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앙과 정의 : 함석헌의 정의론
1. 왜 “신앙과 정의”의 문제인가?
1) 사회 현실과 “정의”를 향한 기독교 신앙의 재각성
(1) 정의 부재 현실의 단상 : 오늘은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의 거리농성 1,500일째 되는 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의 비참함이 확대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99%)에게 밀려오는 다양한 중압감으로 인해, 그 비참의 뿌리에 대해서 주목하거나 대처하지 못하는 현실.
(2)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질서 및 가치/문화의 범람 :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에 관한 정치적 이상을 근본적인 것, 즉 문명의 핵심가치들로 설정하는 현혹으로 자기입지를 굳히고, 사회적 안전망을 형성하는 모든 형태의 공동체적 협의체를 개인주의, 사유재산, 개인적 책임성, 가족 가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해체시켜왔다. 그것은 “소득, 여가, 그리고 안전이 더 이상 향상될 필요가 없는” 상위 1% 사람들의 존엄과 자유를 옹호하는 일을 마음껏 진행하려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 간략한 역사], 21, 41, 57-58)
(3) 세계교회협의회 (WCC) 제10차 총회 : (2013년 10월 30일 ~ 11월 8일, 부산). 150여개 나라, 52만 교회, 6억 명 신앙인의 선교방향을 결정할 모임.
* 주제 :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정의”라는 문구를 넣기까지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제3세계 교회대표들의 강렬한 호소. (“교회 일치” 문제 정도로 퇴행하려는 서구교회의 흐름에 반대)
(4) 세계의 현실과 정의의 요청 : 5억 명이 굶주리고 있고, 10억 명이 극심한 가난 속에 살고 있으며, 해마다 4천만 명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 15억 명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10억 명이 문맹상태에 있으며, 20억 명이 깨끗한 물을 먹지 못하고 있다.
2) 성서적 신앙의 핵심인 “정의”가 실종된 한국교회의 현실
(1) 한국교회의 단상 : 재능교육 양병무 대표이사. [감자탕교회 이야기] 저자. 서울광염교회 집사. / 그 교회의 10대 목표 : ① 전도비를 가장 많이 지출하는 교회, ② 국내외에 100개 이상의 교회를 설립하는 교회, ③ 100명 이상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교회, ④ 일천만장 이상의 전도지를 전하는 교회, ⑤ 구제비를 가장 많이 지출하는 교회, ⑥ 100명 이상의 고아와 과부의 생활비를 지출하는 교회, ⑦ 일만 가정 이상을 천국의 모형으로 만드는 교회, ⑧ 예수 닮은 인재를 가장 많이 양육하는 교회, ⑨ 100명 이상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회, ⑩ 100명 이상의 사회 각 분야 최고지도자를 양성하는 교회
(2) 한국교회의 정의 신앙 실종 현실 : 비지성적인 신학적 세계관과 왜곡된 신앙의 신념구조.
* 기복신앙(이기적, 최소한의 도덕주의) + 설교/신학의 이데올로기적 요소 (칼빈주의적 자본가 대변) + 제도/조직의 권위주의 + 선교/신앙의 배타성
(3) 함석헌의 비판 ([성서조선] 창간호에 실린 글) :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정]의를 구하라. 또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린 배를 움켜쥐고 눈물로 양식 삼아가며 북만(北滿)으로 들어가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이 말로써 전송할 이가 몇인가. 벗은 허리를 꼬부리고 모욕을 옷 삼아 현해탄을 건너가는 자매를 보고 이 말로써 진정한 위로를 드릴 이가 과연 몇인가. 없다,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 안에 새 생명이 창조된 이를 제하고는.... 실로 이 가르침을 그대로 믿기에는 우리 현실문제는 너무 절박한 듯하다. 너무나도 명백한 듯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체하고 복음을 믿기는 너무나도 무지한 듯하다.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인 듯하다. 너무나도 고집인 듯하다. 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너무나도 개인 중심적이요 너무나도 고식적이요 너무나도 동포애가 없는 듯하다.” (“먼저 그 의를 구하라,” 1927년 7월, 18:20)
3) 함석헌의 정의론의 자료와 이 글의 방향
(1) 문헌에 극히 제한적으로 나온 정의담론
* 제목에 정의가 언급된 두 개의 짧은 글 : ① “정의와 진리에 살자” (1963년 7월, 12:155). 박정희 정권의 민정이양을 촉구하는 시국강연회에 사용된 짧은 글 ② “하나님의 정의” (1947년 4월, 19:27)
* 일시적으로 언급된 몇 본문 : ① “정의는 언제고 부르짖어야 높아지는 법이다.” (“할 말이 있다,” 1957년 3월, 16:130). ② “정의의 임금”이라는 용어 (“잠깐 후에 오시는 이,” 1947년 4월, 19:100).
