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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法神學

로마서, 바울의 정의론

by 이덕휴-dhleepaul 2018. 7. 10.

로마서, 바울의 정의론 책이라는 숲

2017. 6. 1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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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law Justice: The Messianic Politics of Paul

Theodore W. Jennings Jr.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3)



바울, 제국,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


글_ 한수현


 

바울의 메시아적 정치론에 대한 짧은 소개서 

몇 년 전 하바드 대학의 한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을 펴들고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무장해제되어 ‘정의’가 가지는 복잡함에 주눅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저자가 슬쩍 끼워 놓은 답안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공동체주의’라는 살짝 매력적인 단어를 꺼내놓고 결국 ‘정의’의 실현을 국가 정치의 장으로 제한하고, 열린 토론에서 ‘최선’이나 ‘차선’의 선택이 바로 ‘정의’라고 하는 결론에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저자는 그것이 자신의 완전하지 않은 의견이라고 밝히기는 하였다.)

물론 내용 중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었다. 종교적 가치가 ‘정치’와 ‘정의’를 논함에 분리되기 어렵다는 부분이다. 하지만 종교적 가치가 갖는 편향성을 말하며 이내 화들짝 물러선다. ‘정의’를 말함에 종교가 빠질 수 없다고는 하지만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말일까? 오히려 필자에게는 ‘정의’를 말함에 있어서 서양 종교의 뿌리가 된 유대교와 기독교를 논하지 않고는 서구 정치에서 정의를 말하기는 힘들다는 주장으로 들렸다. 근대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추구되어 오던 정교분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한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과연 종교, 또는 기독교가 우월한 인종주의나 전투적인 선교주의에 목숨을 거는 공동체만이 아니라 현대 정치사회에 대안이 되는 정치론이나 정의론을 생산할 수 있을까?

철학과 종교, 그리고 정치에 관한 담론들이 분리되기 이전에, 로마제국의 엄청난 패도 앞에 유대교의 한 지식인이 제국의 정의에 대항하여 새로운 ‘정의’를 외치며 나타났고, 그가 쓴 글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우리가 신약성서라고 부르고, 또한 그 안에「로마서」라고 부르는, 바울이라는 쓴 사람이 쓴 서신. 바로 그 서신이 진정한 ‘정의’를 말하는 책이라고 테오도르 제닝스(Theodore W. Jennings Jr.) 교수는 말한다. 바로 이 글이 소개할 책, Outlaw Justice: The Messianic Politics of Paul(Stanford University Press, 2013)의 저자인 제닝스는 바울의 편지 중 하나인「로마서」가 정의란 무엇이며 어떻게 구현해 낼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제닝스 교수는 바울 텍스트의 다양한 해석의 층위를 인정하면서도 정의론적 관점에서 읽는 것이「로마서」를 바르게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흔히 ‘이신칭의’(以信稱儀, justification by faith)라고 말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설파하는 교리적 근거로 사용되는 「로마서」가 제닝스 교수의 손에서 메시아에 대한 충성으로 구현하는 정의로 탈바꿈 되는 것이다.

바울 서신을 정치적 관점에서 읽는 것은 철학과 성서신학 내에 소위, 트랜드를 형성하고 있다. 지젝, 바디우, 아감벤 등이 바울의 서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고, 탈식민주의나 맑스주의 성서신학자들도 새롭게 바울을 읽는다. 그 핵심에 메시아 정치학에 대한 담론이 있다. 서구 지식인들과 신학자들에게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바울 새롭게 읽기는 크게 두 가지 즉, 기독교신학 외적인 흐름과 신학 내적인 흐름이 있고, 제닝스 교수는 정확히 그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책을 썼다. 그 두 흐름을 살펴보자.

