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학)문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by 이덕휴-dhleepaul 2020. 8. 10.

주(God)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4:4) |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이 기쁨이 영원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통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확증하며 성령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을 알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성령 충만이 주는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천국에 대한 기쁨은 이 세상 부귀영화 권세가 주는 기쁨과 비교 할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고통의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목과 평강과 기쁨을 얻을 때 삶의 현장을 작은 하나님 나라로 체험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는 멀리에 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십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와 동행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행복은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날 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순교자들은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갖고 있었기에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화형당하고 짐승에 찢기고 창칼에 찔려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장 극단적인 고통인 죽음의 순간까지 기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행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힘은 이처럼 위대합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넘쳐나는 이 행복을 받아들이십시다. 

이 행복에 인격과 가정과 생활을 점령당할 때 비로소 가치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 행복은 우리로 하여금 어둠에서 빛을, 절망에서 소망을, 죽음에서 생명을, 무질서에서 질서를, 파괴에서 건설을 가져다줍니다.

성령 안에서 이 행복을 얻은 사람이 행복한 가정을 이끌고 나아가며 행복한 대인 관계, 행복한 생활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

 

첫째,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라고 하십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관용’은 ‘넓은 마음, 용서하는 마음, 너그러움, 치유와 화해, 절제, 인내’ 등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관용은 너그러운 마음, 넓은 마음입니다. 바닷물은 어느 강물이냐를 따지지 않고 다 받아들입니다. 관용은 이같이 모두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의(옳은 것)보다 더 큰 것이 관용입니다. 관용은 법 이상입니다. 관용은 참아주는 것이며,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관용의 세상적 표현은 틈새입니다. 즉 허용치를 말합니다. 그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고 허용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요한복음 8장 11절에서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는 법 그 이상입니다.

  조신영은 그의 저서『쿠션』에서  "우리가 살면서 사람이나 환경으로부터 여러 가지 자극을 받는데, 그 자극에 대한 반응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비난할 때 내 반응은 화를 낼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습니다. 자극에 대한 반응은 전적으로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즉각적인 반응은 갈등을 일으키지만  너그러운 반응은 평화를 만듭니다. 조신영은 의자와 엉덩이 사이에 있는 방석처럼, 자극과 반응 사이를 쿠션이라고 했습니다. 푹신한 쿠션을 거친 반응이 관용입니다. 

로마서 15장 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아주라"라고 말씀합니다. 관용은 서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둘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빌 4:6).

염려는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떠나는 불신앙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염려 거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마태복음 6장 25~34절에서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6번이나 하십니다. 마태 6장 31~33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다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염려 거리를 다 맡겨버리고,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염려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다 맡기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십니다.

빌 4장 6절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

감사가 없는 기도는 염려와 불평이기 쉽습니다. 기도는 감사가 동반됩니다.

“모든 일”은 "궂은일, 좋은 일" 다 포함됩니다. 범사에 기도하고 간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구함이고 ‘간구’는 보다 적극적인 기도입니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덮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빌 4:7).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다스리시면 항상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반복하심은 "기뻐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며, 기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삶에 걱정거리가 있지만 하나님께 맡기고 주안에서 항상 기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주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항상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다스리시고 내가 주안에 거함으로 기쁨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