(2) 거의 유일하게 길게 언급된 본문 : “그들은 ‘정의, 정의’한다. 그러나 그들의 부르짖는 정의란 어떤 것인가. 열강의 정의, 윤리학자의 정의, 무력으로 보장하는 정의, 약자의 것을 빼앗는 구실을 공급하는 정의, 강당에서만 부르짖는 정의, 이는 결국 백주에 횡행하는 가면의 유령이다. 신의 정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맘을 다스리는 정의, 태양소(太陽素)를 받들고 전 우주를 고이는 정의, 죄에서 생령(生靈)을 구하기 위하여 죄 없는 자로 대신 희생이 되게 하는 정의, 영원의 생명을 주는 정의, 이에 의하여 서매 창성치 않는 자 없고, 이에 그르치매 거꾸러지지 않을 자가 없는 반석이다.” (“먼저 그 의를 구하라,” 1927년 7월, 18:24)
(3) 이 글의 어려움 : 어떻게 “함석헌의 정의론”을 밝힐 수 있을까?
* 우주적 포괄성을 가진 함석헌의 사상은 문명사적 직관을 담은 거대한 수레와 같기 때문에, 사회과학적 관점을 담은 정의 담론의 측면에서 접근하기 어렵다.
* 이 글의 방향 : 함석헌의 종교사상에 내포된 정의론의 가능한 요소를 추출하여, 그것이 오늘날의 정의담론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를 검토.
-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보다, 종교사상적 관점에서 “신앙과 정의”의 관계를 고찰.
2. 정의론의 역사와 그 철학적 딜레마가 주는 문제의식
1) 서구 정의론의 주요 흐름
(1) 고대 그리스 사상 : “조화”로서의 정의 (플라톤).
* 개념규정 : 정의(dikaiosunē)란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것을 행하는 것”으로서, “절제와 지혜와 용기”의 미덕이 완벽하게 드러나는 것. (Republic, 433a~433b)
* 문제의식 : 정의는 궁극적인 가치인가?
- “어떤 사람이 경건한 것은 그가 신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경건하기 때문에 신[궁극적 존재]의 사랑을 받는 것인가?” (Euthyphro, 10a) → 우리가 정의로운 것은 하나님이 명령한 것을 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어떤 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을 명령하시는가?
(2) 중세 사상 (전통신학) : 신의 명령으로서의 정의
* 안셀름 :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신 (Proslogion, 14장)
- 신 : 존재와 가치의 궁극적 준거점으로서의 신.
- 정의의 척도 = 신. (중세적 믿음 : 신을 잘 믿는 자는 보다 더 정의롭다)
- 중세적 정의론의 나르시시즘(자아도취) 요소 (보수적인 기독교신앙의 고전적 모습)
(3) 근대 사상 : 이성적 주체의 판단에 의존하는 정의
* 근대 초기 : 자연법에 기초한 사회계약으로서의 정의 (유신론의 흔적으로서의 자연법)
- 근대적 정의론의 에고이즘(이기주의) 요소 (보수적인 기독교신앙의 세속적 모습)
* 근대 후기 : 공리주의/실증주의적 정의 (무신론으로 이행한 결과)
- 미덕이나 가치보다 결과에 집중. (정의는 선험적이기보다 인간의 창조물로 이해됨)
- 근대 후기 신의 죽음 이후, 궁극적/절대적 준거점을 상실.
