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의 로마서연구 -구속자적 관점에서 제1장 서론 1-1 문제 제기 1-2 연구 목적 본 연구의 목적은 금세기의 최첨단 문명 사회를 살고 있는 인류에게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구속에 관한 이해를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서 폭넓고 깊이 있게 연구함으로써,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적용되었던 복음의 보편성, 즉 구속에 관한 개념과 구속사를 오늘의 문명 사회를 살고 있는 인류와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게 어떻게 적용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그 목적이 있다. 1-3 연구 방법 및 범위 본 연구의 방법은 현재적 종말을 살고 있는 인류와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구속에 관한 이해, 삶에 적용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는 성서를 기본 택스트로 하고, 구속에 관련된 문헌들을 통해서 다양한 신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복음주의 입장에서 그리고 자유로운 견지에서 비교, 분석, 정리하고, 논자의 견해를 구속의 현재성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2-1 구속의 개념 2.1.1 어원 구속의 일반 통념상 개념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비에서 도와주고 건져주는 것", 혹은 "위험에 빠져있는 사람을 구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여러 종류의 어려움과 문제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정신적이고 각종의 사고,질병,재앙,절망에서 생명을 보호하고 구출해 주는 것 등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림자와 같은 역할을 해 왔다. 다시 말해서 구속의 완성인 메시야에게 초점이 마추어져 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연결되고 있다. 논자는 바로 이런점에서 구약 성경을 이스라엘의 선택된 백성의 역사에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초점을 두고 구속사적인 견지에서 구약 성경에 약속된 언약을 중심으로 구약에 흐르고 있는 구속의 개념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혈통적인 민족적 사역에서 통일성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새 언약을 연합시키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의해 약속된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앞선 사역과 무관한, 구별된 언약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새 언약은 먼저 수립된 언약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이다. 창조 당시 세워진 언약과 하나님의 구속 언약과의 관계가 문제시 되기는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써 창조주에 대한 의무를 가지는 것으로 존재해 왔다. 이처럼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의 계속적인 관계를 볼 때 인간에 대한 최초의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1.3 신약;언약의 성취를 중심으로 이제 예언자들이 예언한 새 언약 즉 완성된 언약을 신약 성경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앞에서 논자는 구속의 개념에 대하여 어원적인 접근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적인 접근을 통해서,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구속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기에는 충분할 만큼 구속에 대한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2-2 구속사란? 구속사는 모든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사건들과 직접 결부되어 있다는 신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그리스도 안에 집약되어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속에서 전개 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고, 구속사 이해를 통해서 본 논고의 주제에 자연스런 접근을 하고자 한다. 2.2.1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 역사란 우리의 언어로 구별이 분명하지 않으나 독일어에 있어서는 역사란 말이 두 가지 낱말이 있다. Historie와 Gechichte이다. 여기서 Historie는 세계사나 민족사, 정치사나 경제사와 같은 사람이 관찰하여 헤아릴 수 있는 "사학적 역사"요, Gechichte는 사람이 관찰하거나 헤아릴 수 없으되 실제에 있어서는 깊은 데에서 엄연히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서의 역사이다. 2.2.2 구속사(Heilsgeschichite)의 이해 많은 신학자들은 구속사"라는 표현에 대해 비동정적이다. Heilsgeschichite란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할 수 없고 그리 좋은 표현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신약 어디서도 "구속사"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신약에 나오는 희랍어는 세속적인 용법에서 계획, 관리, 가사(家事)라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능동적인 뜻으로 "집안 일을 돌봄"이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말은 더 좋은 표현이 없어서 "구속사"라고 부르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영어로 번역하면 management of a household; task, work, responsibility; (divine) plan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 말은 바울이 로마서와 고린도서에서 구원의 신적인 계획에 대하여 그가 받은 초자연적 계시에 대해서 말할 때 사용한 신적인 신비의 개념과 관련되는 경향이 있다. 제3장 로마서를 중심으로 본 구속사 이미 앞에서 구속사의 개념과 구속사 이해를 통해서 개괄적인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외형적인 측면보다는 구체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구속사를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죄의 선언과, 칭의, 성화, 정죄 없음, 영광 순으로 다루려 한다. 3-1 죄의 선언(In Sin) 구속이란 긍정은 죄악이란 부정에서 시작된다. 신적 부정이 없는 곳에 신적 긍정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1장 18절-3장20절에서 인류가 죄 아래 놓여 있음을 선언한다. 먼저 그는 이방인의 죄를 종교적인 죄와 도덕적인 죄로 나누어 역설한다. 그리고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전 인류의 죄에 대하여 선언을 한다. 3-2 칭의(Justification) 바울은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언을 하고, 율법을 떠나서 하나님의 義가 나타난 것,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그리고 이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義니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 義를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의는 아니다. 즉 사람의 자력으로서 달성한 의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義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에게 주셔서 그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3-3 성화(Sanctification) 성화는 구속 적용의 한 부분이다. 성화는 구속 적용의 첫 단계는 아니다. 즉 성화는 유효적 소명, 중생, 칭의, 양자와 같은 다른 단계를 전제로 한다. 이 중에서 성화와 관련된 두 가지 단계는 소명과 중생이다. 성화는 "우리 안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소명과 중생은 그들의 즉각적인 효과를 "우리 안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소명은 우리 의식을 향하여 우리의 의식에서 응답을 끌어낸다. 중생의 그 자체가 우리 의식 속에 신앙과 회개, 사랑과 순종을 일으키게 하는 갱신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소명이며, 실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성화에 의해서다. 중생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 지고, 백성들은 성령에 의해 살게 된다. 3-4 정죄 없음(No Condemnation) "성서를 한 개의 지환으로 본다면 로마서는 그 보석이고 제8장은 그 보석의 반짝이는 첨단이다"(Philip Jacob Spener)고 하였다. 이제 7장을 통과하여 8장에 들어서는 사람은 이미 고뇌의 밤이 지나고 광명한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는 신선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느듯 바울의 구속사의 정점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논자는 모든 사람이 죄 아래 놓여 있다고 하는 선고로 인하여 참으로 인류의 실존이 참으로 비극이라고 생각하고 참으로 무겁고 우울함 속에서 출발했는데,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 오는 동안 이 어둠의 겁풀을 하나씩 제거하는 작업을 통하여 영화를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의 빛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로마서 8장1절의 이제는 다시 정죄 없다고 하는 이기는 자들이 받게 되는 선언을 통하여 본질적인 자유함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연약하여 육신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정죄는 칭의의 반대 개념이다. 칭의는 정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본 서신의 주제인 칭의는 불경건한 자를 완전히 그리고 다시 취소할 수 없이 의롭다 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칭의는 모든 정죄가 취소된 사실을 내포한다. 이것이 1절의 사상이다. 부정적인 표현은 강조를 띠고 있다. "그러므로"라고 하는 말이 이렇게 완벽하게 정죄가 없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말한 문맥에서 나온 추론임을 뜻한다. 만일 사도가 죄책에서부터와 죄책이 부과하는 정죄에서부터의 자유만을 단지 칭의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 땐 우리는 특별히 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서신 중에서 그런 추론의 기초를 발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정죄에서부터의 자유가 죄책에서부터의 구출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부터의 구출까지 포함된다고 본다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바로 앞의 문맥과도 아주 적절하게 관계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장의 투쟁에서 명백히 나타난 것과 같이 죄 및 육신의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는 만큼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까닭에 신자의 소유물이 되어진 승리를 감상해 보는 것은 더욱더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3-5 영화(Glorification) 바울은 신자의 다섯 번째 행복 곧 미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자격 요건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는 생명이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말로 정의되고 있다. 하나님의 후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 자신께서 그들을 위해 세워 놓으신 유업의 후사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치만 유업의 범위는 더 광대하다. 그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곧 유업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사상을 지지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보상은 무엇보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받은 사실이며, 여호와께서 그의 유업의 몫이 된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위에 부여된 유업을 그리스도와 함께 소유하게 된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친교를 통하여 영광의 상태에서 바라본 측면이다. 제4장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 4-1 세상 백성으로서 우리는 지금이라는 현재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벗어날 수 없으며, 세상의 권력의 주체이며, 우리의 삶의 울타리인 국가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속해 있는 현실이 설령 참혹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부인 할 수 없으며,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환경에서 신앙을 통하여 이와 같은 요소들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라고 하는 영역에 속해 있으며, 지역적으로 국가라고 하는 민족의 공동체 속헤 존재하며, 작개는 가정이라고 하는 환경속에 내(吾人)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세상 권세에 대하여, 개인의 삶에 대하여 신자로서 뿐만 아니라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며, 특별히 신자로서 빛과 소금의 삶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신자로서, 세상에 속한 백성으로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 4.1.1 세상 권세에 대한 의무와 책임 우리는 이제 관원들과 우리를 다스리는 권세자들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 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시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4.1.2 개인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 논자는 앞에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에 대한 세상 백성으로서의 실천적인 삶의 태도로서 사랑을 실천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취급하였다. 여기에서는 현존의 삶 속에서 미래의 천국 시민으로서의 선취된 실존의 삶의 모형으로써 교회 중심의 의무와 책임,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성령의 열매 등에 대하여 천국 시민으로서의 기본 자세에 대하여 논하려고 한다. 4.2.1 교회 중심의 의무와 책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신앙 공동체에 속하여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노력을 한다. 그리고 가시적인 교회 또는 불가시적인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봉사와 교육과 연보로 신자의 교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수행한다. 4.2.2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성경은 전 세계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이 전 세계의 창조주 사상과 하나님이 전 세계의 통치자이기에 하나님을 숭배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별은 만민에 대한 관심을 배제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주변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이 자기 나라 속에 성육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이스라엘 역사는 주변 국가들의 눈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표본적으로 역은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적이다. 4.2.3 성령의 열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가 되신다. 또한 성령은 인격자로서 지적인 요소와 정적인 요소 그리고 의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은 유일한 영이시다. 성령은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의지적 행동과 정신적 활동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신다. 그리고 구원받은 천국 시민으로서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참 신앙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성령 안에서의 삶을 통하여 신령한 열매 및 윤리적 열매를 보아 가늠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자는 무엇보다 성령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 성령의 열매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5장 결론 5-1 요약 본 논고는 몇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출발했다. 현대 사회의 특성상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중심인 구속에 대한 위기의식, 구속에 대한 일반적인 보편적 이해 결여, 특히 기독교 신앙 공동체 속에 있는 성도들의 구속에 대한 본질적 의미의 이해 결여, 현대 종교의 특징인 종교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범신론적 구원관에 의한 기독교의 구원관의 유일성 파괴 등이 논제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본 논고의 주제문으로 로마서 본문을 중심으로 바울이 제시한 구속의 교리를 구속사의 흐름에서 접근하여 논자의 견해가 투영된 점층적 구조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는 유죄 선언 즉 죄의 선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롭다 하심 즉 칭의,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심에 의하여 중생 한 신자들이 나아가야 할 성결의 생활 즉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성화, 성화의 삶을 통해서 얻게 된 무죄 선언 즉 정죄 없음, 구원의 완성을 통하여 얻게 될 최종의 목표인 영광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본문을 중심해서 여러 신학자들의 주석을 참고하여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바울의 구원 선포가 종말의 미래의 현재성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이렇게 구속받은 성도들이 성숙한 신앙의 삶을 위해 나아가야 할 실천적인 문제를 세상 백성의 입장에서 국가에 대한 구성원으로서의 의무와 책임, 개인으로서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그리고 천국의 시민권자로서 교회 중심의 예배 생활, 봉사 생활, 교육을 통한 제자의 생활, 연보를 통한 구제하는 생활 등을 살펴보았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위임령을 실천하기 위한 복음 선포와 성령 안에서 열매 맺는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성경을 중심으로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다루었다. 5-2 비판 및 제언 바울의 구속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난해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바울이 희심한 후, 그의 사역 말기에 로마에 있는 신앙 공동체의 신앙 훈련을 위하여 이 서신이 구속의 교리를 중심으로 쓰여졌는데, 그 핵심은 바울 자신의 경험에 의한 신학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시대도 다르지만 바울과 똑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바울이 본래 의도했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는 방향성을 가지게 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종말의 미래의 현재성에서 이 구속사 교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어려움이 있다. 이제 본 연구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성을 두 가지만 제시한다. ☞ 참고문헌 1. 성경류 BIBLIA HEBRAICA SUTTGARTENSIA. 2. 사전류 Com-Bible Dictionary. 3. 주요 신학 서적류 4. 주석류 |
(神學論文)
차례 Ⅰ. 서론 /1 Ⅱ.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성 /3 Ⅲ. 본문의 해석 /23 Ⅳ. 결론 /42 ※ 참고문헌 /44
Ⅰ. 서론 바울의 구원교리에 대한 해명은 무엇보다 인간과 세계가 죄 아래 떨어져 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의 필요성을 요청하고 있는 그 방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요구한다. 바울의 구원교리를 보다 자세히 분석하면 이 세상과 이 세대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악과 비참과 그리고 죽음의 세력들을 언급함으로써 죄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비(非) 중생자들의 삶의 전체성을 가리키고 있다.
논제와 관련하여 1:18이하는 로마서의 구체적인 본론에 해당된다. 그 본론 중에서 1:18-3:20까지가 하나의 큰 단락을 이룬다. 이 단락의 주제는 온 인류가 죄 아래서 사망 아래 갇혀 있음을 말한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처하게 되었음을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한 세상에 대해서 바울이 논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안에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기 이전의 구약의 역사와 이방인의 역사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졌음을 바울이 강조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에 새롭게 개입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대해서 증거 한다. 이전에 나타냈던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도래해야만 되는 형편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3:21이하에서 드디어 이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의가 도래했음을 극명(克明)하게 보여준다.
Ⅱ.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성 제1절. 하나님의 의 바울의 의인론(義人論)은 그것이 발현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문제를 의인론이라는 올바른 사상적 관점을 근거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자기 권리를 침해당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편에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의'( )라는 용어는 단지 하나님의 속성만을 나타내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내적이며 현실 변혁적인 행위명사이며 동작명사이기도 하다. 의(義)는 대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은 세계(世界)이다. 하나님의 의는 의롭지 못한 세계를 향해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는 사건이며, 심판의 사건이다. 바울은 의롭게 됨의 근거를 '하나님의 의'에서 찾는데 여기서 의(義)라는 명사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의 신비를 나타내는 정적(靜的)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동적(動的)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법정적'(法廷的, forensic)인 의미로 사용한다. 구약성서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왜곡된 인간관계를 정상적인 인간관계로 회복시킨다. 1. 칭의 2.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칭의 3. 칭의에 의한 은택
1. 인간의 참상 2. 죄의 만연 3. 참상의 본질 4. 참상의 결과 제3절. 바울에 있어서 인간과 죄의 관계 (1) 육체 (2) 몸 (3) 영
제1절. 본문개관 로마서 1장 18-25는 자연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7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울은 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심리학적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으로 하늘로부터 계시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진노는 불의에 대해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 불의는 하나님의 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앞의 17절과 18절은 반 명제적인 병행을 이룬다. 이유를 설명하는 "가르"( )는 16절과 17절에서 세 번 반복된 가르와 상응하며,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문장 이행을 위한 접속어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의 필연성은 그것의 실현과 더불어 동시에 드러난다. "그러나 하늘로부터는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나게 되는데 불의한 가운데 거짓 진리를 가진 모든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들에 대해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사람들 속에 뚜렷이 있으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이시지는 않으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창세로부터 만드신 만물을 통해 나타내 보이셔서 확실히 알게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변명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참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으며 허망한 생각만을 하게 되고 미련한 마음은 더욱 어두워지기만 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혜 있는 자로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썩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의 형상, 즉 사람, 금수, 벌레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롬 1:18-23). 사도는 이제 18절 이하에서부터 1장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떠난 인류가 얼마나 죄악가운데 있는지를 묘사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마땅한지를 말하고 있다. 17절에 나오는 "아포칼륍테타이"(' )가 18절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가 불경건한 자에게는 진노로 '나타나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오르게"( )를 번역한 '진노'는 인간의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질이다. 따라서 진노를 발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타락한 것들을 거룩한 것으로부터 영원히 분리시키는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는 천재지변을 통한 심판이다. 그러면 여기서 진노를 받게되는 불경건한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이는 사도가 특별히 이방 세계에 속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서 보편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할 것이다. 믿음의 도가 이방인에게 전해지기 전까지의 모든 이방인을 말한다. 제2절. 본문주석 1. 로마서 1:18 "가르"( )는 본문에 앞서 16절과 17절의 의미와 함께 17절 18절과 의식적으로 반명제적인 병행을 이루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18절에 나타나는 가르는 앞 절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가르와 상관되며 따라서 가르는 문장 사이를 연결하는 단순한 접속어가 아닌 16절과 17절에서의 이유를 18절 이하에서 설명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태초부터 인간에게 임한 이후로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나 다른 방법으로나 자신을 완전히 구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르는 지금까지 설명해 왔던 것들과 연결하여 전제된 상황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가르는 17절과 18절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의' 개념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그들에게 가르를 통하여 배경으로 나타내면서 본문을 이끌어 낸다.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단순히 내면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를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일반계시의 방편인 자연 즉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할지라도 이곳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창조의 영역 안에서라면 무엇이나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하게 충분히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알리시는 모든 선포를 그가 위의 제한된 능력에 적응시키는 것처럼, 인간들도 자신들을 한정시켜야 하는 어떤 한계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로마서 1:20 "창세기로부터"라는 것은 시간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창세 이래'로 라고 할 수 있다. 즉 아주 오랫동안 창세로부터 인간에게 보이시고 그들 마음속에 부정할 수 없는 인상을 남기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언급이다. 바울은 세상보다 선행하며 우월한 하나님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께로 향한 창조를 의미하고 있다. 4. 로마서 1:21 하나님을 "알되"( )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분명한 설명이다. 바울이 아덴에서 말했던 것처럼(행 17:27) 비록 타락했지만 어떤 신을 열망함이 없는 자, 즉 진정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돌아가기를 추구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이 찾으신 일을 없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자신에 대한 지식을 넣어 주셨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5. 로마서 1:22 "파스콘테스"( )는 자기주장을 말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한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는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표본이다. "오모란데산"( )은 "모라이오"( )의 과거 수동형이므로 '어리석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6. 로마서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 말씀은 시편 106편 20절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을 가리키며 예레미야 2장 11절의 이스라엘이 주를 다른 신들과 바꾼 것을 말한다. 바울의 사상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우상의 형상을 세우고 그를 숭배함을 말한다. 바울은 역사맥락에 대한 통찰력을 보인다. 따라서 이 교도의 현실은 광야세대에 의한 황금 송아지 숭배와 관계를 갖게 되며, 창조와 출애굽, 타락과 이스라엘의 죄의 전통들을 상호 결합시켰으며, 하나님의 영광은 여기서부터 상실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바울은 이런 전승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시편전승과는 달리, 그러나 랍비적 해석 및 70인 역의 독립과 일치하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한다. 이 '영광'은 원인간에게처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영광에 대한 몫으로서 부여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아담처럼 죄의 타락을 반복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과 바꾸어 버렸다. 여기에서 사람들의 미련함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내고자 소원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조잡하고 비논리적이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썩어질 사람의 모양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의 위엄을 더럽혔다. 왜냐하면 바울은 죽을 인생을 불멸하시는 하나님과 대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썩지 않는 영광을 인간의 바로 그 비참한 상태와 대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그처럼 큰 과오로도 만족하지 않고서 가장 비열한 야수의 수준에까지 내려가 그들의 우준 함을 보다 더욱 분명하게 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잃어버린 신성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이러한 괴상한 노력들에 분개하며 경멸감을 나타내고 있다. 7. 로마서 1:24 8. 로마서 1:25 제3절. 본문의 논증적 검토 본문의 말씀은 로마서의 서론(롬 1:8-17)이라 말할 수 있는 부분 즉 바울이 로마 교회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와 바울이 로마 교회를 그처럼 방문하려고 애쓰는 이유와 로마서의 주제에 대한 대 선언의 말씀이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문안한 후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자신의 계획을 피력한다(롬1:1-15). 이어서 바울의 복음의 주제인 복음은 믿음에 의해서 얻는 의로움(롬 1:16-17)이라고 요약한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정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 후 다음과 같은 주제를 제시한다(1:16-17)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義)의 선물로서 죄로부터의 구원을 주셨다는 복된 소식이 바로 그 주제였다. 로마서의 서두와 서론에 이미 바울이 로마 교회에 증거 하고자 하는 주제, 즉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이 잘 반영되어 있었음을 상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감추어졌다가 이제 드디어 아들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 즉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벌써부터 로마서 서두와 서론에서 언급되었다. 1. 보편적 죄성에 대한 반론 바울은 로마서 1:18 이하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의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1:18-32에 있는 이방세계에 대한 고발에서 바울은 자연을 통하여 주어진 계시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이방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바울은 오직 "불의로 진리를 막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사람들만 언급하고 있다(1:18). 그들은 "핑게를 댈 수 없다"(1:20).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였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1:21). 참 된 하나님 한 분을 버린 후,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사색에 빠져서 짐승과 사람의 형상을 숭배하기 시작했다(1:23).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또한 영화롭게 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을 예배하고, 복을 주시는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높이는 것으로 끝났다(1:25). 로마서 1:18-2:29에서 바울은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죄인이며 또한 핑게치 못할 것임을 명백하게 말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지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으며, 또한 문맥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죄인들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게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 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고 한다. 여기서 바울은 도덕적 기준으로 1:18-32에 묘사되어 있는 행동을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바울이 판단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결점은 그들이 남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일을 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도덕적 가치 기준으로 로마서 1:18-32에 묘사되어 있는 행동을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바울이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자 하는 이유는 그가 "같은 일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cf. 롬 2:1). 바울 역시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여김을 받았다(롬 3:21-26). 2. 인간의 파멸 3. 하나님의 진노 4. 맺음
로마서 1:18-2:29은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1:18-32에 있는 이방 세계에 대한 고발에서 바울은 자연을 통하여 주어진 세계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이방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인간의 죄성의 근본적인 문제는 '불의로 진리를 막아 버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는 데 있다. 도대체 그들은 핑계를 삼을 데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 곧 철저히 나타나게 된 저 이탈은 즉시 더욱 분명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피조물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 그때 그때의 혼동, 그리고 얼마간은 유희적인 혼동일 수 있을 것이며 한층 더 피상적일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 진리의 그득함 속으로 해소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그 가능성이 주어지면 진리를 거짓과 맞바꿔 치게되는 대단히 심각한 결과가 곧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드리워진 안개는 먹장구름이 되어 양극 자체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든다. 즉 우리가 신이라고 칭하는 저편에서 종종 불리어지는 마지막 비밀이 남아있다고 해도 지고의 구체적인 그 비신은 승리하고 만다.
