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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Adolf Hitler

by 이덕휴-dhleepaul 2022. 10. 6.

아돌프 히틀러(독일어: Adolf Hitler,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지도자이자 나치 독일의 초대 퓌러다.


1938년 아돌프 히틀러의 초상 사진

총통기(지도자 겸 국가수상 상징기)
 독일국 지도자 겸 국가수상 
히틀러 내각
1934년 8월 2일 ~ 1945년 4월 30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국가대통령)
카를 되니츠 (국가대통령)
헤르만 괴링
 
  독일국 수상
히틀러 내각
1933년 1월 30일 ~ 1945년 4월 30일
쿠르트 폰 슐라이허
요제프 괴벨스
파울 폰 힌덴부르크
프란츠 폰 파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수
1921년 6월 29일 ~ 1945년 4월 30일
안톤 드렉슬러
마르틴 보어만
 
 독일국의 제3대 육군최고지휘관
1941년 12월 19일 ~ 1945년 4월 30일
발터 폰 브라우히치
페르디난트 쇠르너
프란츠 할더 (1938년 ~ 1942년)
쿠르트 차이츨러 (1942년 ~ 1944년)
아돌프 호이징거 (1944년 ~ 1944년)
하인츠 구데리안 (1944년 ~ 1945년)
한스 크렙스 (1945년)
 
신상정보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브라우나우암인
1945년 4월 30일(56세)
 나치 독일 베를린 퓌러엄폐호
 바이에른 육군 (~ 1919)
독일 노동자당 (1920년 ~ 1921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1921년 ~ 1945년)
알로이스 히틀러 (아버지)
클라라 푈츨 (어머니)
에바 브라운 (1945년)
아돌프 히틀러의 종교관 참조
 
군사 경력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기의 히틀러 (1914년)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1914년 ~ 1920년
제16바이에른 예비연대[1][2]
국가방위군 정보국[3]
병장 (Gefreiter; 제국군)[4]
정보병 (Verbindungsmann; 국가방위군)[3]
제1차 세계 대전
   

뛰어난 웅변술과 감각의 소유자였던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인하여 독일이 서약한 베르사유 체제, 대공황 이후 정권을 잡았다. 히틀러는 군대를 대량 모집하여 취업률을 올렸고, 전쟁 자금이나 국가 민족의 희생양으로 유대인을 지목하여 독일의 게르만족의 지지를 얻었다. 이후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과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폴란드 침공 등을 일으키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히틀러 이전부터 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뿌리 깊어 제1차,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유대인들을 혐오하였고, 이는 유대인 혐오 정책이 호응을 얻은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5] 전쟁 중 그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과 집시, 흑인, 중국인 노동자 그리고 슬라브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 강제 수용소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히틀러는 유대인 족보라는 걸 만들어 할아버지가 유대인이어도 증손자를 잡아가는 정책을 펼쳤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막노동이나 생체 실험을 하고 병들면 총살했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도망친 유대인들은 재산피해, 인명피해가 컸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동성애자와 장애인도 있었다. 그 이유는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가 독일 민족의 우수성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깨고 전쟁을 선포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고, 잇따라 참전한 미국에 인해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에게 포위된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베를린의 국가수상부 지하 벙커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삼키고 발터 P38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6] 그러나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만을 이용해 자살했다는 서술도 있다.[7]

그의 어머니인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이미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에게는 장남 알로이스 2세와 딸 앙겔라를 두고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 낳은 클라라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일에 열중해있던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 될까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 되고 결국 아돌프와 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 되던 해 당시 14세였던 그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출신이라는 설이 한때 돌기도 했지만,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정편집

영아기의 히틀러.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를 흐르는 인(Inn) 강변의 오스트리아 쪽 브라우나우(Braunau)에서 6남매 중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적 '아디'라고 불렸으며 '볼프'라는 별명도 있었다. 세무 공무원이었으나 학력이 낮았던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꾼에 무례하고 권위주의적이고 흉폭했다고 한다. 어머니 클라라 푈츨(Klara Pölzl, 1860 ~ 1907)은 그의 외조카이자 후처였는데 병약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히틀러의 난폭한 성격과 행동의 원인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은 폭력에서 찾으려 하기도 한다.

