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성경적 의미
성경적 의미의 부활(아나스타시스, RESURRECTION, 일어남), (엥게르시스, 일으킴)이란 낱말은 죽은 사람의 몸과 영을 되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뜻한다. 그것은 나사로의 경우처럼(요11:38) 일시적으로 되살아 나는 때도 있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영화로운 영생으로 되살아날 때도 있다. 그리고 크리스챤도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일으킴을 받아 영생을 누릴 것이다.
성경은 또한 가르치기를 그리스도를 믿지 않다가 죽은 자의 몸과 영이 부활하여 영원한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마 10:28; 요 5:28,29; 행 24:15).
“부활”이란 낱말의 용법을 분류하여 보면, 보통은 “죽은 자의 부활”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참고: 마 22:31, 눅 20:37, 행4:21 7:32 23:6 24:21 26:23, 고전 15:12). 신자들의 부활은 “의인들의 부활”이란 말이나(눅14:14, 행 24:15), “생명의 부활”이란 말이나(눅 14:14, 행 24:15), “생명의 부활”이란 말로(요5:29), “악인의 부활”이란 말로(행 24:15)표현되었다.
신앙고백문에 자주 나오는 “몸의 부활”이란 표현은 성경에 입각한 것이다(마 27:52, 롬 8:11,고전 15:35,42-44, 빌 3:21).초대 교부들과 신앙고백문들이 증거한 초대 교회는 “육의 부활”이란 구절을 도입하였는데, 이 귀절은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 신앙고백문 속에 나온다. 교회가 이 표현을 채용한 것은 많은 이단들이 몸에 대한 영원한 미래를 부정하면서 죽은 자”란 낱말을 “죽은 영혼들”이란 뜻으로 이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몸이 부활한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죽은 자는 육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성경의 진리를 강조하였다. 이 표현은 성경 자체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를 보존해야 하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많은 학자들은 “몸의 부활”이란 표현 속에 나오는 “몸”이란 낱말이 신체적인 몸을 배제한 “자아”나 “인격”을 뜻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I. 절대 무오한 성경의 지식
이교는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지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엡2:12,살전4:13).헬라 철학은 “영혼의 불멸성”을 가르쳤다. 영혼은 신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육은 물질이므로 약하며,여기에는 어떠한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헬라 철학은 생각하였다.
헬라인들은 바울의 부활 설교를 조롱하였다(행17:32).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부활에 대한 희망을 현대적인 영혼의 불멸성론으로 환원시켰다. 즉 인간의 참된 “자아”는 물질적이고 유령같은 영적인 몸 속에서 계속 존속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부정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에게 있어서 종말은 “영원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현세의 삶을 끝낸 뒤 현실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신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Church Dogmatics III/2,698 ff. III/3,99ff. 257ff.).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영혼은 신적인 것이 아니며 불멸적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그 존재의 전국면에 걸쳐 “심히 좋았”으며 그 몸과 영으로 영생할 운명을 부여받았다(창3:22).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몸으로부터의 해방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의 몸과 영이 죄와 죽음의 권능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가 신자들에게 허용한 것이다(요6:4011:24-26,고전15:54-56).
II.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역사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죽은 자를 일으키셨다(마22:29,고전6:1415:38 고후1:94:14).이러한 역사는 주의 사자를 통하여 실행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자란 예언자와 사도들이다(왕상 17:17 ff.왕하 4:32 ff. 행20:10).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했다(요5:216:3940).예수 자신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
그는 생명과 불멸성을 드러내었으며(딤후1:10), 그가 영광 가운데 부활한 것은 크리스챤의 부활은 보증하는 것이다(고전15:20-23:47-49,살전4:14 ff.)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모른채 살다 죽어 간 자들을 일으키신다 할지라도,그들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행한 구속사업은 본질적으로 구속적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심판관으로서 그들을 일으키실 것이다(요5:26-30). 각자는 그의 손으로부터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심판을 받을 것이다. 고후5:10).
III. 구약에서 본 부활과 부활에 대한 희망
A. 역사기록
구약에 보면 사르밧에 사는 과부의 아들(왕상 17:17ff),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32ff), 그 시체가 엘리사의 묘실로 던져진 남자 등 세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그 과부의 아들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충분한 실증을 구할 수가 없다. 이 세 가지 경우의 부활이 지상의 삶으로 잠정적으로 되살아난 것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실례들은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도 있는 하나님 여호와의 전능하신 권능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을 돈독하게 만들었다.