(4) 탈근대(포스트모던) : 상대주의 시대 정의담론의 어려움. 진리주장의 상대화(정의담론의 허무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제)
* 정의 주장이 소아병적 보복주의로 기울지 않게 할 방안
* 공평에 관한 주장이 편협한 이기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안
* 정의 주장이 난무하는 사회적 파편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
(5) 역사의 교훈 : 오늘날 정의담론 구성에서 극복해야/유의해야 할 두 가지 정신의 타락
* 중세적ㆍ근대적 정신의 구태로 얼룩진 정신지체 : “중세는 나르시시즘의 증여-공간, 근대는 합리적 에고이즘의 교환-공간” (김영민, [동무론], 448)
- “호의가 에고이즘과 사통하고 선의가 나르시시즘의 미끼로 전락하는 그 속절없는 본능 속에 세속의 본질은 옹글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 한갓 유아론의 자식으로 입적해버린 이 시대의 호의와 선의에서 세속은 자신의 본질을 보인다.” ([동무론], 113, 265)
* 타락한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적 정의 : 자기주장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는 이기적 정의 (이 때,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무응답으로서의 자유가 동반됨)
* 정의 담론의 과제 : 자아도취와 이기심을 넘어선 공동선(共同善)의 추구 가능성 확보
2) 정의 담론의 철학적 딜레마
(1) 철학(담론)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척도에 대한 평가 (measuring the measure)’
* 핵심질문 : 모두가 정의를 갈망하고 있지만, 과연 누가(who) 정의가 무엇인지(what)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을 어떻게(how) 마련할 수 있는가?
* 실제적 어려움 : 이익이 충돌할 때, 각 이익이 가진 가치를 서열화할 수 있는 “합리적 인식이라는 수단”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 (한스 켈젠, [정의란 무엇인가], 14~15)
(2) 동등/공정(fair)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의 개념 자체의 문제
* 두 가지 종류의 동등성 : ㉠ 단순한/엄격한 동등성 (공평의 룰, A=B), ㉡ 비례적 동등성 (은총/연민이 개입, A=X*B). / (E. 브루너, [정의와 자유], 26~27)
- 정의 판단의 두 가지 어려움 : ① 둘(㉠과 ㉡)을 구분 짓는 기준의 모호성, ② 비례적 동등성에서 그 “비례”의 몫(X)을 계산하기 어려움. (X를 규정하는 다양한 요소 : 은총/연민의 힘, 상황(조건)의 상이성, 문명의식의 성숙정도 등)
(3) 이 딜레마가 던지는 문제 : 정의를 측량하는 기준은 ‘엄격한 공평’의 잣대만이 아니라 ‘보다 유연한 은총’의 잣대를 필요로 한다.
* 정의 담론의 과제 : 은총의 잣대를 ‘보다 유연하게’ 할 정신의 힘을 기르는 것.
3. 성경의 정의 개념과 정의 신학의 한 시도
1) 성경의 정의 개념
(1) 정의를 하나님의 본성과 연결짓는 구절이 최소한 50~60회.
* 한글성경 : 개역개정판 (정의, 104번 / 정의+공의, 240번), 공동번역개정판(정의, 164), 개역성서 (정의, 17 / 정의+공의, 112)
* 영어성경 : NRSV (Justice, 139), NIV (Justice, 139), NKJV (Justice, 135)
(2) 구약성경 안의 두 단어 (James K. Bruckner, “Justice in scripture”)
① 엄격하고 공정한 판결로서의 정의(mišpāt) :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에 대해 보응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규율하는 하나님의 정의.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평형상태 유지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회개를 동반한 회복을 지향한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mišpāt)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사 30:18)
② 공감어린 의로운 행위로서의 정의(sĕdāqāh) : 공동체와 개인의 평안을 회복시키는 은총의 행위.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sĕdāqāh)이 되리라.” (신 24:12~13)
(3) 신약성경의 (정)의(dikaiosunē)의 활용
*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속성으로서의 정의. “하나님의 의(dikaiosunēn)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dikaiosunē)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dikaiosunēn)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3~4) / “의로우신(dikaion) 예수 그리스도” (요일 2:1)
* 신앙(pistis)의 본질로서 요청되는 정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dikaiosunēn)를 구하라” (마6:33) /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dikaiosunēs)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갈5:4~5)
(4) 성경적 정의 개념의 특징 : 덕성(virtue)이나 사회개혁 프로그램의 차원을 초월.
