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게시판 깨어있으라
히13:5 돈으로부터 자유하라 내가 너를 지킬 것이다
서 론 헬라 원어에 따르면, 신약에서 ‘깨어 있으라 (watch)’라는 단어는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 γρηγορεω을 음역하면 ‘그리고레오 (grigoreo)’입니다: 그것은 방심하지 않는, 온전히 깨어 있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 신약에 나오는 이 단어의 사용법과 의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헬라어 단어는 약 22번 사용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의미와 차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깨어 있으라 (watch)’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 주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주므로 그 의미들을 알아야합니다. 1.헬라 원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사용되었으며, 그분께서 밤에 도둑처럼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할 필요성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깨어 있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신부를 위한 신랑으로 오실 것입니다. 마가 복음 13:33–37: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일한 헬라어 단어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세대의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 동일한 의미를 가진 같은 단어가 마태 복음 24:42; 마태 복음 25:13; 누가 복음 12:37. 에서도 기록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6, 10절에서도 이 말씀이 사용 되었다. 이 구절에서는 그분의 오심이 밤에 도둑같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깨어 있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 즉, 이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혼이 그분께서 신랑으로서의 오심을 위해 준비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당신의 오심이 홀연한 오심이라고 경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늘 준비되어야 합니다. 2.이 단어가 사용된 두 번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고통의 교제로서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겟세마네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일어났습니다. 마태 복음 26: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같은 의미가 마가 복음 14: 34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고난 가운데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 하도록 초대하고 계심은 놀라운 일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우리가 이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고난 가운데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의 고통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막힘 없이 그분의 고난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대로 그분과의 큰 친밀감과 뚜렷함/확실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 세 번째는 원수로부터 오는 시험과 전쟁에서 구원 받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깨어 있음입니다. 마태 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동일한 말씀이 마가 복음 14:38에서도 나타납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5:8에서 다음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므로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시험으로부터 지켜지거나 보호 받지 못하거나 사단의 함정에서 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다음과 같이 언급 한 것을 기억할 수 있지 않습니까?: […]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요한계시록 12:10). 이것은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소하는 자가 우리를 고소하고 우리를 고발하는 것을 중단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적 깨어 있음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4. 강건한 믿음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영적 삶에서 견고하고 확고하게 설 수 있도록 깨어 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기도와 감사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6: 13, 14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전서 16: 13, 14)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새번역 – 고린도전서 16: 13, 14)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 학장을 지냈고 많은 성인들이 그의 영적인 제자였던, 소경인 성 디디무스(4세기)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부르심 받은 것에 대해 훈련되고 준비된 군인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은 우리를 주님을 위한 군인으로 변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6:18에서 다음을 볼 수 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에베소서 6: 18). 그리고 골로새서 4:2에서 이렇게 기록되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로새서 4:2) 그러므로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가 우리에게 입대한 군인이 되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감사의 영으로 기도를 굳건히 계속하고, 인내로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끝으로 사역과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일과 관련이 있다. 사도행전 20: 31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도행전 20: 31 -새번역)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떠나기 전에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양떼를 깨어 보살피라고 권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2-3 절에서도 사도 요한이 사데의 교회의 사자에게 그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놓인 영적으로 약한 양떼를 향해 깨어나라고 명령하는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3:17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섬김을 받는 자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지키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데 있어서 깨어 있고 굳건할 것을 명령합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 13:17). 우리가 어떻게 이 크고 위대한 은혜를, 즉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이 나눔의 두 번째 포인트입니다. 지금까지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깨어 있음”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두 번째 포인트로 넘어가기 전에, 구별되고 뚜렷한 영적 은사로써 “깨어 있음”에 대한 교부들의 몇 가지의 생각을 살펴보겠습니다.
‘깨어 있음이 오랜 기간 동안 연습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를 욕망의 생각들과 정욕의 말들, 그리고 악한 행동들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킵니다.’