B. 부활에 대한 증거가 초기에는 자주 나오지 않았다는 점
구약에는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에 대하여 명백한 증거를 제공하는 구절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구절은 퍽 후대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희망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상에서 오래 사는 것을 강조하였으며(출 20:12),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미래가 있다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업이 오직 점진적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죽음을 정복할 때까지 사람들은 부활에 대한 완전한 희망을 알지도 못했고 향유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참 신자들은 모세가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신32:39)라고 노래한 그들의 강대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즉 그들의 몸뿐만 아니라 또한 영을 위하여) 이생의 삶보다 더 큰 것을 마련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여기서 “몸뿐만 아니라 또한 영을 위하여”라고 한 것은, 성경적 가르침에 따르면 양자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말하였다(11:19). 한편 히브리서 11:8-16절에 보면, 족장들은 “(하나님이)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기대하였으며, 가나안 보다 “더 나은 본향”을 원했고 “이 사람들은 다 믿음에 따라 죽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 구절들이 비록 초기의 모호한 형태이긴 하지만 부활에 대한 희망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이 부활에 대한 희망은 나중에 가서 하나님의 부활의 권능이 뚜렷이 나타났을 때 더욱 커졌던 것임에 틀림없다(III의 A)을 보라)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 영생을 얻은 에녹(창5:22-24,히11:5)과 엘리야(왕하 2:1112)의 “승천”도 몸과 영을 가진 인간이 영원한 미래를 향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더욱 강화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이스라엘적 희망의 원천을 고대 “세계의 민간 전승”이나 “일반적인 종말론적 사건”에 관한 이론 및 여타 지방에서의 가르침에서 찾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뿐 아니라 이에 대하여 지지할 수도 없는 일이다(IDB,I, p,41).
C. 구약에 표현된 부활에 대한 희망
이 점에 관하여 우리가 고려해 보아야 할 구약의 주요 구절들은 아래와 같다. 여기서는 우선 사무엘상 2:6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한나의 노래를 고찰해 보겠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한나가 실제적인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이러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가는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항상 행하시는 바를 언급한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2:6절은 여호와께서는 음부의 문 앞에서도 인간의 생명을 거둘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보존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이 항목에서 다루고 있는 이 구절과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대한 세밀한 해석에 관해서는,The Nature of the Resurrection Body[1964]를 보라). 한편 욥은 말하기를(19:25-27),”내가 알기로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하였다. 현대의 주석가들은 대부분 논리정연한 사상의 흐름을 보아 이른바 사후(post-mortem)해석론이 정당한 것 같다.
즉 욥은 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그의 구속자(히<꼬엘>)로 일어나셔서 그를 변호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는 것이다. RSV은 ‘밉베사리'(mibbesari)란 히브리적 표현을 “나의 육으로부터”(from my flesh)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죽은 자로부터 부활한 후 욥은 다시 회복된 육 바깥에서 그 자신의 눈으로 신적인 심판관이 그를 변호하는 것을 볼 것이다. 정신사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부활에 대한 이러한 희망이 생각될 수도 없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문제성이 있다.
한편 시편 16:9-11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라.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했다. 9절에 나오는 ‘신체기관의 평행구’는 이 세상에서 몸(또는 육체-인격)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9절 하반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요 불가결하다.
그러나 여하튼 “이는…”으로 시작되는 10절은 미래의 부활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구절은 생명의 완전한 승리를 일반적이고 절대적인 용어로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장차 그의 부활시에 드러낼 영광스러운 영생을(행 2:26ff, 13:35ff).예언자적으로 볼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번에는 이사야 25:8절 상반절을 보자. “만군의 여호와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라했다.
이 구절은 행간 사이에 적어 넣는 간결한 평주가 아니며, 열국에 퍼진 탄식과 슬픔의 베일이 없어질 것이라고 선언하는 7절과는 자연스럽게 연속된다(참고. 삼하 15:30, 에 6:12, 렘14:3).이사야 25:8절 하반절은 이 상징적 베일이 없어져야 하는 까닭을 여호와가 죽음 그 자체를 완전히 멸절시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만민을 위하여” 마련된 종말론적인 연회에 대하여 감동적으로 묘사한 6절의 틀 속에서 8절은 여호와의 위대하신 날에 죽음이 절대적으로 파괴될 것에 대하여 명확히 이야기한다(참고 고전 15:54, 계21:4).