* 시내산 계약에서부터 정의는 하나님의 열정(pathos)을 대변한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시103:6).
* 예언서에는 구원의 핵심사항이 된다.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사1:27) → 성서의 신앙이 부족종교의 잔상을 떨쳐버리고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한 지점.
* 사회적 약자(고아와 과부)와 고난의 현장(십자가)에 집중하지만, 인과응보의 룰을 넘어서 (우리의 상식적 정의 관념 자체를 초월하여) 피조물 전체를 변혁하고 치유하는 하나님의 본성을 대변하는 개념.
2) 정의 신학의 한 시도
(1) 몰트만의 논문 :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이다 : 악의 희생자와 가해자를 위한 하나님의 정의”
* 2009년 5월 한국을 방문하여 발표한 논문
* 문제의식 : 기독교신학과 영성이 가해자 중심의 관점만을 갖고 있었다.
- 예) 중세의 고해성사, 개신교의 칭의론 (죄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 / 영화 [밀양], 이근안 목사면직 사태
- 신학적 문제점 : 죄와 악행의 희생자들을 위한 신학적 해석이 없음 (희생자를 위한 정의의 부재), 가해자의 죄를 사면함으로써 가해자의 실제 행위가 낳은 피해현실은 외면당함, 용서의 언약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믿음을 수동적인 수용에 머물게 만듦.
* 해결의 실마리 :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회복,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정의로 이해할 수 있는 신학을 구성.
- 하나님의 정의 : 권선징악의 정의(justitia distributiva)가 아니라, 창조적인 정의, 다시 말해 “구원하는 정의”(시31:1)요, “악의 희생자들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정의.” 그 정의의 목표는 “영혼구원, 개인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 그리스도의 두 모습 : ① 가해자의 죄의 대신 진 “대속의 그리스도” ② 피해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연대의 그리스도” (양자를 포괄하는 그리스도론)
(2) 몰트만의 정의 신학 평가
* 긍정적인 면 : 가해자 중심의 전통신학 비판, 희생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신학
* 부족한 점 : 신학적 이원론(주-객도식)의 지속. 정의의 주체인 하나님 vs. 정의의 객체인 인간(가해자와 희생자) → 칼빈의 형벌대속의 기독론 구도의 연장.
- 안병무와의 오래된 논쟁 : 몰트만은 민중(씨)의 자기초월/자기구원을 주장하는 민중신학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 적이 있다. “민중신학은 ‘연대의 기독론’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여, 민중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대속의 기독론’이 없다. 대속의 기독론이 없다면, 민중의 고난/희생은 증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난 받는 민중이 세상을 구원한다면, 그 민중은 누구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Experiences in Theology, 256)
(3) 몰트만 신학이 남긴 정의 신학의 문제 : 주객도식의 극복 (정의의 주체인 하나님 ⇔ (또한) 정의의 주체인 씨/민중)
* 함석헌 정의신학의 단초 : 속죄의 그리스도는 (불의에서 회복된) 기억이라는 선험성을 지닌 종교적 희망이 품고 있는 믿음이지, 현실의 불의와 죄악을 해결할 보증이 되는 방편적 믿음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중요한 것은 깨어 일어난 씨(민중)이다. 정의의 주체인 씨이 깨어 일어나 죄악의 사슬을 끊을 때 드러나는(현실로 화육하는) 장면이 “정의의 태양(말4:2)”이신 하나님의 성육신, 그리스도의 등장이다. 즉, 씨이 스스로 일어나 죄악의 사슬을 끊어낼 때 확인되는 장면이 바로 속죄의 그리스도의 등장이다. 씨()는 “지나간 것의 결과인 동시에 장차 올 것의 원인”이다. (“인간혁명,” 2:16) 역사 속에 등장했던 속죄의 그리스도는 씨에 담겨있고, 그 씨이 또 새 생명을 잉태함으로써 (불의와 죽음을 씻겨내는) 속죄의 그리스도(독생자)가 또 다시 역사에 화육한다.
