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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法神學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바울의 논점

by 이덕휴-dhleepaul 2020. 3. 6.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바울의 논점  

 * 이하의 글은 본인의 학위논문 제4장을 옳긴 글이다.


Ⅰ. 서론


  '그리스도의 법'은 그의 사랑의 계명이다(참조. 요 13:34). 그것은 율법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그의 창조적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의 원칙이다. 여기의 '법'이라는 낱말에는 풍자적인 뜻이 있다. 즉 이전에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짐을 졌으나 이제는 그 짐을 벗고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라는 짐을 지라는 뜻이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는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을 가장 극명하게 대조시킨 대목이다. 여기서 '노모스'(법)는 바울과 그의 대적자들이 아주 직접적 관심을 가지는 유대인의 '토라'(율법)이다. 히브리어의 토라와 희랍어의 노모스는 영어의 Law(법) 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토라는 하나의 교훈을 의미하고, 노모스는 관습적인 법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다. 바울이 사용한 법이란 결국 주님께서 요한 복음서 13:34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라고 하신 것 이상은 없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 주신 그 자유 안에(갈 5:1), 율법에서의 자유 안에, 그리고 죄와 죽음과 특히 자아로부터의 자유 안에(롬 6:7-11, 14; 7:24-8:2) 굳건히 서서 살도록 한다. 그렇지만 자유의 완전한 향유는 종말에 가서야 가능하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스런 자유"(롬 8:21)를 기다린다. 따라서 종말이 오기까지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자유인"(고전 7:22)으로서, "그리스도의 법 아래"(고전 9:21)있는 자로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아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은 믿음이 연약하여 실패한 신자들을 앉아서 판단하고 있는 율법주의자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나타낸다. 또한 이 구절은 죄에 빠진 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지고 관용하며 도와주라는 호소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처럼 제1절에서 우리는 정죄하고 비난하는 정신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경고를 받고 있는데, 이 정신에 정반대 되는 것이 우리가 논의하는 제2절의 말씀이다.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의 짐을 지는 것"(갈 6:2)으로서 형제적 교정(矯正)을 논하는 의미이다. 로마서 13:8-10에서 바울 사도는 보다 명시적으로 십계명 중 5, 6, 7, 8 계명을 반복하고 그 계명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 사람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라고 결론을 짓는다. 이 법은 물론 "성령의 법"이다.


Ⅱ. 그리스도의 법의 개관

  1. 갈라디아서 6:2과 고린도전서 9:21에서 그리스도의 법

'그리스도의 법'에 관한 사도 바울의 신학적 기반을 추적해 보면, 가말리엘 학파에서, '온 율법이 이웃 사랑의 법에 담겨져 있다'고 하는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더 이른 시기에 힐렐(Hillel)이 어떻게 율법을 요약했는지 살펴보면, "스스로에게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온 율법이요, 그 나머지는 주석이니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황금률을 소극적인 측면에서 율법의 정수로서 인용한 것은, 특정한 계명에 직면한 어떤 사람이 그 계명은 이웃의 고통을 악화시키는 것을 막아주거나 이웃의 선을 증진시킬 때에만 구속력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길을 터준 셈이 된다. 그러나 바울이 "서로의 짐을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할 때, 그는 그리스도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였는지를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더욱이 "짐을 서로 지라"는 말은 앞에 나와있는 구절(레 19:18)을 일반화시켜 확대한 듯이 보인다. 이러한 권면은 로마서 12:9-12에서도 '그리스도의 법'에 관한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다. 믿는 형제들 사이에서 서로 사랑하고 동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것이다.바울의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언급은 예수의 교훈이 윤리적 가르침의 주요한 자료를 이룬다고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증거로서 인증 된다.

