 경향이 없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회개하는 자세 없이 예배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제물과 함께 제사에 정성이 없었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고 하였지만 가인의 제물은 그런 말씀이 없었습니다. 예배자의 마음과 예물은 미리 준비되어야만 합니다(마22:4).
4) 구속의 언약을 신앙하는 표시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벨이 양의 첫 새끼(어린양이신 예수님)로 제사한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히11:4에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하셨고 히9:22에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곡식은 소제물로서의 예물은 될 수 있으나(레2:4) 메시야의 희생을 나타내는 구속적 의미가 없으므로 중보자의 은혜를 받음에 상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헛된 제사와 제물을 드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사1:13). 신약시대에는 신령한 예배와 헌신으로 족하며 우리의 예배는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통하여만 상달됩니다(히4:14).
2. 가인의 완악을 경계하자.
1) 그는 마음이 선하지 못하였습니다. 분한 마음을 갖고 안색까지 변하였으니까요(5절).
2) 그는 선을 행함이 없었습니다(7절). 하나님이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을 분히 여겼음은 곧 하나님을 마땅치 않게 여긴 것입니다.
3)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이웃사랑에 대한 의무를 느끼지 못하였으니 이는 제물의 응답이 없는 것과 아우를 지킬 의무가 없다(9절)고 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4) 그는 자기를 살필 줄 모르는 자였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였어도 자기의 미움, 시기 ,원망, 불평, 살인죄를 뉘우칠 줄 몰랐습니다(9절).
5) 그는 거짓말을 하였으니 아우를 죽이고도 하나님이 아벨을 찾으실 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고 대답대신 회피만 하였습니다.
6) 그는 하나님의 징벌이 내려졌을 때 그 죄벌이 심히 중하다고 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였습니다(13절).
회개하는 자는 자기의 죄를 크게 보아야 합니다. 사6:5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 하였고, 욘1:12에서 요나는 “이 풍랑이 나 때문이니 나를 바다에 던지라”하였고, 눅23:41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므로 당연하다”고 하였습니다.
7) 그는 하나님을 다시 만날 것을 체념하면서 ‘주께서 나를 쫓아내시기 때문이라’(14절)하였으니 신앙의 체념까지 하나님의 책임으로 미루었으며, 8)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만 중하게 여겼으니 이것이 바로 현실주의자들이 누리려는 분복입니다(15절).
제 18 과 아담 자손의 계보 (창 5:1~32) 목록으로
1. 위 본문에는 1절 말씀대로 ‘아담 자손의 계보’로서 선민의 계열 11대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이 말씀을 주신 목적은,
1) 성경이 역사적 근거에 의하였음과,
2)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과 사역이 그 선민의 계열을 따라 성취되셨음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 성경에 족보가 기록되었다 하여 인류의 대수와 연대가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이후 아담을 제외한 가인으로부터의 비선민 계열은 창4:16~22에서 8대 라멕의 자손들까지로 끝난 후 다시 거론하시지 않았으니 이는 비선민 계열에서 흠모할 만한 사람이 나온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민계열은 본문에서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가 기록되었고, 또 창세기 10장에는 노아의 후손이, 창11:10 ~26에는 노아의 아들 셈부터 아브라함까지 20대가 기록되었고, 마1:1~16에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계보가 기록되므로 선민의 계열을 나타낸 것은 사실이나 유다 8대왕 여호람 이후에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를 건너 뛴 사례가 있고(마1:8), 또 마지막 왕조인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도 생략된 것을 볼 수 있으며(마1:11), 마1:에서의 계보는 62대이지만(14대×3+20) 눅3:23~38 사이의 전체 대수는 76대로 나타나는바 이는 저자의 연구 자료에 따라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메시야 계열의 맥을 이음에 있어서 계통이 연결된 것은 확실하지만 그 대수와 연대에 대한 것을 확실하게 나타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본문에 나타난 대로 열거하면, 1대 아담(130세에 셋) 930세, 2대 셋(105세에 에노스) 912세, 3대 에노스(90세에 게난) 905세, 4대 게난(70세에 마할랄렐) 910세, 5대 마할랄렐(65세에 야렛) 895세, 6대 야렛(162세에 에녹) 962세, 7대 에녹(65세에 므두셀라) 365세, 8대 므두셀라(187세에 라멕) 969세, 9대 라멕(182세에 노아) 777세, 10대 노아(500세 이후에 셈, 함, 야벳) 950세(창9:29)를 향수함으로 그 평균수명은 857세 6개월이 됩니다.
5. 여기에서 특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1) 아담의 5대 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같은 5대손 라멕은 타락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은 에녹의 경건한 생활을 흠모하지 않았습니다.
2) 이 말씀은 선민의 계보이며, 아담이 그 조상이기 때문에 아담이 구원받은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눅3:38).
3) 하나님이 그 시대에는 인종의 번성을 위하여 장수의 복을 주셨음이요. 또 하나님은 사람의 수명의 장단을 임의로 주관하심을 알 수 있고,
4) 아담의 7대손 에녹은 그 세대인 중 가장 적은 나이를(365세) 살았지만 그의 아들 므두셀라는 최고령으로 969세를 살았으며,
5) 아담은 930세를 살면서 9대손 라멕을 보고도 56년을 더 살았으며,
6) 노아는 500세까지 자녀를 낳지 않았다가 500세 후에야 낳았으니 그 이유는
① 500세 전에 낳는 아이가 경건치 못하면 홍수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면에서 은혜를 주심인 듯하고,
② 노아 600세에 홍수가 난 것은 그때가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죽은 지 5년 후요, 또 조부인 최고 장수자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고 별세한 해였습니다. 따라서 노아의 경건한 조상들이 다 세상 떠난 다음에 노아의 가족만 살게 하시고 다른 이들은 다 홍수로 죽게 하신 것입니다.
5.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로 969세요, 그 후 인간의 나이는 점차 짧아져서 10대 노아까지는 950세까지 살았으나 20대 아브라함은 175세로 줄었습니다. 자녀생산도 마할랄렐이 65세에 아들을 낳은 것이 가장 빠른 것이었고 노아는 502세에(500세 후) 셈을 낳았으니 이렇게 생산시기와 수명이 100살 이상이었다가 20대 이후부터는 생산기간과 수명이 단축되었습니다. 원시시대인은 왜 오래 살았을까요? 연구해 볼일입니다.
6. 위 본문 중 계보 외에 설명을 드려야 할 말씀은,
1) 2절의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음에 대하여 그 형상이란 뜻은 창1:26에서 설명 드렸고 아담이란 곧 사람의 뜻이며(창1:26; 2:7, 20) 1남 1녀로 가정을 경건하게 출발시키신 사실에서 교훈을 받으셔야 합니다.
2) 3절에서”아담이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셋)을 낳았다”하신 것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같다는 뜻이 아니고 거의 닮은 아들을 낳았다는 뜻입니다. 이 아들을 130세에 낳았으니까 아무리 닮았어도 연령의 차이를 없애지는 못할 것입니다.
3) 24절에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음”은 영적 신앙의 교제를 뜻하고 또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않음”은 육체의 죽음을 받지 않은 상태로 변화되어 들려 올라간 사실로서 이는 엘리야의 승천(왕하2:11), 예수님의 변화와 승천(마17:2; 행1:9), 그리고 성도의 휴거를 예언하신(살전4:17) 사실로서 이를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4) 29절에서 ‘라멕’은 그 아들 노아를 낳았을 때 그 땅에 저주가 있을 것과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후손들)을 구원받게 함으로 안위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라멕의 아들인 노아와 그 후손들은 수고롭게 일하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7. 10대 계보인들의 이름의 특징을 살펴보면,
1) 아담은 사람이란 뜻이요.
2) 셋은 지정된 자란 뜻으로 죽은 아벨 대신 아담을 많이 닮은 자를 주셨음이요(5:3).
3) 에노스는 약하다는 뜻으로 그는 약함을 앎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4:26),
4) 게난은 대장장이란 뜻으로 농기구 제작자였을 것이요.
5) 마할랄렐은 하나님께 찬송한다는 뜻이요.
6) 야렛은 내려간다는 뜻인즉 거주지역의 이동을 꿈꾼 듯하고,
7) 에녹은 시작하는 자란 뜻으로 300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8) 므두셀라는 무기의 사람이란 뜻으로 최장수 969세를 살았고,
9) 라멕은 정복자란 뜻으로 승리적 생활을 한 듯하고,
10) 노아는 안위한다는 뜻으로 라멕이 노아를 낳자 노아 시대에 멸망과 구원이 있을 것을 예언하면서 노아 당시의 구원을 알고 그런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설교보충 5.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 (창 5:21~24, 6:9) 목록으로
1.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창5:21~24; 6:9)
위 본문 말씀에서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에녹은 65세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승천하였고, 노아 역시 600세 때에 온 인류의 멸망 중에서 구원을 받았으니 그 동행의 은혜가 얼마나 귀합니까?
1) 인생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미는 신앙의 영적 교제를 의미함이고 여기의 영적 교제란 하나님이 영으로 존재하신 중 말씀이나 다른 모양으로 자기를 계시하셨을 것이므로 그 계시된 하나님을 사모하고 순종하며 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인생은 나그네와 같고(벧전1:17), 또 행인 같다고도 하였으며(벧전2:11), 또 연약하여 혼자 살 수 없어 인간들끼리도 상부상조가 필요하다고 하였으니(전4:9~12), 하나님과의 동행은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부부동행, 가족동행, 친구동행, 이웃동행, 사회적 동행, 하나님과의 동행이 얼마나 복되고 든든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그 선민과의 생활에 동행을 하셨으니 곧 야곱이 하란을 갈 때도(창28:15), 또 그 가족이 애굽을 갈 때도(창46:4) 동행하셨고, 예수님도 전도자들과 동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마28:20).
3)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① 우선 동행자는 여행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정욕을 멀리하고 또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므로 자기를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갈5:24; 히12:1; 고전15:31).
② 행선지의 목표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으로 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성도가 하나님 가시는 방향과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지는 천국이며 자신의 영광이고 또 다니시는 길은 의로운 길이며 공평한 길입니다(잠8:20). 하나님과의 동행은 나의 뜻을 펴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복종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과 의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중생한 성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범죄하고 회개치 않는 상태를 유지할 때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집니다(욥22:21). 가족도 의합치 못하여 부모 자식이 함께 못사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암3:3에서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서야 어찌 동행하겠느냐?”하심으로 하나님과의 화목과 의합이 필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서로 대립되고 싸우는 상황에서의 동행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④ 주님의 발걸음에 우리의 보조를 맞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동행은 앞서 가는 것도 아니고 뒤따라가는 것도 아니며 나란히 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의 보조에 맞추라 하지 마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보조에 발을 꼭 맞추어, 주님이 달음질하시면 나도 뛰고, 주님이 정지하시면 나도 쉬고, 나는 오직 주님의 말씀에 앞서 가도 안 되며, 못 따라가서도 안 되고, 꼭 나란히 일치해야 된다는 뜻에서, 오로지 성경적인 생활로 보조를 맞추어야만 되며, 성경보다 잘해도 안 되고 못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⑤ 하나님과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오랜 세월을 같이 가면서 말하지 않는다면 동행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나와 함께 의논하자”(사1:18),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니”(눅2:46,계1:3,신13:14)라고 하였습니다.
4) 동행의 결과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게 되고 또 주님 가시는 곳까지 함께 가게 되는 것입니다.
① 계3:20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의 생활이 주님과 더불어 먹는다”고 하셨는데 이는 만유의 주되신 주님이 자기의 모든 것으로 나누어주신다는 뜻입니다.
② 또 파리가 미국 가는 사람의 몸에 붙으면 미국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예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영광의 길을 가게 됩니다. 강도 노릇하던 사람도 죽을 때 예수님과 동행하여 낙원에 갔고(눅23:43), 모든 성도가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따라 부활하게 되며(고전15:20),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도 입게 되고(고전15:40), 또 공중으로 휴거될 것입니다(살전4:17).
③ 하나님과 동행만 하면 길 잃을 염려도 없고 위험스런 일도 없으며 영원한 생명력이 동반하여 결코 실족함이 없을 것입니다(시23:1).
5) 마지막에 말씀드릴 문제는 동행의 확고성입니다.
12세의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을 지키고 돌아오던 그 부모님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동행중에 계신 줄로 생각하고 삼일 길을 걷다가 나중에 찾아보니 동행하지 않았던 것처럼(눅2:14). 저희들도 주님을 모시지 않았으면서 모신 듯이 착각하지 않는지요? 이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자신과 주님과의 연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연합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든든히 붙잡혀 사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결혼하면 한 집 식구로 살지 않습니까. 우리는 천지의 주재자시요.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에 복종 못할 사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교회 안에는 하나님을 자기 표준에 따라 믿어보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 같고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많지 않아 보이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한 배를 탄 사람처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에녹이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나 노아가 120년간 방주 짓는 일에 복종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그 말씀을 믿고 따르고 복종하며 기도하며 말씀중심에서 전후좌우로 치우치거나 간격을 주지 말고 하나님 뜻에 일치하게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 19 과 최초인류의 범죄와 하나님의 심판계획 (창 6:1~8)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은 ‘최초 인류의 범죄 상황(1절~6절)과 하나님의 심판계획(7~8절)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 최초인류의 범죄 상황에 대하여,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란 노아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생의 계보 11대까지 살고 있을 때이며 노아의 500세를 표준한다면 아담창조 이후 1556년이며 노아까지 10대 인종이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2) 그 때에 “딸들이 출생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남자의 출생만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3) 그 당시 인류의 범죄의 내용은 선민의 계열을 따른 하나님의 아들들이 비선민계열을 뜻하는 사람의 딸들을 임의로 취한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성도가 무분별한 혼인을 한 것입니다. 셋의 계열이라 하여 그들이 다 영적으로 선택받은 백성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그 계열에서 메시야의 맥을 잇게 하시려고 셋의 후손을 선민으로 구별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셋의 후손들은 경건한 생활을 하여야 할 의무를 갖고 있었습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한 혼인을 하여 범죄를 감행하였으니 그 범죄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선민의 아들들이 비선민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한 것이요, 안목의 정욕에 이끌린 것입니다(요일2:16).
②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하였으니 이는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와 자율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도외시하며 자기욕구대로 사는 것을 뜻하고,
③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음’은 1남 1녀로 제한을 두지 않는 다처주의를 뜻하는 것입니다.
5) 이런 행위가 심판을 가할 만큼 큰 죄가 되는 이유는,
① 그들이 절대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도 큰 죄일 뿐 아니라,
② 성속(聖俗)에 구별을 두지 않는 혼잡을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고후6:14~18). 하나님은 성도가 은혜를 정욕적으로 사용하거나… 세상과 짝하여 벗이 될 때는 이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요일2:15~16; 약4:3~4).
③ 따라서 절대자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과 구별되게 살아야 할 백성이 혼잡하게 사는 것은 작은 죄가 아닙니다.
6) 하나님은 이런 사실을 감찰하셨습니다.
① 5절 말씀에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됨을 보셨다”하셨고,
② 또 그들의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악하여 장래성이 없는 것도 살피셨으며,
③ 거기에 “네피림”이란 거인들이 범죄의 결과로 출생하여 상당하게 있었으니 그들이 당시에는 사람들로부터 용사와 유명한 존재로 부각되었겠지만 그들 육체의 장대함과 계획의 악함을 종합해 볼 때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점까지 예상하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7) 선민 된 자들이 경건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나님은 선민의 신앙성과 도덕성을 감찰하셨고, 또 비선민들에게는 신앙성을 요구하시지는 않으나 육체적 생활의 도덕성을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체를 가진 자들로서 부패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성령님의 간섭과 통제를 받지 않는 한 범죄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8) 여기에서 하나님은 선민과 비선민의 생활을 감찰하시고 나타나는 행위는 물론 마음의 부패성과 계획까지 감찰하시며 또 그 중에서도 경건 생활을 애쓰는 자(노아)를 감찰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을 계획하셨습니까?
1) 먼저 하나님은 그 인간들의 패역함을 보셨을 때 한탄하시고 근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실 만큼 미련하거나 한탄하실 만큼 약한 분은 아니시지요. “그는 뜻이 일정하시며 후회하는 분이 아니시라”고 하였습니다(민23:19; 욥23:13).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어떤 분은 “한탄(카라)과 후회(나캄)란 번역용어가 불완전하였다”고도 합니다만 그런 말씀이 창45:5과 삼상15:11에도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인간을 상대로 깨닫게 하시려는 인간적 표현의 일면을 나타내신 것뿐이라’고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모든 패역한 자들과 거기에 부속된 동물들까지 물로 쓸어버릴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삼상2:6).
3) 그러나 유예기간 없이 가혹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요, 충분한 깨달음의 기회를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셔서(합3:2) 120년의 여유를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120년은 결코 짧지 않은 기회입니다.
4)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① 노아가 은혜를 받은 내용은 그의 여덟 식구가 모든 인류의 멸절 가운데서 살아남는 은혜입니다(벧전3:20).
② 이것을 은혜라고 하신 것은 노아의 의로 살아남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복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생이 의롭지 못할 것은 하나님도 아십니다(롬3:20). 따라서 노아의 구원은 그의 경건성과 성실성이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 인정을 받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에서 제외시켜 주신 것입니다.
③ 노아의 경건 생활이 인정받았을 때 그의 가족과 거기에 부종될 동물의 일부가 같이 생명을 보존 받았습니다. 그리고 물심판과 상관없는 어족들은 심판에서 제외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① 하나님은 그 선민들에게 순결을 요구하시며 늘 감찰하시고 또 비선민들의 도덕성도 거저 방치하시지 않으심을 알 수 있고,
② 범죄의 상황과 내적 요소와 미래의 관영성까지 내다보시며,
③ 선악의 분별과 범죄의 통제와 공의의 만족을 위하여 심판을 하시는 분이시며,
④ 노아처럼 인정할 만한 자를 인정하여 긍휼을 베푸시고,
⑤ 악인 따라 죽는 동물과 의인 따라 사는 동물도 분별하셨으며,
⑥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⑦ 저희들은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최대한의 경건과 거룩한 생활을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제 20 과 노아의 사적과 방주제조 명령 (창 6:9~16)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을 분석하면, 9절에서 노아의 사적이 이렇다는 전제 아래, 9절에서 노아의 경건한 생활과, 10절에서 세 아들의 출생과, 11~13절에서 홍수 심판의 원인과, 마지막 14~16절에서 방주를 제조하라는 명령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1. 노아의 사적을 말씀하신 내용에서,
1)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① 의인이란 옳게 사는 사람이란 뜻입니다(겔18:5-9).
② 완전한 자란 그의 생활에 흠 잡힐 만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③ 그러면 이 의인이란 뜻과 완전하다는 뜻을 어느 정도로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면, 본래 인간은 의인이 없고(롬3:10) 의로워질 만한 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고전3:11; 렘13:23). 그러니까 노아가 의롭고 완전하다는 것은 완전 순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표준에 도달한 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정을 받은 사람이 구약에 ‘욥’도 있었고(욥1:1),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있었습니다(마1:19). 요즈음으로 말하면 성자의 칭호를 받을 만큼 그 인격과 생활이 흠잡을 데 없는 모범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생활은 창5:24을 근거로 이미 말씀드렸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합니다만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① 말씀 탐구와,
② 기도를 힘쓰면서,
③ 성경대로 살고,
④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만 따라 살아드리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명령대로 복종만 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저희들의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고, 어느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은 것이냐를 점검하면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 저희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로서,
① 정신을 항상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 뜻에 복종하는 마음에 두고,
②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일삼아 행하며…,
③ 그렇다고 하여 생활을 위한 직업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는 일을 먼저 행하면서 그 다음의 시간과 생활을 직업에 힘쓰셔야 합니다.
④ 또 하나님은 죄와 불의의 길에 계시지 않으므로 항상 정의로운 일만을 택하여 근면하게 살고(잠8:20),
⑤ 또 하나님이 성도 각인에게 주신, 신령한 사명과 일반적 사명을 성실하게 이행하신다면 이는 하나님과의 동행함이 분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범사에 거리낌 없는 생활로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2. 노아가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1) 은혜를 받은 노아가 세 아들을 낳은 것은 이상할 일이 없으나 500세 후에 낳았으니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또 세 아들을 차례로 낳았을 것입니다.
2) 노아는 500세 이후에 아들 낳기를 시작하여 세 아들을 가졌으니 노아가 500년 가까이 자녀생산을 못하다가 낳은 것을 보면(5:32), 하나님이 인간의 출생을 주관하시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홍수심판을 앞두고 500세 전에 출생한 자녀의 타락을 예상한다면 오히려 화를 없애주신 복일 수도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시조를 셈과 함과 야벳으로 새롭게 정하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11~13절은 홍수심판의 원인을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이 패역한 인간들을 멸망시키시고 의로운 백성만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하나님은 패역한 자들의 악을 거론하시면서 “온 땅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였고, 강포가 충만한 것을 보셨다”하셨고, 또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하였다”(6:3) 하심으로(육체를 가진 인간을 혈육 있는 자로 표현하심) 강포의 충만이 이를 때에(11절) 심판을 계획하셨으며,
3) 또 의인 노아의 의로운 생활도 상세히 말씀하시고 구원의 방도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방도를 베푸실 때 노아의 가족만 구원하시려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딤전2:4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벧전3:20에서 “노아 시대에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며 기다려 주셨지만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겨우 여덟 명만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노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믿음과 순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방주 지은 것을 명령하신 말씀입니다(14~16절).
1)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때는 노아 500세 때인 것 같으나 노아의 나이 480세 때였으니 그 이유는 방주를 제조하도록 명령하신 지 120년 후에 홍수가 났을 때 노아의 나이가 600세였기 때문입니다(6:3; 7:11).
2) 그러니까 하나님은 약 20년 후에 노아에게 자녀가 생산될 것과 그들이 장성하여 아내를 취한 다음에 홍수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3) 또 하나님은 긍휼이 무한하셔서 악인들을 속히 멸망시키시지 않으시고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고, 또 노아에게는 방주를 예비하는 기간을 120년간 주시면서 기다려 주신 것입니다.
4) 방주 설계는 잣나무 3층 배였고, 바닥 안팎은 역청으로 발랐으며, 문은 옆으로, 창문은 옆위 쪽으로 내게 하셨으며, 안에는 여러 칸을 막았고 넓이는 약 1000평 넓이의 3층이 되는 것입니다. 장, 광, 고가 300규빗, 50규빗, 30규빗인데 1규빗은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기장이므로 약 1자 6치쯤으로 계산하여 비슷한 건평을 산출할 수 있습니다(1규빗=1.5척, 450척×75척=33750÷36=937평=단층 평면 넓이임).
5. 구체적인 교훈으로
1) 이 방주는 육신구원의 방편도 되면서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영적 구원사업의 모형적 계시가 되는 것이요, 신약의 교회를 예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2) 이 방주는?테바’라는 말로 방향을 잡고 나가는 배가 아닌 ‘떠있는 배’를 의미하므로 움직이는 것과 방향은 하나님이 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3) 이 배의 재료를 잣나무로 쓴 것은 그 나무가 그 지역에 있고 또 이 나무가 수지목이기 때문에 오래도록 잘 견디는 나무요.
4) 역청이란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기름 찌꺼기(아스팔트, 타마구 같은 것)로 배 밑바닥에 발라서 물이 새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배는 물이 새면 안 됩니다. 우리 신앙도 세속의 물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속의 틈을 막고 세상을 필요할 만큼만 등에 대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베드로 사도처럼 인생을 나그네로 알고 적당하게 관심을 가지며 세속의 유혹을 삼가면서 영적 신앙에 늘 경성하셔야 할 것입니다(벧전2:11; 히11:13).
5) 간을 막고 삼층으로 만든 것은 동물들의 종류에 따라 사육하기 위함이요, 크고 무거운 동물은 밑으로 가볍고 작은 동물은 위로 적재하였을 것입니다.
6) 문을 옆으로 내고 창은 위쪽으로 내게 하였으니 이 문은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는 구원의 관문으로 예수님을 상징하고(요10:9), 창은 빛을 전달하여 밝히는 것이므로 성도의 영적 각성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양 이상의 동물이 290종이요, 쥐 이상의 동물이 757종이요, 쥐 이하의 동물이 1,359종이요 조류가 약10,000종이요, 그 이하의 하등동물들 89,834종까지 합하면 102,240종인데 이것이 어떻게 3,000평 방주 안에 다 수용이 되느냐고 의문을 품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만 저는 충분하게 수용되었으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①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며,
② 심판과 구원을 미리 예고하여 준비하게 하시고,
③ 약속대로 이루시며,
④ 또 이 사실을 신약적 구원계시와 심판의 모형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⑤ 그 하나님을 늘 두려워하면서 회개 각성하시고,
⑥ 노아처럼 무흠하게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1 과 홍수심판에서 구원받을 자 (창 6:17~22)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①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방법으로 홍수를 일으키실 것과, ② 구원의 언약을 세우심과, ③ 보존 받을 생물들을 선별하심과, ④ 노아의 순종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방주 제조를 명령하신 다음에 처음으로 홍수를 일으켜 모든 기식 있는 육체, 즉 호흡하는 생물들을 멸절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노아로 하여금 방주 지을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2. 그리고 구원의 대상은 “노아의 가족과 모든 생물의 암수 한 쌍씩으로 이들이 방주 안에 들어가므로 생명을 보존케 하신다” 하시고 노아에게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1) 하나님은 언약(약속)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할 수 없으며 언약의 대상은 노아와 그 아내와 세 아들들과 자부들이었습니다. 언약을 주실 당시는 방주제조를 명령하신 때로 노아가 세 아들을 낳기 전이었지만 하나님은 홍수심판 때에 그의 아들들과 자부들이 있게 될 것을 아시고 약속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심과 함께 모든 생물의 암수 한 쌍씩도 하나님의 선별에 의하여 보존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생물은 어족류를 제외한 모든 것이었고 이것을 선별하신 방법은 하나님이 그 동물들을 방주 앞으로 나오도록 하신 것입니다(20절).
3. 그리고 그들을 보존하시는 방법으로,
1) 식물들을 미리 저축하였다가 방주 안에 있는 동안 먹게 하셨고,
2)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로 들어가야 함은 물론 자기 앞으로 나오는 모든 생물들을 방주로 이끌어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오게 한 생물들을 방주로 이끌어 드리는 것은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는 사람의 임무요(1:28), 하나님은 배후에서 그 생물들을 양육해 주시는 것입니다.
4.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20년을 한하고 방주를 명령대로 지었으니 여기에 동원된 인력은 노아의 4부자 외에 다른 사람들도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120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방주를 짓는 노아와 그것을 협력하였으나 막상 들어가지 않으므로 멸망된 자들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약속대로 믿고 순종하여 구원받은 사람들(노아의 가족)과 의심하고 비난하면서 도외시하다가 멸망 받은 자들과 방주를 제조할 때 생활의 수단으로 협력하였지만 방주의 목적에 대하여는 외면하므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상상할 때 오늘날 인간들도 믿어 구원받는 자와 믿지 않는 자와 믿는 것 같으나 믿는 목적이 다른데 있는 사람들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으니 스스로 어느 편에 속하여 있는가를 판단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2 과 홍수심판을 실현하심 (창 7:1~24) 목록으로
위 본문에서는 그 동안 예고하신 홍수심판을 실제로 이행하신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심판의 방법은 홍수로 인한 물심판이요, 구원과 멸망이 동시에 실현되었으니 노아의 가족과 거기에 부종한 모든 생물들은 방주로 구원을 받고 그 이외의 기식이 있는 동물들은 다 쓸어버림을 당하였습니다.
1. 하나님은 먼저 구원의 대상들을 위하여 예고와 명령을 주셨습니다(1~9절)
1) 예고는 7일 후에 40주야간 비를 내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신다는 것이요,
2) 명령은,
① 노아의 가족으로 하여금?방주로 들어가라’하신 것과,
② 정결한 짐승을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들도 암수 둘씩 방주에 들어가게 함으로 그 종류들을 보존케 하신 것입니다.
③ 노아는 그대로 시행하였으며 그때는 노아 600세 때였습니다.
3) 여기에서 하나님은 미리 예고하시고 의인을 보존하시며, 의인과 함께 부종된 동물들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절).
2. 7일 후인 2월 17일부터 홍수가 땅에 덮이기 시작하였습니다(10~16절).
1) 이는 방주에 들어가서 기다린 지 7일 만에 비가 온 것이고,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간 비가 온 것입니다.
① 깊음의 샘이란 깊은 샘들이 충만한 물을 토한 것을 의미하며,
② 하늘의 창은 공중에서 장대비를 쏟는 시적 표현이요,
③ 30분만 장대비가 와도 홍수가 나는데 40주야를 아래(깊은 샘) 위로(비) 물을 쏟았으니 성경대로 가히 짐작할 일입니다.
3) 그러나 이것이 시작되던 그날에는 노아의 여덟 식구와 하나님이 보존하시기를 원하신 모든 생물들이 다 방주 안으로 들어간 때였고 하나님은 마지막에 “그 방주의 문을 닫아 넣으셨다”(16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생물들을 노아의 앞으로 나오게 하셨고(9~15절), 노아는 인도하여 들였으며(2~3절),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지켜보시다가 다 들어간 후에(천사들을 시켜) 문을 닫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문을 닫으시면 열 자가 없습니다(계3:7).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도 때가 있고 기회가 있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인지요? 거듭 확인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3. 코로 호흡하는 생물이 다 죽음(17~24절)
40일 계속되는 홍수로 땅에 물이 창일하였으며 결국 높은 산 위에 만들어진 방주도 물에 떴고 계속 물은 불어나서 15규빗이 더 오르자 산들이 덮였다고 하였으니 “15규빗이 올랐다”는 뜻은 방주가 물위에 뜬 다음 15규빗이 더 불어났다는 것으로, 가장 높은 산봉우리까지 덮이게 되니 온 천하는 물 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코로 호흡하는 동물은 물론 기는 것과 새들까지 다 쓸어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구상에서 그 부분만 쓸어버리신 것이 아니고 천하에서 멸절하리라(창6:17)는 말씀대로 세계적 멸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가족과 방주 안에 있는 생물만 살았고 물은 150일간 땅 위에 창일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홍수심판의 장관을 눈으로 보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두려우신 하나님입니다(시18:7). 저희들은 항상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설교보충 6. 홍수 입증 (창 7:1~24) 목록으로
1. 이런 자연계의 심판을 상상할 만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가에 대하여 1908년에 로마에서는 큰 지진으로 두 도시가 없어지고 물결이 지상으로 27척이나 올라와서 20만 명이 죽은 예가 있었고, 또 얼마 전 동파키스탄에서는 15미터 이상의 해일로 10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연으로 인한 피해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지만 노아 때의 홍수는 특별섭리로 주신 심판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1876년에 미국 네브라스카 서북방 산악지대 땅 속에서 태고시대의 짐승들과 물고기의 뼈가 나왔고 또 이와 비슷한 증거들이 88건이 된다고 하므로 홍수심판의 양상을 입증한다고 합니다.
대만의 조세광 박사는 그의 창세기강론에서 “다른 민족은 노아 홍수를 못 믿어도 중국 사람은 믿어야 한다. 그 이유는 중국의 한자의 창시자 창일씨가 배 선(船)자를 만들 때 방주라는 舟字자변에 八字와 口字를 붙인 것은 방주로 인하여 여덟 식구가 구원받은 사실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2. 온 지면을 덮을 만한 물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하지만 본래 육지는 바다의 1/3밖에 안 되는 것으로 바닷물이 많은 것이 사실이고, 창7:11에서 하늘의 창이 열렸고, 깊음의 샘이 터졌다 하였으니 공중에서 쏟아지는 비, 지진으로 솟아나는 물바다에서 밀려드는 해일 이런 것들이 넉넉히 지면을 덮었을 것입니다.
3. 지면에 퍼진 모든 생물들이 어떻게 종류별로 다 모였겠느냐에 대하여는 그 기한이 120년이었고 하나님이 모으신 것이므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 23 과 홍수의 그침과 노아의 제사 (창 8:1~22)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 전체의 제목은 “홍수의 그침과 노아의 제사”라 할 수 있고, 내용은 4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분하여 보면, ① 홍수가 그치는 과정이요(1~5절), ② 지면에 물이 거친 것을 확인하는 내용(6~14절)이요, ③ 방주의 모든 가족이 나오는 장면(15~19절), ④ 노아의 제사와 하나님의 약속(20~22절)의 말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홍수가 그치는 과정(1~5절),
1) 하나님은 방주 안에서 1년 17일 동안 생활한 모든 생명들을 권념하셨습니다(1절). ‘권념’이란 생각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모든 생물들이 방주에 들어간 것은 노아 600세 되던 해 비오기 시작한 2월 17일의 7일 전이었고(창7:4,11) 나온 날은 노아 601세, 2월27일 이었으므로(14~15절), 그 기간이 1년 17일이 되는 것입니다. (미리 들어간 7일을 빼고 375일이 됨). 하나님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방주 안에서 살도록 권념해 주셨습니다.
2) 그 다음 바람이 불게 하심으로 비를 멎게 하셨고(1절),
3) 비가 멎음에 따라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혔으며(7:11),
4) 물이 땅에서 점점 물러간즉 비가 그친 날로부터 150일 후인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5) 계속 물이 감하여 10월 1일에는 다른 산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라랏산은 현재 알메니아 국의 맛시스산(5185미터)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2. 지면에 물이 거친 것을 확인하는 말씀(6~14절).
1) 10월1일,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날로 부터 40일이 지났을 때 노아는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보내 본즉 까마귀는 썩은 식물을 먹으며 더러운 곳에도 서식할 수 있는지라 물이 마를 때까지 그대로 날아 다녔고(6~7절),
2) 또 비둘기를 내보내 본즉 비둘기는 깨끗한 동물이므로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여 다시 돌아왔으므로 노아의 손으로 받아들였으며(8~9절),
3) 까마귀를 내보낸 지 7일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놓아 보니 그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고 저녁때에 들어왔으므로 그 땅에 물이 상당하게 걷힌 것을 알았으며(10~11절),
4) 또 7일 후에 비둘기를 내보낸즉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물이 완전히 걷힌 것을 알았으나(12절) 땅은 마르지 않았고 내려가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으므로 계속 기다리다가,
5) 노아 601년 1월1일에 방주 뚜껑을 열고 온 지면에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하였으며 계속 1개월 동안 땅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2월 17일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3. 방주의 가족이 나오는 과정입니다(15~19절).
하나님은 방주의 모든 가족들을 나오도록 명하셨고(15~16절), 사람이 다스려야 할 모든 생물들도 이끌어내게 하셨으며(17절), 그들에게 창조 당시와 같은 생육번성의 복을 내리시니(17절), 노아의 가족들은 그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18절). 여기에서 노아가 비오기 전 7일 만에 들어간 것과 물이 빠진 후 56일이나 기다렸다가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 나온 것은 순종의 본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노아의 제사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20~22절).
1)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물은 정결한 짐승과 새였고 제사의 방법은 불태워드리는 번제였습니다. 이런 제사법은 하나님이 과거에 가르쳐주셨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그 제사의 향기를 흠향하셨으니, 이는 노아의 제사를 기쁘시게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제사는 감사의 제사였으며 장차 오실 메시야의 희생을 예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본래 사람이 어려서부터 마음의 계획이 악함을 아시고 이런 심판을 내리셨으나 앞으로는 그런 방법으로 멸하시지 않을 것과 땅이 있는 동안 심음과 거둠은 물론 춘하추동과 주야가 쉬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인류가 안심하고 미래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결론적으로 노아 홍수는 역사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을 자세하게 알려주신 것으로 저희들은 그의 심판을 위엄 있게 느끼며 노아처럼 의롭게 살고 또 그의 순종과 전도와 인내와 감사를 본받음으로 말세의 심판에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7. 홍수의 역사일정 (창 8:1~22) 목록으로
1. 노아 홍수의 역사 일정
1) 노아의 나이 480세 때(아담 창조 후 1536년), 하나님이 노아에게 장차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시고, 노아에게 방주 지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120년이 지난 후에 시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2) 노아의 나이 600세 때 (방주 지을 것을 명하신 지 120년) 그 해 2월 10일에 방주에 들어가라고 명하셨고,
3) 방주 안에서 7일을 기다린 후 2월 17일부터 3월 27일까지 40일간 주야 호우로 물바다를 이루었으며,
4) 천지가 물바다인데 그 물이 감소하는 여부를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방주는 바람에 밀려다녔을 것이고, 보이는 것은 물뿐이었을 것이니 물의 감소 여부를 모르는 상태에서,
5) 호우가 그친 지 110일 후인 7월 17일에야 물이 점차 빠져 방주가 가장 높은 봉우리인 아라랏산에 닿음으로써 물이 감소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방주가 아라랏산에 닿았을 때는 비오기 시작한 날로부터 150일 되는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비가 그친 후 110일 만에 방주가 다시 땅에 닿은 것입니다(8:2, 4).
6) 그 후 74일을 지나서 10월 1일에 다른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하였으니 7월 17일부터 10월 1일까지 74일 동안 계속 물이 감소하였다는 뜻입니다.
7) 산봉우리들이 보인 10월 1일부터 40일을 더 있다가, 11월 10일에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내 보았습니다(8:6~7). 이때 까마귀는 썩은 것을 좋아하므로 돌아오지 않았고 비둘기는 깨끗한 동물이므로 깃들일 곳을 찾지 못한 채 다시 돌아왔지요.
8) 7일 후인 11월 17일에 다시 비둘기를 내보내본즉 감람 새잎을 물고 저녁때에 들어 왔고,
9) 또 7일 후인 11월 24일에 다시 내보낸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0) 비둘기가 나간 날로부터 37일을 더 지나서 노아 601세 1월 1일에 뚜껑을 열고 지면에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하였으나 하나님이 진 땅을 디디고 내려가라는 명령을 하시지 않으므로 계속 기다리다가,
11) 58일이 지난 2월27일에야 땅이 완전히 마름과 동시에 방주에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① 방주를 예비한 기간은 120년,
② 비오기 전에 들어가서 기다린 기간은 7일,
③ 호우가 쏟아져 물이 불어나고 창일한 기간은 40일,
④ 물이 감소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기다린 기간은 110일,
⑤ 물이 감소되는 것을 보면서 기다린 기간은 167일,
⑥ 물 빠진 후 땅이 마르기를 기다린 기간은 58일, 도합 375일 만에 나온 것입니다.
12) 이렇게 노아 홍수의 역사는 하나님의 생생한 심판으로 인류의 조상들에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제 24 과 홍수 이후에 주신 복 (창 9:1~19) 목록으로
위의 본문 말씀은, ① 하나님이 홍수 이후에 살아남은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선포하신 말씀과(1~3절), ② 정결한 생물의 고기를 먹되 그 피는 먹지 말아야 할 것과(4~7절), ③ 하나님이 다시는 땅 위의 모든 생물을 멸절시키는 홍수심판을 행하시지 않을 것을 언약하시는 말씀(8~19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살아남은 가족들에게 어떤 복을 선포하셨습니까?
1) 노아와 그 자손들이 아담 때처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고(창1:28),
2) 다른 살아남은 생물들, 즉 짐승, 새, 기는 것, 조류들로 하여금 그것들이 사람들을 무서워하므로 해하지 않고, 또 두려워함으로 사람의 다스림에 복종하도록 붙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생물들을 길들이기도 하고 이용할 수도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물들의 성질을 임의로 지배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3) “무릇 산 동물을 너희의 식물로 삼으라”고 허락해 주셨는데 아담 이후에는 동물을 식물 삼으라는 말씀을 안 하셨다가 노아 홍수 후부터 그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꼭 채식만 좋은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되겠지요.
① 채소처럼 다 준다고 하심으로 얼마든지 잡아먹을 수 있게 하셨음이고,
② 무릇 산 동물을 먹으라는 말씀은 죽은 것의 고기를 먹지 말라는 뜻이요,
③ 다 먹되 정결한 동물만 잡아먹도록 허락하셨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불결한 것은 한 쌍씩만 보존하였으니까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정결한 것을 일곱 쌍씩 보존하게 하신 것이 바로 식물을 삼게 하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7:2).
2. 모든 피를 신성시하여 피를 먹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1) 왜 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①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존중시하라는 의미요,
② 하나님이 피의 제사를 받으시고(레1:5; 4:7). 피의 호소를 들으시므로(4:10) 하나님도 피를 생명같이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고,
③ 구약시대에 소나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릴 때면 그 짐승의 피를 예수님의 보혈로 상징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였기 때문입니다(히9:22). 그래서 생명을 존중하는 의미,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로 구별하는 의미, 그리고 메시야 보혈을 예표하는 의미 때문에 피를 신성하게 취급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2) 그러면 오늘 우리들도 피를 먹지 말아야 하느냐? 할 때 현재 우리들은 피에 대하여 큰 관심도 없고 피가 섞인 생고기도 먹고, 또 어떤 이는 노루 피를 약으로 먹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성경에 금한 피를 이렇게 마구 취급해도 되는가? 할 때에 고기로 먹게 하신 짐승의 피 자체를 신성하다 하거나 전혀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① 신약시대는 구약시대와 달라서 짐승의 피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신 사실을 생생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요,
②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목적도 예수님의 보혈을 (예표로 알고) 믿게 하고자 함이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되었기 때문이요,
③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못한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배설되기 때문이라”(마15:11,17) 하심으로 먹는 식물의 분별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요,
④ 초대교회 당시에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처음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할 때 그들은 우상의 제물이나 피나 목매여 죽인 짐승의 고기를 예사로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 신자들이 깜짝 놀라서 그것을 금지시키라고 항의하였을 때 사도회의에서는 그것을 계명위반으로 문제시하지 않고 다만, 이방인신자들과 유대인신자들 간의 거리낌을 해소한 친교유대를 위하여 이방인들이 스스로 삼가 주면 좋겠다고 함으로 피 먹는 것을 명령으로 금지하지 않았으며(행5:20,29),
⑤ 그 후에 바울 사도는 딤전4:4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다 선하므로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하므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부정한 것들도) 거룩하여 진다”고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물의 피를 신성시할 필요가 없으나,
3) 사람이 사람의 피를 흘렸든지 짐승이 사람의 피를 흘렸을 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을 경시하고 살인하는 행위가 되며, 사람이건 짐승이건 그 살인죄와 피 흘린 자에 대하여 응분의 벌을 가해야 된다고 하심으로 인간의 생명을 존중, 보존하며, 번성하도록 복을 주신 것입니다(출21:23; 신12:23).
3.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1) 이 언약은 사람들과 하신 것이었지만 언약의 대상은 그 당시에 살아남은 모든 생물 전체를 상대한 것이었고(9:10,16),
2) 언약의 내용은 다시는 홍수로 멸절시키는 심판을 하시지 않겠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언약하심은 인류로 하여금 원대한 소망을 바라고 또 그런 멸망이 있을 것은 아니니까 생활에 열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 그리고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신다”는 것이었습니다.
① 무지개는 비오고 안개 걷힐 때 조석 간에 나타나는 자연현상입니다.
② 그러나 그 자연현상에서 일곱 가지 색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임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③ 또 이 무지개는 비가 개는 증표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홍수 때처럼 계속 비를 주시지 않고 곧 거두어 가심을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④ 따라서 노아 이후의 모든 인류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노아 때에 약속하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이렇게 식물을 주시고, 피 흘리지 못하게 하셨으며 또 홍수심판을 다시 안하신다는 약속을 주셨으니까 인류는 잘 번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세 아들로 말미암아 인류가 온 땅에 퍼졌는데, 특히 “함을 가나안의 아비라” 하시고 함의 아들 가나안을 거론한 것은 다음에 나타나는 사건과 연결되기 때문이요, 또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적대민족의 대표이름으로 이방족의 대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위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합니까?
1.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고,
2. 의인은 노아의 여덟 식구만이라도 구원하시는 긍휼을 깨달을 수 있으며,
3. 그 당시가 아담의 출생 후 1536년이 되었을 때니까 인류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다 멸하시고 여덟 사람만 구원하신 것은 오늘 저희들이 수억의 인구 중에 여덟 사람에 속하는 자처럼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심이니, 소수의 의인이라 하여 외롭게 생각지 마셔야 합니다.
4.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시하는 생활,
5. 피를 신성시한 것처럼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항상 기억하시며,
6. 장차 하나님이 홍수 같은 심판은 하지 않으시며 낮과 밤과 춘하추동이 계속되겠지만 마지막 알지 못하는 때에 예수님의 재림과 최종 심판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제 25 과 노아의 생업과 예언 (창 9:20~29)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홍수 이후에 노아가 포도 재배하는 농업을 시작하였음과 포도주에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을 때 그 둘째 아들 함이 그 아버지의 하체 드러낸 수치를 형제들에게 알렸고, 그 형제 셈과 야벳은 그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면서 이를 덮어 주었음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후에 술이 깬 노아는 세 아들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예언하였고, 홍수 이후 350년을 더 산 후 950세에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제목을 “노아의 생업과 예언”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노아는 홍수 이후에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으니,
1) 농업을 시작하였다는 말씀에서 그의 과거 직업은 농업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노아가 목축업을 행하면서 자연 유실수를 먹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1년 동안의 홍수 침해로 모든 식물들이 타격을 받았을 것이므로 가장 필요하고 또 재배하기에 알맞은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주를 생산하였습니다.
2) 노아는 포도주 과음으로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몸이 될 만큼 혼미해졌습니다. 24절에서 “술이 깨었다”는 말씀은 있어도 ‘잠이 깨었다’는 말씀은 없는 만큼, 꼭 잠이 들었을 것으로 짐작할 필요가 없고, 다만 알콜에 취하여 혼미해진 상태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포도주는 먹고 난 다음에 취하는 것이므로 처음 맛보았을 때에 포도주의 성분을 모르고 과음한 것이 큰 혼미를 자초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장막 안에서 하체를 드러냈습니다.
3) 사람이 하체를 드러내는 것은 타락 전에는 수치로 여기지 않았으나(창2:35) 타락 후부터는 부끄러움으로 알았습니다(창3:10). 그리고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혀주신 것을 보면(창3:21) 하체를 가리우는 일을 정당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사람이 의복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① 건강 유지와,
② 외모의 단정함을 나타내기 위함이요(창37:3),
③ 남녀 간의 하체를 가림이 음행의 충동을 방지하는 방책으로도 꼭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른이 하체를 함부로 노출하는 것은 고의적이든 실수이든 좋지 못한 일이요, 자녀들을 퍽 민망하게 할 것이므로 삼가고 조심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혹 부자간이나 모녀간에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것을 떳떳하게 행하는 경우도 있으나 부모의 하체를 안보는 것을 성경은 덕으로 말씀하였습니다.
4) 노아의 둘째 아들(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 사실을 알렸는데 두 형제는 요를 들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 하체를 덮어주었는데, 노아가 술이 깬 후 이 사실을 알고 “함”에게는 저주를,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선포하였습니다.
① 여기에서 ‘함’의 잘못은 그가 장막에 들어가 그 아비의 하체를 본 일에 대하여는 크게 탓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두 형제까지 보도록 경박한 행위를 자행한 것이라고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수치와 실수를 스스로 감싸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함”은 그럴 만큼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고,
② 그 함을 가나안의 아비로 칭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22절에서 “가나안의 아비 함”이라 하였고, 또 25절에서는 가나안을 저주하였습니다. 가나안은 함의 넷째 아들입니다(창10:6). 왜 “함”대신 넷째 아들 가나안을 지목하였을까요? 어떤 이는 “가나안이 조부의 수치를 먼저 발견하고 공개한 것을 그 아버지 ‘함’에게 돌렸다” 하고 또 어떤 이는 “함이 가나안을 퍽 사랑하였으므로 그가 가나안의 아비로 호칭되었고 저주도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내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함의 아들 가나안이 크게 번성하여 장차 아브라함에게 주신 기업의 땅에 본토족이 될 것을 아신 하나님이 그의 점령한 땅을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에게 주시기 위하여 예언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노아로 하여금 저주와 축복도 예언적으로 말하게 하셨습니다.
③ 셈과 야벳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으면서 옷으로 덮어드린 것은 아버지의 수치와 부도덕을 가리워드린 것이며, 자식으로서의 도의를 갖춘 일로 귀하게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효도하는 자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께서(출20:12) 효도 여부에 따라 저주와 축복을 하게 하셨고 그대로 성취되게 하신 것을 보면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2. 노아의 아들에 대한 저주와 축복의 예언입니다.
1) 25절에서 “가나안은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셈과 야벳을 뜻하고 “종들의 종”이란 아주 미천한 노예계급을 의미합니다. 함의 순간적 범죄가 큰 저주를 받은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렘12:1). 또 이 저주는 함의 일시적 불효의 대가만은 아닐 것입니다.
① 함은 비택자였고,
② 그 후손들의 범죄가 축적될 것이며,
③ 또 함의 소행을 따라 부도덕한 소행이 나타난 때를 기회로 하여 예언적 저주를 내리신 것입니다.
복 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 사이에 주종관계를 이루는 계급사회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가나안이 형제의 종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26~27절에서도 재차 말씀하셨고, 이들은 세계에 흩어진 미개인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미개함과 저주의 기한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한정이 있을 것입니다.
2) 26절에서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라”하셨으니, 이는 셈의 후손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과 셈족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구원의 사역을 이루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셈족을 통한 노아의 10대 손이므로 신령한 복이 셈족으로 계승될 것을 예언하심이요, 꼭 효도의 공로로 베푸신 것은 아닐 것이며 하나님의 작정된 섭리의 복일 것입니다.
3) 27절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 하셨으니 여기의 “창대케 하심”은 현실적 발전을 의미하고 “셈의 장막에 거함”은 셈족으로 말미암아 전파된 복음의 장막에 깃들이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서양이나 구라파 민족은 현실복에 앞서가면서 신령한 복음을 유대인으로부터 전승받았습니다. 유대인은 동양족에 속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셈족은 황인종의 조상이요, 함족은 흑인의 조상이며, 야벳족은 백인의 조상이라고도 하는데 상당하게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는 그가 ‘원하노라’한대로 성취되었으니 이는 하나님이 노아를 선지자나 사도처럼 예언적 사역자로 쓰셨기 때문입니다(창12:3; 출7:1).
3. 마지막으로 노아는 홍수 후 350년을 더 살고 950세에 죽으므로 노아는 오래 산 족장으로는 마지막 사람이었습니다. 노아가 950세를 산 이후에 다른 사람들은 그 만큼 장수하지 못하였고 그 아들 셈이 602세, 셈의 아들 아르박삿이 440세로 점점 단명해져서 노아의 8대손 나홀은 148세, 9대손 데라는 205세, 10대손 아브라함은 175세로 내려갔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의 수명이 점점 줄었을까요?
①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단축시키셨다는 것과,
② 노아 홍수 때에 일어난 물리적 현상으로 태양 자외선의 광도가 심해져서 그렇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번성은 그들의 장수와 관련이 있는 만큼, 최초의 인류가 번성할 만큼 번성하기까지 하나님이 장수의 연한을 주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노아의 10대 손인데 노아가 홍수 후 350년을 더 사는 동안 노아는 10대 손자 아브라함을 58년이나 돌보아 주고 세상을 떠났으니 노아 때의 상세한 사건들을 아브라함은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노아 때의 모든 역사가 더욱 진실한 사실임을 확증해 줍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들은,
1) 부모 또는 가장으로서의 주의할 점과,
2) 자녀들이 부모에 대하여 효도할 일과,
3)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이 선택적이기는 하나 인간들의 신앙적 도덕적 결함과 범죄 사실들을 기회로 선포된다는 점과,
4) 하나님이 노아를 예언적 도구로 쓰셨다는 점,
5) 모든 인류가 세 종족을 근거로 하여 세계에 분포되고 신앙적 계열이 구속사를 이루고 그 나머지는 저주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26 과 노아의 후예와 분포 (창 10:1~32) 목록으로
1. 창세기 10장에는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와 그들이 어떻게 분포되어 세상에 퍼져 살았는가가 기록되었습니다. 노아 때에 인류의 시작은 아라랏 지역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는 노아 601세 때로 주전 2461년경이며, 아담창조 이후 1656년 만에 재출발을 한 것입니다. 창세기 10장을 3분하면, ① 야벳의 후예와 분포(1~5절), ② 함의 후예와 분포(6~20절), ③ 셈의 후예와 분포(21~32절)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2. 분포의 특징을 살피면,
1) 기록의 순서가 장자로부터 기록하지 않고 말자로부터 기록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글자 뿐 아니라 순서에도 영감을 하셨으므로 이 순서에도 깊은 뜻이 있을 것이나, 우선 메시야 선민계열인 “셈의 자손”을 마지막에 기록하심은 이를 강조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2) 이 인류의 계보가 상세한 것인가? 할 때 역사적으로는 확실하지만 상세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도 건너 뛴 계보가 있듯이 본문의 계보에도 그런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눅3:36을 보시면 “아르박삿”과 ‘셀라’사이에 ‘가이난’이 있으나 본문에서는 그것이 생략되어 건너뛰었습니다.
3) 또 모든 아들들의 후예 즉 손자 이하를 다 기록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
① 야벳의 일곱 아들 중에는 고멜과 야완의 후손만 기록하였고,
② 함의 네 아들 중에는 셋째 아들 ‘붓’의 후예가 없고,
③ 셈의 다섯 아들 중에는 ‘룻’의 후예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후예가 끊기었거나 아니면 기록목적상 의미가 없기 때문에 생략되었을 것입니다.
4) 따라서 이 기록의 목적은 구속사적 계열을 밝히고 역사성의 진실만을 입증하는데 있습니다.
5) 이들이 종족별(셈, 함, 야벳)로 흩어진 시기는 셈의 후손인 벨렉(나눔이란 뜻)이 출생하였을 때 “세상이 나뉘었다”(25절) 하였으므로 ‘벨렉’의 출생연대는 주전 2360년경이며 홍수가 그친 때는 주전 2461년경이므로 홍수 이후 100년쯤 유리하다가 세 종족 별로 나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각기의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번성한 것은(5,20,32절) 자연스러운 일로서 바벨탑사건 이전에도 방언의 혼미(사투리)함이 있었을 것이며 바벨탑 이후에 언어가 완전히 달라졌고 종족은 부족사회로, 나라는 군주사회로 점차 번창한 것입니다.
7) 함의 자손 중 “니므롯”이 처음 영걸이요, 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꾼이라(8절) 하셨는데, “영걸”이란 영웅, 장사를 뜻하고 “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꾼”이란 호의적 의미를 부각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사냥을 잘하였다”는 뜻입니다. 어떤 해석에서 영걸과 사냥꾼을 부정적 의미로 해석하여 반항자, 폭력자, 살상자, 기회주의자, 침략자, 적그리스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사냥은 식물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8) 사람의 이름과 지역 종족의 이름이 같은 것은 그 이름으로 종족과 지역을 일컬었기 때문입니다.
① 야벳의 아들 메섹과 손자 도갈마, 깃딤, 도다님(도단)이 지역의 이름이며,
② 함의 아들 구스(애굽), 가나안과 손자 스바, 라아마, 갑도림(갑들), 증손자 블레셋이 역시 지역 이름이며 가나안의 아들, 헷, 여부스, 아모리, 기르가스, 히위, 알카신, 아르왓, 스말, 하맛은 종족의 이름이 되었고,
③ 셈의 아들 엘람, 앗수르, 아람, 손자 우스, 또 후손인 스바, 오빌, 하윌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지역이름이므로 그들이 그 지역에 분포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3. 야벳과 함과 셈의 후예와 그 분포지역을 살피면,
1) 야벳은,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를 낳았고, 고멜은 아스그나스, 리밧, 도갈마를, 야완은 엘리사, 달시스, 깃딤, 도다님을 낳아 바닷가 땅에 머물렀으니 이 지역은 지중해, 에게해, 흑해, 카스피해, 페르시아만과 인접된 동유럽 소아시아 북쪽을 경유 유럽지역으로 이동되었고(겔38:2~6),
2) 함은, 구스, 미스라임, 붓 및 가나안을 낳았고, 구스는 스바, 하윌라, 삽다, 라아마, 삽드가와 니므롯을, 라아마는 스바와 드단을,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가슬루힘, 갑도림을, 가슬루힘은 블레셋을 낳았으며, 가나안은 시돈과 헷, 여부스 족속 외 여덟 족(가나안족)의 조상을 낳았으니,
① 구스의 자손들은 시날 땅과 에렉과 악갓, 갈레 지역에 분포되었고(10절), 그 지역은 현재 시리아, 이락 영지에 해당되며, 앗수르(시리아) 나라의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 데센 성읍을 창건하였고,
② 가나안 자손은 가나안 지경과 시돈, 그랄 가사까지와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을 지나 라사(사해동편)에 퍼졌으므로, 이는 가나안 북쪽 지중해 변경으로부터 남쪽 사해바다 지역을 거쳐 아프리카쪽으로 이동되었고,
③ 셈의 자손이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라”하였으니(10:30), “메사”는 북아라비아(메소포타미아) 지역이요, “스발”은 시리아 지역이므로 아프리카를 제외한 아랍계열의 땅입니다. 여기서 동아시아로 이동하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야벳족은 13대까지, 함족은 14대까지, 셈족은 16대까지 기록됨으로 형의 후손이 더 번성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또 결론적으로 복음의 시발지인 팔레스틴 지역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의 삼각지, 중앙에 속하는 지역으로 복음전파의 기점이 되기에 적당한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서 공부하시면 금방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제 27 과 바벨탑 사건과 셈의 후예 (창 11:1~3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창11:8을 본문으로 “바벨탑사건과 셈의 후예”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을 살펴보시면, ① 1~9절까지가 바벨탑사건에 대한 말씀이고, ② 그 이하가 셈(노아의 큰 아들)의 후예에 대한 말씀인데, 마지막 부분에서 아브라함의 가족관계가 자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1. 먼저 바벨탑사건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노아와 그의 세 아들들이 홍수가 끝났을 때 아라랏 산에서부터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평지를 만나 거기에 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산에서 강물을 따라 평지로 내려 온 것이나, 또 그 강물(티그리스강을 예상할 수 있음)을 따라 동방지역으로 옮겨 정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또 그 때는 작은 부족사회로 강물 따라 평지 따라 동방으로 이동하다 보니까 지금 쿠웨이트 영지나 그 인근 지역인 “시날평야”에 이르러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2) 그들은 그곳에서 서로 의논하여 이름을 내고 흩어지지 말고 오래 살자는 목적으로 흙과 역청을 벽돌재료로 이용하여 성과 높은 대(망대)를 쌓았습니다.
① 그들이 성과 대를 쌓은 방법은 흙벽돌과 역청을 곁들여 쌓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높이 성벽처럼 쌓은 것입니다. 성이란 것은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외적 될 만한 인간이 없었을 것이므로 이것은 강물의 범람이 성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뚝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 하늘에 닿을 만큼 대를 쌓은 것은 혹 하나님의 두 번째의 노아 홍수 같은 것이 있다고 할 때 그들이 평지에 거할지라도 높은 산만큼 대를 쌓아놓으면 거기에 올라가서 홍수를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을 것입니다.
②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을 풀어야 할 것은 노아 당시의 홍수 때는 방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후손들이 왜 방주를 짓지 않고 마음대로 쌓았느냐 할 때 그 때는,
㉠ 노아의 후손이 11대로부터 상당히 많이 번성하였을 것이므로 배를 이용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였을 것이요,
㉡ 그곳이 평지인 만큼 나무를 구하기 어려워 그들 나름대로 토성과 망대를 쌓아 올리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3)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다 함은 하나님의 주밀하신 감찰에 대한 인간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이것을 흩으셨을까요? 거기에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① 하나님이 그런 홍수를 다시 주시지 않겠다 하시고 노아 때에 무지개로 언약을 보여 주셨는데도(창9:13), 그 후손들은 그 약속을 든든히 계승받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그 당시에 성경말씀이 있어서 창9:11~13 말씀을 문구로 확인할 수 있었다면,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 책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성이나 쌓고 망대는 쌓지 말자’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그 만큼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큰 홍수를 주시지 않는다는 약속의 말씀이 백년 이 백년 구전으로 전승하다가 그만 사라져 버렸을 것이고 그 구전이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장맛비나 홍수를 만날 때에 그 믿음을 상실한 것입니다.
② “땅을 정복하고 땅에 충만하라” 하신 말씀(창9:1)을 역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인종으로 번성하여 전 지구의 땅을 차지할 것을 명하셨으나, 이들은 흩어지고 멀리 퍼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잘못한 것이며,
③ 하나님이 내리시는 홍수재앙을 사람의 힘으로 이겨보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겨루어 보겠다는 교만과 하나님께 대한 대항으로 비화되는 상황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 홍수멸망이 없다는 언약을 불신하고,
㉡ 흩어져 살라는 말씀을 거역하며,
㉢ 하나님이 주시는 재앙을 사람이 회개하는 변화 없이 극복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소행을 이루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④ 그들이 그런 반역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구음(발음성)과 언어(말)가 하나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잘되므로 그런 인간적 단결을 과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여러 갈래로 혼잡케 하여 함께 살 수 없게 하시고 언어가 상통하는 식구들끼리 흩어지지 않을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의 단결과 모임을 그대로 두면 그들의 완악함과 거역함이 점점 더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지역마다 다른 말을 쓰게 하시니, 종족 따라 언어 따라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바벨’이란 혼란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언어는 인간의 방언변화와 같았을 것이요, 언어의 세계적 일치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조건이 되었으므로 이를 혼잡하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인의 언어가 하나로 통일된다면 현실주의의 발전이 더 커져서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거역할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본주의의 확대를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피조물이 창조자를 대항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망치는 것임을 알아서 하나님 뜻에 따르는 일만을 귀하게 여기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단결하여 힘을 과시하여도 하나님을 대항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2. 셈의 후예에 관한 말씀입니다(10~26절).
1) 셈은 노아의 큰아들이므로 노아가 아담의 10대 손이고, 셈은 11대 손이 됩니다. 셈은 그 나이 100세 때(그 때가 홍수 2년 후임)에 12대손 아르박삿을,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셀라는 30세에 에벨을, 에벨은 34세에 벨렉을, 벨렉은 30세에 르우를, 르우는 32세에 스룩을, 스룩은 30세에 나홀을, 나홀은 29세에 데라를, 데라는 70세에 아브람을 낳음으로, 320년만에 10대 손을 번성시켰고, 그들의 나이는 셈이 600세를 산 것을 비롯하여 18대 나홀이 148세를 산 것을 순서대로 합하여 평균을 잡으면 317세가 됩니다. 11대 셈으로부터 20대 아브람까지의 족보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민의 계열을 역사적으로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메시야 언약과 함께 그 계보를 이어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2) 아브라함의 고향 땅을 찾아보시려면 지도를 보십시오. 그곳은 페르시아만 끝에 있는 내륙지역이고, 현재 이라크의 도시인 바그다드 남쪽에 해당합니다. 그곳은 유프라데강과 티그리스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퍽 살 만한 곳이며, 그곳에서 고대문명의 나라인 갈대아, 앗수르, 바벨론, 메데 바사국이 발생한 곳이었으며 그 당시는 그곳이 갈대아 수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퍽 좋은 고장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3)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가정 관계를 자세하게 말씀하였습니다(26~32절).
① 얼마만큼 자세한가 할 때,
㉠ 아브라함은 부친 데라가 70세에 낳은 큰아들이요, 그의 동생 나홀과 하란이 있음을 말씀하였고,
㉡ 그들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이니 이곳이 바로 바벨탑을 쌓은 시날평지 가까운 곳이므로 데라의 가정은 바벨탑에서 거의 이동을 안 한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 아브라함의 아내는 ‘사래’인데 이 사래의 뜻은 영화이며 나중에 ‘사라’ 즉 공주란 뜻으로 개명하였습니다(창17:15). 또 아브라함의 이복누이라고 하였으니까(창20:12) 그렇게 아십시오.
㉣ 아브라함의 다음 동생 ‘나홀’은 그 다음 동생 하란의 딸(조카딸) 밀가와 결혼을 하였고,
㉤ 셋째 동생 하란은 롯과 두 딸 ‘밀가’와 ‘이스가’를 낳고 세상을 떠나니까 롯을 아브라함이 키웠고 ‘밀가’는 아브라함의 다음 동생인 나홀의 부인이 되었으며, ‘이스가’에 대한 말씀은 없습니다.
㉥ 그 때까지 아브라함은 자녀를 갖지 못한 채 생활을 하였는데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하여 큰아들, 둘째 아들 각 내외와 아버지 없는 손자 ‘롯’을 데리고, 말씀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그 북쪽지경인 하란에 머물게 되었고 거기서 205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② 이상의 말씀에서 조금 더 생각해 볼 것은,
㉠ 아브라함의 가족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는 그 아버지 ‘데라’가 생존할 때였으므로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그에게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비옥한 터전을 버리고라도) 아들 아브라함과 함께 3,200리의 길을 떠난 것으로 추측되며,
㉡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쪽을 서남방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서북방 쪽 하란으로 간 것은 사막지대로 길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 데라는 하란에 도착한 후 늙은 몸이라 더 이상 여행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205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 또 그 당시는 사람이 희귀한 부족사회이기 때문에 근친결혼이 불가피하였습니다.
4)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① 아브라함의 족보와 가족을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메시야를 언약 받은 선민이었기 때문이요,
② 아브라함은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갈 때나(약3,200리) 하란에서 가나안을 갈 때나(약 1200리) 하나님의 명령이면 무조건 순종하였으며,
③ 아브라함의 한평생이 광야의 여정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나그네 생활을 거울로 삼아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벧전2:11; 히11:13).
④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바벨탑사건과 인생을 나그네 생활로 보낸 아브라함의 생활이 우리에게 큰 신앙적 교훈을 주신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8. 바벨탑 (창 11:1~9) 목록으로
1) 바벨탑 사건은 노아 후손의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들이 동방 시날평지로 옮겨가며 살 때에 그들의 구음과 언어는 하나뿐이었습니다. 구음이란 발성의 억양을 뜻하고 언어는 의사를 전달하는 말입니다. 세계의 종족별로 구음이 다른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계의 언어 종류가 3,000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역시 구음도 언어 따라 다릅니다.
2) 노아가 950세(창9:29)에 세상을 떠날 때 아브라함이 출생하였으므로 아브라함은 노아의 언어를 계승하였음직하고 아브라함이 75세까지 살았던 밧단 아람(하란)에 그대로 거주한 브두엘(리브가의 아버지)의 아들 ‘라반’은 아람어를 사용하였으며(창31:47), 그 때에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다가 밧단 아람의 외숙 라반을 찾아가서 히브리어를 가르친 일이 있었습니다(창31:47 여갈사하두다(아람어)=갈르엣(히브리어)). 따라서 노아시대의 언어는 아람어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3) 노아의 후손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평지에 머문 곳은 유프라데강 하류지역으로 아브라함의 고향이었던 갈데아 우르 근방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도성을 건설하고 흩어지지 않으며 또 홍수 같은 재앙을 극복하고 인간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하여 성벽과 높은 대를 쌓게 된 것이 바벨탑이었습니다.
① “대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한다” 함은 여간한 홍수도 이길 수 있는 반면에 인간의 위용을 어떤 자연의 재앙(하나님의 심판)보다 더 힘 있게 믿었던 탓입니다. 바벨론의 역사 중에 바벨탑의 기록이 있고 지금 바그다드 서쪽 60Km 지점에 그 흔적이 있으며 그들은 망대를 쌓을 때 우로의 신 ‘말둑’을 섬기는 신전으로 세웠다 하며, 가장 높은 곳에는 왕이 사용하는 금침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비를 내려주는 하늘의 신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서 그 신과 능력을 겨루어 보자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밥일’은 신의 문이란 뜻이고, ‘바벨’은 혼잡이란 뜻입니다.