4. 함석헌의 정의론
1) 정의의 주체인 씨/민중
(1) 정의 담론이 지닌 근본적인 딜레마에 대한 함석헌의 직접적인 대답 : 모두가 정의를 갈망하고 있지만, 과연 정의가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은 어떻게 마련되는가? 씨이 정의의 주체이다. 불의와 정의를 구분하는 기준은 씨의 지혜로만 분별되고, 죄악을 씻어내고 정의를 세울 힘은 씨로부터 나온다.
(2) 함석헌 사유의 특징 : 씨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씨이 지닌 궁극성을 밝히려는 종교적 사유. 정의담론의 합리성(진리성)의 근거로서의 씨.
* 씨에 대한 신뢰 = 고난당하는 씨의 삶의 자리에서 주장되어야 할 정의 : “민중은 사회의 바닥이다. 바닥이므로 타락이요 고상이요 따로 있을 여지가 없다. 타락인줄 알지도 못하는 것이 민중이다. 또 타락이라 해도 좋다. 이 세상이 발전이라면 다 좋아하지만 타락하지 않고 되는 발전이 어디 있다더냐? 역사는 발전하기 위해 타락한다. 가지 끝의 아름다운 열매가 새 숲이 되려면 떨어져야지, 타락해야지.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탄생하고, 세리와 갈보의 친구가 돼야하고, 구더기 같은 민중에게 넘겨줌이 되어야 한다.” (“새나라 꿈틀거림,” 1961년, 3:66~68)
* 씨의 궁극성 = 하나님과 잇대어 있는 씨 (무신론과 범신론의 단층적 사유를 뛰어넘는 함석헌의 종교적 세계관의 특징, 범재신론). 씨을 씨되게 하는 것 = “무엇이려는” 하나님 (“인간혁명, 2:16) 즉, “뜻”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창조/구속활동에 (스스로의 참 생명을 피워냄으로써) 참여하는 것. 씨의 지혜 = 하나님 모심 (신앙, 종교 = “생명의 버릇”). 참 씨 = 예수.
- “예수는 어떻게 알았던가. 씨의 자리에 서기 때문이었다. 씨은 씨이기 때문에 자연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믿게 되어 있다. 믿는 것이 씨이다. 하나님과 씨은 한 실오리의 두 끝과 같다. 위에서는 하나님이요, 아래서는 씨이다. 씨 중에서도 참 씨이 예수였다.” (“앞을 내다보자,” 1972년 1월 4:276)
(3) 정의를 이룰 힘은 오직 고난을 뚫고 생명을 피우는 씨로부터 나옴 = 인류문명의 미래를 밝힐 씨 : “세계역사 전체가, 인류의 가는 길 그 근본이 본래 고난이라 깨달았을 때 여태껏 학대받은 계집종으로만 알았던 그가 그야말로 가시면류관의 여왕임을 알았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30:97)
2) 종교적 정의론 : 정의와 신앙
(1) 정의의 참된 힘은 신앙의 힘에서 나온다.
* “신앙은 힘이다. 말이 아니다. 생각이 아니다. 사상이 아니다. 지식이 아니다. 이론도 아니고 학설도 아니다. 술(術)도 아니요 방편도 아니다. 신앙은 힘이다. 살리는 힘이다. 말로써 영혼을 구원하였다는 일을 듣지 못하였다. 사상이나 지식이나 이론이나 학설이나 무슨 술이나 어떤 방편으로써 한낱 영혼을 구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죽을 사람이 그로써 살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믿는 자는 살았다는 것을 들었다. 들을 뿐 아니라 보았다. 볼 뿐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고 있다.” (“신앙은 힘이다,” 1928년 7월, 18:67)
(2) 참된 신앙이 정신의 타락을 막는 힘의 근원 : 낡은 문명, 낡은 종교, 낡은 신앙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 안으로 함몰하는 유아론(solipsism).
* 유아론의 대표적인 두 양태 : ① 자아도취 (narcissism), ② 이기주의 (egoism)
* 정신지체의 두 신앙 행태 : ① 자아도취의 일방적 신앙, ② 믿음으로 거래하는 이기적 신앙.