기독교 내에서 오랜 세월동안 루터와 칼빈 식의 바울 서신 읽기는 개신교신학의 근거로서 받아들여졌고, 이후의 바울 신학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칭함을 받는 사실성에 대한 연구와 논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과연 믿음으로 구원이 끝나는 것인가, 행함은 의미가 없는가, 율법적인 신앙은 의미가 없는가 등의 기독교가 인간 구원에 대한 단 하나의 유일한 대책이라는 식의 기독교 우월론을 생산하는 데 중요한 해석의 근거가 되어온 것이 바울 서신이었다. 정작 예수는 반(反)율법주의를 주장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이러한 해석은 필연적으로 반유대주의적 신학을 기독교에 불어 넣었다. 기독교는 율법적인 유대교를 뛰어넘는 고등종교이고 유교, 이슬람교, 불교 등도 이에 다르지 않다는, 그래서 오직 예수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바울에게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해석들을 극복하는 흐름들이 성서신학계에서 일어났다. 물론 아시아신학이나 민중신학에서 이미 있었던 흐름들이지만 서구사회는 2차 세계대전의 유대인들에 대한 대학살로부터 정신을 차린 이후에야 반유대주의적이고 종교우월주의적 해석에서 벗어나 바울 서신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도출된 성과들은 다음과 같다. 바울은 유대교적 전통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즉, 바울은 반유대적인 가치로 기독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토록 혹독하게 비판하는 율법적 신앙 또는 율법적 정의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최근에 이르러서야 바울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유대교가 아니라 로마제국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바울이 말하는 율법이라는 것은 모세의 율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법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보고 이를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보았고 그의 유대교적 전통에서 이를 새롭게 해석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는 작금의 경제 제국이 등장하는 시대에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신학 외적인 흐름에서 바울의 서신이 중요해진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자본주의의 끝도 없는 질주를 민주정치체제가 막아낼 수 없으리라는 의심이 확신이 되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레닌주의의 재조명이 이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자본주의 안에 살면서 자본의 힘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비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어려운 질문에 레닌은 형식(form)이 내용(content)에 선행한다는, 당이 당의 정신과 목표보다 먼저라는, 다른 의미로 말하면, 새로운 비전이 먼저가 아니라 희망을 생산할 수 있는 형식(form), 집단, 또는 공동체의 창설이 먼저라는 해답을 내어 놓았다. 이에 착안해 루카치와 지젝은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의 당의 형태로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고 보았다. 즉, 바울이 제국에 대한 대안적 정치학으로 새 정치를 생산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 필생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것이 바로 에클레시아, 소위 현재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집단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만이 제국의 정치학을 벗어난 형태의 정치적 비전, 정의에 대한 인식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바울의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엥겔스와 맑스가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초기 공산당의 조직에 대한 영감을 얻었고, 바디우와 아감벤이 국민의 삶 자체를 통제하는 국가 형태에 유일한 탈출구를 바울에게서 찾는 것은 그래서 공감할 만하다.

이러한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제닝스 교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어거스틴부터 근대의 바르트, 현대의 지젝과 같은 철학자들과 브리짓드 칼과 같은 성서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소개하며 「로마서」를 새롭게 읽어야 함을 제안한다. 아마 독자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예수를 여호수아로, 의(righteousness)를 정의(justice)로, 그리고 믿음(Faith)를 충성(Loyalty)로 읽는 독해에 놀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희랍어 번역이고, 예수는 아람어로써 히브리식 이름인 여호수아를 말하는 것으로, 약속의 땅으로 신민들을 이끌 지도자를 의미한다. 또한, ‘의’라는 표현은 영어식 번역의 오류이며 이보다는 ‘정의’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마지막으로 믿음(피스티스; Tispis)는 충성심(Loyalty)로 번역하는데, 충성심은 헬라어 ‘피스티스’의 더욱 절절한 번역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지면(신실함이라고 생각하면 충성심이 가지는 의미를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야 말로 바울의 새로운 정의론이라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 제닝스는 바울의 시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바울해석의 역사와 정치론적 해석의 역사를 쉽고도 깊게 서술한다. 간단한 서론이 끝나면, 그야말로 「로마서」 1장 1절로부터 마지막까지 독자에게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며, 과연 새로운 정의와 그 정의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어떤 것인가를 생생한 바울의 증언으로 들려준다. 제닝스의 글의 장점은 쉽다는 것인데, 그가 사용하는 일차자료들의 고급정보에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제닝스의 설명과 함께 새로운 정의의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신념을 듣다보면 「로마서」가 현대의 새 정치를 갈구하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외침임을 알게 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을 짧게나마 정리해 보도록하자. 필자가 생각하는 두가지의 개념 (토탈리티, 환대로서의 정의)을 핵심으로 삼고 제닝스가 이해하는 로마서에 접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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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리티 (Totality- 전체성, 총체성)