그런데 이 구절(갈 6:2)은 고린도전서 9:21에서의 그의 진술과 관련이 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 그리고 "믿음의 법"(롬 3:27)에 대한 바울의 언급도 논의되어야 한다.도드(C.H. Dodd)는 예를 들어 바울이 갈라디아서 6:2과 고린도전서 9:21에서 '새로운 법'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핵심은 일단의 예수의 전승된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 6:2과 고전 9:21은 행해지도록 되어 있는 특수한 계명들과 권면들을 나타내고 있는 문맥이다. 이 양 구절은 신약성서 어디에도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고린도전서 9:21에서의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분명하다. 바울 자신은 유대교의 율법주의로부터 자유 한 몸이라고 생각하며 이방인 선교를 위한 과정에서 이 자유를 강조하지만, 그가 결코 윤리적 방종주의자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갈라디아서 6:2에서의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언급이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기독교인들에게 타당한 '새로운 법'의 개념을 지지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새로운 법'이란 율법을 완성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의 법으로서 사랑은 율법의 성취를 말한다(갈 5:14). 바울에 있어서 성령 안에서 살고 행하는 것(롬 5:25)은 사랑 안에서 살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참으로 갈라디아서 6:2절의 '그리스도의 법'이란 사랑의 계명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져야 한다. 로마서 5:5에서도 성령을 하나님의 사랑의 중재자로 보았으며 다음 구절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는 사건으로서 밝히고 있다(롬 5:25-26; 참조. 8:9-10).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권면 하는 것은 전승된 말씀에 복종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요구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표현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기독교적인 상황에서 '법'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이러한 예비적인 고찰이 타당하다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고전 9:21)이나 "그리스도의 법"(갈 6:2)이라는 구절은 전승된 예수의 말씀들을 새로운 토라나 기독교적 초기 교훈집을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2. 그리스도의 법과 짐의 관계

갈라디아서 6:2에 제시되어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생활상의 윤리적 원리이다. 우리는 모두가 짐을 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짐을 홀로 지고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전제가 이 명령에 선행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를 홀로 지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짐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견인의 예로 여긴다. 실제 그러한 견인은 장한 일이다.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은 서로 돕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기독교 윤리가 아니라 차라리 금욕주의적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그리하면 너를 붙드시리라"(시 55:22) 및 수고하고 짐 진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마 11:28)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에게 고유하게 예정된 거룩한 '부담자'가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간적 도움을 구하는 것은 연약한 증거라고 논단 한다. 이것 역시 심각한 오류이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와 짐을 지실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십자가의 구속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다른 짐들, 즉 근심, 걱정, 의심, 유혹 등의 경우는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음은 그가 우리를 권고하시기 때문이다(벧전 5:7). 그러나 그가 우리의 짐을 담당하는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유대를 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로 짐을 져주는 인간적 유대관계는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짐을 홀로 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 안의 친구로 하여금 그것을 우리와 더불어 나누어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 짐을 서로 져 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본문의 구절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짐'과 '법'의 연관을 음미해 보면, 바울 사도가 암시적으로 유대주의자들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신약성서 안에서 몇 가지 율법의 요구들은 분명히 짐으로 비유되었다(눅 11:46, 행 15:10, 28).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 용납되기 위해서 준행 해야 하는 율법이라는 짐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부과하려고 하였다. 바울 사도는 결과적으로 그들을 향해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려하지 말고 오히려 어려운 짐을 서로 져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그리스도의 법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새로운 계명이다(요 13:34, 15:12). 그러므로 바울이 갈라디아 5:14에서 언급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가 율법을 성취하는 길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과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지라'는 ⅢⅣ 말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은 같은 내용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다.

 

