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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학)문

탐심을 버리고 자족함을 배워라

by 이덕휴-dhleepaul 2021. 10. 24.

날자: 2021년 10월 24일 주일 낮 예배

말씀: 빌4:10-13

제목: 탐심을 버리고 자족함을 배워라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담임 이덕휴목사

 

빌립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가난한 동네이다. 우리 진산마을도 가난한 동네입니다. 대부문 남의 땅을 지어먹는 가난한 농부들입니다. 우리 만나교회는 비록 가난한 마음에 세워졌지만,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부자 교회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우리 만나교회처럼,  바울이 세웠던 교회 중에 작은 교회이다. 에베소교회나 고린도교회는 큰 교회이다. 고린도교회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고, 에베소교회는 선교의 중심지였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만 생각하면 기쁨의 넘침에 대해 말했다.

로마의 교회들이 있지만, 바울의 곤고함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했다.

빌립보교회는 그 먼거리에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바울에게 연보를 보내왔다.

빌립보교회에서 왔을 때 기쁨은 부족한 면이 채워진 것보다 바울은 물질은 매여 살지 않는 다는 뜻이다. 자족한다는 것은 금욕적인 면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주심이다.

 

1. 주 안에서 기뻐하는 자는 자족하는 사람이다

 

전도서 5:10에 보면, 자족하기를 배운 자는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존 러스킨은 “돈이 말하면 진리는 침묵한다”고 하였다. 돈을 소유하고 있으면 돈이 큰소리치기 마련이다.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그것을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더 탄다. 돈을 다스리지 못하면 돈이 우리를 지배하는 나쁜 주인이 된다.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히 13:5) 돈을 맘몬으로 섬기지 말라는 뜻이다. 돈에 대한 욕심을 다스리지 못할 때 돈은 사람을 먹어치우고 생명을 말려버린다. 돈이 주인이 될 때 그것은 인격적, 영적, 신적인 세력으로서 인간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맘몬이 되는 것이다.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돈이 인생의 가장 무거운 짐이 된다.

 

세상 것에 기뻐하는 것은 잠시 잠깐이지만, 성령 안에서 사는 성도들은 영원히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난주에도 저 지난주에도 은혜받은 말씀입니다. 보잘것없는 세상 물질이라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가난한 자를 돕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값진 보물로 바뀌는 것이다. 평생 자기가 수고한 것을 잃지 않고 사후세계까지 가져갈 수 있는 길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다(마 6:19-21). 우리가 천국 본향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이 땅에서 미리 보낸 보물들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지혜로운 청지기라면 최상의 길을 선택할 것이다.

 

2.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삶.

 

사도바울은 참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주님을 영접하고 난 후의 삶은 비천에 처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국문을 열고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백성이 되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브리서 6:17-18).

내가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감사할 수 없다면 내일에도

감가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순간이 내게 주어진 최고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은 주님이 주신 커다란 능력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질투로 이스라엘 땅에는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칩니다. 그러나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웅이고,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은 왕에게 다윗이 매우 위험한 인물임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땅 뿐만 아니라 가드에서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결국 다윗은 살아남기 위해서 미친 사람 행세를 합니다. 그는 침을 흘리며 대문짝을 벅벅 긁습니다. 침은 수염을 타고 흘러서 밑으로 떨어집니다. 보기에도 역겨운 모양으로 다윗은 미친 것처럼 연기를 합니다.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에게 정말 모욕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모습을 하면서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고, 또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든 잘 적응할 수 있는 적응력을 가졌습니다.

 

사도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의 권리를 가진 자로,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의 제자였다. 아마도 가문도 부유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성경에서 자신이 능력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가난한 데나 부한 데나 모두 처할 줄 안다고 고백을 하고 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의 확신(확실한 믿음)을 봅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2-13)
바울은 하나님은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이 공급되는 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게 되었고 고백했습니다.

 

3.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통 인간으로서는 받을 수 없는 위대한 약속을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세상 사람들의 약속은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연약하거나 불의하기에 약속을 지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며 약속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절대로 없다(민 23:19).

 

성경은 수많은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 주님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우리는 구약이라고 하고 주님 오신 이후의 약속을 신약이고 한다. 이 성서에는 무려 36,000번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는 약속의 책이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약속의 상대자는 성경을 읽는 사람들과 성경 속의 인물들이다. 장래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하겠다고 다짐해 놓은 것을 약속이라고 한다. 계약사회에서 약속은 상호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을 때 사회질서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그러나 누가 약속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카네기는 어머니가 살아계실 동안 결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52세까지 지켰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52세에 결혼하여 62세에 첫 아들을 낳을 정도로 어릴 때 한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아브라함 링컨도 어릴 때 어머니 임종시에 한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그는 평생 술을 먹지 않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늘 기억하며 일생 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약속을 하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늘 내일 모레” 하고 수없이 약속을 하지만 한 번도 약속 이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의 말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약속을 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성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하였다(시 146:3-4).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것이 믿음 첫걸음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하셨다(히 6:14).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위로를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앞에 있는 우리들의 소망은 무엇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히 11:1). 신앙인은 미래세계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현실세계에 없다. 현실세계에 없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임을 뜻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였다(롬 8:24).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소망이 구원의 동기라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은 받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미래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현실세계에 보이는 소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바울은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다(롬 8:25).

은혜받은 말씀으로 우리 만나성도 모두는 세상 것을 탐하지 않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자족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남에 감사드리는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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