- “가톨릭의 조직이 훌륭하대도 봉건시대의 작품이요, 프로테스탄트의 교리가 날카롭대도 국가주의 시대의 산물” (“새 삶의 길,” 1959년, 2:224)
* 이성의 회의를 넘어설 충분한 지성을 겸비한 신앙 : 그 끝을 “따져 올라가면 믿음에 이르는” 철학, “반드시 철학을 나오게” 하는 믿음, 이 둘이 “절대자를 찾는” 참된 종교정신을 길러낸다. (“생활철학,” 1961년, 13:72)
(3) 신앙은 싸움, 정의를 향한 믿음의 싸움. 그 두 모습으로서의 종교와 혁명. 체제모순을 마음공부로 미봉하려는 거짓 종교의 현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 믿음과 싸움 : “믿는다는 것은... 선과 악이 싸우는 이 역사의 싸움터에서 그리스도 편에 서서 생명을 걸고 싸우는 일입니다.... 값없이 준다니까 달려갈 줄만 아는 것은 아직도 욕심만이고 도덕의식은 없는 어린애 같은 심리지, 인생의 의무와 역사의 뜻을 아는 장성한 사람은 못 됩니다.” (“새계명 2,” 81년 가을, 15:52)
* “종교가는 대개 종교는 현실에는 관계없고 다만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일이라 생각하고 현실에 대하여는 피하고 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남의 억누름을 못 면하면서, 제 자유를 못 찾으면서, 깨진 제 나라를 다시 하나로 통일도 못하면서, 그러면서 하늘나라란 잠꼬대일 뿐이다.... 현실을 피하고 구원은 없다. 현실의 고통은 문제 아니 된다는 소리는 민중을 속여 영원한 압박에 비겁하게 굴복케 하면서 그들의 피땀으로 수고한 결과를 짜먹자는 지배자의 앞잡이가 되는 종교가만이 하는 소리다.... 죄악을 극히 미워하고 겨뤄대는 것이 종교다. 그것은 주마 하지 않고 민중으로 하여금 제 구원을 제가 싸워 얻게 한다. 제가 얻는 것이, 다시 말하면 살아난 것이 참 생명 아닌가? 아무도 악과 싸우지 않고 선한 영이 될 수 없는 한 현실에 눈을 감을 수 없다. 죄악은 곧 현실적 사실, 현실은 곧 죄악적 존재, 죄악은 사회적 현상인 것이므로, 산 종교는 사회악과 죽어도 마지않는 싸움을 싸우는 민중의 조직적 활동이다.” (“말씀모임,” 1957년 8월, 19:251)
* 종교와 혁명의 불가분리적 관계 : “혁명이 종교요, 종교가 혁명이다. 나라를 고치면 혁명이요, 나를 고치면 종교다. 종교는 아낙이요, 혁명은 바깥이다.” (“인간혁명,” 2:49)
(4) 정의실행의 힘. 문명의 미래를 여는 방식 : 강압적 힘의 활용이 아닌, 설득적 힘의 증진.