 3. 갈라디아서 6:2의 논리적 분석

"서로 남의 무거운 짐을 져줍시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룰 것입니다"(갈 6:2). 서로 사랑하라는 사도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사랑 실천의 구절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내 몸을 불 속에 던져서 비록 남을 도와주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다만 어떤 의무감에 의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의 짐을 지어 주라'라는 지시어는 세속적 법률조항에서 전제부(또는 조건부)라고 한다. 다음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룬다'라고 하는 후반부는 결과부 라고 한다. 이것은 일정한 조건이 만족하게 되었을 때, 일정한 결과를 귀속시킬 수 있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결과부는 전제부를 전제하여야 하고 또한 전제부는 결과부를 선행시켜야 한다. 좀 더 논리적인 표현을 부가한다면, 자연법칙 'A'가 있으면 'B'가 '있다'(is)라고 하는 취지의 언명인데 반하여, 도덕률이나 법률에서의 행위의 준칙은 A가 있으면 B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논리이다. 이것은 존재와 당위와의 상위, 인과성과 규범성과의 상위이다. 어떤 형의 인간행동을 명하는 일반적인 규범을 전제한다면 그 전제한 규범에 적합한 것은 정당한 것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은 부당한 것으로 특징 지울 수 있다. 이러한 언명을 우리는 '가치판단'이라고 하며 이 규범이 일반적인 규범임을 전제 할 경우에는 객관적 의미에서의 가치이다. 가치란 평가되는 대상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전제된 규범에 대해서 그 대상이 갖는 관계인 것이다. 가치는 자연의 사실에서 연역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 있다고 하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도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자연학이나 인과의 원리가 아니라, 도덕률 또는 법률의 권위자가 행위 하는 의미에서 당위라고 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사도가 말하기를,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사랑의 의무"(참조. 롬 13:8)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본문의 명제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의 최종적 결론이자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의 정의론의 기초를 이루고 나아가서,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고, 우리가 완성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이다"(참고 옙 3:17-19).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신학 하는 일의 대 명제가 된다. 우리가 신학을 한다는 것의 궁극의 목표는 하나님을 본받는 과제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을 우리의 삶과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정의의 행함이 추상적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과제는 긍휼이 필요한 자가 누구인가를 밝혀야 하고, 누가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가 라는 이중적 과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이 이중의 과제를 실천하는 일이 소위 '신학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의 법의 구체적 지도원리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오늘에 있어서 신학함의 지도원리이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성서의 법은, 그리이스-로마의 전통을 이어 받아 우리에게 부과하는 어떠한 상대도 강제적으로 저지하면서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국법질서와는 다르다. 성서의 법은 이 땅위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성취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국법이 정의 수호를 위한 피동인이라면, 사랑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위에 실현하기 위한 능동인이다. 그 사랑의 실현태가 정의실천의 기본구조가 되며 정의실현은 사실상 분배적 정의의 원리에 바탕 하여야 하는 것이다. 분배, 즉 나눔이란 신학상의 용법으로서는 신자가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는 것을 일컫는다. 나눔이란 먼저 마음을 나누고 서로의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고로 기쁨도 영광도 서로 나누어야 한다. 기독교의 전통은 실천적으로 행하여지는 나눔의 신앙이다. 나눔의 본령은 역시 상대방의 고통을 분담하는 데 있다. 이때의 고통이 물질에서 오는 고통임은 물론이다. 삶의 기본인 물질의 분배는 구원의 커다란 축으로서 고통과 함께 하는 기독교의 나눔의 정신이야말로 오늘의 신학 함에 있어서 희망의 십자가임에 틀림없다.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이른바 비례의 정의(능력 것 가져감)에 의하여 고통받고 억압받는 사회가 되었다. 그 결과 오늘과 같은 시대에 가장 고통받고 설음 받는 민중은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와 나누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와 나누어야 한다.


  4. 갈라디아서 6:2과 6:5에 나타난 짐의 의미론적 차이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갈 6:2a)에서 우리는 믿음이 약하고 짐 진자들을 낙심시키지 말고, '그들의 짐을 지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자세야말로 율법주의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용서와 관용이야말로 은혜의 증거이기 때문이다.그런데 제5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모순되는 것과 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한다"(갈 6:5)는 구절은 양자의 '짐'에 관한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는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6:2절의 '짐'이란 단어의 원어인 '바로스'(     )는, '무거운 짐과 부담'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서 6:5절의 '짐'이란, '포르티온'(       )으로서 '해야 할 임무나 봉사'라는 의미의 '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도와서 다른 사람의 짐을 져야 할 그 '짐'의 의미는 제1절에 비추어서 규정해야 한다. 즉 믿음이 약하여 '범법한 형제'를 도와서 성령의 법으로 그들을 바로 세워주어야 한다고 해석 할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 곤궁한 자를 도와주고, 방황하는 자들을 조언해 주며, 회심한 자들을 말씀과 기도로 도와주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이것이 '서로가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씀의 본의이다. 이것은 율법이 명시하는 그 이상의 의무이며, 오직 은혜와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며, 새로운 자유의 법에 순종하는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계명이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요일 3:23). 이상의 논지가 우리가 나누어 질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짐을 가리킨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나누어 져서는 안 되는 짐, 즉 자신의 짐이 있는 바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짐을 져야 한다"(갈 6:5). 원래 이 구절은 '가르'(   : 왜냐하면)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문맥의 상하를 검토하면서 논의하여야 한다. 제1절에서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지라"고 하면서 제3절에서는,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수치를 무릎 쓰고 다른 사람의 궁핍을 기꺼이 도와주어야 하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즐거이 원조해야 한다. 만일 우리 자신을 너무나 소중히 여겨서 믿음이 연약하고 생활이 궁핍한 형제를 관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인다고 사도는 경고하는 것이다. 생활이 궁핍하면 범죄의 유혹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는 자기의 궁핍함에 그만 범죄 하게 된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에 나오는 '짐'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라"(갈 6:5)에 나오는 '짐'과 의미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서 해줄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는 말의 진의는 내가 바로 완수해야 할 '봉사의 짐'을 말함은 물론이다.    