1. 국내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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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論文) 人間의 普遍的 罪性에 관한 論證的 檢討 -롬 1:18-25 Ⅰ. 들어가는 말 다음 글은 사도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인간은 구원받는다(롬 1:16-17)는 것을 말하고 곧바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소위 "보편적 인간의 죄성"에 대하여 준열하게 꾸짖고 있는 내용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본 성경연구는 바울의 인간론, 의인론, 그리고 죄론으로 이어지는 사도바울의 가르침이 시리즈로 연속되는 강론이다.
본문의 말씀은 로마서의 서론(롬 1:8-17)이라 말할 수 있는 부분 즉 바울이 로마 교회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와 바울이 로마 교회를 그처럼 방문하려고 애쓰는 이유와 로마서의 주제에 대한 대 선언의 말씀이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문안한 후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자신의 계획을 피력한다(롬1:1-15). 이어서 바울의 복음의 주제인 복음은 믿음에 의해서 얻는 의로움(롬 1:16-17)이라고 요약한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정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신앙에서 신앙에 이르는 신의 '의'의 계시가 복음에서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울은 우선 그리고 동시에 신 앞에서의 인간의 자기 상실을 거론하고 전개하는 방식으로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로마서의 말씀대로 이 계시는 생명에로의 진의 부름, 즉 신의 율법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핑게'하지 못하고 그의 분노가 그들 위에 임한다는 데서 분명해진다(롬 1:18:21). 복음의 휘황한 빛에서 율법 아래의 인간의 존재는 신 앞에서의 자기 상실로 드러난다. 바울이 율법의 문제를 거론할 때는 언제나 복음의 이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지금껏 어떤 유대인 혹은 그리스인에 의해서도 그렇게 심오하게 철저히 거론된 적이 없던 인식, 바로 이 성스럽고 선한 율법이 실제로는 이미 구원과 생명에 인도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부각된 것이다. 이미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작용임을 뜻하였다. 그리하여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그들이 신 앞에서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1. 普遍的 罪性에 대한 反論 바울은 로마서 1:18 이하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의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1:18-32에 있는 이방세계에 대한 고발에서 바울은 자연을 통하여 주어진 계시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이방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바울은 오직 "불의로 진리를 막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사람들만 언급하고 있다(1:18). 그들은 "핑게를 댈 수 없다"(1:20).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였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진노 4. 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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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교회이해에 대한 성령론적인 반성 -들어가는 말- 필자는 이러한 뿌리 찾기의 한 부분을 위해 바울의 교회 이해를 살펴보려 한다. 특별히 바울의 교회에 대한 성령론적인 시각을 확대하면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교회 자체가 철저하게 성령에 의해 생겨진 종말론적인 영적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교회 이해에 대한 성령론적인 접근이 가능할 때 비로소 기독론에만 얽매어 있는 정태적인 교회론을 벗어나 보다 역동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론에 대한 이러한 접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대한 이해가 그 동안 기독론에 의해 흡수되어 제대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거나, 아니면 일방적인 영적 신비주의 운동의 사역으로 내몰렸고, 그렇지 않으면 문화 철학적인 기의 명상운동이나, 또는 사회적인 투쟁 영성 운동으로 이해되어 왔고, 그와 같은 성령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교회론적인 접근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통전적 이해가 결여된 채 기독론에 편향된 접근의 경우, 교회론의 교의적 근거에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으나 교회의 역동적이며 유기적인 틀을 부각시키지는 못했으며, 영적 신비주의의 틀에서 본 교회론의 경우, 교회의 은사론에 대해서는 막대한 관심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통전성을 제시하는 데는 미흡했다. 반대로 성령의 인격과 능력을 단지 일반적인 기철학으로 축소시키거나, 사회 정치적인 저항 영성으로 이해하는 경우, 그것은 신앙 공동체가 지닌 영적인 계시의 자리와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공동체성을 상실케 하는 우려를 낳았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교회론적인 문제는 참으로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영적 신비를 강조하면, 사회,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는 도덕성의 결여로 나타날 뿐 아니라, 신앙이 개인화 됨으로써 공동체성이 파괴당하는 결과로 나타났으며(물론 이러한 경향성은 교회 안에 나타난 신비적 현상이나 결과를 복음의 영적인 계시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단지 그 현상과 결과를 신비주의적으로 몰고 간 데서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대로 사회, 정치, 문화적인 영성을 드러내려 하면(원시기독교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성은 뚜렷하게 대두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사역에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영적인 계시의 자리와 신비는 소홀히 취급되는 경향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양자를 적절한 차원에서 접합시키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반된 신학적 경향성이 그 동안 한국 교회의 교회론적인 방향을 주도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이미 이천년 전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특히 바울의 교회에서 이러한 문제가 심각하게 노출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인식과 사도로의 부르심, 그리고 선교 비전이나 능력의 부여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보존과 유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있어서 필요한 인격적이고 실천적인 능력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세운 교회의 현실은 성령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교회론적인 본래의 특성을 상실하고 공동체 없는 개인주의적 신앙양상으로 변모되든지, 아니면 영적인 현상과 그 결과에만 매달려 유대인의 율법적 업적주의를 그리스도인의 영적 업적주의로 바꾸어 버리는 특이한 현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고린도 교회의 경우에 성령이 십자가에 달린 분의 영인 것을 망각하고 도리어 그 영을 사물화함으로써 자기 자랑을 하고, 분파하며, 서로 적대하는 공동체의 심각한 갈등과 분열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바울이 의도했던 성령론적인 교회상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또한 기독론에 근거하는 교회를 왜 바울이 성령론적으로 재해석하며 성령의 사역을 강조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의 교회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교회 이해에 대한 성령론적 접근과 반성이 중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에게서 성령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묶는 힘이며, 개인과 공동체를 엮는 힘이고,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힘으로 교회를 진정으로 교회되게 하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1. 바울의 교회론은 그의 다른 신학적 주제보다 훨씬 더 상황적인 특성을 잘 드러낸다. 그것은 바울의 편지 대상이 그가 직접 세운 교회이거나(고린도교회 등), 아니면 그가 선교적, 목회신학적으로 관심을 깊이 두었던 교회(로마교회 등)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터전 위에 세워진 교회 가운데 발생한 실제적인 문제들은 바울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로써 어떻게 세상 속에 존재해야 할 것인가를 신학적, 목회적으로 반성케 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편지는 그 자체가 교회를 설립한 사도와 지도자로서의 바울에게 선교와 목회활동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기독론,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행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교회론을 진술하면서 기독론적인 접근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기독론을 넘어 성령론적으로 확대 해석하면서 교회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앙 공동체가 겪는 실제적인 주요 문제들이 성령 경험을 통해서 나타난 것들이고,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은 오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가서 바울은 그 모든 문제들이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극복 될 수가 있다는 확신을 지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교회론을 다루면서 무엇보다 성령과 그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시하려 하고 있다(바울에게서 성령은 독립적으로 "영"(pneu/ma)으로(갈 3,2; 5,25; 롬 8,26), 또는 "하나님의 영"(pneu/ma qeou/)으로(고전 2,11.14; 3,16; 롬 8,9), 또는 "거룩한 영"(pneu/ma a[[gion)으로(고전 12,3; 롬 5,5), 또는 "그리스도의 영"(pneu/ma Cristou/)으로(롬 8,9; 빌 1,19) 사용된다. 이는 서로 교환 가능한 용어들이다. 무엇보다 이 영은 인간학적인 의미에서의 "영"(pneu/ma: 고전 7,34; 고후 7,1 등)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종말론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닌 것(살전 1,5; 갈 3,2-5; 고전 12,7이하; 롬 15,19)으로 하나님의 새 언약의 선물이다(고후 3,6; 참조 롬 2,29; 7,6; 8,15이하). 참조 J. Kremer, EWNT III, 279-291). 2. 바울의 교회론은 무엇보다 표상적 언어를 통해 묘사되면서 그 상황적 맥락에 나타난 논쟁적인 특성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참조 고후 6,16; 롬 9,25-26; 갈 6,16)으로서의 교회이며, 두 번째는 "성령의 전"(참조 고전 3,16-17; 롬 9,25-26)으로서의 교회이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몸"(참조 롬 7,4; 12,4-5; 고전 10,16-17; 12,12-26; 골 1,18.24; 2,16-19; 3,15; 엡 1,23; 4,4-6; 5,23)으로서의 교회이다. 교회가 지닌 이러한 각 표상의 고유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 세 표상들을 묶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거주, 그리고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백성: 바울은 구약 인용문이 나타나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백성"(롬 9,25f=호 2,25; 롬 10,21=사 65,2; 롬 11,1f=시 93,14(LXX); 롬 15,10=단 32,43; 고전 10,7=출 32,6; 고후 6,16=레 26,12)이라는 용어와 더불어 "이스라엘"(롬 9,6-13; 갈 6,16: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를 교회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이라는 표상이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교회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용어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약속을 받은 신앙 공동체와 관계되어 있는지를 교회론적으로 말해 주려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설립한 이방 교회들을 향해 구약의 언약 백성에게 붙여진 용어를 다시 구속사적인 전망에서 도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거룩한 자들"(롬 1,7; 고전 1,2; 엡 1,1),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할례자"(롬 2,28 이하; 빌 3,3), "아브라함의 자손"(롬 4,1 이하; 9,7 이하; 갈 3,7-8.29),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고전 3,16; 고후 6,16) 등이다. 바울은 이 개념들을 이방 교회에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성령의 약속을 통해서 구약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신분과 유업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성령의 전: 성령의 전으로써의 교회의 표상(고전 3,16-17; 6,19 참조 벧전 2,5; 엡 2,21-22; 고후 6,16)(묵시문학적 전통에서 하나님께서 종말에 친히 세우실 새롭고 완전한 성전을 기대하고 있다: 겔 37,26-27; 사 44,28; 희년서 1,17.29; thHen 90,28-29; 91,13; Sib 3,290; Tob 14,5; 11QT 29,8-10 등; 참조 O. Michel, ThWNT V. 139ff)은 특별히 하나님이 임재하는 거룩한 장소로써의 교회 이해를 부각시켜 준다. 원시기독교회는 성령의 종말론적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행 2,16 이하). 따라서 그들의 그러한 소망과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마침내 손으로 짓지 않은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는 말씀과 잘 어울리고 있다(참조 막 14,58). 성령은 종말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참조 벧전 2,5). 따라서 원시기독교회는 당시 아직 파괴되지 않았던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신해서 자신들이야말로 성령의 임재함으로 말미암아 종말적인 새 창조 과정에 서 있는 새 성전이라고 이해했다(참조 W. Schrage,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VI/1 305).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거함이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백성에게 주어진 복(갈 3,14)임을 말해주고 있다. 3)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의 출처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다양하다(참조 E. Schweizer, ThWNT VIII 1024-1091; H. Merklein, Entstehung und Gehalt 319-344). 그러나 그 중에 세 가지 측면이 중요하다. 첫째는 성찬 전승이고, 둘째는 아담-그리스도의 모형론이며, 셋째는 우리를 위해 죽음에 넘기시고 부활하신 인자 메시야의 표상(참조 단 7,13-14.22.27)이다(참조 F. Lang, "Das Verst ndnis der Kirche." 175-181; P. Stuhlmacher, Biblische Theologie des NTs. Bd I 358ff).
1. 교회의 탄생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때로 교회가 부활절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탄생했다고 간주하기도 하나, 그것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서 그 뿌리와 실체를 찾는 것이 더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K. Berger, Kirche. II 201-202; 물론 교회의 역사적 근원은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의 교회론적 어휘와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참조 김중은, "구약의 교회 - 신구약의 상관관계의 관점에서", {성경과 신학} 7(1989), 286-302; 강사문, "구약에 나타난 교회", {교회와 신학}, 30(1997년 가을호), 106-132).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사역이 원시기독교회의 전제이며 근거라 할 수 있다. 2. 예수의 "12 제자" 선택은 바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한 메시야적 사역에 그들을 동참시키기 위한 부름이었다(막 3,13-19; J. Jeremias, NT Theologie I 223-225;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98ff; G. Theissen, The Historical Jesus 216f에서 12명의 제자의 선택은 역사적으로 진정성 있는 표현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12제자란 옛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12지파를 상징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새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중심 인물들로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 비로소 하나님 나라 선포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예수로부터 부름을 받고 파송되었다는 사실이다(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더불어 귀신 축출과 병치유가 중심 사역으로 제시된다; 참조 마 10,1-16; 눅 9,1-6; 10,1-12와 눅 7,18-23; 11,20; 막 6,7-12). 따라서 12제자들은 이미 예수로부터 부름받은 순간부터 종말론적으로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도록 위탁받은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곧 종말에 심판주로 오실 인자로, 그리고 12제자는 새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우두머리로서 인자와 함께 심판할 특권을 지닌 자들이었다(마 19,28; 눅 22,29-30; 참조 단 7,9f). 그렇다고해서 하나님 나라의 특권이 단지 12제자들에게만 제한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지닌 이런 메시야적이고 종말론적인 특권을 현실에서 선취하는 자리로써 식탁 공동체를 베풀었으며(막 2,15-16; 눅 15,1-2; 참조 막 2,17.19; 눅 6,21; 22,30; 막 14,25; 사 25,6; 65,13), 이 식탁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자들은 비단 12 제자들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바리새인이나 쿰란 공동체와는 달리 예수는 사람들을 식탁 공동체에 초대할 때, 그 어떤 제의적 정결의식도 요구하지 않았기에(막 7,1-23) 종교적이나 사회적으로 제한받지 않고 누구나 이 식탁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었다(눅 14,12-24; J. Jeremias, NT Theologie I 173). 어떻든 여기서 확인되는 사실은 메시야주의의 변화이다. 예수는 12제자를 선택하고 파송함으로써, 메시야적 권위를 위임받게 됨으로써 전통적인 일인 메시야주의를 집단 메시야주의로 전환, 확대시켰던 것이다(참조 G. Theissen, The Historical Jesus 216). 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 죽음을 당할 것을 직면하면서 예수(참조 눅 13,32; 막 10,45 병행; 막 14,22.24 병행)는 제자들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인해 그들도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로까지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린다(참조 눅 6,22-23 병행; 막 8,34-35 병행; 막 13,9 병행; 누가 본문의 진정성에 대해서 참조 I. Marshall, The Gospel of Luke 252).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 예수가 시작하고 위탁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인 사역을 지속해야 할 것을 인식하게 된다(참조 눅 17,22-37; 18,8). 4.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의 교회로 전환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은 바로 안디옥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바울 교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축출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 곧 스데반 그룹에 의해 생겨진 교회였다(행 11,19-20). 따라서 그들은 신학적으로 율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예수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주님이며 그리스도라는 명백한 신앙 고백을 가지고 유대 회당 예배를 벗어나 독자적인 가정 교회의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결과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그들은 외부인들에 의해 "그리스도인들"(cristianoi,)이라고 불리게 된다(행 11,26; 이는 무엇보다 안디옥교회의 이방선교 때문이고, 또한 그들이 유대의 회당예배와 분리된 독자적인 모임 영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G. Schneider, EWNT III, 1145-1147)). 바나바와 바울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인 이방 선교를 하게 된 안디옥 교회는 곧 예루살렘교회와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사도회의를 통해(갈 2,1 이하; 행 15,1-29) 두 교회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선교 영역과 두 개의 다른 복음을 인정하게 된다(갈 2,7: 유대인들을 위한 "할례의 복음"과 이방인들을 위한 "무할례의 복음"; 참조 박응천, "신약 교회의 유대특수주의와 세계보편주의", 244). 그러나 비록 바울과 누가의 기록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것은 안디옥교회를 대표하는 바울과 바나바와 예루살렘교회의 기둥되는 세 사도는 서로 일치된 의견을 지니게 되었다(갈 2,9: 바울에게 준 "은혜"란 곧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사도권을 뜻한다; 참조 갈 1,15-15; 롬 1,5; 12,3; 15,15; 고전 3,10; 엡 3,8; 빌 1,7: 참조 K. Berger, EWNT III, 1095-1102)는 사실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이방 선교에 대해 동의하게 되었다(참조 행 10,1-11.18; 11,20-21; 15,1-35; 갈 2,6-10). 그것은 바로 이방 지역에 복음을 확장시키기 위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결과였던 것이다. 따라서 누가는 특히 사도회의에서 이방 선교를 위한 개방적 결정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행 15,28에서 결정의 주체가 "성령과 우리"이다: 참조 김지철, "복음의 진정성과 교회의 일치성" 50-75).
