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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고대 철학/플라톤 -국가9,7권)

by 이덕휴-dhleepaul 2019. 12. 1.
  1. 플라톤 - 국가 7권

2019.10.21 15:32 고대 철학/플라톤


1) 제 9권의 논의 전개

 

제 8권은 참주 정체에 관한 언급으로 끝나고, 정작 참주 정체를 닮은 사람에 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 9권은 참주 정체를 닮은 사람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되는데, 먼저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해서 탄생되며 그가 보이는 행태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시도한다. 이어 제 2권에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올바름'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적극적인 옹호를 유도해 내기 위해서 행한 도전적 발언에 대한 결론적 응답을 얻게 된다. 1) 참주 정체를 닮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올바르지 못하며 가장 비참한 자이다. 2)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이 가장 참된 즐거움인지를 밝힘으로써, 어느 쪽이 가장 즐거운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보여 준다. 3) 즐거움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통해 둘째 논의를 심화한다. 

 

2) 본문 (1) - 참주적 인간이 탄생과 그 결과 (571a-580c)

 

"그러면 남은 것은 참주 정체적인(참주 정체를 닮은) 사람이 어떻게 민주 정체적인(민주 정체를 닮은) 사람에서 바뀌어 나오며, 일단 그렇게 생겨난 다음의 그는 어떤 사람이며, 또한 어떤 식으로, 즉 비참한 상태로 아니면 축복받은 상태로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일세." 내가 말했네.

"아닌게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이 사람이니까요." 그가 말했네.

"그런데 자네는 내가 여전히 아쉬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내가 물었네.

"어떤 것인데요?"

"욕구epithymia들의 문제인데, 그것들이 어떤 것들이며 얼마나 많이 있는지를 우리가 충분히 구별해 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네. 이 문제가 불충분하게 다루어진 상태로는, 우리가 하고 있는 탐구는 그만큼 불분명할 걸세."

 

소크라테스는 먼저, 참주정체적인 사람의 탄생 과정을 묘사하겠다고 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또한 이러한 탄생으로부터 참주정체적인 사람의 상태가 비참한 지에 대해, 아니면 축복받았는 지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이 정치 체제politeia의 가치에 대한 평가를 내리려 한다. 이러한 정치 체제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은 욕구epithymia들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들을 보다 심도있게 고찰함으로써 비로소 참주적 정치 체제가 지닌 특성과 본질이 남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즐거움hēdonē과 욕구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내가 생각하기엔 비정상적인 것들인 것 같으이. 이것들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생기겠으나, 법률에 의해서 그리고 이성logos을 동반한 더 나은 욕구들에 의해서 억제됨으로써, 몇몇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주 없어져 버리거나 소수가 약한 상태로 남아 있거나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강한 상태로 더 많이 남아 있네."

(...)

"혼의 다른 부분이, 즉 이성적이고 유순하며 지배하는 모든 부분이 잠들 때면, 짐승 같고 사나운 부분은 잔뜩 먹고 마시고서는 발딱 일어나 잠을 물리치고 나가서는 제 기질을 충족시키려 꾀하지. 그런 때에 그것은 일체의 부끄러움과 분별에서 풀려나고 해방된 터라, 무슨 짓이든 감행한다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네. 그것은 상상하게 되는 데 따라 어머니와도, 그 밖의 인간들이나 신들 중의 누구와도, 또는 짐승들 중의 어떤 것과도 교접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누구든 살해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거니와, 어떤 음식이든 삼가는 일도 없다네. 한마디로 말해서, 어리석거나 파렴치한 짓을 빼놓지 않고 저지른다네." 내가 말했네. 

 

소크라테스는 불필요한 즐거움hēdonē과 욕구들을 언급하면서, 욕구와 즐거움 역시 무조건 추구되어야 할 것이 아닌, 그 필요에 따라 적절히 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에피쿠로스의 사유와 유사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이어 더해, 법률과 이성logos을 동반한 욕구들, 혹은 이것들에 의해 통제되는 욕구들이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성적이고 유순하며 지배하는 모든 부분이 잠들 때", 무절제의 영역에 놓여있는 욕구들은 근친상간, 살해 등 어리석거나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게 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또한 이러한 욕구들이 "일체의 부끄러움과 분별에서 풀려나고 해방된 터"라고 말함으로써, 이성적이고, 유순하며, 지배하는 부분들은 부끄러움과 분별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스스로 건전하게 그리고 절제 있게 처신할 때는, 그리고 이 사람이 잠자리에 들 때는, 이렇게 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그는 자신의 이성적인(헤아리는) 부분to logistikon을 깨워서, 훌륭한 말들과 고찰들의 성찬으로 대접을 받게 하여, 홀로 명상에 잠기게 하는 한편으로, 욕구적인 부분to epithymētikon에 대해서는 모자람endeia도 충족plēsmonē도 느끼지 않도록 해 주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이 부분이 잠들게 되어, 그것의 기쁨이나 고통으로 최선의 부분to beltiston에 소동을 일으키는 일이 없게 하며, 이 부분이 자체로 혼자 생각을 하게 하고,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또는 미래의 것이든, 그걸 깨치게 되었으면 하네. 또한 그는 같은 방식으로 격정적인 부분to thymoeides을 진정시킴으로써 어떤 사람들에 대해 격분하게 되어 격양된 상태로 잠드는 일이 없도록 하네. 그가 이들 두 부류는 안정시키는 한편, 앞의 셋째 것, 즉 지혜로움이 거기에 깃들게 되는 부류는 동하게 함으로써, 이처럼 안식을 얻게 된다면, 그런 상태에서 그는 진리를 가장 잘 파악하게 될 것이며, 그의 꿈속에 나타나는 환영들이 그때에 가장 덜 비정상적인 것들일 것이라는 걸 자네는 알고 있네." 내가 말했네.

 

결국 가장 덜 비정상적인 상태는, 이성적이며 유순하고 지배하는 부분들이 깨어있어, 욕구적인 부분들을 통제하며, 모자람도 충족도 느끼지 않도록 해주고, 이들을 잠들게 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부분들은 최선의 부분to beltiston으로 격정적인 부분to thymoeides을 진정시키는데, 바로 이 상태가 또한 7권에서 논의되었던 선의 이데아, 즉 진리를 가장 잘 파악하게 되는 상태이기도 하다. 결국 플라톤은 욕구 자체의 선과 악을 따지기보다, 무섭고 사나우며 무법한anomos 종류의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기에, 이를 통제하려는 이성적인(헤아리는) 부분to logistikon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참주정체적인 사람이 과연 이러한 통제를 적절히 하고 있는지가 논의된다.

참주정체적인 사람의 탄생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민주적인 사람ho dēmotikos은 어려서부터 오로지 돈벌이를 하게 하는 욕구들만을 존중할 뿐, 불필요하고 놀이와 과시 때문에 있게 되는 욕구들은 멸시하는 인색한 아버지에 의해 양육된다.

2) 이런 양육을 받은 사람이 한결 세련되고 방금 말한 욕구들로 충만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 갖은 오만 무례함hybris과 그들의 행태eidos를 향해 내닫는데, 이는 아버지의 인색함에 대한 미움 때문이다.

3) 그러나 이러한 인간은 자기를 타락시킨 사람들보다는 나은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인색함과 오만함의 양쪽에 이끌리다가, 이들 양쪽 기질의 중간에 자리잡는다.

4) 그리고서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그 각각을 적정하게 즐기며, 부자유한 삶도 불법한 삶도 살지 않으니, 과두 정체적인 사람에서 민주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5) 민주적인 사람의 품행ēthē 속에서 자라게 된 아들은 그를 이끄는 자들에 의해 완전한 자유라 불리는 갖은 불법paranomia으로 인도된다.

6) 그의 아버지와 친척들은 이들 중간 상태에 있는 욕구를 지원해 주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들대로 다른 쪽을 도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은 이 아들에게 욕정erōs을 게으르고 닥치는 대로 발산해 버리는 욕구들을 심어준다.

7) 이러한 제약 없는 즐거움들로 충만되어, 이 사람은 광기mania의 경호를 받으며 미쳐 날뛴다.  그래서 이 사람 안에서 유익하고 아직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의견doxa들이나 욕구들을 이것이 발견하게라도 되면, 이것들을 죽여 버리거나 그에게서 내쫒아 버리어, 마침내는 그한테서 절제를 숙청하고서, 밖에서 들여 온 광기로 채운다.

8) 이로부터 참주적인 인간은 결정적으로 욕정erōs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해명되었다.

9) 8)으로부터, 옛날부터 에로스Erōs가 참주라고 말한 까닭이 해명된다.

10) 이러한 욕정은 앞에서 통찰한 혼의 상태에 관한 고찰과 연결되어, 그것이 타고남보다도 통제의 부족 때문에 타락함을 알 수 있다.

11) 10)으로부터, 참주적 인간이 되는 것은 그가 천성에 의해서나 생활 습관에 의해서 또는 이 양쪽 다에 의해서 욕정적이고 충동적이게 될 때에 가능함이 드러난다.

 

이로부터 참주적 인간의 탄생이 논의되었으므로, 소크라테스는 이제부터 참주적 인간의 생활 방식에 대해 논의를 시작한다.

1) 에로스가 참주로서 그 사람 안에 거주하게 되어 그 혼의 모든 걸 조종하게 되면, 그는 참주적 인간이다.

2) 참주적 인간은 필연적으로, 축제와 주연, 경축 행사와 기녀들 같은 향락을 즐긴다.

3) 이러한 향락의 추구는 에로스 곁에서 많은 무서운 욕구가 매일 밤낮으로 자라나서, 많은 걸 요구하게 된 결과이다.

4) 고로 이러한 욕구의 충족으로 인해, 자산과 자원이 탕진된다.

5) 그러나 3)으로부터, 무서운 욕구가 단지 존재할 뿐 아니라 새로이 생겨나기도 하므로, 이러한 욕구는 결코 충족되는 법이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이 다 떨어지고 나면, 그 사람 안에 둥지를 튼 수많은 강렬한 욕구가 아우성을 칠 게 필연적이다.

6) 고로 이렇게 에로스 자체에 쫓기게 되는 사람은, 부모에게서 훔치거나 부모를 속이려 들며, 폭력까지 불사하게 된다.

7) 그리하여 부모의 재물이 다 떨어지면,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고, 더 나아가 신전을 털게 될 것이다.

8) 그리고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오래 전에 어릴 적부터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에 관련해서 갖고 있었으며 올바른 것들로 간주되었던 의견doxa들을 최근에야 노예 상태에서 풀려나 최근에야 에로스를 경호하게 된 의견들이 에로스와 더불어 지배하게 된다.

9) 이러한 의견들은 이전에는, 이 사람이 아직도 법률과 아버지 밑에 있으면서 자신 안에 민주 정체적 체제를 갖고 있었을 때에는, 잠자는 동안에 꿈으로나 거기에서 풀려났던 것들이다.

10) 그러나 에로스에 의해서 참주 체제로 되고서는, 이들이 풀려나 참주체제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즉 참주체제적인 사람은 어떤 무서운 살인도, 어떤 음식이나 행동도 삼가지 않는다.

11) 오히려 이 사람 안에서는 에로스가, 그 자신이 유일한 지배자이기 때문에, 완전한 무정부적 상태와, 무법한 상태에서 참주처럼 살고 있다.

12) 결국 에로스는 이를 간직한 자를, 마치 나라처럼, 온갖 대담한 짓으로 이끌고 갈 것이니, 그 자신과 그것을 둘러싸고 소란을 일으키는 무리를 지탱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은 이로 인해서이다. 이 무리 중에 일부는 나쁜 교제로 해서 밖에서 들어온 것이고, 다른 일부는 안에서 생긴 것이며, 그 자신의 나쁜 생활 습관으로 인해서 풀려나 자유롭게 된 것이다.

 

만약 이런 참주체제적인 사람들이 소수라면, 평시에 다른 참주를 경호하거나, 또는 전쟁이라도 있을 경우엔 용병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나 평화롭고 조용한 시대에 그들이 살게 된다면, 그들은 국내에 살면서 많은 사소한 나쁜 짓(ex.도둑질, 가택 침입, 소매치기, 노예 매매, 무고, 거짓증언 등)을 저지르게 된다.

반면 나라에 그런 사람들이 많고, 이들을 추종하는 다른 사람들이 많아, 그들이 민중의 어리석음과 더불어 참주를 탄생시키면, 그는 자신의 혼에 최강의 극단적인 참주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참주는 부모에게 그랬듯 조국patris에게도 마찬가지로 굴어 조국을 노예로 만들 것이며, 바로 이게 이런 인간의 욕구의 종말이 될 것이다.

또한 참주는 1) 아첨꾼들을 사귀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어떤 사람의 것이 필요할 때는, 스스로 아첨을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얻은 이후에는 바로 남이 되어버린다.  2) 그리하여 온 생애를 통해서 결코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못하고, 주인 노릇을 하거나 노예 노릇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3) 따라서 참주적 성향은 자유도 우정도 영원토록 맛보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소크라테스는 성향에 있어서 가장 참주적이면서 혼자서 다스리게 되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올바름dikaiosynē에서 먼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가장 사악한 자이기 때문에, 가장 비참한 자이기도 하다.

이제 이 모든 비유들은 "훌륭함 및 행복과 관련해서 나라와 나라의 관계는 바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전제에서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참주 정체적인 인간은 참주 정체인 나라에 상응하며, 민주 정체적인 인간은 민주 정체인 나라에 상응한다는 논의로부터 곧 참주 정체인 나라보다 왕도 정체인 나라가 훨씬 행복한 나라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선생님의 제의는 옳습니다. 그리고 참주 정체의 나라보다도 더 비참한 나라는 없으며, 왕도 정체의 나라보다도 더 행복한 나라도 없다는 것도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그가 말했네.

(...)

"첫째로, 나라를 말함에 있어서, 참주 체제의 나라를 자네는 자유로운 것이라 말하는가, 아니면 노예 상태의 것이라 말하는가?" 내가 물었네.

"최대한에 있어서 노예 상태의 것이라 말합니다." 그가 대답했네.

"그렇긴 하나, 이 나라에서는 주인들과 자유민들을 자넨 보겠지?"

"작은 그 부류를 어쨌든 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 있어서는, 말하자면, 전체와 가장 선량한 부류가 불명예스럽고 비참하게도 노예의 처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가 말했네.  

혼의 상태를 다시금 나라와 유비시켜 말하고 있다. 즉 혼이 에로스에 휘둘려 욕정의 노예 상태로 전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주 체제 역시 "노예 상태의 것"에 놓여 있다. 또한 혼이 욕정에 휘둘려 있다해도, 이성적인(헤아리는) 부분to logistikon이 제거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잠자고 있는 상태라는 위의 논의를 참조한다면, 노예 상태의 참주 체제라 할지라도 주인들과 자유민들은 존재한다. 이들은 다만 "작은 부류"로 "불명예스럽고 비참하게도 노예의 처지가" 되어 있다.  

 

"만약에 사람이 나라와 유사하다면, 사람에 있어서도 같은 질서 체계taxis가 있는 게 필연적이어서, 그의 혼도 많은 굴종과 부자유로 충만해져, 혼의 가장 선량한 부분들은 노예 노릇을 하나, 가장 사악하고 가장 광적인 작은 부분은 주인 노릇을 하는 게 필연적이지 않겠는가?" 내가 물었네.

"필연적입니다." 그가 대답했네.

"그러면 어떤가? 자네는 이런 혼이 노예 상태에 있다고 말하겠는가, 아니면 자유롭다고 말하겠는가?"

"저로서는 물론 노예 상태에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런데 노예 상태에 있는 참주 체제의 나라가 그것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가장 적지 않겠는가?"

"아주 적겠죠."

"그렇다면 참주 체제의 혼도, 전체 혼과 관련해서 말할진대,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적을 걸세. 이 혼은 광적인 욕망(욕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언제나 끌려다녀 혼란과 후회로 가득하게 될 걸세."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한데, 참주 체제의 나라는 부유한 게 필연적인가, 아니면 가난한 게 필연적인가?"

"가난한게 필연적입니다."