② “인간의 이름을 내자”는 목적이었으니, 인간의 이름을 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다는 뜻이지요. 참으로 오만한 행동이 아닐 수 없고,
③ “지면으로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으니 이것도 온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라(창1:38)는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될 뿐 아니라 인간이 단결을 과시하여 비대한 도시를 만들고, 하나님을 대항하며 자기들의 명예를 떨치자는 단합의 기념탑을 쌓은 것입니다. 그들은 돌 대신 흙벽돌을 만들었고, 흙벽돌과 흙벽돌 사이를 붙이는 것으로 진흙대신 역청을 썼으니 흙벽돌은 건조한 지역에서 돌보다 더 견고하다 하며 역청은 유전에서 나오는 골탄 같은 원료를 의미합니다.
④ 그들이 높이 올라가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열심히 단합하여 악을 꽤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려고 강림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멀리서도 통촉하실 수가 있습니다. 거동하지 않으셔도 그 사실을 다 아실 수 있습니다(시139:2). 그러나 ‘강림하셨다’는 표현은 인간의 행동을 빈틈없이 주시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쌓는 성과 대도 보실 뿐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반항적인 마음과 활동을 확실하게 감찰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그들이 단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된 여건은 언어와 족속이 같았기 때문에 악을 도모하는 결탁이 가능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저지하시기 위한 방법으로 단일단체를 크게 만들기 전에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의사소통을 막으셨고, 의사소통이 안 되므로 바벨탑 건축을 못하게 하시고, 각처로 흩어져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과 대가 건립되었던 시날평지를 바벨이라 하였으니 “바벨”이란 뜻은 ‘혼잡’이란 뜻으로 그곳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음을 뜻합니다.
5)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① 인간의 지식문명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과 권위를 도전하는 것이 현시대 인류가 바벨탑 쌓는 일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인간을 진리 위에 앞세우는 일은 극히 삼가야 할 것입니다.
② 인간의 단체 결성이 잘되면 오히려 하나님을 항거하는 일에 힘이 주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악인을 흩으시는 방법을 쓰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을 하나님이 통제하지 않으시면 이 세상에는 악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창20:6; 삼상25:26).
③ 하나님은 인간의 악한 소행과 그 심사와 목적을 감찰하시고 자기의 뜻에 따라 악인을 응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흩어짐이 어떤 면으로는 징계를 받은 일이지만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단체적 범죄를 감소시키는 유익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우리는 현실생활에서 바벨탑을 쌓고 있지는 않는지요?
① 소련의 첫 번째 우주여행자 ‘가가린’은 “내가 우주를 다 살폈어도 하나님이란 존재는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자신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였듯이 많은 인류가 문명주의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고,
② 공산주의자요 무신론자인 마르크스의 무덤에(독일) “역사를 바꾼 자가 여기 누워 있다”는 비문을 새김으로 하나님과 성도를 학대한 자가 위인의 대접을 받으며,
③ 반기독교적 사상이나 이단 그리고 종교의 혼잡 등이 다 이 시대의 바벨탑 같은 죄악이란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9. 아브람의 순종의 성격 (창12:4~5) 목록으로
1) 자기생활을 타산하지 않고 무조건 순종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갈 뿐(4절) 다른 것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계획 자기의 욕망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따라 이리 가고 저리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2) 롯도 그와 비슷하였습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아브람을 그대로 따라간 것입니다. 롯은 작은삼촌 나홀 밑에 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받은 아브람을 따라 자기도 그 약속에 동참하고자 따라 나섰습니다.
설교보충 10. 가나안 땅 (창11:31) 목록으로
1) ‘가나안’이란 이름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아들 이름이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그곳에 살면서 그 지경을 가나안이라고 일컬어온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런데 그 지역을 오늘에 와서는 흔히 “팔레스틴”이라고 부릅니다. “팔레스틴”이란 말은 본래 ‘펠리시티’란 말에서 변화된 것이고 pelisiti는 블레셋을 일컫는 히브리말입니다. 따라서 그곳에 정착한 본토인들이 아브람 시대에는 함의 손자 가나안 족속이 살았고 아브람 후시대인 야곱의 시대(즉 애굽생활 400년 어간)에는 블레셋 족속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 때부터 그 지역을 팔레스틴(펠리시티)으로 명칭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 그 지역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영토에 속하는 예수님의 성역지 전부를 일컫는 것입니다.
2) 아브람이 그 지역에 와서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그 지역은 에발산과 그리심산 근처라고 합니다(창12:6; 신11:30). 아브람이 그곳에 정착하였을 때 가나안족도 그곳에 살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제 28 과 아브람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내려감 (창 12:1~9) 목록으로
< 아브라함의 여정 >
위의 말씀에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약속하시고 하란의 본토 친척을 떠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남방 가나안 땅으로 내려와서 세겜과 모레와 벧엘 근방으로 전전하며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점점 남방(애굽쪽)으로 내려갔다고 하였습니다.
1. 아브람이 하란에 거하던 75세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약속하시며 그 본토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은,
①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② 네 이름을 창대케 하며,
③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④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 받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큰 민족이 되게 한다”하심은 육체적 혈육의 번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영적 선민의 번성을 의미하며, ‘그 이름이 창대하여 짐’은 그가 최초 선민으로 택정을 받고, 복의 근원 또는 믿음의 조상(롬4:16)과 열국의 조상(창17:5)이 되었기 때문이며,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함은 본문에 나타난 대로 아브람이 축복이나 저주를 하면 하나님도 거기에 따라 주신다는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됨”은 그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복이 그의 계통으로 말미암아 메시야가 오셔서 모든 선민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람의 무엇을 보시고 이런 선택과 복을 허락하셨을까 할 때 이것은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롬9:11)에 따라 하나님의 특별섭리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 후에 아브람에게 좋은 믿음이 나타난 것은(창15:6; 22:12) 그가 선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한 것이며 그 믿음에 근거한 순종과 활동에서 아브람은 더욱 특별한 결과를 나타낸 사람입니다.
3) 아브람은 말씀을 따라 순종하였습니다.
① 데라가 하란에 와서 여러 해를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란에서 머문 이유는 데라의 노쇠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데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아브람은 하란을 떠났습니다. 정착지를 떠나는 일은 우선 기업의 땅을 떠나야 하고 다음에 친척과 이웃을 떠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브람은 말씀을 따라 사는 생활목표가 강하였기 때문에 의연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
② 그가 떠날 때 그곳에 남겨 놓은 친척은 동생 나홀의 가족뿐이었고, 아브람 내외와 조카 롯과 모든 소유를 갖고 여행하였으며 이때에 어느 지역에 정착할 것을 알지 못하고 떠났던 것입니다(히11:8). 아브람의 좋은 믿음은 그의 모험적 순종으로 입증할 수 있습니다.
2. 아브람은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1) 그는 먼저 가나안땅에 와서 세겜 지역 ‘모레’에 거주하였으니 이 지역은 갈릴리 바다와 사해바다 중간인 에발산과 그리심산의 사이로 전체 팔레스틴 땅의 중앙지역입니다. 그곳에 상수리나무가 많았습니다. 아브람은 목축업자이므로 풀과 그늘이 많은 곳을 택한 것입니다.
2) 그곳에 함의 후손인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으나 하나님이 그 땅을 주셨으니 만큼(7절), 그곳에 계속 거주하면 이방족은 쇠하여 물러갈 것이고 아브람 후손은 번창하여 약속대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아브람은 그곳에서 제단을 쌓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4) 또 모레 지역에서 북쪽으로 100리쯤 올라간 벧엘과 아이 중간지역으로 옮겨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기도를 올린 후,
5) 점점 남방으로 옮겼으니 이는 흉년을 피하고 초장을 찾아가기 위하여 애굽쪽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입니다(지도를 참고하십시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아브람을 선택하여 복을 주셨고 아브람은 무조건 말씀 따라 복종하는 신앙을 가졌으며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으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였는데 나중에 흉년 등을 이유로 약속의 땅을 벗어나는 잘못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29 과 남방 애굽에서 있었던 일 (창 12:10~20) 목록으로
< 가나안 땅의 아브라함과 이삭 >
주전2000년 초기
1. 이 말씀에서는 아브람이 거주하던 지역(벧엘과 아이 사이)에 기근이 있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점점 남방으로 간 것이 결국은 애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 이때에 아브람은 문득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을 떠났다는 생각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인들이 그의 아내 사래의 아리따움을 탐내어 자기를 죽이지 않겠나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3. 사람이 두려운 마음을 가진다면 한시도 편할 때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편안한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은 믿음 때문이요,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브람이 애굽에 이를 때에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역시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머물지 않고 흉년을 구실로 그곳을 떠났음으로 받는 보응이었을 것입니다.
4. 그러나 아브람은 그 지역에서 돌이킬 생각은 하지 않고 아내를 누이라 함으로 아내는 빼앗겨도 자기의 생명은 보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부부가 그렇게 약조하였습니다. “생명이 진실보다 귀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실을 본받는 생활과 하나님의 보살펴 주시는 은혜를 오히려 불신하는 것입니다.
5. 계획은 적중되었습니다. 애굽에 도착하자마자 아름다운 여동생을 동반한 아브람으로 알려져서 결국은 ‘사래’가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어가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아브람은 바로로부터 많은 노비와 짐승들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흉년은 피하고 재물은 증가된 셈이나 결국 그것은 아내를 판 대가였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실수와 거짓말의 결과였습니다. 정조를 빼앗길 위험에서 재물로 보상을 받았으니 이런 일은 현실세계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6.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가 사래를 취한 연고로 그에게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어떤 재앙인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래는 아브람의 아내”란 사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되찾아 주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1) 하나님이 아브람의 실수를 은혜로 간과하셨기 때문이요.
2) 아브라함에게 자손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창12:7).
7. 결국 아내의 몸값으로 종들과 가축을 받고 해방되었으니,
1) 성도는 우선 진실하고 보아야 할 것이며,
2) 하나님은
① 진실을 토대로 은혜를 베푸시고,
② 고난 중에라도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자를 보호하시며,
③ 자신의 약속은 어떤 형편에서라도 지키시고,
④ 인간의 연약을 긍휼로 간과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설교보충 11. 남방으로 옮겨감 (창 12:6~10) 목록으로
1) 가나안땅 세겜에 장막을 쳤던 아브람은 이리저리 이동하였습니다.
① 세겜에서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을 약속 받고(7절),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잠시 정착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그 다음에 약80리 남쪽 “벧엘”로 옮겨 거기에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8절). 벧엘의 남쪽 약50리 지점은 예루살렘(다윗 시대)이므로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③ 그런데 9절 말씀에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 마침내 애굽까지 갔으니 그 이유는 기근 때문에 양식을 따라간 것입니다(10절). 말씀 따라 행하고(4절), 약속의 땅에서 살며 제단을 쌓던 아브람이 흉년 때문에 이방 땅까지 간 것 은 잘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2) 오늘날 성도들도 말씀중심에서 환경중심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마다 기도하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서 어그러짐이 없도록 노력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따라 주택이나 직장을 잡으려 하지 않고, 주택과 직장을 따라 교회를 임의로 떠나는 성도들을 볼 때 아쉬운 마음을 느낍니다. 팔레스틴 땅은 옛날에는 갈릴리 바다의 물 공급을 못 받았기 때문에 천수만 기다리며 사는 곳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이 비를 주셔야만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그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함이 더 쉬운 일이고 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신8:6~10; 28:12).
3) 위 본문의 9절과 10절을 나누어 생각한다면 아브람이 벧엘을 떠난 다음 애굽 쪽으로 가면서 기근을 만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도는 약속의 땅 곧 은혜의 처소를 떠나면 복을 받지 못할 것이요. 또 성도의 시험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노력할 때에만 해결이 잘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설교보충 12. 복을 주시는 하나님 (창 12:2~3) 목록으로
1)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신30:15에서 “나는 복과 저주와 생명과 사망을 네 앞에 둔다”하셨고, 사45:7에서는 “하나님은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신다”고 하였으며, 본문에서도 “네게 복을 주어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며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하시고 그 근원되는 방법도 3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2) 이 복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시고 택정하신 자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아브람의 특별한 선행이 나타나기 전부터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계명을 잘 지킴으로 복 받는다”는 말씀(신28:1~14)도 있지만, 그보다도 더 큰 원천적인 복은 하나님의 작정 아래서 주시는 것입니다(롬9:11~13).
3) 하나님은 그 선택자에게 복을 주실 때, 때와 장소를 지정하여 주시기도 하십니다.
① 아브람이 복을 약속받은 때는 75세였고(4절),
② 또 가나안땅으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1절). 성경에 “들어가도 나가도… 무엇을 하든지 복 받는다”(신28:2~6)는 말씀은 보통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이요, 아브람에게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여 그 곳에서 복을 주시려 함은 그 지역이 복음전파의 시발지가 됨에 합당하였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이 비옥한 땅이기도 하였지만 동양과 유럽과 아프리카의 중앙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시발지가 팔레스틴 땅이요, 초대신앙의 근거지는 예루살렘이며, 현재는 어느 곳이나 말씀이 있는 교회가 복 받는 처소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사66:10).
4) 하나님이 복 주시는 내용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①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고,
② 이름을 창대케 해 주시며,
③ 복의 근원자가 되어 축복과 저주를 할 수 있게 하셨고,
④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 하셨고,
⑤ 그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신다(7절)고 하시므로 그 후손이 상당 기간 그 땅에서 영화를 누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 상당 기간이란 선민의 나라가 이방국에게 망하기까지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된 것이고(애5:22; 호9:17), 영적 견지에서의 가나안땅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기업의 모형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왕국으로 충분히 그 모형을 성취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복을 받는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고(4절), 롯도 함께 따라갔으며(행18:5; 고후13:8), 그는 아브람을 인하여 복을 받았고(창19:29), 또 제단 쌓는 일을 성실하게 하였습니다(7~8절).
설교보충 13. 아브람의 연약 (창 12:10~20) 목록으로
아브람의 신앙이 위대하여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도 간간히 연약함이 나타났다는 점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흠이 없을 수 없고 때로는 연약할 수도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1) 약속의 땅 가나안 지경을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줄을 알면 그곳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성령주실 것을 약속하여 그곳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행1:4). 또 이것은 말씀을 따라 살던 자가 환경을 따라 사는 자로 변한 것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애굽에 가서 큰 봉변만 당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2) 애굽 사람을 의심한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자기 아내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까 하는 의심과 염려를 한 것이었는데, 사실상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주며 바라는 것이라(고전13:7)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애굽 왕은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가 아닌 줄 알고 자기의 아내를 삼으려 한 것이었고 뉘우칠 줄도 알며, 사례하고 보상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함부로 남을 과소평가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아브람은 거짓말로 생명을 보존하려 하였습니다. 위기에 처하였을 때 연약하면 거짓말할 수도 있겠지요. 성도는 진실을 생명보다 귀히 여기고 또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시지 못하시는 분임을 아셔서 예수님처럼 진실하여지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딤후2:13).
4) 아브람은 아내를 쉽게 포기하고 그 대신 재물을 많이 얻었습니다. 19절에 “바로가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하였으니 정조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겠지만 결국은 아내의 몸값을 재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성도는 인위적 거짓수단보다 하나님의 보호를 더 열망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브람의 연약은 이후에도 또 나타납니다. 인간에게 연약이 있음은 당연하고 성도도 그럴 때가 있기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후에 또 시험에 든 일이 있었지요(창20:2). 아브람은 하나님의 선민인고로 하나님이 그 장래를 유익하도록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사48:17).
제 30 과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옴과 그 당시에 있었던 일 (창 13:1~18) 목록으로
창세기 13장은 “아브람”의 가족들이 애굽에서 나온 사실과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분하여 보면, ① 그 가족이 가나안땅 본고장(처음 단을 쌓은 곳:4절)으로 나온 사실과(1~4절), ②조카 롯의 가족과 분거한 사실과(5~13절), ③ 분거 후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약속하신 말씀(14~18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1. 그 가족이 애굽에서 나옴에 대하여(1~4절)
1) 아브람이 본래 애굽에 간 목적이 흉년 때문이었고, 흉년을 피함과 동시에 애굽 왕에게 아내를 빼앗겼다가 다시 찾았으며, 풍부한 육축과 은금도 소유하게 된 만큼(12:20), 다시 약속의 땅으로 나와야 함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2) 그래서 그는 모든 가족과 소유를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면서 “남방으로 올라갔다” 하였으니 아브람의 목적 방향은 전에 처음제단을 쌓았던 벧엘과 아이 사이였습니다. 그 지점은 애굽에서 볼 때 동북방 약 320㎞(800리)지점이므로 “애굽에서 남방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지중해 쪽으로 많이 오다가 거친 길을 피하기 위하여 지중해 쪽에서 사해바다 남쪽으로 돌아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창12:8). 그리하여 전에 장막 치고 처음 제단을 쌓았던 벧엘 동편에 와서,
3)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람이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영적으로 유익 없이 돌아온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뜻으로 드린 기도와 제사였을 것입니다.
4)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아무리 흉년이 들고 물질소득이 필요해도 불신앙의 고장이나 신앙의 자유 없는 세계로는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안일이나 물질보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는 것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마6:24).
2. 아브람이 조카 롯의 가족과 분거한 사실입니다(5~13절).
1) 롯과 분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① 롯에게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었으니 이는 아브람이 일찍부터 롯에게 물질을 나누어주면서 살아왔음을 알게 하는 것이요, 장막이 있었다는 말씀은 롯을 장가보내어 가정을 이루어 주었음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범 있는 고을에는 가서 살 수 있어도 삼촌 있는 곳에 가서는 못 산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삼촌이 조카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그 반대로 삼촌의 덕을 보면서 살았고 아브람은 조카에게 물질에 대하여 후하게 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 그 땅이 두 가족의 가축 떼를 수용하기에 좁았다고 하였습니다. 목장이란 본래 넓은 지역을 점유해야 하는데 아브람이 정착한 그곳도 초원지대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많은 짐승 떼의 거처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③ 이로 인하여 두 집의 목자들이 좁은 지역에서 각자 자기의 가축을 먹이려는 욕심 때문에 서로 간 다툼이 있었는데, 이런 다툼이 있는 생활을 그 지역에서 같이 사는 가나안사람이나 브리스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대단히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이유로 분거할 때에,
2)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정착지에 대한 선택을 먼저 하라고 하였습니다.
① 이것은 아브람이 조카를 내보낸 것이 아니고 서로 살기 좋은 고장으로 선택하여 나간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함으로 골육 또는 가족들 간에 더 풍족한 상태에서 평화 상존을 위하여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람도 그 지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② 조카 롯이 동남쪽 요단들로부터 소알(현재 사해바다 쪽)까지 바라보니 그곳에 물이 많고 소돔 고모라도 성이 멸망되기 전인지라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처럼 좋아서 그곳을 먼저 택하고 그곳으로 옮겨 소돔 성까지 가서 살게 된 것입니다.
③ 이때에 롯이 선택한 곳은 물질은 풍요로웠으나 소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미처 살피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④ 믿는 성도는 물질을 보기 전에 신앙의 조건과 이웃의 순결성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 없고 완악하며 욕심이 있는 사람을 대하려면 참으로 어렵고 실망이 갈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신앙조건부터 찾는 습관을 기르셔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1) 아브람은 두 가지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애굽에서 나온 일이고 또 하나는 롯에게 은혜를 베푼 일입니다. 롯에게 선택권(우선권)을 주어서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이 일이 있은 후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①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②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여기에 “영원히 이른다”는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 뜻 안에서 사는 한 오래도록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③ “네 자손을 티끌처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번성케 할 것이라.” 여기에 “네 자손”이란 아브람과 같은 신앙을 갖는 영적 자손을 전부 포함하는 말씀입니다(눅16:24; 롬4:11,17).
④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셨으니 땅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신다고 허락하셨으니까 합당하게 점유권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종횡으로 다녀 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축복을 헤아려보고 감사하며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보면서 감사하고 또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3) 아브람은 그 복된 약속을 받고 그 땅을 종으로 횡으로 다녀보기 위하여 우선 벧엘 동편 정착지에서 떠나 약 40Km 남방인 사해 서편 헤브론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사는 ‘마므레’의 소유 상수리나무숲이 있었는데(창14:13)(마므레는 장소이름으로도 쓰임) 거기로 장막을 옮기고 또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아브람의 생활 특징은,
1) 물질의 욕심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으며,
2) 다툼을 싫어하여 물질을 양보하면서 평화를 조성하였고,
3) 하나님이 베푸신 약속의 땅을 점유하기 위하여 그 땅 안에서만 정착을 하였으며,
4) 하나님의 복을 약속받으며 감사와 기도와 제사를 성실하게 드렸음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4. 바른선택과 축복 (창 13:1~13) 목록으로
신앙생활의 승리는 선택을 잘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안 믿는 것의 선택,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피조물을 의지하는 것의 선택,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과 자기의 정욕대로 사는 것과의 선택 등의 갈림길에서 지혜롭게 행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성도가 어떤 선택을 바로 해야 할까요?
1) 신앙과 물질 중에서 먼저 신앙을 택해야 합니다. 아브람의 부친 데라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창11:31)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물질의 고장을 떠난 것이었고, 또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온 것도(창12:4) 역시 신앙중심이었으니 이때에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다”고 하셨습니다. 롯은 아브람과 분거할 때 물질과 현실을 보고 소돔지역을 선택하였으니(창13:10) 이것은 아브람이 자신의 현실적 선택권을 양보한 때문이었으므로 아브람은 먼저 신앙적인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2) 이방적 교제와 현실성에서 하나님과의 경건생활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방적 교제란 불신앙 세계와의 혼돈된 생활을 의미하며 현실성 역시 현세욕으로 만족함과 목적을 삼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아브람의 애굽 생활, 이스라엘의 애굽 생활 또는 나오미의 모압 생활 등이 그런 실례입니다. 롯이 현실성을 앞세우는 소돔성에 간 것에 반하여 아브람이 헤브론의 상수리수풀을 선택하고 그곳에서 제단을 쌓은 것은(18절) 그가 현실을 위주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조용한 교제와 경건을 선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썩어질 것을 취하면서 즐거워하지만 성도는 그보다도 하나님을 더 기뻐하며 만족함으로 현실적인 것들을 소극적으로 상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갈5:24; 빌3:7). 이렇게 되면 서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불신자가 신자를 볼 때 ‘무슨 맛으로 사는가’하게 되고 성도 역시 불신자의 생활을 볼 때 역시 가치관과 목적을 상실한 상태에 대한 실망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이런 가치관의 선택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 신앙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 한 말씀(요삼2)처럼 아브람이 경건을 선택하였을 때 하나님은 또 복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13:14~ 17).
3) 성도는 진실과 거짓에서 바른 선택을 과감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은 믿음의 요소이고 성도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참이시며 거짓을 알지도 못하시고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딤후2:13; 약6:17~18).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꼭 진실하여야 합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가서 그들의 완악을 예측하고 아내를 누이로 나타내는 거짓을 꾸몄으니, 이는 그의 연약이며 또 ‘위험한 환경을 접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 왕을 책망하시고 구출해 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택한 자요 연약한 자의 어려움을 더 잘 보살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일단 진실을 지킨 다음에 하나님의 보호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4) 평화와 갈등 사이에서 평화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살면서 또 자기 아내까지 피해를 보면서 싸우지 않았고, 애굽 왕과 화해를 하였습니다(창12:19~20). 또 롯의 가족과의 싸움도 피하기 위하여 분거하였고 ‘헤브론’에서도 ‘마므레’의 형제들과 동맹한 사이로 산 것은(14:13) 역시 평화 애호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화평을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창12:19~20). 야곱은 20년 만에 에서와 화해하는 일을 성취하였습니다(창33:10~11). 성도는 어떤 대상과도 화해하고 화목하며 사랑하는 사이가 되도록 인내와 이해와 양보와 봉사로서 하나님이 주신 ‘화목케 하는 직책’을 잘 수행하여야 할 것입니다(고후5:18). 혹 불편한 관계로 서로 멀리하게 되는 대상은 없는지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롯처럼 선택을 잘못하면 큰 곤욕을 겪게 될 것입니다.
1) 그는 삼촌 아브람 앞에서 거주지 선택의 우선권을 양보하지 않고, 물 많고 비옥한 평야를 선택하므로 물질적 풍요의 덕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2) 그곳 백성들의 악함과 그 지역이 엘람국의 식민지였음을 살피지 않은 것이 그의 경솔함이었습니다(창14:4).
3) 이로 인하여 롯은 생활의 고충과(벧후2:8) 전쟁과(창14:1~16) 재앙을 맛보았으니(창19:23~28) 이것이 다 선택을 잘못함에 따른 결과인 것입니다.
제 31 과 롯이 전화(戰禍)를 당하고 구출 받음 (창 14:1~16)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롯이 전쟁의 화를 당하였다가 아브람의 군사로 말미암아 구출 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두 대목으로 나누면, ① 전쟁으로 화를 당하는 기록이요(1~12절), ② 아브람의 군사의 힘으로 구출 받는 내용입니다(13~16절).
1. 이 전쟁의 시기는 아브람과 롯이 분거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난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 이유는 롯의 가속이 연합군에 출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화(戰禍)만 입었기 때문입니다.
2. 전쟁의 침략국은 동방 바벨론과 앗수르 지역에 있는 4개국 나라 왕들이었습니다.
1) 시날 왕 “아므라벨”이니 이 나라는 갈대아 우르 지역의 왕이요.
2) 엘라살 왕?아리옥”이니 이 나라는 유프라데강 북쪽에 있는 지역이요.
3)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니 이 나라는 갈대아 우르 동쪽 하류지역으로 현재 쿠웨이트 영지 동북방이며 이 왕이 침략의 주동역할을 하였고(5절),
4) 고임 왕 “디달”이니 이 지역은 앗수르 동방 고원지대에 속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왕들은 모두가 가나안 땅 동북방의 수 천리 떨어진 지역의 왕들로서 원정의 꿈을 이루려고 시리아 땅 “다메섹”에서부터 출발하여 가나안 남방 신광야까지 내려왔다가 올라가면서 싯딤 골짜기에 진을 치고 소돔 고모라성을 침략하게 된 것입니다.
3. 이들은 또 다메섹 지경에서 요단강 동쪽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여러 지역을 정복하면서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1) 갈릴리 동편 땅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족’을 쳐부수고,
2) 요단강 동편 땅 “함”에서 “수스”족을 쳐부수고,
3) 사해동편 “사웨기랴다임”에서 “엠”족속을 쳐부쉈으며,
4) 또 사해 동남방 “세일산”에서 “호리”족속을 쳐부수고,
5) 계속 남하하여 “엘바란”즉 ‘에일랏’(현재)까지 내려왔다가,
6) 다시 지중해 쪽을 향하여 광야 중앙지역인 엔미스밧(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을 쳐부수고,
7) 다시 동방쪽 ‘하사손 다말’에 이르러 아모리 족속을 쳐부수고,
8) 다음에 소돔성을 쳐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둔 이유는 4개국 정예부대인 원정병을 격퇴시킬 만한 국방준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면 이 침략자들이 소돔 고모라를 쳐들어와야 할 이유가 있었는가 할 때 소돔성 지역의 5개국 왕들이 12년 동안이나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13년째에 와서 이를 배반하니 엘람왕은 주위 4개국의 동맹군을 모아 가지고 1년간 준비한 후 14년째 될 때에 출정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롯이 선택하여 살게 된 지역은 물질의 풍요는 있었으나 죄악상으로도 문제가 컸고 또 외교 정치면으로도 어려움을 갖고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침략군이 소돔에 이르자 그 지역의 5개국 왕은 동맹군을 결성하여 싸움에 임하였는데 결국은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1) 이때에 동맹한 왕들은,
① 소돔 왕 ‘베라’와,
② 고모라 왕 ‘비르사’와,
③ 아드마 왕 ‘시납’과,
④ 스보임 왕 ‘세메벨’과,
⑤ 소알 왕 ‘벨라’였습니다.
그러면 이 다섯 왕국이 대략 어디에 있는 나라들인가 할 때 이 나라는 전부 사해 바다가 바다 되기 전 비옥한 땅으로 있었을 당시의 그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작은 성읍 왕국들이었습니다. 작은 부족사회로서 한 왕국을 세우고 살았던 것인데 그 지역이 워낙 비옥하고 물자가 풍부하다보니까 마지막 소득의 대상으로 침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소돔 지역의 5개국 왕은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2) 그들이 패배한 원인은,
① 소왕국들로 군사력도 약하였겠지만,
② 소돔과 고모라 왕이 도망을 하다가 역청 구덩이에 빠지므로 전쟁을 계속 못하게 되어 남은 병사들이 산으로 도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③ 그러나 그 지역의 거민들이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창13:13)”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전쟁의 피해를 받도록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3)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과 가속들이 피해를 당하고 또 포로로 끌려가는 중에 롯과 그의 가족들도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4) 그런데 이 소식이 도망한 자의 전달을 통하여 서쪽 약 30Km 떨어진 헤브론에 사는 아브람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6. 아브람은 이 소식을 듣자 즉시 출정에 나섰습니다.
1) 아브람은 헤브론 땅에서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수풀 근처에 거하면서 마므레 부족(에스골과 아넬의 형제)과 동맹하여 살던 처지라 그는 평화롭게 살면서 318명의 가족군인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2) 그래서 그들을 출동시켜서 도망간 자들을 추적하였는데 우선 갈릴리 바다 북쪽 38Km 지점인 “단”까지 쫓아갔고(전체의 출정거리는 약 190Km) 그곳에서 군인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동북방 60Km 지점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추격하여 귀국하는 침략군들을 격파하고 모든 사람들과 전리품을 다시 빼앗아 오므로 롯과 그가 살던 나라들이 전화(戰禍)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1) 롯이 삶의 고장을 선택할 때 물질 중심으로만 선택하고 죄악과 정치적 문제를 살피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음을 알 수 있고,
2) 전쟁과 패배의 원인이 전쟁준비가 미비한 탓도 있겠지만 방비하는 왕들이 자기 고장의 역청 구덩이에 스스로 빠져서 대항도 못하고 도망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죄 값을 갚아주시는 심판일 수도 있으며,
3) 하나님은 악인들 중에서도 의인을 구출하시는 섭리가 있어 결국은 아브람을 통하여 롯과 모든 나라의 포로들을 다시 구원할 수 있게 하신 것은 의인이 악인과 함께 망하지 않으며 일반 백성이라도 의로운 성도의 덕을 보게 하심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4) 성경지리를 살피시면서 아브람 때의 전쟁의 역사를 더 생생하게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제 32 과 아브람이 이기고 돌아왔을 때 (창 14:1~24) 목록으로
아브람이 엘람의 동맹군들을 호바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파하고(17절) 모든 인민과 조카 롯의 가속(부녀)과 모든 재물을 다시 찾아서 이끌고 돌아올 때,
1. 소돔 왕 벨라가 사웨골짜기(왕곡=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지역)까지 마중 나와서 아브람을 영접하였습니다.
2. 또 그 다음에는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람을 만났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1) 아브람 시대의 “살렘”은 ‘예루살렘’으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 이유는 시76:2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하였는데 “시온”은 예루살렘 서남편의 산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 산의 좌우편에 힌놈의 골짜기와 기드론이 있습니다. “살렘”은 평강이란 뜻을 가진 지역으로 아브람 때에도 왕정통치를 시도한 지역임이 틀림없습니다.
2) 그 지역의 왕은 멜기세덱인데 이 이름의 뜻은 “의의 왕”이란 뜻이며, 또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므로 그는 왕과 제사장의 직임을 겸임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 시대에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으로 지명되어 나타난 직분인데 이 직분이 멜기세덱 이전에는 특정인으로 나타난 바가 없었고 멜기세덱 이후에도 특정인으로 나타난 바가 없다가 약 500년의 세월이 지난 후 모세 시대에 와서 율법으로 세워지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율법으로 세워지는 제사장이 영원하신 중보자 메시야의 모형자인 것처럼 살렘 왕 멜기세덱도 메시야의 예표적 인물임은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그 멜기세덱 왕(제사장)이 왜 아브람을 마중 나와 만났을까요? 그 이유는,
① 인근 소돔지역의 전쟁의 피해를 회복시켜준 지원병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함이요.
② 시장한 군인들에게 떡과 포도주의 양식을 전달하기 위함이며,
③ 제사장의 자격으로 축복하기 위함이요.
④ 아브람의 소득의 십일조를 받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이요.
⑤ 그가 메시야의 모형적 인물임을 나타내려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히11:3에서 “멜기세덱은 부모도 없고 족보도 없으며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며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멜기세덱의 출현이 신비와 이적성을 지니고 나타났던 사실을 말씀하여 메시아와 방불한 모형자임을 드러내신 것이며, 또 히7:11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 아니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셨다”고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레위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에서 탄생하신 것과, 율법의 제사장이 메시아의 모형이기는 하지만 모형적 율법의 계율은 세례 요한의 때까지로 끝나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오신 것이 마치 처음과 나중을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의 사람 멜기세덱의 제사장의 반차를 이어받아 오신 것과 같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 멜기세덱이 그리스도의 모형자이기 때문에 떡과 포도주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희생의 제물로 허락하심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십일조의 제도는 아브람 때에도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전리품을 받지 않았는데 무엇으로 십일조를 드렸을까 하지만 아브람이 양보한 것은 소돔왕과의 관계뿐이었으므로 그 이외의 소득이 있었을 것입니다(20,23절).
3. 소돔 왕과 아브람 사이에서 협정된 일에 대하여(21~24절)
1) 소돔 왕은 그 당시에 피해를 입은 여러 왕국 중 대표적인 왕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보답하는 뜻으로 “사람만 돌려주고 물품은 다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소돔왕의 보답이 후한 것인지 박한 것인지는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그 당시는 보화보다 인명을 중시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물질만 가지라”는 보답이 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 그러나 아브람은 일체의 대가를 받지 않고 거절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쟁으로 승리한 보상을 일체 받지 않은 것입니다. 흔히 강대국이 약소국을 도와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주었다면 그 대가로 주권행사를 하려는 것이 보통이지만 아브람이 이런 공치사를 일체 사양한 것은 귀한 봉사가 아닐 수 없으며,
3) 또 자신이 어떤 경우로라도 물질을 소득하였을 때 “소돔 왕이 전리품을 양보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알려진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물질을 거절한 것입니다.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또 하나님의 허락으로 부요해 질 수 있음을 아는 고로 잘못된 소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어둡게 할 수 없다는 영광의식이 아브람에게 가득한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 손들고 맹세하므로 물질적 사례를 거절한 것입니다.
4) 다만 전쟁 중에 소년 군인들이 먹은 것과 아브람을 도와서 함께 싸워준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 삼 형제의 분깃은 그들이 취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함으로, 자신의 분깃만 양보하고 다른 이의 특권에 대하여는 일체 침해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는 아브람과 같이 헤브론에 살고 있는 원주민 형제들로 함께 동맹하여 살던 이웃이었습니다(14:13).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1) 멜기세덱의 출현이 메시야의 예표적 계시였음을 아셔야 할 것과,
2) 아브람의 봉사활동,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세심한 주의,
4) 다른 사람의 특권을 침해하지 않는 생활,
5) 신앙적으로 혼돈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방인과 화목하고 협력, 동맹하는 생활의 덕을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5. 십일조에 대한 신앙 (창 14:20) 목록으로
1. 위 본문에서 처음으로 “아브람이 그 얻은 것의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드렸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람 때도 십일조 헌금제도가 있었음을 알려주신 것이며 그 십일조는 아브람이 그 얻은 것(소득) 중 1/10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입니다.
2. 아브람의 손자 야곱도 창28:22에서 소득을 주시면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하였으니 이는 조상의 생활을 본받은 일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3. 모세시대에 와서 이 십일조 제도를 율법으로 제정해 주셨으니 레27:30~33에서 농작물과 가축생산물의 십일조 드리는 법을 말씀하셨고, 여기에 따라 다른 소득의 십일조도 포함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14:20; 삼상8:15).
4. 구약시대에 이 십일조 헌물은 제사장의 생활을 위하여 쓰게 한 일도 있으니 먼저 레위인들에게 주면(민18:21,24; 느10:37) 레위인이 또 그 중의 십일조를 드려(민18:26~ 27) 제사장의 분깃으로 돌렸습니다(민18:26~28; 느10:38).
5. 이 제도는 이스라엘 선민 중에서 계속되었고 차차 시행이 나태하여지자 히스기야 왕이 다시 강조한 일이 있었으며(대하31:4~6) 포로후시대에는 느헤미야 총독도 강조하였습니다(느13:10~12).
6.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엄격하게 시행하였고(마23:23),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눅18:12), 예수님도 그 시행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23:23).
7. 이 십일조 제도가 율법으로 주신 것인즉 율법과 함께 폐지된 것이 아닌가? 할때 이 제도는 이 제도는 폐지된 것이 사실입니다(롬10:4) 그러나 이 제도는 모형적 제도(제사의식처럼)가 아니요. 하나님을 섬기는 도덕적 실천의 봉사제도이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가 자유의사에 따라 시행할수도 있읍니다.
8. 그러나 십일조의 은혜를 깨닫고 성경을 통하여 만물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밝히 아는 성도는,
1)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과,
2) 먼저 자신을 주님께 헌신해야 함과(롬12:1, 고후8:5),
3) 소득의 십일조 헌납이 최하 수준의 물질을 드리는 것임과,
4) 그로 말미암아 약조된 복을 더 많이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시행하셔야 하며(말3:10),
5) 하나님이 적게 쓰시고 우리로 하여금 많이 쓸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도 감사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제 33 과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 (창 15:1~21) 목록으로
창세기 15장의 말씀을 보면 아브람이 소돔 백성들과 롯의 전쟁피해를 회복시켜준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약속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구분해 보면, ① 하나님이 이상 중에 복을 선포하여 주신 것과(1~5절), ②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이를 의로 여기사 하나님이 자기를 기업주시는 여호와로 밝혀 주심과(6~7절), ③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증을 구한 일과(8~9절), ④ 아브람의 제사를 응답하심에 대한 것과(10~12,17절), ⑤ 아브람이 잠든 중에 꿈의 계시로 그의 후손들의 미래에 될 일을 예언해 주신 것과(13~16절), ⑥ 제물의 응답과 함께 언약을 주시는 말씀(17~21절)으로 되어 있어서 이 말씀 전체의 제목을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선포해 주심에 대하여(1~5절)
1) 이 말씀은 어느 날 밤(5절) 이상 중에 주셨습니다. 이상(異常)이란 평상시와 다른 정신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베푸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히1:1). 우리는 흔히 “이상”이란 뜻을 “異像”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창46:2에는 그렇게 나타났습니다. 앞의 이상은 영어의 uncommoness이고, 뒤의 이상은 vision이란 뜻으로 다른 원문이 사용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본문의 이상 “마라”는 정상의 입장에서 변화된 상태를 의미하고, 뒤의(창46:2) 이상(마레)는 환상 같은 영상에 도취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아브람을 복의 대상으로 선택하여 복을 선포하신 내용은,
① “두려워 말라” 하시므로 전쟁의 위험 등에서 보호 또는 승리할 것을 확신케 하셨고,
② “나는 너의 방패라”하시므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로 하나님은 선민과 사랑하는 자의 방패가 되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③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하심으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지극히 큰 상급(좋은 은혜)을 베푸시는 분이며 또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지극히 큰 상급”이 무엇일까요? 이는
㉠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롬4:16,17)
㉡ 그의 후손 중에서 메시야를 보내어 구원의 복을 주시는 일(12:2~3; 26:4)이라 할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한 이 상급은 그와 같은 믿음을 갖는 모든 영적 후손들에게도 함께 주시는 은혜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롬4:16).
3) 이때에 아브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상급이 되신다는 말씀을 듣고,
① 하나님이 제게 늦도록 씨(자식)를 주시지 않으셔서 이미 “하란”에서 살 때부터 데려다 키운 종 다메섹(하란 근처 앗수르 수도)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내정하고 있는데 어떤 상급을 주시렵니까? 하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람은
㉠ 씨(후손)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 그 하나님이 씨를 안주셔서 무자한 것도 믿었으며,
㉢ 그 방책으로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내정하여 그에게 축복이 계승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무엇을 내게(상급으로) 주시렵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 때는 아브람의 나이가 거의 100세 가까이 이를 때였을 것입니다.
② 이때에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라”하시고,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하늘의 별을 헤아려 보게 하시면서, “네 자손이 별처럼 무수하게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는 구원의 후손이 혈육의 후손(네 몸에서 날 자; 4절)으로 시작하여 혈육을 초월한 믿음의 후손(롬4:16)에 이르기까지 많아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이 때에 하나님은 아브람이 이 약속을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6~7절).
1) 인간에게는 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의가 있어서 이것을 의로 여겨주셨으니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롬4:18).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귀하게 , 또 의롭게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 인간 아브람 자신에게서 창출된 것인가? 할 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주”(히12:2)는 예수님으로 예수님이 중생의 은혜로 믿을 능력을 주셔야 하지요(엡2:1; 요3:3). 그렇다면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믿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주신 물질로 하나님께 헌금하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요. 시험의 예제를 내주고 그것으로 시험을 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믿음을 구원받을 의로 여겨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2) 하나님은 아브람이 자기의 말씀(언약)을 믿는 것을 기쁘게 여기시면서 “나는 이 땅(가나안 지역)을 네게 업으로 주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이끌어낸 여호와라”고 자신을 알려주셨습니다. 여기에서,
① 하나님은 가나안 땅 즉 현실의 복도 주시는 분이시요,
②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인도하실 때 아브람을 중심으로 이끌어내신 분임을 알려주셨으니, 그 때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를 인도하셨지만 결국은 자신을 하나님이 아시고 인도하셨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셨고(7절), 소돔의 롯의 가족도 멸망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창19:15). 이와 같이 우리도 죄와 환란에서 이끌어내실 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시40:2).
3. 아브람이 확증할 수 있는 증표를 구함에 대하여(8~11절) 1) 8절을 보시면, 아브람이 “이 땅으로 업을 삼게 될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하므로 가나안 땅이 자기의 소유 될 일에 대하여 믿을 만한 확증을 구한 것입니다.
① 이 확증은 후사를 주시고 후손의 번성과 구원을 주심에 대한 의심을 인한 요구가 아니고 다만 가나안땅을 얻게 됨에 대한 더 큰 확증을 구한 것이었으며,
② 또 약속받은 땅은 그 당시 그 지역에 비어 있는 공지가 아니고 이미 정착한 본토족속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확증을 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본토족속들을 어떻게 하시고 그 땅을 내게 주시려 하십니까? 의 뜻인 것입니다.
③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무조건 믿는 것이 가장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이 갈 때에 확증을 얻도록 노력하는 것은 무조건 믿는 신앙만은 못하나 그래도 믿음을 갖기 위한 것이므로 유익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성경에 자주 있습니다(삿6:36~40; 사38:8).
④ 하나님은 그 증표에 관한 응답으로 3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취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제사 드리는 방법에 대하여는(율법 이전의 시대이므로)어떻게 알려졌는지 알 수 없지만 아브람에게 특별한 계시나 전통으로 알려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명하신 대로 제물을 취하여 짐승은 중간을 쪼개어 마주 대하여 놓고 새는 쪼개지 않은 상태로 진설하였는데 그만 제사에 응답이 늦어지면서 솔개가 그 사체(제물)를 먹으려 내려 올 때는 아브람이 쫓았다고 하였습니다.
2) 그러면 이 제사가 아브람에게 확증을 주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할 때 하나님은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고 확증될 만한 말씀의 계시를 계속 더 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자가 더 많이 기도하고 연구하며 기도와 순결을 가질 때 영의 눈을 밝혀 깨닫게 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4. 아브람의 제사를 응답하셨음에 대하여,
1) 그 제사가 해지기 전에 드려진 제물인데 속히 응답되지 않으므로 해질 때까지 솔개를 쫓다가 아브람이 깊이 잠이 들었었고 해질 때에 비로소 꿈 중에 말씀이 있은 후(11~12절) 어두울 때에야 지나가는 불로 응답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응답하신 방법은 불로 태워 없앤 것이 아니고(왕상18:38) 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났다고만 하신 것입니다(17절).
2) 따라서 이 제사와 응답을 낙관적으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낙관적으로 보기 어려운 것은,
① 제물을 사체(11절) 또는 고기(17절)라 하셨고,
② 아브람이 솔개를 쫓다가 깊이 잠들었으며(12절),
③ 해지기 전에 드려진 제사를 해질 때에야 말씀으로 응답하셨고(12절) 다음에 어두웠을 때에 불로 응답하실 만큼 열납이 지연된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긍정할 수 있는 사실은,
① 말씀의 응답과,
② 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통과를 한 것입니다. 일단 말씀으로 응답을 하셨으니까 늦은 감은 있으나 열납이 된 것이고, 또한 불로 응답하신 사실도 처음 있은 일입니다(창8:21; 12:7-8; 13:18; 33:20; 35:1-7;출17:15; 24:4-16). 창35:7과 출24:16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주신 그 자체를 응답으로 표현하였고, 왕상18:38에서는(800년 후) 엘리야의 제물을 불로 사르신 일이 있는데 아브람의 제물이 불살라진 것만은 못하나, 쪼갠 고기 사이로 불이 지나갔고 또 이 사실이 성경에 처음 나타난 응답의 표시이니까 응답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물을 “시체와 고기라”표현한 것과, 아브람이 잠잔 것과 해지고 어두울 때까지 응답이 지연된 것과 두려움이 임한 것은 분명히 제사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저희들은 예배를 잘 드려야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것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문제를 검토한다면,
① 제단 쌓는 문제이고,
② 제물 선택이며,
③ 제사 드리는 방법의 정성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이 제사에서는,
① 제단에 대하여 알 길이 없고,
② 또 모든 것을 취하여(10절) 드렸기 때문에 제물에 대하여도 잘못이 없으므로,
③ 결국은 제사 드린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람 이후 약 500년 만에 주어진 율법을 보면 레1:1~17에서 소나 양이나 염소는 각을 뜨고 내장과 함께 단에서 불살라 화제로 드리게 되어 있고, 비둘기는 몸을 찢되 아주 찢지 않은 상태로(레1:17) 불살라 화제로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대로 비교한다면 아브람의 제사에서 불에 태우지 않은 것과 비둘기를 찢지 않은 것과 또 응답이 늦어지므로 깊이 잠을 잔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늦게라도 그 제물을 받으시고 말씀으로 나타나 주셨으니 이것 또한 용서하시고 간과하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예배나 기도가 조금 부족하게 나타날지라도 긍휼로 응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5. 제사를 열납하실 때 아브람의 후손들의 될 일을 예언하셨습니다(13~16절).
1) 이때는 아브람이 제사에 경성하지 못하고 깊이 잠든 상태에서 꿈으로 계시를 주셨습니다.
2) 꿈에 캄캄함이 임하여 아브람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아브람에게 책망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3)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길 것이고 그들은 네 자손들을 400년 동안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을 징치할 것이며, 그 후에 네 자손들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네 자손은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요구한 확증의 응답이었으니 즉 500년쯤 후에 그의 자손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4대’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객이 된지 400년 동안을 100년을 1대로 계산할 수도 있으나,
2) 객이 될 때 야곱의 12아들로부터 4대 후라고 봄이 더 적합합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레위의 4대 손이고 갈렙이 유다의 4대 손이기 때문입니다. 이 4대란 기점은 객이 된 때부터 (아브람의 손자 야곱이 가나안을 떠난 때부터) 계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16절).
3) 이렇게 400년 동안 이방에서 기다리게 하신 이유는 그 당시에 가나안 땅을 점유한 아모리 족속(대표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의 백성들의 죄악이 관영할 때를 기다려 그들을 심판하시는 때에 그 땅을 선민에게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선민에게 주시는 약속과 축복이 이방인의 죄와 결탁되어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으시므로 성도는 믿고 고난을 참으며 기다리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제사응답 후에 주신 언약의 말씀입니다(17~21절).
1) 하나님은 언약을 세워 자신의 예언적 약속을 더욱 믿게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그 가나안 땅을 더욱 확장시켜서 “애굽강(홍해 또는 나일강인 듯)으로부터, 유프라데강까지를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신다” 하셨고, 그 지경은 겐 족속, 그니스 족속, 갓몬 족속, 헷 족속, 브리스 족속, 르바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기르가스 족속, 여부스 족속들이 사는 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아브람 후손에게 주시는 땅을 가나안 일경뿐 아니라 애굽강과 유프라데 지경까지 확장하신 것은 축복에 따라 선민의 거주지를 넓혀주실 수 있음을 나타내신 것인 바 그 땅이 애굽과 바벨론 국경 이내에 속할 것을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과연 이스라엘 민족은 솔로몬 왕 때와 여러보암 2세 때에 그 지경의 영토를 확보하여 통치한 일이 있었습니다(왕상6:65; 왕하14:25~28). 유프라데강은 팔레스틴 북쪽 경계 “하맛”을 의미합니다(민13:21; 34:8).
4) 그리고 19절 이하의 열 족속은 그 당시에 약속된 지역에 이미 정착한 족속들로서 “겐”족속은 “그니스”족속과 함께 유대광야 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모세의 장인도 그곳에 거주한 일이 있었으며(삿1:16) 갓몬 족속과, 르바 족속은 동방 유프라데 지경에서 이주한 족속이고(14:5), 그 이외의 족속들은 다 팔레스틴 전역에 정착한 본토족을 의미합니다. 이 족속들의 발생근거와 이주 정착과정을 다 살피려면 더 많은 연구를 하셔야 합니다(대상1:1~54).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이 관영할 때 그들을 진멸하시고 그 땅을 아브람의 선민적 후손들에게 주시기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7. 결론적으로 창세기 15장에서는,
1) 하나님이 선민을 택하사 복을 주신 은혜와,
2) 은혜를 받을 자에게 믿음을 갖도록 인도해 주시는 일과,
3) 하나님의 약속을 500년 후라도 성취시켜 주시는 것과,
4) 정성된 제사를 받으신 다음에 말씀으로 응답을 주시며,
5) 패역한 족속을 심판하시고 그 지역을 선민에게 주시며,
6) 악인의 패역이 관영할 때까지 선민을 기다리게 하시고,
7) 선민을 학대하는 백성도 심판하시며,
8) 심판과 구원을 아울러 시행하시고,
9) 아브람의 장수와 구원을 보장해주시며,
10) 또 아브람의 믿음을 구원받을 의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배우게 해주셨습니다.
설교보충 16.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창 15:6~7, 롬 4:16~22) 목록으로
이 시간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아브라함’ 하면 믿음 좋은 사람, 축복 많이 받은 조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하였고, 그 의의 값으로 “가나안 땅을 복으로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1. 아브라함의 의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1) 아브라함의 의가 악인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의였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는 아무리 노력을 잘해보았다 하더라도 그 값이 적기 때문에 결코 구속의 대가를 지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사함 받는 구속의 대가’는 ‘예수님의 의’라야만 이룰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는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전폭적으로 순종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심”이요, 저희들이 그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2) 욥25:4~6을 보시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겠느냐?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하지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하였고, 사64:5에서도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약함이 잎사귀 같아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몰아간다” 하심으로 인간의 의는 어디에도 내세울 것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3)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의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창15:6). 롯도 의로운 인물이라 하였고(창20:4), 욥도 의롭고 순전하다(욥1:1; 12:4)하였으며, 신약의 인물인 요셉이나(마1:19) 고넬료도(행10:21, 35)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칭찬 받고 인정받은 인간의 의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성실함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의도 하나님께 대한 인간적 신앙행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은 보통사람보다 그 신앙행위가 특별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의를 값진 것으로 여겨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겨주셨다”는 말씀은 본문에도 있고, 롬4:3,4에서도 말씀하였는데 인간에게 많은 부족이 있지만 신앙의 정성이 상당한 것을 보아서 더 많은 대가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5)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 때문에 믿음의 조상도 되었고(롬4:11), 복의 근원자도 되었으며(창12:2), 만 백성의 조상도 되었고(롬4:17), 또 할례자 즉 유대인의 조상됨과(롬4:12; 4:18) 한 나라를 이룩할 수 있는 영토인 가나안땅까지 선물로 받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2. 이 시간에 저희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어떤 믿음을 보시고 그렇게 칭찬해 주시고 인정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 듣는 특권을 놓치지 않은 것처럼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 받는 것을 족하게 여기고 사모한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 창17:1을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창18:18에서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만큼 ‘말씀듣기를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는 자를 대단히 좋게 여기시는 것입니다(계1:3).
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믿을 뿐만 아니라 약속으로 주신 말씀이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믿고 기다리는 신앙이었습니다. 롬4:17~18을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실 때 “그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라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단산한 나이에도 “자손이 많으리라”는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또 히11:11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그와 같은 믿음이 있어서 “그가 단산한 상태였지만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로 믿었기 때문에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의 진실성을 변함없이 믿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농촌의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을 약속하였는데 별안간 남자가 이민을 가면서 아무 때라도 돈 벌면 신부를 데리러 온다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처녀는 이웃의 권면 때문에 혼인을 하였고 그 남편의 사업실패로 큰 고생을 하는데, 몇 년 후 이민 간 첫 남자가 많은 돈을 벌어가지고 신부를 데리러 왔다니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이와 같이 성도들도 주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는 신앙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3)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순종하고 보았습니다. “하란을 떠나라” 하셨을 때에 갈 곳도 모르면서 방향만 따라 간 사람이고(창12:4; 히11:8), “첩과 첩의 소생을 내어 쫓으라”하셨을 때도 인정에 얽매임이 없이 시행한 사람이며(창21:14), “독자 이삭을 바치라” 하셨을 때도 죽은 자를 되살려 주실 줄로 믿고 의연히 바쳤으니(창22:12), 아브라함의 순종의 미덕은 마치 기계처럼 순종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순종과 행위로 믿음의 값을 계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4) 아브라함은 예배와 기도를 힘쓴 신앙가였습니다. 창12:7에서 단을 쌓았고, 9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13:18에서도 단을 쌓았고, 창15:9에서도 제사를 드렸으며, 심지어는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까지 제물로 드렸으니 그의 예배행위가 성실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또 창18:22에서 소돔의 의인을 구하기 위한 간절한 기도는 역시 아브라함의 경건성을 충분히 나타내 준 것이요, 이것이 바로 예배와 기도를 힘쓰는 신앙인 것입니다.
5) 시험을 잘 이기는 믿음입니다. 히11:7을 보시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독자 이삭을 드렸다” 하였고, 롬4:19에서는 “나이 100세가 되어 생명의 후사가 끊어졌음을 알면서도 그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어려운 시험이 닥치면 용기와 지혜가 더 생기는 신앙이었습니다. 저희들도 꼭 그런 믿음을 가져야만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 더 큰 복을 받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 외에도 아브라함은 메시야의 때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기뻐하였고(요8:56) 또 본향을 사모하면서 장막생활을 하였으며(히11:16)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고(히11:19), 물질생활을 양보하는 생활의 미덕을 보였습니다(창13:9). 아무쪼록 아브라함의 좋은 신앙을 저희들도 잘 본받아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주시는(롬4:16) 모든 약속을 성취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34 과 아브람의 취첩과 그 결과 (창 16:1~16) 목록으로
창세기 16장은 아브람이 첩을 얻어 아들을 낳음과 본처와 첩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에 대하여 처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아브람이 첩을 얻은 때는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온지 10년 후이며(3절), 아브람의 나이 85세 때였습니다. 그는 86세에 첩의 몸을 통하여 처음 아들을 낳았습니다(15절). 창12:4에서 그가 하란을 떠난 때는 75세였으므로 사래와 혼인한 후 오랜 동안 자녀 없이 살았고, 그가 자녀를 갖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처 “사래”를 통하여 잉태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2절). 하나님이 사래로 하여금 잉태하지 못하게 하신 이 는 때가 되면 약속으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만일 성도의 가정에 자녀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1) 우선은 꼭 자녀가 필요한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옛날 부족사회시대에는 종족의 가치가 대단하였고 또 자녀를 축복과 힘으로 알았으며, 만일 자녀가 없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로 생각하여 큰 불행으로 알았습니다(출23:26; 신7:14). 그러나 오늘의 시대에는 자녀보다 돈이나 안일한 생활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어서 옛날처럼 그렇게 자녀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 성경에서 자식은 은혜요 상급이며 기업으로 주셨다(창33:5; 시127:3)고 하셨으니까 귀한 복이요 또 복의 계승자이지만 자녀의 복보다 더 큰 복이 없는 것이 아닌 이상 죄를 범하면서까지 자녀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하고, 3) 또 성도에게는 하나님 이상 더 좋은 대상이 없기 때문에(시73:25) 자녀가 없어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첩을 얻은 것은 그만한 신앙이 없었을까요.
1) 우리는 아브람이 자식을 필요로 하였음에 대하여 우리의 현실에서 당면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기의 자손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의 사랑하는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세우려고 하였으니까요. 그런데 아브람이 수십 년을 자식 없이 살았으면서 나중에 취첩을 하여 자식을 낳게 된 것은 75세 때에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창15:4에서 하나님이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바람에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까지 하나님은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라고만 하셨고 “본처 사라의 몸에서 날 자”란 말씀은 하시지를 않았습니다.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은 다음 장인 17:15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때에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아들주시는 약속이 “다른 여인의 몸을 빌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인류창조 당시부터 일부일처를 엄격하게 시행해 주셨지만 아담의 7대손 라멕 때부터 다처주의가 시행되었는데 이것이 특별한 제동 없이 만연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때에도 역시 그것을 큰 죄악으로 깨닫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4) 또 사래가 ‘나는 나의 여종을 당신 첩으로 주어 후사를 얻겠소’(하나님이 그런 방법으로 당신에게 후사를 주신다는 약속일 수도 있지 않소) 라고 제의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도 그렇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승낙하여 취첩을 한 것 같습니다.
5) 그 첩은 흉년을 피하러 애굽에 갔다가 애굽 왕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아내를 얼마동안 빼앗겼던 대가로 받은 애굽인 여종이었습니다. 사람이 ‘돈 생기면 좋다’ 하지만 그 돈이 잘못 쓰여 질 때는 죄의 올무가 되듯이 여종을 받을 때는 좋았겠지만 그 여종이 죄의 올무가 되어 아브람이 취첩죄를 범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좋은 선물도 사용을 잘 할 때에 복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4. 가라지는 심었다 하면 번성이 빠른 것처럼 아브람은 취첩을 하자마자 첩이 잉태를 하였습니다. 첩은 잉태하자 태도가 달라졌습니다(4절). 잠29:21에서 “종을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체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종이 첩이 되니까 교만해지기 시작하였고 아브람이 가정윤리의 법을 범하니까 가정에 불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1) 종이 주인의 아이를 잉태하자 교만해지기 시작하였고,
2) 자식 없는 여주인을 멸시하였으며,
3) 자기를 첩으로 허락한 여주인에 대하여 의리를 배반하니,
4) 여주인은 속이 상하여 남편에게 분풀이를 하였고,
5) 아브람은 여주인의 위치와 종의 신분을 잘 구별하는 터라 “여종보다 여주인인 당신이 더 귀하니 알아서 하라” 하므로 사래가 여종을 학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종이 쫓겨났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이 무슨 교훈을 받으셔야 하는가 하면,
1) 불화의 원인을 만든 사람들은 아브람 내외 자신들입니다. 저희들도 혹 내가 불행하면 그 원인이 내게 있는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그 첩의 이름은 하갈입니다. 하갈이 첩이 된 것은 그가 종이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으나 그를 첩으로 취한 아브람과 이를 종용한 사래에게는 잘못이 있음을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3) 사람이 대우를 받고 높아질수록 더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 나아진 것이 있다 하여 교만하면 절대로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4) 사래는 자기가 저지른 화근을 남편에게 전부 전가시키려고 하였는데 성도는 먼저 자책을 느끼고 모든 책임과 어려움을 같이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5) 이때에 아브람은 첩을 얻음이 잘못이라는 것과, 첩이 본처만 못하다는 사리판단을 하므로 본처와 여주인의 위치를 인정해 준 것은 퍽 지혜로운 일이었습니다.
6) 그러나 사래의 생각은 넓지 못하였습니다. 여종을 잘 타이르지 않고 지나치게 학대한 일입니다. 6절 말씀에서 “여종이 그대 수중에 있으니 그대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 한 말은 잔인하게 학대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래는 그를 학대하였으니 퍽 미워하고 지나친 고통을 가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아브람의 서자와 적자 사이에는 대립과 갈등의 씨가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갈은 못 견디어 도망을 하였습니다.
5. 그러면 임신한 상태로 도망한 하갈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1) 본문 7절에서 도망가는 하갈이 광야 “술”길 샘 곁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권고를 받았습니다. 이 권고는 아브람의 기도의 덕분이었습니다(17:20). 그런데 광야 “술”길 샘 곁은 수르광야 가데스와 베렛 사이로(14절) 애굽에 가까이 간 광야이므로 이는 하갈이 자기 고향 애굽으로 돌아가고 있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러나 종이 주인의 씨를 품은 채 학대로 인하여 도망가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주인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았어야 할 것입니다.
2) 이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하갈의 노정을 물으신 후에 “너는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라. 네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이요,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고통을 들으심의 뜻)이라 하라. 그가 사람 중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 것이며 그는 모든 형제의 동방에 살리라” 하시므로,
① 하갈이 주인을 피하여 나온 잘못에 대하여 뉘우친 다음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서 용서받아야 할 것을 알려주셨고,
② 그 몸에서 낳아질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형제의 동방 즉 가나안땅의 동방인 아랍지역에서 살 것과,
③ 그 후손들은 들나귀처럼 유리하며 강퍅하여 싸움을 좋아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④ 하갈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임을 확신하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다”고 하며 두려워하였습니다.
3) 여기에서 저희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① 하갈이 이방인 애굽 여인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선민인 아브람의 가족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까지 주신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이방인이 믿음에로 돌아오는 것을 결코 거절하시지 않음을 알 수 있고,
② 종의 신분인 하갈이 어떤 이유로도 주인에게 항거하거나 도망할 수 없음은 종의 신분인 성도가 하나님을 거역할 수 없음을 교훈해 주시는 것이며,
③ 하갈이 불신앙의 옛 고향인 애굽에 당도할 직전에 하나님의 사자의 권유로 되돌아간 것은 낙망하는 성도가 복음사역자의 권면으로 회개하고 돌아온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④ 또 하나님은 고통하는 성도의 길을 따라가시면서 감찰하시고, 마땅히 그의 갈 길과 할 일을 인도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6. 마지막으로 하갈은 그곳의 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나를 감찰하시는 생존자의 우물)라 이름을 짓고 다시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와서 아브람 86세에 예언대로 아들을 낳고 이름을 “이스마엘”로 짓게 된 것입니다(11,14절).
하갈이 하나님의 권고를 받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왔을 때 아브람과 사래는 이를 영입하였으니 이것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순종한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연약해질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만 잘하면 얼마든지 치료되고 회복할 수 있음을 꼭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7. 네가 어디로 가느냐 (창 16:8) 목록으로
하갈이 아브람의 집을 도망하여 “술”길 샘물 곁에 갔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1. 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1)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가는 것을 물으셨을까요? 좀 더 깊이 추적하면 ‘하갈이 잘못을 깨달아야 하지 않느냐?’는 뜻이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2) 이때에 하갈은 질문의 의도대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갑니다”하지 않고 사실대로 “여주인을 피하여 도망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 되는 입장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2. 종의 신분으로 여인의 몸으로 또 임신한 몸으로 광야를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요, 그가 애굽에 가도 희망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든 인생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롬3:23)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하갈의 길도 희망이 없습니다.
1) 그러나 이것을 해결하는 열쇠는 돌아서는 것(회개)입니다.
2)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의 수하에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3. 인간은 일시적인 분노와 혈기를 참지 못하여 무분별한 행위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항상 과격한 언행을 삼가며 사리를 냉정하게 판단하여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겸손하게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만이 성공하는 길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질문이 몇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1) 창3:9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셨고,
2) 창4:9에서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본문의 말씀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도록 기회를 주시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은 우리의 모든 생활이 생각부터 행실에 이르기까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를 엄밀하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제 35 과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심 (창 17:1~14) 목록으로
창세기 17장에는 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베푸신 언약을 재확인하심과(1~8절), ② 이에 대한 표징으로서 할례를 행하게 하신 말씀(9~14절), ③ 또 사래에게 그가 아들을 낳을 것을 약속하시니(15~22절), ④ 아브라함이 명령대로 할례를 시행하였다(23~27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14절까지만 상고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을 재확인해 주셨습니다(1~8절).
1) 이 언약을 재확인하신 때는 아브람의 나이 99세 때였습니다. 그때는 서자 이스마엘을 낳은 지 13년이요(16:16). 애굽에서 돌아온 지 14년이요(16:3). 하란에서 가나안에 온지 24년째 된 때인데(12:4),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동이 있을 때마다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12:2~3; 13:14~16; 15:4, 16). 하나님이 아브람 99세 때에 특별한 약속을 또 하신 이유는 그때가 비로소 사래에게 잉태의 복을 주실 때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창15:4에서 자기에게 후사가 있을 것을 약속 받고 그 약속이 하갈의 몸을 통해 주실 수도 있음을 오해한 듯합니다. 그래서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런고로 후사가 있을 것을 약속 받은 때는(15:4) 하갈을 취하기 전이요, 그의 나이 85세쯤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 85세쯤에 후사를 약속하시고 그 후사가 본처 사라의 몸에서 출생할 것에 대하여는 14년 후인 99세 때에 아브람과 사래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2) 하나님이 여러 차례 약속하신 축복을 할례의 증표로까지 확인해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더욱 기억하며 상기하도록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3) 그러면 다시 말씀하신 축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①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더욱 의지하게 하심이요.
②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 동안의 연약과 실수를 거울삼아 더욱 경계할 것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간 것과 그곳에서 아내를 누이라 한 것과 제사에 성실하지 못한 것과 또 하갈을 취한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취약점을 보완하라는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완전하라”는 뜻은 실수 없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완전무결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③ “나의 언약을 너와 나 사이에(2절) 또 너와 네 후손 사이에 세워(7절) 심히 번성케 하고 영원한 언약을 삼으며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언약을 아브람과만 세우신 것이 아니고 그 후손들에게도 세우심이요, 아브람의 후손을 심히 번성케 하심과 영원한 언약을 삼으심은 선민에게 주시는 영적 축복이 영원까지 이를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심히 번성한다”는 말씀도 믿음의 후손이 번성할 것을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④ 그 증거로써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하시고 그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큰아버지’란 뜻인데 이 이름을 “열국의 아버지”로 고쳐서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것은 창17:5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⑤ “나라와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올 것이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나라와 왕들과 메시야가 나올 것을 예고하심이요.
⑥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된다”하심은 아브라함과 믿음의 후손을 끝까지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계속 붙들어 주시고 함께 하시며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이요.
⑦ “네가 우거하는 가나안땅 일경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가나안 일경”이란 약속의 땅을 부분적으로 일컫는 말씀입니다. 또 “보이는 땅을 네 자손에게 주신다”(13:14~15) 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또 이 땅은 영원한 기업의 상징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전체의 부분이라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4) 하나님은 이런 언약으로 재확인하신 후에 9절 말씀에서 “너와 네 후손은 대대로 내 언약을 지키라”그리고 그 증표로서 “너의 집 남자는 다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그러면 “할례를 받게 하심”에 대하여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하나님은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할례”란 것은 남자의 양피를 베어 피를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흠집은 항상 있어서 할례 받았다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할 것입니다.