1895년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 피슐람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고다. 하지만 진학문제로 아버지 알로이스와 마찰이 잦아졌고, 상급학교 진학 이후의 학업성적은 전혀 우수하지 못했다.[출처 필요]그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사진은 그의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잘 보여준다.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나오는 유대인이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소년 시절편집

13세 때 오스트리아 에서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는 아돌프 역시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당시 웅장한 건물을 스케치를 하는데 매료되어 있었으며 인문계 학교로 진학해 미대에 가길 원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에게 관대했던 어머니 클라라와는 매우 엄했고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꿈을 짓밟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으로 학업에 매우 불성실해졌다. 참고로 이 때 히틀러의 실업계 학교 시절 같은 반 급우 중 하나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었다. 끝내 화가의 꿈을 접지 못한 그가 하는 일은 그저 린츠의 건물을 스케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반유대주의, 독일 민족주의에 입각한 레오폴드 푓슈라는 역사 선생님의 수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며 비교적 주위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마치 역사에 관해서 만큼은 조예가 깊은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경우가 종종 있으나, 《나의 투쟁》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선전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견해가 통설이며 실제로 역사 시험에서도 낙제를 면치 못할 수준의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자신의 독일 민족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부풀려진 점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03년 1월에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가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15세였던 아돌프는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식 내내 펑펑 울 정도로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더욱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성적은 바닥을 밑돌았다. 자취나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으며 주말에는 어머니가 계신 집에 돌아왔다. 후에 그는 린츠의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고 스테이르라는 곳에 있는 작은 학교로 전학한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16세 되던 해 병으로 1년 간 학교를 쉬게 된 것을 계기로 그 학교를 자퇴했다.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는 유방암으로 고통 받다가 1907년 사망했다.

비엔나와 뮌헨에서의 생애편집

1903년부터 고아연금자로서 살다가, 어머니의 후원으로 1905년부터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게 된다. 1907년 9월부터는 비엔나에서 살았는데 1910년에 히틀러는 징병 신체검사를 받고 오스트리아 군대에 들어가야 했으나 히틀러는 징병신체검사를 기피하고 오스트리아 군대에 들어가지 않았고, 1911년에도 징병 신체검사를 거부하고 오스트리아 군대에 들어가지 않았다. 1913년 5월에 독일 뮌헨으로 갔다.

1907년 비엔나로 여행을 떠나, 비엔나 예술대의 일반 미술학교에서 112명의 후보와 함께 시험을 치르게 된다. 준비해 간 미술화보집으로 79명의 응모자와 함께 2차 시험을 치르게 된다. 결국 28명만이 최종시험을 합격하게 되고 히틀러는 여기에 들지 못하게 된다. 우선 비엔나에서 살았다. 10월 24일에 가족 중 한 유대인 의사 에드워드 블로흐는 어머니가 불치의유방암에 걸려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통보한다. 히틀러는 린츠로 다시 가게 되고, 어머니는 결국 1907년 12월 21일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의 사망 후에 점점 더 친척들과 멀어지게 된다.

아돌프 히틀러는 고아연금으로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그린 그림과 우표 판매로 더 나아지는 그의 수입은 심지어 교사의 초봉보다 많았다고 한다. 한 지인의 추천서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1908년 가을 예술학교의 두 번째 응모에서 견습기간이 없이 정식으로 자격을 얻게 된다. 그 다음에는 직업과 실습을 하는데 거의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히틀러는 두 번째 거절을 한 후에는 점점 재정이 바닥나게 되고, 병역징집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된다.

1909년 7월에 친구인 아우구스트 쿠비첵과 헤어진 후 숙소를 여러번 바꾸게 된다. 그 다음에 얻은 방은 시내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기서 그는 겨우 3주 동안만 방을 얻게 되는데 그 후의 3개월 동안은 그의 거취가 불분명하다. 여러 자료를 근거로 볼 때 그가 그 때 거주자 신고를 안한 것에 대해 노숙자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노숙자 생활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10년 초에 멜데만가에 있는 남자 기숙사로 옮긴다.