"그러므로 참주 체제의 혼도 늘상 궁하고 만족할 줄 모를게 필연적일세."

 

고로 참주 체제는 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욕정들을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욕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가능성도 가장 적은, 혼란과 후회로 가득한 체제라는 게 증명된다. 또한 이 체제는 광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늘상 궁하고 만족할 줄 모른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다시금, 이 사람이 가장 비참한 사람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장 비참한 사람은 실제로 통치자가 된 참주 체제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그런 사람인가요?"

"아마도 이런 사람이 그보다도 한층 더 비참한 것으로 자네에겐 생각될 걸세."

"어떤 사람인가요?"

"참주 정체적인 사람이 사인으로서 일생을 보내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어떤 불운으로 인해서 실제 참주가 될 수밖에 없게 된 경우일걸세."

"나라들에 있어서 많은 노예를 가진 부자들 개개인을 통해서일세. 이들은 참주들과 유사점을, 즉 많은 사람을 거느린다는 유사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세. (...) 자네는 이 부자들이 불안한 구석이 없으며 가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네?"

(...)

"네. 그건 온 나라가 시민 개개인을 지원해 주기 때문이죠."

(...)

"어떤가? 가령 어떤 신이 50명 또는 그 이상의 노예를 갖고 있는 한 사람을 (...) 아무도 그를 지원해 줄 엄두를 낼 수 없는 외진 곳에다 그와 처자를 다른 자산 및 가노들과 함께 내려 놓는다면 말일세. (...) 아무 요구도 하지 않는데도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주지 않을 수 없게 될 뿐더러, 자신이 자기 하인들의 아첨꾼으로 변하여 있지 않겠는가?"

"그에게는 그게 다분히 필연적입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살해될 게 필연적이죠." 그가 말했네. 

이러한 유비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많은 온갖 두려움과 욕정으로 가득 찬 그런 참주"가 이런 감옥에 갇혀 있을 것이라 말한다. 자기 내면에 있어서 잘못 다스려지고 있는 사람, 즉 참주 정체적인 인간이 어떤 불운으로 어쩔 수 없이 참주가 되면, 자신을 다스릴 수도 없으면서 남들을 다스리려고 하기에, 더 많은 불행의 수확을 거두어 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고로 영혼이 병들어 있으면서도, 투쟁과 싸움을 반복해야만 하는 참주의 삶이야말로 가장 고달프게 사는 비참한 처지에 있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참주가 "가장 불운하며, 더 나아가 그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런 사람들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여, 소크라테스는 참주 체제가 가장 불행하고 올바르지 못한 정치 체제임을 논증했다. 이제 앞서 논의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행복한 정치 체제의 서열을 매긴다. 1) 왕도 정체적인 인간, 2) 명예 지상정체적 인간, 3) 과두 정체적 인간, 4) 민주 정체적 인간, 5) 참주 정체적 인간이다.  

 

"저로서는 그들을 [사람의] 훌륭함aretē, [사람의] 나쁨kakia, 행복,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것에 의해서 판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했네.

"그러면 포고할 사람을 우리가 고용할까? 아니면, 아리스톤의 아들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올바른 자가 가장 행복하며, 이 사람은 가장 왕도 정체적인 인간이며 자신을 군왕처럼 다스리는 자이지만, 가장 나쁘고 가장 올바르지 못한 자는 가장 비참하며, 이 사람은 가장 참주 정체적인 인간으로서, 자신과 나라를 최대한 참주적인 방식으로 다스리는 자라고 판정했다고 내 자신이 발표를 할까?" 내가 물었네.

 

3) 본문 (2) - 즐거움, 욕구들과 그 다스림들의 세 부분 (580d-583a)

 

"혼의 세 부분이 있으므로 즐거움hēdonē들에게도 세 가지가, 즉 그 각각에 특유한 즐거움이 하나씩 있는 것으로 내겐 보인다네. 욕구들과 그 다스림들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이고."

(...)

그 하나는 사람이 그것으로써 배우게 되는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으로써 사람이 격하게 되는 부분이며, 셋째 것은 다양해서 우리가 그것 고유의 한 가지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었으나, 그것에 있어서 가장 크고 가장 강한 것, 이것에 의해서 우리가 이름을 붙이게 되엇네. 왜냐하면 이를 우리가 욕구적인 부분to epithymētikon이라 일컫게 되었기 때문인데, 그건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 性, 그리고 이것들에 뒤따르는 그 밖의 모든 것과 관련되는 욕구epithymia들의 강렬함으로 인해서일세. 그리고 이를 우리가 돈을 좋아하는 부분이라고도 했는데, 그건 이런 욕구들이 무엇보다도 돈(재물)을 통해서 충족되기 때문일세."

(...)

"따라서 이를 우리가 돈을 좋아하는philochrēmaton 부분이라든가 利를 탐하는 philokerdes 부분이라 부른다면 우리는 옳게 부르는 거겠지?"

 

이제 플라톤의 유명한 영혼삼분설에 관한 논의가 제시된다. 이는 각각, λογιστικός(logistykon), θυμοειδές (thymoeides), ἐπιθυμητικόν (epithymetikon)이다. 배우는 부분인 이성, 격정을 느끼는 기개, 돈을 좋아하거나 탐하는 욕망이 영혼의 세 가지 부분으로 제시된다.

소크라테스는 격정적(기개적)to thymoeides가 전적으로 지배하는 것과 승리하는 것 그리고 명성을 떨치는 것을 언제나 지향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기기를 좋아하고philonikon 명예를 좋아하는philotimon 부분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배우게 되는 부분은 전적으로 언제나 진리를 그대로 아는 것을 향하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재물과 명성에 대해 가장 덜 관심을 갖는다. 고로 이 부분은 배움을 좋아하고philomathes 지혜를 사랑하는philosophon 부분이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인간들의 일차적인 세 부류genos를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 '이기기를 좋아하는 부류', 그리고 '利를 탐하는 부류'"라 말한다. 그리고 즐거움들에도 세 종류가, 즉 그것들 각각에 속하는 것이 한 가지씩 있으므로, 이는 각각 '이득(재물)을 얻는 즐거움', '명예를 얻는 즐거움', 그리고 '배움을 얻는 즐거움'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즐거움들이 "더 훌륭하게나 더 부끄럽게 산다거나 또는 더 못하게나 더 낫게 산다는 거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더 즐겁거나 더 고통스러운 것 자체와 관련해서 다투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진실한 말을 하는지, 즉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다.

 

"이렇게 생각해 보게나. 훌륭한 판정(판단)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에 의해서 판정을 받아야만 할까? 경험empeiria이나 사려 분별(슬기)phronēsis 또는 이성적 추론(논변)logos에 의해서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이것들보다도 더 나은 기준kritērion을 갖고 있기라도 한가?"

"어찌 있겠습니까? 그가 말했네.

"생각해 보게나. 세 사람 중에서 누가 우리가 말한 모든 즐거움에 대해 가장 경험이 많은가? 利를 탐하는 사람이 진리 자체가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되어서, 앎으로 인한 즐거움에 대해 그가 갖고 있는 경험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득을 얻음에서 연유된 즐거움에 대해 갖고 있는 경험보다도 더 많은가?

"거기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릴 적부터 시작해서 다른 쪽 즐거움들에 대해 맛을 보는 게 불가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利를 탐하는 사람으로서는 사물들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서 그것의 즐거움이 얼마나 달콤한지 맛을 보아야 하는 불가피성도, 경험해야 하는 불가피성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도, 설령 그가 그러려고 열망할지라도,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가 말했네.

"따라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양쪽 다의 즐거움들에 대한 경험에 있어서 利를 탐하는 사람과는 많은 차이가 있네." 내가 말했네.

 

먼저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판단의 기준kritērion이 "경험empeiria이나 사려 분별(슬기)phronēsis 또는 이성적 추론(논변)logos"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어떤 부류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즐거움이 가장 올바른 즐거움인가? 먼저 경험empeiria의 측면에서 볼 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릴 적부터 시작해서 다른 쪽 즐거움들에 대해 맛을 보는 게 불가피"하기 때문에, 양쪽 다의 즐거움들에 대한 경험을 갖는 반면, 이익을 탐하는 사람은, 사물들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할 불가피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경험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즉, 한 쪽의 경험만을 지니고 있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에 비하면 어떤가? 이 사람이 슬기로움phronein으로 인한 즐거움에 대해서 갖는 경험보다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명예를 누리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즐거움에 대한 경험이 더 모자라는가?"  

"하지만 명예는 각자가 목적한 바를 성취하게 될 경우에는, 이들 모두에게 따라옵니다. 부자는 많은 사람한테서 존경을 받고, 용감한 사람도 지혜로운 사람도 존경받으니까요. 그래서 명예를 누림으로 인한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to on에 대한 관상thea이 어떤 즐거움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이외에는 다른 누구도 맛볼 수 없습니다." 그가 말했네.

"그러니 경험 때문이라면, 이 사람들 중에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하게 판정을 내릴 걸세." 내가 말했네.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간의 경험의 차이를 비교한다. 글라우콘은 여기에서,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과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모두 "각자가 목적한 바를 성취하게 될 경우" 자연스럽게 명예를 얻게 됨을 지적한다. 고로 세 부류의 사람 모두 자신의 목적한 바를 성취할 경우엔, 명예에 대한 경험을 모두 가질 수 있다. 반면에 실재to on에 대한 관상thea이 어떤 즐거움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훌륭함aretē의 함양이나 수공적인 기술technē과는 다른 차원의 관조theōria, 즉 철학적 지혜와 같은 것이다. 고로 소크라테스는 경험에 있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하게 판단을 내릴 것이라 결론내린다.

 

"더 나아가 그만이 사려 분별(슬기)와 함께 경험도 갖게 될 걸세."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판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이용해야만 하는 수단(도구)organon은 利를 탐하는 사람의 수단도,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의 수단도 아니고,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수단일세."

"어떤 것인데요?"

"아마도 이성적 추론logos들을 통해서 판정을 내려야만 한다고 우리가 말했던 것 같은데, 안그런가?"

"그랬습니다."

"한데, 이성적 추론(논변)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철학자)의 주된 수단일세."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판단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준kritērion 역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성적 추론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주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판정받는 것들이 부나 이득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利를 탐하는 사람ho philokerdēs의 판단이 옳을 것이요, 판정받는 것들이 명예와 승리 그리고 용기에 의해 판정된다면,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의 판단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empeiria이나 사려 분별(슬기)phronēsis 또는 이성적 추론(논변)logos"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앞에서 합의 보았기 때문에,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ho philosophos과 이성적 추론을 좋아하는 사람ho philologos의 판단이 가장 참된 것들일게 필연적이다.

따라서 철학자의 사람이 가장 즐거운 삶이며, 분별 있는(슬기로운) 자ho phronimos가 적어도 자격 있는 찬양자로서 자신의 삶을 찬양하게 된다. 또한 이 논의에 따라, 전사이며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의 즐거움이 둘째일 것이며, 利를 탐하는 사람의 즐거움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 있는(슬기로운) 자의 즐거움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은 온전히 참된 것도 아니며, 순수한 것도 아니고, 환영적이다.

 

4) 본문 (3) - 즐거움에 대한 두 가지 논증 - 인식론적 논증과 존재론적 논증 (583b-588a)

 

"말해주게나. 우리는 괴로움lypē을 즐거움hēdonē과 반대(대립)되는 것enantion이라 말하지 않는가?" 내가 물었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기뻐하지도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는 어떤 상태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있습니다."

"그건 이것들 둘 사이의 중간에 있어서, 이것들과 관련된 일종의 혼의 평온hēsychia이겠지? 혹시 자네는 이걸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렇게 말합니다." 그가 대답했네.

(...)

"그와 같은 많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 사람들이 괴로울 때는 괴롭지 않은 것과 그런 상태에서 벗어난 평온을 가장 즐거운 것으로 찬양하지, 기쁨chairein을 그런 것으로 찬양하지는 않는다는 걸 자네가 알고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소크라테스는 괴로움lypē과 즐거움hēdonē이 반대(대립)되는 것enantion이긴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어떤 상태도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상태는 일종의 혼의 평온hēsychia이다. 그리고 환자는 아플 때, 건강한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을 때, 고통이 그치는 것보다도 더 즐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괴로울 때, 괴로움에서 벗어난 평온을 가장 즐거운 것으로 찬양한다. 반면 "기쁨chairein을 그런 것으로 찬양하지는 않는다."

 

 

"그때는 그게, 즉 평온이 아마도 즐겁고 만족해야 할 것으로 되겠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말했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기뻐하기를 멈추게 될 땐, 즐거움에서 벗어난 평온이 괴로워질 걸세." 내가 말했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가 말했네.

"따라서 이제 이 양쪽 것 사이에 있는 것으로 우리가 말한 평온이 언젠가는 양쪽 것으로, 즉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될 걸세."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 것도 아닌 것이 양쪽 것으로 될 수 있기나 한가?"

"제가 생각하기엔 없을 것 같습니다."

 

고로 앞의 논의에서부터, 평온은 아마도 즐겁고 만족해야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논변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 괴로움lypē과 즐거움hēdonē은 반대(대립)되는 것enantion이다.

2) 이 양쪽 사이에,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가 존재한다.

3)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는, 오직 그러할때만, 혼의 평온이다.

4) 괴로움이라는 한 쪽에서, 이로부터 벗어나 혼의 평온의 상태에 들어설 때, 사람들은 이를 즐거운 것으로 찬양한다.

5) 즐거움이라는 한 쪽에서, 이로부터 벗어나 혼의 평온의 상태에 들어설 때, 사람들은 이를 즐거운 것으로 찬양하지 않는다.

6) 4)으로부터, 평온은 즐겁고 만족스러운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7) 5), 6)으로부터, 괴롭지 않음은 곧 즐거움이고 즐겁지 않음은 필연적으로 즐겁지 않음이므로, 혼의 평온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상태가 아니라, 즐거움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8) 즉 혼의 평온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배중률 관계에 있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9) 그런데 "즐거움의 상태에 있음"을 A로 정의할 때, 이 사태는 ~(~A)  를 지칭하고 있으므로, 혼의 평온은 A이다.

10) 어떤 사람이 기쁜[즐거운] 상태에서 벗어나면, 즐거움에서 벗어난 평온이 괴로워진다.(583e)

11) 고로 10)에서 정의된 평온은 ~A이다.

12) 9), 11)으로부터, 평온은 A가 될 수도 있고 ~A가 될 수도 있다.

13) 그런데 "양쪽 것 사이에 있는 것으로서 우리가 말한 평온"은 3)에서 정의한대로,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었던가?

14) 고로 13)에 따라, 혼의 평온은 (~A ∧  ~B)의 형식이어야 한다. 

15) 14)에 따라, 혼의 평온은 (A ∧ ~A)가 된다.

16) 이는 모순이므로, "그 어느 쪽 것도 아닌 것이 양쪽 것으로 될 수"(583e) 없다.     

 

 많은 철학자들, 특히 에피쿠로스학파나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좋음과 나쁨을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등치시킬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을 생각해보면, 좋은 삶을 철학의 목표로 삼았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어떻게 이 문제를 논의했을지 살펴보는 것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이해에 매우 중요하다. 플라톤은 최소한 여섯 개의 대화편에서 즐거움의 문제를 다룬다. (『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파이돈』, 『국가』,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그리고 위작 논란이 있는 『대 히피아스』에서 즐거움이 논의된다.) [각주:1]

 『국가』에서 소개된 논의는 즐거움과 괴로움의 종류를 나누고 그 중 어떤 것을 좋은 삶에 포함시켜야 할지를 논의 해야 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정체를 밝히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플라톤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 9권에서 소개된 즐거움에 대한 설명이 일관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즐거움을 일종의 채워짐으로 정의하는(585d) 플라톤은 올바른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참된 즐거움의 성격과 관련하여 두 개의 논증을 제시하는데, 이 두 논증 사이의 관계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각주:2]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2가지의 논증을 약칭 인식론적 논증존재론적 논증이라 이름붙이자.(이종환, 2015)[각주:3] 위에서 정리한 논변은 인식론적 논증의 시작 지점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평온hēsychia의 의미(즉, 즐거움은 괴로움의 멈춤paula이며, 괴로움은 즐거움의 멈춤)가 평온의 다른 의미(기뻐하지도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는 어떤 상태)에 비추어 볼 때, 모순됨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운동kinēsis에 관한 논변을 펼침으로써, 앞의 의미가 착오에서 비롯한 것임을 논증한다.

