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고의 한계와 신학의 가치
1992년 3월 19일 이 근 호 목사,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2 (p 265)
1. 서 론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까?
만약 이러한 시도를 무리를 해서라도 하게 된다면 어떠한 결론에 도달 할까?
인간들의 이러한 실험과 노력의 결과는 학문이라는 형태로 지상에 등장한다. 철학을 위시하여 과학, 의학, 기술 등은 모든 방면에서 인간 자신이 아는 투쟁의 흔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들의 몸부림의 한계는 무엇일까? 이것을 정리해 보고 그 한계 밖에 존재하는 신학의 귀중함을 다시 한 번 부각하는 취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어본다.
2. 본 론
1) 인간 사고의 한계
철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세분화 되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것은 이미 고대 철학에서 다 제시되었다. 비록 모호하고 추상적이고 포괄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인간 한계의 테두리는 쳐져있는 것이다.
인간 사고의 시발은 인간이 神의 간섭으로 부터 탈출하면서 이루어진다.
신회와 전설에서 자신의 근원을 찾고자 했던 것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神이 없는 이상향을 꿈꾸기 때문이다. 이 꿈을 향한 시도는 자연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 정돈되고 축적된 지식에 자신감을 가질 때부터이다. 이러한 도발적 행위의 원인을 학자들은 경제구조의 변동에서 찾고 있다. 소규모 자연생산체제에서 대규모 국가생산체제로 바뀌면서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고, 생산의 수단이 되는 도구의 발전이 분업을 발생시켰고, 분업으로 말미암아 계급이 생겼으며, 계급에도 지시하는 계급과 지시받는 계급으로 나뉘었다고 믿고 있다. 대규모 고대의 생산체제는 노동집약산업인 목축과 농업에 집중 되었는데 한정된 토지에서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동이 투입되어야 하고 그 노동력은 전쟁을 통해서 타국민을 노예로 전환해야 했다. 노예를 원활하게 관리하고 배치하기 위해 관리 계급이 생겨나고 그 관리계급을 국가의 목적에 부합되도록 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조절하는 최고 관리층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번창하는 국가경제의 변혁만으로 고대국가의 성격을 모두 설명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국가는 神에 대하여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神에 대한 과도한 의존현상은 국가의 발생 이전의 상태에서부터 주어진 집단적 의식이다.
원시부락이나 원시국가에서의 세계관은 자연과 인간이 동일시 되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자기를 둘러싸고 변화하는 자연세계는 인간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인간은 여기에 대하여 경외감을 가졌고 자연현상에 종속됨으로 복종하는 본능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에 대한 순응은 원시사회에서는 보편적 규범과 질서를 유지하는 법률적 기능도 갖게 된다. 인간들은 보다 더 확실한 질서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 자연에 인격을 부여하여 자연과 그것을 창조하고 배후에서 조절하는 인견神을 등장시켰다. 자연하나에 神이 하나씩 붙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욕구는 자연의 웅대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자신들의 현신분을 자연의 神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자연과 대화의 창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서는 자연神과의 대화를 통해 오히려 인간이 神을 부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보려는 정복의식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인간들의 대화나 주문이나 주술의 힘으로 神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달래줌으로써 인간의 위치를 神의 위치까지 대등하게 끌어올리려는 의도도 갖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들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한편으로는 神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신에 대한 무지보다 자연의 다양한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려는 몸부림이 바로 종교와 神에 대한 거창한 의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복속도 자연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만이다. 자연현상 가운데 제일 심도있게 관심 두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운명에 관한 사항이다. 즉 내가 죽어서 무엇이 되나 하는 것이다. 죽음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지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자신은 죽어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 방법으로 다름아닌 영혼개념이 등장했다. 보이는 육체 안에 보이지 않는 진짜 내가 생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어 육체가 썩으면 내 속에 있는 진짜 나는 육체에서 이탈하여 자연과 우주의 일부로 합류한다. 