오랫동안 성서학자들은 바울이 인간 개인의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고 생각해왔다. 제닝스는 이에 반하여, 바울은 “사회적 콘텍스트로부터 분리된 개인의 죄의 총합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공동체들을 비판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죄는 개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 (Social Totalities)가 불의 (Unjust)에 기반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1] 이는 일견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총체성 (Totality)의 개념과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932)을 떠올리게 한다. 즉, 불의의 원인을 추적하다 보면 한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불의를 생산하는 구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데리다가 ‘법의 힘’ (Force of Law)에서 법이 정의의 생산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과 같이 제닝스는 바울이야 말로 유대와 로마의 법이 인간 사회를 불의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고 있음을 알아차린 인물이라고 본다.

헬레니즘 시대로 부터 플라톤이나 솔론과 같은 천재들은 법이야 말로 인간 사회에서 정의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더욱 나은 법체계를 만드느냐였다. 그러나 바울은 “정의와 법사이에는 회복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하는데, 그러므로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법 밖에서 도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2] 이신칭의는 바울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으며 이는 충성심(피스티스)를 통하여 구체화된 정의가 바로 복음이라는 바울의 대명제였던 것이라고 본다. 제닝스는 데리다의 정의에 대한 이해가 바울 서신, 특히나 로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시한다고 보는데, 데라다가 정의는 정의 밖에서 그리고 정의를 넘어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 것 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정의가 법의 행함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조르지오 아감벤이 그의 저서인 ‘남겨진 시간’에서 바울을 제대로 이해한 유일한 인간은 발터 벤야민이라고 했는데, 데리다야말로 벤야민의 애독자라는 것이 어쩌면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법밖의 정의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환대로서의 정의 (Justice as hospitality)

환대로서의 정의의 개념은 제닝스가 그의 이전 저서인 Reading Derrida, Thinking Paul에서 이미 데리다를 전유하여 바울의 중요 주제로 제시한 것이지만 이 책에서는 좀 더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제닝스는 데리다의 저서인 ‘법의 힘’이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실천적인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데, 바로 이 저서에서 데리다는 해체와 정의를 하나로 묶어 사용하였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데리다의 환대에 대한 질문들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법 – 정의 – 환대라는 연결고리가 데리다의 해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타났으며 이러한 징우를 바울서신에서 읽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해체가 불가능한 가능성이었던 것처럼, 바울에게 충성(믿음, 신실함)은 불가능을 믿는 행위였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처럼,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야말로 해체적 정의와 가까운 불가능성 위에서의 신실함이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은 불가능함속에 가능성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이는 완전히 인간이 만든 체계밖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메시아가 유대인들에세 거절당하고 로마에 의해 죽임당했다가 부활했다는 것은 바로 유대의 법치 사회와 로마의 문명화된 법의 해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메시아를 하나님의 정의로 선포하는 것이 법밖의 정의이며, 이 믿음(충성심)이야말로 정의의 길을 걸어가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3] 메시아에 대한 충성이야말로 정의를 간직하는 것이라면, 그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 공동체에서 어떻게 구체화 될까?