 

"더구나 혼(마음)에 있어서 즐겁게 되거나 괴롭게 되는 것은 양쪽 다가 일종의 운동kinēsis이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은 평온으로서, 실은 방금 이들 둘의 중간에 나타나지 않았던가?"

 "실상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워하지 않음을 즐거운 것이라 여기거나 기뻐하지 않음을 슬픈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어찌 옳을 수 있겠는가?"

 "결코 옳을 수 없습니다."

 "이는 사실이 아닐세. 괴로운 것과 비교하면 평온이 즐거워 보이고, 그리고 즐거운 것과 비교하면 그 평온이 괴로워 보이는phainetai 걸세. 즐거움의 진실과 관련해서 말하진대 이 보이는 현상phantasma들 중의 그 어떤 것도 건전한 것이 없고, 이는 일종의 기만 현상goēteia일세." 내가 말했네.

"어쨌든 논의가 알려 주는 그대롭니다." 그가 말했네.

"그러면 괴로움들에서 생기는 것들이 아닌 즐거움들을 보게나. 그래서 혹시나 이 경우에, 자네가 이런 식으로 즐거움은 그 본성이 괴로움의 멈춤paula인 반면에, 괴로움은 그 본성이 즐거움의 멈춤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끔 말일세." 내가 말했네.

 

소크라테스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일종의 운동kinēsis임을 밝힌다. 이에 따르면, 즐거움은 중간의 상태에서 채워짐으로의 운동이며, 괴로움은 중간으로부터 비워지는 운동이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이 없는 중간 상태가 바로 평온hēsychia이다. 그런데 즐거움이나 괴로움은 채워짐과 비워짐의 과정에서 부산물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본질이 상대적인 것으로, "즐거움은 그 본성이 괴로움의 멈춤paula인 반면에, 괴로움은 그 본성이 즐거움의 멈춤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평온은 상대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 모두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에서 정의된 평온의 의미상(즐거움과 괴로움 모두에서 벗어난 상태) 모순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고로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일종의 착각인 현상phantasma, 그 중에서도 건전하지 못한 기만 현상goēteia이라 주장한다. "그러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남을 순수한 즐거움이라고도, 즐거움에서 벗어남을 순수한 괴로움이라고 주장하는 것(584c)"은 인식론적 착각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아래에서 중간으로 이동된 사람은 자기가 위로 이동되었다고밖에 달리 생각할 것이라 자네는 생각하는가? 그래서 중간에 멈추어 서게 되어, 자신이 어디에서 옮겨 오게 되었는지를 보게 된다면, 자신이 위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있다고 믿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진짜 위는 못본 터이니 말일세."

(...)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그가 진실로 위에 있는 것과 중간에 있는 것 그리고 아래에 있는 것에 대해서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겪게 되는 게 아니겠는가?"

 

따라서 "진실을 경험하지 못함"이 결국 이러한 인식론적 착각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즐거움에 대한 무경험"이 즐거움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게 된 원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는 반대로 말해, 즐거움에 대한 충분한 경험이 있다면, 그러한 견해가 교정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만일에 진실(진리)alētheia은 경험하지 못했으면서도, 다른 많은 것에 대해 건전하지 못한 의견들을 갖고 있다면, 또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이것들의 중간 상태와 관련해서도 이런 처지에 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괴로운 것으로 옮겨졌을 땐, 그걸 진실이라 생각하고 실제로 괴로워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괴로움에서 중간 상태로 옮겨졌을 땐, 자신들이 충족과 즐거움에 충분히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면, 자네가 놀라겠는가? 마치 백색에 대한 무경험으로 인해서 회색을 흑색과 대비해 보듯, 마찬가지로 즐거움에 대한 무경험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고통 없는 상태에 대비해 보고서, 속게 된다면 말일세."

따라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부터 가장 즐거운 상태까지의 경험이 있어야 이를 근거로 하여 어떤 특정 시점에서 경험되는 즐거움의 참과 거짓 여부, 그리고 그 즐거움의 크기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가장 즐거운 상태나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 해석은 혼의 다른 부분들이 즐거움을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과도 같은 방식이다. 승리나 돈에 대한 욕구가 만족되는 과정에서도 또한 객관적인 기준에 대한 경험(혹은 앎)을 바탕으로 즐거움의 크기가 측정된다. 따라서 인식론적 논증은 혼의 세 부분 전체가 즐거움의 참과 거짓 여부, 그리고 기준에 따른 즐거움의 양을 측정하여 이를 경험하는 방법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각주:4]


 

이러한 관점에 따른다면, 즐거움은 결국 1) "인식적 차원에서의 측정과 판단의 문제"[각주:5]이며, 2) "어떤 기준에 근거한 변화와 운동으로 정의되는 것"[각주:6]이다. 고로 즐거움은 그 자체로 추구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고로 인식론적 논증에서 설명하고 있는 즐거움은 채워지고 있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즐거움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앞에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즐거움을 경험하는 경우는 진실을 그대로 알 때, 즉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 채워진 상태와, 배우는 동안의 즐거움, 즉 사랑의 대상인 진실, 혹은 지식으로 채워지는 과정의 두 가지가 있고, 그 두 가지 경우 각각 즐거움이 있는데, 인식론적인 논증으로는 채워진 상태에서 비롯하는 즐거움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즉, 과정 에 대한 설명이 아닌 채워진 상태에 대한 설명이 더해져야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이 겪는 즐거움이라는 현상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이 가능하므로, 인식론적 논증만으로는 즐거움의 성격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각주:7]

 

고로 이어서 채워진 상태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이 제시된다.

 

"어쨌든 이렇게 생각해 보게나. 배고픔과 목마름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은 신체와 관련된 [적극적] 상태hexis의 비움(비운 상태)kenōsis 현상들이 아닌가?" 내가 물었네.

"물론입니다."

"무지agnoia와 무분별aphrosynē도 혼과 관련된 [적극적] 상태의 비어 있음kenotēs이 아닌가?"

"물론입니다."

"음식물을 섭취하고 지성nous을 사용하게 되는 사람은 차게(채우게) 되지 않겠는가?"

"어찌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한데, 한층 참된 채움(충족)plērōsis은 덜 충실하게 존재하는 것to hētton on으로 하는 채움인가, 아니면 더 충실하게 존재하는 것to mallon on으로 하는 채움인가?"

"그건 더 충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하는 채움입니다."

""어느 부류들이 순수한 존재(순수한 본질)kathara ousia에 더 많이 관여한다metechein고 자네는 믿는가? 이를테면 빵과 음료수, 요리한 음식, 그리고 일체의 음식물의 부류genos들이 더 많이 관여하는가. 아니면 참된 의견doxa alēthēs과 지식(인식)epistēmē, 지성nous, 그리고 요컨대 일체 [사람의] 훌륭함aretē의 종류eidos가 더 많이 관여하는가? 이런 식으로 판단하게. '언제나 같으며 불멸하고 참된 것'과 관계하고, 그것 자체가 그런 성질의 것으로서, 그런 성질의 것 속에서 생기는 것이 '더 충실한 의미에서 존재한다'mallon einai고 자네에겐 생각되는가, 아니면 '결코 같지 않으며 사멸하는 것'과 관계하고, 그것 자체가 그런 성질의 것으로서, 그런 성질의 것 속에서 생기는 것이 그러하다고 생각되는가?"

(...)

"그러니, 전반적으로 말해서, 육신의 보살핌과 관련된 부류들이 혼의 보살핌과 관련된 부류들보다도 진리와 존재(본질)에 덜 관여하지 않는가?"

"훨씬 덜 관여합니다."

"육신 자체도 혼에 비해 그러하다고 자네는 생각지 않는가?"

"저로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더 충실하게 존재하는 것들로 찬 것과 그 자체가 더 충실하게 존재하는 것은 덜 충실하게 존재하는 것들로 찬 것과 그 자체가 덜 충실하게 존재하는 것보다도 진정으로 더 차 있지 않겠는가?"

 

배고픔과 목마름의 상태는 "신체와 관련된 [적극적] 상태hexis의 비움(비운 상태)kenōsis 현상들"이다. 마찬가지로 "무지agnoia와 무분별aphrosynē도 혼과 관련된 [적극적] 상태의 비어 있음kenotēs"이다. 고로 이것에 대한 채움(충족)plērōsis은 음식물을 섭취하고 지성nous을 사용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러한 채움은 곧 더 충실하게 존재하는 것to mallon on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움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운동kinēsis이지만, 순수한 존재ousia "곁에 있는"(para+ousia), 파루시아(Parousia, παρουσία)로 향하는 운동kinēsis이기 때문이다. 

 

"이데아"는 어떤 것이 존재하면서 스스로를 어떤 무엇으로 내주고 있는 그것의 보임새Anblick이다. 이러한 보임새들이 개별의 사물들이 그 안에서 이런 또는 저런 것으로 자신을 현시(sich präsentiert)하는, 즉 현재하며 현존하는anwesend 것으로 제시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 현존성이란 파루시아(Parousia, παρουσία), 또는 우시아(ousia, ουσία)이며, 그들에게 현존성은 존재를 의미한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그 자리에, 마주함[in der Gegenwart] 속에 있다(west an). 따라서 보임새, 이데아는 하나의 사물이 어떤 무엇으로 그 자리에 있는 바로 그것을 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사물이 무엇으로 있는 바 그것, 즉 그것의 존재를 내주고 있다."[각주:8]

 

그 중에서도, 혼을 더 충실한 의미에서 존재하게 하는, 혼의 보살핌과 관련된 부류들은 몸의 보살핌과 관련된 부류들보다 더 순수하다. 혼이 빈 것을 채우는 지혜는 몸의 비움을 채우는 것보다 더 실재에 가깝고, "바로 그 실재에 가까운 것이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즐거움을 참된 것으로 만들어준다."[각주:9]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에 성질상 적합한 것으로 차게 됨이 즐거운 것이라면, 더 충실하게 존재하는 것들로 그리고 진정으로 차게 된 것은 참된 즐거움에 의해 더 실제로 그리고 더 진실하게 기뻐하도록 만들겠지만, 덜 충실하게 존재하는 것들에 관여하게 되는 것은 덜 진실하게 그리고 덜 확실하게 차게 되겠고, 또한 덜 미덥고 덜 진실한 즐거움에 관여하게 될 걸세."

 

고로 "몸과 혼을 채우는 대상들은 실재의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각주:10] 이러한 정도의 차이에 따른 존재론적 위계가, 참된 즐거움과 덜 참된 즐거움을 구분한다.

 

"그러므로 사려 분별(지혜)과 [사람의] 훌륭함(덕)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 아래로 옮겨졌다가는 다시 중간까지 옮겨지는데, 이런 식으로 일생을 통해 헤매게 되네. 그러나 이 한계를 넘어선 적이 없으므로, 참된 위쪽을 보거나 거기로 옮겨져 본 적도 결코 없으며, '참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차게 되지도 않았으며, 확실하고 순수한 즐거움을 맛보지도 못 했네. 오히려 그들은 (...) 이런 것들에 대한 탐욕pleonexia 때문에 '쇠로 된 뿔과 발굽으로' 서로들 치고 받으며, '만족 할 줄 모르는 욕망'aplēstia으로 말미암아 죽이기까지 하네.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 자신들의 존재하지도 않으며 채워지지도 않는 것을 채우려 하고 있기 때문일세."

(...)

"격정적인 부분과 관련해서도 이와 같은 유의 또 다른 것들이 생길 게 필연적이지 않은가? 헤아림logismos과 지성nous이 결여된 상태에서, 명예욕으로 인한 시기심에 의해서나 경쟁심으로 인한 폭력에 의해서 (...) 바로 그 부분이 그 목표를 달성토록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말일세."

"그 부분의 경우에도 그럴 일들이 생길 게 필연적입니다."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어떤가? (...) 利를 탐하는 부분 및 이기기를 좋아하는 부분과 관련해서도 많은 욕구가 있는데, 이것들이 지식epistēmē과 이성적 추론logos을 따르고 이들 둘과 함께 즐거움들을 추구하게 될 때는, 분별 있는 부분이 인도하는 즐거움들만을 취하거니와, 그것들이 취하게 되는 즐거움들은, 그것들이 진실한 것들로 취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가장 진실한 것들이며, 이는 그것들이 진실에 따르기 때문이요, 또한 이 즐거움들은, 각각에 가장 좋은 것이 정녕 그것에 가장 특유한 것이기도 하다면, 그것들 특유의 것들이기도 하다고 말일세." 내가 말했네.

 

 

소크라테스의 존재론적 논의에 있어, "지식epistēmē과 이성적 추론logos을 따르"는 경우에만 그것들이 또한 진실을 따르는 것이고, 진실한 것들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취할 수 있는 즐거움만이 참된 즐거움일 수 있다.

 결국 이는 혼의 이성적인 부분의 욕구만이 참된 대상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참된 대상으로 채워질 수 없는 기개와 욕구의 부분들은 덜 충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을 뿐더러, 엄밀한 의미의 참된 즐거움을 누릴 수도 없다.[각주:11] 이 부분들이 욕구하는 대상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언제나 같고 불멸하거나 참된 성격을 가질 수 없는, 존재보다는 생성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부분들은 이성적인 부분의 통제를 받아야만 한다.

 

"따라서 혼 전체가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을 따르고 반목을 하지 않는다면, 혼의 각 부분이 다른 모든 면에서도 제 일들을 할 수 있으며 올바를 수 있고, 특히 각각이 자기의 즐거움들을, 최선의 그리고 가능한 한의 가장 참된 즐거움들을 누릴 수 있을 걸세."  

 

그렇기에 "나머지 부분들 중의 어느 것이 [혼 전체를] 지배하게" 되지 않도록, 철학philosophia과 이성logos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 또한 이성에서 가까이 있는 것은 법nomos과 질서taxis이므로, 아까 밝혀진 바와 같이 애욕적이며 참주적인 욕구들은 이러한 것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왕도적이고 절도 있는 욕구들은 이러한 것들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리하여 "참되고 고유한 즐거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게 될 사람이 참주이겠으나, 가장 덜 떨어져 있게 될 사람은 [왕도 정체의] 군왕basileus" 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참주는 가장 즐겁게 살지 못하는 자이고, 군왕은 가장 즐겁게 사는 자이다.

 

결과적으로 오직 혼의 경우에만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고 존재론적으로 하위에 있는 대상을 욕구하는 몸의 경우는 참된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듯하다. 따라서 이 부분의 설명을 따르면 즐거움의 참, 혹은 거짓 여부는 대상의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이는 운동에 대한 판단에 참 거짓 여부가 달려있다는 채워짐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인식론적 논증의 결론과는 일관되지 못하다. 우리는 앞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의 즐거움이란 과정과 상태 모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았다. 따라서 존재론적 논증과 인식론적 논증 사이의 관계가 해명되어야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의 즐거움이 총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갖는지 밝혀질 수 있다.[각주:12]  

우선, 소크라테스는 세 번째 증명이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크고 결정적인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세 번째 증명 안에 있는 인식론적 논증과 존재론적 논증은 같은 기능을 같은 방법으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다음과 같이’(585a)라고 말하면서 인식론적인 논의에서 존재론적인 논의로 전환하는 것이 세 번째 논증 안에서의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의 즐거움은 두 차원 모두에서 해명되어야 하므로, 두 논의는 하나의 문제, 즉 즐거움에 대한 오판을 하는 경우에 대한 설명이다.

인식론적 논증의 경우 측정에 있어 착오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사실은 즐거움이 아닌 것을 즐거움이라고 오판을 하는 경우이다. 이에 비하여 존재론적 논증의 경우는 진실된 것으로 채우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는 순수한 존재로 채우지 않기 때문에 욕구의 대상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혼합되어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면서도 이를 참된 즐거움이라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이다.

