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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방 -Q&A

카톨릭의 이해

by 이덕휴-dhleepaul 2019. 12. 8.

What is Catholic

(* 이 문서는 위키피디아의 로마 카톨릭교회 문서를 인용하였습니다. 원문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로마_가톨릭교회

로마 가톨릭교회(라틴어Ecclesia Catholica Romana 에클레시아 카톨리카 로마나[*]영어Roman Catholic Church)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교회이며, 전 세계적으로 약 12억명의 신도를 가진 최대 규모의 교회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에서는 천주교회(天主敎會)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서학(西學)으로도 불렸다. 교회에 대한 정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Lumen Gentium)에 따르면 “성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하는 교황은 주교단의 단장으로서 그 단원인 주교들과 사도단의 직무를 계승하며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자임하고 있다.[1] 2010년 교회통계연감을 기준으로 한 전 세계의 신자 수는 약 11억 9,567만 1천 명으로 세계 인구의 약 17%를 넘어서는 것으로 파악된다.[2]

용어 정리

가톨릭”이란 말은 ‘두루 따르는, 모두를 포함한’이란 뜻이 있는 고대 그리스어 카톨리코스(καθολικός, katholikos)에서 온 말이다. ‘가톨릭’의 뜻을 과거에 ‘공번’(共繙)이라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풀이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보편’(普遍)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어로 ‘가톨릭’이라는 말은 평범한 낱말로서 곳곳에 두루 쓰였으나, 기독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안티오키아의 주교이던 성 이냐시오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냐시오는 저서 ‘이단자와의 대화’에서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가톨릭 교회가 있고 주교가 있는 곳에 교회 공동체가 있다”라는 말을 사용하여, ‘가톨릭’이라는 말을 교회의 보편성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하였다.

기독교 교회가 분열하기 이전의 가톨릭이라는 낱말은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하나같이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특히 당시의 유대교에서 분리된 여러 종교 집단으로부터 구분하는 부차적인 뜻이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사 학계에서는 가톨릭교회를 사도신경에 언급되는 ‘보편적 교회‘로, 특정한 교파로서의 가톨릭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3]

한국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일찍이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가 창안하여 사용했던 천주교(天主敎)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4대 교리

천지를 창조한 삼위일체인 야훼(여호와)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리스도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였다고 믿는다. 사후에 선한 자는 상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게 된다는 도덕률을 믿는다.

이를 천주존재, 삼위일체, 상선벌악, 강생구속의 4대 교리로 정리한다.

  • 천주존재(天主存在) :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이 존재함을 믿음.
  • 삼위일체(三位一體) : 하느님은 세 위격,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어우러져 존재함을 믿음.
  • 상선벌악(賞善罰惡) : 하느님은 선한 이에겐 상을, 악한 이에겐 벌을 준다고 믿음.
  • 강생구속(降生救贖) : 그리스도가 오시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당신을 희생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함을 믿음.

거룩한 전승

그중에서 특히 문자로 기록된 성경(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부여하였다. 특히 교황 다마소 1세의 지시로성 예로니모가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Vulgate)는 현대까지도 공식적인 라틴어 성서로 취급되고 있다. 추후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불가타역(譯)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번역본이라 하여 46권의 구약성경와 27권의 신약성경이 정경(Cannon)임을 추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는 문헌으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구두(口頭) 전승으로도 전해졌다. 기록된 것이든 구두나 전통을 통하여 전해온 것이나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칠 권한은 오직 교회에게 있다. 성경(聖經, Sacred Scripture)을 포함한 성전(聖傳, Sacred Tradition) 그리고 교도권(敎導權, Magisterium of the Church)은 성령 안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어느 하나만 빠져도 구원에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경전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말씀'(로고스)으로 오신 삼위일체의 주님을 믿는 종교이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성경 전체의 맥락과 일관성에 유의하여 거룩한 전승에 따라 읽을 것을 요청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신앙진리의 일관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례

교회 공동체

공의회

로마 가톨릭에서는 21번의 공의회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21번의 공의회는 연대순에 따라,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에페수스 공의회칼케돈 공의회,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1차 라테란 공의회, 제2차 라테란 공의회, 제3차 라테란 공의회,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제1차 리옹 공의회, 제2차 리옹 공의회, 빈 공의회, 콘스탄츠 공의회, 피렌체 공의회, 제5차 라테란 공의회,트리엔트 공의회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교도권