2) 이런 증표가 필요한가 할 때에 사람은 어떤 계약을 하였을 때 계약서를 필요로 하는 만큼 증표는 필요한 것입니다. 역사를 보존하기 위하여 문화재를 보존하면 문화재가 역사를 일깨워 주는 것처럼 할례의 상처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이 할례는 아브라함 집의 모든 남자가 일제히 시행하고 다음에는 남자아이가 출생한지 8일 만에 시행하며 아브라함의 집에 우거하는 모든 사람(돈으로 산 이방인이나 같이 우거하는 종들까지) 이 받아야 하는데,
① 남자만 받아야 하는 이유는 선민제도에서 남자를 지도자와 세대주로 세웠기 때문이요.
② 또 아브라함의 혈육 뿐 아니라 모든 동거인 남자까지 하게 한 것은 선민제도에 따라오는 이방인도 구원의 대상에 포함해 주신다는 뜻이요.
③ 남자아이를 8일 만에 시행하는 것은 출생아가 한 안식일의 기간을 지나서 어릴 때에 받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4) 12절 하반에서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는 뜻은 살에 박힌 증표가 없어지지 않을 것과 그 증표로 받은 약속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기까지 지켜질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3. 할례를 받지 않은 백성은 선민으로서 불순종한 자인데 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것이므로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끊어진다는 뜻은 선민적 축복에 동참하지 못할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1) 하나님이 선민(피택자)에게 주신 언약은 영원불변한 것이므로,
2) 성도는 언약증표를 볼 때마다 그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며,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 주신 언약의 증표는 세례이며,
3) 구약의 성도가 말씀에 순종하는 표로서 꼭 할례를 받아야 함과 같이 신약의 성도는 세례를 받아야 함을 아셔야 합니다.
제 36 과 사라가 득남할 것을 예고하심 (창 17:15~27) 목록으로
1. 창17:15 이하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사가 본처 사라의 몸에서 출생할 것을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아내 사래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 아들을 낳아주게 하고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며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날 것이라”고 하시면서 “사래”란 이름을 “사라”로 고쳐 주셨습니다. 사래는 “영원히 귀하다”는 뜻이고, 사라는 “열국의 어미”또는 “공주”란 뜻입니다.
2.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1) 웃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불신적 비소가 아닌 100세, 90세 된 자신들이 노령에 자식을 낳는 일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2) ‘100세, 90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함이 바로 그런 의미에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적 자체를 의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즈음 50대 여인이 자식 낳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서,
3) 이미 13년 전에 주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복 받고) 살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네 아내 사라가 정녕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은 웃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명년 이 때에 출생할(21절) 이삭과 세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 붙들어 주셨고(20절), 그도 생육 번성하여 열두 방백을 낳으며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① 이스마엘의 열두 방백(열두 아들)은 창25:12~16에 나타나 있고,
② 그의 생육도 아브라함의 기도의 혜택을 힘입었음을 알 수 있으며,
③ 하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으니 이는 천사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승천하셨거나 아니면 예루살렘 쪽으로 올라가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명령대로 할례를 시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자신과 아들 이스마엘과 자기 집에서 길리운 종들과 돈으로 산 자와 모든 남자를 전부 할례하게 된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증표입니다. 그 증표를 인간 편에서 간직시키는 이유는 그 언약을 사모하면서 완전하게 행할 것을 힘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할례가 계속 선민세계에서 실천되다가 결국 그 언약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성취된 다음부터는 은혜의 성취로 죄 씻음 받고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표하는 세례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할례는 은혜의 언약의 증표이고 신약의 세례는 은혜성취의 증표입니다.
제 37 과 아브라함의 손님 접대와 사라에게 약속하심 (창 18:1~15) 목록으로
1. 아브라함의 손님접대에 대하여(1~8절)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거주지인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 세 사람(천사)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세 사람의 천사 모양이란 무형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접할 수 있는 형체로 나타나심을 의미하며 이때에 나타난 세 사람은 지상의 어떤 인간의 몸을 빌린 것이 아닌 천사의 형태로 나타나신 것을 의미합니다.
2) 아브라함은 오정쯤 자기 집 장막 문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① 나그네를 대접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② 즉시 달려가서 그들에게 엎드려 간청하였습니다.
③ 그들을 “주”로 칭하였고 자신을 종이라고 하였으며(3절),
④ 그들이 자기의 대접받는 것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라고 하면서 간청하였고(3절),
⑤ 나무 그늘 아래서 발을 씻으시고 떡(음식)을 대접받고 가시도록 권하였습니다. 이때에 발 씻을 물도 조금, 떡도 조금 가져온다고 하므로 대접을 받는 나그네로 하여금 부담 없이 대기하도록 권유하여 승낙을 받은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은 즉시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고운 가루 세 스아를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였으니 이 세 스아의 분량은 한 스아가 13Kg이므로 쌀 여덟 되에 해당하는 분량입니다. 그리고 또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 요리하였고 거기에 버터와 우유를 포함하였은즉 이 분량은 손님의 수에 비할 때 상당히 많은 것이었으니 이는 다른 손님들도 계속 접대할 뜻을 가졌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손님대접의 정성은 여러모로 대단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찾아가서 간청한 점,
② 손님접대를 대접받는 이가 자기에게 은혜 베푸는 일로 여긴 점,
③ 부담 없이 기다리게 한 점,
④ 풍부한 식물로 신속히 접대한 점입니다.
4)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나그네들을 처음부터 천사로 알고 대접하였을까요? 여기에 대하여 나중에 알았겠지만 처음에는 모르고 영접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증거는 히13:1에서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는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해당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요일4:20).
5) 그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베푼 음식을 먹었으니 천사로 나타난 사람이지만 일반 사람과 꼭 같이 음식을 취할 수 있었음은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이 음식을 잡수신 것과 같은 형편일 것입니다(요21:15; 행10:41).
2. 천사들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사라에게 그의 득남을 약속하셨습니다.
1) 과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만 말씀하셨는데 이 날에는 사라에게도 직접 말씀하셨고(15절) “기한이 이를 때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한이 이를 때 정녕 돌아오리라”는 말씀은 “명년 이때에(원문 상의 뜻) 정녕 너를 권고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1년 후에 아들을 낳게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2) 이때에 사라는 그 말을 장막 문 뒤에서 듣고 “아브라함은 늙었고 나는 경수도 그쳤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것인가 하며 웃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라가 웃은 것은 불신앙적인 비웃음이 아니요, 늙은 자신들이 생산하게 된다는 그 일 자체를 부끄럽게 여긴 웃음이었습니다. 히11:11은 “사라가 늙었으나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으며… 어떻게 아들을 낳겠느냐?”고 하였는데(13절), 이 뜻은 “사라가 의심을 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4절에서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시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말씀하셨을 때 사라는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3) 15절에서 비로소 사라가 직접 천사들에게 나와 “두려워하며 승인치 않았다”하였으니 이는 불신앙적인 비웃음을 나타낸 일이 없다는 자기 항변의 말이고, “네가 웃었느니라” 하신 것은 그가 부끄럽게 여겨 웃은 것을 시인하도록 촉구하는 천사의 말이었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① 아브라함의 봉사정신과 손님접대에 대한 정성을 배워야 할 것이며,
② 그 당시에 하나님이 계시를 주시는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어 나그네로 나타나 직접 대면하신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계시방법 중 하나이며(히1:1),
③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심을 믿음으로써 복을 받게 하신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 38 과 아브라함의 기도 (창 18:16~33) 목록으로
위의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이 천사들(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접대를 마치고 전송하는 중에(16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아니하시고 두 가지의 뜻을 말씀하셨으니, 하나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을 말씀하셨고(17~19절), 또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 도성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20~22절). 이때에 아브라함은 소돔 고모라에 사는 의인을 염려하여 하나님께 질문을 하였는데 이 질문이 기도의 형식으로 나타났고, 결국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을 받고 헤어졌다는 말씀입니다(23~33절).
1. 아브라함은 천사들을 접대하고 친절하게 전송하였습니다.
1) 그의 전송이 하나님께로부터 결정적인 축복의 기회를 열었으니 하나님은 그의 전송하는 기회에 중대한 뜻을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자기의 하시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기를 원치 않으시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은,
1)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목적은,
① 그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 나라는 영원히 존속되는 나라요,
② 천하 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하심이니 “그를 인하여”라 하심은 ‘그의 후손으로 보내시는 메시야의 구속’과 그의 믿음을 의미함이요,
③ 그의 백성(자식과 권속)이 하나님의 도(말씀)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의와 공도”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도 그와 같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의 죄악의 실상을 파악하여 심판하시려는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이 사실은 소돔에 사는 의인의 부르짖음(기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인하여 탄식하는 의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니 이는 롯의 기도임이 틀림없습니다. 벧전2:6~7에 그 사실이 입증됩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인한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② 하나님은 악인의 악한 정황을 확인하시고 확실하게 처리하시는 분이십니다. 21절에서 “부르짖은 내용과 범행한 죄악이 같은지를 보고 알려 한다”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살피시는 역할을 인간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 전지전능, 광대하심은 인간적 역할을 필요로 하시지 않겠지만 하나님이 알려 하신다는 것은 백성을 깨닫게 하시는 계시적 방편임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③ 하나님은 “부르짖음과 죄악이 같은지를 알려 하신다”(21절) 하셨고, “멸하신다”는 말씀은 하시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노아 홍수의 역사를 연상하면서 심판하시고 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의식하였을 것이고, 거기에 따라 질문한 기도가 사실과 부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아브라함이 어떻게 기도를 하였습니까?(23~33절)
1)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서 하였습니다(23절). 기도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갔다’는 것은 믿음의 결연으로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무조건 간격만 좁힌 것이 아니라, 신앙적 관계에서 가까운 사이를 이룩하여야 합니다.
2)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하므로 우선 질문형식으로 기도하면서, “의인과 악인을 같이 취급하실 것입니까? 만일 그곳에 의인 50인이 있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하였으니, 여기에 ‘의인’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실하게 사는 백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의인 50인을 인하여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26절). 하나님은,
①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②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대하시지 않으며,
③ 몇 사람 의인을 인하여 온 지경에 사는 악인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26절).
4) 아브라함의 기도는 또 연장되었습니다. 처음 기도할 때 “의인 몇 사람이 있어야 온 지경의 죄를 용서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더라면 다음 질문이 필요 없을 번하였으나, 아브라함의 기도내용이 핵심을 빗나가는 바람에 의인 50명까지는 확답을 받았으나 그 이하가 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에서, 오인이 부족할 경우, 십 인이 부족할 경우, 이십 인이 부족할 경우, 이십 인만 있을 경우, 십 인만 있을 경우까지 다섯 번을 연거푸 묻게 되니 자신도 퍽 송구함을 느꼈습니다(32절).
5) 하나님은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시지 않겠다”고 하시므로 아브라함은 (작별인사를 끝내고) 자기 곳으로 갔습니다. 아마 ‘의인이 열 명은 있을 것이므로 멸망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예측하였던 모양입니다. 만일 그곳에 ‘의인 열 명이 못되리라’고 생각하였다면 질문을 더 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볼 때 아브라함은 악인의 멸망도 원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이렇게 하나님은 의인 십 인을 인하여서도 그 성을 멸하시지 않겠다 하시므로 큰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4. 이상의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기도의 특징은,
1) 하나님을 가까이 의지하고 기도한 점
2)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공의롭게 심판하여 주시기를 간구한 점
3) 대화식으로 말한 점
4) 자신의 마음에 의문이 풀리기까지 계속성 있고, 또 간절하게 기도한 점
5)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티끌처럼 여기고(27절) 여러 차례 질문하는 태도를 퍽 송구스럽게 생각한 점 등을 들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끝까지 친절하고 자세하게 받아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18. 아브라함의 기도 (창 18:22~33) 목록으로
1. 아브라함이 언제 기도하였습니까?
그는 세 사람의 천사로 찾아오신 하나님이 “소돔에서 부르짖는 의인의 기도를 듣고 그 형편을 살피러 간다”고 하셨을 때 기도하였습니다.
1) 하나님은 악인을 위한 의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 당시에 소돔에 사는 롯도 의로운 중에서 죄악을 탄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벧전2:6~7).
2) 하나님은 의인이 고발한 내용과 죄인들의 범행을 확실하게 규명하시는 분이셨고,
3) 그들의 범죄에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의 정황을 살피러 간다”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을 예측하였을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기도의 동기는,
1) 의인이 악인과 균등하게 취급되거나 같이 멸망되어서는 안 될 것과,
2) 이때에 의로운 조카 롯을 염려하였으며(창19:29),3) 악인들도 의인의 간구를 인하여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3.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공의를 불신하였을까요?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임을 믿었습니다(25절).
2) 다만 의인이 악인의 세계에서 연대적으로 심판을 받는 경우에 순간적 또는 현시적으로 닥치는 불균형을 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선민들이 타락할 때에 의로운 선지자들과 함께 연대적으로 징계 받게 하시는 섭리가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전쟁에서 의인과 악인이 함께 죽는 경우(삼하11:25) 또는 성도 개인이나 몇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다수의 악인들을 함께 살리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행27:24). 또 한 농장에 곡식과 가라지를 심판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용납하시는 경우도 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마13:29).
3) 만일 의인과 악인을 연대적으로 심판하신다면 ‘롯’도 같이 멸망 받아야 할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의 기도의 방법
1)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 기도하였고(23절),
2)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며(18:3에서 두 사람은 먼저 소돔으로 갔은즉 그분들은 성자와 성령님이시요, 기도를 받은 분은 성부 하나님이심),
3) 대화식과 질문식으로 마음의 의심과 염려가 풀리기까지 하였고,
4) 자신을 티끌로 여기고 반복하는 질문을 송구하게 생각하였으며(27,30~31절),
5) 의인과 악인을 구별 심판하여 의인을 구원해 주실 것과 의인을 인하여 악인도 보존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으며,
6) 끝가지 기도하고 응답을 받고 끝낸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1) 저희들은 의인의 비중이 큰 것을 믿으셔야 하고,
2) 의인으로 인정받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이며(욥1:1,8),
3) 의인의 복으로 악인의 멸망을 방지하고,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요(왕하2:12; 13:14),
4) 하나님이 응답하신 의미를 성경으로 깨닫고 확신과 희망을 가지기까지 계속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9 과 소돔의 죄악 (창 19:1~11)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에는 ① 롯이 손님을 영접한 것과, ② 소돔의 백성들의 죄악성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1. 롯이 나그네를 접대하려 한 일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1) 아브라함을 만났던 세 천사가 날이 저물 때에 소돔성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의 거주지인 “마므레”에서 소돔성까지는 약 25Km(60리)인데, 아브라함의 집에서 정오쯤 대접을 받고 출발하면 저물 무렵에 도착하기 알맞은 거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여행자는 사람으로 나타난 천사들이므로 여행의 속도를 인간적으로 맞출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2) 이때에 롯은 성문에 앉았다가 저물 때에 들어오는 나그네를 발견하고 즉시 일어나 영접하고 절을 하면서 자기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내 주여 종의 집에 들어와 발을 씻으시고 주무신 후 내일 일찍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한 것은 나그네에게 호의를 베풀려는 간청이었습니다. 또 처음부터 나그네를 “내 주”라 하였고 자신을 ‘종’이라(2절)고 한 것을 보면 분명히 그 두 사람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예민한 성도는 초라한 소자를 만나도 혹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이 아닌가 하여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롯도 두 사람을 천사 또는 하나님의 사자로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3) 두 천사는 거리에서 경야할 것이라 하며 사양하였었지만 롯의 끈질긴 간청에 의하여 영접을 받았고 롯은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으니 그 음식은 무교병인데 누룩으로 부풀리지 못한 떡을 구워 대접한 것입니다. 이는 갑자기 준비한 탓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천사를 접대한 음식분량보다는 간소한 것 같으나(3절) 롯의 손님접대와 봉사정신은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소돔백성들의 죄악의 상태(4~5절)를 살피면,
1) 그들은 대단히 포악하고, 음란한 백성들이었습니다.
2) 손님이 눕기도 전에 그곳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와 그들을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5절)하였으니 그들의 부패 상황이,
① 전체적이고,
② 신속하며,
③ 포악적이고,
④ 음난성이 강한 무법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는 뜻은 남자들을 음행의 도구로 희롱할 것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여색에 반대되는 남색을 의미할 것입니다.
3) 롯은 이 사태를 당하였을 때 필사적으로 만류하였습니다. 문 밖으로 나가 문을 닫고 말하기를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있는 두 처녀 딸을 내 보낼 것이니 그들에게 좋은 대로 행하고 내 집에 온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그들은 여전히 듣지 않고 롯에게 위협을 가하였습니다. “물러나라. 네가 이곳에 들어와서 우거하며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니 우리가 너를 더 해롭게 할 것이라” 하며 문을 깨치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소돔 백성들의 죄악의 상태를 살필 수 있고 또 롯이 자기의 두 딸을 희생시켜서라도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한 점을 가상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3. 이 광경을 목격한 천사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위기 직전에 역사하시는 섭리가 있습니다(사41:17).
1) 두 천사는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이끌어 들이고 문을 닫았으며,
2) 밖에 있는 모든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므로 위기를 모면시키고 롯의 가족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1) 나그네를 선대하는 롯의 의로운 생활,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적극적인 봉사와 희생적인 노력,
3)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심,
4) 악인들을 어거하시는 하나님의 간섭에 대하여 교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 40 과 소돔성에서 탈출시키심 (창 19:12~23) 목록으로
위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롯의 가족으로 하여금 소돔성을 탈출하게 한 내용’입니다.
1. 천사들은 롯과 그 권속들에게 “속히 소돔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1) 소돔의 죄악상은 이미 확인되었고, 그 천사들은 “소돔의 멸망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13절). 여기의 소돔은 그 인근 도성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을 포함한 대표 도성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창10:19; 호11:8).
2) 소돔성을 멸하기 전에 롯과 그 권속들을 구원하셔야 하겠는 고로 그들을 먼저 성 밖으로 이끌어 내게 하셨습니다.
3) 롯은 그 집 밖에 거주하는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였으나 그들은 농담으로 여기고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고 설득하는 문제로 밤 시간을 거의 보냈는지도 모릅니다. 진실을 사실로 믿지 않거나 농담으로 가볍게 들을 때는 실천할 수 없음이 당연할 것입니다.
4) 동틀 때까지 롯의 가족이 탈출을 주저하자 두 천사는 독촉을 하였고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인도하여 성 밖에 두었으니 이렇게 약한 상태에서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인자하신 은총입니다(15~16).
2. 또 천사들은 이끌려 나온 롯의 가족으로 하여금 “급히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하였습니다(17절).
1) 이렇게 도망할 것을 권고함은 멸망의 도성을 멀리 피하게 하기 위함이요,
2) 그 도망을 빠르게 하기 위하여 돌아보거나 머물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심판의 시각이 촉박하였기 때문이며,
3) 산으로 도망하게 한 것은 그 곳이 지상에서의 피난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백성은 죄악에서 신속히 멀어져야 하며 구원의 피난처가 되시는 예수님 품에 깊이 안겨야 합니다.
3. 롯은 도망하는 와중에서 또 큰 인자의 은총을 간청하였습니다.
1) 멸망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과 멸망에 앞서 이끌어 내 주신 것도 큰 인자의 은총인데 또 도망할 산이 너무 멀고 멸망이 초급함을 느낀 롯은 가까운 작은 성을 가리키며 그 성에 들어가 생명의 보존 받기를 간청하였고 그 간청도 응답을 받으므로 그 이웃의 작은 도성(소알)이 멸망에서 제외된 것입니다(21절).
2) 22절에서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노라”하시므로 구원의 완전 확보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심판하시지 않을 것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3) 롯의 권속들이 소알성에 들어갈 때 아침 해가 돋았습니다. 하루 밤 사이에 구원과 멸망의 준비가 이루어졌으니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죄악의 도성을 떠나는 것이요, 멸망은 하나님의 권고를 받지 않고 불신앙하는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선택과 권고 받는 백성된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복종을 힘쓰고 죄악의 도성을 신속하게 떠나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41 과 소돔 고모라의 멸망과 두 딸의 생산 (창 19:24~38)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두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소돔 고모라 도성이 멸망됨이요(24~30절), ② 롯의 두 딸이 롯과 동침하여 자식을 생산하는 내용입니다(31~38절).
1. 소돔 고모라 성의 멸망에 대하여(24~30절)
1)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백성들과 땅에 난 것(식물)들을 다 엎어 멸하셨다고 하셨습니다.
① 이 유황과 불은 초자연적 능력으로 성사된 것이며 화산폭발 같은 자연의 변화로 나타난 현상일 것입니다. 자연의 변화는 얼마든지 화학적, 물리적 상황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② 24절에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불이 내렸다”는 뜻은 그 재앙의 불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고 또 하늘에서 쏟아진 것을 의미하며,
2) 그 때에 피해를 당한 것은 죄악의 도성들과 온 들과 그 도성에 사는 모든 인간들과 땅에 난 모든 식물들이므로 그 지역의 모든 생물이 다 죽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3) 이때에 롯의 처는 뒤를 돌아보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다”하였으니(26절),
① 롯의 처가 뒤를 돌아 본 것은 현실생활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이요, 이로서 “돌아보거나 머물지 말라”(17절)는 경계의 말씀을 어겼고 이로 인하여 피란처(소알성)까지 당도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금기둥이 된 것은 불과 유황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② 불과 유황의 성분이 물리적 또는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소금기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현재 그 지역은 염해가 이루어져 있음을 볼 때 그 당시의 멸망은 유황성분 외에 염분을 덮어 모든 생물을 없애신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4) 아브라함은 그날 아침에 일어나 천사의 말을 듣던 자리에서 소돔, 고모라 지역을 바라보았을 때 그 지역에서 옹기점 연기처럼 치밀음(솟아오름)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상황을 볼 때에 화산의 폭발이 치솟았고 또 솟아오른 분진과 광물질들이 쏟아져 내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29절에서 하나님이 롯의 거주지를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내보내셨다”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신 것을 의미하며(18:25), 아브라함의 신앙적 미덕이 그 조카에게까지 은혜를 받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롯은 자신의 경건성과 아브라함의 기도의 덕을 힘입어 구출 받았습니다.
6) 30절에서 “롯이 소알에 거하기 두려워하여 산으로 올라가 거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소알이 소돔에 근접된 연고로 두려움을 갖고 그곳에서 잠시 쉰 후 더 멀리 떨어진 산으로 도피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여 롯의 권속은 여섯 식구였지만,
① 두 사위는 믿지 않으므로 멸망에 포함되었고,
② 부인은 확신 없이 나오다가 현실적 미련에 끌려 뒤를 돌아본 탓으로 기회를 잃고 멸망 받은 것이며,
③ 나머지 세 식구만 어렵게 구원을 받은 실례라 할 것입니다(벧전4:18).
2. 롯의 두 딸이 자녀를 생산함에 대하여(31~38절)
1) 롯의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드려 취하게 한 후 먼저 큰딸이 동침을 하고 다음날 작은딸이 동침을 하여 각각 아들을 낳았습니다.
2) 이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① 늙은 아버지에게 후손을 이어드려야 한다는 생각과(31,34절), 자기들에게도 배필 될 남자가 없어 자손 얻을 길이 난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소돔성이 다 황폐되므로 인종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요, 그들이 도망한 산도 역시 광야에 속한 곳이라 사람이 없었든지 아니면 희귀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② 그들이 소돔으로 분가한 후 아브라함이 전쟁의 피해를 복구해준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의 거주지를 알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유목민이 거처를 이리저리 옮기는 경우가 있어서 서로 헤어지면 만나기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롯의 딸들이 그런 문제를 아버지나 삼촌과 의논하지 않았음에 대하여 그들의 생각이 좁다고 하기보다는 만나기 어려운 점, 인종의 희귀한 점, 그들이 산 속에서 거처한 점 등을 감안하여 오히려 그럴 수 있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3) 그러면 그 딸들이 아버지와 동침하는 윤리적 무질서의 의식이 전혀 없었는가? 할 때에 골육이나 근친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계명이 출애굽 때에 율법으로(레18:6~18) 주시기는 하였지만 그 이전에 주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롯의 딸들이 아버지의 하체를 범한 것은 그들의 목적 성취를 위하여 분별없는 행위를 그대로 저지른 소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술 취한 롯은 그 사실을 몰랐다(35절)고 하였으니 이런 사실은 을 많이 취해 본 사람이라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그로 인하여 큰딸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모압”(아버지의 소생)이라 하여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되었고, 작은딸도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벤암미”(내 육친의 아들)라 하여 오늘날(모세 당시) 암몬 족속의 조상을 이루었습니다. 이 두 족속은 사해 동편 남(모압), 북(암몬)지역에 거주하여 포로후시대까지 존속되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사15:1~11; 렘48: ).
결국 롯의 후손은 몰락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모압과 암몬족은 계속 존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임시적 구원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축복을 사모해야 하며 불륜의 씨앗은 불행의 요소가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치료와 은혜로만 회복이 가능한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마1:3; 창28:24).
설교보충 19. 속한 자를 이끌어 내라 (창 19:12) 목록으로
위 본문에 보시면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롯에게 속한 사람은 부인과 딸들과 사위들이었습니다. 저희들도 저희들의 권속을 살펴 모든 권속(가족, 친척)이 장망성에 머물지 않도록 이끌어 내셔야 하겠습니다.
2. “이끌어낸다”는 말씀은 상당한 지혜와 적극성 및 강요가 포함된 뜻입니다. 이끌려 나오지 않는 권속들을 어떤 방법으로 이끌어 내시렵니까? 사랑, 봉사, 권면…? 창19:5에서 “천사들이 이끌어 내라”하였고, 8절에서 롯이 자기 딸들을 “이끌어내겠다” 하였고 또 12절에서도 “네 권속을 이끌어내라”고 하셨습니다.
3. 성경에는 가족적 구원을 귄장하였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 구원(창7:1), 민족적인 구원(출3:8), 기생 라합의 가족 구원(수6:23), 고넬료의 가족과 이웃 구원(행10장), 간수의 가족 구원(행16:15~31, 33), 부부의 신앙적 합심(고전7:14; 벧전3:1)등이 나타나 있습니다.
4. 전도의 방법 중 “강권하여 데려 오라”(눅14:24)는 말씀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강권하여 거부감을 느끼게 할 것은 아니지만 점차 강권하되 자발적인 충동으로 이끌려오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5. 롯이 이끌려 나옴에 대하여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창19:29) 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① 이끌어 내는 적극성에 앞서 기도가 필요한 것을 알 수 있고,
② 성령님의 역사로 완악한 자의 마음을 돌려 이끌어 주셔야만 잘 될 것입니다.
설교보충 20. 장망성을 떠남 (창19:12~19) 목록으로
1. “장망성”이란 장차 망할 도성입니다.
1) 본문 말씀에 나타난 소돔성에 죄악이 극심하였는데(창18:20) 그 죄악세계에서 부르짖고 탄식하는 의인의 호소가 있기 때문에(창18:20; 벧후2:8)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의 정황을 파악하시고(창18:21), 그 죄악의 분량이 상당하다고 인정하셔서(19:13) 그 소돔성을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심(19:1, 12)). 소돔성은 멸망당해야 하므로 그 성을 “장망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17세기 영국의 종교학자 요한 번연이 기록한 성경 다음가는 신앙의 서적이라고 일컫는 「천로역정」이란 책에서 장차 멸망 받아 없어질 이 세상을 장망성이라고 일컬은 데서 이 용어가 나왔습니다. 따라서 롯의 가족이 장망성인 소돔성을 떠나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장망성인 이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 천성을 향해 나가야 할 것임을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창18:20을 보시면 “소돔성에 죄악이 심히 중하다” 하셨고, 창19:4~5를 보시면 그 도성의 퇴폐와 음란이 얼마나 성행하였는가를 알 수 있으며, 또 창18:20과 벧후2:8을 보시면 그 세계에서 의롭게 사는 롯이 죄악과 싸우며 안타까운 심정을 하나님께 호소한 말씀이 있고, 또 창18:21에서는 의인의 간구와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천사의 몸으로 직접 그곳에 오셔서(19:2, 내 주여) 그 정황을 확인하시고 그 중에서 의로운 가족(롯의 식구)을 먼저 구원하시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소돔성의 죄악은 치료할 시기가 지났습니다. 그래서 성한 부분만 내놓고는 다 버리기로 하신 것입니다.
1) 이렇게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또 죄악의 관영을 감찰하시고 확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또 죄악세상에서 의인의 호소를 들으시고 의인을 먼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18:32에 보시면 소돔성에 “의인 10인만 있어도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하셨고, 전7:15에서도 “의로운 중에서 멸망 받는 의인이 없다”고 하셨으니 소돔성에 혹 의인(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 있다면 마땅히 먼저 구출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3. 그때에 사람의 몸으로 변신하여 찾아오신 하나님이 소돔성에 와 보신즉 죄악의 관영한 것은 사실이나 그곳에 의인의 가족이 있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1) 롯의 가족은 아브라함의 조카인데 그가 그의 삼촌과 분가하여 살기 좋은 곳인 줄 알고 간 곳이 소돔성이었습니다.
2) 롯이 의롭다는 것은 완전 결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애쓰는 정성을 의미합니다(창15:6). 그리고 롯은 그 도성민들의 죄 때문에 탄식하고 마음을 상하면서 기도로 호소한 근거가 성경에 있고(벧후2:8; 창18:20), 또 나그네를 접대하는 등(창19:1~2) 도덕적 선행의 표현이 충분하게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런 믿음과 선행의 표시가 확실하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그래서 하나님은 우선 그 의인의 가족을 구출하기로 하셨습니다. 그 가족을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1) “네 가족을 또 네게 속한 자를(딸 사위) 다 성 밖으로 이끌어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성을 멸망시키실 터인즉 속히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구원의 복음입니다(요3:16).
2) “속히 장망성을 떠나라. 지체할 시간이 없다” 하고 밤중부터 새벽 동틀 때까지 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멸망과 징계의 때를 정하셨고, 또 권면하시는 기회도 시기와 한정이 있습니다. 깨달음과 회개는 항상 시급히 서둘러야 함을 잊지 마셔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다 일깨워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롯과 관계없는 죄인들에게는 멸망과 구원을 예고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택자들이었으니까 하나님이 버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롯과 그 권속은 아브라함의 가족이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가족들에게 은혜 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창17:7) 그들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4) 그러니까 권면의 대상은
① 언약의 백성이었고,
② 신앙의 백성이었으며,
③ 신앙인의 권속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언약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복음을 받았고 신앙인의 가족들이 신앙인 주변에 있음으로 인하여 이차적으로 복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믿고 순종하는 자만 받는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5) 그래서 롯과 롯의 부인과 두 딸은 그 도성을 탈출하였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시면 롯은 능동적으로 임하였습니다. 속히 떠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와 두 딸은 억지로 이끌려 나왔습니다. 두 사위는 성도의 권속이기 때문에 구원의 특혜를 받았지만 농담으로 여기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온 다음에 “뒤를 돌아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였는데, 롯의 처는 뒤를 돌아보다가 재앙을 만나(19절)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27절).
5. 그러면 이 말씀과 사건에서의 교훈은 무엇이며 결론은 무엇입니까? 교훈이 참 많습니다.
1) 하나님은 심판자시요.
2) 심판의 표준은 죄악의 분량 따라 하심이요.
3) 소돔성이 장망성 된 것은 장차 이 땅이 장망성 될 것을 예시하심이요(전1:9).
4) 구약의 복음은 언약의 백성과 그 권속들에게 임하였으나 신약시대에는 모든 민족에게 임하였으며,
5) 구원은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자라야만 받으며,
6) 인생들의 종류(구원과 관련하여)를 살펴보면,
① 소돔성의 악인들처럼 복음도 받지 못하는 희망 없는 백성들이 있고,
② 복음을 받되 농담처럼, 신화처럼 여겨 외면하는 자가 있으며(두 사위들),
③ 복음을 받되 “롯”처럼 신속하게 동하여 믿고 순종하는 자가 있고,
④ 복음을 받되 억지로 끌려, 두 딸처럼 겨우 구원에 이른 자가 있고,
⑤ 억지로 끌려오다가 세속에 이끌려 뒤를 바라본 여인처럼 구원의 은혜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롯”과 같이 능동적으로 행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7) 이 세상의 멸망을 피하여 ‘산으로 도망해야 된다’는 뜻은 산이 도피성과 요새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붙잡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 결론적으로,
① 성도들은 장망성인 이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 천성 길을 향하여 달음질해야 하며,
② 장망성을 떠나 믿음의 천성 길에 들어선 성도는 이 세상 것들에 대하여 뒤돌아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7절 말씀에서 “돌아보거나, 머물지 말라”하셨으니 결코 믿음생활을 머무르지 마시고 세상일에 미련 갖는 사람처럼 돌아보지도 마시고, 뒤에 것은 기억에 없는 듯이 잊어버리고(빌3:13) 앞에 있는 천성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합니다.
제 42 과 아브라함의 ‘그랄’에서 있은 일 (창 20:1~18) 목록으로
창세기 20장은 “아브라함의 그랄에서 있은 일”이라고 제목을 정함이 적당할 것입니다. 본장 1~3절은 아브라함이 그랄에 가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여 그랄 왕으로 하여금 자기 아내로 취하게 한 사실과, 4~7절에서는 사라를 취한 그랄 왕에게 하나님이 현몽하여 책망하시는 말씀과, 8~16절에서는 그랄 왕이 계시로 받은 책망 때문에 두려워하여 아브라함에게 연유를 묻고 위자료를 주는 내용과, 17~18절은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 화해하고 아비멜렉의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므로 하나님이 이미 그 집에 닫혔던 생산의 문을 다시 열어주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은 본래 살던 마므레에서 남방지역 그랄로 이사하였습니다.
1) 이때는 소돔 고모라 도성이 멸망된 것을 본 다음이었고,
2) 그가 이사한 그랄땅은 ‘가데스와 술 사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데스”는 가나안 땅 남방 델타지역 북부이고 “술”은 수르 광야로 애굽에 가까운 델타지역 서남방에 있으므로 그랄은 그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그랄이 마므레에서 서남방 50Km 지점에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랄이란 지역이 ‘지도상의 지점’과 ‘가데스와 술 사이의 지점’이 서로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어느 것이 확실한 지역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성경이 말씀한대로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믿는 것이 좋습니다. 그 지역은 마므레에서 적어도 서남방 100Km 이상 내려간 지역입니다. 그랄왕이 도읍한 왕궁을 옮기는 경우를 예상할 때 지도상의 표시도 틀리다고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3) 그런데 문제는 왜 그곳에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창12:10~20에서 아브라함은 흉년을 피하여 애굽에 갔다가 아내를 누이로 속여 빼앗기는 봉변을 당하고 다시 변상을 받고 나온 일이 있었는데 왜 또 갔을까요? 이번에도 흉년으로 인하여 갔을까요? 그에게는 318명의 하속들도 있지 않습니까?(14:14) 아브라함이 그랄에 갈 때에 많은 하속들을 데리고 갔다면 그랄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만큼 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추리해 볼 때 아브라함이 그랄에 간 것은 유목민의 생활풍속을 따라 목초가 많은 지역을 다니다 보니 그랄까지 갔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고, 이것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니며 또 3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아브라함은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창13:8) 모든 군인들을 다 해산시켰을 것입니다.
2. 그러면 왜 그곳에서도 과거의 애굽에서처럼 아내를 누이라고 하였는가 할 때에 그 이유를 10~13절에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곳 그랄의 주민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므로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까 함이었고,
둘째, 자기 아내는 자기의 이복동생으로 아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세째, 그들 부부는 이렇게 함으로 아브라함의 생명을 보존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로 약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13절).
1)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① 생명의 위험을 피하는 방법으로 거짓말을 하였고,
② 사실을 은폐시킴으로 거짓말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같이 온 여인이 누구냐?”고 한 뜻은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묻는 것이었고 아브라함과의 관계는 부부간이요, 남매간이란 이차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일차적 관계는 숨기고 이차적 관계만 나타냄으로 진정한 대답을 회피한 것입니다.
2) 이것이 잘한 것인가? 할 때 역시 진실하고 담대하게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진실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참을 지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지 않는 분이요(딤후2:13), 또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분(약1:17)이라고 하신 것을 본받아서 저희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연약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그 결과로 그랄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자기 아내 삼겠다고 데려갔습니다. 다른 지역 백성이 그랄땅에 들어가 살면서 왕명을 어길 수 없겠지요. 그런고로 사람이 자기의 기본입장이나 위치를 변동할 때는 상당한 명분과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또 아내를 빼앗기는 피해를 자신의 거짓말로 인하여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큰 보호를 받는 줄 알았더라면 거짓말 안하고도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만한 도움과 은총을 기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꾀를 부린 것이니 후회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② 그 밤에 하나님이 현몽으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지금 남의 아내를 취하고 있다. 네가 돌이키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때에 아비멜렉은 그 사라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는 의로운 방법으로 취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누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여인을 맞이한 것입니다” 하니까, 하나님이 “나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너로 범죄치 않게 하기 위하여 일깨워 주는 것이니 속히 돌려보내라. 그의 남편 아브라함은 선지자니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할 때 네가 살게 되려니와 만일 그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죽을 것이라”고 하시므로 아비멜렉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이튿날 일찍 일어나서 아브라함을 불러 책망을 하고 사라를 다시 돌려주게 된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아비멜렉이 두려운 책망을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 그는 왕이란 위세로 아무 여인이나 좋으면 데려오는 잘못을 범하였고,
㉡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생명의 위험을 느껴 왕의 요청이면 거짓말을 하여서라도 아내를 내줄 만큼 권위를 내세워 인권을 억압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 모르고 범한 것이지만(깨끗한 마음과 손으로 취하였다고 함) 그 내용을 깊이 살피지 않은 것이 그의 잘못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아시고 거기에 적절한 권면으로 속히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3. 아비멜렉은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경고대로 속히 돌이켜서 자신이 받을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1) 9절 말씀에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합당치 않은 일을 하였고 자신으로 하여금 “죄를 지을 뻔하게 하였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이 이방나라의 왕에게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방나라 임금이 무법하고 잔인할 것으로 짐작하여 자신이 살기 위한 수단으로 거짓말을 하였는데 이방왕은 오히려 아브라함보다 양심적이었습니다. 성도가 매사에 불신자들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더욱 결심하시고 빛 된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3) 아비멜렉은 미안한 값으로 양과 소와 노비를 포함하여 사라와 함께 돌려주고, 그들이 수치스러운 일을 해결할 때 주는 관행에 따라 은 1000개를 아브라함에게 주고 또 그 지역의 좋은 장소에서 살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비멜렉의 변상이 성실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① “네가 거짓말을 하였기 때문에 내가 모르고 아내를 삼으려한 것이 무슨 잘못이냐?” 하고 변상을 거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②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과오를 충분히 인정하고 또 남의 아내와 동침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집에 데려 온 것이 사실이므로 그 수치에 대한 것을 충분히 변상한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축복기도를 받고 형통하였습니다. 18절에서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려 할 때부터 (이방백성이 성도를 해롭게 할 때부터) 그 집 모든 여인들로 잉태하지 못하도록 태를 닫아 두셨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화해하고 아브라함이 축복기도를 하므로써 다시 그 집의 아내나 여종들의 닫혀진 태를 치료하여 생산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1) 하나님은 여인들의 태를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시며, 특히 하나님의 백성과의 문제가 있을 때 그렇게 하시고,
2) “아브라함이 축복하는 자를 복주시겠다” 하신 말씀대로 성취하신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창12:3).
5. 결론적으로,
① 성도는 자신의 위치와 환경을 변할 때, 꼭 명분 있게 행하여야 할 것을 교훈 받으셔야 하고,
② 진실은 생명보다 중하며 성도의 신분은 존귀하므로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며 지키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고,
③ 어떤 경우에는 성도가 불신자에게 지적을 받는 일도 있는데 이런 것을 크게 부끄럽게 여겨서 경계하셔야 할 것이며,
④ 성도의 생활과 불신자에게 비는 축복에도 하나님이 상관해 주시며,
⑤ 성도는 어디서나 하나님의 보호받는 백성임을 믿으셔서 성도로서의 권위를 잘 드러내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43 과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창 21:1~21) 목록으로
위 본문의 내용은 3대지로 나눌 수 있으니, ① 하나님이 약속대로 이루사 아브라함에게 적자를 출생케 하심이요(1~8절), ② 서자가 적자를 희롱하므로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게 하심이요(9~14절), ③ 하나님이 서자 이스마엘을 권고하심(15~21절)에 대하여 기록하신 것입니다. 본문 전체의 말씀을 하나의 제목으로 요약한다면 10절 말씀을 근거로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는 말씀이 가장 적당할 것입니다.
1. 약속대로 이루사 적자를 낳게 하심에 대하여.
1) 하나님은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돌보심)하여 기한에 미쳐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실천하시는 분이시고(창18:10), 그 약속을 실천하실 때 결코 기한을 넘기시지 않습니다(창18:10,14). 본문 2절에서 “기한에 미쳐… 아들을 낳았다”하신 것은 바로 약속 기간을 늦추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에 아들을 낳아 미리 지어주신대로 이름을 이삭이라 하였고(창17:19, 웃음의 뜻), 또 미리 명령하신대로(창17:12) “낳은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이때에 사라는 “하나님이 자기를 웃게 하셨으니 이 소식을 듣는 자가 함께 웃을 것이라”하였는데, 이 웃음의 의미는,
① 아들을 낳으므로 기뻐하는 의미가 있고,
② 또 90세에 젖먹이는 어머니가 된 일에 대하여 웃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은 이 일을 큰 축복과 경사로 여겨 큰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① 무에서 유를 또는 불가능에서 가능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며,
② 또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을 추호도 어김없이 성취시켜 주시는 분임을 나타내 주셨고,
③ 아브라함은 명령대로 할례를 실천함과 동시에 큰 감사의 잔치를 벌이므로 순종과 감사의 표시를 잊지 않았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서자가 적자를 희롱하므로 여종과 서자를 내어 쫓게 하신 것입니다. 서자 이스마엘은 적자 이삭보다 나이가 13년 위였습니다(창17:24~25).
1) 그러니까 큰 아이가 어린아이를 학대할 힘이 있는데, 문제는 “왜 학대를 하였느냐?” 할 때 이것이 바로 본처와 첩 사이에서 투기와 갈등으로 오래 빚어온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가정의 불륜은 가정의 불화를 가져온다는 사실과 미움이나 시기로 뿌려진 씨가 불화의 열매를 맺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2) 자기의 귀한 아들이 서자로부터 희롱당하는 것을 참지 못한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서자는 적자인 내 아들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므로 여종과 그의 아들을 내쫓아야 한다”고 제의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처음에 근심을 하였지만 하나님이 “아내의 말대로 하라”는 지시를 내리시므로 그대로 이행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이 첩의 소생일지라도 선민 아브라함의 혈육이므로 그에게도 번성하는 복을 주어서 “한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적자에게 주시는 복은 일반 은총에 특수 은총인 신령한 복을 더하여 주신 것이고, 서자에게 주시겠다는 복은 신령한 복을 제외한(행11:18) 일반 은총에 한한 것입니다.
3)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을 내용
① 불륜관계로 자녀를 생산하면 그것이 불화의 씨를 심음이 되고,
② 그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큰 심적 고통을 당하였으니 이것도 불륜의 씨를 심은 결과일 것이요,
③ 아브라함은 “첩과 서자를 내 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인정을 초월하며 복종하였으니 이는 위대한 복종이며,
④ 이스마엘은 적자가 아님을 인하여 기업의 대상에서 축출되었으니, 이는 바울사도의 말씀처럼 “율법 아래 있거나 신앙을 떠난 아브라함의 혈육이 구원받지 못할 것”을 비유로 설명하심과 같은 것입니다(갈4:21~24).
⑤ 아브라함은 서자를 배출한 책임자요, 불륜의 죄를 범한 사람이었지만 그에 대한 문책이나 징벌이 나타나 있지 않고 피해를 본 사람은 첩과 그 아들뿐이니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선민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의 가리우심을 받는 자”이지만(시32:1) 비택자는 그런 특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민 된 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그에게 어떤 흠이 발견된다 할지라도 버림이 되지 않으며 궁극적 구원에 이르게 하심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사41:9).
⑥ 또 이삭은 약속받은 자의 예표로, 이스마엘은 비택자의 예표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3. 이렇게 하여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1)
1) 그들은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어깨에 메인 채 쫓겨났습니다. 남방 애굽을 향해 가다가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고 물이 없는 상태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지쳐 쓰러진 곳은 브엘세바 들이라고 하였으니(14절), 이곳은 아브라함의 거주지인 헤브론에서 100리쯤 남쪽에 있는 곳인데 역시 광야지역입니다. 두 모자는 의지할 곳 없이 방황하다가 물이 없음을 인하여(15절) 죽음을 예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하갈은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하여 아들을 떨기나무 그늘 아래 둔 채 살 한바탕쯤의 거리 간격을 두고 마주 앉아 방성대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살 한바탕 거리란 화살이 갈 수 있는 거리를 의미합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자의 최후통곡이었을 것입니다.
3) 그런데 하나님은 그 버려진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사자를 하갈에게 보내셔서 위로와 함께 살 길을 열어주시고 그들이 크게 번성할 것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방성대곡한 하갈의 울음소리보다 “신음하는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권고하셨다”하셨으니, 이것도 아브라함의 혈육에 대한 하나님의 간접적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복을 받으면 그의 연고자들에게도 간접적으로 은혜가 전달됨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고, 바울 때문에 그와 함께 조난당한 사람들이 구출 받은 것은 그와 같은 실 예라 할 것입니다(창39:5;행27:24).
4)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여시므로 그가 샘물을 발견하고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마시우므로 다시 힘을 얻어 시나이반도 남쪽인 바란 광야에 가서 사냥하며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애굽 여인으로 아내를 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눈을 감기우시면 눈을 뜨고도 좋은 것을 찾지 못할 것이나 하나님이 눈을 뜨게 하시면 신령한 복은 물론 모든 필요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신29:4).
5)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스마엘에게도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4. 결론적으로
1) 죄의 결과로 불행하게 됨은 당연하며,
2) 선민은 실수가 있어도 가리워 주시고 구원하시는 일이며,
3) 불법의 사람과 비택자는 결코 선민의 대열에 오를 수 없는 일과,
4) 하나님은 선민의 서자에게도 간접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것과,
5) 하나님이 권고하시고 눈을 열어 주실 때 필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 44 과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음 (창 21:22~34) 목록으로
위의 말씀에는 그랄왕 아비멜렉과 그랄 지역에 우거한 아브라함과의 싸움을 방지하기 위하여 아비멜렉의 제의를 받아 평화조약을 맺은 내용입니다.
1. 아비멜렉이 이런 조약을 필요로 한 이유는,
1) 아브라함을 볼 때에 그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자이므로 그와 더불어 대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두렵게 생각한 나머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해롭게 할 수도 있다는 예견에서 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요,
2) 또 그의 군대장관 비골이나 다른 백성들이 자기들 땅에 우거하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마땅치 않게 생각하였고, 또 불안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2.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내보내고 그랄 땅에 있을 때에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 와서 아브라함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하면서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에게 자신이 아브라함을 후대한 것처럼 후대해 줄 것을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1) 여기에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섬기는 하나님을 경외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하나님에 대한 권위를 신뢰한 것이 사실이요.
2) 또 그 하나님으로 맹세한 것은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청하였으니 만일 하나님 앞에서의 맹세를 이행치 않을 때는 그 하나님이 거짓말한 사람을 징계하실 것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3) 어떤 약조를 할 때 자신들이 섬기는 신 앞에서 맹세의 의식을 갖는 것은 그들 세계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3. 또 그런 맹세를 조약하는 중에서 아브라함은 과거에 아비멜렉의 종들이 자신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항의하였으나 이 사실에 대하여는 서로 고하지 않은 연고로, 모르고 지나간 것인 만큼 그대로 무마하기로 한 것입니다. 미래의 평화를 위한 조약을 하면서 과거를 말한 것은 그런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4. 27~32절은 상호평화조약 체결의 절차를 말씀한 것입니다.
1) 먼저 아브라함이 암양새끼 일곱 마리를 따로 골라서 아비멜렉에게 주므로 늑탈당하였던 우물의 소유자가 아브라함임을 확인하는 증거로 삼았고,
2) 서로 맹세한 다음 그 우물 이름을 “브엘세바”(맹세의 우물)라고 호칭하였습니다. 그 후 그 지역도 브엘세바로 호칭하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은 과거에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난 후 통과한 지역이었습니다(창21:14).
3) 이 맹세와 조약을 끝내고 아비멜렉과 비골장관은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갔다 하였으니 그 당시의 그랄 지역이 블레셋족의 지경에 속하는 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아브라함은 그곳에 에셀나무를 기념으로 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에셀나무는 광야에 드문드문 성장하는 떨기나무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상록수로 견고하여 장구성을 표상하기 때문에 심은 것이요, 그가 제사를 드린 것은 이웃과의 평화를 주심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드렸을 것입니다.
5)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지역에서 계속 여러 날을 더 지냈습니다. 그 지역은 바로 블레셋족속의 땅인 그랄 지역 “브엘세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32절).
5.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1)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었을 지라도 그 본토족속들이 살고 있는 중에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의 대상이 되어 없어지기 전에는 협력과 평화조약의 공존상태에서 살게 하셨고 출애굽 이후 그 땅을 침략으로 점령하게 하셨음과,
2)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은혜를 받아 이방족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선대를 받게 하신 것과,
3) 실제적인 평화협상을 통하여서도 안주하게 하신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도가 이방인들 세계에서 빛 된 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이런 은혜와 방법이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 45 과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림 (창 22:1~19) 목록으로
위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고 하나님의 칭찬과 복을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이요, 3~10절은 이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순종한 내용이요, 11~19절은 순종 이후에 주신 칭찬과 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내려졌습니다.
1) 그 명령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땅의 지시하는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2) 이 명령이 내려진 때는 아브라함이 그랄 왕과 조약을 맺고 헤어진 후였고, 그의 아들 이삭이 성장한 나이로 자라고 있을 때였습니다(12절). 이때에 하나님은 자기의 사자를 통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11절).
3) 하나님이 왜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에 대하여 본문 1절에서,
①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신앙을 시험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험은 넘어지게 하는 시험이 아니고 정도를 알아보는 시험이었습니다. 즉 테스트해 보시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이 우리를 테스트하신다고 생각하여 무엇이나 어려운 일들을 건설적으로 감당하는 습관을 가지셔야 합니다.
② 하나님은 살인을 금하셨고 또 사람을 죽여 불태워 번제 드리라고 하실 수 없지 않느냐 하는 분도 있지만 하나님은 입법을 임의로 하실 수 있는 분이요, 또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은 최종 시행을 기대하신 것이 아니요, 시험해 보시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무비판적인 순종을 바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③ “네 사랑하는 독자를 드리라” 하신 말씀에서도 아브라함이 얼마나 자식에 대한 인정을 초월하여 순종하는가? 감히 자식을 죽이려고 칼을 대는 용기를 나타내겠는가? “이삭의 후손으로 하늘의 별같이 번성하게 하겠다”하셨는데, 거기에 위반되는 일로 아들을 죽이라고 하였을 때 이유를 붙이지 않겠는가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④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이유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예표로 나타내 주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예루살렘 언덕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이 바로 그 장소인 모리아산에서 제물 되는 사건으로 미리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비유나 예표는 100% 공통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이 성경을 해석할 때 이삭의 나이를 40대의 성인으로 해석하고 또 아브라함이 칼로 아들을 결박하고 찌르려 하였을 때 그는 예수님의 모형자이므로 순순히 결박에 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니 나를 죽여 제물 되게 하시요” 하고 순응하였다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표적 예언에 대하여 꼭 그렇게까지 공통되어야 예언이 맞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비유나 예표는 어디까지나 한두 가지 공통점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독자가 예루살렘 언덕에서 제물 되는 것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예언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요나가 고기 배속에 들어간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한다면 요나는 의로운 선지자로 풍랑을 만나지 않았어야 더 적합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나는 거역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예수님과 다 공통되지 않지만 그가 고기 배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 바로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부활하신 것을 예표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이삭도 약 1000년 후에 있을 성전 터에서 희생될 어린양처럼 제물로 드려졌으니까 그것으로 메시야의 죽음을 예표하기에 충분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2. 이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는 한마디로 표현하여 과감하게 순종하였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취되게 하기 위하여 계획적인 노력을 하였습니다.
1) 우선 그 사실을 부인과 종들과 당사자인 아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분별한 자들의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함이었고,
2)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장작과 불과 칼을 갖고 두 사환과 독자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산까지 삼 일 길을 여행하게 된 것입니다.
3) 목적지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두 사환과 나귀는 기다리게 하고 장작을 이삭에게 지운 후 불과 칼만 들고 산으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① 당시의 불은 횃불이 아닌 불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② 모리아산이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브엘세바에서 삼 일 길을 북상한 곳인데 대하3:1을 보시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다”고 하시므로 바로 그곳이 예루살렘의 성전 터가 될 것을 미리 예언하신 일이 된 것입니다.
③ 장작을 지고 올라가면서 불과 칼과 나무는 있는데 제물이 없으니까 이상하여 이삭이 그것을 물어본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8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하였으니 이 대답도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예언적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신 제물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이삭으로 예표하였다가 다시 수풀에 걸린 양이 예수님의 예표로 변하여지는 것을 나타낸 예언적 대답이었습니다.
4) 목적지에 도착하여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그 위에 장작을 벌여 놓고 주저함 없이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의 나무 위에 놓고 칼로 이삭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려 할 때 어떤 감정을 표현하였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눈을 딱 감고 찌르려 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얼마나 강하게 순종하려고 하였는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① 저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때 이를 악물고 주변의 반대나 여론 따위는 거들떠 볼 필요도 없이 강하게 순종하려는 결심이 있어야만 세상의 여론을 따돌리면서 계명을 더 잘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삭이 반항을 하였는지, 순종을 하였는지는 상상에 맡길 일입니다. 이삭이 예수님은 아니니까 죽음에 순종하는 방법까지 같아야만 되는 것은 아니요, 오로지 예표적 예언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② 아브라함은 자식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일에 먼저 정신적으로 복종하고 다음에 실천에 옮기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이시니까 “죽은 자를 다시 살려주실 줄로 믿고 행한 것”(히11:19)입니다. 이렇게 부활과 영생을 믿는 신앙은 생명의 희생과 죽음도 감수하고 복종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신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시고, 이삭을 찌르기 전에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부르시면서 아이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2) 그리고 아브라함의 절대적 순종에 대하여 칭찬하여 말씀하시기를,
① 네가 사랑하는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②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고 하시므로 아브라함이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저희들에게 어려운 실천이나 봉사와 헌신을 요구하신다면 저희들이 얼마만큼이나 복종할 것 같습니까? “나는 상당하게 복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올 때 자신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진실한 것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수풀에 걸린 수양을 발견케 하셔서 그것으로 이삭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자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으로 (또 이삭 대신 수양으로) 드리게 한 것은 2000년 후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책을 대신 짊어지시도록 구속 사업하실 것을 예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브라함이 독자를 제물로 바치는 정성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4) 아브라함은 그 장소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일컬었습니다. 여호와이레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순종을 보시고 미리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무슨 일이나 사람이 염려하지 말고, 믿고 순종만 잘하면 하나님이 그때그때 적당하게 준비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며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5)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 주실 것을 자신을 가르쳐 맹세하며 말씀하셨습니다.
① 이 맹세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축복을 거듭 강조하신 것입니다(18절).
② 하나님이 자신을 가르쳐 맹세하신 것은 맹세의 입증대상이 하나님 외에 더 든든한 대상이 없기 때문이며 맹세는 듣는 이로 하여금 약속을 굳게 믿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하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③ 축복의 내용인즉,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하시고, 또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선민의 대적이 바로 사탄이고 사탄에게 속한 것들이기 때문에 모든 사탄의 역사를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님이 능히 정복하여 승리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한 입장에서(롬6:19)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사탄의 역사를 누르고 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승리의 복을 모든 선민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이요, 또 이 말씀의 의미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탄생할 것”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④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다짐받고 살던 곳 “브엘세바”로 귀향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1) 하나님은 성도의 믿음을 테스트하여 육성시키시는 분이시며,
2) 성도가 그런 시험을 잘 치르면 큰 복을 받을 것이요(히11:17),
3)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이 바로 메시야를 보내실 것과 메시야 구속 사업을 예표로 나타내 주신 것이며,
4)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순종은 역사세계에서 비교할 데 없는 귀한 순종이요,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진 자에게 귀한 복을 약속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 또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상황 따라 예비해 주시는 분인 것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46 과 나홀의 자손 (창 22:20~24) 목록으로
위의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자녀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① 아브라함은 자기 동생 나홀이 많은 자녀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② 장차 며느리를 구할 때 친족 동생의 자손 중에서 택할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인종이 희귀한 중 이방족과 혼인할 마음이 없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창24:3~4). ③ 아브라함은 동생 나홀의 손녀 “리브가”를 자부로 맞이하였습니다. “리브가”의 계통을 나타내 주시려고 나홀의 자손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 데라(아브라함, 나홀 낳음)
/ 아브라함+사라 / 나홀+밀가
: 이삭 : 우스, 부스, 그므엘(아람 낳음)
게셋, 하소, 빌다스,
/ 아브라함+하갈(첩) 이들납, 브두엘(리브가 낳음)
: 이스마엘
/ 나홀+르우미(첩)
: 데바, 가함, 다하스, 마아가
설교보충 21. 아브라함의 순종과 모범 (창 22:18) 목록으로
1. 성도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퍽 귀한 일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칭찬하여,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으므로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다”는 것은 메시야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메시야 이후시대에 살기 때문에 메시야 약속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저희들이 하나님 뜻을 잘 순종하면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는 약속을 그대로 힘입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출20:6).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한 것이 인류의 죄와 불행과 멸망을 가져왔고(롬5:12,17)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시므로 멸망 받을 인생을 구원해 주셨으며(롬5:19)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하시므로(삼상15:22) 순종을 신앙생활의 으뜸 되는 미덕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14:23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하셨는데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뜻이므로 역시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이 어느 수준까지 순종하였습니까? 아브라함은 그의 생활 중 세 차례에 걸쳐 큰 순종을 하였습니다.
1) 하란에 거하여 그의 나이 75세 되었을 때에 “가나안땅을 너의 후손에게 줄 것이니 그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땅은,
① 어느 지역이란 확정이 없었고 광범한 지역을 의미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 바를(정착지를) 알지 못 한 채 떠났습니다(히11:8).
② 그리고 그 당시에 그 땅은 비어 있는 공지가 아닌 가나안족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으며,
③ 또 그 땅을 당장 주신다는 것이 아니고 “약 500년 후에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430년을 살다가 광야 40년을 거쳐서 그 땅에 발을 디뎠으니까 약 500년 후가 되는 것이지요.
④ 하나님이 이렇게 500년 후에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고향땅을 떠나라”하셨으니 이렇게 먼 훗날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의 삶의 터전을 다 버리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떠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나안땅에 가서 나그네로 유리하며 살았습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물질주의를 포기하였고 인생을 나그네처럼 살 것을 결심하고 떠난 것이었습니다. 히11:14~16을 보시면 아브라함은 본향을 사모하며 나그네 인생을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2) 그의 나이 87세에 낳은 “이스마엘”서자와 서자의 생모인 첩 하갈을 내 쫓으라는 명령을 순종한 것입니다(창21:10). 요즈음 시대에는 첩이나 서자를 내 쫓는 일이 옛날만큼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은 인종이 귀하였고 자식을 하늘처럼 의지하던 시대였으며 아브라함이 기다리고 바라다가 87세에 낳은 아들과 첩이기 때문에 참으로 쫓아내는데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도 하나님의 뜻인 만큼 마음의 쓰라림과 인정을 초월하여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가혹한 명령을 하셨을까? 하시겠지만 하나님은 가혹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모든 것을 공의롭게 하실 뿐이지요. 따라서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쉽게 거역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혹한 일이지요.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은 가혹한 일이 아닌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서자가 기업을 못 받고 쫓겨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인생이 구원받지 못할 것을 예표로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백성은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은 백성임을 아셔야 합니다.
3) 아브라함은 더 어려운 일을 또 순종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① 백세에 얻은 자식을 칼로 찔러 죽이는 일,
② 죽인 자식을 불태우는 일,
③ 그 자식을 통하여 인종의 번성과 메시야까지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고, 또 살인을 금하시는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주셨기 때문에 더욱 순종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할 때 이 사정 저 사정을 따지면 순종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이 사정 저 사정 따진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의심하는 태도요, “자신에 관한 전부를 맡기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불신앙과 불순종을 아울러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순종하도록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3. 아브라함의 순종이 왜 모범적인가 할 때에,
1) 환란이 있을 때 순종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히11:17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복 받은 아브라함이라도 편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흉년, 유리하는 생활, 땅에 우거하는 생활, 롯을 분가시키기 전에 종들끼리 다툰 일, 소돔성의 멸망, 전쟁, 첩으로 인한 가정불화, 자식을 내쫓은 일 등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욥의 신앙을 방불케 한 것이기 때문에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2) 계획적으로 순종을 한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이 시행되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① 아내에게 숨겼고,
② 종들에게도 숨겼으며,
③ 당사자인 이삭에게도 처음에는 숨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숨긴 이유는 너무도 엄청난 일을 해야 하니까 만일 미리 누설하였다가 순종에 어떤 제제를 받을 우려가 있을 것으로 추측하여 계략적으로 누설하지 않고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계략을 쓰는 경우는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계략을 쓰고 연구하며 계획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도록 계획적인 순종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신속하게 어려운 일을 순종한 것입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서둘렀고, 또 주저하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4. 어떻게 이런 모범적인 순종을 할 수 있었는가? 할 때,
1)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믿었고,
2)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능력있는 분임을 믿었으며(롬4:17),
3) 이삭을 드릴 때도 부활로 다시 돌려주실 줄로 믿었고(히11:19),
4) 자기에게 주시는 어려운 명령이 곧 자기의 믿음을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들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진실성과 그의 능력과 성도를 시험(테스트)하여 육성시키신다는 사실을 믿으신다면 순종을 더욱 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의 순종을 본받아 저희들도 순종을 잘하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은혜를 더 많이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 47 과 사라의 장례 (창 23:1~20) 목록으로
창세기 23장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에 세상을 떠나므로, 아브라함이 그 지역에서 매장지를 구입하여 장례를 치르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열국의 어미인 사라의 장례식인 만큼, 고인이 된 사라의 약력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1) 사라는(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의 이복누이로 태어났고 아브라함보다 10세 아래이며 아브라함의 아내가 되어,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서 살다가 그 나이 65세 때에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으로 왔으며, 90세 때에 이삭을 낳고 36년을 살다가 며느리를 맞이하지 못 한 채 그가 살던 헤브론 땅에서 127세에 세상을 떠나니 아브라함보다 28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창11:29, 20:12).
2) 그는 아브라함을 따라 꼭 같은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두 번이나 흉년을 만나 고생을 하였고 흉년이 있을 때마다 애굽과 그랄에 가서 살면서(창12:14~20;20:1~14) 그의 미모로 인하여 이방 왕들에게 모욕당할 번하였으나 그 때마다 하나님이 구출해 주셨고, 아브라함의 지극한 사랑을 받다가 세상을 떠난 여인입니다.
① 이복 여동생이 아내가 된 것은 종족이 희귀한 시대에 흔히 있었던 일이요.
② 아브라함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이유는 그가 자매요, 아내요, 미모가 있을 뿐 아니라 먼 고향에서 같이 살아온 혈족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③ 사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단산 중에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한 것이 그의 신앙의 특징이라 할 것입니다(히11:11).
2. 사라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아브라함은 “슬퍼하며 애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옛 고향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서 산 세월만도 62년인즉 그 이전 갈대아 우르에서 산 것까지 합치면 100년쯤 부부로 산 사이였으니까 섭섭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장사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이 사는 헤브론 땅에 우거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미리 매장지를 확보하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나그네 생활의 정황이 가족묘지 하나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그래서 아브라함은 우선 매장지를 구하러 나섰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고장에 “막벨라 굴”이 있었는데 이 굴은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소유 밭머리에 있는 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굴을 자기의 소유로 구입하여 그곳에 장례할 뜻을 세우고 한 곳에 모인 헷 족속들에게 그 사정을 말하였더니 헷 족속들이 대답하기를 “당신이 우리의 주이시고, 또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신만큼 우리 묘실 중에서 임의로 좋은 것을 택하여 쓰셔도 말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1)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이방인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그들의 군주격으로서 상부상조해온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을 호칭할 때 “주”라 하고 또 “하나님의 방백(하나님이 쓰시는 통치자)으로 호칭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이 이렇게 존경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붙드사 높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지역의 거주민들은 어느 매장지든지 사용해도 말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아브라함은 에브론의 소유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굴을 사용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정당한 가격으로 팔기를 청한즉 땅 소유자 에브론이 말하기를 “땅 값은 은 400세겔이지만 어찌 군주격인 아브라함에게 교계를 하겠습니까?(즉 돈 받고 팔 수 있겠습니까?) 그 땅을 이 자리에 모인 여러 동족들 앞에서 거저 드리니 그대로 사용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저 받아쓰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증인들 앞에서 은 400세겔을 주고 그 밭과 굴과 거기에 속한 수목까지 자신의 소유로 삼아 거기에 사라의 시체를 장사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을 것은
1. 아브라함은 이방인의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 생활로 인생의 나그네 생활을 모형으로 나타내 주었습니다.
2. 아브라함은 어디서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존귀한 대우를 받으며 살았고 이방인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방백이란 인정까지 받았습니다. 성도들도 불신세계에서 큰 존경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은 헷 족속으로부터 군왕의 존경을 받았지만 군주라는 위세를 내세워 누구에게도 피해를 준 일이 없었습니다.
4. 군주로 대접하는 정성으로 필요한 묘지를 “거저 쓰라”하는 것도 부디 사양하고 정당한 대가를 주어 자기소유로 삼은 다음에 사용하였습니다.
5. 아브라함은 물질거래에 대한 절차를 대단히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식에 따라 체결하였습니다. 증인을 세운 일과, 밭과 굴과 수목을 포함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6. 사라는 한 남자의 아내였지만 열국의 어미란 칭호와 함께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절차로서 메시야의 맥을 잇는 귀한 역할을 한 여인임을 알 수 있고,
7. 아브라함은 미리 매장지를 준비한 일이 없었으나 필요하게 되매 하나님이 대책을 세워 그때그때 사용하게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장례법이 성경적인가? 할 때,
① 사람의 죽는 환경이 일정하지 않고,
② 육신은 생명이 떠나면 누구의 육신이건 흙과 같은 요소요,
③ 모세나 예수님도 무덤이 없는 상태인 것을 감안할 때 선민들이 시행한 장례법이 교리적이거나 표준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례는 시대와 형편에 따라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의하여 치루어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제 48 과 이삭을 결혼시킴 (창 24:1~67) 목록으로
창세기 24장은 “아브라함이 자부를 구하여 아들 이삭과 혼인을 시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1~9절은 종에게 자부를 구해오도록 부탁하는 내용이고, ② 10~27절은 종이 주인의 고향 땅에 가서 규수를 찾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며, ③ 28~53절은 찾은 규수를 아브라함의 자부가 되도록 허락받는 내용이고, ④ 54~60절은 허락한 딸을 보내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요, ⑤ 61~66절은 신부를 인도하여 신랑을 만나 살게 하는 내용입니다. 내용은 소설처럼 길지만 제목은 한 마디로 “이삭을 결혼시킴”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이 자부감을 구함에 대하여(1~9절).