두 번째: 어떻게 하면 영적 깨어 있음의 은사와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포인트를 나누겠습니다:
이 포인트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영혼의 내면적 영적인 세워 우리가 앞서 성경과 교부들의 어록에서 보았듯이, 그 모든 축복과 특성들과 함께 영적으로 깨어 있음의 은사를 받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깨어 있음, 또는 경각심은, 우리의 영혼을 세우는 것에 대해 주의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세워진 속사람 안에는 깨어 있음의 은혜와 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사람의 성숙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태 복음 16:18).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세우시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교회의 일차적이고 주요한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음)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히브리서 3: 3, 4). 바울은 또한 자신이 섬기는 교회들의 영적 건축과 덕을 세우는 것에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고린도전서 3:10) 부릅니다. 이 영적인 세움/건축은 우리에게 다음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깨어 있음의 첫 번째 영역이 성령 안에서 우리의 일상의 행동들을 지키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볼 수 있도록 적합하고 적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 14) 우리에게 있는 것들에 대해 깨어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밖의 것들을 주십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로 당신의 은혜와 덕을 허락하십니다. 기록 되기를: […] 믿음에 덕을 […] 더하라 (베드로후서 1:5) 2. 분열되지 않은/나뉘지 않은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갖는 것 우리의 마음은 종종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분열되고 나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정결함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경우, 우리의 마음은 혼의 욕망과 정욕으로 가득 차기 때문에 분열되고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8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8) 이 구절의 다른 번역들을 볼 때 우리가 이 분열과 나뉨을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이 됩니다. 두 마음을 품어 라는 문구를 중심으로 몇 가지 번역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오래된 번역 중 하나인 콥틱의 번역도 “두 마음의 사람/a double-hearted man” 이라고 기록 되었습니다. Young Literal Translation (YLT)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개의 혼의 사람은 모든 일에서 불안정합니다.” 여기서 마음의 정결함과 일관성을 가로 막으며 혼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함을 볼 수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NLT)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들의 충성심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나뉘었다.” 그러므로 시편 86: 11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편 86: 11) 마음과 양심의 영적 민감성에 대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성경적인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마음이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여 자신이 죄를 지으면 즉시 자신을 찔렀습니다. 사무엘상 24: 5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사무엘상 24: 5) 또한 사무엘하 24:10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하 24:10) 사울이 다윗의 뒤를 쫓으며 그에게 많은 고통과 고난을 안겨줬는데 다윗이 겨우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다고 해서 왜 다윗의 마음과 양심이 가책을 느겼는지 우리는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죽이지도 않았는데요! 그의 겉옷 한 귀퉁이만 베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또한 왜 다윗의 마음이 단지 백성의 수를 세었다고 자신을 찌르고 가책을 느낄까 궁금해 할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위해 단순히 백성의 힘을 알기 위한 것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악으로부터 정결케 된 영적으로 민감한 다윗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에서 정복하는 것이 백성을 강건케 하시는 주님의 선하심에 바탕을 둔 것이지, 백성의 능력과 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성 티콘, 모스코바의 총대주교(19세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덕은 마음에 있지 않다면 진정한 덕이 아닙니다. 악이 마음 속에 없다면 결코 겉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손은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발은 악을 향하여 걷지 않을 것이며, 혀와 입술은 악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눈은 악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지나 마음은 악을 원하지도 갈망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대해 깨어 있으며, 악함과 분열됨으로부터 지킬 때, 우리는 순전한 깨끗한 마음을 얻게 되며, 영적으로 민감한 양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발견한 책의 기록된 말씀을 읽고 백성의 상태에 대해 여호와께 묻기 위해 요시야 왕이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낸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사신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역대하 34: 27, 28).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과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더 이상 부드럽지 않는 딱딱하고 굳어진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물 또한 말라버린 것입니다! 선지자 요엘의 말을 기억합시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요엘2: 12, 13). 여기서 선한/좋은 양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디모데후서1: 3).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섬기는 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히브리서 13: 18). 이 신성한 말씀을 듣고 나서, 우리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을 얻고, 모든 악함이 비워진,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을 얻으며, 선한 양심을 얻어야 할 큰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걸을 수 있고 진정으로 성령 안에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이 위대한 덕을 얻을 준비가 되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또한 마지막 때에 광범위하게 증가하고 있는 악 때문에 우리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 한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주의하고 깨어 있기 제가 연합에 대한 말씀을 예전에 많이 드렸지만, 여기서 몇 가지의 포인트를 추가하기 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우리 시대 가운데 원수가 일하는 주요 영역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연합을 파괴하거나 약화시켜서 영적인 권위와 여러 다양한 특권을 상실하게 하는 원수의 주요 분야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원수는 대부분 우리의 감각들, 즉, 눈과 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거짓된 것을 보고 듣게 함으로써 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의 정확성을 조사하거나 확인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거리낌이 없는 청결한 양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벽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며,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참된 사랑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남게 되는 것은 표면적이고 외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그 사이에 마음과 양심은 오염되고 닫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악한 계략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고, 타인을 향해 우리의 양심을 투명하게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구성원들 사이의 분열은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분열을 야기시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과의 이 분열의 결과로 우리는 많은 축복과 영적 권위와 하나님의 영의 지속적인 흐름을 잃게 됩니다. 