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창세기를 정말로 썼는가? (Did Moses really write Genesis?)|성서와 신학에 관한글
문서가설(documentary hypothesis, 문서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디모데후서 3:16)
근본주의적 믿음, 즉 성서에 대한 무비판적이고 순진한 믿음은 고대와 중세를 지배하였던 만큼 그들 또한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근본주의는 새롭게 일어난 운동이 아닌 고대로부터 지켜오던 순수한 믿음을 이어받은 전통 있는 입장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근본주의는 성서의 비판적 연구에 대한 반동에서 이루어진 만큼 고대와 중세인들은 아직 근본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현대의 근본주의는 의식적으로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반대하는 입장이며,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인 접근 방법을 거부하는 입장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태도는 사실상 당연한 것입니다. 프리젠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이 발전 되었다. 원래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킬 때만 쓰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메시지에 의해 영감된 수집물을 포함한 기록들을 가리키게 되었고,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 수집물이 이 신적 메시지보다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원래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기록들의 전체 수집물에까지 적용되게끔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용어가 주는 질적 수준이 적용되면서 구약성서는 전체적으로 문자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 (Th.C.프리젠, 구약신학개요 152쪽)
그러나 오래전부터 성서의 축자적 영감에 대한 의심은 끊임없이 제기 되었습니다.
주후 2세기경 켈수수(Celsus)는 ?진리의 말씀?에서 오경에 대한 모세 저작설을 부인하고 오경의 통일성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성서의 통일성에 의심을 갖기 보다는 성서의 통일성을 전제하고 성서를 해석하였으며, 교리를 증명하고 교리에 입각한 신앙고백을 확립하기 위한 도구로서 성서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작업을 자멸시킬 성서 내의 불일치에 대해서는 암묵 간에 묵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의 발전과 함께 르네상스의 바람이 불자 금기시되던 모세 오경의 권위에 대한 물음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고 18, 19세기에는 더이상 이 물음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적절한 답변을 요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기되어 오던 오경에 대한 모세 저작의 의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경에 대한 모세 저작의 의문점]
• 오경의 마지막 부분인 신명기 34:5 이하의 모세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언급은 모세의 글이라고 보기 어렵다.
• 모세는 왜 자신이 글을 쓰면서 "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모세”라는 3인칭 시점을 사용하였는가?
• 아브라함의 용병들이 "단"까지 그의 적들을 추적했다는 창 14:14의 기록은 사사기 18:29의 기록과 모순되는데, 거기에서 성읍 “단”은 모세시대가 훨씬 지난 후대에 와서야 “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창 36:31의 "왕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전에 에돔을 다스리던 왕"이라는 말은 기록자가 벌써 이스라엘에 왕이 있던 시절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기록 시기를 모세 시대라고 보기 불가능하다.
이러한 풀리지 않는 간단한 의문들과 함께 보다 발전적인 질문과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711년 아스트럭(Jean Astruc, 1684-1766)은 창세기 1-2장의 창조기사 안에서 하나님의 명칭이 1장에서는 엘로힘(Elohim, 우리말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으로 번역되어 있다), 2장에서는 야훼(Yahweh)로 사용된 것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Elohim)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여호와 하나님이(Yahweh Elohim)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창 2:4b)
아스트럭은 이에 하나님 명칭에 대한 사용을 기준으로 창세기에서 출애굽기의 첫 두 장에 이르는 본문들을 분석하여 각각의 신명을 사용하는 두 개의 문헌이 결합되어 있다는 놀라운 가설을 결론으로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오경의 모세 저작설에 대한 의혹을 뛰어넘는 실로 엄청난 가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독일의 아이히호른(J.G.Eichhorn, 1752-1827)은 아스트럭의 문헌 가설을 받아들이고 이를 더 발전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르는 문서를 E문서, 야훼로 부르는 문서를 J문서로 나누고 창세기에서 레위기에 이르는 본문들을 분석하여 E와 J외에도 다른 문서들이 더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놓았습니다.