로마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교도권(potestas magisterii)’이라는 말은, 평신도를 가르쳐 이끌어주는 교회의 권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이 권위는 신학자의 것이 아니고, 주교의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도권이 없으면 신도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해석한다든가 왜곡하여 모순이나 대립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이끌어줄 것을 약속하고 있지만, 이 인도는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신앙과 도덕에 관한 일에 대해 발언할 때 나타난다는 것이 로마 가톨릭에 의한 교도권 해석이다. 단지, 이것은 결코 성령이 개인을 이끌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분열된 교회의 일치 노력

아시리아 동방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에페소스 공의회 및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파문된 네스토리우스파의 계파이다. 431년의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서로 다툰 소위 테오토코스논쟁이 주 원인이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와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 중 어느 쪽이 더 올바른 칭호인지 겨룬 사건이었다.

1994년 11월에 발표된 《그리스도 이해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아시리아 정교회의 공동선언문》에서, “어느 쪽을 부르든 같은 신앙을 표명한 것이며, 두 교회는 서로 전례와 신앙심을 존중한다.”라며 쌍방간의 존중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

한층 더 어려운 것은 동방정교회와의 일치 문제이다. 로마 가톨릭 측에서는 두 교회의 합동에는 교리 문제보다는 전통에 관한 문제가 더 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나, 전례나 신앙심에서의 차이를 어떻게 서로 존중하는가의 문제가 관건이라고 본다. 한편, 동방정교회 측에서는 두 교회의 대립은 성상(聖像)의 문제나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하는 기본적 교리의 불일치에 있으며, 교황의 수위권이나 무류성에 관한 문제도 단순한 전통의 문제는 아니고 교리상의 문제라고 파악하고 있다. 또 십자군 문제나 동유럽 포교 등의 로마 가톨릭의 행동에 대한 반발도 있다.

동서교회가 결국 최종적으로 갈라지게 된 역사적인 사건은 15세기에 있었던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침략 때문이었다. 동로마 제국 황제와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이 있자 그 동안의 동서교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서유럽의 정세와 여러가지 지역문제로 서방교회에서는 동방교회를 물리적으로 도와줄 여력이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는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동방교회의 서방교회에 대한 서운함은 교회분열에 가장 큰 일조를 한 것으로 보는 사가들이 있다. 두 교회의 분열은 신앙적인 것보다는 정치적·감정적인 원인이 더 컸다는 것이다.

개신교(Protestant)

종교개혁 시대의 장 칼뱅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치를 주장했다.[4] 현대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루터교감리교 사이에서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문”이 발표되기도 하였으며, 대한민국에서는 각종 개신교 교파와 한국 정교회의 협의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함께 협력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 기독교의 분열은 소모적 논쟁으로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진보적인 반성에 따라 진전되어어, 과거의 오해한 부분들을 양측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양측은 신학적인 이견으로 인해 서로의 세례를 잘 인정하려 하지 않아서 가시적인 결과는 근본적으로 미비하다.

현재 로마 가톨릭교회의 숙제는 개신교와의 일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견해, 성모 마리아에 대한 쟁점, 교회론, 가톨릭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도전승과 관련된 데에서 발생하는 문제(예를 들어 세례의 상호 인정, 상호 성직 인정 등) 해결 등이 쌓여있다. 한편, 성공회와는 1960년대부터 연합 기도회를 통해 대화를 해왔다.

성직자

교황과 추기경단

로마 가톨릭이 다른 기독교 종파와 비교해서 특이한 점은 우선은 교황과 평신도 간의 관계이다. 교황이란 로마 가톨릭의 정신적 수장으로서, 로마 가톨릭의 재치권과 통치권을 소유한 자이다. 교황은 성 베드로에 의한 사도좌의 계승자이며, 바티칸에 거주한다. 덧붙여 사도좌라는 말은 바티칸의 행정 조직을 가리키는 때도 있으며,로마 교황청이라고도 불린다.

