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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현대 철학 -해석학 및 슐라이어마허

by 이덕휴-dhleepaul 2019. 12. 1.

'현대 철학'에 해당되는 글 41

  1. 2019.11.12 지평 확대의 철학 : 슐라이어마허, 점진적 자기발견의 정신탐구 (1)
  2. 2019.11.01 “예술철학이란 무엇인가?” - 시(時)와 사유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3. 2019.10.30 기계와 인간의 인식적 차이 탐구 - 인간 사고의 환원가능성에 관하여
  4. 2019.10.30 심리철학 정리 (2)
  5. 2019.10.30 설명과 기술
  6. 2019.10.30 윤리학에 관한 강의
  7. 2019.10.30 『논리철학논고』발제문
  8. 2019.10.30 언어 철학 정리
  9. 2019.10.30 심리 철학 정리
  10. 2019.10.30 현대 인식론 정리

최신한, 『지평 확대의 철학 : 슐라이어마허, 점진적 자기발견의 정신탐구』, 한길사, 2009 를 요약 정리한 글이다.


제 1부 지평 확대의 해석학


1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 개념


슐라이어마허는 1804-1805년 할레 대학교에서 시작한 해석학 강의 이후 많은 학기에 걸쳐 해석학적 사유를 발전시켜왔지만 이를 서술적으로 완결시키지 못했다. 강의를 위한 메모 형태로 남아 있는 원고들이 슐라이어마허의 희망과 같이 완결된 모습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면 그에 대한 철학사적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다행이도 해석학 개념에 관한 한, 독자들은 베를린 학술원 강연을 통해 그의 핵심적 사유의 편린을 확정적으로 접할 수 있다. 「볼프 및 아스트와 연관된 해석학 개념」으로 이름 붙여진 이 강연은 서술적으로 완결된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생애 말년에 속하는 1829년 8월과 10월에 행해진 이 강연은 해석학 영역에서 동시대를 대변하는 볼프 및 아스트와의 대결에서 나온 결과물로서 슐라이어마허 고유의 빛깔을 띠고 있다. 

볼프Friedrich August Wolf, (1759-1824)는 괴팅겐 학창시절부터 문헌학의 영역을새롭게 개척했으며 나중에 슐라이어마허가 공부하고 가르쳤던 할레 대학교의 문헌학부를 창설했다. 해석학에 관한 한 슐라이어마허는 애당초 볼프를 건너뛸 수 없는 조건에 있었다. 문헌학을 "고대에 나타난 인간본성에 대한 지식"으로 정의하는 볼프와 슐라이어마허의 연관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둘이 높은 수준으로 문명화된 민족과 그 역사, 그리고 이를 담고 있는 문헌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런 점에서 볼프에게 수준 높은 질적 삶의 역사와 이를 표현하는 언어는 해석학의 과제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해석학은 개별 문헌에 대한 해석기술이라는 폭 좁은 분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애당 초 인간 일반과 그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인문학의 정수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볼프를 "문헌학에서 탁월하게 섬세한 정신"을 소유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아스트Georg Anton Freidrich Ast(1778-1841)는 예나와 란츠후트에서 활약한 문헌학자이다. 슐라이어마허는 학술원 강연에서 자신보다 연배가 조금 아래이기는 하지만 플라톤 연구가이자 "철학적으로 결합할 줄 아는 문헌학자"인 아스트의 주장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철학과 문헌학의 결합(아스트) 및 신학과 철학의 결합(슐라이어마허)은 해석학을 둘러싸고 서로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딜타이에 의하면 "양자는 역사에 대한 철학적 사변을 통해 해석학의 도정을 개척했다." 이 강연에서 슐라이어마허가 염두에 둔 아스트의 저서는 1808년에 출간된 『Grundinien der Grammatik, Hermeneutik und Kritik』이다. 

이 글은 슐라이어마허가 학술원 강연에서 주장하는 해석학 개념을 『Hermeneutik und Kritik』에 나타나 있는 그의 사유 일반과 연관해서 재구성하고 그의 고유한 사상을 볼프 및 아스트와의 대화를 통해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해서 특수해석학의 지평을 보편해석학으로 확대하는 근거를 밝히고(1장), 볼프와 아스트를 넘어서는 해석학의 방법과 논리를 드러낸 다음(2장), 교의적 해석과 알레고리 해석을 비판하는 양자의 시도를 종합하면서 슐라이어마허가 꿈꾼 것으로 보이는 해석학의 완결적 지평(3장)을 모색한다. 볼프 및 아스트와의 대화는 그 자체가 역사적이며 해석학적인 것으로서 해석학이 문헌학 저편에 속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해석학의 확장- 특수해석학에서 보편해석학으로

슐라이어마허는 이 강연에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세 가지 활동성을 구별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인간의 활동성에는 몰정신적 활동성, 기계적 활동성, 그리고 기술적Kunstmäßig 활동성이 있다. 1) 몰정신적 활동성은 말 그대로  아무런 정신활동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활동성이다. 2) 기계적 활동성은 "풍부한 경험과 관찰에 기인"하는 활동성이다. 3)  기술적 활동성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본래적인 해석활동Auslegen이다.

몰정신적 활동성은 별다른 정신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며, 주로 시장이나 거리에서 일어나는 담화에서 쉽게 확인된다. 여기서 화자와 청자는 일반적인 대상에 관해 담화하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 특별한 반성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확신한다. 

기계적 활동성은 학교와 연구기관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문헌설명에서 쉽게 확인된다. 예컨대 어문학자나 신학자가 사용하는 해설이나 주석은 대상에 대한 풍부한 관찰과 증명을 담고 있다. 관찰과 증명은 그 자체가 진정한 해석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려운 구절이 등장할 때는 아예 자의적인 해석으로 나타나며 심지어 좋은 내용을 간과하거나 이를 바보스럽게 왜곡하는 현학적 우둔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해석학적으로 가장 유의미한 활동성은 기술적 활동성이다. 이 활동성은 본래적인 기술론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서 해석활동 자체를 문제 삼는 해석자에게서 확인된다. 슐라이어마허는 바로 이 기술적 활동성을 천착함으로써 모든 해석활동을 관통하는 보편적 기술론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마련되는 해석규칙, 즉 "관찰들의 집합"으로 규정되는 해석기술의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말하자면 특수한 텍스트와 특수한 구절에 선별적으로 적용되는 해석기술이 아니라 이해 대상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기술론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수해석학에서 보편해석학으로의 이행은 해석학의 확장을 위한 철학적 프로그램이다. 보편해석학 기획은 "이해의 원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철학적이지만, 사변적 이론보다 구체적인 이해확장의 기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실제적이다. 이 강연의 출발점을 이루는 볼프와 아스트는 공히 문법과 해석학과 비평의 친화성을 주장한다. 이 셋이 문헌학의 영역에 포함된다면, 해석학은 우선 문헌학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특히 고대의 고전은 인간담화의 명작으로서 해석기술이 관계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탁월하고도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 더 나아가 문헌학자들도 다룰 수 없었던 해석학의 또 다른 대상이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성서이다.

보편해석학은 기독교 신학 및 고전학klassische Altertumswissenschaft의 특수한 기술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양자를 포함하면서 이를 넘어서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이 이 둘을 종합해야 한다는 아스트의 주장을 소개한다. "우리의 총체적 정신활동의 목표는 그리스적 삶과 기독교적 삶의 통일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아스트의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면서 넘어서려고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과 고전학은 근동사상Orientalismus 및 낭만주의 문학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엄격하게 구별한다면 기독교 신학, 고전학, 근동사상, 낭만주의 문학 이 네 영역에 해당하는 독자적 해석학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해석학의 확장은 바로 이 네 영역을 통합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상위의 보편적 지평을 마련하는 데서 비로소 가능하다. 보편해석학의 정립을 위해서는 네 가지 해석학을 능가하는 "상위적 공통성"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슐라이어마허는 볼프의 경고에 귀를 기울인다. 해석학은 이론의 측면에서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면, 해석학은 보편해석학의 정립이라는 목표에서라도 사변적인 이론 구축이라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해석기술의 내적 속성과 근거를 탐구하는 "순수학문 이론"을 위해 모험하는 것보다, "이해 대상에 대한 관찰들을 합목적적으로 총괄하는 유용한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수행하는 실제적인praktisch 해석자의 지평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특징적인 것은 슐라이어마허의 보편해석학 구상이 그 출발에서부터 사변적 관점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해석학의 확장을 시도하는 슐라이어마허의 관점은 자명하다. "해석학은 고전의 영역이나 폭 좁은 문헌학적 오르가논에 종사할 뿐만 아니라 저자가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의 작품을 쫓아간다. 해석학의 원리는 이 전체의 영역을 만족시켜야 하며 고전작품의 속성으로만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여기서 슐라이어마허 문법적 해석기술의 제1카논Kanon이 작동한다. 이것은 이해를 위해 주어져 있는 낯선 존재 또는 낯선 작품에 관한 기준이다. 이해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낯선 것의 개념"을 거부해야 한다. 이해 대상이 이해 주체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고 그에게 전적으로 낯설고 이질적이기만 하다면, 그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플라톤의 동일한 것만이 동일한 것을 인식할 수 있다의 원리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허는 문법적 해석의 제 1카논으로 다음의 사실을 강조한다. "주어진 말 가운데서 보다 상세한 규정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저자와 그 원초적 청자에게 공동적인 언어영역으로부터만 규정될 수 있다." 이해 대상과 이해 주체의 연결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해석학적 상황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사실도 거론될 수 있다. 그것은 화자와 청자 사이에 아무런 낯선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이다. 만약 화자와 청자 사이에 아무런 이질적인 것이 없다면 이해는 그야말로 곧바로,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이며 둘 사이에는 모든 것이 "예감적으로 예지적으로divinatorisch 앞서 주어져 있다." 이해 대상과 이해 주체 사이의 전적인 일치와 불일치는 해석학적으로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해석학적 과제는 항상 이 둘의 사이에서 발생하며, "해석학적 작업은 이 두 지점의 사이와 틈새를 아우른다."

이 지점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이해 대상을 제한하는 아스트와 볼프의 입장을 넘어서려 한다. 이해 대상에는 문자로 고정된 저자의 작품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대화에서 직접적으로 청취되는 대화 상대의 말도 포함된다. 또 이해 대상에는 외국어만이 아니라 모국어를 포함해서 이해를 위해 주어지는 모든 문자적, 실제적 말이 해당된다. 명시적이지는 않으나 슐라이어마허는 전자를 아스트에서, 후자를 볼프에서 발견하고 이를 넘어서는 해석학 이론을 마련하고자 한다. 

"해석학은 저술가의 작품에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친숙하고 은밀한 대화에서도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는 "사고의 이행"이 있으며 이 사고가 대상에 대해 갖고 있는 관점과 판단이 있는데 이는 올바른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해의 대상은 낯선 저술가의 작품이나 외국문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에는 일상적인 담화내용뿐 아니라 모국어와 모국어의 사투리까지 그때마다 이해 주체에게 주어지는 모든 유의미한 말과 글이 포함된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이해의 대상은 이미 말과 관련된 저체 존재로 확장되어 있다. 

이러한 의도에는 이해 주체와 이해 대상의 순간적인 접촉에서 발생하는 의미에 대한 강조가 깃들어있다. 이해의 실제에서는 저자와 분리되어 있는 글에 대한 이해에서 발견되지 않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저자가 화자가 되어서 이해 주체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상황으로, "화자의 직접적인 현존"과 여기서 나오는 그의 "생생한 표현"이 관건이다. 바로 여기서 청자는 화자의 글을 읽을 때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그의 전체 정신적 현존에 참여할 수 있다.

(데리다가 지적했던 로고스 중심주의의 전형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문자 언어에 대한 음성 언어의 확연한 우위가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지점이다.)

저자의 글을 읽을 때보다 그와 직접 대화할 때 그로부터 더 큰 자극을 받을 수 있따는 사실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다. 

(정말 그러한가?)

여기서는 화자의 일련의 생각들이 그의 솟구치는 삶의 계기로 나타나며 일상적인 다른 사람의 생각과도 구별되는 연관 속에서 등장한다. 특히 감동을 주는 설교나 감화를 수반하는 강연은 설교자와 강연자의 글을 훨씬 능가할 뿐 아니라 이를 결코 대신할 수 없다. 

(강연의 설득력...개념으로 포섭할 수 없는 사유의 편린과 문자 언어로 고정 시켜놓을 수 없는 음성 언어의 우위는 유비 관계에 있는가?)

그런데도 근자에 특정 설교자나 강연자를 매체에 등장시키고 이들의 말을 반복 가능한 기제 하에 둔 것은 정신의 확장에 기여한다기보다 이와 정반대로 그 타락과 몰락에 기여할 가능성이 높다. 

(일회성을 지닌 원본에 대한 동경...그러나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가 없는 복제품에 대해 오히려 더 큰 저항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살아 있는 직접적인 말은 애당초 상술이나 물량공세가 의도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반복 불가능한 것이며 그것을 위한 특별한 마당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예배나 저자와의 대화와 같은 직접적인 공간이다.

(로고스 중심주의야말로 서양 사유의 독특한 특징이다.)


보편해석학의 방법 - 예감과 비교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주장은 증명 그 이상의 것이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확실성과 전적으로 다른 확실성이 있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에 관하여] 참고.)

(미토스와 로고스의 내적 긴장이 여기서도 유사하게 드러나고 있다.)


해석학적 확실성은 과학적 확실성과 구별되는 그 무엇이다. 이것은 볼프가 추어올린 비판적 확실성이 일반적 확실성과 구별된다는 사실과 흡사하다. 슐라이어마허는 이것을 증명적(demonstrativ) 확실성과 구별해서 예감적 확실성으로 부른다.

(결국 미토스와 같은 개념 아닌가?)

  

예감적 확실성은 "해석자가 가능한 한 자신을 저자의 온 마음 가운데 옮겨놓을hineinversetzen 때" 갖게 되는 확실성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너무 모호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너무나 조악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전에 한 번 "철저한 사유 끝에 예감해야할 것이 스스로 드러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 개념을 보다 명료하게 고찰할 수 있다면, 다음의 잠언도 어떤 구체성을 띠게 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슐라이어마허가 드는 사례는 흥미롭다. 플라톤은 자신의 랩소디를 통해 ㅗ머를 탁월하게 해설했던 반면 다른 시인에 대해서는 해석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다. 호머에게 가졌던 예감적 확실성을 다른 저자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독자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저자가 분명 존재한다.

(너무 심리주의적인 냄새가 나는 설명일 뿐더러, 예감을 취향의 문제Gesmacksache로 격하시키고 있다.)

독자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저자는 이미 독자와 특별한 관계 속에 있다. 이 관계는 독자로 하여금 저자 내면의 진행과정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어째서? 엄밀히 말하면 "저자 내면의 진행과정"이 아니라 "독자가 이해한 저자 내면의 진행 과정"이라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오해의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한다.)

연인이나 친구처럼 저자의 삶 한복판으로 들어설 수 있는 사람만이 그를 특별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독자가 저자의 마음 가운데 옮겨지며 저자의 삶 가운데 투영된다면hineingelebt, 여기서 그는 저자에 대한 예감적 확실성을 획득한다.

(투영이라는 개념의 내포가 불분명할 뿐더러, 예감적 확실성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설명은 그저 기독교적 사제의 냄새가 나는 독단론으로 보인다. 그 기준이 객관적이라면 이 설명은 불충분하고, 그 기준이 주관적이라면 이 기준은 독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슐라이어마허는 "올바른 해석"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결론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훨씬 정교하고 자세한 논증이 필요하다.)

예감적 확실성은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심리적 해석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실망스러운 접근. 보편적 해석학으로의 확장이라는 원 기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하이데거의 존재 이해의 해석학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저자의 내적인 생각과 마음을 읽어내는 해석이다. 이런 점에서 심리적 해석은 주관적인 것에 대한 해석이며, 따라서 해석의 실제가 함께 고려해야 하는 언어 및 역사에 대한 해석과 예리하게 구별된다. 

(예상대로 심리학주의의 문제로 그대로 돌진하고 있다.)

모든 저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져 있는 언어와 역사는 그것에 대한 저자의 고유한 적용에 앞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이며 객관적인 것이다. 이런 객관적인 것으로서의 언어는 저자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도 저자의 실존을 떠받치고 있는 외적 양상Modalität에 불과하다. 

(결국 슐라이어마허도 근대적 사유의 틀을 극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생각과 마음은 이러한 수단과 양상을 통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것으로서 객관적인 것을 능가한다. 예감적 확실성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져 있는 언어와 역사를 넘어서는 저자 고유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기존 언어와 역사를 뛰어넘는 새로운 어법은 새로운 언어 시대를 창출한다. 이해의 대상이 되는 모든 문헌들은 실제로 서로 대립하는 "두 시대"에 속한다. 첫째 시대가 아름다운 말의 기술을 떠받치고 있는 형식이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시대라면, 둘째 시대는 모든 말이 이 형식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시대이다.


   



           


             


        



“예술철학이란 무엇인가?”

- 시(時)와 사유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우리는 이 글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지 않고, 곧장 “예술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룬다. 왜냐하면 후자의 질문이 합당하게 해명되고 나서야,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금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은 영미의 분석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철학자들, 즉 예술 정의 불가론을 주장하는 웨이츠(M. Weitz)나, 정반대로 예술이 정의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단토(A. Danto) 혹은 디키(G. Dicky) 등에게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이들은 “예술은 정의(定議)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있어 양 극단에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이는 다시 말해 “예술철학의 주요 문제는 예술을 필요충분조건(If and if only)으로 정의하는 일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아무래도 다음과 같은 자명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철학 내에서 모든 물음의 목표는 그것의 본질을 제시하는 데 있다. 윤리학은 “윤리와 같은 가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 하고, 인식론은 “인식(앎)이란 무엇인가?”를 다룬다. 그렇다면 예술철학이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다루는 것, 그 외에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자명성은 다음의 두 가지 문제가 해명되지 않으면 자명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첫째, 철학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적법성을 가지고 있는가? 즉 철학의 고유한 질문 형식이 예술이라는 대상에 적용될 수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지 않다면 철학에서 예술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단지 확립된 세계관(Weltanschauung)[각주:1]에서 바라본 예술의 의미에 불과할 것이며, 이는 달리 말해 예술을 비본질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 즉 예술을 그 고유한 존재로 묻지 않고 단지 월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행한 작업의 의미는, 수학과 자연과학의 객관성을 증명함으로써 그 학문들을 정초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순수이성비판』의 주요 물음 중 하나는 “선험종합판단이 가능한가?”가 아니라, “선험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각주:2]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판 철학은 사변 이성의 영역 아래에서 형이상학의 물음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이는 거꾸로 말해, 사변이성의 영역에 위치한 자연과학이 신앙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학문적 월권임을 암시한다. 고로 “과학적 방법론의 지배 영역을 넘어서는 진리의 경험”[각주:3]이 도처에 존재한다면, 각 학문의 지배 영역의 적법성은 그 경험의 대상이 개별 학문의 영역에서 얼마나 고유하게 개현(開顯)될 수 있느냐[각주:4]에 달려 있다.

둘째, 설령 그러한 적법성이 확보되었다 할지라도, 위에 언급한 철학자들의 방식이 적절한 물음의 형식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이들이 탐구하려는 예술의 본질은 어찌하여 필요충분조건의 형태로 제시되어야만 하는가? 필요충분조건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p → q) ∧ (q → p)]라는 것, p는 예술 개념의 외연(外延)이며, q는 그것들이 필연적으로 갖는 내포(內包)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각주:5] “진리의 본질은 ‘내재함’(inesse)에서 성립한다. 이러한 ‘내-재함(in-esse)의 근원 형식 (...) 일차적인 근원적 진리들은 ‘동일한 것들(identica)'[각주:6]이다.” 즉 그것은 ‘동일성’(identitas)으로부터 산출된 판단의 타당성에 근거한다.[각주:7] 경험으로부터 붙잡은 개념의 엄밀성은 이렇게 논리학의 타당성으로부터만 구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동일성 자체는 다시금 존재 이해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명제논리는 사물의 '어떻게 있음(wie-sein)'을 구성하지만, 사물의 “무엇(das Was)”에 앞설 수 없다.[각주:8][각주:9] 그러나 앞서 철학자들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묻고자 했던 것은 예술의 ‘무엇-임’, 즉 본질이지 않았던가?

이렇게 본다면 본질에 대한 물음을 기호 체계적 엄밀성을 통해 물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언어의 형식이 미해석된 연산 체계이고 언어의 내용이 해석에 의존한다”[각주:10]는 이분법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형식적 명료화와 해석 양자는 이미 기호들에 대한 선이해(Vorverständnis)를 요구한다.[각주:11] 고로 양자의 연관을 자의적으로 분리하여 고정시키고 어느 한쪽에 우위를 부여하는 행위는, 주체와 객체를 분리함으로써 마주-세움의 존재론을 세웠던 근대성의 변형된 형태에 불과하다. “그것은 언어의 죽음이자 존재의 황폐화”[각주:12]를 의미한다. 고로 어떠한 대상에 관한 올바른 규정은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다. 시(詩)를 단어들의 집합으로 정의내리는 규정은 그 자체로 올바르지만 아직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각주:13]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매우 기묘한 역설과 만나게 된다. 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읽어야(해석해야) 하지만,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이해에 의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경험(이해)으로부터 붙잡은 개념의 타당성은 논리에 의존하지만, 논리는 또 다시 경험(이해)에 의존해야 한다. 이러한 순환이 설령 긍정적이라 할지라도[각주:14][각주:15], 본질에 대한 통찰이 일반적인 경험에 대한 통찰과 매우 다른 어떤 것임은 드러난다. 일부 철학자들이 논리적 명료화를 통해 얻으려는 설명은 어디에선가 끝나야 한다. 그러나 그 설명이 근거하고 있는 지평(Horizont)은 언어 사용 과정 전체를 기술(記述)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각주:16] 즉 이 통찰은 다른 모든 것을 가능하게 개시(開示)하지만 그 자신은 개시하지 않는 그런 것을 사유하도록 요구한다. 칸트는 이미 이러한 지평을 초월성(Transzendenz)이라는 이름으로 사유한 바 있다. “[선험적] 표상들은 전혀 경험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인식과, 그러면서도 이 표상들은 경험의 대상들과 선험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 초월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각주:17] 그러니 이제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러 의미론적으로 무(Nichts, 無)와 다름없는 것이 밝혀졌다 할지라도[각주:18],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고로 이제 우리는 적법성이라는 최초의 물음을 다시 본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철학이 그 고유한 물음을 견지해나감에 있어 개념에 의한 사유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철학 고유의 물음 형식인 “-임”이라는 정의(Definition)는 이미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로부터 제시된 바 있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여러 차례 “~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질문이 이 질문에 속하는 다양한 존재자들을 열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존재자들을 존재자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그것’에 대한 명확한 정의로 제시해야 한다고 논박한 바 있다. “우리는 그것들의 수효를 헤아리고 싶어서 물은 게 아니라 앎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물었던 것이거든. (...) 그러므로 ‘앎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런저런 어떤 기술에 대한 이름으로 대답할 경우, 그런 대답은 우스꽝스런 것이네.”[각주:19] 그러나 플라톤 그 자신도 “[본질에 대한] 지식은 개념 안에서 완벽하게 개시될 수가 없기 때문에 결코 논증적으로 얻어질 수 없”[각주:20]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플라톤이 철학적 지혜를 온전히 로고스(λόγος)로 전달하기보다 오히려 비유와 신화, 즉 미토스(μῦθος)로 전달하려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기 때문이다. 즉 그는 로고스에 담길 수 없는 의미의 잉여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려 노력한다.[각주:21]

철학이 그 독자성을 획득하는 전개 과정에서 이루어진 “미토스에서 로고스로”라는 표어는, 단순히 미토스로부터 로고스로 대립되는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토스와 로고스는 그 어원을 살펴 볼 때, 연속적 이행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신화를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지어낸 이야기’, ‘거짓된 이야기’라는 뜻의 우화와 대립되는 의미로 신화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각주:22] 그리스어 미토스(μῦθος)는 ‘참된 말’로서의 ‘말’을 의미하며, 그것은 본래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말’, ‘있는 사실에 대한 말’이다.[각주:23] 미토스와 로고스는 거짓되고 참되다는 점에서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토스는 “어떤 조건이나 연관성 없이 그 자체로”[각주:24] 참된 말이고, 로고스는 “어떤 연관성 안에서,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각주:25] 숙고한, ‘올바른’ 말이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원시적인 미토스로부터 이성적인 로고스로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토스는 “존재를 부여하는 실재성의 계시”로, 로고스 이후에도 여전히 저 나름의 방식대로 지혜에 봉사하고 있다. 따라서 신화적 사고는 철학 내에서 완전히 극복되지 않고[각주:26], 내적긴장의 형태로 계속해서 불안한 공존을 지속한다.

물론 플라톤이 ‘시인 추방’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시(詩)를 존재론적으로 '덜 참된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시(詩)가 “본성상 (...) 일종의 마력을”[각주:27] 지니고 있으며, “우리 안에 생겨난 이런 시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시가 최선의 것이며 가장 진실된 것임이 밝혀지는 데 대해 호의적일 것”[각주:28]이라고 말한다. 즉 그는 시(예술)에 대한 변론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즐거움을 위한 시와 모방이 훌륭히 다스려지는 나라에 자기가 있어야만 하는 어떤 논거를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우리 자신이 이런 시에 의해서 매혹되고 있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 두세. (...) 시가 서정시로 된 것이건 또는 다른 어떤 운율로 된 것이건 간에 변론을 제대로 하게 되었을 땐, 이렇게 귀환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는가?”[각주:29]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 예술은 그 자신의 존재 의미를, 보다 정확히 말해 플라톤이 세운 체계 안에서 특정한 존재 의미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플라톤의 의도는 예술을 무작정 폄하하고 몰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미토스를 로고스의 지배 아래에서 경계하며 수용하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보다 노골적으로 “철학과 시(詩) 사이에는 오래된 일종의 불화(diaphora)가 있다”[각주:30]고 말한다. 이 불화는 진리의 소유권에 있어서 예술과 철학 사이의 대립을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미토스와 로고스 사이의 외적긴장은 플라톤에 이르러서도 극복되지 않고[각주:31] 내적긴장의 형태로 변모하여 존재한다. 이 긴장이 바로 철학과 시(詩) 사이에 있는 오랜 불화의 원천이다.

“내가 그를 미워하고 있을 때 나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시인을 추방하고자 했을 때 그는 여전히 시를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 내가 그를 의식하고 있을 때, 나는 아직도 그보다 약자인 것이다. 시와 철학의 복잡 미묘한 애증관계에 민감한 것은 시인들이 아니라 철학자다. 시인들은 철학자를 경멸하지 않지만 철학자는 때로 시인들을 경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철학의 무의식이다. 그런데 비평가들은 그런 철학자들의 눈치를 본다. 시가 철학의 무의식이라면 철학은 비평의 초자아다. 비평가는 호메로스와 횔덜린과 랭보를 염두에 두지 않고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헤겔을 염두에 둔다. 연인이 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할 때 느끼는 불안은 비평가들의 고질이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시를 사랑하지만 철학을 등지지 못한다. (...) 그래서 하이데거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철학자들이 시인과 다르지 않았음을 강조할 때, 횔덜린을 ‘시인 중의 시인’이라 찬미하면서 오로지 시만이 구원의 장소라고 말할 때, 비평가들은 기꺼이 감동하지만 하이데거를 진심으로 믿지는 못한다. 위대한 것은 횔덜린이 아니라 차라리 하이데거가 아닌가를 의심한다.”[각주:32]

어느 문학 평론가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이미 양자의 불화가 결정적으로 한 번 단절된 이후에 쓰인 것이다. 플라톤은 철학과 시(詩)를 분명히 구별하고, 미토스가 로고스의 우위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지언정 그 긴장을 온전히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철학의 기원을 놀라움에서 찾으며, 동일한 기원을 갖는 ‘미토스를 사랑하는 사람’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한다.[각주:33] 심지어 막스 베버가 ‘탈마법화Entzauberung된 세계관’이라 불렀던 계몽의 시기에도,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났던 낭만주의 혁명은 미토스를 다시 한 번 극적 위치로 끌어올려 사유하였다.[각주:34] 그러나 20세기를 자연과학의 양화(量化)와 논리주의(Logizismus)의 엄밀성이라는 두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 로고스는 미토스를 객관적 과학 밖으로 추방해 버렸다. 아니, 로고스(철학)는 그 자신을 학문 밖으로 유폐시켜 버렸다. 철학적 지혜를 지탱하던 내적 긴장이 무너지면서, 사유는 시(詩)에 대한 적법성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사유는 본질을, 즉 참된 것을 사유하려 하며, 그렇기에 참되지 않은, 대상으로서의 예술을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예술에 대한 하나의 규정에 이르렀다. 예술에 대한 사유의 적법성은 예술과 사유가 같은 선상에 있을 때만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자의 공속성(共屬性)으로부터, 진리의 소유권에 대한 내적긴장으로부터 사유와 시(詩)는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시 지음을 사유함과 비교해본다면, 시 지음은 아주 다른 또 하나의 탁월한 방식으로 언어를 위해 헌신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을 깊이 숙고해 보는 우리의 대화는 반드시 사유함Denken과 시 지음Dichten의 관계를 논구하는 자리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사유함과 시 지음 사이에는, (...) 어떤 숨겨진 친밀함이 편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또한 갈라진 틈이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은 <가장 멀리 떨어진 산 위에 살고 있기wohnen auf getrenntesten Bergen> 때문이다."[각주:35]

고로 이제 우리는 예술을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비록 그것이 언어의 한계에 달려가 부딪치는 것[각주:36]이라 할지라도 말이다.[각주:37] 이 규정은 한편으로는 낯설고, 다른 한편으로는 (낯설기에) 긴급하게 숙고(das besinnliche Denken)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예술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이 오직 철학적 물음의 고유한 영역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후자는 그러한 가능성, 즉 내적긴장을 계산적인 사유(das rechnende Denken)가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사유의 종말과 허무주의(Nihilismus)가 초래한 극단의 위험[각주:38]이다. 존재를 뒤따라 사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에 우리는 우리를 앞서가는 논리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결론적으로, 예술이 위험에 처한 사유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각주:39] 다만 우리는 “예술의 본질적인 존재를 순전히 미학만을 보아서는 더 이상 보존할 수 없다는 상황의 긴급성을 확인”[각주:40]했을 뿐이다. 시(詩)에 관한 사유가 사유를 떠나지 않듯, 사유에 관한 시(詩)는 시(詩)를 떠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詩)가 붙잡고 있는 그것은 사유와 마찬가지로 그 존재 자체의 정당성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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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르틴 하이데거, 『논리학의 형이상학적 시원근거들』, 번역 김재철, 김진태. 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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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양대종. 2018. 〈철학에 깃들인 종교적·수동적 이성의 전통에 대한 소고〉,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76(), 487-512.