먼저 인식론적인 논의에서 즐거움에 대한 오판을 하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 전체를 다 겪어보지 못하여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즐거움이 아닌 것을 즐거움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고통을 피해 중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사실 즐거움이 아니다. 이는 참된 즐거움과 거짓된 즐거움이 혼합된 상태가 아니라, 즐거움이 아닌 것을 즐거움이라고 판단하는 경우에 생기는 오류이다.

그런데 존재론적인 논의는 국가편 5-7권에서 소개되는 형상에 대한 논의의 구도와 잘 맞아 들어가기 때문에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판단의 오류는 참된 즐거움이 아닌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혼합되어 있는 즐거움, 즉 참된 즐거움의 모방을 참된 것이라고 오판하는 것의 문제이다. 이때 ‘모방’으로서의 즐거움의 성격은 무엇인가?

이는 즐거움이 아닌가? 혹은 즐거움과 괴로움 중간의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국가 5권 마지막에 등장하는 지성과 의견, 그리고 무지의 대상을 각각 구분했던 기준을 따른다면, 이 모방으로서의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충실하고 참되게 즐거움이 아닌 어떤 즐거운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올바르지 못한 자가 추구하는 즐거움은 즐거움이기는 하지만 ‘괴로움과 혼합된’ 즐거움이기 때문에 ‘덜 참된’ 즐거움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런 덜 참된 즐거움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이러한 즐거움이 갖는 성격이 무엇인지 플라톤은 밝히지 않았다.

인식론적인 논의와 존재론적인 논의 각각에서 다루어지는 즐거움에 대한 오류는 서로 정확히 같은 상황에 대한 것은 아니다. 전자는 즐거움이 아닌 것을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는 즐거움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덜 참된 즐거움을 참된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는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참주의 즐거움의 영상은 참된 즐거움에서 729배(587e)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즉 즐거움이기는 하지만, 군왕의 즐거움이 참주의 즐거움보다 그 만큼이나 더한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존재론적 논증에서, 즐거움은 참/거짓이 대상의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반면 인식론적 논증에서, 즐거움의 참/거짓은 운동에 대한 판단에 달려 있다. 즉 존재론적 논증이 채워짐의 여부와 상관 없이 즐거움의 참/거짓이 결정되어 있다는 입장이라면, 인식론적 논증은 채워짐의 과정에 있어, 그 운동에 대한 판단에 따라 참/거짓이 결정된다는 입장이다. 양자는 이렇게 괴리되어 있지만, 또한 즐거움에 대한 오판을 하는 경우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인식론적 논증은 애초에 즐거움이 아닌 것을 즐거움으로 잘못 판단한, 객관적 기준을 확립하지 못한 경우이고, 존재론적 논증은 혼합되어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이를 순수하게 참된 즐거움이라고 착각하는, 참된 즐거움의 모방을 참된 것이라 오판하는 경우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괴로움과 혼합된 즐거움들, 즉 참된 즐거움의 영상들eidōla이며 환영들인 것들"(586b)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논증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울프스도르프나 패리는 인식론적인 논증이 결국 존재론적인 논증에 의해서 대치되어 즐거움에 대한 논증이 완전해진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식론적인 논증은 즐거움의 본질을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고, 존재론적인 논증이 국가 전체의 구도와 부합하는 방식으로 즐거움의 정체를 밝혀주고 있다는 것"[각주:13]이다.

 울프스르도프는, 1) 두 논증의 차이가 즐거움이라는 현상에 대해, 2) 하나는 "느끼는 일"이고, 하나는 "실제로 채워지는 일"이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국가편 전체에서 일관적으로, 인식적 경험이 주관적, 심리적, 오류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하에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고로 인식론적 논증이 존재론적 논증과 실질적 일치를 이룰 필요는 없다. 인식론적 논증 전체가 "실제 그러함" 보다는 "주관적 느낌"의 영역에서 오류가능성을 전제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울프스르도프는, "참을 ‘존재론적인 개념(the ontological conception of truth)’과 ‘표상적인 개념(the representational conception of truth)’로 구분하여 설명한다."[각주:14]

 

존재론적인 개념으로 거짓인 상황은 (...) 사실상 환영illusion이자 착각이다. 이에 반해 표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참과 거짓의 문제는 대상에 대해 적합하게 묘사하지 못하는 상황과 연결이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페루의 수도가 산티아고라고 믿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존재하는 페루라는 나라와 산티아고라는 도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믿음의 대상들이 실제로 갖는 속성이나 요소에 대해서는 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페루의 수도는 리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람은 어떤 믿음을 갖고 있고 그 믿음의 대상이 있기는 하지만, 이에 대해 정확하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존재론적인 개념에서 참되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는 없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각주:15]

울프스도르프는 그의 용어로 ‘존재론적’인 참과 거짓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즉 실재로 채워지는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채워진다고 ‘느끼고’ 있는 상황이 인식론적 논증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채워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인식하는 주체가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마치 가짜 금반지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과 같은 환영을 느끼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론적 논증은 경험 대상 중 무엇이 즐거움이고 무엇이 즐거움인지를 밝히는데 초점이 맞추어 있다. 이에 반해서 존재론적인 논증은 즐거움이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고 울프스도르프는 설명한다. 그는 즐거움이 일종의 채움 이라고 전제한 후, 채우는 것은 아무것으로나 채우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 채우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

바로 이런 점에서 채우는 것의 성질인 ‘순수성’이 즐거움의 질을 따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순수한 대상일수록 안정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채워진 상태를 오랫동안 지속시키는데 유리하다. 이에 더불어서 채워짐을 당하는 부분의 안정성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욕구의 경우 채워진다고 하더라도 그 채워짐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므로, 계속적으로 채우는 과정이 반복되어야 계속해서 즐거울 수 있다. 따라서 욕구의 부분에 있어서의 즐거움은 계속적인 채워짐이라는 작용이 요구된다. 그러나 혼에 있어서 이성의 부분은 진리로 채워질 때에 이를 쉽게 잃어버리지 않기에, 진리로 채워진 상태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은 반복적으로 채우지 않더라도 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울프스도르프는 즐거움에 있어서 참과 거짓을 따지는 데에는 채워지는 것과 그리고 채움을 당하는 것 각각의 안정성의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형상과 같은 변함이 없는 대상으로 채워짐을 당하는 욕구보다 더 나은 부분인 이성이 채워지는 경험이 더 진실한 즐거움이라고 본다. [각주:16]

 

한편 패리는, 인식론적 논증이 존재론적 논증으로 대치된다고 본다. 이에 따르면, "나중에 다가올 즐거움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하는 즐거움은 인식론적으로 참인 즐거움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덜 참(ontologically less true)이기 때문에, 이성의 부분이 그것의 본연의 대상으로 채워질 때 발생하는 즐거움이 가장 참된 즐거움이라고 주장한다."[각주:17]

이상 양자의 해석은 인식론적 논증이 존재론적 논증으로 대체된다 내지 존재론적 논증이 인식론적 논증보다 우월하다는 공통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1) 소크라테스가 논증을 전환하는 부분에서, 인식론적인 논증에 대해 비판하면서 이를 기각하고 존재론적인 논증을 통해 즐거움의 성격을 밝히려고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각주:18] 이들 논의처럼 즐거움이 형상과는 다른 존재론적 지위를 지녀, 채워지는 과정에서 얻는 것이며 존재ousia가 아닌 생성genesis이라면, 그것이 형상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참/거짓이 결정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참된 즐거움이나 거짓 즐거움은 대상의 존재론적인 성격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느끼는 사람의 경험적인 측면도 고려한다. 게다가 즐거움이라는 경험은 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몸에서도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지식을 배움으로 얻어지는 즐거움은 즐거움의 경험 중 아주 특이하게 몸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 밖의 많은 즐거움들은 몸을 이용해서, 혹은 몸이 채워지면서 경험되는 것"[각주:19]이다.  2) 순수함에 있어서는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참과 거짓에 있어서는 정도 차이를 고려할 수 있는지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순수함은 정도의 차이와 관련되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서로 직접 대응될 수 없기 때문"[각주:20]이다.

 

울프스도르프는 참된 즐거움이란 ‘절대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참인 것(absolutely ontologically true)’이라고 말하면서 ‘절대적’이라는 말로 참과 거짓에 있어서의 정도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이미 존재론적인 참과 인식론적인 참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존재론적인 참은 대상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의 문제로서만 보아야하며 그것이 ‘인식론적 논증’의 핵심적인 전제라고 주장했었기 때문에, 참과 거짓에 관해서는 정도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울프스도르프 마저도 플라톤이 국가편에서 즐거움의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각주:21]

즐거움은 과정에서의 판단이 참이 되는 경우와, 그리고 대상에 의해서 채워진 상태가 참이 되는 두 방법에 의해서 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순수하게 존재하는 대상으로 인해서 채워지는 경우는 대상이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기에 “절대적으로 있는 것”(477a)이고 따라서 이런 ‘있는 것들’( ta onta :477c)인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적인 능력( dymamis )인 인식( epistēmē: 477b)이 참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이 참인 경우에 그 대상이 꼭 순수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 다시 말해 순수한 대상에 의한 즐거움인 경우 이 즐거움은 참된 즐거움이겠지만, 우리가 어떠한 즐거움이 참되다고 할 때, 꼭 그 대상이 순수한 대상이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즐거움, 혹은 즐거움다운 즐거움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차원에서 즐거움이 참되고 올바르게 되는 경우와 과정 모두를 보아야 한다. 즉 대상은 순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의 판단이 올바른 경우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각주:22]

 

또한 3) 이들의 논의에 따르자면, 이러한 참된 즐거움을 경험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가 된다. 그러나 국가편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즐거움의 경험이라는 것이 완전히 배제된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각주:23] 결국 이 두 논증은 각각 즐거움이라는 감각 경험의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을 고려하며, 그 중 "즐거움의 참과 거짓 문제가 즐거움의 순수성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는 전제"[각주:24]로 인해 두 해석자들이 모두 존재론적 논증에 우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논증의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은 다소 애매하며, 이에 대해서는 참/거짓이 순수함과 섞여 있음에 정확히 대응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의 저자인 플라톤은 인식의 대상인 형상의 ‘순수함’과 괴로움과 섞이지 않은 즐거움 사이의 순수함에 있어서의 차이보다는 유사성에 주목한 나머지, 인식론적 논증과 존재론적 논증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보이지 못했다. 사실 이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참된 즐거움’과 ‘순수한 즐거움’사이의 관계를 설명해야만 한다. 순수함은 정도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참됨은 앞 절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정도 차이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순수한 즐거움을 바로 참된 즐거움과 등치시키는 국가 9권의 존재론적 증명은 인식론적 증명과 일관될 수 없다. 순수한 즐 거움이란 무엇과 섞여있지 않기에 순수한 것이고, 그것은 판단의 문제와 결부하여 어떻게 참된 즐거움과 같을 수 있는지를 보여야 한다. 다시 말해 인식론적 논증에 근거하여 어떻게 즐거움이 참될 수 있는지, 즉 우리가 순수한 대상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즐거움을 주는 대상들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해야 즐거움에 대해서 올바르고 참되게 판단할 수 있는지의 문제까지도 해명이 되어야 국가 9권의 즐거움에 대한 두 증명은 일관되게 설명될 수 있다."[각주:25]

그 결과 플라톤이 국가에서 존재론적 논증과 인식론적 논증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보이지 못했고, 따라서 독자들은 플라톤이 무엇을 참된 즐거움이라고 주장하는지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론적 논증에 기대고 있는 학자들은, (...) 참됨과 순수함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완전한 대상, 즉 형상과 같이 순수한 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즐거움만이 참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대상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결론 내리는 듯하다. 그러나 이 경우 인식론적 논증이 즐거움의 성격을 밝히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기 어렵고, 사실 이 점을 플라톤이 분명히 밝히지 않기 때문에 해석의 어려움이 발생한다. [각주:26]

 

이종완(2015)에 따르면, "이 문제는 참된 즐거움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필레보스』 편에 가서야 해결이 된다"

이제 다시 7권의 논의로 돌아간다면, 소크라테스는 위의 논의에서 언급된 세 가지 즐거움을, 다시금 정체politeia와 연관시킨다. 참주 정체적인 인간의 즐거움은 과두 정체적인 인간과 민주 정체적인 인간 다음에 위치하고, 과두 정체적인 인간의 즐거움은 다시 왕도 정체/최선자 정체(445d)인간의 즐거움과 명에 지상 정체적인 인간의 즐거움 다음에 위치한다. 고로 참주는 참된 즐거움에서 수적으로 세 배의 세 배만큼, 떨어져 있다.

 

"그러니까 참주적 즐거움의 영상은 길이의 수에 따른 평면 도형의 수일 것 같으이." 내가 말했네.

"바로 그렇습니다."

"제곱 그리고 세제곱에 따른 거리가 얼마나 먼지는 분명할 것이네."

"적어도 산술에 밝은 사람에게는 분명하겠죠."

"그러므로 만일에 누군가가, 이를 거꾸로 돌려서, 즐거움의 진리에 있어서 [왕도 정체의] 군왕이 참주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말하려 한다면, 그 곱셈이 끝난 뒤에, 군왕이 729배나 더 즐겁게 살되, 참주는 같은 거리만큼 더 괴롭게 사는 걸 발견하게 될 걸세."[각주:27]

 

5) 본문 (4) - 올바른 혼의 상eikōn과 올바른 통치 체제politeia의 상eikōn (588b-592b)

 

"좋으이. 우리의 논의가 이에 이르렀으니, 처음에 언급된 것들로, 즉 그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들로 되돌아가도록 하세나. 아마도 그때 말했던 것은 철저하게 올바르지 못한데도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는(평판이 난) 자에게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는 것adikein이 이익이 된다는 것이었을 걸세.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말했네.

"사실 그랬었조."

"이제 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 보도록 하세나.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는 것'과 '올바른 것들을 행하는 것' to dikaia prattein이 각각 어떤 힘dynamis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합의한 터이니 말일세." 내가 말했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혼의 상eikōn을 말로써 형상화하기로 한다. 구체적으로 욕구(욕구적인 부분)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형태idea의 짐승으로, 기개(격정적인 부분)은 사자의 형태로, 이성(헤아리는 부분)은 사람의 형태로 형상화하여 고찰을 시작한다.

 

"그러면 이 인간으로서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 이로우나 올바른 것들을 행하는 것은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해 주도록 하세나. 그가 주장하는 것은 이런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즉 이 인간으로서는 온갖 형상을 한 [자신 속의] 짐승[각주:28]과 사자[각주:29] 그리고 사자와 관련된 것들이 실컷 잘 먹도록 하여 강하게 만들되, [자신 속의] 사람[각주:30]은 굶주려서 쇠약하게 만들어서는, 이게 아무 데고 그 둘 가운데 어느 한쪽이 이끄는 대로 끌리어 가게 되어, 서로 익숙해지거나 친해지도록 하는 일은 없이, 이것들이 내부적으로 서로 물어뜯으며 싸우다가 서로 잡아 먹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말일세."

"올바르지 않은 짓을 하는 걸 찬양하는 자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 겁니다." 그가 말했네.

"반면 올바른 것들이 이롭다고 주장하는 자는(...) 행하고 말해야 할 것들은, 이로써 내부의 인간이 이 인간을 최대한 장악하게 되며, 많은 머리를 가진 짐승을, 마치 농부처럼, 유순한 머리들은 키우고 길들이되, 사나운 것들은 자라지 못하게 막아가며 보살피게 되는 한편으로, 사자의 성향을 협력자로 만들어서, 공동으로 모두를 돌보며, 서로들 그리고 자기 자신과도 화목하도록 만드는 그런 방향으로 조장하는 것들이어야 한다고 말일세."

그렇기에, 올바른 것을 찬양하는 자는 진실을 알면서 진실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거짓말을 말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무엇을 비난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ta kala은 우리의 성향에 있어서 야수적인 것들이 인간적인 것 혹은 신적인 것to theion에[각주:31] 종속하는 것들로 만드는 것들이나, 추한 것들ta aiskhra은 온순한 것을 사나운 것에 굴종하는 것들로 만드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가장 신적인 부분을 가장 비신적인 부분에 종속시키기 때문에 무절제함(방종)이 비난받으며,

2) 격정적인 부분(사자같고 뱀 같은)을 키워 주고 조화롭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고집스러움과 고약한 성미가 비난받으며,

3) 다시금 이 부분을 이완과 완화시켜 비겁을 생기게 하기 때문에 사치와 나약이 비난받는 것이다.