한편 이사야 26:19절에 보면,”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고 했다.14절과 비교해 볼 때(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미래에 부활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이 죽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19절은 의롭게 죽은 자들의 종말론적이고 육체적인 부활을 예언하는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롭게 죽은 자들이란 13절에 나오는 “다른 주들” 아래에서 죽어 간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뜻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일반적”인 부활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결코 일반적 부활이 그 당시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 누릴 위안은 오히려 일반적 부활에 대한 신앙을 전제한다(참고 25:8 절 상반절). 에스겔 37:1-10절은 이미 마른 해골(뼈)골짜기의 환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뼈들은 생명을 잃은 채 서로 떨어져 있었으나 성령의 강한 능력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는데 이것이 곧 부활을 뜻한다.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이 환상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회복할 것에 대한 예언이며(11-14절),이는 죽은 자가 장차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통속적인 신념을 전제한다고 한다. 이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에 대해 실증자료를 댈 수는 없다. 또한 다니엘도 12:2,3절에서 부활을 예언하였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가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다. 선지자 다니엘은 가까운 장래에 전례 없었던 환난을 당할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로하였다.(1절).이들 중 대부분은 여호와를 위하여 목숨을 내 던져야 했었다. 이러한 순교자들은 영광 속에서 육으로 부활한다는 확신에 의하여 위로 받았다.
그러나 여호와를 부인한 자들은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입을 것이었다. 물론 이 구절에는 죽은 자들 일반의 부활이라는 사상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다니엘이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하여야 할 동포를 위로하고자 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의 예언은 종말론적인 몸의 부활 신앙에 대하여 확고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그 다음 호세아 14:13절은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고 선포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생각나게 하는 말투로 죽음과 무덤에 대한 완전한 승리에 관하여 말했다(고전 15:55).물론 이것은 호세아 13:14절이 죽은 자의 부활을 예언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문맥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에 대한 심판이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14절을 자연스럽게 해석하여 보면 에브라임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며 그러므로 죽음과 음부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여호와도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위에서 말한 바의 결론을 내려보자. 구약은 매우 명료한 것으로부터 조금 모호한 구절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다양하게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지 이교 사상으로부터 채용한 것이 아니다.
IV. 정경 이외의 자료에서 본 부활
고대 유대교 및 기독교 시대의 비정경 자료에도 (사해 두루마리,탈굼,탈무드.외경 및 위경) 부활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이 표방하는 개념과 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이 구절들에 대하여 논의할 수 없다(T. H. Gaster, IDB,IV, pp,41-43을 보라).
V. 신약에서 본 부활
A. 명사 및 동사
헬라어 아나스타시스는 죽은 자의 영적인 부활이나(눅 2:34 참고. 엡 2:15:14) 육적인 부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예수와 모든 사람은 마지막 날에 일으킴을 받을 것이다. 신약 도처에 이에 관한 구절이 나와 있다). 한편 헬라어 엥게르시스(문자적으로는 깨어남”이라는 뜻)는 오직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마 27:53).
이러한 명사와 상관되어 흔히 쓰여진 동사에는 아니스테미와 엥게이로가 있는데, 이 동사는 타동사로서(‘일으키다’란 뜻이다) 하나님의 주도권과 활동을 강조하며, 특히 예수의 부활이나(행 2:24,32. 3:26. 17:31), 활기를 띠게끔 자극하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신약 곳곳에 나옴: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자주 사용되었음).
B.역사기록
1. 예수의 부활과 상이한 죽은 자들의 부활. 예수 자신은 야이로의 딸(막 5:35ff. 및 평행 귀절), 과부의 아들(눅 7:11ff), 나사로(요 11:11ff)등 여러 사람을 다시 살리신 적이 있다. 예수가 사망하였을 때 죽어 있었던 성자들이 많이 일어났다(마 27:52,53). 한편 베드로는 도르가를 일으켰고(행 9:36ff.) 바울은 유두고를 일으켰다(행 20:9ff).
