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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by 이덕휴-dhleepaul 2019. 12. 8.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17-18)


 성서에 기록된 여러 기적들 중 왜 그리스도의 부활이 유독 기념되어야 하는 일인가? 모세는 홍해 바다를 갈랐고, 엘리아는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렸다. 기적의 규모만으로 보자면 이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보다도 훨씬 거대하게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성서는 그리스도 외에도 죽음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럿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구약성서에서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은 예언자 엘리사의 기도로 살아났다. 신약성서에서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예수의 친구 나사로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왜 성서의 이러한 기적들 중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가? 사도 바울은 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을 경우 모든 믿음이 헛되다는 극단적인 이야기까지 주저하지 않는가?


 부활에 대한 신앙이 유대교 안에서 본격화된 것은 포로기 이후 제2성전 시대였다. 당시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력을 확장하며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지중해 동부 연안을 정복함으로써 유대인들이 다시 그리스 문화권의 지배 아래에 식민 통치를 받던 상황이었다. 특별히 기원전 175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에 이르게 되었을 때 유대인들에 대한 종교적 박해는 극심해졌다. 안식일과 할례가 금지되었으며, 유대교의 음식규정을 어길 것이 강요되었고, 성전에는 제우스의 신상이 세워져 숭배되었던 것이다. 부활신앙은 바로 이러한 박해 속에서 등장하였다. 유대인들은 비록 자신들이 현실에서 박해를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시키셔서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서12장과 신구약 중간기에 쓰인 2경전혹은 외경가운데 하나인 마카베오 하권7장의 내용들이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때에 너의 백성을 지키는 위대한 천사장 미가엘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생긴 뒤로 그 때까지 없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 책에 기록된 너의 백성은 모두 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다니엘서 12:1-3)


 “이 못된 악마, 너는 우리를 죽여서 이 세상에 살지 못하게 하지만 이 우주의 왕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위해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마카베오 하권 7:9)


 “그는 죽는 마지막 순간에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지금 사람의 손에 죽어서 하나님께 가서 다시 살아날 희망을 품고 있으니 기꺼이 죽는다. 그러나 너는 부활하여 다시 살 희망은 전혀 없다.’”(마카베오 하권 7:14)


 부활이 이루어지는 때는 마지막 심판의 자리이다유대인들은 종말의 날에 있을 이 심판을 그들의 현실적인 법정을 토대로 이해하였다.