  1. 철학을 가치론의 관점에서 세계관의 건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형이상학은 가치의 위계를 세우는 작업으로, 인식론은 그러한 가치를 알기 위한 도정(道程)으로, 윤리학은 그러한 가치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적 기술(技術)로 이해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B20, 번역 백종현, 아카넷, 2006, p. 230 [본문으로]
  3.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진리와 방법』, 번역 이길우, 이선관, 임호일, 한동원, 문학동네, 2012 p.10 [본문으로]
  4. Ibid. [본문으로]
  5. 양화사를 적용하면, , 즉 모든 x에 대하여, 예술 작품인 x는 Q(내포)인 x와 필요충분조건 관계에 있어야 한다. [본문으로]
  6. 마르틴 하이데거, 『논리학의 형이상학적 시원근거들』, 번역 김재철, 김진태. 길, 2017, p.69-70 [본문으로]
  7. Ibid. p.90-91 [본문으로]
  8.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5.552, Suhrkamp Verlag, 1969, p.87 [본문으로]
  9. 이러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경험Erfahrung을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고] ‘보여지는 것’으로,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의 ‘존재 이해’로, 가다머는 ‘진리의 경험’으로 파악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더 날카롭게 “우리가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경험’은 [일반적인] 바로 그 경험이 아니다.(aber das ist keine eben Erfahrung.)”라고 말한다.(같은 곳) [본문으로]
  10. 이승종. 1999. 〈반시대적 고찰 :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수리논리학 비판〉, 현상학과 현대철학. 1999-01 12:395-424. p. 408 [본문으로]
  11. op. cit. [본문으로]
  12. op. cit. [본문으로]
  13. 마르틴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기술에 대한 물음, 번역 이기상, 이학사, 2008, p.12 [본문으로]
  14.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p.22-23 [본문으로]
  15. “존재자가 그 존재에 있어 규정될 수 있다. 이때 존재의 의미에 대한 명시적인 개념을 이미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 [명시적인 개념이 아닐지라도] ‘존재’는 분명히 지금까지의 그 모든 존재론에서 ‘전제되었다.’” (같은 곳) [본문으로]
  1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번역 이승종, 아카넷, 2016, p.36-37 [본문으로]
  17.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B81, 번역 백종현, 아카넷, 2006, p. 278 [본문으로]
  18. 비트겐슈타인은 명제를 세 가지 층위로, 즉 의미Sinn있는 명제, 뜻이 없는sinnlos 명제, 무의미한Unsinn 명제로 구분한다. 이 세 가지는 각각 경험적 명제, 논리적 명제, 윤리적[미학적] 명제에 대응한다. 그러나 『논리-철학 논고』에 대한 주류 담론[분석철학]의 해석이 이 책의 요점[윤리적인 것]을 포착하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철저히 무시하게 된 원인은, 각각의 층위에 대한 관계성을 통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논리학과 윤리학은 초월적teanscendental이다.(TLP 6.13, 6.421) 이는 『논고』의 기획이 칸트적 의미의 초월성- 그 자신은 경험적이지 않으나 경험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논리와 윤리-에 정향(定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 원리”라는 자의적 해석을 도입함으로써 이 기획을 결정적인 망각에 빠뜨렸다. [본문으로]
  19.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146e-147c, 번역 정준영, 이제이북스, 2013, p.81-82 [본문으로]
  20. 양대종. 2018. 〈철학에 깃들인 종교적·수동적 이성의 전통에 대한 소고〉,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76(), 487-512. p.492 [본문으로]
  21. op. cit. [본문으로]
  22. 칼 알버트, 『플라톤 철학과 헬라스 종교』, 번역 이강서, 아카넷, 2010, p.20 [본문으로]
  23. Ibid. p.19-20 [본문으로]
  24. Ibid. p.20 [본문으로]
  25. Ibid. [본문으로]
  26. 칼 알버트, 『플라톤 철학과 헬라스 종교』, 번역 이강서, 아카넷, 2010, p.17 [본문으로]
  27. 플라톤,『국가』, 번역 박종현, 서광사, 1997, p.624 [본문으로]
  28. Ibid. p.639 [본문으로]
  29. Ibid. p.638 [본문으로]
  30. Ibid. p.637 [본문으로]
  31. 플라톤이 말하는 오랜 불화는 이를테면, 호메로스에 대한 크세노파네스의 비난을 의미한다.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인간의 치욕스러운 일을 신에게 적용시켰다고 비판한다. (칼 알버트, 같은 곳) [본문으로]
  32.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p. 296-297 [본문으로]
  33. 칼 알버트, Ibid. p.18 [본문으로]
  34. 찰스 테일러,『헤겔』, 번역 정대성, 그린비, 2014, p.77-79, 89-97 [본문으로]
  35. 마르틴 하이데거,『동일성과 차이』, <철학- 그것은 무엇인가?>, 번역 신상희, 믿음사, 2000, p. 100-101 [본문으로]
  36.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5.6, Suhrkamp Verlag, 1969, p.89 [본문으로]
  37. 비트겐슈타인이 사유해야 하는 것의 ‘말할 수 없음’에 주목하고 있다면, 하이데거는 말할 수 없는 것의 ‘사유해야 함’에 주목하는 듯하다. [본문으로]
  38. 마르틴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기술에 대한 물음>, 번역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이학사, 2008, p.48-49 [본문으로]
  39. Ibid. [본문으로]
  40. Ibid. [본문으로]




           



             

2019.10.30 18:55 현대 철학/분석철학

2015년 1학기 인식론 레포트로 제출한 글


<인식론 과제> Page 1

<기계와 인간의 인식적 차이 탐구

- 인간 사고의 환원가능성에 관하여>


0. 요즘 테크닉의 발달로 음성인식이나 지문인식이라는 기계의 기능이 일상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계가 인식을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아니 그 전에, 기계에게 인식이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들의 인식은 인간의 인식과 동일한 것일까 다른 것일까?

카스파로프는 최연소로 세계챔피언에 오른 이후 15년 동안 무패를 기록한 체스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하지만, 도전자였던 슈퍼컴퓨터 딥블루는 그가 그동안 두었던 기보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그대로 따라했다. 챔피언은 자신의 수를 뛰어넘을 신의 한수를 찾지 못했고, 딥블루 또한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수를 DB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되는 무승부 끝에 챔피언은 점차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어이없는 실수를 하며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자신이 수를 계산하지 못하고, 기보에 의존하는 딥블루를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고 불러야할지 곤란해 한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한 일반적 정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에서 다루는 지능과 인식의 문제들, 더 나아가 인간의 인지능력과 추론능력을 인공적으로 모델링함으로써 외부 대상을 지각하고 자연언어와 같은 구문적 패턴까지 이해하는 능력을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정의가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결과적으로, ‘지성을 가지고 사고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슈퍼컴퓨터 딥블루는 이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까? 잠시,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인공지능에 관련된 연구는 기계의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딥블루가 체스를 두는 행위도 기계가 인식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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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인식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인식주체로서의 인간과 기계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도대체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이란 무엇일까? 또, 기계에 있어서 인식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 글에서, 인지과학의 발전과정을 대략적으로 서술하여, 현대과학이 기계의 인식을 어떻게 규정해냈으며, 또 기계와 인간의 인식이 동일하다는 생각에 어떻게 도달했는지에 대한 전 과정을 유추해낸 후, 인공지능 발전의 추세를 통해, 현대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영역까지 진보할 수 있을 것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만약에 그러하다면, “기계의 인식이 인간의 인식과 동일한 것인가?”라는 처음의 물음은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다. 현대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영역까지 진보할 수 있다면, 기계의 인식이 인간의 인식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위의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인지과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인지와 인식을 정의내리고 그 둘의 차이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또, 인지과학자들이 인식론을 탐구하는 철학자들과 비교해봤을 때 인간의 인식을 파악하는데 있어 어떠한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통, 인지과학자들은 철학자들이 탐구하는 인식과 차별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탐구하는) 인식을 비교적 수동적 과정이라 볼 수 있는 정보처리 개념이 강조되지 않은 형태로의 앎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철학자들이 탐구하는 인식의 경우, 정보처리 과정을 거친 능동적 앎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인지의 경우에는, 그러한 수동적, 능동적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앎을 지칭하며, 특히 정보 처리 (information processing) 과정을 거친 앎의 과정과 내용을 지칭한다고 규정하여 차별화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철학에서의 인식 개념 역시 수동적, 및 능동적 앎의 과정을 모두 지칭하며 사용해왔기에,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인식이라는 단어와, 인지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인지라는 단어를 구분하기가 한층 더 애매해지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인식과 인지의 실질적 차이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정보처리 패러다임의 강조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이, 어떤 구조를 가지며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심리학이 생긴 이후로, 심리학자들은 어떤 이론이 현실을 가장 잘 관찰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 틀, 즉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초기에 많은 심리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패러다임은 행동주의 심리학이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을 주장한 과학자들은,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만을 과학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야하며, 모든 과학적 용어는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것만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경험적으로 관찰하기 곤란한 '마음'의 상태와 작용을 개념화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비과학적이며, 마음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생각한 심리학자들은 마음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되었다. (즉 그들은 마음에 대한 탐구자체를 포기하였다.) 대신에, 이들은 마음을 하나의 수동적인 스위치 연결 상자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마음속에 자극과 반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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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관계가 기계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극 S가 입력(I)되면, S에 대해 관계를 지니고 있는 반응 R이 마치 함수처럼 기계적으로 출력(O)되는 것을 마음이 작동하는 과정이라 본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이러한 기계적 S-R 연결들을 중계할 뿐인,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하나의 암흑상자(black box)이며 마음(M)의 본질을 추론하기보다는 입력(I)에 따른 출력(O)의 관계를 추론하는 것을 주요 탐구과제로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 M

자극 S(또는 입력 I) -----→ Switch Box -----→ 반응 R(또는 출력 O)

f [(S) × (M)] = R : (M은 불변하는 상수)

∴ M = 상수 :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음.

따라서 S'→R'의 관계만 연구가능

그러나 1950년대 이후로 이들의 생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과 컴퓨터의 관계에 집중하였다. 이들은 인간의 마음과 컴퓨터가 기본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활동을 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을 정보처리 패러다임이라 흔히 말하며, 이 패러다임에서는 인간의 마음과 그것에 대한 물리적 구현체인 두뇌, 그리고 컴퓨터를 정보처리적인 틀로 간주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보(information)’란 통상적으로 말하는 의미(意味)가 할당되고 해석된 기호가 아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정보를 단순히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호들이라는 용어로 사용하는 반면, 인지과학에서 정의하는 정보는 대중들이 흔히 사용하는 정보의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정보의 수학적 이론에 의하면, 정보는 시스템 사이의 소통을 위해 생성되고, 전달되고, 수용되는 신호(signal)로서, 그 신호를 해석하고 사용하는 지적인 주체의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정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해석을 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이며, 따라서 흔히 정보로 간주되는 명제나 진술은 그것들의 원천(source)으로서의 정보와 구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보들은 외부에 존재하던 정보를 우리의 인지체계에 의해 주체적으로 해석해낸 것으로, 지금까지의 심리학에서 정의하던 것처럼 마음을 단순한 스위치 연결 상자로 보는 것에서 빠져나와, 마음을 정보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로서, 즉 정보를 처리해내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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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들의 입장에서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입력(I)하는 것과 이에 대한 인간의 정보처리 결과인 출력(O) 사이의 기계적(mechanistic) 관계를 탐구하기보다는, 입력(I)과 출력(O) 사이에 어떠한 심리적 과정이 일어나기에 이러한 I와 O의 연결이 가능하게 되는가에 대한, 즉 마음(M)의 과정과 내용에 대한 추론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게 되었다. 마음은 잠재적인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자극으로부터 정보를 추출하고(선별), 해석에 따라서 상징화하여 조직하고, 처리함으로써 이것들을 상징구조로 저장하여 처리 결과를 반응으로 출력해내

는 정보처리 시스템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전까지는 마음을 기존의 수동적 기계장치로 이해한 것에 비해, 정보처리 패러다임 내에서는 마음을 I와 O 사이에서 정보를 해석하고 결정하며 스스로를 점검(모니터)하는 역동적인 상징조작체계(symbol manipulation

system)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체계란 여러 하위 체계 또는 구성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부분들이 다양하게 상호작용하며 환경에서 입력을 받아 출력을 내어놓는 개방적인 전체를 말한다.

I ---> M ---> O

물리적 심적 자극(입력) 마음이라 불리는 것 정보처리과정을 거친 반응(출력)

f(I × M)= O

추론된 마음 M <- f([I'] × [O'])

이 패러다임에서 지적하는 내용, 즉 ‘인간의 마음과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활동을 하며, 각종 자료는 인간의 마음이나 컴퓨터에 주체적 해석을 거친 형태로 저장되어있어 어떠한 특정 상황 속에서 마음의 작용과 내용을 간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얼핏 보기에 간단하지만 인지과학의 입장에서는(물론 철학적 입장에서도) 두 가지 측면에서 굉장히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첫 번째는 기존의 마음을 과학적 탐구대상에서 제외하려던 심리학이, 마음을 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탐구할 수 있음을 보이고, 마음에 대한 탐구를 주요과제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마음에 대한 연구를 철학에서 수행했다면, 이제는 인지과학, 또는 인공지능의 영역에서 역시 철학에서 진행하던 연구들, 즉 철학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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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칸트가 자신의 책 순수이성비판에서 규명하고자 한 내용의 일부(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의 기획)는

C1. 경험 이전에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있다.

C2. 그런 조건 중에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있다.

C3. 공간의 형식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다.

이러한 것들이었다.

이 중 C1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특히 인지과학에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로 바뀌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철학적 질문은 "인공지능을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공학적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을 다른 종류의 물리적 장치에 실현하면 그게 바로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한 분야인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에는 '귀납 편향(inductive bias)"라는 용어가 있다.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알고리듬에 따라 똑같은 경험을 해도 다른 학습을 하게 된다는 걸 말한다. 칸트와 현대의 인공지능 연구자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로, 공학적 측면에서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을 설계하는 공학자들, 혹은 인지과학자들의 탐구는, 인간의 마음 역시도 그러한 정보처리과정의 시스템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인간의 인식 역시도, 기계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의 마음(그리고 그것의 물리적 구현체인 두뇌)은 하나의 컴퓨터이며, 환원할 수 있는(일일이 계산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파악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인지과학은 그 발전으로 인해 철학에서 다루던 마음의 문제를 환원주의적 입장에서(인간의 사고가 계산 가능한 것이라고 파악하는 입장에서) 다루게 되었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이러한 관점을 거부하는 기존의 철학자들과 일정 부분 대립하게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들이 파악한 인식과 인지의 차이를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철학에서는 흔히 인식을 다룰 때 앎의 개념에 집중한다. 즉, 이들이 주로 탐구하는 주제는 “앎으로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은 어떤 것인가?”, “인식 주체는 어떤 것을 앎으로 받아들이는가?”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Epistemology(인식론)를 간단히 Theory of Knowledge, 즉 앎에 대한 학문으로 부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이 철학에서 인식을 앎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철학에서 앎을 인식의 주요 탐구과제로 다루고 있으며, 그렇기에 인지과학자들이 초기에 철학에서의 인식을 “능동적 앎”을 뜻하는 것이라 해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그다지 선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철학과 인지과학에서의 인식의 차이를 정보처리 패러다임의 강조여부로 판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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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인지과학에서의 인지는, 앎뿐만 아니라, 다른 마음의 여러 가지 기능(가장 간단하게 분류하자면 전통적으로 마음의 세 가지 요소라 일컬어지는 지(智), 정(情), 의(意) - 사고, 감정, 의지의 개념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철학에서 인식론이 앎을 중점적으로 탐구하는 반면에, 인지과학에서는 앎을 탐구한기는 해도, 인지과학 전체의 탐구과제로 봤을 때는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지과학은 마음 전반을 탐구하고 있기 때문에 인식론처럼 '앎의 과학'(The Science of Intellect)으로 불리지 않고 '마음의 과학‘ (The science of minds)으로 불린다. 따라서 인지과학자들이 말하는 인식은, 인지의 한 부분집합이며, 인지과학자들은 기계의 마음(그 나름의 정보처리과정)을 탐구하고 설계하는데 있어 인식과 관련된 문제들 역시 부분적으로 탐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기계와 관련된 여러 인식의 문제들(인식과정, 인식여부, 인식가능성 등)은 인지과학의 탐구대상이자 인공지능 구현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집합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과연 인간과 기계의 인식이 동일한 것인가?”라는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위에 서술한대로, 인지과학자들은 인간과 기계의 인식은 동일할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의 인식체계를 분석하여 설계할 수 있다면 마땅히 인간의 인식체계 역시, 환원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한편에선, 인간의 수준이 기계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 것이며, 인간을 기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모욕적 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기계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은 우리의 편견일 뿐이며, 인간은 기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생체기계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보일 것이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정보처리과정에서 일어나는 선별과 해석, 또는 논리적 사고 등 사유의 정신은, 그저 두뇌의 신경망 활동에 불과하며 인간은 생물학적 기계이자 고도의 생체기능 컴퓨터(즉 두뇌)를 가진 로봇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인지과학자들이 (인식주체로서의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기에) 기술 발전의 차이일 뿐, 인간의 인식과 기계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며,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인간 역시도 언젠가는 인간처럼 인식하고 사유할 수 있는 기계를 창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왔다. 나 역시도, 정보처리 패러다임의 내용들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또, 인간이 기계보다 당연히 우월한 존재라는 (어찌 보면 편견일 수도 있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들을 무시할 수만 있다면 무리 없이 위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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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정보처리 패러다임의 내용과, 기계(인공지능)와 인간의 인식이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난관이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가 정말로 환원가능한 성질의 것이냐는 물음이다. 만약에, 인간과 기계 사이의 인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면, 이것은 인간의 사고와 마음이 근본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어떤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정보처리 패러다임으로는 인간의 사고를 온전하게 밝혀낼 수 없음을, 나아가 기계가 인간의 인식수준과 인식체계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인간의 정신 과정이나 '의식'이라고 하는 것들은 계산(computation) 가능한 성질의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인공지능 연구와, 인간과 기계의 인식이 동일하다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례로서 작용할 것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인지과학자들에게 있어 어째서 딥블루는 인공지능의 구현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가?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지능이라고 부를 것인가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이를테면 인간의 '지능'을 필요로 하는 일을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능을 필요로 하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정의한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감성과 같은 것 또한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

체스를 두는 것이 바로 이 분야에 들어간다. 대중적으로 컴퓨터가 체스를 둘 수 있는 것이 지능을 가진 증거인 듯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체스 머신은 매우 이른 시기에 인공지능 연구에서 제외되었다. 체스를 연산으로 처리하게 만드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수 하나를 더 내다보려면 평균적으로 26배의 연산이 더 필요해지기 때문에 아무리 현대의 컴퓨터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 해도 5~6수를 내다보는 것이 고작이며 수십 수를 내다보는 체스 기사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실제 체스 머신들은 지금까지의 체스 기보를 대량으로 입력한 후 그 체스 기보에서 같은 모양이 나온 적이 있는지를 하나하나 대조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다만, 뇌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체스실력이 뛰어난 선수일수록 판단력보다는 기억력에 의지해 수를 두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처음 자신의 수를 만들 때는 선수의 창의력이 발휘되지만, 자신만의 기보가 점차 확보됨에 따라, 창의력보다 기존의 기억하고 있던 수에 의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즉 컴퓨터의 체스행위, 혹은 딥블루의 체스행위는 이미 만들어진 기보전체를 정보로 받아들인 후, 기억력에(이 경우는 컴퓨터의 방대한 연산 작용에) 의존하여 그 기보를 재배열한 것에 불과하다. 즉 딥블루에게는 수를 창조하는 과정이 결여되어있었다. 인간의 체스행위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수를 ‘창조’해내는 것과 달리, 컴퓨터의 체스행위는 이미 창조된 수를 모두 정보로 받아들여 앞의 수와 대조하고 재배열하는 일련의 ‘계산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체스는 인간이 체스를 할 때 바탕이 되는 사고의 창조성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는 컴퓨터의 체스가 데이터 병렬처리를 빠른 속도로 해낼 수 있는 슈퍼컴퓨터의 성능 과시용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위의 칸트의 기획을 설명할 때도 지적한 바 있지만, 딥블루는 애초부터 체스의 주어진 수(정보들)를 입력하여 그를 토대로 체스를 둔 것일 뿐 학습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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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결국, 인공지능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학습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덧붙여 이 학습을 위한(귀납편향도 고려한) 알고리듬 설계 역시 인공지능 구현을 위해 필수적이다. 딥블루는 여기에서 실패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최근 각광받는 음성인식과 화자인식이다. 딥블루와 같은 인공지능의 선배들과는 달리, 음성 인식과 화자 인식, 또 최근의 여러 인식이 사용되는 기계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들이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학습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LA 타임즈>에서는 지진이 발생했을 때 사람이 아닌 퀘이크 봇이 알고리즘 기반의 기사 작성 프로그램으로 기사를 작성한다. 영국의 <가디언>은 사람의 편집 없이 알고리즘으로 종이신문을 발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수집된 데이터와 정보에 기초해 소프트웨어가 의미를 해석하고, 어울리는 도표와 이미지를 제안해 기사를 작성한다. 화자 인식(Speaker Recognition)은 입력 받은 음성 데이터를 미리 저장된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하여 화자가 누구인지 식별하고, 음성인식은 다양한 화자들이 발성한 음성들을 통계적으로 모델링하여 음향모델을 구성하며 말뭉치 수집을 통하여 언어모델을 구성한 후에, 언어 속에서 다양한 신호를 제어해 잡음을 없애고 키워드를 이해해 맥락을 분석한다. 이들은 어찌 보면 체스를 두는 것보다 훨씬 간단한 행위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여 스스로 학습한다는 점에서 딥블루보다 훨씬 고급의 인식기술을 발휘하고 있다.

한편 영화 Her에 나왔던 것처럼 대화 예측기술이 상황적 맥락을 파악해 매번 다른 대화가 가능하도록 만들고 심지어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는 것은 아직까진 SF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이미 실제로 상당부분 구현된 기술이다. 이를테면 MIT에서 개발한 ‘지보’가 인간의 음성과 이미지를 인식해 표정과 심리 상태를 분석하여 (학습을 통해)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 또는 이모스파크가 이미지를 이식하는 감정 프로파일 그래프를 통해 사람의 기분과 감정을 인식해 대화하는 것들은 이미 현실에서 구현되어 상용화를 기다리고 있다.

처음에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실제로 나는 그러한 반론에 대해(인간의 사고가 계산가능한 성질의 것인가?) 제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더 자세히는, “인간의 사고가 계산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로 봤을 때, 또 인류의 태동을 생각해 봤을 때, 인공지능이 학습능력을 통해 인간의 인식 영역에 다다르는 것은, 기술적으로 필연적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직관에 근거한 것이지만, 나를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게 만든 가장 중요한 근거는 과학자들이 미약하게나마 이미 기계에게 학습능력을 구현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 없었던 시절(즉 사고가 지극히 단순하던 시절), 인간이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내 생각에는) 그들의 학습능력에 있었다. 달리 생각하면, 인류가 뼈다귀를 들었던 유인원에서, 핵미사일을 쏠 수 있게 될 때까지의 역사 진보의 과정 역시, 그들의 학습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문자의 발명이후로, 인간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문자가 인간의 학습능력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기에 나는, 기계가 스스로 자료를 능동적으로 해석하게 될 수 있게 되었단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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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으로도, 그들 역시도 인간만큼이나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1.인지과학(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이정모 저, 2009)

2.http://blog.naver.com/metapsy/40171771072

(심리학 인지과학 마을- 성균관대학교 인지과학전공 이정모 교수 블로그)

3. 이정모 (1988a). 과학적 물음의 본질: 과학철학적 관점들과 그 시사점. 한국심리학회(편). 실험심리연구법총론-가설검정, 설계, 실험 및 분석. 성원사, 37-72.

4. 이정모 (1988b). Turing 기계와 마음: 마음은 기계인가? 심리학의 연구문제, 5권.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서울대학교 출판부.

5. 정보처리 패러다임의 특성 - 이 정 모 · 이 흥 철 (2002)

6. How the Mind Works- 2장: Computational Theory of Mind 발췌 - Stephen Pinker (2009)

7.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1950 네이버 영화 Her

8. http://blog.naver.com/gesbroad/60114515572 계산주의에 대한 설명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더글라스 호프스태더 : 인공지능의 전망 챕터

9. http://plato.stanford.edu/ 스탠포드 온라인 철학사전- 인지과학, 인식, 인지, 화자인식, 음성 인식등 인공지능과 관련된 전반적 개념들, 사례들을 찾아보는데 이용함

10. http://ko.wikipedia.org/wiki/%EB%94%A5_%EB%B8%94%EB%A3%A8 딥블루 위키백과, 사진은 구글링.

1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6027&cid=40942&categoryId=32845 인공지능 개념 인용 두산백과

12. 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1697&contents_id=83121 인공지능의 진화- 네이버 매거진 캐스트, 인공지능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데 사용

13. http://www.newspim.com/view.jsp?newsId=20141224000310 인공지능 지보

뉴스기사

14.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94810&memberNo=6525697&vType=VERTICAL 인공지능 이모스파크, 네이버 블로그 검색



15.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557884 인공지능 가디언 지, LA타임스 의 사례들




           


             

2019.10.30 17:04 현대 철학/분석철학


4장 컴퓨터로서의 마음 : 기계 기능주의 (machine functionalism)


1절 심신동일론 -> 다수실현 가능성에 의해 반론됨

유형동일론의 몰락 (생각보다 빨리 쇠퇴함)

기능주의의 등장 -> 물리적으로 다르나 하는 역할, 기능이 동일함(물질적 현상보다는 동일한 기능이 중요함)

심적 속성(mental property)에 대한 anti – reductionosm(반 환원주의) 입장이 강화

cf) Davison의 무법칙적 일원론 -> 환원주의적 입장을 약화

- 개별자 동일론

1. 다수실현 가능성과 심적인 것의 기능적 개념

ex) 천사 : 우리 세계에서 구현되기는 어려운 존재자 but 논리적인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님

물리적 실현 원리 (physical realization principle) -> 물리주의를 대변하는 입장

내용 만일 x가 정신적(심적) 속성 m을 가지고 있다면 x는 물리적이고 x는 m을 실현하는 물리적 속성 p를 가진다.

a) 마음이 존재하려면 물질 속에 있어야한다

b) 심적 속성의 다수실현 가능성을 남겨둠

ex) 고통

1) 행동주의 자극 -> ㅁ (특별한 언급이 없음) -> 반응 (행위)

input과 output만을 다룬다.

2) 심신동일론 (유형 물리주의)

고통 = c섬유의 작동

3) 기능주의

상자의 중요성을 인정 실재(real) 하다고 인정 + 인과적 (causal power)

자극 -> (고통) -> 반응

function 함수로 존재함

then 고통의 기능은 -> 조직손상의 발견 (고유한)

-> 생존에 기여, 이러한 기능이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님

2. 기능주의 vs 행동주의

공통점 : 심성(meantatily)의 본질의 자극과 반응

차이점 : 실재론적 입장(functionalism) vs 도구주의적 입장(행동주의)

a) 1) functionalism : 심적 상태를 인과력을 지닌 내적 상태로 봄

2) 도구주의적 입장 : 심적 상태를 행동으로만 설명할 뿐 인과력을 지닌 내적상태로 인정하지 않음

ex) 물에 녺음 : 수용성

1) 도구주의 : x는 물에 녹는다 = df 만일 x가 물에 들어가면, x는 녹는다.

2) 실재론 : x는 물에 녹는다 = df x가 s라는 내적 상태(속성)에 있으며, 그 상태 s는 x가 물에 들어가면 x를 녹게 한다.

-> 과정에 대한 설명 매개체에 대한 설명이 가능함

b) 행동주의 : 물리적 사건, 작극과 반응이 관찰가능한 행동으로 나와야함

기능주의 : input과 output에 따른 심적 상태가 들어가는 것을 인정 -> 행동이외의 상태(불쾌감, 괴로움)도 인정

3) 기능주의의 특징 (입장)

1. mental realism 심성 실재론 데카르트 이원론이 아님

-> 심적 상태(mental state)가 실재(real)한다는 존재론적 입장

2. holism 총체론 whole -> input과 output에 다른 심적 상태가 포함될 수 있음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심적 상태

총체론의 장점 : 행동주의가 설명하기 어려운 dba 법칙에 적용가능

dba desire belief action 욕구 믿음 행동

q) 이런 총체성을 순환적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4. 기계 기능주의 함수 = 마음

인과 -> 물리적 영역에서 발생 그래서 마음도 물리적

기계 (연산, 계산) 마음을 turing 기계로 보는 것 -> machine table(마음에 해당) 에 의한 연산(계산) 작용

마음을 계산 능력(함수)으로 보는 것

심성을 갖는다는 것은 적절한 복잡성을 가진 물리적으로 실현된 튜링기계

한 유기체가 심성을 갖기위한 필요충분조건

1) 그 유기체의 기계 서술(기계표)에 해당하는, 적절한 복잡성을 지닌 튜링기계가 존재

2) 유기체의 심적상태가 튜링기계의 내적 상태와 동일

V: 심리적 주체 s의 모든 가능한 인풋(입력, 공역)과 아웃풋(출력, 치역)을 나열

(list)

C: S의 인풋과 아웃풋의 연결 관계를 제시

(심리)

C를 통해서 심리의 발생 이유를 설명, 예측

f(x) = x +1 -> 내적 상태(마음) c

1 -> 2

2 -> 3

3 -> 4

나열된 것 : v

기계 기능주의 : 내적 상태 c = 기계표 = 함수가 중요

real

인과력 (a가 없으면 b가 없다)

왜 도구주의 보다 실재론을 선호?