4) 또한 격정적인 부분to thymoeides을 광포한 짐승에 종속하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아첨과 비굴함이 비난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의 종류인 것인 부분으로 다른 부분들(짐승들)을 다스리지 못하는 수공업 및 수공예는 멸시당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최선의 인간ho beltistos을 지배하는 것과 닮은 것에 의해서 지배받아야 한다. 이는 다시 말해, 그가 최선의 인간이며 자신 속에 신적인 지배자to theion archon를 가진 인간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즉 자신 속에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지니지 못한 자는 외부의 것인 최선의 것에 의해서라도 다스려져야 한다. 이는 법nomos이나 통치자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가 된다. "그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이의 협력자인 법nomos의 취지가 그런 것임이 분명하이."

"아이들에 대한 다스림도 그러하여, (...) 이들에게 있어서 통치 체제politeia를 확립하게 되기까지는, 그래서 그들 안에 있는 최선의 부분을 우리한테 있는 최선의 부분에 의해 보살핀 다음에, 그 아이 안에 우리 것을 닮은 수호자와 통치자를 우리가 대신 들여앉"혀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르지 못한 짓, 무절제함, 부끄러운 짓이 어느 경우에도 이익이 되지 않음을 지금까지 논의했기 때문에, 설령 법의 통제에서 운 좋게 피하게 될지라도, 발각되지 않은 자는 한결 더 사악하게 되므로 그 자신에게 손해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차라리 발각되어 벌을 받을 때, 그의 야수적인 부분은 잠들고 순화되는 한편, 유순한 부분은 자유로이 되어 절제와 지혜(분별)을 갖추게 됨으로 그에게 이득이라는 것이다. "그의 혼 전체가 가장 훌륭한 그 본성을 찾아 갖게 된 상태에 있게 되고, 절제를 그리고 지혜(분별)가 함께 갖추어진 올바름을 갖게 됨으로써, 육신이 건장함과 건강을 동반한 아름다움을 얻어 갖게 되는 상태hexis"

고로 이러한 인간은 1) 자신의 혼을 실현하게 될 학문들을 귀히 여기되, 다른 것들은 무시할 것이며, 2) 신체의 상태와 양육에 있어, 육신의 조화를 혼의 화합을 위해 조종할 것이며, 3) 재물의 소유에 있어서도 질서와 화합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4) 자신 속의 통치 체제politeia를 응시하면서, 거기에 있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재산의 과대나 과소로 인해서 교란되는 일이 없도록 지킬 것이다. 5) 명예들과 관련해서도 역시 같은 것을 응시하면서, 자신을 더 나아지도록 만드는 것이라 믿는 것들에는 자진해서 관여하며, 현재 [혼의] 상태hexis를 와해시킬 것들은 사적으로건 공적으로건 피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사람은 정치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나라에서는 그러려 하겠으나, [현실의] 나라에서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즉 [현실의] 나라에서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런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는 일은 "신이 내리는 행운"이 필요하다.

 

"선생님께서는 이제껏 우리가 수립하면서 언급해 온 나라, 즉 이론상(논의상)으로나 성립하는 나라에서 그러려 할 것이란 말씀이군요. 그 나라는 지상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니까요." 그가 말했네.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걸 보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보고서 자신을 거기에 정착시키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하늘에 본paradeigma으로서 바쳐져 있다네. 그러나 그게 어디에 있건 또는 어디에 있게 되건 다를게 아무 것도 없으이. 그는 이 나라만의 정치를 하지, 다른 어떤 나라의 정치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네." 내가 말했네.

"그럴 것 같군요." 그가 말했네.

 

  1. 이종환, 「『국가』9권에서 제시된 즐거움에 대한 두 개의 논증」, 대동철학, 제72집 (2015.09), pp.47-75, p.48 [본문으로]
  2. 이종환, op. cit. p.50 [본문으로]
  3. 이 두 논변의 차이점에 주목한 울프스도르프는 전자를 ‘환영 논변(the Illusion Argument)’, 후자를 ‘참된 채움 논변(the True Filling Argument)’라고 부르면서 전자는 인식론적인 측 면에서의 오류, 후자는 즐거움을 주는 대상의 존재론적인 지위에 근거하여 구분한다 (이종환, 같은 곳) [본문으로]
  4. 이종환, op. cit. p.57-58 [본문으로]
  5. 이종환, op. cit. [본문으로]
  6. 이종환, op. cit. [본문으로]
  7. 이종환, op. cit. [본문으로]
  8. 마르틴 하이데거,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테아이테토스』,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2004, p.60 [본문으로]
  9. 이종환, op. cit. p.59 [본문으로]
  10. 이종환, op. cit. [본문으로]
  11. 이종환, op. cit. p.60 [본문으로]
  12. 이종환, op. cit. p.61 [본문으로]
  13. 이종환, op. cit. p.62 [본문으로]
  14. 이종환, op. cit. p.63 [본문으로]
  15. 이종환, op. cit. [본문으로]
  16. 이종환, op. cit. p.64 [본문으로]
  17. 이종환, op. cit. p.64-65 [본문으로]
  18. 이종환, op. cit. p.65 [본문으로]
  19. 이종환, op. cit [본문으로]
  20. 이종환, op. cit. p.66 [본문으로]
  21. 이종환, op. cit. p.66-67 [본문으로]
  22. 이종환, op. cit. p.67 [본문으로]
  23. 이종환, op. cit. p.68 [본문으로]
  24. 이종환, op. cit. p.70 [본문으로]
  25. 이종환, op. cit. p.70-71 [본문으로]
  26. 이종환, op. cit. p.71 [본문으로]
  27. 그러나 이 수치의 산법이 어떻게 해서 729라는 수가 나왔는지는 명확치 않다. 즉 3의 세제곱 x 3의 세제곱에서 얻어진 것인지, 아니면 9의 세제곱에서 얻어진 것인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본문으로]
  28. 혼의 욕구적인 부분 [본문으로]
  29. 혼의 격정적인 부분 [본문으로]
  30. 혼의 이성적인 부분 [본문으로]
  31. 즉 지성nous 또는 이성logo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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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0 00:28 고대 철학/플라톤

플라톤, 『국가』, 번역 박종현, 서광사, 2005

 

1) 제 7권의 논의 전개

 

제 6권에서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를 통해 시도된 "좋음의 이데아"와 앎의 대상들 및 앎의 단계들에 대한 도식적 설명 대신에, 7권에서는 "동굴의 비유"를 통한 보다 입체적 설명을 시도한다.

동굴 안은 가시적 현상의 세계를, 동굴 밖은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실재의 세계를 각기 비유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실재들을 인식하는 것인데, 이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비교육의 단계가 필요하고, 따라서 이를 위한 교과가 제시된다.

이 예비 교육이 끝난 이후에 변증술에 대한 집중적인 단련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변증술적 논변의 오용과 관련된 위험성에 대한 언급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러한 단련을 거친 후에는 오랜 세월 동안의 실무적 경험을 쌓게 한다. 그 동안의 교육 과정을 밟게 하는 각 단계의 연령에 대한 언급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쉰 살이 된 적격자들로 하여금 통치를 위한 본을 갖도록 하기 위해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의 길로 들어서게 함으로써, 마침내 철인 치자의 확보 가능성이 보이게 된다.

이 구도를 다시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 ‘태양’의 비유 (506d-509b)는 최상의 원인으로서의 선(to agathon)의 역할을 언급하고, (b) ‘선분’의 비유(509c-511e)는 원리로서의 선, 즉 최상의 원리(arche)6)로서의 존재 영역과 인식 영역의 구조를 설명한다. (c) 플라톤 철학함의 전체적 운동으로서의 ‘동굴’의 비유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선의 인식에로 향한 교육의 길이며, 플라톤의 철학 사유가 불확실한 것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확실한 목적, 즉 ‘선의 이데아'(Idee des Guten)에 한 직접적 인식이다.[각주:1]

 

2) 본문 (1) 동굴의 비유(514a-517a)

 

"그러면 다음으로는 교육paideia 및 교육 부족apaideusia과 관련된 우리의 성향을 이런 처지에다 비유해보게나. 이를테면, 지하의 동굴 모양의 한 거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spēlaion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 뒤쪽에서는 위쪽으로 멀리에서 불빛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이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가로로]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담(흉장)이 세워져 있는 걸 상상해 보게. 흡사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사람들앞에 야트막한 휘장(칸막이)이 쳐져 있어서, 이 휘장 위로 인형들을 보여 주듯 말일세."

 

첫 문장에서 대화 편의 전체 주제가 정의와 더불어 다시금 교육, 즉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이 확인된다. 만일 "동굴의 비유"를 단순히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묘사하기 위한 비유라고 받아들일 경우, 이 비유가 지닌 힘과 의미는 상당히 축소되어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동굴의 비유에는 동굴과 바깥의 이분법보다도 그 양자를 넘어가면서 겪게되는 적응의 문제가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동굴의 비유는 "어둠 속에서 태양의 빛과 밝음으로 나아가는 상승과정과 그 빛에서 동굴의 어둠속으로 귀환하는 하강과정 속에 담긴 네 가지 상이한 체류과정-1) 지하 동굴에서의 인간의 상황, 2) 동굴 안에서의 인간의 해방, 3) 근원적인 빛에로의 인간의 본래적 해방, 4) 해방된 자가 동굴 속으로 귀환함-"[각주:2]으로 이루어진다. 

처음으로 주목할만한 부분은, 동굴 안의 죄수들이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채로"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박을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파악했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인식과 결부시켜볼 때,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박은 스스로 풀어질 수 있는가, 아니면 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가? 일차적으로 이 글이 교육에 관한 텍스트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일견 후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후에 7권에서 다시 암시되는 부분이지만, 플라톤은 자연발생적으로 결박에서 풀려나는 경우 역시 염두해두는듯 하다.(520a-520b) 그러나 플라톤이 보기에, 통치자의 자질에 적합한 사람은 그 본성상 (우리가 일반적으로 통치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금전적 이득과 명예를 오히려 혐오하는 사람이므로, 교육은 여기서 단순히 훌륭한 통치자를 양산하기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통치자의 필요조건이기도 한 것처럼 보인다. 

둘째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의 유래에 대하여 고찰해보자. 플라톤은 어찌하여 굳이 비유의 장소로 "동굴"이라는 공간을 선택하였는가?

 

 우리는 희랍 세계에서 행해진 ‘동굴제식’(祭式)과 ‘신비 동굴’을 구분해야만 한다. 동굴은 신을 숭배하는 제식을 위해 사용된다. 동굴 모양의 닫힌 공간에서 비의식의 축성 (Einweichung)이 이루어진다. 반쯤 어두운 동굴에서 사람들은 신성(神性)을 더욱 가깝게 느끼게 된다. 엘레우시스(Eleusis)의 비밀의식(Mysterienkult)에 참여한 자들은 분명히 빛의 현상, 즉 신비스러운 어두움 가운데 갑작스런 밝음을 통해 깊은 인상을 얻었을 것이다. 후일, 사람들은 인간 세계의 모상(模像)으로서 ‘동굴’이라는 공간을 미트라스(Mithras) 제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을 만나는 곳으로 이해한다. 사람들은 플라톤 동굴의 비유를 종교적인 면에서 중요한 것으로 해석하려들지만,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 플라톤 동굴의 비유에서 많은 것을 얻어내기는 어렵다. 그 까닭은 플라톤에게 동굴은 신이 하는 곳이나 숭배되는 장소가 아니며, 사람들은 신들에게로 나아가기 해서 동굴 밖으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각주:3]

 

인간세계를 어두운 동굴로 비유하며, 이 세계가 참된 세계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최초의 철학자는 플라톤보다 2세대 앞서 살았던 아크라가스Akragas 출신의 엠페도클레스였다.[각주:4] 이를 통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역시도, 플라톤 자신의 고유한 창작이라기보다는 그의 사유에 여러 영감을 주었던 사유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성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빛 ’ 은 바라봄과 인식을 뜻하며 , ‘ 어두움 ’ 은 이와는 반대로 보지 못함과 무지함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아주 오래부터 우리들에게 일반인 경험 사실로 여겨졌다. 초기 희랍 문학, 특히 호메로스(Homeros)와 핀다로스(Pindaros)에게서 빛, 어둠, 청명한 하늘, 안개는 이러한 의미에서 ‘실제’, ‘모상’, ‘은유’ 의미 사이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것으로 종종 나타난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철학자들이 ‘빛의 형이상학’(Lichtmetaphysik)이라고 부르는 사상이 점차 생겨난다. 이러한 사상에서 인식의 근원은 ‘빛’이며, 이 빛은 태양과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각주:5]  

 

실로 플라톤 이전의 많은 사상가들이 이러한 1) 빛과 어둠 사이의 대립, 2) 어둠으로부터 빛으로의 이행, 3)빛을 진리aletheia로 여기며, 진리와 현상 사이의 구분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파르메니데스는 "말들이 이끄는 마차에서 태양(helios)의 딸들에 의해서 밤의 영역에서 낮인 빛의 영역으로 이끌"[각주:6]린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유비(Analogia) 관계를 통해 상이한 것들의 관계적 유사성을 도출해낸다.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 학파는 위에서도 언급했던 육체(soma)를 혼의 무덤(sema)으로 간주하는 사상의 최초 발원지이다. 오르페우스교 사람들은 영혼을 육체를 보호하기 위한 감옥으로 여겼다. 기원전 5세기 중반(483-423)에 살았던 엠페도클레스는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각주:7] 엠페도클레스에 따르면, 영혼은 어떤 과오로 인해 신들의 세계에서 쫓겨나 육체와 결합되어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이를 “우리는 지붕이 있는 이 동굴로 왔다”(elythomen tode hypo antron hypostegon)라고 표현한다.

 

“살인과 증오와 다른 불행한 사람들 그리고 바싹 마르게 하는 질병과 부패 그리고 어둠 가운데 재앙의 초원위로 강이 이리 저리 흐르는 외로운 장소"  

 

이 장소는 "인간의 혼이 사후(死後)에 하데스로 간다는 희랍인의 일반적 사고를 전제"[각주:8]로 한다. 하데스는 인간의 영혼이 지하세계의 어두운 곳으로 이끌려, 현세에 지은 죄를 씻어내고 용서를 비는 곳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이에 더해, "인간은 ‘ 현재 ’ 이미 지하세계에 살고 있으며, 이미 이전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참회를 위한 처벌을 ‘ 지금 ’ 이곳에서 받고 있다"[각주:9]는 사고를 덧붙인다.

물론 인간의 세계 밑에도 형벌의 장소인 어두운 하데스가 존재한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는 빛의 세계인 신들의 세계에 비해 인간의 세계가 상대적으로 어두움을 강조하고 있다. 더 높은 세계에는 신들이 있고, 순전한 영혼이 있으며, 태양이 있다. 인간은 이승에서의 정화를 통해 순전한 빛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더 나아가 또한 상상해보게나. 이 담(흉장)을 따라 이 사람들이 온갖 인공의 물품들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 또는 그 밖의 온갖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인물상들 및 동물상들을 이 담 위로 쳐들고 지나가는 걸 말일세. 또한 이것들을 쳐들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나, 어떤 이들은 잠자코 있을 수도 있네."    

"이상한 비유와 이상한 죄수들을 말씀하시는군요."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세. 글쎄, 우선 이런 사람들이 불로 인해서 자기들의 맞은편 동굴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들 이외에 자기들 자신이나 서로의 어떤 것인들 본 일이 있을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실상 이들이 일생을 통해서 머리조차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제당했다면, 어떻게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반문했네.

"그럼 운반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겠는가? 이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물론입니다."

"그러므로 만일에 이들이 서로 대화(토론)를 할 수 있다면, 이들은 자신들이 [벽면에서] 보는 이것들을 실물들(실재들)ta onta로 지칭할onomazein 것이라고 자네는 생각지 않는가?"