1. 에클레시아의 신학적 의미: 바울의 초기 서신에서 사용된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하나의 장소에 모인 신앙 공동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써 단수로도 복수로도 사용이 가능했다(살전 1,1; 2,14; 롬 16,16; 고전 7,17; 16,1; 갈 1,2(복수) 등). 그래서 당시 산재하는 가정교회 하나 하나가 교회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롬 16,5; 고전 16,19; 골 4,15; 구체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공동체와 상관없이 교회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단수로 나타난다; 예 고전 4,17; 에베소서에서는 보편적 교회의 양상으로 변모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롬 12장과 고전 12장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도 그 출발점이 지역교회인 로마 교회와 고린도교회라는 장을 염두에 둔 진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의 후기 서신(골로새서와 에베소서: 본고에서는 본격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에 나타난 우주적인 교회로의 발전 소지가 바울의 초기 서신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차단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가정 교회를 지칭하는 "교회들"이라는 복수 형태를 사용하면서도 이미 고린도전서 1장 1절과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단수 형태로 전체 교회를 통합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살전 2,14)이라는 부름으로써 지역 교회와 보편적 교회와의 관계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각 지역 교회가 단지 전체 교회에 참여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영적-기독론적 실체라는 점에서 지역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전체 교회와 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이다(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97).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을 종말론적인 구원 공동체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 "교회" 안에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에서 그러하다(참조 고전 12,13.27; H. Merklein, "Die Ekklesia Gottes" 315-316). 이러한 점에서 단지 장소적인 모임인 에클레시아의 세속적인 의미를 신학적인 의미가 담긴 실체로 확대 해석해 낸 인물은 바울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령의 피조물로써의 교회: 바울은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살전 2,14; 갈 1,22; 참조 롬 16,16)라는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롤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낸다. 하나는 보이는 세례라는 틀(롬 6,3 이하)이며,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이다(고전 6,11; 12,12-13; 갈 3,27). 그러나 바울에게서 이 두 가지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실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세례받는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속한 통치권의 전환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 아래 서게 된다(롬 6,10f; 고전 6,11; 갈 2,20). 따라서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여기에 참여한 신앙인들로 하여금 과거 옛 사람의 특권, 예를 들면, 과거의 종교적, 사회적, 성차별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그분과의 새로운 연대와 연합이 가능해 진다. 바울은 이것을 교회론적인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7-28).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서 전체를 대표하는 인격적인 표상이다(아담-그리스도 모형론의 배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참조 롬 5,11-21; 고전 15,20-28).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의 존재"로 연합될 때, 그는 세상의 사회 종교적 신분에서 야기되는 우월/열등의 차별, 지배/피지배의 권력 투쟁, 정결/부정이라는 이분법적 갈등을 극복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자리에 들수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써의 교회의 모습이다. 3. 성령의 약속을 이어받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새 이스라엘)으로서의 교회: 바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핍박자였으나(고전 15,9; 갈 1,13; 참조 빌 3,6)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 현현 사건을 통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의 수호자가 되었다고 증언한다(참조 C. Dietzfelbinger, Die Berufung des Paulus).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확신케 되었다(갈 1,16).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이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복이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물하기로 약속하신 성령을 뜻한다(갈 3,13-14; 참조 사 44,3; J. L. Martyn, Galatians 323). 1)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온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많은 자손: 창 15,5; 땅의 소유: 창 15,7)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아브라함(창 15,6)이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이 되고 그들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율법에 신실했기 때문이거나 할례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롬 4,3; 갈 3,6)이었다는 것이다. 불경한 자를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가장 적합한 인간의 태도란 믿음(롬 4,5)인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결코 육체적인 자손으로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 곧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의한 것(롬 4,17)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따라서 그의 육체의 자손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다(롬 4,16; 갈 3,9)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주적 지평으로 확대되었음(롬 4,18.23.24; 갈 3,8.14)을 뜻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지평 확대는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길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길로 개방되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이러한 개방은 이스라엘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폐기처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약속을 더욱 유효하게 만들었다(참조 고후 3,6-11). 바울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나타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고후 3,16-18). 2) 고린도교회를 향해 바울은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를 모형론적으로 제시한다(고전 10,1-13). 그리고 그 출애굽 과정에 있었던 이스라엘을 향해 "우리들의 조상"(1절)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들과 바울의 교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암시해준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광야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결과를 보여 주면서, 고린도교회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례전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만약 그들에게 불신앙과 불법이 있다면, 그들은 결국 이스라엘처럼 구원의 자리에서 탈락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례전적 제의에 참여한다고 해서 구원이 결코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여기에 영적으로 거듭난 참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부각되게 된다. 3)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먼저는 유대인이요 그 다음은 헬라인이다"(롬 1,16)라고 하는 구원사적인 선후 관계를 진술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울의 일관된 주장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폐해진 것이 아니다(롬 9,6a)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의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모두 구속사의 전환이 나타났으나(롬 9,30-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게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선언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를 세 단계로 진술한다(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127-130). 첫째 단계(롬 9,6b-29)로써 바울의 기본적인 입장이 갈라디아서 3장과 로마서 4장에 나타난다. 곧 이스라엘에게서 육체적으로 나온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롬 9,6b),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바울의 기본적인 판단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에서 보면, 그 안에 야곱과 에서처럼 늘 하나님의 선택과 폐기의 양면성이 있었다(7-9절). 그러나 이러한 선택과 폐기는 어떤 고정된 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에 달린 것이었다(14-23 절).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유가 결코 하나님의 자의적인 횡포라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유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신실성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표지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24-29절; 11,1-10)에게서 발견된다. 바울에 의하면 그들은 곧 유대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들의 존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두 번째 단계(롬 9,30-10,21)로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신실성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선포는 바로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신실성의 표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신실한 약속대로 마지막 때에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입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신 것이다(롬 10,6-15; 참조 신 30,12-14).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아직도 율법의 길을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구원받는 믿음의 길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책임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한 이런 어두운 전망 하에도(롬 10,19-21)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이 있음을 알린다. 하나님이 지금 그의 백성에게 수행하시는 심판은 단지 정화의 심판일 수 있다는 것이다(19b절). 이 같은 가능성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6절에 언급된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넘어서게 한다(참조 P. Stuhlmacher, Der Brief an die R mer 145f). 곧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하나님의 긍휼이 더 풍성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온종일 팔을 벌리시고 불순종하는 백성을 기다리시는 분임(21 절=사 65,2(LXX))을 말한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든다(롬 11,1-36). 하나님은 약속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결코 영원히 버리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다시 한번 남은 자에 대해 언급(참조 롬 9,27ff)하지만, 그것은 미리 아신 백성(롬 11,2)에 대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신실함에 대한 증거로서이다. 바울은 더 분명하게 하나님이 그의 백성 모두를 아직도 버리시지는 않았음을 강조한다(롬 11,1b). 이스라엘이 비록 믿음을 거부함으로써 걸려 넘어졌으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선택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가 종국적인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조차도 그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한 일시적인 삽화적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롬 11,11a).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진행되는 이스라엘의 구원사에 대한 거대한 파노라마를 펼치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은 서로 배타적인 존재가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서로 연계성을 지닌 존재들임을 강조한다(롬 11,11: "저희(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은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의 신앙 거부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은 도리어 이스라엘의 구원 영역에 참여케 되고 동일한 구원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다시 가까운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인들을 통해 그 구원사의 흐름이 역전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수용자로 확정된 이방인들을 보며,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다시금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로 돌아올 것을 소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직까지 기다림으로 남아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에 대한 바울의 이해이다. 이방인들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종국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산 시온에 재림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며(롬 11,26; 참조 사 59,20f) 그를 메시아로 인식하는 신앙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는 있다. 즉 바울은 신앙에 의한 하나님의 의를 구속사의 진행과정에서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참조 P. Stuhlmacher, Der Brief an die R me 154-158; 이한수, "바울의 교회론", 40-43, 55-59).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속사 속에서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회복(롬 11,25-32)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선언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라고 찬탄한다(롬 11,33). 여기서 "하나님의 깊이"란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으로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혜와 지식을 뜻한다(참고 고전 2,7.9.12; U. Wilckens Der Brief an die R mer. II 269). 로마서 9장 1절에서 바울이 "성령 안에서 진리를 말한다"고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그가 구속사에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혜와 지식의 깊이를 드러낸 것을 뜻한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구속사적인 이스라엘과 이방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속사의 과정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결정적인 분기점과 전환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과의 구속사적인 연속선상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수용과 거부를 통해 이제 구원과 심판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선교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왜 그토록 스페인까지의 선교에 집착했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의 선교적인 독자성을 주장하면서도 왜 마지막까지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계속 고수하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 이방 선교를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바로 그의 구원사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구원사의 마지막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을 것을 염두에 둔 바울은 자신이 이방 백성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음으로써(갈 1,16),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라는 이사야 52장 7절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롬 11,12). 말하자면 바울은 그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침내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신앙 가운데로 들어올 것을 소망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태어난 이방 교회들이 그 신앙적 뿌리인 예루살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길만이 이러한 구속사적인 전망을 계속 이루어 나가는 것이라고 확신했다(롬 15,19).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바울의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이다(갈 2,10). 그래서 바울은 강한 애정을 가지고 추진했다(고후 8,1-24; 9,1-15; 롬 15,25-29). 이 헌금이야말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구원사적으로 연대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참조 행 20,1-4). 4. 성령이 거주하는 성전으로써의 교회: 고린도전서 3장 5-17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으로 비유한다(고전 3,5-17). 그리고 그 단락의 결론으로 교회는 성령이 거주하는 성전임을 밝힌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분파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이 행한 경고이다.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서는 우상 숭배의 위험 속에 놓인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다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참조 레 26,11; 겔 37,27)라고 선언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에 그 백성이 그의 처소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자리인 교회는 새로운 성전이라는 말씀이다(참조 롬 8,9-11). 1) 하나의 건물로써의 교회는 선교적인 측면(고전 3,5-15; 롬 15,20)과 목회적인 측면에서(고전 8,1.10; 10,23; 14,4.7; 살전 5,11) 부각된다. a. 밭과 건물로 비유되는 교회에서(고전 3,5-17)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밭에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성장하는가 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건물은 어떻게 건축되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식물을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와 친히 건물의 기초를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밭에 어떻게 씨를 심고 물을 주며, 그 터 위에 어떤 건물을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도 그의 관심을 집중시킨다(참조 W. H. Ollrog, Paulus und seine Mitarbeiter 164-175). 왜냐하면 사역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올 심판에서 그들이 그 기초 위에 무엇을 가지고 세웠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고전 3,13-15). 다시 말해 선교 동역자들이 증거하는 복음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한 복음인지 아닌지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선교 사역자들이 지닌 복음에 대한 이해와 증거 방법은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게 된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는 복음의 내용과 그 복음을 증거하는 방식에 의해 서로 갈등하고 분파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b. 밭과 건물로써 교회의 모습은 또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문제와 연결되어진다(고전 8,1.10; 10,23; 14,4.7 살전 5,11). "덕을 세운다"라는 용어에는 기본적으로 건물로써 성전에 대한 인식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바울의 목회적인 관심과 목표를 잘 보여주는 표현으로서, 신앙 공동체가 서로 구원의 기쁨을 나누는 내적인 교제와 연합을 이룬다는 뜻과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을 통해 세상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의 특성인 것이다(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116; 여기서 교훈체제의 확대나, 사람 숫자의 확장으로서의 덕을 세운다는 의미는 생소하다). 바울이 특별히 고린도교회를 향해 집중적으로 덕을 세우는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고린도교회의 성령주의자들은 성령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고전 1,23.24.30; o` evstaurwme,noj Cristo,j의 현재완료형은 지금까지 그 효력이 지속됨을 뜻한다)의 영인 것을 망각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만 만족하여 배부름과 부요함과 왕적 권위만을 누리고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4,8). 바울은 그들에게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친다(참조 고전 2,2; 4,9-13; 갈 2,20; 롬 8,17; 빌 3,8-11). 또한 고린도 교회의 성령주의자들은 "지식이 세우는 것"이라고 자랑하며, 그러한 지식을 가진 자신들은 이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전 10,23)고 주장하면서 영적으로 자유 분방한 신앙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바울은 "지식은 오히려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라고 권면하며, 동시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유익한 것은 아니다"(고전 10,23)라고 경고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고린도교회가 자랑하는 방언의 경우에도 해당되었다. 방언은 비록 방언하는 자 자신의 덕을 세울 수는 있으나,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일에는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을 하는 자는 자기 절제를 해야 하지만, 예언의 경우 그것은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기에(고전 14,4), 오히려 그것을 사모하라고 역설한다(고전 14,28.40). "교회의 덕을 세우라"는 바울의 강력한 권면(고전 14,12.17.26; 롬 14,19; 15,2; 살전 5,11; 엡 4,29)의 직접적인 대상은 교회 안에서 소위 강한 자들이었으며, 간접적인 대상은 그 안에 함께 거하는 연약한 자들(고전 8,11)이거나, 앞으로 신앙 안에 들어와야 할 사람들(고전 9,19-23; 10,32)이었다. 교회란 곧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하나됨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고 사랑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은사나 직분은 그것이 얼마나 교회의 덕을 세우는가에 따라 평가된다(고전 14,3-5; 엡 4,12)고 할 수 있다. 2) 성령이 임재하는 장소로써 교회의 거룩함의 주제는 신앙 공동체라는 교회 전체와 더불어 그 안에 참여하고 있는 각각의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된다. 먼저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것으로 부름 받은 존재이기에 거룩하며, 또한 그 안에 성령이 내주 하시기에 거룩한 존재이다. 따라서 이 거룩한 교회를 파괴하는 것은 명백한 죄악이다(고전 3,17). 예를 들어, 고린도교회의 성령주의자들은 영적 이기주의를 통해서 서로 자랑하고 분파하며 성령 경험을 독점하려 함으로써 교회를 사물화했다(참조 W. Schrage,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VII/1 305f). 이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파괴하는 일로,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아야 할 죄악이라고 바울은 경고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고전 3,16-17: "더럽히다"(fqei,rw: 고전 3,17)라고 번역된 것은 단지 세속적인 도덕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세우다"(evpoikodome,w: 고전 12.14)라는 의미의 반대 표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교회의 근거까지 파괴시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전인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인가를 말해준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숭배는 결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병존할 수 없는 양자택일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이 현존하는 교회를 그의 소유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닌 우상에 의해 그 영광을 빼앗길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론과도 밀접히 연결된다(몸의 소유가 누구인가에 따라 창녀의 지체가 될 수도, 아니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도 있다: 고전 6,16-17). 자기 몸의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인식 여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위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5장 1-8절에서 바울은 개인의 윤리적 범죄가 전체 교회의 거룩성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기의 계모와 함께 사는 성적인 범죄를 다루는 것으로, 그것은 구약에서뿐만 아니라(레 18,8; 신 23,1 등), 당시 이방의 윤리적 규범에서도 간음에 해당되는 범죄였다(Tacitus Ann. 6,19; Cicero, Pro Cluentio 14f). 따라서 바울은 그가 실제로 그들과 함께 그 곳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모일 때에 바울 자신이 그의 영으로 그 곳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범죄자를 공동체에서 내어쫓고, 사탄에게 넘기도록 판단하겠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 이렇듯 강력히 경고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범죄한 개인의 신앙 여부와 상관없이, 교회는 그 거룩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참조 W. Schrage,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VII/1 373-378).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바울은 그 범죄자에게 마지막 구원의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전 5,5). 이로써 중요하게 지적되는 것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고전 6,19)인 그리스도인의 몸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모든 신앙인들은 무죄한 상태로 세상을 살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교회는 이 세상과 담을 쌓고 폐쇄된 채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권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바울은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인정되는 죄악을 교회가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과 적대하는 옛 세력(고전 5,7: 묵은 누룩)에 투항하는 일일뿐 아니라, 그것은 교회의 거룩이란 본질을 해치는 것이고 성령의 거룩함을 모독하는 행위임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비록 이 세상의 죄악 속에 거하고 있지만, 성령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지녀야 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불신앙의 세상과 대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대조사회(Kontrastgesellschaft; G. Lohfink, Wie hat Jesus gewollt?, 142)가 지녀야 할 모습이다. 그것은 이미 예수의 말씀(참조 마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가운데서 나타난 것이며, 그의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실천되어야 했던 모습이고(참조 막 10,41-45 병행: 섬기는 자), 원시기독교회를 통해서 확증된 것이며(참조 행 4,32-5,11), 또한 바울의 교회를 통해서도 계속 드러나야 할(참조 고전 5,1-6,11; 고후 6,14-7,1; 롬 12,1-2) 삶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도 거룩성을 담지하고 이 땅 위에 존재해야 할 종말적인 성령 공동체인 교회가 지녀야 할 특징이기도 하다. 5. 성령의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은 바울의 초기 서신 중 다음 네 구절에서 나타난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의 새 존재를 율법과의 관계에서 언급하는 본문(롬 7,4)이며, 둘째는 신앙 공동체의 은사적 삶을 위한 권면적인 문맥(롬 12,4-5)이고, 셋째는 성만찬의 맥락(고전 10,16-17)과, 넷째는 몸과 비유라는 비유의 틀에서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본문(고전 12,12-26)이다. 1) 바울은 로마서 7장 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세례의 사건을 통해(참조 롬 6,3 이하)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함으로 율법에 대해서는 죽임을 당한 존재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다름 아닌 십자가의 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그 몸에 참여하게 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에는 이미 교회론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U. Wilckens, Der Brief an die R mer. VI/2 65)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이제 "의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롬 7,6)으로 살아야 할 것이라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두 종류의 인간상으로 나뉠 수 있게 된다. 하나는 로마서 7장 7절 이하에 언급된 의문의 묵은 것에 얽매어 고뇌하는 인간상이며, 다른 하나는 로마서 8장 1절 이하에 등장하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성령을 통해 승리하는 인간상이다. 2) 로마서 12장 3절 이하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 대신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바울은 몸과 지체라는 틀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받은 영적인 은사는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소수 집단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공평하게 나누어준 성령의 선물임을 언급한다. 따라서 영적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신앙 공동체 내의 각 지체가 다양하고 고유한 은사를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의 몸을 이루어 나가기 위함에 있다. 