1) 아브라함은 아들을 장가보내야 하였습니다.
자기의 나이는 늙었고 부인은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은 성인이 되었고, 하나님이 자기의 범사에 복을 주셨으므로 아들을 먼저 장가보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이때가 이삭의 나이 40세요(창25:20) 사라가 죽은 지 삼년 후였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인류 초기부터 허락하신 축복이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지 않게 여기시므로 한 남자와 한 여자와의 혼인은 항상 허락되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장가보낸 후 “그두라”를 후처로 취하였습니다.
2) 아브라함은 자기의 자부를 구하는 문제를 자기 집의 소유를 맡은 늙은 종(청지기)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이 늙은 종은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을 때 후계자로 지목하려 하였던?엘리에셀”이라고 추측됩니다(창15:2).
3) 아브라함은 그 종의 손을 자기의 환도뼈 밑에 넣게 하고 맹세시켰습니다.
① 중대한 일을 신용 있게 부탁할 때 맹세를 시키는 일은 풍속으로 전해지는 것이고,
② 손을 환도뼈 밑에 넣게 한 것은 맹세의 특수한 방법인데 환도뼈는 척추와 다리를 연결하는 뼈로서 자녀 생식의 요소가 허리(척추)에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아(히7:5), 아브라함이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는 뜻으로 그런 맹세방법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③ 이때에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이방족 딸을 원치 않았고 동생 나홀이 살고 있는 하란 땅(중간 고향)에 가서 자기 부족의 딸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하였으니 그 당시에 아브라함의 근족들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은 아닐지라도 노아홍수 이후의 경건한 백성으로 살아 온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경건한 부족의 딸을 찾게 된 것입니다.
④ 이 때 종이 묻기를 “만일 그곳의 딸이 당사자 신랑을 보지 않고는 못 오겠다 하면 주인의 아들을 그 고향 땅으로 데리고 가리이까?”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지 말라 하였으니 그 이유는, 1800리 가량 되는 장기여행 중에 아들의 신변상 위험을 염려하기 싫었고, 또 하나님이 가나안땅을 자기의 후손(네 씨)에게 주실 것을 맹세하실 때는 반드시 그 사자를 앞에 보내셔서 일을 성취하게 하실 것인즉 그렇게 믿고 시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만일 여자가 오지 않겠다고 한다면 너와 나와의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4)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신변을 보호한 것은 그의 씨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성심을 다한 것이었고 거기에 따라 하나님의 사자의 인도가 있을 것도 아울러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성심을 다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일에 역사해 주실 것을 믿고 바라셔야 할 것입니다.
5) 또 성도는 혼인의 대상을 구할 때 의례히 믿음세계 안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믿음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결혼하고도 나중에 신앙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큰 불행을 당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본 일이 있습니다.
2. 종이 주인의 고향땅에 가서 규수를 찾는 내용입니다(10~27).
1) 종은 주인의 약대 열 필을 몰고 떠났으며 종자들도 같이 갔다고 하였습니다(59절). 그는 장거리 여행을 끝내고 주인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 지역 나홀성에 도착하여 성 밖 우물곁에 머물렀으니 그 때는 여인들이 물 길러 나올 때인 저녁이었습니다.
2) 이때에 종은 하나님께 기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주인의 고향 동리 성 밖에 와 있습니다. 이제 이 성안의 소녀들이 물 길러 나올 것입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순적하게 규수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물 길러 나온 한 소녀에게 마실 물을 청하였을 때 그의 대답이 마시라하고 또 약대에게도 마시우겠다 하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 정해 주시는 규수인 줄로 알겠습니다” 하였으니 이 기도의 의미는 하나님께 부탁함이 첫째이고 다음은 친절하고 봉사성 있는 여인인가를 살피려고 한 것입니다.
3) 그런데 그 기도가 마치자마자 가장 먼저 물 길러 온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인 리브가였습니다. 그 소녀는 친절하고 민첩하며 (급히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함) 나귀에게까지 물을 먹이는 봉사성 외에도 제일 먼저 물 길러 나오는 근면과 미모까지 겸한 규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4) 과연 하나님의 사자가 앞서 인도하신 것이었고 이런 것을 가르쳐서 “여호와 이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 좋다고 다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21절을 보시면 “그를 주목하면서 하나님께서 과연 평탄한 여부를 주셨는지를 알고자 하였다”하였으니, 그 방법으로 먼저 비싼 패물을 선물하게 된 것입니다. 반 세겔짜리 금고리, 열 세겔짜리 금 손목고리 한 쌍을 주고 규수의 이름과 유숙처를 묻게 되었습니다. 주인의 자부가 되어 줄지 안 되어 줄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비싼 패물을 줄 수 있는가 할 때 이 종은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요, 또 계속 신부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패물을 증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5) 패물을 받은 리브가는 자신이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인 것을 말하고 자기 집에 유숙처가 넉넉한 것을 말하므로 하나님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인자와 성실을 더하신 것과, 또 자신의 길도 인도하셔서 무사히 그곳까지 오게 된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6) 종이 규수 감을 구할 때 먼저 기도로 부탁하고 믿음의 족속 중에서 친절하고 근면하며 봉사성이 있는 처녀를 구한 것처럼 오늘도 사람을 구하는 표준이 믿음과 근면성과 봉사성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만난 규수를 아브라함의 자부가 되도록 허락받는 과정에서(28~53절),
1) 종은 리브가의 집으로 영접을 받았습니다. 리브가가 귀한 패물을 갖고 자기 집에 가서 사실을 말하였을 때 가나안 땅으로 간 백부 또는 형님의 종이 약 50년 만에 형의 심부름 차 왔다는 말을 듣고 반갑게 영접하여 예우를 갖추고 식물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나홀의 이름이 안 나오는 것을 보아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2) 종은 영접을 받고 먹고 휴식하는 것보다 주인을 위한 사명으로 자부를 구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였기 때문에 33절에서 “먹기 전에 먼저 자기 일을 진술하겠다”하고 자신이 아브라함의 종인 것과, “규수가 종을 따라 오지 않아도 아들 이삭을 데리고 올라가지 말 것은 하나님이 형통한 길을 주실 것으로 믿었다는 것과, 자신이 하란에 도착하여 기도한 대로 규수를 만난 것과 그가 바로 리브가인 것을 알고 그에게 선물을 준 것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3) 또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으므로 주인의 동생의 딸(나홀의 손녀 또는 이삭의 사촌 동생의 딸)을 택하게 하신 것을 감사하여 경배와 찬송을 드렸으니 이제 당신들이 인자와 진실로 나의 주인 아브라함을 대접하시려거든 이 혼사를 허락하시고(49절, 내게 고하시고) 그렇지 않을지라도 내게 뜻을 고하여 나로 행동을 취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4) 그랬더니 이 말을 다 들은 리브가의 오라비 라반과 부친 브두엘이 말하기를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가 가부를 말 할 것이 아닌즉(허락할 수밖에 없은즉) 리브가를 데리고 가서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하므로 종이 크게 감사하고 더 많은 선물을 리브가와 그 오라비와 그의 어미에게 주었습니다.
5) 이상의 말씀에서 옛날 신앙인들의 혼사법은 기도와 중매로 성취시키되 하나님의 뜻임을 믿을 때는 부모가 일방적으로 승인하고 자녀는 무조건 순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방법으로 혼사가 성취된다면 당사자끼리 만나는 것보다 훨씬 더 좋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4. 딸을 보내는 과정에서(54~60절)
1) 종이 하루를 유한 다음 가려고 하자 딸의 부모는 섭섭한 감정 때문에 적어도 열흘 후에 갈 것을 권하였지만 종은 그 기쁜 소식을 빨리 주인에게 알리고자 하는 충정 때문에 급히 가기를 원한즉 결국 딸 리브가의 의향대로 하자 하여 딸에게 물으니 지체 없이 떠나겠다고 하였습니다.
2) 그래서 그 가족들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를 함께 딸려 보내면서 “천만인의 어미가 되라” 하고, 또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하라”고 축복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천만인의 어미가 되라”는 말과 “원수의 성문을 얻으라”(22:17)는 말은 이삭과 리브가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예언한 축복으로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으로 향할 때부터 그런 약속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창12:2~3) 그 약속이 계속 성취되기를 함께 믿고 축복을 한 것입니다(60절).
3) 그래서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 본 고장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삭은 “브엘라헤로이”에서 살았는데 그곳은 창16:7~14에서 하갈이 쫓겨났을 때 하나님의 사자의 지시를 받고 되돌아오게 된 지역으로 그랄 땅에서 남쪽으로 100리쯤 내려 간 곳이었습니다(62절).
4)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여기의 묵상은 자기의 혼사문제로 인한 기도인 듯함) 종들의 일행이 오는 것을 보았고 리브가도 그 사실을 안 다음 약대에서 내려 면박으로 자기를 가리웠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리브가가 자기의 남편 될 사람 앞에서 낮은 자세를 취하고 여자로서의 정숙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5) 리브가가 자기 집 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은 채 시집으로 온 것은 성도가 현실에 미련 없이 살면서 본향을 사모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요, 또 여인이 남자 앞에 정숙함을 보인 것은 성도가 예수님께 대하여 그렇게 겸손하게 섬김의 자세를 취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이삭은 자기 아내를 모친이 살던 옛날 장막으로 인도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므로 모친이 세상 떠난 후에 위로를 받았으니 하나님은 슬픔당한 일 후에 위로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의 결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에 의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결혼예식의 장황스런 절차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합당한 배우자로 그 집에서 살게 하니 그것이 바로 혼인이 된 것입니다. 혼인을 은밀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으나 장황스런 절차 없이 같이 살도록 허락한 것이 구약의 혼인제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가정의 인륜대사인 혼인을 어떻게 치렀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믿음의 동족세계에서,
2) 중매혼인으로,
3) 그리고 그 나머지는 종에게 다 일임하였습니다. 그 종은 자기를 대신할 만한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사자와 종이 기도한 후 종이 사람을 찾고, 종이 예물을 건네고, 종이 인도해 오고, 종이 서로 만나게 하고, 살게 해 준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성경을 해석할 때 종은 성령님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인도해 주신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혼인대사 문제도 성령님께 부탁하시고 성령님의 교통하심과 도우심으로 순적하게 만나서 좋은 혼사가 많이 성취되기를 기도하셔야 합니다.
설교보충 22. 이삭의 혼인과 비유적 교훈 (창 24:1~9) 목록으로
1. 창세기 24장에 나타난 이삭의 혼인에 관한 말씀에서 그 사건의 주인공들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므로 교훈을 받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성부 하나님으로, 이삭은 성자 예수님으로, 늙은 종은 성령님으로, 그리고 리브가는 예수님의 신부될 성도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성경을 해석하여 밝히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관한 절차를 교훈 받고자 함에 목적이 있습니다.
2. 성삼위의 구원사역 중에 성부 하나님은 계획(뜻)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그 계획(구속사업)의 요건을 성취하시고, 성령님은 이를 선민에게 적용시키는 역할을 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늙은 종의 역할은 이삭의 신부 감을 데려다가 결혼을 시키는 사명을 이행하므로 이는 성령님께서 전도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신부될 성도를 이끌어 오는 사명과 비슷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전도자를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가르치게 하십니다.
3. 전도자의 자격을 늙은 종의 신분에서 찾아봅니다.
1) 그는 아브라함의 신임을 받는 종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전도자는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 믿음이 있는 자이어야 합니다.
2) 늙은 종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종임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갖고 있었으니, 이것이 곧 아브라함에 대한 지식과 가지고 간 보화였습니다. 이것은 전도자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 곧 성경지식과 그 지식에 입각한 믿음과 자신의 진실 됨을 입증하는 생활입니다. 자신의 진실성을 믿어주는 세계에서 전도해야 합니다(막5:19). 모든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도록 은사를 갖추어야 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은사는 진리와 진리에 입각한 생활입니다.
4. 늙은 종의 활동에서 전도의 방법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전도자는 선민의 세계로 찾아가야 합니다. 본문 3~4절에서 “이삭의 아내를 택할 때 이방족에게서 택하지 말고 내 고향의 족속 중에서 택하라”하신 말씀은 “성도 될 자는 선민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이나?예루살렘과 유다에 먼저 가서 전파하라”(마15:24, 행1:8)는 말씀과 상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선민의 대상이 사람의 눈에 감추어져 있지만
① 범사에 종교성이 많거나(행17:22),
②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거나(눅9:50),
③ 믿는 가족 중에 살거나(고전7:14; 행16:14~15; 행16:30~35),
④ 환란 중에 있거나(마9:11~12),
⑤ 어린아이 같은 자(막10:14)등을 살필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더 지혜로워져서 선민의 싹을 엿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선민세계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구약의 선민세계는 셈의 후예와 아브라함의 부족,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었지만 이들이 다 구원적 선민이 된 것은 아니요 그 족속들 중에 선민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약시대에도 선민세계를 가까이 예측할 뿐입니다.
늙은 종은 자신의 진실성을 인정받았으며 주인의 아들 이삭을 소개하였고 그의 신붓감을 위하여 청원하였습니다. 이때에 온 가족들과 당사자 리브가는 대단히 기쁘게 여기며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늙은 종의 말만 듣고 딸을 보내는 것을 보면 그 종이 얼마나 진실하고 설득력이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전도의 사명을 가진 성도가 이만큼 신용과 설득력이 있으면 전도를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용을 얻은 자가 예수님을 소개할 때 설득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설득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정상에 효력은 있습니다.
3) 선민은 전도를 받을 때 믿고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6~7절에서 “여자가 따라오지 않으면 주인의 아들을 데리고 가리이까?”하였을 때 그렇게는 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이면 따라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살후1:10; 살후3:2).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면 굉장한 덕을 베풀어도 믿음의 귀가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민은 “하니님이 계시다. 십자가의 은혜다. 천국이 있다”하면 의심하지 않으며 비판하지 않고 따라오는 것이 마치 리브가가 늙은 종의 말을 듣고 따라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5. 늙은 종의 활동에서 사명수행의 방법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자기의 모든 일보다 주인의 뜻을 먼저 수행하는 것입니다. 늙은 종은 먼 여행 중에서 음식을 먹고 휴식하는 문제를 주인이 맡긴 사명만큼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먼저 자기의 할 일을 하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먹는 일보다 귀하게 여길 수 있는 사명감이 생겨야 하겠습니다(창24:33).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 또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마10:37~38)는 말씀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2) 사명자는 성도를 온전하게 양육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늙은 종이 신부를 단장시켜서 인도해 온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신랑이 아름다운 신부를 좋아하듯 예수님도 온전한 성도를 좋아하십니다. 엡4:12에서 “목사와 교사를 세우심은 성도를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온전함은 말씀과 기도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요17:19; 딤전4:5). 사명자의 지도를 받는 성도는 다 리브가처럼 아름다운 영적 미를 갖추어야 합니다.
3) 사명자는 성도를 예수님과 연합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자의 목적입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아내로 삼아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다”(창24:67)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의 극치는 예수님과의 개인적 교제에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맛보고 귀하게 아는 성도는 세상일이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멀리하게 됩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전도자의 자격과 사명활동과 그 목적에 대하여 교훈을 받았습니다.
제 49 과 아브라함의 죽음과 그의 서자들 (창 25:1~18) 목록으로
위의 말씀 1절~4절은 “아브라함의 후처의 자손들”이 기록되었고, 5절~6절은 “아브라함의 재산분배의 말씀”이며, 7절~10절은 “아브라함의 죽음과 장례에 관한 말씀”이요, 11절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 이삭의 거취”에 관한 말씀이요, 12절~18절은 “이스마엘의 후예와 그의 죽음”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상의 말씀들을 종합하면 “아브라함의 죽음과 그의 서자들의 생활”이라고 요약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입니다.
1. 아브라함 후처의 자손들에서,
1) 아브라함이 후처 “그두라”를 취하여 여섯 아들을 낳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후처 “그두라”가 대상1:32에서는 첩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후처는 본실이 죽었을 때 다시 재혼한 처이고 첩은 소실을 의미하는데 왜 이렇게 말씀이 다른가 할 때 이는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소실로 데리고 있다가 본처가 세상을 떠나니 자연히 그 소실이 후처가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애굽 여인 하갈 외에 또 한 여자를 소실로 두어 자녀를 생산하였으니 이것이 그 당시에는 생활수단의 한 방법이었으나 하나님 앞에 바른 생활은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문제에 대한 계시가 강조되지 않은 때문일 것입니다.
2) 그 여섯 아들들의 이름은,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인데 본문에서는 둘째 아들 욕산의 자손으로 스바와 드단이 있고 또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와 르두시와 르움미 족속이 되었으며(르두시와 르움미 족속은 후에 없어진 듯함), 또 넷째 아들 미디안의 아들들이 에바, 에벨, 하녹, 아비다, 엘다아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미디안족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 족속이고, 욥의 친구 빌닷의 고향이 수아라고 하였습니다(욥2:11). 약 500년후에 요셉이 미디안 족속에게 팔렸고(창37:28), 미디안 제사장의 딸이 모세의 처가 되었으며(출2:15~21)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여자와 행음한 일이 있고(민25:6~15) 사사시대에도 그들과 전쟁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삿7:14:25). 이 미디안 족속은 시내반도 서부에 거주하였으나 다른 아들들의 분포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알 길이 없습니다.
2. 아브라함의 재산 분배에 관한 말씀에서,
1) 이삭에게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다” 하였으니 이 모든 소유란 이삭만 약속의 땅에 살게 한 것을 보아서 정착지 땅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었다는 것은 유동재산으로서 자기 생전에 그들로 이삭을 떠나 살게 하기 위함이었고 그들은 그 재산을 분배받아 동북쪽 현재 아랍계열로 떠나게 한 것입니다.
2) 이 사실에서 아브라함의 서자들은 이삭이 사는 가나안땅을 떠나 살게 한 것을 알 수 있고 이삭의 안전한 거주를 위하여 아브라함이 크게 힘쓴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3. 아브라함의 죽음과 장사지냄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아브라함은 “175세의 높은 나이로 기운이 진하여 세상을 떠났다” 하였으니,
① 그 당시의 175세를 높은 나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연세가 장수한 나이임을 알 수 있고(창15:15),
② 기운이 진하여 죽은 것은 특별한 병에 의하여 죽지 않고 그대로 늙어서 세상 떠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건강을 주시면 이렇게 무병장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③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할 때 이는 그의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흔히 구약에서 왕들이 세상을 떠나면 “열조의 묘실에 장사되었다”(대하12:16; 22:26)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그 시체를 조상들의 묘소에 장사지냈음을 뜻할 뿐 그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는 그 시체가 조상의 묘실로 가지 않았지만 창15:15에서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갈 것이라”하셨으니, 여기에 “평안히 간다”는 말씀이 곧 영혼의 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아브라함이 천국에 가 있는 것은 눅16:23에서 밝히 증명하신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장사는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38년 전에 사라를 장사한 막벨라 굴에 장사를 하였는데 그곳은 그 당시 이삭이 살고 있던 “브엘라헤로이”에서 약 100리 정도 북상하는 곳입니다. 이때에 이스마엘도 같이 장사를 치렀다고 한 것 보면 바란 광야로 쫓겨 살던 이스마엘이(창21:20~21) 이삭의 사는 곳에 와서 같이 장사를 지낸 것입니다. 바란 광야와 브엘라헤로이는 과히 먼 곳이 아니니까 아브라함 생전에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도 이삭은 복을 받고(11절) 그곳에 살았다고 하였습니다(창16:7~14).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도 이삭이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선민의 후손에게 복 주실 언약을 지켜주심인 것입니다.
4. 이스마엘의 후예와 그의 죽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1) 본문 12절에서 “이스마엘”도 야곱처럼 열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창17:20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자하였을 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그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말을 들으시고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사 그가 열두 방백을 낳고 큰 나라가 되며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사실이 그대로 응한 것입니다. 여기의 ‘번성’이란 의미는 현실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들의 이름은 느바욧, 게달, 앗브엘, 밉삼, 미스마, 두마, 맛사, 하닷, 데마, 여둘, 나비스, 게드마인데 이들이 흩어져 사는 고장의 이름을 다 그들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명칭하고 또 각 족장의 대표 이름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3) 그리고 자손들은 하윌라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살았다고 하셨으니 이는 가나안 땅을 제외한 동남방에 퍼져 산 것입니다. 하윌라는 애굽의 동남방이고 술은 시나이반도에 있으며 앗수르는 가나안의 동북쪽이니까 그들의 분포지역을 대략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그리고 이스마엘은 “137세에 역시 기운이 진하여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아브라함처럼 “평안히 돌아갔다”는 말씀(창15:15)이 없음을 보아 아브라함의 죽음의 성격과 구별 지을 수는 있으나 구태여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씀에서 구원받고 안 받은 여부를 가리려고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도 기운이 진하여 세상을 떠났는데 아브라함보다 38년을 덜 산 것을 보면 아브라함이 얼마나 건강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비택자에게도 차별 없는 현실 복을 주시는 분이요,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택적 축복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성취되게 하기 위하여 다른 서자들을 그 지역에서 떠나도록 지도하고 노력한 것을 알 수 있고, 아브라함이 175세, 이삭이 180세를 산데 대하여 이스마엘은 137세를 산 것을 보면 신앙적 인물들의 건강이 훨씬 나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 같이 기운이 진하여 죽었는데 이스마엘은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동생 이삭보다도 약 40년이나 먼저 쇠하였으니 여기서도 신앙적으로 소망적 삶을 사는 사람은 그만큼 더 건강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① 비택자에게도 차별 없이 후하게 주시는 현실의 복을 신앙차원에서 우선하지 말아야 하겠고,
② 하나님의 뜻이라도 인간의 노력을 통하여 성취하게 하시는 점과,
③ 신앙 안에서 낙관하는 생활이 건강장수에 큰 유익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제 50 과 이삭의 두 아들 (창 25:19~34) 목록으로
위 본문을 살피면 3대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19~26절의 말씀이 이삭의 두 아들 출생에 관한 말씀이고, ② 27~28절이 두 아들의 성장과정의 말씀이며, ③ 29절~34절 말씀이 “장자의 명분을 팔고 삼”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전체의 제목을 “이삭의 두 아들”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이삭의 두 아들의 출생에 관한 말씀에서(19~26절), 1)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혼인을 하였고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또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라고 하셨는데 이 리브가에 대한 신분은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주인의 자부를 구하는 과정에서 이미 말씀하셨는데 또 본문에서 밧단 아람이란 지명과 아람 족속이란 말씀을 두 번이나 강조하셨기 때문에 그 지명과 족속을 다시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① 밧단 아람은 아브라함의 두 번째 고향인 하란 지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첫번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고 두 번째 고향은 밧단 아람의 하란 성읍이었습니다. 따라서 밧단 아람은 메소포다미아 북쪽 유프라데강의 수원이 시작되는 지역의 이름이고 하란은 그 지역의 성읍 이름입니다. 그 지역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760Km(1900리쯤) 되는 곳이고 밧단 아람이란 말은 메소포타미아 아람평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② 리브가가 아람 족속이란 말씀을 두 번 강조하셨는데, 이 아람족속의 뜻이 무엇이냐 할 때 그 당시에 아람 족속이란 명칭이 붙여질 만한 이름은 아담의 손자요 셈의 다섯째 아들 이름이 아람이기 때문에(창10:22~23) 이 아람의 후손들이 그 지역으로 퍼져 살면서 아람족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셈의 다섯째 아들 아람의 후손이 아니고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후손입니다. 그러니까 창24:4에서 “내 족속에게로 가서 자부를 택하여 오라”는 말씀의 “내 족속”이란 말과 아람족 계열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람족이란 의미는 그 당시에 셈의 후손이란 의미 밖에는 없는 것이요, 셈은 아벨 대신 주신 선민족이므로 가인의 후손에 비할 때 퍽 순수한 족속이란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또 다른 아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창22:20~22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와서 살 때에 자기 고향에 있는 동생 나홀이 그 아내 밀가(하란의 딸 놋의 누이) 사이에서 여덟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의 셋째 아들인 그므엘의 아들이 “아람”이고 또 여덟 째 아들 브두엘의 딸이 “리브가”입니다. 이 사실이 가나안 땅에 사는 아브라함에게 알려졌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창24:4). 그러나 이 아람은 족속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말한 내 족속은 바로 형제족속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형제족속을 아람족이라고 한 것은 모세 시대에 지역 거민을 일컫는 칭호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신앙적으로 잘못 오염되지 않은 근족 중에서 자부를 구한 것입니다.
2) 이삭은 결혼하자 즉시 잉태를 못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20년 만에 쌍둥이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19절에서 이삭은 40세에 결혼한 것을 밝혔고 26절에서는 “60세에 두 아들을 낳았다”하였으니 20년을 기도하고 기다린 것은 꼭 그 아버지 아브라함과 비슷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이삭은 가정윤리를 잘 지킨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마 아버지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하여 잘 각성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잉태와 출생을 임의로 주관하시고 또 기도응답으로 생산케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리브가의 몸에 잉태한 상태가 괴로울 만큼 심상치 않아서 리브가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① “리브가가 기도하였다”는 것은 23절에서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움이 있었고 그가 가로되 내가 어찌할꼬… ” 하였으며, 또 23절에서 “두 국민이 네 태속에 있다”고 하신 것을 보면 리브가가 기도하고 응답 받은 것이 확실하므로 리브가도 선지자적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응답을 받은 내용은 “두 국민,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뉘어지는 데 어린 자가 큰 자보다 강해지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시므로 복중에서부터 두 족속이 나뉘어 질 것과 동생의 족속이 더 강해져서 형의 족속으로부터 섬김을 받을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뜻은 다만 동생의 족속이 형의 족속을 정복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삼하8:12~13의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 사람(에서의 족속) 18,000명을 쳐 죽이고 명예를 얻었다”는 말씀이 그 예언을 성취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4) 결국 기한이 되어 쌍둥이를 낳았는데 쌍둥이치고는 특색 있게 태어났습니다.
① 먼저 나온 자는 피부가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았으니 이 “갖옷”이란 털이 많은 가죽옷을 뜻하기 때문에 붉고 털이 많은 거칠은 피부로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갖옷”이란 의미로 이름을 ‘에서’라 하였는데, 나중에 팥죽을 “붉은 것”(30절)이라고 말하였기로 “붉다”는 뜻으로, 또 ‘에돔’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고,
② 나중 나온 자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하여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으로 야곱이라고 하였는데, 이 야곱의 뜻에는 “간교하다”는 뜻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국민의 조상이 복중에서부터 나뉘어 출생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였습니까?(27~28절).
1) 27절에 에서는 장성하여 익숙한 사냥꾼이 되어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큰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사람은 성장하는 환경에 따라서 인격과 생활체질이 형성되는데 에서는 피부도 거친데다가 사냥에 취미를 붙이니 결국은 들사람이 되었습니다. “들사람”이란 밖으로 활동하는 생활로 지식탐구와 정적생활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정적생활을 멀리하고 신체적 운동을 많이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폭력적 유혹이 있을 수 있으며 야곱은 조용한 성격의 사람이라 가정적이고 정적생활을 하므로 어머니의 사랑을 더 받았는데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공평할수록 좋지만 아버지는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제공하는 아들을 더 사랑하고 어머니는 자기의 일을 잘 돕는 아들을 더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3) 여기에서 선택을 받은 야곱은 신앙적 성향(종용한 사람, 기도자의 자세)으로, 비택자 에서는 탈선적 성향(살생, 살인성)으로 기울어져 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신앙의 성향으로 기울어진 것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에게 주시는 변화의 은혜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3. 장자의 명분을 판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29~34절).
1) 야곱은 집에서 팥죽을 쑤고 있었고 에서는 사냥한 후 곤비하여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야곱이 죽 쑤는 것을 보고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먹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에서가 차분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급한 성격이 있음과, 또 팥죽을 붉은 것이라 할 만큼 주밀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성격은 차분하고 인내하며 주밀하여야 하는데 에서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2) 이때에 야곱은 형의 급하고 주밀하지 못한 약점을 이용하여 “팥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자”고 제의한 것입니다.
① 야곱은 평소부터 장자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탐냈을까요? 장자에게 갑절의 기업을 주는 법은 약 500년 이후에 율법이 명시한 것이므로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② 그 이유는 조상의 가문을 장자가 계대한 사실과, 가정의 권리를 장자가 받는다는 사실에 따라 조상에게 주신 약속의 복을 자신이 계승받아야 한다는 야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조상에게 약속된 신령한 복이 장자의 명분 있는 자에게로 계승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장자명분을 소원한 것입니다.
③ 그러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고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신령한 약속의 복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는 표현이요, 다만 “내가 곤비하여 죽게 되었으니 먹을 것만 속히 달라”고 하였을 때 야곱은 이 사실(장자의 명분을 사는 일)을 맹세로 확인하고 떡과 팥죽을 주었으며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채 먹고 마시고 갔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것은 망령된 일이요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히12:16-17).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아야 할 것은 택한 백성인 야곱의 관심은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에서는 완전히 그 반대의 생활과 태도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잠시 피곤하고 배고픈 육체의 허기증을 면하기 위하여 분별없이 행하거나 신령한 복을 경홀히 여기는 미련한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되며 저희들의 관심은 야곱처럼 항상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데 있어야 됨을 거듭 확인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23. 야곱이 성공한 이유 (창 25:19~34) 목록으로
1.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입니다. 야곱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성경에서 야곱이 복 받고 승리하게 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시며 그에게 허락하신 것을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겠다”(창28:15) 하셨고 또 그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고(창32:28)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어 축복 받은 사실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창27:27~29).
2. 야곱이 받은 복은 선천적인 복과 후천적인 복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두 가지 요소에서 그가 성공한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선천적인 복으로,
① 그는 신앙이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잘 만나면 성공하는 확률이 많습니다. 야곱의 조부, 조모가 아브라함과 사라요, 또 부모가 이삭과 리브가 이니 이들은 다 성경에서 칭찬한 인물들입니다(히11:8~19). “부모의 덕을 삼사 대까지 주신다”고 하신 만큼 좋은 부모를 만난 것이 성공한 것이요.
② 그 아버지의 기도응답으로 출생한 만큼 그것이 복된 이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21절에서 “이삭이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기도 응답으로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기간은 20년이었습니다.
③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만 롬9:11~13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는 성공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벧후1:10).
2) 후천적인 이유로는,
① 야곱은 조용한 사람,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조용한 성품은 실수를 방지할 수 있으며, 온유와 겸손과 화평을 이룰 수 있고 묵상할 수 있는 건설적인 성품입니다. 이런 성품은 타고날 수도 있지만 스스로 연단시킬 수도 있습니다.
② 장막에 거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장막에 거하면 죄의 유혹을 많이 피할 수 있고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유익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③ 꿈과 포부를 가졌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취득한 원인이 바로 그의 포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의욕을 갖고 야심을 품었습니다.
④ 그는 노력하였습니다.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하였다”(창31:40)고 하였으니까요. 노력하고 일을 많이 하는 인생이 곧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이렇게 선천적 축복과 후천적 노력을 통하여 야곱은 성공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제 51 과 이삭이 그랄에 감 (창 26:1~22) 목록으로
위의 본문에서는 이삭이 그랄에 거주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1절에서는 그랄에 가게 된 이유를, 2~5절에서는 애굽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 거할 때에 조상에게 맹세한 복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며, 6~11절은 이삭이 거짓말로 자신을 보호하려 한 사실, 12~13절은 이삭이 소득의 복을 받은 사실, 14~22절에서는 블레셋 사람들과의 알력으로 피해를 당하고 거처를 옮긴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1. 이삭이 그랄에 간 이유는 흉년 때문이었습니다.
1) 아브라함 때에도 그 땅에 첫번 흉년이 들어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피난을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창12:10~13:1). 그런데 이삭 시대에 또 흉년이 들었으니
① 아브라함 때의 흉년은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나안땅으로 온 초기였고,
② 이삭 때의 흉년은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고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이 성숙하였을 때였으므로 약 100년 만에 당하는 흉년이었습니다.
2) 이삭이 흉년을 피하기 위하여 가족을 이끌고 그가 살던 브엘라헤로이(창25:11)에서 서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그랄은 나라이름이고, 블레셋은 그 지경에 분포되어 사는 부족의 이름인데 이 부족은 함의 후손 가슬루힘의 자손들이라고 하였습니다(창10:14). 그리고 블레셋에서는 왕을 아비멜렉이라 일컬었고 애굽에서는 바로라 칭하였습니다.
3) 그런데 약 100년 만에 일어난 심각한 흉년을 서북쪽 100리쯤 떨어진 그랄에 가서 피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할 때, 이것은 그 지역이 비옥하기 때문에 간 것은 아닙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다”는 말씀이 결국은 그 왕이 비축한 양식을 얻기 위하여 갔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것은 백리 어간을 두고, 한쪽은 흉년이 들고 한쪽은 풍년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먹기 위하여 방법을 동원하여야 하는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2. 이삭이 그랄에 갔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1) 하나님은 위험이 있을 때마다 말씀을 주시고 헤어날 방법을 주시는 분입니다.
① 아브라함이 그랄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무렵에도 말씀을 주신 일이 있었고(창20:3),
② 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게 되었을 때에도 말씀을 주어 구출하셨습니다(창22:12). 이때에도 이삭이 흉년으로 고난당하여 의지할 처소에 갔을 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꼭 말씀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① “네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창12:10에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흉년 때문에 애굽까지 간 일이 있었으나 그것을 아들까지 본받을 필요는 없으니 그곳은 약속의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② 그리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지시하신 땅은 가나안 지경으로 창10:19에서 그 땅의 남쪽 경계는 그랄을 포함하여 가사까지로 되어있기 때문에 거기서 더 내려가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③ 이삭이 그 약속의 땅에 거할 때
㉠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 그에게 복을 주시며,
㉢ 그 모든 땅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시고
㉣ 또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하셨으니 여기에서 이삭이 복 받는 방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자신의 생활위치를 잘 지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릇이 자기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성도는 그의 생활 위치에 따라서 신앙과 사명을 옳게 감당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행1:4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하신 말씀도 성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으로써 은혜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있어야 할 자리란 바로 믿음생활의 위치, 교회와 사명생활의 위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이러한 복을 주셔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에게 맹세로 약속하셨기 때문이요(창22:15~18),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복을 맹세로 약속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가 내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에서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도 하나님의 계율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계율을 나타내신 형편에 따라 표현을 달리하였습니다. 그 예로서 법도와 율례는 표준문서를 의미하고 계율은 시행방법을 나타내신 것이며, 명령은 요구사항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것들을 성심껏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크게 복 주실 것을 맹세로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3. 이삭이 거짓말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한 사실에 대하여
1) 8절을 보시면 “이삭이 그랄에 가서 오래 거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는 그곳에 가자마자 그곳 사람들이 ‘같이 온 여인이 네 아내냐?’고 물었을 때에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내가 이복누이였으므로 누이라 하였어도 조금은 이해가 되지만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사촌누이도 아니고 작은아버지의 손녀이기 때문에 누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2) 그렇지만 그곳 백성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까 두려워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아내란 사실이 탄로 났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 지역의 아비멜렉이 그가 거짓말을 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범죄할 번하였다고 하면서 “그 아내를 건드리는 자는 죽일 것이라”고 엄명을 내려 오히려 그를 보호하여 준 것입니다.
3) 따라서 이삭이 거짓수단으로 자기를 보호하려 하였던 방법은 하나도 유익을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방의 왕이 그를 보호하여 주었으니 이것은 창20:3에서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같은 일을 당하였다가 하나님의 현몽으로 보호받은 사실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도 재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이삭이 소득의 복을 받은 사실입니다.
1) 12절을 보시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백배를 수확하였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므로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짐승의 떼와 노복을 거느린 거부가 되었다고 하였으니
① 하나님이 흉년 때에라도 다시 복을 주셔서 농사도 잘되고 짐승도 잘되었으며, 많은 노복들도 따르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 이 축복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의 아버지에게 주신 약속에 근거한 바도 있고, 애굽으로 가지 않은 순종에도 있지만 또 한 가지는 거짓말로 아비멜렉을 속였던 양심의 속박에서 해방된 다음 받게 된 축복이란 점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는 모든 거리낌에서 해방될 때에 복이 따라오는 줄로 믿으셔야 하고 또 그러한 축복을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이삭을 거부되게 하셨다 하여 “우리도 거부가 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셨고, 현실적인 축복은 신령한 복에 비례하여 하나님께서 유익한대로 주시기 때문입니다(마6:33).
5. 블레셋 사람의 시기와 훼방을 극복하고 그 지경을 떠난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1) 외방의 사람이 자기들 지역에 와서 왕성하니까 그 지역인들이 시기하고 훼방하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LA 교포들이 그곳의 흑인들보다 더 잘사니까 한국인들은 돈밖에 모른다고 비난하면서 불태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15절을 보시면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그들이 메웠다”고 하였으니 본래 이삭은 아브라함이 그랄에 갔었던 일과 그곳에 판 우물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고, 또 그랄의 거민들도 저 우물은 옛날에 아브라함이 판 것이라는 것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이 그곳에서 그 우물을 이용하려고 하였을 때 100년 후에 다시 파헤치는 것이니까 시기하고 훼방하는 뜻으로 그 우물을 메운 것입니다. 한 우물을 메우고 그 옆에 다른 우물을 파면 메워진 샘물이 그 쪽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물싸움을 한 것입니다.
3) 그래서 아비멜렉도 충돌을 피하여 이삭을 떠나라 하였고 이삭은 그곳에서 골짜기로 피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옛날에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파서 물 근원을 얻고 그 우물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지었던 이름대로 브엘세바(맹세의 우물 창21:31)라고 하였는데 그랄의 목자들이 그 우물도 자기들의 것이라고 다투는 바람에 그 이름을 에섹(다툼)이라 개명하여 양보하고,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 또 다투어 오므로 싯나(대적함)라는 이름을 지어 또 양보하고, 거기서 더 떨어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때에는 다툼이 없으므로 장소가 넓다는 뜻으로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였습니다. 바로 그 지역이 그랄의 골짜기인 브엘세바인데 거기서 번성하기를 바라게 된 것입니다.
4) 이 말씀에서는
① 이삭이 홀로 번창하니까 그 지역사람들의 미움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공존공영을 누리도록 생활함이 지혜롭고
② 아브라함이 판 우물이 다툼에 걸린 것은 아브라함이 그곳을 계속 지키지 않고 100여 년간이나 떠났기 때문에 기득권을 상실한 연고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직책이나 모든 특권에 있어서 공백이 초래되면 기득권을 상실하니까 항상 자신의 은혜를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으며,
③ 이삭은 시기하고 다투는 자들과 맞서 싸우지 않고 그들을 피하며 양보하여 결국은 넓은 르호봇으로 옮겼습니다. 옛말에 “범 사는 고을에는 살 수 있어도 삼촌 사는 고을에는 못 산다”는 말이 있듯이 시기하고 투기하고 훼방하는 자들 곁에서는 살기 어려우므로 되도록 크게 양보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현명한 처사임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또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은,
① 성도가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사모하면 자신의 신앙적 사명적 위치를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② 하나님은 어려운 일을 당하는 성도에게 때마다 말씀을 주어 형통하게 하신 사실을 기억하셔야 하며
③ 이삭은 그 조상에게 맹세된 약속 때문에 축복을 받은 것이 많았으며
④ 이삭의 거짓말 수단은 덕을 보기는커녕 오히려 손해가 되었고
⑤ 이웃과의 거리끼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 큰 복을 받았으며
⑥ 악한 자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크게 양보하면서 평화를 추구하였을 때에 더 큰 발전이 있었음을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52 과 브엘세바에서 된 일 (창 26:23~35) 목록으로
위 본문의 말씀 창26:23~35은 이삭이 그랄 골짜기에서 브엘세바로 옮긴 후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정착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구분하면 26~33절은 그랄 왕이 찾아와서 평화조약을 맺은 내용이요, 34~35절은 에서의 취첩으로 인한 근심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브엘세바에서 된 일”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서 브엘세바로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1) 이삭이 거주지를 옮긴 때는 그랄에서 큰 부자가 되고 블레셋 사람들과의 다툼 때문에 그 지역을 떠나서 그랄 골짜기(26:17)에서 얼마동안 살다가(26:22) 다시 브엘세바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2) 그랄 골짜기는 그랄 평원에서 오지 광야 쪽을 의미하며 그곳 백성들의 시기로 인한 훼방 때문에 아비멜렉 왕이 그곳을 떠나도록 종용하였기 때문에(26:16) 골짜기로 왔었지만 거기서도 여전히 훼방이 계속되어 세 차례나 우물을 양보하며 잠시 거주하였었지만 결국은 얼마 후에 또 브엘세바로 옮긴 것입니다.
3) 브엘세바는 그랄 쪽에서 동남방 100Km 되는 고지대이기 때문에 “올라갔다”고 표현하였고, 또 브엘세바란 창21:31에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고 “맹세의 우물”이란 뜻으로 명칭한 기념우물의 이름인데 그 우물의 이름이 지역의 이름이 되어 후시대까지 이른 것입니다. 언제나 선한 백성은 다툼과 시기를 피하여 사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2. 이삭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복을 받고 경배를 드린 것입니다.
1) 이삭이 다툼을 피하는 곳으로 옮겼을 때 하나님이 계시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① 아브라함의 섬기던 하나님이요,
②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이요,
③ 그 약속을 실천하시기 위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이란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다툼을 피하고 조용한 곳에서 묵상 또는 기도하기를 힘쓰면 가까이 해주시고 또 말씀으로 격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방인의 훼방이 있어도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또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할 것이라”는 복을 선포하시고 이는 “네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하심으로 조상이 닦아 놓은 근거의 복을 그 아들에게 전달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으로 격려를 받고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제단을 쌓았다는 뜻은 하나님의 뜻대로 제사를 드렸음이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감사와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3) 그리고 거기에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팠으니 이는 훼방을 피한 조용한 장소요 과거에 아브라함이 거주하였던 곳에 머물기 위함인 것입니다.
3. 아비멜렉 왕이 찾아 와서 평화조약을 맺은 사실입니다.
1) 이삭이 브엘세바에 정착하였을 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이삭에게 찾아왔습니다.
2) 이삭이 그들의 찾아온 연유를 물으니 서로 평화조약을 맺자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와서까지 평화조약을 청원하게 된 이유는,
① 여호와께서 이삭과 함께 하심을 분명히 본 때문이고(28)
② 이삭이 여호와께로부터 복 받은 자란 사실을 알았으며(29)
③ 또 그랄에 사는 동안 선하게 대하며 크게 다투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삭이 그랄에서 쫓겨 온 것은 백성들과의 알력 때문일 뿐 왕이 선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3) 그래서 이삭은 그들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여 잔치를 하고 서로 해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돌려보내었으니 여기에서 평화조약이 쉽게 체결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① 아비멜렉과 이삭 사이에 심각한 대결이나 싸움이 없었으므로 서로의 감정이 크게 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대결과 피해가 심하여지면 점점 화해와 평화의 조성이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는 그럴만한 대립이 없었으니 이는 이삭이 양보하고 자주 피하였기 때문입니다.
② 그런데 피하고 양보한 자가 계속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아비멜렉은 이삭의 모든 생활을 관찰할 때 그는 신의 도움을 받는 자라는 사실을 확신하여 그를 두렵게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남북화해가 속히 진행되지 않는 것은 그 동안에 쌓인 감정과 유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니 대립이 심하면 화해의 난관도 심해진다는 것을 아셔서 성도는 절대로 대립하거나 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이렇게 평화조약을 맺고 난 다음에 이삭의 종들이 파는 우물에서 또 샘 줄기를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평화조약의 사절들을 잘 대접하여 보낸 후에 복 받은 일이 된 것입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세바”라 하였으니 이는 맹세란 뜻으로 아비멜렉과의 평화조약을 맹세한 기념우물이 된 것입니다.
4. 이삭의 큰 아들 에서가 두 아내를 취하였는데
1) 그는 부모의 승인과 인도를 받지 않고 자의로 취하면서
2) 이방족인 헷 족속의 딸을 취하였고
3) 또 한 여인이 아닌 두 여인, 유딧과 바스맛을 취하므로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을 안겨주었습니다. 에서는 신앙과 효도에 어긋나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① 신앙에 어긋난 일은 이방여인을 얻은 것이고
② 효도에 어긋난 것은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불신앙의 사람은 이렇게 자기본위로 행함이 특징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1.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은 증인임을 나타낸 점이고,
2. 또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두렵고 존귀한 자로 부각된 점이며,
3. 자기를 대립하거나 해롭게 하는 자와 다투지 않고 피하면서 평화롭게 살기를 노력함으로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시고 샘물의 복과 번성의 복과 평화의 복을 받게 된 것을 배울 수 있고,
4. 또 에서처럼 잘못된 혼인으로 부모를 근심시키는 일을 하여서는 안 되는 것도 아울러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제 53 과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함 (창 27:1~29)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을 구분하면 1~4절은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려 함이요, 5~24절은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함이요, 25~29절은 축복의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고 이것을 종합하면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함”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연구하면서 살피고 지나가셔야 할 것은, ① 이삭이 축복할 수 있는 근거를 어디에 두었는가 하는 점과, ② 왜 맏아들에게 베풀려 하였는가? ③ 왜 별미를 먹어야만 축복하는가? ④ 둘째 아들을 맏아들로 속고 축복해도 효력이 있는가? ⑤ 아버지를 철저하게 속이면서 복을 받아도 되는가? ⑥ 이삭이 베푼 복이 무엇인가를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함에 있어서(1~4절)
1) 이삭이 나이 많아지고 눈이 어두워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움을 예상하고 그 아들에게 축복하려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도 세상 떠날 무렵이 되면 유언도 하고 부탁도 할 것입니다.
2) 그런데 문제는 이삭의 축복권이 어디로 말미암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삭뿐 아니라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등도 축복을 하였습니다.
① 이 축복은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의 말씀을 받고 쓰임을 받는 사람은 “선지자”라 할 수 있는데 노아, 아브라함, 모세(신33:11), 엘리야(왕하4:16; 33:34) 등이 선지자의 권위로 축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 축복이 예언처럼 성취된 것은(창9:26~27) 하나님의 허락이기 때문입니다.
② 창12:2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복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할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시므로 아브라함에게 축복권을 허락하셨고 이 사실이 아비멜렉을 상대로 시행되었으며(창20:17), 또 이 특권이 이삭에게로도 계승되었던 것입니다.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제물이 되었을 때에 “네 씨(이삭)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22:18)는 말씀이 결정적 근거가 되며,
③ 신약에서도 사도적(선지자적) 권위를 부여하실 때 “그 집에 들어가 평안의 복을 빌라”(마10:12~13) 하심은 선지자에게 축복권을 주신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축복할 수 있지만(창12:3) 특별히 교회의 감독자들(목사, 장로)이 축복할 수 있는 것은 감독(장로)이란 직책과 함께 축복한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벧전5:1,14).
3) 그러면 또 이삭은 왜 맏아들에게 축복하려고 하였으며 리브가는 반대로 야곱이 복 받게 되기를 결사적으로 노력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① 이삭이 에서를, 리브가가 야곱을 더 사랑한 편애였을 것이요.
② 이삭은 두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망각하고(창25:23) 장자에게 가장권을 계승시키려는 관습을 따랐음이요.
③ 리브가는 “동생이 형보다 강한 족속이 될 것이라”(창25:23)는 예언을 염두에 두고 그 말씀대로 성취되게 함이었을 것입니다.
4) 이삭은 왜 맛있는 별미를 먹고 축복하려 하였을까요?
① 이것은 축복의 특권을 가진 상태에서 복 받을 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일이요.
② 복 받을 자가 축복을 사모하여 축복하는 아버지에게 복종과 존경의 뜻으로 접대를 함이 마땅하고,
③ 이삭이 별미를 들고 힘을 돋우어 힘 있게(마음껏:4절) 축복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2.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사실에 대하여
1) 이삭은 완전히 속은 상태에서 에서에게 줄 복을 야곱에게 베풀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겠다”한 말을 듣고 야곱으로 하여금 에서를 가장하고 아버지를 속여서 에서가 받을 복을 가로채게 한 것입니다.
2) 야곱은 그 말을 들을 때 “축복대신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하면서 거절을 하였지만 “그 저주는 내게 돌릴 것인즉 너는 내 말만 들으라”하므로 야곱은 거짓행위인줄 알면서 어머니의 말에 복종하였으니 이 거짓행위의 책임은 리브가가 앞장서서 져야 하지만 야곱도 거짓행위를 의도적으로 따른 것이 분명하므로 꼭 같이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3) 속임수의 행위가 철저하여 결국은 눈 어두운 이삭을 속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① 에서의 의복을 입히므로 들로 다니는 에서의 냄새를 풍기도록 위장하였고,
② 손목과 목에 털을 가장하여 촉각으로의 속임수를 썼으며,
③ 음성은 야곱의 음성으로 알아듣게 하였지만(21절) 이삭이 그것으로 의심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음성에도 다소의 가장이 있었을 것임이 예측되고,
④ “내가 맏아들 에서입니다. 명대로 하였으니…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하나님이 순적하게 만나게 하셨습니다”, 또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하였을 때도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므로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⑤ 야곱이 이런 거짓말을 자행하면서 모험을 한 이유는,
㉠ 축복에 대한 갈망과,
㉡ 리브가의 명령에 순종하여 어머니의 뜻을 따름과(6절),
㉢ 자신이 “계약상으로 장자의 명분을 받겠다”는 야심에서였을 것입니다.
4) 그러면 속임에 따른 축복이 전달될 수 있을까요? 축복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축복 경위에는 거짓이 개입되었다 할지라도 결과는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므로 취소될 수 없게 되었고(33절) 다만 속인 죄에 대하여는 별도의 징계가 따랐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리브가가 받은 징계는 그가 야곱을 몇 날 동안 외가로 피신시킨 다음(창27:44) 그는 야곱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으며(창49:31) 야곱은 거짓말한 죄로 20년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으니(창31:40) 이것이 바로 거짓말한 결과로 당한 일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5)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리브가와 야곱의 욕심에 의한 집착이 큰 실수와 불행을 야기 시킨 점입니다.
① 리브가는 그런 상황에서 이삭에게 하나님의 예언을 설명하고 권면할 지혜가 있어야 하고,
② 야곱도 자신이 장자의 명분 받은 것과 사명감을 말하고 축복을 구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에 사로잡힌 마음인지라 그만한 지혜를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은 현실세계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욕심이 죄를 낳았고 죄가 야곱의 죽음을 가져올 번하였습니다.
③ 하나님의 복은 누구를 통하여 주시든지 그 원하시는 선택자에게와 믿음으로 노력하는 자에게 주시는 만큼 형제간에 욕심 부리며 갈등하지 말고 서로 양보하면서 행하여도 자기가 받을 복은 순리적으로 받게 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6) 만일 그런 속임의 절차가 없었다면 야곱이 그 축복을 못 받았을 것이 아닌가? 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복 주실 자에게 혼돈 없이 축복하게 한 사실이 창48:14에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인간의 속임수가 하나님의 방임 하에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이용될 수는 있어도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실수하시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하여도 하나님은 특별한 계시로 이삭을 일깨워 야곱에게 축복하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7) 하나님은 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셨는지의 이유는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3. 이삭이 야곱에게 베푼 축복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1) 이삭은 야곱이 가져온 별미와 포도주를 잘 먹고 힘을 차렸습니다.
2) 또 “자기에게 입 맞추라”하였으니 이는 사랑의 접근을 뜻하는 풍속이요.
3)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라”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농작물의 결실이 있음을 감사함이요. 또 그 향취로 들사람인 에서가 왔음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4)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주실 것”을 축복하므로 자연의 은총과 함께 양식과 물질의 복을 빌었고,
5) “네가 만민의 섬김을 받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며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야곱의 후손 중 다윗 왕이 나와서 에서인 에돔의 족속을 정복할 것과(왕상11:15~삼하8:13~14), 그 후손에서 메시야가 탄생하여 이방열국을 복음으로 정복할 것을 예언하면서 이울러 권세와 존귀의 복을 빈 것입니다.
6)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하심은 옛날에 아브라함에게도 선포하셨던 것으로(창12:3) 이는 하나님이 두루 복되게 하심과 야곱으로 하여금 축복과 저주를 선포할 수 있는 자로 삼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창47:7).
따라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쓰시는 사역자의 축복이 귀한 것임을 믿고 복 받기를 사모해야 하며 망령된 방법으로 축복을 구하지 말 것과 또 하나님은 자기의 원하는 자와 자기를 사랑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복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제 54 과 에서의 탄식과 야곱의 피신 (창 27:30~46) 목록으로
위의 말씀에는 ① 에서가 돌아와서 축복 빼앗긴 것을 탄식하는 내용과(30~35절), ② 이삭이 빈 축복을 변하지 못함과(37절), ③ 에서가 축복을 갈망하니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는 내용과(38~41절), ④ 리브가가 야곱을 외가로 피신시키는 내용(42~46절)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네 가지 대목을 한마디로 표현하여 “에서의 탄식과 야곱의 피신”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에서가 축복 빼앗긴 것을 탄식함(30~35절)
1) 에서는 아버지의 약속대로 축복을 받기 위하여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마음껏 축복해 주시기를 요청하였더니 이삭이 “너는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다 먹고 축복하였으니 그가 정녕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방성대곡하였습니다. 에서가 이렇게 방성대곡한 것을 보면,
① 그도 축복을 사모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축복을 못 받은 것은 하나님의 작정섭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에서는 빼앗긴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축복이란 하나님의 작정섭리로만 주어지고 인간의 노력은 무관한 것인가? 할 때 하나님은 복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을 은혜로 주시기도 하시지만 복 받을 자의 수고를 통하여 주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시128:2에서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하신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따라서 복 받을 자는 수고하므로 복을 받는 것이요, 에서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복 주실 작정이 제한되었을 때는 인간이 수고하여도 제한적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을 받은 야곱도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복을 받았고 축복을 못 받은 에서가 축복기도는 못 받았어도 그의 노력에 따라 상당한 복을 받고 생활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② 저희들은 축복의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 의식주문제는 오늘날 성도와 불신자의 생활에 별 차이 없듯이 현실축복은 다 대동소이한 것입니다. 다만 축복이란 의미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것은 선민적 신령한 복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에서는 현실의 축복을 많이 못 받은 것을 탄식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성취되는 일과 현실의 복을 적게 받는 것으로 탄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자신의 실수로 인한 불행에 대하여 회개하는 뜻으로 방성대곡해야 할 것입니다(마26:75).
에서가 방성대곡한 것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단지 야곱의 속임 때문에 받지 못한 것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분한 마음으로 방성대곡하면서 “야곱이 그 이름의 뜻처럼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때도 간교하게 하였는데 이번에도 또 그런 간교한 방법으로 축복을 빼앗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배후에는 하나님의 작정섭리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까 성도는 표면의 현상만 볼 것이 아니라 이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직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이삭이 빈 축복을 변할 수 없다고 한 사실에 대하여(37절)
1) 이삭이 빈 축복은 예언적 의미가 있고, 축복한 자의 권위가 있기 때문에 변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8:8을 보시면 잘못된 명령이라도 왕명은 왕의 권위 때문에 취소하지 못한 사례가 있는데 하물며 계시에 따른 하나님의 축복이겠습니까?
2) 그리고 또 축복은 분량과 받는 대상에 따라 합리적으로 조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편에 ‘가장 잘되라’는 복을 빌었으면 다른 편에는 그런 복을 빌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서가 “빌 복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라고 한 것을 보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제한된 분량(현실 복)으로 한 편에 많이 주었으면 다른 편은 적게 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고 한 쪽을 다 주었으면 다른 쪽엔 줄 것이 없는 것입니다.
3) 따라서 축복기도는 마음대로 남발하는 것이 아니고 상당한 근거와 절차와 분량상의 적당한 논리가 맞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러면 에서는 무엇을 받았습니까?(38~41절)
1) 이미 37절에서 “존귀와 풍성한 재물의 복을 야곱에게 주었으니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함으로 39절에서 이삭은 “축복”이란 말을 하지 않고 대답하기를,
①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다”함으로 비옥한 땅을 차지하지 못할 것을 예언하였는데 결국은 그 예언대로 세일의 거친 땅으로 가게 되었고(창33:17),
②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다”함으로 우로의 혜택을 적게 받을 것과,
③ “칼을 믿고 생활한다”함으로 약탈을 일삼게 될 것과,
④ “아우를 섬기게 될 것이라”함으로 그 후손이 힘으로 뒤떨어질 것과,
⑤ “네가 매임을 벗을 때는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릴 것이라”하셨으니, 이것은 에서의 후손이 여러 차례 주인에 대한 반역행위가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후손은 이스라엘족이 되고 에서의 후손은 에돔족이 되었는데 다윗 왕 때에 에돔족이 유다에 복속을 당한 후(삼하8:13~14) 고삐를 끊고 도망하는 짐승처럼 자주 이탈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대하28:16~17). 이리하여 에서는 이삭의 축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2) 에서는 자신이 장자의 명분을 팔고 이방혼인을 하여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축복의 분깃이 적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할 것입니다.
4. 리브가가 야곱을 외가로 피신시키는 내용인데(42~46절) 이 사실은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인 결과로 온 것입니다.
1) 에서가 축복을 빼앗긴 분풀이로 야곱을 미워하고 그 미움이 지나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죽일 작정까지 하였습니다(41절).
2) 그러나 아들에게 속임을 당한 이삭은 야곱에게 노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3) 에서의 심사를 알아차린 리브가는 야곱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형제가 함께 있다가 둘 다 죽게 할 수 없으니 하란에 사는 외가에 가서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만 피신하여라. 에서의 노가 풀리면 오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4) 이렇게 수습하지 않으면 형이 동생을 죽이고 동생죽인 형도 살인자가 되어 벌을 받아 죽게 될 것이므로 두 아들을 다 잃게 되는 위험을 방지하여야만 하였습니다.
5) 여기에서 두 사람의 계획이 맞지 않은 것이 있으니,
① 에서가 아버지 세상 떠나면 동생을 죽이려한 계획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므로 속히 곡할 때가 될 줄 알았으나 80년 정도를 더 살았고 동생은 피신하였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돌아와서 화해하게 된 것이요(33:4;35:2),
② 리브가가 몇 날만 피신하면 “에서의 노가 풀려 너를 오게 할 것이라” 하였으나 야곱은 몇 날이 아닌 20년 만에 왔으며 그때는 이미 리브가의 이름이 성경에서 사라진 때이므로 리브가는 세상에 오래 살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므로 자기의 생각과 예측을 의지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6) 마지막 46절에서는 리브가가 야곱을 피신시킬 계획으로 이삭의 동의를 구할 때, 에서가 이방 혼인한 것으로 인하여 생명을 싫어한즉(살 맛을 잃었다는 뜻) 야곱도 이곳에 있으면 그렇게 되겠으니 그를 하란으로 보내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에서는 40세에 이방여인을 둘이나 취한 때이므로 야곱이 집을 떠난 때는 아이가 아닌 40세 이후였고(이삭이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음), 그 때에 이삭은 100세가 넘은 때였습니다. 100세 넘은 이삭이 눈이 어두운 상태로 180세까지 산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따라서 이삭은 20년 후에 돌아온 야곱과 손자들의 효도를 받으며 살았을 것이요. 성경은 리브가에 대하여 그가 조상의 묘에 장사된 것(창49:31) 외에는 말씀하지 않았으므로 야곱으로 거짓말하게 하였을 때 자신이 받겠다고 한 저주는 그가 아들을 만나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성취되었다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1. 성도가 축복을 받음은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노력을 통하여 주신다는 것과,
2. 하나님의 복 주심을 받아야 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과,
3. 리브가의 자식을 위한 희생은 좋으나 거짓을 방조한 것은 잘못인 점과,
4. 축복은 분량이 있고 받는 대상에 따라 합리적으로 주어진다는 것과
5.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55 과 야곱이 여행 중에 받은 계시 (창 28:1~15) 목록으로
위 본문 1절~5절은 이삭이 야곱에게 부탁하고 축복함이요. 6절~9절은 야곱이 떠난 후 에서가 취한 때도요. 10절~15절은 “여행 중인 야곱에게 주신 계시”입니다. 이 세 대목을 하나로 요약하여 “야곱이 여행 중에 받은 계시”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이삭이 야곱에게 부탁하고 축복함에 대하여
1)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한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협력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는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21:14) 함처럼 항상 만족하게 승복하는 태도를 취하여야 합니다.
2) 그래서 야곱에게 부탁하기를 “너는 가나안사람의 딸을 취하지 말고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하였으니 이는 그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를 위하여 리브가를 취하게 함과 같은 뜻이요.
3) 3~4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족속을 이루며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야곱이 계승하기를 빌었으니 이 축복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빈 복이었습니다.
4) 야곱은 아버지의 부탁과 축복을 받고 밧단 아람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게 되었는데 본문 5절에서 “이르렀다”는 표현은 서론격으로 뒤에 있을 일을 미리 기록한 것입니다.
2. 야곱이 떠난 후 에서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1) 자기와의 불화에서 떠나는 야곱 동생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혼사를 구실로 내세워 보낸다 하여도 그 이유를 다 알았을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이삭이 야곱에게 부탁하고, 축복하는 장면을 에서가 뒤에서 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음은 물론 붙잡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속으로 다행하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동생이 없어졌으니까 아버지의 재산은 다 자기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만족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은 야곱은 빈손으로 나갔으나(창32:10) 더 큰 재산을 이루어 왔고 그 재산의 반으로 형에게 도움을 주는 형세가 되었으니 이렇게 축복은 발전에 큰 힘을 주는 것입니다.
2) 그 후에 에서는 자기의 처인 가나안 여인이?부모를 기쁘게 하지 못 한다’는 구실로 아브라함의 비정통자손인 “이스마엘” 자손들에게 가서 “마할낫”이란 여인을 아내로 또 취하였습니다. 창26:34을 보시면 에서는 이방 여인 “유딧”과 “바스맛”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를 기쁘게 한다는 구실로 또 마할낫을 취하였으니 이것은 한 여자로 만족하지 않는 자의 습성일 것입니다.
3. 여행 중인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10~15절)
1) 야곱이 출발한 장소는 “브엘세바”요,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남쪽 가자지구로 약220리 지경입니다. 거기서 밧단 아람의 “하란”까지는 약 2000리의 길입니다. 밧단 아람은 현재 시리아 영지인데 셈의 후손 아람족이 그곳에 살면서 그런 지명이 생겼고, 또 그 지경의 하란도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의 후손이 살므로 그 지명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계시를 받은 곳’은 벧엘인데 이 이름은 나중에 일컬은 이름이며 예루살렘에서 서쪽 80리 지경으로 야곱의 여정 중 약 200리를 여행한 장소였습니다.
2) 야곱이 홀로 걷는 여행으로 약 200리 길을 걸은 다음 한 곳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잤는데(학자들의 해석을 따르면),
① 그 이웃에 이방인들의 거주지가 있었지만 그곳에 가서 사정하지 않고 차라리 하나님과의 교제시간을 갖기 위하여 한적한 곳을 택하였다는 것이요.
② 또 야곱은 그곳에서 기도하고 누웠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계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니까(시91:15)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③ 그때에 하나님의 계시가 “꿈”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늘과 땅을 이은 사닥다리가 있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내리고, 또 하나님께서 그 위에서 복 주시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3) 그러면 이 사다리를 보여주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다리는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니까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뜻하는 것이고 “사자의 오르내림”은 하나님의 사역자의 활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중보사역과 성령님의 끊임없는 활동이 있으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으로 선포하시기를
①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 너 누운 땅(가나안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요,
② 네 자손이 티끌 같이 번성하여 땅에 편만할 것이라.
③ 땅의 모든 족속(世界人)이 너와 네 자손(메시야를 의미)을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메시야로 인한 구원의 축복을 예고하심).
④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고,
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⑥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요(20년 만에 성취됨).
⑦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 중 “네게 허락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야곱이 “그 땅으로 돌아와서 그 땅을 기업으로 받고 그의 자손이 번성한 중 메시야의 구원사역이 있을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하나도 성취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진실합니다. 야곱은 행인 같은 나그네 인생으로(벧전2:1,) 인생의 여행 중에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도 “야곱이 받은 은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야곱은 인생 여정을 외롭게 산 사람입니다. 이방인과의 교제를(즉 세속을) 멀리하려니까 더욱 외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의 중보와 성령님의 사역을 보여주셨으며, 항상 함께 하시고 보호 인도하시며 약속하신 은혜를 남김없이 이루도록 역사해 주셨던 것입니다.
야곱의 생활에서 그가 세속주의를 피하려는 인상은 그가 이방인 숙소에 잠자지 않고 동질성 있는 혼인을 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을 보아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속을 피함이 곧 거룩한 생활입니다.
제 56 과 야곱의 제사와 서원 (창 28:16~22)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 16절~17절은 야곱이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함이요. 18절~19절은 야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이요. 20절~22절은 야곱의 서원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야곱의 하나님 임재에 대한 각성
1)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은 처음에 자기 혼자만 있는 줄 알았고 하나님이 자기 있는 곳에 어디든지 함께 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자기가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알았을 때 16절에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는 솔직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오늘날처럼 계시가 밝아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앙지식이 성경을 가진 이 시대보다 훨씬 미숙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알지만 야곱의 경우는 직접 체험에 의하여서만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성도와 늘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고 특히 외로운 자에게 함께 하시며 성도에게서 한 시도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셔야 합니다(마28:20).
2) 하나님은 계시의 말씀을 곧 하나님의 임재로 믿은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셔서 회전하는 그림자도 볼 수 없는 분이라(약1:17) 하셨고, 오직 영으로 존재하시고(요4:24;고후3:17), 따라서 볼 수도 없으며(욥23:8~9;요1:18), 그 대신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나타나시며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요1:1에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하시므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셨고, 요1:14에서는 예수님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며, 그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신다”고 살전2:13에서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곧 하나님의 임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눈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요1:18에 보시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하나님을 보았다”는 이가 있다고 하니, 그것은 분명히 호화롭게 가장한 마귀를 본 것일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말씀으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말씀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아야 하는데 그런 신앙이 바로 야곱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사닥다리에서 오르내리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자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천사이겠지요. 그러나 15절에서 축복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하나님의 임재로 믿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도와 항상 함께 하시고 또 말씀으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3)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죄를 지을 수도 없고 방종할 수도 없으며 지존자 곁에 있는 감정 그대로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경건한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떨면서 경외하여야 합니다. 시2:11에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면서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하는 자가 경건한 성도입니다.
4)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말씀으로 만남) 곧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① “하나님의 전”이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인데 “벧엘”이란 말도 역시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벧=집, 엘=엘로힘: 하나님). 이렇게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그곳이 곧 “하나님의 집”이란 신앙지식은 구약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 또 그곳을 “하늘의 문”이라 하였으니 하늘의 문은 천국 가는 통로를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이 있는 곳에 복음이 있고 복음이 바로 천국 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본 사닥다리가 바로 땅과 하늘을 연결한 길인만큼 그것이 중보자를 예표한 것이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받은 계시 속에 복음의 의미가 담겼기 때문에 그곳을 “하늘의 문”이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2. 야곱은 그곳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았으니까 당연히 경배의 표시로서 제사를 드린 것이지요. 야곱의 제사에 네 가지 요소가 있었습니다.