이렇게 되면 온 우주는 죽은 영혼들의 차지가 된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변화와 조화는 이 죽은 영혼들의 심정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는게 아니다. 모든 자연에도 영혼이 있다. 초목에도 영혼이 있고 소택지(작은호수)에도 영혼이 있다. 그래서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살아있는 자기들이 손해 보는 수가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그들의 환심을 사야한다. 뿐만 아니라 잘만하면 자기 원대로 부릴 수도 있다. 자연이 원리를 압도했다고 믿어지지 않던 시절에는 국가적으로도 주술의 기능을 담당하는 계급이 있었다. 이들이 성직자이다. 이 성직 계급은 고대사회의 모든 정신적 업무를 관장한다. 자연을 효과적으로 다스려 자국가에 이익되게 한다. 타국가와 전쟁을 치른다든지 사냥을 할 때에 이들은 바빠진다. 사실 자연에 대한 정복은 곧 그 속에 살아있어 인간에게 겁을 주고 있는 神들에 대한 정복이다. 전쟁도 자국가의 神이 타국가의 神을 이길 때 승리가 돌아온다.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들은 맨 먼저 신전에 상납된다. 타국 신에 대한 인간의 승리인 동시에 그 전리품을 자국신에게 먼저 바침으로 자국신에 대한 통제도 가능한 것이다. 많은 신들의 이야기가 전쟁을 통해서 하나 둘씩 제거되자 신들의 통합 내지는 병합 과정이 일어난다. 민족들마다 갖고 있는 잡신들을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의 神에 예속을 시켜 놓음으로써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변천한다. 일신교로 종교가 성숙해짐과 동시에 하나의 神은 점차 지상의 일에 간섭하게 되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초월신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자연을 의존해 농업생산물을 양산했던 시절이 지나가고 전쟁을 통해 물자를 획득하고 상품을 상호교환하여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 있는 시절이 되자 인간은 신을 폐기처분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인간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고 새로운 세계관이 인간유익 중심으로 발생된다. 그리스의 상품경제는 고대 농업경제의 해체와 더불어 神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이 神의 입장이 되어 해결해 보는 철학적 시대로 접어들게 했다.
자연물은 신들이 과연 하나하나 만든 것일까? 아니면 자연물끼리의 작용에 의해서 조화롭게 유지되는 것일까?
神을 빼놓고 생각한다면 남는 것은 인간과 자연 뿐인데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결국 자연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셈이 된다.
그래서 최초의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했다. 만물의 근원을 알려면 관찰과 관찰한 것을 통일성 있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같은 사물을 관찰하는데도 각기 다른 근원이 제시되는데 이를 크게 둘로 나눈다면 존재와 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있다]는 것과 [운동]한다는 것은 서로 조화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있다]는 그 자체로서 운동이 설명되지 않으며 운동이 설명 안되면 우주의 변화무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운동을 설명하려면 또다시 神의 간섭론이 등장한다. 그래서 신의 간섭대신 다른 용어가 등장하는데 [정신] [이데아] [사랑] [증오] [힘] 같은 것들이다. 근원적으로 말해서 이들 철학자들은 그 궁극적인 운동의 실체를 모르겠다고 말한 셈이다. 알 수 없는 것이 실제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실재론]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실재]하는 것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은 [실재]하는 것인데 그 [실재]에 가까운 정도에 따라 계급이 결정되어야 원만한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재]하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모두 들어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에는 운동의 최초 원인은 운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서 지상 밖의 존재로 문제를 회피해 버렸다. 이러한 관념론이 한계에 이르자 철학자들은 존재의 근원보다는 사람이 순간순간 어떻게 행복을 소유하면서 살 수 있느냐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사회가 안정되자 국가의 존폐보다는 개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철학자들은 사람이란 결코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고 허무하게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대응으로 두 가지 방법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인간의 허무를 스스로 인정하여 마음의 위안과 평정을 찾는 방법이고, 다른 방법은 불행을 잊기 위해 인간은 특별하지 않고 물질의 일부이며 죽음이란 물질의 형태변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은 육체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각자의 종교신비주의에 몰입했다. 이러한 때에 종교신비주의 일환으로 유대교가 성행했고 그 유대교의 줄기를 타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소개되었다.