이로써 강조되는 것은 다른 지체와의 차별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위치이며, 그 위상을 통한 몸의 하나됨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전체와 개별의 연대성과 고유성을 인식하면서 자기의 은사에 따라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바울은 그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이 드려야 할 영적 예배(롬 12,1: 하나님의 영적인 본질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도 접근 가능한 예배: P. Stuhlmacher, Der Brief an die R me, 168; 참조 E. K semann, "Gottesdienst im Alltag der Welt," 198-204)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12장 3절 이하에 언급된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된 은사목록과 비교해 볼 때 보다 윤리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몸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를 통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고린도전서의 그리스도의 몸을 언급하는 두 본문(고전 10,16-17; 12,12-31)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강조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에 성례전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으며(고전 10,16-17), 다른 하나는 몸의 각 지체가 그리스도라는 몸 안에서 서로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역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고전 12,12-31). a. 고린도전서 10장 16-17절에 언급된 성찬에 대한 바울의 구원론적 접근은 그의 교회론과 잘 어울린다.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의 사건에 참여케 되는 구원론적 언급이라면, 고전 10,17은 이러한 구원의 사건에 참여한 각 그리스도인이 이제 소외된 개인의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전체에 연합되었음을 교회론적으로 말해준다. 본래 예전적인 식탁 참여는 그 제의의 대상과 교제하는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누군가 이방의 우상 제물에 참여하게 되면 그는 귀신과의 교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고전 10,19-20), 성찬에 참여하게 되면 그 식탁의 주인으로서 떡과 잔을 나눠주는 그리스도와 교제를 경험하게 된다(고전 10,16-17). 이렇듯 성만찬의 참여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참조 G.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467f). 바울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두 개념을 서로 연결해서 제시하고 있다. 바로 참여/교제라는 koinwni,a와 직분/섬김을 나타내는 diakoni,a이다. 바울은 이 두 개념이 하나의 몸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먼저 바울은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라는 말로써 식탁을 통한 공동체교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하나의 떡인 몸에 많은 지체들이 함께 참여하여 먹는 것을 의미한다(koinwni,a가 "참여"인가 아니면 "교제"를 뜻하는가 라는 양자 택일적 질문은 무의미하다. 외적인 식탁에의 참여는 내용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교제의 자리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H. Conzelmann,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210; 참조 J. Hainz, EWNT II 749-755에서 고전 10,16b의 교제(koinwni,a)와 10,17b의 참여(mete,cw)를 구분한다. 참여를 통한 교제로 하나의 몸에 연합한다). 바울이 여기서 신앙 공동체의 교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고린도교회는 개인주의적이며, 동시에 그들은 성례전주의적인 성만찬의 이해에만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앞의 맥락에 속하는 고린도전서 10장 1절 이하는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모세를 통해 인도함을 받고, 광야 생활을 하면서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신령한 음식물을 먹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한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여 영적인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보장도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바울에 의하면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공동체로 참여하는 것으로서, 참여자는 그것을 통해 그가 속한 공동체의 덕을 세울 책임과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탁 공동체를 나누지 않음으로 해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뜨렸던 것이다(참조 고전 11,21-22.33-34). 이에 바울은 그것은 주의 만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행위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고전 11,27)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 같은 의미에서 바울은 안디옥에서의 식탁 사건(갈 2,11-21)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이방 그리스도인과의 식탁 교제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가졌던 식탁 공동체(막 2,14-17)의 정신을 거절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의 하나됨을 파괴시키는 행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b. 고린도전서 12장 3-11절은 교회론의 관점으로 성령의 은사론을 언급한 것이며,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은 영적 은사의 통전적 실체인 "그리스도의 몸"의 관점에서 교회론을 전개한 것이다. 은사론과 성령론이 함께 맞물려 있다. 바울은 이러한 어울림을 통해 신앙 공동체의 하나됨을 보존하려 하고, 동시에 각 은사의 다양성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은 바로 하나인 성령의 역할임을 강력하게 표명해 준다(고전 12,4 이하에서, 같은 성령, 한 성령의 반복, 또한 고전 12,13에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바울이 여기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면서 교회가 지녀야 할 다양성과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 고린도교회가 다양성과 공동체성을 동시에 무시하고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이미 고린도전서 10장 17절과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그 원인을 부연한다면, 고린도교회는 영적 은사 중에 특히 방언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심취해 있었다는 것이다(고전 12,1; 13,1; 14,1-5). 물론 바울은 영적 은사인 방언을 거부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언을 포함하는 모든 은사들은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은 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각 은사는 교회를 바로 세우며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은사의 진정한 권위와 역할은 신앙 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하고(고전 12,7), 덕을 세우는가(고전 14,4.26)에 따라 판별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바울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작고 별 것 아닌 은사와 지체가 더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것임을 가르친다(고전 12,22-27). 즉 교회 안에서 개인의 업적이나 신비한 종교적 경험으로 영적 우월성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의 하나됨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사실임을 말해준다. 그러기에 바울은 영적인 은사마다 영적인 분별력에 의해 평가받아야 할 것을 권고한다(고전 12,10; 14,29; 참조 살전 5,19-22). 이런 과정에서 모든 공동체가 서로 책임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참조 J. D. G. Dunn, "The Spirit and the Body of Christ," 346-348). 바울은 다양한 영적 은사는 섬김(diakoni,a: 고전 12,5)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따라서 이 섬김은 당시 헬라어에서 사용되던 식탁의 봉사(참조 행 6,1-2)라는 개념을 넘어선다. 바울은 그 말의 의미를 더욱 확대하여 자신이 사도로서 선교적 파송을 위임받은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다(고후 3,8-9; 4,1; 5,18; 6,3; 롬 11,13). 바울의 이러한 섬김에 대한 이해는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왔다(막 10,45; 눅 22,27)는 모습과 잘 어울린다. 그리하여 바울은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맥락의 마지막 결론으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나를 본받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한다(고전 11,1; 참조 4,16; 살전 1,6). 바울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섬기는 모형을 이어받고 있으며, 그의 신앙 공동체에게 전달하려 하고 있다(빌 3,17: 참조 빌 4,9).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신앙 공동체란 서로 자랑하고 뽐내는 지배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를 모범으로 삼아 서로 돕는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안에서 만인 제사장의 정신과 그 가능성은 바울에게 이미 열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참조 벧전 2,9; 계 1,6).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교제(koinwni,a)와 섬김(diakoni,a)의 사역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몸을 통해 일하는 성령으로부터 온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각 사람에게 고유한 은사를 나눠줌으로써 서로 교제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서로의 섬김을 통하여 하나됨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은 곧 "같은 한 성령"의 사역인 것이다(고전 12,11).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을 통해서 교회 안에 잠재해 있는 개인주의의 위험성을 다양성과 고유성으로, 그리고 집단주의의 위험성을 공동체됨과 통일성으로 극복하면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의 성령임을 보여주고 있다(참조 F. Lang, "Das Verst ndnis der Kirche" 177). 4) 바울의 후기 서신인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들어오면 그리스도가 몸에 대한 권위를 지닌 머리, 곧 교회의 머리로서 표현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는 여기서 지역교회라는 틀을 벗어나 우주적인 교회로까지 확대된다. 머리인 그리스도는 몸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정체성과 성장의 근원이며 동시에 성장의 목표인 것이다. 곧 머리로부터 몸이 세워지고 그 머리까지 자라나게 됨을 뜻한다(엡 4,15; 골 2,19). 여기서 성장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극대화된 표현이다. 교회는 그가 속한 머리인 그리스도, 곧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여 만물의 으뜸이 되신 분이시고, 궁극적으로 세상의 주관들과 정사들과 권세들을 다스릴 분이신 그리스도로(엡 1,21-22; 골 2,10)로부터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게 되며, 또한 그의 몸으로 충만해지기까지 성장해야 한다(엡 1,23-24)는 것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몸의 통일성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것을 통합시키는 구체적인 자리이다(엡 2,13-22). 여기서 반복되는 주제는 성령의 사역이다. "(한) 성령 안에서"(18.22절)가 강조되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란 마지막 시대에 성령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본질적 내용임을 분명히 보여준다(엡 3,5-12: 5절에서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9절에 "비밀의 경륜"). 교회는 말하자면 이 세상 앞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영적인 지혜의 내용임을 의미한다. 5)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에 있어서 직제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서 언급된 세 종류의 중요한 은사들은 그 뒤에 언급된 은사들과는 달리 일정한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바로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교사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선교지역을 방문하거나, 지역교회를 순회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고정된 장소에 머물면서 언제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의 인격 안에 그 모든 다양한 기능들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그는 사도로서, 예언자로서(롬 11,33; 고전 13,2), 그리고 교사로서(빌 4,9; 살전 2,13) 사역을 담당하면서, 교회를 세우기도 하고, 그 교회의 내적 질서를 도모하기도 하면서(고전 11,34) 선교하고 목회한 인물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런 은사들은 제도적으로 확정된 교회 직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빌립보서 1장 1절의 감독과 집사의 경우도 후에 목회서신에 나타나는 교회 직제의 의미보다는 훨씬 유연한 의미로써, 교회의 목회적인 관리 차원에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바울이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한 받는 교회가 그 시대마다 교회의 운영과 질서에 적합한 제도적 요소를 필요로 함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늘날의 교회법적인 의미에서 교회 직제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은사 공동체는 다만 한 세대만에 유용했던 임시적 직제라고 말해야 되는가(참조 J. D. G. Dunn, "Models of Christian Community in the New Testament" 252)?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바울에게서 은사적 공동체인 교회에서 조직하고 운영하는 능력은 성령이라고 할 수 있다(F. Lang, "Das Verst ndnis der Kirche" 180). 그는 성령과 교회 직제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보충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직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성령의 역사에 따라 각 시대마다 유연성과 역동성을 지니며 질서있게 운영될 수 있도록 열려진 틀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개방성의 기준과 한계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화평의 하나님"(고전 14,33)이라는 기본적 사고가 아닐까?
바울의 교회 이해로부터 이제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바울의 교회 이해에 비추어 볼 때 오늘 한국 교회는 어떤 면에서 회복하고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몇 가지 질문형식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양자 간에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비록 깊은 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교회 가운데 창조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1. 바울의 교회에 발생하는 갈등과 문제들(특히 고린도교회)은 주로 그들의 성령에 대한 오해와 곡해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로 부딪쳐 나간다. 서로 다른 성령 이해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고린도교회가 개인적이며 성례전적인 영광의 신비주의로 성령을 사물화했다면, 바울은 성령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함으로써 교회의 역사적이며 공동체적인 기반을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2. 바울의 교회론은 신학적으로는 기독론의 터전 위에, 그리고 선교적이며 목회 실천적으로는 성령론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3. 바울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으로 다음 세 종류의 표상적 이해를 제시했다. 첫째로,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약속을 종말론적으로 이루는 구속사의 실체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둘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존하는 자리인 "성령의 전"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셋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제와 사랑의 섬김을 삶의 원리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4.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 안에 통일성과 다양성이 성령의 사역을 통해 조화롭게 나타나야함을 역설한다. 5. 바울에게서 있어서 세례와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모든 사회적, 종교적, 성별적 차별성이 극복되고 하나로 연합하는 성령이 함께 하는 표지이다. 6. 바울은 세례를 통한 교회 예배에의 참여와 성례전의 참여만으로는 그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7. 바울의 은사적 공동체의 직제는 유연성과 역동성을 지닌 직제라 할 수 있다. 곧 만인 제사장적인 정신과 그 가능성이 열려진 직제라 할 수 있다. 이제 새로운 세기의 교회는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짐작케 한다. 첫째로 교의와 교직에 기초한 교파주의는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고백으로 말미암아 점차 극복되는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둘째로 교회의 사역은 목회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 그 역할이 확대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의 조화가 극대화되는 모습이다. 따라서 교회의 직제 또한 성령의 사역과 기능을 더욱 존중하는 열려진 직제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셋째로 인터넷 시대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교회의 모습이 제시될 것이다. 성령이 시대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의 하나됨을 이루는 인격적인 힘인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오늘의 인터넷 시대에 필요한 것은 교회의 과감한 "성령의 네트워킹"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네트워킹"이란 성서적 표현으로는 "성령의 교제"이다. 사이버 시대에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절실한 것은 아마도 진정한 영적 인격적 교제일 것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성령의 인격적 능력이야말로 이 사이버 시대에도 가장 핵심적이고 절실히 요청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의 기계적인 네트워킹이 무기적 조직체로서의 연결이라면, 성령의 네트워킹은 유기적 연합, 곧 살아 생동하는 사랑의 유기적 관계를 만들어주는 힘과 능력이다. 따라서 만약 오늘의 교회가 이러한 성령의 네트워킹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령에 의한, 그리고 성령을 통한 사이버 교회를 이해하고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의 주체이며 동시에 내용이고, 또한 활동하는 능력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 분이다.
Berger, K. Kirche I. II: TRE Bd. XVIII (Walter de Gruyter. Berlin/New Your 1989) 출처: 김 지 철(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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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바울의 구원교리에 대한 해명은 무엇보다 인간과 세계가 죄 아래 떨어져 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의 필요성을 요청하고 있는 그 방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요구한다. 바울의 구원교리를 보다 자세히 분석하면 이 세상과 이 세대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악과 비참과 그리고 죽음의 세력들을 언급함으로써 죄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비(非) 중생자들의 삶의 전체성을 가리키고 있다. 제2절. 연구의 범위 논제와 관련하여 1:18절 이하는 로마서의 구체적인 본론에 해당된다. 그 본론 중에서 1:18-3:20절까지가 하나의 큰 단락을 이룬다. 이 단락의 주제는 온 인류가 죄 아래서 사망 아래 갇혀 있음을 말한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처하게 되었음을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한 세상에 대해서 바울이 논증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기 이전의 구약의 역사와 이방인의 역사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졌음을 바울이 강조하여 증거하고 있다.
제1절. 하나님의 의 바울의 의인론(義人論)은 그것이 발현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문제를 의인론이라는 올바른 사상적 관점을 근거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자기 권리를 침해당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편에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의'( )라는 용어는 단지 하나님의 속성만을 나타내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내적이며 현실 변혁적인 행위명사이며 동작명사이기도 하다. 의(義)는 대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은 세계(世界)이다. 하나님의 의는 의롭지 못한 세계를 향해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는 사건이며, 심판의 사건이다. 바울은 의롭게 됨의 근거를 '하나님의 의'에서 찾는데 여기서 의(義)라는 명사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의 신비를 나타내는 정적(靜的)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동적(動的)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법정적'(法廷的, forensic)인 의미로 사용한다. 구약성서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왜곡된 인간관계를 정상적인 인간관계로 회복시킨다. 1. 칭의 2.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칭의 3. 칭의에 의한 은택
1. 인간의 참상 2. 죄의 만연 3. 참상의 본질 4. 참상의 결과 (1) 육체 (2) 몸 (3) 영
Ⅲ. 본문의 해석 제1절. 본문개관 로마서 1장 18-25절은 자연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7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울은 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심리학적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으로 하늘로부터 계시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진노는 불의에 대해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 불의는 하나님의 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앞의 17절과 18절은 반 명제적인 병행을 이룬다. 이유를 설명하는 "가르"( )는 16절과 17절에서 세 번 반복된 가르와 상응하며,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문장 이행을 위한 접속어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의 필연성은 그것의 실현과 더불어 동시에 드러난다. "그러나 하늘로부터는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나게 되는데 불의한 가운데 거짓 진리를 가진 모든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들에 대해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사람들 속에 뚜렷이 있으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이시지는 않으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창세로부터 만드신 만물을 통해 나타내 보이셔서 확실히 알게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변명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참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으며 허망한 생각만을 하게 되고 미련한 마음은 더욱 어두워지기만 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혜 있는 자로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썩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의 형상, 즉 사람, 금수, 벌레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롬 1:18-23). 사도는 이제 18절 이하에서부터 1장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떠난 인류가 얼마나 죄악가운데 있는지를 묘사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마땅한지를 말하고 있다. 17절에 나오는 "아포칼륍테타이"(' )가 18절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가 불경건한 자에게는 진노로 '나타나는'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오르게"( )를 번역한 '진노'는 인간의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질이다. 따라서 진노를 발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타락한 것들을 거룩한 것으로부터 영원히 분리시키는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는 천재지변을 통한 심판이다. 그러면 여기서 진노를 받게되는 불경건한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이는 사도가 특별히 이방 세계에 속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서 보편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할 것이다. 믿음의 도가 이방인에게 전해지기 전까지의 모든 이방인을 말한다. 제2절. 본문주석 1. 로마서 1:18 "가르"( )는 본문에 앞서 16절과 17절의 의미와 함께 17절 18절과 의식적으로 반명제적인 병행을 이루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18절에 나타나는 가르는 앞 절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가르와 상관되며 따라서 가르는 문장 사이를 연결하는 단순한 접속어가 아닌 16절과 17절에서의 이유를 18절 이하에서 설명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태초부터 인간에게 임한 이후로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나 다른 방법으로나 자신을 완전히 구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르는 지금까지 설명해 왔던 것들과 연결하여 전제된 상황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가르는 17절과 18절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의' 개념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그들에게 가르를 통하여 배경으로 나타내면서 본문을 이끌어 낸다.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단순히 내면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를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일반계시의 방편인 자연 즉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할지라도 이곳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창조의 영역 안에서라면 무엇이나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하게 충분히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알리시는 모든 선포를 그가 위의 제한된 능력에 적응시키는 것처럼, 인간들도 자신들을 한정시켜야 하는 어떤 한계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로마서 1:20 "창세기로부터"라는 것은 시간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창세 이래'로 라고 할 수 있다. 즉 아주 오랫동안 창세로부터 인간에게 보이시고 그들 마음속에 부정할 수 없는 인상을 남기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언급이다. 바울은 세상보다 선행하며 우월한 하나님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께로 향한 창조를 의미하고 있다. 4. 로마서 1:21 하나님을 "알되"( )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분명한 설명이다. 바울이 아덴에서 말했던 것처럼(행 17:27) 비록 타락했지만 어떤 신을 열망함이 없는 자, 즉 진정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돌아가기를 추구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이 찾으신 일을 없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자신에 대한 지식을 넣어 주셨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5. 로마서 1:22 "파스콘테스"( )는 자기주장을 말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한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는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표본이다. "오모란데산"( )은 "모라이오"( )의 과거 수동형이므로 '어리석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6. 로마서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 말씀은 시편 106편 20절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을 가리키며 예레미야 2장 11절의 이스라엘이 주를 다른 신들과 바꾼 것을 말한다. 바울의 사상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우상의 형상을 세우고 그를 숭배함을 말한다. 바울은 역사맥락에 대한 통찰력을 보인다. 따라서 이 교도의 현실은 광야세대에 의한 황금 송아지 숭배와 관계를 갖게 되며, 창조와 출애굽, 타락과 이스라엘의 죄의 전통들을 상호 결합시켰으며, 하나님의 영광은 여기서부터 상실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바울은 이런 전승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시편전승과는 달리, 그러나 랍비적 해석 및 70인 역의 독립과 일치하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한다. 이 '영광'은 원인간에게처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영광에 대한 몫으로서 부여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아담처럼 죄의 타락을 반복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과 바꾸어 버렸다. 여기에서 사람들의 미련함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내고자 소원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조잡하고 비논리적이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썩어질 사람의 모양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의 위엄을 더럽혔다. 왜냐하면 바울은 죽을 인생을 불멸하시는 하나님과 대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썩지 않는 영광을 인간의 바로 그 비참한 상태와 대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그처럼 큰 과오로도 만족하지 않고서 가장 비열한 야수의 수준에까지 내려가 그들의 우준 함을 보다 더욱 분명하게 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잃어버린 신성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이러한 괴상한 노력들에 분개하며 경멸감을 나타내고 있다. 7. 로마서 1:24 8. 로마서 1:25 제3절. 본문의 논증적 검토 1. 본문의 상황 2. 인간의 파멸 3. 하나님의 진노 4. 맺음
로마서 1:18-25은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방 세계에 대한 고발에서 바울은 자연을 통하여 주어진 계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이방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인간의 죄성의 근본적인 문제는 '불의로 진리를 막아 버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는 데 있다. 도대체 그들은 핑계를 삼을 데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 곧 철저히 나타나게 된 저 이탈은 즉시 더욱 분명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피조물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 그때 그때의 혼동, 그리고 얼마간은 유희적인 혼동일 수 있을 것이며 한층 더 피상적일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 진리의 그득함 속으로 해소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그 가능성이 주어지면 진리를 거짓과 맞바꿔 치게되는 대단히 심각한 결과가 곧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드리워진 안개는 먹장구름이 되어 양극 자체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든다. 즉 우리가 신이라고 칭하는 저편에서 종종 불리워지는 마지막 비밀이 남아있다고 해도 지고의 구체적인 그 비신은 승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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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학년도 불트만의 신앙적 실존 이해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00년 12월 일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한 순간도 하느님의 은혜 없이 살았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발길에 부딪치는 돌을 보면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의 구슬픈 울음 속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가운데 세상에서 살아오는 동안 소중한 분들을 너무 많이 만났기에 그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000년 12월 18일
나는 친구와 함께 언제나 새로이 예수를 만나서 뜻을 세우며 결단을 내리고 현실을 믿으며 이해하며 늠름하게 살았나이다.