교황과 관련된 권한 중에는 교황수위권(敎皇首位權)과 교황무류성(敎皇無謬性)이 있다. 우선 교황의 수위권은 교황이 지상교회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교회의 주교이자 보편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서 전 교회에 대해 완전한 권한을 행사한다는 말이다. 통상적 이해로는 모든 주교 중에서 교황의 우위권을 가리키고 있다. 이 우위권은 이미 초대교회 시대에 5대 지역교회였던 로마 교회, 콘티탄티노플 교회, 예루살렘 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 그리고 안티오키아 교회의 주교 가운데 가장 높은 서열로(First among equals) 인정받고 있었으며 로마 교회에서 임의로 만들어낸 순위는 아니다. 다음으로, 교황의 무류성은 “교황이 교리의 머리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공적으로 사도좌에서 장엄하게 선언할 때는 그르침이 없다.”라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무류성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신앙과 도덕, 교리 문제 판단에만 한정되어 있으며, 천문학이나 지리학 등 자연과학의 영역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교황 선거에 관한 최근의 규정은 1996년의 《사도헌장》(使徒憲章, Universi Dominici Gregis)에 나타나고 있다. 그 문서에 정해지는 규칙에 따르면, 교황 선거자인추기경들은 외부로부터 격리되어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비밀 투표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 선거를 콘클라베라고 한다.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려면 후보자에게 투표자의 3분의 2 이상의 표가 몰려야 한다. 또 관례에 따라서, 교황 선거에 참가할 수 있는 추기경은 80세 미만의 추기경에 한정된다.

추기경은 교황청에서 일하는 고위 성직자나 세계의 중요한 교구의 주교 중에서 교황에 의해 임명된다. 교황 선거에 참가할 수 있는 추기경은 80세 미만이지만, 80세 이상의 성직자로 교회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명예직으로 추기경에 임명하는 때도 있다. 그런 추기경 중에는 신학자나 중화인민공화국 대륙중국이나 베트남 등 독재나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서 장기간 걸쳐 투옥된 사람도 포함된다.

주교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주교(主教)는 사도의 계승자이며, 교회를 통솔하는 직무에 해당한다. 교황 역시 로마의 주교이지만, 초대 교황인 베드로의 수위권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여 주교단에서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주교직을 맡은 사제에게 부여되는 권한은 자기 교구의 관할권이다. 교구장 주교를 보좌하도록 임명되는 부교구장의 직책도 존재한다. 교구장 주교가 어떠한 사정 때문에 공석이 되었을 때는 부교구장 주교가 교구장의 직무를 승계하게 된다.

또한 ‘명의 주교’가 있다. 명의 주교는 교구 주교의 보좌 주교, 교황청에 근무하는 주교, 교황대사 등이 이에 해당된다. 보좌 주교는 주교의 업무를 보좌하기 위하여 서품되나, 다른 계승권은 없다. 이러한 주교들은 자기가 관할하는 교구가 없으므로 재직시는 고대의 폐쇄된 교구의 주교 명의만을 사용하게 된다.

주교 중에는 대주교라는 지위로 올라가는 일도 있지만, 이것들은 서품에 따른 위계가 아니고 교구의 규모에 따라 정해진 교회 행정상의 직무를 나타낸다. 즉 사제가 주교로 서품되는 일은 있어도, 주교가 대주교로 서품되는 일은 없다. 물론, 대주교 중에서도 명의 주교직을 갖는 대주교가 있다. 주교들은 정기적으로 회합을 열고, 다양한 문제를 주제로 토의하는데, 주교회의(시노드)라고 한다. 시노드에서는 미사 등의 문제에 관해서는 결의할 수 있지만, 특정 주교의 처우에 관해서 등의 결의를 위해서는 주교의 3분의 2 이상의 동의와 교황청의 재가가 필요하다.

사제와 부제

주교는 일반적인 사제(司祭)와 부제(副祭)의 보좌에 의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는 교구에 소속하는 교구 사제와 수도회에 소속하는 수도 사제,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선교 사제로 나뉜다. 11세기 이후에는 교회부패의 가장 심각한 유형인 교회세습의 폐단과 세속 왕이나 귀족들이 성직자 임명에 관여하는 등의 교회의 부패를 막고자 성직자의 동정을 교회법으로 정하여 결혼을 엄격히 금지했다. 예외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일치하지만, 동방식 전례를 실시하는 동방 가톨릭교회나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로 전향한 이들 중의 기혼자는 특별히 인정되는 경우도 있다.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종신 부제(사제로의 진급이 없는 부제)에 관해서는 기혼자의 서품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라도 서품 후의 결혼이나 기혼자의 아내가 죽었을 경우의 재혼은 인정되지 않는다.