바울은 일단 사회적 불의의 총체적 현실을 인정한다. 비록 하나님의 정의가 선물로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불의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사회는 여전히 죄의 현실 아래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법의 장점이 구체화되는데, 법은 인간이 죄의 현실에 처하여 있음을 알게 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정의가 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바로 이순간이 법이 활동정지 (Inoperative)하는 순간이며, 이것이 바울이 말했듯이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법을 완성시키는 순간이다(Fulfilled). 그리고 남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 밖에는 없다.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이 이방인의 지혜로서도 유대인의 종교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것 처럼, 하나님의 정의는 실로 예측할 수 없다.[4] 여기에서 제닝스가 생각하는 로마서의 정의의 두번째 요소 (첫번째는 법밖의 정의)인 정의의 즉흥성 (Improvisation)이 등장한다. 정의는 계산되거나 예측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의 개념을 인간의 어떤 지식체계로 가두려 하는 시도는 결국 인간 사회의 불의함을 더욱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의 즉흥성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이 바로 정의의 시작이다. 그런데 인간의 지혜로서도 종교전통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면 바울은 어떻게 그 정의를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제닝스는 그 해답을 로마서 12장으로 부터 시작되는 바울의 권면에서 찾는다. “형제들아 네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5] 어찌 보면 뜬금없는 설교로 보이는 바울의 권면이 바로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제시된다.[6] 바울은 정의의 실현하는 도구로서 철학도 종교적 제의나 세상의 어떤 학문이나 기관도 아닌 바로 인간의 몸을 생각했다. 그 몸은 개인의 몸이 아니라 ‘다중이 모여 하나의 완성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장 뤽 낭시 (Jean-Luc Nancy)의 Singular Plural[7]의 개념이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각자의 특이성(Singularity 또는 유일성)들이 전체로서의 다양성(Plurality)과 연결되어 하나의 메시아적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메시아적 공동체에 참여함이다.”[8] 이 메시아적 공동체의 삶 즉흥적(Improvisational) 이면서 개인이기보다는 공동체이며 환대 (Welcoming, Hospitality)의 정신으로 외부로 열려진 공동체임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메시아적 공동체는 어떻게 메시아적 정치론을 만들어 내는가? 이 책의 제목이 법밖의 정의 (바울의 메시아적 정치론)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필자의 관심은 도대체 어떻게 로마서에서 어떠한 형태의 구체화된 정치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였다. 물론 정치라는 것이 하나의 공동체가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본다면 바울의 메시아에 대한 충성을 통해 환대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해가는 것으로 설명은 충분히 설명될 수도 있다. 제닝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울이 주는 좀 더 실질적인 정치학에 대한 가능성을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 (Democracy to-come)의 개념을 통해 제시한다. 이미 바울의 시대 이전에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개념화하였는데, 바울이 시도하는 환대의 공동체가 바로 현실의 모든 형태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더욱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그리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제닝스의 설명을 필자가 나름 재구성해 보았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결국 모든 이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바울의 급진적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공동체가 약해지지 않고 자라났더라면 필시 외부의 힘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살아남기 위해 현실정치와 결탁했다면 원래의 특이성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타자에 대한 환영과 강자와 약자가 서로를 존중하는 정치학은 어찌보면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 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오랜 인간의 역사에서 주변인으로서 억압 받았던 민중들은 한번도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들고 일어설 때마다 위정자들은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근대이후의 시대에는 민주주의의 이념에 힘입어 여성, 성소수자, 노동자, 피식민인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찾고자 투쟁하였으나 너무나 분명한 힘의 차이에 억눌려지거나 그들의 이론적 기반인 평등과 환대의 논리에 스스로 해체되는 결과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너무나 분명한 힘의 차이 앞에서, 때로는 논리의 모순 앞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몸부림은 언제나 아무런 희망없이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그보단 우선, 왜 우리는 아직도 그러한 공동체를 꿈꾸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안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욕망의 잠을 깨우고 있는가? 이 책의 컨텍스트에서 말하자면 제국을 뒤집어 보려는 운동도 아닌, 자신의 논리에 반대하는 진영을 시원하게 논파하는 이론서도 아닌 바울 서신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아 우리의 욕망을 깨우고 있는가? 바로 급진적 평등과 환대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바울의 서신이 쓰여진 이후로 바울의 저작들은 기독교 공동체의 논쟁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바울에게 매혹되어 그의 이름 아래에서 글을 썼던 사람들 (제 2 바울서신의 저자들) 조차도 바울이 말하던 논지와 전혀 다른 논리를 말하거나 심지어 어떤 이들은 바울의 서신을 훼손하려 하였다.[9] 바울을 기독교 신학의 정수로 보고 개혁을 주도했던 마르시온 조차도 바울이 유대인의 역성을 드는 것이 싫어서 로마서 16장에서 유대인들의 이름을 삭제해 버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바울의 서신은 끝없이 사랑 받으면서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왔고, 기독교의 최고의 권위를 부여 받으면서도 스스로 그 권위를 부정하는 텍스트로 우리에게 전해져왔다. 이를 데리다의 용어로 보면 자기면역(Autoimmunity)로 볼 수 있는데, 경찰이나, 군대, 또는 경제들이 정신분석학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결국에는 그들이 무장해제하기 원하는 바로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처럼, 바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서신을 이용하여 자기의 신학에 권위를 부여하고, 여성들이나 성소수자들을 탄압해왔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이 억압하는 그 대상들이 새로운 비전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결과는 낳아온 것이 기독교의 역사이다.[10] 