말이 곧 삶이게 하소서 삶 아닌 것은 말 아니 하게 하소서 희망은 속으로 품게 하시고 표현은 으로 하게 하소서 목 차 Ⅰ. 서론 1 Ⅱ. 바울의 인간학에 대한 불트만의 신학적 전제들 5 Ⅲ. 인간 실존의 형식적 구조 49 1. 몸의 토대로서의 혼·영 49 2. 몸의 토대로서의 이성·양심·마음 52 1. 죄의 토대로서의 세계 63 2. 죄의 토대로서의 육 66 3. 비본래적인 신앙적 실존의 양태로서의 죄 72 Ⅴ. 신앙적 실존의 본래적 구조 78 1. 신앙의 근거로서의 '하느님의 의(義)'( ) 78 2. 신앙의 근거로서의 '하느님의 은혜'( ) 87 3. 본래적인 신앙적 실존의 양태로서의 신앙 93
Ⅰ 서 론 1. 문제 제기와 연구 목적 신학은 인간의 작업이며 언제나 그래왔다. 신학은 인간의 역사적 사건들과 경험들에 근거한 것이고 그것들을 해석하는 일이다. 신학은 인간이 만들고 고안한 용어들과 개념들을 사용하며, 인간이 명상하고, 추론하고, 말하고, 쓰고 읽는 과정을 통하여 수행되는 것이다. . . . 그러므로 우리의 신학 작업은 오로지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에 근거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만 이해되어져야 한다.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전개될 것이다. 가장 먼저 Ⅱ장에서 필자는 이 논문의 중심부(Ⅲ, Ⅳ, Ⅴ장)에서 필자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들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여러 예비적 주제들을 취급할 것이다. Ⅱ.1에서 필자는 불트만의 학문적 배경 속에서 그의 신학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설명할 것이다. 불트만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전기 하이데거 사상이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만 하이데거 사상이 고찰되어질 것이며, 또한 불트만은 자신의 신학 속에서 필요로 하는 만큼에 대해서는 하이데거의 철학 용어들을 대폭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각주를 활용하여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하고자 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본 논문의 중심부에서 반복되는 설명없이 사용될 것이다. Ⅱ.2에서 필자는 신학의 범주 안에서 인간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밝힐 것이다. 이를 위해 성서적 창조 신앙에 근거해서 인간과 관계를 이루는 인격적인 하느님 개념과 주객도식을 극복한 '신학'이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를 밝혀낼 것이다. Ⅱ.1 에서도 나타나고, 중심부에서도 나타나겠지만, 성서적 인간관을 이야기 할 때 항상 유대인과 이방인(그리스인)이라는 두 축을 사용하여 비교하는 불트만의 특성이 나타날 것이다. Ⅱ.3 에서 필자는 Ⅱ.1과 Ⅱ.2의 진술을 근거로 바울의 신학이 인간학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할 것이며 중심부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바울의 인간학을 전개하기 전에, 불트만이 바울에 대해 몇 가지 전제하고 있는 내용들을 정리할 것이다.
Ⅱ. 바울에 인간학에 대한 불트만의 신학적 전제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1884년 8월 20일 올덴부르크(Oldenburg)의 비펠슈테데(Wiefelstede)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곳의 개신교 목사인 아르투르 불트만(Arthur Bultmann)으로서, 후에 올덴부르크 교회 협의회 회원이었다. 불트만의 가정적 배경이 되었던 것은 그의 할아버지의 경건주의적 유산과 그의 아버지의 온건한 루터교 신앙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불트만은 그 당시 칼 야스퍼스(Karl Jaspers)가 학생으로 있었던 올덴부르크의 짐나지움(Gymnagium)에서 고전 문학을 배웠으며, 튀빙엔과 베를린 그리고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전형적인 신학 수업의 과정을 거쳤다. 26세가 되던 1910년에 마르부르크 대학의 빌헬름 하이트뮬러(Wilhelm Heitm ller) 밑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1916년에는 부레슬라우 대학에서 조교수를, 1920년에는 기센 대학에서 정교수 자격을 받았으며, 1921년에 하이데거를 만났던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옮겨갔다. 이와 같은 경력은 학자로서 매우 정상적인 과정이며, 성공한 경력이었다. 이 시기까지는 불트만에게 있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학문의 바탕을 쌓는 연구 기간이었으며, 학자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1921년에 『공관복음 전승사』[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를 출판한 이래, 마르부르크 대학에서의 30년간의 기간이었다. 필자는 Ⅱ.1 에서 불트만이 그의 학문적 배경의 과정 속에서 하이데거를 만나게 되는 부분까지를 언급하였다. 이제부터는 불트만이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살펴본 후에, 성서적 인간 이해와 그리스적 인간 이해를 비교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이데거 사상과 만나는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위와 같이 불트만에게 있어서 실존이란 특수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존재하는 존재를 일컷는데, 이러한 존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가지며, 자신의 존재를 자기 스스로 이루어갈 수 있는 '존재 가능'(Sein-K nnen)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재는 자기 자신의 통제로부터 벗어나서, 날마다 연속적인 삶 속에 주어지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모험해야 하며,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으로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결단을 내리는 존재라는 것을 알 때, 실존 개념은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트만은 인간 현존재에 대한 이해를 실존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데, 그의 이러한 실존 개념은 철저히 성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서적 인간이해는 그리스의 인간본질과 비교할 때 분명히 그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의 인간 이해는 성서적 인간상과 동시대적이면서도 성서적 인간상과는 상반되는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커다란 코스모스의 일부분으로 이해하며 모든 인간 존재의 현실성은 개체 인간의 모든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현실성에 관계없이 그 이전에 이미 코스모스적 질서에 의해 주어져 있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리스인들은 자기 자신을 대우주(大宇宙)의 일부인 소우주(小宇宙)로 파악하였으며, 코스모스의 영원한 법칙성을 이해하였을 때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수수께끼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다른 자연 대상과 마찬가지로 관찰의 대상이 되게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인간은 정신 즉 사유하는 이성의 힘으로 통찰하고 측정할 수 있는 코스모스의 법칙에 따라 자기 자신을 판단하며, 자기 자신을 이러한 코스모스의 법칙에 일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인은 이러한 일치를 위해서 일시적이고 우연적이며, 구체적이고 시간적인 현실의 영역을 넘어 무시간적이고 영원한 것의 영역에서 실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현실은 코스모스의 영원한 법칙에 의해 주어진 인간에게 있는 본래성에 대한 관심을 인간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인들은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목적을 가지고 배열되어 있으므로 인간에게 통찰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인간은 코스모스에 대한 관조 속에서 신적 세계와 영원한 법칙에 자신을 결속시킬 수 있다는 부류의 섭리개념은 신약성서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행위는 통찰될 수 없으며, 하느님의 행위의 방법들은 탐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과 더불어서 자신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는 하느님과의 측정 불가능한 만남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불트만은 그리스의 인간 이해와 대립되는 신약성서의 인간 이해를 그리스의 인간 이해와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의 인간 이해에 반하여 신약성서는 인간의 실재적인 삶이 코스모스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신약성서의 인간 이해는 인간의 실재적인 삶이 어떤 주어진 시간에 발생하는 것 속에서, 개개인의 영역에서, 그리고 역사의 무대 위에서 발견되어진다는 것을 역설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인에게 있어서는 현실의 환영(幻影)으로 간주되는 것이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실재로 삶의 참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그러한 실제적인 삶이 바로 여기이고, 현재 속에서 인간에게 그러한 삶 자체를 제공하는 미래를 위해 자신을 개방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따라 그의 운명이 선 또는 악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하느님, 하느님이 질문하는 것, 하느님이 요구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 인간과 만나는 곳은 바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는 이 세상이다. 이러한 하느님은 영원한 질서 속에서 시간을 넘어 있는 곳으로 도피하는 사상에서는 증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서의 하느님은 그리스적 세계관에 있어서 하나의 걸림돌이다. 이러한 사유는 이중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을 나타내는 것처럼, 그만큼 하나님을 쉽게 숨길수도 있다. [그러나 성서의] 하느님은 하느님의 자유롭고 독자적인 형식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만나져야만 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진리에 대한 물음이 우주의 전체성 속에서 실재로 있는 것의 나타남에 대한 물음이었다면, 신약성서에 있어서 진리에 대한 물음은 순간이 요구하는 것과 결과적으로 순간이 주는 것에 대한 탐구이다. 이러한 진술을 통해 드러나는 신약성서의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오직 순간 속에서의 삶으로서만 얻게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질은 매순간 인간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서 인간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을 철저하게 개방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결단 속에서 실존할 준비를 하고 있는 한, 그 인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매순간의 결단속에서 하느님 혹은 세계, 은혜 혹은 죄, 삶 혹은 죽음, 그 어느 것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성서의 인간이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서에서 말하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들에 직면하여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결단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결단을 내린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현존재 분석은 인간의 삶에 대한 신약성서의 견해를 단지 세속적으로, 철학적으로 서술한 데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역사 속에 있는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은 불안이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연속된 긴장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인간은 '눈 앞에 있는 것'과 일상인(日常人)의 세계에 집착함으로 자기를 상실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안정성을 포기하고 미래를 위해 과감히 자기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자기의 본래성을 찾을 것인가를 그때 그때마다 결단해야 하는 순간에 처해 있다. 사실 신약성서에서도 인간은 이렇게 이해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트만은 이러한 근거로 하이데거가 철학자의 입장에서 분석한 인간의 현존재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학에 수용하고 있다. 앞서 보았듯이 각주에 서술되어진 하이데거의 개념이 불트만의 개념체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과연 인간이 '죄에 빠져서' 타락 상태에 있는지, 완전함의 상태에서 거닐고 있는지, 아니면 중간단계, 즉 은총의 상태에 처해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존재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 그러나 믿음과 '세계관'은 그것들이 이렇다 또는 저렇다라고 발언하고 있는 한에서 그리고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에 대해서 발언할 때에는, 앞에서 끄집어낸 실존론적 구조들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발언이 동시에 개념적인 이해를 요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말이다. 세계-내-존재는 그 자체로 유혹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기 자신이 이미 유혹되어버리기에, 공공의 해석되어 있음은 현존재를 그의 빠져 있음에 확고하게 붙잡아둔다. 잡담과 애매함,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이해했음이 그렇게 처리할 수 있고 지배하고 있는 현존재의 열어 밝혀져 있음이라면 현존재에게 그의 존재의 모든 가능성의 확실성, 진정함과 풍부함을 보장해 주리라는 억측을 만든다. '그들'의 자기 확실성과 확고부동함은 본래적인 처해있는 이해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점점 자라나게 하고 퍼뜨려나간다. 완전하고 진정한 "삶"을 기르고 이끌고 있다는 '그들'의 억측이 모든 것은 "최상의 상태에"있고 모든 문은 열려 있다는 안정을 현존재 안으로 끌고 온다. [그렇기 때문에] 빠져있는 세계-내-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유혹적이면서 동시에 안정적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빠져있음'에 집착할 때, 그는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를 파악한다고 하는 것은 그가 매순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세계는 인간이 매순간 그 자신이 가능성이라는 것, 즉 그의 존재가 '존재 가능'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인간은 매순간 결단에로 불려지고 있으며, 그 자신을 모험에로 부른다. 그러나 세계는 그러한 결단을 거부한다. 세계는 그러한 결단을 거부함으로써 이미 결단한 것이며, 그 때문에 존재가능으로서 세계의 존재를 잘라냈다. 결국 세계는 그 자신의 미래를 잘라 낸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가능으로 존재하는 것은 미래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항상 이미 과거이다. 세계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속임수이고, 거짓이다. 다시 말해 세계는 항상 낡은 것에 집착해 있으며, 결코 미래에로 이끌지 않기 때문에, 이미 과거의 것이다. 결국 '세계'는 죽음 안에 있다. 위와 같은 진술로 밝혀낼 수 있는 하이데거와 불트만의 입장 차이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철학은 인간이 세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알게 할 수 있다. 즉 철학은 인간에게 자신의 비본래성을 드러내 주고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철학적 실존 해석의 기반 위에서 자신의 본래성에로 돌아갈 수 있으며, 인간의 빠져있음을 극복할 수 있다. 반면 신약성서는 인간이 세계에 빠져 있는 실제적인 상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구출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행위를 통해서만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선포는 자연에 대한 교리나 인간의 본래적인 본질에 대한 교리가 아니라,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선포,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 사건에 대한 선포라는 점에서 철학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실존론적 분석에서 미래에로의 자유로운 개방은 자신의 본래성 안에서 실존하는 존재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존론적 분석이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인간에게 과연 그러한 지식으로서 [성서의] 이와 같은 개방성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실존론적 분석이 이를 제공할 수 없는 것은 실존론적 분석이 일반적으로 실존을 제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존론적 분석이 인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인간이 참되게 실존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미래에 대하여 자유롭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사실뿐이다. 이와 같이 불트만에 따르면 인간이 세계에 빠져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 행위의 선물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앙이란 철학적으로 기술하면, 미래적이며 인간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직면하여 자기 자신을 미래에로 개방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신앙은 철학에서와는 달리 그러한 일이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선물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신학의 주제는 하느님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난은 그 신학이 하느님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문제삼는다는 점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철저한 부정(Verneinung)과 지양(Aufhebung)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주제가 하느님인 신학은 그 내용으로서 단지 '십자가의 말씀'( )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십자가는 인간에게 하나의 걸림돌( )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 신학이 비판받는 점은 그것이 이 걸림돌을 회피하려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 걸림돌을 극소화하려는 데 있다. 불트만은 위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하느님이 모든 신학적 작업에 있어서 유일한 분으로 바르게 사유되어야 한다는 데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금까지 왜곡되어 왔던 하느님 개념을 찾기 위해 철저하게 성서적 입장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왜곡된 하느님 개념을 정립하고자 노력한다. 불트만은 바로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신학의 올바른 의미를 살려내고, 그것을 토대로 실존적인 인간학을 진술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는 Ⅱ.2 에서 먼저 전적 타자로서의 하느님 개념을 살피고, 다음으로 주·객 도식을 극복한 '신학'이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조망한 후에, 마지막으로 신학의 근거인 인간학이라는 소제목으로 신학과 인간학의 관계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칠 때 불트만이 바울의 신학을 인간학으로 보는 근거가 명확히 밝혀지게 될 것이다.
먼저 불트만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하나의 소여성(Gegebenheit), 즉 주어져 있는 어떤 것(a given entity)이 아니다. 즉 하느님은 인간이 다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완전히 배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물음은 하느님을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의 대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떤 수단으로도 하느님께 도달될 수는 없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인식에 고정되는 어떤 주어진 것 일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을 인간의 이해나 인간의 마음에 직접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주어진 것으로서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인간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동일한 한 부분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 즉 Ⅱ.1.2) 에서 언급한 그리스 사람들의 세계관의 맥락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부언하자면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이 세계( ), 즉 코스모스는 질서 정연한 형태를 지니고 이 세계는 제한되어 있으며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 이러한 코스모스의 통일성은 여러 다양한 신들과 인간을 함께 포괄하며, 여기에는 어떤 초월적 영역도, 기적을 위한 여지도 없다. 이와 같이 그리스인의 세계관처럼 여러 신들과 인간이 동일한 질서, 동일한 우주 법칙에 던져져 있고, 둘 다 하나의 자연의 일부분을 이룬다고 한다면, 이 신들도 당연히 인간 이성에 있어서 하나의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神)은 어떤 세계관에 있더라도 초월성이라든지, 피안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트만은 그리스 세계관에서 신의 초월성은 단지 인간적인 것의 특징이 되는 구체적이고 개체적인 모든 것, 생성하고 소멸하는 모든 것에 대한 초월로서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5. 남들은 신도 많고 주도 많다고 하고, 이른바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고 하지만, 6.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생겼고,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또한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우선 이 구절의 서두에서 바울은 '하느님은 한 분밖에 안 계시다'(4절)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만약 하느님에 관한 말이 인간의 눈 앞에 있는 어떤 우주적 본질에 관한 말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은 한 분밖에 안 계시다'라는 명제는 틀린 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미에서는 바울이 언급하였듯이 다른 여러 신들과 주(主)들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5절). 그러나 바울이 확신하고 있듯이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이다'(6a절). 그래서 바울은 한 분뿐인 참된 하느님을 다른 어떤 것보다 나은 보다 높은 본질, 어떤 인식 가능한 주어진 것으로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현실적인 하느님은 오히려 우리의 하느님이며,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관계하는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 개념을 통해 인간이 어느 정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불트만은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에 관해 인간이 말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여전히 불가능한 과제로 나타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구체적인 실존적 상황을 무시하고 실재(Reality)에 대한 주객(主客) 도식에 의해 야기되어진 대상적(對象的)인 사유를 할 경우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불트만은 다시 '신학'(Theo-logia, Rede von Gott)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3) 신학의 토대로서의 인간학 지금까지의 진술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학과 인간학의 관계이다. 즉 '전적 타자'인 하느님으로부터의 말을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이 우리 실존과 관계를 가질 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뒤집어서 표현하면, 우리가 하느님에 의해 요구되어진 우리 실존에 관해 말할 수 있을 때만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의 말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계를 불트만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3. 바울의 인간학에 대한 예비적 기초 분석
앞서 보았듯이 바울은 인간을 그리스 사상처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 영역의 한 현상으로 서술하는 학문적 인간학을 끌어들이지 않고, 인간이 보는 모든 것과 인간에게 발생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점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구분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다면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주어진 독특한 특성, 즉 특별히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신학적 인간학에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바울의 인간학적인 개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간 실존의 형식적 구조들이 드러날 때 비로소 그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 사상에서는 몸에서 자유로워진 영혼불멸의 개념이 있었으며, 인간의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정신적 생명의 힘, 또는 자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푸쉬케(혼)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불트만은 바울에게 있어서 이러한 그리스 사유는 익숙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우선 바울에게 있어서 푸쉬케는 구약성서의 '네페쉬'( , soul, life, self)와 같이 '생명력'(vitality) 또는 '생명'(life)을 나타내기도 한다.(롬 11:3 cf)왕상 19:10, 롬 16:4, 고후 1:23, 빌 2:30, 살전 2:8) 특히 롬 2장 9절, 13장 1절에서 '모든 혼'( )이 '모든 사람'(everyone)을 나타내는 것은 구약성서 화법에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의미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푸쉬케도 네페쉬와 마찬가지로 인격(Person), 자아(Self)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네페쉬와 '루아흐'( , spirit)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푸뉴마(영)와 푸쉬케(혼)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인간을 나타낼 때 사용한 푸뉴마는 '거룩한 영'( ) 또는 '하느님의 영'( )으로 사용된 경우와 주의 깊게 구별되어져야 한다.(롬 8:16, 고전 2:10-11) 이러한 구별은 고전 2장 10 - 11절은 유비(analogy)에 의한 결론으로서 인간의 영은 오직 인간 속에 있는 것만을 알 듯이, 신의 깊이는 오직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푸뉴마로만 가능하다는 진술로 그 근거를 지닐 수 있다.