청년 시절편집

미술학교 입학 거부와 실직자 생활편집

아돌프는 그가 19세 되던 해인 1907년 10월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그곳에서 고아들을 위한 약간의 보조금을 받고 이어 빈의 미술학교에 두 번 지원했지만 두 번 모두 학교 측으로부터 입학을 거절당한다. 하지만 교수가 히틀러의 건축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보고 건축가가 되라고 조언을 해준다. 그래서 히틀러는 건축가가 되기 위한 꿈을 가지고 건물 스케치와 여러 가지의 도안을 완성한다. 그렇지만 건축가가 되기 위해선 높은 학력이 필요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21살 되던 해에는 받았던 보조금마저 끊기게 된다. 대신 아주머니로부터 약간의 돈을 물려받게 되는데 이마저 곧 바닥이 나게 되고 이후 그는 몇 년 동안 엽서에 담긴 그림들을 그대로 다시 그려 상인에게 되파는 일개 그림장이 신세가 된다. 당시 그는 여전히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시설에 살고 있었고 매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며 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종종 리하르트 바그너 게르만 민족신화에 관련된 오페라를 감상하였다.

히틀러가 활발한 반유대주의자가 된 것은 빈에 있을 때부터였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가 자랐던 오스트리아의 기독교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빈에는 기독교의 한 종파인 동방정교회 신도를 포함한 큰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 빈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히틀러는 정치 평론가 란츠 폰 리벤펠스나 정치가 카를 뤼거, 비엔, 게오르히 리터 폰 쇠너러의 영향을 받아 후에 그의 정치관념의 밑바탕이 되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배웠다. 이런 빈의 분위기로 인해 결국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되었고, 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청년기에 그는 종종 언론사에 칼럼을 투고하기도 했는데, 이때 자신의 어릴 적 별명이었던 '볼프'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썼다 한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누구도 그가 볼프라는 이름으로 글을 투고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화가로서의 히틀러편집

히틀러는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히틀러는 비엔나 콩쿨 대신 린츠 실업학교로 진학하면서 화가로서의 그의 생활이 단절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 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1913)', '바다의 야상곡(1913)' 등의 다수의 그림들을 남겼다. 현재 히틀러의 작품 중 한 점이 한화로 1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에 경매 낙찰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화가로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작품인데도, 작품성이 아니라 독재자가 그린 그림들이라는 화가의 인물적 특징이 더 관심을 받았다.[8][9][10]

이에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그린 그림들을 나치의 잔재로 인정하였으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그린 그림을 경매에 올리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정하는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남긴 작품들을 모두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2012년 1월 29일에 아돌프 히틀러 작 바다의 야상곡은 슬로바키아에서 온라인 경매에 올라왔는데 한화로 4천7백만원에 낙찰되었다. 이는 최초경매가 1천6백만원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제1차 세계 대전편집

독일 제국으로편집

1913년 바이에른 주의 뮌헨으로 갔다. 히틀러가 뮌헨으로 간지 얼마 안 됐을 무렵에 오스트리아로부터 체포 영장을 들고 온 수사관들이 히틀러를 찾았다. 이유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군 징집을 거부하고 독일로 도망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이때 "몸이 허약하여 도저히 군복무를 할 수 없다" 고 말하였고 면제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히틀러가 병역을 거부한 것은 몸이 허약해서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슬라브족과 유대인으로 혼탁한 오스트리아군에서 군복무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조국이 아니었고, 그의 조국은 순수 독일인들로 구성된 독일 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징집을 거부한 것도 그 때문이다.

1914년 7월 말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뮌헨 오데온 광장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장교 앞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 히틀러가 촬영되었다. 히틀러는 즉시 바이에른 16보병연대 입대를 자원했다. 그에게 진정한 마음의 조국인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복무 시절편집

1923년에 제작된 히틀러의 초상화

상병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받은 충격으로 인한 히스테리성 실명에서 회복되자 독일 육군에 입대하여 통신병으로 복무했다. 뮌헨의 제4군 사령부로 복귀해 임무를 활발히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9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싹트고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 중 하나를 조사하라는 군 정보작전참모부의 명령을 받았다.

정치 데뷔편집

나치당 입당과 지도자 부상편집

히틀러가 받은 당원증

그러나 히틀러는 오히려 1919년 9월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에 입당, 당원증 제55번을 받았다. 히틀러는 곧 당내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고 지도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0년 초,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0년 2월 24일, 뮌헨의 커다란 맥주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 모인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히틀러는 그의 동지들이 추구하고 있는 운동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짧게 나치스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독일어 약자로 NSDAP)이 바로 그것이다.

그 외에도 히틀러는 민주공화제 타도와 독재 정치 강행, 베르사유 조약 타도,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 그리고 백화점과 다국적 기업 공격 등을 포함한 25개 조항으로 된 나치당의 당 강령을 발표했다.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당 로마 진군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으며 부상당하였다.