일반 대중들에 눈에는 기독교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에 우선 매력을 느꼈다. 구원에 대하여 어떤 준비작업이나 소양교육이 필요 없었다. 히브리인들이 수천 년 동안 고대한 메시야가 이제 현실로 나타났다는 소식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그 메시야는 굳이 히브리인만을 구원의 상대자로 지목하지 않고 구원의 혜택이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다고 했다. 인간차별로 시궁창이 되어버린 로마에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보란 듯이 어엿한 천국의 백성, 창조자의 자녀가 된다니 누가 안믿겠는가! 집권자들에게는 국가질서 유지차원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는 종교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왕족들은 기독교인들을 핍박 했는데 이 핍박은 불에 기름을 뿌리는 격이 되었다. 신약사도의 말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대규모 환란과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 예언이 현실로 드러나 핍박뿐 아니라 예수의 재림까지도 모두 현실로 받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순교적 차원의 종교적 열심은 가중 되었고 신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로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상황을 신약 성경에 맞추어서 해석하니 그 교리의 전파를 힘으로 막을 재간이 없게 된 것이다. 모든 일이 예수와 연관해서 이루어진다는 풍토 속에서 사람들은 이 새로운 종교운동을 거부할 수 없었고 새로운 통치사상으로까지 등장한 것이다. 일반 대중들에게 기존 철학은 어렵고 모호한 논리지만 새로 등장한 예수교는 모든 것이 분명했다. 로마의 통치자는 이 분명한 교리를 통해 민중들을 지배 권속으로 몰아넣었다. 국가를 하나님이 지상에 보이는 천국을 이루는 수단으로 그 정당성을 삼았다. 기독국가에 복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기독 국에 순종함으로 가능해진다. 국가권력의 절대화는 질서유지 차원에서 탁월한 효과를 보았다. 국가가 민중들의 종교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가로 마땅한 것이다. 그동안 로마 공화제 가운데 퇴폐와 부패로 말미암아 민심이 불안정한 가운데서 국가종교가 국민들의 마음에 평화를 안겨주게 되었다. 이제 철학은 신학에 비해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동안 철학의 불확실한 것들이 확실한 교리로 종교적으로 처리되었고 모든 것이 가시적 천년왕국인 현 국가에서 자체적인 완결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안정도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었는데 외부적으로 이민족이 영토를 확장해 왔고 내부적으로 성직계급이 부패해 졌기 때문이다. 성직계급의 타락으로 완전국가에 대한 민중들의 마음에 동요를 가져오게 되었다. 여기에 불안을 느낀 고위층은 국민들을 더욱더 강압적이고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기존 교리를 경직화 시켰다. 교리에 대항하는 자는 이단으로 간주되어 국왕 앞에서 가차 없이 처리되었는데 이것은 국가의 핵심 사상에 도전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약점이 노출된 이상 문제의 근원을 회복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드러난 약점을 통해서 기존 교리에 대한 회의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원인은 무리한 교리 보강을 위해서 헬라철학을 사용했던데 원인이 있다. 이 사변적인 논리체계는 결론이 신학적인 형식을 보여준 다해도 이미 철학과의 유사점을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모습으로 등장해 있는 것이다. 특히 신학에 접근이 가능한 학자들은 논리전개에 있어 다른 철학을 사용하여 보다 폭넓은 신학의 세계를 열어가려는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식한 교리수호주의자들도 빈틈없는 논리체계를 언제까지나 반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이슬람교도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유입되자 그동안 초월에만 매달렸던 신학체계가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 신학으로의 요구에 부응하는 쪽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껍데기는 신학의 모습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알맹이는 그동안 중단되었던 자연에 대한 관심을 학문으로 정리하는 과학기운의 시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神과 계시의 입장에서 자연을 권위적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이제는 자연을 자연의 입장에서 조사하고 관찰하여 그 속에서 본래의 법칙과 원리를 발견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기존의 교리와 마찰할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중 진리설]을 앞세웠다. 기존의 신학도 진리이지만 자연의 진리도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둘 다 불안정하기 때문에 이 두 진리를 하나의 진리 안에 통합시킨 자도 있었다. 그러나 신학과 과학은 언젠가는 마찰하도록 되어 있다.