3. 실존으로서의 몸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의 존재를 특징짓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은 바로 소마(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소마 개념은 복잡하며 이해하는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불트만은 보고 있다. 먼저 일반적인 화법 속에서 소마개념은 흔히 인간의 육체 혹은 신체를 뜻하며, 앞서 살펴본 인간학적 개념인 푸쉬케 및 푸뉴마와 대립시켜 볼 수도 있다.(살전 5:23, 고전 5:3, 7:34) 몸은 많은 지체를 가지고, 몸 안에서 통일을 이룬다.(롬 12:4f, 고전 12:12-26) 인격적이고 육체적인 현재는 곧 몸의 현재를 나타낸다.(고후 10:10) 바울은 그의 소마 안에서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으며(갈 6:17), 소마를 학대하고 구속했다.(고전13:3) 2) 인간 자신에 대한 몸의 이중적 관계 위와 같은 사실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이 소마에 의해 전인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소마로 간주되어질 때, 인간은 어떠한 관점에서 보여지는가? 불트만이 볼 때, 그것은 인간의 존재가 그 자신의 행위의 대상으로써 그 자신을 이해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을 발생하게 하는 주체로써 그 자신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소마로 불리워 진다는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별할 수 있는 존재로서,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해 관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인간은 소마로 불리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보자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행위의 객체로서 다룰 수 있는 자기 자신이면서, 또한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과는 다른 의지로부터 생기는 사건에 지배됨으로서 자기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그 자신이다. 바로 이러한 자기 자신을 인간이 주체로서 구분할 수 있을 때, 그는 소마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3) 인간 실존의 형식적 구조에 대한 결론적 고찰 지금까지 다룬 개념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서 결론을 내려보자. 바울에게 있어서 소마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관계를 가지며, 자기 자신의 처분에 맡겨져 있으며,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그러나 앞서 다룬 푸쉬케·푸뉴마·누우스·카르디아·수네이데시스의 개념 분석을 통해서 밝혀진 바와 같이 소마로서의 인간 실존은 결코 현재에서 완성된 실재로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자신 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학적인 개념들과 관계된 소마로서의 인간 실존은 항상 '의도'와 '의문' 속에 있으며, 이 속에서 인간은 그 자신을 발견하거나 그 자신에 대한 파악을 상실하기도 하며, 자신의 자아를 얻을 수도 있고 자신의 자아를 얻는데 실패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고 그의 자아를 얻는데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창조자로서의 하느님에 관한 지식은 그 자체 안에 인간에 관한 지식, 즉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것과, 그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요구를 받고 있다는 인간에 관한 지식을 내포하고 있다. . . .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다음의 사실, 즉 하느님을 인정하며, 그의 요구에 복종하고, 감사의 찬양으로 하느님에게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울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가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인간 존재의 존재적 기초는 인간의 죄성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그의 본래적인 존재를 상실하고 있다. 즉 인간은 하느님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1. 죄의 토대로서의 세계 2) 종말론적 개념으로서의 '이 세계'( )
1) '육'( , flesh)의 개념 바울에게 있어서 사륵스(육)는 인간의 물질적인 신체성으로서 '육체'를 의미하지만, 식용(食用)을 위한 동물적 육체를 가리키는 고기( -롬 14:21, 고전 8:13)와는 다르게 인간의 살아있는 육체이고, 감정적 표현과 감각에 대해 인식이 가능한 것으로 활동한다. 따라서 사륵스는 우선적으로 재료( )이기는 하나 형태(Form)와 구별되는 재료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몸에서 생명을 얻고 형성되어지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사륵스는 소마와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고, 더 나아가 푸쉬케와 푸뉴마와 같이 인격의 특성으로까지도 사용될 수 있다.(고후 7:5) 반면에 사룩스는 구체적인 신체뿐만 아니라, '육체성'도 나타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육체성은 지상적인 인간의 특수한 본성, 즉 인간의 연약함과 무상함,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과 하느님 자신의 푸뉴마에 대해 대립하여 있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 '죄'( , sin)의 결과로서의 죽음 단도 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죄의 결과는 곧 죽음이다. 바울은 구약성서와 유대교적 전통에서 율법의 위반은 곧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간주하고 있다. 즉 죽음은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한 형벌로 나타난다(롬 1:32 ; 6:7, 16, 23)는 전통적·법적인 개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육 안에서, 육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삶 속에 필연적으로 깃들여 있을 수밖에 없는 죄의 세력들은 죄에 빠진 인간을 완전히 지배한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을 노예화한다는 점에서도 작용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육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상황이다. 결국 불트만이 보기에 바울이 말하고 싶은 바는 인간의 본질 자체가 육과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죄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인류의 시작부터 잠재해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율법없는 시기인 아담에게 있어서도(롬 7:7-11), 율법 하에 있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도(롬 7:7), 양심에 따라 사는 이방인에게 있어서도(롬 2:4f) 이미 인간 속에 그러한 죄의 가능성이 싹트고 있다는 것이다. 상속죄의 사상이 나타나는 구절 중 5장 12 - 13절에서는 인간이 책임져야 할 죄와 인간이 책임지지 않는 죄 사이에 구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다. 즉 상속죄의 사상에는 모든 인간이 언제나 잘못된 노력에 의해 이끌린 다는 것과 그러한 인간성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경험이 놓여 있다. 이로부터 규정된 인간의 실존 이해는 처음부터 모든 인간을 애워 싸는 바, 인간은 각기 구체적인 '범행'에서 그 이해를 분명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서로간에 연결된 책임을 진다. 인간의 생활은 상호 관계된 생활이므로 단 한번의 속임수에 의해 서로간의 신뢰가 파괴되고 이와 함께 죄가 세워진다. . . .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염려하는 자기 세력에 서 있다. 각기 자신의 권리에 의존하며 자신의 생활을 위해 싸운다. 그리고 삶은 설사 그 싸움이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른 자발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모든 사람에 대항하는 모든 사람의 싸움으로 된다. 이와 같이 죄는 언제나 현재 하는 것이며, 그 때문에 하느님의 명령은 항상 '너는∼해라' '너는∼해서는 안된다'는 형식으로 인간에게 요구해 온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함으로 이 계명에 대해 '나는 ∼원한다'로 바꾸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선(善)이 언제나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처음부터 끝가지 근본적으로 죄의 명백성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이와 같이 불트만은 바울에게서 나타난 상속죄 사상, 그러니까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아담에게서 넘겨받는 유전적인 죄 사상은 거부하지만, 바울의 또 다른 입장인 보편성으로서의 원죄 사상, 즉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가능성안에 살고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원죄 사상은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불트만의 입장은 그의 서술 속에 나타난 단수로서의 죄와 복수로서의 죄 개념을 살펴볼 때 더욱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불트만은 '죄' 개념에 대해서 시종일관 단수로서 취급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단수로서의 '죄'(S nde)와 복수로서의 '죄들'(S nden)을 똑같이 취급하고 있지만, 불트만은 죄 개념에 대해서 시종일관 단수로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트만에게 있어서 단수로서의 죄와 복수로서의 죄들은 불트만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불트만은 이러한 죄를 본질적인 죄라고 부르면서 이 본질적인 죄는 율법에 대한 개개인의 위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를 주장하여 하느님 앞에서 그 자신을 자랑하려고 하는 인간의 근본태도, 즉 인간의 노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죄는 결코 도덕 일반인 죄들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죄인됨과 죄의 보편성이 비도덕의 관점에서는 결코 주장될 수 없다는 것이다. Ⅴ. 신앙적 실존의 본래적 구조
인간의 죽음이 자기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스스로 살고자 하는 노력에서 자신의 자아를 상실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면, 인간의 생명은 자신의 자아를 하느님에게 맡기고,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의 본래적인 자아를 얻는데서 생긴다. 불트만은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것은 바로 바울이 말한 義, 또는 생명을 얻기 위한 전제가 되는 의인됨(justification)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표현된다고 한다.
' '(의)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 '처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불트만은 여기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 세속적인 화법인 분배정의(distributive justice, justica distributiva)로서 자신의 것을 되찾게 하는 정의이다. 둘째로 ' '(의로운)와 마찬가지로 정직함(uprightness)을 나타내는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개인의 윤리적 성품이나 어떤 속성(quality)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relationship)를 나타내는 법적 개념이다.
그런데 먼저 바울의 '義'의 현재성에 관한 논제를 전개하기 전에 파악되어야 할 근본적인 중요성은 그가 여기에서 구약성서와 유대교적 전통에 있는 '義'의 법정적·종말론적 의미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법정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법정적·종말론적 의미가 바울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혜는 인간의 연약함을 헤아려 주기 위해, 선을 향한 인간의 노력 속에서, 경우에 따른 실수나 심지어 많은 실수를 용서하기 위해, 그리고 사소한 죄나 심지어 큰 죄를 용서하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발생하는 하느님의 친절과 자비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노력은 정확히 하느님의 은총을 물리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노력 자체에 인간 실존의 본래의 죄, 즉 인간이 독자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인간의 오만과 자기 환상이 이미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이 인간이 자기 자신과 싸우고 격투하는 자일지라도, 절망에 이르러 하느님의 도움과 구속을 갈망할 지라도, 심지어 그럴 때일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그러한 노력을 긍정하고 인간의 상실하는, 실패하는 힘을 지지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질문으로서 인간 앞에 다가온다. 즉, 너가 전적으로 하느님의 처리에 굴복하겠는가? 다시 말해 하느님 앞에서 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너 자신이 아는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義'가 '하느님의 義'로 불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주신, 그리고 하느님이 의롭다고 판결하신(롬1:17, 3:21f. 26, 10:3) '하느님의 은혜'에만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및 '내 義'가 인간이 '율법의 일들'의 실천으로 노력해서 얻으려는 '義'인 것과 같이 바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義'는 오로지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혜에 의해 인간에게 선사되는 義라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말해 보자면 '하느님의 義'는 우리 자신의 행위 없이 우리가 하느님과의 평화에 도달했다(롬 5:1)는 말로 바꿀 수 있으며 우리 이전에, 우리 없이 있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우선성(prioprity)을 선언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1) 사건으로서의 하느님의 은혜 먼저 불트만은 바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은혜의 행위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주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했다는 데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린 자로 선포되었다.(고전 1:23, 2:2, 갈 3:1)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죽음과 함께 하나의 구원사건의 통일성 속에서 묶여진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곧 살아난 자이다.(롬 8:34, 고후 5:15, 13:4) 바울이 부활을 언급하지 않고도 십자가를 언급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때에 따라서 십자가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도, 부활에 대해서만 언급할 수 있었다.(살전 1:10, 고전 6:14, 고후 4:14, 롬 1:4, 8:11, 13:4)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두 가지의 독립된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동일한 구원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일어났는가? 불트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원 사건이 선재한(prevenient) 하느님의 은혜로운 행위라는 것, 그리고 이 행위를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들은 결국 이 사건이 전례가 없었던 것이었으며 인간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개조할 수 있는 능력을 표현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전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제기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인간에게 은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생명 또는 자아를 얻으려는 그의 왜곡된 투쟁에서 풀려나고, '하느님의 의'( )에서 단지 선물로서 자신의 생명 또는 자아를 얻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건은 어떻게 인간에게 은혜의 행위로서 인식되고 경험될 수 있는가? 먼저 불트만에 따르면 그러한 경험은, 은혜의 행위가 인간 자신을 향한 것, 인간에게 적중하는 것, 인간에게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을 때, 즉 그것을 구원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청이 인간을 참된 결단의 물음 앞에 세울 때, 즉 인간이 실존적으로 결단하고자 할 때 바로 그때만이 이 사건은 인간에게 강압적이고 변형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불트만에 따르면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당시에 있었던 서로 다른 사상 영역, 예를 들면 유대교에서 발생한 속죄 제물 또는 대속 제물, 밀의 종교에서 생긴 밀의주의적 죽음, 그리고 영지주적 신화에서 차용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그 어떠한 설명도 이 사건이 어떻게 인간에게 구원 사건으로 인식되고 경험될 수 있는가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변을 찾을 수 없었다고 보고 있다.
1) '신앙'( )의 의미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인간이 신앙의 근거인 '하느님의 의'를 선물로 받고, 하느님의 구원사건인 '하느님의 은혜' 그 자체를 자신에게 실현시키는 인간의 태도를 말한다. 무엇보다도, 신앙은 유대교의 입장에서 조건으로 되어있던 '일'( , 율법수행)들을 대신하는 '하느님의 의'를 받아들이기 위한 조건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은혜인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역시 신앙을 위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신앙은 업적이 아닌 만큼 그만큼 더 행위이다. . . 업적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으로 머문다. 즉 나는 신앙을 나 자신 외부에 떼어내어 소유하고 평가하고 정죄하고 자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행위를 통해서 나는 비로소 내가 된다. 다시 말해 나는 내 존재를 행위에서 찾으며 살지만, 행위와 나란히 서지는 않는다. 만일 내가 나 자신과 나의 행위를 관망하려고 하면, 나는 행위로서의 그 행위를 파괴하고 그것을 업적으로 격하시키게 된다. . . . 신앙은 업적들에 대한 포기이다. 오히려 신앙은 결단의 행위이다. 신앙은 단지 그러한 포기에서 은혜가 주어진다는 통찰에 의해 모든 업적을 포기하는 역설적인 행위이다. 그렇다면 신앙은 행동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이미 행한 일이거나 업적이거나 만들어내고 이룬 어떤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선사 받은 자유 안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순간적인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불트만이 말하는 신앙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제 불트만이 바울 서신을 분석하면서 드러나는 신앙의 특성들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이러한 신앙의 특성 속에서 밝혀지는 내용은 지금까지 살펴본 신앙의 의미에 대해 바울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들 속에는 이미 '∼안에서의 신앙'(faith in), 즉 '하느님의 의', '하느님의 은혜인 그리스도 사건'안에서의 신앙에 대한 의미가 들어가 있다. 불트만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신앙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차례로 살펴보자. 누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별다르게 보아줍니까?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인데,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고전 4:7) 바로 여기에서 신앙은 참된 순종으로서 하나의 공로( )라는 의혹에서 벗어난다. 업적에 대한 철저한 포기, 신에 의해 결정된 구원의 길에 순종적인 복종,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서의 신앙은 옛 자아 대신 그 자체로 새로운 자아를 구성하는 순종의 자유로운 행위가 된다. 이와 같이 신앙의 순종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결단은 참된 의미에서 행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앙인의 참된 결단의 행위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반면 '업적'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행하는 것과 나란히 있게 된다. 따라서 결단의 자유로운 행위로써 신앙의 순종은 신앙을 일반적인 '체험'으로, 종교 속에 있는 참된 '종교성'으로, '영적인 상태'로, '덕'(德)으로 이해하는 오해를 막는다. 순종으로서의 신앙의 행위는 정신의 완전한 상태로써 구원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복종으로서 구원을 받아들이는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12.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쫓아가고 있습니다. 13.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빌 3:12-14)
앞서 살펴 본대로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의 순종적인 복종인 그리스도 십자가의 받아들임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 자기 힘에 의해 생명을 얻으려고 시도하는,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죄와 죽음의 세력들에 희생시키며, 상실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옛 자기이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으로서 신앙은 동시에 이러한 세력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과 더불어 인간에게 선사되는 새로운 자기 이해는 신앙인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자기 자신의 자아를 획득하는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는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 받는 자로서 신앙인이 더 이상 그 자신에 속해있지 않다는(더 이상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바로 그 사실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자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생명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혜에 맡기면서 이러한 인간적인 염려를 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그 자신을 하느님의 소유로 인정하고, 하느님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은 자유한 삶을 영위하게 되며, 바울은 이러한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힘차게 표현하고 있다.
참고 문헌 Ⅰ. 성서
박창환. 『성서헬라어사전』.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Bultmann, R..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Ⅰ. Trans. Kendrick Grobel.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1.
1. 단행본 2. 소논문 Bultmann, R.. "Theologie als Wissenschschaft" Zeitschrift der Theologie und Kirche. 81. 1984. "학문으로서의 신학" 박재순 역 『신학 사상』49호. 서울: 한국 신학 연구소, 1985. |
碩士學位 請求論文 -律法과 福音을 중심으로- -律法과 福音을 중심으로- 李德休의 碩士學位論文을 認准함 1999年 12月 20日
Abstract A Study of Rechtstheologie on the Law thought in St.Paul
『律法은 聖經神學에서 根本的인 主題인가?』(Das Gesetz als elementares Thema einer Biblischen Theologie?)라는 저서에서 휘브너(H. H bner)는 다음의 사실에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는 지금까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 그리고 조직신학적으로 맹렬히 논란되는 律法이라는 주제는 성경신학의 주제라고 하면서, 보다 포괄적인 신학적 물음은 뒤로하고 "구약 율법의 어떠한 면이 또는 구약의 어떤 이해나 혹은 오해가 구약 전승의 진행과정에서 그때마다 신학적 반성의 대상이 되는가?" 라고 물었다. 사도 바울의 神學思想을 本稿의 主題가 되는 律法과 福音이라는 對稱的 二元論을 어떻게 克復하고 解釋하는가를 그의 法神學的 思想의 土臺 위에서 조명하는 것을 本稿의 주요 임무로 한다. 이러한 작업이 수행되기 위해서는 먼저 바울 신학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때로는 垂直的으로 때로는 水平的 交互關係로 나타나게 되고, 나아가서는 서로 補完的 對稱關係로서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바울 시대의 新約啓示의 構造가 舊約의 歷史性을 辨證하면서부터 終末論的이고 메시야적인 豫言은, 未來를 指向하는 有機體가 되고 있다. 구약은 그 자체로서 새 언약을 예비하여 놓았으며(사 65:17, 겔 11:19 참조), 예레미야 31:31-34에 나오는 "새 언약"은 신약 계시에서도 사용되고 있다(마 13:52, 막 16:17, 고후 5;17, 계 2:17).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언약은 비록 새 언약과 옛 언약의 구별이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예레미야 31:31-34 본문에서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두 개의 가장 분명한 묘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여호와의 법을 그 마음에 기록하여 그 법에 복종하게 할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의 죄악을 赦하시고 이제 완전히 자유케 하신다는 것이다.