E문서와 J문서의 발견 이후 더 세밀한 구분들이 이루어지고 있던 때에 드 베테(W.M. de Wette, 1780-1849)는 신명기가 전혀 다른 문서에서 온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게 됩니다. 특히 신명기가 오경의 다른 문서들과는 달리 “택하신 곳”에 집중하는 것을 이상히 여긴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이와 같은 주장이 제기된 시점을 요시야 왕의 시대에서 발견하여 신명기 문서가 기원전 7세기 요시야 왕 때에 기록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요시야 왕 18년에 실시한 성전 수리 중에 한 문서가 발견되게 되는데 이는 지금껏 감추어졌던 율법서인 것으로 판명이 나고, 이에 그 율법서의 명령에 따라 요시야왕의 개혁조치들이 이루어지는데 남유다의 중앙 성전 중심의 유월절을 시작으로 시행되는 그 개혁은 지방의 모든 산당들을 헐고 없애는 것으로 개혁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조치들의 면모를 면밀히 살펴보건데 이는 이미 히스기야 때에 이루어진 개혁들과 평행선을 그리고 있으므로(대하 29:1~31:21) 학자들은 요시야 때 발견된 율법서가 모세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닌, 히스기야 종교개혁 운동을 부활시키고자 한 개혁세력의 작품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명기 12장부터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그 곳’에서만 각종 절기를 치르고, 십일조와 예물을 드리라고 매번 반복되어 나오는 규정은, 출애굽기 계약법전의 정신과 다를 뿐 아니라 모세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신앙의 모습이기에 새로 발견된 율법서에 대한 의혹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신명기의 모세 율법서로의 제정은 모세 이후로 요시야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신명기적 율법의 관점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강력한 역사관으로 자리 잡게 만들었으며 구약 전체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E문서는 점차 E1 과 E2로 구분되게 되는데, 1866년에는 그라프(K.H. Graf)가 가장 후대에 작성된 문서로 E1를 선택하고 그 문서의 작성 연대를 기원전 6세기 포로기 이후로 돌리게 되자 오경 전체가 포로기 이후에 완성되었다는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E1으로 구분된 이 문서는 포로기 이후 민족을 이끌던 제사장 세력을 뜻하는 Priest의 첫 글자 P를 따서 P문서로 불리게 됩니다. P문서는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제의를 확립함으로써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영구한 관계를 확립하려 하였으며, 포로기의 혼란 속에서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창조시로부터 정리하며 족보를 완성하려 하였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관계에 주목하였습니다.
때마침 사무엘서와 열왕기를 연구하던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4)은 이 역사서들이 레위기에서 규정하고 있는 정교한 제사제도들을 알고 있지 못하는 점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E1문서에 속하는 레위기가 오경보다 후대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하던 중 그라프가 제시한 E1문서의 포로기 이후 작성 가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에 1877년 이스라엘 역사에 따른 문서들의 발전 단계를 추적하여 J-E-D-P의 순서로 오경이 구성되게 되겠다는 구약의 표준적인 문서 가설을 확립하게 됩니다.
문서가설이란
모세오경에 나오는 여러가지 모순들과 의문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18~19세기에 도입된 가설이다(사실 이러한 의문들은 8세기 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벨하우젠 학파에 의해 정립되었다. 주된 내용은 모세오경은 모세가 쓴 것이 아니고, 전부터 존재하던 4개의 문서들을 편집자들이 짜맞추고 편집해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이 4개의 문서들은 가상의 문서이고, 그 존재가 확증된 적은 없다. 다만 그런 문서가 있었고 그런 문서들로부터 오늘날의 모세오경이 편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러 학자들이 생각하기에 그런 문서들을 상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 실제 전승자료의 부재와 엄밀하지 못한 점에서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각 문서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J - 벨하우젠의 시대 무렵에 J는 보편적으로 가장 오래된 문서인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J란 문서의 이름(Jahwist 독일어), Yahwist(영어)은 이 책이 가진 특징, 즉 이 책이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이름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은 J의 저작연대를 왕정시대, 즉 주전 10세기 혹은 9세기로 보며, 이 책이 창세기 49:8-12등과 같은 그 곳에서 기원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P는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에 J는 인간과 땅에 관심을 기울인다. J는 신인동형론적으로 하나님을 묘사한다.
J는 남조 유다에서 어느 익명의 저자에 의해 B.C. 850년경에 쓰여졌다. 그는 개인의 전기에 특히 관심이 깊었으며 한 인물, 인물의 개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또한 그는 선지자처럼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관심을 가지나 제사나 의식에는 거의 흥미가 없다.
E - J가 야웨란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에 E 는 보다 일반적인 엘로힘
(Elohim) 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 E 문서는 J보다 한 세기 정도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간주되며 북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후자의 견해는 북왕국의 문제 및 (요셉과 같은)북왕국적인 인물들에 강조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추론된 것이다. 신학에 있어서 E는 보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관심사들에 초점을 두고 있다.