그 사건으로 란츠베르크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전복할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비록 수감 생활은 6개월로 끝났으나 당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다. 히틀러는 흩어진 당원들을 다시 모으고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당의 재건은 쉽지 않았다. 독일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좌파 우파 정당중에서 극단적인 정당들은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실직자 수가 6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정당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나치당은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단독 집권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1932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하여 1,340만 표(36.8%)까지 득표하였으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원래는 장군) 후보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는 33.1%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자본가나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집권편집

총리와 퓌러편집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좌파 세력,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파 인사 등 반대파를 감금, 납치, 암살, 고문, 불법적인 재판과 처벌 등의 방법으로 탄압하고, 기존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함을 강조하여 인기를 모은 뒤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 체제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되었고 그 지위를 퓌러 겸 국가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 약칭 퓌러(Führer)라 칭하였으며 보통 총통으로 불린다.

나치스의 집권편집

전권 위임법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했고 제3제국이 시작되었다. 지방 의회가 해산되고 사민당은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각종 단체와 조합들이 나치당의 하부조직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나치 조직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하면서 1934년 6월 30일에는 장검의 밤 사건을 일으켜 나치 돌격대 지휘관 에른스트 룀을 제거한 데 이어서 바르톨로메오의 밤 사건을 일으켜 권력 등 모든 비밀을 알고 있던 전임 총리 슐라이허 장군을 제거하면서 오래된 청구서를 모두 해결하였다.

그 후 독일 국방군은 나치당원에 융합되었고, 이러한 권력 인수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민족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지구수도편집

히틀러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심에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전 세계를 정복하면 전 세계의 수도에 해당되는 도시를 계획했다. 히틀러의 패망으로 이 계획은 도중 중단되었으나 굉장히 치밀하고 크게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건축가를 고용하여 1938년에 인구 1억명의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를 오늘날 베를린에 해당되는 지역에 계획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게르마니아를 조성하기 위해 슈페어는 오랜 역사의 문화적 흔적들을 깡그리 지우며 무려 7km에 달하는 직선도로를 내고 그 도로의 끝에 300m가 넘고 18만 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돔의 국민대회당(Grosse Halle)을 세웠다. 그러나 비뚤어진 민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슈페어와 히틀러의 광신적 신전을 위한 이 허망한 도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공사가 중단됨은 물론 전대미문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11]

제2차 세계 대전 패전편집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에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이는 스탈린이 히틀러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폴란드를 히틀러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 맺은 군사 동맹 조약이 있었으나 소련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기자들에게 '앉은뱅이 전쟁'이라고 불리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은 너무 늦었으며 미국은 국내 여론 때문에 고립주의를 천명하며 직접 개입을 삼가고 있었다. 공습 및 기계화 부대의 신속한 기동력이 결합한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법으로 독일은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프랑스마저 항복하였다. 1940년 말까지 히틀러는 서부 유럽과 스웨덴을 제외한 북부 유럽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영국에 우세한 공군을 쏟아 부어 폭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영국을 점령하지 못했다.

1942년 6월 4일의 히틀러.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그리스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연합군의 마지막 보루인 영국에 공습을 퍼부어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배틀 오브 브리튼이 실패했음에도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고, 10월에는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소련의 매서운 겨울앞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 12월 7일 일본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전쟁은 전기를 맞게 되었다. 나흘 후 히틀러는 미국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나 허스키 작전에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에 밀린 이탈리아가 영국군에 항복,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항복을 하게 되고 독일군은 천왕성 작전으로 인한 소련군의 반격에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에게 패하고 치타델 작전의 대표적인 공격으로 대표되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다.

죽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입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독일 본토까지 밀어내고 베를린을 점령함으로 곧이어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아돌프 히틀러의 사망 소식이 게재된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 호외 (1945년 5월 2일 발행)

결국,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괴멸, 북아프리카 전선의 상실, 암살 미수로 인한 히틀러의 정신 이상 등이 초래한 전선의 혼란, 미국의 참전으로 전열이 더욱 두터워진 연합군의 진공으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는다. 1945년 4월 30일 절망한 히틀러는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발터 P38 권총으로 자살하게 된다. 그의 향년이 57세였다.