 유대인들의 법정은 검사 없이 재판관, 원고, 피고로 이루어진다. 재판관이 대립하는 원고나 피고 사이에서 판결을 내려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줄 경우, 재판관이 이겼다고 판결한 그 편이 의롭다(dikaios)’는 선언을 얻는다. 이때의 의롭다라는 용어는 순전히 재판상의 형식적인 선언일 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윤리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 가령 원고가 재판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원고가 훌륭한 인격을 지니거나 정의로운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피고에 대한 그의 고발 내용이 재판관이 보기에 수긍할 만하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피고가 의롭다고 선언을 받았다면 이 역시 피고가 특별히 윤리적이라고 밝혀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재판관이 그에 대해 제기된 고발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가 무죄로 밝혀졌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원고나 피고뿐만 아니라 재판관의 의로움 또한 이야기될 수 있다. 재판관이 법정의 상황에서 정해진 법의 내용과 절차에 따라 판결을 내리면 그 재판관은 의롭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은 종말의 날에 있을 심판의 자리에서 바로 그들 자신의 의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은 심판의 날에 유대인들과 그들을 핍박한 압제자들 사이에서 재판관이 되셔서 판결을 내리실 것이다. 그리고 이 판결에서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핍박받던 유대인들의 손을 들어주시고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모세를 통해, 다윗을 통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진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면 유대인들은 종말의 날에 의로운 자가 되어 부활하게 된다. 즉 부활은 종말의 날에 있을 의로움의 선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부활을 통해 유대인들과 맺었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하나님 또한 이제 의로운 재판관으로 드러나게 되신다. 그분은 법정에서 자신의 영원한 언약에 따라 판결하셨기 때문이다. 소송 사건을 법에 의거하여 공정하게 처리한 재판관이 의롭다고 여겨지듯이, 언약에 의거하여 공정하게 심판하실 재판관으로서의 하나님께서도 종말의 날에 의로우신 분으로 밝혀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제2성전기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던 이와 같은 종말론의 배경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성서는 예수 외에도 죽은 뒤에 살아난 몇몇 인물들을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사건들과 예수의 부활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구별된다. 성서가 예수의 부활을 특별히 구별하여 죽음을 이긴 사건으로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예수가 부활을 통해 다시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새로운 몸을 얻었기 때문이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나, 회당장의 야이로의 딸이나, 예수의 친구 나사로는 죽음으로부터 살아난 뒤에 다시 죽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예수는 죽음을 완전히 이겨내는 부활에 이르렀다. 이 부활은 바로 유대인들이 제2성전기에 고대하던 종말론적인 부활이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주실 영원한 생명의 몸이 예수에게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대단히 복합적인 함의를 지니게 된다. 첫째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 자신이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모든 사역들이 자신의 뜻에 합치하는 것이라 인정하셨고, 이것을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 가운데로 부활시키심으로써 온 세상에 그의 의로움을 선언하셨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다른 종류의 기적들과 구별된다. 부활은 단순히 놀랍고 기이한 일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이전까지 사람들에게 보여준 삶과 그가 제시한 가르침들이 하나님께 옳다고 판결되었음에 대한 증거이다.

 

 둘째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전권요구가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예수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하던 랍비가 아니었다. 예수는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로써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인격을 서로 뗄 수 없이 연관시켰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선포될 수 있다. 그의 선포는 예수라는 인격을 벗어날 경우 일반화된 가르침으로 남을 수가 없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라는 구절이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예수가 아닌 사람은 이 구절에 사용된 라는 말을 그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가 없다. 이 내용은 오직 예수 자신에게서 선포되었을 때만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그 외의 사람들은 동일한 선포를 할 수 없다. 문제는 예수의 선포가 지닌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예수의 하나님은 예수 이외의 다른 인격을 통해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분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예수의 가르침대로라면, 우리는 예수 자신을 통해서만 하나님에게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점을 예수가 하나님에 대해 전권을 요구하였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키심으로써 의롭다고 선언하였다는 점에서 부활 사건에 커다란 함의가 생겨난다. 자신의 인격과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을 분리시키지 않았던 예수의 말이 부활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으며, 이 점에서 예수가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듯 부활로써 예수가 하나님 자신과 동등한 분으로 인정받았을 경우, 이 인정은 예수의 이전까지의 삶으로도 소급 적용이 가능해진다. 부활 사건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 드러난 예수는 사실 그의 사역 초기부터 하나님 자신이셨고, 더 나아가서는 탄생부터 하나님이셨으며, 마침내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것처럼 태초 이전의 로고스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셋째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연대하였던 자들, 곧 하나님께 버림받은 모든 자들이 의로운 자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되었다. 이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의 성육신이었다. , 하나님은 예수가 되시기로 선택하심으로써 단순히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는 인간이 되시기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위치에 놓으시고, 버림받은 사람을 선택하심으로써 이러한 처지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편에 서시는 분이 되셨다. 몰트만이 이야기하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저주받은 자들과 연대하신 하나님,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과 동일시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수가 부활함으로써 그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 자신의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연대하였던 자들, 곧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대표(Stellvertretung)하였던 모든 자들에 대한 의로움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부활시킴으로써 하나님께 버림받은 모든 자들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며, 자신을 버림받은 자들의 하나님으로써 확정하시는 것으로 밝혀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폭력 가운데, 부조리 가운데, 재난 가운데 악의 문제로 신음하며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질문하는 모든 사람들의 정당함을 인정하신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 버림받은 자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로 이렇듯 버림받은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는 결국 아무도 버림받지 않는다.