Ⅲ. 그리스도의 법의 본질


1. 하나님의 정의로서 그리스도의 법 

그리스도의 법이란 사랑이다. 사랑이란 신의 속성으로서의 정의의 실현태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무서운 오류 가운데 하나는 희랍적인 정의(定義)의 영향을 받아 사랑과 정의를 구분하려는 데 있었다.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희랍어는 모두 사랑을 의미한다. 이 두 낱말은 각각 생에 대한 기독교적 태도와 희랍적 태도를 말해 준다. '아가페'(     )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며,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인자의 생애 가운데 나타났고 그 중에서도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나타났다. 그 가운데는 하나님이 자기의 영을 통하여 그의 사랑에 감촉 된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불붙여 주신 사랑도 포함된다. 아가페는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하강적 운동이다. 그러나 플라톤 사상의 근원에서 유래한 '에로스'(    )는 신을 찾아 구하는 인간 영혼의 상승적 운동이다. 에로스의 본질적 의미는 영혼이 감각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참되신 자 안에서 최고의 영적 욕구를 충족시키기를 추구하는 천상적 에로스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구약에서 나타낸 아가페의 불완전한 계시와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완전한 계시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인격적으로 계시되는 것은 오직 구속으로만, 즉 아가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와의 관계에서 사랑(charity)의 가장 민감한 부분은 바로 사랑을 받는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데 있다. 이런 존중심으로 사랑은 사랑이 되고, 굴욕감을 주는 온정주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박탈이 사랑과 혼동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이웃에게 억압적인 모욕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정의에 대해 날카롭게 의식하지 못하고, 학대받는 나의 형제와 함께 진정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랑은 초월하지 못한다.      