第 一 節 法神學(Rechtstheologie)의 課題 도그마(dogma, )란 의견, 교훈, 결정, 규례 등의 뜻이 있는데, 이는 다음 세 가지 의미로 파악될 수 있다. 첫째, 일반적인 정부, 의회, 황제, 왕의 결의나 명령(cf. 눅 2:1, god 17:7) 또는 임금의 명령(히 11:23). 둘째, 십계명의 율례들(엡 2:15, 골2:14). 셋째, 종교적 생활규범에 관하여 사도들과 장로들이 작성한 규례들(행 16:4). 여기서 세 번째의 "규례"라는 말에는 도그마타( , dogmata)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사도들이 장로들과 더불어 성령으로 결의한 규례들이 곧 도그마로서 교회의 생활규범이 된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여러 책들을 " "(여호와의 규례들), 교부들은 기독교를 ' "(하나님의 교리), 그리스도의 화육론을 " "(신학의 교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도그마는 성경 전체에 근거한 신앙과 생활에 관한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이란 무엇인가? 라는 법의 개념과 본질에 대한 물음은 모든 법철학적 고찰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一義的인 해답을 얻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만큼 법의 본질에 대한 내용 규정이 다난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법이라는 특성은 시대와 대상에 따라서 항상 내용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법의 본질에 대한 많은 대답이 주어지는 것은 법 자체가 복합적인 현상이어서 그 요소들이 다양한 관점과 관심에 입각하여 검토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法의 本來的 機能이 紛爭解決과 社會統制에 있음을 감안한다면 법의 본질도 결국 인간과의 관련하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 요컨대 법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변화의 요인은 법이 인간의 본성과 괴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드시고 다시 인간에게 그의 법을 주신 것은, 법에 있어서 인간학적 사고의 발단이 원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법과 인간은 변증법적 일치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며, 존재에로 배열된 인간과 인간에 따라 배열된 법은 상호간에 실존적인 유기적 관계에 있다. 우리가 신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에서 인간과 법의 일치를 추구할 때는 항상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 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제기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법은 그러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으로서, 법은 좀 더 현실적 인간에게 접근시킴으로써 자유와 평등의 실현에 기여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존재에 관한 규명은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다. 그러한 한 존재론적 법 고찰도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법존재론과 인간학의 한계를 느끼고, 여기에서 법신학은 신과 인간상호간의 관계에서 인간과 법의 본질을 찾게 한 것이다.
Ⅰ. 유대교의 전통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백성에게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것은 실로 비상한 영적 교훈이었다. 율법을 부여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에게 살아있는 역사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啓示하셨는 바, 돌비(石碑)에 기록된 율법을 가지고 있는 구약 ****니브**** 3. 참 유대주의자 바울 4. 맺음*****바울로의 신학-바울로의 배경에의거
바울의 律法 이해는 그의 神學思想에 있어서 가장 복잡한 敎義(dogma)이다. 고린도 서신에서는 원시 기독교의 열광주의에 대항하며,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유대주의자들에게 방어하고, 로마서에서는 고린도와 빌립보로부터 그에게 대항해서 로마에로 퍼져나아 가는 유대 그리스도적 논쟁을 물리치려 애쓴다. 여기에 열거된 서신들은 바리새인인 바울의 사도적 사명 위임으로부터 성서적으로 생각되고 사상적으로 뒤따라 이루어지는 하나의 통일성이 밝혀져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된 교회는 새 계약 의무의 시대 안에 이를 섬기는 가운데 살고 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미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고 하나님의 의를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의 실천에서, 성령의 힘입은 바를 확증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은 하나님의 시내산 율법의 의도가 목표에 이르고 원수 사랑에 이르기까지 심화된 사랑의 계명이 십계명의 근본 요구들과 다 함께 타당한 하나님의 뜻으로 요구된다. 첫째; 그리스도 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힘입어 예레미야 31장 31절 이하의 새 계약 의 무의 시대와 실현 안에 살고 있다. 2. 언약이 있기 전에 주어진 법과 제도 3. 율법과 언약의 관계***기독교사상 91년 1월 "율법은 약속에 관여할 자리가 없다"**** 언약의 히브리어는 베리트(( , b'erith)이다. 이 명사는 '자르다' 또는 '보다'라는 어근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카드어에서 베리투(beritu)가 '협정', '속박'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히브리 단어가 후자와 연관되는 것처럼 보였다. 언약을 맺는 것에 대해 구약에서 사용된 가장 일반적 표현은 언약을 자르다(to cut a covenant, karat b'erith)라는 말이었다. 멘델홀은 히타이족들 사이에서 발전된 언약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 시켰다 (2) 言約의 內容 (3) 메시야 豫言과 言約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蒙學先生( , pedagogue, 個人敎師, 後見人)이라고 하였다(갈 3:24-25 참조). 律法이란 구약에서의 의미로는 "토라"( , t r , torah)라고 한다. 이는 '나무조각의 제비를 던진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가르치다, 인도하다, 훈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신약에서의 의미는 "분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또 하나의 단어로부터 파생되었는데,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 나누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약적 용법이나 구약의 용법이나 양자 모두 가르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사람들을 그들이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빚진 바 된 어떤 義務로 拘束하는 모든 敎理, 敎訓, 律法, 法令, 規則을 포함한다. 또한 여기에는 神的인 것, 人間的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유대교에 있어서 율법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1) 律法 存在論 서설로서,,,,, 유한적 목적설-율법의 존치인가? 무한적 목적설-율법의 확장인가? 아니면 폐기인가? 논한 후 를 계약신학에서 논---
1. 계약의 時機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옛 契約(old covenant)과 새 契約(new covenant)이라는 歷史的·內容的 脈絡에서 파악된다. 契約이란 히브리어의 "베리트"( , b'erith)이고, 헬라어로는 "디아데케"( , diatheke)이다. 구약이 메시아가 降臨하기 전의 恩惠契約의 時機( )라면, 신약은 그의 강림 이후 오늘 우리가 사는 지금까지의 時機이다. 계약이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다. 여기서 옛 계약과 새 계약을 구분 짓는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서 전자는, 그리스도 이전의 하나님과 인간의 유대, 후자는 당연히 그리스도 이후의 인간과 하나님과의 유대이다(히브리서 참조). 그러나 바울 사도가 구분 짓는 궁극적 목표는 오직 유대인의 율법주의와 새 계약의 은혜를 대조시킴으로써(갈 2:14-16; 3:1; 4:31-5:2), 유대주의자의 파괴적인 의견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내세운 다른 모든 부차적인 대조는 이 근본적인 부분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쓰였을 뿐이다. 3. 성령의 새 계약 4, 영과 문자 본문의 주제가 되는 영과 문자라는 구절이 주는 의미는 바울 선생의 하나님에 대한 義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새 계약을 옛 계약 즉 율법의 완성으로(롬 7:6; 갈 3:24) 보는 한, 글자와 영이라는 모순되는 대조는(이때 영은 높임을 받는 주님의 땅위에 나타남으로 해석하고, 글자는 하나님의 확립된 의지의 유대교적 왜곡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 교회 안에 율법이 지배하는 것을 연대기적으로 종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Ⅰ. 하나님의 의
第 四 節 救援의 辨證論 구약신학이 구약 시대의 점진적인 자기 계시에서의 하나님 연구라면, 계시가 끼친 영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할 필요가 있다. 성경 자체에 따르면 구약 계시의 시기는 준비의 시기였다.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었고 나중에 올 것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구약 자체에서 찾아낼 수 있다. 족장들에게 행한 약속에서, 메시아 예언의 목적론적 경향에서 그리고 희생 제사와 그 효과의 점진성에서 찾을 수 있다. 1. 우리 주님의 메시아 意識 우리가 주님의 메시아 의식을 논의하게 되면, 우선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았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며, 인성과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位格(a Divine Person)이며, 자신의 神的 本質에서 말세의 시기와 같이 그가 알지 못하였던 부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마 24:36). 인간으로써 그는 참된 인간이었고 우리는 그의 지식이 참으로 자라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눅 2:52 참고). 2. 메시아의 救援使役 3. 司徒의 宣敎的 說敎 초대교회의 선교적 설교의 측면에서 우리는 구약의 교훈의 영향에 주목할 수 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님이시니라"(살전 1:9-10). 사도 바울의 선교적 설교의 핵심을 포함하는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구약신학의 개요로서 나타난다. Ⅱ. 救援史의 展望
救援의 歷史(Heilsgeschichite, history of salvation)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契約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말을 分說하면 다음과 같다. Ⅲ. 救援의 終末論的 意義
율법이란 히브리( )어로 토라(Torah, ), 헬라어로는 노모스(Nomos, ) 라고 하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사회적·제의적 규범을 포함한다. 이와 같이 규범으로서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통해서도 보여지며, 인간의 양심 가운데도 숨겨져 있으나 본질적 의미에서 명문화된 율법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과 백성과의 본질적인 관계 형성인 십계명에 있었다. 노모스( , 법)와 디케(( , 규범)라는 말은 원래 하나님의 법(神法)이라는 헬라적 용법이었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중세 아퀴나스에 이르러 오늘날의 세속적인 용법으로는, 法과 正義( )를 뜻하는 용어로 정착하였다. 2. 법과 정의의 용례 율례란 용법으로서의 히브리어의 '미쉬파트'( , mi pa , Judgement)라는 말은 심판하다 또는 正義라는 의미가 있으나, 영어의 justice는 히브리어의 미쉬파트라는 의미를 분간해내지 못한다. 미수파트라는 히브리 단어는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은 통일되고 유기적인 성격의 일관된 계획, 어떤 일을 성취하려고 결단한 이의 집요한 연속성을 갖는다. 그 최후의 행동은 우리가 최후의 심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주석학적으로 우리는 미쉬파트라는 히브리 말을 거스르게 된다. 미쉬파트라는 히브리어 단어 한 개가 법, 재판, 권리, 정의, 정의를 위한 司法外的 개입이라는 여러 뜻을 가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의미로는, 아직 우리가 충분히 논의되지는 아니하였지만, 흔히 말하는 최후 심판이라는 궁극적 내용을 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최후의 심판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미수파트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좌우된다. 1. 舊約聖書의 正義觀 세속 형법학에 있어서의 應報刑主意(Theorie der Vergeltungsstrafe)는 사상적으로 볼 때, 16세기의 자연법적 계몽사상에 기인한다. 즉 17-18세기 프랑스를 기점으로 Hugo Grotius, T. Hoppes, J. Locke, C. Montesquieu, J. J. Rousseau 등에 의한 자아발견이라고 하는 계몽사상에 의하여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에 그 터를 두고 있다. 응보형주의의 주된 관심은 형벌의 본질을 응보에 두고, 형벌이란 범죄에 대한 제재로서의 응보라는 사상이다. 즉 이 점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거니와 하나님의 그것은 바로 언약의 파기에 대한 피의 보복인 것이다. Ⅰ. 하나님의 정의 미슈파트 - 미란다 260, 앨룰 3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 주신 그 자유 안에(갈 5:1), 율법에서의 자유 안에, 그리고 죄와 죽음과 특히 자아로부터의 자유 안에(롬 6:7-11, 14; 7:24-8:2) 굳건히 서 살도록 한다. 그렇지만 자유의 완전한 향유는 종말에 가서야 가능하다. 따라서 종말이 오기까지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자유인으로서(고전 7:22),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는 자로서 살아야 한다.
1. 본문: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 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 랑 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니라 (1)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라"(갈 6: 2; 6: 5). 여기서는 2절과 5절을 서로 대조하기 위하여 중간의 말씀을 생략하였다. 2절은 자신이 마땅히 지어야 할 짐 외에도 형제의 짐을 질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법보다 우세하며(요 7:23), "하나님의 법"(롬 7:22-25)을 능가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이며(요 15:12), 다른 사람이 진 짐을 도와주는 것도 그 일부이다. 지금까지 가장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죄의 짐을 진 분이며(사 53:3-10), 그분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법은 그의 사랑의 계명이다(요 13:34). 그것은 율법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그의 창조적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의 원칙이다. 여기의 "法"( , Law)이라는 낱말에는 풍자적인 뜻이 있다. 즉 이전에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짐을 졌으나 이제는 그 짐을 벗고 그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라는 짐을 지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을 가장 극명하게 대조시킨 대목이다. 노모스( , Law, 律法)는 바울과 그의 대적자들이 아주 직접적 관심을 가지는 유대인의 토라이다. 히브리어의 토라와 희랍어의 노모스는 영어의 Law 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토라는 하나의 교훈(instuction)을 의미하고 노모스는 관습적인 법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다. 바울이 사용한 법이라는 말은 명령어로서의 성격이 다분하다. 그리고 이 말은 당시 갈라디아 사람들의 독특한 문제의 상황에 있어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것을 그렇게 무뚝뚝하게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바울이 여기서하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요한 복음서 13: 34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라고 하신 것 이상은 없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nothing) 무엇이라(something) 생각하면" 이라는 의미이다. 참으로 된 사람은 자신을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되지 못한 사람은 된 줄로 생각하는 법이다. 자신을 무엇인 것처럼 생각하고 범죄한 자를 억압하고(짐 진자를 억압하고) 그 고통을 더해 주는 사람은 되지 못한 사람이요, 스스로를 속이는 자이다. 도케이( , 보이다)는 온( , 실제로 이다)과 그리고 티스( , 어떤 사람)는 메덴( , 아무 것도 아닌)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별것 아닌 사람일지라도 바울 사도께서는 그 사람의 영적 빈곤을 채워주기 위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속임이니라"( ) 이 말은 신약성서에는 유일하게 사용된 말이다. 뿐만 아니라 70인 역이나 고전어에서도 나오지 않는 단어로서 바울 사도가 만들어 낸 말로 추측된다. 다만 같은 어원의 명사형으로서 프레나파테스( , 속이는자)가 디도서 1:10에 나온다. 마음을( ), 속이다( ), 생각하면( , 보이다)이라는 말을 연관시키면, 주관적인 속임을 뜻하는 말이 된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이 말을 택한 것은 그런 자는 소위 너무 똑똑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는 비록 다른 사람은 속이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본절과 다음절에는 앞선 절들과 모순되는 말들이 있다. 남의 짐을 지는 것과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 되지 못하면서 된 줄로 생각지 말라는 말과 자기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는 말, 짐을 서로 지라는 것과 각각의 짐을 지라는 것 등이다. 그러나 문자적으로는 대립이 되고 모순되는 듯이 보이면서도 신앙생활의 체험에서는 조화가 되고 일치되는 일들이다. 逆說을 피하면 眞理를 구하지 못한다. 바울이 각 사람이 그 자신의 에르곤( , 업적)을 살펴보도록( )한 것은 製鍊所에서 純金을 골라내는 것을 뜻한다(벧전 1:7). 거기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후반부의 카우케마( , 자랑하다)는 바울의 용어로서 그의 서신에 35회나 사용되고(바울 이외에 야고보에서 단 2회 사용됨), 기쁨을 동반하는 자랑이고 큰 말로 승리적인 자랑인 것이다. 남을 평하고 남과 비교하여 얕은 교만에 잠기는 상대적 자랑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중에 얻어지는 내심의 자랑이며, 절대적인 자랑이다(고후 12:9-19 참조). 본문에 제시되어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생활상의 윤리적 원리이다. 우리는 모두가 짐을 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짐을 홀로 지고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전제가 이 명령에 선행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를 홀로 지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짐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堅忍의 禮로 여긴다. 실제 그러한 견인은 장한 일이다.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은 서로 돕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基督敎 倫理가 아니라 차라리 禁慾主義的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그리하면 너를 붙드시리라"(시 55:22) 및 수고하고 짐 진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약속(마 11:28)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에게 고유하게 예정된 거룩한 부담자(burden bearer)가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간적 도움을 구하는 것은 연약한 증거라고 論斷한다. 이것 역시 심각한 오류이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와 짐을 지실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십자가의 구속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짐들, 즉 근심, 걱정, 의심, 유혹 등의 경우는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음은 그가 우리를 권고하시기 때문이다(벧전 5:7). 그러나 그가 우리의 짐을 담당하시는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유대를 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로 짐을 져주는 인간적 유대관계는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짐을 홀로 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 안의 친구로 하여금 그것을 우리와 더불어 나누어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 짐을 서로 져 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3. 본문의 논리적 구조분석 1. 하나님의 정의로서의 그리스도의 법 2. 성령의 열매로서의 그리스도의 법 3. 사랑과 정의의 변증론
第 四 章 그리스도의 法은 律法의 完成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롬 13:8). 사도의 갈라디아 서신을 기독교의 大憲章(Magna Chartar)이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헌장에 대한 각 條文이라고 한다. 바울 사도의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로마서는 구체적인 긴급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서신이 아니다. 본서는 복음 진수들에 대한 차분한 해설로서 바울에 의해 기록된 어느 것 못지 않게 논리가 정연한 서신이다. 이 논증문의 대 주제인, 義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모든 인간을 위한 유일한 구원 수단이라는 것이다. 로마 교인들은 이미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바울 선생께서는 기독교의 메시지 전체를 전할 필요성을 갖지 않았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로마교회에 자신을 소개하면서 특별히 하고 싶은 말만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본서의 내용은 차분하면서도 매우 교리적인 성격을 띄우고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의 사상과 교훈 속에서 완성된 내용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께서 로마서의 어느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이미 언급한 내용이나 또는 앞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내용과 따로 떼어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를 넘어뜨리거나 죄짓게 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하여야 한다"(롬 14:13). 이제껏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욕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이다(롬 1:24, 26 전단 참조). 비록 아무리 자기가 잘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죄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며, 남을 판단하는 일은 바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롬 2:1 참조).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피 흘림에 의하여 우리의 죄를 참고 눈감아 주셨다(롬 3: 25 참조).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신 것은 우리가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올바른 관계를 찾아 주신 것이다. 다만 하나의 의무를 주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을 받게 된다. 第 一 節 인간상과 법******몰트만 인간, 84 라드부르흐 Ⅰ. 聖書의 黃金律
Ⅰ. 이웃법-이상적인 인간의 법****지승원 박사논문과 법과 사회철학 창간호**** Ⅲ. 가난한 자****하나님과 돈, 기독교사상 1990. 5월, 기타**** 성서가 말하는 네 이웃은 분명히 가난한 사람을 가리켰다. 예수께서 관심 하신 것도 가난한 이웃, 버림받은 병든 자를 일컬었다. 그러나 부자에 대해서는 냉담하셨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이 말씀은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행복했던 사람들을 벌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안이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보다는 돈이 그에게 충분한 도움을 주고 돈의 위안이 그에게 충분한 소망을 준다. 부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를 변명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성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가난한 자는 돈이 없다. 오늘날의 사회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소유함으로써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은 사회주의 체제에서보다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더욱 실감나는 표현이다. 성서의 가르침에서 가난을 말할 때 그 모습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지만, 성서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1. 구약성서의 가난한 자
*이하의 진술을 오늘날의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구원사적으로 논의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모든 宗敎가운데 基督敎처럼 歷史를 愼重히 여기는 宗敎도 없다. 실로 기독교는 역사를 近代의 哲學的 歷史觀은 近代世界의 思想的 根幹을 이루고 있다. 近代神學의 자세도 近代哲學의 歷史觀에 그 근거를 두고 聖經의 歷史的, 批評的 硏究方法을 탄생시켰으며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非聖經的' 역사 연구방법이라 한다. 희랍어 "Historia"에서 유래한 "Historie"라는 용어도 역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Historia는 본래 연구 또는 탐구하여 얻은 지식을 의미하였다. 즉 Historia의 동사형이 Historein(조사하다)이므로 특별히 역사의 조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연구하여 記述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事實關係를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독일어의 Geschichte는 事實을, 희랍어의 Historia는 記述을 나타내지만, 두 용어는 역사에 있어서 사건 자체뿐만 아니라 역사의 지식, 역사의 연구, 역사의 기술, 사학 등에 구별없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근대신학에 있어서는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의도적으로 구별되는 용어들이다. 近代神學에 있어서 역사의 개념을 일반 普遍史(世俗史)와 救贖史(實存史로서 史實性을 초월하는 본질적, 본래적 역사)로 구별하였다. 世俗史(Weltgeschichte)에 대비되는 말을 우리는 救援史 또는 救贖史(Heilsgeschichte)라고 한다. 이 때 구원 또는 구속을 의미하는 영어의 "salvation"은 독일어의 "Heil"이라는 단어만큼 많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원래 "Heil"이라는 말은 病든(sick), 世俗的인(profane), 不完全한(imperfect) 등과 의미론적으로 대조되는 病을 고치다(heal), 健康(health), 歡呼(hail), 亭亭한(hale), 聖스런운(holy) 그리고 全體(whole) 등을 한꺼번에 의미한다. 따라서 같은 구속사를 의미할지라도 독일어의 "Heilsgeschichte"가 영어의 "history of salvation" 보다 넓은 의미 영역을 갖는다. 동시에 이는 역사의 개념과 구속 혹은 구원의 관념을 서로 밀접하게 통일시킨다.