"그야 필연적입니다."

 

그림자의 현상이 불로 인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현상은 태양을 조건으로 하여 나타난다. 이러한 유비 관계는 소크라테스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세."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이러한 유비 관계의 확장이 다시금, 현상에 대한 의심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즉, 동굴의 죄수들이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면, 이는 곧 죄수들이 그림자를 "실물들(실재들)ta onta로 지칭할onomazein 것" 만큼이나 이 비유를 전개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금 하데스와 혼의 감옥인 육체가 거주하는 이승, 육체로부터 풀려나 정화된 영혼이 가는 빛의 세계의 구도를 상기시킨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인공적인 제작물들의 그림자들 이외의 다른 것을 진짜라 생각하는 일은 전혀 없을 걸세" 내가 말했네

"다분히 필연적입니다."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러면 생각해보게. 만약에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사태가 자연스레 진행된다면, 이들이 결박에서 풀려나고 어리석음에서 치유되는 것이 어떤 것이겠는지 말일세. 가령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서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으로 쳐다보도록 강요당할 경우에, 그는 이 모든 걸 하면서 고통스러워할 것이고, 또한 전에는 그 그림자들만 보았을 뿐인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볼 수도 없을 걸세. 만약에 누군가가 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전에는 그가 엉터리를 보았지만, 이제는 진짜(실재)to on에 좀은 더 가까이 와 있고 또한 한결 더한 실상을 향하여 있어서, 더욱 옳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면, 더군다나 지나가는 것들 각각을 그에게 가리켜 보이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서는 대답하도록 강요한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그는 당혹해 하며, 앞서 보게 된 것들을 방금 지적받은 것들보다도 더 참된 것들로 믿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2) 동굴 안에서의 인간의 해방"이 묘사되고 있다. 플라톤은 이를 "어리석음에서 치유"된다고 표현함으로써 (앞서 확인하였던) 영혼의 치유를 지칭하는 동시에 知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즉 영혼의 정화 내지 치유는 知의 추구와 같이 움직이는 영혼의 활동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할만한 부분은, 결박으로부터 풀려나 그림자로부터 불빛으로 시야가 전환될 때, 결박되어 있던 사람이 고통스러워할 뿐 아니라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다음 구절에서 이어지는 "익숙해짐"의 문제를 야기한다.

 

"또한, 만약에 그로 하여금 그 불빛 자체를 보도록 강요한다면, 그는 눈이 아파서,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것들로 향해 달아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방금 지적받은 것들보다도 정말로 더 명확한 것들이라고 믿지 않겠는가?"

"그럴 것입니다." 그가 대답했네.

"그러나, 만약에 누군가가 그를 이곳으로부터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통해 억지로 끌고 간다면, 그래서 그를 햇빛 속으로 끌어내 올 때까지 놓아 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또한 자신이 끌리어 온 데 대해 짜증을 내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가 빛에 이르게 되면, 그의 눈은 광휘로 가득 차서, 이제는 진짜들이라고 하는 것들 중의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내가 물었네.

"적어도 당장에는 볼 수 없겠죠." 그가 대답했네.

"그러기에, 그가 높은 곳의 것들을 보게 되려면, 익숙해짐synētheia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네. 처음에는 그림자들을 제일 쉽게 보게 될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물 속에 비친 사람들이나 또는 다른 것들의 상eidōlon들을 보게 될 것이며, 실물들은 그런 뒤에야 보게 될 걸세. 또한 이것들에서 더 나아가,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밤에 별빛과 달빛을 봄으로써 더 쉽게 관찰하게 될 걸세. 낮에 해와 햇빛을 봄으로써 그것들을 관찰하는 것보다도 말일세."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는 그가 해를, 물 속이나 다른 자리에 있는 해의 투영으로서가 아니라 제자리에 있는 해를 그 자체로서 보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필연적으로 그럴 겁니다." 그가 말했네.

"또한 다음으로 그는 태양에 대해서 벌써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을걸세. 즉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며, 보이는 영역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또한 어느 면에서는 그를 포함한 동료들이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것'aitios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일세."

"그가 그 다음으로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가 말했네.

 

소크라테스는 "높은 곳의 것"을 보게 되려면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것들의 위계 안에서, 한 위계로부터 다른 위계로 넘어가 인식하기 위해서는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이 필요하다. 이러한 익숙해짐을 넘어 플라톤 특유의 상향적 인식이 드러난다. 인식은 1) 처음에는 그림자들, 2) 물 속에 비친 사람들이나 또는 다른 것들의 상eidōlon들, 3) 실물들, 4)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로 이행한다. 이러한 이행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각각의 현상들이 모두 어떤 조건을 통해서 보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림자들은 불을 통해서 현상하고, 상eidōlon들은 물 속에 비침으로써 현상되며, 실물들은 해의 투영을 통해서 현상한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는 별빛과 달빛을 봄으로써 더 쉽게 관찰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러한 이행에 걸쳐저 있는 모든 조건들이 그 다음 단계의 조건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그림자의 조건이 되는 불은 결국 해의 투영으로부터 나온 것이요, 이러한 조건들의 궁극적 원인은 결국 그 자체로서의 해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태양은 "보이는 영역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그를 포함한 동료들이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것aitios"이다.  

 

이 세 번째 체류과정에서는 동굴의 어둠에서 나와 태양의 빛과 낮의 밝음 가까이로 상승하는 사건이 서술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진정한 해방을 성취하게 된다. 플라톤은 ‘동굴 의 비유’의 전체적인 의미에 관해 설명하는 자리에서(517 b 이하), 동굴은 하늘 아래 이 땅 에서의 생활을 상징하고, 동굴 속의 불은 태양을 의미하며, 동굴 속의 그림자는 우리가 하늘 아래서 보고 있는 사물들을 상징한다고 해설한다. 또한 동굴 밖은 이데아들의 자리이고, 동굴 밖의 사물들은 이데아들이며, 동굴 밖에서 빛나는 태양은 사람들이 아주 힘겹게만 통찰할 수 있는 최고의 이데아, 즉 좋음의 이데아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이 비유에서 진리를 통찰하여 자유를 획득한 자의 자리는 하늘에 있고, 그곳에는 최고의 이데아를 중심으로 이데아들이 조화롭게 질서를 이루는 세계가 펼쳐져 있다. [각주:10]

 

이데아란 "개별 사물들(동굴 속의 그림자와 동굴 밖의 반사된 모습)을 ‘넘어선’ 어떤 다른 것"[각주:11]이다. 즉 그것은 "각각의 사물들이 스스로를 ‘어떤 공통된 무엇’으로 내보여주고 있는 그것의 보임새(Anblick)로서, 지성적인 봄을 위해서 그리고 지성적인 봄 안에서 일차적으로(primär) 보이는 것, 즉 인식되는 것을 가리킨다."[각주:12]

플라톤은 개별 사물들을 봄에 있어, 이미 앞서 이해되고 있는 그것을 이데아로 파악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해한다"는 것은 이데아의 이데인(봄), 즉 이데아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비-감성적인 것을 보고 받아들이면서 파악하는 능력을 누스Nous, 즉 지성이라 부른다.[각주:13] 

 

그리스인들에게서 존재자의 존재는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아리스토텔스에 따르면 제2실체로서의 우시아(οὐσία), 즉 지속인 현존성(beständige Anwesenheit)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이데아란, 어떤 것이 현존할 경우에, 하나의 사물이 공통된 무엇으로 자신을 내보여주고 있는 그것의 존재를 가리키는데, 그러나 이러한 존재자의 존재는 하이데거의 눈으로 바라보면 존재 자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자성(Seiendheit)으로서의 존재를 가리킬 뿐이다. [각주:14] [각주:15]

"어떤가? 이 사람이 최초의 거처와 그곳에 있어서의 지혜 그리고 그때의 동료 죄수들을 상기하고서는, 자신의 변화로 해서 자신은 행복하다고 여기되,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라고 자넨 생각지 않는가?"

"그러고말고요."

"만약에 그때 [그들 앞의 벽면에] 지나가는 것들을 그들 사이에서 가장 예리하게 관찰하고서는,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들이 곧잘 먼저 그리고 뒤에 또는 동시에 지나가는지를 가장 잘 기억하고 있다가, 이에서 앞으로 닥칠 사태(미래)를 가장 유능하게 예측하는 사람에게 명예와 칭찬 그리고 상이 주어졌다면, 그가 이것들을 갖고자 욕심부리며, 그들 사이에서 존경받고 힘깨나 쓰던 자들을 부러워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호메로스의 처지가 되어, '땅뙈기조차 없는 사람의 농노로서 남의 머슴살이를' 몹시도 바랄 것으로,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 '의견(판단)을 가지며'doxazein 그런 식으로 사느니보다는 무슨 일이든 겪어내려 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플라톤의 존재론적 체계는 곧 가치론으로 이어진다. 이는 517b-517c 구절의 "좋음to agathon의 이데아"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는데, 좋음의 이데아는 그것을 인식한 것만으로도 추구할 가치가 있는 궁극적인 것이다. 한 위계 안에서의 가장 좋은 일도, 그보다 높은 영역에서의 좋음에 비하면 (마치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처럼) 가치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결박에서 풀려나 태양을 바라본 죄수가 동굴 안에서 계속 머물며 명예나 칭찬, 상을 추구하기보다 차라리 동굴 밖의 세계에서 머슴살이를 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러면 이 점 또한 생각해 보게. 만약에 이런 사람이 다시 동굴로 내려가서 이전의 같은 자리에 앉는다면, 그가 갑작스레 햇빛에서 벗어나왔으므로, 그의 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가 대답했네.

"그렇지만, 만약에 그가 줄곧 그곳에서 죄수 상태로 있던 그들과 그 그림자들을 다시 판별해 봄에 있어서 경합을 벌이도록 요구받는다면, 그것도 눈이 제 기능을 회복도 하기 전의 시력이 약한 때에 그런 요구를 받는다면, 어둠에 익숙해지는 이 시간이 아주 짧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는 비웃음을 자초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에 대해서, 그가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기들을 풀어 주고서는 위로 인도해 가려고 꾀하는 자를, 자신들의 손으로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일 수만 있다면, 그를 죽여 버리려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전환에서 반드시 필요한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은 단순히 더 높은 세계로 고양될 때뿐만 아니라, (마치 밝은 빛 속에 있다가 다시금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눈이 적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동굴 밖에서 다시 동굴 안으로 복귀할 때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플라톤은 이 점을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연결시킨다. 내부에서의 명예나 칭찬, 상을 바라는 동굴 안의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데아의 빛을 바라보고 온 소크라테스는 비웃음의 대상이자, 붙잡아서 죽여야 하는 대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플라톤은 통치자의 자질로서 빛을 바라보는데 필요한 익숙해짐συνήθεια 만큼이나, 다시 동굴로 복귀하여 어둠을 바라볼 때 필요한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의 중요성 역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3) 본문 (2) 혼의 전환과 통치자의 육성(517b-521b)

 

"그러면, 여보게나 글라우콘! 이 전체 비유eikōn를 앞서 언급된 것들에다 적용시켜야만 하네. 시각을 통해서 드러나는 곳을 감옥의 거처에다 비유하는 한편으로, 감옥 속의 불빛을 태양의 힘에다 비유함으로써 말일세. 그리고 위로 오름anabasis과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의 구경thea을 자네가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영역'으로 향한 혼의 등정anodos으로 간주한다면, 자네는 내 기대에 적중한 셈이 될 걸세. 자네는 이걸 듣고 싶어하니 말일세. 그렇지만 그게 진실인지 어쩐지는 아마도 신이나 알 걸세. 아무튼 내가 보기에는 이런 것 같으이. 즉 인식할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각고 끝에 보게 되는 것이 '좋음to agathon의 이데아'이네. 그러나 일단 이를 본 다음에는, 이것이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 옳고 아름다운(훌륭한) 것의 원인aitia이라고, 또한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는 빛과 이 빛의 주인을 낳고,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영역'에서도 스스로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또 장차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슬기롭게 행하고자prattein 하는 자는 이 이데아를 보아야만idein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하네." 내가 말했네.

(...)

"즉 이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인간사에 마음쓰고pattein 싶어하지 않고, 이들의 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지내기를 열망한다는 사실을 말일세."

 

플라톤은 빛을 향해 올라가는 영혼의 등정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지성의 장소에서 최종적으로 통찰하게 되는 이데아를 '좋음의 이데아'라고 부른다. 이 좋음의 이데아는 진리와 더불어 지성적 인식을 보장해준다.

 

"(좋음이라는...) 이 낱말은 우선 도덕적인 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이 낱말의 근원 의미는, ‘그것(아가톤) 덕분에 다른 어떤 것들이 어디에 유익하게 사용되는 그런 것’, 따라서 ‘다른 어떤 것들을 유용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것’을 뜻한다."

"따라서 플라톤은 존재자들이 좋음의 이데아 덕분에 보여질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도 좋음의 이데아 덕분에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플라톤이 파악하는 이러한 좋음의 성격을, 여타의 모든 이데아들에게 권능을 부여해주는 것(das Ermächtigende)이자, 존재 그 자체와 진리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das Ermöglichende)이라고 말한다." [각주:16]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통치자의 역설이 생겨난다. 즉 선의 이데아를 볼 수 있기에 통치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은 바로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인간사에 마음쓰고pattein 싶어하지 않고, 이들의 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지내기를 열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는" 선의 이데아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이 이데아를 보아야만idein, 장차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슬기롭게 행하고자prattein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선의 이데아를 보았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인간사에 마음쓰고pattein 싶어하지 않"고 선의 이데아만을 계속 탐구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는 통치에 참여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플라톤이 말하는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가 단순히 선의 이데아를 보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국가의 운영을 위한 통치자의 육성이라는 구체적인 목표에 관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면 다음은 어떤가? 자네는 이런 걸 놀라운 일로 생각하겠는가? 가령 누군가가 신적인 관상theōria들에서 인간적인 나쁜 일들로 옮겨 가서, 어색한 꼴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또한, 아직도 제대로 못보는 상태인 데다 주위의 어둠에 충분히 익숙해지기도 전에, 법정이나 또는 다른 곳에서 올바른 것의 그림자들 또는 이 그림자들을 생기게 하는 상들과 관련해서 말다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그리고 '올바름 자체'를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도대체 이것들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두고서 열띤 논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몹시도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면 말일세." 내가 말했네.

 

516e-517a와 연동되는 구절로,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연상시킨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의 현실은 모른 채로 자신의 철학적 행각과 확신 그리고 사명을 열띠어 말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이가 지각이 있다면, 그는 눈에 있어서의 두 가지 곤혹 현상이 두 가지 것에서 연유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즉 빛에서 어둠으로 옮겼을 때와 어둠에서 빛으로 옮겼을 때에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할 걸세. 이 사람은 똑같은 현상들이 혼의 경우에도 일어난다는 데 생각이 미치어, 어떤 혼이 혼란을 일으켜 뭘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되더라도, 생각 없이 웃지 않고, 이 혼이 한결 밝은 삶에서 와서 미처 익숙하지 못하여 암흑 속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밝은 삶에서 와서 미처 익숙하지 못하여 암흑 속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심한 무지의 상태에서 한결 더한 밝음으로 감으로써 눈부셔하는 것인지를 살피려 할 걸세. 그래서 그는 한쪽에 대해서는 혼의 그런 처지와 삶을 행복하게 여기되, 다른 쪽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길 것이며, 또한 이 혼에 대해서 웃고 싶은 심정일지라도, 그의 웃음은 위쪽의 빛에서 온 혼에 대한 웃음보다는 덜한 것일세." 내가 말했네.

"아주 적절하신 말씀입니다." 그가 말했네. 

 

앞에 언급했던 것처럼, "플라톤은 통치자의 자질로서 빛을 바라보는데 필요한 익숙해짐συνήθεια 만큼이나, 다시 동굴로 복귀하여 어둠을 바라볼 때 필요한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의 중요성 역시 강조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에 더해,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이 필요한 "혼의 혼란"이, 밝음에서 암흑으로의 이행인지, 아니면 심한 무지의 상태에서 한결 더한 밝음으로의 이행인지에 대하여 살필 것이라 주장하면서, 가치론의 위계, 즉 윤리적 기준을 세우고 있다.