1) 심성과 관련된 이론의 설명능력, 특히 인과적 설명능력을 갖기 위함

2) 심적 상태의 기저에 있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찾고자 함.

행동주의의 경우 input – o – output 가운데항은 설명되지도 못하고 실재하지도 않음

튜링테스트

1) 기계가 지적인 업무를 한에 있어서 인간만큼 할 수 있는지 테스트

2) 판정 : 기계가 질문자를 지속적으로 속일 수 있다면, 컴퓨터에게 인간과 유사한 지적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

3) 문제점

1번 심성이나 지적능력을 갖기 위해서 꼭 인간만큼의 능력을 가져야 하는가?

2번 감각적 기능은?

튜링테스트 통과는 인간과 유사한 지적능력의 충분조건임

튜링의 주장

두 시스템이 인풋-아웃풋에서 동일하다면 그들의 심적 지위도 동일하다

즉 한 시스템이 마음을 가짐을 인정하면, 다른 시스템도 마음을 가짐을 인정함

반론) 인간과 튜링기계의 인풋-아웃풋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같은 심성을 가진다고 보기 어려움

인풋-아웃풋의 연결은 단순한 연산작용만으로도 가능함 -> 내적상태에 대한 조건이 명시되어 있지 않음

존 설(john sealr)

중국어방 논증

중국인 <-> 방 ( 미국인) -> 중국어를 이해 못함 모든 아웃풋을 내는 룰북

대화중...

과연 중국어 방 안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ans 룸 시스템 자체가 이해하는 것 아닐까?

ans 시스템의 작동과 이해는 다른 영역이다.

2절 ‘대화함’로는 기계의 생각함이 해명되지 않는다.

튜링테스트는 인간과 기계가 원활한 대화를 할 수 있으면 그것이 기계가 생각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다시 말해, 대화함이 생각함의 기준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제 그 기계가 인간의 언어를 모방해서, 즉,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맥락으로부터 단어를 조합하는 것을 그저 분석해서, 혹은 배워서, 말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기계의 대화가 “분석”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것은 input이라는 명령어를 넣을 때 output을 산출하는,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와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이 보다 정교한 형태의 자판기라는 것은 분명해도, 내가 동전을 넣을 때마다 원하는 음료수가 나온다면, 즉, 내가 평소에 선호하는 음료수가 나온다면, 우리는 그 자판기가 적절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판기가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이는 직관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튜링테스트의 적절한 반례가 된다. 대화로부터 “생각함”이 나오기 위해서는 아무튼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따라서 튜링테스트를 좀 더 정교화해볼 수 있다.

기계가 생각하는 기계로 인정받기 위한 기준 iff)는

1) 인간과의 원활한 대화가 가능해야하며,

2) 대화가 기존의 대화를 분석하여 모방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대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가 대화의 본질에 대해 아직 정의내리지 않았기에, 이러한 기계에게서 무엇이 결여되어있는지에 대해 아직은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튜링테스트가 실질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면, 거기에는 생각함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니까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그것은 ‘생각함’이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대화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그것, 대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필요한 그것에 “생각함”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통찰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요소가 결여된 대화는 그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엄밀히 말하면 두 대화자 사이의 독백이라고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화가 생각함의 필요조건이 아니고, 오히려 생각함이 대화의 필요조건이며 대화의 본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올바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를 규정해야만 기계의 “생각함”이 드러날 수 있을 텐데, 생각함은 이 “올바로 이루어짐”에 이미 포함되어 있으므로, 생각함을 규정하는 데 있어 대화함을 넣는 것은 순환논증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대화를 배운다.”고 표현해도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스스로 배울 수 있으려면, “생각함”으로서 배워야하고, 이것은 결국 “생각함”이 무엇인가의 문제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배움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구현하려하는 그것(즉, 생각함)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직 서명도 되지 않은 수표를 사용하려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함이 대화랑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는 아직 몰라도, 대화함 그 자체는 생각함으로부터, 혹은 생각함과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앞서 우리가 해명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기계의 생각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기계의 대화함은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게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해명하고자 하는 문제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함으로부터 대화함이 나온다면, 우리는 결국 생각함이 무엇인가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대화함과 생각함이 그저 같이 놓여있는 것이라면, 대화함으로서는 생각함의 문제를 건드릴 수조차 없으니 말이다.

튜링테스트에 대해 이와 유사한 반박을 가한 철학자가 위에서 언급했던 존 설(John Searle)이다. 존 설은 그가 제시한 중국어 방 논변에서,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지능적이고’ 세련된 것일지라도 어떤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계산 기계는 심성과 동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시도한다. 논증은 다음과 같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일련의 기호들을 받으면 다른 기호들로 변형시켜 산출하는 규칙들이 작동하는 중국어 방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기호들은 중국어 표현이고, 규칙들은 의미에 따라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만 적용된다. 방은 중국어 표현들을 받으면 그에 적절한(마치 중국어를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이 방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대답들을 산출한다. 방에 들어간 사람은 중국어를 전혀 모르지만 이러한 형식적 규칙과 “통사론”에 따라 기호를 조작할 뿐이다. 그러나 밖에서 관찰했을 경우엔, 중국어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랑 정확히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중국어 방에 들어간 사람이 중국어를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러한 상황엔 중국어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의미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설의 반론의 핵심이다. 따라서 튜링테스트는 기계의 “생각함”을 증명하기에 부적절하며, 이에 따라 다음 장에서는 “생각함”의 의미를 명료화함으로써 “생각함”이 선험적 틀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를 보이고자 한다.


제 5장 인과적 구조로서의 마음: 인과론적 기능주의 <-> 기계 기능주의(인과력을 요청하지는 않음)


인과론적 기능주의 :인과적 역할을 통한 심성의 기능주의적 설명

-> 심적 상태 –인풋 아웃풋의 관계로 설명 피부조작 손상 -> 고통(인과력) -> 찡그림, 피함, 불쾌감

주의 1)다른 심적 상태가 포함될 수 있음 무한후퇴의 우려 -> 총체론을 택함으로서 해결

2)기계기능주의는 인과력이 반드시 포함될 필요는 없음

1) ramsey-rewis의 방법

ex) 고통에 대한 이론 t : if then

t) 임의의 x에 대해서 만일 x의 조직이 손상되고 x가 정신이 있다면(심적인 현상m1) x는 고통 속에 있다. m2

-> 만일 x가 잠들지 않은 상태라면, x는 정신이 있는(m1) 경향이 있다.

-> 만일 x가 고통 속에 있다면, x는 움츠리고 신음하며, 괴로운 상태에 있다. m3

중재 일반화(erisetentially generalizing) 램지화

Tr :

-만일 x의 조직이 손상되고, x가 M1의 상태에 있다면, x 는 M2의 상태에 있다.

-만일 x가 잠들지 않은 상태라면, x 는 M1의 경향을 가진다.

-만일 x가 M2의 상태에 있다면, x는 움츠리고 징그리며 M3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T -> Tr의 존재양화

ex) 문재인은 한국사람이다. -> 어떤 한국사람이 있다.

Hm

---------

some x Hx

-> 논리적 관계도 축약( 주장이 약화됨)

T – Tr은 물리적 측면에서는 동일한 내용

ex) x가 고통속에 있다 =df

고통에 대한 이론 T에 대해,

some x M1 M2 M3 [T(M1,M2,M3)^x는 M2의 상태이다.] -> 고통에 대한 물리적 설명이 가능함

우리의 관심은 T(고통 대한 이론 or 심적 상태에 대한 이론)

2) 기제에 있는 심리이론의 선택 1)상식적 심리학 2) 과학적 심리학

1)상식적 심리학 : 일반인이 공유하는 심적 개념을 기반

2)과학적 심리학 : 상식적 심리학이 지닌 오류가능성을 우리 과학이론이 심적 상태와 물리적 상태 사이의 인과적 법칙적 관계를 탐구

문제점

1) 상식적 심리학의 경우 : 모든 심리개념과 관련된 부분이 모두 참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ex) 고통 : 조직의 손상 + 정신이 있음 -> 불쾌감 (전장을 수행하는 군인의 경우 예외가 가능)

2) 과학적 심리학 : 이론들 사이의 갈등

과학 이론의 갈등 -> 심리적 개념이 작동

T Tr

근거

Tr1 -> T1

Tr2 -> T2

상충되지 않음

->심리적 개념이 상이해질 위험, 의사소통이 가능한가?

절충안)상식적 +과학적 심리학

ex) 통속의 뇌 vs 인간

인간과 다른 인풋을 가지지만 인간과 정확하게 같은 내적 상태를 가질 수 있다고 가정

(반론의 핵심) 기능주의에서 얘기하는 인풋과 아웃풋만으로 심적상태(심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심적 속성의 중요한 요소인 감각질(qualia)을 설명하기 어렵다.

3) 기능적 속성, 선언적 속성, 인과력

심적 상태(M)는 인과적 역할(인풋-아웃풋)

물리적으로 실현하는 물리적 상태(Q1,Q2,Q3)

인간, 문어, 화성인 등의 물리적 기반

M 은 Q1과 같지 않다.

M = Q1 V Q2 V Q3

물리적 속성

문제) Q1 Q2 Q3의 물리적 상태는 매우 상이함

-> 기능주의 입장에서 과연 이러한 서로 다른 물리적 기반으로부터 통일성이 있는 이론을 만들 수 있을까? *과학이론은 통일성을 지닌 규칙을 발견하는 작업

1. 상식적으로 우리는 심적속성 M이 선언적 속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음

2. 설령 우리의 상식이 틀려서 심적 속성이 선언적이라 하더라도 이는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에 어렵다

*인과력(Causal power)

주의:인과적 역할과는 다름 -> (뜨거운 물에 들어감 ->나오려고함)

인과력이란 실제로 인풋과 아웃풋을 야기시키는 힘이다.

o 뜨거운 물 -> (인간의 신경계를 자극) -> 몸이 불편함을 느낌 -> 나오려고 함

o 뜨거운 물 -> (문어의 신경계를 자극) -> 문어의 몸이 불편함을 느낌 ->나오려고함

인간의 신경계는 문어의 신경계와 같지 않음

M : P1 P2 P3 등에 의해서 실현, P1 P2 P3가 가지는 인과적 힘(인과력)은 다른 것임

정신이 인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 -> But 과학이 기대하는 통일성(법칙성)을 확보하기 어려움->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적절한가?

4) 개념과 속성

개념(concept) : 언어적 인위적

속성 (property) : 세계를 구성하는 부분, 인과가 성립하는 차원

*인과적 역할(관계) vs 인과력

인풋-아웃풋 구체적(물리적으로 실현된 상태)으로 A라는 사건 B사건을 야기 A CAUSE B

물리적 기반이 다를 떄 인과적 역할을 유사하지만 인과력은 다를 수 있음

정신인과, 심적 인과

Mental to physical

physical to mental

mental to mental

3) 물리주의로서의 기능주의

기계 기능주의 :기계표(기계 서술)가 물리적으로 실현되기를 요구

인과론적 기능주의: 그자체로는 물리주의를 함축하지 않음(물론 물리적인 설명으로 향하고는 있음) (램지-루이스 방법은 그 자체가 물리주의적이여야만 한다고 요구하지는 않음)

P

램지화된 심리이론 Tr 의 존재함이 확인되는 상태는 물리적 상태이다

Tr의 변항인 심리상태 M1 M2 M3가 물리적 상태의 치역을 가즌ㄴ다.

심리적 상태 치역 물리적 상태 실험

M1 ----------> P1

M2 ----------> P2

M3 ----------> P3

반론과 난점

1. 감각질 (Qualia –qualitative state) : 특정한 (독특한) 질적인 속성(특성), 현상적 속성

Q) 모든 고통이 공유하는, 그것 때문에 고통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이 무엇?

ans) 아픈 느낌

a) 고통과 같은 심적상태를 기능(함수)으로 설명하려는 기능주의의 입장에서는 감각질과 같은 질적상태(느낌)을 설명할 방법이 없음

고통과 같은 심적현상을 인과적 역할로 설명하려는 입장은 반론에 부딪침

b) 뒤바뀐 감각질 qualia inversion. inverted spectrum

가 . 빨강 -1- 빨강

파랑 –2- 파랑

나. 빨강-2-빨강

파랑-2-파랑

c) 감각질이 없는 경우(absent qualia)

대표적으로 좀비 <--------------일상적으로 말하는 좀비의 의미와 상이함

심리철학에서의 의미 다른 사람과 인풋-아웃풋은 동일한데 감각질을 가지지 않은 경우

ans) 같은 물리적 기반(ex 사람의 신경계 + 감각기능)이 동일하면 같은 감각질을 가질 것이다

재반박) 1. 인간과 화성인의 물리적 기반이 다르다면 같은 기능을 하는 다른 감각질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임

2, 감각질의 문제제기가 바로 이 대답을 문제삼는 것. 위의 반론은 감각질이 물리적 기반에 수반된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이 전제가 바로 감각질을 반론으로 제기하는 사람이 공격하는 지점 – 선결문제의 오류임

2. Cross wired brain 혼선된 두뇌

일종의 감각질 뒤바뀜

가) 압정을 밟음 –pain box- 움츠리고 아야 소리를 냄

모기가 물음 –itch box- 가려운 곳을 긁음

나) 압정을 밟음 –itch box-움츠리고 아야 소리를 냄

모기가 물음 –pain box- 가려운 곳을 긁음

제 6장 정신인과 (mental causation)

-mental to physical causation 심물인과

ex) 내가 무언가를 쓰기를 원함(want) -cause> 칠판에 무언가 씌어짐

-mental to mental causation 물심인과

ex)불에 손이 닿음 –cause> 손의 통증

-mental to mental causation(심심인과)

ex) 헤어진 그녀에 대한 생각 -> 마음을 아프게함

(1) 행위와 심적인과 (mental to physical causation)

[DBA] s가 무언가를 원하고 D , A를 행하는 것이 원하는데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면 B s는 A를 행할 것이다.

Desire Belief Action

-> 인과에 대한 설명 : DBA에서 원함과 믿음이 행위의 원인

-> 이런 설명이 심물인과에 적용됨(DBA를 기반으로 하는)

(2) 심적인과 심적 실재론 그리고 부수 현상론

-Physical to Mental(우리가 세상을 알게되는 중요한 요소) causation : 우리의 감각경험을 통해서 일어남

-mental to mental causation :추론

태양계의 행성의 수는 짝수이다.

태양계는 행성이 8개 있다

8은 짝수이다

-부수현상론(epi Phenomenalism)

ex) 자동차의 움직임 vs 그림자의 움직임

자동차가 움직이는 건 인과에 의한 것이지만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엔 인과가 없다. 부수된다.

심적속성은 그림자처럼 인과력을 가질 수 없다.(인과의 원인이 될 수 없다.)

-> 즉 심적인과를 아예 부정

mental to physical mental to mental을 부정

ex) 통증을 야기하는 물리적 상태 –cause> 약을 먹고자 하는 욕구에 해당하는 물리적 상태

cause 통증(심적상태) cause 약을 먹고싶어하는 욕구

둘 사이엔 인과력 없음

Alexander : 심성이 인과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쓸모가 없기에 실제로 인정할 필요가 없음 (부수 현상론에 대한 반론)

3) 데카르트의 상호 작용론 문제점 비공간적 비물질적인 실체가 어떻게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에 영향(인과력)을 줄 수 있을까?

4) 심물법칙(physcophysicae law) 과 무법칙적 일원론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부정하면 mental causation의 설명은 상대적으로 쉬워짐

정신적 실체와 물리적 실체 사이의 인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 사이의 인과를 설명하면됨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과를 법칙으로 여김

Daned Davidson : 무법칙적 일원론 (주의) Davidson 부정하는 것은 인과도 아니고, 인과법칙도 아니고, 심물인과법칙임

상식선에서(D의 주장) 심물법칙을 부정하는 근거

1) 명제적 태도와 같은 심적상태(고통 등은 제외)

EX)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이다

S1 S2 S3 등의 인식 주체가 P를 믿는 상태는 심적으로 동일 -> 과연 P를 믿는 물리적 상태가 과연 동일할까?

2) 퍼트넘 쌍둥이지구

자작나무와 너도밤나무

대부분의 사람이 구분을 못함

P자작나무는 어린이 대공원에도 있다

P에 대한 믿음 -> 일종의 심리상태

쌍둥이 지구의 예 쌍둥이 지구는 우리의 지구와 모든 것이 같으나 단, 그곳에서 ‘자작나무’는 너도밤나무를 지시하고 ‘너도밤나무’는 자작나무를 지시한다.

지구와 S1와 쌍지구의 S2가 P를 믿는 심적상태는 정확하게 동일 -> 믿음의 내용(지시체가 다르기에) 달라지는 경우

S1의 심적상태(지구) -> 믿음의 내용이 자작나무

S2의 심적상태(쌍지구) -> 믿음의 내용이 너도밤나무

직접지시론 Narrow content wide content

Davidson 논증의 전제 : 믿음이나 욕구같은 의도적(명제적) 상태(내적상태)는 합리성과 정합성을 따름

ex) 그 사람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해 -> 모순으로 받아들이지 않음,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성향

ex) 서울에서 인천사이가 50키로미터 미만이다

-> 서울에서 인천사이는 100키로미터 미만이다

주의) 데이비슨이 정신인과 부정하지 하지 않음 인과법칙을 부정하지 않음

심 – 물

법칙이 작용하지 않음

합리성과 정합성은 심의 영역인데 물리적상태가 있어야 심물법칙이 생김

그런데 물리세계에는 합리성과 정합성이라는 물리적 상태를 관찰할 수 없으며 따라서 법칙이 되지 않음

심적 사건 m –야기> 물리적 사건 p

->c -> -> e 물리적 속성

야기하지 않으며

심물법칙 x

또한 심적 사건으로부터 물리적 사건 사이엔 법칙이 없음

물리적 속성(심적속성) <- 심적상태나 심적 속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

심적인과 “속성부수 인과론”

물리적 속성과 함께 심적 속성도 가짐

Davidson의 무법칙적 일원론

정신인과는 인정

인과는 법칙을 요구한다는 것도 인정, 하지만 정신 인과가 심물법칙을 요구함은 부정 무법칙적임

모든 사건은 물리적 사건이다.(정신적 사건도 포함) ->일원론 :물리적 사건의 일부는 정신적 사건

M(심적 사건)인 동시에 물리적 사건 -> P물리적 사건

법칙관계

물리적 속성(Q) <---------------> 물리적 속성(P)

정신적 속성(M) <------------X---------> 물리적 속성 P

심물법칙 부정

근거: 심적 사건은 합리적이고 정합적이나 물적 사건은 그렇지 않다.

심적사건은 물리적 속성과 정신적 속성을 지닌다

인과의 폐쇄성

5)속성부수 현상론과 심적 속성의 인과적 도전

고전적 부수현상론 : 정신인과를 부정

고통 <-야기------ 신경상태(물리적상태)

ㄴ-------> 움츠림

VS

속성부수현상론

정신인과는 인정

단 심적 속성은 인과력이 없음

물리적 상태가 인과의 원인 (인과력을 가정)이 될 수 있음.

to Davidson

Q) 심적 속성의 인과력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정신인과는 인정하는가?

1. 데이빗슨의 심적 무법칙성을 부정

2. d가 말하는 인과법칙 개념이 유일한 설명방식이 아님을 밝히고, 무법칙성을 인정하면서, 심적속성이 인과적 효력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설명

6) 반사실적 조건문이 도움이 될까? counter factual

c가 e를 야기한다

-> 만일 c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e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반사실적 조건문을 설명(해설)하는 두 가지 방식

1. 법칙 추론적 접근법

만일 p가 발생 x then q도 발생 x

-> q와 p가 법칙적으로 연결

2. 가능세계 접근법 -> 양상가능성

-> p가 발생하지 않을 가장 가까운 가능세계로 가서 q의 t,f를 판정

ex) 성냥을 켜면, 불이 붙는다.

현실: 성냥을 키지 않은 상태

현실에 가까움 – w1 성냥을 켜고, 성냥이 마른 상태이고 산소가 충분히 있으면, 불이 붙는다.

w2 성냥을 켜고, 성냥이 마른 상태이고 산소가 충분히 있으면, 불이 붙지 않는다.

7) 심적 상태의 외재성

프로그램 :0과 1의 조합 -> 원인 -> 결과

어떤 내용 의미인지는 x

but, 인간의 마음은 인풋-아웃풋에서 내부적 고리

ex) 갈증이 난다. -인과> 물병에 손을 내민다

cf 쌍둥이 지구의 예 : 심적 상태의 내용은 그 마음을 가지는 사람의 내적 상태(물리적 상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님

meaning ain’t in the head

내 신체 속, 머리 속에 있는 신경 상태는 정확히 동일하면서 서로 다른 내용의 믿음을 가질 수 있다. but 인과는 머릿속에 있는 물리적(신경계)의 상태에 의해서 이루어짐

-> 행동을 야기하는 심적 상태는 내적인 반면에 심적 상태의 내용은 외적인 부분을 포함

-> 외적 심적 상태의 내용이 어떻게 행동을 야기하는 인과에서 유도할 수 있을까?

내적인 것만으로는 심적 설명 불가

8) 물리적 영역의 인과적 폐쇄성

x가 물리적 사건이고, y가 x의 원인이나 결과라면 y 역시 물리적 사건이어야 함

예외 ) 데카르트의 이원론 : 물질 정신이 각각 실체

문제 : 정신인과 (mental causation)

-> 정신적 영역이 물리적 인과에 하는 역할이 있다.

정신인과는 물리적 영역으로 환원되어 설명해야 함

-> 환원주의: 물리주의자들 중에서도 환원되기 어려운 심적속성이 있음을 인정 ex) 감각질, 믿음의 내용

정신인과의 문제가 해결해야하는 난점들 : 무법칙성, 외재성, 폐쇄성

9) 심신수반과 설명적 배제

기능주의자 : 심적 속성(거의 물리적 속성으로 여겨짐)이 물리적인 것에 의해 실현

2절 수반 의존 최소 물리주의

1.심신 수반- 모든 물리적 속성들이 같은 두 사물(대상, 사건, 유기체, 사람 등)들이 심적 속성에서도 다를 수 없다면 심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에 수반한다. 물리적 식별 불가능성은 심리적 식별 불가능성을 필함(entail)한다. 물리적 차이가 없이는 심적 차이도 없다.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2.다시 말해 물리적으로 같은 상태에 있을 때(무엇의 같음인지는 해명되어야 한다.) 심적으로 차이가 날 수는 없다. 반대로 심적으로 동일한 상태(예를 들면 고통)에 있더라도 물리적으로 차이날 수는 있다.

3.수반(supervenience) :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 df A와 B가 물리적 측면에서 모두 같으면 A와 B가 물리적 측면에서 모두 같으면 A와 B의 심적(심리적, 정신적) 측면에서도 차이가 없다 – 사실 / 있을 수 없다 – 필연성 물리적 식별 불가능성은 심리적 식별불가능성을 필함(entail)한다.

4.물리적(A=B) -> 정신적(A=B) 심적 속성을 가진 주체의 물리적 측면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심적 현상이 모두 다르고 어떤 이름을 공유하고 있을 뿐 /같은 event를 다른 조건을 가지고 받아들임 개체/ 타입에서 타입 측면의 접근

5.만일 수반이론이 참이라면,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맞다고 해도 영혼은 많아야 하나만 존재 영혼: 물리적 속성이 없음 영혼 1의 물리적 속성 : 공집합 영혼 2의 물리적 속성: 공집합 공집합은 물리적 측면 -> 모든 영혼은 동일 *일반적으로 수반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반데카르트적(실체이원론 부정) 오직 하나의 영혼만 있다 혹은 질적으로 구별되는 영혼은 하나만 있을 수 있다.

6.반 데카르트 원리 – 순전히 심적인 존재(영혼)란 있을 수 없다. 즉 물리적 속성을 갖지 않고서는, 따라서 물체가 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심적 속성을 가질 수 없다.

7. cf) 심신결정론 : 물질이 정신을 결정 ->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의해서 결정됨 심신 수반론 함축 심신 결정론 혹은 의존론은 심적인 것에 대한 물리적인 것의 존재론적인 우월성 내지는 우선성을 명시적으로 긍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심적인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둠

8. 심물 수반, 반-데카르트 원리, 심물 의존이 최소 물리주의를 규정한다. 이 원리를 받아들이면 최소의 물리주의자라 할 수 있고, 이 원리 중 하나 이상을 거부하면 물리주의자가 아니라 할 수 있다. 이 원리들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이 지닌 모든 속성이 물리적 속성이거나 아니면 그 대상의 물리적 속성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면서, 물리적이지 않은 것이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더 강한 형태의 환원물리주의도 있으므로, 이를 최소 물리주의라 부른다.

*수반에 관한 기능주의자의 입장

물리적으로 같은 유기체는 심적 속성도 같다

*수반에 관한 물리주의자의 입장

1. M심적속성이 N신경체계에 수반된다면, N은 M의 충분조건(법칙관계)

2. M은 N1 N2 N3등에 의해서 다양하게 실현될 수 있음

3. M은 N1 N2 N3 와 모두 각각 다르다

Q) 수반이 정신인과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즉, 수반이 심신인과를 허용할 만큼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를 가깝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환원만 피할 수 있는가?

1. 상식

통증 ----Cause----> 움츠림

;

; 수반

;

신경상태 M cause

2.문제

1) overdetermination (과잉인과)

부수현상론

고통

; 움츠림

;

신경상태N

문제) 정신인과를 배제

설명적 배제

2)환원주의

통증 = 신경상태 N ----Cause---> 움츠림

문제) 다수 실현가능성

거시 수온의 상승 -----------> 물이 끓음

주전자에 수반 수반

열을 가함

미시 물분자의 활동이 빨라짐----------> 물분자가 공기중에 방출

3)수반적 인과 모델

거시적 차원/ 통증 ---------Cause----------> 움츠림

수반적

수반 야기 수반

미시적 차원/ 신경상태----------Cause--------> 근육수축



           


             

2015년 2학기 언어철학 레포트



설명(說明)과 기술(記述)

- 의미론(論)에 대한 철학적 명료화 시도


서론

철학의 목표는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과학과 철학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물음에 대한 답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진리로의 도정이라는 점에서) 그러나 과학과 철학 사이의 이러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또, 과학적 탐구가 궁극적으로 철학의 문제들 역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철학은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물론 연역과 귀납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실로 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가질 수 있는 오해 중 하나는,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양도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오해는 철학의 문제가 과학의 문제와 동일한 종류의 것이며, 기존의 철학자들이 과학과 같은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 까닭은 단순히 방법론의 차이에 있다는 생각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과학과 철학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것에서 벗어나, 과학자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한 채 여전히 철학자들을 괴롭히는 가망 없어 보이는 물음들에 대해 고찰해봐야 할 것이다.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철학의 목표는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질문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애초에 무엇을 질문으로 여겨왔는가? 우리가 설명을 시도하려는 일련의 질문들은 얼마나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가? 우리는 물론 지금까지 발생한 철학적 혼란들은 단순히 그것에 대해 충분하게 숙고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이전에, 단순히 그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를 먼저 따져봐야 되지 않는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내가 ‘시간’에 대해 설명하려 들지 않을 때에,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내가 설명을 시도하면서부터, 모든 것은 혼란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심오함에 아연해지기 전에, 나는 그 단어가 올바른 설명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한다. <“......철학자들은 ‘실재’의 의미에 플라톤이 도달한 것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 있지 않다......” 얼마나 이상한 상황인가. 플라톤이 도대체 그렇게 멀리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또는, 우리가 그리 멀리 나아갈 수가 없었다는 것은! 그건 플라톤이 그렇게 명민하였기 때문인가?>¹ 우리는 철학이 설명을 제공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나는 앞서 철학과 과학의 동일한 목표가 세계를 바로 보는 것에 있다고 했지만, 이것은 두 물음의 형식에 관한 고찰일 뿐,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설명하기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따라서 나는 그 차이를 일단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좀 더 정교하게 드러내고 싶은데, “과학이 세계를 보는 것 그 자체에 집중하는 반면에, 철학은 세계를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과학의 목표가 설명을 통해 실재로 접근해나간다면, 철학적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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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와 가치 MS 111 133: 1931.8.24

는 순전히 기술적이다. 과학이 명제들을 생산하고, 지식을 늘릴 때 철학은 그러한 것을 전혀 하지 않는다. 철학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어떻게 길을 잘못 걸어왔는지 고찰하고, 오류를 교정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철학이 사유에 한계를 그음으로써 문제에 대답하려고 할 때, 철학자들의 지향점이 모두 한계 너머의 초월에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모든 철학은 나름의 물음에 답하려고 시도하는 동시에, 그 물음이 얼마나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있는가를 깨닫는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내가 파악한 이 차이가 과연 옳고 그른가를 따지기 전에, 이것이 두 개의 전제 위에 서있으며, 하나의 난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겠다.