 

 넷째로, 예수의 부활은 그와 연대한 모든 자들에게 일어날 미래의 사건에 대한 선취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새로운 몸으로 살리셨듯이, 최후의 심판 때에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모든 자들 또한 부활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라 일컬어졌던 자들이 의로운 자로서 선언될 것이며, 이들은 새로운 육신을 얻게 될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육신을 벗어난 자가 아니라 영원하고 회복된 육신을 얻은 자였다. 그리스도교가 처음 그리스-로마 문화권으로 전파되었을 때, 교회는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교도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스 전통에서는 이원론으로 인해 영혼은 순수하고 완전하며 불멸의 것인 반면, 육신은 타락하고 불완전하며 필멸의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팽배해 있었다. 이 때문에 첼수스(Celsus)와 같은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가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조롱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 사건에 근거한 그리스도교는 결코 육신을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부활은 물리적 세계를 탈피하고서 비물리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세계로 이행하는 과정이 아니라, 물리적 세계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육신은 영혼과 함께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서 부활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부활의 날에 회복될 것이다. 우리의 몸이 부활을 통해 완전하게 되는 것처럼, 피조 세계 전체가 종말의 날에는 새로운 창조로써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바로 종말의 날에 일어날 이러한 새로운 창조를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다.

 


 다섯째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셨고, 그 백성들의 왕이 되셔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하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포로기 유대인들은 이 언약을 의지하며 그들에게 찾아오는 어려움들을 견뎌나갔다. 그들은 종말의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셔서 자신을 유대인들의 왕으로 모든 민족 가운데 나타내실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세우실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유대인들의 편에 서실 때에 억압받던 그들에게 해방이 찾아오리라고 믿었다. 예수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언약이 이루어진 사건이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전권요구는 부활을 통해 인정되었다. 유대인의 왕은 바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로써 온 세상에 선언되었다. 왕이 된 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가운데 침투해 들어온다. 다만 이 나라는 이전까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유대인들은 그들 민족을 식민지배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무력을 가진 정권을 꿈꿨다. 유대인들이 세상의 제국들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서게 되며, 하나님은 유대 민족의 왕이 되시는 나라를 상상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을 통해 밝혀진 하나님의 나라란 유대인들이 희망했던 무력에 근거한 나라, 민족에 근거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 나라는 예수를 왕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는 나라였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이라는 특정한 집단이 아니라 예수를 자신의 주님으로, 왕으로 인정하는 모든 열방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예수가 왕이기 때문에 권력도, 재산도, 혈통도 다른 어떠한 것도 인간 위에 군림하며 왕의 권위를 내세울 수 없다고 고백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그동안 속박해온 거짓된 왕들로부터 해방을 경험하였다.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왕이 되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소외시킨 모든 폭력과 압제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다.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 곧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세상의 부당한 억압과 폭력에 저항하며 해방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해방을 위한 이 싸움 가운데서 세상 속에 확장되어 간다.


 예수의 부활이 함의하는 이 모든 것들을 요약하여, 우리는 부활을 하나님의 의(dikaiosune theou)가 드러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예수를 부활시키신 하나님은 버림받은 모든 자들의 편에 서시는 하나님이시며, 예수와 연대한 모든 버림받은 자들의 의로움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 되셔서 모든 억압과 폭력에 저항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우신 분이시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맺은 언약은 종말론적인 부활의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이 언약에 끝까지 신실하신 분으로서, 종말의 날에 예수의 부활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셨다. 곧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악과 싸우시며, 마지막에는 우리의 모든 것들을 새로운 창조로 회복시키실 분이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믿음을 통해 세상에 나아간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종말의 첫날을 살아가며, 만물의 부활로 완성될 종말의 마지막 날을 기대한다. 우리는 이 종말의 시간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의로우심을 세상 가운데 선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