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의 신학에서 십자가의 신학과 삼위일체론은 서로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십자가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수난이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내적 관계 안으로 끌어들여 그리스도의 수난 속에서 하나님이 세상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십자가의 신학은 삼위일체론을 위한 근거이고, 삼위일체론은 십자가 신학을 위한 배경이다.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개념의 직관은 예수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인식의 형식적 원리는 삼위일체론이다.” 따라서 두 논의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십자가의 신학을 통해 삼위일체론에 이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통해 십자가의 신학을 더욱 풍성하게 묵상할 수 있다. “십자가의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며,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이 명제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음미하여 보고자 한다.”3
그리스도교 신앙은 십자가를 “내어줌”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 그는 모든 하나님 없는 자들을 위해, 곧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 속으로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버림받은 자들을 대변하여 하나님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가복음 15:34)라고 항의하였다. 그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이 고상하지도, 유대 저항군 지도자들의 죽음 같이 영웅적이지도, 스토아학파 현자들의 죽음 같이 태연하지도, 초대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죽음 같은 경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리스도교 전승들은 예수가 “매우 놀라고 괴로워하면서”(마가복음 14:33), “근심에 쌓여 죽을 지경인”(마가복음 14:34) 상태에서, “크게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면서”(히브리서 5:7), 발음이 불명료한 “큰 소리를 지르시고서”(마가복음 15:37) 죽었다고 증언한다.5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조차 예수의 죽음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든 미화하고자 시도하였을 정도였다(누가복음 23:45; 요한복음 19:30).
그러나 신약성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형태로 죽임당한 예수에게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1세기 유대교의 맥락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란 최후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벌어질 완전한 정의의 실현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서 죽임당한 예수를 의롭다고 선포하셨다. 그분은 온 세상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십자가의 상태 속에 자신의 의를 드러내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예수와 함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항의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 곧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이다. 그분의 의는 불의한 자들과 권리 없는 자들을 심판하는 의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들을 의롭게 만드는 역설적인 의로서 ‘의롭게 하는 의(justitia justificans)’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나님이 ‘하나님 없는 자들’과 연대하시는 분이라는 역설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 없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즉, 자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님 없는 자들에게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 이상 하나님이 도달할 수 없다고 여겨진 세상의 가장 버림받은 곳조차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절규를 들으시는 분은 바로 그 예수가 대표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하나님 없는 자들의 절규를 들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하나님 없는 자들의 편에 서 계시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때 하나님은 하나님 없는 자들의 편에 서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다.” 그분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신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pathos)’은 자신의 사랑에서 기인하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나님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가 있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최고실체 혹은 절대존재로서의 신이 흔히 ‘고통’과 같은 인간적 감정을 경험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 반면,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분으로 증언된다. 즉, 인간이 고통받는 장소에는 언제나 하나님도 거기에 함께 계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받는 인간과 함께하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다. 그분의 사랑은 바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랑, 곧 자기 자신을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앞에 개방시킬 수 있는 사랑이다.
삼위일체론은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이 증언한 ‘하나님의 열정’과 ‘하나님의 고통’을 통해 이해된 십자가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즉, (1)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은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에 사랑으로 동참하는 분이라고 증언한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열정에서 기인하는 고통을 감내해낸다. (3)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자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서 고통당하였다. (4)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부활시키어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편에 사랑으로 함께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셨다. 따라서 (5) 그분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고통과 무관한 분이실 수 없다. 