빈번한 전쟁으로 경제의 기반이 흔들리자 국왕에게 기대어 살던 교회의 권위도 흔들기 시작했다. 교회 권위의 균열은 곧 신학의 권위와 와해를 불렀고 신학 이외의 방법으로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려는 욕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옛날 헬라철학자들이 연구했던 것을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고 거기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자연의 원리를 자연에 국한해서 파악하려는 선입감에서 비롯된다. 계시는 따로 있는게 아니라 자연이 곧 계시이다. 교회권위가 무너지고 상대적으로 개인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요구되던 시절이 되자 神과 구원에 관한 문제를 교회를 통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관찰과 생각에 의존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이런 방법은 고대철학시대의 업적뿐 아니라 그들의 학문방법까지 빌려와야 했다. 오직 감각적으로 경험되고 관찰되는 것만 진리가 되는 방법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물론 그동안 듣고 배웠던 교회의 교리나 계시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일단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기준을 세우고 거기에 맞추어서 교리가 이해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인간이 자연의 신비성과 법칙성에 대해 탐구한 결과 그동안 감추어졌던 자연과 천체의 비밀들이 속속 드러나자 인간은 거기에서 자신의 이상향을 찾고 그 자연법칙에 따라 인간의 세상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세상은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둘 사이에는 서로 연결점이 없이 각각의 고유 원칙에 따라 움직여진다고 주창했다. 따라서 물질세계에 대해 교회와 신학은 더 이상 간섭할게 없고 오직 과학자에게 맡길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신세계 존속자체가 거추장스러웠는지 관념과 정신의 세계가 참된 과학의 진리를 막는 우상의 역할을 한다고 원망하기도 했다. 어쨌든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부터는 과학의 세계가 활개 치는 시대가 진행된다.
시민들은 과학자들의 말을 그 어떤 말보다 더 우선적 권위로 받아들였다. 인간사회의 조직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발언권이 세진 유산계급이 등장했고 그들에 의해 의회제가 생기고 권력이 분산되자 국가의 개념조차도 자연법칙에 의해 규정되었다. 가장 좋은 사회란 자연법칙에 가까운 사회이며 인간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국가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개인의 자유와 욕망이 타인에게 침범하지 않는 이상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유로운 개개인이 모여서 이루는 거대한 이상적인 몸체로서의 국가가 이상적 국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가는 개인의 소유물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유를 보장해 줄 의무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근원을 파헤쳐보고자 했던 헬라철학자의 욕망이 교회의 권위의 몰락이후 인간은 비로소 자연을 정복하게 되었다. 그 자연으로 인해 인간은 그들 상호간의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이상사회를 꿈꾸게 된 것이다. 자연은 갈수록 그 비밀의 정체가 노출될 것이고 자연을 알수록 인간은 자연을 자신들의 욕망추구에 사용할 수가 있다. 보다 철저하게 자연을 요리할 수 있는 기능과 기술이 보다 많은 물자를 인간세계에 제공할 수 있다. 자연이란 하나의 거대한 기계이다. 神은 자연을 만들어 놓고는 인간의 재능에 인계하고 말았다. 자연은 서로의 기계적 연결고리로 말미암아 가만있어도 돌아가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에도 의문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자연의 본래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물질과 자연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상대적으로 프랑스와 영국에 비해 과학이 뒤떨어진 독일이 정신적인 면에서 발달했다. 그러나 그것이 비실제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곧 자취를 감추고 다시 물질 우위에 대하여 외쳐대기 시작했다.
자연에 대한 사냥에 분주한 열국들은 서로간의 욕심이 국제사회에 충돌된다는 것을 직감하기 시작한다. 인간사회에서 상호간 이해정도가 차이나고 마찰이 일어나는 문제에 봉착했다. 국내적으로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국제사회에서는 힘이 센 국가와 그 국가에 의해 정복당하는 국가와 민족이 발생한다.