한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주교, 사제, 부제가 있다고 하는 피라미드형의 관료적 계급 구조가 강조되던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모든 신도가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맡고 있다고 하는 ‘유대 민족의 교회론’이 다시 검토되어 종래의 성직자 지상주의의 수정이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직자는 물론 평신도에게도 그리스도의 사제직, 왕직 그리고 예언직을 모두 갖고 있다고 가르치며 사제는 미사성제라는 예배를 주관하는 직무로서의 제사장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라별 인구에 대한 로마 가톨릭 신자 비율 – 색이 짙을 수록 비율이 높다

신자의 분포

전세계 신자의 총수는 2012년 12월 기준 약 12억2,800만 명에 달한다. 가톨릭교회 공동체를 중화인민공화국 다음으로 큰 단일 인구집단으로 볼 수도 있다. 로마 가톨릭교도는 전 세계 곳곳에 분포하고 있지만, 주로 교세가 강한 지역은 유럽과 아메리카이다. 2012년도의 통계에서는, 아메리카에 5억 9,882만 명, 유럽에 2억 8,687만 명, 아프리카에 1억 9,859만 명, 아시아에 1억 3,464만 명, 오세아니아에 970만 명이다[5]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뿌리깊은 종교다. 유럽에서 신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라틴 유럽에서는 프랑스이탈리아에스파냐포르투갈이 있고, 비(非) 라틴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벨기에크로아티아체코헝가리아일랜드리투아니아몰타폴란드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 등이 있다. 독일네덜란드스위스 및 영국의 북아일랜드 지방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의 교세가 비슷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로마 가톨릭교도는 폭넓게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중남미 지역인 라틴 아메리카 주민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멕시코브라질아르헨티나,콜롬비아에서 교세가 강하며, 브라질은 세계에서 신자 수가 가장 많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칠레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앵글로아메리카의 미국과 캐나다에는 라틴 아메리카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비중은 낮으나, 캐나다에서는 신자 수가 가장 많은 종교로 꼽히며, 미국에서도 2012년 말 현재 7,118만명의 신자로서, 전 국민의 4분의 1 가량이 속해 있는 중요한 종교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여러 나라에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신자는 콩고 민주 공화국나이지리아우간다 등에 많으며, 국민 중 신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나라로는 세이셸우간다부룬디 등이 있다.

아시아에서는 전체 인구 중 그 비중은 낮으나, 필리핀과 동티모르는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가 대다수인 가톨릭 국가이다. 대한민국은 현재 국민의 약 10% 가량을 차지한다. 그 외의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는 신자의 비중이 낮은 편이다.

오세아니아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신자가 가장 많으며, 다른 중소 국가들에도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미국의 해외 영토인 하와이 섬에서는 19세기 다미앵이라는 사제가 한센인을 대상으로 의료선교 활동을 하였다.

역사

로마 교회의 기원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시작됐다. 유다교의 입장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분파로 이해됐고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 문제로 유다교와 늘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다음에 예루살렘은 더 이상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자연스럽게 집중되게 됐다. 비록 예루살렘이 기독교의 발상지이지만 오히려 로마가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정치 상황 등 복합적인 이유에 기인한다. 로마 교회가 언제 생겼는지, 즉 로마에 첫 그리스도인이 언제 정착했고 어떻게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됐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바울의 로마를 근거로 적어도 그 집필 연대인 58년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로마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59년에서 61년 사이에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에는 로마 도착 사실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의 로마 체류 사실과 순교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 시기에 64년 7월 19일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한다. 이때 네로 황제는 그의 출생지인 안티움 해변가에 휴양을 가 있었다. 화재 소식을 듣고 로마로 급히 돌아온 네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 대참사에 대한 항간의 방화을 사주한 것이 황제라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이때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을 시기 질투해 왔던 광적인 유대인들은 화재 혐의가 자기들에게 돌아올까봐 그리스도인들이 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퍼트리자, 로마시민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극에 달해 있었다.[6] 네로는 자기에게 쏠리는 의혹을 모면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방화 혐의와 책임를 뒤집어 씌웠던 것이다. 이로 인해 모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방화범으로 몰려 4여년간 박해와 화형으로 처형되어 나갔다. 이 기간에 바울과 베드로로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