2. 십자가상의 대속으로서 그리스도의 법

루터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법은 세 주요한 단계로 계시되었다. 자연법과 십계명, 그리고 복음의 법이다. 이 세 가지 법은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굳이 차이를 말한다면, 법의 본질적인 의미와 내용을 계시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루터는 생각한다. 따라서 그 모든 법의 본질적 내용은 사랑이며 사랑은 그리스도의 계명과 마찬가지로 자연법과 모세의 법의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그 법들의 참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다.  복음의 법이란, 곧 사랑의 법이다. 법의 준수에는 도덕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있는데, 전자는 율법의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고 후자는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의 성취로서 만족하니 이것은 사람의 행위보다는 그 마음으로부터 율법을 준행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법도 사랑의 법이니 이 법은 자기애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조건 없는 이타적인 사랑, 즉 아가페를 말한다. 이 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시키며 죄 있는 인간성을 더 자극시켜서 발악케 하며, 동시에 그 법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할 인간의 무능력을 폭로시켜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선포하는 일종의 폭군이다. 법과 진노의 이 폭군을 정복하는 길은 인간에게는 없다. 이러한 진노는 인간의 사후(死後)가 아니라 현재적인데 이 폭군의 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을 수밖에 없었던 만큼 율법의 정죄와 하나님의 진노는 엄격한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희생시킨 만큼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사랑은 위대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를 직시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진노와 그의 위대한 사랑의 충돌의 드라마를 스스로 연출하였으며, 그 결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둔 은혜의 승리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본성의 표출이었다. 정의라는 절대적인 중심적 주제는 무엇인가? 사실 이 물음만큼 격렬하게 논란이 된 의문은 전에 없었으며, 이 물음만큼 많은 고귀한 피와 쓰라린 눈물을 흘리게 한 의문은 결코 따로 없었다.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진리를 선포하려고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에 매달리게 하였을 때, 나사렛 예수가 빌라도 앞에서 한 말, 즉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요 18:37). 빌라도가 다시 "진리란 무엇인가?"(요 18:38)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이에 대해서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말은, 빌라도 같은 사람에게 대답조차 필요 없는 고귀한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였으며, 이 물음은 인간 세상에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것은 진리를 증언한다는 것이 구세주의 주요한 사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실 정의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고, 정의를 신의 나라에 실현하려 하였고, 그리하여 이 정의의 구현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예수는 죄인에게도 심지어 그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적에게도 선을 가지고 보답하라는 사랑의 정의를 말하였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지만, 오늘날처럼 정의의 종교, 평등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특성을 강조한 때는 그리 있어온 것 같지는 않다. 기독교 사회정의의 구심점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림 이외에 그 어느 것도 사랑의 구체적인 의미를 제공할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의 아가페는 십자가의 아가페이며, 그에 있어서 전도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었다(고전 2:2). 갈 3:13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신' 이라는 대속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속죄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죄 없는 구주로서 자진해서 고난을 당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게 하였다는 논리에서 결과된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라는 개념과도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고후 5:18, 21; 살전 5:10; 갈 1:4; 롬 4:25; 8:32; 골 1:13).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 바 되기는 했지만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지는 아니하였다. 차라리 그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옹호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응보적인 공의, 즉 구약에서의 율법적 정의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를 높이는 것이다(롬 3:24-26).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린 진정한 의미를 오늘에 되새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뜻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율법은 복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는 그의 영원한 용서의 사랑으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의 심판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행위까지도 그것은 사랑의 행적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고, 우리의 이웃을 진정으로 돕는 것은 십자가의 피 흘림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 돕는 것까지는 얼마든지 권장 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 숨은 이익을 위한다던가, 선심 공작성 도움이라든가 체면치레를 위한 도움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위배되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은 이기주의를 버리고 영적인 사랑, 즉 육체적인 욕정적 자유를 버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자유를 얻었으니 서로 무거운 짐을 져줌으로써, 사랑을 실천하라는 간곡한 사도 바울의 권면 이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육적인 욕정을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시오"(갈 5:13).  이제 자유를 얻은 그들은 어떤 일이나 해도 되는 그러한 자유가 아니라 올바른 일을 행할 자유를 말함이다. 다시 말하여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얻었지만,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할 의무는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믿는 자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그의 과거로부터, 그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계명을 요구하신다는 사실로써 요약된다. 격식화 된 조문, 즉 율법으로는 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 하며, 자랑하지 아니 하고, 교만하지 아니 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 하고, 자기의 고집을 세우지 아니 하는 것이라는 소극적인 방법으로만 말 할 것이 아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구체적인 계명은 일정한 상황, 즉 그의 이웃과의 만남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성령의 열매로서 그리스도의 법