이 점을 히브리서 10:24, 25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것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대신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4, 25) 4.마지막 때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영적 민감성 이 점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씀드렸지만 오늘 제가 몇가지의 강조할 점들과 질문들을 제시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이 마지막 때와 관련된 매우 특별한 일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요한 복음 14:26). 만약 우리가 그분에게서 마지막 때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약되고, 마비되며, 연약함과 요동침 가운데 갇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즉 늘 성령 안에서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이 구절의 각 부분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구 하나하나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요동치는 상태, 미지근한 상태에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상태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와 같은, “영적인 포로 됨, 유배”의 상태로 여기신다는 것을 제가 이해하도록 하나님의 영이 알려 주셨습니다. 요즘 날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밝히고 싶어하시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들은 설명하거나 가르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신비롭게 영감으로 오는 것이며, 영적으로 마음 가운데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받은 자들의 생각 가운데 드러나고 계시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포로의 상태로부터 나오게 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중요성 때문에 다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반복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여기서 우리는 세가지로 연결된 두개의 세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말씀에 예치된 성령의 신비들을 깨닫도록 합시다: 첫 번째 세트:
두 번째 세트: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때에 연관된 영적 민감성에 대한 또 다른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마음 가운데 죽음의 정복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유산이기 때문에 인간의 혼 안에 그것이 심어지고 많은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 26)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망을 멸하시고 정복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육 안에서 죽음을 대면하셨고 이기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 24). 사망에 고통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네, 그것은 깊이 있고 숨겨져 있거나 묻혀 있는 고통으로, 때로는 질병, 약점, 무력함, 또는 두려움, 불안, 슬픔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얻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여러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죽음과의 싸움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병, 슬픔, 시험과 같이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 사람의 통찰력을 열어서 그것이 죽음의 세력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그에게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그 사람이 성령 안에서 행하고 걸으면서 이 전쟁에서 인내한다면, 그는 부활의 능력과 죽음을 이기는 것에 대한 분깃,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와 관련된 준비의 필수적이고 뗄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깨어 나고 주의하기를 바라시며 신음하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유업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죽음을 너무나도 두려워하는 우리 세대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믿음의 이전 세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 큰 차이가 있을까요? 순교자들은 고난 중에서도, 왜 그리고 어떻게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었을까요? 전도가 초기 세기 가운데, 왜 그리고 어떻게 확장 되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이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살펴봅시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행전4: 33). 사도 바울이 고리도인들에게 전한 말씀을 읽어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린도전서 15: 14). 순교자들은 이렇게 극복한 것입니다! 성인들은 이와 같이 노력하였고, 그 은혜가 그들을 변모하게 하였습니다! 주의 종들이 이렇게 대대로 복음을 전파하여, 어둠과 사단이 지배하는 곳들에서 구원을 위한 믿음의 문들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 전파는 상황들과 개인들,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 질문은 절대적 진정성과 기도의 영 가운데 지속적인 숙고를 필요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잠시 주의를 기울이다가, 또 다시 평상시처럼 삶의 다른 일들에 몰두하며 방향을 돌린다면, 우리의 상황은 마지막 때의 대립과 대적에 있어서 많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 복음13: 37). 5. 하나님 나라의 책임들 제가 이전에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지 몇 가지 점에만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과 복음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며 위임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즉,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기록된 것에 순종합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2: 2) 그대가 많은 증인을 통하여 나에게서 들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 2 – 새번역)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 계시록 3: 3). 동시에 우리의 삶은 이 세대 가운데 증인 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거룩히 구별된 공동체로 부르심 받은 자들로서,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도시와 같아야 합니다 (마태 복음 5:14).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거짓과 악에서 벗어나고 위를 향해 올라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되기를, 믿는 자들을 강건케 해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35: 3, 4a) 이것이 계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따로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자 계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곧 성육신 절기의 금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임을 기억합시다. 이 기도와 금식의 시간들 가운데 다음을 행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살피고 검토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이 메시지를 다시 보고 이것을 가지고 기도하고; 그래서 이 메시지가 우리 안에 흡수되고 깊이 정착될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살아 내며, 하나님의 영의 경륜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전수해야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하고 주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도록 말입니다. ========================================================================== 3월 11, 2020 6월 23, 2021 10월 14, 2018 4월 20, 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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