평가와 비판편집

베르사유 체제 하의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상황 속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관련 제한 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확장, 실업 극복에 성공한다. 독일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경제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나, 그러나 그가 내놓은 실업 대책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슐라이허 내각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파 지도자들이 수립한 계획이었고, 히틀러는 단지 그 기획안을 일부 수정하여 열매를 따먹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각종 논란편집

사망 원인과 두개골편집

2009년 9월 27일, 영국 일간지인 가디언의 주말판 옵서버에서 미국 코네티컷 대학교 고고학자이자 뼈 전문가인 닉 벨란토니 교수가 분석한 결과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보관 중인 히틀러의 두개골은 40대 미만의 여성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보도했다. 벨란토니 교수가 이 두개골이 40대 미만의 여성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베를린 점령 직후인 1945년, 소련은 벙커 주변 구덩이에서 히틀러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했고, 이듬해인 1946년 추가발굴을 통해 히틀러의 두개골 조각을 찾아냈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2000년,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에 보관하고 있던 두개골을 공개하였다. 이 때부터 벨란토니 교수는 러시아 측이 '히틀러'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두개골의 DNA를 분석하였는데, 분석 결과 이 두개골은 20대에서 40대 사이 여성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이어서 벨란토니 교수는 "두개골 두께가 남성의 것과 달리 너무 얇았으며 두개골의 봉합선도 1945년 57세였던 히틀러의 나이와 달리 40세 이하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많은 외신들은 히틀러가 진짜 권총 자살했는지 의문시 되는 검사결과라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히틀러가 권총 자살하지 않았거나, 두 번째는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보관하고 있는 '히틀러'의 두개골이 히틀러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므로 현재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12][13]

생존설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지금까지도 히틀러가 당시 자살하지 않고 생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면 히틀러는 피신하여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생존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생존설 주장은 다음과 같다.

  • 히틀러의 시체를 조사한 소비에트 연방 측에선 히틀러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히틀러의 측근들은 성병으로 죽었다고 하는 등 사인이 일치하지 않는다.
  • 자신은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모든 장군들에게 나가라고 지시한 뒤 그의 시체를 본 독일 장군들은 히틀러와 유사한 체형에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구멍이 나있었고 이를 히틀러라 생각하며 불에 태웠다는 점을 보아 자살한 것은 히틀러가 아닌 그의 대역이었다.
  • 히틀러는 자신의 몸에 7,200만 달러의 보험을 들고 있었으나, 그가 죽은 후 그의 여동생 파울라 히틀러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돈을 찾아가지 않았다.
  • 히틀러가 찍힌 마지막 모습이 뉘른베르크에서 SS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 1950년 3월경에 아르헨티나에서 히틀러로 추측되는 사람이 목격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히틀러의 아들이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독일의 신문에는 히틀러의 아들이 아르헨티나에 생존했다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 스탈린이 히틀러 사후인 1946년에도 그를 찾아내서 제거하라는 명령을 NKVD에 내렸다.
  • 히틀러의 부하가 했던 증언을 토대로 제라드 윌리엄스라는 사람이 주장을 했는데, 그에 의하면 히틀러는 벙커에서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대역을 살해한 직후 비행기를 타고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로 도주에 성공하였으며 그 길로 안데스 산맥 기슭에 숨어들어간 뒤 1962년 2월 13일까지 천수를 모두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는 히틀러를 직접 아르헨티나까지 데려다 준 비행기 조종사의 증언까지 확보한 상태에서 제기된 주장이다. 이에 제라드 윌리엄스는 덧붙여 주장하기를 히틀러의 시체라고 발견된 유골은 히틀러가 아니라 히틀러와 체격이 비슷한 40살 이하의 러시아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히틀러가 1945년에 사망한 사실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14]이 주장에 의하면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히틀러 부부는 나치 독일 시절 유대인에게 약탈한 금과 보석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다른 주장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남극에 있는 비밀 기지로 도망갔다거나, 소비에트 연방에서 거주하다 1971년 사망했다거나, 아르헨티나로 도망가거나 심지어는 지구를 떠나 로 도주했다는 등의 설들이 있으며, 그의 여러 가지 생존설은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유대인설편집

히틀러가 반쪽 유대인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편 그가 유대인을 증오하게 된 배경에는 학창 시절에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은 유대인 스승 때문이라는 설과 그의 어머니 클라라가 자신의 주치의인 유대인 의사와 불륜관계를 갖는 장면을 목격하고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증오를 증폭시켰다는 설이 있으나 그 의사는 오히려 히틀러가 죽이지 않은 몇 안되는 유대인중 하나였기 때문에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의사는 가난했던 히틀러의 어머니의 치료비를 많이 삭감해주었다. 유대인을 증오하는 성향과는 관계 없이 그가 유대인의 혈통을 일부 물려받았다는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2010년 히틀러의 유전자를 검사한 결과, 서유럽 사람들에서는 극히 드문 M1B1a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히틀러가 유대인이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장애인설편집