먼저, 위와 같은 접근은 철학적 물음이 사실 아무런 물음도 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즉 우리가 추구하던 물음이 애초에 성립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물음은 단순히 우리가 언어의 형식(논리)을 오해한 결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대답 없는 물음, 즉 설명을 제공할 수 없는 물음은 전혀 물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6.5 답이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을 때에는 언제나 물음도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답 없는 수수께끼 물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물음이 제대로 성립할 수 있다면 그 물음에 대한 답도 가능하다.

6.51 ...왜냐하면 의심은 물음으로 표현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의심일 수 있고, 물음은 답이 있을 때에만 물음일 수 있으며, 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을 때에만 실제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6.521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그 문제가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에서 깨달을 수 있다.²

나는 물음이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앞에서도 암시하고 있다시피 실로 그러한 물음은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탐구할 수 있는 철학적 문제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철학자들과는 정반대의 접근법이며, 비유하자면 산맥의 반대편에서 길을 뚫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기존의 철학적 탐구 방식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어떠한 논거도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러셀(B. Russel)이 증명한 것처럼, 명제의 “겉보기 논리적 형식”은 그 명제의 “진짜 논리적 형식”일 필요가 없다.³ 그러한 차이는 일상 언어 속에 산재해있으며, 그렇기에 철학적 명제가 성립, 탐구되는 방식도 이러한 의심의 분석대상이 되는 것이다.(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떠올려보자. 골드바흐의 추측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증명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추측이 실로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모순되지 않고, 존재 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모순되지 않는다면, 즉 수학적으로 증명될 수도 없고 반증 될 수도 없다면, 그 때 수학자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할까?⁴이 지점에서 수학자들이 느끼는 혼란은 철학자들이 느끼는 것과 동류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철학이 메타적이라는 사실, 즉 스스로에게도 역시 메타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 점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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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6.5, 6.51, 6.521

3.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4.0031

많은 수의 대륙철학자들은, 언어가 하나의 의미만을 전달한다는 입장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언어에 대한 논리적 분석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심오한 사유의 존재를 당연시 여기곤 한다. “언어로 도저히 담아내기 어려운 심오한 사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러한 사유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하여, 상징이나 알레고리 등을 활용하거나, 새로운 종류의 단어를 조합해내거나, 아예 일부로 모호한 문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이 전제하는 명료화될 수 없는 심오한 사유는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이러한 언어에 대한 불신은 거의 전적으로, 그들의 직관에만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저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단어들을 가지고 무작위로 구성한, 거짓된 심오한 문장을 만들어내기는 쉽다. 심지어는 버튼만 누르면 논문에 자주 쓰이는 단어들이 무작위로 조합되어, 하나의 논문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심오해 보이는 어떤 문장은, 사실 전혀 심오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저 직관으로만 정당화된 이 믿음은 거짓된 심오함과 진짜 심오함, 명료화될 수 있는 심오함과 명료화될 수 없는 심오함 등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그러니까 언어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사유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가?

비트겐슈타인 사유의 핵심 중 하나는, 어떤 종류의 생각들(윤리나 미학)은 본질적으로 말해질 수 없으며, 그것의 심오함은 단지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직관이나 신비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기 사유에 나타나는 논리적 형식의 분석과 후기 사유에서 고찰되는 삶의 형식에 대한 철학함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메타적으로 수행하는 다른 학문에 대한 정당화가, 무엇보다 철학 그 자신에게 먼저 이루어져야하는 것으로 보았다. 철학에 대한 메타 철학, 이것이 철학적 명제에 대한 의심으로 나타나는 것이다.(그렇기에 철학적 명료화가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종류의 철학은 순전히 기술적이어야 될 것이다. 즉, 이러한 방식은 항상 반-이론적이고, 누군가가 사태에 대해 제공하려는 설명이 언제나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방향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 그것이 실제로 그러함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는 마치 철학자들이 그들이 탐구하는 주제의 최종적인 분석-진리를 목표로 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앞에서 나온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고찰해보자. 철학자는 “시간”이라는 관념에 있어 하나의 단일한 설명을 제공하고자 한다. 전통적인 철학은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일반적이고, 이상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물리학적 세계관 속에서 정의된 ‘시간’과 메타-분석적으로 ‘시간’을 정의하려는 철학적 시도 사이의 간극) 그러나 이러한 정의가 갖는 난점 중 하나는 시간의 정의에 대한 설명을 그 사용에 있어 고찰하기보다 조건과 결합의 알고리즘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수정체와 같이 깨지기 쉬운 불안정한 지반위에 올려두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념은 여전히, 설명이 분석을 통해 일상 언어의 범주를 완벽하게 포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언어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해서는 외면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흐름은 유사와 같아, 거기에 집착할수록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실로 물음이 가진 형식상의 동일성은 마치 과학을 탐구하듯이 철학을 탐구하도록 철학자를 이끈다. “앎이란 무엇인가?” “실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은 적어도 질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과 같은 방식으로 탐구할 수 있는 무언가라는 믿음을 철학자에게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대체 이러한 질문들이 주제로 삼고 있는 단어들은 얼마나 상이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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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postolos Doxiadis, Uncle Petors and Goldbach's Conjecture

이를테면 앎에 대한 정의를 우리가 아무리 자세하게 분석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실제의 언어 사용에 대해 고찰할 때,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어그러지지 않는가? 그러한 언어 놀

이가 실제로 벌어지는(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을 고찰한다면, 이러한 불합리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P를 알기 위해서는 P가 참이어야한다.” 그러나 내가 P를 안다고 말할 때 P가 그러함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어떻게 우리가 오류를 전혀 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런 앎의 정의에 따르자면 내가 “알았었다”고 말하는 모든 상황은 단순한 착각이나 오류의 범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참이 아니었기에. 그러나 이제, 이를테면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뇌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냐고” 주장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실제로 밝혀진다면(나의 두개골을 절제해보는 상황), “나는 내가 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었다. 지금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저런 상황을 상상할 수 있고, 내가 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가 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항상 의심해야 될까?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앎’이라는 개념은 전혀 사용될 수 없다.(아무런 정당화 없이 시작되는 의심) 이는 우리가 전제했던 또 하나의 오류, 이상 언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성하려는 언어는, 논리적으로 완전한 형태의 이상적인 언어이며, 일상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이러한 완전한 범주를 벗어난, 하나의 오류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일반성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왜곡된 설명과, 니체(Nietzsche)가 지적했던 서양철학의 유구한 질병- 피안과 차안을 나눔으로써 저 피안을 참된 것으로, 차안을 열등한 것으로 바라보는 지고한 플라톤(Plato)의 망령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명제의 일반 형식은 다음과 같다 : 사정이 이러이러하다” <이것이 우리들이 자신에게 무수히 되풀이하는 그런 종류의 문장이다. 우리들은 되풀이해서 사물의 본성을 뒤쫓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들은 단지 사물의 본성을 고찰하는 형식을 따라서 가고 있을 뿐이다.>말하자면, 우리가 전제하는 이상의 언어는, 쉴 새 없이 변형되며 뛰어다니는 언어의 사용을 하나의 틀 안에 끼어놓으려는 행위일 텐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것이 어디까지나 설명의 본성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의 설명이 실제 언어에 맞춰 틀을 구성해야할 노릇이지 그 반대는 기만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난점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의 대안 철학이 취하고 있는 전략은 무엇인가?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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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e Gettier problem(Edmund Gettier,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에 나오는 앎의 전통적 정의를 지칭한다. “1. P가 참이다 2. S가 P를 믿는다. 3. P에 대한 S의 믿음이 정당화 된다.”

6.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114

7. 바디우(Alain Badiou)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론과 체계에 대한) 반-철학으로, 로티(Richard Rorty)는 (진리의 포기라는 측면에서) 교화철학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들의 정의는 바디우가 『철학적 탐구』의 기술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그는 애초에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논의를 『논고』로 한정한다.), 또 로티가 메타-설명에서 비롯되는 규범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치 못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난제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일반적 설명의 욕구)가 철학자를 잘못된 길로 이끈다는 점에서 “대상에 대한 이해와 그들이 보려고 원하는 것 사이의 대립”을 기술(단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의지의 저항이 극복되어야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류로부터 그것을 진리로 옮김으로써, 삶의 형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규범적 요소를 탐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진리 탐구 자체를 포기한 것 역시 아니다.

위에서 말했던 하나의 난점과 직결되는 것으로, 교정-철학 혹은 치료-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일반성(설명)에 대한 갈망을 철학자로 하여금 단념해야할 어떤 것으로 여기게끔 만들어 그를 철학적 혼란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다.(그리고 이것이 철학함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공하고자 하는 설명이 차지하고자 했던 자리는 오로지 기술로만 대체되어야한다. 다시 말해, 교정은 의미의 차원에서 “의심과, 오류, 앎, 참” 등의 개념을 분석하는 것이 아닌,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는 것을 단순히 기술하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일상의 언어가 우리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할 일은 그 언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조용히 추적함으로써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정 철학의 방향은 다음과 같다 : 누군가 철학에서 이론을 수립할 때, 그 이론이 참이나 거짓이 아니라, 성립할 수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이후의 분석(실은 기술)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물론 이것은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물음이 사라지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철학적 혼란의 제거) 나는 이것을 보이고자 한다.

1

문제를 고찰해보자.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법한 어떤 문제가 있다. 홍길동 씨는 하나의 사물에 두 가지 다른 이름이 붙어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일한 대상에 대한 모순된 믿음을 동시에 형성하고 있다.

그는 “나성은 재미있는 도시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 믿음은 친구의 경험담이라는 근거로 인해 뒷받침된다.

“LA는 재미있는 도시가 아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 믿음은 본인의 경험이라는 근거로 인해 뒷받침된다.

사정은, ‘LA’와 ‘나성’은 모두 동일한 도시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인식주체인 홍길동은 “LA”와 “나성”이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LA”와 “나성”은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그런 방식으로 항상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홍길동은 모순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상황은, 어떤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홍길동이 'LA'와 ‘나성’이라는 기호를 가지고 정말 모순된 믿음을 형성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 그가 그 두 가지 기호로 서로 다른 두 도시를 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간편하기 때문이다. “홍길동이 이후에 LA가 나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내가 말했던 그 도시가 바로 이 곳이었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동일한 대상에 대해 정반대되는 믿음을 형성한다고 해도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것을 하나의 오해로 여기고 싶은가? 그러니까 나는 홍길동 씨가 모순으로 나아간 과정을 알지만, 그 과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결론조차도. 홍길동 씨는 어째서 자신의 모순에 대해 혼란스러워하지 않는가? <“LA”가 “나성”과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홍길동은 LA(=나성)에 대해 시간상으로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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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치료로서의 철학: <철학에서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 파리에게 파리통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보여 주는 것.>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309

에는 친구의 경험담을 근거로 하여 “LA는 재미있는 도시다.”라는 믿음을 형성한 것이고, 후에는 본인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 “LA는 재미없는 도시다.”라는 믿음을 형성하고, 친구의 경험담보다 강한 근거인 본인의 경험을 믿음의 근거로 채택하여 앞의 믿음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렴, 우리는 굳이 이론을 구성하지 않더라도 이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아니면 아예 이 자리엔 전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을까? 왜냐하면 홍길동 씨가 모순으로 나아간 과정을 기술하기만 해도, 우리는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철학적 난제로 여기지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이론에 대한 반례로 기능한다.

그러니까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문제가 이론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지 않냐는 점이다. 물론 그러한 일반 이론이 완성된다면, 우리는 모든 언어적 반례들을 설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가 일상적으로도 발생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철학적 이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철학적 이론이 완성되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런데 언어에 대한 그러한 하나의 역학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2

본 소논문이 최초에 의도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 이었다 :

본 소논문은 의미에 대한 언어철학의 두 가지 이론을 적용해 위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고, 어떤 이론이 더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러셀(Russell)의 기술 이론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지 확인해보고, 크립키(Kripke)가 지적했던 기술 이론의 문제점들을 분석하여 이러한 해결책이 적절한지에 대해 검토해 볼 것이다. 이후, 크립키(Kripke)의 직접 지시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 위 문제를 해결하는지 확인한다.

직접 지시이론은 그러나, 기술 이론과 달리 문제해결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이 문제는 프레게가 제시했던 대체율의 문제와 직결되는 사례인데, 이는 직접 지시이론가들이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혀온 문제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직접 지시 이론이 이 사례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할지라도, 보편적인 해결책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논증한다. 그 까닭은 직접지시 이론이 허구적 이름으로 변용된 문제에 대해서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허구적 이름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내놓는 것에 대해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종합해볼 때, 기술이론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직접 지시이론 보다 여러 측면에서 설명의 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 문제는 직접 지시이론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사리 해결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직접 지시이론으로 문제를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기술 이론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이를 위해, 크립키(Kripke)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기술 이론의 문제점들을 재검토해 봄으로써 기술 이론 비판에 대한 방어를 시도한다. 이후 두 이론이 각각 문제 해결에 있어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나는 앞서, 앞에 놓여있는 문제와 의미-이론 간의 분리를 시도했는데, 여기에는 앞서 문제의 성격에 대한 전제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론을 활용하는가? 아니면 이론을 완성하기 위한 반례로써 문제를 가져오는가? 그 사례가 철학적 이론에 대한 반례가 될 때, 우리는 “당신의 이론으로는 이 사례를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의 이론을 틀렸다.”로는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말하려고 시도해온 것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의미가 발생하는 모든 사태들에 대해 하나의 단일한 설명을 제공하려는 이론들은, 그 이론이 완전해졌을 때 의미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 역시 해결될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탐구를 진행한다.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완전한 설명은 모든 단어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의미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소박한 의미론에 있어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직관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어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던 시절-동물과 구분되지 않던 시절에도, 인간을 사냥하려는 동물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그의 동료의 시선을 돌렸을 테고, 이러한 원시적인 지시 역시도 언어활동의 하나로 보이기 으로 설명하며, 따라서 소박한 의미론을 받아들이자면, 지시하는 대상이 동일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 역시 동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소박한 의미론은 모든 실재에 대한 지칭이 가능하며, 그 지칭한 대상이 아무튼 간에 우리가 사용한 단어의 의미라고-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적 표현의 의미라고 설명하는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의 의미가 소박한 의미론의 설명과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에서 나오는 LA나 나성은 모두 동일한 지시체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닌 의미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것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홍길동의 문제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먼저 LA와 나성을 홍길동이 동일한 것으로 여기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의 정보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ㄱ) LA는 LA이다.

(ㄴ) LA는 나성이다.

(ㄱ)은 동어 반복 명제이며,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참이고 뜻이 없는 명제이다. 따라서 이 명제는 선험적이며 우리에게 어떠한 새로운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반면에 (ㄴ)는 동어 반복 명제가 아닌 종합 판단 명제로 우연적으로 참이며, 대상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주는 명제이다. (ㄱ)는 LA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 참이라고 여길 명제이지만, (ㄴ)은 LA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음(LA가 한국에서 나성으로도 불린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모르는 사람의 경우, 쉽게 참이라 동의할 수 없는 명제이다. 따라서 두 명제는 정보성이, 다시 말해 인지적 가치가 다른 명제이다. 그리고 인지적 가치가 다른 두 문장은 의미 역시도 다를 것이기 때문에, LA와 나성은 같은 대상을 지칭하지만 그 두 고유명사의 의미는 같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결국 종합해보면, 홍길동에게 생긴 문제 역시 “LA”와 “나성”이라는 두 고유명사가 제공하는 정보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이유로, 소박한 의미이론을 따르면 진리치 보존의 법칙과 모순되는 결과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S) 한 문장 내에서 그 문장을 구성하는 한 단어를 동일한 의미의 단어로 대체할 경우, 두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의 진리치는 동일해야한다.⁹

(ㄷ) 홍길동은 LA가 LA라는 것을 안다. (T)

(ㄹ) 홍길동은 LA가 나성이라는 것을 안다. (F)

LA가 LA라는 것은 동어 반복 명제이므로, 홍길동이 그것을 아는 것은 당연히 참이다. 따라서 (ㄷ)명제의 진리치 역시 참이다. 그러나 (ㄹ)의 경우, 애초에 홍길동의 문제가 생긴 바로 그 지점, “홍길동은 LA가 나성이라는 것을 모른다.”라는 명제의 부정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ㄹ)의 진리치는 거짓이 된다. 따라서 (ㄷ)와 (ㄹ), 두 문장의 의미가 동일하다면, 진리치 보존의 법칙에 위배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이 사례는 반대로 두 문장의 의미가 동일하지 않음을, 다시 말해, LA와 나성의 의미가 동일하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러셀(B. Russel)에 따르면 고유명사의 의미는 그 고유 명사를 설명할 수 있는 기술어구(descriptions)들의 연언()이다. 서술이론마다 개개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기본적인 입장은 이와 같으므로 이를 서술이론의 일반적 설명으로 차용한다.

이를테면, 세종대왕이라는 고유명사의 의미는 “태종 이방원의 막내아들”,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 “일 만원 권에 초상이 새겨진 사람” 등의 기술구로 나타낼 수 있으며, 고유명사의 의미는 이러한 한정 기술 어구들을 모아놓은 것을 축약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고유명사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는 위장된 기술어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일상생활에 비추어 볼 때, 직관적으로 옳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이 누구야?”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 사람은 “나이는 몇 살이고”, “어떠어떠한 성격을 지녔으며”, “누구누구의 아들이다.”라는 식으로, 즉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 대상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홍길동이 과연 동일한 대상에 대한 모순된 믿음을 가지고 있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홍길동은 LA와 나성을 다른 도시로 여기고 있으므로, 홍길동에게 파악하고 있는 나성과 LA의 기술 어구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홍길동에게 있어, LA의 기술 어구 중 하나는 “나성이 아닌 어떤 도시 중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홍길동은 “나성은 재미있는 도시다" ->"미국에 갖다온 친구가 말해준 그 도시는 재미있는 도시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반면, “LA is not an interesting city" -> "LA는 재미있는 도시가 아니다.” -> “나성이 아닌 어떤 도시 중 하나는 재미있는 도시가 아니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기술 어구로 분석해볼 경우 이 두 진술은 모순되지 않는다. 만약 그가 “LA가 한국에서는 나성이라 불린다.”라는 말을 듣고 LA와 나성이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친구의 말보다는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나성은 재미있는 도시다.”라는 믿음을 버리게 될 것이다.

서술 이론은 이론상으로 위의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크립키(Kripke)는 서술 이론에 대한 세 가지 종류의 반론을 들어, 서술 이론이 설득력 없음을 주장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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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진리치 - 명제가 사실과 일치하면 진리치는 참이며, 사실과 일치하지 않으면 진리치는 거짓이다.

다. 만약 그 비판이 이론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면, 이것은 위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게도 심각한 반론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비판들은 보다 자세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크립키(Kripke)는 어떻게 서술 이론을 비판하는가? 세 가지 비판점이 있다. 양상 논증, 오류로부터의 논증, 무지로부터의 논증이 각각 그것이다.

먼저 양상논증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예시를 통해 나타낼 수 있는 논증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제자”를 의미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가 아닌 것은 불가능하다.

(2)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가 아닌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3)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제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고유명사의 의미는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제자”,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저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 등의 한정 기술 어구들의 축약이자 위장된 기술 어구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제자이다.”라는 문장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러나 다른 가능세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가 아닌 경우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타당한 논증이고, (1)과 (2)는 기술주의의 입장에서 모두 거부하기 어려운 명제이다. 또한 이를 받아들인다면 필연적으로 (3)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므로, 기술주의는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류로부터의 논증은 일종의 회의주의적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논증이다. 기술 이론에 따르면 고유명사의 의미는 그 고유명사의 한정 기술 어구와 동일하다. 따라서 한정 기술 어구로 고유명사의 자리를 대체한다 해도, 진릿값은 변하지 않는다. 기술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고유명사의 기술 어구가 거짓이라면, 그 기술 어구를 고유명사로 대체 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누군가 세종대왕을 “한국의 16대 대통령”과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이라는 기술 어구로 여기고 있다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은 옳지만, “한국의 16대 대통령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이다.”는 옳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름이라는 고유명사에 대한 선천적으로 참인 기술 어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는 “<햄릿>의 작가”라는 기술 어구로 나타낼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가 <햄릿>을 쓰지 않았을 경우를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햄릿>은 사실 무명의 작가가 유작으로 남긴 작품이고, 셰익스피어가 후에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을 뿐이라면,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의 의미를 “<햄릿>의 작가”라는 기술 어구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은 설령 천문학적이라 해도 가능할 수 있기에, 기술 어구를 고유명사의 의미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기술 어구는 비록 그 확률이 천문학적으로 낮다 할지라도, 참이 아닐 수 있고 따라서 기술 어구는 이름에 대한 부연 설명의 기능만 할 수 있을 뿐 이름과 동일한 것으로는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무지로부터의 논증은 우리가 실제로 그 기술 어구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일상생활에서 무리 없이 고유명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리처드 파인만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리처드 파인만은 미국의 물리학자이다.”라는 정보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미국의 물리학자는 리처드 파인만이 아니라 할지라도 매우 많기 때문에, 기술 어구가 이름의 의미라면 이 사람은 리처드 파인만을 정확히 지칭하여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무리 없이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이름을 지칭하여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기술 이론은 이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필요하다.

크립키의 직접지시 이론은 기술 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 경우 기술 이론이 해결했던 대체율의 문제에 다시 직면해야한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직접 지시이론의 해결 방법이 보편적으로, 즉 변용된 사례에 대해서도 적절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a) 홍길동은 해리포터 소설을 읽은 친구에게서 Hogwarts에 대한 묘사를 들은 후 그 마법학교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묘사를 근거로 하여 홍길동은 “Hogwartsl는 재미있는 곳이다.” 라는 믿음을 가진다. 그런데 홍길동은 이후 우연히 Hogwarts에 대해 묘사해놓은 글을 하나 읽게 되는데 이 글은 오탈자로 인해 Hogwarts를 오그와트로 번역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묘사 자체도 늘어지는 문체 때문에 지루함을 느낀 홍길동은 “오그와트는 재미없는 곳”이라는 믿음을 형성하였다.

직접지시 이론은 이 사례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위 사례는 원래 문제에 있던 LA와 나성이라는 고유명사를 단순히 Hogwarts와 오그와트로 바꾸었을 뿐 다른 차이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직접지시 이론의 경우, 고유명사의 의미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대상인데, Hogwarts와 오그와트는 모두 소설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에 대한 이름일 뿐이므로,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름이 실제로 가리키는 대상이 없다면 그 이름에 대한 서술 역시 무의미한 내용일 것이므로, 이에 따르면 “Hogwartsl는 재미있는 곳이다.”는 명제도 무의미한 명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다. 해리 포터나 셜록 홈즈에 대해 설명하는 명제들은 모두 의미를 갖지 못한단 말인가? 실존 인물임이 의심되는 이름의 경우는 어떠한가?

앞서 크립키(Kripke)는 양상 논증, 오류로부터의 논증, 무지로부터의 논증을 들어 기술 이론이 설득력 없음을 밝히고, 본인이 제시한 직접지시 이론이 의미 이론에 대해 보다 좋은 설명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직접지시 이론은 기술 이론과 달리 대체율의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호그와트(Hogwarts)와 같은 허구적 이름이 쓰인 문제에 대해서는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면 기술 이론의 입장에서는, 호그와트나 셜록 홈즈(Sherlock Holmes)가 실제 존재하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호그와트는 “조앤 롤링이 창조한 가상의 학교”라는 기술 어구로, 셜록 홈즈는 “코난 도일이 창조한 가상의 인물”이라는 기술 어구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기술 이론은 허구적 이름이 쓰인 변용된 사례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기술 이론의 설명이 더 매력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3

직접 지시 이론은 언어의 의미가 지시체라는 소박한 의미론의 입장을 계승한다. 그런데 나는 이들이 구성하려는 이론이 지닌 장점들- 크립키(Kripke)의 가능세계 의미론이 해결한 양상 문제, 퍼트넘(Putnam)의 본질주의 복권 -과, 또 이들이 지적했던 기술이론의 해결되기 어려운 난점들이, 사실 둘 다 동일한 기반 위에서 다만 관점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또 크립키의 고정지시어는 본질적으로 기술적이라는 점도. 그러나 이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각각의 이론들이 설정하는 전제와 조건들 일반으로부터 도출된 설명에 대해 반례를 내세워서는 안 될 것이며, 또 서술 이론이나 직접 지시 이론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그림 이론과 같은 다른 이론을 가져오려고 시도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에서 행한 일련의 철학이 “교정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 철학적 문제에 접근하는가?”에 대한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여긴다.

기본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하고 있지 수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괴델이나 칸토르(G. Cantor), 데데킨트(Dedekind) 등의 수학적 작업에 대해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관한 수학자들과 철학자들의 해석의 정당성을 따지는 것이다....(중략)....이 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수학관이 매우 독특한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지적할 만하다. 기존의 어떤 수학관도 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즉 수학이란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수학적 실재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실재론적 수학관, 인간의 정신의 구성물이라는 직관주의적 수학관, 경험의 일반화라는 경험주의적 수학관, 수학은 의미 없는 기호들로 이루어지는 놀이이며 수학적 체계는 형식 체계라는 형식주의적 수학관, 수학은 논리학으로부터 도출 가능하다는 논리주의적 수학관 등과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각기 다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수학은 말하자면 증명 기술들의 다채로운 혼합이며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수의 개념도 가족유사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개념이다. 또한 논리적 추론 규칙들은 언어 놀이의 규칙들이고, 논리적 필연성은 언어의 문법의 필연성이며, 이는 다시 법률의 강제성과도 비교되는 그러한 인간적 개념이다. 수학은 결국 하나의 인류학적 현상이다.¹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만 그 이론들이 구성된 시점으로 돌아가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의미론들을 내부에서 공격하는 것이 아닌(즉 그들의 설명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설명에 앞서 자연스럽게 전제하고 있는 지점들, 두 이론이 밟고 서 있는 공통의 지반을 공격하고자 한다.