1) 일찍 일어나서 첫 시간을 사용한 점,
2) 소중하게 사용한 돌베개로 제단을 쌓은 점,
3) 항상 먹어야 할 기름으로 제물을 삼은 점,
4) 그곳에서의 사건을 기리기 위하여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하나님께 대한 정성의 표시요, 신앙적 태도인 것입니다. 저희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든 활동도 하나하나 소중하고 착실하게 성실을 다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3. 야곱의 서원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이 어떻게 서원하였습니까?
1) 서원이란 하나님께 대한 약속입니다. 인간을 상대한 약속도 필요할 때가 있고, 그 약속을 지킬 때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상대한 약속도 지키지 않을 때는 두 번 상대할 사람이 못되듯이 하나님께 대한 서원은 꼭 지켜야 하며 또 해로울지라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시15:4). 지킬 가능성이 없는 서원은 차라리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2) 야곱이 서원하게 된 이유는 나그네로서의 초라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반드시 힘입어야 한다는 갈망 때문에 서원을 한 줄로 압니다. 생명이 위태할 때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시면 충성을 잘하겠습니다. 내게 복을 주사 잘되게 하시면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야곱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서 양식과 옷도 주시고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자신이 살아있고 능력이 있는 한)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겠다”는 서원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였습니까?
①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하나님을 독점한 자처럼 섬길 것이란 것입니다. 이는 성도가 교회를 자기교회처럼 섬겨야 함을 교훈함이며,
②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는 뜻은 약속을 받고 서원한 그 장소에 제단을 쌓고 제사드릴 것을 서원함이니 이는 감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창35:1~15에서 야곱은 돌아온 후에 그곳을 찾아 제단을 쌓으므로 서원을 이행하였고,
③ “소득의 십일조를 반드시 드릴 것이라” 함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행해 온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드린다는 뜻입니다(창14:20).
저희들도 야곱처럼 나그네 인생 중에서 은혜를 받고 진리의 깨달음을 더 풍성케 하며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고 합당한 예배를 드리며 서원을 이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24.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창 28:10~22) 목록으로
1) 하나님은 고독한 야곱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루아침에 고아 같은 신세가 되어 집을 떠났고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고독하였을 것입니다. 동행자도 없이 홀로 여행하면서 돌베개를 베고 광야에 누운 처량한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데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고독을 느낄 때 그 마음도 가난하여 하나님을 찾게 되는 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독한 야곱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성도가 고독할 때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마6:4), 골방에서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마6:6),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50:15) 하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또 세상적 고독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기회임을 알고 분발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야곱에게 꿈으로 계시를 주셨습니다. 계시란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 주심을 뜻합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합니다. 아무도 인위적으로 알아내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십니다. 예를 들면 꿈이나 환상, 음성, 기타 다른 모양 등(천사) 계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욥33:15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 치듯 교훈하신다”하였고, 히1:1에서는 “옛적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계시는 신구약 66권으로 충분하게 주시고 끝내셨습니다(유3;요21:25;딤후3:16~17). 따라서 다른 계시를 주시지도 않거니와 필요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번 제정한 헌법이 오래 보존되는 것과 같으며 인간의 법은 오류가 발견될지라도 하나님의 법은 완전하기 때문에 영원불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경이 최고의 계시임을 아셔야 합니다.
3) 하나님은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계시를 주셨습니다.
①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이 사닥다리의 의미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을 의미합니다(요14:6).
②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내림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도우시는 역사로 성령님은 기도를 도우시고(롬8:26) 천사를 보내시며(히1:14)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셔서(시23:4) 직접 간접으로 붙드시는 역사를 하십니다.
③ 들려주신 말씀은 상징적 계시보다 훨씬 명확한 것입니다. 계시는 말씀계시가 가장 명확하고 능력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4)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서원을 이행하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서원은 건설적이며 신앙적으로 된 것입니다. 서원은 이행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야곱의 건설적인 서원을 그의 기도와 함께 이루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설교보충 25. 사다리 계시의 의미 (창 28:12) 목록으로
야곱에게 보여주신 사닥다리에 대하여 영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사닥다리는 천성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욥19:25에서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다”한 것처럼, 길 되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은 유일한 길이듯 예수님이 유일한 구속자요 중보자이시며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14:6;행4:12;갈1:8). 우리는 복음적 기독교만 구원이 있는 줄 믿어야 합니다. 범종교의 하늘사상은 자연신론적 신을 숭배할 뿐 여호와 계약의 하나님, 즉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의 종교가 되지 못합니다. 한 개의 사닥다리는 유일한 구세주 예수님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요10:9).
2) 사닥다리는 좁고 험한 십자가의 길을 의미합니다. 마7:13~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고, 또 야곱은 그 사닥다리를 보는 자리에서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하였으니, 그 사닥다리는 바로 하늘가는 좁은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믿음의 근거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같은 성경을 가지고 좁은 길 험한 길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시 같은 성경을 갖고 넓고 편한 길로 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성경대로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는 성도이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성경을 적당하게 지키려고 하면서 인간의 생각대로 편리하게 예수 믿으려는 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천성 가는 길은 분명히 좁고 험한 길이며 적은 사람들이 간다 하셨으니까 우리의 신앙의 방도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족히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요즈음 어떤 사람들은 “주일날 새벽기도 한번 나오는 것으로 예배가 족하니 성수주일에 구애되지 말라. 또 주일날 어떤 직장에서라도 잠시 예배드릴 기회를 가지면 된다. 다방에서 예배드리고, 설교는 녹음으로 듣고, 예배는 비디오로 보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쳐서 예배의 신성함과 성수주일의 의미와 교회의 경건성을 일시에 파괴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런 것이 곧 넓은 길로 가는 방도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그런 인본주의를 따르지 말고 혹 우리의 현실성에 손해가 있더라도 근면하게 예수 믿고, 의롭게 믿는 방식을 택하실 뿐만 아니라 다수 편에 진리가 있는 듯이 현혹되어서도 안 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3) 사닥다리는 독자적 신앙으로 올라가야 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이니 퍽 높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올라가야만 천성에 도착할 것인데,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가 할 때 이는 사닥다리를 타보신 분들이면 많은 참고가 되실 것입니다.
① 우선 자신이 올라가야지요. 누가 대신 나를 올려 줄 수가 없습니다. 또 좁은 길이기 때문에 둘이 함께 올라갈 수가 없으니 이는 자기의 구원이 독자적 신앙으로만 성취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타인의 공덕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닥다리는 자신이 타고 올라가야 하고, 거기에 천사의 부축과 보호를 받는 것처럼 믿음도 타인이 믿어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자신이 믿고 고백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믿지 않는 가장이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십시오”하니까 우리 딸이 너무 열심히 잘 믿으니까 나를 천국에 보내주지 않겠습니까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롬10:10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하였고, 또 13절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였으니 이 말씀도 역시 자기신앙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② 아무리 사닥다리가 높아 보이고 무서워 보이지만 용기 있게 붙잡고 오르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큰 빌딩에 불이 나면 그 안에 사람들이 다 옥상으로 피하겠지요. 그러면 옥상에서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밑에서는 불길이 타오르는데…. 이때에 헬리콥터가 그 위에 와 줄사다리를 내려 주었다고 할 때 죽지 않으려면 붙잡고 타야겠지요. 이와 같이 이 세상이 죄악으로 불타는 중에 하나님이 위에서 구원의 사다리를 내려 주셨으면, 우선 용기 있게 타고 든든히 붙잡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도 마찬가지로 구조의 생명줄을 든든히 잡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닥다리를 타는 방법은 붙잡는 용기와 올라가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4:14을 보시면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하였고, 히10:23에서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자”고 한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은 ‘믿을 것만 든든히 붙잡는 것’인데 그 믿을 것은 바로 성경뿐입니다. “성경만 믿으십시오” 해도 굳이 다른 것까지 믿으려는 심리는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닥다리 타는 방법은 성경을 의심 없이 믿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③ 위만 바라보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높은 데 올라가는 사람이 아래를 내려다보면 참으로 위험한 것이요, 아래를 보면서는 감히 높이 오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저희들의 신앙생활도 아래 세상을 멀리 보시고 높은 곳 하늘의 세계를 소망하면서 달음질하셔야 합니다. 골3:1~2에서 중생한 성도는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땅에 것에 대하여)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④ 신앙 순서의 계단을 밟아 올라가야 합니다. 집 짖는 순서가 있지요. 또 나무도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줄기요 그 다음이 충실한 곡식이라(막4:28)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이 순서대로 되었을 때 원만한 것처럼 신앙성장도 사닥다리 오르듯이 단계적으로 성장함이 귀한 줄을 아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닥다리 계시에서 유일 중보자 예수님과 유일한 구원의 길 그리고 독자적 신앙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용기 있게 올라가며 위를 쳐다보고 단계적으로 오르는 신앙을 가져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 57 과 야곱이 외가에 감 (창 29:1~14) 목록으로
위의 말씀을 살피면 ① 야곱이 외가의 동리에 도착하여(1절), ② 그 곳 목장의 근황을 살피고(2~3절), ③ 목자들에게 물어 외숙의 사정을 알고(4~8절), ④ 외숙과 그의 딸을 만나는 내용(9~14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야곱이 외가에 감”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1절에서 “야곱이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 함은 외숙이 사는 곳 즉 자기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고향인 “하란”에 간 것을 의미합니다. 하란을 동방사람의 땅이라 한 것은 그 지역이 가나안땅 위치에서 볼 때 동방이요, 아람족이 사는 곳이며(31:20) 메소포다미아 지역과 팔레스틴 지역의 중간을 의미합니다.
2. 야곱은 그곳 들판에 우물과 양떼가 있음을 보았고 목자들이 그곳에 모여 우물 돌을 옮기고 물을 먹인 후 다시 큰 돌을 우물 아구에 덮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런 형편은 목자들 생활에 따르는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목자들이 일정한 때에 우물에 모이는 이유는,
1) 물 먹이는 시간도 일정해야 하려니와,
2) 우물 돌을 같이 옮기고,
3) 우물물을 같이 사용하기 위하여서이며,
4) 또 우물 아구를 막아야 함은 모래가 덮이는 손해 등을 막기 위하여서입니다.
3. 야곱은 그곳에 모인 목자들에게 나의 형제여 하면서 친절하게 접근하여 그들이 하란에서 온 목자들임을 확인하고 나홀의 손자 라반의 안부를 물은즉 그들은 ‘라반의 딸 라헬이 양을 몰고 온다’는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야곱이 그 소식을 듣고 기다리는 차에 그들에게 아직 해질 때가 멀어서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물을 먹이고 또 뜯기라 하므로 돌을 옮기는 봉사를 해 줄 의향을 표시한 즉 그들은 양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함께 돌을 옮겨야 물을 먹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4. 이상의 말씀에서 야곱이 동방의 땅 양치는 곳에서 사람을 만난 것과 그 사람들이 라반에 대하여 친절하게 알려 준 것과 마침 그 때 ‘라헬이 오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야곱의 길을 대단히 순탄하게 인도하셨음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는 해가 많이 남아 있는 때라 짐승모일 때가 아닌데 물을 먹이기 위하여 특별히 일찍 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야곱이 그들에게 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자리에서도 봉사와 근면성을 보였으니 그것이 바로 “해가 아직 높은즉 물을 먹이고 또 뜯기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단체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다 모일 때까지 기다리고 목자들이 함께 돌을 옮기고 모든 이의 양떼도 다 같이 물을 먹게 한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1) 하나님의 순탄한 인도,
2) 사람을 적시에 오게 하여 만나게 하시는 섭리,
3) 야곱의 친절한 대화와 봉사와 근면성,
4) 양치는 자들의 단체생활의 미덕을 엿볼 수 있습니다.
5. 마지막 부분에서 야곱이 라헬과 외숙을 상봉한 것입니다.
1) 목자들과 말하는 중 라헬이 그 아비의 양떼를 몰고 왔습니다.
2) 야곱은 주저하지 않고 우물의 돌을 옮겨 그의 양떼들에게 물을 먹이고 자신이 그의 아버지의 생질(즉 고모의 아들)인 것을 말하고 오래간만에 만난 상봉의 정으로 입을 맞추며 울었습니다. 요즈음 포옹하고 입 맞추는 일을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그것이 풍속이고 자연스러운 반가움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3) 야곱과 라헬의 만남은 초면이었고 그때 야곱은 40세 이상이었으며 라헬의 나이는 얼마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또 그때에 라반은 누이 리브가가 가나안땅으로 내려가서 40세의 이삭과 결혼한 후 60세 때에 낳은 야곱이 40세 때에 하란에 와서 만난 것이니까 누이의 가족과 약 60년 만에 만난 것이므로 퍽 반가웠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는 여행자들을 통하여 소문으로 들은 소식만 있었을 뿐입니다(창22:20).
4) 10절 말씀에서 야곱은 라헬의 양에게 오자마자 우물 돌을 옮기고 물을 먹였는데, 먼저 와서 기다리며 친절하게 대답해 준 사람들의 양떼보다 먼저 물을 먹이므로 물 먹이는 순서를 앞지른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너는 늦게 와서 물을 먹이느냐?’한 사람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① 60년 만에 반가운 조카를 만난 집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하여 양보하였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리브가가 물을 먹인 후 급히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아버지 “라반”에게 알린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② 혹시 우물 샘이 여럿이라 여러 목자들이 이 우물 저 우물에서 함께 물을 먹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우물 환경은 드문 예일 것이요, 반가운 일이 생긴 집에 축하의 뜻으로 다른 목자들이 양보한 미덕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③ 이런 것은 작은 실례이지만 모든 일에 있어서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는 봉사와 양보와 이해가 성도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외삼촌이 생질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누이 리브가가 떠난 지 약 60년 만에 그의 아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영접하고 안고 입을 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떠난 때로부터 얼마 만에 그의 손자 야곱이 할아버지의 고향에 간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75세에 집을 떠났고 100세에 이삭을 낳았으며 이삭은 60세에 야곱을 낳고 야곱은 40세 이후에 그곳에 갔으니, 25년, 60년, 40년을 합하면 125년 후에 라반이 삼촌의 골육을 만난 것입니다. 라반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야곱,
② 고향을 방문하게 되는 특별한 과정,
③ 목자들의 단체생활의 화합,
④ 야곱의 친절과 근면성이 이 말씀 속에 내포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제 58 과 야곱의 결혼 (창 29:14~20) 목록으로
위 본문의 말씀에는 야곱이 결혼하게 된 경위가 기록되었습니다.
1.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조카 야곱이 집에 거한지 한 달 되었을 때에 거저 일만 시킬 수가 없으니 보수를 정하자고 의논해 왔습니다. 야곱이 열심히 일을 하니까 외삼촌이 보수문제를 말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만일 게으른 사람이라면 자기 집에 머무는 것도 싫어하였을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나 게으르면 그 이웃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면하고 성실하고 봉사성이 있으면 누구도 그런 사람을 멀리 보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2. 라반이 보수문제를 의논해 왔을 때 야곱은 기회를 포착한 듯이 “7년 봉사를 할 터이니 라헬을 아내로 주시오” 하였습니다. 라반의 두 딸 중 레아는 안력이 좋지 않고 라헬은 처음 왔을 때 우물에서부터 만난 딸로, 곱고 아리따워 이미 연애를 하고 있던 차였기 때문입니다. 약 3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풍속에서 연애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은근히 연애를 하여서라도 배우자를 구해오는 것을 바라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연애와 중매 어느 것이 좋으냐 할 때 다 일장일단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연애하고 결혼성취를 못하거나 연애하면서 덕을 세우지 못할 때는 중매결혼만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중매로 만나 간단히 교제해본 후 결정하는 것이 가장 건전할 것 같습니다. 성도는 결혼과정에 있어서 건전하고 덕 되고 진실하게 행하여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야곱은 자기가 하란에 온 목적이
1) 형을 피하는 일과,
2) 아내를 얻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적극성을 나타냈습니다. 라헬에게 장가들기 위하여 7년을 봉사하겠다고 자청한 것입니다. 7년 봉사란 딸의 값을 그의 부모에게 내는 것입니다. 이삭이 리브가에게 장가들 때에도 많은 패물을 신부 측에 제공하였는데 반대로 여자는 남자에게 선물하였다는 말씀이 없음을 보아서 ‘돈을 주고 아내를 사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풍속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7년 인건비로 ‘아내의 값을 치르겠다’한 것은 대단히 후하게 치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좋으면 그 이상도 치를 수도 있겠지요.
4. 그래서 라반은 인건비 문제로 염려하던 차 7년 봉사를 받고 딸을 주기로 하였으며 딸을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조카에게 주게 된 것을 만족하게 여겼습니다. 선민세계가 희소한 시대에 근친결혼은 이미 허용되고 있었습니다(창20:12).
그리고 야곱의 7년은 라헬과 연애하는 취미로 수일 같이 지나갔습니다. 기쁨과 만족이 있는 세월은 빨리 가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확실하고 보람있는 생활에 만족을 얻으며 빠른 세월을 살아야 합니다.
5. 7년 기한이 찼을 때 “딸을 달라”하여 잔치를 하고 신부를 취하였는데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라헬이 아니고 레아였습니다. 조명시설이 없이 밤에 혼인을 하는 풍속인 만큼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깜짝 놀란 야곱은 외삼촌이 자기를 속였음에 대하여 항의하였더니 “이곳의 풍속으로 작은 딸을 먼저 줄 수 없어서 그렇게 하였으니 우선 큰 딸을 아내로 삼고 7일을 있으면 작은 딸도 줄 터인즉 그 딸도 아내로 취하고 또 7년을 봉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덫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더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얻을 목적 때문에 또 7년을 봉사하겠다고 약속한 후 7일 후에 라헬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때에 라반은 큰 딸에게 “실바”를 작은 딸에게 “빌하”를 각각 여종으로 더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딸의 대가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6. 라반은 야곱과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지 아니하였습니다.
1) 둘째 딸을 7년 봉사의 대가로 주겠다 하였으면 그대로 실천하든지, 아니면 사전에 문제성을 알려야 하는데 느닷없이 혼인날 밤에 큰 딸을 주었으니 퍽 잘못한 일입니다.
2) 이는 라반이 고의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큰 딸이 나이도 많고, 눈도 안 좋고, 인물도 못한 레아를 야곱에게 떠맡긴 것입니다. 그것도 최고의 값인 7년 봉사의 대가로…. 그래서 야곱은 계획에 없던 아내를 한사람 더 얻게 되었습니다.
옛날 족장시대나 왕들에게 일부다처제가 실시된 것은(삼하12:8) 바른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에 일부일처제도의 계몽이 부족하였고, 종족번성을 인하여 하나님이 간과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시대에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3) 라반은 좋은 사위에게 두 딸을 혼인시키면서 14년을 봉사 받음으로 이익을 도모하였고 여기에 따라 야곱은 뜻에 없는 여러 아내를 거느리며 7년 봉사를 더하게 되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복이 된 것은,
① 그 인력으로 큰 부자가 되었고,
② 거기서 출생한 여러 아들들이 다 선민족이 된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다처의 몸에서 생산된 자녀들을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열두 지파를 다 택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계략에 넘어간 것 같았으나 결국은 그것도 축복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르심 받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롬8:28).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을 수 있는 내용들은 야곱의 근면과 함께,
1. 사람을 거저 일시키지 않는 라반의 고용적 윤리에서 노사합의 정책을 배워야 하고,
2. 야곱이 기회를 포착하여 아내 얻는데 진력한 사실과,
3. 7년 봉사로 아내의 대가를 지불할 만큼 반려자의 필요성과 존귀성을 나타낸 사실과,
4. 라반이 풍속을 따라 계약을 어긴 것은 부당한 일이며,
5. 야곱이 즐거운 일로서 세월을 빨리 보낸 점과 7년 동안을 연애하면서 인내하다가 결혼한 점,
6. 야곱이 속임을 당한 것 같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복을 더 받게 되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59 과 야곱이 열한 아들을 낳음 (창 29:31~30:25) 목록으로
위 본문은 야곱이 열한 아들을 낳는 내용으로, 30:25까지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결혼한 사람들에게 자녀가 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야곱도 예외는 아니어서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본문에는 그 열한 아들의 출생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① 레아가 네 아들을 낳음(29:31~35), ② 빌하가 두 아들을 낳음(30:1~8절), ③ 실바가 두 아들을 낳음(9~13절), ④ 레아가 또 두 아들을 낳음(14~20절), ⑤ 레아가 딸 “디나”를 낳음(21절), ⑥ 라헬이 요셉을 낳음(22~25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야곱이 네 아들을 낳음에 대하여(29:31~35).
1)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주셨습니다(31절).
2) 라헬은 무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태를 열어주시지 않았다는 뜻인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라헬보다 불행한 레아에게 위로하시는 뜻으로 권고하신 줄 압니다. 라헬은 아름답고 젊은 나이에 결혼하여 남편의 사랑을 받았지만 레아는 신체적 결함과 함께 남편의 사랑이 결핍된 중 노처녀로 결혼한 불행을 하나님이 보충해 주신 것입니다(32절).
① 레아가 “르우벤”(보라 아들이라)을 낳고,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하므로 괴로움을 권고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였으며 남편의 사랑을 더욱 기대하였습니다.
② 또 레아가 시므온(들으심)을 낳고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시고(무자하지 않도록 은혜 주셔서) 내게 이도 주셨도다”하므로 감사하였고,
③ 또 레위(연합함)를 낳고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하므로 남편의 사랑의 심정을 갈망하였고,
④ 또 유다(찬송함)를 낳고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레아의 생산은 잠시 멈추었습니다.
3) 이상의 말씀에서 레아는 남편의 정신적 사랑에서 소외된 대신 네 아들을 낳으므로 복을 받았고 남편과의 생활에서 큰 만족을 누리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은 후손의 세계에서 복을 누리게 하셨으니, 세째 아들 레위는 제사장 지파가 되었고(민18:2) 넷째 아들 유다는 메시야 지파(창49:10)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복이 아닙니다. 야곱이 레아에게 깊은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은 본래부터 라헬을 사랑하였고, 레아는 풍속적 결혼으로 임한 때문이었습니다.
2. 빌하가 두 아들을 낳음에 대하여(30:1~8)
1) 라헬은 무자한 중 형의 생산을 투기하며 야곱에게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하였으니 이는 미련한 소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투기는 죄악입니다(고전13:4). 야곱은 라헬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하였으니 자녀 생산에 관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지나친 과학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생산적 섭리를 침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일 것입니다.
2) 라헬은 참다못하여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었고, 거기에서 첫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이 나의 억울함을 들어주셨다”는 뜻으로 “단”(억울함을 푸심)이라 하였고, 또 다음 아들을 낳았을 때,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는 뜻으로 납달리(경쟁함)라고 하였습니다.
3) 여종이 낳은 자식은 그 주인의 소유가 될 수 있음이 그 당시의 법이요, 또 그 시대는 노동력을 삶의 수단으로 삼는 때였으므로 생산의 의욕은 재물의 의욕 이상으로 컸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3. 실바가 두 아들을 낳음에 대하여(30:9~13)
1) 레아는 자기의 생산이 멈추고 라헬의 여종이 생산하는 것을 보았을 때 또 자녀 생산의 의욕이 생겨서 자기의 여종 실바를 또 첩으로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2)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았을 때 레아는 “복되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갓(복됨)이라 하였고, 또 둘째 아들을 낳으니 “기쁘다”는 뜻으로 아셀(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3) 옛날에는 이렇게 경쟁적으로 자녀를 생산하였습니다. 인간의 생활방도가 바뀌어 짐에 따라 자녀생산이 자녀 제한 생산으로 바뀌어진 것은 성경적 윤리를 왜곡한 처사일 것입니다.
4. 레아가 다시 두 아들을 낳음에 대하여(14:20절)
1) 레아는 평소에 남편과 동침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 레아의 큰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모친 “레아”에게 드렸는데 동생 라헬이 그 합환채에 탐심을 갖고 청구를 하자 레아는 “네가 남편 빼앗은 것도 적은 일이 아닌데 이 합환채까지 달라고 하느냐?”하고 거절하자 라헬은 “오늘 저녁에 남편을 언니 방에 들게 해 줄 것이니 합환채를 달라”하여 그렇게 바꾸었습니다. 합환채란 들풀의 일종으로 연가자(戀茄子)란 식물인데 고대 중동지방에서 그 풀이 “생산을 도와주는 풀”로 신앙화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생산을 못한 라헬은 그 풀의 신비한 힘이라도 이용해 보려한 것입니다. 시127:3에서 “태의 열매는 하나님의 선물이라”하였으니 합환채에 의존하는 신앙은 미신입니다.
2) 그러나 라헬은 합환채를 받고 레아에게 남편을 동침케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레아는 또 들으심을 받아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잇사갈”(값)이라 하였으니 이는 레아가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준 값으로 받은 아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며,
3) 그 다음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후한 선물 주심을 감사함과 동시에 남편이 자기와 동거해 주기를 바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스블론(동거함)이라 하고, 그 후에 “디나”란 딸을 낳았으니 이 말씀에서 레아는 자녀의 복을 순순히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아에게서는 감사와 봉사성이 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20절-후한 선물, 18-시녀를 준 값을 받음).
5. 마지막으로 라헬이 요셉을 낳음에 대하여, 하나님이 라헬의 태를 늦게 열어 주심으로 라헬이 처음으로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음을 감사하였고 또 다른 아들을 더 주시기를 바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요셉”(더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태를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시며 복을 주시되 공평하게 주시는 섭리가 레아와 라헬에게서 나타났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아들들의 탄생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잉태의 은혜로 되었음을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사44:1~9;49:1~3).
제 60 과 야곱이 재산을 확보함 (창 30:25~43)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야곱이 “자기의 재산을 확보한 일”에 대하여 기록되었습니다.
1. 야곱이 재산을 모으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1) 그가 빈손 들고 외삼촌의 집에 가서 품꾼으로 취직한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① 야곱이 무일푼에서 시작한 것은 그가 집을 떠날 때 지팡이만 갖고 요단을 건넜다(창32:10)고 한 말씀으로 알 수 있으며,
② 또 그가 품꾼으로부터 시작한 증거는 본문 26절에서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한 것을 볼 때 그가 외삼촌의 딸들과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지만,
③ 아내와 자식도 정식으로 돌려받아야 하고, 또
④ 그 집을 떠나는 자유도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 실권 없는 자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과 물질관계로는 품꾼의 입장에 있었고, 인적 관계로는 사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야곱은 재산을 모으기 전에 먼저 가족 구성을 하고 그 다음에 재산을 모았는데 재물 모은 수단은 가족들의 노동력이었으며 소득의 근거지는 외삼촌의 목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소득으로 노비와 약대와 나귀까지 풍부하게 갖게 되었습니다.
① 요즈음은 “돈 벌어서 결혼을 한다, 생활기반이 있어야 가족을 늘린다” 하므로 재산을 쥐고 사람을 붙잡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야곱은 사람의 노동력을 발전의 근거로 삼아야 하였기 때문에 우선 자기가족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확보한 다음에 재산을 모으기 시작한 것입니다.
② 온 가족이 자기의 일에 몰두하면서 외삼촌의 양떼를 근거로 재산을 모았으니 이는 오늘의 노동자나 고용인들이 다른 이의 사업체에 종업하여 소득을 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③ 물질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야곱도 양떼가 많아지므로 거기에 딸린 노비와 약대, 나귀도 많이 모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43절).
④ 그런데 한 가지 특징은 외삼촌이 야곱의 소득을 인색하게 통제하였지만 결국은 외삼촌의 재산이 야곱의 재산으로 더 많이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2. 그러면 본문 말씀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① 야곱이 가족들과의 귀향을 외삼촌에게 처음으로 청하였을 때 외삼촌은 더 있으라고 하였습니다(25~28절). 그 때까지는 야곱의 소유가 많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② 이때에 야곱은 그 동안 자신이 외삼촌을 “어떻게 섬겼다”는 자기의 공로를 말하면서 독립된 집을 세울 것을 청하니, 외삼촌은 “품삯 정하는 방법을 네가 정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까지도 외삼촌의 마음은 너그러웠습니다. 이때에 야곱은 외삼촌의 양과 염소 중에서 검고 점 있고 아롱진 새끼를 자기 소유가 되게 해 달라 하여 허락 받았습니다(29~34절). 양은 흰 양이 외삼촌의 것, 검고 점 있고 얼룩진 새끼는 자기의 것, 염소는 희고 검은 것이 외삼촌의 것, 점 있고 얼룩진 새끼는 자기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이 허락을 받은 후에 야곱은 자기에게 소유된 새끼가 많아지고 또 그것들이 건실하게 번성하게 하기 위하여 방법을 쓰며 노력하였습니다. 그 번창하는 방법이 35~4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야곱이 가족들과 귀향청원을 함에 대하여(25~28절) 야곱은 외삼촌의 집에서 산지 1개월 만에 외삼촌의 딸들과 결혼을 하고 14년 동안 고용됨으로 두 아내의 값을 다 지불하였습니다. 그 동안 첫 부인인 레아가 네 아들을 낳았고, 또 얼마간 멈추었다가 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고 그 사이에 두 부인의 여종들이 각각 두 아들씩, 네 명을 낳았고, 맨 나중에 둘째 부인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 귀향청원을 하였으니까 첫 부인이 일곱 자녀, 두 여종이 네 아들, 라헬이 요셉을, 도합 열두 자녀를 낳은 기간은 거의 15년이 걸렸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의 값으로 14년을 제하고 얼마 안 되어서 귀향을 청원한 것인데 야곱은 그때부터 재산을 모으기 시작하여 집을 떠난 지 20년 만에 귀향하였으므로 그가 재산을 모은 기간은 4~5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야곱이 귀향청원을 하였을 때 라반은 야곱을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① 야곱이 너무 성실하였고,
② 또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인하여 자기 집에 복 주신 것을 깨달았기에 품삯을 주면서라도 있게 함이 유익하였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은 어디서나 붙잡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야곱은 자신이 수고한 노력을 말하고 품삯을 제의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29~34절).
1) 먼저 야곱은 자기의 성실성을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성실한 것이 없으면 할 말이 없겠지요. 그러나 성실하였으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 할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① 내가 성실하였던 것은 “외삼촌이 다 알지 않느냐?”고 반문하였고,
② 또 성실하였던 증거는 처음 올 때 외삼촌의 적었던 소유가 이제는 떼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나의 공력을 따라 하나님이 복 주신 것이 아니냐?”하면서 실증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③ 하나님은 야곱의 공력을 따라 복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30절)2) 그리고 “나는 언제 내 집을 세울 것입니까?” 하였더니 “네 품삯을 네가 정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외삼촌의 양과 염소 중에서 낳아진 “새끼가 아롱지고 점 있고 검은 것이면 그것을 나의 소유로 정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양의 본색은 흰 것으로 치고 염소의 본색은 희거나 검은 것으로 친 것입니다. 그 본색에서 특이한 색이 나오는 것만 야곱의 몫이 된다는 것입니다. 검고 점 있고, 아롱진 것은 본래 희귀종이었습니다. 어느 주인이 많은 짐승의 새끼를 종의 품삯으로 주겠습니까? 당연히 희귀한 품종인데 그것도 “종자 어미”를 준 것이 아니고 거기서 나오는 특이한 새끼만 요구한 것입니다.
3) 그러면 야곱이 왜 그런 방법으로 품삯을 청하였을까요?
① 외삼촌이 욕심이 있고 변덕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딸들을 주고 14년 고용을 받은 사람) 소유에 대한 분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② 생육번성에 관한 축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라반은 그 품삯이 많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승낙한 것입니다.
4. 그렇게 승낙한 라반이 그 후에 어떻게 하였습니까(35~43절)
1) 라반은 즉시 유색종자를 낳을 수 있는 검고 아롱지고 점 있는 염소를 자기 아들들에게 맡기므로 그것들이 야곱의 손에 가지 않고 자기 아들들 손에서 통제되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잘못 해석하면 35절의 “그가”란 말을 야곱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가”란 사람이 야곱이 아니고 주인 “라반”이란 것이 그 다음 36절의 ‘자기와 야곱의 사이’란 말에서 밝혀집니다.
2) 36절에서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길이 뜨게 하였다”하였으니 이것은 3일을 걸어가야 하는 먼 곳에 야곱을 보내어 자기의 소유 짐승만을 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색종자는 자기의 아들들에게 키우게 하였으니 야곱이 3일길 떨어진 곳에서 주인의 짐승만 치면서 어떻게 유색종자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하여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 재산의 의욕을 못 갖게 한 것입니다. “내 집에서 나오는 것 중 유색종자가 생기면 네 것인 줄 알아라”하는 식이었습니다.
3) 그래서 야곱은 주인의 아들들이 키우는 얼룩진 짐승의 새끼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특별한 방법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 특별한 방법이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이 세 가지 나무를 공동번역에서는 미류나무, 감복숭아나무, 플라타나스라 하였음)의 푸른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겨 얼룩진 무늬를 만들어 개천 물구유에 놓아 양떼로 하여금 자주 보게 하고 양들이 그것을 보면서 새끼를 배게 하였을 때 거기서 아롱진 양이 나왔습니다. 물론 라반의 흰 양들 중에서도 유전원칙에 의하여 유색종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구별 취급하여 잘 키우면서 또 실한 양이 새끼를 밸 때는 나무껍질무늬를 보게 하고 약한 양에게는 그것을 보이지 않으니까 결국은 튼튼한 유색종이 많이 번성하게 되어 마침내 부자가 된 것입니다.
4) 여기서 저희들은 두 가지 의문을 풀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는 양이 얼룩진 무늬를 보면서 새끼를 배면 얼룩진 새끼가 나왔는데 이것이 근거 있는 방법인가 하는 점이고, 또 하나는 야곱이 그렇게 이기적인 방법을 써도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① 야곱이 양의 색깔을 만들기 위하여 나무껍질 무늬를 짐승에게 보인 것은 역사적 전통에 없는 일이며, 렘13:23에서 “구스인은 그 피부를 표범은 그 반점을 스스로 변하지 못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유전법칙이나 돌연변이에 의하여 색깔이 변하는 것이고 그 외에는 기적으로 주신 은혜일 것입니다. 야곱이 짐승에게 얼룩무늬를 보게 한 것이 과학적 근거가 있느냐 아니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냐 할 때 이것은 유전공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실험하여 발표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 문제가 육체에 미치는 영향으로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태교”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임신부가 “바른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그 마음이 아이의 정신조성에 영향을 준다는 뜻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이 성경에 근거하여 “두 부부가 딸을 낳기를 원할 때는 미녀를 생각하며 임신하게 하고 아들을 원할 때는 지성인을 생각하면서 임신을 시켜라”, 자기가 그렇게 하였더니 다 미국에 유학 가서 공부를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야곱은 특별한 지혜로 그러한 방법을 알고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② 그리고 야곱이 자기의 재산증식을 위하여 이기적 수단을 쓴 일에 대하여는 이기적 욕심 그 자체는 나쁘지만 라반이 고의적으로 야곱의 재산 통제를 열 번이나 변역하는 입장에서 대응한 것인 만큼 가장 정당하고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고용주는 고용인의 권익을 위하여야 하고 고용인은 주인을 위하여 충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과 그의 지혜와 근실하므로 부자가 되었고 라반은 복 받은 야곱을 가난하게 만들기를 원하였지만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니 해롭게 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26. 성도의 윤리생활 (창 29:15~30, 마 22:36~40) 목록으로
성경은 신앙과 윤리 두 가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 신앙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느냐 함이고, 윤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 즉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2. 방금 읽으신 마22:36~40의 말씀은 신앙과 윤리를 아울러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십계명을 요약한 말씀으로,
1)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2)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시므로 하나님과 사람을 다 사랑하여야 하되 하나님은 생명을 다하여 사랑하고 사람은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명은 영원한 것이고 몸은 한정된 것이니까 하나님은 영원히 사랑할 대상이고 사람은 우리의 육신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할 것이라는 뜻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성경은 윤리생활에 대한 말씀도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일남일녀의 혼인법, 부부생활의 윤리, 부모자식간이나 형제간, 이웃과의 화목생활, 임금과 백성, 상전과 하인 관계 등 여러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저희들의 윤리생활을 점검하는 의미로 창세기 29장에 나타난 “라반의 가정문제”를 가지고 현실적인 윤리와 대조하면서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4. 어떻게 보면 옛날의 윤리적 교훈과 오늘의 윤리적 교훈이 다른 것처럼 오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옛날에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다윗 왕이나 솔로몬 왕이 많은 처첩을 거느렸으나 성경이 지적하지 않았으니 그 때는 일부다처 제도를 허용한 것이 아니냐 하시겠지만 하나님은 인류초기에 일남일녀로 부부제도를 창설하신 후 신약시대까지 그 제도를 바꾸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조상들의 다처생활은 잘못된 것이 사실인데 그것이 평범하게 시행된 것은 그 당시에
1)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계몽이 없었고,
2) 인종번성을 필요로 하였으며,
3) 상당기간 다처제도가 지적 없이 성행되었고,
4) 또 하나님이 계시사역이나 징계사역을 드러나게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제도가 생긴 것일 뿐 결코 윤리적 교훈이 변동되어 그런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5. 저희들은 야곱이 라반의 가정에 가서 20년 동안의 생활을 하나의 역사로만 알 것이 아니라, 오늘 저희들의 당면한 윤리적 입장과 대조하면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옛날에는 계시와 계몽이 부족한 시대였고, 오늘은 완성된 성경계시와 함께 계몽이 발달한 시대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람들보다 신앙 면과 윤리 면이 더 예민해졌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라반의 가족생활에서 무슨 잘못된 윤리를 지적할 것이 있을까요? 지적사항이 너무도 많지요. 그래서 저희들은 그것들을 무심히 넘어가지 말고 확실하게 지적하고 우리의 생활에서도 그런 잘못들이 재현되지 않도록 윤리의식을 고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라반은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① 자기 조카인 야곱을 물질적 관계에서 완전히 노예처럼 취급하였습니다. 창30:25~26을 보면 야곱이 고향에 돌아가는 문제를 외삼촌의 허락에 의존하였고, 또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달라고 한 것을 보면 장가는 갔으나 가족 전부가 주인에게 예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년 사이에 한 번도 고향엘 못간 것을 보면 시간적 자유와 인권이 노예처럼 붙잡힌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에게 동등한 인권을 허락하셨습니다. 혹 인권의 격차를 두신 것은 하나님의 저주나 징벌의 결과로 주신 것뿐이었습니다(창9:25).성도는 인권을 존중할 의무만 있습니다. 요즈음은 인권이 많이 존중되고 있지만 성도가 누구를 무시하거나 돈으로 사람의 인권을 억압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② 라반은 딸을 조카에게 아내로 주면서 그 값을 받았으니, 이것은 오늘날 윤리의식으로 인신매매에 속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혼인법을 정할 때 “딸을 시집보내면서 그 값을 받으라”고 하였다면 큰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일을 예사로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혼숫감의 명목이 기념품의 수준을 넘을 때는 사람의 값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자식은 하나님의 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거저 보내고 거저 데리고 오는 생활을 하므로 인신매매 같은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③ 야곱이 아내 값으로 ‘7년을 봉사하겠다’하였을 때 외삼촌인 라반이 딸을 완전히 거저 주기 어려우면 “한 3년만 하라. 어찌 7년까지 하겠느냐? 너는 내 조카이고 또 내 딸을 노예로 주는 것도 아니요 너의 사랑을 받을 아내로 주는 것인데…”라고 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이 “그렇게 봉사하겠다”고 하였을 때 선뜻 승낙하였고 또 그것이 공정가격이 되어서 다른 딸을 줄 때에도 그 가격을 첨부하였으니 여기에서 라반은 이기적인 사람임을 면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가 그런 식으로 하였다면 전도가 안 될 것입니다. 혹 라반이 정당하게 하였다고 할지 모릅니다. 준다고 하여 받았으니까…. 그러나 결국 라반은 물질의 축복을 적게 받았고 오히려 후하게 주고 손해 본 야곱이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④ 라반이 야곱의 7년 봉사 후에 둘째 딸 라헬을 주기로 하였으면 그대로 시행하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결혼 초에 어두운 상태에서 야곱을 큰 딸 “레아”에게 들어가도록 하여 아침에야 알게 한 것은 속임수인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속임수로 축복을 빼앗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큰 잘못입니다. 또 풍속에 따라서 둘째 딸을 먼저 주기 어려우면 사전에 이야기하고 협의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조카의 혼인을 속이는 방법으로 적당히 바꾸는 소행은 참으로 악한 것이지요. “진짜 물건을 준다 하고 가짜를 주는 것, 서로의 약점을 감추고 혼인 말하는 것, 은근히 사람을 속이는 행위, 약속을 고의로 범하고 자기의 이득을 차리는 일들”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결코 음흉한 데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⑤ 둘째 딸을 먼저 주지 않은 이유는 “그 곳 풍속이 아니기 때문이라(29:26)”하였는데 풍속이 아무리 중요하여도 계약만큼 중요할 수가 없고, 또 성도는 풍속이 성경에 위반 될 때는 완전히 무시하고 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인간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과…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쳐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을 예수님이 지적하신 만큼(마15:6,9) 성도는 전통이나 유행에 끌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야 어떤 방식으로 살든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만 보고 따라가면 되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⑥ 라반이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면서(31:7), 자기의 이익을 차리는 일에 연연하였지만 결국 자기는 가난해졌고 손해를 보면서 산 야곱은 거부가 되었습니다(31:1). 그런고로 내가 부자 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손해 보이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남을 손해 보이면 결국 그 이상의 손해가 자기에게 온다는 것을 예상하여 남을 속이지 말고 서로의 피해로운 일이 있었을 때에는 합당하게 화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라반의 도덕적 윤리 결함을 여섯 가지로 지적하였습니다.
2) 다음은 “레아”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 레아는 라반의 큰딸로 동생 “라헬”이 시집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자기를 먼저 야곱의 아내가 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동생을 위하여 칠 년을 봉사하고 장가드는 날에 먼저 자신인 “레아”에게 들어오면 되겠습니까? 형제간의 의리로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되겠지요. 당연히 아버지에게 항의하고 거절해야 됨은 물론,
② 혹 아버지의 명에 의하여 야곱이 자기에게 들어왔다 하여도 밝는 날까지 자기를 “라헬”인 것처럼 숨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국은 야곱과 자기와의 부부된 것을 맺어놓고 보자는 욕심과 거짓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형제간에 평생 원수 될 일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고 눈이 나쁘며 인물이 없어서 시집을 가기 어렵다 하여도 동생 앞에 그렇게 하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동생의 남편을 가로채는 언니가 되었으니 차라리 시집을 못 갈지언정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된다는 윤리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3) 라헬은 어떻게 하였는가?
① 칠 년을 연애하면서 당연히 야곱과 혼인할 것을 알고 기다린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자기 아버지와 언니가 자기 남편을 가로챘을 때 어떻게 하여야 좋았을까요? 오늘 우리들의 신앙적 양심이라면 일부이처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동생이 양보하고 용서하므로 야곱으로 하여금 일부일처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시행할 윤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울 때는 야곱이 속은 상태에서 레아와 동침한 것인 만큼 가벼운 보상으로 레아를 위로하고 라헬만 자기 아내로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② 또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하자 강한 투기로 남편을 원망하며 죽겠다 하였고(창30:1~8), 자기의 여종을 첩으로 주어 자녀를 생산하게 하였으며 이로써 아들을 갖게 되었을 때 “내가 억울함을 풀었다”, “내가 형과 경쟁하여 이겼다”는 말로 투기를 나타내었습니다.
③ 남편 야곱을 자기가 독점하므로 언니의 장막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결국은 언니가 합환채를 주고 남편을 하루저녁 양보 받아 동침하게 한 것도 윤리의식에서 볼 때 비판의 여지가 많다는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④ 또 나중에 집을 떠날 때는 아버지의 우상인 “드라빔”을 도적한 일까지 있으므로 그 욕심과 투기를 끝내 버리지 못하다가(창31:19) 좋은 날을 맞지 못한 채 “베냐민”을 낳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창35:19).
결론적으로 여기에서 잘못된 윤리는 모두가 욕심을 버리지 못한 상태와 사랑이 무르익지 못한 상태에서 빚어진 갈등임을 생각할 때 우리 성도는 이기적인 욕심에서 떠나 사랑을 실천하는 단계에 들어가야만 성도로서의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61 과 야곱이 귀향길에 오름 (창 31:1~20)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서 20년 만에(38절) 귀향길에 오르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1~3절은 “귀향의 동기”에 관한 말씀이요, ② 4절~13절은 “야곱이 두 아내에게 귀향에 관하여 의논함”이요, ③ 14~20절은 “두 아내의 적극적 동의로 귀향에 오르는 내용”입니다.
1. 귀향 동기에 관하여(1절~3절)
귀향의 첫째 동기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다음 동기는 야곱이 집 떠날 때의 소망대로 고향에 와서 서원을 이행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오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요(28:21), 셋째는 라반과 그 아들들이 야곱의 계속 거주를 원치 않은 것입니다.
1) 본문 1절에 보시면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빼앗아 거부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결코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가 외삼촌의 양을 치다가 맹수에 물려 찢겼거나 도적맞은 것은 자기의 것으로 변상하면서까지 손해를 끼치지 않았고(31:39) 약속한대로 합당하게 자기 몫만을 가졌지만 소유가 줄어든(9절)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라반의 아들들은 “빼앗아 갔다”고 분노하였으니 참으로 바르지 못한 사고방식이었습니다.
2) 그들은 또 말하기를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거부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신앙적인 견지로 볼 때는 잘못된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셔서 야곱의 몫이 많아지도록 생산되게 한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는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니까 “아버지의 소유로 거부가 되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 여기에 따라 라반도 야곱에 대하여 “그 안색이 전과 같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① 재물의 격차로 인한 투기였습니다. 상대방이 정당하게 노력하여 재물을 얻은 일에 대하여 투기하여서는 안 됩니다. 또 자신이 가난하다고 하여 이유 없이 가진 자를 미워하여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재물도 하나님의 분복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잠8:21) 누가 부자가 되었든지 감사할 줄 알고 자신이 가난하면 가난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서 가난을 통한 유익을 얻을 줄 알아야 하며, 또 노력하여도 원하는 만큼 재물이 얻어지지 않을 때는 재물보다 더 귀한 건강, 지혜, 신령한 은혜 등을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그런 은혜를 계속 추구하셔야 합니다.
② “라반의 안색이 변하였다”는 것은 야곱에 대한 사랑이 떠난 표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떠나면 그 모습도 사랑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다는 것을 깨달아 주의하시기 바라며 성도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안색이 변하지 않도록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의 자세 취하는 연습을 잘 하셔야 합니다.
4) 야곱이 20년 동안 얼마나 집에 가고 싶었겠습니까? “형의 분노가 풀리면 사람을 보내어 오게 하겠다(27:45)”고 한 어머니의 소식은 20년 동안 연락이 없었습니다. 이때에 야곱은 20년을 인내하며 노력하여 금의환향할 것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 “네 조상의 땅(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 족속”이란 아브라함과 이삭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 거할 때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2. 야곱은 들에서 두 아내와 귀향에 관한 의논을 하였습니다(4~13).
1)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이 예전처럼 사랑스럽지 않다. 과거에 그대들의 아버지는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다(7절).
2) 그러나 나는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고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셔 주셨다(5, 6절).
3)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므로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해하지 못하게 하셨고(7절) 내 몫에 오는 양떼를 많이 생산되게 하셨다(8절). 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사실을 꿈의 계시를 통하여 보여 주시기까지 하셨다(10~12절). 나는 그대들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으려 한 일이 없었으나, 하나님이 그 재산을 빼앗아 내게 주신 것이라(8절).
4) 또 하나님은 “외삼촌이 내게 행한 모든 것을 보았다”하셨고, “벧엘에서 기름을 붓고 서원한 것을 이행하기 위하여 지금 일어나 출생지로 돌아가라”(12~13절) 하셨으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모든 상황을 감찰하시는 분이시고 야곱을 복되게 하시며 또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서원도 지키게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일어나… 돌아가라”는 계시에 의지하여 귀향할 것을 제의한 것입니다.
3. 이때에 두 아내는 적극 동의하였습니다(14~20절).
1) 두 아내의 말이 “우리는 딸로서 아버지의 분깃 받을 가능성이 없다(14절). 아버지는 우리를 팔아서 남편 야곱을 고용하고 노예처럼 부리므로 14년의 인건비 금액을 다 먹었으니 우리를 외인으로 여긴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재산을 더 준다는 것은 바랄 수 없으니 하나님이 취하게 해 주신 재물만 우리 것인 줄 알고 그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돌아가자”고 일치한 뜻을 보여 주므로(14~16절).
2) 야곱은 아내와 자식들을 약대에 태우고 라반이 양털을 깎으려고 자기의 목장으로 간 사이에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취하고 모든 소유물을 이끌고 그대로 뗘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를 집고 넘어갈 것이 있으니, 하나는 20년만에 떠나는 야곱이 외삼촌 몰래 도망한 것이 잘한 일이냐 하는 점이요. 또 하나는 왜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적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① 야곱이 도망한 이유는 하나님이 “지금 일어나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13절에서 독촉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야곱이 사람의 생각대로 외삼촌의 허락을 받고 인사를 차리고 떠나게 된다면 외삼촌이 또 다른 구실로 붙잡든지 재산을 삭감시킬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도망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하나님이 그 문제의 어려움을 아시고 “지금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시므로 야곱에게 행동할 기회와 방법을 명하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한 것이요,
②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적한 것은 그의 잘못된 신앙과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애굽이나 유대 사회에서 드라빔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드라빔”은 동물모양으로 만든 작은 우상입니다. 쥐 모양의 우상, 송아지 모양의 우상, 개구리 모양의 우상, 물고기 모양의 우상, 돼지 모양의 우상 등…, 그런 것들을 집에 놓고 수호신처럼 믿은 것입니다. 또 그 드라빔을 보석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으니까 재산이 되기도 하며, 또 그 드라빔 소유자가 그 집의 가문의 전통을 잇는 자라는 특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라헬이 나올 때 그것을 도적질한 것입니다. 신앙으로 볼 때는 우상숭배와 자연숭배에 해당하지만 재물의 가치를 더욱 인정하였을 것입니다. 신앙이 약하거나 깨닫지 못하면 그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아야 할 것은,
1.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시니 역경 속에서도 성공할 수 있음과
2. 합당치 않게 행하는 라반은 욕심을 부려도 발전하지 못한 점과
3. 성도는 각박한 곳에서 괴롭게 살려고 할 필요가 없고 자유세계를 지향하여야 할 것과
4.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되, 라헬처럼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제 62 과 추적과 화해 (창 31:21~43)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의 총 제목은 “라반의 추적과 화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① 22~30절까지는 “라반이 도망한 야곱을 추적하여 책망하는 내용”이고, ② 31~32절은 “책망받은 야곱의 대답”이며, ③ 33~35절은 “야곱이 도둑맞은 드라빔을 찾지 못하는 내용”이요, ④ 43절은 “라반이 야곱의 떠남을 허락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 속에서 인간 심리의 어두운 부분들과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라반이 도망한 야곱을 추적하여 책망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22~30절).
1) 22절에서 야곱은 그의 외삼촌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멀리 간 사이에 강을 건너 도망하였는데(19절), 이 소식이 3일 만에 알려지자 라반은 그 형제들을 대동하여 불같이 추적하므로 7일 만에 길르앗산까지 따라 미치게 된 것입니다.
① 도망한지 3일 만에 알았고 야곱이 3일 길을 더 갔을 때에 좇아와서 만났은 즉 라반은 갑절의 빠른 속도로 따라온 것입니다.
② 또 도망할 때 강을 건넌 것은 하란 땅 남방에 유프라데스강의 상류가 흐르기 때문에 그 강을 건넌 것이고 길르앗산에서 만난 것은 길르앗 산맥이 갈릴리 동편 전역을 남북으로 뻗었기 때문에 그 산맥의 한 지점에서 만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라반이 추적할 때 그 형제들과 함께 하였다 하였는데 그 형제들이란 라반의 형제와 그 아들들의 형제를 의미할 것입니다. 여기에 그 아들의 형제가 포함되는 이유는 32절에서 야곱이 그들을 향하여 우리 형제들이란 용어를 쓴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2) 이렇게 라반이 야곱을 따라 만나게 되던 날 밤에 하나님이 그에게 현몽으로 말씀 주시기를 “너는 선악 간에 야곱에게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주셨습니다.
① 선악 간에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지만 하나님이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하시면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요.
② 라반은 이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라반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감을 두텁게 갖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드라빔을 의지한 사실과 또 자기에게 계시를 주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고 꼭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29절) 말한 사실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3) 그래서 야곱을 만나자 자신이 야곱을 해할 능력이 있었지만(29절) 감히 해롭게는 못하고 책망만 하였는데 그 책망한 내용을 살펴보면,
① “왜 내게 알리지 않고 내 딸들을 칼로 잡은 자처럼(강도짓 하여 납치해 가는 것처럼) 가만히 떠났느냐?”고 하였는데 여기에 대한 야곱의 대답은 31절에서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억지로 빼앗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의심받을 만한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란
㉠ 라반이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한 점과,
㉡ 또 43절에서도 “내 자식, 내 양떼…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는 이기적인 표현을 한 점과,
㉢ 심지어는 “야곱을 해할 능력도 있다”고 말한 것을 보아서(29절) 외삼촌의 입장으로는 모든 것을 빼앗고 안 돌려줄 수도 있음이 사실이므로 야곱이 그렇게 의심한 것입니다. 또 라반 자신은 그들을 돌려보낼 때 “잔치하고 입 맞추며 보내줄 수 있을 것이라” 하였지만 평소에 성실한 조카의 인건비를 가로챈 상태에서 잔치를 해 준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따라서 라반이 야곱의 떠남을 인정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계시를 두려워한 때문이었습니다. 라반 자기의 신은 “드라빔”이었고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섬기는 신인데 그 신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복종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② 두 번째 책망은 왜 나의 신(드라빔)을 도적질해 갔느냐?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하여 지닌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없어졌으면 우리 세간을 다 뒤져보시오, 만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나오면 그는 살지 못할 것입니다. 고의로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벌을 주어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을 음미해 볼 때 야곱은 남의 것을 무법하게 취하지 않는다는 정신과 남의 것을 함부로 취하는 죄는 죽어 마땅한 큰 죄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 말이 예언이 되어서 결국 그것을 도적한 라헬이 장수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반이 드라빔을 찾을 때 여기저기서 찾아본 후 라헬의 장막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라반이 라헬의 장막을 뒤질 때 라헬은 그것을 약대 안장에 숨기고 “경수가 있어서 일어나 영접을 못 한다”고 이유를 들어 드라빔을 숨기는데 성공하였습니다.
4) 이렇게 되자 야곱은 자기의 정당성을 힘 있게 역설하였습니다(36~42절). 사람은 매사에 정당하고 보아야 합니다. 약점이 있으면 큰 소리를 칠 수 없습니다. 만일 야곱이 드라빔 도적으로 나타났다면 귀향이 취소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허물이 숨겨졌습니다.
① 야곱이 오히려 노한 태도로 외삼촌께 책망하기를 “내가 무슨 허물과 죄가 있기에 나를 불같이 급히 쫓습니까? 내게 와서 외삼촌의 것을 발견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제는 그것을 두고 우리 형제(야곱의 사촌)들과 외삼촌의 형제들 앞에서 판단하자”고 하였습니다.
② 여기에 “그것을 두고”란 말은 “서로의 것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에도 야곱은 “20년 동안의 봉사생활을 하는 중에 외삼촌의 암양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한 일이 없었고, 또 수양 한 마리도 잡아먹은 일이 없었으며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만 하였으나 외삼촌은 그 사이에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에 아무도 항의를 하지 않으므로 그 사실을 인정하였고,
③ 다만 자신이 재물을 취하게 된 것은 자신과 조상의 하나님이 자기의 수고를 근거로 도와 주셨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은 “나의 고난과 수고를 감찰하셔서 나를 해하지 말도록 외삼촌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5) 결국 라반은 야곱을 보내는 승낙을 하면서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부당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말임) 내가 오늘날 어찌하겠느냐?” 하고 그대로 헤어질 뜻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43절). 여기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위하여 세 가지로 역사하셨습니다.
① 고난과 수고를 감찰하심이요.
② 재물을 취하도록 친히 도와주심이요.
③ 야곱을 해하지 못하도록 방비해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1) 라반의 이기심과 외식을 삼가야 하겠습니다.
2) 야곱의 결백과 근면과 고난의 극복을 본 받으셔야 하겠고,
3) 하나님이 여러 방면으로 야곱을 도와주시는 섭리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제 63 과 증거의 무더기 (창 31:44~55) 목록으로
지금 읽은 말씀은 “증거의 무더기” 또는 “라반과 야곱의 헤어짐”이란 두 제목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내용의 역사적 배경은 야곱이 20년간 외삼촌 집의 생활을 청산하고 말없이 귀향길에 오른 후 10일 동안을 남하하여 길르앗산의 한 장소에 머물렀을 때에 라반은 그가 떠난 지 삼일 후에 그 사실을 알고 그 형제들과 함께 7일 동안을 따라 내려와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 다시 말하면 쟁론을 다 끝냈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도록 분을 풀고 화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헤어지는 입장에서 그들이 화평 중의 이별을 기념하고 또 “서로의 약조를 잘 이행한다”는 증표로 돌기둥을 세우고 돌무더기를 쌓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제목을 “증거의 무더기”라 할 수도 있고, 또 라반과 야곱이 화평 중에 헤어지는 장면을 말씀한 것이기 때문에 “라반과 야곱의 헤어짐”이란 제목을 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내용 따라 분석하면, ① 44~49절은 ‘증거의 무더기를 쌓는 내용’이요, ② 50~53절은 ‘약조하는 내용’이며, ③ 54~55절은 ‘헤어지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증거의 무더기를 쌓는 내용에서
1) 언약의 내용을 말하고 증거의 무더기를 세우는 것까지 전부를 라반이 주동하였습니다. 라반이 외삼촌이요 장인이니까 주동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는 7일 동안 쫓아올 때 분을 발하려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헤어지는 일에 적극성을 띤 것은 그의 심정이 크게 변화되어 야곱의 입장을 도운 것인데 이런 일이 다 하나님의 권고로 이루어졌음을 아셔야 합니다.
2) 라반이 스스로 언약을 세우고(50절) 그 언약을 실천하자는 의미로 “망대를 쌓자”고 제의하자 야곱도 이에 동의하여 망대 기둥을 세우고 라반의 형제들이 그 기둥에 돌을 쌓아서 돌로 무더기를 만드니 이것이 곧 증거의 무더기란 하나의 망대가 된 것입니다. 라반은 아람 방언을 하는 사람인고로 ‘증거의 무더기’란 말을 “여갈사하두다”라 하였고, 야곱은 본래 히브리말을 하다가 다시 히브리말을 하는 세계로 돌아오는 사람인고로 증거의 무더기란 말을 히브리말로 “갈르엣”이라고 하였는데 또 야곱은 그 돌무더기가 하나의 망대처럼 쌓아진 것이기 때문에 미스바(망대란 뜻)라고도 하였습니다.
3) 본문 49절에서 망대를 뜻하여 “미스바”라 이름을 짓고 “우리가 피차 떠나 있을 때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감찰하옵소서”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책에 보면 감찰이란 말이 ‘미스베’인데 야곱이 발음을 잘못하여 ‘미스베’를 ‘미스바’라고 하였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어구사전에서 감찰이란 용어가 ‘미스베’인 것을 찾을 수 없으므로 ‘미스바’는 망대로 해석하고 야곱이 그 망대를 생각할 때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위하여 그런 말을 하였다고 해석함이 좋을 것입니다.
4) 이 ‘미스바’가 망대의 이름과 함께 지명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에 미스바란 곳이 다섯 곳이 있으므로(수11:1~9; 15:38; 18:26; 삼상7:5~16; 22:3) 다른 미스바와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2. 기념 망대를 세우게 된 언약의 내용입니다(50~53절).
1) 이 내용도 전부 라반이 일방적으로 말하였고 야곱은 53절 끝에서 그 내용에 따라 조상의 하나님 앞에 맹세만 하였는데,
2) 그 언약과 맹세의 내용은,
① 네가 내 딸들을 박대하지 말아라
②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를 취하면 사람은 함께 할 자가 없어도(사람은 그 사실들을 지적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너와 나 사이에 언약위반을 증거하실 것이요,
③ 이 증거의 무더기와 기둥이 바로 그 일의 증거가 될 것이라, 그리고 “나는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너를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너도 이 무더기를 넘어 내게로 와서 나를 해하지 말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④ 라반은 야곱이 조상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53절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소서”하였는데 이 말은 라반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후손이 섬기는 신으로만 알고 두려워할 줄은 알았으나 결코 자기의 하나님으로는 영접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을 남의 하나님처럼 섬기지 말고 반드시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섬기며 의지하여야 합니다.
3. 헤어지는 내용입니다(54~55절)
1) 야곱은 이렇게 맹세를 하고 망대를 쌓은 다음에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라반의 형제들을 불러 같이 떡을 먹고 친목하며 경야하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라반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 맞추고 축복하고 떠나갔다고 하였습니다.
2) 라반이 축복하였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입장에서의 축복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 나름대로 어떤 신을 의지하여 행하는 축복이므로 그 축복의 효력이 있을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증거의 무더기를 세운 뜻은
① 라반과 야곱의 쟁론이 끝나고
② 화해가 성립되었으며
③ 서로 해하지 않는다는 조약과 함께
④ 은혜롭게 헤어지게 되었음을 입증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화해와 화평을 도모하도록 은혜 주시기를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27. 야곱에게 배울점 (창 31:38~42) 목록으로
야곱은 믿음으로 성공한 믿음의 선진으로 일곱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야곱은 창28:15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약속을 받았으니, 이 약속은 바로 우리들에게 주신 성경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고하게 믿어야 합니다. 야곱이 받은 계시에는
1) 자신이 보호 인도 받을 약속과,
2) 그의 후손이 번성할 것과,
3)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에 대한 약속이었는데(창17:8; 28:15; 48:4) 이 약속을 끝까지 믿고 요셉에게와(창28:15) 다른 자손들에게까지 유언을 하였으니(창49:29) 이것이 곧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신앙입니다. 저희들도 성경말씀을 꼭 그렇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야곱은 대단히 근실하였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도 눈 붙일 겨를 없이 일하였고(창31:40),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큼 수고하였다(창31:42)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으로 하여금 땀 흘리며 살게 하셨고(창3:19) 또 “네가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시128:2) 하시므로 수고를 인간의 천직으로 명하셨습니다. 일하기를 싫어하거나 노는 여유를 가지면서도 평안한 마음을 갖는 사람은 꼭 야곱의 근실함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3. 야곱은 물질생활에 결백하였습니다. 그는 집을 떠날 때 지팡이만 갖고 떠났으며(창32:10) 외삼촌의 재산에 피해를 준 일이 없었고(38,39절), 혹 피해되었을 때에는 자기의 것으로 보충해 주면서 물질거래의 결백성을 보였으며 외삼촌이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므로 당하는 손해도 감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물질생활의 결백은 모든 진실성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4. 하나님의 복 주심을 크게 사모하였습니다. 형보다 먼저 복 받기 위하여 힘쓴 일과(창27:19) 나중에 환도뼈가 위골되면서도 복을 간구한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창32:26).
5. 인내의 사람이었습니다. 외삼촌의 집에서 아내의 값으로 14년을 봉사하고 고향을 떠난 상태에서 20년을 견딘 것은 인내가 아닐 수 없고 또 품값을 열 번 변역당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으면서 견딘 것입니다. 성도의 인내는 성령님의 열매이며 연단과 희망을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갈5:22; 롬5:34).
6. 봉사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이십 년을 봉사하였다(창31:41) 하였고, 또 이십 년 동안 모은 재산의 상당 부분을 에서에게 선물로 전달하였으니(창32:13~15; 33:8~11) 이는 분명히 봉사심이 강한 때문이었습니다.
7. 화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창33:3~4). 외삼촌과도 화해를 하였고, 또 20년 만에 만난 형 에서와도 화해를 하지 않았습니까? 저희들도 야곱의 좋은 점을 본받아서 계시를 믿는 신앙, 근면, 물질적 결백, 인내, 봉사생활 그리고 화해를 도모하는 생활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제 64 과 야곱이 형 만나기를 시도함 (창 32:1~20) 목록으로
위의 본문 말씀을 종합하면 야곱이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형 에서를 만나 용서를 받고 화해하기를 시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구분해 보면, ① 1~2절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하나님의 군대)를 만나는 내용이고, ② 3~6절은 야곱이 에서의 동태를 보고 받는 내용이요, ③ 7~20절은 형을 무사히 상봉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야곱이 자기의 길을 진행하는 중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습니다(1,2절).
1) 야곱의 진행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①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창28:15의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는 의미가 있고,
② 또 한 가지는 20년간 형과 화해를 못한 상태에서 형과의 화해상봉을 시도하는 일이었습니다.
2) 이 두 가지는 야곱에게 있어서 아주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예언을 성취시키며,
② 형제간의 불화를 화해로 시도하는 것인 만큼 신앙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 이런 일을 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군대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일4:13에서도 “사랑하는 자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시고 그도 성령 안에 거하는 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뜻을 순종하는 자와 사랑을 실천하는 자편에 군사로 함께 하여 주심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야곱이 에서의 거동을 보고 받는 내용입니다(3~6절).
1) 야곱은 먼저 세일 땅 “에돔”들에 거하는 에서에게 미리 사람을 보내어 자기의 오는 소식을 알리려 하였습니다.
① 세일 땅 에돔들은 요단강 상부 동편 지역으로 에서가 임시로 거주하였던 곳입니다(창33:14, 16).
② 야곱은 그곳에 사는 에서에게 먼저 종들을 보내어 “자신이 20년 동안 외삼촌의 집에서 살았고 현재 짐승들과 노비가 많으며 내 주께(에서를 존칭한 말) 은혜 받기를 원한다”고 말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형을 ‘주’라고 존칭한 것은 야곱이 자신을 종처럼 겸손히 낮추고 형님을 주인처럼 존경하여 사랑 받기를 바라는 뜻이었습니다. 화해를 비는 자의 자세로는 최대의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그런데 야곱의 종이 에서를 만나 ‘그 말을 전하였다’는 말씀은 없고, ‘종들이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벌써 400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고 있다’는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냥꾼의 근성을 가진 에서는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already란 말이 있습니다. 즉 “벌써 오고 있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종들이 말을 전하기 위하여 에서가 거주하는 지경에 갔을 때 에서는 벌써(야곱이 오는 사실을 알고) 야곱을 만나기 위하여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다는 것이니 이는 야곱의 종들이 에서를 만나 소식을 전달하지 못한 채 되돌아와서 보고를 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400인을 거느리고 마주 나오는 에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3.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이 어떻게 대책을 세웠습니까(7~20절).