바울 사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法은 사랑의 계명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져야 한다. 원래 법의 기원은 종교적이다. 이 점은 거의 모든 사회학적 결론들에 의하여 확인된다. 법이란 신의 의지의 표현이다. 법은 사제(司祭)에 의하여 공식화된다. 그리하여 법은 종교적 승인을 받는 것이며, 또한 종교적 가르침도 법적 외양을 갖추어서 표현된다. 본문의 가르침도 법적 외양을 갖춘 종교적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사랑을 율법의 실천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에 다 들어 있습니다"(갈 5:14). 바울 사도에 있어서 성령 안에 살고 행하는 것(롬 5:25)은, 곧 사랑 안에서 살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도가 본문에서 가르친 내용은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요구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표현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 사랑이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삶의 실체로서, 성령의 열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성령 안에 있는 자이며, 성령 안에 사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가 된다. 바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체험은 곧 성령의 체험이며, 그리스도의 체험은 곧 성령의 체험이며, 성령의 체험은 또한 그리스도의 체험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성령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한 신자의 새로운 신분과 성령을 통한 신자의 새로운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바울에 있어서 성령은 참으로 실천적이 삶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이니 이런 것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갈 5:22-23)라고 하여 체험에 의한 사랑의 실천적 지도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의 법인 사랑의 구조, 즉 내적 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이는 설령 남의 짐을 져주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랑의 실천 강령이다. 이하에서 사랑에 관한 사도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2) 예언의 능력을 가졌다하더라도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 믿음은 쓸모가 없다.3) 비록 모든 소유를 나누어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내 몸을 내주어 불사르게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유익이 없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법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롬 8:2)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고 사랑 안에서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행위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성령의 법을 따라 나온 것이며, 율법과 규례는 자유롭지만 이것은 이미 자유롭게 된 사람(갈 5:1)에게도 어떤 것을 요구한다. 자유로운 사람이 자유의 특권을 남용한다면, 그는 자신이 위반한 것으로 인해 고통을 당할 것이고(고전 11:30), 때로는 죽기까지 한다(롬 8:13).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성령의 법은 성령을 지닌 자들과 관련하여 자동으로 일하는 자동적인 법이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사랑의 법이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잘하는 일입니다"(약 2:8). 신약성서의 전체적인 규범원리는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제일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 그리스도의 법은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기 위한 첫 단계이다. 그리스도의 법의 본질은 살펴 본 바와 같이 사랑을 그 요소로 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고린도 인에게 보낸 편지 중, "사랑의 계명"(고전 13:3-7)에 나타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법'의 구체적인 실천은,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에 다 들어있습니다"(갈 5:14)라고 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최고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의무를 다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남에게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것도 역시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롬 13:8). 바울 사도의 사랑의 법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큰 계명'과 일치하나, 그러나 사도에게는 하나님께 향하는 사랑은 하나도 없고 오직 이웃 사랑만 남아 있다. 이것은 아마도 진정한 사랑의 법은 법을 주시는 자 하나님의 동력적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의 법을 실천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의 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정의, 힘,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사랑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그리스도의 법-사랑의 법'으로 하나님의 속성인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요청 받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참된 것이라면 악한 자에게나 선한 자에게 다 햇빛을 주시고, 감사할 줄 아는 자에게나 배은 하는 자에게 다 비를 주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같이 우리도 친구든 원수이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우리의 순전한 심정에서 사랑이 생겨 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반을 떠나서 바울의 신앙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표는 '그리스도의 법'과 '그리스도의 정신'의 관계 속에서 진행된다. 그리스도의 법은 예수의 교훈이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는 데 참된 방법론이며 또한 예수 자신이 친히 본이 되어 하나님의 법을 실현하였다. 고로 그리스도의 법은 바로 하나님의 법안에 성취됨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도에게 있어 모세의 율법은 불필요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참조. 롬 7:5-6, 10:4; 갈 2:16, 3;23; 히 10:1, 1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는 예수의 새 계명, 즉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율법과의 연속성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다 확실히 입증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원칙들의 외적 표현이라 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에 대한 길과 방향을 지시해 주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정신'인 성령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게 하며(고전 2:10-14), 각각 윤리적 판단을 갖추도록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법은 조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철저한 율법주의자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복음의 사도 된 바울의 신학사상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독특한 윤리관은 그리스도의 법과 사랑이 하나님의 법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울 신학의 윤리적 특성이다. 그의 윤리관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바울 신학이 정립되고 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철두철미한 윤리적 실천신학 사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롬 13:8).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신 것은 우리가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올바른 관계를 찾아 주신 것이다. 다만 하나의 의무를 주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의 이웃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사랑과 정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오직 진정한 사랑만이 우리 이웃의 고통받는 모든 일을 참을 수 없는 불의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계명만 지키면 이제 율법은 완성된다고 하였다. 율법이 완성되었으니까 율법은 없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율법은 완성되었지만 우리에게 아직 율법의 효력은 남아 있는 것이다.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은 없게 된다"(롬 4:15)고 하였지만, 율법이란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정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율법은 정의로운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법을 행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제정된 것입니다"(딤전 1:9). 하나님의 의에 반대되는 행위에 대한 징벌의 수단, 즉 죄에 대한 경고이자 이에 대한 징계의 수단으로 율법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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