이것을 한 가지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짐으로써 드러내겠다. “명명될 수 없는 사물이 존재하는가?” 직접 지시이론을 지지하는 철학자이던, 서술 이론을 지지하는 철학자이던 간에, 또 ‘이’, ‘그’, ‘저’로써 명명될 수 있는 것만을 지시 가능한 것으로 설명하는 러셀(Russel)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질문을 당연하다 못해, 이상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이름을 가지지 않은 사물”은 극단적인 관념론자나 회의론자가 아닌 다음에야, 직관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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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박정일 역) 서문

재하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때 언어가 없이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저 언어가 가지는 역할로 대체 지시적 기능 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름을 가지지 않은,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사물, 지금까지 혹은 앞으로도 계속 이름을 가지지 못한 채로 존재하고 있을 사물을 우리는 쉬이 상상해볼 수 있다. 혹은 이름을 전혀 부여받지 못한 채 죽었던 어떤 존재자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이름이란 단순한 표찰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물”이란 실제로 이름을 아직 가지지 못한 사물이나, (물자체와 같은) 인식적 가능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내가 말하는 사물은 여기서 “이름을 가지지 않는 사물” 즉, “원초적으로 전혀 명명될 수 없는 사물”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차이인가? 이제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전혀 이름을 가질 수 없는 사물이 존재하는가? 여기에 대해 우리가 물자체와 같은 것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물자체”라 명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름을 전혀 가질 수 없는 사물은, 만약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면 이름과 외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없다면, 이름과 사물은 어떤 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순수한 사물 자체가 존재한다. 물론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이래로, 우리는 인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존재자, 우리가 전연 인식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자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순수한 사물, 곧 “물 자체”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물이 전혀 이름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혹자는 지시적 정의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떠올리면서, 어떻게 인식할 수조차 없는 것에 대해서 이름을 붙일 수 있겠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사물이 존재하고, 우리가 그 사물에 대해 “물 자체”라고 부르기로 했다면야, 도대체가 그 사물은 이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가 아닌가? 그리고 이제 그러한 것의 존재 여부에 대해 우리가 원초적으로 알 수 없기에,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이제 그러한 것의 존재는 완전한 無와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구체적 사물은 그것이 (지시적 정의에서의) 지시로 이루어지던, (한정기술구로서의) 서술로 이루어지던 간에, 그것이 구체적인 사물이라는 바로 그 점에서 이름을 원초적으로 가질 수 있는 존재자이다. 지시적 정의가 벌어지는 상황을 고찰해보자. 어떤 사람이 장기 말의 “저 말”로 하여금 손으로 가리키며 “왕”이라고 명명할 때만 비로소 그것은 이름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이름을 (아직) 부여받지 못한 사물은 존재한다. 그런데 이제 그 지시 이전의 사물이 원초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래서 그 사물이 원초적으로 이름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도대체가 그 사물은 아무것도 아닌 것과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언어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실재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절대적 의미에서 無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실재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불만에 찬) 반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사물이 언어에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마치 절대적 차원에서 인간이 사회의 구조 속에 귀속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절대적 차원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가 결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만약 그러한 논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리낄 것이 없다. 인간의 모든 사유가 시대에 귀속되어 있다고 해서, 그로부터 객관적이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없는 것처럼, 또 인간의 모든 행위가 결정되어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인다 해서, 그로부터 인간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이 도출되지 않는 것처럼(왜냐하면 그러한 책임을 묻는 행위역시 모두 결정되어 있을 것이므로)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이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해서, 그로부터 사물의 존재 자체가, 본질이 변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은 여전히 언어로부터 독립해있다. 당신은 외연을 지나치게 넓게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외연이 지나치게 넓다는, 그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는 지시적 정의로 들어가면서부터 전개될 설명을 위한 하나의 준비 작업이자, 이제 앞서 사물이 언어로부터 독립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그가 지시를 통해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드러내려고 시도할 때, 발생하는 오류의 원천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누군가 이제, 사물을 지시함으로써 다른 이에게(이를테면 언어를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아이) 그 사물의 이름을 가리켜주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그는 어린아이에게 ‘빨강’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다. 그렇다면 그가 어린아이에게 온통 빨간색 물감으로 칠해져 있는 도화지 한 장을 보여주고, 그 밑에 빨강이라는 이름 명찰을 붙여줌으로써 아이는 ‘빨강’의 의미를 알게 되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기서 아이가 받은 ‘빨강’이라는 이름 하나로는, 도대체 아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지시적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그가 준 ‘빨강’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A’라는 문자로 대체해도 좋을 텐데, 어떤 이가 나에게 위와 같은 도화지를 보여주면서 “이것의 이름은 ‘A’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가 그 이름을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A’라는 이름은 도화지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도화지의 네모난 모양을 일컫는 말인가? 그도 아니라면 내가 그가 보여준 그림을 보고선 떠올린 심상에 대한 이름인가? 나는 그가 취한 지시(무언가를 가리키고, 그것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빨강”이라는 그 색깔의 이름에 대한 문법이지, 이름이라는 텅 빈 기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법이란, 그 이름이 문장 아래에서 어떤 방식으로 쓰이고, 어떤 규칙을 따르는지에 대한 일련의 사용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인데, 한 가지 유의할 것은 ‘문법’이라는 개념 스스로도 그 자신의 통제를 받으며 가족유사성적으로만 정의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방식은 말하자면, 우리에게 논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문법-규칙을 따르지 않았을 때에 생기는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말한 순간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 우리의 발언을 제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화의 상대방과 우리 자신조차도 그 규칙을 따르지 않는 문장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알지 못하는데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로 위에 서있는 이정표의 규칙을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혼란은 이제 그 도로를 어떻게 주행해야할 지 알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빨강’에 대한 지시적 정의를 사용하기 위해서, 나는 아이에게 “지금부터 ‘색깔의 이름’에 대해 알려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위해 파랑색과 같은 견본을 대조해 보여줌으로써 아이에게 ‘빨강’이 무엇인지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설명을 위해 사용한 “색깔의 이름”은 아이에게 색깔-문법의 규칙을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놓은 공간이며, 그 기호의 놀이 공간이 그 기호 자체에 선행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순히 말해, 아이가 어떤 사물의 이름에 관한 지시적 설명을 듣기 위해서는, 지시 이전에 우리가 설명할 그것에 관한 문법, 자리, 규칙, 행위 등이, 즉 언어놀이에 있어 그것의 사용법을 배우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장기에 있어 왕의 의미를 배울 적에, 그 장기의 전체적인 규칙과 다른 장기 말들의 복합적인 역할 수행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없는 것처럼. 퍼트넘(Putnam)의 논증¹¹이 우리가 최초의 명명으로 지시한 대상이 가진 본질이, 내포의 변화와 무관하게 외연 그 자체로서 결정되는 것이기에 외연만이 대상의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이제 장기 말에서의 ‘왕’의 의미도, 그것의 지시체라고 설명해야 되는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마치 장기 게임에서 ‘왕’의 의미가 그것이 따르는 규칙 등에 있는 것이 아닌 단순히 “내가 첫 번째로 선택한 그 말”이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우리가 임의로 바둑돌을 놓고 그것을 ‘왕’으로 여긴다고 해서, ‘왕’의 의미가 변하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서 ‘왕’은 다른 말들과의 상대적인 관계로부터 규정되고 있다. 즉, 지시는 이 상황에서 어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단지 지시만으로는, 우리가 받은 그 이름을 가지고 어떤 규칙에 따라야할 지에 대하여,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제 그렇다면, 그러한 지시적 설명이 단어의 의미를 알려주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나,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있어서는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저것의 이름이 바로 빨강”이라고 배우고 나서, 이제 빨강을 들을 때마다 특정 색깔의 표상이 떠오른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 표상이 색깔을 나타내기에, 형태의 이름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말하려면, 나는 먼저 ‘빨강’이라는 이름이 색깔을 뜻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의 질문이 다시 ‘색깔’과 ‘이름’의 의미에 관해서도 제기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시에 선행해서 알아야 한다고 말한 그 의미는, 지시적 정의가 그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했던 그 의미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여기서 지시는 결국 그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빨강’을 가지고 “이것은 네모와 같은 형태의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것을 뜻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형태의 이름으로는 사용될 수 없고 다만 색깔의 이름을 뜻한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가져와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지시적 정의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례가 되지 않는가? <지시적 설명에서 조차도 우리는 언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Wittgenstein 2003: 9)>¹²

29. 아마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이 수는 둘이라고 한다.”, 오직 이렇게 해서만 둘은 지시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수”라는 낱말은 우리가 그 낱말을 언어의 어떤 자리에, 문법의 어떤 자리에 놓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저 지시적 정의가 이해될 수 있기 전에 “수”라는 낱말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그 정의 속의 “수”라는 낱말은 물론 이러한 자리, 즉 우리가 그 낱말을 둘 부서를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색은 이러이러하다고 한다.”, “이 길이는 이러이러한다고 한다.” 등등으로 말함으로써 그러한 오해들을 예방할 수 있다. ....중략....자 우리는 바로 그것들을 설명해야 한다.-그러니까 다른 낱말들에 의해 설명해야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슬에서의 마지막 설명은 어떠한가? ¹³

그런데 이렇게 해서 이름과 사물이 어떤 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제 그 연관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질문은 이행된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것은, 기호의 의미에 있어 지시 이전에 일어나는 준비들 : “‘색깔의 이름’과 같이 ‘빨강’이라는 이름을 지시를 통해 설명하기 전에 그것의 자리를 확정하는 것”은 무엇을 통해 구성되는가이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빨강’이라는 이름의 사용을 확정짓는 문법-일반의 규칙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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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물론 퍼트넘(Putnam)은 외연만을 의미로 여기지 않고, 그 의미도 자연종 명사로 한정하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빨강”이란 기호를 지시적으로 정의할 때에 내가 가리키는 빨간 사물은 빨강의 속성이 귀속된 [따라서 저 속성이 사고 중에서 제거될 수도 있는]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표본(sample), 곧 언어의 일부이다. 향후 나는 그것을, 마치 표준 미터가 그런 것처럼, 비교의 대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 서 그러하다. 표준 미터가 측정의 대상이 아니라 [길이가 귀속되는 대상이 아니라]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시척(paradigm)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¹⁴

이러한 문법 규칙은 이를테면 “한 시야 안에서 동시에 두 가지의 색깔이 보일 수는 없다.”, “거리는 1M인 동시에 2M일 수 없다.”와 같은 것일 텐데,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러한 규칙은 논리적이나 물리적으로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법규칙은 그 규칙의 제정에 있어 자율적이며, 그 규칙을 논리적이나 물리적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제재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한 사물이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상황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기에(배중률 위반) 문법규칙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은 단지 그가 그 문장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응수한다. 실로 논리적 불가능성으로 여겨졌던 위의 문장도 양자역학과 같은 미시차원의 특수한 논의에서는 제대로 사용되지 않은가? 비록 우리가 그 상황을 상상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혼란을 느낀다하더라도 말이다. 마찬가지의 경우를 “거리는 1M인 동시에 2M일 수 없다.”에서도 고찰할 수 있다. 거리가 1M인 동시에 2M인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는 그러한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우리가 제대로 상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가 논리로 재단되어 있고, 그가 방금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 그 문장 역시 언어로써 말해지고 있다면(논리의 귀속을 받고 있다면), 무엇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사고가 결코 비논리적일 수 없다는 하나의 징표로 나타난다.(역학적 설명이 시작되면, 모든 사물은 물리적 세계관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상상할 수 없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누군가 “네모난 삼각형”을 우리가 결코 상상할 수 없기에 그러한 문장은 무의미하다고 지적한다면, 도대체 그는 상상불가능하다고 지적한 그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는가?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 그가 처음의 ‘상상’과 두 번째 ‘상상’은 메타적 차원에서 다르며, 단지 첫 번째의 방식으로 말해지는 그것만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바로 그것이다. 그는 4차원 입방체인 테서랙트를 결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사용되는 모든 문장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겠는가? 우리가 인식적 차원에서 사고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의 메타적 차원(언어적 차원)에서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언어적 차원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튼 우리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사용될 수 없다면, 다만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어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벌어지는 논의들, 수학에서 벌어지는 논의들에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어쨌거나 유의미하게 사용되며, 다만 일상 언어에서는 그 문장들을 가지고 어떤 놀이를 행할만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뿐이다. 이럼에도 여전히 언어가 거울처럼 실재를 비춘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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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대석 (2013). 말-사물 동일성 그리고 논리-문법 공간 존재론. 철학, 116, 101-148.

13.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29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문법의 규칙이라 하는 것이, 구체적 언어-놀이가 이루어지는 상황 이전에 준비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실재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립적으로 존립해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문법의 규칙은 언어가 실재를 그려내기 전에 미리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논리적 동일성을 가지고 실재를 (거울처럼) 반영하지 않는다.

a) 따라서 기호와 사물 간에 논리적 동일성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필요한 것은 오히려 말과 사물 간에 존립하는 모종의 내적, 논리적 관계이다. 어떤 의미에서, 말과 사물 간에 그러한 관계의 존립은 모종의 근본적인 -내적인- 동일성의 존립이다.

b) 논리 문법은 [이른바] 실재에게 자신을 해명하지 않는다. 논리 문법적 규칙들은 의미를 비로소 결정(bestimmen)하기 때문에, 혹은 구성(konstituieren)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독립적으로 주어져 있는 이른바] 의미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논리 문법은 자의적이다. ¹⁵

이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은, 문법과 실재 사이의 동일성은 내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법은 실재와 정확히 같은 수준에 있으며, 실재를 해명할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문법은 그것이 성립되는 순간 곧바로, 실재가 무엇임(what)에 대해 말한다. 실재가 어떤 상태(how)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문법은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문법이 실체에 대한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실체가 없으면, 세계에 대한 어떤 그림도 올바르게 그릴 수 없을 것이므로.

2.0211 If the world had no substance, then whether a proposition had sense would depend on whether another proposition was true.

2.0212 Ogden

It would then be impossible to form a picture of the world (true or false).

Pears/McGuinness

In that case we could not sketch any picture of the world (true or false). ¹⁶

위의 논의를 바탕으로 할 때, 결국 의미에 대한 두 이론(서술 이론, 직접 지시 이론)은 그 공통의 지반에서 다만 관점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을 뿐이다. 언어에 대한 교정 철학의 관점은, 이들 철학이 지반으로 삼고 있는 “언어와 세계 사이의 논리적 동일성” 혹은 “언어를 실재에 대한 거울”로 여기는 관점이 하나의 편견일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언어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이론을 구성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리의 사소한 측면에서, 논리만으로 명제 전체의 일반성을 도출해내는 작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법의 규칙은 자의적이며, 그 사용으로부터 비롯되는 언어의 본질은, 그러한 본질이 다양한 규칙과 행동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유동적인 경계의 가족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 옳다면, 결국 언어에 대한 일반 이론의 구성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이 때문에, 다양한 언어-놀이 사이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기술(記述)이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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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한대석 (2013). 말-사물 동일성 그리고 논리-문법 공간 존재론. 철학, 116, 101-148.

15. 한대석 (2013). 말-사물 동일성 그리고 논리-문법 공간 존재론. 철학, 116, 101-148.

16.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2.0211, 2.0212

Ogden, Pears/McGuinness 영역

참고문헌

1.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Ludwig Wittgenstein 저, Ogden 영역)

2.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Ludwig Wittgenstein 저, Pears/McGuinness 영역)

3. 논리-철학 논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영철 역)

4.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해제) (박정일 저,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5. 철학적 탐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영철 역)

6. 청색 책. 갈색 책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영철 역)

7. 소품 집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영철 역)

8. 확실성에 관하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영철 역)

9. 문화와 가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영철 역)

10.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박정일 역)

11.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알랭 바디우 저, 박성훈, 박영진 역)

12. 리처드 로티 『철학과 자연의 거울』(해제) (이희정 저,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13. 양상논리와 형이상학 (김우진 저, 새들 녘 출판사)

14. 이름과 필연 (솔 크립키 저, 정대현 역)

15. 논리 철학 (여훈근 저, 고려대학교 출판부)

16. 현대 영미 인식론의 흐름 (김도식 저)

17. 논리적 추론과 증명(이병덕 저)

18. 한대석 (2013). 말-사물 동일성 그리고 논리-문법 공간 존재론. 철학, 116, 101-148.

19. 한대석(2012). 비트겐슈타인 그림 이론에 대한 또 하나의 연구. 철학, 113, 101-141.

20. 이승종 (2012). 언어의 한계와 유아론. 철학적 분석, 26, 1-18.

21. 강진호(2010) 촘스키와 비트겐슈타인의 지칭 의미론 비판. 철학, 102, 109-137

22. 선우환 (2005). 프레게와 함수적 표현. 철학, 83, 241-271.

23. 이병덕 (2006). 허구적 이름에 대한 밀주의 이론과 추론주의 의미론. 철학적 분석, 13, 101-132.

24. 문장수 (2011). 후기 분석철학의 주요 의미론들에 대한 역사-비판적 연구. 철학논총, 64, 289-313.

25. 김도식 (2003). 의미와 지시의 관계에 관하여. 인문과학논총, 40, 13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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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에 관한 강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번역

저의 본래의 주제에 관해서 말을 시작하기 전에, 서론적인 언급을 좀 하겠습니다. 제가 제 생각들을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데는 큰 난점들이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드는데, 제 생각에, 그것들 중 일부는 그것들을 여러분에게 미리 언급함으로써 감소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난점은 제가 거의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서, 영어가 저의 모국어가 아니고, 따라서 어려운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바람직할 정밀성과 미묘함이 저의 표현에는 종종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영어 문법에 어긋나게 끊임없이 저지르게 될 잘못들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제가 뜻하는 바를 파악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저의 일을 덜어 주기를 요청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제가 언급할 두 번째 난점은, 아마도 여러분 중 다수가 좀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저의 이 강의에 오셨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여러분의 생각을 바로잡아 드리기 위해서, 저는 제가 저의 주제를 택한 이유에 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전임 총무께서 영광스럽게도 저에게 이 협회에서 논문을 하나 발표하라고 요청했을 때, 저의 처음 생각은, 물론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생각은, 제가 여러분에게 말할 기회를 가질 거라면, 제가 여러분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어떤 것에 관해 말해야겠고, 이 기회를, 이를테면 논리학에 관해 강의하기 위해 오용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용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과학적인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 시간의 논문이 아니라 연속 강의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의 대안은, 여러분에게 이른바 대중 과학적 강의를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즉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이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이해한다고 믿게 하려고 의도된 강의,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근대적인 사람들의 가장 저속한 욕망들 중의 하나인 것, 즉 과학의 최신 발견들에 관한 피상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의도된 강의 말입니다. 저는 이 대안들을 거부하고, 제가 보기에 일반적인 중요성이 있는 한 주제에 관해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 주제에 관한 여러분의 생각들을 명료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비록 여러분이 제가 그것에 관해 말할 것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저의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난점은 사실 대부분의 기다란 철학 강의에 따라붙는 것인데, 그것은 듣는 이가 그가 인도된 길과 그 길이 이르는 목적지를 둘 다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이해한다, 그러나 도대체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하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나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겠다, 그러나 도대체 그는 거기에 어떻게 도달하고 있는 거야”하고 생각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 참을성을 가져 달라고 다시 요청하는 것과, 여러분이 결국에는 길과 그것이 이르는 곳을 둘 다 볼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저의 주제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윤리학입니다. 저는 이 용어에 대해 무어 교수께서 그의 저서 <윤리학 원리>에서 준 설명을 채택하겠습니다. 그는 “윤리학은 좋은 것(善)에 대한 일반적인 탐구”라고 말합니다. 이제 저는 윤리학이란 용어를 조금 더 넓은 뜻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사실상, 제가 믿기에는, 일반적으로 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포함하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무엇을 윤리학의 주제라고 간주하는가를 여러분이 가능한 한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저는 앞의 정의와 각각 대체될 수 있을 터인 다소 동의어적인 수많은 표현들을 여러분 앞에 제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열거함으로써 저는 골턴이 상이한 얼굴들이 모두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특질들에 대한 그림을 얻기 위해서 상이한 얼굴들의 수많은 사진들을 같은 사진 감광판 위해서 취했을 때 산출한 것과 같은 종류의 효과를 산출하고자 원합니다.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집합적 사진을 보여 줌으로써 제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를테면, 무엇이 전형적인 중국인의 얼굴인가를 보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제가 여러분 앞에 제시할 동의어들의 열을 여러분이 자세히 살펴본다면, 여러분은-제가 희망하는 바로는-그것들 모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적 특질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윤리학의 특징적 특질들입니다.

이제 “윤리학은 좋은 것(善)에 대한 일반적인 탐구”라고 말하는 대신에, 저는 윤리학은 가치 있는 것에 대한 탐구, 또는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윤리학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 또는 삶을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탐구, 또는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모든 구절들을 바라본다면 여러분은 윤리학이 관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대충의 관념을 얻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이 모든 표현들에서 우리 눈에 띄는 첫 번째 것은, 그것들 각각이 실제로는 매우 상이한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두 가지 뜻을 한편으로는 사소한 또는 상대적인 뜻이라고 부르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적인 또는 절대적인 뜻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것은 좋은 의자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그 의자가 미리 결정된 어떤 목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좋다’라는 낱말은 이 목적이 사전에 고정되어 있었던 한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사실상, 상대적인 뜻에서 ‘좋다’는 낱말은 단순히 어떤 미리 결정된 표준에 부응함을 의미합니다. 가령 우리가 이 사람은 좋은 피아니스트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정도의 어려움을 가지는 작품들을 어떤 정도의 솜씨로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비슷하게, 제가 감기 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가 말한다면, 제가 의미하는 것은 감기 걸리는 것이 제 생활에서 어떤 기술 가능한 장애들을 생기게 한다는 것이고, 또 이것이 올바른 도로라고 제가 말한다면, 제가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목적에 상대적으로 올바른 도로라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면, 이 표현들은 어떤 난점이나 깊은 문제들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학이 그 표현들을 사용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제가 테니스를 칠 수 있고, 여러분 중 한 사람이 제가 경기하는 것을 보고, “이런, 당신은 테니스를 꽤 못 치는군요.”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제가, “압니다. 저는 못 칩니다. 그러나 더 잘 치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답한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 그럼 됐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 중 한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고, 그가 제게 다가와서 “당신은 짐승같이 행동하고 있어” 하고 말했는데, 제가 “나는 내가 나쁘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더 좋게 행동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고 합시다. 그 경우 그가 “아, 그럼 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틀림없이 아닙니다; 그는 “아니, 당신은 더 잘 행동하고자 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여기서 당신은 절대적 가치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첫 번째 예는 상대적 판단의 예였습니다.

이 차이의 본질은 명백히 이러하다고 보입니다. 즉 모든 상대적 가치 판단은 사실들의 단순한 진술이며, 따라서 그것은 가치 판단의 모든 외관을 상실하는 그런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랜체스터(Granchester)로 가는 올바른 길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당신이 최단 시간 내에 그랜체스터에 도착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당신이 가야 하는 올바른 길이다”라고 말해도 똑같이 좋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좋은 경주자이다”는 단순히 그는 몇 마일을 몇 분 내에 달릴 수 있다, 등등을 뜻합니다.

이제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모든 상대적 가치 판단들이 단지 사실들의 진술들임이 입증될 수 있지만, 어떤 사실 진술도 결코 절대적 가치의 진술이거나 절대적 가치를 함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중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아는 인물이고, 따라서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무생물체나 생물체의 모든 운동을 알며, 또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인간들의 마음의 상태도 다 안다고 합시다. 그리고 이 사람이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을 하나의 큰 책에다 써 놓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책은 세계에 관한 기술 전부를 포함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책은 우리가 윤리적 판단이라고 부르거나 또는 그런 판단을 논리적으로 함축할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모든 사대적 가치 판단들과 모든 참된 과학적 명제들을, 그리고 사실상,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참인 명제들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술된 모든 사실들은, 말하자면, 같은 수준에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식으로, 모든 명제들은 같은 수준에 있습니다. 어떤 절대적인 뜻에서 숭고하거나, 중요하거나, 사소한 명제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아마도 여러분 중 일부는 그 점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햄릿의 말을 상기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좋거나 나쁘지 않지만, 생각이 그것을 그렇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도 오해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햄릿의 말은, 좋고 나쁨이 비록 우리 외부 세계의 성질들은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의 상태의 속성들이라는 것을 함축한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뜻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즉 마음의 상태는, 우리가 그것으로 의미하는 것이 우리가 기술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인 한, 어떤 윤리적인 뜻으로도 좋거나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 일이 기록된 우리의 책에서 우리가 어떤 살인이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점들에서 완전히 자세하게 기술된 것을 읽는다면, 이 사실들의 단순한 기술은 우리가 윤리적 명제라고 부를 수 있을 터인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살인은 다른 어떤 사건, 예컨대 돌의 낙하와 정확히 같은 수준에 있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술을 읽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이나 분노 또는 다른 어떤 감정을 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우리는 이 살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들었을 때 그 살인에 의해 그들 속에 야기되는 고통이나 분노에 관해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사실들, 사실들, 사실들만이 존재하고, 윤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윤리학이라는 그런 학문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를 제가 심사숙고한다면, 이러한 결과는 저에게 아주 명백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을 어떤 것도 것[윤리학]일 수 없으리라는 것은 저에게는 명백해 보입니다. 우리는 본래적으로 숭고하고 다른 모든 주제들 위에 있을 수 있을 그런 주제를 가진 과학 책을 쓸 수 없습니다. 저는 저의 느낌을 다음과 같은 은유로 기술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만일 어떤 사람이 실제로 윤리학에 관한 책인 윤리학 책을 쓸 수 있다면, 이 책은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책들을 폭음을 내면서 파괴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과학에서 사용하는 바와 같이 사용되는 우리의 말들은 의미와 뜻, 즉 자연적 의미와 뜻을 포함하고 전달할 수 있을 뿐인 그릇들입니다. 윤리학은, 만일 그것이 어떤 것이라면, 초자연적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말들은 오직 사실들만을 표현할 것입니다. 제가 하나의 찻잔에 일 갤런의 물을 쏟아 부어도, 그 찻잔은 한 잔의 찻잔 가득할 만큼의 물만을 담을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말하기를, 사실들과 명제들에 관한 한, 오직 상대적 가치와 상대적 좋음, 옳음 등만이 있다고 했습니다. 계속해 나가기 전에, 이것을 좀 명백한 예에 의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올바른 도로는 자의적으로 미리 정해진 목표로 인도하는 도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리 정해진 목적지와 별도로 올바른 도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아무런 뜻도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분명합니다. 이제, “절대적으로 올바른 도로”라는 표현에 의해 우리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봅시다. 저는 그것은 이런 도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것을 보면 모든 사람이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가야할 도로, 또는 가지 않으면 부끄러워할 도로, 그리고 비슷하게, 절대적 좋음[善]은 그것이 기술될 수 있는 사태라면 이런 것일 겁니다.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의 취향과 경향들과는 별개로, 필연적으로 성취할 것, 또는 성취하지 않으면 죄스럽게 느낄 것. 그런데 저는 그와 같은 사태는 하나의 키메라, 즉 망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태도, 그 자체로는, 제가 절대적 심판관의 강제력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처럼 여전히 “절대적 선”이니 “절대적 가치”니 하는 그런 표현들을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는 우리 모두는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으며, 무엇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것인가요? 이제 제가 틀림없이 이러한 표현들을 쓸 경우들을 상기할 것인데,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경우 저는 예컨대 제가 여러분에게 쾌락의 심리학에 관해 강의를 해야 한다면 여러분이 처하게 될 상황에 있습니다. 그 경우 여러분이 할 일은 여러분이 언제나 쾌락을 느끼는 어떤 전형적인 상황을 상기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할 모든 것이 구체적이 되고 말하자면 제어 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마도 날씨 좋은 여름날에 산책을 할 때의 감각을 자신의 전형적인 예로서 고를 것입니다. 이제, 제가 절대적 또는 윤리적 가치에 의해서 제가 의미하는 것에 제 마음을 고정하고자 한다면, 저는 이러한 상황에 처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저의 경우에는, 하나의 특수한, 그러니까 어떤 뜻에서 저의 탁월한(par excellence)경험의 관념이 저에게 떠오르는 일이 언제나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적에 이 경험을 저의 최우선적인 예로 사용하려는 이유입니다.(제가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예들을 더 마음에 와 닿는 것으로 볼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저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같거나 비슷한 경험들을 상기하도록 만들어, 우리가 우리의 탐구를 위한 공통적인 기반을 가질 수 있도록 이 경험을 기술할 것입니다.

제가 믿기에는, 그 경험을 기술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경험을 할 때 나는 세계의 존재에 대해 경탄한다.” 그리고 그 경우 저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가!”, 또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가!”와 같은 그런 문구를 곧잘 사용합니다. 저는 저도 알고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터인 다른 한 경험을 곧 언급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경험입니다. 제가 뜻하는 것은, 우리들이 “나는 안전해; 무엇이 일어나건, 아무것도 나를 해칠 수는 없어”라고 말하고 싶을 때의 그 마음의 상태입니다.

이제 저는 이 경험들을 고찰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믿기에는, 그것들은 우리가 분명히 하고자 애쓰는 바로 그 특징들을 내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가 말해야 할 첫 번째 것은, 이러한 경험들에 우리가 부여하는 언어적 표현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나는 세계의 존재에 놀란다.”고 말한다면, 저는 언어를 오용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어떤 것이 사실임에 경탄한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훌륭하고 명료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제가 이전에 본 적이 있는 어떤 개보다도 더 큰 개의 크기에 대해 제가 경탄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합니다. 또는 특별하다는 낱말의 평범한 뜻에서, 특별한 어떤 것에 대해서나 경탄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합니다. 그러한 모든 경우에, 저는 사실이 아니라고 제가 상상할 수 있을 그런 어떤 것이 사실임에 대해 경탄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개의 크기에 대해 경탄하는 것은, 다른 크기의 개, 즉 저의 경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일상적 크기의 개를 제가 상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것이 사실임에 대해 경탄한다.”고 말하는 것은, 제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상상할 수 있는 경우에만 뜻을 가집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들은, 이를테면, 우리들이 오랫동안 방문한 적이 없고 그동안 헐렸을 것이라고 상상해 온 어떤 집을 볼 때 그 집의 존재에 대해 경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세계의 존재에 대해 경탄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데, 왜냐하면 저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그 있는 바대로 있음에 대해 경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제가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이런 경험들을 한다면, 저는 하늘에 구름이 낀 경우와 대조적으로 하늘이 파란 것에 대해 경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늘이 어떠하게 있건 간에 좌우간 있음에 경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제가 경탄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동어반복, 즉 하늘이 파랗거나 파랗지 않음에 대해서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동어반복에 대해 경탄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것이 바로 무의미인 것입니다. 이제 제가 언급한 다른 경험들, 즉 절대적 안전성의 경험에 대해서도 같은 것이 적용됩니다. 우리 모두는 일상생활에서 안전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압니다. 저는 제 방에서, 제가 버스에 치일 수 없을 때, 안전합니다. 만일 제가 백일해를 앓았었고, 따라서 다시 그 병에 걸릴 수 없다면, 저는 안전합니다. 안전하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일들이 저에게 일어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무엇이 일어나건 제가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다른 예가 “존재”나 “경탄”이란 낱말의 오용이었던 것처럼, 이것은 다시 “안전하다”란 낱말의 오용인 것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이 점을 각인시키고 싶습니다. 즉 우리 언어에 대한 어떤 특징적인 오용이 모든 윤리적 표현들과 종교적 표현들에 퍼져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표현들은 일견 그저 비유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가령 우리가 옳다는 낱말을 윤리적인 뜻으로 사용하고 있을 때, 비록 우리가 뜻하는 것이 그 낱말의 사소한 뜻에서는 옳지 않지만, 그것은 비슷한 어떤 것으로는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람은 좋은 친구이다.”고 말할 때, 비록 그 ‘좋은’이라는 낱말이 “이 사람은 좋은 축구선수이다.”라고 하는 문장에서 그 낱말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어떤 유사점은 있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람의 삶은 가치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뜻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가치 있는 보석류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뜻은 아니지만, 어떤 종류의 유사성은 있어 보입니다. 이제 이런 뜻에서 모든 종교적 용어들은 비유들로서 또는 알레고리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神)에 대해, 그는 모든 것을 본다고 말할 때, 그리고 우리가 무릎 꿇고 그에게 기도할 때, 우리의 모든 용어들과 행위들은 그를 우리가 그의 은총을 얻으려 애쓰는, 위대한 힘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나타내는 하나의 커다랗고 정교한 알레고리의 부분들이라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알레고리는 또한 제가 좀 전에 언급한 경험들을 기술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가운데 첫 번째 경험은, 제가 믿기에는,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사람들이 말할 때,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고, 또 절대적 안정성의 경험은, 우리는 신의 손안에서 안전함을 느낀다고 하는 말로 기술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같은 종류의 세 번째 경험은 죄스럽게 느낀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도 신은 우리의 행위를 인가하지 않는다고 하는 문구에 의해 기술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윤리적 언어와 종교적 언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비유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비유는 어떤 것에 대한 비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어떤 사실을 하나의 비유에 의해 기술할 수 있다면, 저는 또한 그 비유를 버리고 사실들을 비유 없이 기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 우리가 비유를 버리고 그 배후에 있는 사실들을 단순히 진술하려고 시도하자마자,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처음에 하나의 비유라고 보인 것은 이제 단순한 무의미라고 보입니다. 그러데 제가 여러분에게 언급한 세 경험(저는 다른 경험들을 덧붙일 수 있었을 겁니다.)은 그것들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컨대 저에게는, 어떤 뜻에서 본래적인,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것들이 경험들이라고 말할 때, 틀림없이 그것들은 사실들입니다; 그것들은 어떤 때 어떤 곳에서 일어났고, 어떤 일정한 시간 동안 지속했고, 따라서 기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제가 몇 분 전에 말한 것으로부터 보면, 저는 그것들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저의 논점을 더욱 더 예리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경험이, 사실이, 초자연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역설이다.”