과학과 물질 일변도의 세상관에 대한 자체적인 반성과 문제점이 드러났다. 물자 생산에 참여한 노동자의 권한이 이탈되는 경제적 소외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사회적인 갈등이 첨예화 되면서 인간들만의 이상사회 건설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대규모 전쟁이 두 차례 일어났을 때 그들은 다소 정신을 차리고 문제점을 살피기 시작했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서 나와야 한다는 의식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에 대하여 소홀했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기 보다는 물리적 존재로 파악해서 경제생산의 도구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여겼던 데서 돌아서서 인간의 이성을 자연의 법칙으로 적용 시킬 것이 아니라 정신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인간을 자연과 분리시키면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분석이 뒤따라야 하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보다는 인간을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따져 봐야 한다. 이로서 사회학이 등장해 각광받기 시작한다. 인간에게는 원초적으로 성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었고 그 본능이 의식세계의 행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성적본능이란 외부세계로부터 굴복 당함에서 오는 쾌감과 남을 굴복시키고 정복함에서 오는 쾌감이 조화롭게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단순히 물리적 생산수단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인간의 근원적 충동을 메워 줄 수 있는 국가나 사회의 등장을 고대한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성은 선과 정의를 추구하고 발달시키는 주체적 이성이 아니라 경제적 욕구와 성적 욕구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이성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특히 기술과 기능이 노동의 내용으로서 등장하고 인간이 주체가 되지 못했다. 개인이 거대 기술 지배에 있는 현실에서 욕망은 위축되고 더 나아가서는 生을 사회에 반납하고 포기하는 인간성 상실이 발생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自己再生産이라는 생산 메커니즘의 노끈으로 묶고 있는데 여기서 이탈되는 것은 곧 자살을 의미한다. 사회를 통해서 인간을 파악하고자 했으나 깊은 수렁에 빠진 개인을 발견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풍요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 자연을 정복했다지만 그 정복한 인간사회에 의해 모두들 버림받은 현대인들, 이들이 바로 인간사고의 한계를 말해준다. 자연을 수탈했던 인간들이 이제는 저희 삶을 저희가 수탈하고 있다. 선과 사랑을 노래했던 그들이 한 기계의 부속품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상품화된 사랑과 정의를 노래한다. 기술우위의 사회에서 진리와 비진리의 차이를 이성이 판단할 기회를 부여해 주지 않고 있다. 다만 기술적 효용성에 限時的인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를 제대로 정립하는 능력은 무관계성이 갖는 사회적 무가치성 때문에 그 능력의 가치도 무의미하다. 이 냉혹한 사회에서 자기를 상실하고 자살의 본능대로 자기를 죽음으로 넘기려고 해도 죽음이 자신을 받아 자기 주체성을 연속시켜 줄 장소가 없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도 생산적 가치가 없는 것은 손실로 보기 때문이다. 불행의 씨앗이 물질인가 하여 물질 면으로 추적해 봤지만 그것도 허사였고, 정신인가 하여 인간의 요소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사태를 해결해 봐도 소용이 없다. 도대체 근원적인 문제는 무엇으로 해결 되는가? 자연을 정복할 때 이미 神도 정복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神을 들먹일 근거가 사라졌다.
이처럼 인간에게 신이든 자연이든 적(敵)으로서 의미가 사라졌을 때 인간은 깊은 허무에 빠진다. 즉 자기를 허무케 하는 적이 보이지 않는 허무이다. 자신을 절망케 하고 파멸로 몰아넣은 적이 어디 있는지 자연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神을 모시는 제단마저 부수면서 수색해 봤지만 그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이겼다고 생각한 그 순간 인간들은 가장 불쌍한 패배자가 된 것이다.
2) 신학의 가치
신학을 가지고 神에 관한 학문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옳다고 볼 수 없다. 신학이 제대로 복음의 의미를 지닌 신학이 되려면 인간의 호기심이나 충족시키는 관념적 神論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복음적 가치를 지닌 제대로 된 신학을 정의하자면 성경을 해석하는 학문이어야 한다. 계시에 관한 학문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계시 자체의 개념이 추상적 신개념에서 도출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성경이 유일한 계시임이 선행되지 않으면 신학은 붕괴되고 인간의 이성에서 나오는 철학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성경이 유일한 계시라는 사실이 신학의 유일한 전제가 된다. 물론 이 전제를 비판할 수 있는 전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기에 성경의 무오는 필연적이다. 즉 성경이 무오 함이 증명되어서 무오 한 것이 아니다가 전제가 되는 게 아니라 성경이외에 또 다른 전제를 세우지 않아야 하기에 성경은 오류가 없이 완전무결하다.
신학의 가치란 달리 말해서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의 가치이다. 성경으로 인해 인간세계의 모든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다. 이 계시의 핵심은 바로 메시야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곧 인간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평가가 된다. 세상에 대한 무가치성을 선언하는 것이며 완전함에서 내려다 불 때 부정(否定)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 있는 죄를 부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세운 종교형태든 정치형태든 그 어떤 것도 거부하신다. 따라서 십자가 이후도 이 계시의 적용을 받게 된다. 인간이 세운 그 어떠한 교회도 부정되고 그 어떠한 나라도 부정된다. 하여튼 인간역사 자체에 대한 전면 부정이며 거부이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되지 않고 부정되지 않는게 하나 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존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 그래서 만약 교회론을 접근하려면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원리와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령론이다. 그리고 성령론은 기독론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독론에서 출발한 교회론은 기존의 교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지상에 있으면서 망하지 않는 유일한 단체이며 실체이다.
신학의 가치는 교회를 위해서 존속된다. 지상에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봉사 수단으로 신학이 존재한다.