로마는 기독교 공동체의 박해의 주무대였으며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의 순교지라는 특수한 의미와 배경으로 인해 지역교회를 넘어선 새롭고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초기 교회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일치의 기준이었고 가시적인 정점이었다. 이후 로마 주교는 스승처럼 다른 지역교회와 공동체의 문제에 가르침을 내린다.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의 내부 분쟁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로마 주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려준다. 당시 지역 공동체 지도자들은 로마를 방문해 로마 공동체와의 일치를 확인하고 보장받곤 했다.[8]

로마 제국의 박해는 대체로 10번에 걸쳐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 성격은 3기에 걸쳐 뚜렷이 구분된다. 100년경 까지의 제1기는 교회에 호의적이다가 로마 시 대화재 사건으로 일어난 우발적이고 산발적인 박해기이며, 250년까지의 제2기는 교회를 반인류적 반국가적 금지된 종교로 규정하고 신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되던 시기다. 가장 조직적이고 잔인하게 시행된 250년에서 313년까지의 제3기는 로마 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무마시키기 위해 일어난 박해시기였다. 이 4년여에 걸친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도 순교했다.

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교회와 로마 제국은 비록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안고 있었다. 먼저 로마인들은 병역을 노예나 무산자(無産者)들에게는 부과 시키지 않을 만큼 시민의 권리요 의무라고 생각할 정도로 개인보다 국가를 절대시하는 성향이어서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기독교와 상충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황제들은 로마 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기를 맞으면 종교적 기반에서 제국의 쇄신과 내적 강화를 꾀했는데 황제숭배 같은 국가종교 예배가 국가에 대한 충성의 시금석으로 강조될수록 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로마인들은 영적 세력이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었는데 타치우스나 아우렐리우스 같은 황제들의 재위기간에 전염병, 기근, 홍수, 야만족 침입 등의 재난이 발생하자 기독교 반대파들은 기독교 때문에 신들의 분노를 사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며 군중들을 부추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무지도 박해의 한몫을 담당했는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에 대해 신자들을 식인종으로, 형제자매로서의 친교생활에 대해 근친상간하는 야만인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300여 년에 걸친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마침내 로마제국의 새로운 사회·통치 질서로 자리잡게 되는 승리를 거둔다.[9]

제국 교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2년 이탈리아로 출정해 막센티우스와 서로마제국의 패권을 두고 다투게 된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티베르 강 밀비오 다리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전투 전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인들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했을 때 공중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이것을 가지고 승리하라’는 문구를 보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키(Χ)와 로(Ρ)로된 군기를 만들어 가지고 싸워 승리했다고 한다. 이 밀비오 전투의 승리로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의 주인이 됐고 그리스도를 수호신으로 숭배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의 이러한 개종은 박해의 종식과 함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열어놓는 대전환점이 된다.[10]

313년 밀라노를 방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동부지역의 황제 리치니우스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논의하게 되고 그 중에서도 십자가 발현 체험을 한 콘스탄티누스는 종교문제, 특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포고형식의 영을 내리게 된다. 이를 밀라노 칙령 혹은 관용령이라 부른다.

밀라노 관용령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면서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제국 내 모든 시민들에게 적용되는 종교자유의 원칙을 선포한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시대에 몰수당한 재산이나 팔린 재산까지도 교회에 반납하도록 명시한 것이다. 이 밀라노 관용령 자체가 기독교를 국교화 하거나 특권을 베푼 것이 아니라 타종교와 같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뿐이지만 기독교가 제국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기초가 됐다. 밀라노 관용령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취한 여러 조치들은 대중의 대량 입교와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기독교 정신을 확산시키게 된다.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반 교회적 정책을 시행한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전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됨으로써 기독교 정책은 더욱 강화된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이은 아들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친 교회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비록 율리아누스 황제 때 반 교회 정책이 시행되긴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테오도시우스 1세 때인 380년 2월에 ‘가톨릭 신앙에 대한 칙령'(De fide catholica)의 반포와 함께 기독교가 제국의 공인 종교가 됐다. 이로써 300년 간의 혹독한 박해를 이겨낸 기독교는 제국교회, 국가교회가 됐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단초로 제국의 공인교회가 된 기독교는 박해받는 교회에서 특권의 교회로, 순교자의 교회에서 국가교회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는 광범위한 복음전파와 함께 대중의 대량 입교로 인해 양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 교회가 됨으로써 국가권력과 너무 밀착되어 부와 권력을 누리면서 세속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우려한 인물들 중 몇몇은 교회 복음화와 내적 쇄신 그리고 신앙생활의 심화를 위해 사막으로 은거하기도 해 초기 수도원 운동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11]