1) 우선 야곱은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자기를 해치기 위하여 출동한 것으로 믿고 두렵게 생각하고 또 답답하게 여긴 것입니다. 화해는 속히 할수록 좋은 것인데 20년이나 끌었으니 만나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2) 그래서 야곱은 종들과 짐승의 떼를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① 종들을 나눈 것은 짐승 관리상 나눈 것이고,
② 짐승을 두 떼로 나눈 것은 만일 에서가 한 떼를 해할 때 한 떼를 방패로 삼으면서 남은 떼를 도망시켜서라도 일부재산을 보존할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③ 이렇게 위험하고 피해를 예상하면서까지 그곳에 와서 화해를 해야만 하는가 할 때 신앙인은 재산을 보존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3) 야곱은 조상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① “조상의 하나님, 하나님이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하셨고 또 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이루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도 받았으며, 또 지팡이 하나만 갖고 요단을 건넌 후 재물의 복도 두 떼나 받았습니다. 간구하옵나니 내 형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 주십시오. 그가 와서 내 처자들을 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야곱은 괴롭고 두려울 때 기도하였고, 그 기도의 내용은 감사와 간구였습니다. 모든 은총과 진리와 재물의 복을 주신 것을 감사한 후 형의 위협에서 가족을 구원해 주실 것을 기도한 것입니다.
②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12절).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모래 같이 많게 할 것이라”는 응답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보호약속을 받았을 때 든든한 마음과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③ 야곱은 거기서 기도의 밤으로 경야한 후에 형에게 보낼 선물을 택하였습니다. 암염소 200, 수염소 20, 암양 200, 수양 20, 약대 30과 그 새끼들, 암소 40, 황소 10, 암나귀와 그 새끼들까지 30을 택하여 세 떼로 나누어 종들에게 맡겨 자기의 짐승들과 상거가 뜨게 한 상태로 먼저 형에게 보내면서 종들에게 부탁하기를 형이 그 짐승 떼에 대하여 물으면 야곱이 자기의 주(형)에게 보내는 예물이며 야곱도 뒤에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게 한 것입니다.
④ 야곱이 이렇게 선물을 먼저 보낸 이유는 형이 감정을 풀고 자기를 화평 중에서 만나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선물은 야곱의 계획적 특성(32:7-8,20; 33:1-3)으로 볼 때 뇌물의 성격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뇌물은 부정한 일을 청탁하는 것이 아니고 화해를 목적으로 하는 사랑실천의 방법이므로 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피면 야곱과 에서 사이에 된 일들에서 일깨워 주시는 교훈이 있으니,
① 야곱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행할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군대들)이 그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해 주신 점(마18:10),
② 야곱이 고향으로 가는 것과 형과 화해해야 하는 것을 자기 생애의 큰 과제로 삼고 재물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귀하게 여긴 점.
③ 야곱이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 감사와 간구로 기도하는 점.
④ 야곱이 기도의 응답을 받았지만 자기가 해야 할 노력을 다하여 형에게 선물을 보내므로 화해를 청원한 점.
⑤ 용서를 비는 동생이 형 앞에서 자신을 종의 위치로 낮추어 겸손하고 형에게 주인이란 호칭을 쓴 점 등은 사랑을 성취하고 화목하는 직책을 가진 성도로서(고후5:18) 귀한 모범을 보여준 것입니다.
제 65 과 하나님 앞에서의 승리 (창 32:21~32)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짧은 내용이지만 중요한 제목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 중요한 제목이란 얍복 나루에서 된 일(22절), 야곱의 씨름(24절), 환도뼈가 위골됨(25절), 야곱이 축복을 사모함(26절), “이스라엘”로 개명됨, 하나님과 더불어 이김(27절), 또는 브니엘(31절) 등으로 제목을 정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승리”란 제목이 가장 교훈의 의미를 크게 나타낸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분류해 보면, ① 21~26절까지는 ‘씨름의 격투’장면이요, ② 27~32절까지는 ‘씨름의 결과’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또 우리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야곱의 씨름격투에 대하여(21~26절).
1) 이 씨름은 야곱이 혼자 남아있는 상태에서 밤에 이루어졌습니다. 형에게 보낼 예물을 앞서 보내고 그날 밤 날이 어둡자 두 아내, 두 여종, 열 한 아들로 먼저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신만 혼자 남았었습니다.
① 형에게 보낼 예물과 자기 가족을 거리상으로 떼어놓은 것은 400인을 거느리고 오는 에서가 혹 폭력으로 나올 경우에 피할 방책을 세우기 위함 같고,
② 밤중에 강을 건너는 것은 가능한 한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며,
③ 자신이 혼자 남은 것은 기도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혼자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창28:20).
2) 그런데 성경은 혼자 남은 야곱이 “기도하였다”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만나 날이 새기까지 씨름하였다”고 하였으니,
① 이 어떤 사람이 누구였느냐 할 때 그는 천사로 나타난 하나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 하나님이 천사로 나타났을 때 씨름으로는 야곱을 이기지 못할 만한 체력자요, 대신 환도뼈를 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으로 나타났으니 쉽게 천사로 구별하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고,
③ 그 천사가 하나님이란 증거는 29절에서 “네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하고 축복한 사실과 또 30절에서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한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④ 그러면 천사로 나타난 하나님이 왜 야곱과 씨름을 하였느냐 할 때 야곱은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을 느끼던 차(32:6~11) 어두움 중에 사람이 나타났으므로 이 사람을 경계하기 위하여 씨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⑤ 씨름은 육신적 대항을 뜻합니다. 또 육신적 대항은 곧 인간적 폭력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이 폭력적 대항이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 “씨름”의 의미를 ‘기도’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씨름을 영적 기도로만 해석한다면 환도뼈를 쳐서 위골된 내용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도뼈가 위골되어 야곱이 씨름을 포기하기까지는 육체적 폭력대항을 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나타난 사람을 천사인줄 모르고 물리치려 하다가 씨름에 이른 것인데 나중에 이길 대상이 못됨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고 그때부터 기도로 축복 받기를 간청하게 된 것입니다(호12:4). 여기에서 두 사람의 육체적 대항을 씨름으로 표현한 것은 두 사람이 꼭 같이 죽일 의사로 싸운 것이 아님을 나타낸 것입니다.
⑥ 오늘날도 어떤 대상이 성도에게 육체적 또는 현실적 방법으로 대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 현실적으로 해롭게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야곱처럼 꼭 같은 방법으로 대항하면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도가 폭력이나 현실 또는 육체의 힘으로 싸운다면 결국 이기지도 못하고 자기의 환도뼈만 상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원수 갚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어있고(롬12:19; 시32:35), 또 폭력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마5:29) 야곱은 그것을 망각하고 대항해 본 것입니다. 만일 성도나 야곱이 어떤 위험한 대상에 대하여 폭력이나 현실적 대항을 한다면 “마하나임”같은 하나님의 군대가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⑦ 야곱이 처음에는 사람으로 알았고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이길 듯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도뼈가 위골되면서 포기를 하고, 밤새도록 싸운 대상이 “하나님의 사자”란 사실을 알았을 때 그에게 회개하면서 축복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환도뼈가 부러지기 전까지는 육체적 대항이었고 그 후부터는 기도로 축복을 간구한 것입니다(호12:3~4).
2. 이 씨름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27~32절)
1) 계속되던 씨름이 환도뼈 위골된 이후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은 씨름할 형편도 못되었고 또 그 씨름한 대상이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았을 때부터 그 사람을 붙잡고 놓지 않으면서 “내게 축복하셔야만 놓아준다”고 하면서 매달린 것입니다.
2) 축복은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갈망하는 마음을 늦추지 않고 끝까지 간구하며 매달려야 하는 것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3) 결국 간청하는 기도를 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의 간구에 승복을 당하여 “네가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하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 전에는 육체를 의지하는 사람이요 현실적으로 사는 건강한 사람이었으나, 이스라엘이 된 다음에는 기도로 축복을 구하는 사람, 다리 저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처럼 저희들도 현실적인 사람에서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이 이겼다는 뜻은 하나님이 야곱의 간청을 수락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기도가 간절하면 이렇게 하나님이 수락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4) 야곱은 축복을 허락 받았을 때 이름을 확인하고 받으려 하였습니다. 아무한테나 “무엇”을 받으면 안 됩니다. ‘계시다’,?기적이다’하여 마귀에게 받는 일이 허다하니까요. 그래서 야곱은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이름을 고하라”고 하였더니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의심하지 말아라 하신 뜻임)하시고 축복하셨다고 하였습니다.
5) 그래서 야곱은,
① 그 장소를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하였으나 생명이 보존된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 이름하고, 해 돋을 무렵에 다리를 절면서 자기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② 그 후에 그 자손들은 야곱의 환도뼈의 위골을 생각하며 모든 짐승의 고기를 먹을 때 환도뼈의 힘줄을 먹지 않았다고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받아야 할 교훈은,
1. 야곱이 노력을 다하고 다음에 기도한 점과.
2. 하나님은 기도자를 시험하시되 그의 현실성과 폭력성 여부를 시험하시고 야곱을 깨우쳐 육체와 현실과 폭력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환도뼈를 치신 다음에 축복하셨다는 점과,
3.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된 다음 자신의 육체적 폭력적 과오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끈질기게 간청하여 응답을 받은 사실과,
4. 자신에게 축복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후에 축복을 받은 점과,
5.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하는 과정에서 육신적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된 점을 생각하셔서 저희들도 야곱처럼 큰 변화를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고전3:1~3).
설교보충 28. 야곱의 환도뼈를 치심 (창 32:22~32) 목록으로
1. 야곱에게는 좋은 면도 많았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잘못도 없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널 때 어떤 사람과 씨름하다가 환도뼈의 부상을 입고 그것이 위골되어 절었다(25,31절)고 하였으니 이때에 환도뼈를 치신 분은 하나님이요(30절, 브니엘),?하나님이 치셨다’는 뜻은 징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징계 받을 만한 잘못이 있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야곱의 생애를 둘로 구분하면 환도뼈 위골(얍복강을 건넌 때를 말함)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고, 또 이것을 네 때로 구분하면,
1) 자기 집에서 살던 시기,
2) 밧단아람에서 살던 시기,
3) 가나안에서 살던 시기,
4) 애굽에서 살던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연령별로 구분하면, 1~40세, 40~60세, 60~130세, 130~147세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환도뼈가 위골되기 전의 생애에서 많은 문제가 나타났고 그 이후에는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즉 야곱으로 있을 때와 이스라엘로 이름이 개칭되었을 때에(창32:28) 큰 차이를 나타낸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야곱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요?
1) 욕심이 많았습니다. 에서보다 자기가 더 잘되기를 바라는 욕심이었으므로 이것은 형제우애의 역행이요, 나아가서는 시기하는 죄까지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축복을 앞당긴 것은 바로 이 욕심과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욕심과 시기는 죄악이요 결코 행복을 가져오는 방법이 아닌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거짓을 자행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유혹을 받아 거짓을 꾸미는데 용감하였고 결국은 아버지가 형에게 주려던 축복을 가로챘으니, 이것은 마치 아버지의 인감도장을 위조하여 재산을 가로채는 죄보다 경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어머니와 공모하여 복을 가로채는 죄를 범한 것이요.
3) 꾀가 많은 사람, 즉 계책의 인물이었습니다(호11:6). 야곱이 꾀가 많았다는 것은 타산성이 강하였다는 뜻으로,
① 아내를 얻기 위하여 봉사하였고 그 기간을 연애하면서 즐겁게 보낸 점과(창29:18; 호12:12),
② 자신의 몫인 아롱진 양 새끼를 많이 생산하기 위하여 특별한 수단을 써서(껍질이 벗어진 얼룩진 신풍나무를 보면서 새끼를 배게 한 것; 창30:37~38) 생산의 유익을 도모하려 한 점입니다.
③ 창32:13에서 에서를 만나게 되었을 때 만일에 있을 에서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처자식을 분별하여 앞세우고 뒤세운 일이라든지,
④ 에서의 마음을 감동시켜 자신과의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상당분량의 짐승의 떼를 선물한 것(창32:13~15; 33:11)은 뇌물의 성격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사실에 대하여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양을 쳤다”(호12:12) 하였고, 또 “하나님이 그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실 것이라”(호12:2)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야곱은 그 소행에 따라 벌을 받은 것입니다. 성도는 계책의 인물이나 꾀 많은 사람이 되지 말고 차라리 순진하고 어수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야곱은 얍복강에서부터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책이 강한 야곱을 벌하시고(호12:2) 환도뼈를 치신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다리를 절게 되었고 매를 맞은 다음부터 변화되었다 할 수 있으니 호12:4에서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복 주시는 백성은 하나님의 권고를 받고 회개하게 됩니다.
5. 야곱이 복을 받은 이유는,
1) 선택적 축복이었고(창25:23; 롬9:13),
2)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에서의 망령된 행위도 야곱이 복 받는 동기가 된 것이며(히12:6),
3) 야곱의 간절한 기도요(창28:18; 32:26).
4) 그의 근면이며(창31:40~42),
5) 화해를 추구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야곱의 결점을 크게 경계하고 그의 변화된 모습의 생활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제 66 과 야곱과 에서의 상봉 (창 33:1~20)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본문은 야곱과 에서의 상봉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내용을 구분하면 5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1~3절은 상봉을 준비함이요, ② 4~6절은 상봉과 화해요, ③ 8~11절은 선물을 제공함이요, ④ 12~17절은 서로 헤어짐이요, ⑤ 18~20절은 야곱이 세겜에 정착하여 제단을 쌓는 내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야곱이 400인을 거느리고 오는 에서를 상봉함에 있어서 맨 앞에 여종들과 그 자식들을 앞세우고, 다음에 레아와 그 자식들을 세우고 맨 뒤에 라헬과 그 아들 요셉을 세우고 자기는 그 앞에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야곱이 이렇게 가족을 구별하여 단계적으로 세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① 아직도 형이 어떤 자세로 나올지를 모르니까 만일 폭력으로 나온다면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피하거나 피해를 적게 보도록 하기 위한 대책이었음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는 앞에 있는 자가 피해를 볼 때 뒤에 있는 자는 여유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② 여기서 야곱은 라헬과 요셉을 가장 사랑하였고 첩과 그 아들들은 덜 사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어떤 인격차별의식을 가지고 가족들을 차별대우하였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옛날에는 주인과 종, 적자와 서자의 차이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종을 아내로 삼고 서자를 배출한 책임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야곱은 결코 가족의 인권을 차별하여 대우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런 면의 윤리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인격차별은 거의 없지만 인격차별을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배운 자가 배우지 못한 자를 똑같이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직책상의 계급은 구별하여야 합니다.
③ 가장이 가족을 사랑함에 있어 그 가족의 선행 여부에 따라 사랑을 더 할 수도 있고 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는 주는 자가 어떻게 주든지 불평하여서는 안 될 것이요. 받는 자는 받는 것으로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야곱이 이렇게 가족을 배열한 후에 자신이 앞에 나가 에서에게 일곱 번 몸을 굽히고 가까이 나갔습니다.
① 가족들의 안전을 염려하면서 자신이 앞장선 것은 가장다운 태도요.
② 일곱 번 몸을 굽힌 것은 형의 용서를 구한 겸손한 태도입니다. “나는 형님에게 일곱 번 절하고 용서를 구하니 형님의 처분대로 하시오”하고 가까이 나간 것입니다. 때리면 맞을 각오도 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선한 용기입니다. 성도에게도 이런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죄를 돌이킬 때 또는 형제와 화해할 때 또는 의로운 새 출발을 할 때 야곱처럼 기도하고 일곱 번 절하고 적극성 있는 화해로 나서는 용기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인간이 노력할 수 있는 화해의 최대방법입니다.
2. 만남과 화해가 무사히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1) 에서가 달려와서 동생을 맞아 목을 맞대어 안고 입을 맞추니 반갑고 감격하여 울었습니다. 화해의 성취는 접근, 대화, 뉘우치는 눈물, 반가움으로 이루어집니다. 만남이 없고 대화가 없으며 또 사랑이 없으면 화해는 절대로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은 회개하고 화해를 성취한 자입니다.
2) 에서가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이들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라’하고 서 있는 순서대로 인사를 시켰습니다. 그 인사순서가 도의적으로 볼 때 거꾸로 된 것입니다. 본처와 장남부터 인사를 시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런 서열문제에 대하여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① 한 가족 중에도 서열이 있습니다. 하물며 사회생활에 그것이 없겠습니까? 선배, 스승, 연장자, 상사 또는 윗사람과의 관계 등에서 서열이 있는 법입니다. 옛날에 요셉은 형들의 서열을 지켜준 일이 있었습니다(창43:33). 서열의 순서를 지켜 처신할 줄 아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② 야곱은 자식들을 소개할 때 하나님이 종인 자기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라”하므로 자녀를 갖게 됨이 하나님의 선물의 복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도는 자식을 선물이 아닌 부담스러운 존재로 아시면 안 됩니다. 혹 자식들이 현재 복되게 행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복되게 살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기도하시고 또 당대에 좋은 일이 없어도 후시대에 좋은 때가 있을 것을 소망하면서(갈6:9; 벧전5:6)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③ 야곱은 은혜로 받은 가족들을 다 절하게 하였습니다.
3. 선물을 제공하는 내용입니다.
1) 에서는 이 모든 짐승 떼가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습니다. 야곱은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라”하였으니 이 말은 야곱이 형에게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받기를 원한다는 뜻이었습니다.
① 마5:26절에서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하신 것처럼 죄는 20년이 지났어도 회개하고 용서받은 증표가 없으면 언제라도 거리끼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간직하였던 가책을 용서받고 “용서받았다”는 증표로 선물을 받게 한 것입니다. 만일 용서받기 전에 선물을 먼저 주었다면 뇌물의 성격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화해를 끝내고, 선물을 주려한 것이니까 이 선물은 뇌물의 성격에서 “용서의 은혜를 베푼 일에 대한 감사의 표”가 된 것입니다.
② 그런데 “에서”는 퍽 대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동생이 20년 전에 자기를 속인 죄나 그것을 용서해야 한다는 문제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뜻을 표하지 않았으니 그는 동생의 과거지사에 대하여 이미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의 허물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좋은 용서의 방법입니다. 또 선물을 주려할 때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고 하며 사양하였습니다. 에서는 선민계열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도 물질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에서는 복을 못 받은 자라고 할까요? 어떤 복이든지 믿음 안에서 받는 복이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 안에서 받는 복은 그 분량이 적어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만 믿음 떠난 현실의 복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③ 야곱은 “내가 형님께 은혜를 받았으니(그 은혜의 보답으로) 이 예물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에서가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으므로 용서의 은혜가 무언중에 전달된 것입니다. 야곱은 “형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것을 보니 내가 하나님을 본 것처럼 기쁩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셔서 내 소유가 많으니 받아 주십시오”하고 강권한즉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에서는 불신자라도 대범한 사람이요, 동생의 잘못을 말없이 용서하였고 동생의 간청으로 선물을 받을 만큼 탐심도 없는 사람이요. 아량이 넓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이런 면에 “안 믿는 사람만도 못하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송구합니까? 이런 아량은 불신자들에게도 있습니다. 하물며 성도에게 그런 것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은혜로 죄 사함 받고 영생 얻은 성도는 더욱더 용서의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4. 서로 헤어지게 된 말씀입니다.
1) 에서는 야곱을 자기의 거처로 인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짐승의 떼를 무리하게 몰 수 없어서 천천히 뒤따라 갈 것을 사정하니까 에서는 또 야곱을 인도하기 위하여 “안내 할 종을 머물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헤어졌습니다. 사실상 야곱은 세일로 가야 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행선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자기의 고장인 사해 동편 세일로 가는 길이고 야곱은 요단강 서편 가나안땅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나안땅은 조상이 자기에게 준 땅이고 에서에게 준 땅이 아니니까 ‘나는 가나안 땅으로 가야합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말로 형과 헤어지게 된 것입니다. 믿는 성도는 신령한 은혜를 추구하기 위하여 세상적인 일을 적당한 말로 따돌리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후에 야곱은 “숙곳”에서 잠시 머물렀으니 이 숙곳은 출애굽 당시 애굽의 숙곳이 아니고 ‘요단강 동편 얍복강 하류지역’을 의미합니다. 거기서 얼마간 휴식을 취한 후에 요단 서편 세겜 땅에 왔습니다. 거기서 장막 친 밭을 산 다음 하나님 앞에 먼저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표시였습니다. 야곱은 무사히 도착하여 형과 화해한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도착하자마자 땅을 사서 제단을 쌓고 그 장소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아라고 하였습니다. 남의 땅에서 그대로 제사 드리는 것은 바른 정성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사는 창28:22에서 서원한 제사를 드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 서원한 곳은 벧엘이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1. 화해를 염원하는 야곱의 적극성 있는 자세를 배울 수 있고,
2. 에서는 비택자라도 아량이 넓었음을 알 수 있으며,
3. 야곱은 화평 중에 에서를 만난 것이 “하나님을 본 것 같다”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천국을 사는 성도의 세계임을 아셔야 할 것이요,
4. 야곱은 혈육의 인정보다 하나님이 주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을 변하지 않았고,
5. 땅을 사서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드린 생활을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 67 과 피해와 보복 (창 34:1~31) 목록으로
창세기 34장은 야곱이 세겜 땅에 거하던 중 이방인 본토족 추장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하고 이에 대한 자구책으로 청혼을 하였을 때에 야곱의 아들들이 이를 분하게 여겨 그들을 속이고 가혹하게 보복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피해와 보복”이란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① 1~12절까지는 “디나를 욕보이고 청혼하는 내용”이요, ② 13~29절까지는 “속이고 보복하는 내용”이요, ③ 30~31절은 “가혹한 보복 때문에 야곱이 근심하는 내용”입니다.
1. 본토족 추장 세겜이 디나를 강간하고 청혼한 사건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1~12절).
1) 야곱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세겜 땅에 장막을 치고 거주하였고(33:18) 그의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들을 만나 교제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그 땅의 추장 세겜(히위족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런 일을 “욕된 일”로 표현하였습니다.
2) 왜 이런 피해를 당하였을까요? 여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반성하는 입장에서 살필 때,
① 야곱이 세겜에 오래 거주한 것이 문제입니다. 야곱은 가나안땅에 들어오자마자 그곳을 떠날 때에 하나님께 서원하였던 장소에 가서 제단을 쌓고 서원을 이행하여야 하는데(창28:18~22) 그것을 적당히 연장하여 넘기려고 한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대한 서원이나 사명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요나가 순종하지 않다가 풍랑을 만난 일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타고 “벳세다로 가라”하셨는데 더디 가다가 풍랑을 만난 일처럼 불상사의 배경에는 꼭 불순종이 도사린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께 대한 책임 문제를 늘 반성해야 합니다.
② 디나가 함부로 이방족을 만나러 나간 것이 잘못입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처녀가 분별없이 외출하고 사람을 상대하면 안 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3) 세겜은 디나를 욕보이고 “그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청혼을 하였습니다. 세겜이 자기 아버지 하몰에게 부탁하여 부자가 야곱에게 와서 후한 조건으로 청혼을 하였습니다. 그 후한 조건이란
① 그들도 딸을 주고 통혼을 하겠다는 것이었고,
② 마음대로 그 땅에 거하며 기업을 얻게 하겠다는 것과,
③ 디나만 자기 아내로 주면 무엇이나 청구하는 대로 응하고 예물도 많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불상사를 야곱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세겜의 부자가 와서 청혼을 할 때 야곱의 아들들이 있는 장소에서 말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4) 그 후 야곱의 아들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① 야곱의 아들들이 흉계를 꾸며서 보복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보복한 방법은 본래 이방족과는 통혼을 안 하는 법이지만 “할례를 받으면 할 수 있다” 하여, 세겜이 자기의 족속 남자들에게 일제히 할례를 하게 한 후,
② 고통 할 무렵인 3일 후에 그들의 성을 침략하여 모든 남자들과 하몰과 세겜의 형제를 죽이고 모든 재물을 노략하고 자녀들과 아내들까지 사로잡아 오므로 그 강간사건을 구실로 한 족속을 거의 없애버린 것입니다.
5) 이런 가혹한 보복행위를 어떻게 여겨야 할 것입니까?
① 원수 갚음에 대한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였으며,
② “할례”라는 거룩한 예식을 원수 갚는 거짓 술책에 이용하였고,
③ 가혹한 보복을 자행한 것입니다.
성도는 불신자에 대하여 빛의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죄가 비록 크고 자신에게 피해가 있다 하여도 분한 마음을 갖기 전에 이성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의 마음이었습니다. 본문 5절에서 야곱은 그 사실을 아들들에게 알리는 것까지 자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가만히 끊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였을 때에도 의로운 요셉은 가만히 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이 양치는 데서 돌아오자 세겜의 부자가 그들 앞에 와서 청혼을 하므로 사실을 들어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비밀을 보장하면서 처리해야 할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불상사는 믿음 없는 아들들에게 알려진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6) 그래서 그 아들들이 큰 보복을 감행한 일에 대하여 야곱이 어떻게 하였습니까?(30~31절)
① 야곱은 이 일을 주동한 둘째, 셋째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를 책망하였고,
② 그 보복이 오히려 “야곱 자신에게 화를 끼쳐 본토족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하였고(냄새를 내게 함),
③ 나는 수가 적으므로 “보복 당할 우려가 있다”고 근심하였습니다. 이때에 그 아들들은 자기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보복처럼 여겼다고 한 것입니다.
7)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합니까?
① 자기의 손해는 대부분 자기의 부주의로 온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속히 벧엘로 가고 “디나”가 함부로 외출을 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② 디나의 피해에 대하여는 이 사건의 성질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유익하므로 은밀하게 숨기고 그 지역을 떠났어야 하는 것입니다.
③ 성도는 모든 피해로운 일에도 자기를 살피며 먼저 자신이 책임지는 노력을 하고 되도록 다른 사람이나 가해자에게 보복이나 지나친 배상을 하지 않게 하는 아량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희생적 손해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없을 것입니다.
제 68 과 야곱이 벧엘에 거함 (창 35:1~8) 목록으로
지금 읽은 말씀은 야곱이 가나안 땅에 와서 세겜에 거주하였을 때, ① 1절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벧엘에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하신 내용이고, ② 2~4절은 “야곱이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준비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으며, ③ 5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고을 사람들로 야곱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여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이요, ④ 6~7절에서는 벧엘 곧 루스란 장소에 와서 20년 전에 서원한 것을 이행하여 제단을 쌓은 내용이며, 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가 세상을 떠나므로 그 장소(벧엘)에 장사지냈다”는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다섯 가지 대지를 하나로 종합하면 “야곱이 벧엘에 거함”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 야곱이 세겜에 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너는 벧엘에 가서 거하고 과거에 네가 도망할 때 나에게 서원한대로 그곳에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을 하심에 대하여(1절)
1) 여기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서원기도를 들으셨고(창28:20~22), 그 기도가 성취되도록 응답하시고 인도하셨으며, 또 그 서원 실천을 기다리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성도들도 기도할 때 서원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면 내가 반드시 어떻게 하겠습니다”하는 기도의 형식이 바로 서원 기도입니다. 삿11:31에서 입다란 장군도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면 자기 가족 중 먼저 자기를 영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는 서원을 하고 그 요구가 성취되었을 때 서원을 실천하였다는 말씀이 있고, 삼상1:11에서 “한나도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헌신케 한다”고 서원기도를 하고 그대로 이행하였으며, 시15:4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말아야 한다”하므로 성도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무엇보다도 엄히 지켜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② 서원이란 일종의 맹세와 같은 것입니다. 서원, 맹세, 강한 약속이 같은 뜻인데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은 무를 수 없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사람과의 약속은 타협으로 변동할 수가 있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은 타협을 못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중하게 생각하여 서원을 하여야 합니다. 함부로 서원을 하였다가 지키지 못할 때는 하나님께 거짓말한 큰 죄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헛맹세를 할 바에는… 도무지 맹세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마5:33~34에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③ 서원 기도는 보통기도 보다 더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기도에 비할 때 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야곱의 기도를 들으시고 20년 만에 성취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2) 문제는 왜 야곱이 가나안땅에 오자마자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렀을까 하는 것입니다.
① 이것은 목축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새끼 딸린 양들을 천천히 이동하면서 휴식을 주자는 것이었고,
② 세겜 땅에 목초가 많으니까 그 목초를 이용한 다음에 가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③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의 서원 이행을 자기의 생업을 구실로 늦추는 것은 마땅치 않게 생각하여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께 드릴 약속을 조금 미루다가 책망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주의하셔야 합니다.
2. 야곱이 서원한 제단을 쌓기 위하여 벧엘로 떠날 때 준비하는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2~4절). 야곱은 가족들에게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갈아입으라” 하므로 20년 전에 하나님께 서원한 바를 시행하기 위하여 벧엘로 간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주지시킨 것입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족들이 왜 이방 신상을 가졌을까에 대하여 외삼촌이 드라빔 없어진 일로 소동을 피운 일도 있었고 또 혹시 자녀들이라도 이방풍속을 따라 다른 신물을 갖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야곱은 이것을 정리하려고 한 것입니다. 드라빔은 이방적 신앙의 대상도 되고 또 귀중품도 되기 때문에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귀중품이라고 간직한 어떤 물건이 우상의 대상이 된다면 크게 위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것을 버리라 하였더니 그 가족들이 이방신상(드라빔)과 귀걸이(귀에 건 장식품 우상)를 내줌으로써 그것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여기에 ‘묻었다’는 뜻은 미신적 요소를 멀리 버리듯 장사지내버렸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물질우상, 지식우상, 권세우상, 육체우상 등이 있다면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을 제일주의로 섬기는데 거리끼는 것들이니까 그것들을 깊이 장사지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또 그들이 자기를 정결케 하고 의복을 갈아입은 것은 하나님께 나가는 자가 깨끗하고 단정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이렇게 하여 벧엘로 올라가는데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움을 갖게 하시므로 아무도 야곱을 추격하거나 해롭게 하는 자가 없었다 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보호해 주시기 위하여 그런 방법을 베푸신 것입니다(5절). 저희들이 어떤 우상이나 현실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그만큼 멀어지고 이 세상의 의지할 것들을 멀리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가까이 하여 보호해 주시는 것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3:1에도 그런 말씀이 있고 욥22:24~25에도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릴 때 하나님이 그에게 은금이 되어 주신다”는 말씀이 있으며, 다윗 왕이 군대를 계수하였을 때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함보다 군대를 의지함이 되어 재앙을 받게 하신 사실이나(삼하24:1,7~10), 또 스18:21~22을 보시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호위병을 거절한 사실들이 바로 같은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 것을 의지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4. 그들은 “루스”곧 벧엘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서원하였던 제단을 쌓고, 그 장소를 “엘 벧엘”이라고 하였습니다(6~7절). “벧엘”이란 말이 ‘하나님의 집’이란 뜻인데 그곳에 와서 또 “하나님을 만났다”는 뜻으로 “엘 벧엘” 즉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이 벧엘에서 야곱의 어머니를 양육한 리브가의 유모가 죽어 그곳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를 지내고 그곳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하였으니 “곡함의 상수리”란 뜻입니다.
1) 이 리브가의 유모는 창24:59에서, 리브가가 이삭에게로 시집올 때 딸려온 사람이었습니다.
①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기사는 야곱의 여행과 무관한 사실을 역사적 측면에서 기록한 것 뿐일 것입니다.
② 혹 야곱이 집을 떠날 때 혼자 떠난 것이 아니라 리브가의 유모와 함께 갔다가 같이 오면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므로 그곳에 장사지낸 것이라고 예측할 수도 있으나 무리한 추상을 더하게 되므로 전자의 설명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2) 성경에는 이렇게 “누구의 무덤이 어디에 있다”고 기록되었으나 위대한 모세의 무덤을 밝히지 않은 것을 보면 무덤은 역사적 측면에서 일시 보존할 것이로되 숭배의 대상은 아니란 점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① 야곱이 서원한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 수 있고,
② 또 하나님께 드린 서원은 꼭 이행해야 하며 하나님은 서원기도의 이행을 반드시 기다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③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가 우상적 신앙을 떠나서 자기를 성결케 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어 그 성도를 보호해 주신다는 실례를 보여 주셨는데,
④ 성도 중에는 알게 모르게 하나님보다 현실의 것을 더 의지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외면하는 용기가 필요함을 교훈해 주셨으며,
⑤ 조상의 무덤은 일시 보존하되 숭배할 것은 아니라는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제 69 과 야곱이 고향에 감 (창 35:9~29)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①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하였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선포하신 복을 받은 일이요(9~15절), ② 계속 에브랏 쪽으로 남하하다가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죽은 사실과(16~20절), ③ 또 에델 망대를 지날 무렵에 장자 르우벤이 아비 야곱의 첩 “빌하”를 통간한 내용과(21~22절), ④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을 소개한 내용(23~26절), ⑤ 귀향한 후 아버지 이삭을 만나고 또 이삭이 180세에 세상을 떠난 내용(27~29절)까지 기록되어 있어서 전체의 제목을 “야곱이 고향에 감”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하나님이 이 말씀을 왜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1) 선민의 역사를 알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고,
2) 선민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알게 하심일 것이며,
3) 이 역사에 나타난 사건들을 통하여 의와 불의를 깨닫게 하시려는데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신앙적 선행은 긍정적으로 받고 실수나 죄는 부정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이 복 주시는 내용도 있고 사람의 출생과 죽음의 내용도 있으며 또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내용, 자식이 부모를 만나는 내용, 범죄하는 내용, 열두 아들을 소개하는 내용 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 9~15절을 보시면 야곱이 “벧엘”에 돌아와 제사를 드리니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1) 이 벧엘은 20년 전에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서원한 장소인데 갈 때도 만나주신 하나님이 올 때도 만나 주신 것입니다. 갈 때는 꿈에 나타나 주셨는데 이번에는 어떤 형상으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셔서 말씀으로 복을 주신 후 그곳에서 “승천하는 모습으로 보여주셨다”고 13절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과 함께 하시고 말씀으로 복 주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야곱이 서원한대로 제사를 드리니 하나님은 또 복을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3) 그 복의 내용은,
①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재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뜻은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창32:22~28)으로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신 만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증표인 것입니다. 결국 이 이름은 야곱 개인의 이름에서 족속의 이름으로, 또 나라와 지역의 이름으로, 더 나아가서는 선민의 대명사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재확인하신 뜻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대상이란 뜻입니다. 지금 저희들도 선민이란 의미에서 “이스라엘인”인만큼(눅19:9) 선민의식을 가지고 선민다운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② 두 번째 선포하신 복은 하나님이 자기를 전능자로 소개하시면서 “야곱을 생육 번성시켜 많은 국민을 이루고 그 후손(허리)에서 왕들이 나오게 하겠다” 하셨으니, 이 왕들은 메시야를 포함하는 이스라엘 나라의 여러 왕들이요.
③ 조상에게 약속한 땅을 야곱과 그 후손에게 주시겠다 하시고, “그곳에서 올라가셨으니” 20년 전에는 꿈으로 계시를 주셨던 하나님이(창28:12) 이때는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셔서 말씀으로 복을 선포하시고 엘리야나 예수님처럼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4)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선포를 받고 그 장소에 또 돌기둥을 세우고 그곳에 전제물을 붓고 제사를 드린 다음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으니 이 제사는 감사와 헌신의 목적으로 드린 것입니다.
① 여기에서 돌기둥을 세운 것은 임시 제단을 쌓은 것이요.
② 전제물을 부은 것은 포도주와 기름 같은 부어드리는 제물을 뜻하고,
③ 또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한 것은 20년 전에 그 장소를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부른 것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④ 결국 야곱은 성공하여 서원을 이행하였고,
⑤ 하나님은 그가 서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준비할 때부터 성취할 때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결심하고 노력할 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계속되는 여행 중에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세상을 떠난 내용입니다(16~20절).
1) 벧엘은 세겜에서 30Km가 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에브랏”을 향해 오다가 에브랏을 채 못 와서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죽은 것입니다. 이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옛 이름입니다(룻4:11). 그러니까 벧엘에서 에브랏까지는 25Km쯤 되고 그곳을 못 미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2) 라헬은 그곳에서 임신, 산고와 난산으로 아들을 낳았고 라헬은 자신이 살 소망이 없음을 깨달았음인지 그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란 뜻으로 “베노니”라 하였는데 야곱은 나중에 그 아들의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으로 “베냐민”으로 고쳤습니다.
①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낳은 베냐민을 오른손처럼 귀하게 키울 결심을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② 그런데 또 한 가지는 라헬의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고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니까 이상할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헬은 투기와 욕심이 많았고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그의 신앙으로 볼 때는 드라빔을 도적하여 간직할 만큼 문제가 있었는데 그는 현실의 복을 단명으로 누린 것입니다. 성도는 많이 행하고 적게 누릴수록 유익하고 적게 행하고 많이 누릴수록 불리할 때가 있으니 이는 하나님이 공평한 통치를 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시97:2).
3) 야곱은 라헬을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가에 장사하고 묘비를 세웠으니 지금까지 그 무덤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4. 장자 르우벤이 서모 빌하를 통간한 사건입니다(21~22).
1) 야곱이 라헬을 장사지내고 계속 헤브론 쪽을 향하여 남하하다가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치고 쉬는 사이에 장자 르우벤이 라헬의 여종이요 아버지의 첩인 빌하의 장막에 들어가서 통간하였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들었다고 한 것입니다.
2)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① 성경은 진실을 증거하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고,
② 인간이 정욕에 사로잡히거나 그것을 억제하지 못할 때는 그런 유혹과 범죄도 있을 수 있음을 알려 주신 것이요,
③ 이런 사실을 볼 때 죄를 경계하는 성도는 이런 유혹을 피하도록 각별히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④ 야곱이 젊은 여인을 취첩한 것도 문제이고 르우벤이 젊은 여인의 장막에 간 것도 문제인데 그 당시 르우벤의 나이는 몇 살일 것 같습니까? 야곱은 밧단 아람에 가서 7년 봉사 후에 결혼하였기 때문에 13세 정도의 소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남편을 자주 못 만나는 빌하의 욕구와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 사이에서 일어난 순간적인 실수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그래서인지 야곱은 그 사실을 듣기만 하고 아무런 책망을 하지 않았으니,
① 이런 친고죄적인 불륜의 사실은 소문 없이 덮어두는 것이 덕이 될 것입니다.
② 그러나 대상5:1을 보면 “르우벤은 장자라도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족보상 장자의 이름만 올라 있을 뿐 기업으로 받는 장자의 특혜는 요셉에게로 돌아간다” 하시므로 그 범죄에 대한 보응을 받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소개한 내용입니다. 이 열두 아들들의 소개는 출생순서대로 기록하지 않고 먼저 본처의 아들들을 순서대로 기록한 다음 첩의 아들들을 순서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순서대로 기억하시려면
① 레아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낳고
② 라헬의 여종 빌하가 단과 납달리를 낳고
③ 다음에 레아의 여종 실바가 갓과 아셀을 낳고
④ 레아가 다시 잇사갈과 스불론을 낳고
⑤ 마지막에 라헬이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는데 베냐민만 귀향하는 도중에 낳았고 다른 아들들은 다 밧단 아람에서 낳았습니다(26절).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기억하시려면 먼저 그들의 어머니 순서를 기억하시고(레아 4, 빌하 2, 실바 2, 레아 2, 라헬 2) 다음에 열두 아들들의 이름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6. 마지막으로 비로소 고향에 도착하여 아버지 이삭을 만난 내용과 이삭이 180세에 세상을 떠남으로 장사지낸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1) 야곱이 고향에 도착한 때는 그의 나이 60이 넘은 때였습니다. 그 이유는 창26:34에서 에서가 40세에 이방결혼을 한 다음에 야곱에게 축복한 순서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창25:26).
2) 그러니까 야곱이 귀향하였을 때에 120세가량의 아버지를 만난 것이었고 그때에 어머니 리브가를 만났다는 말씀은 나타나지 않으니까 리브가는 20년 만에 돌아온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그때에 귀향처는 “기럇아르바”라고도 하고 “마므레”라고도 하며 또 “헤브론”이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장소는 예루살렘에서 30Km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지면서 살던 곳이었습니다(창18:1; 23:2). 아브라함이 흉년을 피하여 잠시 그랄 땅에 간 일이 있었고(창18:1), 이삭도 간 일이 있었다가(창26:1) 브엘세바에 와서 거할 때 야곱이 집을 떠났는데(창26:23; 28:10) 그 후에 이삭은 옛 고향인 헤브론(기럇아르바, 마므레)에 와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럇아르바는 헤브론의 옛 이름이고 마므레는 헤브론의 동리 이름입니다.
4) 야곱이 60세쯤에 그곳에 왔을 때에 120세의 아버지를 만났고 에서는 세일 쪽에서 살았으며 이삭이 180세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약 60년간 아버지와 같이 살았습니다.
5) 이삭이 “늙고 기운이 진하여 죽은 것”은 병으로 앓지 않고 죽었다는 뜻이요. 또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는 뜻은 아브라함이 간 곳으로 갔다는 뜻이므로 내세와 구원을 아울러 표현한 것이며,
6) 에서와 야곱이 함께 장사지냈다는 말씀을 보아서 세일에 사는 에서와 계속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야곱이
① 제사를 드리고 복을 받은 일,
② 사랑을 많이 받은 라헬이 일찍 죽은 일,
③ 가정에 불상사가 일어나는 일,
④ 열두 아들들이 건재하는 중 아버지를 60년쯤 모셨다가 별세하여 장사지낸 일 등으로 그의 생애가 파란만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자라 하여 꼭 평안과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고, 또 그런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보호와 인도를 받은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희들의 생활이 최대한 원만한 가운데서 주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기를 바라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9. 벧엘의 의미 (창 35:1~8, 28:18~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벧엘의 의미”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신 후에 벧엘에 찾아오셔서 야곱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이 저희들에게도 임재하셔서 은혜 주시기를 기도하려고 합니다.
1. 이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야곱은 “룻스”라는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과 복을 약속 받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서원한 후에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개칭하였습니다. 벧엘이란 뜻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집”이란 서로 만나는 곳이고 함께 사는 곳이고, 교제하는 곳이며 또 안식을 누리는 곳입니다. 야곱이 그 장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지을 때도
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② 기도와 말씀계시와 제사(예배)로 하나님과 교제를 하였으며,
③ 또 하나님의 언약을 통하여 안위를 힘입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2. 야곱은 그 곳을 경유한 후 20년 만에 다시 그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20년 만에 그곳에 돌아올 때 많은 가족과 재산을 이루어 가지고 왔습니다. 20년 만에 가족이 늘어나고 재물이 많아진 것만이 큰 축복은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합당하게 살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① 야곱은 자기 재물을 모을 때에 정당한 수고로 모았다고 하였습니다(창21:40~42).
② 그러나 가족을 이룰 때는 정당하게 늘리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인을 네 명이나 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거짓말로 복 받은 것이 정당한 방법이 아니듯이 다처에서 자녀를 생산한 것도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정당치 못한 생활을 공의로운 심판의 계산대에서 복을 삭감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와 그 자손들의 생애에서 크게 어려움을 가진 사실들이 바로 그런 원인에 의한 결과들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3. 야곱에게 평생의 숙원과 무거운 책임이 있었다면 두 가지였을 것입니다.
① 형 에서와 화해하는 문제였고,
② 또 하나는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한 바를 이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야곱은 형 에서와의 불화를 20년 만에 해결하였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20년간의 불화의 장벽을 헐 때 환도뼈가 부러지는 영적 체험의 기도를 하였고(창32:24~28, 천사와 겨룬 것이므로) 다음에는 사랑의 물질공세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바친 예물의 수가 소와 양과 나귀를 합하여 580두인데 이것이 두 떼 중에 한 떼라 하였으니(창32:7,13), 거의 절반의 재산을 화해 공세에 쓴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화해는 물론 성도간의 사랑과 화해도 중요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4. 이렇게 형제간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계획한대로 “벧엘에 올라가 단을 쌓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너는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라 네가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나타나셨던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당히 야곱의 서원을 받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5. 그러면 하나님 앞에 제단(예배)을 쌓는 자의 자세가 어떠하여야 하겠습니까?
1) 먼저 형제 화목이 잘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이것을 해결하였습니다.
2) 이방 신상을 버렸습니다. 야곱은 자기 가족과 종들까지 많은 군상을 거느렸는데 그들에게 이방신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왜 이들에게 이방신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적인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강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성도들끼리 구별되게 살지 않고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빈번히 가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방색채가 없으려면 우선 성경적 표준생활을 강조하셔야 하고 다음에 불건전한 신앙운동을 멀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제사 드리기 위하여 “이방 신상을 버리라”고 하였을 때 그들은 이방신 섬기는 도구(패물)를 다 내놓았고 야곱은 그것을 아낌없이 땅에 묻었습니다. 저희들도 무속적 의식이나 기복신앙 등…, 이방적 풍습은 아낌없이 버릴 줄 아셔야 합니다.
3)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태도의 모습입니다. 몸을 씻고 의복을 바꾸는 것이 죄를 씻는 방법 자체는 아니지만 과거를 청산하고 새 출발하는 결단의 표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을 의식하며 감사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가는 길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다”고 하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자기에게 어떻게 하신 분이신가’를 기억한 것입니다. 야곱이 체험하고 깨달은 하나님은 환난 날에 응답하신 하나님이시고 성도의 가는 길에 함께 하신 하나님이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식하면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 벧엘”이라 불렀으니 “엘 벧엘”은 “하나님의 집에 계신 하나님”이란 뜻이고 벧엘을 “엘 벧엘”로 고친 동기는 하나님이 벧엘에서 언약하신 축복을 이루셨음과 동시에 자신도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이행하였다는 의미로 그 이름을 다시 개칭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벧엘이란 곳은 오늘 저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① 야곱은 벧엘에서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벧엘에서 나타나셨으며 천국 가는 길을 계시하셨고 또 언약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또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벧엘이 또 엘 벧엘로 개칭되기까지 하나님은 성실하게 야곱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② 야곱은 자기의 서원대로 그 장소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야곱은 제단을 쌓을 때 형제와 화목하였고, 이방적 색채를 벗어 버렸으며, 또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따라서 벧엘은 하나님을 교제한 곳이고 복의 약속을 힘입은 곳이며 복된 서원을 이행한 곳입니다. 또 모든 고독한 자가 찾아와서 안위를 받은 곳이기도 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사닥다리 계시로 전달받는 장소도 되었으니 구약의 벧엘은 신약의 교회와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외로운 자들이 찾아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의 교훈을 받고 예배로 영광을 돌리는 곳입니다. 옛날에 야곱이 벧엘에서 행한 것처럼 저희들도 교회의 생활을 그렇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독수리가 외로운 새이지만 그 날개에 힘이 있기 때문에 높이 나르는 것처럼 저희들이 세상적으로 외로워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실 때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벧엘의 은혜, 벧엘의 생활을 저희들도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꼭 맛보셔야 할 것입니다.
제 70 과 에서의 자손과 족장들 (창 36:1~19) 목록으로
이 말씀은 네 대지로 나눌 수 있는데, ① 에서의 아내들이요(1~3절), ② 에서의 이주함이요(4~7절), ③ 에서의 후손들이요(8~14절), ④ 에서의 후손의 족장들입니다(15~19절). 이상 네 대지를 종합하여 “에서의 자손과 족장들”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에서의 아내는 세 사람이니,
1) 한 사람은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이고,
2) 또 한 사람은 히위족 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홀리바마”이며,
3) 셋째는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이었습니다. 또 에서의 아내 이름은 창26:34과 28:9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26:34에서 에서의 아내는,
①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②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과,
③ 창28:9에서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마할랏이라고 하였으니 본문에 소개된 아내들과는 부족과 이름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요?
①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을(26:34) 엘론의 딸 “아다”라고 한 점에 대하여 브에리와 엘론이 같은 사람 이름이거나 부모의 이름을 나누어 기록할 수 있으며 또 유딧과 아다를 동일인의 이름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 이유는 흔히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이것저것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 브에리와 엘론으로 그 부모의 이름을 다양하게 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②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히위 족속 시브온의 외손녀(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홀리바마라고 한 점에 대하여 헷 족속(26:34), 히위 족속(36:2), 호리 족속(36:20)이 같은 계열 상 선후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헷과 히위와 호리는 같은 부족의 분파에 불과하므로 그 족속이름이 다르다 하여 기록상에 문제될 것이 없고 또 바스맛과 오홀리바마가 다른 점도 한 사람이 두 이름을 가진 것이며,
③ 마할랏(창28:9)과 바스맛(36:3)이 다른 것도 역시 같은 뜻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혹자는 사본을 옮겨 적을 때 혼돈이 있었다 하기도 하고, 에서가 본래 네 아내를 거느렸다가 나중 여인을 앞의 여인 계열에 종속시켰다고도 설명하지만 그 해석도 만족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에서는 성결 여부에 상관없이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이 사실이었고 2~3절의 ‘취하였다’는 말씀이 절차에 따른 혼인이 아닌 축첩행위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혼인의 무법성을 나타내지 말아야 합니다.
2. 에서가 그 아버지와 야곱이 사는 가나안 땅을 떠나 세일산에 거하는 내용입니다(6~7절).
1) 창32:3에서 “야곱은 세일 땅에 사는 에서에게 사자들을 보냈다”고 하였으니 그때에 에서가 세일에 거한 것은 정착한 것이 아니고 양을 치기 위한 목적으로 다닌 것이었습니다.
2) 그러나 이번에는 에서가 야곱의 거처를 떠나 세일 땅으로 이주한 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예언(35:15)의 성취인 것입니다.
3) 에서가 그 땅을 떠날 때 자신은 장자이고 또 고향을 지킨 관계로 그가 떠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는 선민에게 복 주신 땅이란 사실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고 또 자신과 야곱의 짐승들을 함께 수용할 수 없다는 판단아래 더 광활한 곳으로 가기 위하여 스스로 그곳을 떠났지만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을 위하여 다른 백성들을(창27:39~40) 적당하게 인도하시고(창35:12), 또 인류의 거주의 경계를 한 하시는 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행17:26).
3. 그 세 아내들에게서 낳은 아들들은,
1) 아다에게서 “엘리바스”를 낳았고, 엘리바스에게서 데만, 오말, 스보, 가담, 그나스를, 또 첩 “딤나”에게서 “아말렉”을 낳으므로 아다는 한 아들에 여섯 손자를 둔 셈입니다.
2) 바스맛에게서는 “르우엘”을 낳고 “르우엘”에게서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를 낳으므로 한 아들에 네 손자를 두었고,
3) 오홀리바마에게서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 세 아들을 낳았으므로 결국 세 아내에게서 다섯 아들과 열 손자를 둔 셈입니다. 야곱이 네 여인에게서 열두 아들을 낳은 것에 비할 때 에서는 세 여인에게서 다섯 아들을 두었은즉 야곱만큼은 번성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에서의 번성을 약속하심(창21:18)에 따라 받은 일반 은총입니다.
4. 에서의 부족의 족장 이름들을 기록한 말씀입니다(15~19).
1) 아다의 아들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에서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니스 족장,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첩 딤나의 아들)들이 있고,
2) 바스맛의 아들 르우엘의 자손으로 나핫 족장, 세라 족장, 삼마 족장, 미사 족장이 있고,
3) 오홀리바마 자손으로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 있었습니다.
4) 이상의 족장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①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만 족장 명에서 빠지고 다른 아들들과 손자들은 다 빠짐없이 족장이 되었는데 이는 종족의 권위를 과시함일 것입니다.
② 그런데 문제는 16절에서 오홀리바마의 셋째 아들 고라(14절)가 아다의 아들 엘리바스 계열의 족장으로도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라는 16절에서 엘리바스 자손이 아닌데도 그 자손의 족장이 되어 있고 또 18절에서는 오홀리바마의 계열의 족장도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두 계열의 족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고라가 아들을 낳아서 엘리바스 계열로 양자를 줄 수도 있었을 것으로 예측해야 할 것입니다.
5)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① 에서는 신령한 은혜와 하나님의 약속과 선민적인 순결유지에 대하여 관심 없이 행동한 사실을 알 수 있고,
② 그 방법의 결과로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한 것이며,
③ 그가 지경을 떠난 것은 양보가 아닌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떠났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된 것입니다.
제 71 과 세일 땅에 거주한 자들 (창 36:20~43) 목록으로
지금 읽은 본문 말씀은 세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세일 땅에 거하는 원거인(原居人)들의 부족명단이요(20~30), ② 에돔 땅을 다스리는 왕들의 명단이요(31~39절), ③ 에서 계열의 족장 이름들입니다(40~43절). 따라서 세일 땅에 거주한 원거인들과 그들을 정복하고 에돔 족속을 살게 한, 에서 자손들의 왕들과 또 지역과 이름에 따른 족장들을 기록하였으므로 “세일 땅에 거주한 자들”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세일 땅에 거하던 원거인들(20~30절)
1) 이들은 호리 족속 세일의 후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호리 족속은 히위 족속, 헷 족속에서 파생된 족속으로(26:34, 36:25) 호리 족속의 조상은 세일(그 지역 이름과 같음)이었습니다.
2) 세일 땅은 사해바다 동편 땅으로 아브라함 때부터 그 부족이 살고 있었으며(창14:5~6) 나중에 에서가 그곳에 가서 거주하였습니다(창33:14).
3) 호리족 세일의 후손(또는 자녀)은 일곱 자손의 후손들로,
① 로단은 호리, 헤맘(로단의 누이 딤나)을,
② 소발은 알완, 마나핫, 에발, 스보, 오남을,
③ 시므온은 아야, 아나를(광야에서 부친의 나귀를 치다가 온천을 발견함),
④ 아나는 디손, 오홀리바마(딸)를,
⑤ 디손은 헴단, 에스반, 이드란, 그란을,
⑥ 에셀은 빌한, 사아완, 아간을,
⑦ 디산은 우스, 아란으로, 일곱 아들, 열여덟 자손이요. 이 족속이 기록된 것은 에서가 그들을 정복한 세력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2. 아울러 에돔 땅을 다스린 왕들도 기록되었으니 에서의 후손은 이스라엘 선민보다 약 800년 먼저 왕의 다스림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왕이 “벨라”인데 이 사람이 에서의 몇 대 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딘하바”에 왕도를 정하였고, 2대 왕 요밥(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3대 왕 후삼(데만 족속의 땅에 거주한 자), 4대 왕 하닷(브닷의 아들 모압들에서 미디안을 친 자), 5대 왕 삼라(마스레가 사람) 6대 왕 사울(유프라데 하숫가 르호봇의 사람), 7대 왕 바알하난(악볼의 아들), 8대 왕은 하달이며 그는 바우에 도성을 정하였고 메사합의 손녀요, 마드렛의 딸 므헤다벨이 왕후였습니다. 성경에 이 사실이 기록된 것은 에서의 후손이 힘있게 번성한 것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3. 에서의 계열에서 나온 족장 이름을 그 지역과 종족별로 열한 족장을 세웠으니 곧,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입니다. 하나님은 칼을 믿고 사는 에서에게도(창27:40) 그의 영적 축복과 관계없이 현실의 복을 주셨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마5:45~46).
제 72 과 꿈을 꾼 요셉 (창 37:1~11) 목록으로
위의 말씀에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 17세 때에 된 일이 기록되었습니다. 요셉의 일을 기록하면서 야곱의 약전이라(2절) 한 것은 야곱의 집안일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말씀은 두 대지로 나눌 수 있으니, ① 요셉의 가정생활이요(1~4절), ② 요셉이 꿈을 꾼 사실입니다(5~11절).
1. 요셉의 가정생활(1~4절)
1) 야곱이 우거하던 땅은 헤브론을 의미합니다(창35:27).
2) 요셉은 17세 때에 그의 형제와 함께 아버지의 양을 쳤습니다(12절). 그의 직업은 아버지의 생활을 돕는 평범한 일이었고, 그 직업이 서민적이었지만 하나님이 높여 주시므로 성공한 것입니다.
3) 요셉은 그 형제들과 양을 칠 때에 아버지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즉 단, 납달리, 갓, 아셀)로 더불어 생활하면서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였으니 이 사실에서,
① 요셉은 어릴 때부터 정의로웠고,
② 그 형제들 중에 아비의 첩의 소생들이 과실을 범하였음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과실을 범하여 고발을 당하는 입장에 있지 말고 항상 의로운 입장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4) 요셉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어서 그에게 더 큰 사랑을 주고 채색 옷을 지어 입혔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노년기란 약 90세쯤(창47:6)을 의미하고, 그에게 깊은 사랑을 준 것은 라헬을 사랑함과 관련한 사랑이요. 그 사랑의 표시로서 채색 옷을 입히게 한 것인데 이는 편애라기보다는 어미 없는 어린 아들이므로 특별한 사랑을 베풀음이 당연한 것입니다.
5) 이때에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의 사랑 받는 동생을 시기하여 그를 미워하고 좋은 말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이 동생을 사랑하지 않고 시기하거나 미워하고 좋은 말로 대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시기와 미움과 언사의 불평이 결국 살인을 가져온다는 것은 비단 요셉의 경우만은 아닐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시기, 미움, 언사의 불평 같은 것이 성도에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요셉이 꿈을 꾼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5~11).
1) 요셉이 꿈을 꾼 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였습니다.
① 모든 이의 꿈이 다 하나님의 계시는 아닙니다. 다만 요셉처럼 계시의 도구로 쓰임에 한하여 그렇다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은 계시사역을 완성하시기 전에 여러 모양으로 뜻을 전달하셨으니(히1:1) 요셉도 거기에 해당한 것입니다.
③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계22:18~19) 어떤 꿈도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④ 요셉이 17세에 계시의 꿈을 꾼 것은 바로 우리가 17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하였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⑤ 요셉은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하였을 때 그의 형들은 “너 좋은 꿈을 꾸었구나” 하지 않고 그를 더욱 미워하였으니 이는 그의 꿈이 “자신의 성공을 예견하였고 형들은 그 밑에 있게 된다”는 것 때문에 그를 시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자기보다 앞서가는 형제를 시기한다면 그는 사랑의 실천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2) 요셉이 그 형들과 아버지에게 고한(11절) 꿈의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① 형제들이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단은 둘러서서 요셉의 단을 향해 절을 하는 광경이었고,
②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더란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왜 이런 계시를 주셨을까요?
① 요셉이 당면하는 환난에 대하여 자신의 성공을 기대하면서 믿음을 지키게 하시기 위함이고,
② 또 약 20년 후에 야곱의 집에 될 일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하여 야곱은 그것을 마음에 두었지만 그 형들은 믿지 않고 미워하기만 하였습니다.
4) 요셉의 형들이 왜 미워하고 시기하였을까요?
①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를 두렵게 여기지 않았고,
② 또 그 꿈 내용이 자기들에게 불리한 의미를 주는 것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③ 처음 곡식 단의 꿈을 말하였을 때 요셉의 형들은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며 우리를 다스린단 말이냐?” 하면서 비웃고 믿지 않고 미워하였으며, 그 다음 해와 달과 별의 꿈에서도 야곱이 말하기를 “나와 네 어미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하고 불신적인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 때에 야곱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말을 마음에 두었으니 결국 이 계시를 불신한 사람들은 요셉의 형들뿐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 받을 것은,
1) 하나님은 지금도 완성된 성경으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심을 믿으셔야 하며,
2)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무조건 겸손하고 순종하셔야 하며,
3) 하나님은 복 주실 자에게 계시로 깨닫게 하셨고 요셉은 그 계시 받은 말씀의 힘으로 환난의 때를 이겨 나갔으며,
4) 하나님은 야곱의 가정의 될 일을 요셉을 통하여 알려 주셨지만 우둔한 형들은 욕심과 시기와 미움에 가리어 하나님의 계시의 뜻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5) 겸손과 순결과 복종은 하나님 앞에서 눈을 뜨는 일이요. 욕심과 교만과 미움과 불순종은 그 어떤 계시 앞에서도 눈을 감는 일임을 아셔야 합니다.
6) 또 요셉의 꿈은 바로 미래의 희망이었으니 만큼 저희들도 말씀 안에서 희망을 갖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 73 과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감 (창 37:12~28) 목록으로
위 본문은 요셉이 애굽으로 가게 된 경위가 기록되었는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당한 끝에 결국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따라 그 경위를 살펴보면, ①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양치는 곳을 찾아간 내용(12~17절), ② 형들이 요셉을 없애려고 흉계를 꾸민 내용(18~24절), ③ 결국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파는 내용(25~28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내용을 종합하여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감”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 가는 내용(12~17).
1) 야곱은 그의 아들들이 세겜에서 양떼를 칠 때에 요셉을 그곳에 보냈으니 세겜은 예루살렘 북쪽 약 50Km 지점이고 출발지점인 헤브론에서는(14절) 약 70Km(180리) 지점이었습니다.
2) 야곱이 17세 된 요셉에게 180리 가량의 멀고 험한 길을 가게 하는 심부름을 명하였을 때 요셉은 “내가 그러하겠나이다”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요즈음 귀한 자식들이 부모의 작은 심부름도 거절하는 것에 비하면 요셉은 부모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절대 복종형의 효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야곱은 “형들이 잘 있는 여부를 살피고 돌아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헤브론에서 출발하여 먼 여행 끝에 그곳에 도착하였는데 형들이 그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방황하던 차 어떤 사람이 “도단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결국 도단에 가서야 만난 것입니다.
4) 도단은 세겜에서 25Km쯤 더 가는 곳이었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모험적 순종을 하였습니다. 육신의 아버지 말씀도 모험적으로 순종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겠습니까? 여기서 요셉의 복 받을 조건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2. 형들이 찾아온 요셉을 없애려고 흉계를 꾸민 내용입니다(18~24절).
1) 형들은 요셉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볼 때부터 죽이기를 꾀하였다고 하였습니다(18절). 240리 길을 모험적으로 걸어오는 동생을 멀리서 보면서 죽이려고 꾀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악하였는가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2) 그들은 “꿈꾸는 자가 온다” 하면서 그를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고 악한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핑계하면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가를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① 이렇게 형들의 미움은 살인음모로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살인자와 같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마5:22).
② 또 그들은 자신들의 살인수법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꿈을 대항하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죽이면 그의 꿈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말은 절대자 하나님의 통치라도 자신들이 뒤집을 수도 있다는 오만한 태도입니다.
3) 그런데 그 의견이 나왔을 때 맏형인 르우벤이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피 흘리는 것이나 생명을 상하지는 말고 구덩이에 던져 넣기만 하자고 주장을 하였으니, 이것은 르우벤이 기회를 보아 요셉을 건져 아버지 집으로 보낼 생각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르우벤의 말을 듣고 채색 옷을 벗긴 후 물 없는 깊은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이때에 채색 옷을 벗긴 이유는 그 옷에 양피를 발라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었다고 위장하기 위함이었습니다.
4) 여기에서 요셉은 죽음의 위기를 임시 모면하였으나 그것이 르우벤의 공로는 아닙니다. 르우벤이 요셉을 일시적으로 구출하였으나 이는 나타내신 섭리를 이루셔야 하는 하나님이 르우벤을 감동시켜 그렇게 되도록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아니하거든(마10:29) 하물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의 생명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생명도 그러한 방식으로 붙들어 주시는 줄을 믿으시고 더욱 의지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형들은 구덩이 속의 요셉을 꺼내어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25~28절).
1) 요셉은 구덩이 속에 있었고 형들은 음식을 먹다가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 쪽에서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약대들에게 싣고 장사 차 애굽으로 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르우벤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2) 그 때에 넷째인 유다가 요셉을 죽여서 그의 피를 흙 속에 묻는 것보다 차라리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서 돈을 받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도 골육인데 생명에는 손을 대지 말자 하니까 그들이 다 좋다고 하여 결국은 은 20개를 받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버리므로 그들이 요셉을 애굽으로 데려가게 되었습니다. 은 20개는 20세겔로 싼값입니다(레27:5; 겔21:32).
3) 요셉이 죽음의 위기에 있었을 때 하나님이 르우벤을 들어서 살린 것처럼 이번에는 유다를 또 한 번 쓰셔서 요셉이 죽지 않고 애굽으로 가게 되었으니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렇게 되었음이 창45:7~8에 기록된 것입니다.
4.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받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말씀)에 책임을 지시는 분이시요.
2)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인간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이요.
3) 하나님은 그 원하는 자를 살리시고 인도하시기 위하여 르우벤이나 유다나 이스마엘의 상고 또는 구덩이까지 이용하시는 분이요.
4) 성도는 기필코 형제를 사랑하고 살리는 일에는 가담을 하여도 해롭게 하는 일에는 관여하지 말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제 74 과 아버지를 속임 (창 37:29~36)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는 다섯 가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요셉이 구덩이에서 없어진 것을 르우벤이 탄식하는 내용(29~30절), ② 아들들이 야곱을 속이는 내용(31~32절), ③ 야곱이 속고 탄식하는 내용(33~34절), ④ 자녀들이 야곱을 위로하는 내용(35절), ⑤ 요셉이 애굽에서 시위대장 집으로 팔리는 내용(36절)입니다. 그래서 전체의 제목을 “아버지를 속임”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르우벤이 탄식한 사실(29~30).
1) 르우벤은 구덩이에 갇힌 요셉을 형제들 몰래 이끌어 내어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는데 르우벤이 없는 사이에 다른 형제들끼리의 음모로 요셉을 팔아버렸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르우벤은 “옷을 찢고 나는 어디로 갈까?”하며 탄식하였으니,
2) 르우벤이 나는 어디로 갈까 하고 탄식한 것은 자기가 요셉을 구덩이에 넣자 하여 넣었는데 그가 없어졌으니 만일 요셉을 잊어버린 것이라면 르우벤이 그 책임을 져야 할 뻔 하였기 때문에 더욱 크게 놀란 것입니다.
3) 여기에서 르우벤은 아버지에게로 무사히 돌려보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계속 정의에 강하지는 못하였습니다.
2. 요셉이 죽은 것처럼 꾸며 야곱을 속인 내용입니다(31~32).
1) 그들은 요셉에게서 벗긴 채색 옷에 수염소의 피를 적셔서 그것을 아비 야곱에게 보이며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였으니 그들의 거짓 소행과 요셉을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호칭한 것을 보면 그 말과 행동이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이때에 르우벤은 요셉을 파는 데는 가담하지 않았으면서도 형제들과 단합하여 아버지를 속이므로 형제들의 죄악에 합세할 만큼 연약하였습니다.
3) 성도는 무슨 일에나 정의가 아니라고 판단될 때는 과감하게 반대하고 피하는 담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3. 야곱이 아들들에게 속고 탄식하는 내용입니다(33~34절).
1) 야곱은 요셉의 채색 옷을 쉽게 알아보고 확인한 다음 “악한 짐승에게 요셉이 찢겼다”하고,
2) 옷을 찢으며 베 허리띠를 묶고 아들을 위하여 오래도록 애통하였습니다.
3) 사랑하는 아들이 짐승에 찢겨 죽었고 또 자신이 위험한 심부름을 보낸 후회감 때문에 더욱 애통한 것입니다.
4)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았던 야곱이 바로 자기 아들들에게 속임을 당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그 징계를 20년 만에 나타내셨습니다.
4. 야곱이 오래도록 애통하니 그 자녀들이 위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35절).
1) 그러나 이 위로는 거짓된 연극에 불과한 것입니다.
2) 야곱은 여전히 슬퍼하면서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하였으니 여기에 음부란 무덤을 가리키는 말로 요셉을 따라 죽기를 바란다는 애절한 탄식을 한 것입니다.
3) 부모에게 거짓을 말하고 거짓으로 위로하고 부모의 마음을 아프고 슬프게 하는 것은 큰 불효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야곱의 슬픔은 오래 계속 되었을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애굽에 끌려간 요셉은 애굽 왕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습니다(36절).
1) 36절에서 이스마엘 족속(25절)을 미디안 사람이라고 한 것은 이스마엘(아브라함이 하갈에게 낳은 아들)과 미디안(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소생)이 한 형제로 아카바 만에 인접한 아라비아 지역에 같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미디안 지역 사람들이지만 각처를 순회하며 장사를 다녔기 때문에 도단까지 통행하게 된 것입니다.