“메시아적 프로젝트를 보호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결국에는 현실과 타협한다. 그러나 비록 타협하더라도, 또는 그 정반대의 메세지로 변질되더라도, 바울의 메시아적 정치학은 여기 저기에서 새롭게 희망으로 태어나 모든 형태의 지배와 분열의 형태에 저항한다. 바울의 텍스트는 언제나 기존 사회 질서에 어떤 형식으로든 대항해왔다. 이것이 가진 폭팔적인 잠재력은 여전히 우리가 메시아적 정의의 부름과 선포를 듣고 일어나 충성을 서약하게 한다.”[11] 그리하여 바울의 목소리는 계속 남아 우리안에 새로운 저항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데리다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 처럼. “그 어떤 형태의 민주정치보다, 사회민주주의 (Social Democracy) 또는 대중민주주의 (Popular Democracy)보다, 기독교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적들을 환영해야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다른 뺨을 그 적들에게 돌려대는 것이고, 환대를 제공하고, 표현의 자유를 부여하고, 반민주주의에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하며… 만약 어떠한 민주정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 기독교 민주주의야말로 민주정치라는 이름을 받을 가치가 있다.”[12] 그리고 제닝스는 다음과 같이 책을 마친다. “그리하여, 바울의 메시아적 프로젝트는 ‘민주주의 그 자체’라는 말로 설명될 수도 있다. 물론 이 민주정치는 절대로 현존하지 않고 도래할 것(To come)으로 언제나 남아있을 것이다. 이 도래할 민주주의 (Democracy to come)를 바울이 말했듯이 ‘거룩한 정의’ (Divine Justice)라 불러도 될 것이다.”[13]



책을 덮으며 처음 든 생각은 어찌 이리도 데리다와 바울이 잘 어울리는지 누가 데리다고, 누가 바울이며, 또는 누가 제닝스인지 정리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야말로 바울과 이후 이천년의 시간속의 여러 인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바울의 정의의 열망으로 이야기하는 듯했다. 제닝스가 먼저 내딛은 바울신학의 한 걸음이 한국의 여러 독자들에게 새로운 도전과 가능성으로 보여지길 바라며, 곧 출간되는 제닝스의 저작 Reading Derrida/ Thinking Paul이 널리 읽혀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바울과 데리다를 잊는 제닝스의 필생의 노력이 담겨있으며, 데리다와 바울의 차이또한 깊게 다루었기에 법밖의 정의와 함께 읽기에 이상적인 책이 되리라 믿는다.
 



 


  1. Theodore W Jennings, Outlaw Justice: The Messianic Politics of Paul, 2013, 56. 

  2. Ibid., 61. 로마서 3:20-21 참조. 

  3. Theodore W Jennings, Outlaw Justice: The Messianic Politics of Paul, 2013, 94–97. 

  4. Ibid., 152–155. 

  5. 개역성서 롬 12:1. 

  6. 당시 보통의 서신에는 마지막 부분에 도덕적인 권고가 들어가는 것이 하나의 형식으로 쓰였는데, 이에 일군의 학자는 롬 12장을 도덕적 삶을 위한 전형적인 권고라고 보고 이 메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제닝스는 이 부분을 전통적인 헬라서신의 도덕적 권면으로 읽는 것을 반대한다. 

  7. ‘유일한 복수성’이라고 한국에 소개되었으나 번역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영어단어를 그대로 읽어보는 것이 더욱 쉽게 의미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아 번역하지 않고 놓아두었다. 

  8. Jennings, Outlaw Justice, 185.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 이러한 공동체의 예로 제닝스가 한국의 동학혁명 공동체를 들고 있는데, 바울이 생각한 존경과 사랑의 공동체를 본문과 동학운동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9. 바울 서신의 여러부분들이 학자들 사이에서 이후에 편집되거나 덧붙여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거나 그러한 가능성을 두고 논쟁중이다. 대표적인 예로 로마서 16장을 들 수 있는데, 어디까지가 바울의 저작인지를 두고 학자들간에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몇몇 부분에서는 여성의 이름을 남성처럼 후대에 편집했음이 거의 확하다. 

  10. Jennings, Outlaw Justice, 228–230. 

  11. Ibid., 231. 

  12. Jacques Derrida, Rogues: Two Essays on Reason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41. 

  13. Jennings, Outlaw Justice, 231. 


 출처

http://hwacademy.kr/?mod=document&uid=1029&page_id=2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