* “위에서 나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혁명을 할 수 없다. 그것은 칼로 칼을 막음이다....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강건한 기풍이 아니고 난폭한 기풍이다.... 대체 강건이란 무엇인가? 폭력적인 것을 말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것은 곧 맘이 외계에서 오는 위협 혹은 유혹을 이기고 스스로 되어나가는 생명의 길에 가로막히는 장애를 힘 있게 이기는 정신의 힘, 혼의 힘이다.” (“사상과 실천,” 1959년, 1:56-57)
* “힘의 철학”이 아닌 “사랑의 철학”이 필요한 시대 (“평화문제에 대하여, 1968년 11월, 12:35)
- 힘의 철학은 “자기보존”을 위해 신의 의지나 살피면서 외교하는 신앙을 뒷받침하는 반면, 사랑의 철학은 영원한 새로움의 원천이 되는 신의 본질적 선함을 닮기 위해 모험하는 신앙을 뒷받침. (Whitehead, Bergson)
3) 전체를 살리는 공동선(共同善)의 추구로서의 정의
(1) 정의와 전체. 선과 악의 전체성
* “하나가 된 전체에만 진리가 있습니다. 나도 아니요, 너도 아니요, 나와 너를 초월한, 나와 너를 다 같이 낳아놓고 이끌어가는 전체 속에 하나를 이뤄서만 너 나를 다 살리는 진리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된 전체에만 진리가 있다,” 1970년 8월, 11:109~110)
* “선은 한 개인의 선이 아니라 전체의 선이요, 악도 한 개인의 악이 아니라 전체의 악입니다. 선악이 개인의 것이라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전체의 것입니다. 성냥개비 하나를 훔쳤어도 인간 전체가 들러붙어서 한 일입니다. 전체를 동원하지 않고 악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전체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펜들힐의 명상,” 1971년 8월, 15:28)
(2) 진리는 전체를 보는 것. 전체를 봄으로써 분별을 이끌어내는 지혜
* 철학의 주된 과오는 과잉주장 : 단편적 증거에 대한 배타적 주장 (Whitehead)
* 개체의 선악에 착안한 단순한 “권선징악은 유치한 방법.”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 1954년 7월, 277-278)
* 보복적(retributive) 정의와 회복적(restorative) 정의, 공평한 분배적(distributive) 정의와 창조적인 은총의 정의를 구분할 지혜는 전체를 포괄적으로 사유하는 방법 외엔 없다.
* 개인적 도덕성에서만이 아니라 연대적 공동선의 추구로써만 해결될 우리시대의 문제들.
- 전체성의 비전 없이는 정의 담론이 상대주의의 포로가 될 것
- 전체성에 대한 비전의 성숙만이 “수량에 굴복한 추상적 평등”을 구원시킬 것 (A. 바디우,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35)
맺는 말
“이 세대의 강자들아, 너희는 재를 쓰고 통회하여야 한다. 너희는 ‘힘은 정의라’ 하면서 ‘약육강식’이라 하면서, 약한 자를 압박하고 강탈하지 않았나. 힘을 예찬하고 국가란 이름 아래 우상을 세워 피로써 제사하고 그 밑에서 난무하지 않았나. 그러나... ‘정의의 임금’은 살아서 대진동을 일으킨 줄을 알고 믿어야 한다.
이 세대의 눌린 자들아, 너희는 강자의 철학에 속았느냐. 간사한 자의 유혹에 빠졌느냐. 왜 너희는 의심하려 하고, 자포자기 하려하고, 원망하려 하느냐. 너희의 구주, 정의의 임금은 그 오실 차를 선로에 실어놓고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맘에 그가 더디 오신다 하나, 그가 더딘 것이 아니요, 우리의 믿지 못함이다. 눈을 들어보라. 정의의 대로는 직주(直走)하는 철로같이 세계의 복판을 뚫고 환하게 열려 있지 않나. 그의 수레는 언제나 올 수 있게 준비되어 있다. 천국은 언제나 손끝에 있다. 어리석은 우리가 시간은 항상 그만인만큼 여겨, 차에 오를까 말까, 올랐다 내렸다 하는 고로 연민의 정 깊은 그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낙오될까 희생될까 하는 말에 우리의 올라타기를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고의순준(孤疑巡逡)하는 현대의 가엾은 인생들이여, 너희는 결연히 태도를 결하고 정의의 노선에 올라타라. 그러면 그 차는 지존자(至尊者)의 깃발을 날리며 즉시에 발차할 것이다....
믿는 자야, 너는 건장하라. 눈을 크게 뜨고, 귀를 멀리 기울이라. 낮 동안의 격전에 피곤한 몸을 네가 가로누이려 껌벅이는 등잔 밑에 꿇어앉아 간구(懇求)의 손을 들려 할 때, 에덴동산의 보드라운 풀 속을 스르르 기어들던 장사(長蛇) 모양으로, 어디론지도 모르게 네 가슴속에 기어들어 ‘정의는 어디 있느냐’고, 진실한 듯이, 동정하는 듯이, 가르치는 듯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음이 몇 번씩일 것이다. 그러나 너는 굳세라, 그리하여 단연히 부르짖으라. “사탄아 물러가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 오시고 지체 없으시다.”
(“잠깐 후에 오시는 이,” 1947년 9월, 19: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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