십자군 전쟁의 또 다른 중요한 배경은 기사계급의 동요였다. 끊이지 않던 제후들간의 세력다툼이 11세기 이후 사회의 안정과 함께 소멸되었으며 교회도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교회 안에 유입된 호전성을 순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평화」(Pax Dei)와 「하느님의 휴전」(Tregua Dei)이란 제도를 만들어 많은 전투 행위를 금지 시켰다. 이렇게 되자 기사들은 전투정신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고 신분마저 위태로워졌다.

서유럽과 동로마 제국, 이슬람으로 삼분되어있던 국제정세 또한 셀주크 투르크족의 발흥으로 균형이 깨지고 동로마 제국이 교황을 비롯한 서유럽 사회에 구원을 요청하게 됐다. 637년부터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의 세력아래 들어가 있었지만 성지순례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셀주크 투르크족이 점령한 이후부터는 성지순례가 어려워졌고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리하여 11세기말부터 13세기까지 근 200여 년 동안 8차례에 걸쳐 원정이 이루어졌다. 농민십자군에 이어 기사들과 귀족들로 이뤄진 제1차 십자군이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십자군 원정이 거듭될수록 그 순수성도 잃어버리게 되는데 4차 원정에서는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놀아나 성지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라틴제국을 세움으로써 동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회복할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십자군 운동은 원정이 거듭될수록 신앙의 순수한 열정이 퇴색되고 변질된 채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교황의 주도로 이뤄진 십자군은 초기에는 교황권의 신장을 가져왔지만 궁극적으로 십자군이 실패함으로써 교황권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동시에 유럽의 종교적 열정도 식었다. 또한 영주들이 십자군 원정에 나선 후 영지관리를 소홀히 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쇠퇴하자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왕권이 절대화하는 한편 공동체의식이 강화돼 민족의식 내지는 국민의식이 싹트기 시작함으로써 서유럽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마련됐다. 또한 동방과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은 학문을 증진시켜 스콜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12]

이 종교 개혁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독일 주교들의 부정한 교도권 남용이었다. 당시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위한 헌금 봉헌, 고해성사참여, 성지순례 등의 이행을 조건으로 신자들에게 대사 특전을 부여하고 있었는데,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 등 북유럽(독일) 교회들은 이러한 대사특전 교도권을 남용하여 더 많은 돈을 끌어모으려고 했다. 따라서 원래 신앙의 촉진을 위해 주어지던 특전인 대사의 의미가 변질되어 “미래의 죄”까지 사해진다고 믿는 신자들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루터는 성직자들의 올바르지 못한 사죄권 남용과 이러한 독일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기 위하여 95개조의 반박문을 올린 것이다.

루터는 독일 교회에서 이루어진 작금의 대사특전이 성실한 신앙생활을 위한 노력보다는 돈으로 자기 영혼을 구하려고 고심하고 보이기식 순례와 같은 외적 행사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독일 교회 대주교에게 새 훈령을 통해 대사설교의 폐단을 없앨 것을 요구하고 신학자들이 대사 교리를 명확히 밝힐 것을 촉구하면서 작금의 대사 시행을 반박하는 신학 명제로서 대사 명제와 대사 논문을 첨부했다. 루터는 후에 자신이 95개 조문을 발표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 편지에 대해 주교들이 아무런 회답을 주지 않은데 있었다고 말했다. 이 95개 명제는 루터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출판업자들의 손에 들어가 1518년 95개 항목으로 정리돼 「95개조 명제」로 인쇄됐다.