2) 애굽 왕 바로는 그 당시가 주전 1880년경이므로 애굽의 12왕조 중의 한 왕일 것이나 고증(考證)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3) 시위대장은 왕을 시위하는 경호대장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애굽의 노예시장에서 그의 집으로 팔려갔으니 “어디로 팔려가느냐”하는 것도 그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대한 일입니다.
6.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으셔야 할 것은,
① 르우벤이 책임감과 동정심은 있었으나 정의감이 없음이 유감스러운 일이며,
② 자식이 아비를 속이고 슬프게 하는 불효를 경계하셔야 하며,
③ 야곱이 아비를 속이고 자식에게 속은 것처럼 하나님은 비슷한 것으로 보응하시고 일깨우시는 분이심을 아셔야 하며,
④ 하나님이 요셉의 길을 인도하신 것처럼 성도의 길도 꼭 필요한대로 인도하는 것을 꼭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0. 꿈꾸는 성도 (창 37:5~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꿈꾸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저희들은 요셉이 꿈을 꾸었다는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1. 요셉이 그 형들과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자기가 묶어 놓은 곡식 단이 벌떡 일어서고 형들이 묶은 곡식 단들이 요셉의 곡식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는 광경을 보았고, 또 다른 꿈은 해와 달과 열 한 개의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광경을 본 것입니다. 본래 꿈이란 확실한 절차와 형식이 없어도 꿈꾸는 자에게 느껴지는 깨달음이 있는 것이니까 해와 달과 별들이 어떻게 절을 하였든지 그 형식에 대한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요셉이 그 꿈을 꾸고 그 꿈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하니 그들은 즉각 그 꿈 내용이 요셉과 부모들과 자기들과의 관계를 예언하는 꿈으로 느껴져서 그 형들은 “참으로 네가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하면서 미워하며 시기하였고, 그 아버지는 “우리가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하고 책망하면서도 그의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한 것입니다.
2. 성경에는 여러 사람들이 꿈꾼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창28장에서는 야곱이 꿈을 꾸었고
2) 왕상3장에서는 솔로몬왕도 꿈을 꾸었으며,
3) 단7장에서는 다니엘이 꿈을 꾸었고,
4) 신약에서는 동방박사들도 꿈의 지시를 받았으며(마2:12), 요셉도 꾸었고(마2:19), 마27:19에는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님을 도와주는 꿈을 꾸었다고 하였습니다.
5) 또 이방인들도 꿈을 꾸었는데…,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꾸었고(창20:6) 역시 애굽 왕 바로가 꾸었으며(창40:9; 41:1, 11), 요셉 당시의 애굽의 죄수들도 꾸었고(창40:5), 블레셋 군인들도 꾸었으며(삿7:13), 느부갓네살왕도 꾸었습니다(단2:1, 31-35).
3. 그런데 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일반적으로 꾸는 꿈이 있고,
2) 하나님의 계시를 목적으로 꾸게 되는 꿈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든 꿈 내용은 전부가 하나님이 계시를 목적으로 꾸게 하신 꿈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꿈은 영감의 은사를 받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또 이런 영감의 꿈을 악한 자에게도 주시는데(단2:1) 악한 자의 꿈은 하나님이 그에게 번민을 주시고 그 꿈 해석을 통하여 의인을 유익하게 하시는 방편으로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방인 아비멜렉이 꿈을 꾼 것은 그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덕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바로의 꿈 역시 요셉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으며, 블레셋 군인들의 꿈도 자기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사기를 돕기 위한 것이었고 느부갓네살의 꿈도 역시 다니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주시는 계시의 꿈은 그 성도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목적으로 주셨으며, 악인에게 주시는 계시의 꿈도 필경은 의인을 위하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4. 하나님은 계시를 주시던 시대에 이렇게 꿈을 계시 방편 중의 하나로 사용하신 것입니다(히1:1). 민12:6에서 “하나님은 꿈으로 말씀하신다”하였고, 삼상2:6에서는 “꿈과 우림과 두밈으로 뜻을 나타내신다”하였으며, 욥7:14; 33:15에서도 “하나님은 꿈으로 교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타난 꿈은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유의하셔야 할 것은 욜2:28에서 요엘 지자가 예언하기를 “말세에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예언은 행2:17에서 오순절 당시 성령 충만의 상태로 응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행2:17의 “말세에 내가 내 성령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 말씀이 바로 “오늘의 성도가 예언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꾸는 계시라” 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해석입니다. 히1:1에서 “계시를 주시던 모든 날 마지막에 예수님으로 계시를 끝내셨다” 하였고, “그 예수님으로 끝내신 계시”가 바로 신약성경인 것입니다. 고후 3:10에서 “이 닦아둔 터 외에 다른 터를 닦을 자가 없다”한 것이나 유3에서 “믿음의 도는 단번에 주셨으니 이것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한 것은 모두 계시사역이 끝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꿈으로 계시를 나타내시는 사례가 없습니다. 혹 꿈이 사실대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일반적 꿈이 우연으로 일치된 것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5. 그러면 또 한 가지 의문은 일반적인 꿈은 어떻게 꾸어지는 것인가 할 때 ‘개도 꿈을 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반적인 꿈은 왜 꾸어지며 또 어떻게 꾸어지는 것입니까?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 꿈에 대하여 한 가지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그것은 꿈이 자기 정신의 불규칙한 역할로 꾸어지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체험으로는 생각한대로 꿈꾸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은 말하기를 “꿈이란 취침 중에 일어나는 뇌신경의 작용이라” 또는 “수면 중에 일어나는 육체적, 정신적, 감각자극에 의한 환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대한 것은 그런 일반 꿈은 왜 꾸어지도록 허용되고 있는가 할 때에 이것은 자연계시가 인간들에게 교훈을 주어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설명하시는 것처럼 꿈을 통하여 인간에게 영혼이 있고 내세가 있음을 증명하며 좋은 꿈은 일시적 기쁨을 누리고 나쁜 꿈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경고로 이용하게 하심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원시인들은 일반적 꿈도 신통한 신의 계시로 알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복술자나 가짜 해몽자들이 나와서 사람들을 유혹하였습니다(창40:5; 41:1; 신2:5), 그래서 신18:10에서는 “길흉을 점치는 자를 용납하지 말고, 꿈을 말하고 해몽하며 그 해몽대로 성취되어도 믿거나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신13:1~3; 렘23:25, 32; 27:9).
성경에 일반 꿈에 대하여 참고하도록 기록된 내용이 있습니다. 전5:7에서 “꿈이 많으면 헛된 것도 많다”하므로 일반 꿈은 슬쩍 지나가는 것이므로 멸시하는 것이 상례란 뜻이고, 유8에서는 “꿈꾸는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꿈을 계시의 방편으로 거짓 이용하는 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어떻게 꿈을 꾸어야 합니까?
1. 영혼의 소중함과 신령한 세계를 사모해야 합니다.
2. 성경으로 하나님 뜻을 배우는 것으로 꿈을 꾸어야 하며
3. 성령 충만한 은혜의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꿈꾸는 생활임을 아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꿈은 영계의 활동을 의미하되 새로운 계시는 다시 주시지 않으며, 요셉에게 꿈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그에게 알리시기 위함인데 그런 뜻이 저희들에게는 성경말씀으로 다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제 75 과 유다의 불륜사건 (창 38:1~30) 목록으로
위의 본문에는 “유다의 불륜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유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1) 야곱의 넷째 아들이고,
2) 요셉이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골육이니 죽인들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그러니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손을 대지 말자”(창37:26~27)고 하여 요셉을 살려서 애굽으로 팔려가도록 제의한 사람이었고,
3) 메시아 계열의 조상이 된 사람입니다. 가나안 여인 수아의 딸 사이에서 “엘”과 “오난”과 “셀라” 세 아들이 있었으나 엘은 장가간 후 자식이 없이 벌을 받아 일찍 죽었고(7절), 둘째 아들 오난은 형에 대한 계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악으로 인하여 벌 받아 죽었으며(9~10절), 셋째 아들 셀라에게서 후손을 보기 전에 유다가 과부된 자부와 관계를 맺어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 큰아들 “베레스”의 계통으로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아담이 1대, 노아가 10대, 아브라함이 20대, 유다가 23대, 베레스가 24대, 다윗 33대, 예수님이 64대로 되어 있음).
2. 본문 말씀은 4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유다의 취처와 세 아들을 낳음(1~5절).
② 아들의 죽음과 계대 결혼에 관한 내용(6~11절).
③ 유다의 아내가 죽고 유다가 자부를 범하여(12~23절) 자식을 낳는 내용(24~27절).
④ 그 불륜사건의 결과를 처리하는 내용(24~30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선 대목별로 살핀 후에 이 말씀이 기록된 이유와 교훈을 받기로 하겠습니다.
1) 유다의 취처와 세 아들(1~5절).
①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후에 유다는 자기 고장 헤브론에서 30리쯤 북쪽에 있는 “아둘람”에 내려가서 친구 히라를 만났고(12절) 그곳에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아내로 취하였습니다(12절).
② 그 사이에서 엘과 오난과 셀라, 세 아들을 낳았는데 그 당시에 유다는 거십에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거십”이란 지역은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땅 안에 있는 동리 이름인데 확실한 위치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2) 아들의 죽음과 계대 결혼(6~11절).
① 유다의 장자 “엘”이 “다말”과 결혼을 하였는데 “엘이 하나님 목전에 악하므로 하나님이 죽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어떤 악으로 죽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삼상2:6에서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하였고, 잠10:27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하므로 하나님은 인생의 수명을 좌우하시고, 쓰실만한 자에게 장수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 잠16:31에서 “백발은 여호와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의 의로운 길이란 바르게 사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바르게 사는 자의 백발(장수)이 영화의 면류관이 되고 또 하나님은 바르게 사는 자에게 백발 되는 장수의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특별섭리로 단명하는 자를 제외하고).
② 그런데 “엘”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를 세상에 더 두실 필요를 느끼시지 않을 만큼 악하여 하나님이 죽이셨다고 하였습니다. 엘이 일찍 죽은 것이 죄로 말미암은 징벌임은 사실이나 그것이 영원한 심판(지옥)과 연결되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③ 그래서 엘의 아내 “다말”이 과부가 되었는데 그 당시에 계대 결혼풍속이 있었습니다. 계대 결혼이란 장가간 형제가 자식 없이 일찍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과부된 형수(계수)와 동침하여 죽은 형제의 후사를 이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후손들에게 민법으로 주어진 것은 약 500년 후인 출애굽 때였지만(신25:5~10) 야곱 시대에도 이미 시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④ 그래서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과 형수로 계대 결혼을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오난이 죽은 형에게 후사를 이어주는 것이 싫어 고의적으로 수태를 피하였으니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악하게 여겨져 그도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⑤ 하나님이 오난의 소행을 악하게 보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 오난은 형의 후계자가 없을 때 장자권 상속에 따른 재산을 탐하였을 수도 있고,
㉡ 자기의 혈육이 족보상 형의 아들이 되어 가문을 계승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 이는 한마디로 표현하여 형에 대한 사랑과 봉사가 없음은 물론 부모의 의도까지 무시한 불효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그도 죽이셨습니다.
⑥ 이렇게 되니까 유다는 그 과부된 자부에게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수절하고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유다가 처음에는 계대 결혼의 성실성을 보였지요. 그래서 자부 다말은 수절하고 기다렸는데 셀라가 장성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만일 셀라를 계대 결혼시켰다가 그도 죽으면 어찌하나 하는 염려 때문에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다가 자부에게 “계대 결혼을 시킬 것이니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수절하고 기다리라” 하여 젊은 자부를 수절하게 하고 나중에 아들을 주지 않았으니 큰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그래서 어떤 결과가 생겼습니까?
① 그 후에 유다 자신도 상처를 당하여 홀아비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자가 과부 되어 혼자 사는 어려움보다 홀아비 된 신세는 더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수절한 자부를 생각지 않은 유다에게 하나님은 그 자신이 그 어려움을 체험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② 유다가 친구 “히라”와 함께 “딤나”에 올라가서 양털 깎는 일을 한다는 말을 듣고 “다말”은 그를 유혹하여 후사를 가질 목적으로 자신을 창녀처럼 변장하고 “에나임” 길거리에서 유다를 유혹한 것입니다. 유다가 그 창녀를 보자 자부인 줄을 모르고 들어가기를 원하자 그 창녀는 값을 청하였고 그 값을 염소새끼로 하겠다 한즉 우선 “증표를 먼저 내라” 하여 그의 도장과 도장 끈과 지팡이를 증표로 받고 동침하여 잉태를 하였고, 유다는 집에 와서 그 약조물을 찾으려고 염소새끼를 보내어 그 친구로 하여금 돌려받게 하려 하였으나 그런 창녀는 찾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유다는 음행을 하였고 또 자부를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부를 범하면 죽이도록 율법은 명하였으나(레20:12) 유다는 율법공포 이전의 사람으로 자부인 줄 모르고 음행을 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약조물을 찾는 일에 대하여 자기책임을 다 하였은즉 더 이상 발설되면 부끄러우니까 그만 두자하여 찾기를 포기하였습니다.
③ 석 달 후에 그 자부가 “행음하여 잉태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지자 유다는 자기로 된 일인 줄도 모르고 “당장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명하니 다말이 화형장으로 끌려 나가면서 약조물을 내보이며 “이 물건의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다”고 하였을 때 유다는 자신의 소행임을 알고 “내가 셀라를 주지 않은 연고로 그렇게 하였으니 그는 나보다 옳다”하여 그를 용납하고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 것입니다.
④ 결국 자부 다말이 그 일로 인하여 쌍둥이를 낳았는데 먼저 나온 “베레스”가 메시아의 계열이 되었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세라”였습니다.
3. 결론적으로 몇 가지 의문을 풀고 교훈을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1) 이런 사실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후사를 귀하게 알고 계대 결혼을 시행하던 시대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2) 이런 사실이 성경으로 기록되어야 할 이유는,
① 메시야 계열의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기 위함과,
② 메시야 예수님의 조상도 도덕성 문제와 이방 여인 문제 등의 결점을 가진 것은 죄 많은 인간들이 과거의 장점이나 약점을 문제시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요,
③ 하나님은 과오 있는 죄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④ 범죄자라도 얼마든지 고치시고 치료하여 쓰시는 분이심을 알려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3)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① 유다의 계열로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작정하신 하나님이시므로(창49:10) 그 뜻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셨고,
② 자부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약속을 위반한 유다에게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홀아비 되는 징계를 내리셨으며,
③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인하여 책임을 회피한 결과가 더 큰 불상사를 일으키게 된 점과,
④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부정행위로도 막을 수 없음과,
⑤ 그 당시의 사람들이 후사와 계대 문제를 귀중히 여긴 점과,
⑥ 하나님 앞에 악하게 보이면 하나님은 죽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것과,
⑦ 인간의 성적본능과 욕구, 또 계대 의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범죄하게 되는 문제를 크게 경계할 것과,
⑧ 자기의 잘못은 반성하지 않고 타인의 잘못만 문책하려드는 조급하고 편벽된 사람들에 대하여 중대한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제 76 과 요셉의 애굽생활 (창 39:1~23) 목록으로
창세기 39장에는 요셉의 애굽생활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① 요셉이 애굽에 끌려 와서 “보디발”의 집으로 팔린 사실(1절), ②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신 사실(2~6절), ③ 그 집 여주인의 유혹을 물리친 일(7~12절), ④ 혐의를 덮어쓴 일(13~20절), 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으나 그곳에서 또 형통케 하신 일(21~23절)등입니다.
1. 요셉이 이스마엘 상고들에게 이끌려 애굽에 가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대통령 경호실장이나 수도경비사령관 같은 직위)에게 팔렸습니다. 당시 바로는 12왕조의 한 왕에 해당될 것입니다. 요셉이 어떤 곳에 가서 사느냐 하는 것도 그의 성공을 가름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이 될 것이며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자는 그런 인도도 복되게 받아야 합니다.
2. 요셉은 그 집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2~6절).
1)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2절).
2) 아울러 요셉을 형통하게 인도하여 주셨으며(2절)
3) 주인이 요셉을 볼 때 하나님이 복 주시는 자로 인정하게 하셨습니다(3절).
4) 가정 총무로 삼아 모든 소유를 맡은 청지기처럼 일하게 하신 것이며(4절),
5) 그 일 후에 요셉으로 말미암아 그 집이 평안하고 밭의 소유가 더 풍족해진 일이며,
6) 주인이 모든 것을 다 위임하되 자기가 먹는 식료문제와 자기의 처(9절) 외에는 다 맡긴 일로서 요셉에게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요셉 자신의 신앙적 행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3. 그런데 요셉에게도 어려운 시험이 왔습니다(7~12절).
1) 그 시험은 주인의 처가 요셉의 용모의 준수하고 아담함을 탐하여(6절) 눈짓으로 유혹하고 동침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2) 요셉은 처음부터 거절하였고 다음에 주인이 자기에게 위임한 사항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말로 권면하였으며 또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득죄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9절).
3) 그러나 그 여인은 날마다 유혹하였고 요셉은 그를 피하여 함께 있지도 않았지만 한 번은 가사일 관계로 들어갔다가 옷을 잡히고 동침을 요청 받는 입장에 이르게 되자 요셉은 잡힌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벗어 버린 채 도망하여 나온 것입니다.
4) 요셉은 이렇게 하여 죄의 유혹을 물리친 것입니다.
4. 그러나 그 여인은 욕구불만에 따른 악의에 찬 태도로서 그 죄를 요셉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13~21절).
1) 그 여주인은 집사람들을 불러 놓고 주인이 데려 온 히브리 사람이 자기를 겁간하려 하는 것을 소리 질러 쫓으니 그가 옷을 버린 채 도망하였다 하였습니다.
2) 또 그 주인에게도 같은 말로 요셉을 모함하니 주인도 크게 노하여 요셉을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넣은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정의를 지키고도 모함을 당하는 경우가 된 것입니다.
5. 요셉은 감옥에서도 형통케 하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21~23절).
1) 역시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이요.
2) 전옥을 통하여 은혜를 받게 하시되 전옥이 모든 죄수를 요셉에게 맡겨 사무를 처리하게 한 것이며,
3) 전옥은 요셉의 하는 일을 신임하여 돌보지 않았고,
4) 하나님은 그의 범사를 형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창세기 39장은 크게 어려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이 말씀에서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하는가 할 때,
①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는 은혜입니다. 2,3,23절에서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하셨으니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는 것을 은혜로 깨닫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② 보호, 인도, 형통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고(2절) 하나님은 범사에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3,23절).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하시는 일과 요셉 때문에 주인의 집이 복되는 일까지 애굽 사람이 확인할 수 있도록 현저하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3,5절). 우리도 은혜 받고 형통하며 이웃에까지 복을 끼쳐야 하겠습니다.
③ 하나님은 역경으로 인도하여 성공하게 하십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노예로, 모함을 당하고 감옥에 가는 일도 하나님이 인도하심인 줄 믿어야 할 것입니다.
④ 요셉이 유혹을 힘써 이긴 것과 그 일로 모함을 받고 일시적인 고난은 당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환경에서도 은혜를 베푸시고 형통케 하실 수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⑤ 또 음행의 유혹을 피하므로 이긴 것과 악인의 음모에 의인이 피해를 당할 수도 있지만 결국 하나님은 의인의 편이 되시어 모든 일을 형통하게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바라는 성도들이 되셔야하겠습니다.
설교보충 31. 유혹을 이긴 요셉 (창 39:7~12) 목록으로
요셉에게는 두 가지 유혹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음행의 유혹이니 이는 실제적으로 당한 일이요, 또 하나는 자기를 판 형들과 자기를 무고히 감옥에 넣은 자를 원망할 수 있는 유혹인데 요셉은 이 유혹을 다 이긴 것입니다.
1. 여주인이 요셉과 동침하자는 유혹을 이김.
1) 요셉은 음행죄가 하나님 앞에 범하는 큰 죄악임을 알고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39:9)하였고,
2) 요셉은 자기 것과 남의 것에 대한 구별이 확실하였습니다.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39:9) 하면서 남의 아내에게 손을 대는 것을 큰 잘못으로 여겼습니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크게 두려워함이었습니다.
4) 양심을 지켰습니다. 양심이 흐려지면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흐려진 양심은 스스로의 모순을 합리화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사람은 살인죄를 범하고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현직 대통령이 특사를 선언하였지만 ‘양심상 특사를 받을 수 없다’하고 처형당한 일이 있다 하며 일본의 동지사대 총장이었던 신도양씨는 학생들에게 금주운동을 편 일이 있는데 그가 항해 도중 승객으로부터 이 배에는 아무도 없으니 음주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하는 권주를 받았으나 양심상 거절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시를 받는 것이 양심이요, 이 양심이 맑아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5) 죄를 피한 것입니다. 다른 유혹은 대항하여 이길 수 있지만 “음행죄는 피해야 이긴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고전6:18; 딤전6:11; 딤후2:22; 요일5:21). 이와 같이 요셉도 겁간하는 상대를 피하기 위하여 옷을 버리면서까지 도망친 것입니다. 뱀은 위험이 올 때 멀리서 살펴 알고 머리부터 숨기는 지혜가 있습니다. 성도들도 폭력이나 대항 등 위험한 환경을 잘 피해야 합니다.
6) 인간적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유혹을 박차고 나올 때 여주인의 음모와 학대를 예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심한 고통을 무릅쓰더라도 죄의 유혹을 이겨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용기를 다한 것입니다. 마10:28에서는 “육체만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과 육을 아울러 지옥에 보내는 자를 두려워하라”하셨고, 히13:6에서는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이 핍박을 받으면 하나님이 의인의 길에 서신 것을 믿고(잠8:20) 담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요셉은 자기를 애굽으로 보낸 형제들과, 또 자신을 옥에 넣게 한 여주인도 원망하지 않고, 또 자신의 부탁을 받고 2년간이나 망각한 술 따르는 관원도 원망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런 과정과 그런 이들을 이용하여 자신을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창45:7~8; 삼하16:10; 롬5:3~4; 약1:12). 아무도 원망하지 않으며 유혹을 이긴 요셉의 신앙을 잘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32. 역경에서 형통하게 하심 (창39:20~23) 목록으로
1. 요셉이 당한 역경은
1) 일찍 어머니를 잃었습니다(창35:19).
2) 형들의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창37:19).
3)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는 위기에 처하였습니다(창37:20).
4) 노예의 신분으로 11년을 살았습니다(창37:36).
5) 2년간 감옥생활을 억울하게 하였습니다(창39:20, 41:1).
2. 요셉이 구출되고 형통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즉,
1)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시40:2).
2) 흑암으로 빛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사5:20).
3)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롬4:17).
4)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익히 아시는 하나님(시139:1~4).
5)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슬픔을 참으면 복이 있음과(벧전2:19).
6) 르우벤, 유다, 애굽으로 가는 상고, 시위대장, 여주인, 감옥생활, 바로, 관원장, 꿈, 풍년, 흉년 등을 이용하여 요셉을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며 연단시키시고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3. 요셉에게 배울 점
1) 정의감을 갖고 유혹을 피하며 악을 유감스럽게 여긴 일.
2) 그가 꿈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은 곧 계시의 정신이 밝은 성경지식과 같은 것이며,
3) 인내하는 신앙을 가졌으니 노예생활에서도 인내하고 감옥 생활에서도 인내하였으며,
4) 섭리를 믿는 신앙이 있었으니 이는 자신이 애굽에 오게 됨을 유익한 복이라 한 것이며(창45:8).
5) 형들의 죄를 거론치 않음으로 용서하는 신앙을 가졌고(창50:19~20),
6) 일가족과 이웃나라까지 먹여 살리는 봉사자요,
7) 자기의 유골을 가나안 땅에 묻으라 하므로 본향을 사모하였으며(창50:25; 히11:13~16).
8) 말년에 부모를 섬긴 효자였습니다.
설교보충 33. 요셉이 받은 복 (창 39:2~3) 목록으로
요셉이 받은 복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복이었습니다(2절).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는 복은 참으로 큰 복입니다. 시73:23에서 “내가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하였고, 또 시73:28절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하였으며, 요14:23에서는 “예수님이 계명을 지키는 자와 거처를 함께 하신다” 하셨으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이기 때문에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약1:17).
2. 범사에 형통하는 복이었습니다(2,3,23). 역경에서 건짐을 받고 잘되는 것이 범사에 형통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세 번 역경을 당하고 거기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1) 형들의 시기를 받아 죽음을 당할 뻔한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죽이려 하다가 구덩이에 넣었고, 또 구덩이에서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2) 애굽의 노예시장에서 어디로 팔려가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는 것인데 여기에서도 형통하여 좋은 집으로 가게 된 것이요,
3) 죄 없이 감옥에 들어갔으나 거기서도 감방장이 되어 형통하다가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형통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화도 복으로 바꾸시고(신11:26), 악의 경향도 선으로 바꾸시며(창50:20)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도 건져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시40:2).
3. 봉사하는 복을 받았습니다(창49:22). 요셉은 자기 아버지의 가족 70여명과 애굽과 가나안 땅의 모든 백성들을 흉년 중에 살게 한 사람이요. 창49:22에서 “요셉은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한 말씀이 바로 이웃에 봉사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담으로 넘어간 가지의 과실은 담 밖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애굽 사람의 집에 살 때에 그 집이 복을 받은 것도(39:5) 역시 그런 뜻입니다. 요셉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은 역시 봉사하는 복일 것입니다. 행20:35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받기를 바라지 말고 달라 하지 않으며 주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4. 장자의 기업을 받은 것입니다. 요셉이 열한 번째 아들이지만 장자 르우벤의 잘못으로 그가 장자의 실제적 기업에서 제외되자 야곱은 장자의 기업을 요셉에게로 돌린 것입니다(창48:5~6, 대상5:1~2). 그래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명의로 갑절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복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셔서 받기도 하고 또 받을 자가 못 받게 된 것을 대신 받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요셉이 어떻게 하여 이런 복을 받았을까요?
1)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특출하였습니다(창50:19).
2) 주어진 환경에 충실하였고,
3) 결백한 생활을 제일로 삼았으며(창39:9),
4) 애매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인내하며 성실하였습니다(벧전2:19).
5) 인간배경 없이 하나님을 의지한 결과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설교보충 34. 요셉이 성공한 이유 (창 39:21~23) 목록으로
위 본문에서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고 요셉을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출33:19과 대하16:9, 행13:21을 보시면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를 주실 만한 자에게 베푸신다”고 하였습니다. 요셉도 은혜를 받을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1. 요셉은 의로운 생활을 힘썼습니다. 창37:2에서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한 일”과, 창39:7~12에서 “음행죄의 강한 유혹을 힘 있게 물리친 일”과, 창40:15에서 “옥에 갇힐 일을 행하지 않았다”함이 그 증거가 됩니다.
2. 아버지의 양치는 일에 근실하였습니다(37:2). 이는 요셉의 본업이요 그 직업이 서민적이었습니다.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이 다 양치는 목자이었고 베드로는 어부요, 마태는 세리요, 바울 사도는 천막업자였으나 모두 하나님이 귀하게 쓰셨으므로 누구든지 자기 본업에 충성하는 자를 하나님은 들어 쓰셨습니다.
3. 요셉은 영감의 지식이 풍부하였습니다. 요셉은 17세 소년 때 두 번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었습니다(창37:5~9). 또 30세 때에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꿈을 해석하였으니(창40:13), 이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으로 받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계시를 받은 것은 바로 우리의 성경지식 영감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시91:14에서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하였습니다.
4. 요셉은 아버지 말씀에 순종을 잘하는 효자였습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180리의 험한 길을 요셉은 17세의 소년으로 심부름을 갔고(37:13) 아버지의 뜻에 순종을 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효도하는 자를 복주십니다(엡6:1~3).
5. 요셉은 어려운 환경을 인내로 잘 극복하였습니다. 요셉의 노예생활 11년과 감옥생활 2년은 어려운 환경이 있었고, 또 그렇게 되기까지 애굽으로 팔려간 일과 유혹을 이기고도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가야 하는 일들은 보통 어려움이 아니었지만 그것을 인내와 기도로 극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슬기롭게 감당하는 자를 귀하게 쓰십니다(롬5:3~4; 약1:12).
6.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소망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섭리란 인간의 계획에 구애됨이 없이 또는 그런 것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45:7~8에서 “요셉이 애굽으로 오게 된 것은 그 형들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흉년에 자기 가족들을 먹이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라”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의 말씀은 삼하16:10에도 있습니다.
7. 요셉이 17세에 꿈의 계시로 자신의 성공을 확신하고 잘 견디며 기다렸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닥쳐오는 환난도 성공의 지름길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신앙의 성도는 소망이 무궁할 뿐 낙심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고전13:13). 요셉이 고독한 환난을 당할 때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를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시10:14; 68:5).
요셉이 노예로 팔려 왔을 때와 또 감옥에 들어갔을 때는 인생으로서 최고의 고독을 느꼈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39:2,21)는 말씀이 바로 그가 하나님을 의지한 사실을 입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 패트릭”이란 사람은 어릴 때에 해적에게 붙잡혀서 아일랜드로 팔려갔고 거기에서 어떤 집의 목동이 되었는데 그는 그 고독한 환경에서 산과 들로 헤매며 기도하기를 힘쓰는 중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크게 위로를 받았으며, 그 후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아일랜드에 가서 자기가 일하던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를 하여 367처의 교회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과 같은 고독은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일어서는 기회라는 것을 아셔서 더욱 소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젊어서 연단 받는 고생을 하면 나중에 큰 은혜를 받습니다.
8.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성공한 후에
1) 형들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였고(창50:17),
2) 아버지의 가족 70명에게 생활 기업을 주었으니(창45:11; 46:27) 이는 그에게 용서(사랑)의 정신과 봉사의 정신이 컸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젊어서의 고생이나 환경의 불우함이 결코 성공의 길을 막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그런 과정을 통하여 더 큰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서 더욱 신앙인의 길을 잘 걷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77 과 요셉의 꿈 해석 (창 40:1~22) 목록으로
지금 읽은 말씀에는 요셉이 꿈을 해석한 내용이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요셉의 꿈 해석”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4절은 요셉이 있는 감옥에 바로의 두 신하가 들어와 함께 있게 되는 내용이고, ② 5~19절은 두 신하의 꿈을 요셉이 해석하는 내용이며, ③ 20~23절은 그 꿈대로 성취되는 내용입니다.
1. 바로의 두 신하가 감옥에 들어오는 일에 대하여(1~4절)
1) 이때는 요셉이 감옥에 들어간 지 수일 후였는데(4절),
2) 바로 앞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왕에게 죄를 범하여 왕이 그들을 옥에 가두게 하였는데,
3) 그 옥은 바로 요셉이 갇혀있는 시위대장의 집안에 있는 왕실 감옥이었던 것입니다.
4) 시위대장은 바로의 두 신하를 왕명에 따라 감옥에 넣으면서 요셉으로 하여금 감옥 안에서 그들을 수종 들게 하므로 요셉이 감옥에서 두 죄수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5) 섬기는 복을 받은 사람은 감옥에 가도 그 복을 받습니다.
6) 이상의 말씀에서 두 관원장의 범죄한 것과 그들이 들어간 것이 요셉과 관련이 있는가?
① 그들이 섬김의 대상이 되었으니까 관련이 있고,
② 그들의 꿈을 해석하고 그 꿈대로 성취되어 요셉이 꿈 해석의 명수로 알려졌으니까 관련이 있으며,
③ 그것을 계기로 2년 후에 바로의 꿈을 해석하므로 애굽 총리가 되었으니 확실히 관련이 있는 사건입니다.
7) 그런데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 사건이 요셉이 감옥에 들어간 지 수일 후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하나님이 요셉을 구출하시려는 작전을 수일 후부터 시작하셨고 그 시작한 내용이
① 두 관원장이 범죄하는 일과,
② 바로가 노하여 그들을 감옥에 넣은 일과,
③ 시위대장이 그들을 요셉이 있는 감옥에 넣으면서 수종 들게 한 일과,
④ 그 다음에 두 관원장이 꿈을 꾸게 한 일과
⑤ 요셉에게 그 꿈의 뜻을 알려주시고 그대로 성취되게 하신 사실과
⑥ 나가는 관원이 요셉의 부탁을 받고 2년이나 잊은 사실과
⑦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으나 해석할 자가 없자 비로소 사면을 받아 나간 신하가 요셉을 기억하고 천거하여
⑧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로 바로의 꿈을 해석하므로 왕의 신임을 받고 형통하게 되는 일인데, 이 일을 하나님이 요셉이 감옥에 들어간 지 수일 후부터 역사하셨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2. 두 신하의 꿈 내용과 해석에 대하여(5~19절).
1) 그들은 하룻밤에 각각 몽조가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이 꿈은 보통 꿈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역사가 꼭 신령한 종들을 통하여만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복되게 하시는 일과 관련하여 애굽의 신하들과 왕에게도 꿈을 주셨고, 출애굽 때에는 발람을 깨우치시기 위하여 나귀의 입을 여신 일도 있었으며(민22:28) 바벨론 시대에는 다니엘을 구출하시기 위하여 느부갓네살 왕에게 계시하신 일이 있었습니다(단2:1,5:5). 하나님은 만물도 계시의 방편으로 쓰십니다(롬1:20).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이요, 계시 절차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2)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은 자기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세 가지가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며 자기가 그 포도즙을 짜서 바로에게 드리는 꿈을 꾸었고 또 떡 맡은 관원장은 흰 떡 세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맨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한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는 꿈을 꾸었습니다.
3) 그들은 이 꿈을 꾸고 근심 빛이 있었습니다(6절). 포도주 꿈을 꾼 사람은 “그 꿈이 반대로 되면 어찌하나?”하고 근심하였을 것이고 떡 꿈을 꾼 사람은 불길한 예감에서 근심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꿈이란 것은 해석이 감취어 있을 때 좋은 꿈이나 나쁜 꿈이나 모두 근심을 안겨줄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이때에 요셉은 봉사성과 사교성이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로 근심을 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만일 묻지 않았으면 그대로 지나쳤을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온 노예에게 “내 꿈을 해석하라”고 말할 고관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타인에게 대한 관심과 대화 한마디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의 질문 한마디가 자신의 길을 형통시키는 열쇠가 된 것입니다.
우선 술 맡은 관원은 한 감방에서 자기를 섬기는 청년이 질문을 하니까 대답을 하면서, 꿈의 뜻을 몰라 답답해 할 때에 요셉은 즉시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그 꿈을 말하라”고 한 것입니다. 요셉은 그 꿈 내용을 듣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그 꿈은 “3일 후에 전직을 회복하여 과거처럼 복직할 것이라” 하고 “당신이 나가면 나는 죄 없이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니 나를 생각하여 건져내 주시오” 하고 부탁하였습니다. 술 맡은 관원의 꿈이 길함을 듣고 있던 떡 맡은 관원도 자기의 꿈 이야기를 하니 그는 “3일 후에 목이 잘리고 까마귀가 그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하므로 불길한 해석을 서슴지 않고 해 주었습니다.
5) 여기에서 저희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① 미래의 계시는 미래를 통치하시는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과,
② 하나님이 요셉을 높이시기 위하여 요셉에게 그런 사실(꿈 해석)을 알려 주셨다는 것과,
③ 그 꿈 내용이 사실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꼭 해석을 필요로 하게끔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 가지나 세 광주리가 3일 후란 것과 바로에게 드리고 못 드린 것이 복직되고 안 된 것을 나타낸 것은 비슷한 일이지만 까마귀가 머리 위에 있는 떡을 먹은 것이 머리가 끊기고 몸까지 까마귀밥이 된다는 것은 비슷하게 상상할 일이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꿈의 계시는 기본 계시를 알게 하시는 예비적인 계시이므로 성도는 항상 희미한 계시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확실한 계시(성경)에 관심을 두셔야 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④ 요셉은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이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불길한 내용이지만 서슴지 않고 말하였다는 사실도 유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불길한 것이라도 꼭 말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저주나 불행한 일도 그것이 계시의 말씀이면 핍박이 와도 증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⑤ 요셉이 나가는 관원에게 자기의 일을 부탁한 사실에 대하여 “관원에게 부탁한다”는 자체가 정당한 사회에서는 비리에 속하지만 요셉처럼 부조리하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결코 비겁한 일이거나 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부탁으로 효력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부탁 받은 사람은 2년 동안을 까맣게 잊어버렸고(40:23; 41:1) 2년 후에 요셉을 기억한 것은 부탁에 의한 기억이 아니요 바로의 꿈 해석을 위한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3. 그 꿈 해석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 3일 후 바로의 생일에 그대로 성취되었으니 한 사람은 참형을 받아 나무에 달렸고, 또 한 사람은 사면을 받아 나온 것입니다.
2) 결국 하나님은 자신이 주신 계시에 책임을 지시고 진실하게 성취시켜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계시의 말씀을 확고하게 믿을 것이요. 또 하나님은 의인을 어떤 경우에서도 도와주시고, 요셉 주위에서 돌아가는 모든 환경의 변화도 요셉의 생애와 유기적 관계로 적용시키는 분이심을 아셔야 합니다. “왜 근심하십니까? 꿈 해석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하고 툭 던지는 말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서 작은 말이나 작은 일 하나하나까지도 의미 있게 생활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78 과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함 (창 41:1~36)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요셉이 감옥에 있은 지 2년 후에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꾸고 애굽의 술객과 박사들로 이를 해석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그 꿈을 풀지 못하여 왕이 번민하게 되자 마침 2년 전 그 감옥에서 요셉의 꿈 해몽을 받고 그 해몽대로 나오게 된 술 맡은 관원장이 꿈 해몽 잘하는 히브리 소년 요셉을 왕에게 천거하여 요셉이 왕 앞에 나아가 왕의 꿈을 해석하고, 꿈과 관련된 일에 대하여 방책을 제시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함”이라고 정하였습니다. 또 이 말씀은 세 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된 경위요(1,8~16절), ② 바로의 꿈과 그 해석이요(2~7,17~24절), ③ 요셉이 베푼 방책입니다(33~37절).
1.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된 경위(1,8~16절).
1) 그때는 요셉이 감옥에 있은 지 2년이 지난 후라고 하였습니다(1절). 감옥생활은 짧은 기간이 아니었을 것이지만 요셉은 꾸준히 인내하면서 옥중생활과 함께 옥중사무(창39:22)를 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2년이란 세월을 요셉을 위하여 섭리에 이용하셨으니,
① 요셉의 부탁을 기억해야 할 술 맡은 관원이 그 사실을 망각하게 하셨고
② 그 동안 요셉을 감옥에서 연단 받게 하셨으며(약1:12),
③ 또 때와 기한을 맞추시는 하나님이 애굽의 풍년과 흉년을 주실 시기에 맞도록 바로 왕에게 꿈도 주신 것입니다. 만일 바로가 꿈꾸기 전에 술 맡은 관원장의 배려로 요셉이 나갔다면 바로 앞에 설 기회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년 동안 요셉을 가두어 대기하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이 자기의 일도 그렇게 통치하신다고 믿고 기다릴 때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막9:23; 마9:29).
2) 그 때에 바로 왕이 크게 몽조가 있을 뜻한 꿈을 두 번이나 꾸고 술객과 박사들을 동원하여 해석을 구하였지만 그들이 해석을 못하므로 왕이 번민하는 기회에 비로소 술 맡은 관원장이 꿈 해석 잘하는 요셉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이런 일도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하시기 위하여 바로에게는 꿈을 주셨고, 술객, 박사들에게는 계시의 지혜를 어둡게 하셨습니다. 바로는 답답하여 번민을 나타내게 되었고 이런 환경의 자극이 술 관원장으로 하여금 요셉을 기억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분입니다(빌4:7). 그래서 성도는 항상 평범하게 이루어지는 생각이나 환경이라도 그 평범한 일 속에 하나님의 특별섭리는 끊이지 않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꿈 해석 잘하는 히브리 소년을 생각하고 술 맡은 관원장은 그 사실을 왕에게 말하여 즉시 요셉을 왕 앞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2. 바로의 꿈과 그 해석에 관한 것입니다(17~24절).
1) 바로는 몽조가 같은 꿈을 두 번 연속 꾸었습니다. 같은 몽조의 꿈을 두 번 나타내시는 것은 계시의 방법상 속히 성취될 것이 확실함을 나타내는 강조라고 요셉은 해석하였습니다(32절).
2) 그리고 바로가 꾼 꿈의 내용이 두 번 나오는데 앞에서 말씀한 것(2~7절)은 대략 표현한 말씀이고 두 번째 요셉에게 말한 꿈 내용이 더 상세한 내용입니다(17~24절). 거기에는 바로가 그런 흉한 것들을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요. 또 “파리한 것이 충실한 것들을 먹고도 먹은 듯도 아니 하더라”(19,21절)는 내용으로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3) 그 꿈의 본질적인 내용은 단순한 것입니다. 즉 일곱 마른 소가 일곱 살진 소를 먹었고 일곱 쭉정이 이삭이 일곱 충실한 이삭을 먹었으나 다 여전하였다는 것입니다.
4) 요셉은 바로 앞에서 이런 계시의 꿈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전제한 후에(16절), 일곱이란 수는 7년을 뜻하고, 살진 소와 충실한 이삭은 풍년을 뜻하니, 7년 풍년 후에 7년 흉년이 들 것인데 여기에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7년 흉년을 견디기 어렵게 될 것을 보여 주신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 해석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받아 말한 것입니다.
5) 요셉이 이렇게 계시에 민감하고 계시를 받는 자이었기 때문에 희망이 있었던 것처럼 성도들도 말씀에 민감하고 말씀계시를 잘 깨달아야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또 요셉은 꿈 해석과 함께 방책을 설명하였습니다.
1) 요셉의 이 방책은 하나님의 특별계시 아닌 일반적 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2) “7년 흉년이 심각할 것이니까 7년 풍년에 양식을 비축하여야 하므로 왕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에게 일을 맡겨 풍년 소출의 1/5을 왕실에서 거두어 적치하면 7년 흉년을 멸망 없이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요셉을 배워야 하는데,
1) 하나님은 선민을 형통케 하시기 위하여 이방인을 들어 쓰시는 분이시고 때와 기한을 맞추시는 분이며 이방인에게 계시도 주시고 풍년과 흉년도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으며
2) 요셉은 고난의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소망 중에 인내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민감할 뿐 아니라 일반 은총으로 받는 생활의 지혜도 뛰어난 사람임을 알 수 있으니 저희들도 하나님의 오묘하신 통치 안에서 요셉처럼 믿음과 소망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79 과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 (창 41:37~57) 목록으로
지금 읽은 말씀은 요셉이 바로 앞에서 신의 감동을 받고 지혜와 명철이 있는 자로 인정을 받고, 크게 높임을 받아 애굽의 총리가 되므로 요셉의 신변이 크게 변화된 후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고 풍년 중에 비축한 양식을 흉년기에 파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지를 구분하면 세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요셉이 애굽의 총리 되는 내용(37~44절), ② 요셉의 가정 내용(45,50~52절), ③ 요셉이 애굽을 다스리는 내용(46~49,53~57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37~44절).
1) 바로와 신하들은 요셉을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라 하였고 또 요셉처럼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 하여 총리직을 명하면서 “내 집(애굽 나라)을 치리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감옥생활 2년을 포함한 애굽생활 13년 만에 30세의 나이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16절).
2) 왕은 요셉을 치리자로 세운 증표로 자기의 인장반지를 요셉에게 끼워 주었고 존귀한 자가 입는 세마포 옷과 금사슬을 착용시켰으며, 버금 수레에 태워 백성들 앞에 효유(잘 공개하는 것)시키며 요셉을 크게 높였고 그의 이름도 “사브낫바네아”(하나님이 말씀하심)로 고쳐 주었습니다.
3) 여기에서 저희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① 요셉이 13년의 고난과 선행 끝에 영광을 입게 된 것과,
②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일시에 일어난 것과,
③ 하나님이 낮은 자를 그 진토에서 들어 존귀하게 하셨다는 것과(삼상2:8),
④ 요셉이 애굽에 팔려 노예가 되고 감옥생활을 2년이나 하면서 기다린 것이 모두 다 형통하게 되는 절차였음과,
⑤ 하나님은 요셉에게 계시를 베푸셨고 바로에게 꿈을 주셨으며, 또 술 맡은 관원장과 애굽의 박사들을 어둡게 하셔서 요셉을 형통하게 하신 것과,
⑥ 바로의 꿈으로 “자기 나라의 미래에 있을 일”을 알게 하시면서 요셉을 높이는 목적에도 쓰시므로 하나님이 택자와 비택자를 결탁하여 통치하시는 섭리들을 알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4) 오늘 우리의 꿈 해석은 성경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나는 종교개혁 당시부터 꿈이나 환상이나 천사보기를 구하지 않았고, 다만 성경을 바로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였으며 성경대로 행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길로 다니며 잘못에 빠지지 않는 줄로 안다’고 하였습니다.
5) 요셉이 명철하고 신에 감동된 자였기 때문에 형통한 것처럼 저희들도 성령 충만으로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요셉은 가정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45,50~52절).
1) “온”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삼은 것이고,
2) 거기에서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았으니 풍년기간 내에 큰아들을 낳아 “모든 고난과 아비의 집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으로 므낫세(잊어버림)라 하였고, 또 자신이 그 땅에서 창성한 것을 기념하여 둘째 아들 이름을 “에브라임”(창성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총리에 임하면서 과거를 잊을 만큼 분주하였고 또 둘째 아들을 낳을 때도 크게 창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되는 것은 장인 “온”제사장에 관한 것입니다.
① “온”은 카이로에서 동북방 12km 지역으로 고센 땅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전설로는 예수님이 피난가신 곳이라 함),
② 당시 “보디베라”는 그곳의 종교풍속에 따라 태양신을 섬기는 제사장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③ 그러나 그의 딸 “아스낫”과 요셉총리가 결혼할 때는 신앙이 일치해야 하므로 “아스낫”이 요셉의 섬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개종하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가 요셉을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자로 칭찬하고 그에게 자기 집을 다스리는 일까지 맡겼음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41:38~39).
3. 요셉이 애굽을 다스린 내용입니다(46~49, 53~57절).
1) 그는 먼저 애굽 온 땅을 순찰하였고(45, 46절),
2) 7년 풍년 중의 심히 많은 소출을 1/5씩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였으니 그 수량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34절),
3) 흉년이 들기 시작하자 애굽의 백성들과 그 이웃나라들까지 기근이 생겨 바로에게 양식을 구하므로 요셉이 창고를 열고 양식을 팔았으며 기근 당한 각국 백성들도 양식을 사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사실대로 성취되었고, 요셉의 지혜 역시 사실대로 적중되었으며,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신앙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크게 형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백성들과 이웃나라에까지 덕을 베풀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역사를 영적으로 비유하여,
1) 애굽은 죄악세상, 요셉은 그리스도, 술 맡은 관원장은 구원받은 백성, 떡 맡은 관원장은 멸망 받은 백성, 요셉이 은 20에 팔려 고난당한 것은 예수님이 은 30에 팔려 고난당한 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2) 또 성도는 영혼의 양식에도 기갈 당함이 없도록 늘 풍부하게 공급받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본래 비유란 측면적으로 부분적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 속에는 이삭이나 다윗, 호세아 등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비슷하게 모형하는 계시들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앙 편에 있는 신자를 어떤 역경에서라도 희망 있게 인도하실 수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시40:1~2).
제 80 과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사러 감 (창 42:1~25)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는 가나안 땅에 사는 요셉의 형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가서 요셉에게 알려졌으나 요셉이 모르는 척하며 그 형들의 실상을 알아보기 위하여 심문을 하고 1차로 양식을 주어 보내는 내용이 기록되었으므로 총 제목을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사러 감”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이 본문 말씀은 4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감이요(1~4절), ② 요셉이 그들을 심문함이요(5~20절), ③ 요셉의 형들이 과거의 죄를 뉘우침이요(21~23절), ④ 요셉이 방책을 써서 1차로 양식을 주어 보내는 내용입니다(24~25절).
1.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에 감(1~4절)
1) 그 때는 애굽의 풍년 7년을 보내고 흉년이 들기 시작한지 2년이 채 못 되었을 때이니까(두 번째 사러간 때가 2년이라 함, 창45:10),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지 약 22년이 되는 때요. 요셉이 17세에 집을 떠나서 39세쯤 되었을 때입니다.
2) 그 때에 가나안 땅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풍년과 흉년이 든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인류들에게 복과 징계를 주시는 방법의 일종입니다(신28:11~19).
3) 야곱의 집에 양식이 궁해지자 야곱은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들들을 독촉하여 양식을 사러 보냈습니다. 우리는 영적 양식을 그렇게 사모하며 구하러 다녀야 합니다(렘15:16).
4) 그 때에 야곱은 말째 아들 베냐민을 보내지 않았으니 이는 옛날의 요셉처럼 그에게 재난이 미칠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4절).
5) 그리고 야곱은 열 아들에게 베냐민을 맡기지 못할 만큼 그 아들들을 신임하지 못하였습니다. 야곱은 그때까지도 요셉을 없앤 범인이 자기 아들들이란 것을 몰랐지만 다른 아들들을 성실한 자들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 요셉을 없앤 죄를 아버지에게 숨기고 있었으니까 그 아들들이 성실하지 못한 취급을 받아도 마땅한 것입니다.
2. 요셉이 양식 사러 온 형들을 심문하는 내용입니다(5~20절).
1) 요셉이 각국 사람들에게 양식을 팔 때 그의 열 형들도 왔습니다. 그때는 요셉이 그들을 떠나 온지 22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2) 그때에 요셉은 형들을 쉽게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요셉이 열 명의 형들을 알아본 것은 그들이 가나안 말을 하고 형제 구성이 명확하며 또 성년에서 장년으로 성장한 것이니까 20년 전 모습에 큰 변화가 없지만 요셉은 소년에서 장년으로 변화되었고 또 그가 애굽 총리로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음이 당연합니다.
3) 이때에 통변을 세워 대화를 하면서(23절) 속히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형들의 성실성 여부를 탐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숨긴 것은 우선 형들의 진실성을 파악하려고 한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처음부터 자신을 알렸다면 그들은 외식적으로 요셉 앞에서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셉이 보복할 것이 두려워서 그 가족이 아니란 식으로 말입니다.
4) 그 당시 요셉의 소원은 반가운 인사나 가족에게 양식을 보내는 일 보다도 형들의 변화로운 생활을 확인하기를 더욱 원하였던 것입니다. 저희들도 양식을 구하는 일(생활대책)에 앞서서 정의롭게 생활하는 변화의 바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5) 그래서 요셉은 형들의 성실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그들을 ‘정탐’이라고 엄포를 놓았으니 이것은 그들의 진실성을 상세히 밝히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수사하는 사람들이 유도심문을 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양식 사러온 형들을 정탐이라고 몰아세운 것이 안 좋은 일이지만 진실을 알기 위한 일시적인 위장술이요. 또 애굽을 외세에서 보호할 책임자로서 그만한 타진은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6) 이때에 요셉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꿈을 생각하였습니다.
7) 형들은 정탐 아닌 증명을 하기 위하여 “가나안에서 왔다.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독실한 자들이다. 말째는 집에 있고 하나는 없어졌다”고 대답하니까 요셉이 말하기를 “당신들이 독실한 사람들이고 또 당신들의 말이 진실하다면 너희 중 한 사람이 가서 말째 동생을 데려다 놓고 이를 증명해야 할 것이라. 만일 그렇게 못할 때는 정탐이 틀림없을 것이라” 하고 그들을 3일 동안 가두었다가 3일 후에 다시 나오게 한 후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당하게 은혜를 베풀 것인즉 한 사람만 갇혀 있고 다른 사람은 다 양식을 가지고 가서 식구들의 주림을 구하고 다음에 올 때 꼭 말째 아우를 데리고 와야 할 것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8) 이상의 말씀에서 세 가지 주목을 끌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① 9절 말씀에 “요셉이 꿈을 생각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요셉은 어릴 때 깨달은 계시를 항상 간직하고 있다가 22년 만에 그 계시대로 성취될 때 그것을 기억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항상 성경을 간직하고 있다가 한 가지 한 가지 사건마다 성경대로 실천하고 또 성경대로 성취되는 것을 확인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고 말씀과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② 15절에서 “너희의 진실함을 증명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11절에 보시면 자기들 입으로 “독실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그러면 말째 아우를 데리고 와서 너희의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시는데 누가 “진실치 않다. 외식으로 다니는 것이다” 하면 다 싫어하시겠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성경말씀이라면 밤중에 무덤을 파서 시체에 입을 맞추라 해도 할 용기가 있는 사람인데 정성이 부족하다 한다면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은 그 진실성을 증명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생활과 봉사로 증명해야지요. 교회에서 행사가 있거나 헌금이 필요할 경우에 반드시 “물질보다 예수님과 그의 교회를 더 사랑한다”는 진실성을 꼭 증명하시기 바랍니다.
③ 18절에서 요셉이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만 보내어 말째 아우를 데려오게 하려다가(16절),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한 사람만 볼모로 잡아놓고 다른 이는 다 양식을 가지고 가서 식구들의 생명을 보존하라”고 하였으니 이는 “사랑을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척 하는 것은 참으로 가증한 일입니다. 참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고 예수님을 닮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3. 요셉의 형들이 죄를 뉘우치는 내용입니다(21~23절). 21절 이하에서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였다”고 하니 장형인 르우벤이 말하기를 “그 때 그 일로 죄를 짓지 말자고 하였는데도 너희가 듣지 않더니 이제 그 피 값(보응 받는 일)을 내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들은,
1) 그제서야 22년 전의 죄를 깨달은 표시를 나타냈고(최초의 죄의식은 르우벤만 가졌음, 22절),
2) 그들이 요셉을 괴롭힌 죄로 당하는 보응임을 알았으며,
3) 또 “범죄한 자가 그 피 값을 받는 일은 당연한 것”인 줄 알았고,
4) 누구라도 “범죄하지 말라”할 때 듣지 않으면 후회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의 형들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회개하는 증표를 나타낸 것입니다. 회개의 증표는 뉘우치고 확실하게 돌아서는 것입니다.
4. 요셉이 방책을 써서 양식을 주어 보내는 내용입니다(24-25절).
1)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지은 죄를 뉘우치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2) 이때에 요셉은 감동을 받고 그들을 떠난 자리에서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회개의 장면은 다른 이의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회개하는 성도가 많아지므로 눈물이 흔한 생활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려보지 못한 성도는 ‘나는 아직 완고하다’고 느끼셔야 합니다. 그런 완고한 상태는 어디서나 덕을 세우기 어렵습니다.
3) 요셉은 울고 돌아와서 여전히 엄격성을 보이기 위하여 시므온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고 각인의 자루에 곡물을 채우고 길양식을 따로 주고 그리고 또 각인의 돈을 그들 모르게 그들의 자루에 도로 넣어 길을 떠나게 한 것입니다.
4) 왜 그 돈을 받지 않았을까요? 이는 형들에게 거저 주기 위함이요. 물욕에 대한 형들의 양심을 탐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는,
1) 요셉이 진실을 증명 받는 일과
2) 그의 형들이 죄를 회개하는 일과
3) 물욕에 대한 양심을 지키는 일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겼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81 과 일차 곡식을 가져옴 (창 42:26~38)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는 ①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가지고 가다가 한 사람이 자기의 자루에서 돈을 발견하는 내용과(26~28절), ② 집에 도착하여 야곱에게 다녀온 사실을 보고하는 내용과(29~34절), ③ 각인의 자루에서 돈을 발견하고 두려워함(35절), ④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야곱을 설득하는 내용(35~38절)으로 되어 있어서 총 제목을 “일차 곡식을 가져옴”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한 사람이 자루에서 돈을 발견한 일(26~28절).
1) 한 사람이 객점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기 위하여 자루를 열었다가 돈이 자루 아구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2) 이 사실을 안 형제들은 혼난 일처럼 떨면서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하셨는가?” 하였으니 그들의 태도가 사행심에 사로잡힘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하는 올바른 태도를 나타낸 것입니다.
3) 무슨 일이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일”이라고 생각할 때는 신앙중심으로 처리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일”이란 것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시험하시기 위한 일로 여긴 것입니다. 성도는 모든 일을 그런 차원에서 해결하여야 합니다.
2. 집에 도착하여 모든 일을 야곱에게 고하였는데(29~34절) 하나도 거짓이 없이 사실대로 고하였으니 그들이 옛날에 아버지를 속인 때에 비하면 그들의 진실성이 많이 발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각인의 곡식자루를 쏟았을 때 모든 이의 자루에서 다 돈 뭉치가 그대로 나온 것을 보고 처음 발견되었을 때처럼 다 같이 두려워하였습니다(35절).
4. 베냐민을 데리고 가기 위하여 야곱을 설득하는 내용(35~38절).
1) 야곱은 “요셉과 시므온도 없어졌는데 이제 베냐민마저 없어지게 하려고 하느냐?” 하면서 자신을 해롭게 하는 일이라고 거절하였습니다.
2) 이때에 큰아들 “르우벤”이 말하기를 “만일 베냐민을 데리고 갔다가 데려 오지 못하면 내 두 아들을 죽이라”고 하면서 간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아버지의 손자를 죽이라”는 말로 오히려 불효에 해당하는 말이므로 아버지를 감동시킬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 아들을 죽이라는 것은 “담보한다”는 것인데 이 의미는 “대신 바친다”는 뜻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논리를 예표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여전히 요셉의 죽음을 생각하면서(38절) “만일 베냐민에게 재난이 미친다면 너희가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하였으니 이 뜻은 야곱이 구원받지 못하고 떠난다는 것이 아니요, 다만 늙은 몸으로(흰머리) 탄식하며 죽게 되어 무덤으로 내려가게 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자식의 불행을 본다면 그 충격으로 일찍 죽게 될 것이란 탄식입니다.
5.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을 것은,
1) 요셉의 형들이 되돌아 온 돈에 대하여 욕심이나 사행심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두렵게 생각하는 좋은 양심을 가진 것이며,
2) 옛날 20년 전에 요셉을 팔아 은20을 챙긴 때와 비교하면 큰 변화를 나타낸 것이요,
3) 자기들에게 생겨진 이상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 일을 만들어 자신들을 시험하시는 일로 받아드린 점과(28절),
4) 르우벤이 아들을 담보로 아버지를 설득하려 한 것은 십자가 대속의 논리적 예표가 되는 것이며,
5)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만 요셉 앞에서 진실을 증명하고 정탐의 누명을 벗으며 양식문제를 해결하게 됨과 같이 우리들에게도 하나님 앞에서 한 가지 문제가 풀려야 여러 가지 복된 길이 열리는 사실이 있음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 문제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신앙적 접근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꼭 행하므로 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 82 과 야곱이 2차 여행을 허락함 (창 43:1~15) 목록으로
지금 읽은 말씀에는 그 땅에 여전히 기근이 심하고 야곱의 집에 양식이 떨어지자 야곱이 2차로 또 양식을 사오도록 명하지만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그 사람(애굽 총리)을 만날 수 없다”(3절) 하였으므로 유다가 자신의 몸을 담보하면서 자신이 영원히 죄책을 질 것을 제의하며 호소하자(9절) 비로소 야곱이 베냐민을 허락하고 아울러 선물과 함께 갑절의 돈을 갖고 가게 하여 애굽에 도착한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제목을 “야곱이 2차 여행을 허락함”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또 위 본문은 두 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으니, ① 베냐민을 허락하도록 야곱을 설득하는 내용이고(1~10절), ② 야곱이 허락하여 보내는 내용(11~15절)입니다.
1. 베냐민을 보내 주도록 야곱을 설득하는 내용에서(1~10절),
1) 넷째 아들 유다가 애굽 총리의 엄한 말을 상기시키며 “말째 아우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하였으므로 그가 없이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항의하자,
2) 이스라엘이 “왜 아우가 있다는 말을 하였느냐?”고 질책하지만 유다는 그 사람이 자세히 묻기 때문에 말하게 된 것이라 하면서,
① 우리가 그의 몸을 담보하겠고(형제 전체가 책임을 진다는 뜻),
② 내 손에 그를 무르시며(유다가 대표로 그 책임자요 변상자가 되겠다는 뜻),
③ 내가 “영원히 죄를 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원히 죄를 진다”는 것은 만일 베냐민을 잃어버린다고 가상할 때 이에 모든 죄책을 “자기와 자기의 후손까지 담당시키겠다”는 뜻이니 유다는 베냐민을 허락 받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3) 여기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아야 할 것은,
① 유다가 최선을 다한 점이요,
② 유다의 희생정신입니다. 유다는 형제를 대표하여 책임질 것을 강하게 제의하였고, 그 책임을 이행하지 못할 때에는 ‘자기와 자기의 후손이 영원히 그 죄책을 받겠다’고 하였으니 이런 솔선하는 희생자가 꼭 있어야만 어려운 일들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③ 이 사실을 유다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탄생(마1:3)한 것과 결부시킨다면 유다의 담보(9절)가 곧 예수님의 대속을 예표하신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④ 여기에서 요셉은 하나님을, 베냐민은 중보자 예수님을 모형하여 장차 있을 대속적 은혜의 논리를 예시하신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이 허락한 내용은(11~15절).
1) 예물을 갖고 가게 하였으니 이는 비자(호도 같은 과자)와 파단행(살구의 일종)으로 상대방의 환심을 얻기 위함이요,
2) 갑절의 돈도 갖고 가게 하였으니 이는 차착을 예상하였기 때문이요,
3) 베나민도 데리고 가라 한 것입니다.
① 야곱이 그 아들들을 보내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에 근거하였고(14절),
② 또 베냐민을 보낼 때는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하였으니 이 두 가지가 다 믿음에 근거한 행동으로서 “모험을 행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설령 자식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의 섭리로 믿겠다”는 신앙을 나타낸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을 주시는 것은,
1)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때 중보자(베냐민)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2)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때 최선을 다하며 과감한 솔선과 희생이 있어야 하는 일과,
3) 유다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죄의 책임을 지실 것을 예표로 나타내 보이신 일과,
4)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베냐민을 포함하는 열 아들을 보내는 결단과,
5)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베냐민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결심을 함에 대하여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제 83 과 요셉이 형제들을 대접함 (창 43:16~33)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은, ① 베냐민을 데리고 온 형제들을 요셉이 자기 집으로 인도한 내용과(16~17절), ② 요셉의 형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청지기들과 대화하는 내용과(18~24절), ③ 요셉이 형제들을 만나는 내용과(25~28절), ④ 요셉이 베냐민을 상면하는 내용과(29~30절), ⑤ 베냐민에게 다섯 배의 음식을 주고 형제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내용(31~34절)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을 종합하는 내용으로 “요셉이 형제들을 대접함”이란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1. 요셉이 그 형제들을 자기 집으로 인도함(16~17절).
1) 그 형들이 말째 동생을 동반하매 이것이 그들의 진실함을 증명한 것이 되었으므로(42:15) 요셉은 그들을 영접하였고 또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음식 먹을 준비를 갖추게 하였으니,
2) 이것은 진실이 통하는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를 의미할 수 있고, 또 베냐민 한 사람의 요긴한 역할로 요셉과의 상통이 이루어졌음은, 곧 그리스도의 중보로 하나님과의 교제와 은혜의 길이 열려질 것을 예표하는 교훈이 될 수도 있습니다.
3) 은혜를 베푸는 자와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큰 은혜를 받는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석하는 일(마22:11~12), 주님의 만찬에 참석하는 일(마26:26) 또 주와 더불어 먹고 사는 일(계3:20)로도 나타납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동거하고 한 식탁에 앉는 복을 받았으므로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요셉의 형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를 받고 크게 두려워한 것은,
1) 곡식자루에서 나온 돈이 없어진 것을 문책하여 나귀까지 빼앗고, 자기들을 노예 삼으려는 줄로 짐작하여 크게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돈을 도로 갖고 왔기 때문에 한 가닥의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정의롭게 행한 일에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2) 그래서 청지기에게 먼저 말을 하였습니다. “전일에 양식을 사갔을 때에 객점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돈이 자루 안에 있음을 발견하고 그 돈과 새로 양식살 돈을 다 가져왔다”고 하니까 그 청지기의 말이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 돈은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버지의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또 내가 이미 받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여기에서
① 그 청지기가 신앙적인 말을 옮길 수 있을 만큼 믿음을 갖고 있었으니 이는 요셉이 전도한 때문일 것이요,
② “그 양식 값을 이미 받았다”는 말에서 요셉은 국고의 양식을 거저 준 것이 아니고 자기 돈으로 청렴결백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청지기의 정신을 꼭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3) 그 때부터 그들은 대접을 받는 위치로 변동이 되어 발을 씻고 나귀 양식까지 먹이며 요셉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3. 요셉이 형제들과 만나고 점심을 먹음에 대하여(25~28절).
1) 그날 정오쯤에 요셉이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자기 집에 왔고,
2) 그 형들은 가져온 예물을 정돈하여 드리면서 일제히 절을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요셉이 꿈꾼 내용대로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3) 이때에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생존 여부를 포함한 모든 이의 안부를 묻고 ‘평안 무사하다’는 대답을 들은 후에,
4. 베냐민에게 눈길을 돌려 친동생을 상면하였습니다(29 ~30절).
1) 요셉은 친동생 베냐민을 확인한 후에,
2)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베풀어지기를 축복하였고,
3) 마음이 애 타는 감정을 인하여 안방에 들어가서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요셉은 감정이 풍부하기도 하였고 또 그 감정을 잘 억제하는 힘도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요셉은 다시 정색을 하고 돌아와서 형제들과 음식을 먹게 될 때에,
1) 요셉 따로, 형제들 따로, 애굽 사람 따로 식탁을 마련하였고,
2) 요셉 앞에 앉은 형들을 장유 서열로 앉혔으며 또 베냐민 앞에는 다섯 배의 식물을 주었는데,
3) 그들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채 먹으며 즐거워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4) 여기에서 그들이 눈치를 챌 만한 근거는,
①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였고, 또 그 청지기가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주신 것이라” 하였으며, 또 베냐민에게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고 한 것이 자기들과 신앙이 통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며,
② 요셉의 식탁이 애굽 사람과 같이 앉지도 않았고, 애굽 사람들만 따로 앉고 형제들을 따로 앉혔는데도 요셉이 애굽인이 아니란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이요,
③ 그 식탁에 열 한 형제가 장유의 순서로 앉게 된 것을 보고도 그들은 이상하게만 여겼을 뿐이었으며,
④ 요셉이 베냐민과 특별면담을 하고, 또 그에게만 축복을 하고 그에게 다섯 배의 음식을 주었는데도 요셉과 베냐민이 가까운 사이란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입니다.