이제 제가 이 역설에 대처하고 싶어질 때 취하는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먼저, 세계의 존재에 대해 경탄한다고 하는 우리의 첫 번째 경험을 다시 고려해보고, 그것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술해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일상생활에서 무엇이 기적이라고 일컬어질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그와 같은 것을 우리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단순히 그런 사건입니다. 이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여러분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머리가 자라 사자의 머리가 되고 포효하기 시작하는 경우를 들어 봅시다. 확실히 그것은 제가 상상할 수 있는 한, 비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놀라움에서 벗어날 때는 언제나, 저는 의사를 데려와서 그 경우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도록 할 것을 제안할 터이고, 또 그를 해치는것이 아니라면 저는 그의 생체를 해부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이런 식으로 바라볼 때, 기적적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기적’이란 용어로 의미하는 것이 단지, 하나의 사실이 과학에 의해 아직 설명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이 사실을 과학적 체계 내의 다른 사실들과 조화롭게 배치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이것은 “기적이 없다는 것을 과학이 증명했다”고 말하는 것이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실은, 사실을 바라보는 과학적 방식은 그것을 기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실을 여러분이 상상하건, 그것은 그 자체로는 기적적이라는 용어의 절대적인 듯에서 기적적이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우리가 “기적”이라는 낱말을 상대적인 뜻과 절대적인 뜻에서 사용해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세계의 존재에 대해 경탄하는 경험을, 그것은 세계를 하나의 기적으로 보는 경험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기술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세계의 존재라는 기적에 대해 올바른 언어 표현은, 비록 언어 내의 어떠한 명제도 아니지만, 언어 자체의 존재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그라니 그렇다면 이 기적을 어떤 때에는 알아차리고 어떤 때는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왜냐하면 제가 말한 것, 즉 제가 기적적인 것의 표현을 언어에 의한 표현으로부터 언어의 존재에 의한 표현으로 전환함으로써 말한 것은 다시, 우리는 우리가 표현하기를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으며, 절대적으로 기적적인 것에 관해 우리가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 중 많은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완전히 분명해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 어떤 경험들이 우리가 절대적 또는 윤리적 가치와 중요성이라고 부르는 성질을 자신들에게 부여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면, 이것이 보여 주는 것은 단순히, 이 말들에 의해 우리는 어떤 경험이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는 말로 뜻하는 것은 어쨌든 다른 사실들과 같은 그저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의 귀착점은 결국 우리가 우리의 윤리적 표현들과 종교적 표현들로 의미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논리적 분석을 발견하는 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저에게 반대해서 강력히 제기될 때, 저는 마치 전광석화처럼 즉시 명료하게 봅니다-제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기술도 제가 절대적 가치로 의미하는 것을 기술하기에 좋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혹시 제안할 수 있을지 모르는 모든 유의미한 기술을 그것의 유의미성을 이유로 처음부터 제가 물리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즉, 저는 이제 이 무의미한 표현들은 제가 아직 올바른 표현들을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무의미성이 바로 그것들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무의미했다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들을 가지고 하기를 원한 것은 그저 세계를 넘어서는 것, 즉 유의미한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모든 경향은,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윤리학이나 종교에 대해 쓰거나 말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의 경향은, 언어의 한계들에게로 달려가 부딪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새장 벽에로 이렇게 달려가 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절대적으로 희망 없는 일입니다. 윤리학이 삶의 궁극적 의미, 절대적 선, 절대적 가치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발생하는 한, 윤리학은 과학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정신 속의 한 경향에 대한 기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정신을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죽어도 그것을 비웃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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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학기에 발표했던 비트겐슈타인 발제문


『논리철학논고』

1. 논리철학논고의 기획

『논리철학논고』는 철학사의 위대한 책 중 하나로 꼽히지만, 동시에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다루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배경설명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그는 논의를 전개하다 갑작스레 프레게와 러셀을 비판하기도, 해설하기도 한다. 따라서 책을 읽기 전에, 현대 논리학과 그로부터 파생된 논의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두 번째로, 논고에는 수많은 논증이 제시되지만 그 내용을 엄청나게 압축하고 있어,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논고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이와 비슷한 사고를 이미 스스로 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을 발제하는 건 어쩌면 무의미할지 모른다. 곳곳에 나오는 물음들에 대한 배경을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고, 논증에 대한 해석마저 학자들마다 분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논고의 기획을 먼저 제시하고 그 기획을 급급히 따라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논고는 기존의 철학적 문제들이 우리가 언어논리를 오해하여 발생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의 목표는, 사고에 한계를, 더 정확히는 사고의 표현(언어)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고에 한계를 설정하기 위해선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모두 생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한계를 언어에 설정할 수밖에 없으며 그 한계 밖에 있는 것은 그저 헛소리에 불과하다. 예컨대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만 한다.” (머리말)

다음은『논고』의 논의가 진행되면서 나오는 4가지 핵심적 물음들이다. :

(Ⅰ)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Ⅱ) 어떻게 명제는 뜻을 지닐 수 있는가?

(Ⅲ) 왜 어떤 명제는 뜻 있는 명제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뜻을 지니지 않는가?

(Ⅳ) 왜 요소 명제들의 진리함수가 아닌 명제들은 뜻을 지니지 않는가? 이 명제들의 성격은 어떠한가?

(Ⅰ)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대답은, 뜻 있는 명제, 예컨대 자연 과학의 명제들이다. 이외의 명제들은 뜻이 없기에 유의미하게 말할 수 없다. 이는 (Ⅱ)으로 이어져 세계와 언어의 관계를 규명한다.

2. 세계와 언어

(Ⅱ)에 대해 답변은 두 가지다. 첫 번째로 명제는 사실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 이를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기호"와 "상징"을 구분한다. 명제는 일종의 기호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명제 기호"는 일종의 사실이고, 또 오직 사실들만이 뜻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명제는 뜻을 지닐 수 있다.

두 번째로 명제는 “그림”일 수 있기에 뜻을 지닐 수 있다. 이것은 그림 이론으로 나타난다. 명제는 상징으로 파악될 수도 있으며, 이러한 명제는 하나의 그림으로서, 뜻을 지니는 부분의 함수이다.

이제 존재론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닌 사실(일어나는 일)들의 총체다. 간단히,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모든 경우들 전체이다. 세계는 사실들, 즉 성립할 수 있는 모든 경우들 중 실제로 성립하는 경우들로 이루어지며, 또 이것으로 인해 확정된다. 왜냐하면 사실들 전체가 실제로 성립하는 경우들을 확정하는 동시에, 실제로 성립하지 않는 경우들도 확정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사물들"이 아닌 "사실들"인 이유는 간단히 말해, 세계가 대상들(사물들)을 그저 모아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시계의 부속품들을 그저 모아놓은 것이 시계가 아닌 것과 같다. 시계의 부속품들이 모여 시계가 되려면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태(사물의 상태)들의 존립(exist)이며, 다시 사태는 대상들의 결합이다. 사태들이 모여서 사실이 되기에 사태는 원자적(atomic fact)이다. 사태는 어떤 한 요소 명제가 참일 때 거기에 대응(존립)한다. 마지막으로 사태들 간엔 어떤 필연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기에 사태들은 논리적으로 상호 독립적이다. 대상은 단순한 것으로서 대상들의 어떤 일정한 배열이 사태를 형성한다.

이제 세계와 언어의 관계를 살펴보자.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세계는 언어와, 사실은 명제와, 그리고 사태는 요소 명제와 대응한다. 따라서 언어는 명제들의 총체이고, 명제는 요소 명제들로 이루어지며, 요소 명제 이름들의 연쇄이다.

명제는 "명제 기호"와 "상징"의 두 부분으로 파악된다. 상징은 뜻을 지니는 것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눈은 하얗다"라는 명제는 뜻의 측면에서 하나의 상징이다. 기호는 "상징에서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이다. "김구"라는 상징에서 활자 모양이나 색깔 등과 같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호이다. 따라서 상징은 뜻과 관련되고, 기호는 물리적, 지각적 측면과 관련된다.

"명제 기호" 는 "명제"라는 상징에서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이므로, 세계와 투영적 관계에 있는 하나의 사실이다. 그런데 오직 사실들만이 뜻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명제는 뜻을 지닐 수 있다. 명제는,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사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며, 사태가 그렇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명제 기호가 하나의 사실이라는 점은 명제 기호를 문자 기호로 생각하지 말고 책상이나 의자, 또는 책 같은 것들로 합성되어 있다고 상상해 본다면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문자 기호를 공간적 대상들로 생각해 보면 "명제 기호의 본질"이 매우 분명해진다. "그 경우 이러한 사물들 상호간의 공간적 위치가 그 명제의 뜻을 표현한다."(3.1431)

요소 명제는 사태가 대상들의 결합인 것과 대응해서 "이름들의 연쇄"(4.22) 이다. 이름은 요소 명제를 통해서만 명제 속에 나타날 수 있다 이 때 이름은 대상을 대표하며, 이러한 대상의 연쇄는 마치 "활인화"처럼 사태를 대표한다(4.0311). 따라서 요소 명제가 참이면, 사태는 존립한다.; 요소 명제가 거짓이면, 사태는 존립하지 않는다.

3. 그림이론

비트겐슈타인은 어느 재판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난 과정을 모형을 통해 설명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림이론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모형(모델)이 사실을 묘사할 수 있다는 것에서 명제 또한 그러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림을 그려서 어떤 사실을 묘사하듯이, 명제를 통해서 어떤 사실을 그린다. 요컨대, 명제는 현실의 그림이다.

명제가 그림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과 일정한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그 둘은 매우 다르게 보이지만 어떤 “공통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령, 음악은 그것을 그린 악보와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음악가가 악보로부터 교향곡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규칙이 존재하며, 그로부터 이끌어낸 교향곡을 다시 처음의 규칙에 따라 악보로 만들 수 있다. 이는 악보와 교향곡이 내적인 유사성을 지니며, 악보가 교향곡을 악보로 투영하는 투영 법칙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명제가 사실의 그림일 때, 사실은 명제에 투영되어 있으며, 그 규칙은 논리적 형식이다. 음악가가 악보로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우리는 명제를 통해 사실을 이해한다.

명제는 사실의 그림을 그릴 때 사실을 모사한다. 따라서 명제의 논리적 형식은 바로 “모사 형식”이다.(엄밀하게는 모사 형식이 논리적 형식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모사형식은 그림과 그려지는 것 사이의 공통된 어떤 것이다.

이러한 모사 형식에 따라 그림(명제)은 현실을 묘사한다. 요소 명제는 사태를 묘사하며, 명제는 사실을 묘사한다. 사실들만이 뜻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는 것(뜻 있는 명제)은 오직 사실을 모사한 그림(명제)들뿐이다. 그 외에는 뜻을 결여하거나 무의미하다. 따라서 "비가 온다."라는 명제는 한편으로는 명제 기호로서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태나 사실과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는 그림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 그림이 현실과 일치하면 명제는 참이고, 일치하지 않으면 거짓이다. 이를 알려면, 그림을 현실과 비교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오로지 그림만으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2.224).

4. 진리함수 이론

진리함수 이론은 (Ⅲ)에 대한 해명작업이다. "비가 온다."라는 명제와 달리 왜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 같은 명제는 하나의 명제기호로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뜻을 지니지 않는가? 이 명제들은 모두 요소 명제들에 대해 어떠한 조작을 가해 얻어진,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그러나 뜻이 없는 명제들은 사실에 대한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진리표를 통해 드러난다. 먼저, 요소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요소 명제는 다른 요소 명제와 독립적이며, 다른 어떤 요소 명제와도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p

T

F

1) 요소 명제 p에 대해서,

T와 F는 요소 명제의 "진리 가능성"이고 이는 각각 사태의 존립과 비존립의 가능성을 의미한다(4.3).

p

q

T

T

F

T

T

F

F

F

2) 두 개의 요소 명제는 다음의 진리 가능성들을 지닐 수 있다 :

진리 가능성의 개수는 요소 명제가 1개인 경우 1개- TF이고, 2개인 경우 4(=2²)개- TT/ FT/ TF/ FF이며, 3개인 경우 8(=2³)개이다. 일반적으로, 요소 명제가 n개인 경우 2ⁿ이다.

p

q

T

T

T

F

T

T

T

F

F

F

T

3) 예컨대, 아래의 진리표는 하나의 명제기호로 기능한다.

도식에서 진리가능성들의 순서가 조합규칙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면, 마지막 세로 칸은 그것만으로 진리조건의 표현이다. 위 진리표의 경우, "p ⊃ q"라는 명제를 드러냄을 알 수 있다. 진리 가능성의 일치 및 불일치 표현은 명제의 진리 조건들을 표현하므로, 진리 조건만으로도 한 명제를 표현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명제는 그 진리조건들의 표현이다. 따라서 위 진리가능성들의 순서조합은 명제 "p ⊃ q"의 진리조건을 나타내고, 명제 "p ⊃ q"는 위 진리조건들의 표현이다. 이 세로 칸을 일렬로 적어, (TT_T)(p, q)로, 보다 뚜렷하게 (TTFT)(p, q)로 나타낼 수 있다. 또, 이를 간단히 TTFT로 나타내면 "p ⊃ q"명제를 대신할 수 있다. 진리표만으로도 명제 "p ⊃ q"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4.42 어떤 한 명제와 n개 요소 명제의 진리 가능성들과의 일치 및 불일치에 관해서는 개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요소 명제가 2개가 있는 경우 진리조건들의 가능한 조합은 16(=)이다.

(TTTT)(p, q): (p ⊃ p. q ⊃ q) - 동어반복 (항진 명제)

(FTTT)(p, q): (~(p. q)) / (TFTT)(p, q): (q ⊃ p) / (TTFT)(p, q): (p ⊃ q) /

(TTTF)(p, q): (p ∨ q) / (FFTT)(p, q): (~q) / (FTFT)(p, q): (~p) /

(FTTF)(p, q): (p.~q : ∨ q.~p) / (TFFT)(p, q): (p ≡ q) / (TFTF)(p, q): p / (TTFF)(p, q): q

(FFFT)(p, q): (~p.~q) 또는 (p|q) / (FFTF)(p, q): (p.~q)/ (FTFF)(p, q): (q.~p) /

(TFFF)(p, q): (p. q) / (FFFF)(p, q): (p.~p. q.~q) - 모순 (항위 명제)

여기서 동어반복과 모순의 두 극단적인 경우들을 확인할 수 있다.(4.46) 동어반복의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모든 진리 가능성들에 대해 참이다. 모순의 명제는 모든 진리 가능성들에 대해 거짓이다. 이들은 뜻 있는 명제들과 유사하나, 그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1> 동어반복과 모순은 뜻을 상실해 있다. 예를 들어,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알 때, 내가 날씨에 관해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뜻이 있는) 명제는 자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보여 주는데, 동어 반복과 모순은 자기들이 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보여 준다.

<2> 그러나 동어 반복과 모순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며, 산술에서 0이 하는 것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3> 동어반복과 모순은 현실의 그림이 아니다. 그것들은 가능한 어떤 상황도 묘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동어반복은 확실성과 필연성에 대응하고, 명제는 가능성에 대응하며, 모순은 불가능성에 대응한다.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는 명제는 비가 오던 오지 않던 간에 항상 참이다. “비가 오고, 또 비가 오지 않는다.”는 명제는 항상 거짓이다.

p ∨ q를 p와 q의 진리 함수라고 하는데, 이는 p와 q의 진리치가 결정되면 이에 따라 p ∨ q의 진리치도 결정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뜻 있는 명제와 동어반복, 모순은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그런데 논고에서는, 진리 함수 외에도 진리 조작이란 표현이 나오며, 비트겐슈타인은 함수와 조작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먼저, 비트겐슈타인은 "조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5.2 명제들의 구조들은 서로 내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5.21 우리는 명제를 어떤 조작의 결과로서, 즉 한 명제를 다른 명제들(조작의 토대)로부터 산출하는 조작의 결과로서 묘사함으로써, 이러한 내적 관계들을 우리의 표현 방식 속에서 부각시킬 수 있다.

5.23 조작은 한 명제로부터 다른 명제들을 만들어 내려면 그 명제에 행해져야 하는 그런 것이다.

조작은 "명제의 논리적 구성"과 직결되는 개념이다. "~p"의 구조는 "~~p"의 구조와 "내적인 관계"에 있다. "~p"에 "~"라는 조작을 하면 "~~p"가 나오듯이 명제 p에 "~"라는 조작을 계속 적용하면, 그렇게 산출된 내적 관계에 의해 배열된 계열이 드러난다. : p, ~p, ~~p, ~~~p, ~~~~p, ~~~~~p, … 이것을 조작의 "계속적 적용"이라 부르며, 이 계열을 "형식 계열"이라 하여, [p, x, O'x]로 나타낸다.(x는 임의의 항, O는 조작의 기호)

그런데 여기서, 함수와 조작의 근원적인 차이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어째서 함수와 조작을 엄격히 구분했는지 알 수 있다. 함수는 자기 자신의 독립 변수가 될 수 없지만, 조작의 결과는 자기 자신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예컨대, F(F(fx))에서 두 "F"는 형식이 다르기에 동일하지 않지만, ~(~p)에서 "~"는 형식과 관련 없이 동일하다. 따라서 진리 함수들은 사실 실질적 함수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스스로 자신의 토대이자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들이 요소 명제들을 토대로 가지는 조작들의 결과이므로, 이를 진리 조작이라 부른다. 따라서 모든 명제는 요소 명제들에 대한 진리 조작의 결과다. "p & q"는 p와 q의 진리 함수이며, "&"라는 진리 조작을 적용한 결과다. "~~p"는 p의 진리 함수이며, "~"라는 진리 조작을 두 번 적용한 결과다.

이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동치"의 문제를 해결한다. 예컨대 이중 부정을 통해 긍정을 산출할 때, 부정은 긍정 속에 포함되는가? ~~p는 ~p의 부정인가?, p의 긍정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라고 불리는 대상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p는 p와 논리적 동치이기에 동일한 것을 말해야하므로, "~~p"에서 "~"가 있다는 점이 명제의 뜻을 특징짓지 못한다. 이는 조작들이 서로를 상쇄하여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분명하다.(~~p = p) 따라서 위의 물음은 애초에 무의미한 것이다. 그리하여, 논리적 상항들은 세계에 속하는 어떤 것을 대표하지 않는다. 명제 "p ⊃ q"와 "~p ∨ q"는 논리적 동치이며, "p ∨ q"가 "~p ⊃ q"로 정의되는 것처럼 교차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즉, 그것들은 외적인 형식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 동일하므로 ~나 ∨, ⊃와 같은 논리적 상항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적 상항은 원초적 기호(세계를 기술하는 데 있어 어떤 본질적인 것)가 아닌 문장을 이해할 때 필요한 보조 수단, 구두점들이다. 또한, 요소 명제 “p”가 p ∨ p, p & (~p ∨ p), p ∨ (p ⊃ p) 등과 동치라는 점에서, p속에는 ~, ∨, & 와 같은 모든 논리적 조작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5.47 요소 명제는 모든 논리적 조작을 본질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 우리는 “유일한 논리 상항”은 모든 명제가 본성상 서로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명제가 본성상 서로 공유하는 것은 명제의 일반형식이다.

따라서 논리적 상항은 실로 하나뿐이며 모든 논리적 상항들(논리적 사이비 관계)을 관통한다. 이 원초적 기호를 “명제의 일반형식”이라 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명제의 본질을(5.471), 다시 말해, 세계의 본질을 제시할 수 있으므로, "명제의 일반 형식"이 정의되면, 물음 Ⅲ에 대한 대답은 완결된다.

5.5 모든 진리 함수 각각은 ( _ _ _ _ _ T)(ξ, ····)라는 조작을 요소 명제들에 계속적으로 적용한 결과이다. 이 조작은 오른편 괄호 속의 명제들 전체를 부정하며, 나는 이 조작을 명제들의 부정이라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간단히 라고 표기한다. 이것은 (FT)(p), (FFFT)(p, q), (FFFFFFFT)(p, q, r) 등과 같은 것을 간단히 로 표기하는 것이다. 이 때, "ξ"는 "괄호 표현의 항들을 그 값으로 가지는 하나의 변항"(5.501)이고, 는 명제 변항 ξ의 값 전체의 부정이다.

그런데, 조작 N은 특수한 종류의 부정이다. 논리학에서의 "부정"이 한 문장이나 명제에 대해 적용되는 반면, 조작 N은 다수의 명제들에 대해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 부정)이나 "|"(선택 부정)은 2항 관계에서만 적용가능하나, 조작 N은 임의의 n항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구분을 위해 조작 N을 간단히 "W-부정"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다음의 두 가지 사실들:

(1) W-부정에서 ξ가 두개의 값을 가지는 경우, 동시 부정 "↓"과 동일하다

설명: 5.51 ξ가 오직 하나의 값만을 가진다면, = ~p이며, ξ가 두 개의 값을 가진다면, 이다. (...) 이 경우에는 = ~p & ~q (p도 아니고 q도 아니다)이고, 동시부정 "p↓q"의 진리표는 (FFFT)(p, q)= ~p & ~q이기 때문에 둘은 동일하다.

(2) 논리학에서 모든 논리식(진리 함수)들을 동시부정"↓"만을 사용해서 표현될 수 있다.

설명: 예컨대 ~p는 p↓p로, 그리고 p ∨ q (p가 옳거나 q가 옳다)는 (p↓q)↓(p↓q)로 표현된다.

(1), (2)을 통해 모든 명제들은 N 조작의 계속적 적용을 통해 표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 또는 명제의 일반적 형식을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6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은 []이다.

6.001 모든 명제 각각은 요소 명제들에다 라는 조작을 계속적으로 적용한 결과이다.

5. 여러 명제들& 유아론

그림이론과 진리 함수 이론을 통해 질문(Ⅱ)과 질문 (Ⅲ)이 해결되었다.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만이 뜻을 지닐 뿐이라면, 그 외의 명제들은 무엇인지, 또 왜 그런 명제들은 뜻이 없는지에 대한 물음이 생겨난다. - 물음 (Ⅳ) 이를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여러 명제들을 비교하여 그 차이를 드러낸다.

먼저, 논리학의 명제는 동어반복이므로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면서도 뜻을 결여하는 명제“이다.

6.1 논리학의 명제들은 “항진명제”(동어 반복들)이다.

6.11 따라서 논리학의 명제들은 (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

6.13 논리학은 이설(異說)이 아닌, 세계의 거울상이다. 논리학은 선험적[초월적, transcendental]이다.

<1> 뜻 있는 명제가 사실에 대한 그림이라면, 논리학의 명제들은 동어 반복을 통해 언어와 세계의 형식적 속성을 보여준다(6.12). 따라서 논리학의 명제는 세계의 골격을 기술하는 분석적 명제이다.

<2> 또한 논리학의 명제는 선험적(초월적)이다. 어떤 뜻 있는 명제가 참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 명제를 세계의 사실과 비교해야만 한다. 반면에 논리학의 명제들은 그 상징만으로도 그 명제들이 (논리적으로) 참인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논리적 명제들의 특수한 징표"이다.

<3> 마지막으로 논리학의 명제들은 항상 필연적으로 참이다. 뜻 있는 명제들은 경험에 의해서 반박되거나 확증될 수 있지만, 논리학의 명제는 (세계의 골격을 기술할 뿐이므로) 가능한 어떤 경험에 의해서도 그럴 수 없다. 논리적 법칙들은 그 자체로서 근원적이고 필연적이다.

6.3 논리의 탐구는 모든 법칙성의 탐구이다. 그리고 논리 밖에서는 모든 것이 우연이다.

6.375 필연성은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이 존재하듯이, 불가능성도 오직 논리적 불가능성만이 존재한다.

반면에, 자연과학의 명제는 뜻 있는 명제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들은 논리학과 달리 사실들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요소 명제의 진리 함수"이지만, 논리학의 명제들은 필연적으로 참이고 자연 과학의 명제들은 우연적으로 참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자연과학의 법칙은 뜻 있는 명제로 간주하면서, 다른 법칙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먼저 "귀납 법칙"은 뜻을 지닌 명제로 간주된다(6.31). 어떤 일이 충분히 많은 횟수로 반복해서 일어났을 때, 다음에도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논리적 법칙이 아니다(6.31). 지금까지 매일 해가 동쪽에서 떠올랐으므로 내일도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리라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따라서 귀납 법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다.

반면, 보존 법칙이나 인과성의 법칙은 법칙이 아니라 법칙의 형식이며, 과학의 명제들이 지닐 수 있는 가능한 형식에 관한 통찰들이다. 이러한 법칙들은 뜻 있는 명제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법칙들을 다루는 것이 역학으로, 간단히 말해, 세계에 어떤 하나의 통일된 형식을 기술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과학은 뜻 있는 명제들로 이루어진 법칙들과 뜻을 결여하는 명제들로 이루어진 법칙들로 동시에 이루어져 있다.

윤리학과 미학의 명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초월적인 것이다(6.421). 그것들은 모두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가 아니기에 무의미하다. 물론 이는 그것들이 헛소리라는 것이 아니다.

6.42 따라서 윤리학의 명제들도 역시 존재할 수 없다. 명제들은 보다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없다.

6.421 윤리학이 언표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윤리학은 선험적[초월적, transcendental]이다.

"(뜻있는) 명제들은 보다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없다"(6.42b) 따라서 "(뜻 있는) 윤리학의 명제"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의 명제들은 "존재할 수 없다"(6.42a).

또한 필연성에는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이 존재하므로(6.375),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한다 해서 그것이 일어나야 할 논리적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이며(6.373), 우리가 원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운명의 은총"에 불과하다(6.374).

그런데 어떤 것이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비우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이 세계에 우연적으로 존재하므로, 모순이 발생한다. 비우연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이 우연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는 세계밖에 놓여야 한다.(6.41) 옳음, 좋음, 선악 등의 가치는 세계 밖에 있는 보다 높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윤리적인 것을 소유하는 주체인 의지에 관해서 말할 수 없다(6.423a).

비트겐슈타인은 의지에 대해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단지 세계의 한계들을 바꿀 수 있을 뿐”이며(6.43a), “선악의 의지를 통해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6.43b)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논고의 세계 개념은 뒤집히고, 이것은 유아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유아론이 나오기 이전의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로서 어떤 주체와도 독립적이었다. 반면 "유아론"과 관련된 "세계"는 주체와 관련되며 주관적 세계이다. 따라서 그 주체가 죽으면, "세계는 바뀌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다."

5.61 (...) 세계의 한계들은 또한 논리의 한계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이것과 이것은 세계 내에 존재하고, 저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논리의 한계들을 넘어서는 것이고, (논리학의 명제들은 세계의 골격을 기술하므로) 세계의 한계들을 넘어서는 것이며, 말할 수 없는 것은 언어의 한계들을 넘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이고, 세계의 한계들은 또한 논리의 한계들이다.

그런데 논리학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논리학에서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이 존재할 수 없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야 할 텐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내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뜻 있는 명제이지 필연적인 명제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존재한다."는 어떠한가? 도대체 "나는 존재한다."의 확실성을 의심할 수 있는가? "이 책상은 존재한다."와 "나는 존재한다."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책상의 존재는 경험적인 것이지만,"형이상학적 주체"로서의 나의 존재는 하나의 논리적 요청이며 경험을 비로소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때문에, 유아론이 뜻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다만 그것은 말해질 수는 없고, 스스로 드러날 뿐이다.

5.621 세계와 삶은 하나다.

5.63 나는 나의 세계이다. (소우주)

6. 철학의 역할

이제 논고의 근본 물음 중 하나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철학의 명제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4.0031 모든 철학은 "언어 비판"이다. (...)

4.112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철학은 이설(異說)이 아니라 활동이다. (...)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들"이 아니라, 명제들이 명료해짐이다.

철학은 말하자면 흐리고 몽롱한 사고들을 명료하게 만들고 명확하게 한계를 그어야 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은 사고를 명료화하는 활동이다. 언어는 사고를 위장하고, 따라서 명제의 논리적 형식은 실제 형식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무의미한 물음과 명제들이 생겨난다. 따라서 철학의 목적은 명제나 물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언어비판을 통해 그러한 대부분의 물음과 명제들이 “거짓”이 아닌 "무의미"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4.003)

4.11 참된 명제들의 총체가 전체 자연 과학(또는 자연과학들의 총체)이다.

4.111 철학은 자연 과학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철학"이란 낱말은 자연 과학들의 위 아니면 아래에 있는 것을 의미해야지, 자연 과학과 나란히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명료화함으로써, 그리고 무의미한 것에는 그 무의미성을 확립함으로써 명료화 활동을 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자연 과학의 논란 많은 영역을 확정하며(4.113), 생각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그음과 동시에, 생각할 수 없는 것에 한계를 긋는다(4.114). 이로써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통해 궁극적으로 사유의 한계를 그을 수 있음을 보인다. 그 방법이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4.115).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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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16:25 현대 철학/분석철학

언어철학 정리

2015년 2학기 "언어 철학" 수업을 정리한 글


1. 소박한 의미론

소박한 의미론은 “언어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간단하고 보편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이다. 이를테면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이름은 그 이름이 지칭하고 있는 실제 사람을 지시하며, 그것이 바로 그 이름의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자’의 의미는 개별 물리학자들의 집합과 같다. “리처드 파인만은 물리학자다.”가 참인 이유는 ‘리처드 파인만’이 지시하는 대상이 ‘물리학자’의 원소이기 때문이다.

2. 소박한 의미론의 난점

(1) 동일한 지시체를 지시하면서 의미가 달라보이는 두 표현

김대중 = 2001년 12월의 한국 대통령?

이것을 참으로 받아들인다면

2001년 12월의 한국대통령 = 2002년 1월의 한국대통령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둘의 의미는 명백히 다르다.

따라서 소박한 의미론은 옳지 못하다.