예수는 단순히 가치중립적인 존재로서 죽임당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신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어서도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커다란 고통의 사건이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문제는 십자가에서 단순히 인간 예수가 고통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 역시 고통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십자가의 신학이 증언하는 대로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 없는 자들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사건일 경우 ‘예수의 고통’과 ‘하나님의 고통’은 서로 긴밀한 내적 관계를 맺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의 고통과 하나님의 고통 사이의 관계가 단순히 ‘성부수난론적으로(theopaschitisch)’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입장은 바르트와 라너가 보여준 것처럼 자칫 ‘원초적 결단 가운데서 자신으로부터 나온 하나님’과 ‘이전부터 자기 자신 안에 계시고 악에 의해 접촉되지 않은 하나님’ 사이의 이분법적 구별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즉, 성부수난론적으로 이해된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이 골고다에서야 비로소 고통을 경험하셨을 뿐 태초에는 고통과 무관하게 순수하고 완벽한 상태 속에서 존재하시고 계셨다는 오해를 낳기 쉽다.9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이미 세상 속에서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하나님의 바깥쪽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안쪽에 놓여 있다. 즉,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 이전부터의 사랑에 대한 성서적 증언을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십자가 사건을, 곧 고통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자기 안에 품고 계셨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인간 예수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 역시 고통을 경험하셨다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지적하는 작업이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세상의 버림받은 자들과 연대하고자 하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셨다는 성서의 증언을 진지하게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고통당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수밖에 없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고통을 감내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겪은 만큼이나, 하나님 자신 역시 예수를 버리는 고통을 겪으셨다고 증언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상실’을 경험한 만큼이나, 하나님 자신 역시 십자가에서 ‘아들의 상실’을 경험하셨다고 증언해야 한다. “아들은 죽음을 고통당하며,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고통당하신다. 여기서 아버지가 당하시는 아픔은 아들의 죽음만큼 큰 것이다. 아들이 당하는 아버지의 상실Vaterlosigkeit은 아버지께서 당하시는 아들의 상실Sohnlosgkeit과 상응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다면, 아들의 죽음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되심의 죽음Tod Seines Vaterseins을 고통당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언제나 동시적으로 성립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점에서 ‘아버지의 상실’과 ‘아들의 상실’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과 예수는 가장 철저하게 분리되는 동시에 가장 철저하게 결합된다. 이러한 역설은 둘 사이에서 일어난 관계의 단절이 사실 그 둘 사이에서 이루어진 의지의 일치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한편으로, 둘은 깊은 차이와 비동일성 속에 놓인다. 예수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게 되고, 하나님 역시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불렀던 자를 상실하고 만다. 남아 있는 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절규와 그에 대한 깊은 침묵일 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둘은 완전한 일치성 속에서 하나가 된다. 예수는 세상의 버림받은 자들을 대변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었고”, 하나님은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내어줌’의 사건 속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님 없는 자들에게 새로운 의를 가져다주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그렇다면 예수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이 사건 속에는 분리된 상태 속에서의 결속성Gemeinschaft im Getrenntsein과 결속된 상태 속에서의 분리Getrenntsein in der Gemeinschaft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단절과 완전한 일치는 삼위일체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고통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두 고통이 단순히 동일한 고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수의 고통은 ‘버림당하는’ 고통인 반면, 하나님의 고통은 ‘버리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연합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고통의 사건, 곧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삼위일체적 사건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에 직면한다. 두 위격은 철저하게 서로 다른 동시에 철저하게 하나의 의지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모든 전제된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하나님 개념을 먼저 버린다면, 우리는 예수가 <아버지>라 불렀고 그와의 관계에서 자기를 <아들>이라 이해한 그 하나님에 대하여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버리는 아버지와 버림받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의 치명성과, 또한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의 생동성을 이해하게 된다.”12
십자가 사건에서 결코 성자만 일방적으로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신학적 요점이다. 성부는 고통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는 분이 아니다. 전통적 그리스도론은 십자가 사건을 성자 예수 안에서 일어난 ‘인성’과 ‘신성’의 문제로 양성론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성부의 고통을 간과하고 만다. 고통당한 것은 십자가에 달린 성자 예수일 뿐, 성부의 위격은 그리스 존재론의 ‘일자’처럼 아무런 고통에도 무감각한 채 순수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성부의 사랑은 그를 고통으로 내몬다. 비록 아들을 내어주는 성부의 고통이 자신을 내어주는 성자의 고통과 동일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성부에게서 성자를 상실하는 고통을 제외시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도록 만든다. 십자가 사건이 세상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증언하기 위해서는 성자와 마찬가지로 성부 역시 고통에 대해 노출되어 있는 분이라고 강조해야 한다. “[……] 우리는 십자가의 사건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파악하여 인격들 상호간에 일어난 관계의 사건으로 해석하였으며, 이 사건에 있어서 인격들은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세 인격 중 단 한 가지 인격만이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미리 그 자신 속에, 신성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13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일치 속에서 발생하는 ‘생명의 영’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발생한다는 서방교회의 ‘필리오케(Filioque)’ 교의를 십자가의 신학을 통해 재구성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16 즉, 세상의 버림받은 자들에게 찾아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shekinah)의 경험이야말로 성령의 경험이다.17 임재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성령은 자신을 버리시고 아들을 내어주시는 성부와 