예수가 죽은 자를 일으키신 것은 예수가 메시야임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예수를 통하여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가져다 준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마 11:5, 눅 7:22, 요 11:25).잠자던 성자들이 신비스럽게도 많이 일어섰다는 기사도 이와 똑같은 방향을 취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도르가와 유두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예수의 제자로서 여러 가지 치료 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행 3:6, 16:18, 고후12:12, 참고 마 10:8).이 모든 부활은 예수가 갖고 있었던 부활의 권능을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부활은 오직 죽을 수밖에 없는 현세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죽음에 대한 최종적 승리는 종말이 이르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2. 예수의 부활은 금요일 저녁 예수가 죽어 장사한지 사흘만인 일요일 아침에 일어났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 자신이 만인과 상이한 것처럼 여타의 부활과는 전혀 달랐다. 예수는 성육신 한 하나님이요(요 1:14), 죄 많고 잃어버린 인류를 상징하는 마지막 아담이요(롬 5:12ff, 고전 15:45ff),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유일한 중재자요(딤전 2:5), 죽음의 권세를 가진 악의 역사를 파괴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요(히 2:14, 요일 3:8),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딤전 1:15).
이러한 능력을 갖고 계셨던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죽으셨으며(롬 4:25),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rausom)으로 주셨으며”(딤전 2:6),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고”(롬 4:25),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 1:4). 그는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사셨으며(빌 3:21),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다(롬 6:9). 그는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는 “대제사장이며(히 7:16),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참되고 영광스럽고 무궁한 생명의 원천이 되셨다(요 3:16; 6:56ff; 11:25,26; 14:19, 고후 13:4, 딤후 1:10, 계 1:18).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예수의 부활과 부활하신 주의 현현을 최초로 기록하였다(고전 15:3ff, 참고 11:23). 바울에 의하면 복음서의 설교와 그리스도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헛될 것이라고 한다(고전 15:17). 예수의 부활에 대한 교회의 신앙이 입각하고 있는 세부적인 빈 무덤 및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 기사는 복음서에 나온다(마 28장, 막16장, 눅24장, 요20,21장). 예수의 부활에 대한 완전한 논의에 관해서는 부활(예수 그리스도의)을 보라.
C. 죽은 자의 부활.
1. 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모두 일으키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신약은 죽은 자 모두의 부활을 명료하게 가르친다. 즉 신약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 밖에 있든지 간에 오로지 그들의 업적에 따라 그들 자신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부활할 것을 가르친다(요 5:28,29; 행 17:31, 롬 14:10, 고후 5:10, 계11:18, 20:11-15).
하나님이 지향하는 목적은 인간이 그의 몸이 없이 존재하는 중간상태일 리가 없다(히 12:23, 계 20:4). 인간의 전체성(즉 몸과 영)은 영원을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다. 그리고 심판은 각자가 그 몸 안에서 행한 바와 관계될 것이다(고후 5:10). 그러므로 몸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마 10:28, 25:34, 요 3:36, 5:29, 계 20:15).
비록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심판관으로서의 그리스도(행 17:31)가 죽은 자를 모두 살리겠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신자들의 부활은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하여 보증될 것이다(고전 15:20ff, 살전 4:14). 고린도전서 15:22절의 빛 안에서 보면, 22절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사람 모두를 뜻하는 것 같다. 성경의 본질은 구원의 복음이므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부활에 관해서 신약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특히 저 위대한 부활장(고전 15장)은 오직 신자들의 부활만을 강조한다.
2. 그렇다면 죽은 자는 언제 부활하는 것일까?
신약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특별히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고전 15:51,52, 살전 4:16), 죽은 신자들의 부활은 주의 재림 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이때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되살아나자마자 즉시 변화될 것이다. 만세에 걸친 신자들은 모두 영광된 성자들의 연합을 구성하며, 공중에서 그들의 구속자를 만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것이다. 처음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서 죄를 용서받고 그 아버지의 나라로 환영받아 들어간 후(마25:31-40), 이들은 불신자와 타락한 천사들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마 25:41ff, 고전6:23). 불신자들이 신자들과 동시에 부활할 것인지, 아니면 일부 학자가 주장하듯이 조금 나중에 부활할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는 확실하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주제는 부활이 하나의 일반적인(통전적인) 몸의 부활인지 아니면 처음에는 부분적인 부활이었다가 얼마 후 나중에 가서야 몸 전체가 부활하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다.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적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동안 끝까지 신실하였던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는 계시록 20:4절 이하를 그 전거로 내세운다.