동일한 지시체를 가진 단어

소박한 의미론 -> 동의어

직관 -> 동의어가 아님

(2) 지시체를 결여하는 경우

네모난 삼각형과 같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 셜록 홈즈와 같은 가상(소설 속)의 인물, 용이나 페가수스와 같은 환상속의 대상

(...)은 일각수이다.

(...) 자리엔 singular term이 들어가야함.

일반 명사 ‘유니콘’이 지시하는 대상 -> 공집합

일반 명사 ‘페가수스’가 지시하는 대상 -> 공집합

두 일반 명사가 같은 집합(공집합)을 지시하므로, ‘유니콘’과 ‘페가수스’의 의미는 같아야한다.

그러나 둘의 의미가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부정적 존재 언명의 경우 -> “셜록홈즈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 명제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가 있는” 명제이다.

그러나 소박한 의미론에 따르면 지시체를 결여하는 고유 명사는 의미 역시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소박한 의미론을 수용하여 셜록 홈즈의 의미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그러한 표현을 주어로 가지고 있는 문장 역시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셜록홈즈라는 표현이 들어가있는 문장은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참인 진리치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불투명한 맥락

소박한 의미이론을 따르면 진리치 보존의 법칙과 모순되는 결과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S) 한 문장 내에서 그 문장을 구성하는 한 단어를 동일한 의미의 단어로 대체할 경우, 두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의 진리치는 동일해야한다.

*진리치 - 명제가 사실과 일치하면 진리치는 참이며, 사실과 일치하지 않으면 진리치는 거짓이다.

3-1 명제적 태도

<이광수는 ‘흙’의 저자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내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믿음, 믿지 않음, 희망함, 의심함, 두려워함 등의 태도이다. 이러한 문장을 명제적 태도를 지닌 문장이라 한다.

a) 철이는 이광수가 흙의 저자라고 생각한다.

b) 철이는 춘원이 흙의 저자라고 생각한다.

철이는 이광수가 흙의 저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광수의 호가 춘원이라는 사실은 모른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a)는 참이지만, b)는 거짓이 된다. b)의 종속절의 내용은 참이지만 철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진리치는 주절의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는가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소박한 의미론에 따르면 ‘이광수’와 ‘춘원’사이의 의미차이는 없다. 그러나 a)와 b)에서 진리치가 변했다는 것은, '이광수‘와 ’춘원‘의 의미가 동일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2 양상 문맥

양상은 필연성, 가능성에 대해 다룬다. 양상문맥이란 필연성 가능성 등의 양상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를 말한다.

c) 필연적으로, 9는 7보다 크다.

d) 필연적으로, 행성의 수는 7보다 크다.

행성의 수가 지칭하는 수는 9이므로, 소박한 의미론에서 ‘행성의 수’와 ‘9’의 의미는 동일하다. 하지만 c)는 참인 반면 d)는 거짓이다. 행성의 수는 7보다 작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성의 수가 7보다 작은 경우를 상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행성의 수가 7보다 큰 것은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인 명제이고 따라서 d) 명제는 거짓이다.

3. 서술이론 개요

서술이론은 단어의 의미가 지시 대상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명사의 경우, 관련된 서술의 의미가 곧 그 고유 명사의 의미 결정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이러한 서술을 만족시키는 대상이 바로 그 단어의 지시체가 된다.

그러나 서술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론마다 이견이 있다. 프레게는 관련된 서술을 그 언어적 표현과 관련된 객관적 서술로 이해하는 반면, 러셀은 주관적 서술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프레게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한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고유명사와 관련되어 거의 무한하게 나올 수 있는 객관적 서술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술이론에서는 인식 주관이 알고 있는 주관적 서술을 관련된 서술로 인정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서로 다른 관련된 서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4. 프레게 의미론

(1) 프레게 퍼즐 : 인지적 가치의 문제

동일성 명제(identity statement)의 문제

동일한 지시 대상을 지니면서 의미가 다른 두 단어는 소박한 의미론에 대한 심각한 문제로 작용하게 된다.

a) 이광수는 이광수이다.

b) 이광수는 춘원이다.

a)와 b)는 각각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그 둘은 인지적 가치가 다르다.

<1> a)는 a posteriori한 종합판단이다.

<2> b)는 a priori한 분석판단(동어반복)이다.

<3> 만약 a)가 a posteriori한 종합판단이고, b)가 a priori한 분석판단이라면, a)와 b)의 인지적 가치는 다르다.(If, Then)

<4> a)와 b)의 인지적 가치는 다르다.

<5> 인지적 가치가 다른 두 문장의 의미는 항상 다르다.

<6> a)와 b)의 의미는 다르다.

<7> 만일 두 문장의 의미가 다르면서, 다른 곳은 모두 동일하며 한 곳에서만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두 문장의 차이는 그 단어의 의미차이에서 일어난다.

<8> a)와 b)에서 유일하게 다른 지점은 a)에서 춘원이, b)에서 이광수가 쓰였다는 것이다.

<9> 춘원과 이광수의 의미는 다르다.

<10> 소박한 의미이론은 틀렸다.

소박한 의미이론의 입장에서 반박할만한 부분 <3>: 인지적 가치는 허상이다. <5> : 인지적 가치의 차이가 의미의 차이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7>

(2) 프레게의 해결책

1) 춘원과 이광수는 동의어가 아니다.(지시체는 같지만 뜻이 다름)

2) 의미는 지시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뜻도 의미를 결정한다.)

3) 의미는 뜻(sinn, sense) 과 지시체(Bedeutung, reference)로 구성되며, 이중으로 구분할 수 있다.

(3) 뜻의 의미

1) 고유명사의 ‘뜻’이란 그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인식 주체에게 주어지는 방식이나 양식(mode of presentation)이다. 같은 대상이라도 어떤 사람에겍 그것이 보여지는 방식이 다를 수 있듯이, 같은 지시체를 가지는 단어들이라 할지라도, 각 단어가 가지는 ‘주어지는 양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삼각형 세 꼭지점 ABC에서 마주보는 선분의 중점으로 그은 중선을 각각 abc라고 할때 선분 a와 b의 접점은 선분 b와 c의 접점 선분 c와 a의 접접과도 동일하며 그것이 바로 p이다. 따라서 ‘선분 a와 b의 접점’, ‘선분 b와 c의 접점’, ‘선분 c와 a의 접점’이라는 표현(주어지는 양식)은 모두 다르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지시체)는 P로 동일한 것이다. 이렇게 단어가 지니는 뜻(과정)이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의 지시체(도달하는 귀착점)은 모두 같을 수 있다.

2)프레게에 의하면 뜻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객관적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뜻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파악된 대상(인식적 개념)이 아닌 인간에게 파악되지 않고도 객관적으로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이를 프레게는 망원경의 렌즈에 맺힌 상에 비유를 하고 있다. 밤하늘에 있는 별은 객관적인 대상이며, 그 별이 망원경의 렌즈를 통해서 우리의 시신경을 자극하여 머릿속에서 별을 인식하게 된다. 별을 지시체로 비유할 수 있다면, 뜻은 우리가 인식한 머릿속의 별이 아닌, 망원경의 렌즈에 맺혀 누가 그것을 보더라도 그 사람의 시신경을 자극할 수 있는 객관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3) 뜻은 어감, 어조와는 별개의 것이다.

a)나는 어제 밥을 많이 먹고 바로 잠을 잤다.

b)나는 어제 밥을 많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잠을 잤다.

a)와 b)가 전달하는 말의 어조나 느낌은 다르지만, 이러한 차이가 뜻의 차이는 아니라는 것이 프레게의 주장이다. 그 까닭은 a)와 b)의 어조 차이가 진리치 결정에 있어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a)와 b)를 기호화할 경우 어감이나 어조의 차이와는 무관하게 같은 문장으로 기호화된다. 따라서 기호 논리로 번역했을 때 차이를 갖지 못하는 두 문장은 의미 역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4) 뜻은 지시체를 결정한다. ‘주어지는 양식’에서 알 수 있듯이 뜻이란 관련된 지시체를 찾아가는 나침반의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단어의 지시체를 알기 위해선 그 뜻을 만족시키는 대상을 알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 있어 임의의 두 단어 t1, t2가 있을 때, t1과 t2의 뜻이 모두 동일하면, 그 단어들의 지시체도 같은 것이 된다. 따라서 그 단어의 지시체를 찾기 위해서는 그 단어의 뜻을 만족시키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면 된다.

(4) 개념과 대상 (Concept and Object)

1) 대상 :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개체 (individual)

2) 개념 : 함수 - 정의역의 원소 모두가 각각 하나의 치역의 원소와 대응 하는 것

IF f(x) = y and f(x) = z, then y = z

개념 : 대상 ->진릿값으로의 함수

술어와 유사하나 동일하지는 않은 것

대상- 고유명사의 지시체

개념- 개념단어의 지시체(대상이 input, 진릿값이 output)

( )는 가수이다.

( )안에는 고유명사가 들어가며 이것은 대상을 지칭한다.

<~는 가수이다.>는 개념 단어

개념은 대상으로부터 진릿값으로의 함수

ex) 모든 사람은 죽는다.

(...)는 죽는다. : 개념 Mx

사람은 대상이 아닌 개념이다.

(...)는 사람이다. : 개념 Hx

(...) : unsaturatedness

원칙적으로 개념은 (...)안에 들어갈 수 없음.

모든 대상 x에 대하여 -> ∀x( )

만일 x가 사람이면, then x는 죽는다. Hx -> Mx

∀x(Hx -> Mx)

모든<- 2차 개념

Hx-> Mx <- 1차 개념

1차 개념 :대상을 input, 진릿값을 output으로 하는 함수

2차 개념: 1차 개념을 input, 진릿값을 output으로 하는 함수

뜻과 지시체

뜻 차원의 함수 -> 언어적 측면

지시 차원의 함수 -> 형이상학적 측면

지시체 (Reference)

고유명사의 지시체 - 그 명사가 지칭하는 개별 대상

개념단어의 지시체 - 대상으로부터 진릿값으로의 함수(개념)

문장의 지시체 - 진리치

뜻 (Sense)

고유 명사의 뜻 - 그 명사의 지시체를 만족시키는(결정하는) 한정 서술들

개념단어의 뜻 - 대상으로부터 명제로의 함수

한정서술이 달라지기 때문

문장의 뜻 - 명제

Ex) 이광수는 무정의 작가이다.

1. 이광수 (고유명사)

1) 지시체(Reference) - ‘이광수’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실제 대상

2) 뜻(Sense) - ‘이광수’를 만족시키는 한정 서술들

‘이광수’를 만족시키는 한정 서술들(뜻)이 ‘이광수’가 가리키는 지시대상(지시체)을 결정함

: 뜻이 지시체를 결정함

2. ~는 무정의 작가이다 (개념 단어)

1) 지시체(Reference) - 개별 대상들로부터 진릿값으로의 함수 (개념)

X -> Y

김건모 ~는 무정의 작가이다. (F)

이광수 ~는 무정의 작가이다. (T)

이순신 ~는 무정의 작가이다. (F)

2) 뜻(Sense) - 개별 대상들로부터 명제로의 함수

X -> Y

김건모 ~는 무정의 작가이다. 김건모는 무정의 작가이다.

이광수 ~는 무정의 작가이다. 이광수는 무정의 작가이다.

이순신 ~는 무정의 작가이다. 이순신은 무정의 작가이다.

3. 이광수는 무정의 작가이다 (문장)

1) 지시체(Reference) - 진리치 (T)

2) 뜻(Sense) - 명제(그 문장이 표현하는 내용)

<1>의미는 뜻과 지시체의 결합이다.

<2>고유명사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지시체)과 한정서술(뜻)의 결합이다.

<3>개념 단어의 의미는 개념- 대상으로부터 진릿값으로의 함수(지시체)와 대상으로부터 명제로의 함수(뜻)의 결합이다.

-> 대상으로부터 명제로의 함수가 대상으로부터 진릿값으로의 함수를 결정한다.

<4>문장의 의미는 진리치(뜻)와 명제(지시체)의 결합이다.

(5) 프레게 퍼즐(동일성 명제)의 해법

“이광수는 이광수이다.”와 “이광수는 춘원이다”의 인지적 가치가 다른 이유

이광수와 춘원은 지시체는 같은 반면에, 뜻(이광수와 춘원이 가지고 있는 지시체를 만족시키는 한정서술들)이 다르기 때문에, 의미에 차이가 발생한다. 예컨대 춘원의 뜻은 이광수의 뜻에는 없는 “이광수의 호”라는 한정서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a)와 b)의 의미는 다르다.

(6) 지시체를 결여하는 경우

페가수스와 유니콘의 지시체(공집합)가 동일하다 할지라도 의미가 다른 이유

한정서술(뜻)이 다르기 때문 -> 이것은 고유명사의 뜻일 경우에 성립하므로 올바른 대답이 될 수 없다.

보다 정확히는,

페가수스와 유니콘은 모두 일반 명사 -> 다시 말해 개념단어로 나타남

(...)은 페가수스다.

(...)은 유니콘이다.

개념단어의 함수

지시체

x -> y

임의의 대상 ~는 페가수스이다. 모든 경우에 F

임의의 대상 ~는 유니콘이다. 모든 경우에 F

페가수스와 유니콘 개념단어의 지시체는 동일함.

그러나

x -> y

김건모 ~는 페가수스이다. 김건모는 페가수스이다.

이순신 ~는 페가수스이다. 이순신은 페가수스이다.

로빈슨 부인 ~는 페가수스이다. 로빈슨 부인은 페가수스이다.

x -> y

김건모 ~는 유니콘이다. 김건모는 유니콘이다.

이순신 ~는 유니콘이다. 이순신은 유니콘이다.

로빈슨 부인 ~는 유니콘이다. 로빈슨 부인은 유니콘이다.

따라서 개념 단어 ‘유니콘’과 ‘페가수스’는 뜻 함수의 치역이 다르다.(다시 말해 뜻이 다르고, 이는 곧 의미의 차이로 이어진다.)

(7) 불투명한 맥락 - 명제적 태도

a)철수는 이광수가 흙의 저자라는 것을 믿는다.

b)철수는 춘원이 흙의 저자라는 것을 믿는다.

진리치 보존의 법칙을 위배함

a) T

b) F

명제적 태도에 대한 프레게의 해결책

택하지 않은 방식 -> 이광수와 춘원의 뜻이 다르기 때문

이광수는 흙의 저자이다. T

춘원은 흙의 저자이다. T

그러나 진리치는 지시체 차원의 함수이다.

대상 -> 개념(대상으로부터 진리치로의 함수)

x T

y F

z T

프레게에 따르면 진릿값은 지시차원의 문제이므로, 진리치 보존의 법칙을 위배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Sense의 차이로 설명해선 안되고, Reference의 차이로 설명해야만 한다.

명제적 태도 문맥 하에서 종속절의 경우

“춘원”의 지시체 -> 춘원의 본래 뜻

“이광수의 지시체 -> 이광수의 본래 뜻

(S*) 한문장에서 지시체가 같은 다른 단어를 대입해도 진릿값은 보존된다.

종속절 안에 있는 지시체는 일반적인 지시체가 아닌 간접적인 지시체(indirect reference)(=일반적인 Sense)이다.

종속절 이광수 - 지시체 : 일반적 sense

뜻 : indirect sense

철수는 [이광수가 춘원임을] 믿는다.

이광수의 지시체 -> 간접적 지시체 -> 일반적 sense

이광수의 뜻 -> 간접적 sense

춘원과 이광수의 지시체는 같지 않음

종속절 내의 지시체는 일반적인 sense이고, 춘원의 sense와 이광수의 sense는 다르기 때문

주절 이광수 - 지시체 : 일반적 reference (곧 대상)

뜻: 일반적 sense (곧 한정서술)

왜 프레게는 indirect sense를 일반적 sense라 하지 않았을까

만일 indirect sense가 일반적 sense라면

주절의 sense -> 일반적 sense (결정)-> 지시체 이광수라는 사람(대상)

종속절의 sense -> 일반적 sense (결정)-> indirect reference(간접적 지시체) - 즉 일반적인 sense를 지시함

같은 sense가 다른 reference를 결정하게 됨.

간접적 sense가 일반적 sense라면 주절에서는 일반적 sense가 대상 결정

종속절에서는 일반적 sense가 indirect reference를 결정(즉 직접적 sense를 결정)

따라서 간접적 sense가 indirect reference를 결정(즉 직접적 sense를 결정)해야함.

(8)이러한 명제적 태도의 설명이 지니는 문제

1) indirect sense에 대한 직관적 설명이 없음

2) indirect sense가 indirect reference를 어떻게 결정하는지도 설명이 없음

3) 나는 [철수가 [이광수는 흙의 저자라고] 생각하는지를] 의심한다. -> 좋지못한 무한후퇴를 발생시킴

5. Russel의 의미론

(1) 특징

1) Frege와 유사 : 일상언어의 문법적 구조는 논리적 구조와 전혀 다름

2) Frege 비판 - 반심리주의(sense는 객관적 서술)

프레게와 달리 언어의 의미를 지시만으로 설명하려 시도함

지시는 logical proper name 고유명사/ 한정서술 -> 지시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음

유일한 지시표현 : “this + sense data"

3) 형이상학 : logical atomism (논리적 원자론)

                              

             

2019.10.30 16:22 현대 철학/분석철학

심리 철학 정리

2018년 1학기 심리 철학 정리

1장 서론

1절 심리철학 개관

0. 이 글은 김재권의 심리철학과 김도식 교수님의 인공지능과 마음 수업을 정리한 글이다. 이 글의 목표가 정리에 국한되기 때문에, 그 이상의 비판이나 코멘트를 최소화하기로 한다.

1. 우리는 사물들에 관해 통상 그 사물이 생물이냐 아니냐로 구분한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 생물인지 아닌지를 모르면서 동시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경우는 드물다

2. 마음이나 심성(mentality)을 가진 것들과 마음을 가지지 않은 것들을 구분할 때에도 위에서 말한 바가 똑같이 적용된다.

3. 심성은 심리학적인 이론을 통해 다루어져야 한다.

4. 식물적 영혼에는 이러한 심리학적 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동물의 경우 감각, 지각, 의식, 기억, 학습, 감정 등 인간이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심적 상태를 갖는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동물들도 무엇을 의도하거나 숙고하거나 희망할 수 있을까? 논리적 추론을 할 수 있을까?

5. 따라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심성을 가지고 있다는 여기에서부터 다루어져야한다. 이 물음은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첫째, 고등 심리에 있어 동물과 인간의 구별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둘째, 인간의 마음은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즉,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에게는 다른 것이 있는가?

6. 고대인들은 영혼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영혼을 단순하고 신성하며 불변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영혼은 복잡하고(그러니까 분석될 수 있고) 신성하지 않으며(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변하는 신체와 구별되는 무엇이다. 또한 고대인들은 우리 각자가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의식적이고 지성적이며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의식적, 지성적, 합리적인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온다.

7. 데카르트 역시 나는 생각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즉 나는 마음이거나 지성, 또는 이성이다라는 말로 이를 다시 표현하였다. 사유하지만 비연장성의 존재로서의 마음(res cogitans)과 연장하는 신체(res extensa)의 구분.

8. 이로부터 비물질적인 마음과 물질적인 신체를 구분하는 실체 이원론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마음은 신체와는 구분되는 특수한 종류의 개체나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실체 이원론의 난점은 그러한 실체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는 비물질적인 마음이, 과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그러니까 관찰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마음과 물질적인 신체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없다는데 있다.

9. 실체는 1)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2) 속성들을 갖고, 3) 다른 실체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독립적으로 존재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탁자의 경우, 우리는 우리가 탁자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가능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반면 두께를 가지지 않는 이차원의 표면은 그 대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즉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대상의 속성이지 실체라고 부를 수는 없다.

10. 그렇다면 마음은 데카르트의 말처럼 실체인가? 심리철학에선 이 질문에 대해 회의적이다. 1) 일단 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을뿐더러, 이 세상에 전적으로 비물질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강력한 이유가 있는지 확실치 않다. 2) 이러한 마음이 신체라는 다른 실체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비물리적인 실체가 물리적인 사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심성이 어떻게 세계에 대해서 인과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는 심적 인과(mental causation)의 문제를 실체이원론은 해결하기 어렵다.

11. 따라서 마음이 독립적인 실체이고 이 마음에 다양한 속성들이 붙는다고 여기기보단, 차라리 마음을 물리적 신체의 속성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심리철학의 주류는 마음이라는 실체가 있음을 부정하려 한다. 따라서 마음은 속성, 역량, 또는 특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음을 가지고 있음은 특정한 종류의 행동과 기능(감각, 지각, 기억, 학습, 추리, 의식, 행위 등)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마음을 가짐 이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심성, 혹은 심적 상태로 말하는 것이 옳다.

12. 심성은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속성이다. 문을 닫다가 엄지손가락을 찧을 때 우리는 고통스러움이라는 속성을 예화한다. 존재론적으로 일체의 사물이나 대상은 실체로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체들은 다양한 속성(property)들은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속성과 관계들을 합쳐 특성(attribute)이라 부른다. 또한 우리는 심적이나 물리적인 사건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는데, 사건은 시간성을 전제하는 반면(즉 변화를 암시한다), 상태는 그렇지 않다. 또 현상이라는 용어를 통해 사건과 상태를 모두 포괄할 수도 있다.

13. 심리철학의 주요 문제는 심성과 심적 속성들에 관한 것이다. 1) 마음을 가진 생물의 개념을 어떻게 명료화할 것인가? 심성의 개념을 정의함으로서 우리는 기계 장치에 마음을 갖게 할 수 있고, 인공지능을 만들어낼 수 있다. 2) 심적 속성이나 상태, 사건들은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가? 고통은 감각사건인가? 아니면 동기적 요소도 있는가? 정서는 믿음을 포괄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믿음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3)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심신문제는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매우 다름에도 또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칼에 맞는 물리적 사건을 당하지 않는다면, 칼에 맞았다는 고통(심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심적 사건으로부터 물리적 사건이 일어남을 우리는 당연시 여긴다. 우리의 욕구나 믿음에 의해 우리는 행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구나 믿음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물리적 행위를 유발하는가? 따라서 문제는 물리세계 내에서의 마음의 위치 혹은 위상을 정립하는 데에 있다.

2절 수반 의존 최소 물리주의

1.심신 수반- 모든 물리적 속성들이 같은 두 사물(대상, 사건, 유기체, 사람 등)들이 심적 속성에서도 다를 수 없다면 심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에 수반한다. 물리적 식별 불가능성은 심리적 식별 불가능성을 필함(entail)한다. 물리적 차이가 없이는 심적 차이도 없다.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2.다시 말해 물리적으로 같은 상태에 있을 때(무엇의 같음인지는 해명되어야 한다.) 심적으로 차이가 날 수는 없다. 반대로 심적으로 동일한 상태(예를 들면 고통)에 있더라도 물리적으로 차이날 수는 있다.

3.수반(supervenience) :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 df A와 B가 물리적 측면에서 모두 같으면 A와 B가 물리적 측면에서 모두 같으면 A와 B의 심적(심리적, 정신적) 측면에서도 차이가 없다 – 사실 / 있을 수 없다 – 필연성 물리적 식별 불가능성은 심리적 식별불가능성을 필함(entail)한다.

4.물리적(A=B) -> 정신적(A=B) 심적 속성을 가진 주체의 물리적 측면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심적 현상이 모두 다르고 어떤 이름을 공유하고 있을 뿐 /같은 event를 다른 조건을 가지고 받아들임 개체/ 타입에서 타입 측면의 접근

5.만일 수반이론이 참이라면,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맞다고 해도 영혼은 많아야 하나만 존재 영혼: 물리적 속성이 없음 영혼 1의 물리적 속성 : 공집합 영혼 2의 물리적 속성: 공집합 공집합은 물리적 측면 -> 모든 영혼은 동일 *일반적으로 수반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반데카르트적(실체이원론 부정) 오직 하나의 영혼만 있다 혹은 질적으로 구별되는 영혼은 하나만 있을 수 있다.

6.반 데카르트 원리 – 순전히 심적인 존재(영혼)란 있을 수 없다. 즉 물리적 속성을 갖지 않고서는, 따라서 물체가 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심적 속성을 가질 수 없다.

7. cf) 심신결정론 : 물질이 정신을 결정 ->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의해서 결정됨 심신 수반론 함축 심신 결정론 혹은 의존론은 심적인 것에 대한 물리적인 것의 존재론적인 우월성 내지는 우선성을 명시적으로 긍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심적인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둠

8. 심물 수반, 반-데카르트 원리, 심물 의존이 최소 물리주의를 규정한다. 이 원리를 받아들이면 최소의 물리주의자라 할 수 있고, 이 원리 중 하나 이상을 거부하면 물리주의자가 아니라 할 수 있다. 이 원리들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이 지닌 모든 속성이 물리적 속성이거나 아니면 그 대상의 물리적 속성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면서, 물리적이지 않은 것이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더 강한 형태의 환원물리주의도 있으므로, 이를 최소 물리주의라 부른다.

3절 심적 현상의 종류

1. 감각을 포함하는 심적 현상들 –고통, 간지러움, 가려움, 잔상, 색점을 봄, 소리를 들음, 매스꺼운 느낌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심적 상태들은 현상적이거나 질적인 면모를 가진다고 여겨진다. 그 상태들이 보여지거나 느껴지는 방식 고통은 고통만이 가지는 독특한 질적 느낌이 있다. 초록색 점을 볼 때는 그 색점이 당신에게 보여지는 독특한 방식이 있다. 즉, 초록색으로 보인다. 이러한 질적인 심적 상태를 가리킴에 있어 감각질(qualia)란 표현을 사용한다.

2. 믿음, 소망, 걱정 등의 명제적 태도가 있다. 이러한 명제들은 하나의 사실명제에 대해 주체가 갖고 있는 특정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철수는 중간고사에서 100점을 맞기를 희망하다.”에서 “중간고사에 100점을 맞는다.”는 내용문장(혹은 지향적 상태, 내용적 상태)이고, “철수는 ~을 희망하다.”는 명제적 태도이다. 이 중 내용문장은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감각질이 갖고있는 질적 측면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비전문적으로 심리학적인 사고와 이론화를 시도하는데 이것을 가르켜 통속 심리학이라 부른다. 통속 심리학은 명제 태도를 포함하며, 믿음과 욕구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명제 태도이다. 느낌과 정서라는 총괄적이면서 다소 모호한 심적상태들을 살펴보면 더 분명해지는게, 분노 기쁨 슬픔, 침울, 의기양양, 당황, 후회, 비탄 등의 정서들은 흔히 주체에게 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어떤 정서 상태들은 명제 태도이기도 하다.

3. 의지함이라고 불리는 심적 상태가 있는데 의도함, 결정함, 자원함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상태들 역시 명제 태도이고, 의도와 결정은 내용을 갖는다. 의도를 통해 행위가 결정된다고 흔히 말하며, 행위는 전형적으로 우리의 신체를 움직이는 것을 포함하지만, 단순한 신체적인 움직임과는 구분되는 것 같다. 신체를 움직임에 있어 우리는 욕구나 소망을 느끼고 그에 따라 행위하기 때문이다.(DBA)

4절 심적인 것의 특징

1. 인식론적 기준 1)직접적 지식 2)사밀성 혹은 일인칭적 특권 3) 오류 불가능성 교정 불가능성

2. 비공간적인 것으로서의 심성 : M이 심적 속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대상 S가 M을 가진다는 명제는 S가 공간적으로 연장되어 있다라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M을 가진 것은 실제로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상충되지 않는다. 즉 심성 개념은 심성을 가진 대상이 공간적으로 연장성을 갖는 물체여야함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심성을 가지는 모든 대상이 공간적 연장성을 갖는 것은 하나의 우연적 사실일 뿐이다. 추상적인 대상이 아닌 X가 속성 M을 가진다는 명제로부터 X가 공간적으로 연장되어 있다라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추론되지 않을 경우에만 M은 심적 속성이 된다.

3.마음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 나 : 직접성, 사밀성, 타인 : 행동

4. 심적현상이란?

1) 감각(내용) qualia(감각질) sensation –느낌 (질적 상태) qualitative state

2) 명제적 태도 (propositional attitude) - 믿음 원함 피함 궁금함 의심함

belief + desire = 행동

3) 느낌(feeling), 감정 -> 1,2로 환원할 수 있음

4) 의지, 욕구, 욕망 -> 행동과 연결

5) 성격, 인성

5.qualia / 명제적 태도(의지를 명제화)

감각(내용) sensation –느낌 (질적 상태)

감각을 초래하는 요인(물리적 상태=양적상태)

양적상태로부터 질적 상태로의 이행 환원가능성 여부

re + presentation (기억)

6. mental 의 기준

1) 인식적 기준 : 직접성(direct), 사밀성(private), 오류불가능성(infallible)

2) 비공간성 – 속성으로부터 얻어짐(non-snatial)

3) 지향성(intentionality) - 브렌타노, 존 설, 무엇을 향함 (대상이 실재하지 알아도 됨)

물리적 상태 -> 심리적 상태 (공간성 – 비공간성) 물리적 -> 물리적(인과) 심리적(대응, 부수)

2장 행동주의

1. 등장 배경: 직접성, 사밀성에 대한 반향(관찰 불능) 마음은 주관적이고 관찰이 불가능하다.(비과학적) 으로만 접근가능하다는 비판에 대한 반응 -> 관찰가능(행동을 통해) the problem of other mind 타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없다. -> 극단적으로 가면 유아론으로 흐름

2. 타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대상 : 타인의 행동(언어 포함) 행동은 객관적으로 접근이 가능하다(상호주관적)

3. 행동이란 무엇인가 – 행동(행위) = df 공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람 기관 기계가 하는(do) 것들 – 물리적 행위로 취급

주의 단순한 신체의 움직임이 아니고 한다와 행해지는 것으로 구분함 – 의도가 있느냐의 여부, 로봇이 책상으로 가서 책을 집는 것도 행동으로 포함(?)