 

"그런데 만일에 이게 진실이라면,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야만 하네. 즉 교육이란 어떤 사람들이 공언하여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일세. 그들은 주장하길, 혼 안에 지식(인식)epistēmē이 있지 않을 때, 마치 보지 못하는 눈에 시각을 넣어 주듯, 자신들이 지식을 넣어 준다고 하네." 내가 말했네.

"아닌게 아니라 그렇게들 주장합니다." 그가 말했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논의는 각자의 혼 안에 있는 이 힘dynamis과 각자가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기관(수단)organon을, 이를테면 눈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는 것은 몸 전체와 함께 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듯, 마찬가지로 혼 전체와 함께 생성계에서 전환해야만 된다는 걸 시사하고 있네. 또한 이는 실재to on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밝은 것을 관상하면서도 견디어 낼 수 있게 될 때까지 해야만 된다는 걸 말일세. 한데, 이것을 우리가 좋음이라 말하겠지?" 내가 말했네.

 

플라톤은 동굴 안에서 동굴 밖으로 이행하면서 겪었던 눈의 변화(눈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는 것)를 혼의 전환으로 유비시켜 사유를 전개한다. 즉, 교육이라는 것은 소피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혼 안에 지식(인식)epistēmē을 주입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 전체의 (어둠에서 빛으로의) 방향 전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혼 안에 있는 힘dynamis과 혼의 기관organon을, 혼 전체와 함께 생성계로부터 전환해야만 참된 인식이 가능해진다. 이 과정에서 겪어내야 하는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은 지식의 주입과는 도대체가 무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것의 전환periagōgē에는 방책(기술)technē이 있음직하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하면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전환을 하게 될 것인지와 관련된 방책 말일세. 이는 그것에다 보는 능력을 생기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능력을 지니고는 있되, 바르게 방향이 잡히지도 않았지만, 보아야 할 곳을 보지도 않는 자에게 그러도록 해 주게 될 방책일세." 내가 말했네.

 

바로 위 문단의 논의와 이어지면서, 혼의 전환을 위한 방책(기술)technē들이, 능력의 효과적인 사용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지식이 결코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는 플라톤의 생각은 그가 『메논』 등에서 전개했던, 지식이 "상기되는 것"이라는 생각과 이어진다.

 

"한데, 혼의 이른바 다른 '훌륭함'(덕)aretē들은 신체적인 훌륭함들에 가까운 것들인 것 같으이. 사실인즉, 이전에는 그 안에 있지 않았으나, 습관ethos과 단련askēsis에 의해 나중에야 생기게 되기 때문이지. 그러나 똑똑함to phronēsai의 훌륭함(덕)은 무엇보다도 더 신적인 것 같아 보이네. 이것은 그 힘을 결코 잃는 일이 없으며, 그 전환에 의해서 유용하고 유익하게도 되는가 하면 반대로 무용하고 해롭게도 되네. 혹시 자네는 흔히 못된 사람들로 불리나 영리한 사람들의 그 작은 혼(마음)이 얼마나 약삭빠르게 보며, 그것이 향하는 것들을 얼마나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지를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그건 변변찮은 시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이를 나쁜kakia에 봉사토록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그것이 더 날카롭게 볼수록 그만큼 더 나쁜 일들을 하게 되기 때문이란 걸 말이세."

"물론입니다." 그가 말했네.

"그렇지만 이런 성향의 이 부분이 가령 어릴 적부터 곧장 다듬어져서 생성genesis과 동류인 것들이 잘리어 나가게 된다고 해 보세. (...) 만약에 이것들에서 이것이 벗어나게 되어, 참된 것들로 방향을 바꾸게 되면, 이  참된 것들을 똑같은 사람들의 똑같은 이 부분이 또한 가장 날카롭게 볼 걸세."

(...)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진리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도, 끝까지 교육받느라 소일하도록 허용받은 자들도 결코 능히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게 말일세. 앞의 경우는 그들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행하게 될 모든 것을 행함에 있어서 목표로 삼아야 할 그러한 인생에 있어서의 목표를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고, 뒤의 경우는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축복받은 자들의 섬들'에 이주한 것으로 믿고서, 공사간에 자진해서 행하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일세." 내가 말했네.    

 

플라톤에 따르면, 다른 '훌륭함'(덕)aretē들(이를테면 신체의 훌륭함)과 선의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는 똑똑함to phronēsai의 훌륭함(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1) 후자는 결코 배울 수도, 생겨날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다. 2) 후자는 그 힘을 결코 잃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신적이며, 그 방향전환에 따라 유익할 수도 해로울 수도 있다. 고로 플라톤은 이 힘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방안, 즉 "어릴 적부터 곧장 다듬어져서 생성genesis과 동류인 것들이 잘리어 나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본 권의 주제인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다시금 전체 대화편인 국가Politeia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교육(육성)을 겪지 못하거나, 끝까지 교육(육성)받느라 소일하도록 허용받은 자들 모두 능히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를 통해 선의 이데아를 볼 수 있게 된 사람들은 위에서 논의한 것처럼, 나라를 다스리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를 국가Politeia에 대한 통치로 연결할 수 있는가?

 

"바로 거기에 머물러katamenein 있으려 할 뿐, 저들 죄수 곁으로 다시 내려가서katabainein 저들과 함께 노고와 명예를, 이게 다소 하찮은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간에,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일세." 내가 말했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들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며, 이들로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은데도 우리가 이들로 하여금 더 못한 삶을 사도록 만들게 될 텐데요?" 그가 말했네.

"여보게, 자넨 또 잊었네. 법nomos은 이런 것에, 즉 나라에 있어서 어느 한 부류가 각별하게 잘 지내도록(살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이것이 실현되도록 강구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는 걸 말일세. 법은 시민들을 설득과 강제에 의해서 화합하게 하고, 각자가 공동체to koinon에 이롭도록 해 줄 수 있는 이익을 서로들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그런다네. 또한 법은 나라에 그런 사람들이 생기도록 하는데, 이는 각자가 내키는 대로 향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 자체가 나라의 단합을 위해 이 사람들을 십분 이용하기 위해서일세." 내가 말했네.

(...)

"글라우콘, 더 나아가 이 점에 유의하게나. 즉 우리의 이 나라에서 철학자들로 된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고 지켜주도록 우리가 강요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들에게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올바른 걸 이들한테 말해 주게 된다는 걸 말일세. 우리는 이렇게 말할 걸세. '다른 나라들에 있어서는 그런 사람들이 생기더라도 그 나라들에 있어서의 노고는 함꼐 나누지 않는 게 합당하오, 그들은 각각의 나라에 있어서의 정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게 되었으니, 더구나 스스로 자란 것은 어떤 것에도 양육의 신세를 지지 않았을진대, 어떤 것에도 양육의 빚을 갚으려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게 정당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우리는 여러분 자신들과 함께 여느 시민들을 위해, 마치 벌떼 사이에 있어서 지도자들 및 왕들처럼 여러분을 탄생시켜서는, 여느 시민들보다도 더 훌륭하고 완벽하게 교육을 받도록 했으며, 또한 양쪽 생활 다에 더 잘 관여할 수 있도록 했소.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느 시민들과의 동거를 위해 각자가 번갈아 내려가서는, 어두운 것들을 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오.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그곳 사람들보다도 월등하게 잘 보게도 될 것이며, 각각의 상eidōlon들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떤 것들의 상들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인데, 이는 여러분이 아름다운 것들과 올바른 것들 그리고 좋은 것들과 관련해서 참된 것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오. (...) 한 나라에 있어서 장차 통치하게 될 사람들이 통치하기를 가장 덜 열망하는 그런 나라가 가장 잘 그리고 제일 반목하는 일이 없이 경영될 게 필연적일 것이지만, 이와 반대되는 자들을 지배자들로 갖는 나라는 역시 반대로 다스려질 게 필연적이오'라고 말일세." 내가 말했네.

 

글라우콘은 위의 물음과 연관된 합리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들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며, 이들로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은데도 우리가 이들로 하여금 더 못한 삶을 사도록 만들게 될 텐데요?"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론은 첫째, 법nomos은 어느 한 부류의 좋은 삶보다, 오히려 온 나라의 이익, 즉 각자가 공동체to koinon에 이롭도록 해 줄 수 있는 이익을 서로들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만듦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또한 법nomos은 나라의 단합을 위해 이들의 더 나은 삶을 제한할 수 있으며, 십분 이용할 수 있다. 이것이 법nomos의 강제력이자 법 그 자체의 목적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첫 번째 반론이다.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반론은, 위에서 언급했던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문제와 연관된다. 설령 선의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통치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하게 될지라도, 이들은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에 대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 빚을 갚을 의무, 즉 통치에 참여할 의무를 갖는다. 고로 소크라테스는 "정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게" 된 경우, 이러한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고로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본질은 단순히 결박된 자로 하여금 빛과 그 빛을 가능하게 하는 선의 이데아를 보게 함이 아니고, 그 빛을 보게함과 동시에 그 빛을 본 이들로 하여금 통치에 참여해야하는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로써 7권의 주제가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인 이유가 결정적으로 해명된다. 고로 이들은 어두운 것을 보는 익숙해짐을 반드시 겪어야 하고, 그러한 익숙해짐 이후에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플라톤은 고로 "한 나라에 있어서 장차 통치하게 될 사람들이 통치하기를 가장 덜 열망하는 그런 나라"를 이상적인 국가로 여긴다.

 

"그러나 거지들이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은 것들에 허기진 자들이 공적인 일들에 관여하게 된다면, 이에서 좋은 것을 낚아채야만 된다고 생각하고서 그런다면, 그런 나라가 실현될 수는 없다네. 통치하는 것이 쟁취의 대상이 되면, 이런 싸움은 동족간의 내란으로서 당사자들은 물론 다른 시민들마저 파멸시키기 때문일세." 내가 말했네.

"더없이 참된 말씀입니다." 그가 말했네.

"자넨 정치적인 관직을 깔보는 삶으로서 참된 철학자의 삶 이외에 다른 것을 댈 수 있겠는가?" 내가 물었네.

"단연코 없습니다." 그가 대답했네.

""그러나 실은 통치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통치에 임하도록 해야만 하네. 만약에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경쟁자들이 싸우게 될 것이기 때문일세."     

 

4) 본문 (3) 혼의 전환periagōgē에 필요한 방책(기술)technē들 (521c-531e)

 

"그러면 이제는 이 문제를, 즉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생기게 되며, 또한 어떻게 이들을 광명으로 인도하게 될 것인지를 우리가 생각해 보기를 자네는 원하는가? (...)"

"이건 (...) 밤과도 같은 낮에서 진짜 낮으로 향하는 혼의 전환psychēs periagōgē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지혜의 사랑)이라고 우리가 말하게 될 실재to on로 향한 등정(오름)epanodos일 것 같으이."

 

이로써 혼의 전환을 위한 구체적인 방책들, 즉 교과들(학문들)mathēmata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생성되는 것to gignomenon에서 실재로 혼을 끌어당기는 교과(학문)mathēma"를 찾으면서, 그러한 교과가 될 수 없는 것들을 지적하고 있다. 1) 체육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교과가 될 수 없다. 2) 시가는 체육과 상관적이며, 습관ethos들을 통해 교육된 것이다. 3) 또한 모든 기술은 분명히 수공적이다. 고로 시가와 체육 그리고 기술들은 이러한 교과가 될 수 없는 것으로서 배제된다.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모든 기술과 모든 형태의 사고와 지식이 이용하는 공통의 것"이 그가 찾고 있는 교과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교과는 바로 수arithmos와 계산logismos이다. 이 교과들은 전사에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본성상 지성의 의한 이해(앎, 직관)noēsis로 인도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앎들은 존재(본질)ousia로 이끌기에 알맞다. 왜냐하면 감각(감각에 의한 지각)aisthēsis들의 경우, 어떤 것들은 감각에 의해 판단된 것들로도 충분하기에 지성에 의한 이해로 이행할 수 없으나, 어떤 것들은 이러한 이행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감각에 대한 플라톤의 불신이 나타난다.

플라톤에 따르면, 대립되는 감각enantia aisthēsis으로 넘어가지 않는 모든 것은 지성에 의한 이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감각이 동일한 것을 단단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한 것으로도 알려 온다면, 이제 이 대립되는 감각enantia aisthēsis은 혼으로 하여금 계산logismos와 지성에 의한 이해를 불러일으켜 고찰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내가 이를, 즉 어떤 것들은 사고dianoia를 불러일으키지만, 어떤 것들은 그러질 않는다고 방금도 말하려고 하고 있었던 걸세. 자기들간에는 대립되는 것들과 동시에 감각에 부딪쳐 오는 것들을 그걸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라 정의하되, 그러지 않는 것들은 '지성에 의한 이해(앎)'를 '일깨우지 않는 것들'이라 정의함으로써 말일세."

(...)

"그리고 이 경우에 혼은 당혹해 하면서aporein, 자기 안에서 사고 작용ennoia을 가동케 하여, 탐구를 하지zētein 않을 수 없게끔 될 것이며, '하나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묻지 않을 수 없게 될 걸세. 또한 이렇게 해서 '하나'에 대한 공부는 실재to on의 고찰로 이끌어 주며 그쪽으로 방향을 바꾸도록 하기에 적합한 것들 중의 하나로 될 걸세." 내가 말했네.

"그러나 실은 시각도 하나와 관련해서 이런 점을 적지 않게 갖고 있습니다. 동일한 것이 동시에 하나이면서도 수에 있어서 무한함을 우리가 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했네.

"한데, '하나'가 이러하다면, 모든 수가 같은 처지에 있지 않겠는가?" 내가 물었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산술logistikē과 수론arithmētikē은 모두가 수와 관련된 것일세."

(...)

"그렇다면 이것들은 우리가 찾고 있는 교과들에 속할 것 같으이. (...) 철학자로서는 생성genesis에서 벗어나서 존재(본질)ousia를 포착해야만 되기 떄문이겠는데,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결코 계산에 능하며 이성적일 수가 없을 테니까."

 

이러한 논의를 통해 수arithmos와 계산logismos는 지성에 의한 앎을 불러일으키는 교과로 판명된다. 그러나 이 교과는 "무역상이나 소매상들처럼" 실용적인 목적에서 다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수들의 본성physis에 대한 고찰인 동시에, 혼의 방향전환metastrophē을 용이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수arithmos와 계산logismos으로부터 그 다음 학문인 기하학geōmetria이 따라나오며, 이 학문 역시 그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있는 것"에 대한 앎이라는 점이 논의된다. 그 후 세 번째 교과인 천문학astronomia이 논의되나, 곧 기하학 다음의 것을 잘못 취했다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이 이어진다. 즉, "평면epipedon 다음에 입체stereon를 그 자치로 취하기도 전에, 이미 회전 운동을 하고 있는 입체를 취했"다는 지적이다. 순서에 따르자면 이차원deutera auxē 다음에 차례대로 삼차원tritē auxē이 취해지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 아직 입체 기하학의 학문적 체계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이 교과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각주:17] 그리하여 세 번째 교과로 (나라가 이를 추구할 경우 성립할) 입체 기하학과, 네 번째 교과로 다시금 천문학이 정해진다.

 

"이 교과들을 통해서 각자의 혼의 어떤 기관organon이 순수화되어ekkathairetai, [그동안의] 다른 활동들로 인해서 소실되고 눈멀어 버린 이 기관이, 눈 만 개보다도 더 보전될 가치가 있는 이 기관이 다시 점화된다는 것을 말일세. 이것에 의해서만이 진리가 보이기 때문이네."  

"하늘에 있는 장식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확한 것들이라 믿어지지만, 참된 것들에는 많이 미치지 못한다네. 즉 '실재하는 빠름'과 '실재하는 느림'이 참된 수와 온갖 참된 도형schēma에 있어서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운동하며, 아울러 그 안에 실재하는 것들을 운동시키는 그런 운동들에는 말일세. 이것들이야말로 이성logos과 추론적 사고dianoia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들이지, 시각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 것들이네. 혹시 자네는 달리 생각하는가?"