한편 오직 몸의 부활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계시록 20장을 별도로 치며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서로 구별하는 내용이 성경에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계시록 20:5절의 “첫째 부활”을 실신한 성자들이 죽고 난 후 즉시 중간상태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는 단계로 이해한다(참고, 빌 1:23, 히12:22).
VI. 몸의 부활.
A. 육적인 몸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소위 과학적인 근거에서 육적인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부인하는 것이다(참고 마12:24). 또한 이들은 몸을 죄의 원천이거나 죄의 본거지로 간주함으로 인하여 이러한 육적인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으로 부활하거나 “천사와 같은” 비물질적인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한다.
비록 성경(특히 바울서신)에서 “육”이란 낱말이 종종 인간의 악한 본성을 뜻할 때도 있지만, 이러한 육적인 몸이 악하다거나 죄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한 군데도 없다. 오히려 악한 것은 인간의 인격적 중심인 마음(kardiva, 카르디아)이라고 했다(창 8:21, 막 7:14ff, 롬 2:5). 육적인 몸은 윤리적으로 보면 중립적인 매체이다.
그것은 신자에 관한 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고전 6:15), 성령의 전이며(고전 6:12,13).일부 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몸”이라는 낱말은 인간의 “자아”나 “영적인 인격”을 뜻한다고 단정하는데,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충분한 실증자료를 댈 수가 없다. 죽은 자가 육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예수 “살과 뼈”를 지닌 몸으로 부활하신 사실에 의하여 보증된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처 흔적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을 만질 수도 있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다(눅 24:38-43, 행 10:41).
예수는 승천하실 때에도 이러한 육적인 몸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행전 1:1, 빌립보서 3:21, 계시록 1:17절에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부활한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똑같은 것이므로(고전 15:49, 빌 3:21, 요일 3:2)이들도 또한 육적인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참고 고전 15:35-42). 그리하여 인간은 그 전체성에 있어서 구원받을 것이며 새로운 땅에서 살아갈 것이다(사 65:17ff, 66:22, 마 5:5, 계 21:1-3).
B. 육의 부활을 부정하는 듯한 성경 구절들
예수는 사두개 사람들에게 부활한 성자들은 천사와 같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마 22:30, 막 12:25).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부활 이후에는 결혼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러한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20:36절은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까닭을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 구절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발생하는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자녀들을 재생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부활한 몸의 본성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제거된다는 뜻도 들어 있지 않다. 고린도전서 15:44절에 보면, 부활한 몸은 “신령한 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부활한 몸이 영으로 구성된 몸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령한 몸”이라는 말이 보다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부활한 몸이 성령으로 채워지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15:50절에서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도 없고” 라고 말했는데 학자들은 이 구절이 육적인 몸의 부활을 배제한다고 종종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실상 사도 바울은 이와는 전적으로 판이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혈과 육”이란 표현은 몸의 “본질”(실체)을 뜻하지 않고 인간의 전체성(몸과 영)이 덧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마 16:17, 갈 1:16, 엡 6:12, 히 2:14).
이것은 고린도전서 15:50절의 의미와 똑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평행 구절인 50절 하반절에서 사용된 “썩은 것”이란 낱말은 인간 전체가 썩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 그것이 몸의 본질임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맥 전체를 살펴보건대, 덧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영광스럽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는 처음에 불멸하고 멸망당하지 않으면,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탈바꿈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육적인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구절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셈이 된다.
C. 동일성과 변화.
비록 부활한 몸이 육적인 몸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몸과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몸의 존재 조건에 관해서는 변모가 있을 것이다. 바울은 죽은 자 뿐만 아니라 예수가 재림할 때 아직 살고 있는 자들의 몸이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고전 15: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여기서 ‘불가불’이라는 말을 주목하기 바란다.
이러한 변화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한 신자들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새로운 죄를 범하지 않는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새로운 세계로 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고전 15:47-49). 여기서 말하는 “새 영광”이란 그리스도의 영광과 같은 것이며(고후 3:18), 개개인의 신자가 현세에서 주에 대하여 헌신한 바에 따라 달라질 그러한 영광이다(단 12:3, 고전 3:14,15, 고후 9:6).
이러한 변화는 기적적이고 장엄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무덤 이쪽 편에서 이에 대하여 적당한 사상을 형성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하여 신뢰할 만큼 세부적으로 묘사할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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