E는 이스라엘의 북조에서 무명의 저자에 의해 B.C. 750년에 쓰여졌다. 그는 설화체에 있어서는 J보다 좀더 객관적이며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관심이 적다. 오히려 그는 구체적인 것들에 더 집착하였다. 창세기에서 E는 의식과 예배에 관심을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것으로 서술한다.
D - 고전적인 문서비평학이 구분해 낸 세 번째 자료층은 바로 D(Deuteronomic, 신명기적)이며 이 문서는 오경 중에서 그 이름의 기원이 된 신명기에 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신명기서의 핵심 부분은 요시야의 치세 중에 성전에서 발견된 문서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생각되어지는 경우가 자주 있다.
D는 요시야 왕이 B.C. 621년에 부흥을 일으킬 때 대제사장 힐기야의 지도를 따라 공식적인 개혁의 프로그램으로써 만들어졌다. 그 목적은 유다 왕국에 있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산당에 있는 그들의 지방성소(신당)를 버리고 그들의 모든 제사와 종교적 현물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바치도록 하는 데 있었다.
P - P는 아마 오경의 네 자료층 중에서 가장 독특할 것이다. 이 문서의 관심사는 연대기, 족보, 의식, 예배, 율법 등인데, 이러한 영역들은 제사장 직분과 쉽게 연관되어지며, 따라서 제사 문서(the Priestly source)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 문서에는 전통적으로 BC5세기 혹은 4세기의 늦은 연대가 주어지며, 포로 시대 혹은 그 이후 시대가 연관되어진다. P는 포로기 이후 시대의 제사장 계층의 역할을 반영하며, 또한 그 시대의 율법에의 순종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 연대는 현재 P를 구성하고 있는 내용들이 수집된 연대가 그렇다는 것이며, 이 문서의 많은 내용들은 그보다 이른 시기에 파생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문서의 후대성을 지지해 주는 근거 중의 하나는 P가 기껏해야 5세기의 것으로 간주되는 역대기에만 그 영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P는 에스겔의 성결법전(레 17-26장)으로부터 시작하여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 에스라서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편집이 되었고 에스라는 가장 후대의 제사문서를 율법에 첨가시켰다. P는 이스라엘 신정정치의 기원과 조직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또한 족보와 제사 제도, 희생의 세부 사항들과 기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기원전 500)
••• 벨하우젠 이론의 약점과 오류
1. 문서설은 미묘한 순환 논법으로 특징지어졌다. 즉 그것은 결론(성경은 초자연적 계시가 아니다)을 중요한 전제로 삼고 있다.
2. 벨하우젠 이론은 텍스트 자체의 증거 위에서 있다고 단언하면서도 텍스트 자체의 증거가 그 이론에 상반되면 곧 회피해 버리고 만다.
3. 문서설주의자들은 히브리 저자들이 문학사에 알려진 다른 저자들과 달라서 그들만이 하나의 하나님 이름, 주제와 상관없이 하나의 문체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거나 혹은 한 사상에 대해 동의어를 여러 개 쓸수 없었다고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단 하나의 주제와 관심만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4. 고고학적 증거로서의 히브리 성경을 다룸에 있어서 주관주의적 성향이 나타난다.
5. 벨하우젠 학파는 이스라엘 종교가 다른 어떤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희 인간적으로 생겨난 것이며 진화론적 산물로서 설명이 될 수 있다는 순수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6. 교묘하게 본문을 다르게 착색하며, 그 구절을 문맥에서 도려내어 ‘차이점’(불일치점)을 드러낸 후 그 어떤 조화의 가능성도 배제해 버리면서 추정된 차이점이 문서의 다양성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7. 비록 다른 고대 셈계 문학들은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사를 진술해 가는 기술로써 반복과 중복을 여러 번 해나가고 있지만 히브리 문학만은 다른 저작권을 드러냄이 없이 이와 같은 반복과 중복이 있을 수 없다고 비평가들은 전제하고 있다.
8. 벨하우젠 학파는 현대 유럽의 비평가들이 고대 히브리 문학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서도 각 문서들의 편집 연대를 과학적 정확성을 가지고 고정시킬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자신감에 빠져 있다.
9. 그들은 3400여년이나 후대에 살고 있는 학자들이 고대의 저자들보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더 잘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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