히틀러의 가계는 근친혼이 종종 있었고,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 조차도 자신의 누나 요안나의 딸이자 외조카인 클라라 푈츨과 결혼하였다. 근친혼으로 태어난 히틀러에게 피부병이 있었다는 설, 정신적 장애를 앓았다는 설, 성불구자설 등이 있다. 성불구자 설로는 외형은 정상적이나 성적으로 불구였다는 설과 고환이 한 쪽 밖에 없었다는 설이 있다. 일각에는 히틀러는 자신의 신체적 열등감 때문에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여러 여성들에게 요구했고, 자신의 조카이자 연인인 겔리 라우발(Geli Raubal)에게도 요구했으나 그녀는 수치심에 자결했다고 한다.

가족 관계편집

히틀러의 공식 결혼 경력은 한 번이었으며, 그 밖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가 한 명 존재했으나 행방은 미상이다. 현재 존재하는 그의 가까운 친족으로는 파울라 히틀러의 자녀들과 미국에 체류 중인 알로이스 히틀러 2세의 손자 3명, 이복 누나인 앙겔라의 손자 페트로 라우발(조카이자 연인인 겔리 라우발의 조카)이 있다. 그 밖에 형 알로이스 2세의 아들인 윌리엄 패트릭은 아일랜드계 혼혈인이자 영국 출신으로 순혈주의자였던 삼촌을 상당히 싫어했다 한다. 그 때문에 미국 망명 뒤에도 외가의 성을 따라 '윌리엄 패트릭 스튜어트-휴스턴'(William Patrick Stuart-Houston)이라고 개명했다는 것이다.

  • 친할머니 : 마리아 쉬클클루버(Maria Schicklgruber, 1795~1847)
  • 아버지 : 알로이스 히틀러(Alois Hitler, 1837~1903)
    • 누나 : 텔카(Thelka, 1860~?, 아버지 알로이스의 사생아 딸이었다.)
  • 어머니 : 프란체스카 히틀러
    • 형 : 알로이스 히틀러 2세(Alois Hitler Jr., 1882~1956)
    • 형수 : 브리짓 다울링(Bridget Dowling, 1891~1969,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 조카 : 빌헬름 패트릭 히틀러(1911~1987)
      • 조카며느리 : 릴리 진 재퀴스(Phyllis Jean-Jacques, 1925~2004)
        • 종손 : 알렉스 스튜어트-휴스턴 (?~?)
        • 종손 : 브라이안 스튜어트-휴스턴 (?~?)
        • 종손 : 하워드 스튜어트-휴스턴(?~1989, 1989년에 교통사고로 사망)
        • 종손 : 루이스 스튜어트-휴스턴(?~?)
    • 헤드비가 히드만(Hedwig Heidemann, 형 알로이스 히틀러 2세의 내연녀)
      • 조카 : 하인츠 히틀러(Heinz Hitler, 1920~1942)
    • 누나 : 앙겔라 히틀러(Angela Hitler, 1883~1949, 그의 연인이자 조카딸인 겔리 라우발의 생모)
    • 매형 : 레오 라우발 1세(Leo Raubal, Sr., 1879~1910, 앙겔라의 첫 남편)
      • 외조카 : 레오 라우발 2세(Leo Rudolf Raubal Jr., 1906~1977)
        • 외종손 : 페트로 라우발(Peter Raubal, 1931~)
      • 외조카딸 : 엘프리데 라우발(Elfriede Raubal, 1910~1993)
      • 외조카사위 : 어니스트 호칭거(Ernst Hochegger, 1910~?)
        • 외종손 : 하이너 호칭거(Heiner Hochegger, 1945~)
    • 매형 : 마르틴 하미트시(Martin Hammitzsch, 1878–1945, 레오 라우발 1세 사후 앙겔라와 재혼)
  • 어머니(생모) : 클라라 히틀러(Klara Hitler, 1860~1907), 알로이스 히틀러의 외조카딸. 요안나 히틀러 요한 푈츨의 딸, 히틀러의 어머니이면서 사촌 누나.
    • 형 : 구스타프 히틀러(Gustav Hitler, 1885~1887)
    • 누나 : 이다 히틀러(Ida Hitler, 1886~1888)
    • 형 : 오토 히틀러(Otto Hitler, 1887~1887)
    • 남동생 : 에드문트(Edmund Hitler, 1893~1900)
    • 여동생 : 파울라 히틀러(Paula Hitler, 1896~1960)
  • 처 : 에바 브라운 히틀러(Eva Anna Paula Hitler, 1912~1945)
  • 이름 미상
    • 아들 : 성명 불명(1939 ~ ?), 다만 나치 패망 이후 아르헨티나로 보내져 그 곳에서 삶을 이어나갔고 그는 아르헨티나인이라 함. 대부분의 전범들과 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로 도주.[출처 필요]
  • 외할아버지 : 요한 푈츨(Johan Wetzzl, ?~?), 히틀러의 외할아버지이자 고모부
  • 외할머니 : 요안나 히틀러(1830~1907), 알로이스 히틀러의 누이, 히틀러의 외할머니이면서 고모
  • 외조카 : 겔리 라우발(Geli Raubal, 1908~1931), 외조카이자 그의 연인이었다.
  • 외증조부 : 로렌초 푈츨(Laurenz Pölzl, 1788~1841)
  • 외증조모 : 율리아나 베일리(Juliana Walli, 1797~1831)
  • 고종사촌 : 요한나 푈츨(Johanna Pölzl, ?~?) 고종사촌이자 이모