논쟁이 이어지면서 루터는 자신의 신학 체계를 전 분야에 걸쳐 발전시키게 되고 쇄신의 주장은 분열의 빌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1518년 1월 대사 설교가로 활동하던 도미니코회 수사 텟첼이 106개조 반박문으로 95개조 명제를 논박하자 루터는 대사 명제에 대한 해설서와 대사와 은총에 관한 글로 대응했고 저명한 신학자인 요한 에크(Johann Eck, 1486~1543)와도 논쟁을 벌였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교황청에 루터가 이단적 새 교리를 전파시키고 있다고 보고했고 교황 레오 10세는 독일에서 발생한 대사 사건을 교리 논쟁으로 간주해 직접 개입을 피하려고 했다. 루터는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대사 명제의 출판에 대해 해명하고 교황에 대한 충성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충성 선언과는 달리 루터가 동봉한 「대사 효력에 관한 해설서」는 교황의 권위보다는 공의회의 결정이 우선적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따라서 교황에게 복종을 표시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은 결코 취소할 수 없음을 고집했다.

레오 10세 교황은 8월 23일 아우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교황특사로 파견한 가예타노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파견해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루터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지만 논쟁은 계속됐다. 루터는 분열을 원치 않았고 대사특전의 폐단과 교회의 타락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교황청은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며 외면하였고 루터를 지지하는 움직임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루터는 자신의 문제가 교황청이 아닌 독일 법정에서 취급되도록 요청하여 이는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연결되었고 교도권을 넘어 심각하게 부패하고 있는 교회를 쇄신하기 위해 세계 공의회 소집을 청원했다. 마침내 교황청은 파문장을 보냈으나 루터는 이를 불살랐다. 루터는 이후 세속 군주의 보호 아래에서 자신의 확신을 실현하게 됐다.[13]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걸쳐 루터 등에 의한 종교개혁 운동으로 서방 교회는 기존의 가톨릭교회로부터 개신교가 분열되었고 이 분열을 치유하려는 운동이 16세기 들어서 본격적으로 전개됐으며 이러한 쇄신 운동을 19세기 초 역사가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종교개혁이라고 불렀다.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에 생겨난 반 로마 가톨릭 교회적인 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히 하려고 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은 특히 교회의 내외적인 개혁을 정치적으로 후원했으며 정치적 결속을 공고히 하고 잃어버린 교회의 영향력과 영토 회복을 도모하기도 했다.

예수회

당시 교황으로부터 쇄신의 주역으로 각별한 관심을 받던 예수회가 16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 운동의 중추가 됐다. 예수회는 특히 영성 생활 지도와 선교지역의전통을 존중하는 선교 활동, 자선 사업, 청소년 교육과 신학 연구 등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과 신앙 복구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독일프랑스네덜란드폴란드헝가리 등 여러 유럽 국가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즉, 로마 가톨릭교회가 수천년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은 예수회 운동등을 통해 스스로 개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독일의 가톨릭 성향 제후들은 새롭게 변모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모습에 고무되어 쇄신을 실행했고 자기들의 영지 안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가톨릭 제후들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개신교가 확산되면서 개신교 신자가 억압을 받는 정치적· 종교적 갈등이 야기되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열린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는 제후와 자유도시의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으며, 루터교와는 달리 장로교는 종교의 자유에서 제외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는 제후의 신앙을 인민이 따르게 하였으므로 종교의 자유 곧 개인이 종교를 선택하고 거부할 권리가 허용된 것은 아니었으며, 제후와 신앙을 달리 할 경우에는 인민이 거주지를 이동하는 것이 인정되었다.[14]

30년전쟁

1617년 페르디난드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됐을 때 개신교를 억압함으로써 같은 기독교인끼리 전쟁을 벌인 30년 전쟁(1618~1648년)이 일어났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정치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가 실추됐고 종교적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갖는 데 합의함으로써 신구 교회 간의 종교 분쟁이 종결됐다.[15]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대한민국의 천주교 교구

박해

주로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시파가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적인 벽파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 탄압을 빌미로 시파를 탄압했다. 즉, “조상을 몰라보는 사람”(무부지자[無父之者])이라는 게 박해의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성을 띤 사건이었다.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백서’에서 ‘천주교회가 반대 당파를 제거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라고 하였다.[16] 1866년 병인박해시 6,000여 명의 신자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정권 당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했다.[17]


성장

현재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16개 교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교구는 서울대구광주의 3개의 관구 안에 소속되어 있으며, 한국 내 각 교구장의 협의회인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가 있다. 한국의 가톨릭 신자 수는 2013년 12월말 현재 544만 2,996명으로서 전체 인구의 10.4%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