4. 행위의 네가지 유형

1) 생리적 반응 : 땀이 남, 침을 흘림, 맥박, 혈압의 증가

2) 신체적 운동 : 팔을 올림, 냉장고 앞으로 감, 공을 던짐

3) 신체운동을 포함하는 행위 : 가계 수표를 씀, 친구를 맞이함, 도서관에서 책빌림

4) 명시적인 신체 행위를 포함하는 행위 : 추론 추측 계산 판단 결정

5. 걷다가 발을 헛딛음 – 걸음(의도) 내가 어떤 것을 기대함 내가 걷는 순간순간마다 어떤 것을 의도하는가? 의식적이지 않은 의도, 로봇도 의식적이지 않게 의도함 어떤 매커니즘으로? 사람의 행동과 로봇의 행동에 차이가 있는가?

6. 행동주의의 3가지 입장

1) 논리 행동주의 (logical behaviorism) : Hempel : 심리 상태를 서술하는 명제의 의미가 신체의 물리적 반응 양식의 서술을 축약 -> 심리상태를 서술하는 명제나 표현은 행동적으로 물리적인 현상으로 번역/정의할 수 있음

2) 존재론적 행동주의 (ontological behaviorism) : 행동과 관련된 사실이나 사건을 넘어서는 심리적 사실이나 사건은 없다.

3) 방법론적 행동주의 ( methodological behaviorism) : 심리적(내적) 상태를 서술하는 표현의 의미는 인정할 수 있지만 심리적(내적)상태의 존재자체를 인정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 -> 심리학이 과학으로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

7. 기계는 행위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의 행동가능성과 행동주의 고찰 – 행동을 의도함으로 봄의 의미, 개는 희망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 언어철학 관점에서 행동주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함.

8. 논리 행동주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서술의 의미는 신체의 물리적 반응 양식에 대한 서술의 축약

1) 논리실증주의 –logical positivism -> 실증주의 의미있는 언어의 의미는 적어도 다음 둘 중 하나를 만족시켜야 한다. 1) 경험적 검증가능명제 2) 논리적이나 수학적 증명이 가능할 것

2) hempel의 논증

2-1) 의미 있는 진술의 의미는 검증 가능한 조건들에 의해서 나열되어야 한다.

2-2) 한 진술이 타인과 공유될 수 있는 의미를 가진다면 검증가능성 조건은 공적 관찰이 가능해야한다.

2-3) 행동적인 현상만 공적 관찰이 가능하다. 의미있는 심리진술은 공적 관찰이 가능하다. 행동에 대한 검증 조건에 의해 나열되어야 한다.

9. 철이는 치통을 가지고 있다.

1) 철이는 눈물을 흘리며 몸을 뒤틀고 있다.

2) 무슨일이야? 라고 물어보면 치통이 있어 라고 대답한다.

3) 검사결과 충치가 발견되었다.

4) 철이의 혈압, 소화과정, 반응속도 등에 변화가 있다.

5) 철이의 중추신경계에 여러 가지 일들이 발생한다.

10.논리 행동주의의 난점

1) 심리 상태에 대한 의미를 안다는 것이 관련된 물리적 상태(신경, 혈압, 소화)를 알기 요구하지 않는다.

2)심리상태를 일반적으로 야기하는 원인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님

3)복잡한 명제를 믿는 심리 상태는 행동으로 드러나기 어려움 ex) 원래부터 북미대륙에 있던 표범은 없다고 s는 믿는다.-> 일상적인 행위로 표현이 어려움 – 유일한 대안은 언어적 행위이다. s는 p를 믿는다 -> p가 사실인가에 대해 s는 사실이다라고 신실하게 대답할 것이다. -> 언어행동으로 확인하기 어려움

3-1) ‘신실하게 답해야함’의 조건을 추가할 필요 없음(관찰불가능)

3-2) 질문과 대답에 대한 이해 성향 인과적 경험적

3-3) 사실을 말하기를 원해야한다. 특정 질문에 대한 특정한 대답을 하는 성향을 갖는다는 방식으로 설명


12.심리 상태 – 행동

DBA desire belief action

어떤 사람이 p라는 상태를 원하고 a라는 행동을 통해서 p를 얻을 수 있다면 s는 a를 행할 것이다. 1)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2)거시 측면에서 인과율에 의해서 다음일이 어떤 식으로 발생할지 결정되어 있다.

kripke – 고통 = 고정지시어 (공적으로 지시할 경우만) 지시가 의미를 결정

과학자들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탐구가 먼저 있지 않을까? 의지와 세계의 사건은 무관하다.

13. 심리상태와 행위의 상관관계 : “필연성”

심적 상태에 의해서 어떤 행위가 필연적으로 나오는가? ex) 반가움 -> 어떤 행위가 필연적으로 나타나지 않음 심적

상태가 행위를 지시한다는 믿음 벽에 못이 박혀있으면 못이 벽을 지시하는가? 그러나 벽은 못과 같이 있을 뿐이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줄 경우, 진주목걸이가 돼지를 의미하는가?

q) 고통은 고통과 관련된 행위를 엄밀함축하는가?(필함 – entail)

a entails b: 1) a, b가 개념 a is b가 분석판단 2) a, b가 명제, a가 참이면 b도 반드시 참

q)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가 반드시 행하는 행동이 있는가?

스토아 학자 혹은 스파르타 병사

수정 -> 경향성

그런데 필연적이 아니잖아

s가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은 일정한 행동의 경향을 지닌다. -> 행동으로 관찰가능

ex) 신음소리를 낸다 -> 성대 등의 특정한 신체구조를 가져야함 -> 그 구조를 안가진 생물은 고통을 못느끼는가?

14. 존재론적 행동주의

행동과 관련된 사실 이상의 심리적 사실은 없다(상태 사건)

심적 상태와 행동은 동일

1) 고통은 움츠림과 신음함 (존재론적 행동주의)

2) 고통은 움츠림과 신음함의 원인 (데카르트의 이원론 마음/실체 논리행동주의)

15.pain -> 필연성 -> 행위

고통과 고통행위의 진정한 관계 : 우연적

고통은 c섬유의 작동

ex) 1m 특정 금속의 길이 de re 필연성 ->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내용은 있음

de dicto 필연성이 아님

16. 방법론적 행동주의

심리학이 과학으로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

1) 심리학에서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료는 관찰 가능한 행동 -> 언어관련 행동을 배제

2) 심리학 이론은 심리 주체의 내적 상태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s(자극) -> ㅁ -> r(반응)

3) 언어행위는 “이해” “믿음” “의도” etc의 관찰가능하지 않은 내적요소(내성)

긍정적 측면 - 의식을 심리영역에서 배제

수동적 반응 – 행위는 의도를 어느 정도 지님 –순수한 행위를 분리해내기 어려움

4) 심리학 이론은 심리적 설명을 위해서 내적인 심적 상태를 언급하지 말아야한다.

문제점) 상식 : mental causation 인과 물 <-> 심 인과

-> 내적 심리적 상태를 너무 배제하는 인상 function – 기능/함수 f(x) = 반응

3장 두뇌로서의 마음 : 심신동일론 ( mind – body identity theory)

1 마음과 두뇌(신체)의 상관관계

ex) 대뇌의 손상 : 정신활동에 제한

술을 마심 : 정신을 혼미

마취제의 투임 :통증을 못느끼게 하는 생물체 o에게, 심적상태 m이 발생할 때마다 이에 상응하는 두뇌의 상태 b가 있다.

m의 발생 <-> b의 상태 (필요충분조건)

1) 이러한 상관관계(m<-> b)는 법칙

2) 수반관계 (supervenience) 심적 상태의 차이는 물리적 상태의 차이로부터만 온다 -> 두뇌의 상태가 변하지 않으면 심적상태의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2.심신 상관관계의 여러 이론

1) 상호인과작용 –데카르트 mental causation의 문제

2) 예정조화설 – 라이프니츠 -> 공통의 과거 원인 (특정시점) 시계주인이 시간을 동시에 맞추어놓음

3) occasionalism – malblanch -> 공통의 원인 시계가 계속 변화함 오차가 발생할 때마다 수정함 (끊임없는 개입) 시계끼리는 상호작용이 없음

4) 양면이론(double aspect theory) : 스피노자 -> 같은 실체의 서로 다른 양태(측면)

5) 부수현상론(epiphenomenalism) : 정신현상은 인과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

.... -> A -> B -> C -> D -> .... (물리적 현상)

ma mb mc md

인과(x)

심적상태가 없는 행동은 가능하다. (DB가 없는 A) 그렇다면 행동으로부터 부수되지 않는 심적상태가 가능한가?

6)심신동일론 :심적상태와 물리적 상태가 동일하다(같은 상태이다)

7)창발론 : 설명불가, 심리현상이란 단순한 사실이다. ->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3. 심신동일론에 대한 논증 : JJ C Smart

Simplicity(단순성)

if 심 =신 하나의 실체

논증 : 오컴의 면도날 존재하는 것들은 필요이상으로 상정되어서는 안된다. (형이상학적 주장) 존재자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존재자를 상정(증명되지 않음) 필요 없는 기호는 제거되어야한다.

1) 형이상학적 측면 -> 단순성 확보

2) 개념 언어적 측면 -> 단순성 확보

3) 무한후퇴를 방지

4. 심신동일론 : 모든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이다.

5. armstrong의 논증 : 인과를 통해 심적 사건(현상)을 설명 ex) 유전자 ans) 유전자의 개념을 인과적 기능으로 정의 <정의> 생물의 세대적 전이를 인과적으로 책임지는 신체만이 요소 생물학자: 이 기능을 하는 것이 DNA

마찬가지로 고통도 인과적으로 정의하면 -> 생체 조직에서 발생하여 움츠림이나 신음등을 나타나게 하는 내적 요소

생물학자 : c섬유의 작동

반론 1) 고통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맞는가?

2) 다수 실현 가능성

6. 심적 인과

고통= c 섬유의 작동이라고 가정

상식 : 고통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원인

심적 사건 -> 물리적 사건 인과

고통 ->      얼굴을 찡그림(심적 인과)

c섬유 작동 -> 얼굴을 찡그림 (물리적인과)

심적인과가 하는 역할이 없음

따라서 과잉인과가 발생함

-> 해결책 고통이 c섬유 작동이다 (심신동일론)

정신사건의 이면에 물리적 사건이 깔려있다.

인과는 물리적 세계에서 발생하므로 물리적 사건의 원인 역시 물리적 사건이다.

7. 동일성의 의미

1) token identity vs type identity

token ; one and the same (하나의 개체)

type : 같은 종류, 같은 집합

2) 선험적 동일성 vs 후험적 동일성

선험적 동일성 : 5 +7 = 12

후험적 동일성 : 물 = h20

라이프니츠의 법칙

1) if x=y, then 모든 속성 p에 대해서 x가 p를 가지면 y도 p를 갖는다.

2) if x가 p라는 속성을 가지고, y는 p라는 속성을 안가지고 있으면 x=y가 아니다.

8. 개별자 물리주의 vs 유형 물리주의

사건에 대한 두 형이상학적 입장

1) 사건 실체론 : 사건 자체가 대상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체 사건은 더 이상 분석되지 않음

2) 속성예화이론 ; 사건 자체는 독립적 위상을 지니지 않음 사건은 대상이 특정시간에 특정 속성을 예화

2)에서는 token과 type의 구분이 중요치 않음 사건이 대상 시간 속성으로 분석되기 때문

1)에 따르면 사건이란 물리적 대상들과 함께 이 세계를 이루는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개별자들이라고 본다. 사건들도 물체들처럼 속성을 가지며 유 아래에 포섭된다. 이에 따르면 개별적인 고통의 발생은 고통의 유 아래에 포섭되는 하나의 사건이다. 다시 말해 그 사건은 하나의 고통사건임이라는 속성을 가진다.

9. 토큰 물리주의

심적 사건에 포섭되는 모든 사건은 물리적 사건에도 포섭된다. 즉 심적 속성을 가진 모든 사건을 물리적 속성도 갖는다. 사건 : 심적 속성을 가지면 반드시 심적 속성과 더불어 물리적 속성도 있다 -> 각각의 심적 사건은 곧 물리적 사건이지만 이 두 측면에 법칙성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님

개별자 물리주의는 어떤 심적 사건 류 아래에 포섭되는 모든 사건은 또한 물리적 사건 류 아래에 포섭된다. 또는 심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건은 또한 어떤 물리적 속성을 가진다.

사건의 모든 속성은 사건의 한 유를 정의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의 사건 개별자 혹은 개별 사건은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사람에게 발생한 고통처럼 시점이 명시되는 개별적인 사건이다.

사건 개별자는 고통들이나 가려움들과 같은 사건 유형이나 사건 류와 대비된다.

따라서 개별자 물리주의는 심적유형과 물리적 유형간의 동일성을 필함하지 않는다.

1)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사이의 특별한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주장 하진 않음)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

2)수반을 함축하지 않음

물리적 차이가 없이는 정신적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정신적 차이가 있으면 물리적 차이가 반드시 있다.

현실 ps1 – ms1 ps2 -ms2

가능세계 ps1 –ms2 ps2 -ms3

3) 비환원주의

token물리주의와 관련된 비우

ex 지우개(사건) 검정(ps), 네모(ms)

반면 유형 물리주의는 심적 사건의 유형과 물리적 사건의 유형이 동일하다. ex 고통은 c섬유의 작동

환원주의 환원적 물리주의

10. 유형물리주의

심적 사건 유형과 물리적 사건 유형은 동일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심적 속성들과 물리적 속성들은 동일하다.

1) 색깔을 가지고 있는 모든 대상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2) 색깔과 모양은 동일하다

1)만을 주장하는 것은 토큰, 1)2)를 주장하는 것은 타입이다.

심적 속성을 가진 모든 사건이 물리적 속성을 가지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심적 속성들이 체계적으로 물리적 속성들과 상관관계를 맺는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우연적)

이러한 까닭에 심리-신경 동일론은 일반적으로 유형 물리주의로 해석된다.

유형 물리주의에서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속성예화이론이다. 하나의 사건이란 한 시점에서 대상이 어떤 속성을 예화하는 것이다. 즉, 고통스러운 시점에서 내가 고통스러움이라는 속성을 예화하는 경우는 하나의 사건이다.

t시점에서 x가 속성 p를 예화하는 사건이 t2시점에서 y가 속성 q를 예화하는 사건과 동일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x가 y와 동일하고 p와 q가 동일하며 t와 t2가 동일하여야 한다.

개별적인 심적 사건의 예로서 조지가 어느 시점에서 고통스러워함 이라는 사건을 생각해보자 이 사건이 물리적 사건인 조지의 c섬유가 자극된 상태에 있음이라는 사건과 동일하다면, 고통스러워함이라는 심적 속성이 c섬유의 자극이라는 물리적 속성과 동일해야 한다. 그래서 속성예화이론에 따르면 개별적 심적사건과 개별적 물리적 사건의 동일성으로부터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간의 동일성이 필연적으로 귀결되고, 개별자 물리주의와 유형물리주의 사이의 차이가 없게 된다.

11. 심신 동일론에 대한 반론

1) 인식론적 반론 :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에는 인지적속성이 다르다.

즉 사람들이 고통에 대해서는 잘알지만 c섬유의 작동은 잘모르는 경우가 많다.

전제1) s는 x에 대해서 무언가를 안다

전제2) x=y (t가정)

--------------------------------

결론) s는 y에 대해서 무언가를 안다. f

전제) s는 x에 대해 무언가를 안다

전제) s는 y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

x=y가 아니다

라이프니츠의 법칙은 know bys 인식적 태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답변) 논증1과 논증2는 타당하지 않다.

s는 물을 안다 t

물은 h2o t

--------------

s는 h2o를 안다 f

2) 위치문제

ps는 공간을 차지

ms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음

ps는 위치를 가지고 ms는 위치를 가지지 않음

위치를 가짐이라는 속성이 ms와 ps를 구분하는 속성

답변) 물리적 속성의 위치 -> 중추신경계

따라서 정신적 속성의 위치도 여기임 -> 응 선결문제의 오류

통증이 느껴지는 곳 혹은 통증이 발생하는 곳이다

-> 응 환상통

3) 심적 상태의 현상적 속성들

심적 상태 = 물리적 상태

심적 상태에서 느끼는 어떤 느낌(현상)들이 있음

EX) 핀에 찔렸을 때 고통 : Sharp 날카로운 느낌 아픈 느낌

q) 물리적 상태(상응하는) 날카로움과 아픈 느낌을 가지고 있느냐?

ans) aristoteles – 실체 vs 속성

심적 상태가 날카로움이란 속성을 지닌듯한 인상

-> 심적 상태가 그 자체로 어떤 현상적 속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q) 그렇다면 우리가 갖는 경험은?

아픔/날카로움

ans) “날카로운 고통” : 앞의 입장과 다른 점 -> 물리적 상태와 동일

오렌지에 대한 색

orangish – yellow – visual – image (x)

visual image -> orangish yellow를 가짐

4) 다른 측면의 현상적 속성

고통 = c섬유의 작동 -> 간지러움 or 가려움 etc

-> qualia의 문제 : 심적 사건이 가지는 느낌은 물리적 사건은 갖지 못함

ans) 심적 사건의 현상적 속성을 배재하고 중립적인 표현으로 서술하려는 시도

smart – s가 왼쪽 손가락에 핀을 찔려서 날카로운 고통을 느끼고 있다.

핀이 s의 왼쪽 손가락을 찌르고 그가 손가락을 잡으며 신음할 때 발생하느 ㄴ것과 같은 일이 s에게 벌어지고 있다.

armstrong – s는 핀이 2의 왼쪽손가락을 찌름에 의해 원인이 되고 그의 손가락을 잡으면서 신음하는 것을 야기하는 내적 상태에 있다. (인과적 설명)

5)고정지시어로서의 고통

고정지시어 :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적 표현(그 대상이 존재하는 가능세계 안에서)

고통 = c섬유의 작동

경험적 (우연적 참, 필연성 x)

=> ‘고통’ 고정지시어, ‘c섬유의 작동’ 고정지시어

<고통=c섬유의 작동> 필연적이어야 함 귀류법

그런데 거짓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음

만일 고통= c섬유의 작동이 우연적 경험적이라면 고통이나 c섬유의 작동은 적어도 하나가 고정지시어가 아니다. 고통 = c섬유의 작동이 아니라는 상상을 할 수 있음

그런데 고통과 c섬유의 작동은 고정지시어임 따라서 고통은 c섬유의 작동이 아니다.

6) 다수실현 가능성 논증

파충류/연체동물들은 c섬유가 없지만 고통을 느낀다

고통 = c섬유의 작동

but 고통 발생 ->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a=고통 c섬유=고통 a=c섬유가 아님 물리적 상태가 다른데 고통이 발생하는 문제

12. 퍼트넘 - 쌍둥이 지구의 예시

서술이론에 대한 반박

퍼트넘이 가정한 서술이론의 전제

: 심리적 상태가 언어의 내포를 결정하며, 언어의 내포가 언어의 외연을 결정한다.

지구 - 물이라고 부르는 무색 무취 갈증 해소등의 물질 -> H2O = 물

쌍지구 - 물이라고 부르는 무색 무취 갈증 해소등의 물질 -> XYZ = 쌍물

H2O와 XYZ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음

지구의 철이가 쌍지구에 가서 쌍물을 보고 물이라고 “저기에 물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가 참이겠는가?

퍼트넘은 참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형이상학적으로 참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는 <저기에 물이 있다>인데, 실제로 저기에 있는 것은 쌍물이기 때문에.)

직접 지시론자가 지시하는 지시체의 본질 - 속성, 한정 서술 등의 서술들은 모두 본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류로부터의 논증을 참고할 것.)

철이와 쌍철이가 정확하 같은 심리 상태에 있지만 그들이 물이라고 할 때 지시하는 대상 즉 외연은 다르게 된다.

퍼트남 말하는 지시 관계의 결정

ostensive definition 지적하여 이름을 붙이는 작업

눈에 보이는 것을 찍음

사물과 언어 사이의 관계

사물이 놓여있으며, 거기에 언어로서 명명함

사물 - 언어의 관계 도식

명명

사물 -------- 언어

그 지적된 대상과 sameness relation을 갖는 것이 외연에 포함됨.

의미의 본질 -외연 -> 직접 지시론 : 크립키

- 외연은 4가지 중의 하나이다. : 퍼트넘

직접 지시론 : 실제 대상 -> 의미

인식 -> 의미(서술) -> 대상

심리적 상태 ----> 내포 ----> 외연

서술이론에서 한정서술은 머릿속에 있는 것.

경향성 - 관념론

심리적 상태가 내포를 결정한다는 것은 인식과 언어사이의 관계맺음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실재 - 실제로 존재하는 사태들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태들의 총체

실재와 관련하여, 서술이론과 직접지시론의 차이.

서술이론은 실재와 언어의 관계맺음에 있어,

직접지시론은 실재와 언어의 관계 맺음에 있어, 언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원초적 상황에 있어서도, 지시적 정의/혹은 설명을 통하여 실재가 있음을 전제한다. 이른바 이름을 갖지 않은 사물은 가능하나 이름을 갖지 않는 사물이 가능한가에 대해, 직접 지시론은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름을 원초적으로 부여할 수 없는 실재가 존재하는가?

언어노동의 분업.

우리의 언어 사용은 그 대상의 전문가가 지니는 배경지식에 의존한다.



                              

        


2015년 1학기에 정리했던 현대 영미 인식론 글 모음.


1. Epistemology 란 거창한 이름이 붙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그저 Theory of Knowledge, 앎에 대한 학문으로 불리는 인식론은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형이상학, 가치와 규범의 문제를 다루는 윤리학과 더불어 철학의 세 가지 기본분과 중 하나이다. 

 

2. 인식론자들은 지식 그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혹은 사실)의 내용을 궁금해하지는 않는다. 자연과학의 명제들, 윤리적 명제들, 역사적 사실들과 같은 '구체적 지식'은 과학자나 철학자, 사학자들의 탐구대상이지 인식론자들의 관심사는 아니다.

 

3. 철학자들은 세계와 존재를 탐구하기 이전의 탐구, 즉 세계와 존재의 바탕이 되는 작업틀이나 구조를 탐구하는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인식론자들의 구체적 탐구대상은 바로 앎의 내용 이전의 앎이 성립할 수 있는 틀, 즉 앎의 조건에 대한 탐구이다...이것은 다시 말해 앎과 모름 사이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4. 말하자면, "어떠한 조건을 만족시켰을 때, 한 사람(인식주체S)이 무언가(명제 P)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5. 수학시험에서 답을 찍어 문제를 맞춘다해서, 그 사람이 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어째서? 풀이 과정의 결여, 그가 답을 맞춘 것이 전적으로 우연에 의존해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명제가 참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나온 것이라면 그 명제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식을 세우고 풀이과정을 통해 답을 도출해낸다면 우리는 그가 답을 알고 있다고, 다시 말해 어떤 지식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을 안다는 것에는 어떤 과정이, 앎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심지어 그 결과물이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나온 결과와 일치한다 할지라도.

 

6. 따라서 무엇을 안다고 일단 확신한 후에 근거를 찾아해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근거들은 진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식적 정당성은 믿음에 선행해야한다.

 

7. 따라서 신학의 문제들은 인식의 문제와 전적으로 무관하다.

 

8. 인식론의 문제는 '인식주체S가 명제 P를 안다'는 답을 도출해내는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것이다.⑵⑶ 이 알고리즘은 앎의 조건에 관해 명확히 정의된 유한개 절차의 집합들이다. 즉, 인식주체가 받아들인 외부로부터온 모든 명제들의 입력 중, 앎의 조건에 관한 유한개의 절차를 통과한 명제들을 앎이라 정의하는 것이다.

 9. 나는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안다'는 것을 일상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앎의 개념을 보다 명료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10.  먼저 다음과 같은 지식들을 보자.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안다"

"나는 피아노를 칠 줄 안다."

"나는 축구를 할줄 안다" -> "나는 공놀이를 할줄 안다"

 

이들을 모두 Knowing-How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어떻게' 하는지 알고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지식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발로 페달을 돌리기에", "균형을 잡기에", "손잡이로 방향을 조정하기에"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것일까? 이것은 그러나 어떠어떠한 하나의 문장으로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지식이다.

 

11. (그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하나의 '과정'을 서술하는 여러 '절차'들로 나타낼 수 있다.

 

12. 따라서 이러한 지식들을 Procedural knowledge(절차적 지식)이라 부를 수 있다.

 

13. 그런데, 이러한 지식들을 여러 개의 절차로 만든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에게 실제로 쓸모가 있는가? 이를테면,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절차화하여 나에게 알려준다 해서 내가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오히려 그 지식만 가지고서는 자전거를 타기는 커녕 넘어지기만 할 것이다. 그러한 지식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내 감각적 경험을 통해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힐 수 있다.

 

14. 이러한 지식들은 그것을 머릿속에(혹은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특정한 기술이나 능력에 가까운 것이다. 인식체계가 적절한 훈련을 통해 규칙에 따라 hard-wired되어 있다면 그것을 새삼스레 다시 떠올릴 필요는 없다.

 

15. 이렇게보면, 절차적 지식은 인식론자들의 주요한 과제들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Artificial Intelligence(인공지능)를 구현하고자 하는 Cognitive Science(인지과학)의 영역에서, 절차적 지식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16.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지식들을 보자

 

"나는 어젯밤에 비가 내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물이 100℃에서 끓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Thomas Harriot이 1621년에 죽었다는 것을 안다."

 

이들은 모두 Knowing-That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들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내가 자전거를 타고있을때 굳이 자전거와 관련된 생각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것이 스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가 내린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비가 내린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을 안다고 말하려면 최소한 먼저 그 지식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떠올려야하는 것이 분명하다. 즉,  마음속에서 대상을 그려내야한다.

 

17 . 따라서, 이러한 지식들을 표상적 지식이라 부를 수 있다.

 

18. 표상적 지식과 절차적 지식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다. 표상적 지식은 언뜻 보기에 절차적 지식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와 같은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특정한 능력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설령 내가 특정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향키가 된다 할지라도(이를테면 불이 났을때는 자세를 낮추어 연기를 흡입하지 않아야한다는 지식) 그것은 그 지식을 활용한 결과지, 지식의 내적 본질에 그러한 능력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즉,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활용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만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절차적 지식은 '내가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말하기 전부터(혹은 깨닫기도 전부터) 스스로 드러날 것이 자명하기에 나로서는 그 지식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지식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활용할 생각을 하고 있던 말던 이미 그것을 활용하고 있다. 내가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러한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증명된다.

 

19. 표상적 지식을 떠올리는 것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 절차적 지식은 현실속에서 실천되는 행위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20.  그렇다면 절차적 지식을 절차화할 필요성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21. "나는 레몬을 보면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안다"는 절차적 지식인가? 그렇다면 신경계의 조건 반사역시 절차적 지식으로 볼 수 있는가?

 

22. 물론 절차화는 일상생활에 있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에 대한 조건들은 이미 인간에 내재되어있다. 인간은 경험의 반복을 통해 그것을 익힌다. 그렇기에, 절차적 지식을 일련의 명령들로 절차화시키는 작업은 그러한 학습능력이 부재한 인공지능에게 필요한 일이다. 인식적 추론 능력 역시 절차적 지식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인식적 추론이 표상적 지식이 아닌 절차적 지식에 속한다는 주장엔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지금까지 나온 절차적 지식의 예시들은 모두 신체적 행동을 통한 기술이나 능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표상없이 인식적 추론이 가능하단 말인가?

 

24. 누군가가 "JFK가 암살당했으며, 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가 JFK가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그가 <암살당했다>라는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암살당했다>라는 뜻에는 <죽었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죽었다>라는 뜻에는 <현재 살아 있지 않다>라는 뜻이 내포되어있기에, JFK가 암살당했으면서 살아있다는 진술은 모순된다는 것을 추론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추론 능력은 "JFK가 암살당했다"는 표상적 지식을 떠올리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될뿐만 아니라, 그것을 굳이 마음에 떠올리지 않아도 이미 인식적으로 hard-wired된 추론규칙으로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지식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자연스러운 인식적 추론 능력은 절차적 지식에 속하며, 이러한 절차적 지식(기본적 추론능력)이 표상적 지식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룬다고 볼 수도 있게된다.

 

25. 이는 참으로, 우리가 논리학을 실제로 배우지 않고서도 그것이 묘사하는 바대로 논리적 추론규칙에 따라 일상적으로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27. 이것의 보다 간단한 예는 수학문제의 공식을 암기해서 푸는 것이다.

 

 



 

 이 명칭의 기원이 된 고대의 인식론과 -epistēmē와 doxa- 인간 주체가 전면으로 나서게된 이후의 Descartes, Locke, Kant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 인식론에 관한 사유는 다른 글에서 다룬다. 적어도 앞으로 전개하는 현대 인식론의 논의에서는 간단한 언급만 하고 넘어갈 것이다. 

⑵ 그러나 인식론의 문제를 단순히 명제적 지식(Propositional Knowledge)에 대한 알고리즘 설계로 국한시킨 것은 The Gettier Problem (Edmund Gettier,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1963)이 등장한 직후부터의 현대 영미 인식론의 논의를 살펴보기위한 서술 트릭일 뿐이다. 이것이 현대 인식론에서 다루는 모든 문제도 아닐뿐더러,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주요한 문제들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⑶ The Gettier Problem 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앎에 대한 전통적인 분석이 Plato(Menon) 이후로 계속해서 문제없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에(Descartes, Chisholm, Ayer) 이러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⑷ 절차적 지식이란 단어는 현대 인식론(김기현,1998)에서 번역된 것을 가져온 것이다. 혹은 기술적 지식(김도식, 현대영미인식론의 흐름, 2004), 실천적 지식- Practical Knowledge- (현대 인식론, 이병덕, 2013) 등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⑸ 이는 인식론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지식들이- 선험적 지식, 경험적 지식, 도덕적 지식과 같은 -  모두 마음에 떠올려지는 표상으로서의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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