우리가 역사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역사의 과정 속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우리의 임무이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당위질서이다. 우리에게 역사적 통찰력이 없다면, 우리는 역사의 과정 속에 들어 있는 단순한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지도하는 사람들은 그릇된 길로 빠지게 될 것이다. 역사 속에 참여한다는 말의 뜻은 과거가 현재 속에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때 이 과거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또한 이 말은 우리가 현재 속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고 미래를 예언해서 용의주도하게 이를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거를 다룸에 있어서 역사가가 절대적인 심판자의 기능을 떠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거의 것 중, 어떤 것이 계속 존속할 가치가 있고 어느 것이 폐기되어야 하고 어느 것이 수정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함에 있어서 역사가는 왕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역사가는 미래를 예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미래에 있을 것의 기초를 놓을 권리는 역사에만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역사를 결합시킨 "歷史哲學"이란 용어를 "神學的 歷史解釋"(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history) 즉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된 "歷史神學"(theology of history) 과 구별하여 역사철학이란 용어를 신학적 역사해석과 구별하여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에서 사용한 것은 볼테르(Voltaire, 1694-1778)이다. 볼테르에 의해 개발되어 "社會經濟史"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종류의 역사에 그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당시 볼테르가 생각하는 역사철학의 개념은 역사에 있어서 과학적(철학적) 진술은 쾌쾌묵은 왕실의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 경제사 등을 다루는 학문분과 정도를 역사철학의 범주로 간주한 것이다.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파악한 볼테르에 있어서 역사란, 여러 국민의 도덕, 종교, 예술, 관습 속에서 구현되는 '인간 정신'의 역사로서 포착하였다. 그는 신의 攝理가 차지하지 하고 있던 자리에 인간의 의지나 이성이 대신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였던 그는 '정통기독교를 인류의 최악의 적'이라고 혹평한 바 있다. 역사신학이라는 명칭은 여러가지 이유로 주장되어 왔다. 이유는 역사를 서술하고 정의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지만, 칼 바르트의『교회 교의학』의 英譯者이자 풀러 신학대학원의 역사신학자인, 브로밀리(Geofrey W. Bromiley)도 말하기를, 理想的인 歷史神學이란, 人間의 可能性을 超越한다. 참으로 이상에 대한 관념조차도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에 근접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절망적으로 부족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고 하면서, 역사신학을 저술하는 것은 모험을 수반하고 있으며 목표, 방법, 자료, 접근에 대한 일련의 선택들에 기초한다고 토로하였다.
역사의 단락은 완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의 미래를 향하여 열려있다. 그 영향은 그 역사의 단락 자체를 위해서 유익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상가나 신학자의 영향은 그들이 죽은 후에도 그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교회에 있어서도 역시 설립된 시대와 그 후에 계속되는 역사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 관계는 신앙과 교회의 맥락 그 자체와 더불어 시작된다. 교회는 여러 종파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역사의 여러 시대들을 통해서, 교회의 설립에서 오늘날까지 일치를 고백한다. 주님이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에 교회는 미래를 향하여 이 일치를 믿는다. 다른 한편으로 신앙은 역사에 대한 회고를 자기 영광의 수단으로 만드는 것을 거절하였다. 역사적인 서술은 그리스도인 자신이 세상에서 어떻게 보여졌는지, 또 그들이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물어야 할 뿐만 아니라 밖으로부터 기독교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 철학자의 눈을 가지고 교회를 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이상 - (1998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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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어떠한 신학이나 교리적 체계도 하나님을 확증하고 측정하는 절대적인 바로미터 일 수는 없다. 신학은 하나님께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단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큼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일 뿐이다. 아무리 위대한 신학적 판단과 교리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역시 그것은 한 시대 속에서 그 시대의 과제에 응답하고 그 시대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려는 신학자들의 노정일 뿐이다. 바울 신학을 묘사하는 일은 그의 사고를 체계화하는 일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그러한 체계화의 형태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만일 그러한 체계화가 바울의 신학을 그의 사고와는 동떨어진 범주에다 가둬 맞추려고 하거나 혹은 단순하게 미리 엉뚱한 신학적 체계를 세워 놓고 거기에다 바울의 사고를 하나의 예증으로 갖다 붙이려 시도한다면 그 체계화는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 1. 용어의 이해 (1) 율법의 용례 율법이란 히브리어로 '토라'( ), 헬라어로는 '노모스'( )라고 하며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신앙과 행위에 따른 명령으로서 사회적·제의적 규범을 포함한다. 이와 같이 규범으로서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통해서도 보여지며, 인간의 양심 가운데도 숨겨져 있으나 본질적 의미에서 명문화된 율법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과 백성과의 본질적인 관계 형성인 십계명에 있다. (2) 복음의 의미 '복음'( )이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일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말한다. 헬라언어권에서 사용된 복음은 '유안겔로스'( )라는 명사에서 유래하였다. 유안겔로스가 도착했다고 하는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이 도착했다는 뜻이며,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준 대가로 주어지는 상이 '유안겔리온'( )이었다. 이런 식의 표현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이에게 주어지는 상'의 개념은 사라지고 단지 '기쁜 소식'만을 의미하였다. 2. 바울의 율법관 (1) 율법의 의의와 목적 하나님의 백성이 범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죄를 드러냄에 의하여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타락한 인간의 저주받은 본성에 한계를 설정하기 위하여 율법이 선포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율법은 죄인들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어도, 그들을 구속할 수는 있다. 그것은 죄의 상처를 치유하고 낫게 할 수는 없어도 그들을 구속할 수는 있다는 뜻이다. 3. 율법과 복음의 관계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역사적·내용적 맥락에서 파악된다. 구약이 메시아가 강림하기 전의 은혜계약의 시기라면, 신약은 그의 강림 이후 오늘 우리가 사는 지금까지의 시기이다. 구약과 신약이 종종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혼용되고 있는 바, 이는 오해와 혼란을 일으킨다. 주제 자체와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용어의 기원과 의미를 정확히 함으로써 논의의 진행을 원활히 하고자 한다. 율례라는 용법으로서 히브리어의 '미쉬파트'라는 의미를 영어의 'Justice'(정의)는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은 통일되고 유기적인 성격의 일관된 계획, 즉 어떤 일을 성취하려고 결단한 이의 집요한 연속성을 갖는다. 그 최후의 행동은 우리가 최후의 심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석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미쉬파트라는 히브리말을 예의 주시하지 않았다. (1) 구약성서의 정의 하나님의 초월적인 속성과 공유적 속성의 중앙에 '여호와의 의'가 있다. 먼저 여호와에 대하여 의롭다고 할 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해야 할 일을 다한다는 것에 보다는 심판자 편에서 공정한 판결과정과 그 유비가 있다는 점이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은유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기 위해 재판정에 나타나는 것으로 표현된 곳뿐이다(시 51:4). 이 외에 대체로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다. 그런데 공정하다고 함은 그 위에 있는 법에 충실할 때 우리는 의롭다고 한다. 그러나 이 법은 하나님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안에 있는 법이다. 이 법은 독단적인 명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법이 없고, 있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성에 일치하는 것이므로 의로운 법이다(신 4:8). (2) 신약성서의 정의 신약 성서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응보에서 사랑으로 그 슬로건은 완전히 역회전한다. 예수의 엄숙하고 단호한 부정은 바로 이 대갚음 즉 앙갚음, 복수, 응보, 보복 등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 5:38-41)라고 함으로써 복수에 대한 강렬한 부정을 하였다. 2. 바울의 의인론 (1) 의인의 개념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에서 유대인은 율법의 소유와 준수에 의해서 특징화되는 사람들이며 역으로 율법의 준수는 유대인의 종교적 존재양식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는 유대인 된 신분을 나타내준다. 그들은 율법에 의해 요구되는 행위들을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이 율법의 백성 안에 속해 있다고 간주하였고, 또한 그런 행위들은 자신이 율법의 백성에 속한 구성원임을 표시해주는 행위들이기 때문에 자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연히 율법은 외적으로 유대인에게 울타리와 경계선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 짓는 사회적 기능을 가지게 된다. 유대인은 율법의 백성 곧 언약백성이기 때문에 이방인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자의식을 지녔으며, 따라서 그들은 율법에 근거해서 이방인을 죄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율법은 '율법의 행함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행함의 원리를 본질로 삼는 율법의 영역 안에 사는 것을 말하며(레 18:5) 따라서 율법의 저주가 작용하는 영역 안에 갇혀있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에 있어서 '칭의'라는 이 단어는 그가 전한 복음의 중심이며, 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다.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단어의 뜻을 간단히 말하면, '의롭게 되다' 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바른 삶, 참 생명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갈 3: 26)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구원사건(참조. 갈 3:25-27)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 사도 바울의 무차별 의식은 믿음에 의한 의의 완성이다. (4) 의인의 실존상황 바울의 의인의 교리는 그의 서신 가운데서 특별히 전개되고 강조되었다. 의의 법정적 개념은 그 근원을 구약 성서에 두고 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유대교에 있어서의 율법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즉 의는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율법은 단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감시자에 지나지 않았었다. Ⅳ.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바울의 논점 '그리스도의 법'은 그의 사랑의 계명이다(참조. 요 13:34). 그것은 율법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그의 창조적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의 원칙이다. 여기의 '법'이라는 낱말에는 풍자적인 뜻이 있다. 즉 이전에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짐을 졌으나 이제는 그 짐을 벗고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라는 짐을 지라는 뜻이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는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을 가장 극명하게 대조시킨 대목이다. 1. 그리스도의 법의 개관 (1) 갈라디아서 6:2과 고린도전서 9:21에서 그리스도의 법 (2) 그리스도의 법과 짐의 관계 갈라디아서 6:2에 제시되어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생활상의 윤리적 원리이다. 우리는 모두가 짐을 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짐을 홀로 지고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전제가 이 명령에 선행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를 홀로 지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짐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견인의 예로 여긴다. 실제 그러한 견인은 장한 일이다. (3) 갈라디아서 6:2의 논리적 분석 "서로 남의 무거운 짐을 져줍시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룰 것입니다"(갈 6:2). 서로 사랑하라는 사도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사랑 실천의 구절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내 몸을 불 속에 던져서 비록 남을 도와주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다만 어떤 의무감에 의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갈라디아서 6:2과 6:5에 나타난 짐의 의미론적 차이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갈 6:2a)에서 우리는 믿음이 약하고 짐 진자들을 낙심시키지 말고, '그들의 짐을 지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자세야말로 율법주의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용서와 관용이야말로 은혜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정의로서 그리스도의 법 (3) 성령의 열매로서 그리스도의 법
Ⅴ. 결론 1. 요약 및 평가 사도 바울의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 있어 온지 2000년이 되도록 양자의 관계는 확정되지 않고 지금도 무릇 교회에서는 율법과 복음이 어떠한 관계에 서 있는지도 모르고 오늘은 율법, 내일은 복음, 하는 식으로 서로 적당한 관계에서 어우러져 선포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개신교회의 신학자로 인정받고 주장되는 것은 그의 서신,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주장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소위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2. 제언 이제 우리는 성서가 가르치는 사랑 실천의 강령에 따라 이웃의 짐을 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여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의 가난한 이웃은 진정한 우리의 이웃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이웃되게 하여야 한다.
* 참고문헌 1. 국내서적 국제신학연구회.『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성화』서울: 국제신학 연구원, 1997. 2. 번역서 Bolton, Samuel.『크리스챤의 자유의 한계』박우석 역. 서울: 생명의 말 씀사, 1984. 3. 주석서 및 사전류 4. 제2차서적 Dodd, C. H. " ," Studia Paulina(1953).
* 국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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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의 그리스도의 法(6:2) Ⅰ. 갈라디아서 개관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 주신 그 자유 안에(갈 5:1), 율법에서의 자유 안에, 그리고 죄와 죽음과 특히 자아로부터의 자유 안에(롬 6:7-11, 14; 7:24-8:2) 굳건히 서 살도록 한다. 그렇지만 자유의 완전한 향유는 종말에 가서야 가능하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스런 자유"를 기다린다(롬 8:21). 따라서 종말이 오기까지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자유인"(고전 7:22)으로서, "그리스도의 법 아래"( , 고전 9:21)있는 자로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이 사랑의 법은 "서로의 짐을 지는 것"(갈 6:2)으로서 兄弟的 矯正을 논하는 의미이다. 로마서 13:8-10에서 바울 사도는 보다 명시적으로 십계명 중 5, 6, 7, 8 계명을 반복하고 그 계명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 사람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라고 결론을 짓는다. 이 법은 물론 "성령의 법"이다. 1. 受信者 2. 年代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영감을 받아서 쓴 저술이다. 바울은 그의 제1차 전도 여행(행13장-14장) 이후와 예루살렘 총회(행 15장) 이전에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 예루살렘 총회가 A.D. 49년에 열렸으니까 A.D. 48년이 이 서신의 기록 연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3. 背景 5. 特徵 사도회의는 갈라디아의 위기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의 상황이다. 공식대표자들은 사과하였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무리 속에는 사도회의 전이나 사도회의 후에도 여러 가지 흐름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갈2:4). 단호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준수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개별적인 논거나 선동방법, 그리고 청중의 동향에 대해서는 전승되고 있지 않다. 다만 구약성서가 성서로 인정된다면, 예수의 아버지가 구약성서의 하나님과 동일시된다면, 그토록 중요한 내용이 무효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의 한계는 어느 정도인가? 심지어 도덕률도 폐기되어야 하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생활태도의 원칙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가? 바울의 가르침의 결과는 벌거벗은 부도덕, 즉 자유방종주의인가? Ⅱ. 갈 6: 2-5의 주해 1. 본문 (2) 그리스도의 법( , The Law of Christ) 본문에 제시되어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생활상의 윤리적 원리이다. 우리는 모두가 짐을 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짐을 홀로 지고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전제가 이 명령에 선행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를 홀로 지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짐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堅忍의 禮로 여긴다. 실제 그러한 견인은 장한 일이다.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은 서로 돕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基督敎 倫理가 아니라 차라리 禁慾主義的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그리하면 너를 붙드시리라"(시 55:22) 및 수고하고 짐 진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약속(마 11:28)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에게 고유하게 예정된 거룩한 負擔者(burden bearer)가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간적 도움을 구하는 것은 연약한 증거라고 論斷한다. 이것 역시 심각한 오류이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와 짐을 지실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십자가의 구속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짐들, 즉 근심, 걱정, 의심, 유혹 등의 경우는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음은 그가 우리를 권고하시기 때문이다(벧전 5:7). 그러나 그가 우리의 짐을 담당하는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유대를 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로 짐을 져주는 인간적 유대관계는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짐을 홀로 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 안의 친구로 하여금 그것을 우리와 더불어 나누어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 짐을 서로 져 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Ⅲ. 본문의 논리적 분석 "서로 남의 무거운 짐을 져줍시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룰 것입니다"(갈 6:2). 서로 사랑하라는 사도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사랑 실천의 구절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내 몸을 불 속에 던져서 비록 남을 도와주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다만 어떤 의무감에 의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의 짐을 지어 주라"라는 指示語는 世俗的 法律 條項에서 前提部(또는 條件部)라고 한다. 다음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룬다"라고 하는 후반부는 結果部라고 한다. 이것은 일정한 조건이 만족하게 되었을 때, 일정한 결과를 歸屬시킬 수 있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결과부는 전제부를 전제하여야 하고 또한 전제부는 결과부를 선행시켜야 한다. 좀 더 논리적인 표현을 부가한다면, 自然法則이란 A가 있으면 B가 '있다'(is)라고 하는 취지의 언명인데 반하여, 道德律이나 法律에서의 行爲의 準則은 A가 있으면 B가 '있어야 한다'(ought to)고 하는 논리이다. 이것은 存在(is)와 當爲(ought to)와의 相違, 因果性과 規範性과의 相違이다. 어떤 型의 인간행동을 명하는 일반적인 규범을 전제한다면 그 전제한 규범에 적합한 것은 정당한 것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은 부당한 것으로 특징 지울 수 있다. 이러한 언명을 우리는 價値判斷이라고 하며 이 규범이 일반적인 규범임을 전제 할 경우에는 객관적 의미에서의 가치이다. 가치란 평가되는 대상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전제된 규범에 대해서 그 대상이 갖는 관계인 것이다. 가치는 자연의 사실에서 연역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 있다고 하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도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자연학이나 인과의 원리가 아니라, 도덕률 또는 법률의 권위자가 행위 하는 의미에서 당위라고 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사도가 말하기를,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사랑의 의무라고 했다"(cf. 롬 13:8). 우리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본문의 명제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의 최종적 결론이자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의 정의론의 기초를 이루고 나아가서,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고, 우리가 완성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이다"(cf. 옙 3:17-19). Ⅳ.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인가? -결론에 갈음하여-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지적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법은 다른 법과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그리스도의 법은 크리스챤이 그의 삶의 정황(situation)에 맞는 어떤 규율을 정해주는 하나의 법전이다. 예를 들어 재산권 분쟁이 있는 어떤 사람에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눅 12:14)라고 예수는 말했다. 그리스도의 법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산상수훈에서조차 우리는 행위에 관한 잘 정리된 어떤 규율의 법전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행동할 때 어떤 정신으로 행해야 할 것을 현저하게 예시하여 주는 내용을 보여 줄 뿐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決疑論(Cauistry)자들이 만들어 놓은 어떤 도덕적 규칙의 법전으로 환언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관한 규칙과 같은 법전에서 예수는 사도 바울과 같이 오직 위험만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의 법은 오히려 사소한 규칙을 넘어 위대한 이상과 근본적인 원리를 바라보도록 인도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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