신학이 교회를 세우는 과정은 교회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세상을 평가해야 한다. 신학은 세상을 설득해서 교회되게 하는게 아니다. 세상을 고발하는데서 출발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참된 은혜에 참여하고자 빈몸으로 나오게 만드는 요인을 유발시키는 것이 바로 신학이어야 한다.
신학은 인간에 대한 고발과 인간세계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차야 한다. 동시에 신학은 인간 학문에 대한 거침없고 고발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런 식으로 전개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한계를 느끼고 자체적으로 고발하는 것과 성경이 철학을 고발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철학이 자체적으로 비평하는 것은 왜 좀 더 인간의 발전과 존속을 위한 긍정적 학문이 되지 못하느냐에 대한 질책이다. 인간이 인간을 부정하면 절망밖에 남는 것이 없다고 자체적으로 검토하고 반성해 보는 것이다. 오직 인간을,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학문이기를 원해서 비평한다. 그러나 신학의 철학 비평은 다르다. 신학의 비평은 인간의 죄성과 악마성이 어떤 형식으로 변장해서 나오는가를 살펴 그 정체를 폭로하는데 있다.
신학의 가치는 인간의 실패에 대해 근원적 해답을 제시해준다. 인간나라의 궁극적 붕괴 원인을 인간들에게 알려주는 선지자 역할을 하는데 가치가 있다. 교회 안에 국민이 다 들어있다 할지라도 교회와 함께 인류가 왜 멸망하는지를 알리는데 신학의 본래의 목적이 있다. 동시에 신학이 있음으로 인류는 희망을 갖는다.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 자신의 자비와 사랑을 은혜라는 형식으로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철학의 종말이 신학의 시작은 아니다. 인간이 멸망하지 않는한 철학도 없어지지 않는다. 철학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존속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철학이 그들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신학의 시작은 철학이 멸망하기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다만 투쟁관계에 있을 뿐이다.
만약 신학이 교회의 시녀 역할을 한다면 이는 신학이 아니라 종교철학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신학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봉사하지 가시적인 교회를 위하여 봉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이 가시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계시도 사실은 그 가시교회 안에 있는 신실된 그리스도의 몸을 찾아내기 위한 선교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신학의 불일치성이나 다양성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교회라는 권위있는 단체에서 최종적인 옳음과 그름을 판가름해 주어야 되지 않을까? 신학의 불일치가 공동체의 불화를 야기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학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나는 과정에서 자신의 완전 성숙을 주창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된 형제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택한 자 같으면 구원받을 만한 받은 지혜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 형제의 장래까지 인간이 확정지울 수는 없다. 다만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 따라 사랑으로 옳고 그름으로 충고할 뿐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하심을 기대하고 말이다.
이런 학문적 자세 또한 바른 성경적 계시가 된다. 그러나 확신이 없으면서 남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신학의 정도에서 벗어난다.
어쨌든 신학은 이 세상의 유일한 빛이 되는 학문이다.
3. 결 론
절망했다가 다시 오뚝이처럼 희망을 품고 일어서는 것이 인간의 역사였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한치 앞도 못 보는 맹인이다.
인간을 이런 맹인으로 만든 것이 바로 악마이다. 그러나 인간의 서적에는 악마가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악마는 인간들의 다정한 친구요 우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직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장래를 약속해 준 친구 악마가 있기 때문이다.
악마는 인간들에게 역사의 발전을 부추기고 격려한다. 용기를 북돋워 준다. 끝까지 그리스도를 의존하지 말것을 잊지 않고 순간순간 당부한다. 인간의 능력의 무한을 강조한다. 인간의 지혜와 재능에 끈이 없음을 가르친다. 그리고 행복을 보증한다. 인간은 이런 악마로 부터 벗어날 길을 없다. 인간 자신이 마귀에 대한 더 친근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신학도 인간과 길을 같이 간다.
쉴 새 없이 마귀의 존재와 사역에 대해 설명해 준다. 속아서는 안된다고 말해 준다. 인간은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끝장났다고 알려준다. 회개하고 하나님 편에 서기를 당부한다. 세상에 대해 더 이상을 미련 갖지 말기를 요청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다가옴을 약속해 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회개치 않는 자에게는 두고두고 후회할 저주와 형벌이 있음도 잊지 않고 선포한다. 여기에 신학의 존재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