성자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비로소 발생하신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자들의 편에서 그들과 연대하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에서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임재하셨다는 사실은 바로 성령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들에게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생명을 가져오셨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성령이며, 이 성령은 하나님 없는 죽은 자들을 의롭다 인정하여 주며, 버림받은 자들을 사랑으로 채워주고, 죽은 자들마저 살게 한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벌어진 십자가 사건에 성령의 발생을 귀속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자칫 ‘삼위일체’보다는 ‘이위일체’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18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과연 이위일체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다. 다만, 삼위일체론적 십자가의 신학에 대한 논의를 보다 철저하고 일관성 있게 만들고자 할 경우 세 위격이 처음부터 성령에 의해 이끌리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다주기 위해 연합하여 활동한다고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성령이 단순히 십자가 사건 이후에 발생하는 위격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 자체를 주도하는 위격이라고 증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로 ‘조직신학적 기여’라는 표어 아래에 기획된 몰트만의 후기 신학에서는 ‘영-그리스도론’이라는 논의를 통해 예수의 삶을 이끄시는 성령의 역할이 보다 부각되기도 한다.19
그리스도교 신앙이 삼위일체론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삼위일체론이 세상의 가장 아래로 임재하신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은 결코 그리스도교 신앙의 구체적 실천과 관계 없는 신학적 사변에 불과한 논의가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으로 철저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나 삼위일체론적 사유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즉, 하나님 없는 자들과 연대하시고자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모든 고통을 감내하시는 분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기존의 그리스 철학 전통을 차용하여 ‘무감정성’ 공리를 귀속시킬 수도 없고, 가현설을 바탕으로 인간 예수만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성부수난설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태초에는 순수하게 존재하시다가 십자가에 이르러서야 고통을 받으셨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분은 자기 안에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채 십자가 사건을 향한 역사를 걸어오신 분이시다. 십자가 사건은 성자뿐만 아니라 성부 역시 태초부터 고통에 노출되어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고통받는 이 세상에 ‘성령’으로 임재하기 위해 ‘성부’와 ‘성자’가 고통 속에서 연합한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는 세 위격의 내적 관계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영원한 신적 연합의 이유이자 목표인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십자가 사건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올바르게 이해된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자들에게 임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예수가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자들을 대변하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항의한 그 십자가 위에 하나님 역시 고통 속에서 함께 계셨다. 그분은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 대해 저항하시는 분이시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은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조차 우리와 함께 계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증언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셔서 우리와 함께 싸우시고 계시며 불의와 폭력에 대한 우리의 절규를 인정하셔서 우리에게 종말론적 의를 선언하실 것이라는 사실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구원이다. “죄와 죽음으로 결정되어 있는 인간의 모든 역사는 이 <하나님의 역사> 안에, 즉 삼위일체성 안에 지양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의 미래 속에 통합되어 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고통이 아닌 고통은 없으며, 골고다 산상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 아니었던 죽음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삶, 영원한 기쁨에로 통합되지 않는 삶이나 행복이나 기쁨은 없다.”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된 하나님은 일종의 ‘사건’이시다. 그분은 하늘에 투영된 하나의 허구적 인격이 아니다. 애초에 삼위일체는 세 위격이 이루고 있는 내적 관계를 말하는 것일 뿐, 단일한 인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늘에 투영된 인격으로서의 <인격적 하나님>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형이상학적 하나님의 개념을 내려놓은 채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이라는 용어에 상응하는 것은 하나의 대상 혹은 실체라기보다도 ‘사건’에 더욱 가깝다. 고통받는 세상 속에 ‘성령’으로 임재하기 위해 ‘성부’와 ‘성자’가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은 사건, 곧 성부, 성자, 성령의 연합의 사건이야 말로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세 위격은 하나님 없는 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태초부터 영원까지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기독교적으로 얘기하는 자는 예수의 역사를 아들과 아버지 상의 역사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의 다른 본성이나 하나의 <사건>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인간성의 역사가 아니라, 골고다의 사건, 즉 미래를 열어주고 삶을 창조하는 영이 거기서부터 생성되는 아들의 사랑과 아버지의 고통의 사건이다.”
이때 그리스도교적 기도란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드려진다. 성부, 성자, 성령의 내적 관계의 한 가운데 놓인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기도의 진정한 자리이다. “우리는 단순히 하늘의 당신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기도한다. 우리는 한 사건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 <안에서> 기도한다. 우리는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께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 즉, 우리는 불의와 폭력 속에서 고통받는 자들과 연대를 맺는 가운데 도래할 종말론적 미래를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고통, 곧 모든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에 참여하는 가운데 부활의 새로운 삶을 희망해야 한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란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이 바로 이러한 자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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