여성 편력편집

히틀러의 여성 편력으로는 4, 5명의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동성애 기질도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겔리 라우발이 자살하자 당시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성적인 모욕을 주었다, 히틀러가 비정상적인 행위를 강요했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겔리 라우발의 자살설로는 히틀러가 겔리를 버리고 에바 브라운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주요 저서편집

문화 속의 히틀러편집

영화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물보호법편집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키우던 개가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 개를 엄청 아꼈는데 얼마나 좋아했으면 아내가 질투를 할 정도로 아꼈다. 그래서 아돌프 히틀러는 동물보호법을 최초로 제정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죽기전, 개가 적군에게 고통스럽게 죽을까봐 개가 먹는 물에 사이안화칼륨을 타서 고통스럽지 않게 보냈다.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1차 득표율1차 득표수2차 득표율2차 득표수결과당락
1932년 선거 독일의 대통령 2대 나치당  30.1% 11,339,446표  36.8% 13,418,547표 2위 낙선

각주편집

  1.  Weber 2010, 12–13쪽.
  2.  Kershaw 1999, 90쪽.
  3.    Stackelberg 2007, 9쪽.
  4.  Bullock 1962, 52–53쪽.
  5.  “홀로코스트는 히틀러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다”. 2020년 10월 16일. 2022년 6월 8일에 확인함.
  6.  Hitler's final witness. BBC News, 2002년 2월 4일.
  7.  히틀러 평전, 요하임 페스트, 푸른 숲.
  8.  “히틀러가 그린 그림과 실제건물(2)”. 한양대학교 동아시아건축역사 연구실. 2008년 5월 31일.
  9.  “히틀러가 그린 수채화, 인터넷 경매 나와”. 2021년 11월 17일에 확인함.
  10.  “ADOLF HITLER MEIN KAMPF DER FUHRER MEIN KAMPF SEIG HIEL GERMAN DICTATOR 1989 TO 1945 MASTER RACE”. 2021년 11월 17일에 확인함.
  11.  게르마니아, 히틀러가 꿈꾼 초대형 '세계 수도' 모습 공개 :: 네이버 뉴스
  12.  히틀러 두개골, 알고보니 여자의 것?《KBS》
  13.  '히틀러 두개골' 여성의 것 Archived 2009년 10월 1일 - 웨이백 머신《한국일보》
  14.  "히틀러 늙어 죽었다"...1962년 2월 13일 사망?《동아닷컴》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전임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파울 폰 힌덴부르크
제1대 나치 독일의 퓌러
1934년 8월 2일 ~ 1945년 4월 30일
후임
(독일 대통령)카를 되니츠
전임
쿠르트 폰 슐라이허
독일 총리
1933년 1월 30일 ~ 1945년 4월 30일
후임
요제프 괴벨스
전임
파울 폰 힌덴부르크
제3대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
1934년 8월 2일 ~ 1945년 4월 30일
후임
카를 되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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