⑤ 또 그들이 그렇게 요셉인 줄을 눈치 채지 못한 이유는 요셉에 대한 희망적 미련을 이미 버렸기 때문이고 공포에 떨다가 별안간 좋은 음식을 먹으니까 세상 감정에 쏠려서 다른 것을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 그러나 특별히 변화로운 것은 베냐민이 다섯 배의 음식을 놓고 먹는데 대하여 그 형들은 일체의 욕심이나 시기를 나타낸바 없이 즐겁게 먹기만 한 것입니다. 왜 그 형들이 베냐민을 시기하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① 베냐민이 왔기 때문에 자기들이 살게 되었기 때문이요,
② 또 그 형들의 양심이 동생에 대하여 많이 선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6) 요셉은 여기에서 형들이 순진해진 것과 동생에 대한 미움이나 시기가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6.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은,
1) 요셉이 어디에서나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이방에 소개한 점과,
2) 성도는 양심을 앞세우며 살 때에 앞길이 평안해진다는 것과,
3) 요셉은 감정의 사람이면서도 그 감정을 잘 억제한 점과,
4) 요셉의 형들이 진실한 형제우애를 나타낼 정도로 변화된 것과,
5) 성도가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식탁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 축복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제84 과 요셉이 은잔을 숨김 (창 44:10~34) 목록으로
1. 위 본문에서는 요셉이 두 번째 양식을 사가는 기회에 청지기들을 시켜서 양식을 후하게 줌은 물론 가져온 모든 돈까지 그대로 주고 자신의 은잔 한 개를 베냐민(소년)의 자루에 은밀하게 넣게 하여 보낸 다음 멀리 못간 그들을 다시 좇아가서 만난 후 “왜 악으로 선을 갚느냐?”하고 같은 은잔을 보이며 “이 은잔은 주인이 늘 점치는데 쓰는 것이어늘 너희들이 가져갔으니 악한 자라”고 하였을 때, 그 형제들은 “곡식자루의 돈도 도로 가져왔는데 왜 그 은잔을 훔치겠느냐, 만일 그것이 우리 중에 발견되면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모두가 이 집의 종이 될 것이라” 한즉 청지기들은 “다 종 될 필요는 없고 은잔이 발견된 자만 종이 될 것이라” 하면서 요셉이 시킨 각본대로 연극을 진행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각기 자기의 곡식 자루를 맏형부터 풀어 보기 시작하였는데 결국 베냐민의 자루에서 그것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애굽의 청지기들은 “우리 주인이 점 잘치는 것을 너희가 모르느냐?” 하였고 유다는 나서서 “일이 이렇게 된 바에는 우리가 다 종이 되겠다”고 선언하자 청지기들은 “은잔이 나온 자만 종이 되면 된다” 하여 형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옷을 찢고(탄식하며) 다시 요셉 앞으로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은잔 발견된 소년만 남겨두고 가라고 하자 유다가 다시 나서서 그 동안 가정에서 되어진 일들, 즉 아버지와 자기들 사이에서 되어진 일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아버지의 생명에 문제가 있으므로 자신이 종으로 대신 남을 것인즉 베냐민과 다른 형제들을 돌려보내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2. 이상의 본문에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① 요셉이 왜 이런 드라마를 연출시켰으며,
② 형제들을 그렇게 속이고 시험을 해도 되는가 하는 점과,
③ 그 결과로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교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1) 요셉이 이런 연출을 시킨 이유는, 베냐민에 대한 형들의 관심을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요셉은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총애를 받은 것 때문에 형들의 미움과 시기를 받아 애굽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없어진 후 동생 베냐민이 꼭 자기와 같은 입장에서 형들의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을 짐작하고 그 형들의 말째 동생에 대한 우애를 시험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베냐민을 고의로 죄인이 되도록 궁지에 몰아넣고 그 형들의 태도를 살핀 것입니다. 형들이 볼 때 베냐민은 도적질한 죄인이 되었고 또 그의 신세가 딱한 지경에 처한 것인데 그 때에 그 형제들이 그에게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은 비단 요셉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자신들의 이웃들에게 그런 문제가 생길 때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제시해 주시는 꼭 같은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진정한 태도는 그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어떻게 사랑을 베푸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사랑의 실천이 쉽게 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반드시 이런 문제에 연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그런데 요셉이 신앙의 사람으로 그런 엉뚱한 일로 형제를 속여 놀라게 하고 위협하여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짓으로 형제를 모함하거나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그렇게 한 것은,
① 가족 간에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는 세계에서 한 일이요,
② 용서와 친교를 전제한 일이며,
③ 형제들의 사랑의 정도를 진단하고 교육하기 위함이었으므로 이를 악한 행동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정의를 알리기 위하여 부조리한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하셨을 때 살인해도 되는 문제를 내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런 경우를 당하면 여기에는 필시 곡절이 있고 하나님이 이런 일로 자신을 시험하시는 줄로 짐작하는 여유를 가지고 바르게 처신하도록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 자신에게 부조리한 문제가 나타날 때 하나님이 자신을 시험하시는 줄로 생각하고 처신한다면 크게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곡식 값도 도로 가져왔고 또 자신들이 그것을 훔친 것이 아니므로 속으로는 결백한 담력을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3) 여기에서 요셉이 확인한 형들의 형편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① 베냐민은 아버지의 노년에 얻은 아들이요, 그의 죽은 어머니의 자식으로 그 형은 죽고 하나만 남은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자기 곁에만 있게 하였다는 사실과(20~22),
② 그가 영원히 아버지 곁을 떠나면 아버지가 죽게 된다는 사실과(22, 30, 31),
③ 베냐민이 도적으로 몰렸어도 형들이 그를 미워하지 않음과,
④ 유다가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남게 해 달라고 간청함으로써 동생의 죄와 견책을 짊어지려는 태도를 보이므로 베냐민을 진실로 사랑하는 증거를 확인한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이 사실은,
① 형들의 변화에 대한 교훈과,
② 유다가 대속물의 모형으로 나타나는 교훈과,
③ 여러 아들들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큰 것과,
④ 요셉이 형제들의 변화된 사실을 확인한 후에 자신을 나타내려 한 것은 마치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천국을 보여주심(마5:8)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도의 변화 여부를 여러모로 감찰하실 것입니다(시139:1~4).
제 85 과 요셉이 자기를 나타냄 (창 45:1~15) 목록으로
위 본문에서는 요셉이 형들의 변화된 모습을 본 후에 자기를 알리고(1~4절), 형들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애굽에 온 것을 하나님이 보낸 것으로 믿게 하고(5,8절) 아직도 5년의 흉년이 남았으므로 자신이 고향의 가족들을 봉양할 것이니 속히 모시고 내려오도록 부탁하는 내용(9~15절)이 기록되므로 전체의 제목을 “요셉이 자기를 나타냄”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요셉은 먼저 자기를 형제들에게 나타냈습니다(1~4절).
1) 형들의 변화된 모습을 확인하였을 때 요셉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혹 요셉의 형들이 변화되지 않았으면 요셉은 자기를 그대로 숨긴 상태에서 형들을 적당하게 벌하였을지도 모릅니다.
2) 그러나 요셉은 변화된 형제들 앞에서 억제할 수 없이 감정이 복받쳐 시종자들을 내 보내고 형제들만 있는 장소에서 자신이 요셉임을 알리고 방성대곡하니 궁중까지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3) 요셉이 자기를 알리고 아버지의 생존을 물었을 때 형제들은 너무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자 요셉은 “자기가 바로 형들이 애굽에 판 그 동생이라”고 하면서 가까이 와서 확인하게 하였습니다(4절). 참 놀라운 장면이 벌어진 것입니다.
2.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요셉은 형들로 근심하지 않게 하였으니,
1) 이는 형들의 죄를 용서하였음이요,
2) 또 “한탄할 일도 아니라” 하고 “하나님이 다가올 기근 시에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미리 보내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귀한 교훈들을 받게 됩니다.
① 요셉의 용서의 아량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말라”하였으니, 근심은 벌 받음에 관한 두려움이고 한탄은 과거의 죄를 크게 후회하는 때문이지만 형들의 이런 사실을 미리 헤아린 요셉은 근심하지 않도록 권면하였을 뿐 아니라 또 탄식도 하지 않도록 전화위복이 된 것까지 설명을 한 것입니다.
② “하나님이 자기 가족들의 흉년을 대비케 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애굽에 미리 보내신 것일 뿐 형들이 보낸 것이 아니라”(8절) 하였으니 이는 용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유익하게 하신 섭리까지 믿고 감사하는 마음까지 나타낸 것입니다. 성도가 난관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믿음이 바로 전화위복 되도록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희망을 갖는 신앙인 것입니다(롬8:28).
3. 요셉은 남은 흉년을 잘 보내기 위하여 고향의 가족들을 초청하였습니다(6~15절).
1) “아직 5년의 흉년이 남았다”하였으니 이때는 요셉이 총리 된 지 약 9년 후였음을 알 수 있고,
2)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 구원이 그 가족들에게 임하게 하시기 위함이며(7절),
3)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에 보내어 “바로의 아비를 삼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바로의 아비란 뜻은 바로를 보필하는 후견인 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온 집의 주를 삼고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다”(8절)는 뜻도 역시 모든 치리에 대하여 왕권을 위탁받은 자처럼(창41:40) 대행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요셉은 이 사실을 속히 아버지에게 고할 것과 지체하지 말고 모든 가족들이 다 애굽으로 내려와서 고센 땅에 가깝게 있으면 남은 5년의 흉년을 봉양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5) 뜻밖의 일로 어리둥절한 형제들에게 요셉은 자신의 확실한 말로 또 재확인을 시키고(12절) 자신의 애굽의 영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고까지 하였습니다. 언제나 확실한 것은 현실로 증명이 될 때 다른 사람을 믿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남은 흉년을 강조하면서 속히 이행할 것을 촉구하였고(13절) 또 베냐민과 형들을 붙잡고 입을 맞추며 22년 만에 만난 반가운 표시를 나타낸 것입니다(15~15절).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을 것은,
① 요셉이 진실하고 변화된 형들에게 자신을 나타낸 것처럼 하나님도 성도가 진실 되고 변화되었을 때 그의 심령을 여시며 가까이 하심을 믿어야 할 것이요(시91:14; 잠8:17).
② 요셉이 형들의 죄를 용서하는 넓은 아량을 본받아야 할 것이요(마6:12; 벧4:5),
③ 요셉이 하나님의 통치섭리를 믿을 때 역경도 위복되게 하시는 것을 믿고 기다리며 감사하는 신앙을 가진 것과(창45:7~8)
④ 자기의 실상을 자신의 생활로 입증한 것과(13절),
⑤ 부모에 대한 효도와 가족부양의 봉사적 책임을 지는 것을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11절).
⑥ 또 이 일은 요셉이 17세에 애굽에 와서 39세쯤(30세에 총리 되고 7년 풍년, 2년 흉년)에 일어난 일이므로 하나님은 22년 후에 될 일을 미리 계시하시고 그렇게 되도록 실천하신 점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먼 미래를 내다보는 소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은 총리가 된지 9년 만에 고향가족을 상봉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왜 찾아가서 만나지 않았을까? 요셉이 공무에 바쁘므로 못간 것일까? 종들을 보내어 미리 안부를 살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만일 요셉이 집으로 찾아갔다면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하고 굴복하는 계시는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일찍 고향에 가지 못하게 된 일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 86 과 바로가 야곱의 가족을 초청함 (창 45:16~28)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왔다는 소문을 들은 바로가 기뻐하며 요셉의 온 가족을 애굽으로 초청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16~20절까지는 “초청하도록 명령하는 내용”이요, ② 21~24절까지는 “초청을 위한 행차”에 관한 말씀이요, ③ 25~28절은 “야곱이 그 사실을 알고 만족하며 초청에 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총 제목은 “바로가 야곱의 가족을 초청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바로가 야곱의 가족을 초청함(16~20절).
1) 바로는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사실을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양식을 사러 온 자들의 이름을 왕에게 보고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므로 요셉은 사사로운 일로 여기고 왕에게 알리지 않았지만 그 사실이 소문으로 알려지자 바로와 그 신복들이 기뻐하였으니, 요셉의 인덕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바로는 요셉으로 하여금 그 형들에게 명하여 “온 가족을 애굽으로 오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명령은 요셉의 뜻과 왕의 뜻이 무언중에 일치한 것입니다. 요셉은 창45:10~11에서 이미 그 뜻을 나타냈지만 왕에게 청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소문으로 듣고 요셉의 중심을 헤아린 듯 그 가족을 초청해 준 것이니 이런 일들이 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되어지는 섭리적 인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3) 바로는 요셉의 가속을 위하여 그 형들을 보낼 때에,
① 그들이 오면 “애굽 땅의 아름다운 것을 주고 기름진 것을 먹일 것이라” 하였고,
② 가족을 태워올 수레와 기구를 아끼지 말고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선민의 후손이 이방인을 통하여 복 받게 하시는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정탐이 기생 라합의 보호를 받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2. 초청을 위한 행차 역시 바로의 배려가 컸습니다(21~24절).
1) 수레와 길양식을 주고 또 형제들 각자에게 옷 한 벌씩, 그리고 베냐민에게는 은 300과 옷 다섯 벌을 주었고 또 선물로 보내는 아름다운 물품이 있었으며 열 명의 형들만 올려 보냈습니다(24절).
2) 또 야곱 가족을 인도해오기 위한 거마 장비로서 수레와 기구, 수나귀, 암나귀, 각 열 필과 길양식을 주었으며,
3) 요셉은 형들에게 “노중에서 다투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들이 요셉을 애굽에 판 사실에 대하여 아버지에게 고백하는 문제로 다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형제가 잘되는 것을 절대로 투기하여서는 안 되며 회개하는 태도와 함께 진실을 고백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거짓이나 욕심은 성령 충만이 빈약한데서 오는 결과요, 오직 주의 영이 계신 곳에만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고후3:17).
3. 그 사실을 야곱에게 고한 내용입니다(25~28절).
1) 그 형들은 요셉이 살아 있다는 사실과 또 애굽의 총리로 있다는 사실을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의 아버지인 야곱에게 고하였습니다.
2) 그러나 자기들이 22년 전에 요셉을 애굽으로 판 사실에 대하여는 밝히지 않았으니 이는 사실을 상당 기간 숨겨두었다가 적당한 기회에 고백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 소극적인 태도는 형들의 회개하는 태도로 아쉬움을 주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야곱이 즉시 믿지 않고 기색(강한 충격을 받고 실신 또는 어리둥절한 것)한 것은 역시 염려한 것처럼 베냐민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나 수레 및 다른 선물들을 보고야 기운을 차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말과 현실이 일치해야 믿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레와 나귀와 선물들이 없었다면 역시 아들들의 말을 믿기 어려울 것이지만 그것들이 말의 실상을 증명하였기 때문에 야곱이 믿은 것처럼 성도는 말과 실상이 일치되는 생활을 하여야만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게 되고 전도의 효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4)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믿게 되었을 때 만족하였고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① 하나님은 이방인 왕이나 백성을 통하여도 선민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② 야곱이 요셉을 잃고 오랜 세월(22년) 상심하였지만 때가 되매 죽은 자가 다시 살아오는 듯한 변화로운 환경을 맞이한 점이요,
③ 야곱이 애굽에서 보낸 수레와 나귀 등 선물들을 보고 아들들의 말을 믿은 것처럼 성도의 말도 반드시 일상생활로 증명해야 함을 교훈하심이며,
④ 야곱의 애굽행 결심이 결국은 창15:13의 예언을 성취함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제 87 과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감 (창 46:1~34) 목록으로
창세기 46장은 야곱의 가족이 바로의 초청을 받아 애굽으로 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1~4절에서는 야곱이 출발하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내용이고, ② 5~7절은 행차하는 내용이며, ③ 8~27절은 애굽에 가서 살게 된 야곱의 가족 이름과 수이고, ④ 28~30절은 요셉이 고향의 가족을 맞이하는 내용이요, ⑤ 31~34절은 바로를 배알하기 위한 사전 준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야곱이 제사를 드리고 출발함에 대하여(1~4절)
1) 야곱이 출발한 장소는 헤브론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야곱의 최종 정착지가 그 아비 이삭이 거하던 헤브론이기 때문입니다(창35:1, 16, 27; 37:1).
2) 거기서 모든 소유를 이끌고 60리쯤 서남방 지역인 “브엘세바”에 와서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제사(희생)를 드린 것입니다.
① 야곱은 이 “브엘세바”란 지역과 특별한 관계가 없었지만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 장소에서 블레셋 왕과 평화조약을 맺은 장소(창21:22~33; 26:26~33)이기 때문에 평화를 상징하는 지역이기도한데 야곱이 그곳에서 제사를 드린 것은 역시 평화를 추구하는 뜻과 자신들의 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는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② 이때에 야곱이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렸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그 아비의 하나님께”란 뜻은 조상이 섬기던 신앙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시키려는 의도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저희들도 부모님들의 신앙을 전수받고 크게 계승시키는 책임을 귀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③ 이때에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이 계시로 말씀을 주셨는데,
㉠ 나는 하나님이요 네 아비의 하나님이라 하셨고,
㉡ 네가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하셨으며,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나도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 갈 것이라,
㉤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 오게 할 것이라 하셨고,
㉥ 또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길 것이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신분을 확실하게 밝히셨다는 점과 야곱과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과, 야곱이 요셉 앞에서 평안히 세상을 떠나지만 그 후손이 약 400년 후에 하나님의 인도로 다시 나올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미래를 아시고 지도하시는 하나님이 꼭 그와 같은 방법으로 저희들과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2. 야곱의 행차에 대하여(5~7절)
1) 야곱이 브엘세바를 출발하여 애굽 고센 땅까지 가는 거리는 약 750리 길인데 그들이 그 길을 여행할 때,
2) 그 아들들이 바로가 보낸 수레에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웠다”하였는데 여기에 야곱의 부인 레아와 두 첩 실바와 빌하가 거론되지 않았음을 보아서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여겨지고,
3) “모든 생축과 재물도 가지고 갔다” 하였으니 살아 있는 모든 가족이 다 간 것을 알 수 있고, 종들은 초청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상당수 딸려 갔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애굽에서 살게 된 야곱과 그 자손들의 이름과 수에 관한 것입니다.
1) 이 순서는 야곱의 처 레아의 계열과 라헬의 계열 순이고 레아의 여종(실바)과 라헬의 여종(빌하)의 계열은 각각 그 여주인에게 종속되기 때문에 순서를 레아, 실바, 라헬, 빌하의 자손 순위로 기록하였습니다.
2) 그리고 레아와 실바와 빌하를 수레에 태웠다는 말씀이 없음을 근거로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야곱의 자부들은 수레에 태워 왔으면서도 그들의 어머니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짐작하는 것입니다.
3) 시므온의 첩(10절)도 역시 제외되었지만, 딸은 혈육이기 때문에 제외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디나:15절, 세라:17절).
4) 그런데 야곱과 열두 아들들과 손자를 합하여 70명이 되는 중에 딸은 둘밖에 기록된 것이 없음을 보아서 그 당시에 딸이 귀하였던지 아니면 딸들의 이름 일부를 생략하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여인이 희귀하였던 것은 사실이므로 딸의 생산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혼인은 주로 이방여인이나 에서의 계열에서 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입니다(창38:2,6) 번성하는 집안은 아들만 많이 생산하는 것이 상례이므로 하나님이 야곱의 집안도 그렇게 하신 줄 압니다.
5) 그 수를 어떻게 헤아렸는가 할 때,
① 먼저 레아의 아들 6명, 딸 1명, 손자 23명, 증손자 2명을 합하면 32명인데, 15절 말씀대로 33명이 되려면 야곱까지 합하여야 하고(8절),
② 실바의 아들 2명, 그 손자 12명, 증손자 2명이므로 18절 말씀대로 16명이요,
③ 라헬의 아들 2명과 손자 12명이니 22절대로 14명이요,
④ 빌하의 아들 2명과 그 손자 5명이므로 25절대로 7명이니 이들을 다 합하면 27절대로 70명이 됩니다.
그 이름을 정리하면,
야곱, 르우벤 ~ 하녹, 발루, 헤스론, 갈미
시므온 ~ 여무엘, 야민, 오핫, 야긴, 스할, 사울(가나안 여인 소생)
레위 ~ 게르손, 그핫, 므라리
유다 ~ 셀라, 베레스(헤스론, 하물), 세라
잇사갈 ~ 돌라, 부와, 욥, 시므론
스블론 ~ 세렛, 엘론, 얄르엘
디나(딸) ~ 야곱과 6남 1녀, 손자 23, 증손 2, 계 33명.
갓 ~ 시뵨, 학기, 수니, 에스본, 에리, 아로디, 아렐리
아셀 ~ 임나, 이스와, 이스위, 브리아(헤벨, 말기엘), 세라(딸), 자 2, 손자 11, 손녀 1, 증손 2, 계 16명,
요셉 ~ 므낫세, 에브라임
베냐민 ~ 벨라, 베겔, 아스벨, 게라, 나아만, 에히, 로스, 뭅빔, 흡빔, 아릇, 자 2, 손자 12, 계 14명.
단 ~ 후심
납달리 ~ 야스엘, 구니, 예셀, 실렘, 자 2, 손자 5, 계 7명
총계 70명입니다.
6) 그런데 26절에서 “야곱과 함께 애굽에 이른 자가 66명이라”하였으므로 70명에서 제외된 4명은 가나안에서 내려온 여행자에서 제외된 수일 것이요, 이들은 요셉과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베냐민입니다. 요셉의 처 아스낫은 모든 자부 이름들이 제외되었으므로 해당되지 않습니다. 창45:22에서 베냐민은 옷 다섯 벌과 은 300을 특별히 받았고 23절에서는 열 한 형제가 왔으나 그들이 갈 때에 암나귀, 수나귀를 각 열 필씩 주므로 한 명당 암수나귀 각 한 필씩에 해당되고, 또 24절에서 요셉은 “형들만 돌려보냈다”고 하였으므로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또 45:26에서 야곱이 기색한 이유는 베냐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7) 그런데 행7:14절에서는 “야곱과 온 친족 75명을 청하였다”하였으니 숫자상의 착오가 아니냐 하지만 창46:27과 출1:5과 신10:22의 70명은 애굽에 온 야곱의 혈족의 수이고, 행7:14의 75명은 “초청한 수”일 뿐 애굽에 온 사람의 수가 아니므로 문제 될 것이 없으며 그 당시에 요셉이 자기 고향 가속의 수를 넉넉하게 헤아려 75인을 청하였으나 실제적인 혈육은 70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요셉이 고향의 아버지와 가족을 맞이하는 내용입니다(28~30절).
1) 그 일행은 미리 고센 땅으로 왔고 요셉도 그곳으로 가서 상봉을 하였으니 이는 짐승들의 떼와 함께 하였기 때문이요.
2) 야곱은 요셉을 만나보고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어서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다” 하므로 야곱이 요셉을 연민한 정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5. 바로를 알현하기 위한 준비의 내용(31~34절).
1) 그들은 바로에게 와서 인사를 하게 되었고,
2) 양과 소를 대동한 목자들이기 때문에 목축에 적당한 고센 땅에 머물러야 할 것과,
3) 또 그곳에 왕궁에서 멀지 않은 곳임과 왕에게 직업을 사실대로 알리되 애굽인은 목축을 천히 여긴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야 할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6. 결론적으로
1)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의 살 길을 인도하셨고
2) 창15:13의 예언이 약 210년 만에 성취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의 210년이란 기준은 창15:13에서 예언을 받은 시기가 아브라함 80세쯤으로 짐작할 때 20년 후인 100세에 이삭을 낳았고 이삭 60세에 야곱을 낳았으며(창25:26) 야곱이 130세에 애굽에 갔기 때문입니다(47:9).
제 88 과 야곱이 바로를 알현함 (창 47:1~12)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① 요셉이 자기의 가족으로 하여금 바로를 알현시키는 내용과(1~2절), ② 바로가 은혜를 베푸는 내용(3~6절), ③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는 내용과(7~10절), ④ 요셉이 왕명에 따라 아버지 가족을 인도하는 내용(11~12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총 제목은 “야곱이 바로를 알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요셉이 가족으로 왕을 알현케 할 때(1~2절).
1) 먼저 아버지의 권속과 모든 짐승과 소유가 도착한 것을 보고하고(1절),
2) 다음에 형들 중 5인을 택하여 먼저 바로를 알현시켰습니다. 그 5인이 누구누구였는지 상상해 볼일입니다.
3) 요셉이 열한 형제 중 오인을 택하여 왕을 알현시킨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주신 선택의 은혜를 생각나게 합니다.
2.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내용에서(3~6절)
1) 요셉은 형들의 생업이 목자란 사실과 그들이 기근으로 짐승먹일 장소가 없어서 그곳으로 우거하러 왔다는 사실을 듣고,
2) 애굽의 좋은 고센 땅을 주었으며,
3) 또 짐승사육에 능한 자로 바로의 짐승을 주관케 하는 직업도 준 것입니다.
3.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는 내용(7~10절)
1) 요셉은 다섯 형들을 알현시킨 다음에 아버지 야곱을 왕 앞에 인도하였고,
2)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하였으니, 여기에서,
① 하나님께로부터 복 받은 선민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축복할 수 있음과,
② 그 축복의 대상은 선민이 아닌 이방인을 위하여도 할 수 있음과(선택자에게 주시는 신령한 복은 아님),
③ 나아가서는 왕이라도 선민의 축복영역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이 사실에서 성도는 왕이나 이방인을 위하여 축복하고 기도하는 사명을 이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4) 그 당시 야곱은 연세를 묻는 바로에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으로 조상의 연세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그의 인생여정을 짧게 표현하였습니다. 야곱은 조상들만큼 오래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험악한 인생을 살았으니 이 험악한 인생이란 아버지의 집을 떠나 고생한 20년의 생활과 죄와 싸우며 믿음을 지키고 책임을 다한 노력을 뜻하였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야곱도 그렇게 살았거든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죄와 싸우며 살아야 하는 인생은 험악하게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안일을 꿈꾸는 생활은 믿음과 정의를 고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4. 요셉은 바로의 명을 따라 형제들에게 거할 곳을 주되(11~12절),
1)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를 주어 기업을 삼게 하였으니 이 “라암세스”란 애굽의 동북부 고센 지방의 한 성읍 이름입니다. 이곳은 출애굽 당시에 애굽의 국고성이 되었고(출1:11) 이스라엘의 출애굽 출발지였습니다(출12:37).
2) 요셉은 그 때부터 아버지와 형들 가족에게 식물을 주어 공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교훈을 주시는 내용들은,
① 하나님이 비상한 방법으로 인생의 살 길을 열어 주신다는 점과,
② 가장 미워하여 버림받은 자가 오히려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된 것과,
③ 한 사람이 복을 받아도 70명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음과,
④ 험악한 세월을 살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드릴 수 있음과(삼상2:7~8),
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누구에게나 축복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89 과 요셉이 양식을 팜 (창 47:13~31) 목록으로
위의 말씀 ① 13~20절까지는 “요셉이 양식을 팔아 바로를 부자 되게 하는 내용”과, ② 21~26절까지는 “애굽의 토지법”을 만들어 농사를 짓게 하는 일과, ③ 27~31절에서는 “야곱이 그곳에 거한지 17년 동안 자손이 번성함과 함께 자신이 죽으면 가나안 땅에 묻어 줄 것을 요셉에게 맹세 받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요셉이 양식을 팔아 애굽의 재산을 왕실로 들이는 내용이 가장 많기 때문에 제목을 “요셉이 양식을 팜”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역사소설처럼 읽어 나가면 크게 교훈될 것이 없지만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을 찾기 위하여 깊이 상고할 때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떠오릅니다.
1. 요셉이 양식을 팔아 백성을 살리고 왕실을 부하게 한 일에 대하여(13~20절).
1) 우선 사람이 생존하는 데는 먹을 양식이 가장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인들은 본래 돈과 짐승들과 토지를 소유하였었고 또 인권(人權)의 자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흉년이 들고 양식이 없게 되니까 우선 먹어야 살겠는 고로 모든 소유를 다 주고 양식을 산 것입니다. 나중에는 인권보다도 양식이 더 중요하여 “우리가 종이 될 것이니 양식을 주시오”라고 자원하여 자기들의 소원과 요청으로 왕의 종들이 된 것입니다.
2) 여기에서 모든 재산과 인권을 주고 양식을 바꿀 정도로 육신의 양식이 귀하였다면 성도가 귀하게 여기는 영적 양식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육신의 양식도 돈과 짐승과 토지와 인권을 주고 사는데 영혼의 양식은 그 이상의 것을 주고 산다하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영혼의 양식을 거저 주어도 안보고 안 듣고 안 배우는 사람들이나 물질을 더 벌기 위하여 말씀배울 기회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귀한 교훈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요셉은 그들에게 양식을 거저 주지 않고, 꼭 값을 받고 팔았습니다. 이렇게 값을 받고 판 이유는,
① 백성들로 하여금 남을 의존하거나 공짜를 바라는 심리를 없애기 위함이요,
② 모든 소유를 국가소유(바로의 소유)로 만들어서 나라가 백성을 살게 해 주고 백성들이 나라를 신뢰하도록 만들기 위함인 것입니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면 나라가 우리를 보살펴 준다”는 희망을 갖고 나라에 충성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③ 요셉이 정치하였을 때에는 그 목적이 가능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요셉의 정치와 나라를 신임하고 나라에 물질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종이 되겠다”고 자원하는 입장에까지 들어간 것입니다. 요셉이 처음에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므로 애굽인과 가나안인의 돈을 다 모았고 나중에 백성들에게 돈이 떨어지니까 “짐승이라도 가져오라” 하여 짐승을 받고 양식을 주었고, 그 짐승은 나라의 소유로서 백성들이 양육하도록 하였습니다. 돈이 떨어졌을 때 짐승이라도 받고 양식을 주니까 백성들은 이것을 고맙게 생각하였습니다(16절).
그런데 그 다음에 또 양식이 없게 되자 백성들이 자원하는 태도로 나서서 “우리에게는 토지와 몸 밖에 없으니 토지를 받으시고 또 우리를 종으로 삼으시고 양식을 주십시오”(18~19절)하므로 자원하여 토지를 내놓고 종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대로 해 주었습니다. 토지를 다 내 놓은 백성이 갈 곳이 없게 되자 21절 말씀대로 “그들을 다 옮겼다”하였으니 이는 새 토지법이 나오기까지 받은 양식을 먹고 토지를 나누어 받을 때까지 대기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요셉이 양식을 미끼로 백성들의 모든 재산을 빼앗은 느낌을 줍니다만 그 당시 백성들의 인식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셉과 정치를 신뢰하여 나라에 바치기를 원하였고 25절에서도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기 위하여 바로의 종이 되겠다”고 자청한 것을 볼 때 그 정치가 독재정치 같고, 사유재산을 인정치 않는 정치 같으나 결국은 백성들의 뜻과 호흡이 맞는 민주정치요, 칭찬 받는 정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재산과 인권을 바로에게 드렸다”는 것은 국가 중심으로 돌렸다는 뜻이요. 그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가가 요셉처럼 신임을 얻고 정치를 하였을 때 백성들은 그 밑에서 종 되기를 원하므로 요셉의 정치가 대단히 원만한 정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비유를 생각해 보신다면 바로는 하나님을, 요셉은 예수님을, 백성은 성도를 비유한다고 할 때 예수님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듯 요셉이 모든 영광을 왕에게 돌린 중보자 사역을 비유하여 교훈을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애굽 백성들이 요셉을 믿고 모든 것을 바친 것처럼 저희들도 예수님을 그렇게 믿어야 하겠고, 정부도 그런 신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5) 그러나 제사장의 전지는 사지 않았으니 그들은 바로로부터 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양식이 핍절하지 않았고 땅을 팔지도 않았습니다.
① 이 제사장이 어떤 제사장일까 할 때 바로가 요셉이 섬기는 하나님을 믿었을 것이니 이는 야곱의 축복을 받은 것을 보아서 짐작이 가는 것입니다(창47:7). 따라서 이 제사장은 요셉이 섬기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한 제사장이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② 그 제사장에게는 왕실에서 식량을 공급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었은즉 여기에서 요셉이 성직자를 우선 접대한 사실과 그들 자신의 기본재산도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요셉이 애굽의 토지법을 만든 일(21~26절).
1) 백성들이 자원하여 바친 물권과 인권을 붙잡은 요셉은 그들에게 토지와 씨앗을 무상으로 나누어주어 스스로 농사를 짓게 하고 그 소득의 1/5만 나라에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2) 이 정책은 백성들에게 대단히 후한 정책이었고, 또 백성들이 종 된 위치에서 왕실의 농사꾼이 되겠다고 자청하는 것을 들어 준 것이기 때문에 후한 정치가 된 것입니다. 농토와 씨앗을 거저 주고 농사를 지어 4/5를 먹으라 하였으니 백성들을 살린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3) 그래서 그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요셉이 우리를 살렸다”고 칭송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백성들을 구원하는 정치 살게 하는 정치, 만족을 주는 정치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3. 17년이 지난 후 야곱이 요셉으로부터 맹세를 받은 일에 대하여(27~31절).
1) 요셉의 토지법정책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였습니다.
2) 야곱이 애굽에 온지 17년이요, 그 나이 147세였을 때 자기의 세상 떠날 날이 가까워짐을 깨닫고 요셉에게 마지막 청원을 하면서 요셉의 손을 자기의 환도뼈에 대게하고 맹세하는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이 맹세는 확실함을 강조하는 표현이었습니다.
3) 그리고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 선영에 장사하라”고 청원하였습니다. 이 선영이란 야곱의 조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사들인 막벨라 밭(굴)을 의미하며 그곳에는 사라(창23:19), 아브라함(창25:9), 이삭(창35:27~29), 리브가(창49:31), 레아(창49:31)가 장사된 곳입니다. 야곱도 그곳에 묻히기를 원한 것입니다(창49:30~31; 50:13).
4) 야곱이 왜 이런 소원을 하였을까요? 또 이 소원은 나중에 요셉도 꼭 같은 소원으로 유언하였습니다(창50:25). 여기에 대하여 야곱과 요셉은,
① 자기의 부족들이 머지않아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다시 올라가게 될 것을 확신하고 사모하였기 때문이고,
② 또 가나안 땅을 점유하게 된다는 이 약속은 영원한 천국 기업의 모형이란 점에서(창17:7~8) 그들이 다 부활과 영생과 천국을 사모하였음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한 장소에서 만나고 부활하고 영생하기를 사모한 때문일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야곱은 “침상머리에서 경배를 하였다”하였으니 이 말씀은 야곱이 기운이 진하여 죽을 때에도 침상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잘 경배하였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죽음이 가까워지거나 죽을 때에 하나님을 힘써 경배하면서 죽음을 맞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6) 또 본문 27절 이하를 보시면 이스라엘이란 이름과 야곱이란 이름이 교대로 다섯 번이 나오는데,
① 이스라엘이 생육 번성하였다.
② 야곱이 애굽 땅에 17년을 거하였다.
③ 이스라엘이 죽을 때가 되어 선영에 장사되기를 원하였다.
④ 야곱이 맹세하라 하였다.
⑤ 이스라엘이 침상머리에서 경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분석해 보면 인간적인 생활을 나타낼 때는 야곱의 이름을 쓰고 신앙적인 일과 복 받은 일을 나타낼 때는 이스라엘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야곱은 옛사람의 성격을 나타내고 이스라엘은 변화된 새사람의 성격을 나타냅니다. 저희들도 변화된 사람으로 새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말씀은
① 양식의 중요성,
② 요셉의 바른 정치,
③ 왕 앞에 스스로 종 되기를 자원하는 백성들,
④ 복 받은 이스라엘의 번성과,
⑤ 야곱의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에 대하여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90 과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함 (창 48:1~22) 목록으로
창세기 48장에는 “야곱이 요셉과 그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서 제목을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함”으로 정하였습니다. ① 1~2절은 요셉이 부친을 문병함이요, ② 3~4절은 야곱이 과거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을 요셉에게 전달함이요, ③ 5~6절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의 직속 아들이 되게 함이요, ④ 7절은 라헬의 무덤을 알림이요, ⑤ 8~16절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함이요, ⑥ 17~20절은 축복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것이요, ⑦ 21~22절은 야곱의 죽음과 후손들의 가나안 정복을 예언함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요셉이 부친을 문병함(1~2절)
1) 그 때는 “이 일 후”라 하셨으니 이는 바로 앞 장(47:28~31)에서 야곱이 요셉을 불러 “자기를 선영에 장사하도록 맹세시킨 일”이 있은 다음 얼마 후라는 뜻입니다.
2) 이때에 요셉은 부친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문안하러 갔습니다. 요셉이 ‘부친의 병든 소식’을 듣고 갔을 때에 “요셉이 왔다”는 소식을 야곱이 알게 된 사실에 대하여 1절과 2절에서 “혹이 고하였다”하였는데 다른 성경에는 이런 표현으로 번역하지 않았으나 이 뜻은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는 뜻으로 ‘고한 자’의 신분을 감출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소식을 들은 것이 중요할 뿐 누가 어떻게 전달한 것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성경의 뜻을 교훈 받을 때 감추인 것과 드러낸 것을 구별할 수 있으며 감추인 것은 구태여 펼치거나 교훈으로 받을 필요가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3) 야곱은 147세에 병이 들었는데 그 병은 죽을 병이었고 그는 그 병으로 침상에서 기운이 진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49:33). 엘리사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왕상13:14). 따라서 죽을 병이란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 야곱은 침상에 있었으나 “요셉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힘을 내어 앉아서 요셉에게 유훈과 축복을 한 것입니다.
2. 요셉에게 준 유훈과 축복이 무엇인가 할 때,
1) 야곱은 과거에 하나님께로부터 약속 받은 복을 전달하였는데, 그것은 옛날에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다가 벧엘이라고 개명한 루스 땅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 자기에게 복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전달한 것이요, 그 복의 내용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백성이 많아지고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2) 야곱이 이 사실을 요셉에게 꼭 알려야 할 이유는,
① 요셉이 자기의 본래 사랑하였던 실제적 아내의 소생이요, 또 가족부양의 실력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축복을 계승시킬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②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을 계승시킬 내용으로는 바로 장자의 기업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곱의 법적 장자는 르우벤이지만 그는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죄”가 있어서 장자 될 자격을 상실하였습니다(창35:22; 대상5:1~2). 그래서 실제적 장자요 가장역할을 하는 요셉에게 장자의 기업으로 더 많이 주기를 작정하고 이를 축복으로 시행한 것입니다.
3) 그래서 야곱은 요셉이 데리고 온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야곱의 열두 아들처럼 취급한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한 것이 바로 그런 뜻이요 6절에서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된다”는 것은 세 번째 아들부터는 요셉의 아들로 인정하되 “그들의 산업이 그 형의 명의 하에서 함께 한다”는 것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두 기업에서 분배받게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업은 레위 지파가 빠졌지만 요셉 지파가 두 몫을 받기 때문에 계속 열두 지파로 분배하게 된 것입니다.
4) 7절에서는 라헬의 죽음과 그의 무덤 위치를 말하였으니 이는 요셉의 생모이므로 마땅히 알려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3.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기도를 하였습니다(8~20절).
1) 야곱은 요셉이 데리고 온 두 아들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축복하려 하니 요셉은 야곱의 힘 있는 오른손이 장자 므낫세에게 얹어지게 하기 위하여 그를 오른 쪽에 에브라임을 왼 쪽에 세웠으나 야곱은 눈이 어두워 잘 분별을 못하면서도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 머리에 얹고 왼손을 오른 쪽에 있는 “므낫세”에게 얹어 1차 축복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른손을 얹는 것은 왼손보다 더 힘이 있고 풍성하게 축복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래서 야곱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부르며 축복을 기원하였는데 복 주시는 하나님을
① 조상의 섬기던 하나님,
② 출생 시부터 자신을 기르신 하나님,
③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 칭하므로, 하나님을 섬김의 대상으로 알리는 것과 자신이 보호 인도 받은 사실을 감사함과 또 그와 같은 은혜가 요셉의 자손에게도 임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을 섬김의 대상으로 또 보호 인도의 하나님으로 믿고 의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야곱이 축복한 내용은,
① 두 손자 이름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여 달라”하였고,
② 그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5절)를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자신을 포함)으로 칭하게 해 달라”는 뜻은 바로 자신과 그의 조상들(족장들)에게 베푸신 은혜처럼 특별한 은혜로 요셉의 자손에게도 베풀어 달라는 기원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특수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번식되기를 축복한 내용에서 그 번식이란 용어가 “따가”라는 말로서 강세형이기 때문에 “신속히 번식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4) 이 축복이 끝나자, 요셉은 야곱의 오른손의 복을 장자인 므낫세에게로 돌리려고 시도하였으나 야곱은 그 사실이 하나님의 복 주시는 섭리와 계시에 의한 것이므로 거절하면서 “두 아들이 다 큰 족속이 될 것이나 그 아우가 더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눈이 어두운 야곱이라 할지라도 복을 더 받을 자와 덜 받을 자를 분명하게 나타내도록 계시하시고 인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6:7에서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 받지 않으시며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하였고, 또 출33:19에서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기 때문에 은혜주시는 특권과 선택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결국 이 축복대로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보다 많았고(민2:31,35) 한 세대 뒤의 지파이지만 가장 많이 번성한 유다 지파(민2:27)보다 1900명이 적을 뿐이었습니다. 여러 민족을 이룬다는 뜻은 많이 번성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 또 20절을 보시면 “그날에 그들에게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하였으니, 이 말씀의 뜻은,
① 에브라임이 므낫세보다 더 발전할 것이요,
② 후시대에 복 받을 자들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복되기를 바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4. 야곱의 죽음에 관한 예언과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것에 대하여 예언을 하였습니다(21~22절).
1) 야곱이 “나는 죽으나”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세상을 체념하고 끝낸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이런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계속 말하기를,
2) “하나님은 너희와 함께하셔서 너희를 인도하시고, 조상의 땅(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요 요셉은 두 분깃을 받으므로 그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게 될 것인데 그 지역은 가나안의 대표 족인 아모리 족속이 사는 곳으로 장차 후손들이 칼과 활로 싸워서 빼앗아 갖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한 것입니다. 이 의미가 바로 22절의 뜻입니다.
야곱은 그 후손들이 미래에 성취할 일을 자신이 성취한 것처럼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상이 없으면 후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후손이 한 것은 곧 조상의 공이 될 수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1) 야곱이 147세에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과(창48:1; 49:33),
2) 하나님이 주신 복의 약속을 후손에게까지 계승시키면서 그것의 성취를 바라보게 한 점과,
3) 요셉이 장자의 복을 받으므로 갑절의 기업을 받은 일과,
4) 축복은 하나님의 섭리와 선택에 의하여 전달되는 점과,
5) 야곱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 기르시는(양육하시는) 하나님, 건지시는 하나님을 상기시킨 점과,
6) 요셉이 좋은 일을 한만큼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35. 야곱의 하나님 호칭 (창 48:1~4, 15~16) 목록으로
야곱은 요셉에게 축복할 때 네 가지로 하나님을 호칭하였습니다.
1.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3절). 야곱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의지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전능하십니까?
1) 없는 것을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창1:1).
2) 있는 것도 없게 하실 수 있습니다(롬11:36; 벧후3:10 ~11). 죄를 없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막2:10).
3) 마귀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막1:39).
4) 생명을 만드시고 병도 고치시며 죽음도 주관하십니다(삼상2:6; 마 8:16).
5) 악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고(창50:2),
6) 복과 화도 임의로 주관하십니다(신11:26).
7) 죄인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요3:16).
2. “조상의 섬기던 하나님”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15절).
1) 야곱의 믿음은 뿌리와 전통이 있었고,
2) 조상 적부터 하나님을 섬겼으며,
3) 조상이 섬기던 하나님을 자기도 섬겨야 한다는 것과,
4) 자기의 후손들도 그 하나님을 섬겨야 함과,
5) 하나님을 섬김의 대상으로 모신 믿음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좋은 세월에만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역경에서도 섬겼습니다. 저희들도 섬기기 위한 하나님을 모셔야 할 것입니다. 부모를 섬기기 위하여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섬길 수 없을 것입니다(요일4:20).
3.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15절). 야곱이 자기의 생애를 회고할 때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창47:9). 그러나 하나님은 그 험악한 세월 속에서도 야곱을 보호하시고 기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목자가 되셔서 때를 따라 은혜를 주시며 기르신 하나님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자기의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대조하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0). 저희들도 꼭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고 하였습니다(16절).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가 막힐 수렁에서도 건지신다”(시40:2) 하였고,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50:15)고도 하셨습니다. 또 시121:7에서는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는 분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심판의 환난에서도 건지십니다. 벧후2:9에서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벧후2:7에서는 “고통에서 건지시며”, 딤후4:17에서는 “사자의 입에서도 건지시고”, 고후1:10에서는 “큰 사망에서 건지시고”, 요5:24에서는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시며, 행7:10에서는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험악한 생애 속에서 건짐 받은 사실을 여러 번 체험하였으니,
1) 형 에서의 살인계획에서 건짐을 받았고,
2) 여행 중의 위험에서 보호를 받았으며,
3) 외삼촌의 경제적 대결에서 형통함을 받았고,
4) 흉년에서도 건짐을 받았으며,
5) 죄와 심판에서도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저희들도 의지하시고 꼭 건져주심을 체험하시며 더 잘 섬겨야 할 것입니다.
제 91 과 야곱이 열두 아들의 후일을 예언함 (창 49:1~21) 목록으로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열두 아들의 후일에 될 일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① 1~2절은 서론으로 ‘열두 아들을 집합시켜 듣게 하는 내용’이고, ② 3~27절까지는 ‘열두 아들의 후일에 대한 예언의 본론’이요, ③ 28~33절은 결론부분으로 야곱이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한 사실과 자신을 조상의 묘소에 장사지낼 일에 대한 유언을 남긴 말씀입니다. 이 시간에는 요셉과 베냐민을 제외한 열 아들에 대한 말씀만 상고하겠습니다.
1. 르우벤에 대하여(3~4절).
1) 르우벤은
① 혈육의 장자요,
② 야곱 즉 그 아버지에게 힘이 되어줄 만한 능력이요(시127:4,5),
③ 기력의 시작으로 야곱의 힘을 가장 먼저 계승받은 자이어서
2) 겉으로 볼 때는 위광이 초등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현대인 성경 번역에 따르면 “위엄과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으로 이는 명분(장자)과 능력(힘)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3) 그러나 그의 미래는 “물의 끓음”같아서 탁월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① 물의 끓음이란 일시적인 능력, 즉 수증기 증발로 줄어드는 상태를 비유한 것으로 축복의 특권을 상실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르우벤이 받을 축복의 특권은 장자의 특권과 지도자의 특권이 있었으나 그것이 물의 끓음처럼 없어지게 되었으니,
③ 그 이유는, “자식이 아버지의 침상에 오른 죄”(창35:22)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자기 생애의 특권만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후손의 대에까지도 손해를 보게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출20:5). 이렇게 좋은 조건과 능력이 있어도 하나님이 막으시면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예언입니다(5~7절).
1) 시므온과 레위가 형제라는 뜻은 ‘우애와 협력이 잘되었다’는 것입니다. 형제가 의합하고 협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2) 그러나 “그들의 칼이 잔해하는 기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창34:25~31의 사건을 야곱이 회상하여 나타낸 표현입니다. 야곱이 자녀들을 이끌고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처음 돌아 왔을 때 그의 딸 “디나”가 세겜 족장에게 강간을 당하고 청혼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시므온과 레위가 그 보복으로 세겜 족장을 죽이고 크게 약탈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야곱이 큰 불안을 겪은 일이 있었으므로 그 사건이 두 사람 후손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고 예언을 한 것입니다.
3) 그래서 야곱은 마지막 유언을 하는 기회에 옛날을 회상하고 두 아들을 크게 책망한 것입니다. 그 책망이 바로 “너희들은 분노대로 사람을 죽였고 혈기대로 소의 힘줄을 끊었으니 그런 잔인한 일을 하여서 되겠느냐? 너희들의 노여움과 혹독함이 저주받을 행위요, 그 분기와 맹열함도 역시 저주받을 일이라”고 하므로 그들의 죄와 잔인함이 저주로 연결될 것을 예언하였고,
4) 자신의 입장을 결코 그런 모의와 행사에 가담치 않을 것을 표명한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내 혼이 그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야곱 자신(혼)은 그런 악한 모의에 가담할 수 없고 또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서도 그런 집회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교훈의 경고를 준 것입니다.
5) 그런 결과로서 시므온과 레위 두 지파는 저주스러운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그것이 곧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는 일이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음이 된 것”입니다(7절). 이것은 시므온과 레위 지파가 좋은 기업을 받지 못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어서
① 시므온 지파는 독립적으로 기업을 받지 못하고 유다 지파 분깃의 일부를 떼어 받았으니(수19:1,9) 이것이 곧 야곱 중에서 나눈 일이요 이스라엘 중에서 흩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② 레위 지파 역시 성전봉사자로 발탁되어 기업을 얻지 못하자(신10:9) 가축먹일 장소를 다른 지파 분깃 중에서 나누어 받았지만(수21:1~3) 나중에는 그 후손들이 유리하는 신세가 되기까지 하였습니다(삿17:7~8). 7절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시므온과 레위는 그들의 폭력성과 잔인성 때문에 넉넉한 기업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3. 유다에 관한 예언입니다(8~12절).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로 그에게 왕적 권위와 물질의 풍성함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1) 8절에서 “형제의 찬송이 되고 그가 원수의 목을 잡으며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한다”는 뜻은 그 자손 중에 치리자(왕)가 나옴으로 그가 대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든든히 세워 백성들로부터 칭송 받을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다윗의 왕통이 약400년 계속되었는데 그 왕통이 바로 유다 지파였습니다(삼상17:12).
2) 9절에서 유다 지파를 “먹이를 움키는 사자새끼”로 비유한 것은 그 왕적 권위가 짐승의 왕 사자처럼 위엄이 있어서 그들에게 함부로 대항하지 못할 것을 뜻하며,
3) 10절에서 “홀과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왕적 권위가 무궁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친다”는 말씀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유다의 왕권이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친다”는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주석 상 난제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실로”란 말의 의미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① 실로란 지명이 있기는 하나(벧엘 동북편 18Km지점~ 삿21:29; 삼상4:3; 렘7:12,14) 본문의 “실로”는 인격의 대명사 “오시는 이”로 표현되었은즉
② 그가 오시면 유다 지파가 향유하던 왕권이 끝나게 되니 이는 그 왕권을 부여하신 통치자가 직접 오셔서 통치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그렇다면 유다 지파가 향유하던 왕권이란 무엇인가 할 때,
첫째는 다윗 왕으로부터 시드기야 왕까지의 현실적 왕통으로 이는 바벨론 침략으로 왕국이 무너졌은즉 하나님의 징계의 간섭으로 끝나게 되었음이며,
둘째는 하나님이 유다 지파를 통하여 메사야 왕을 보내심이니 이 왕은 유다 지파의 법적 계열로 계속 이어지다가 예수님의 탄생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실로라는 어원은 해석하기 어려우나 그 의미를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 의미는 유다 지파에게 왕권을 주어 향유하게 하신 근원자의 직접통치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통치와 성령님의 통치시대인 신약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유대인의 영적 권위는 메시야 탄생과 함께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의 영적 권위를 부여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롬2:28~29; 행11:17; 고전7:18~19; 갈2:11~16).
④ 또 그분은 모든 백성을 복종케 하실 예수님이요,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4) 11~12절 말씀은 유다 지파에게 양식이 풍족할 것을 예언하셨으니 나귀나 암나귀 새끼를 잡목에 매지 않고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만큼 포도나무가 많을 것이고, 그 옷을 포도주에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만큼 포도주 생산이 많으니 이는 포도주의 풍성한 사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눈이 포도주로 인하여 붉었음도 역시 포도주를 많이 먹을 수 있다는 뜻이요, 이가 우유로 희어진다는 것도 역시 “흰색의 우유를 많이 먹어 이까지 희게 물들 것이라”는 뜻인즉 풍성함의 비유적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 지파는 현실적 왕권과 양식의 풍족함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유다 지파에게 이런 복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도 있었고 또 유다가 요셉을 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창38:26~27; 출33:19) 참고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4. 스블론 지파는 “배를 매는 해변 지역을 기업으로 받아 그 북쪽지경이 시돈까지 이를 것이라”(13절)하였는데 이 예언대로 그 지파는 갈릴리바다 서편 지중해지역을 기업으로 받았고(수19:10~16),
5. 잇사갈 지파는 “양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처럼(14절) 힘과 위엄이 있을 것이며, 토지를 아름답게 보고 휴식의 여유(쉴 것을 보고 좋게 여김)를 갖는 농업에 종사할 것과 힘있게 일하고 복종하는 자세를 취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 섬길 것이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6. 단 지파가 “이스라엘의 한 지파처럼 그 백성을 심판하리라”하심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인 유다 지파에서 심판자 예수님이 나오신 것처럼 단 지파에서는 삼손이 나와서(삿13:2) 백성을 구할 것을 예언하심이요, 또 단 지파는 길의 뱀이 말굽을 물어 탄 자를 떨어뜨리고 날쌔게(거칠게: 첩경) 나는 독수리가 먹이를 채가듯 다른 사람을 해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삿18:14~29에서 그들이 무법하게 “라이스”거민을 학살하여 불사른 일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 사실을 예언으로 내다보면서 범죄하는 단 지파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있기를 기원하였습니다(18절).
7. 갓 지파는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추격할 것”을 예언하였는데 이 사실은 다윗 때에 성취되었습니다. 즉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블레셋 진영 시글락에 있을 때에 블레셋의 침략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대하11:13~16) 이때에 갓 지파의 용사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도망하게 한 사실로 이루어졌습니다(대하12:8~15).
8. 아셀 지파는 기름진 식물을 재배할 것과 그것으로 왕의 진수를 공궤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약 400년 후시대에 모세도 예언하였고(신33:24), 아셀 지파의 기름진 식물로 왕을 공궤한 사실은 솔로몬 왕 때에 궁정의 식물을 두로 왕에게까지 공급한 일로 성취되었습니다(왕상5:11).
9. 납달리 지파는 “놓인 암사슴”처럼 날랜 군사를 보유할 것을 예언하였으니 이는 사사시대에 가나안 왕 야빈과 싸울 때 큰 역할을 한 바락 장군이 납달리 지역에서 출전한 사람이요(삿4:6) 그들이 전공을 세웠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삿5:18). 또 그들이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 함은 승리의 노래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여러 아들들의 미래에 될 일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의 특징은
1) 하나님이 미래를 통치하시는 주인이 되심과,
2) 하나님만 그것을 예언하게 하실 수 있음과,
3) 미래의 복된 상황은 하나님이 보시는 특정한 근거에 의하여 나타내심과,
4) 약 400년 이후에 될 일을 예언하였음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성도는 먼 미래를 위하여서도 희망을 가져야 할 것인즉 이는 성도가 영원히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복 받을 만한 좋은 일들을 많이 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92 과 요셉, 베냐민에 관한 예언과 야곱의 죽음 (창 49:22~33) 목록으로
위 본문에서는 ① 야곱이 요셉과 베냐민에 관하여 예언한 말씀과(22~28), ② 자신의 장례에 대한 명령과 죽음기사로 되어 있습니다.
1. 요셉에 관한 예언(22~26).
1) 22절에서 요셉의 후손이 발전할 것을 예언하였으니,
① 요셉의 발전을 무성한 나무로 비유하여 설명하였고,
② 무성한 가지란 발전과 번영을 의미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발전으로 여기지만 성도는 반드시 신령한 복의 발전과 현실의 복을 아울러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③ “샘 곁의 무성한 가지”란 발전의 축복이 오래 지속될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가뭄이나 천재의 피해를 샘물 같은 은혜로 피하면서 꾸준하게 발전할 것을 의미하며,
④ 그 가지가 담을 넘은 것은 봉사적인 축복으로 담 밖으로 넘어간 열매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복을 의미합니다. 귀 가정에도 이러한 발전의 복, 환난을 피하는 복, 봉사의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2) 외적의 침략을 잘 막을 것에 대하여 예언을 하였으니(23절)
①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 군박한다” 함은 대적의 침략 받음을 뜻하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한즉 이를 물리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삿11장과 12:4~6을 보시면 길르앗 백성들이 입다를 앞세워 암몬의 침략을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 길르앗이 므낫세의 손자이므로(민26:29,30; 수17:1) 이 사건이 예언에 적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여호수아의 지도로 에브라임 지파가 기업을 확장하기 위하여 브리스 사람들과 충돌하여 승리한 사실이 있었는데(수17:15~18) 바로 그 사건을 예언하신 것이요.
② 요셉의 후손들이 이렇게 견강하여 적을 물리칠 수 있음은 야곱의 섬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도우심)을 힘입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24절).
③ 그리고 또 24절에서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하셨는데 이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 우선 이 말씀이 요셉의 후손에 대한 예언임을 감안할 때 ‘그로부터’란 말씀을 요셉으로부터(즉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은 자) “이스라엘 목자가 나온다”고 생각할 때 메시야는 유다 지파에서 오셨으므로 해당되지 않으나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탄생할 것을 예언하신 것으로(민13:8)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셉이나 여호수아가 다 메시야의 모형자이기 때문입니다.
㉡ 므낫세의 손자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낳은 “입다”(민26:29, 30; 수17:1; 삿11:1)가 이스라엘을 암몬의 침략에서 구한 사실이 있었는데 본문 23절과 결부시킬 때 “활 쏘는 자의 군박을 받았으나 도리어 요셉의 활이 견강하여 이를 물리쳤으니 이는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이요 목자인 입다가 나와서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 그러나 현대번역 성경에서는 문맥 자체를 다르게 번역하여 “요셉의 활이 견강함은 이스라엘의 반석이시며 목자이신 전능자의 능력 때문이라”하므로 반석과 목자를 하나님과 결부시켰으니 개역성경과 상당히 의미가 다른 것이요.
㉣ 또 어떤 주석에는 칼빈의 해석을 인용하여 이는 요셉을 선한 목자인 예수님으로 상징하여 나타낸 말씀이라고 하므로 “반석이신 목자”를 요셉에 대한 설명으로 나타내었습니다.
㉤ 본문의 ‘그로부터’는 요셉에게 힘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목자요 반석이신 메시야가 오시게 될 것이라는 해석이 가장 바람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만은 아니시지만 구약적 표현으로는 그렇게 나타내실 수 있을 것이요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반석”으로 표현하는 것은 무리한 표현일 것입니다.
3) 25절의 “위로 하늘의 복”이란 햇빛과 비와 이슬 등이요, “아래로 원천의 복”은 샘물의 복이요 “젖먹이의 복”은 생산과 양육을 의미함이며,
4) 26절의 “그 부여조의 축복보다 더 많다”함은 야곱이 비는 복이 그 조상들이 빈 복보다 더 많음을 나타낸 것으로 산이 영원히 변하지 않음같이 장구하게 임할 것을 축복한 것입니다. 또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 정수리에 임할 것”이란 뜻은 육체의 중심부를 뜻하므로 확실하게 요셉의 후손에게 임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2. 베냐민에 관한 예언입니다. 27절에서 “베냐민이 물어뜯는 이리라”하심은 그 후손들이 폭력을 일삼아 살되, “마치 이리가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는 것”처럼 폭력이나 탈취행위를 자행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삿19장과 20:15~16을 보시면 베냐민 지파의 만행으로 큰 싸움과 살육이 빚어진 일이 있었는데 아마 그 일을 예언하심인 듯도 합니다. 야곱은 베냐민 후손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예언을 하였을 것입니다.
3. 28절에서 야곱은 열두 아들에게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으니 이는 축복하는 자의 양심이요 특권인 것입니다. 선한 자에게 축복을 아끼지 않으며 악한 자에게 축복할 수 없음이 신앙양심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갈6:7) 은혜와 긍휼도 베푸실 만한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출33:19). 하나님의 복에는 선택적인 은혜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람의 축복은 공의로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야곱의 장례에 관한 명령과 죽음에 관하여(29~33).
1) 29절에서 야곱은 자신이 미구에 세상 떠날 것을 예지함으로 말하고 자신의 시신을 조상의 묘소에 장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요셉에게 부탁하고 맹세 받은 사실을 다시 모든 아들들에게 재확인한 것입니다.
2) 30절에서는 조상의 묘소인 막벨라 굴의 위치와 선조가 구입한 경위와 그곳에 묻힌 조상들을 상세히 알려 주었습니다. 이처럼 무덤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은
① 관리의 책임을 전가하고,
② 하나님의 약속대로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모이게 될 것과,
③ 한 장소에서 같이 부활할 것을 사모한 때문일 것입니다.
3) 야곱은 이 말을 마치고 침상에서 그 발을 거두고(모으고) 기운이 진하여 열조에게로 돌아갔으니(33절), 이는 죽음의 상태를 표현한 내용으로 조용히 영면한 것이며, 쇠약한 병으로 시작하여(48:1) 기운이 진하여 운명한 것입니다. 열조에게로 돌아갔음은 그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 즉 천국(눅16:22)에 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1) 요셉의 후손이 많은 복을 받은 일에 대하여 요셉의 공로가 컸다는 점과,
2) 베냐민은 폭력성을 가지므로 발전하지 못한 점과(마5:5),
3) 축복은 주실 만한 분량대로 베풀게 된다는 것과,
4)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과 내세를 사모한 점과,
5) 세상을 떠나는 성도의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는 사실이 구약시대에도 있었음과,
6) 야곱의 후손들에 대한 이 예언과 축복은 극히 부분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 93 과 야곱의 장례 (창 50:1~14)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에는 이스라엘이 147세에 세상을 떠나므로 장사지내는 내용들이 기록되었습니다. (대지 구분은 본문을 참조하십시오.)
1. 야곱이 세상을 떠나므로 요셉이 크게 애통하였으니(1~3절), ① 요셉은 죽은 아버지의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을 맞추었고(1절), ② 70일 동안 크게 애곡하였으므로(3절) 가나안 백성들이 그의 애통을 보고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여 그가 애통한 장소 즉 아닷의 마당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애굽인의 곡)이라 하였으니, 그 지경은 요단강 건너편이었습니다(11절). 물론 다른 아들들도 슬퍼하였겠지만 요셉은 특별히 많이 애곡하므로 부모에 대한 애정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요셉은 그 아버지 시신에 방부제 처리를 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3절). 애굽 사람들의 고대문화는 시체처리에 탁월하여 시체가 오래도록 썩지 않도록 보존하는 미이라 기술을 발휘하여 야곱의 시신에 향재료(몰약)를 넣는 작업이 40일이 걸린 것입니다.
3. 그리고 요셉은 이 사실을 바로에게 고하게 하여 야곱의 유언을 따라 가나안 땅에 다녀올 것을 허락 받은 후(4~6절), 장례 차 가나안 땅으로 갈 때에
1) 애굽 땅보다 가나안 땅이 높은 지역이므로 “올라간다”(6~7절)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2) 이때에 바로궁의 모든 신하와 장로들과 요셉 집안의 사람들이 아이들과 양떼, 소떼만 남기고 다 올라갔으며 병거와 기병의 떼도 심히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3) 그 행렬이 요단강 건너편 “아닷의 타작마당에 이르렀다”하였으니 이곳은 요단강 건너편이므로(11절) 애굽에서 헤브론의 막벨라로 직행하지 않고 동쪽 사해 동편으로 돌아서 사해바다 북편의 요단강을 건넌 것입니다. 따라서 이 요단강 지역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입국 시에 통과한 지역과 비슷할 것입니다.
4. 야곱의 아들들은 그 아버지의 명대로 준비된 선영에 장사하므로 유언을 잘 이행하였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5.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배울 점은
1) 요셉이 부친의 죽음을 크게 슬퍼한 점과,
2) 요셉과 그 형제들이 부친의 유언을 잘 지킨 점과,
3) 애굽 사람들의 장례식 절차가 장황스러운 것은 그들의 풍속이고 또 시체를 보존하는 기술이 특출한 것은 부활소망을 믿는데서 비롯되었지만 현재는 그런 신앙을 계승할 만한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하고 있음이 아쉬운 점이라 하겠습니다.
제 94 과 요셉이 형을 위로하고 세상을 떠남 (창 50:15~26)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두 제목의 내용이 수록되었으니, ①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형들이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미리 용서를 구하는 내용과(15~21절), ② 요셉이 남은 생애를 살다가 110세에 세상을 떠나는 내용(22~26절)으로 창세기 전부가 마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종합하면 “요셉이 형제를 위로하고 세상을 떠남”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 요셉이 형들을 위로함에 대하여(15~21절).
1) 이 대지에서 요셉이 형들을 위로하였음은 21절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요셉의 보복이 있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15절) 1차, 2차에 걸쳐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였고 요셉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의 자녀를 기를 것이라”하면서 간곡히 위로를 한 것입니다.
2)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자 요셉의 보복을 우려한 것은 요셉을 불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사랑이 부족한 불신감으로 요셉을 의심한 것입니다. 이런 의심은 좋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고전13:7)라고 한 말씀에 위배되는 일로 의심을 한 것입니다.
3) 그래서 1차는 간접적으로(16절) 2차는 직접으로 용서를 구하였으니(18절) 그들이 용서를 구한 내용은 “부친이 생전에 말씀하시기를 형들이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라”고 요셉에게 전하도록 하였으니 “종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원한 것입니다. 1차로 구하였을 때는 간접적 요청으로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 특징이었고(17절), 2차에는 직접 와서 절을 하며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하였으니 이것은 요셉이 어릴 때 받은 계시를 더 확실하게 성취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창37:7).
4) 이 말을 들을 때 요셉은 “울었다”고 하였습니다(17절). 이 울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요셉의 넓은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형들이 불쌍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인정에 끌려 용서한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용서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5) 그래서 요셉은 형들의 “용서를 구한 청원”에 대하여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19절). 사람은 용서만 할 뿐이요, 보복적 심판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음을 알 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롬12:19).
6) 또 하나님은 해롭게 하는 일도 선으로 바꾸어 전화위복이 되게 하셔서(20절) 오히려 그 일로 말미암아 만민의 생명(애굽과 가나안 지역의 모든 사람)을 구원케 하셨으니 더욱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형제들의 자녀들까지 양육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7) 이상의 말씀에서,
① 요셉의 넓은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형들의 얕은 생각과,
② 그들이 용서를 빌므로 하나님의 계시가 성취되게 하신 사실과,
③ 사람은 용서할 수 있으나 보복은 할 수 없으며,
④ 하나님은 해롭게 한 일을 선으로 바꾸어 유익하게 하시는 분임과,
⑤ 요셉의 용서와 충분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요셉의 남은 생애와 죽음에 관한 말씀입니다(22~26).
1) 요셉은 110세에 세상을 떠났다 하였으므로 애굽에서 93년을 살았고, 애굽 총리 80년을 지냈으며 가나안에서 온 가족들과는 약 70년(창45:6)을 같이 산 것입니다. 이 70년이란 계산은 요셉이 30세에 총리 되고 7년 풍년과 2년 흉년, 그리고 가나안의 가족이 흉년 때 1년쯤 견디었을 것을 감안한 계산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부친 야곱이 세상 떠난 후에 53년을 더 산 것입니다. 이 계산은 요셉이 40세쯤에 야곱이 130세요(창47:9), 야곱이 세상을 떠난 147세 때에 요셉이 57세쯤임을 앎으로 계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요셉은 110세까지 살면서 에브라임의 자손으로 3대(그러니까 고손자까지)를 보았고 므낫세의 자손으로는 손자(증손자)까지 보아 자기의 슬하에서 양육하다가
3) 세상 떠날 날이 가까워 옴을 깨닫고 그 형제들 앞에서 유언을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① 그의 유언은 “자신은 죽으나 하나님이 남은 가족들을 권고하시리라”는 점과 “조상의 하나님이 자기 부족들을 맹세하신 땅(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② 이것을 말한 후 이 사실을 믿을 것과 또 25절에서 자신의 유골을 가나안 선영에 장사할 것을 맹세로 받고(히11:22),
③ 110세에 세상을 떠나니 애굽 방식으로 입관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죽음도 신앙적으로 맞이하였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게 하는 등 남은 가족들에게 건설적인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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