 

여기서 플라톤의 천문학이 당대의 생각과, 또 오늘날의 천문학과 이질적이라는 점을 언급해야 한다.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천문학이 육안의 관찰에 의존하는 것이었고, 또 케플러가 확립했던 타원 궤도로서의 천체 운동이 관측(관찰)에 의해서였던 것처럼, 천문학(과 과학)은 일반적으로 경험을 통해 지지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플라톤은 천문학을 추론적 사고dianoia의 대상으로서 수학적인 것으로 여긴다. 『티마이오스』에서는 먼저 천체들의 운행 궤도를 수학적으로 산정하고서 그 궤도를 따라 천체들이 운행을 하게 되는 것으로 말한다. 즉 경험으로부터 실제의 궤도를 도출해내기 보다, 마치 설계도처럼 추론적 사고에 이행하여 궤도를 수학적으로 산정하고, 이에 맞춰 실제 천체들의 운행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중세 세계관으로 이어져, 케플러 이전까지의 천문학자들은 천체의 궤도가 완전한 원이라고 상정하고 이에 맞춰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려 했다. 이는 케플러가 관측에 근거하여 천체의 운동을 타원이라고 수정할 때까지 오랜 시간동안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져,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이심원운동 등의 복잡한 궤도를 만들어야 했다.

이후 소크라테스는 천문학과 더불어 움직이는 운동phora[각주:18]에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눈이 천문학에 맞추어졌듯, 귀는 화성적 운동enarmonios phora에 맞추어져 있으며, 이 학문들epistēmai은 서로 자매 관계에" 있다. 화성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지성nous보다 귀를 앞세운다"는 점이 지적된다. 결국 수론, 평면 기하학, 입체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은 모두 지성의 의한 이해(앎, 직관)noēsis로 인도하는 것들이며 사고dianoia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이 교과들은 "아름다우며 좋은 것의 탐구를 위해서 유용한 것이지, 다른 목적으로 추구한다면 무용한" 것이다. 고로 이 교과들이 참된 철학을 위한 교과인 변증술dialektikē을 위한 서곡(서론)prooimion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 모두는 마땅히 배워야 할 바로 그 본 악곡nomos의 서곡들인 것이다.  

 

5) 본문 (4) 변증술적 논변to dialegesthai과 앎의 네 단계 (532a-534e)

 

소크라테스는 변증술적 논변to dialegesthai이 본 악곡임을 밝힌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변증술적 논변to dialegesthai에 의해서 일체의 감각aisthēsis은 쓰지 않고서 이성적 논의logos를 통해 "각각인(-ㄴ, x인) 것 자체auto ho estin hekaston로 향해서 출발하려하고, 그래서 좋은 것 자체auto ho estin agathon지성에 의한 이해(앎) 자체autē noēsis에 의해서 파악하게 되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을 때, 그는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것to noēton의 바로 그 끝에 이르게 되네. 마치 동굴을 벗어난 그 죄수가 그때 가시적인 것to horaton의 끝에 이르렀듯이 말일세." 내가 말했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여정poreia을 바로 변증술dialektikē이라 정의한다. 즉 앞에서 다루었던 교과들은 모두 "혼의 최선의 부분으로 하여금 결박에서 풀려나 실재들ta onta 가운데서도 최선의 것to ariston의 관상thea으로 이끌어 올리는 힘"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교과들과 변증술적 논변to dialegesthai이 차별화되는 지점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각각인 것 자체' 하나와 관련해서는 다른 어떤 탐구 방법methodos이 모든 경우에 대해 체계적 파악을 시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하학과 이에 뒤따르는 것들은 모두 실재의 어떤 면을 파악하고 있기는 하나, 또한 실재에 관해서 꿈을 꾸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정hypothesis들을 이용은 하되, 이러한 가정들 자체에 대한 설명을 해 주지logon didonai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근본학문이라 부르기엔 그것들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전제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증술적 논변to dialegesthai에 비해 열등한 것이다. 이들은 그 출발점(원리, 전제)archē들이 해명되지 않았기에 결코 지식(인식)epistēmē이 될 수 없다.

고로 변증술적 탐구 방법hē dialektikē methodos만이 모든 가정들을 하나하나씩 폐기하고서,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원리archē 자체로 나아간다. 변증술적 논변to dialegesthai은 위에 언급된 학술들technai을 협조자들 및 동조자들로 이용하며, 조용히 이끌어서는 위로 인도한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습관 탓에 이것들을 종종 인식들(지식들)epistēmai로 일컬었지만, 이 명칭이 사실은 부적절함을 지적한다. 이들은 의견(판단)보다 명료하지만, 인식(지식)보다는 한결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이제 앎을 네 단계로 분류한다.

 

"그렇다면 앞서처럼, 첫째 부분은 인식(지식)으로 부르되, 둘째 것은 추론적 사고로, 셋째 것은 믿음(확신)pistis으로, 그리고 넷째 것은 상상(짐작)eikasia으로 불러 족하다네. 그리고 뒤의 둘을 함께 의견(판단)doxa으로, 앞의 둘을 함께 지성에 의한 이해(앎)noēsis로 일컫네. 또한 의견은 생성genesis과 관련된 것이지만, 지성에 의한 이해(앎)은 존재(본질, 실재성)ousia에 관련된 것이라 일컫고, 그리고 존재가 생성에 대해 갖는 관계는 지성에 의한 이해(앎)가 의견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으며, 지성에 의한 이해(앎)가 의견에 대해 갖는 관계는 지식(인식)이 믿음에 대해, 그리고 추론적 사고가 상상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네. 그러나 이것들이 대응하는 대상들에 대한 유비 관계analogia와 이 대상들의 각각, 즉 의견의 대상to doxaston과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대상to noēton이 각기 둘로 나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세."  

 

이러한 분류 중 나머지 셋, 즉 dianoia, pistis, eikasia의 경우는 제 6권 511d-e와 같으나, 첫째 것, 즉 이데아에 대한 앎을 511d에서는 지성에 의한 앎noēsis이라 말하고 여기서는 지식(인식)epistēmē이라 말하고 있다. dianoia와 epistēmē는 포괄적으로 noēsis라 했는데, 이는 그 대상들이 포괄적으로 ta noēta라 지칭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자체는 각각의 것의 본질(존재, 실재성)ousia에 대한 설명을 해낼 수 있는 자를 변증술에 능한 자dialektikos로 지칭하는가? 그리고 그럴 수 없는 자를,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설명을 해줄 수 없는 한은, 그것과 관련해서 그는 그만큼 지성nous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자넨 말하는가?"

"그러니까 좋음to agathon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이겠지? (...) 이런 처지에 있는 자가 좋음 자체auto to agathon를 알고 있다고도 자네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 밖의 다른 좋은 걸 알고 있다고도 자네는 말하지 않을 걸세. 그러나 만약에 그가 어떻게 해서 좋음의 어떤 영상을 포착한다면, 그는 인식 아닌 의견에 의해서 포착하게 되는 것이라고 자네는 말할 것이며, 또한 현재의 삶을 꿈을 꾸며 조는 상태로 보내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미처 깨어나기도 전에, 저 세상에 미리 이르러, 완전히 잠들어 버리게 될 것이라고 자넨 말하겠지?"

 

고로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문제에 있어, 변증술dialektikē은 마치 갓돌처럼 다른 교과들 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 이로써 교과에 대한 모든 논의가 마무리된다.

 

6) 본문 (5) 교과들의 배정과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구체적 방안 (535a-541b)

 

이제 마지막으로 교과들을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배정할 것인가가 문제시된다. 즉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구체적 방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먼저 통치자로 키워낼 사람들의 선발은 1) 가장 견실한 자들, 2) 가장 용감한 자들, 3) 가장 잘 생긴 자들, 4) 성격에 있어서도 고귀하고 강건한 자들, 5) 이 교육에 적합한 성향을 지닌 자들이라는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5)에 대한 기준으로 학문에 대한 날카로움을 타고 나야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혼은 체육보다는 까다로운 학문들에서 훨씬 더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다. 또한 기억력이 좋고 꿋꿋하며 모든 면에서 열심인 사람을 선발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기준이 확립되지 않았기에, 오늘날 철학이 여러 잘못과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철학에 대한 무자격자의 접근을 차단하고, 적자들이 철학을 건드려야만 한다. 고로 이제 철학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준이 제시된다. 이는 1) 모든 일에서 부지런해야하며, 2) 항상 진실해야하며, 3) 절제와 용기, 고매함, 그리고 훌륭함(덕)의 자질을 타고나야 한다. 그리하여 "사지가 건전하고 마음이 건전한 사람들"을 교육한다면, 정의dikē 자체도 "우리를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또한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에 있어 늙은 사람이 아닌 젊은 사람을 후보로 양육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계산이나 기하학, 변증술에 앞서 교육받아야 할 일체의 예비 교육propaideia의 교과들은 아이들일 때 제공되어야 하며, 또한 강제적인 배움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를 아이들로 하여금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배우도록 하여, "그들이 저마다 무엇에 적합한 성향을 타고났는지"를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비교육의 교과들과 싸움터에서의 훈련을 통해 가장 민활한 것으로 드러나는 자들을, 필수적인 체육에서 벗어날 때에 선발한다. 이 기간은 20세가 되기 전의 2, 3년간의 기간으로, 소크라테스는 이 기간 동안은 나라의 수호를 위한 군복무를 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 후 스무 살이 된 자들 중에 적임자를 선발하여, 교과들을 교육시키고 교과 상호 간의 친근성 및 실재to on의 본성physis에 대한 포괄적인 봄synopsis을 갖도록 해야만 한다. 이렇게 포괄적으로 보는 사람ho synoptikos은 변증술에 능한dialektikos 자이기도 하므로, 이는 변증술적 자질dialektikē을 테스트하는 시험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간을 거친 후에는, 서른 살이 된 사람들 중 다시금 인원을 선별해 변증술적 논변의 힘에 의해 시험을 거친다. 그리하여 이들 중 실재 자체auto to on로 진리와 더불어 나아갈 수 있는 자를 파악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나, 변증술적 논변이 무법(범법)paranomia 상태라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올바른 것들 및 아름다운 것들과 관련된 신념dogma들이 어릴 적부터 있어 그것에 복종하며 자라오는데, 변증술적 논변의 무분별한 사용은 이런 신념들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to kalon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지자, 그는 입법자nomothetēs한테서 들은 걸 대답하고, 논변logos이 이를 논박하는데, 이 논박이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행하여져, 그가 입법자한테서 들은 것이 추한 것aischron이 아니듯, 아름다운 것도 전혀 아니라는 의견(판단)을 그로 하여금 갖도록 하며, 또한 올바른 것이나 좋은 것 그리고 그가 가장 존중해 왔던 것들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 꼴이 될 경우에 말일세. 이런 일이 있고 나서, 그가 이것들에 대한 존중 및 복종과 관련해서 무슨 짓을 할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

"그는 어느새 준법적인(관습을 지키는)nomimos 사람에서 범법적인(paranomos) 사람으로 바뀐 것으로 보일 것이라 나는 생각하네"

 

"따라서, 자네의 이 서른 살 된 사람들에 대한 이 연민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조심하여 [변증적] 논변에 관여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그렇고 말고요" 그가 대답했네. 

"그렇다면 젊은이들이 논변을 맛보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신중성이 아니겠는가? 나는 자네가 다음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걸로는 생각지 않으이. 즉 청년들이 처음으로 논변의 맛을 보게 되면, 이를 언제나 반박(반론)antilogia에 이용함으로써, 놀이처럼 남용하네. (...)"   

 

이러한 이유에서 소크라테스는 변증술적 논변이 신중하게 교육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이가 더 든 사람은 이런 광기mania에 관여하지 않고, 놀이paidia를 위해 변증술적 논변을 이용하는 자들 보다 참된 것을 고찰하고자 하는 자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즉 논변에 참여토록 할 사람들은 성향에 있어서 예절 바르고 견실해야만 하며, 따라서 지금처럼 아무나 그리고 어느 면으로도 적합지 않은 사람이 이에 접근하는 일이 없도록 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변 기간은 신체와 관련된 단련에 상응해서 두 배 햇수, 대략 5년 정도로 정해진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다시 저 동굴 속으로 내려가 익숙해짐을 겪으며, 전쟁에 관련한 일과 젊은 사람들에 맞는 관직들을 맡게 된다. 이 15년의 기간을 거쳐 이들이 50살이 되었을 때, 실무나 학식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 비로소 모든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최종 목표에 다다르게 된다.

 

"이들로 하여금 고개를 젖히고서 혼의 눈으로 하여금 모든 것에 빛을 제공하는 바로 그것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야만 하네. 그리하여 좋음 자체to agathon auto를 일단 보게 되면, 이들은 그것을 본paradeigma으로 삼고서, 저마다 여생 동안 번갈아 가면서 나라와 개개인들 그리고 자신들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만 하네. 이들은 여생의 대부분을 지혜사랑(철학)으로 소일하지만, 차례가 오면 나라일로 수고를 하며, 저마다 나라를 위해 통치자로도 되는데, 이들이 이 일을 하는 것은 이것이 훌륭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어서일세."

"그리고 이처럼 언제나 자기들과 같은 또 다른 사람들을 교육시켜서는 나라의 수호자들로서 자기들 대신에 남긴 다음, '축복받은 자들의 섬들'로 떠나가서 살게 되도록 해야만 할 걸세. 한편, 나라는 이들을 위해 기념물을 만들고 공적인 행사로 제물을 올리는 의식을 행할 것이며, 만약에 파티아Pythia가 동의의 대답을 내린다면, 이들을 수호신daimōn들로 모시되, 만약에 그런 대답을 내리지 않는다면, 복되고 신과도 같은 분들로서 모시도록 해야만 할 걸세."

 

이로써 7권의 주제인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문제가 모두 해명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이러한 통치자의 조건으로 "자질을 충분히 지니고 태어난 자들"을 들기 때문에, 이는 여성 통치자에게도 해당된다. 그리하여 1) 참된 철학자들이, 2) 한 나라에서 최고 권력자들로 되어, 3) 현재의 명예들을 저속하며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라 생각하고서 경멸하는 한편, 4) 바른 것to orthon과 이것에서 생기는 명예는 최대한 높이사며, 5)올바른 것to dikaion을 가장 중대하고 가장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자신의 나라를 질서잡히게 하는, 이상적인 국가Politeia의 본paradeigma이 완성된다.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방안의 구체적 실현을 위해, 나라에서 열 살 이상 된 사람들을 모두 시골로 보내되, 그들의 아이들은 공동의 생활방식tropos과 법률 안에서 양육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공동 양육이 민족ethnos에 최대한의 혜택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1. 임성철,「플라톤 동굴 비유의 기원에 관하여」, 2004, 417 - 436, p. 419 [본문으로]
  2. 신상희, 「동굴의 비유 속에 결박된 철학자, 플라톤 - 하이데거가 바라보는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 성격과 진리경험의 변화에 관하여」, 2009, 171 - 196, p.173 [본문으로]
  3. 임성철, op. cit. p. 420-421 [본문으로]
  4. 임성철, op. cit. p.421 [본문으로]
  5. 임성철, op. cit. p.423 [본문으로]
  6. 임성철, op. cit. p.424 [본문으로]
  7. 임성철, op. cit. p.428 [본문으로]
  8. 임성철, op. cit. p.429 [본문으로]
  9. 임성철, op. cit. [본문으로]
  10. 신상희, op. cit. p.175 [본문으로]
  11. 신상희, op. cit. p.175 [본문으로]
  12. 신상희, op. cit. p.175-176 [본문으로]
  13. 신상희, op. cit. [본문으로]
  14. 신상희, op. cit. p.176 [본문으로]
  15.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이 글에서의 관심사가 아니므로 다른 지면에서 다룬다. [본문으로]
  16. 신상희, op. cit. p.183 [본문으로]
  17. 입체 기하학sterometria이라는 명칭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와서 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18. phora는 장소적 이동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고, 이를 포함하는 여러 가지 운동은 kinēsis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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